뒷모습이 청년 같았다. 낡은 청바지에 아무렇게나 걸친 듯한 중간 톤의 체크무늬 셔츠. 햄버거 주문을 하며 서 있는 남자의 옷차림이 근사하다고 생각했다. 문득 그의 앞모습도 궁금해졌다. 그 순간 그가 햄버거와 커피를 받아들고 뒤돌아섰다. 나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반전이었다. 그는 허리가 금방이라도 휘어질 것 같은 나이로 보였다.
굽은 나무는 멋스럽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옷매무새가 좋아 보이려면 일단 몸이 곧아야 한다. 그래야 당당하고 자신 있어 보인다. 패션쇼에 나오는 의상들을 일상에서 입는다면 소화 못할 옷이 많다. 그러나 그 옷을 걸치고 모델이 당당하게 자신감 넘치는 스텝으로 걸으면 그럴듯해 보인다.
나이가 들어 몸이 불편해지면 다리도 벌어지고 무릎도 구부러진다. 젊음을 포기하면 몸도 따라간다. 탄탄한 근육과 생동감 넘치는 표정은 싱싱하다. 펄떡펄떡 뛰는 물고기처럼 반짝인다. 무얼 입어도 근사해 보인다. 늙는다고 멋까지 잃어버리면 안 된다. 우리에게는 중후함과 우아함이 있다. 이것들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옷을 어떻게 입느냐에 따라 자신감이 생기고 행동도 달라진다. 잘 다듬은 세련미를 무기로 나이보다 젊게 옷을 입으면 자신뿐만 아니라 주위에도 활력을 불어넣어줄 수 있다.
패션 감각도 세대에 따라 많이 다르다. 우리 세대는 3가지 색 이상으로 옷을 코디하지 말라고 배웠다. 그러나 요즘 젊은이들은 보색에다 튀는 색깔의, 좀 정신없어 보이는 패션을 하고 다닌다. 고정관념의 파괴를 일으키는 세대다. 자유롭고 과감한 패션을 감상하는 재미가 있다. 마치 물감을 갖고 노는 기분이랄까.
나이가 드니 어두운 색이 싫다. 얼굴이 컴컴해 보일 것 같아서다. 그래서 가능한 한 밝은 색의 옷을 입는다. 어두운 색상의 옷을 입으면 스카프나 브로치 등으로 포인트를 준다. 옷 잘 입는 요령은 때와 장소에 맞게 갖춰 입는 것이다. 아무 때나 등산복 차림으로 나타나는 사람이 있다. 가끔은 특별한 사정도 있겠지만 마치 불감증에 걸린 사람처럼 보이고 성의도 없어 보인다. 나이가 지긋한 한국 남자들의 패션은 마치 군복 같다. 하나같이 우중충한 색깔에 신발도 거무튀튀한 색이 많다. 남자는 코트에 목도리만 잘 걸쳐도 멋이 있다. 이제 생존을 위해 옷을 입던 시절의 얘기는 꺼낼 필요가 없다. 다양한 패션 문화에 적응해보자. 비 내리면 레인코트, 가을엔 바바리코트, 눈 내리는 겨울엔 털 달린 파카, 늦겨울 봄 눈 트는 따스한 날엔 좀 화사한 재킷, 연말 모임이나 축하 파티에서의 화려한 옷차림이나 장신구는 보기에도 좋고 주위 사람을 즐겁게 한다. 그동안 열심히 일하며 나이 든 당신들, 이제 허리 펴고 멋진 노년을 맞이하면 좋겠다. 마사지를 하고 화장하는 젊은이들을 나무라기보다는 그들의 패션 감각을 적극 배워볼 때다.
동서고금을 불문하고 사람들은 왜 술을 즐겨 마시는 걸까? 알코올 성분이 있어 마시면 취하는 음료의 총칭이 술이다. 축배(祝杯)는 축하를 위한 술잔이다. 모두가 잔을 들고 ‘건배!’, ‘브라보!’, ‘위하여!’ 등 구호를 외친다. 특히 연말연시 모임에 참석하면 축배의 노래와 별별 외침이 가득하다.
술 하면 아일랜드 시인 윌리엄 예이츠의 시 ‘술의 노래’가 떠오른다.
술은 입으로 들어오고
사랑은 눈으로 들어오네
그것은 우리가 늙어서 죽기 전에
알게 될 진실은 그것뿐.
잔 들어 입에 가져가며
그대 보고 한숨짓네.
정철 송강의 장진주사(將進酒辭) 중 한 수도 음미해본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산(算) 놓고 무진무진 먹세 그려
예나 지금이나 이백, 두보를 비롯해 시인, 묵객, 영웅호걸 등 모두 술을 좋아하고 예찬을 했다. 바이런은 인생의 으뜸가는 것을 만취(滿醉)라 했다. 나도 말술은 아니지만, 친구들과 술 마시는 걸 꽤 좋아한다. 하지만 술은 과하면 실수가 꼭 따르게 마련이다. 절제만이 최선책이다. 술을 절제해서 마시는 사람은 멋이 있고 아름다운 향기가 난다.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술의 역사는 포도주로부터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이 오묘한 음료를 처음 마실 때는 양같이 온순하나 조금 더 마시면 사나워지고, 더 마시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우스꽝스러운 행동을 한다. 또 심하게 마시면 토하거나 추한 행동 등을 하게 된다.
내가 참여하는 친목 모임은 회의와 토론이 끝나면 식사를 하며 한잔 술을 곁들인다. 그런데 술을 많이 마신 회원이 2차, 3차 계속 가자 하고 술주정까지 해서 분위기를 흐려놓는 일이 더러 있다. 몇몇 회원은 그게 싫어서 말없이 자리를 뜨기도 한다. 충고를 해도 술주정꾼의 버릇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급기야 회원 자격 박탈 논의를 하기도 했다.
‘법화경’에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술이 술을 마시며, 마침내 술이 사람을 마신다”는 내용이 있다. 탈무드에도 “술이 머리로 들어가면 비밀이 밖으로 새어 나온다”, “권하는 사람들의 예의가 바르면 어떤 술이든 맛있는 법이다”라는 조언이 있다. 술을 마실 때도 그렇지만 술을 권할 때도 품격이 있어야 한다.
매년 연말연시면 전화통이 분주하다. 나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금주는 못해도 절주(節酒)라도 해볼 방법을 궁리해본다. 그러나 쉽지 않다. 한 친구는 술 깨는 좋은 방법이 있다면서 알려줬다. 바로 해정주(解酲酒, 해장주의 원말)다. 한번 시도해보려고 한다.
작년 겨울 한 유명 백화점에서 평창올림픽을 겨냥해 만든 롱 패딩은 없어서 못 팔았다. 이 상품을 사려고 고객들이 새벽부터 줄을 서는 등 그야말로 광풍이었다. 대부분의 스포츠 의류 업체에서는 롱 패딩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이번 겨울은 그야말로 롱 패딩이 거리를 휩쓸었다. 그런데 롱 패딩 매출이 급감하고 있다는 보도가 들려왔다. 살 만한 사람은 대부분 샀을 테고 올겨울이 그다지 춥지 않은 탓도 있다는 분석도 따랐다.
내가 한때 일하던 회사에서 1996년 ‘UMBRO’라는 영국 스포츠 의류 브랜드를 국내에 처음 들여왔다. 달러 환율이 800대 1까지 가던 시절이었으니 수입해서 팔 만했다. 그때 상품 품목 중에 눈에 들어온 것이 롱 패딩이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 클럽의 알렉스 퍼거슨 감독이 이 옷을 입고 광고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추리닝 정도가 주종이던 스포츠 패션에서도 멋스러웠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없던 패션이라 보기에도 그럴싸했다.
나는 그 무렵 이 회사의 대표이사로 일했는데 롱 패딩 가격을 놓고 사장과 갈등을 빚었다. 수입 원가 1만5000원 상당의 품목이었으니 9만 원 정도로 팔면 괜찮은 가격이었다. 요즘처럼 오리털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인조 솜으로 만든 패딩이었다. 그런데 사장은 비싸게 정가를 매겨야 팔릴 품목이라며 판매가를 놓고 고집을 피웠다. 더 올리면 안 팔린다고 강하게 조언했는데도 사장이 내가 출장으로 자리를 비운 사이에 12만 원, 15만 원, 18만 원으로 가격을 순차적으로 올렸다. 롱 패딩이 유행하던 시기가 아니었으므로 판매는 부진했다. 결국 1997년 1월이 돼서야 사장은 내게 가격 책정을 맡겼다. 하지만 이미 판매 기회를 놓친 상황이었다. 이런 상품은 추운 겨울에 잘 팔리고 첫 추위 때가 적기다. 11월이 적기이고 날씨에 따라 12월까지도 판매가 이어질 수 있지만, 1월에 겨울 상품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근년에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패딩이 100만 원을 훌쩍 넘었는데도 날개 돋친 듯 팔린 적이 있다. 그러나 당시 롱 패딩 가격으로 사장이 책정한 가격은 너무 비쌌다.
롱 패딩의 유행이 그로부터 20년이나 지난 작년에서야 시작된 셈이다. 나나 사장 모두 너무 앞선 시기에 롱 패딩에 큰 기대를 했다. 우리나라 소비자들은 유행에 민감한 편이고 유행 주기도 짧다. 롱 패딩 하나를 사면 더 이상은 사지 않는다.
롱 패딩을 입어보니 과연 따뜻했다. 무릎까지 덮어주니 당연하다. 그러나 걸을 때마다 무릎에 옷이 닿아 걸리적거렸다. 이를테면 멋을 포기한 패션이다. 마치 이불을 두르고 다니는 형상이다. 패딩 옷에 붙은 모자에 털이 달린 것도 있다. 보기에는 좋을지 몰라도 보온 효과는 거의 없다. 털이 붙었다는 이유로 비싸기만 하다. 따로 따뜻한 모자를 사서 쓰는 편이 더 실용적이다. 히말라야 트레킹 때 롱 패딩을 가져가려 했다. 고산에 올라가면 기온이 급강하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국 부피 때문에 포기했다. 숙소에서는 입을 수 있으나 트레킹 때는 입을 수 없다는 조언도 작용했다.
요즘 젊은 세대는 ‘인스타그램’으로 소통한다. 인스타그램은 사진과 동영상을 공유할 수 있는 소셜미디어 플랫폼이다.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에서 관계를 맺지 않아도 인스타그램을 통해 일상을 공유하고 게시글에 ‘좋아요’를 누르고, ‘팔로우’하며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 젊은이들이 주로 활용하는 새로운 소통 방식에 도전장을 내민 시니어가 있다. “62세 새로운 인생 시작.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인생은 길고 기회는 누구에게나 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인스타그램의 고수 김석재(63) 씨다.
“‘그레이네상스’라는 표현처럼 시니어가 지는 꽃이 아니라, 인스타그램 같은 새로운 채널을 통해 다시 피는 꽃이 되길 희망합니다.”
인스타그램을 시작하며 그레이네상스를 맞이한 김석재 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레이네상스(Greynaissance)는 ‘그레이(grey)’와 ‘르네상스(renaissance)’를 합친 용어로, ‘노인 전성기’를 의미하는 신조어다. 김석재 씨가 인스타그램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자녀들과 더 가깝게 지내기 위해서였다. 평소에도 자녀들과 격의 없이 지내지만, 더 많이 소통하려면 젊은이들이 쓰는 언어, 문화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2018년 10월 9일 자택인 한옥 앞에서 찍은 사진을 게시하며 그는 인스타그램을 시작했다.
반응은 놀라웠다. 첫 게시물을 올린 후 단 두 달 만에 25만4000여명의 팔로워(소통망 서비스에서 특정한 사람, 업체 등의 계정을 즐겨 찾고 따르는 사람)가 생겼다. 팔로워 연령대도 10대부터 시니어까지 다양했다. 이토록 짧은 기간에 전 연령대를 사로잡으며 인스타그램 스타로 떠오른 비결은 뭘까.
“‘희소성’ 때문인 것 같아요. 인스타그램이 20~30대 젊은 세대들이 주로 소통하는 SNS잖아요. 외국에는 꽤 많은 여성 시니어가 인스타그래머(인스타그램 사용자)로 활동하지만, 국내에는 시니어, 특히 남성이 인스타그래머로 활동하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래서 제가 돋보였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인스타그래머로 활동하는 시니어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도 그가 인스타그램 시니어 스타로 떠오르게 된 것은 단순히 희소성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저는 나이가 들었어도 젊은이들 못지않게 ‘패션’에 관심이 많아요. 오래전부터 운동을 꾸준히 해왔는데 인스타그램을 시작하면서 몸 관리에 더 신경 쓰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김석재 씨의 패션은 남달랐다. 세련된 검정색 코트에 붉은색 머플러로 포인트를 주고 ‘꾸민 듯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멋을 연출했다. 모델 경력이 있는 건 아닐까 할 정도로 패션 감각이 돋보이는 그는 모델 활동을 해본 적은 없지만 꼭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인스타그램 고수로서의 자기계발 비결을 묻자 ‘고수’라는 명칭은 부담스럽다며 “인스타그램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굳이 비결을 꼽자면 자신만의 콘셉트를 만들어나가면서도 타인에게 잘 보이려고 지나치게 애쓰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볕이 잘 드는 집 앞마당에서, 동네 돌담길 앞에서, 여행지에서의 사진 등 일상에서 틈틈이 기록한 모습들을 꾸준히 업로드한다. 그래서일까, 김석재 씨 인스타그램 게시글엔 ‘일상’과 관련한 해시태그가 많다. 해시태그란 단어나 문구 앞에 ‘#’ 기호를 써서 다른 사용자들과 정보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다. 그는 매일 소소하게 일상을 공유하며 팔로워들과 짧은 인사를 주고받는 게 행복하다고 말한다.
“인스타그램을 처음 시작할 때도 두려움보다는 흥미로움이 더 컸습니다. 사실 그전에는 스마트폰 사용도 어려워했어요. 하지만 이제는 인스타그램 팔로워들과 소통하며 스마트폰과 함께하는 시간이 참 즐겁습니다.”
김석재 씨는 인스타그램에 입문하는 중장년층에게 자녀들 또는 젊은이들과 자주 소통하는 게 SNS 활동을 재미있게 할 수 있는 가장 큰 비결이라고 조언했다.
“SNS 같은 새로운 문화에 대해선 당연히 젊은 세대가 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물어보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앞으로는 ‘유튜브’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동안 인스타그램을 통해 정제된 모습을 보여드렸다면, 유튜브에서는 좀 더 활동적인 매력을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 오랜 기간 건설업에 종사했는데 ‘건설’을 주제로 영상도 제작해보려 합니다. 그동안 쌓아온 경험으로 진정한 ‘조언’을 해주고 싶어요.”
그의 새해 소망은 노년층을 대표하는 ‘트렌드리더’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모습을 보고 더 많은 시니어가 도전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2019년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그레이네상스’로 다양한 연령층의 사람들과 더 소통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멀리 와 있다는 생각을 가끔씩 해본다. 2002년 한일월드컵 경기를 위해 서울 마포 상암동에 월드컵경기장이 생겼다. 근처의 난지도 쓰레기매립장은 환경재생 사업을 통해 월드컵공원으로 탈바꿈했다. 이 공원은 2002년 5월 1일 개장했다.
이곳과 가까운 성산동 거주 주민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공원 개장을 기념할 수 있는 운동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그 무렵 인라인스케이트가 붐을 이루던 때라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마음이 끌렸다. 개장일 새벽, 안전장비를 착용하고 혼자 공원으로 나갔다. 초보자였으므로 누가 넘어지는 모습을 볼까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사는 곳이 공원과 가까워 매일같이 새벽 운동을 나갈 수 있었다. 모 일간지의 인라인스케이트 관련 기사와 인터넷에 소개된 교본을 보며 연습에 연습을 거듭했다. 그렇게 3개월쯤 지나자 다른 사람을 지도할 수 있는 실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가까운 곳에 위치한 H대학교 인라인스케이트 동아리에 참여해 젊은이들과 함께 한강변 남단 코스도 라운딩했다. ‘인라인 마라톤 대회’에도 참가했다.
그러나 이 기간 동안 힘든 일도 있었다. 2004년 초 운동을 하러 나가다가 월드컵경기장과 평화공원 사이 횡단보도 건널목 대로에서 대형 교통사고로 우측 다리를 크게 다쳐 1년간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 기간을 제외하곤 인라인스케이트 타는 걸 쉬어본 적이 없다. 스피드나 슬라롬(속도를 겨루는 경기)을 즐겨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이처럼 오래 한 종류의 운동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경계가 느슨해지곤 한다. 운동을 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안전이다. 특히 인라인스케이트는 보호 장비를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 가끔 멋 부리느라 보호 장비 없이 타다가 대형 사고를 겪는 사람들을 본다.
고수가 되려면 실력과 함께 겸손함을 겸비해야 한다. 그래야 마음 수련까지 할 수 있다. 초보자들이 도움을 원할 때 나는 인간적 차원에서 남녀노소 관계없이 성심성의껏 지도를 해준다. 그럴 때 큰 보람을 느끼고 행복하다.
지난해 말부터 6세 손주에게 인라인스케이트를 가르치고 있다. 뭐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재미가 있다. 새해엔 손주 녀석이 자력으로 제대로 탈 수 있도록 더 세심한 지도 방법을 고민해봐야겠다. 손주 녀석의 실력이 향상되면 손주의 유치원 친구들에게도 가르쳐주고 싶다. 그래서 그 녀석들이 자라 손주와 헤어져 서로 다른 학교에 진학하더라도 인라인스케이트를 통해 맺은 우정이 오래 유지되길 기대해본다.
새삼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새해 바라는 게 있다. 옛날 인라인스케이트를 타며 시간을 함께 보낸 동호인들을 SNS를 통해서라도 만나고 싶다. 그들과 다시 소통할 수 있다면 시니어답게 천천히, 그러나 멋있게 나를 보여주고 싶다.
새로운 다짐과 희망으로 가득한 1월 한 해를 시작하며 읽을 만한 신간을 소개한다.
◇ 딸기색 립스틱을 바른 에이코 할머니 (가도노 에이코 저ㆍ지식여행)
30년 넘게 전 세계인에게 회자되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마녀 배달부 키키’의 원작자인 아동작가 가도노 에이코의 에세이다. 2018년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이라고 불리는 국제 안데르센상을 수상한 그녀는 여든이 넘은 현재까지도 왕성한 집필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책에는 나이와 상관없이 건강하고 생기 넘치는 인생을 살기 위한 에이코 할머니만의 비법들을 담았다. 소소한 일상 속에서 빛나는 자신만의 멋과 철학, 나이가 들어도 우아함을 잃지 않는 패션, 오랜 세월 즐겨온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그릇들, 딸기색 벽을 가득 채운 수많은 책 등 그녀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엿볼 수 있다. 마흔 이후 빨간색 옷이 잘 어울린다는 칭찬 한마디에 ‘딸기색’을 자신만의 색깔로 삼은 저자는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예쁘게 꾸미고 싶은 마음을 간직한 채 매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옷장 속을 살피고 싶다”며 아름다운 삶의 비결과 꾸미는 즐거움에 대해 말한다.
◇ 같이 읽고 함께 살다 (장은수 저ㆍ느티나무책방)
10대 여고생부터 80대 할머니까지, 함께 책을 읽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30년 넘게 맥을 이어온 ‘할머니 독서모임’, 귀촌자가 모여 만든 ‘남원북클럽’ 등 저자는 전국 독서공동체 24곳을 직접 찾아다니며 기록했다.
◇ 비가 와도 꽃은 피듯이 (노신화 저ㆍ포레스트북스)
말기 암과 치매를 앓는 시한부 아버지와 그 곁을 지키는 딸의 마지막 76일을 그렸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 속에서 절망보다는 희망을 이야기하며 가족의 질병이 갈등과 붕괴가 아닌 치유와 사랑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 우리가 살아 있는 모든 순간 (톰 말름퀴스트 저ㆍ다산책방)
‘뉴욕타임스’, ‘가디언’이 추천하고 각종 문학상을 휩쓸며 ‘유럽 소설의 새로운 목소리’로 주목받는 톰 말름퀴스트의 소설. 갑작스러운 아내의 죽음으로 평범한 일상이 파괴된 한 남자의 비극을 담담하고 직설적으로 풀어냈다.
◇ 왕초보 책과 글쓰기 도전 (가재산 외 공저ㆍ노드미디어)
100세 시대를 맞아 시니어들이 쉽게 도전해볼 수 있는 책과 글쓰기 방법에 대해 정리했다.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자료를 수집하고, 문서를 정리하는 등 글쓰기에 효율적인 스마트폰 활용 노하우를 친절하게 소개한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겨울 철새들이 제철을 만났다. 우리나라에도 철새도래지가 몇 군데 있어서 일몰 무렵이면 새들의 화려한 군무를 보기 위해서 찾아가는 탐조객들이 많아졌다. 불그스레 빛나는 석양을 배경으로 날아오르는 엄청난 철새들이 산하를 휘젓는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경남 창원의 주남저수지는 남쪽 지역의 특성대로 겨울에도 따뜻한 기후를 유지하고 있어서 겨울 무렵이면 철새들이 이동해오고 있다. 또한, 지자체에서도 겨울 철새들의 서식환경을 보호하고 조성하느라 시책을 준비한다.
어둠이 풀리지 않은 어두운 새벽에 도착한 12월의 주남저수지는 생각만큼 춥지는 않다. 저수지 주변과 둘레길을 천천히 걷다 보니 새벽 공기의 싸늘함이 기분 좋다. 길가의 채소밭과 풀잎에는 빳빳한 서릿발이 새하얗다. 서리꽃으로 보여주는 자연의 멋을 볼 수 있는 겨울 아침은 상쾌함 그 이상이다.
물 논에 큰기러기들이 먹이를 쪼며 조금씩 움직이고 있다. 간간이 두루미가 살짝 날갯짓한다. 큰 고니의 도움닫기도 구경하고 휴식을 취하던 쇠기러기는 가끔 고개 숙여 물속에서 먹이를 찾는 모습이다. 노을 무렵 떼 지어 날아가는 웅장하고 거대한 모습은 볼 수 없으나 군데군데 다정하게 무리 지어 있는 아침 풍경이 평화롭다.
건너편 산등성이 너머로 하늘에 조금씩 붉은빛이 번진다. 그리고 빠르게 해가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다. 붉은 하늘에 무리 지어 나는 철새들의 비행이 여유롭다. 물 논에서 노닐던 원앙과 백로가 아침 해를 받아 붉은 반영 속에 잠겨있다. 온 산하가 일출의 붉은 기운을 받아 설렘을 준다. 한바탕 일출의 잔치를 즐기고 나면 행복해진다.
몽골 북부와 시베리아에서 따뜻한 남쪽으로 날아온 철새는 월동한 뒤 다음 해 3월이면 다시 시베리아로 돌아간다. 그리고 다시 겨울이 되면 해마다 3만여 마리가 찾아와 겨울을 난다. 철새들이 월동하기 좋은 환경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 몫이다.
이제는 주남저수지 탐방 둘레길을 따라 억새를 보며 걸어볼 수 있다. 둘레길은 전체 7.5km 코스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척박한 땅에 소박하게 피어나 가을을 멋지게 보내고 겨울 길을 지키는 억새 길은 지루하지 않다. 요즘 걷기 열풍에 힘입어 주남저수지 탐방 둘레길이 10월의 추천 길로 선정되기도 한 걷기 좋은 길이다.
한참을 걷다 보면 주남 돌다리가 나온다. 800여 년 전 강 양쪽의 주민들이 힘을 합쳐 만든 돌다리인데 자연 속에 그대로 스며드는 아련한 풍경이다. 걸으며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이다.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225호다.
주남저수지는 철새들이 연출하는 날갯짓과 군무뿐 아니라 돌아볼 것들이 많다. 입구의 람사르 문화관과 주남 생태관이 있어서 습지 보전의 중요성과 주변 생태 환경을 자세히 이해할 기회다. 자전거 대여도 하고 마라톤 코스도 있어서 골라서 즐겨볼 만하다.
새벽부터 주남저수지의 아침 공기 속에서 사진 촬영도 하고 둘레길 걷기도 하면서 보낸 시간은 일상을 벗어나 여유를 누리게 해 주었다. 일출과 일몰 속에서 화려하게 비상하는 철새들의 군무는 겨울에 더욱 즐길만한 풍경이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엔 불가능한 꿈을 지니자” - 체 게바라
집을 아름답게 하는 건 그 안에 사는 사람이듯, 한 나라를 아름답게 하는 것 또한 사람이다. 아름다운 사람에게서 나는 향기, 아름다운 사람이 만든 역사. 살사, 시가,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캐리비언 바다…. 쿠바를 수식하는 단어는 무수히 많지만 누가 뭐라 해도 쿠바는 체 게바라와 헤밍웨이의 나라다. 아바나, 산타클라라, 바라데로, 트리니다드에 이르기까지, 쿠바 전역을 덮고 있는 순수한 열정과 문학적 향기를 찾아 떠나보자.
낡은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빈티지 도시, 아바나!
전 세계 어디를 가도 비슷한 모습이 되어가는 지구라는 행성에서 마치 타임머신을 탄 듯 1950년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곳이 있으니 바로 쿠바, 그중에서도 아바나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낡은 건물들과 빨래가 나풀대는 발코니, 혁명가들의 얼굴이 그려진 벽화들과 영화 속 한 장면처럼 거리를 누비는 클래식 카가 어우러진 아바나는 세상 어디에서도 만날 수 없는 빈티지한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사진작가들로부터 열렬한 러브콜을 받고 있는 쿠바는 아이러니하게도 미국과의 화해 무드가 일면서 고유의 아름다움을 잃어버리기 전에 한시라도 빨리 가봐야겠다는 숙제를 안겨준 나라이기도 하다. 주름진 세월이 그대로 내려앉은 올드 아바나 거리와 카리브 해안을 따라 가슴이 탁 트일 듯 시원하게 뻗어 있는 말레콘 방파제는 오늘도 변함없이 자유와 풍요를 꿈꾸는 쿠바인의 안식처가 되어주고 있다.
쿠바의 상징, 체 게바라
본명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훗날 체 게바라(Che Guevara)로 불린 그가 고향 아르헨티나가 아닌 쿠바에서 더 유명해진 것은 11년 동안 쿠바혁명을 위해 싸웠기 때문이다. 혁명이 성공한 후 카스트로에게 명예시민권을 받은 그는 한동안 각종 요직을 수행하며 세계를 향해 제국주의의 문제점과 자유에 대한 연설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영화로움도 잠시, 편안함에 결코 안주할 수 없었던 진정한 혁명가는 모든 영예를 뒤로 하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 고난의 길을 택했고, 결국 이국땅에서 처참한 죽음을 맞았다. 39년의 짧고 굵었던 그의 생애는 많은 사람에게 거대한 영향을 끼쳤다.
체 게바라 묘지가 있는 산타클라라
혁명의 도시 산타클라라로 가는 길. 끝없이 넓은 사탕수수밭과 길게 뻗은 길 위로 마차와 쿠바를 상징하는 올드 카, 현대 차, 그리고 모터사이클이 뒤섞여 달린다. 젊은 시절, 체 게바라의 삶을 바꿔버린 여행을 그린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오버랩된다. 그는 이 길을 달리며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꾸었을까. “고대 전사와 같은 품위 있는 죽음”을 맞기를 원했던 그는 소망대로 산타클라라에 있는 묘지에 묻혔다. 묘지 앞의 흰 꽃다발은 오늘도 생생하게 그를 기리고 있다. 진정한 혁명은 자신을 위한 혁명이며, 어떠한 물질적 보상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던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쿠바를 가장 쿠바답게 해주는 시가와 커피
전 세계가 지탄해마지 않는 담배도 쿠바에서는 매력 덩어리다. 체 게바라의 상징과도 같은 시가. 화보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시가를 입에 문 쿠바인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쿠바 산 에스프레소의 맛도 빼놓을 수 없다. 에스프레소 마니아라면 1달러(현지 화폐로 1CUC)로 네다섯 잔의 에스프레소를 마실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쿠바엔 관광객들이 가는 카페와 쿠바인들이 가는 카페가 따로 있다. 관광객들이 가는 카페는 깔끔하지만 아무런 풍미도 느껴지지 않는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건 역시 허름하지만 진한 삶의 향기가 묻어나는 현지인 카페다. 의자도, 커피머신도 없는 작은 공간에서 주인장이 막걸리 주전자처럼 생긴 용기에 커피가루를 넣고 끓인 뒤 평범한 유리잔에 주르륵 따라주면 끝이다. 묘지에서 돌아와 체 게바라의 진한 삶을 되새기며 쿠바인들과 섞여 마신 에스프레소의 맛을 잊을 수 없다. 무례한 카메라 세례에도 친절로 응대해준 묵묵한 쿠바인들에게 1쿡으로 다섯 잔의 커피를 선물했다.
문학도 미술도 혁명
쿠바에서 만날 수 있는 또 한 명의 인물은 바로 헤밍웨이다. 아르헨티나 태생이지만 쿠바에서 더 많은 계기를 맞았던 체 게바라처럼, 미국 태생인 헤밍웨이도 쿠바에서 삶의 전환을 맞는다. 그는 군사독재자 프랑코를 반대하며,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가한 행동파이기도 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도 적극 참여했고, 당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등 주옥같은 작품을 썼다. 그 때문일까. 헤밍웨이도 쿠바를 좋아했다. 문학도, 미술도 혁명과 다름 아니니까. 태어난 나라에 국한되기엔 너무나 자유롭고 광대한 영혼들이었다.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비굴하게 뒤로 숨지 않고, 초라한 삶에 연연해하지 않고, 열정을 다해 생명을 불태우는 것. 이것이 바로 혁명가들의 공통점이니까 말이다.
아바나에서 한 시간 거리, 헤밍웨이가 만난 코히마르
헤밍웨이는 키 웨스트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우연히 들른 쿠바의 한 바닷가 마을에 매혹된다. 그 후 무려 20년을 그곳에서 살며 낚시를 하고, 어부들과 친구가 되고, 친구를 모델 삼아 ‘노인과 바다’를 썼다. 이 작품으로 노벨상을 받은 그는 어부들에게 상을 바쳤다. 어부들은 그를 기리며 바다가 잘 보이는 곳에 그의 동상을 세워줬다. 헤밍웨이가 즐겨 찾았다는 라 테라사(La Terraza)에 들러 모히토 한 잔을 마셔본다. 1928년 헤밍웨이가 머물며 ‘노인과 바다’를 썼다고 전해지는 ‘핀카 라 비히아(Finca La Vigía)’는 현재 헤밍웨이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아바나 시내도 헤밍웨이의 자취로 가득하다. 그가 머물며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를 썼다는 암보스 문도스 호텔(Hotel Ambos Mundos) 551호실과 라 플로리디타(La Floridita) 칵테일 바, 라 보데기타 델 메디오(La Bodeguita del Medio)까지 보고 나면, 당신의 삶에도 혁명 같은 바람이 불어올지 모르겠다.
파스텔 톤의 동화마을에서 배우는 춤 ‘살사’
17세기 스페인 통치 시절의 풍경이 가장 잘 남아 있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큼 아름다운 도시 트리니다드. 아르마스 광장을 중심으로 교회와 건물, 돌로 포장된 길이 고풍스런 멋을 더하는 트리니다드는 쿠바에서도 살사의 본고장으로 불린다. 전기를 아껴야 하기에 해가 지면 쿠바의 도시들은 온통 깜깜해진다. 특별히 할 일도 없어 잠이나 청하려던 차에 갑자기 온 동네가 떠나갈듯 살사음악이 울려퍼진다. 시간을 보니 밤 11시 무렵. 도저히 그냥 잠들기에는 아까운 장면이라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역사박물관과 산티시마 교회가 있는 중앙 광장엔 하바나 클럽이 있다. 밤마다 현지인과 여행자가 어우러져 한바탕 살사 파티가 벌어지는 곳이다. 프로 뺨치는 쿠바인도, 태어나 처음 리듬에 몸을 맡긴 여행자도 흥겨움에 가득 취하는 밤이다. 스페인어로 ‘소스’라는 뜻의 살사는 맛깔스런 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소스처럼 격렬하고 화끈하며 율동감이 넘치는 춤이다. 동네 여기저기 붙어 있는 살사 레슨 안내지는 지금 아니면 언제 살사를 배워보겠냐고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망설이던 끝에 결국 살사를 배워보기로 했다. 레슨 장소인 카사 데 라 무시카(Casa de la Musica)로 가서 근사한 춤 선생을 기다렸다. 그러나 탄탄한 구릿빛 몸매의 섹시남을 기다리던 내 앞에 나타난 사람은…? 그렇지! 이상과 현실은 다르기 마련이니까.
travel info.
항공한국에서 쿠바까지의 직항은 없으므로, 토론토나 멕시코시티를 경유해야 한다.
여행코스 수도인 아바나에서 시작해서→바라데로→산타클라라→트리니다드→산티아고데쿠바가 일반적이다.
언어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여행적기11월부터 2월까지로 낮에도 무덥지 않으며 밤엔 선선하기까지 해서 관광객이 가장 많이 몰리는 때이다.
치안 사회주의국가라 위험하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나라일수록 관광수익이 중요하므로 관광객에게 해를 끼치는 행위는 중대범죄로 취급되어 오히려 매우 안전하다.
화폐 CUC과 CUP이라는 이중화폐를 사용하고 있어 좀 불편한 점이 있다. 1CUC(쎄우쎄)=1USD, 1CUC(쎄우쎄)=24CUP(쎄우뻬)이며, 외국인이 주로 가는 곳에서는 CUC을, 현지인이 가는 곳은 CUP을 사용한다. 외국인이 CUC으로 계산해도 거스름돈은 CUP(혹은 모네다라고도 함)으로 주는 경우가 많다.
인터넷 무선인터넷망이 깔려있는 공원/호텔/건물등에서 접속가능하며, 인터넷카드비용은 1시간에 1달러정도이다.
숙소호텔도 좋지만 민박집 까사에 머물기를 권한다. 인심좋은 아침상을 받으며 때묻지 않은 현지인들을 만나는 일은 쿠바여행의 또 다른 즐거움이다.
*여행전 보고가면 좋은 영화모터사이클 다이어리, 치코와 리타, 부에나비스타소셜클럽
*여행전 보고가면 좋은 책 체게바라 평전, 쿠바의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
‘그리움’의 다른 말 ‘復古’ 이경숙 동년기자
조국을 떠난 지 한참 된 사람도 정말 바꾸기 힘든 것이 있다. 울적할 때, 특히 몸이 좋지 않을 때면 그 증세가 더 심해진다고 한다. 어려서 함께 먹었던 소박한 음식에 대한 그리움이다. 식구는 많고 양식은 빈약하던 시절, 밥상에서는 밥만 먹었던 것이 아니었나보다. 둥근 상에 올망졸망 모여 앉아 모자란 음식을 나눌 때 느꼈던 진한 가족애와 혈육의 뿌듯함이 DNA에 녹아들기라도 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가마솥 누룽지, 지겹던 보리밥,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던 시래기죽도 각자의 추억과 함께 잊히지 않는 음식이 되어 ‘그것만 먹으면 내 병이 다 나을 것’처럼 그리워지는 것 같다.
골목에 있는 만화방 주인은 청년이었다. 가끔 내게 만화방을 맡기고 외출을 하기도 했는데, 대신 보고 싶은 신간 만화를 실컷 볼 수 있어 좋았다. 만화방 앞에는 약간의 학용품이 놓여 있어 그것도 팔아야 했다. 그날도 만화방을 봐준다는 명목으로 독서(?)에 빠져 있었다. 누군가 나를 ‘툭툭’ 쳐서 보니 군인 아저씨가 물건을 들고 얼마냐고 묻고 있었다.
그렇게 몰두할 만큼 만화책은 너무 재미있었다. 그 만화방엔 안데르센 동화책도 많았다. 울적할 때면, 나는 동물들과 숲속 방앗간 짚 덤불에서 자던 소녀를 떠올리곤 했다. 샘물을 마시고 동물들과 대화하던 맑고 밝은 소녀가 아직도 가슴속에 있다. 지칠 때면 그 소녀가 가만히 내 창을 두드린다.
나팔바지를 입고 집을 나설 때마다 듣던 말이 있다. “동네 다 쓸고 다닐 거니?” 어깨는 각이 지고 허리는 잘록하고 엉덩이는 딱 맞고 바지통은 아주 넓은 디자인이었다. 그 시절엔 사실 유행이 일률적이었다. 지금처럼 다양한 취향을 주장할 만큼 당당하지도, 식견이 풍부하지도 못했다. 개성을 개인적 취향으로 인정해주기보다는 모자란 사람 취급을 하던 그런 시대였다. 그래서 좀 멋쟁이다 싶으면 일제히 미니스커트, 일제히 맥시스커트를 입는 그런 분위기였다. 어찌 보면 마치 유니폼을 입은 것 같았다.
테이블마다 달랑대는 조명등이 달려 있거나, 촛불을 켜는 낭만적인 카페도 많았다. 종종 작은 무대에서 통기타를 치며 노래를 흥얼거리고, 술이 아니더라도 20대는 늘 무엇인가에 취해 있었다. 쉽게 흥분하고 자주 슬펐던 우리들의 20대. 끝도 없는 논쟁으로 밤을 새우고, 모든 게 다 진지하기만 했던 시절. 사랑하고 싶었던 사람들은 사랑 얘기를 쉼 없이 되풀이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며 모두 정의의 순교자라도 되고 싶어 했다.
미팅 땐 생맥줏집, 볼링장, 극장엘 갔다. 애프터 미팅은 카페에서 만나 주로 비원이나 경복궁, 덕수궁을 걸었다. 가난한 젊은 커플들은 버스를 타고 종점을 오가며 대화를 나눴다.
이런 추억들에 젖어보기 위해 옛 시절을 떠올리는 것은 아닐까. 그것이 복고의 매력이라 할 수 있겠다. 그냥 먹고 마시기만 하자니 심심하고 무미건조해 그리움이라도 불러와 옛 필름들을 다시 돌려보고, 식어버린 가슴을 조금이라도 데워보려는 것이다.
벼룩시장에서 보물찾기 윤종국 동년기자
“내가 나를 생각하는 만큼 남들은 나에게 관심이 없다.”
나는 이 말을 엄청 좋아한다. 난 늘 나를 생각한다. 나는 키도 작고 몸집도 작다. 그러나 머리는 크다. 표준 사이즈로 옷을 고르면 거의 맞는 게 없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곳이 있다. 30여 년은 족히 된 듯하다.
독자들이 궁금해할 것 같아 먼저 알려준다. 바로 ‘벼룩시장’이다. 수백, 수천 가지의 물건이 있는 곳이다. 옛날에는 청계6·7가에 있었고, 지금은 동묘(동대문구) 일대에 시장이 형성돼 있다. 벼룩시장에서 레트로를 본다. 내게는 수만 가지 물건이 레트로 대상이다. 한 달에 두세 번 보물을 찾는 기분으로 간다. 내 작은 체구를 잘 알기에 어울리는 옷도 찾아본다. 손에 주로 들리는 옷은 복고풍의 외투다. 벼룩시장에서 입수한 옷은 꼭 수선 집을 거친다. 그래야 진짜 내 것이 된다.
누구나 알고 있듯 없는 게 없는 곳이 벼룩시장이다. 그렇다고 아무나 덤빌 곳은 또 아니다. 내게는 오랜 세월의 경험이 있다. 레트로를 사랑하려면 요령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레트로인이 된다. 예를 들면 맘에 드는 복고풍 옷을 하나 발견했다 치자. 구매의사가 있을 경우 먼저 입어보고 가격을 흥정하면 초보자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구매자 몸에 어울린다 싶으면 가격이 달라진다. 가격 매기기는 벼룩시장 주인들만의 특권이다. 그러므로 먼저 가격을 물어본 다음에 흥정을 해야 하는 게 원칙이다. 설사 맘에 들더라도 그 맘을 들키면 절대 안 된다. 그래야 원하는 가격에 살 수 있다.
또 하나의 팁. 다른 물건에 관심이 있는 척하다가 진짜 맘에 드는 물건을 들고 슬쩍 “이건 얼마죠?” 하고 물으면 점포 주인은 대부분 낮은 가격을 부른다. 이것이 지혜롭게 레트로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수년 전 딸아이가 벼룩시장이 궁금하다며 따라나섰다. 그날 지나다 발견한 물건은 흙이 묻어 다소 지저분해 보이는 신발이었다. 신을 만해서 단돈 5000원에 손에 넣었다. 집에 와서 닦고 손질해보니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고가 브랜드 신발이었다. 딸아이가 좋아라 했다. 내가 벼룩시장 마니아로 인정을 받은 건 사실 그날이었다.
한 달 전 큰손주의 생일이 있었다. 그날을 위해 몇 번이나 벼룩시장을 찾아 헤맸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찾기 위해서다. 신제품도 생각했지만 하루가 다르게 키가 크는 녀석의 발 사이즈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라인스케이트를 선물로 선택한 이유는 내가 좋아하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10여 년 전 전국, 특히 서울에서 인라인스케이트 붐이 일었다. 그러다가 아파트 내에서 어린이 안전사고가 일어났고 그 충격으로 슬쩍 사라져버렸다.
벼룩시장을 갔던 날, 다행히 손주에게 맞을 것 같은 인라인스케이트를 발견하고 흥정을 시작했다. 일단 가격부터 묻고 사이즈를 확인한 뒤 며느리에게 전화를 걸어 손주 발 사이즈를 물어봤다. 그러면서 주인의 눈치도 살폈다. 발 사이즈가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듯 대화를 나눈 뒤 주인과 흥정을 했다. 결국 내가 원하는 가격으로 물건을 손에 넣었다. 이런 요령을 터득해야 비로소 벼룩시장의 프로가 된다. 집으로 돌아와 깨끗하게 정비하니 새 물건보다 더 정감이 갔다.
손주 생일에 인라인스케이트를 건네주며 “지금은 키가 부쩍부쩍 크는 나이니까 일단 이것으로 먼저 타는 연습을 하자”라고 말했다. 갖고 싶어 했던 거라 그런지 손주도 아주 만족스러워했다. 그날 나는 손주바보 할아버지에서 멋진 할아버지로 거듭났다.
옛것들에서 한 수 배우며 사는 삶 육미승 동년기자
“넌 조금만 더 나중에 태어났더라면 뭔가 해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심심찮게 이런 말을 해주는 친구들이 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민망하지 않은 표정으로 다정하게 미소를 짓는다. 친구들 말은, 내 패션이나 생각 그리고 사는 방법이 자기들과는 전연 다르다는 의미다. 그도 그럴 것이 레트로가 내 생활이니….
특히 패션에 대한 생각이 그렇다. 옷을 살 때 겉옷은 지금 당장 유행을 타는 것들 중 나중에도 입을 수 있고 멋지게 소화해낼 수 있는 디자인을 고른다. 그리고 다른 옷들은 옷장 문을 열어 예전에 신나게 입고 즐겼던 옷들에서 선택한다. 그날의 모임 콘셉트에 맞고 남의 눈에 거슬리지 않으면서도 유행에 뒤떨어짐이 없는 은은한 멋을 지닌 그런 의상을 즐기는 거다. 나는 옛것을 너무 좋아한다. 옛것들 버리지 않고 여전히 아끼고 사랑하는 나를 보고 “어머 얘, 너무 잘 어울린다아~’ 하고 해주는 말들을 좋아하는 것도 같다.
회상하고 추억에 빠지는 시간은 천천히 꼼꼼하게 내 생각들을 정리하는 데 꼭 필요하다. 그러고 보니 인연이 끝나 지금은 만나지 않는 사람들과의 대화도 마음 한구석에 감춰두고 있다. 어느 날 그들과의 추억을 꺼내 감상하는 게 내 취미다. 나는 옛것들은 대부분 귀하게 여기고 좋아한다. 가끔은 그동안 읽었던 책 속에서 또는 영화 속에서, 예를 들면 사마의 같은 중국의 책사들에게 한 수 배우길 희망한다. 그 놀라운 생각의 회로를 닮아보려고 혼자 부단히도 노력한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반짝이는 젊은이들. 그 두뇌를 못 따라가는 나는 느린 사고방식이 편하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단 한 번도 싸워보질 못했다. 갈등이 일어날 것 같으면 슬그머니 자리를 피하거나 가만히 듣고만 있는 게 내 모습이다. 져주는 게 상책이라 생각하며 지내왔기 때문이다. 일처리를 할 때도 나를 뺀 모든 관계자들이 편한 쪽으로 해답을 구한다. 어느 면으로 보면 답답해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나를 길들이며 살아왔기에 불편하지 않다. 그러나 지인들은 불똥이 내 발 바로 앞에 떨어져도 “이게 뭐지?” 하며 그제야 슬쩍 뒤로 물러날 사람이라며 핀잔 섞인 말을 한다.
그렇다. 나는 오래 생각하며 말없이 기다린다. 특히 답이 여러 가지로 나올 수 있는 문제는 더더욱 끝까지 기다린다. 엉망으로 뒤섞여버린 물을 가만히 두면 침전물들이 여러 층으로 가라앉고, 맑은 물이 맨 위로 올라온다. 내 앞의 문제도 그렇게 될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면 마치 무위이화(無爲而化)하듯 저절로 아주 유효하고 명쾌한 답이 나온다. 그 신기함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이것이 바로 레트로의 진가라고 믿는다. 새로운 기술과 기교도 좋지만 옛 성현들의 말씀에서 더 많은 답을 찾는다. 레트로는 내 단짝이다. 한 시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 앞으로도 복고 속에서 빛나는 다이아몬드를 찾아내는 마음으로 패션, 음악, 미술,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등을 즐기며 여유작작한 삶을 살아가려 한다.
레트로는 ‘마음의 휴식’이다 손웅익 동년기자
1980년. 그 해 나는 대학교 4학년이었다. 건축과 학생들 중 건축설계에 특히 관심이 많은 학생이 모인 동아리에서 활동을 했다. 회원들은 매년 몇 달씩 동아리방에서 합숙을 하며 건축 작품전을 준비했다. 식사는 2학년생들이 돌아가면서 전체 회원이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러나 집에서 설거지 한 번 안 해본 학생들이 만든 밥은 그야말로 배가 고파서 억지로 먹을 수밖에 없는 정도의 상태였다. 그런 식사로 몇 달 합숙을 하다 보니 대부분 건강이 나빠졌다. 1980년의 교정은 봄부터 최루탄으로 뒤덮였다. 수업도 대부분 휴강이었다. 그렇게 혼란한 상황에서도 건축과 동아리 회원들은 밤낮으로 모여 작품전을 준비했다. 대체로 밤에 설계를 하고 낮에는 잠을 잤는데, 그 와중에도 매일 데모하러 나가는 회원도 있었다. 졸업을 앞둔 4학년 학생들은 최고참이라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저녁에 가끔 학교 앞으로 나가 막걸리도 한잔씩 했다.
그날도 4학년 동기들은 동아리방에서 저녁을 먹지 않고 학교 앞에서 막걸리를 마셨다. 4학년만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막걸리를 마시고 난 뒤에는 학교 교문 근처 문방구점에서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중계를 봤다. 당시 텔레비전은 다 흑백이었다. 그런데 선발대회 중에 화면 아래쪽으로 대학교를 폐쇄하겠다는 자막 뉴스가 떴다. 합숙 중이었던 우리는 얼른 짐을 챙겨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아서 학교로 들어가려는데 어느새 장갑차가 교문을 지키고 있었다. 1980년 5월 15일이었다. 17일에는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그다음 날이 5월 18일.
그 해 우리가 준비했던 5월 전시회는 무산되었다. 전국으로 계엄이 확대되면서 집회는 일절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우리는 회원들 집에서 만나 작품전 준비를 했고 가을에 전시회를 열었다. 당시 동아리 회장이었던 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잘 준비해서 내 임기 중에 전시회를 마칠 수 있었다. 그렇게 겨울이 또 왔고 어느 날 술친구들이 중국집에 모였다. 텔레비전을 보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고량주를 마시면서 방송 시작 시간을 기다렸다. 그날은 우리나라 텔레비전 역사상 처음으로 컬러 방송을 하는 날이었다. 당시의 자료를 찾아보니 1980년 12월 22일 이었다. 우리는 컬러로 텔레비전을 보면 중국 영화처럼 피가 난무하는 장면은 너무 살벌할 것 같다는 둥, 연예인들이 옷을 더 화려하게 입을 것 같다는 둥 이런저런 추측성 대화를 나눴다. 그날 그렇게 흑백텔레비전 시대가 종료되었고 내 학창 시절도 저물어갔다.
얼마 전에 영화 ‘로마의 휴일’을 텔레비전에서 다시 봤다. 오래전에 갔던 로마 여행의 기억을 떠올리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옛날 영화를 보다 보면 흑백 화면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다. 흑백이라서 불편하거나 아쉬운 점도 없다. 오히려 로마의 유적이 더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상상을 자극하는 것 같다.
사진도 마찬가지다. 컬러 사진이 보편화하기 전의 흑백 사진들은 그 분위기로 시간을 되돌리는 신비로움이 있다. 흑백 사진을 손에 들면 사진을 찍던 순간으로 순식간에 되돌아가는 듯하다. 흑백이라는 무채색의 아름다움은 그래서 복잡하고 바쁘고 혼란스러운 현대인들에게 향수를 자극하고 잠시 쉬어갈 수 있는 마음의 휴식을 주는 것 같다. 현대인들은 현란한 색과 형태 그리고 자극적인 소리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 정보의 홍수와 자극의 파도를 견디려니 모든 감각기능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다. 이런 현실에서 흑백은 잠시나마 여백의 세계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눈이 편안해지면 마음도 편안해진다.
나는 새벽안개를 좋아한다. 특히 두물머리의 새벽안개는 한 폭의 수묵화다. 물안개가 피어오르는 새벽에는 온 세상이 흑백으로 변한다. 안개의 농담(濃淡)으로 그려놓은 수묵화는 화려한 가을날의 유화 같은 풍경과는 비교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이 있다. 그 여백은 흑백 사진처럼 아련한 시간의 심연으로 빠져들게 한다.
요즘 펜화 스케치를 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받곤 한다. 검은색으로만 그림을 그려놓고 원본의 컬러와 비교하면 흑백이 가진 깊이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가끔 의식적으로라도 흑백의 세계로 눈을 돌릴 필요가 있다고 본다. 흑백은 레트로다. 나는 레트로에서 마음의 휴식을 찾는다.
굴업도는 방사능 폐기물 저장소로 발표했다가 유명해진 섬이다. 필자는 제주도 외에는 배 타고 외지에 나간 일이 없다. 굴업도는 인천에서 배 타고 덕적도까지 1시간, 그리고 다시 작은 배를 타고 2시간을 가야 하는 먼 곳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만리포에 갔다가 배 타고 오던 길에 뱃멀미를 심하게 한 트라우마 때문에 배 타는 것은 꺼렸다. 혼자 가려면 배편이며 민박 예약 등 번거로운 절차가 까다로워 엄두도 못 내던 중 단체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기회가 찾아왔다.
인천 역에서 아침 7시 30분에 모이기로 했다. 그런데 집에서 나와 가장 일찍 출발하는 5시 40분 발 전철을 탄다 해도 2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10분이 모자랐다. 여러 가지로 고민하면서 그동안 서쪽에 위치해서 서로 자주 못 보던 지인들이나 만나 그 동네에서 자고 아침에 인천 역으로 가려고 했다. 그런데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게 되면 밤늦게 술을 마실 것이고 그렇지 않아도 걱정하던 뱃멀미에 시달릴 생각을 하니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마침 마곡나루 근처에서 열린음악회 공연이 있다 해서 서쪽 지인들과의 약속을 취소하고 공연장으로 달려간 것이다.
공연이 끝나고 혼자 계양역까지 가고, 인천1전철로 갈아타고 부평역까지, 그리고 1호선 전철을 타고 인천 역까지 갔다. 밤 10시였다. 인천 역 앞은 불은 다 꺼지고 깜깜했다. 인천 역은 사람의 왕래가 잦은 곳이니 당연히 찜질방이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역 앞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망연자실하여 멍하니 있을 때 동네 노인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물으니 다시 전철을 타고 동인천역으로 가라고 했다. 거기가 인천역보다 번화하니 찜질방이 있을 거라고 했다. 마침 인천에 산다는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몇 정거장 더 거꾸로 와 주안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찜질방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초행길에 그것도 밤늦은 시간에 버스까지 갈아타고 가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아 그냥 동인천역에서 내렸다. 과연 역사에서 바깥을 보니 찜질방 간판이 보였다. 잠을 잘 수 있는 24시 찜질방이어야 하는데 그건 가봐야 알 수 있었다.
다행히 찜질방은 24시 운영 체제였다. 입장료 8000원에 찜질복 1000원인데 경로라고 1000원 할인받았다. 들어가 보니 주인인 듯한 남자와 손님으로 보이는 2명만 앉아서 TV를 보고 있었다. 몇 가지 물어 오는데도 퉁명스럽게 대해 일단 몸을 씻고 잠자리를 찾았다. 변두리이니 그러려니 하고 몇 시간 동안 눈만 붙이자는 것이었다. 어두운 2층 마루로 된 침실에 들어가 누웠는데 다른 손님 한 명이 부스럭거리며 들어 왔다. 너무 추워서 열린음악회에서 지급해준 담요 한 장에 의지하고 잠을 자는 둥 마는 둥 하다가 6시에 일어나 다시 씻고 둘러보니 커튼 뒤로 가족 찜질방이 따로 있었다. 커튼 사이로 여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게 보여 가지도 않았는데 거기가 이 찜질방의 중심지였다. 밤새 떨었던 몸을 찜질방에 들어가 녹이고 바로 나왔다.
전철을 타기 전에 아침 식사로 요기를 하려던 차에 보니 ‘24시 무인 라면 판매점’이 눈에 들어왔다. 2000원이면 라면 한 그릇을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아침 식사까지 느긋하게 마치고 다시 전철을 타고 인천역에 도착했다. 필자와 몇 정거장 앞 인근에 사는데도 첫차 타고 온 사람도 있었다. 필자도 첫차 타는 것을 수차례 고민했으나 전철 소요시간이 10분 모자라니 오면서 생 땀 흘리느니 느긋하게 미리 전날 인천에서 자고 합류하기로 한 것이다. 배가 8시 30분에 출항이라 조금만 여유를 더 줬어도 필자도 당연히 집에서 자고 첫차로 출발했을 것이다.
인천 역에서 택시를 타고 15분 만에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했다. 미리 직접 온 동행인들까지 12명이었다. 신분증을 제시하고 승차권을 받았다. 덕적도까지 경로 할인받아 1만9550원이었다. '코리아나'라는 배는 제법 큰 편이었고 일등석을 끊었는데 다른 좌석과 별 차이가 없었다. 한 시간을 달려 덕적도까지 갔다. 파도가 잔잔해서 뱃멀미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거기서 내려 다시 2시간 여유가 있었다. 나래호라는 다른 배를 타고 2시간을 달리는데 중간에 문갑도-지도-율도-백아도에 잠시 들렀다가 목적지인 굴업도에 도착했다. 나래호는 경로 할인받아 6600원인데 작은 배지만 지정 좌석이 없고 바닥에 누워서 갈 수 있었다. 엔진 소리와 진동을 자장가 삼아, 등판 마사지 삼아 잠시 눈을 붙이니 2시간도 금방 지났다.
굴업도에 도착하자 민박 주인이 1.3톤 트럭을 몰고 와 기다리고 있었다, 화물칸에 타고 10여 분 달렸다. 방을 배정받고 가져온 점심을 먹고 하기를 달랬다, 바로 트래킹 코스로 나섰다. 덕물산이었다. 굴업도는 굴이 많은 섬이라 그렇게 부른 줄 알았는데 사람이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 해서 그렇게 이름 붙였다고 한다. 덕물산은 왼쪽 다리이고 연평산이 오른쪽 다리에 해당한다. 섬 중심부가 큰 마을이고 머리 부분이 개머리 언덕이다. 덕물산은 가다 보니 욕심이 나서 정상까지 올라가기는 했지만, 대단히 위험한 코스였다, 중간에 나무뿌리를 붙잡아야 올라갈 수 있는 코스가 있고 나무를 붙잡아야 하는데 고사목이 많아 자칫하면 나무가 부러질 수 있었다, 바닥도 바위가 늙어 부서진 마사토라서 등산화가 아니면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꼭 등산화를 신어야 하는 코스이다. 해발 183m지만, 경사도가 높아 가파른 산이고 코스가 대중적이지 않아 보호 시설도 없다. 그렇게 험한 코스인 줄 알았다면 말리고 싶은 코스였다.
하산해서 민박집에 왔는데 서해 최서단이라 일몰이 아름다울 것 같았다. 물어보니 빨리 가면 일몰을 볼 수 있다 하여 마을 뒤 SK 타워까지 20분 걸려 올라갔다. 해가 거의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순식간에 해가 없어진 것이다. 어쨌든 일몰 광경은 봤다. 저녁 식사 후 별이 쏟아진다 하여 밖으로 나갔으나 가로등 불빛이 여기저기 있어 기대했던 것만큼은 안 되었다. 여기저기 사슴이 놀라 서 있다가 도망치는 모습을 본 것이 소득이었다.
다음 날 아침 부지런한 일행들은 일출 광경을 보러 나갔다. 섬 사이로 떠오르는 태양이 볼만했다는 것이다. 식사를 마친 후 개머리 언덕 쪽으로 향했다. 능선에 올라가니 섬 양쪽이 다 보이는 절경이었다. 가을 바닷바람이 제법 신선하게 불어 왔다. 산의 관목들이 바닷바람을 견디며 이만큼 자라 왔다는 것이 신기했다. 보통 나무는 줄기가 하나인데 여기 관목들은 여러 줄기가 동시에 같이 자라 나온다. 키도 그리 사람 키 약간 넘을 정도로 그리 크지 않다. 그리고 군집을 이뤄 바람을 막는 모양이다. 개머리 언덕은 몇 해 전 등반객 화재 사고로 풀만 나 있어 걷기에 쉬웠다. 멀리 툭 터진 바다를 보는 멋이 있었다. 야영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이 있는데도 몇몇 야영객들이 텐트를 치고 있었다. 화기를 이용한 취사도구가 있는 것으로 보아 화재가 염려되기도 했다.
다시 개머리 언덕을 내려와 토끼섬 앞까지 걸었다. 썰물 때라 긴 백사장에 갯강구가 부지런히 다니고 바위 위에는 굴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연장이 없어 시식은 못 했다. 좀 더 기다리면 토끼섬 가는 길목에 물이 빠져들어 갈 수 있었으나 시간 관계상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 대신 바닷물에 침식된 절벽인 해식와는 감상할 수 있었다.
코끼리 바위는 연평산 쪽이라 포기하려 했는데 민박집 주인이 입구까지 태워다 준 덕분에 가볼 수 있었다. 평소에는 바다에 면해 있어 일부러 찾아가기 전에는 보기 어려운 해안 쪽이었는데 다행히 썰물 때라 볼 수 있었다.
2시 10분 나래호 배를 타고 굴업도를 떠났다. 덕적도에 들어 바로 코리아나 호로 옮겨 타고 2시간을 달려오니 인천항에 5시 반 이었다. 근처 유명한 중국집이 있다 하여 가서 자장면을 먹었는데 조미료 범벅이라 입안이 말라 혼났다. 인천 역에서 동인천역까지 와서 급행으로 노량진역까지, 그리고 다시 9호선 종합 운동장 역까지 오고 집 앞에서 내리는 버스를 타고 내리니 9시였다. 막걸리 한 병으로 타는 갈증을 달래고 2박 3일의 여정을 마쳤다.
‘한국의 갈라파고스’,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섬’ 등 극찬의 글은 많이 올라와 있으나 필자에게는 섬은 그냥 섬이었다. 오래된 화산섬으로 마치 공사장 돌 쓰레기가 한데 엉겨 붙은 것처럼 보이는 단층이나 가지각색의 단층이 특이하기는 했다. 우럭 낚시가 너무 쉽게 잘 된다는 낚시꾼 얘기도 듣기는 했다. 민박집 반찬이 서울의 어느 음식점보다 맛있었다는 것만 기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