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과 가정을 함께 꾸려나가는 맞벌이 주부는 슈퍼우먼이 아닌 한 힘이 든다. 게다가 명절날 시댁 가서 이런저런 일을 거들고 집에 오면 녹초가 다 되니 무슨 핑계 거리라도 만들어 시댁에 안 가거나 음식 장만에 열외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만도 하다. 일도 해본 사람이 한다고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곱게만 자라 시집 온 대부분 며느리들이 명절증후군을 느낄 만도 하다. 명절음식은 가짓수도 많고 양도 많다. 잘못했다고 야단맞을 까봐 겁도난다. 심지어 명절 후유증으로 이혼하는 사례도 있다하니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지난 추석때 힘든 시댁 일을 피하기 위해 가짜로 아픈 척 깁스를 하는 며느리가 늘었다고 한다. 방송에서도 가짜깁스 판매업체에서 나와서 하는 말이 “(매출이) 한 100%정도 올랐다고 보시면 돼요. 명절 앞두고 가사노동이나 개인적인 핑계거리가 없어서 필요하신 분들”이라고 한다. 물론 연출용 깁스가 며느리만 애용하는 것이 아니라 영화나 연극에 소품으로도 쓰이고 결근(결석)이나 조퇴용으로도 사용하니 전부 명절 때문에 늘어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차례나 제사음식을 간소화하는 음식문화 혁명이 필요하다. 조상에 대한 정성이라고 하여 한 상 그득 그득 쌍아 올리고 겨울에 수박을 다 올린다. 주부들의 말을 빌리면 ‘그래도 명절인데’ 초라한 음식상은 친척들 눈치가 보이고 ‘그래도 조상님 제사상인데’ 정성스럽게 최고급품을 준비해야지, 하는 유교적 효의 문화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어 간단히 하기도 어렵다. 예절과 관련한 음식문하는 주부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유림이나 국가에서도 물꼬를 터주고 각 가정에서도 열린 마음으로 가족회의를 열어 원만하게 해결하였으면 한다.
명절 때 남은 음식처치에 집집마다 골머리를 앓고 있고 명절 후에는 각 방송사에서 남은 음식 조리법이 어김없이 방영된다. 음식물 쓰레기로 쓰레기 하치장이 몸살을 앓을 정도로 넘쳐난다. 사회 지도층 인사부터 명문가에서부터 달라진 시대상을 반영하여 차례상, 제사상을 간소화 하는데 앞장서고 각종 언론에서도 이를 널리 홍보하면 차츰차츰 줄어들지 않을까 생각된다.
연출용 깁스를 사용하는 일이 비록 일부의 일이라고는 하나 이런 세태까지 등장한 것은 집안일을 분담하지 않는 낡은 가부장적 문화와 어떻게든 과중한 책임에서 벗어나보려는 ‘이기주의’의 ‘잘못된 만남’이라는 분석이 가능하다. 가족회의를 통해 음식준비를 줄이고 음식 장만에 가족 모두 역할분담을 새롭게 만들어 즐거운 명절, 진심으로 조상을 섬기는 제사상 차림이 되었으면 한다.
서대문화신극장이 청춘극장으로
종로허리우드극장이 실버극장과 낭만극장으로 재개관했다.
벌써 수많은 사람이 다녀갔다.
주중과 주말의 개념이 없는 대부분 은퇴한 어르신들이 오시는
실버영화관을 하루에 몇 차례 흘러간 국내외 유명영화를 상영하고 있었고,
노래와 댄스 등의 예전 리사이틀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던 공연은
청춘극장은 토요일에 낭만극장은 일요일에 진행되고 있었다.
오드리헵번,마리린몬로,클라크케이블,제임스딘등이 나오는 영화의
포스터가 정겹게 입구에 걸려있었다.
특히 실버극장은 인사동거리 근처라 구경도 하다가 저렴한 식사도 근처에 많이 파는
식당이 있어서 지인이나 친구, 자매나 형제,부부도 함께 문화생활을 하는 분들이
많았다.
비교적 영화관로비와 매표소근처도 앉을 곳 쉴곳도 많고 환하여 마음이 조금 가볍게
돌아왔다. 명절 때는 유명연예인이 나오는 공연도 하고 가끔 감독에 대해 연구하려는
젊은이들도 오기도 한다.
2>한국영상자료원
www.koreafilm.or.kr
일주일에 몇 차례 영화를 상영한다.
위치는 상암동 mbc바로 앞에 있다.
인터넷예매의 경우는 다음과 같이 수수료가 있고 그 외 당일발권은 무료이다.
신용카드 결제 수수료
1매 당 500원 (신용카드의 경우 1,000원 이상 소액결제가 가능하다.)
휴대전화 결제 수수료
1매 당 1,000원
주중주말 모두 상영하지만 월요일은 휴관입니다.
하루에 영화길이에 따라 시간이 약간 차이는 나지만 4번정도 상영한다.
영화박물관도 상영관과 함께 같은 건물에 있다.
어린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모두 입장객이 다양하다.
독립영화를 보여주기도 하고, 감독특별전, 영화배우특별전도 하는 곳
대형 마트의 범람. 깨끗한 포장용기에 담긴 식재료, 말끔한 동선, 넓은 주차장에 포인트 적립까지 모든 것이 고객에게 맞춰져 있는 곳이 차고 넘치고 있다. 이는 재래시장의 규모를 줄이거나 사라지게 만들었고 찾아가는 서비스마냥 골목으로, 집 앞으로 다가왔다. 편해지긴 했지만 뭔가 부족하다. 바로 사람 냄새, 그리고 다양함을 선택할 권리다. 는 불필요하게 쉽고 간편해진 장보기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킨 장터 두 곳을 2회에 걸쳐 둘러보기로 한다.
글·사진 권지현 기자 9090ji@etoday.co.kr
9월 11일, 추석 명절을 앞둔 서울 종로구 동숭동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 아침부터 북적북적 사람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뜨거웠던 여름, 잠시 쉬어가던 도시형 농부 시장 ‘마르쉐@(엣)’이 다시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추석 연휴를 맞아 알 굵고 맛도 좋은 유기농, 친환경 사과와 귤이 산지에서 농부와 함께 상경했다. 다양한 농법으로 기른 착한 먹거리가 마르쉐@ 안을 가득 채워 그 어느 때보다 풍성해 보였다. 수·공예품, 도자기 등 시중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아기자기한 물건들도 이곳에서는 한눈에 차고 넘쳤다. 사람들의 웃음이 넘쳐나고 시끌시끌 친구와의 인사도 길어진다. 사는 사람은 생산자의 얼굴을 보며 대화하기에 더욱 믿음이 간다. 이 때문에 마르쉐@ 이용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중. 누구든지 기꺼이 좋은 마음으로 교류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서울 도시 장터의 대표선수 마르쉐@이다.
마르쉐@은 4년 전인 2012년 10월 대학로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한 달에 두 번(두 번째 일요일, 네 번째 토요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과 중구 명동의 ‘명동성당 1898 광장’ 등지에서 장이 선다. 마르쉐@은 현재 마르쉐 친구들을 이끌고 있는 이보은(李保垠·48)씨가 옥상 텃밭을 일구던 중 자연주의 식당 수카라를 운영하는 김수향씨, 다양한 농부와 요리사, 예술가와 함께 만들었다. 마르쉐@의 모든 먹거리에는 슬로푸드 정신이 담겨 있다.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 시마무라 나쓰가 에서 ‘슬로푸드란 입으로 들어오는 음식을 통해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천천히 되묻는 작업이다’라고 한말과 마르쉐@의 생각은 많이 닿아있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만나 직접 거래하는 시장, 그래서 소비자의 질문도 생산자의 대답도 사뭇 진지하다. “살 거면 사지 말이 많냐”는 식의 말다툼을 찾아볼 수 없는 것도 마르쉐@의 매력이다.
매회 평균 참가하는 생산자(혹은 판매자)는 60명 정도다. 이중 농부집단은 30개 정도이고 전국 농부 200여 명의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다. 서울 경기권의 도시 농부와 전국의 귀농 귀촌인들이 활동 중이다. 건강하고 맑은 마음이 모여 마르쉐@을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꾸미고 있다.
귤이랑 사과랑 싣고 마르쉐@으로 고고~
경북 영주에서 유기농 사과를 재배하는 윤건(尹健·52)씨. 20년 동안 마음의 준비를 하고 6년 전 귀농해 지금은 서울에 있는 가족과 떨어져 살고 있다. 서울에서도 10년 정도 도시 농업을 했고 생활협동조합 활동을 꾸준히 했다고. 유기농 사과 재배를 위해 영주에서도 산꼭대기에 자리 잡아 사과 농사를 짓고 있다. 마르쉐@에는 사과를 팔러 오는 것 외에도 가족과 친구들 만나는 재미에 빠지지 않고 온다.
윤순자(尹順子·53)씨는 제주에서 갓 나온 친환경 하우스 감귤과 한라봉잼을 가지고 서울을 찾아왔다. 추석을 맞아 제주에서 올라온 알알이 큰 하우스 감귤. 얇은 초록색 귤껍질을 까면 달콤한 과즙이 시원하게 터진다. 거의 매회 마르쉐@에 참여하는 윤순자씨. 10월에는 달콤함이 예술인 레드키위를 들고 올 예정이다.
홍대 도시텃밭 자란다는 4년 전에 마르쉐@서울역으로 시범운영했을 때부터 참여했다. 이곳에서 잘 되는 것을 바라는 게 아니라 꾸준히 나오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홍대입구 카톨릭회관 옥상과 합정동, 상암동 비빌기지 상자 텃밭도 운영하고 있다. 도시 텃밭에서 자란 농작물을 이용해 페스토 등 가공품을 만들어 마르쉐@에서 판매한다. 10월에는 생강을 수확해 시럽을 만들 계획이다.
※마르쉐@ 어떻게 읽죠? 마르쉐(marche)는 프랑스어로 장터라는 뜻입니다. 거기에 ‘~에서’를 의미하는 영어 전치사 @(at)을 사용한 것이죠. ‘마르쉐@대학로’는 ‘대학로에서 열리는 장터’라는 뜻이고, ‘마르쉐 엣 대학로’라고 읽으면 됩니다.
※마르쉐@ 어디서 열리나요? 상황에 따라 장 서는 곳이 달라집니다.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비롯해, 명동성당 지하 ‘1898 광장’, 어린이 대공원, 양재 시민의 숲, 상암동 석유비출기지(일명 비빌기지)에서 장이 열립니다. 마르쉐@ 홈페이지와 페이스북에서 장소를 확인하면 됩니다.
마르쉐@ 홈페이지 marcheat.net
마르쉐@ 페이스북(facebook.com) 검색창에서
마르쉐at 혹은 마르쉐@을 검색하세요.
도사 되는 법?
무림의 비급은 인연 있는 자의 것이다
누구에게나 열려 있지만 누구나 가질 수 없어 비급이라 했던가
어언 나이 70을 넘었다
고령사회에서 평균연령 100세 이상을 산다고 하는데 우리도 피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하루가 다르게 빠르고, 계속해서, 새롭게 변하는 IT 세상에서 알파고 아이들과 어울려 살아가려면 앞장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고 뒤따라가기도 버겁고, 쳐지면 짐이 되어 걸림돌이 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날에는 명절이다 하면 시끌벅적 건너 뛴 시간 이어주는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요즘은 “안녕 하세요” 인사만 끝나면 각자 스마트 폰 하나씩 들고 어느 구석 찾아 벽에 기대 카톡, 게임, 페북에 열중하며 혼자서 웃고 찡그리고 즐겨서 명절이어도 고향이 조용하다는 쓴웃음 소리도 있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귀엽고, 궁금한 게 많으신 조부모님께서 말을 붙여보지만 눈길 한번 없이 입으로만 단답식 대답에 부모가 꾸지람도 해 보지만 소용없다.
나 역시 다르지 않아 내 자신이 바뀌어보자 생각하고 IT를 배워보기로 했다.
우선 컴퓨터를 배워 메일이라도 보내봐야겠다는 소박한 생각에 시작한 컴퓨터.
시작은 켜고, 끄고, ID 만들고 독수리 타법이었다.
친구들에게 짧으나마 10행 미만의 글 하나 보내는데 한나절
그런데 격려의 답장이 오고
곧 이어 전화가 와 컴퓨터 배우길 참 잘 했다며 별 다섯짜리 도장을 찍어준다느니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신났다.
뭔가 하나 시작 했는데 주위에서 그게 잘 한 짓이라니 너무 신났다.
문장이 늘어나고 답장이 여러 곳에서 오는데도 글 쓰는 시간은 좀체 줄지 않는 것이 안타까웠지만 엉덩이 진물 날 정도로 앉아 보내고 또 보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조선일보와 유어스테이지 (주)시니어 파트너즈에서 강사과정 안내문을 컴퓨터로 받아보니 새삼 신기했고 그 위력을 알 것 같았다
강사과정을 공부하며 아쉬웠던 부분은 파워포인트 강의안을 만들어야하는데 그런 실력이 없어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만들려니 그때마다 부탁하는 것이 너무 미안하고 나의 부족함이 싫어 새삼 컴퓨터를 제대로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는데 2015년 도심권 이모작센터에서 SNS기초반이 있다는 광고를 컴퓨터로 접하고 등록해 가보니 베이비부머 수강생이 많아 정말 놀랬다
시작이란 이제까지 해보질 않던 것을 하는 것이니 두근거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다
나처럼 아랫사람에게 지시하면 척척 되던 시절을 겪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을 한 울타리에 모아놓은 모습이었다.
켜고, 끄기부터 시작해 자판을 외우라는 숙제가 떨어졌고 독수리 타법을 생소한 10손가락 운지법으로 고치는데 집에 와서도 계속 연습하다보니 이젠 독수리 타법으로는 오히려 불편해지며 점차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애국가, 명시 등을 치며 어느 시점에서 행을 바꾸고, 여백의 아름다움을,
글자체의 종류와 적용 사례, 내용에 따라 한 장에 들어가는 글자 크기, 배열 그리고 속도를 익혀갔다
노트북을 하나 사 지참하고 교육을 받다보니 손에 익숙해져 슬슬 넘어가는 손놀림만으로도 신기했다
3개월 후 시험에서 1/2 합격선에 들어 심화반에 들어갔다
문제는 스마트폰이었다
컴퓨터와 함께 스마트 폰 교육이 병행되었는데 컴퓨터보다 어려운 게 스마트 폰이란 걸 처음 알았다
그러나
스마트 폰만 제대로 알면 컴퓨터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페이스 북, 트위터, 밴드로 영역을 넓히다보니 재미있어 하나하나 신기함에 시간가는 줄 몰랐다
블로그, 카페, 동영상을 배우며 숙제는 간단했다
단 한줄, 한 컷도 좋으니 매일 올리라는 것이었다.
남들은 매일이라는 이게 쉽질 않았나보다
나는 무슨 일이든 남보다 빠르질 못 해 오죽하면 별명이 “느림보”일까.
그렇지만 느리기는 해도 꾸준함은 있기에 하루도 빠짐없이 올리길 해
3개월 후 1/2 탈락자 명단에서 빠져 전문가반으로 올라갔다.
구글의 여러 기능, 스프레드시트, 모두, 마인드맵, 음악 동영상 시간과 분위기에 맞는 것 골라 넣기, 유튜브 옮겨 자르고, 붙여 필요 부분만 사용하는 법 등을 신나게 배웠다
무엇보다 강사로서 PPT 배우는 것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가장 백미는
누구나 팀을 이뤄, 새로 공부하시는 분들 기초반에서 선생님 보조강사 하는 것이었다.
그때 보조강사는 물론이고 누군가를 가르쳐봐야 가르치기 위해서도 자신이 배운 걸 제대로 익힐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수료를 위한 마지막 시험은
자신의 스프레드시트 만들어 자신의 전문분야 동영상 15분 이상 6개 만들어 그 주소를 넣을 것
SNS 관련 모임 6번 개최한 기록 만들어 넣을 것
타 SNS 관련 모임 6번 참석해 자신이 타 모임에서 기여, 보조한 기록 만들어 넣을 것 등을 스프레드시트 지정 란에 채우고 클릭 한 번으로 바로 열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니 거짓말도 못하는 것이었다.
강사다보니 내 강의 장면을 누군가 동영상 찍어주질 않으면 안 되는데 미리 알았으면 틈틈이 준비했으련만 발등에 불이 떨어져 약 한 달을 만사제치고 그 일에 매달려도 쉽지 않았는데 다행히 강의가 곳곳에 있어 첫 번째는 채울 수 있었다
SNS관련 모임 6번과 타 SNS관련 모임 참석은 동기생들과 짜고 서로 모임 주선하고 참여해 주는 것으로 하렸다가 선생님께 들켜 자신의 집 구역을 설정하고 그곳에서 모임 하라니 지역이 각각이라 동기들도 가고 오기가 버거워 잘 되질 않았고 나 자신도 멀리까지 찾아가 참석해 줄 형편이 되질 않아 애를 먹다 미완성인체 겨우 턱걸이로 수료증을 받고나니 어느새 1년이 지났다
평생 써먹을 걸 배웠는데 얼마나 큰 성과인가
스마트 폰이 내 손 안에 착 달라붙은 기분이다
바로 IT 비급은 내가 차지한 것이었다.
요즘 중학생 학습 방법은
한 반을 1팀 5~6명, 4~6팀에게 다음 시간 수업할 내용을 팀별로 나눠주고 각 팀별로 주제 만들어 PPT 만들어 발표하게 해 시험, 발표 각각 50%씩 반영 성적을 낸다고 한다.
효과는 팀웍의 중요성과 협동의 가치를 자연히 익히게 하며, 있을 수 있는 지진 한 친구를 어떻게, 각기 다른 능력의 조화여부, IT는 물론 회전식 역할분담까지 하다보면 자연히 인성을 익히고 학습을 놀이형태를 빌려 재미로 승화시키는 것이라 한다.
중학생들 IT 능력은 뛰어나다
노트북, 스마트 폰은 그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장난감에 불과하다
우리와 실력인지도 모르고 일상에서 즐기며 놀이로 자유자재 다루는 그들과는 게임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사실 버겁다
IT 도사되는 비급을 열어보니
“IT 지름길은 없다
꾸준히 만지며 실패하고 익히는 길만 있을 뿐이다“
라고 쓰여 있었다.
한복은 참 아름답다. 가지런히 역삼각형으로 내려오는 새하얀 동정 깃에 고운 빛의 저고리와 치마가 이루는 조화는 세계의 어느 나라 드레스에 비할 바 없이 멋지다. 예쁜 색상과 날렵한 선도 멋지지만 음식을 많이 먹어도 배가 감춰지는 치마의 풍성함도 좋다. 그러나 제대로 갖춰 입으면 행동하기에 쉽지 않다는 단점이 있어 상용하는 옷이 되기에는 힘들다는 생각으로 명절 때나 찾아 입게 된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거리에서 한복 입은 아가씨가 눈에 띄인다. 특히 서울 삼청동부터 광화문까지 거리엔 한복을 차려입은 아가씨가 많이 보인다. 삼청동, 광화문뿐 아니라 인사동 근처에서도 한복 차림의 젊은 여성을 자주 볼 수 있다.
일본 지자체가 관광지에서 일부러 기모노(着物)를 입고 다니게 해 그곳의 명성을 높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한국의 한복 아가씨도 특별히 우리나라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에게 아름다운 한복을 선보이려고 서울시가 진행하는 행사인가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특정 지자체가 입혔다고 생각한다면 이들의 한복 차림엔 큰 문제점이 있다. 대부분 한복 아가씨가 단정하게 머리도 땋고 댕기도 들였으나 그중 일부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한다. 머리는 산발한 듯 풀어헤치고 치마의 뒷부분은 여미지 않은 채 벌어져 속에 입은 청바지가 훤히 나타났다. 이렇게 입을 거면 입지 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기자는 당연히 이 일을 벌인 곳이 서울시라고 여기고 다산콜센터에 전화를 걸었다. 오늘 보았던 보기 싫은 모습에 대해 주의해 달라고 건의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다산콜센터에서는 들은 바가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문화부 소속 어느 전화번호를 알려주기도 했지만, 그곳에 문의해 봐도 거리의 한복 아가씨에 대해서는 아는 바 없다고 한다.
그러면 거리에서 보이는 수많은 한복 아가씨들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러던 중 인사동에 갈 일이 생겨 창덕궁 앞 정류장에 내렸는데 마침 한복 입은 아가씨들이 많이 눈에 보였다. 앞쪽에 즐겁게 깔깔대는 예쁜 한복 아가씨 세 명에 다가가 “궁금한 점이 있어요.” 하며 말을 걸었다.
이렇게 한복 입고 다니는 이유에 관해 물었더니 자기들은 강원도에 사는 대학생인데 서울에 놀러 와 한복 체험을 하는 중이라 한다. 안국역 근처에 한복 대여해 주는 집이 있어 돈을 내고 한복을 빌려 입었다고 했다. 한복을 입으면 고궁에 무료로 들어갈 수 있고 멋진 사진도 찍을 수 있어 재미있다고 웃는다. 아르바이트가 아니고 자발적으로 한복을 빌려 입고 하루를 즐기는 당당하고 멋진 젊은 여성들이었다.
기왕 빌려 입고 즐길 것이면 단정하게 입고 즐기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한복을 입은 것도 고맙고, 이상하게 입었던 경우는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지적질 대신 칭찬만 해줬다. 아울러 기자의 궁금증을 풀어 준 세 명의 예쁜 대학생이 즐거운 한복 체험을 했기를 바란다. 흔쾌히 포즈도 취해 준 학생들이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기를 기원하며 오늘의 나들이를 마쳤다.
[경봉궁 부근서 한복대여점 삼삼오오 운영하는 정병훈 대표 일문일답]
-젊은이들이 한복 입기에 열광하기 시작한 시기는.
“3~4년 전부터다. 한복을 입고 에펠탑을 비롯한 유명한 여행지 앞에서 사진을 찍은 뒤 인스타그램 등 SNS에 올리는 것이 인기를 끈 것이다.”
-대여 비용만 30만원은 넘는데 한복을 왜 굳이 가지고 가는 걸까.
“일종의 놀이다. 재미있으니까 돈을 기꺼이 낸다.”
-외국인 여행객과 한국 학생 중 어느 쪽이 더 큰 고객인가.
“못 믿겠지만 한국 학생이다.”
역모 혐의로 능지처참을 당한 허균(1569~1618)은 수많은 조선조 인물 가운데 여러 모로 특이한 사람입니다. 고리타분한 유교질서에 염증을 냈던 허균은 어머니 상중에도 기생을 끼고 놀아 비난을 받은 바 있습니다. 광해군일기에는 ‘천지간의 괴물’이라고 기록된 인물입니다.
그가 광해군 3년(1611)에 귀양지인 전북 함열에서 엮은 ‘성소부부고(惺所覆?藁)’에 ‘도문대작(屠門大爵)’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8도의 명물 토산품과 별미를 소개한 음식 안내서입니다. 귀양살이를 하다 보니 지난날에 먹었던 음식 생각에 견딜 수 없어 종류별로 기록해 놓고 때때로 보아가며 한번 맛보는 것처럼 한다는 게 집필 동기였습니다.
허균이 참 가엾습니다. 처형 직전에 “잠깐 할 말이 있다”고 소리쳤지만 무시당한 채 처참하게 죽은 그는 마지막으로 무슨 음식을 먹고 갔을까?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이 처형장에서 지은 절명시(絶命詩)에는 “황천길엔 주막 하나 없다는데 오늘 밤은 뉘 집에서 잘까?”[黃泉無一店 今夜宿誰家]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곧 죽을 사람들이 왜 먹는 생각을 할까? 음식이란 몸을 살찌우거나 생존을 이어주는 영양소만이 아니며 정신의 허기를 달래고 불안을 덜어주는 그 무엇입니다. 생존의지에 관한 행위와 관련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문자 그대로 음식은 마시고[飮] 먹는[食] 것입니다. 먹고 마시고 저작(詛嚼)하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심신을 기르고, 세상과 함께 하면서 사람들과 정을 다지고, 그 시대와 사회를 섭취합니다.
음식남녀 인지대욕존언(飮食男女 人之大慾存焉), 예기(禮記)가 갈파한 대로 음식과 남녀의 정, 쉽게 말해 먹는 것과 섹스는 인간의 가장 큰 욕망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이 원초적 본능을 다스려 사회질서와 양속(良俗)을 유지하기 위해 온갖 제도와 절차를 만들고 규제와 금지 장치를 마련해왔습니다.
음식은 예절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숟가락 젓가락 포크는 어떻게 쥐고 어른 앞에서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 배운 뒤 식사공동체의 일원으로 편입됩니다. 밥상머리교육은 인간의 품성을 결정하는 원초적 교육기제입니다.
쌀을 뜻하는 글자 ‘米’를 파자(破字)하면 八十八이 됩니다. 옛 어른들은 쌀 한 톨을 얻기 위해서는 88번이나 농부의 손길이 가야 하는 걸 알라며 이 글자 이야기를 하곤 했습니다. 예절은 먹는 방법에만 있는 게 아닙니다. 음식 자체에 대해 지켜야 할 예의가 있습니다. 먹을 게 귀하고 쌀이 모자라던 시절에는 밥풀을 남기면 꾸중을 들었고, 맛있는 것만 먹거나 같은 반찬을 두 번 떠가는 것도 남을 배려하지 않는 행동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최근 번역된 댄 주래프스키 교수(미 스탠퍼드대·언어학)의 ‘음식의 언어’(The language of food)에 의하면 고급한 식사일수록 에티켓을 따집니다. 요리의 이름이 길수록, 식재료의 출처를 거론하는 횟수가 많을수록 음식 값이 비싸집니다.
음식은 정입니다. 온 가족이 모여서 밥 한 끼를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복인가요? “음식 끝에 의 상한다”는 말, “콩 한 쪽도 나눠먹는다”는 말에서는 상부상조하며 살아가는 인심과, 누구에게나 똑같은 고통인 가난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내가 아는 술꾼 3형제는 명절에 모이면 소주를 궤짝으로 갖다 놓고 마시면서 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 이야기를 하며 웁니다. 어차피 가실 분인데, 병상에 누워 “한 잔만, 한 잔만” 하는데도 끝내 술을 드리지 않았던 불효를 그들은 지금 후회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또는 주부는, 또는 아내는 가족을 위해서 정으로 다듬고 무치고 사랑 양념을 넣어 음식을 만듭니다. “세상에서 제일 듣기 좋은 소리는 제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와 내 새끼 입에 밥 들어가는 소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려서 어머니가 해주었던 반찬이나 요리가 맛이 없어지면, 그때는 죽을 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과학적 근거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말입니다. 음식은 소통입니다. 왕조시대에 기근이 들고 흉년이 심하면 왕은 부덕의 소치라고 자성하며 하늘에 빌면서 반찬 가짓수를 줄였습니다. 이른바 감선(減膳)의 소통정치라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서로 자기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손님 접대랍시고 내놓은 두루미와 여우의 우화는 달리 해석하면 서로 다른 음식을 통한 소통의 시도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음식은 배려입니다. 우리는 요리를 잔뜩 빚어 내놓고도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십시오” 하고 인사를 합니다. 예전에 중국인들은 “이미 익힌 걸 날것으로 되돌릴 수 없지요”[熟不還生]라고 말하며 식사를 권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금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고 있고(장 지글러 저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세계의 절반은 먹거나 더 먹거나 또 먹고 있습니다. 음식을 먹으면서 기아의 진실, 과식과 체증의 진실을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중국 북송시대의 명재상 범중엄(范仲淹·980~1052)은 ‘강상어자(江上漁者)’라는 시에서 이렇게 읊었습니다. “강 위를 오가는 사람들/농어 맛을 즐길 줄만 아는데/그대들 보시게나 작은 배 하나/풍파 속에 출렁거리는 것을.”[江上往來人 但愛?魚美 君看一葉舟 出沒風波裏] 농어만 즐기지 말고 농어를 잡는 이들의 고생도 알라는 뜻입니다.
굶주리는 이들도 많고, ‘혼밥’이나 불기 없는 1회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가족과 따뜻한 음식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이걸 좋아한다고 내세울 만한 음식이 없는 사람, 함께 먹자고 남에게 권할 만한 메뉴나 음식점에 무지하거나 무신경한 사람, 무엇이든 한 가지라도 남을 위해 만들어 먹일 수 있는 음식이 없는 사람의 삶은 끝내 불행합니다. 구차하고 용렬합니다.
이어령 전 문화부장관은 어느 책에서 “여성이 매일같이 요리를 하는 것은 작은 기적을 만들어 내는 일상의 기도와도 같은 것”이라고 썼습니다. 이제는 남자들도 나를 위해, 남을 위해 요리를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TV화면을 점령하다시피 한 먹방, 쿡방은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조류입니다.
요리는 본질적으로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 먹을 것으로 만드는 행위입니다. 살아 있는 것을 죽여서 생명을 살게 합니다. 그러니까 역설적이지만 음식은 삶입니다. 그리고 살림입니다. 이 경우의 살림은 생계를 꾸려가는 일이나 세간이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들이 목숨을 이어가게 해주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런데 살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움직이는 것, 푸른 것, 부드러운 것, 따뜻한 것, 촉촉한 것, 선한 것, 맛있는 것입니다. 일용(日用)하고 장복(長服)하는 음식을 통해 삶과 살림의 길을 찾아가는 일이 늘 즐거움과 행복이 되기 바랍니다.
필자의 고교 동기동창들이 동창회를 창립한 것은 졸업한 지 13년째 되는 1975년 3월이다. 당시 L동문이 사장으로 있던 시내 S호텔에서 창립총회가 열렸다.
동창회는 첫 번째 행사로 바로 다음 달인 1975년 4월에 역시 같은 S호텔에서 제1회 동창회 바둑대회를 개최하였다. 그때 후배인 프로기사 홍종현 4단(당시)에게 지도를 부탁하였으나 선약을 이유로 김동명 4단(당시)이 대신 왔다. 당시 기력이 4급(현 아마 2단) 정도였던 L사장은 바둑에 한창 심취하여 동문 강자 중의 한 명인 인하대 L교수와 4점을 놓고 자주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4점을 놓고도 쩔쩔매는 그 L교수가 김 사범에게 오히려 2점을 놓고도 지는 것을 보자, 프로바둑계를 잘 모르던 L사장은 김 사범을 한국바둑계의 대단한 고수라고 생각했는지 즉시 S호텔의 지도사범으로 위촉하고 호텔의 과장급에 해당하는 급여를 지급하도록 했다. 과장급이라고는 하나 그 액수가 프로기사들 중 최고였던 조훈현 국수의 수입에 버금갈 정도여서 많은 기사들이 부러워하였다고 하니 당시 프로기사들의 수입이 얼마나 열악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 덕택에 필자를 비롯한 동문 바둑애호가들은 틈만 나면 S호텔에 들러 김 사범의 지도를 받곤 하였다. 뿐만 아니라 당시는 1974년에 시작된 한국기원 기사파동이 계속되던 때라 갈 곳이 마땅치 않던 다른 프로기사들도 S호텔에 자주 들렀다. L사장은 이들에게도 다과를 제공하고 밥을 자주 사는 등 대접을 잘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도 지도를 받을 수가 있어 필자의 경우 양상국 4단(당시), 장두진 2단(당시) 등에게도 종종 지도를 받은 기억이 있다. 그런 L사장이 언제부터인가 바둑 두기를 꺼려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기사파동이 끝나고 한국기원으로 복귀한 기사들이 고맙다고 L사장에게 실제 실력보다 몇 단 높은 아마단증을 증정한 것이었다. 그 단증을 벽에 걸어놓고 옛날 치수대로 두자니 단증을 볼 낯이 없고 단증대로 두자니 판이 짜이질 않아 그랬던 것이다.
제2회 대회는 다음해인 1976년 2월, 제3회 대회는 같은 해 9월에 열렸다. 1977년에는 S동문이 초동극장 옆에 초동기원을 개원하여 제4회 대회는 그해 7월 자연스럽게 초동기원에서 열렸다.
그때 그 기원에는 김좌기 3단(당시)이 지도사범으로 있어서 필자는 틈만 나면 기원에 들러 처음에는 4점으로, 그리고 나중에는 3점으로 지도를 받았다. 그 덕분인지 한 해를 건너뛰고 1979년 5월에 열린 제5회 대회 때는 필자가 A조에서 준우승을 하기도 했다.
그 후 3년을 건너뛴 1982년에 명동에서 C백화점을 운영하던 K동문이 백화점 내에 동창회사무실을 제공하면서 그 기념으로 제6회 대회가 열렸으나 그 후에는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992년 11월에 기우회가 정식으로 출범하여 매월 둘째 토요일 오후에 모이기로 했는데, 이 전통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모이는 장소는 처음에는 선릉역 부근의 H 바둑살롱이었으나 1993년 10월, Y동문이 신사동(新沙洞) 부근에 회돌이라는 기원을 개원하면서 그곳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 기원이 2001년 문을 닫자 진양상가에서 화원을 하던 P동문이 2002년 초 화원 인근에 진양기원을 개원하였으나 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그 후에는 지하철 서초역 부근에 있던 한일기원에서 모였다. 당시 한일기원에 지도사범으로 나오던 김수영 7단은 인사를 하면서 필자가 한국바둑학회 회장이라고 밝히자 한국바둑계를 강력히 비판하며 필자와 같은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한국기원을 개혁하지 않으면 희망이 없다고 열변을 토하곤 하였다.
필자와는 동갑내기인 그가 암으로 너무 일찍 타계한 것은 한국바둑계로서도 상당한 손실이라고 생각된다. 그 후 2008년 11월, 전에 초동기원을 하던 S동문이 다시 양재역 부근에 청석기원을 열어 우리 기우회는 지금까지 이 기원에서 모이고 있다.
필자는 딸 없이 아들만 넷으로, 바둑을 가르칠 기회를 찾다가 1982년경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영동시장 부근에 한국기원 영동지원이 개원되어 김좌기 사범이 지원장으로 왔기에 아들들을 데리고 그곳에 다녔다. 그러나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그만두었는데 큰아들만은 약간 관심을 가지고 조금씩이나마 지속적으로 바둑을 두어 현재 기원 7~8급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무슨 생각에서인지 제 아들(필자의 손자)에게도 꾸준히 바둑을 가르치더니 최근에는 바둑학원까지 보내 중학교에 들어간 올해 중에는 제 애비를 추월하여 아마 유단자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필자가 바둑학과 설립을 추진 중이던 1996년 추석 때는 한국기원 사무국장 정동식 5단과 TV에서 3점으로 기념 순장바둑을 두어 비겼는데, 해설을 맡았던 권경언 6단이 명절 때 화국(和局)은 길조(吉兆)라며 환하게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또 같은 해 11월 29일에는 바둑학과 교수로 내정된 정수현 8단(당시)과 함께 신라호텔에 가서 필자가 왕 팬인 유창혁 9단의 제1회 삼성화재배 최종 결승국을 관전하였다. 이 바둑은 중반까지 흑을 잡은 유창혁 9단이 필승의 국세였으나 후반에 터무니없는 실착이 나와 일본의 요다 노리모토(依田紀基) 9단에게 1집 반 역전패를 당한 것을 필자뿐만 아니라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마치 자신의 일처럼 분해했다.
그래서 해설을 맡았던 조훈현 국수, 중앙일보 박치문 바둑전문위원, 그리고 필자보다 더한 애기가중 한 명인 S대의 K교수 등과 함께 신라호텔에서 밤새워 술을 마시고 포커를 하며 화풀이 겸 뒤풀이를 했던 일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조 국수는 그 후 명지학원 바둑대회가 개최되었을 때 초빙하여 필자가 지도를 받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