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통이야말로 두통거리’라는 말이 있다. 딱따구리가 자신의 머리를 쪼아대는 듯하다며 고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두통이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두통 환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두통이 어디에 속하는지 감별하는 것이다. 크게 두 종류의 두통이 있다.
첫째, 머리를 끈으로 조인 듯 아픈 긴장성 두통이다. 머리 좌우 모두에서 나타나며 일상생활로는 악화되지 않는다. 통증은 가볍거나 중간 정도이며 30분에서 7일가량 지속된다. 전조 증세도 없고 통증은 심장박동과 무관하게 온다. 가장 흔한 형태의 두통이며 과로나 스트레스로 인한 두피 근육의 과도한 수축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평소 컨디션을 잘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려면 균형 잡힌 영양, 충분한 수면, 적절한 운동이 필요하다. 컨디션이 좋아야 두통을 유발하는 스트레스에 견디는 힘이 커지기 때문이다.
둘째, 편두통이다. 심장박동에 맞춰 욱신욱신 아프다. 편두통이란 말에서 짐작이 되듯 머리 좌우 중 한쪽으로 오지만 양쪽 모두 오는 경우도 있다. 통증은 대개 4~72시간 지속되며 긴장성 두통보다 훨씬 심하다. 30%가량은 시야에 번쩍거리는 섬광이 나타나는 등 특유의 전조증상도 있다. 메스꺼움이나 구토 증세가 있고 냄새에 대해 예민하다. 또 안구충혈, 코막힘 등의 동반증세도 있다. 계단오르기 등 일상생활로도 악화되는 편두통의 원인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유전적 요인 또는 통증을 느끼는 뇌세포의 과민반응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과거에 원인으로 의심했던 뇌혈관의 수축과 확장은 원인이라기보다는 과민반응의 결과로 해석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두통은 원인이 달라 치료도 다르다. 치료는 신경과 전문의 등 전문가에게 받아야 한다.
어떤 경우이든 두통에 대해 다음 세 가지를 강조하고 싶다.
01 긴장 완화가 중요하다.
두통엔 자율신경이 관여한다. 우리 의지로 조절되는 것이 아니다. 교감신경이 흥분하면 두통발작이 온다. 스트레스로 곤두선 신경은 가벼운 걷기나 명상, 심호흡, 적절한 취미활동 등으로 누그러뜨려야 한다.
02 두통 일기를 쓰자.
사소해 보이고 번거롭지만 매우 중요하다. 두통발작을 유발하는 방아쇠 요인을 찾기 위해서다. 두통은 대부분 특정 환경에서 자주 생긴다. 끼니를 거르거나 치즈나 햄, 장시간 TV를 볼 때, 커피를 많이 마실 때 등 매우 다양하다. 내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 때 두통이 시작됐는지 기록할 필요가 있다. 생활 속에서 이렇게 찾아낸 방아쇠 요인을 회피하면 두통을 예방할 수 있다.
03 증세가 나타나면 재빨리 약을 써야 한다.
심하게 아플 때 약을 쓰면 효과가 적다. 전조증세를 비롯해 발작이 올 것 같은 느낌이 오면 빨리 약을 복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약이 없으면 물을 마신 뒤 가능하면 어둡고 조용한 곳에 앉아 쉬면서 머리를 차갑게 해주는 것이 증상 완화에 도움을 준다.
#두통 #홍혜걸
충주 땅 변두리 후미진 동네에 사는 너를 찾아간 것은 들판에 황금빛 물결이 일기 시작하는 어느 해 가을이었지. 논에는 벼농사, 밭에는 주로 사과 농사를 짓는 마을. 사과 과수원에는 누런 잎이 떨어지기 시작하고, 나뭇가지마다 매달린 사과들은 태양의 후예들인 양 붉은 빛깔로 여물어가고 있었어. 모처럼 찾아온 나를 위해 너는 한 과수원으로 데려가 사과 한 상자를 사서 선물이라며 안겨준 뒤, 손수 차를 몰아 마을 변두리에 있는 큰 저수지 부근으로 데려갔지. 지금까지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은, 늘 혼자 가서 머물다 오곤 한다는 너만의 성소(聖所)로!
네가 말한 성소는 저수지를 둘러싼 울창한 숲속 무덤 몇 기가 있는 아늑한 장소였어. 한낮인데도 도래솔 몇 그루가 무덤 둘레를 감싸고 있어 자연스레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고, 그 적요한 품에 들자 성소라는 네 말이 실감으로 다가왔지. 들뜬 마음이 가라앉고 명상에 들기에 안성맞춤인 곳.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 내면으로 잠수할 수 있는 곳. 우리는 마른 잔디 위에 앉아, 깊고 푸른 저수지 물결을 내려다보며 한가로움을 즐겼고, 잠시 눈을 감고 명상에 들기도 했지.
그렇게 너를 만나고 온 후 보름쯤 지났을까. 후배를 통해 너의 갑작스런 부고를 들었지. 청천벽력이었어! 우리는 이제 쉰 살을 막 넘은 나이였고 정신적, 영적으로 토실토실 여물어가는 때였지. 평생을 목회자로 살아온 너는 자발적 가난을 택해 남들이 가려 하지 않는 시골 오지로 스며들어, 노인들이 대부분인 교우들을 지극정성으로 섬기고 살았어. 예수의 거룩한 종지(宗旨)를 따라 살려는 이들은 점차 줄어들고, 천민자본의 코뚜레에 코가 꿴 이들이 점점 늘어나는 세상을 직시하며 너는 마지막까지 올곧게 살려고 몸부림쳤지.
네가 세상을 떠난 뒤에, 매스컴에서는 너의 아름다운 삶을 기리는 보도가 줄을 이었지. 죽기 1년 전에 네가 작성해놓은 유서도 공개됐어. 그 아름답고 의미심장한 유서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너의 갑작스런 죽음을 더욱 안타까워했지. 그때 네가 남긴 유서의 일부야.
나는 오늘까지 주변인으로 살게 된 것을 감사하고/모아 놓은 재산 하나 없는 것을 감사하고/목회를 하면서 호의호식하지 않으면서도 모자라지 않게/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이 땅에서 다른 무슨 배경 하나 없이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하고/앞으로도 더 얻을 것도 없고 더 누릴 것도 없다는 것에/또한 감사하노라.//사람들의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르며 치솟고/사람들의 욕망은 멈출 줄 모르고 내달리며/세상의 마음은 흉흉하기 그지없는 때에/아무런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음에 참으로 감사하노라.
이쯤에서 내가 너를 만나게 된 사연을 잠깐 얘기해볼까 해. 우리가 만난 건 강릉 땅에서였지. 서울에서 ‘기독교사상’이란 잡지 일을 하던 나는 필화사건이 터져 회사에서 쫓겨났지. 나는 부득이 홍천 땅으로 가서 잠시 목회를 하다가 네가 사는 강릉의 해변가에 있는 농촌 교회로 부임했어. 너는 강릉 시내에서 아주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었고, 민주화운동을 위해서도 헌신하고 있었지.
그렇게 사회운동에 열정을 쏟으면서도 여린 감성을 지닌 너는 시를 사랑하는 문학도였고, 어린 시절 조부에게 한문을 배운 터라 동양 경전에도 해박했어. 서로의 공통된 관심이 우리를 가깝게 했고, 우린 자주 붙어 다녔지. 주위에선 그렇게 붙어 다니는 우리를 보고 놀리곤 했어. “전생수는 고진하의 보디가드 같다”고. 나는 60kg이 채 나가지 않는 홀쭉이였고, 너는 내 몸무게의 두 배나 되는 뚱보였으니까. 물론 남들의 그런 놀림도 너는 개의치 않았어.
우리는 그렇게 친했지만, 어쩌다 객지에서 만나 여관 같은 데서 함께 잠을 자게 될 때는 좀 힘들었어. “내가 코를 좀 심하게 고니까 너 먼저 자!”라고 늘 말하곤 했지만, 내가 잠을 청하려 애쓰다 보면 너는 항상 먼저 잠에 떨어져 천장이 들썩거릴 정도로 심하게 코를 골았으니까. 그렇게 잠을 설치고 난 어느 날 아침에 국밥을 먹으며 너는 병든 후배가 입원하고 있었던 병상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 함께 킬킬대며 웃었지. 후배가 입원한 병원에서 불편한 쪽잠을 자고 나오는데, 같은 병실에 있던 이들이 이렇게 쑥덕거리더라는 거야. “코 고는 소리가 어찌 큰지 시골 경운기 가는 소리 같았어!” 너무 미안한 너는 병실을 나오며 이렇게 대꾸했다고 했어. “죄송합니다. 시끄러운 경운기는 이만 물러갑니다!”
하여간 그렇게 네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나는 시골로 솔가해 잡초를 키우며 살고 있어. 너 역시 목회생활을 마치고 자유로워지면 네 고향에 돌아가 소나 몇 마리 기르며 살고 싶다고 했지. 그처럼 소박한 바람을 왜 하느님은 들어주지 않고 일찍 데려가셨는지? 네가 살던 충주 땅 부근을 지날 때나 촉촉이 비가 내려 문득 네가 그리워질 때면 원망을 담은 이런 물음을 하늘에 던져보기도 하지. 그리고 네가 남겨둔 시 몇 구절을 혼자 읊조리며 위로를 받아.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도/본디 제 맘이 아닌/우주의 움직임//사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낙담하지 말라/그대 속에 그대보다 더 큰 숨이/물결치고 있나니/그 숨결 속에 그대 삶을 묻으라.
나뭇잎 한 잎 떨어지는 것도 ‘우주의 움직임’이라는 겸허한 네 통찰 앞에서 나는 절로 옷깃을 여미게 돼. 그리고 작은 우리 속에 ‘더 큰 숨이 물결’친다는 너의 시구를 보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넌 이미 우주의 비의(秘意)를 깨친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곤 해.
네가 이승에 있을 적에 가끔씩 꽃엽서를 주고받곤 했지만, 오늘처럼 이렇게 네게 부치지 못할 편지를 쓸 줄은 몰랐어. 그래도 너의 이름에 기대어 편지 몇 줄을 쓰면서 꽃보다 향기롭게 살았던 너의 삶을 조금이나마 드러내고 싶었어. 물론 내가 그렇게 하지 않아도 네가 사랑했던 불우한 이 땅의 민초들, 저 산과 들의 이름 없는 풀꽃들이 네 아름다운 삶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지만 말이야.
고진하(高鎭河) 시인·목사
강원 영월생.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지금 남은 자들의 골짜기엔’, ‘프란체스코의 새들’, ‘얼음수도원’, ‘거룩한 낭비’, ‘명랑의 둘레’ 등이 있고 산문집으로 ‘시 읽어주는 예수’, ‘잡초치유밥상’, ‘조금 불편하지만 제법 행복합니다’가 있다. 영랑시문학상, 김달진문학상 수상. 현재 한살림교회 목사.
산과 산 사이 도로를 줄기차게 달려도 산 첩첩. 깊고 후미진 산간이다. 도로를 버리고 접어든 비좁은 산길 끝자락 산 중턱, 후련하게 탁 트인 거기에 나무선(57) 씨의 거처가 있다. 풍경의 절반은 산, 절반은 하늘. 또는 절반은 청풍, 절반은 구름. 절집 자리처럼 개활하니 명당이렷다.
나무선 씨는 서점을 운영한다. 외진 산골짝 서점을 누가 찾아들까 싶지만 드나드는 발길이 허다하단다. 해서, 그는 느긋하다. 살뜰히 정붙이고 산다. 여기가 낙원이거니, 그리 자족한다. 서점 이름은 ‘터득골 북샵’이다. ‘자연주의 플랫폼’을 표방하고 있다. 일찍이 자연 속에서 자연스레 자연과 동화하는 삶을 그리다 마침내 이루었다. 이 산중으로 귀촌한 지 10여 년이 흘렀다.
나무들 울창한 숲속에 차린 서점이란 필시 이색이다. 게다가 장사가 된다 하니 거의 이변이다. 책 또는 독서는 긴 세월 동안 매력적인 향을 뿜었다. 지식 축적과 소통의 유력한 도구였다. 그러나 인터넷, 휴대폰, SNS 등속의 강력한 적들에 밀려 변방으로 밀려났다. 출판사들이 줄줄이 무너지고, 온라인 서점의 파죽지세에 오프라인 서점들이 나가떨어졌다. 정황이 이러하지만 나무선 씨의 숲속 서점은 순항 중. 귀촌생활 방식의 새 지평을 열어가는 중.
귀촌 이전, 그는 서울에서 출판업자로 뛰었다. 말하자면 책을 만드는 사람에서 책을 파는 사람으로 변신했다. 지금으로부터 2년쯤 전에 ‘터득골 북샵’을 오픈했다. 나는 언젠가 서울에서 출판사를 하던 사람 하나가 시골에 내려가 1인 출판사를 꾸렸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연과 생태에 관한 책들을 주로 출간한다 했다. 당시 퇴고를 마친 원고의 출간을 위해 출판사를 물색 중이었던 나는 그 산골 출판사 사장에게 구미가 동해 원고를 보냈다. 하지만 퇴짜를 맞았다. 얼굴은 보지도 못한 채 두세 차례 전화통화만으로 상황 끝. 당시 그 사장은 재정난을 내세우며, 더 유능한 출판사를 찾으소서! 라는 요지의 기별을 해왔었다. 전화기에서 울려온 그의 언사가 어찌나 정중하고 수굿하던지 스타일 구기고 사기 저하됐던 나는 충분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당시의 그 산골 출판사 사장이 바로 나무선 씨다.
“20대 후반에 출판사를 창업, 이후 30여 년 동안 300여 권의 책들을 냈어요. 1년에 한두 권쯤은 베스트셀러에 올랐죠. 그러나 출판이라는 게 남의 뒷바라지나 하는 일이 아닌가, 내 마음은 늘 시골로 향하는데 어쩌자고 서울에 눌러 사는가, 그런 회의가 밀려들더라고요. 그게 귀촌의 단초였어요.”
“황대권 작 ‘야생초 편지’도 기획하셨죠? 몇 부나 찍었죠?”
“100만 부 정도 나갔습니다. 그 밀리언셀러의 파장으로 야생초 바람이 일었죠. 저 개인에게도 큰 행운이었어요. 덕분에 수입을 올려 이곳 산중턱에 너른 터를 장만하고 이주할 수 있었으니까. 출판을 해서 땅을 산다는 게 사실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빈번한 헛발질 뒤에 용케 운이 따랐던 거죠.”
“아까 마음은 늘 시골로 향했다 했어요. 시골의 그 무엇에 끌렸죠?”
“은둔자 성향, 제겐 그런 게 있습니다. 젊어서부터 철학이나 자연, 명상 관련 서적들을 탐독했어요. 니어링 부부가 실현한 ‘조화로운 삶’에, 존재지향적인 사유에 깊이 경도되기도 했죠. 그들의 삶이 부러웠고 그리웠고 꿈꾸었어요. 그렇다면 사람을 지치게 하는 서울을 벗어나 시골의 자연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당연하다 봤어요.”
“사는 일의 희로애락은 시골에서건 도시에서건 마찬가지 아녜요?”
“필생의 프로젝트로 귀촌을 했으나 막상 실현은 어려웠어요. 터를 잡아 집을 짓는 일에서부터 마을 사람들과의 관계 맺기, 물적 토대를 구축하는 일 등등 상처받기 쉬운 난항이 많았어요. 한동안 너무도 힘들었죠. 먹고살아야지, 무아(無我)도 해야지, 벅찼어요.”
“무아? 자아에서 벗어나면 해탈이라죠? 불로 태우고 도끼로 찍어내도 없어지지 않는 게 자아라 하고.”
“자칫 제멋에 취해 가족이나 생활을 외면한 채 뜬구름 잡기에 그치기 쉬운 게 무아 공부죠. 저 역시 거기에서 예외가 아닐지 모르지만, 산중에 살며, 야생의 자연을 경험하며, 리얼하게 몸으로 생태와 부닥치며 삶의 본질적인 가치를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하게 됐어요.”
나무선이라는 이름에 그의 지향이 이미 완연하다. 고요한 ‘나무[木]’를 닮은 ‘선(禪)’으로 날뛰는 마음을 단속하겠다는 의미로 지었단다.
호랑이를 봤다!
마음을 돌보면 눈도 밝아지는가. 나무선 씨의 눈은 남들이 보지 못한 걸 본 눈이다. 호랑이를 보았다는 게 아닌가. 귀촌 직후, 계곡 물가에서였단다.
“폭우가 쏟아진 이튿날 아침이었어요. 천둥처럼 요란한 물소리 들리는 계곡 저편에 호랑이 한 마리가 떠억 앉아 있더라고요. 믿어지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바로 지척이었기에 의심할 여지가 없었어요.”
“햐! 들고양이를 호랑이로 오인한 거 아녜요? 국내의 야생 호랑이는 이미 멸종했다고 알려졌어요.”
“남들은 영양 부실로 헛것을 본 거 아니냐고들 하지만 분명히 호랑이였어요. 황소처럼 커다란 호랑이. 냅다 달아났지만 반갑더라고요. 야생 호랑이가 생존하는 생태계에 외경을 느꼈어요.”
“토속신앙에서 호랑이는 산신령으로 간주되죠. 귀촌 환영 사절단으로 신령이 납시었군요.(웃음)”
“나의 삶은 이제 모험 속으로 들어와 있다! 저는 그렇게 호랑이 출몰의 의미를 해석했어요. 이전과는 다른 적극적이고 충실한 삶을 살라는 통첩으로 여겼어요.”
호랑이라는 전설과의 기묘한 해후를, 그는 삶을 일깨우는 자연의 선물로 간주하는 것 같다. 호랑이뿐일까. 들풀에 얹힌 아침 이슬도, 말매미의 그악스런 사이렌도, 듣고 보는 관점에 따라 무상의 선물이자 위안이자 기적일 수 있다. 나무선 씨는 한때 ‘조화로운 삶’을 구현하기 위한 공동체 운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아내 이효담 씨와 동행, 미국의 인디언 촌락이나 인도의 오르빌 같은 생태마을을 답사하기도 했다. 공동체 운동의 비전을 탐색하기 위해.
“국내외의 공동체를 나름 둘러본 뒤엔 생각이 바뀌었어요. 장단점을 고루 확인하고서였죠. 특히나 저 같은 인물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를 만든다는 건 교만이거나 무익한 도전일 수 있다는 판단을 했어요. 제가 보기보다는 엄청나게 고집이 센 사람입니다. 마음공부라는 걸 해왔지만 때로 문제가 불거져요. 공동체를 꾸렸다가는 자칫 생태근본주의에 매몰된 독불장군으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겠더라고요. 해서, 새로운 걸 만드는 대신, 기존 우리네 마을에 서린 미덕과 문화에 관심을 갖고 움직이는 게 더 소중하다고 봤어요. 마을 노인들의 고단했던 삶에 서린 내공을 배우는 건 더욱 소중한 학습이라 봤고요.”
“쇠약한 노인들을 무시하는 게 현실이죠. 과거 전통사회에선 노인이라는 이유 하나로 죽임을 당하기조차 했어요. 오늘날에도 노인에 대한 푸대접은 비일비재해요. 이는 어쩌면 인간사의 숙명일지도. 노화란 쓸쓸해요.”
“비록 고달픈 인생을 살았더라도 시골 노인들의 기본 태도는 매우 정중합니다. 상대의 성정까지를 헤아려 존중해줘요. 이게 엄청난 내공이죠.”
“마을과 관련해선 어떤 일들을 했죠?”
“예컨대, 이곳 산간 지구 일대에 산재하는 100여 가구 주민들이 동참하는 마을신문을 만들었어요. 계간 신문을 8년째 발행하고 있습니다. 신문을 만들며 저 자신부터 주민들과 긴밀하게 소통할 수 있었고, 외지에서 들어온 귀촌인들과 토착민 사이의 유대도 강화됐어요.”
여한 없는 삶이란?
초여름 산야의 풍광이 싱그럽다. 바람에 설레어 부푸는 숲, 나무 우듬지를 비집고 은빛 비늘처럼 쏟아지는 햇살, 저마다 가창력을 뽐내는 새들의 노래…. ‘터득골 북샵’의 명품은 어쩌면 자연 풍경이다. 나무선 씨 부부가 10년 이상을 공들여 가꾼 집과 정원과 텃밭 역시 빼어나기는 마찬가지. 이 근사한 공간에 무시로 사람들이 찾아들고, 수시로 공연과 이벤트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나무선 씨가 이 산골에 들어와 첫 번째로 한 일은 집짓기였다. 8평짜리 흙집을 손수 지었던 것. 이후 증축을 통해 맵시 있게 규모를 늘렸다. 부부 살림채로 쓰이는 이 집엔 ‘다명헌(多明軒)’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추사(秋史) 김정희가 제주 유배 시절에 쓴 글, 소창다명 사아구좌(小窓多明 使我久坐, ‘작은 창문에 빛이 밝아 나로 하여금 오래 머물게 한다’는 뜻)에서 빌려 쓴 이름이다. 예순 살을 코앞에 두었으니 부질없는 욕망이 잦아들 시절이다. 삶을 한층 진솔하고 겸허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는 나이이지 않겠는가. 이 점에서 나무선 씨는 귀촌으로 절호의 찬스를 포착했다. 그가 추구하는 무아와 무욕을 실현할 수 있는 토대를 일구고 있으니.
“흙집을 지을 때 다산 초당을 염두에 뒀었죠. 삼간 초막이면 산중 살림에 족하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러나 이젠 살림 규모가 크게 늘었어요. 소박한 귀촌생활을 작정했으면서도 서점을 차린 건 어쩌면 모순이죠. 색다른 방향으로 삶이 풀려나가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궁리해왔던 지역문화의 거점 하나를 구축해나가고 있다는 보람과 만족이 커요.”
“산골에서 돈도 벌고, 지역문화에도 이바지하고, 일거양득의 신선한 모델이에요. 극히 내성적이고 조심성 많은 사람으로 보이는 선생에겐 복주머니나 꾀주머니가 장기처럼 붙어 있는 건 아녜요?(웃음)”
“어떤 이들은 가급적 일판을 벌이지 말고 조용히 사는 게 더 좋지 않냐고도 하지만, 일이 없으면 무슨 재미? 일 없이 사노라면 괴팍해지고 피곤해지고 폐쇄적으로 변할 게 빤하지 않겠어요? 자신이 꿈꾸는 삶과 현실을 일치시키는 것, 좋아하는 곳에서 적당한 수입이 가능한 일을 하며 맘 편하게 사는 것, 그게 여한 없을 삶이라 봅니다.”
일로부터의 은퇴란 일을 싫어하는 사람에겐 해방이지만, 일을 좋아하는 사람에겐 감옥이다. 귀촌을 하더라도 공을 쏟을 일 하나는 쥐고 있어야 한다! 나무선 씨의 생각은 그렇다.
나무선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시골에 대한 피상적인 선입견을 완전히 버리자. ❷ 귀촌으로 실현할 수 있는 버킷리스트를 준비하자. ❸ 수입 창출을 위한 일을 갖고자 한다면 신선한 아이템을 발굴하자. 가령 산골 북샵도 유망하다. 500평 정도의 부지에 크지 않은 집을 지어도 무방하다. 서책 구입과 가구 장만에 소요될 비용 조달 여력은 필수다. 책에 관한 안목을 기르고, 도서 유통 구조를 철저하게 이해해야 한다. 고객들은 책만을 사기 위해 산골 북샵을 찾지 않는다. 주변 자연경관을 즐기기 위해 온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❹ 귀촌 현장과 귀촌인들을 사전에 충분히 접하라.
건강 100세를 사는 방법은 다양하다. 식이조절이나 운동, 취미생활을 통해 에너지를 충전하면서 자신의 건강을 유지한다. 그러나 과거 아날로그 시대를 지나 급변하는 미래 테크놀로지를 접하며 살아가는 시니어 세대에게 일상이 스트레스일 수 있다. 생활 속 스트레스를 건강하게 풀어주는 요가와 명상 프로그램을 개발한 ‘홀리스틱힐링협동조합’의 곽승현(51) 대표다. 급변하는 사회를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건강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들어봤다.
삶의 균형을 되찾다
곽승현 대표가 개발·보급하는 홀리스틱 힐링 시스템은 인도 정통의학인 아유르베다를 통합적으로 적용한 프로그램이다. 고대로부터 전해져 오는 요가, 자연요법 등과 함께 균형이 깨진 몸과 마음을 동시에 돌보는 과정이다. 우리 몸을 정화하는 독소 제거 치유과정을 시작으로 올바른 식이요법, 올바른 운동과 호흡, 이완, 감정조절, 및 명상까지 체계적으로 접근한다. 이를 통해 사람들은 쌓여 있는 스트레스와 질병을 완화하고 행복감과 긍정적인 자아를 되찾는다. 몸과 마음의 조화로운 움직임과 균형을 통해 고요해질 때 평온과 행복을 느끼는 것에 방점이 있다. 홀리스틱 힐링의 마지막 단계는 사랑과 봉사로 균형 잡히고 온전한 삶을 추구 한다.
인도에서는 홀리스틱 아쉬람(공동체)이 체계화되어 있다. 곽승현 대표는 홀리스틱요가힐링을 통해 육체적, 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삶의 주체자로서 본질을 찾게 도와주는 힐링 전도다. 이렇게 산지도 벌써 20여 년은 됐다.
“요가는 20대 중반에 접하게 됐습니다. 생활고는 물론이고 미래에 대한 불안함에 학업을 지속해야 할지 갈등을 겪을 때였습니다. 스트레스의 근원을 찾고 해결하고 싶었는데 마침 한 단식원의 광고를 보게 됐죠. 호흡으로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문구가 마음에 들어서 바로 찾아갔어요. 그런데 잠시 배운 요가명상이 저를 사로잡았습니다. 호흡을 통해 몸의 움직임, 조화 등을 느낄 수 있었어요. 요가의 길로 접어든 첫 단추였습니다.”
이후 명상과 수행을 위해 산으로 절로 돌아다니면서 공부를 하던 중, 부인 이선 박사를 만났다고 한다. 당시 부인도 깨달음을 찾아 수행하고 있었다. 부인과 함께하면서 삶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명상과 수행만이 행복한 삶으로 향하는 중요한 단서라는 점에 공감하고 체계적인 요가 수행을 위해 인도 유학길에 올랐다.
“인도 하리다와(Haridwar)에 있는 구랑클 캉그리(Gurukul Kangri) 대학에서 요가를 배웠습니다. 유명한 수행센터란 곳도 다 찾아다녔어요. 네팔, 미얀마, 그리고 스리랑카 등에 있는 유명한 수행센터는 거의 다 찾아다니면서 요가수행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얻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요가의 본질과 다양한 수행 방법을 터득할 수 있었지요.”
곽승현 대표 부부는 오랜 공부와 요가수행을 하는 가운데 정신적·육체적으로 지쳤던 자신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었다. 또한, 긍정적인 자아로 내면의 행복을 느낄 수 있었으며 삶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수행이 함께 하는 삶, 인도에서 배우다
곽승현 대표는 특히 인도 공동 수양체인 아쉬람에 대해 많은 연구를 했다. 이를 통해 인도인의 삶이 요가수행과 함께 체계화돼 정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도인은 일상생활과 요가수행이 어우러진 삶의 주기를 4단계로 나누고 있다. 태어나서부터 25살까지를 제1기 인생이라고 한다. 이때는 공부하는 학습기이다. 제2기를 칭하는 ‘그라스타’는 인생을 뜻하는데 결혼을 해서 가족과 함께 생활하는 시기이다. 이 시기는 결혼과 직업을 통해 가족을 부양하고 돈을 버는 생활이 계속된다. 제3기 인생은 은퇴기로 사회생활을 정리하고 고요한 숲속이나 아쉬람에서 요가와 명상으로 노후생활을 보낸다. 이처럼 인도의 요가 수행을 통해 균형 있고 건강한 삶을 살아간다. 곽승현 대표는 구랑클 캉그리 대학에서 요가철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2000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홀리스틱 요가 힐링 시스템을 개발하여 국내에 처음으로 보급하였다. 원광대학교 디지털대학의 요가학과 교수로 홀리스틱 요가 힐링 시스템 활용법을 가르쳤다.
온전한 인생을 찾아 살다
예측할 수 없는 빠른 사회 변화는 우리 삶을 점점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곽승현 대표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육체적 움직임이 느려진 시니어의 활동을 위축시킬 뿐 아니라 심리적 압박도 느끼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전인적이고 통합적인 홀리스틱 요가 힐링은 시니어뿐만 아니라 균형적인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에게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많은 수행을 통해 배웠습니다. 균형 잡힌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도 깨달았죠. 특히 인도에서 수행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이것이 얼마나 긍정적이고 서로에게 엄청난 에너지를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지도 체험했습니다. 제 건강한 삶이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좋은 것을 나누다 보면 모든 사람이 함께 누릴 수 있게 되겠죠.”
혼자서 건강한 삶을 찾아가기보다는 함께 찾아간다면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 그가 찾아낸 홀리스틱 힐링 시스템이 추구하는 가장 높은 단계가 사랑과 봉사라는 점을 되짚어본다. 인간의 궁극적인 행복이란? 사랑과 봉사로 세상과 함께 나누며 미덕을 실천할 때 비로소 느낄 수 있는 것 아닐까? 새삼 나 자신의 삶을 되돌아본다.
'오름 오름' (박선정 저ㆍ미니멈)
‘제주에서 1년 살아보기’의 저자 박선정 작가가 제주살이 6년 동안 오름을 오르며 정리한 탐방 정보와 노하우를 담은 ‘오름 트레킹 가이드북’이다. 무성한 숲에 가려져 전체를 보기 어려운 오름의 모양을 개성 넘치는 일러스트로 표현한 점이 독특하다. 오름마다 특이사항은 물론 트레킹 순서와 코스, 준비물, 편의시설, 소요시간, 주의점 등을 일러준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몇몇 오름 외에는 초행자가 곧바로 찾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에 저자는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알아낸, 승용차는 물론 대중교통으로도 오름을 찾아갈 수 있는 루트를 제공한다. 특히 노약자도 쉽게 오를 수 있는지, 여성이 혼자 올라도 안전한지 등에 대해서도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당일치기 제주 여행객들을 위한 ‘원 데이 트레킹(1 Day Trekking)’ 코너를 마련해 시간에 알맞게 효율적으로 오름을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한다. 특정 계절, 시간, 분위기 등 여행 시기나 조건에 따라 가볼 만한 오름도 따로 골라 정리했다. 오름 트레킹과 더불어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공간과 이벤트, 서비스 정보도 알차게 실었다. 여행하면 빠질 수 없는 것이 사진. 각 오름의 사진 찍기 좋은 뷰포인트와 최적의 시간까지 알려준다.
'숲은 생각한다' (에두아르도 콘 저ㆍ사월의책)
캐나다 인류학자 에두아르도 콘이 4년간 아마존 숲속에서 생활하며 사색한 결과물을 담아냈다. 저자는 개미핥기나 고무나무 등 언어가 없는 숲의 생물들도 저마다 생각하고 세상을 표상한다고 주장하며 그들만의 생존 전략이 인간의 역사와 어우러지는 풍경을 묘사한다.
'프랑스 여자는 80세에도 사랑을 한다' (노구치 마사코 저ㆍ더퀘스트)
일과 삶에서 ‘나’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프랑스 여성 55명의 우아하고 당당한 라이프 스타일을 보여준다. 온전히 자기 취향대로 살며 자신이 원하는 것에 솔직한 그들은 80세가 넘어서도 설레는 사랑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시 읽는 엄마' (신현림 저ㆍ놀)
“엄마라는 무게에 흔들리고 외로울 때마다 시를 읽으며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고 말하는 신현림 시인이 이 세상 모든 엄마에게 들려주고 싶은 시 38편을 엮었다. 시와 함께 실린 ‘딸의 남자 친구가 온 날’, ‘기쁘고 힘겨운 엄마’ 등의 에세이로 따뜻한 공감을 나눈다.
'간다, 봐라' (법정 저ㆍ김영사)
법정 스님의 임종게와 사유 노트, 그리고 미발표 원고와 지인들의 편지 등을 최초로 공개한다. 자연과 생명, 침묵과 말, 명상, 무소유 등의 주제로 나눠 스님의 노트 속 글과 메모를 그대로 수록했다. 퇴고의 흔적을 간직한 육필 원고에서 짙은 여운을 느낄 수 있다.
노화가 중년에게 무서운 이유는 신체적인 변화가 눈에 보여서가 아니다. 단지 주름이 늘고 흰머리가 늘어서가 아니라, 일상적으로 가능했던 것들이 쉽지 않게 되면서 ‘늙는다’는 공포와 맞닥뜨리게 된다. 더 이상 높은 선반의 물건을 꺼내기 어려워지고, 달려가는 손주를 들어올리기도 버겁다. 숙면 후 아침의 개운한 기상은 젊은 날의 추억처럼 여겨진다. 여성들에게 이런 두려움이 극대화되는 시기가 있다. 바로 ‘갱년기’다. 이 시기를 힘들게 겪어낸 여성들은 한꺼번에 모든 것이 무너지는 기분이 든다고 이야기한다. 피할 수 없는 갱년기를 지혜롭게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한방부인과 전문의인 이윤재(李侖哉·37) 자생한방병원 원장을 통해 들어봤다.
“신수(腎水)가 부족해서 그렇죠.”
이윤재 원장은 한방에서 바라보는 갱년기 증상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양방에서는 여성호르몬 부족에 의한 질환으로 해석하지만, 한방에서는 폐경과 함께 몸의 ‘정기(精氣)’라고도 불리는 신수의 부족이 이러한 증상을 초래하는 것으로 해석한다고.
“한방에서는 신체의 변화가 숫자
7과 연관이 있다고 보는데, 여성의 경우 14(7×2)세에 첫 생리가 시작되고 49(7×7)세에 천수가 다 돼 폐경을 겪게 된다고 하죠. 그런데 최근에는 아이들의 영양상태가 좋아지고 성조숙증도 발생하면서 초경 나이가 점점 어려지고 있습니다. 폐경 시기는 큰 변화가 없거든요. 결국 갖고 태어나는 몸의 정기를 사용해야 하는 기간이 늘어난 셈이니 몸에 무리가 될 수밖에 없어요.”
여성 노화 증상의 ‘종합세트’
이 원장은 여성에게 나타나는 갱년기 증상은 발현되는 기간에 따라 나눌 수 있다고 설명했다. 먼저 갑작스레 나타나는 갱년기 급성 증상이 있다. 얼굴이 붉어지거나 울긋불긋한 반점이 나타나는 안면홍조 질환, 땀이 많이 나는 발한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증상들은 대인관계에도 영향을 준다.
급성과 구분되는 갱년기 아급성 증상은 여성의 생식기와 관련이 깊다. 질 점막이 건조해져 위축되거나, 성관계 시 통증이 발생한다. 또 자꾸 가려운 소양증도 나타난다.
만성 증상은 이와는 또 다르다. 근골격계에 통증이 나타나다 퇴행성관절염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심하면 손가락 관절에도 결절이 나타난다. 골다공증도 주요 만성 증상이다. 기억력 감퇴와 우울증이 나타나다 심해지면 치매로 확대된다.
“이렇게 구분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증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스무 가지가 넘는 증상을 호소하시는 분도 있어요. 또 한두 가지 증상 때문에 병원을 찾았다가 인지하지 못했던 다른 갱년기 증상을 찾아내기도 하죠. 증상을 방치하면 병이 심해집니다. 안면홍조를 제때 치료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에 문제가 생깁니다. 우울증으로 발전하기도 하고요. 관절통을 다스리지 못하면 퇴행성관절염으로 질환이 확대됩니다.”
갱년기 증상이 나타났을 때, 당사자가 겪게 되는 심리적 충격을 어떻게 이겨낼 것인지도 치료의 중요한 과정이라고 이 원장은 말한다. 노화는 자연스러운 현상이고 그 과정을 받아들여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환자는 쉽게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심리적 변화는 화병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간기울결(肝氣鬱結)로 인한 간화(肝火)가 대표적이다. 평생을 참으며 살아온 여성의 쌓인 스트레스가 뭉친 기운을 만들고 간 쪽으로 쌓이면서 갱년기와 함께 증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화가 쌓이면 안면홍조나 발한과 같은, 눈에 보이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참지 못하고 쉽게 화를 내는 심리적 변화를 보이기도 합니다. 손주를 보다가 이 나이까지 왜 애를 봐야 하냐며 느닷없이 화를 내기도 하고, 가족에게 갑자기 전화해 소리를 지르기도 하죠. 실제로 진료실에서는 상담하다 눈물을 쏟는 환자가 비일비재합니다.”
치료 방법 다양, 맞춤치료 필요
양방에서 여성의 갱년기를 치료하는 기본적인 방법은 부족해진 여성호르몬의 보충이다. 그러나 여성호르몬 보충이 쉽지 않을 때가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유방암과 난소암을 유발하는 BRCA 유전자 돌연변이를 부모로 물려받은 경우다. 유방암을 예방하기 위해 가슴 절제를 선택한 할리우드의 여배우 안젤리나 졸리와 같이 유전자 검사결과 변이가 발견돼 암 발병이 우려되거나 가족력이 있을 때 여성호르몬 치료에 주의가 요구된다고 이 원장은 설명한다.
“여성호르몬 보충제 사용에 특별한 관리가 필요할 때는 한방 치료가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한방에선 부족한 여성호르몬을 직접적으로 보충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보다는, 현재의 상태에서 건강을 영위하도록 노력하죠. 즉 갱년기로 인해 발생하는 증상들을 별도로 관리하면서 극복해나갈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질환별로 한약이나 약침, 뜸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증상을 완화시킵니다.”
무작정 이러다 말겠지 하며 증상을 방치했다가는 오래 고생할 수도 있다. 증상이 10년 이상 지속되는 경우도 있다.
활동적인 삶, 갱년기에 도움
치료 방법에 대한 조언을 듣다가 바보 같은 질문을 해봤다. 갱년기를 피할 순 없는 것일까. 당연한 답이 돌아왔다. 노화를 피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는 것이다.
“노화를 피할 수 없는 것처럼 갱년기 역시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가볍게 넘어갈 수 있는 방법들은 몇 가지 있죠. 먼저 갱년기 증상에 대해 스스로 공부하고 예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갱년기를 겪기 전에 발생할 수 있는 질환들에 대해 미리 공부해두면 상황에 처했을 때 겪을 수 있는 심리적 충격을 예방할 수 있어요. 기본적으로 40대 중반 전후면 갱년기가 찾아올 수 있습니다. 이때 노화는 나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두가 겪는 현상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죠.”
갱년기를 극복하려면 육체적으로 ‘액티브 시니어’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이 원장은 말한다. 운동과 활발한 생활 등을 통해 기본 체력을 잘 유지하면 골다공증 등 갱년기 증상의 발병 가능성도 낮아진다. 또 근육량이 많으면 기초대사량이 높아져 갱년기 증상으로 인한 급격한 체중 증가도 예방할 수 있다. 스트레스나 화도 잘 관리해야 한다. 명상, 요가와 같은 활동은 마음에 평화를 가져다주고 체력에도 도움이 된다.
갱년기를 겪는 아내에 대한 남편들의 ‘외조’도 질환 관리에 많은 영향을 주는 요소 중 하나다. 자녀를 떠나보낸 빈 둥지에서 갱년기를 겪는 여성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은 배우자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부여된 역할에 비해 한국 남성들의 기여도는 높지 않다는 것이 이 원장의 설명이다.
“환자들의 상당수는 남편의 이해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 살아왔고, 애들도 무탈하고, 특별히 힘든 상황도 없는데 왜 유난스럽게 구냐고 하죠. 아내가 아파도 그런가보다 하다가, 감정기복이 심해지면 되레 화를 내요. 감싸줘야 한다는 생각은 못하는 것이죠. 이 고비를 지나 노년기로 접어들면 감정기복은 줄어들게 되어 있어요. 계속되는 것이 아니므로 슬기롭게 갱년기를 보내는 지혜가 필요해요. 위기를 잘 넘으면 함께 건강하게 살면서 아름다운 노년을 보낼 수 있어요. 하지만 갱년기를 겪을 때 배우자와 갈등이 깊어지면 회복되기 어려워요.”
태어나기는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필자가 자란 곳은 경남 진해다. 요즘은 행정 구역이 변경되어 과거 진해시에서 마산시, 창원시와 함께 창원시로 합병되어 진해구가 되었다.
군복무를 해군이나 해병대에서 하신 분들은 잘 알겠지만 진해는 군항도시이자 아주 오래된 계획도시, 그리고 벚꽃도시로 유명한 곳이다. 이른 봄만 되면 필자는 진해의 시루바위에서 다시 태어났다는 생각을 저버릴 수가 없다. 표고 653m, 봉우리 높이 10m, 둘레 50m의 크기로 우뚝 솟은 시루바위는 시루처럼 생겼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나 그 바위가 있는 웅산의 이름을 따라 웅산암(곰메바위)으로 불리기도 한다. 시루봉은 옆의 천자봉과 더불어 역사적으로도 유명한 곳이다. 천자봉은 중국의 천자 진나라 황제가 장생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다가 잠시 쉬어갔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근대에는 명성황후가 세자를 책봉하고 세자의 무병장수를 빌기 위해 ‘웅산신당’을 두어 전국의 명산대천을 찾아 빌었는데 이곳도 그중 한 곳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외지인들은 가끔 시루봉(바위)과 천자봉을 혼동해 부르기도 한다.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무렵 어느 봄날이었다. 혼자 산에 올라 시루바위를 보고는 10m 위가 한없이 궁금해서 인적이 드문 곳을 올라가 보기로 했다.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이니 길도 험했다. 아무리 둘러봐도 절벽뿐이어서 바위를 잡고 조심조심 기울기가 약 110도 정도 되는 비탈진 암반을 올라갔다. 젊은 혈기가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도전이었다.
막상 올라가 보니 특별한 것은 없었다. 단지 맑은 날에는 일본의 대마도가 보인다 할 정도로 일본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산이어서 혹시 대마도가 보이나 둘러봤지만 잘 보이지 않았었다. 잠시 진해만을 바라보며 명상에 잠겨 있다가 내려가려고 하니 올라올 때와는 길의 상황이 전혀 달랐다. 내려갈 수 있는 길이 없었던 것이다.
인적이 드물어 소리쳐 구원을 요청할 수도 없고 요즘처럼 핸드폰 같은 것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순간 “아! 여기서 꼼짝없이 굶어 죽게 생겼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왕 굶어 죽게 되었으니 가만히 앉아 죽는 것보다 올라오던 길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더 내려가는 길을 찾아보자 하면서 길을 찾아보기로 했다. 경사진 곳이라 위에서 보니 밑의 바위는 안 보이고 하늘 위에 그냥 솟아 있는 것 같은 느낌밖에 들지 않아 현기증이 일었다. 포기하려다가 다시 탈출을 위한 도전을 해보기로 했다.
솟은 바위를 양손으로 잡고 발을 내리니 몸이 허공에 붕 떴다. 잘못해서 양손에 힘이 빠지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 경사진 곳을 딛고 올라왔으니 철봉하듯 몸을 움직이면 발이 바위 어디엔가 닿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렇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더니 예상대로 발이 바위 끝에 닿았다. 바위를 오를 때처럼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내려왔다.
그때 필자는 다시 세상에 태어난 느낌이 들었다. 진해 시루바위 위에서 다시 태어난 것이다. ‘해병혼’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웅산. 해군이나 해병으로 입대하면 최소 한 번쯤은 오르는 산이다. 웅산의 시루바위 그리고 그 옆에 웅장한 모습의 천자봉이 있는 진해는 나를 키워준 자랑스러운 고향이다. 초등학교 교가가 생각난다. “ 높이 솟은 천자봉 병풍을 삼아 굽이치는 푸른 물결 앞에 맑았네. (중략) 문화의 밝은 빛을 갈고 닦아서 누리를 비취어줄 등불이 되자.”
봄꽃에 설레어 마음에도 꽃물 번진다. 처처에 흐드러진 벚꽃은 절정을 넘어섰다. 꽃잎마다 흩어져 비처럼 내린다. 만개보다 황홀하게 아롱지는, 저 눈부신 낙화! 남도의 끝자락 완도 땅으로 내려가는 내내 벚나무 꽃비에 가슴이 아렸다.
한나절을 달려 내려간 길 끝엔 완도수목원. 칠칠한 나무들, 울울한 숲이 여기에 있다. 사철 푸른 야생의 수해(樹海)다. 천연의 상록 난대림이 산자락을 뒤덮었다. 붉가시나무, 동백나무, 완도호랑가시나무, 구실잣밤나무, 황칠나무, 후박나무, 감탕나무, 녹나무 등 770여 종의 난대성 목·초본과 희귀식물이 자생한다. 환호할 만한 종 다양성과 놀랄 만한 광활한 규모를 과시하며 씨억씨억 거센 숨을 쉬는 삼림이다.
산길로 들어서 초록 숲에 풍덩 빠진다. 숲길을 노니는 발걸음은 노루처럼 가뿐하다. 잡다한 소음과 미세먼지가 들끓는 도시에서의 보행과는 다르다. 인위와 허영이 난무하는 도회의 거리는 개운한 활보를 허용하지 않는다. 고뇌에 사로잡힌 카프카처럼 도시에서 사람들은 흔히 소심한 행보를 하지 않던가. 숲에서는 다르다. 깊은 근원으로 침잠한 숲 사이로 뻗은 오솔길이 발길을 보듬어 유유한 지경으로 인도한다. 숲길을 걷기란 그래서 물이 흐르는 것처럼 자연스럽다. 탈출처럼 자유롭다.
이럴 때 의식은 자명종처럼 깨어나고 오감이 열린다. 온몸으로 말을 걸어오는 숲의 언어에 귀가 민감해진다. 나무를 흔드는 바람소리와 숲속의 공인된 가수인 산새들의 악곡이 귓속으로 스민다. 이것들은 숲과의 협연의 산물이다. 유심히 귀를 기울이는 사람 역시 순간적으로 숲의 식솔이 된다. 물속 같은 적막이나 사무치는 고요마저 숲의 언어다. 이 묵묵한 숲의 좌정 앞에서 번잡한 혀처럼 날름거리던 욕망이 비로소 순해진다. 숲길을 가만히 걷는 일은 그래서 오롯한 순례다. 내밀하게 전개되는, 조촐하되 순수한 향연이다.
완도수목원의 무진장한 상록 숲은 한때 황무지에 가까웠다. 지난 1950년대까지만 해도 남벌과 도벌로 헐벗기어 황량했다. 재질이 조밀해 숯 재료로 널리 알려졌던 붉가시나무와 동백나무 군락은 한결 자심한 수난을 당했다. 수목원 곳곳에 발달한 ‘맹아림(萌芽林)’은 당시의 벌채가 남긴 상흔이자 재생의 현장이다. 맹아림? 밑동이 잘려나간 그루터기에서 새로 돋은 움싹들이 자라난, 여럿의 줄기로 이루어진 나무들로 이루어진 숲을 말한다. 생존의 고역은 사람만의 전유물은 아니다. 나무와 숲도 때로 부당하게 찢기고 스러진다만, 불굴의 인간처럼 용을 써 기어이 회생한다.
숲길에 상큼한 향이 감돈다. 나무들이 내뿜는 피톤치드 향기렷다. 피톤치드는 갖가지 균(菌)들의 내침으로 야기된 상처나 고난을 다스리기 위해 나무가 분비하는 휘발성 물질이다. 아픈 나무가 풍기는 향기, 우리는 그 피톤치드를 마시고 심신을 치유한다. 사람이 나무의 숨을 마시고, 나무가 사람의 숨을 마셔 서로 재미를 본다면 그건 공정거래이겠지. 그러나 과연 그러할까. 주기만 하고 받는 게 없음에도 마냥 태연한 게 숲의 천성이다. 나무도 숲도, 사람과 멀면 멀수록 안전하고 온전하다. 사람의 속세는 아수라장. 나무들의 마을, 숲 안의 생명들만 격의 없이 어울려 자애롭다.
근원을 헤아리자면 나무와 사람은 다를 게 없다. 나무의 몸에 흐르는 수액과 사람의 혈관을 달리는 피가 서로 무엇으로 다르단 말인가. 나무를 남으로 알았던 시절엔 꽃이 피건, 무참히 낙엽 지건, 폭설에 가지가 우두둑 부러지건, 사시사철 보기에 좋았다. 나무가 남이 아님을 알고 난 뒤로는 꽃 피우는 진통에, 낙엽 떨구는 우수에, 겨울나기의 고역에 한결 마음이 쓰였다. 내 안의 나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나무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나무들의 도가니를, 숲길을, 느릿느릿 천천히 걷는 행위란, 그렇기에 가상한 명상이자 성찰에 가깝다.
완도 앞바다를 건너온 바람일까. 하오의 숲은 세찬 바람을 품으며 한껏 부풀어 오른다. 등을 미는 바람 따라 들어선 ‘푸른 까끔길’은 어둑한 숲길이다. 기차게 무성한 동백나무 군락이 하늘을 가려서. 태초 이전처럼 심원한 적막에 휩싸인 동백 숲은 그러나 밝다. 순결한 몸을 붉게 연 동백꽃들이 초롱처럼 환해서다. 매달린 꽃도, 통째 떨어져 뒹구는 꽃도 성(聖)의 이미지로 다가와 내 안의 진흙탕을 헹군다. 향화(香火) 아니면 촛불 보살이다, 저 4월의 동백꽃!
탐방 Tip
완도수목원은 2000여 ha(약 600만 평)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난대림 자생지로 공립수목원이다. 숲길의 총길이는 약 94km. 한나절을 머물며 숲길 걷기와 삼림욕을 즐기기에 적격이다. 산림전시관, 아열대온실, 방향식물원, 수생식물원 탐방도 즐겁다. 개원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애초부터 걷기와 가까울 수밖에 없었다. ‘고비’라는 말과 맞닿아 있던 삶. 다양한 운동 방법이 세상에 넘쳐나지만 걷는 게 그에게는 최적, 최상, 최고의 선택이었을 게다. 극복을 위한 아주 원초적 접근 방법. 한 발짝 한 발짝 내디뎌 무조건 길을 나선다. 걷는다. 여행한다. 궁극의 선택 안에서 자유를 찾고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느낌은 어떤 것일까?
“내가 목소리만 좋았으면 배우가 됐을 거예요!(웃음)”
사진을 찍는 동안 오십 넘은 중년의 얼굴이 어린 소년처럼 한껏 생기가 넘친다. 모델로서 이런 포토제닉 또한 오랜만이다. 기본적으로 재밌고 대화하는 상대를 편하게 해준다. 자신에 대한 사랑까지 충만하다. 삶의 중요한 부분이라는 걷기에 여행 이야기가 더해지니 함께하는 시간이 즐겁다. 최근 ‘마흔 넘어 걷기 여행’이라는 책을 낸 걷기 여행 전문가(?)이자 강동경희대학교병원 한방신경정신과 김종우(金鍾佑·53) 교수를 만났다. 대한민국은 물론이고 세계의 걷기 성지까지 두루두루 섭렵했다.
“제 나름대로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걷기 여행에 관한 책을 쓰게 됐습니다. 제 삶의 철학 중 하나죠. 여행을 가더라도 좀 걷자! 대학생인 딸도 그렇고 저보다 어린 직장인, 병원 내 레지던트들이 들려주는 여행 이야기도 그렇고. 좀처럼 재미가 없어요. 안타까워요. 어디를 가도 장소를 점처럼 찍어서 가요. 마치 사진작가처럼, 먹는 것을 찾아 떠난 셰프처럼 그렇게요.”
선을 연결해 영토를 확장하듯 면을 만들고 입체적인 그림을 그려가는 게 걷기 여행이다. 돈도 적게 들고 좋은 것도 많이 볼 수 있다. 여행자 자신의 관심사를 명확히 알게 해주기 때문에 걷기 여행이 매력적이라고..
“걷기는 인간의 본능적 행동이자 의도하는 바를 이루게 하는 행위이죠. 여행은 반복된 일상에서 벗어나서 진짜 나를 찾아가는 작업이라고 정의하고 싶어요. 걷기와 여행이 결합하면 떠나는 순간부터 마칠 때까지 여정 속에 푹 빠져서 자기 자신을 찾고 새로운 많은 것을 발견할 수 있게 됩니다.”
걷기에 의사의 해석이 더해지다
걷기 여행에 관해 이야기하기 전에 걷기가 뭔지 들어보기로 했다. 걷기에는 운동이라는 요소와 철학이라는 요소가 맞물려 있다고 김종우 교수는 말한다. 걷기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육체적인 성취뿐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걸으면서 여행하고, 세상을 보고, 사람을 만나고, 문화를 가까이서 느낄 수 있다. 이 모든 것을 포함할 수 있는 단순하지만 놀라운 행위가 걷기다.
“한 일간지에서 걷기 두 시간 해봤자 운동 효과 제로라는 제목의 기사를 본 적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요즘 쓰고 있는 문화일보 고정 칼럼에 ‘걷기는 굉장히 중요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숭고한 철학이 담긴 활동’이라는 글을 쓰기도 했습니다. 걷기를 그냥 운동이라고만 생각하면 그건 걷기가 아니죠.”
스트레스와 화병 전문가인 김종우 교수는 오랜 기간 한 월간지에서 주최하는 건강캠프 등에서 상담과 주치의를 맡아왔다. 한의학을 하다 보니 스트레스 치료의 가장 좋은 조건이 자연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호소하는 사람들 대부분 활동량이 많이 떨어집니다. 가장 큰 해결책이 어떻게 하면 활동량을 늘리느냐 하는 점이죠.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자연만 한 좋은 환경은 없죠. 물론 자연에서 어떤 방법을 쓸 것인가도 중요하겠지만 조용히 걷고 사색하는 것만으로도 심적 치유를 느낄 수 있습니다.”
걷기 여행이 주는 매력을 말하다
치유 프로그램이나 트레킹 스태프로 참여할 때마다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참여자들과 토론을 하고 강의도 한다. 선정된 주제에 관련한 책들을 먼저 많이 읽어두고 그 느낌을 걸으면서 계속 확인하는 과정을 거친다고 했다.
“스태프로 참여할 때는 걷기와 관련해 훨씬 더 많은 철학적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걷기 여행의 콘셉트을 제대로 가지고 가고 싶어서요.”
문득 걷기 여행을 예찬하는 김종우 교수가 이렇게 스스로 준비해 참가자들과 철학적 의미를 찾아 떠나는 여행이 부담 되지 않는지 물었다. 예전부터 자신도 비슷한 방식으로 여행을 해왔기 때문에 괜찮다고 했다.
“그리고 나이 오십이 넘으면 내가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얻은 것을 전해야죠. 선생의 즐거움은 가르침을 주는 것이잖아요. 가르침의 즐거움이 없으면 선생을 할 필요가 없죠.(웃음)”
김종우 교수는 일반인과 함께 참여하는 걷기 프로그램을 즐긴다.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걷고 명상하는 일을 반복하지만 행복한 시간이라고 했다.
“저는 정말 굉장한 스태프예요.(웃음) 아침 6시부터 명상이나 새벽 산책을 해요. 이때는 주로 육칠십대 분들이 참여합니다. 그리고 두 시간 걷죠. 아침식사를 하고 한나절을 걷고 점심을 먹고 또 걸어요. 저녁식사 후에는 허리나 무릎에 침을 놔줘요. 물집도 다 따주고요. 그러고 나서 오후 8시, 9시쯤 되면 밤 산책을 나가요. 그때는 사오십대가 많이 가세요. 대신 이 사람들은 다음 날 새벽에 절대 안 나와요. 저는 다시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걷죠. 풀타임으로요.(웃음)”
그렇다면 하루 중 가장 걷기 좋은 시간은 언제일까? 김종우 교수는 이른 아침 통이 트기 시작할 때를 꼽았다. 도시건 자연이건 가장 근본적인 원초적 에너지를 만날 수 있는 시간이 바로 새벽이라는 것이다.
“가장 큰 접점은 해 뜰 때거든요. 여명이 딱 깃들 때 도시와 자연은 정말 달라요. 자연은 특히 이탈리아의 돌로미티 같은 곳에 가면 지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요. 새벽에는 그 도시의 풋풋함이 느껴집니다. 자연의 기운을 그대로 내 몸에 받아들이는 것이 명상인데 새벽에는 장애 요소들이 없잖아요. 새벽 산책은 도시건 자연이건 각성, 깨달음을 느낄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에요. 만약 도시여행이라면 해가 뜨고 나서 호텔로 돌아가기 전에 카페에 들러 에스프레소와 크루아상 하나 딱 먹으면 최고죠. 그리고 새벽에 걸으면 두 배는 더 여행할 수 있고요.”
모두가 말린 히말라야에 오르다
걷기 프로그램 주치의로 활동하다 급기야 히말라야 트레킹에까지 참여하게 됐다. 히말라야는 김종우 교수가 가서는 안 될 장소였다.
“저는 세 살, 일곱 살 때 심장병으로 수술을 받았습니다. 중·고등학교 때는 뛰지를 못하니까 체육시간에 맨날 낙오됐어요. 30대 중반에 부정맥 증상이 나타나서 반복적으로 응급실에 갔었고 중환자실에도 들어갔다 왔고요. 그런 저에게 히말라야가 다가왔습니다. 무조건 간 거죠.”
이런 제안이 없으면 언제 또 히말라야에 가보나 생각했다. 심장병 주치의가 말렸지만, 비아그라를 처방받아 네팔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아무 생각 없이 말이다.
“도보 코스도 굉장히 좋았고 마지막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모든 것이 너무 좋았어요. 1000m에서 2000m, 3000m 갈 때 힘들어지는데 산은 올라갈수록 에너지가 생겨요. 반복적인 리듬으로 계속 가다 보면 걷는 게 쉬워지거든요. 트레킹을 아주 재밌고 멋지게 다녀왔죠.”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사지 보행을 하면서 힘들게 올라갔다는 고백(?)을 받아냈다. 그 후로 스페인 순례자의 길인 산티아고를 비롯해 이탈리아 아말피 해안도로와 터키의 리키안 웨이 등 세계 유수의 트레킹 코스를 다녀왔다. 그렇게 걸어 다니면서 꼭 지키는 법칙이 있는데 밤 12시에는 반드시 잔다는 것.
“일과를 마치고 나면 마을 사람들이 다니는 선술집에 가요. 맥주 한 병 혹은 와인 두 잔이 딱 적당하죠. 그리고 함께 걸었던 사람들과 여행 이야기를 해요. 사람들이 똑같은 길을 온종일 걸었다고 칩시다. 그럼 다 똑같은 거만 볼까요? 얘기를 하다 보면 훨씬 더 다양한 느낌이 와요. 그러고는 밤 12시에 취침에 들어가는 거죠.”
가족과 함께 나서는 길
꼭 프로그램을 통해 걷기 여행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걷기 여행 조기교육을 받은 대학생인 아이들과 아내가 함께 할 때도 있다. 작년에는 호주의 그레이트 오션 워크를, 올해는 일본 순례자의 길인 오헨로에 다녀왔다.
“그레이트 오션 워크는 100km인데 3일 동안 60km를 걸었습니다. 어렸을 때도 아이들이 배낭 메고 10km, 20km 걸었거든요. 일본 시코쿠에 1400km의 오헨로 길이 있어요. 88개의 절을 지나는 순례길이죠. 한 번 갔을 때 다 걸으려면 45일은 걸립니다. 저는 직업도 있고 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딱 10년 계획을 세웠어요. 1년에 일주일 정도 120km만 걷자. 아내하고 아이들 다 데리고 갔어요. 그런데 기특하게도 우리 애들은 걷자고 하면 걸어요.”
물론 가족들과 가면 타협점을 찾아야 한다. 계속 걷기보다는 도시 여행도 한다. 오헨로 길 여행 때는 이틀은 걷고 이틀 노는 방식으로 가족들과 시간을 보냈다. 다음 달에도 오헨로 길을 가는데 아내와 6일 내내 걷기로 했다.
“아내가 날 좋아하니까요.(웃음) 나 혼자 즐기는 게 억울해서 가는 거겠죠. 그런데 아내가 대단한 것이 10년 동안 그 길을 걸을 계획이라니까 일본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어요. 떠날 때마다 제안하겠지만 아마도 아내랑 함께 걷게 될 거 같아요.”
생사를 넘나드는 삶 속에서 얻은 깨달음
“언제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살면서 네 번의 전신마취를 했다. 그때 깨달았다. 수술대에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굴곡진 길 또한 쉼 없이 걸었다. 명상하고 마음을 다잡고 하는 건 벌써 오래전에 끝냈다는 김종우 교수.
“삶에 대해 골똘히 생각해봤자 달라지지 않아요. 문득 떠오르는 생각 속에서 ‘내가 이렇게 살아왔구나!’ 하고 한두 번 씩 깨달으면 됩니다. 내면의 뭘 찾겠다고 해봤자 다 내 삶이거든요.(웃음)”
올 초에도 몇 번이나 힘든 일들을 겪었다. 1월에 맹장염이 복막염으로 번졌다. 수술 도중에 담석이 발견됐지만 곧바로 제거하지 못하고 다음으로 미뤄야 했다. 심장이 약해 전신마취가 쉽지 않았던 것. 결국 일본 오헨로 길 여행을 다녀온 후에 담석 제거를 했다.
“간단한 수술이기는 한데 일본 트레킹 가서 아이들한테 그랬어요. 아빠는 언제 갈지 모른다고요. 너희들 대학교까지 보내고 잘 키워놨으니까 언제든 혼자 살 수 있겠다고 말했죠. 물론 술 먹으면서 잘 풀어서 대화했습니다. 우리가 걷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자연과 교감을 하는 것이죠. 건강한 삶을 추구하지만, 또 언제든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니까요. 자연의 이치 같은.”
가보고 싶은 길이 있냐고 물었다. 어디를 가도 좋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학회 때문에 미국 미니애폴리스에 갔을 때도 3시간씩 걸었어요. 어디가 중요한 것이 아니죠. 걸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좋습니다. 적당한 장소에 에스프레소와 크루와상이 있으면 정말 끝내주겠죠.”
성인이나 현자들이 하나같이 사막이나 황야를 찾아간 것은 그곳이 ‘비어 있는 곳’이기 때문이라는 글을 본 적이 있다. 비어 있지 않으면 신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 많은 사람이 해오는 질문 중 하나는 가봤던 여행지 중 한 곳만 추천한다면 어디를 꼽겠느냐는 것이다. 장소마다 느낌이 다른데 그런 데가 어디 있냐며 웃어넘겼지만 결국 꼽은 곳은 모로코였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장 진기한 것들로 가득한 곳. 정비된 수도 라바트와 천년 미로의 도시 페스, ‘본 아이덴티티’를 비롯해 온갖 영화의 배경이 된 다닥다닥 붙은 하얀 집들이 있는 항구도시 탕헤르, 이름만 들어도 노래가 흥얼거려지는 낭만 가득한 카사블랑카도 좋지만 역시 모로코 여행의 백미는 세계에서 가장 큰 야시장이 열리는 마라케시와 별이 쏟아지는 사하라 사막의 야영이라 하겠다. 아침에 일어나면 입안에서 모래가 서걱대고 며칠간 제대로 씻을 수도 없지만 밤이 되면 500만 개, 아니 5000만 개의 별을 이불 삼아 잘 수 있는 곳. 사하라 사막의 하룻밤은 세상 어느 5성급 호텔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환상적이다.
모로코의 심장, 마라케시
카사블랑카를 지나 기차를 타고 모로코의 심장이라 불리는 마라케시(Marrakesh)로 간다. 밤이면 세상에서 가장 큰 포장마차촌이 펼쳐지는 제마엘프나(Djemaa el-Fna) 광장과 미로로 된 장터 수크(souq)가 있는 곳. 가게마다 손님을 불러 세우고 어느 나라에서 왔냐, 안 사도 좋으니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말을 걸지만 다른 곳에서라면 몰라도 이곳에선 귀찮지 않다. 모로코 사람들 특유의 유머와 밝음 때문이다.
이곳에선 반드시 흥정을 해야 한다. 함께 여행한 유럽 친구들은 평소엔 콧대 높게 굴다가도 수크에 갈 때면 한껏 낮은 자세로 함께 가줄 것을 청했는데 그들에겐 흥정 문화가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일단 80%는 후려치고 들어가며 흥정하는 내 모습을 보며 눈이 휘둥그레진다. 난 마치 묘기라도 부린 듯 으쓱해진다. 그들은 왜 정찰제가 아니냐고 투덜대지만 이런 맛이 있어야 장터이지~
광장이 내려다보이는 노천카페에 앉아 민트차를 마신다. 제대로 씻지 않은 민트 잎에 뜨거운 물만 부었는지 흙이 우적우적 씹힌다. 포장마차가 열리기 전 낮의 빈 광장에선 세상 어디서도 보기 힘든 진기한 묘기를 볼 수 있다. 젤라바(모로코 전통의상)를 입고 춤을 추는 마라케시의 명물 물장수를 비롯해서 뱀 부리는 사람, 약 파는 사람, 헤나 타투를 하는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수백만 명이 들끓는 광장을 보고 있으면 마치 알라딘의 요술 램프를 보는 것 같다. 저녁 무렵이 되니 목욕탕도 아닌데 거대한 광장에 일제히 연기가 피어오른다. 낮 동안 비어 있던 광장이 거대한 포장마차촌으로 변신하는 순간이다. 다닥다닥 붙은 포장마차에서 타진, 하리라, 쿠스쿠스, 케밥, 에스카르고 등 갖가지 산해진미에 취해본다. 현실인지 환상인지 헷갈리는 동안 밤이 깊어간다.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 사막 여행이 시작되는 므하미드로!
마라케시에서 뭉친 일행은 미니버스를 타고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 사막 캠프가 있는 므하미드(M’hamid)로 향했다. 베르베르족들의 터전이기도 한 므하미드 사막 캠프의 숙소는 진흙으로 된 카스바다. 카스바라니? 가요에서나 듣던 카스바가 정말 존재한다는 말인가? ‘카스바(casbah)’는 ‘요새’라는 뜻으로 주로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한 이슬람 도시의 방어를 위해 시가지의 일부 또는 그 외곽에 세워지는 성을 말한다. 붉은 사막 한가운데 미로처럼 붙어 있는 성안에 있는 집에서 민트차를 마셨다. 므하미드엔 사막 캠프가 여러 개 있다. 혼자서 온 여행객도 이곳에서 사막 투어를 예약하면 안내받을 수 있긴 하지만, 그럴 경우 차 한 대와 부대비용을 혼자서 다 감당하거나 아니면 사람들이 모일 때까지 기다려야 하는 불편이 있다. 사막 투어는 혹시 모를 위험도 있어 혼자 하는 것보다는 여러 명이 함께하는 것이 재미도 있고 비용도 절약할 수 있다. 사막으로 들어가기 위해 3대의 지프차에 나눠 타고 자동차 경주대회인 다카르 랠리가 열리는 길을 따라 에르그 시가가(Erg Chigaga)로 들어갔다. 열린 창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용광로처럼 뜨겁다. 모로칸들은 머리엔 터번을 쓰고 젤라바라 부르는 긴 가운 같은 것을 입는데, 패션이라기보다는 이곳의 기후에 최적화된 의상이다. 어느 나라의 패션이든 그렇게 입고 다니는 이유가 다 있다. 사막에서 하는 스카프는 장식용이 아닌 것이다. 모래바람을 막아주고, 살을 몽땅 태워버릴 듯한 50℃의 태양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해주는 필수품 중의 필수품이다.
사막 중의 사막, 사하라!
사막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붉은 모래사막을 떠올리지만 흰색과 핑크색의 소금사막부터 잡초가 자라는 사비나 사막, 이집트의 흑사막과 백사막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의 사막이 있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하는 무수한 사막 중 사하라(Sahara)만 한 게 있을까. ‘사흐라(Sahra, 불모지)’라는 이름에서 유래한 사하라는 사막 중 가장 규모가 큰 사막으로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를 비롯해 북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들에 걸쳐 있다. 바람이 부는 대로 끝없이 굴곡을 달리하는 사하라의 듄(Dune, 모래언덕)은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사막의 이미지는 바로 사하라다. 낮 동안 달궈진 사막은 걸어 다니기가 힘들지만 이른 아침의 사막은 밤 동안 식어 맨발로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이때 발끝에 느껴지는 시원한 감촉은 두고두고 기억될 만큼 감미롭다. 인간의 기억 중 가장 오래가는 감각이 촉각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가 된다. 해가 지자 사막은 변화무쌍하게 변했고 곧 밤이 찾아왔다. 모로코 전통의상 젤라바를 두른 사막 캠프 주인 하산과 운전기사는 음악을 크게 틀더니 “밥 먹으러들 내려와~” 하며 손짓했다. 언제나 유쾌한 모로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 짓게 하는 매력덩어리들이다.
별이 쏟아지는 사막에서 즐기는 야영
사막 야영을 갈 때는 운전사와 요리사가 함께 간다. 일행이 사막을 보며 광분하는 동안 그들은 텐트를 치고, 저녁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한다. 사하라 사막의 밤, 전갈이 있다 해서 높은 매트리스를 깔았다. 무수한 별이 쏟아지는 하늘이 지붕이다. 새벽 무렵 사막을 덮어버릴 듯 쏟아져 내리던 별들. 그 향연을 잊을 수 없다. 낮 동안 뜨겁게 달궈졌던 모래 위에 발을 얹어본다.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어 밤새 식어버린 곱디고운 사하라 사막의 모래 위를 맨발로 걸어 아름다운 듄에 호젓하게 올라본다. 최고의 명상이란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고요함 속에서 붉은색 모래 평원을 보니 시간이 그대로 멈춰버린 듯하다. 가늘고 긴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간질인다.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달콤한 오르가슴이다. 겹겹이 쌓인 산맥처럼 듄과 듄 사이를 너머 시야를 넓히니 멀리서 부지런한 이탈리아 친구가 벌써 산책 중이다. 모래 위에서 잠을 자던 운전기사 모하메드와 요리사 알리도 어느새 일어나 메카를 향해 절을 올리고 있다.
검은 옷의 카스바 여인!
사막을 나와 낙타를 타고 카스바 마을을 지나는데 단체로 어디를 다녀오는지 검은 옷을 입은 카스바 여인들이 지나간다. “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알라의 평화를)!” 하고 인사를 하니 “봉주르~” 하고 답한다. 모로코, 알제리, 튀니지 등은 오랫동안 프랑스 식민지였던 탓에 프랑스어를 공용어처럼 사용한다. 프랑스 사람들은 모로코의 아름다운 항구도시 에사우이라 등지에 별장을 사두고 바캉스 시즌이 오면 차를 몰고 온 가족이 내려와 한 달간 머물다 돌아가곤 한다. 사막에서 돌아온 밤, 숙소에서 생존을 축하하며(?) 하산이 열어준 모로칸식 전통공연을 관람했다. 마치 현실의 시간이 아닌 듯 몽롱했다. “별밤에 더워서 잠도 안 오는데, 이렇게 공연을 보며 놀지 뭐.” 멋쟁이 프랑스 언니 오빠는 흥에 겨운 듯 덩실덩실 춤을 춘다. 그렇게 아름다운 밤이 꿈결처럼 흘러갔다.
Travel tips
■항공편
인천공항에서 카사블랑카까지 직항이 있으며, 여기서 기차로 이동하면 된다.
■ 추천 숙소 및 카페/ Hotel & Guest House
Marrakech 추천숙소: Hotel Ryad Mogador(tel: 024-43-8646)
Earth cafe website: www.earthcafemarrakech.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