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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위의 노래하는 예술가, 버스커 한복희
- 작은 체구에 은빛 단발을 한 여자가 바람 부는 거리에 나타난다. 아직 조금은 쌀쌀한 날씨. 길 위에 선 여자는 뭔가 투덕거리더니 마이크를 집어 들고 청중 앞에 선다. 잔잔하게 선율이 흐르면 그녀의 인생이 담긴 목소리가 터져 안기다 마음속에 녹아든다. 바삐 가던 이의 속도가 느려지고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귀 기울인다. 그녀의 마법에 하나, 둘 빠져들더니 멈춰서는 발걸음, 또 발걸음. 길 위의 예술가 한복희(韓福姬·58) 씨의 노래가 울려 퍼지면 모두가 판타지 속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장소협조 보수동 정.[점] 저기 저 분 노래 되게 잘 불러요! 부산의 남포동 밤거리를 거닐던 어느 날. 사람들이 몰려든 곳을 향해 누군가 소리쳤다. 음악이 들리는 곳은 이미 인산인해. 길거리 공연을 많이 봐왔지만 노래 부르는 이가 인파에 묻혀 보이지 않는 건 드문 일이다. 그때 딱 스치는 사람이 바로 중년의 버스커(거리 예술가) 한복희 씨였다. 언젠가 SNS 영상을 통해 그녀가 노래 부르는 모습을 봤다. 프랑스의 전설적인 여가수 에디트 피아프(E′dith Piaf, 1915~1963)의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Non, Je Ne Regrette Rien)’를 부르는 모습이 압권이었다. 언젠가 우리 지면을 통해 꼭 소개하겠노라 사진까지 저장해놓았었다. 그런 그녀가 앞에 나타났으니 머뭇거릴 틈이 있겠는가. 노래를 마치고 잠시 쉬고 있는 한복희 씨에게 다가가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며칠 후, 햇볕이 따뜻하게 비추는 부산시 보수동 책방 골목의 한 찻집에서 만났다. 환하게 반겨 웃는 모습에 포근함이 느껴진다. 50대 끝자락. 그녀는 왜 부산 길거리 귀퉁이에서 노래를 부르게 됐을까. 대인공포증을 이기려고 대중 앞에 섰어요 누가 믿겠는가. 그녀가 노래를 부르는 순간 길거리는 콘서트 현장이 된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서서 그녀를 응원하는 팬 또한 상당수다. 대중 앞의 그녀가 사람에 대한 공포 때문에 세상 밖으로 나왔다니! “전문 버스커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어요. 본격적으로 노래하기 전까지는 섬유공예를 했어요. 광목 위에 매일 그림을 그리고 빨래하고 염색하고 다림질도 하고요. 그 세계에서 충분히 바쁘고 즐겁고 행복했어요. 누구를 만날 시간도 음악을 집중해서 들을 여유도 없었어요. 그 일을 너무나 사랑했지만 인간관계가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어요.” 어려서부터 자신이 꾸며놓은 공간에서 생활하는 것이 좋았다. 친구들도 그 안에 오게 해서 함께 놀았다. 그런데 나이 오십이 넘어 새로운 삶이 열렸다. “지금은 돌아다니며 살고 있죠. 처음에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했어요. 내가 부산에 와 있는 건 예전이라면 상상 못할 일이죠.” 관객들 중에는 한복희 씨를 알아보고 사진을 찍기 위해 다가오는 이들이 있다. 공연을 통해 사람을 만나는 거부감이 많이 사라졌다고 느끼면서도 남자에 대한 경계는 여전하다. 중년 남자들이 와서 악수라도 하자고 하면 정중히 거절한다. 그래서 지금까지 쭉 싱글인 것 같다고 멋쩍게 웃는다. “물론 정말 노래가 좋아서 다가오는 사람도 있지만 가끔은 술 냄새 나고 비릿한 냄새 풍기는 남성분이 있어요. 정성스럽게 노래를 불러드렸으면 됐지 뭘 손까지 잡아줘요.(웃음)” 영국 노처녀의 모습에서 본 희망 그녀에게 단비 같은 용기를 준 사람이 있었다. 바로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가수 수잔 보일(Susan Boyle, 1961~)이다. “그분이 저에게 절대적인 용기를 줬어요. 예술가처럼 보이지도 않고 시골에서 올라온 푸짐한 시골 노처녀가 뮤지컬 ‘레미제라블(Les Miserables)’의 ‘아이 드림드 어 드림(I dreamed a dream)’을 부르는데… 관객 모두의 입이 떡 벌어지잖아요. 내 안에 노래를 향한 불씨가 있는지 몰랐는데 수잔 보일을 보고 난 뒤에 힘이 났어요. 며칠 동안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리고. 그 사람이 나오는 영상을 보는데 너무 떨리는 거야.” 한복희 씨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일반인의 숨은 재능을 발굴하는 tvN ‘코리아 갓 탤런트(Korean got talent)’를 통해서였다. 생업을 이어나갈 수 있을지 고심하던 상황이었다. 그녀 나이 53세. 대단한 도전이 시작됐다. “섬유공예를 하면서 줄곧 써오던 염료 때문에 건강이 많이 나빠졌습니다. 천식이 발병했어요. 이제 어떤 일을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을 때 마침 그 프로그램이 생긴 거죠. 나는 정말 악보도 볼 줄 몰랐어요. 음악을 좋아하고 꾸준히 들은 것 말고는 뭐가 없었어요. 막연한 자신감이었어요.” 무대에 서서 에디트 피아프의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를 부르는 순간 관객들은 환호했고, 심판단의 극찬이 뒤를 이었다. 몇 년 후 ‘아시아 갓 탤런트’에도 초청됐다. “‘코리아 갓 탤런트’가 끝나고 노래 연습도 안 하고 있을 때였는데 ‘아시아 갓 탤런트’가 노래를 향한 두 번째 불을 지펴줬어요. 역시 나는 노래를 할 때 굉장히 행복하구나, 건강 때문에 힘들 때였는데 노래는 굉장한 기쁨의 순간을 경험하게 해줬어요. 불 속에 뛰어드는 마음이었어요. 그냥 내가 좋아하는 거 하다 죽자!” 한복희 씨는 인터뷰 내내 숨을 깊게 내쉬고 기침을 했다. 그러면서도 노래하며 사는 삶에 대해 얘기할 때는 웃음이 넘치고 생기가 솟았다. 그녀에게 노래는 수많은 의미를 담은 보약이다. 서울 인사동에서 부산 남포동까지 길바닥에 누워 자는 한이 있어도 노래하는 삶을 택하겠노라 굳은 다짐을 했다. 언제 올지도, 내 앞에 설지도 모르는 관객을 만나기 위해 거리를 나섰다. 2015년 11월, 서울 인사동에 작은 스피커와 마이크를 들고 섰다. 당시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돌보느라 추워진 날씨가 돼서야 밖으로 나왔다. “그때는 뭐 진짜 노숙자 같았어요. 노래를 부르고 싶은 절박함도 있었어요. 부랑자가 되더라도 나는 음악을 할 것이라고 전제하고 있었어요. 그래야만 내가 충격을 덜 받으니까요. 산발한 긴 백발에 군용 잠바를 입고 그렇게 나섰어요.” 개업(?) 첫날. 빛이 점점 잦아드는 오후 5시. 조그마한 박스 하나 놓고 준비한 노래를 불렀다. 삽시간에 구름같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저 사람이 누구냐?”며 수군대는 사람들. 정신없이 노래를 부르고 난 뒤 눈을 떴을 때! “비현실적이었어요. 꽃 선물에 돈은 물론이고요. 이렇게 계속된다면 달리 노래를 부르기 위해 직업을 찾지 않아도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신호가 굉장히 좋았죠.” 알고 보니 인사동은 버스커들이 좋아하는 장소였다. 동창 모임이나 출판기념회 등을 하고 나온 중년들이 쉬이 지갑을 열어 팁 박스 두둑하게 돈을 넣는다. “인사동 거리에는 내 나잇대의 기억을 추억하는 사람들이 서성입니다. 그러다 보니 팁도 후하고 앞에서 춤도 추고 그러죠.” 비현실적인 인사동 거리는 반할 만했지만 다른 블루오션을 찾기로 했다. 젊은 버스커들과 소위 자리 경쟁 같은 건 하기 싫었다. 인사동에서 이태원으로 대학로로 자리를 옮겨 다녔다. 그러다 2016년 10월 부산국제영화제가 열리는 부산으로 향했다. “글로벌 스타가 되어 브로드웨이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고 싶어요. 제 목표죠. 그래서 가요보다 외국 노래를 많이 부릅니다. 부산국제영화제는 외국 문화계 인사들이 많이 오잖아요. 그래서 갔어요. 기대를 했는데 태풍이 몰려와서 영화제가 거의 폐점 상태였어요. 제가 지방마다 팬이 좀 있는데 부산 팬이 며칠 동안 가이드를 해줬어요. 그때 찾은 곳이 바로 남포동입니다.” 부산 하면 꼭 남포동이 생각났다. 서울로 가기 전에 남포동에 좀 데려다 달라고 팬에게 부탁했다. “차에서 딱 내리자마자 느꼈어요. 남포동이 나를 환영하더라고요. 활짝 팔을 벌려서요. ‘어서 오세요’라고요.” 곧바로 노래를 한 곡 했더니 관객들의 반응이 예사롭지 않았다. 비로소 부산 팬하고 축포를 터뜨렸다. “부산에서 재밌는 일이 많아요. 노래하는 친구들이 저한테 ‘너무 감동받았습니다. 우리는 가짭니다!’ 이러기도 하고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모두들 표현이 강렬했어요.” 자기 세상 속에 살던 엄지 공주 한복희 씨는 매력적인 남포동 기운에 이끌려 부산행을 결심했다. “부산 생활은 1년 좀 넘었어요. 친근하고요. 부모님 두 분 다 함경도 출신이세요.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했던 지식인이셨고요. 제가 사는 보수동에는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살았대요. 우연이라기보다 DNA의 이끌림? 정서적으로 이물감이 없고 자연스러워요. 서울 생각 잘 안 나요.” 욕망과 집념으로 인생을 그려가다 “제가 그림을 그리고 천식이란 병을 얻게 되는 과정은 욕망이 많았던 시간이었어요. 표현의 차이겠지만 나는 뭘 하든지 욕망 강한 사람이에요. 노래를 하면서도 굉장히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게 느껴져요. 반드시 정점에 올라야 하는 승부사 기질이 있는 거예요. 지나치게 올인하죠.” 강원도 원주에 작업실을 꾸며 2년여 섬유공예를 할 때 밥 먹는 시간을 잊어버릴 정도로 천과 색에 매료돼 있었다. 작은 결과물이라도 손에 쥐어지면 황홀감에 빠지기도 했다. 그렇게 쉼 없이 몰두하던 어느 날 숨소리에 이상이 왔고 더 이상 염료들과 마주할 수 없게 됐다. 그때 빛처럼 다가온 것이 노래, 노래였다. “그림을 그릴 때도 프랑스 노래 좀 배워놓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영화 ‘파니핑크’에 삽입됐던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 이 노래가 극적으로 다가왔어요. 그러곤 나도 멋지고 강렬한 노래 한번 불러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이렇게 어려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어요.(웃음) 너무 어렵더라고요.” 한복희 씨 공연의 대미를 장식하는 에디트 피아프의 대표곡 ‘아뇨, 전 후회하지 않아요’. 사실 이 노래를 듣는 사람 대부분은 한복희 씨가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반대다. “명절에 외국인들이 우리나라 노래를 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재밌지만 감동이 없잖아요. 제가 원어민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야 하는 상황이 오게 되면 최대한 원어에 가깝게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프랑스어는 정말 할 줄 몰라요.” 완벽하게 노래를 부르기 위해 천 번 이상 듣고 공부했다. 보컬 트레이닝을 받은 일도 없다. 동영상 속 에디트 피아프 선생님(?)을 모시고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정열을 쏟아 얻어낸 결과다.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하루하루를 만들어가면서 공연이 다 끝나면 장비를 챙긴 후 내가 나한테 얘기해요. ‘오늘 노래 참 괜찮았다, 그렇지? 오늘 괜찮은데?’ 이런 기쁨, 자긍심이 생겼어요.” 인생의 아름다움은 비현실에 있다 최근 천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한쪽 눈을 실명했다는 한복희 씨. 그럼에 불구하고 노래만 부를 수 있다면 어디에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다. 물론 꿈은 있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극장이 있으면 좋겠다. “나만의 공연장이 있으면 꼭 하고 싶은 것이 모노드라마예요. 내가 부르는 노래는 제가 성장하면서 알게 된 곡들입니다. 노래를 부르면서 인생 이야기도 하고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노래를 부르고 싶다는 한복희 씨. 좋아하는 공간을 만들어 좋아하는 사람들이랑 좋은 음식도 만들어 먹고 싶단다. “내 삶의 가치는 행복에 있어요. 경제력은 자존감이 손상되지 않는 선만 지키면 될 거 같아요. 약간 비루하고 불편해도 상관없어요. 노래를 선택하면서 저는 그 대가를 지불했고 잘했다고 봐요.” 인생의 맛을 이제 알았는데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게 느껴진다고. 그래도 노래로 행복할 수 있다면 그녀는 순간순간 기쁘게 살아갈 것이다.
- 2018-03-12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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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권호, 그의 금메달이 더욱 빛나는 이유
- 키 157cm의 작은 체구, ‘작은 거인’ 심권호(沈權虎·45)는 올림픽, 세계선수권, 아시안게임, 아시아 선수권에서 총 9개의 금메달을 쓸어담으며 한 번도 하기 어렵다는 그랜드슬램을 48kg, 54kg 두 체급에서 모두 달성했다. 2014년엔 국제레슬링연맹이 선정하는 위대한 선수로 뽑히며 아시아 지역 그레코로만형 선수 중에선 최초로 명예의 전당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사람들은 그를 세계 레슬링 경량급의 전설이라고 부른다.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 금메달, 1995년 프라하 세계선수권 금메달, 1995년과 1996년 아시아 선수권에서도 금메달을 거머쥔 심권호. 그는 일찌감치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로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벨라루스의 알렉산더 파블로프와 연장 접전 끝에 4대 0으로 승리하면서 그랜드슬램의 마지막 조각인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이 올림픽에서 따는 100번째 메달이자 애틀랜타올림픽의 첫 금메달이었다. 심권호를 대적할 만한 상대가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다.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을 끝으로 그가 속한 48kg급이 폐지된 것이다.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한순간에 최경량급이 54kg이 되었다. 기존의 48kg급 선수 대부분은 이때 은퇴했다. 체중을 불려 변경된 체급에 맞춘 선수들은 평소만큼의 기량을 발휘하지 못했다. 심권호의 입장도 마찬가지였다. 48kg에서는 독식을 했지만 그가 54kg으로 옮겼을 때도 성공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주위에서 다들 못할 거라고 했어요. ‘넌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네가 되겠어? 48kg에서는 무적이었지만 54kg에서는 어렵지 않겠냐? 은퇴해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어요. 근데 주위에서 포기하라고 말하니까 오히려 오기가 생기더라고요. 한 번 금메달 따본 경험도 있겠다, 나 자신을 믿고 한계에 도전한 거죠.” 변경된 체급에 적응하기까지는 딱 2년이란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자신의 도전이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란 듯이 증명했다. 1998년 예블레 세계선수권 금메달을 시작으로 부활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1998년 방콕 아시안게임 금메달, 1999년 타슈켄트 아시아 선수권 금메달. 그야말로 완벽한 승리였다. 두 체급 그랜드슬램, 새로운 역사를 쓰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레슬링 국가대표로 선발된 심권호는 두 체급 그랜드슬램이란 기록을 세우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위태로운 순간들도 중간중간 있었지만, 역전승과 테크니컬 폴로 상대를 제압하는 데 성공, 결승에서 당시 54kg 최강으로 여겨지던 쿠바의 라자로 리바스 선수를 만났다. “아, 까불더라고요.(웃음) 경기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쿠바 코치석은 거의 승리를 확신하는 분위기였어요. 여유롭게 휘파람까지 불고 있더라고요. 저희 쪽은 조용히 있었죠. 신체 조건이나 탄력을 딱 봤을 때 차이가 너무 났었으니까요.” 작은 고추가 맵다고 했던가. 경기 시작 1분 만에 패시브를 얻은 심권호는 리바스를 좌우로 뒤집으며 8점 득점에 성공했다. 이후 수비 상황에선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전략으로 철통 방어를 하며 점수를 지켜냈다. “원래는 납작하게 배를 바닥에 붙여서 수비하거든요. 리바스 선수가 절 뒤집는 건 쉬웠을 거예요. 그래서 처음부터 손이 들어올 수 없게 겨드랑이를 닫아버린 거죠. 여기서 겨드랑이가 벌어지면 난 죽는다 생각하고 방어했죠. 나중엔 손이 안 들어간다고 막 심판한테 성질을 부리더라고요.(웃음) 그럼 뭐해요. 반칙이 아닌데.” 지금은 룰이 바뀌어 더 이상 경기 중에 볼 수 없는 장면이지만 당시 심권호는 남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방법으로 끝까지 버텨내며 두 체급 그랜드슬램이라는 위업을 이뤄냈다. “두 번째 올림픽 금메달은 제게 아주 큰 의미가 있는 메달이에요. 그야말로 피와 땀과 눈물로 만들어낸 메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서 딴 메달이라 특별하죠.” 북한 강용균 선수와의 특별한 인연 “시드니올림픽 결승전에 올라가기 전에 북한의 강용균 선수는 리바스 선수, 저는 강용균 선수의 상대가 될 선수랑 경기했기 때문에 서로 정보 교류를 했어요. ‘얘는 이런 걸 조심해라, 저런걸 조심해라’ 하면서요. 그리고 같이 단상에 올라가자고 했는데 정말 그 약속을 지켰죠. 저는 금메달, 용균이는 동메달.” 심권호에게 강용균 선수는 조금 특별하다. 1997년 체급 조정 당시 48kg 체급에서 두 명의 선수만 선수생활을 이어갔는데 그 두 명이 바로 심권호와 강용균이다. 말 한마디 안 통하는 외국 선수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 있었던 강용균 선수를 48kg 시절부터 수차례 만나다 보니 어느 순간 친한 형, 동생이 되었다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이 끝나고 나서 제가 가지고 있던 옷을 줬어요. 제가 처음 용균이를 만났을 때 입던 옷을 그때도 그대로 입고 있더라고요. 어쩌면 시드니올림픽을 마지막으로 용균이를 더 이상 보기 힘들 것 같아서… 언제 또 볼 수 있을지 모르잖아요. 용돈도 달러로 챙겨주고. 달러는 좋아하면서 미국인은 왜 그렇게 싫어하는지.(웃음) 나중에 나이 들어서 기회가 되면 제자들이랑 한번 만나자 이런 이야기도 주고받았죠.” 부산아시안게임을 이후로 강용균 선수는 지도자의 길로, 심권호 선수는 은퇴하면서 서로 얼굴을 못 본 지 어언 16년이 지났다. “용균이가 후배들한테 제 얘기를 종종 하나봐요. 국제대회에 가면 난데없이 처음 보는 북한 선수들이 인사를 하고 가더라고요. 다음엔 감독으로 나온 용균이를 보고 싶네요. 언젠간 보고 싶을 때 바로 볼 수 있는 날이 오지 않을까요?(웃음)” 세계 최고 레슬링 선수가 되기까지 “열아홉에 태릉선수촌에 들어가서 서른아홉에 나왔어요. 얼마나 지겨웠겠어요. 거의 기계였어요, 기계. 톱니바퀴. 아침에 일어나서 운동하고, 밥 먹고 운동하고, 자야 하네? 자고. 20년 동안 하루하루가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어요. 심지어 선수촌 밥이 2주 간격으로 비슷하게 나오거든요? 나중엔 식단도 꿰뚫어봤다니깐요.(웃음)” 혹독한 훈련으로 인해 치아는 마모되고 귀는 터진 혈액이 그대로 굳어 만두 모양으로 변하지만, 선수들은 이를 열심히 훈련해서 생긴 훈장으로 생각한다. 강도 높은 훈련으로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또 그 당시 심했던 체벌 때문에 옥상에 올라가 남모르게 눈물도 훔쳤고 그럴 때마다 도망가버릴까 하는 생각도 수없이 했다고. “너 나 할 것 없이 돌아가면서 제사 있다고 거짓말하고 집에 가고 그랬어요. 멀쩡한 친척 여럿 죽였죠.(웃음) 평범한 학생들은 방학이나 명절에 다 집에 갈 수 있잖아요. 근데 운동선수들은 어디 가지도 못하고 체육관에서 로프 타고 바벨 드는 걸로도 모자라 360도로 돌리고 있고…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들 때가 가장 힘들고 서러웠죠. 태릉선수촌 나올 땐 거기 보면서 오줌도 안 싼다고 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경기를 하다 보면 다양한 악조건(?) 속에서도 경기를 치러야 한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길 수 있어야 진정한 레슬러라며 우스갯소리로 말한다. “털 많은 놈, 냄새나는 놈, 오일 바르고 나오는 놈. 아 정말 짜증나요. 특이 오일을 매일 바르는 터키 선수 같은 경우엔 땀이 나면 땀 자체가 미끌거리거든요. 레슬링 특징상 잡고 돌려야 하는데 미꾸라지 빠져나가듯이 손이 쏙 빠지니깐 정말 돌아버리겠더라고요. 또 털 많은 선수랑 몸을 밀착시키고 경기를 하다 보면 민감한 부위가 찔리기도 하고… 입에도 들어가고 그래요.(웃음) 그리고 냄새가 심하게 나는 사람은 저 멀리서부터 나기 시작하는데 그럼 3분 안에 끝내야겠다 생각하죠.” 몸도 상하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고 온갖 고생 다 했지만 한 번도 레슬러로서의 삶을 후회한 적이 없다는 그다. “당신은 그럼 레슬링 천재입니까?” “천재요? 저는 천재라기보다는 그냥 레슬링을 놀이라고 생각했어요. 재미있었거든요. 놀다 보니까 어느 한순간 푹 빠져서 계속 놀았던 거예요.”
- 2018-01-25 1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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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나물 주말농장 세운 신왕준씨 “자연으로 출근, 인생이 달라지는 길입니다”
- 그 선택은 누가 봐도 모험이었다. 준공무원급으로 평가받는 안정된 직장을 스스로 박차고 나와 산으로 들어갔다. 평범한 사람들의 눈에는 위험한 가장의 선택이었다. 그래도 그는 “조금 더 빨리 들어왔으면 어땠을까?” 하고 말한다. 경상북도 청송에서 만난 신왕준(申旺俊·53)씨의 이야기다. 신왕준씨가 고향인 청송 ‘부곡마을’로 돌아온 것은 2015년 3월. 선산이 있는 고향이라고 하지만 초등학교 1학년 때 상경한 후 청송은 그에게 명절 때 가끔 찾아오는 곳일 뿐이었다. 여생을 이곳에서 보낼 결심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연고가 없는 곳에 내려온 것과 다름없었죠. 이웃들의 얼굴을 익히는 것부터 자연에서 사는 법, 작물을 키워내는 방법 등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습니다.” 느닷없는 귀촌을 결심하게 된 것은 그가 다니던 산림조합중앙회의 직원 대상 명예퇴직 신청이 계기가 됐다. 막연히 인생 후반을 어떻게 지내야 할까 고민하던 그에게 선산을 활용해보면 좋겠다는 아이디어는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을지 모르겠다. 명색이 산림경영팀장이었으니까. “가족과 상의 없이 명퇴신청서를 제출했어요. 당시 아내는 펄쩍 뛰었지만, 지금은 제 선택을 존중해주고 있어요. 아내도 자신의 삶이 있고, 저도 여기에서 완전히 자리가 안 잡힌 상태라서 주말부부처럼 지내고 있지만 함께 살 시기를 앞당기려고 노력 중이에요.” 자연 속의 삶, 현장에서 배우고 익혀야 한다 ‘마을 주민’이 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이웃들과의 친분을 쌓기 위해 그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서울에선 중년에 속했지만, 주민들의 평균 나이가 60대 후반인 마을에서 그는 젊디젊은 청년이자 막내였다. “동네에 가만히 있으면 하루에 한두 분 뵙기도 힘들어요. 아침에 눈뜨면 마을회관에 들러 일찍부터 나와 계신 할머니들에게 인사하는 것이 하루의 시작이었어요. 그리고 밭일을 돕기도 하고. 그렇게 얼굴을 익혀나가자 동네 주민 자녀들이 제 전화번호를 알려달라고 하더라고요. 부모님에게 연락이 안 되거나 급한 일이 생기면 절 찾기 시작한 거죠. 그렇게 이곳 구성원이 됐어요.” 서울에선 산림경영 분야의 전문가 대접을 받던 그였지만 산은 ‘초짜’를 알아봤다. 명예퇴직 후 1년간 다시 전문 분야 수업을 들으며 귀촌을 준비했지만, 결국 현장에서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다. “이론과 현실은 많이 다르더군요. 새로 배우면서 많이 반성했습니다. 또 노력으로도 안 되는 것이 있었죠. 올 초 가뭄이 심했을 때는 정말 아찔했습니다.” 그래도 서두르지 않고 체계적으로 준비한 것은 조금씩 성과를 냈다. 그가 제안한 산림복합경영단지 조성사업은 산림소득 사업공모에 뽑혀 정부의 자금지원을 받았고, 이를 기반으로 밭이 아닌 산속에 자리 잡은 최초의 상업용 산나물 주말농장 청송 뫼살이 농장을 시작했다. 5평짜리 텃밭 90개를 분양해 일반인들도 쉽게 곰취나 잔대, 미역취 같은 산나물을 심고 수확할 수 있도록 한 농장이다. 수확된 산나물은 대신 팔아주기도 한다. 자연에서는 농사도 사업도 천천히 흐른다 서울에서 살던 그가 자연으로 들어온 후의 삶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는 ‘스트레스 없는 삶’을 가장 큰 변화로 꼽았다. “제가 이 산의 대표이자 의사결정권자니까요. 계획한 대로 차근차근 실천해나가면 스트레스받을 일은 많지 않아요. 신선한 새벽 숲의 공기를 마시고, 강아지 두 마리를 데리고 산길을 산책하는 일은 정말 즐겁죠. 딱히 일이 없어도 정해진 시간에 숲으로 출근하는 것은 그 때문이에요.” 아직은 작은 농장에 불과하지만 이제 그의 꿈은 기지개를 펴고 있다. 먼 미래를 보고 계획을 세운 뒤 하나하나 진행 중이다. 산속에 전기를 들이는 일도 3년에 걸쳐 진행했다. 산농사는 초기 투자가 많고 수확을 하려면 2~3년 걸리기 때문이다. “7만4000평 규모의 산에서 활용하는 땅은 5000평이 안 돼요. 해야 할 일들이 많아요. 단순히 농작물을 심고 수확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에게 자연과 숲을 즐길 수 있는 새로운 체험공간을 제공하고 싶어요. 요즘 주목받는 야외활동인 오리엔티어링(orienteering, 지도와 나침반만을 이용해 목적지를 찾아가는 야외 스포츠)이나 라디엔티어링(radienteering, 지도와 나침반 대신 라디오를 지참하고 정해진 주파수에서 방송되는 안내에 따라 정해진 지점으로 이동하는 게임) 같은 서비스를 구상하고 있습니다. 자연으로 오셔서 맘껏 즐겨주세요(웃음).”
- 2017-08-17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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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내와 약속한 서유럽 여행
- 아내는 집을 7일씩 비운 적이 거의 없다. 장남인 필자에게 시집와서 아이 둘을 키우고 시어머니를 모시는 와중에도 필자의 네 동생들 학업을 지원하느라 적잖은 고생을 했다. 그뿐인가? 명절 때는 처가가 멀리 있는데다 시집간 동생들이 시차를 두고 인사를 와서 친정에 한 번도 가보지 못했다. 누가 처갓집이 멀수록 좋다고 했는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요즘에는 아들 둘이 다 결혼해서 우리 부부는 젊어서 제대로 누리지 못한 인생 2막의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다. 게다가 아내는 무려 15일간 친하게 지내던 동네 주부들과 동유럽 여행을 함께 다녀왔다. 아내에게 그런 여유가 생긴 건 좋았지만 아내의 빈자리는 너무 공허했다. 아내는 혼자 있을 필자를 위해 이런저런 것들을 미리 준비해놓고 떠나 숙식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래도 아내가 없는 침실은 쓸쓸했다. 특히 밖에 나갔다가 돌아왔을 때 필자를 기다리는 아내 모습이 보이지 않아 허전했다. 마치 아내가 멀리 떠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필자가 직장생활을 할 때 1개월 이상 해외 장기출장도 했고, 1년 이상 파견근무도 했는데 그때 아내와 우리 가족들이 얼마나 힘들었을지 비로소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바쁘게 직장생활을 하느라 아무 생각 없이 지냈는데 시니어의 삶을 사는 지금은 아내가 없는 보름간의 시간이 너무 공허하고 힘들었다. 아내가 없는 보름이라는 시간은 마치 먼 훗날 우리 내외 중 한 명이 저세상으로 갔을 때 어떻게 살아야 할지 예행연습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아내의 빈 공간이 그렇게 크고 넓을 것이라고는 이전에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다. 아내가 돌아오면 그동안 고생한 세월에 대해 고맙다는 표현을 하고 그만큼 더 잘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내가 동유럽 여행 중에 보내주는 문자와 카톡으로 보내오는 사진은 마치 천국에서 보내주는 선물 같았다. 그렇게 반갑고 기쁠 수가 없었다. 필자도 과거에 회사 다닐 때 아내와 함께 다녀온 북한의 겨울 개골산 여행에서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주었다. 얼마나 다행인가? 아직 건강해서 하고 싶은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필자가 직장 다닐 때 퇴직하면 함께 세계여행을 다니자고 아내에게 약속한 적이 있는데 아직 그것을 실행하지 못하고 있다. 아내는 그 약속을 믿고 기다리다 도저히 현실성이 없다고 보고 동네 친구들과 유럽행을 결심한 것이다. 아내가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후 혼자서 생활하는 것이 힘들었지만 아내가 여행 중에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오히려 행복했다. 여행을 함께하지 못한 죄책감 혹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한 미안함도 들었다. 앞으로 우리 부부는 이행해야 할 숙제가 남아있다. 아내가 친구들과 서유럽 여행을 할 기회가 있었는데 필자와 함께 간다고 빠진 적이 있기 때문에 서유럽 여행은 꼭 함께 해야 한다. 나이가 들다 보니 시간과 돈이 문제가 아니고 건강이 제일 걱정이다. 요즘 아내는 과거에 비해 몸이 많이 안 좋아졌다. 지난 2개월간 허리 통증으로 힘들어하더니 요즘은 다리가 아파 계속 병원과 한의원에 다니고 있다. 쉽게 낫을 것 같지 않아 걱정이다. 여행 약속은 건강이 허락할 때 빨리 이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몸이 허락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요즘 필자는 간곡한 화살기도를 하고 있다. 아내가 하루빨리 회복해 옛날처럼 산행도 하고 여행도 함께할 수 있도록 건강을 회복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이번에 건강을 회복하면 더 나이 들기 전에 서유럽 여행 약속부터 지켜야 할 것 같다.
- 2017-06-12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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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스런 나의 며느리들
- 필자는 슬하에 아들만 둘을 두었다. 딸 하나를 더 갖고 싶었지만 관상쟁이로부터 사주팔자에 아들만 셋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 딸 갖는 것을 포기했다. 그러니 남의 집 딸들만 봐도 사랑스러웠다. 딸 갖기를 포기한 이유 중 하나는 아들 둘이 너무 활발한 삶을 살았던 탓도 있다. 결혼 전 자식은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했지만 세월이 흘러 시대가 바뀌니 자식 양육도 옛날 같지 않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이 가끔 아쉬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들들이 성장해 해병대에서 군복무를 마친 차남은 울산에서, 육군 학사장교 출신인 장남은 서울에서 살게 되었다. 그 뒤 혼자 가족이 살던 집을 지키고 있던 둘째가 마침 혼기가 찬 여자 친구가 있어 먼저 결혼을 허락했고, 현재 아들을 놓고 잘 살고 있다. 울산에서 가족과 함께 살던 아파트에 보금자리를 튼 둘째 내외는 집 사기 힘든 시대에 어쩜 복이 많은 아이들인 것도 같다. 작은 며느리는 손자가 커가는 사진을 수시로 카톡으로 올리거나 한 주가 멀다 하고 화상통화를 해서 우리 부부를 즐겁게 해준다. 필자의 아버님은 효자였다. 그 핏줄이 이어졌는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손자들이 일찍 작고하신 아버님의 효심을 그대로 빼닮아 참 고맙기도 하고 장하기도 하다. 물론 가끔 필자의 투박한 말투를 닮은 둘째가 눈에 벗어나기도 하지만 말이다. 작은 며느리는 결혼 전 필자를 처음 만나 인사하는 자리에서 남편이 될 우리 둘째를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당돌한 이야기를 해서인지 멀리 떨어져 살고 있지만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다. 실제로 집안일이나 무슨 일을 할 때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할 정도로 아주 일을 잘하는 며느리다. 첫째는 결혼 결심을 늦게 해서 둘째보다는 좀 늦게 결혼을 했다. 아직도 신혼의 꿈을 즐기고 있는 큰아들이 몇 주 전에 우리를 초대해 퓨전음식을 대접했는데 요리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레시피를 보고 했다는데도 마치 프로가 만들어낸 요리를 먹는 듯 맛있었다. 특히 정성을 들여 만든 하트 모양의 전은 너무 예뻐서 먹기가 망설여 질 정도였다. 두부와 함께만든 고기 요리 또한 일품이었다. 맛과 모양이 함께 뛰어나니 어느 유명 레스토랑에서나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은 것 같아 며느리에게 금일봉을 주면서 칭찬을 해줬다. 음식솜씨가 남다른 큰며느리임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큰며느리의 100세 시대 행복한 삶을 위해 필자가 무엇을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해봤지만 당장 생각이 나질 않는다. 서울 사는 큰며느리는 제사와 명절 때 빠지지 않고 일찍 와서 시어머니와 제사 음식을 준비한다. 그 모습이 참으로 든든하고 좋다. 맏며느리로 시집와서 필자 아내가 늘 혼자 고생하면서 준비를 했는데 며느리가 손을 보태니 너무나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물론 둘째 며느리도 차례에 참석할 때는 손위 형님을 깍듯이 대하며 우애 있게 잘 지내는 것 같다. 어느 날 우리 부부는 큰아들 부부가 좋아한다는 간장게장을 담아주기 위해 함께 노량진 수산시장을 찾아가 봄에 가장 맛이 좋다는 암꽃게를 샀다. 아내는 처음 만들어본다는 꽃게 간장게장을 정성들여 만들어 아들들에게 보냈다. 아들과 며느리들은 맛이 환상적인 게장이라며 감사인사를 했고 그날 아내는 내내 행복해했다. 요리솜씨가 좋은 필자의 아내는 둘째 아들 내외가 명절에 올라올 때마다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해 잔뜩 챙겨준다. 둘째는 명절 귀갓길에 짐꾼 노릇을 하느라 힘들었을 것 같다. 우리 며느리들은 박사도 아니고 절세미인도 아닌 평범한 며느리들이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소중한 며느리들이다. 두 아들 내외 모두 화목하고 서로 위하면서 살고 있으니 이보다 행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이웃에 사는 어느 집 며느리는 얼굴도 예쁘고 똑똑하다고 소문이 났지만 남편과 신혼 때부터 불화를 겪고 있다고 한다. 한 번은 육탄전을 벌이며 대판 싸워 이혼 직전 상태까지 갔단다. 아내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그 집 시어머니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란다. 우리 집 며느리들은 남편을 위하고 동서간의 우애도 좋으니 얼마나 기특하고 고마운지 모르겠다. 내년 새해 며느리들에게 주는 절값은 금년의 배로 올려줘야 할 것 같다.
- 2017-05-31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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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가 소년 임충휴 나전칠기 명장이 되다
- 이맘때쯤이었다. 1962년 완도 앞바다의 햇살은 따뜻했다. 바닷가엔 조개껍데기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뱃머리에 선 소년은 이 정도 기온이면 다시는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 안심했다. 당시만 해도 전라남도 완도에서 서울로 가려면 배를 두 번 타야 했고,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14세 소년은 멀고 긴 상경길이 걱정되지 않았다. 고향에는 다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금의환향을 위해서는 차라리 먼 여정이 낫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눈 앞의 조개들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나전칠기 대한민국명장 임충휴(任忠休·67)씨다. “원래 어릴 때부터 공부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했죠. 신문팔이며 구두닦이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서울의 추위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한 달 만에 집으로 도망쳐왔어요. 그리고 날이 좀 풀렸을 때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동네 이장이셨던 아버지는 그때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다시 도망쳐올 것 같으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성공하려면 인내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임충휴 명장은 그날부터 아버지의 조언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다. 그의 작업실 한쪽에는 큼지막하게 쓰인 ‘忍耐’라는 글자 액자가 걸려 있다. 그는 두 번째 상경 때 생각을 바꿨다. 무작정 돈을 좇기보다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천의 라이터 공장에 들어갔다. 그의 성실함이 통했는지 후암동의 한 공장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전칠기 공장이었다. 나전칠기를 처음 본 소년은 바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영롱한 빛깔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전복 껍질은 지천에 널린 흔한 것이었지만, 주걱 대신 무엇을 긁을 때 말고는 쓸모가 없었다. 그런 하찮은 것이 이렇게 아름답게 변하다니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그는 이 기술을 꼭 자기 것으로 만들겠노라 다짐한다. 월급·휴일 없어도 감지덕지 그러나 기술을 익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 3년간은 월급도 받지 못했다. 그저 명절 때 주는 옷 한 벌과 간식 정도 사먹을 수 있는 용돈이 전부였다. 일요일도 없었다. 휴일은 한 달에 한 번뿐이었다. 그래도 숙식을 해결하며 어깨너머 기술을 훔쳐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작업만 고됐던 것이 아니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청소를 하느라 손과 무릎에는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아직도 그의 몸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말도 못하게 힘들었죠. 어린아이에게는 벅찬 일들뿐이었어요. 당시엔 기술자 중 상당수가 통영 분들이었는데, 연장 명칭은 죄다 일본어였죠. 전라도 출신 아이가 일본어가 섞인 경상도 사투리를 어떻게 알아듣겠어요. 그런데 말도 못 알아듣는다고 혼났죠(웃음).” 엄격한 교육은 요령을 부리지 않고 길고 번거로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제대로 된 완성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도록 해줬다. 전통 공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그는 이미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중일(잡부가 아닌 정식 기술자의 초보 단계) 자리를 줄 테니 공장을 옮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된 공장은 보문동의 조안공예사. 이곳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김태희 선생의 제자 안승권씨가 운영하던 공장이었다. 임충휴 명장은 아직도 당시에 인연을 맺은 13명과 친목회를 통해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그를 담금질한 성공과 고난의 시간들 제대로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날아갈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순탄하지는 않았다. 옻칠에 사용되는 고운 토분(土粉)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흙먼지를 마셔야 했고, 나무판자 표면을 곱게 고르는 작업에 종일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또 정신없이 5년을 보내고 나니, 임충휴 명장은 업계에서 꽤 알려진 기술자가 돼 있었다. 탐을 내는 사람도 많았다. 말 그대로 어엿한 기술자였다. 웬만한 화장대나 문갑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실력이 됐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스카웃 제의가 있었다. 이번에는 김호창 선생이었다. “김호창 선생님 덕분에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죠. 제 성실함을 눈여겨보셨는지 4년 만에 그 공장에서 공장장을 맡게 됐어요.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많고, 실력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악착같은 제 모습이 맘에 드셨나봐요. 그곳에서 공장장으로 일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제 회사를 차리게 됐어요. 독립하고 나서도 선생님이 하청을 주고 신경을 써주셔서 자리 잡는 데 큰 고생은 하지 않았어요.” 어렵게 융통한 300만원이 밑천이 됐다. 시작은 직원들 먹일 밥 지을 곳이 없어 비 맞으며 음식을 할 정도로 열악했다. 전라도 사람을 차별하는 풍토도 있어 어떻게든 신용만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성공이라는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그때는 9자 나전칠기 장롱이 300만원 정도 했어요. 그 돈이면 당시 시골에서 논 20마지기(약 6000평)를 살 수 있었어요. 고향에서 장롱이 그 가격이라고 하면 믿지 않았으니까요(웃음). 덕분에 여러 고관대작의 집에 들락날락했는데 그분들 중에 재벌이나 국회의원, 장관도 있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삼성종합건설의 부탁으로 쿠웨이트 영빈관에 줄 선물로 자개병풍을 만든 것이에요. 사진이라도 하나 남겨놨으면 좋았을 텐데….” 인내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뚝섬과 성남에 나눠져 있던 그의 작업장에는 직원이 어느 새 100명에 달했다. 제대로 된 9자 나전칠기 장롱이 만들어지는 데는 6개월이 걸리는데, 그의 작업장에서는 하루에 하나꼴로 완성됐다. 그만큼 꾸준한 수요가 이어졌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사랑받았다. “당시 나전칠기 장롱은 주부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어요. 누구나 갖고 싶어 했고, 부의 상징이었죠. 실제로 정부에서는 이 장롱을 사치품으로 간주해 특소세 인지가 있어야 거래가 가능하도록 했어요. 주부들이 자개장을 갖기 위해 계모임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어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어려움이 닥쳤다. 1978년 2차 유류 파동에 잠시 휘청했던 사업이 좀 견뎌지나 싶더니 1997년 IMF라는 직격탄을 맞고 말았다. 현찰 대신 받았던 어음들은 줄줄이 부도가 났다. 당시 부도난 어음의 총규모는 12억8000만원 정도. 개인사업자가 넘길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당시 인사동과 명동, 신설동에 거래하던 가게들이 많았죠. 물론 대부분 어음으로 거래를 했어요. 받지 못한 돈이 12억이 넘었어도 절 믿고 따라준 거래처, 직원들을 실망시킬 순 없었죠. 몇 채 가지고 있던 집들을 모두 처분하고 빚잔치를 했죠. 직원들에게 퇴직금도 조금씩 챙겨주고. 그러고는 칠기와는 인연을 끊으려 했죠.” 실제로 그는 칠기와 잠시 이별했지만 다시 돌아왔다. 그도 천직을 잊기 어려웠지만, 그의 솜씨가 사장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주변의 만류도 컸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진성옻칠공예가 다시 부활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과거의 제작 방식과 전통 소재에 더욱 집중했고, 이러한 노력은 2004년 노동부의 칠기 분야 명장 지정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는 명장 지정 이후에도, 전승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 한국옻칠공예대전 금상 수상, 대한민국명장회 최우수 명장 위촉 등으로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고 있다.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냈다며 주는 상 같았어요. 그간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습니다.” 그는 명장 제도가 기능인들의 사기를 살리고, 상공인들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칠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나전칠기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자개 장식에 관한 것. 나전칠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자개 장식이다. 이 자개 장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구는 높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일까? 임 명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칠기의 생명은 곱고 투명하게 옻칠을 하는 실력과 옻칠의 재료인 칠액에 있어요. 칠액은 옻나무의 수액을 정제해서 만드는데 1Kg에 70만원을 호가하기도 해요. 그래서 예전엔 저렴한 동남아에서 캐슈(cashews) 나무 수액으로 만든 칠액을 쓰는 곳도 있었어요. 사실 자개가 가구 표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넓으면 넓을수록 만드는 과정은 쉬워요. 또 자개 재료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요. 그래서 자개는 약간의 장식으로만 쓰인 옻칠 가구가 훨씬 귀하고 비쌉니다.” 또 옻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조금 다른 방법으로 진행된다. 말리는 과정이 그렇다. 칠액을 바르고 말리고 바르고 말리는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어야 제대로 된 옻칠의 광택이 살아난다. 투명 옻칠은 이 과정을 스무 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보통 말린다는 표현은 수분이 날아가 표면이 단단하게 굳는 것을 의미하지만, 옻칠은 물로 말린다. 습도가 80% 이상 되는 곳에서 표면을 굳혀야 특유의 투명함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업실의 건조장 바닥은 늘 흥건하다. 이렇게 천연재료로 만들어진 칠기는 모양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훌륭한 생활 도구가 된다. 환경호르몬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아토피 같은 질환을 예방하는 데도 좋은 친환경 재료로 알려져 있다. 칠기 가구가 아기용 옷장으로 입소문이 난 것도 이 때문이다. 잘 썩지도 않고 불도 잘 붙지 않는다. 후진 양성을 위한 노력 임충휴 명장은 최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옻칠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보통의 장인이라면 옻칠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 마음먹은 제자들 중에서 후계자를 골라 기술을 전수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업계의 가장 큰 문제는 일할 장인이 없다는 것이에요. 특히 자개장 같은 건 기능인이 부족해서 웬만한 곳에서는 만들 엄두도 못 내요. 50세 정도는 이제 현장에서 젊은 축에 듭니다. 예전엔 옻칠조합 회원이 100명도 더 됐는데, 이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가 돼서 조합도 없어졌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후진 양성이다. 군포시에 위치한 서울남부기술교육원 옻칠나전학과에서 취업이나 취미를 목적으로 모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술을 가르친 지 2년이 됐다. 이제 그를 사사한 학생이 100명이 넘는다. 장인에게 기술은 밥줄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는 교육원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전통공예를 현대적 디자인에 접목하고 싶어도 매일 비슷한 것만 만들어온 사람들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칠기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한데 말이죠. 그런데 교육원에서 학생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제가 배우는 기분이에요. 실제로 미술 전공자들도 많이 있고요. 이제 교육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일은 제 인생에서 보람 있는 일 중 하나가 됐어요.”
- 2017-04-0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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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설날 음식] 어린 시절의 설날 풍경은 어제처럼 생생한데…
- 얼마 전까지만 해도 떡국은 설이나 결혼식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명절마다 먹는 음식이 정해져 있어 그날이 되면 색다른 음식을 먹은 이야기가 화제가 되곤 했다. 그러나 요즘은 언제라도 명절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제철 아닌 과일도 늘 맛볼 수 있다. 기다리는 기쁨을 빼앗긴 기분이다. 설날이 다가오면 장보기와 음식 장만하기가 김장을 하는 것만큼이나 커다란 행사여서 재래시장이 북적이고 정다운 덕담들이 오가곤 했다. 친척들은 돌아가며 청주나 과일을 들고 인사를 왔고 또 싸서 보낼 것을 대비해서 음식 장만이 만만치 않았다. 추운 겨울 새벽에 엄마가 흔들어 깨우면 언니와 필자는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껴입고 불린 쌀을 나누어 이고 방앗간으로 향했다. 방앗간엔 사람들이 주욱 늘어서 차례를 기다렸다. 우리도 그 줄에 서서 기다렸다. 털신을 신고 있어도 발이 엄청 시렸고 볼은 추위에 떨어져나가는 듯했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방앗간 안으로 들어가면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뜨거운 떡시루에서 뿜어져 나오는 김으로 온통 뿌옜다. 쌀을 빻고 떡으로 찐 뒤 가래떡 기계에 넣으면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가래떡이 두 줄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방앗간 아저씨는 적당한 길이로 잘라 서로 붙지 않게 물에 담갔다가 우리가 준비해간 함지박에 나란히 줄을 세워 담아주었는데 마지막에는 자투리가 두 줄로 끊어지곤 했다. 자투리는 언니와 필자의 몫이었다. 그 가래떡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가래떡에서는 구수한 쌀 냄새가 확 풍겼다. 뜨거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훨씬 따뜻하고 신났다. 언니와 필자는 균형을 잘못 잡아 휘청거리며 걷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함지박이 떨어질까봐 긴장하며 꼬옥 잡고 걸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엄마가 함지박을 반갑게 받고 나면 식구들이 둘러앉아 가래떡을 조청과 간장에 찍어 맛을 보았다. 그 쫄깃하고 폭신폭신한 맛은 방앗간에서 바로 빠져나온 떡이 아니면 맛볼 수 없다. 이후 떡을 가지런히 펴서 밖에 내놓고 적당히 굳어지면 모두 둘러앉아 떡을 칼로 썰었다. 가마솥에선 육수를 내는 구수한 냄새가 밤새도록 났고 엄마는 부엌 불을 밝히고 밤새 음식을 만드셨다. 필자가 잘 때도 일어났을 때도 엄마는 부엌에 계셨다. 도마소리와 기름에 음식 지지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대구나 조기, 생태를 사다 눈과 바람에 말렸고 그것을 찜으로 상에 올리시곤 했다. 설날 아침에 상을 차리고 음식이 한둘씩 오르기 시작하면 신이 나고 침이 꼴깍 넘어갔다. 움집에 묻어놓은 김치는 미리 꺼내오면 맛이 없다고 상차리기 바로 전에 꺼내곤 했는데 주로 막내인 필자가 그 일을 담당했다. 김칫독은 필자의 키와 거의 비슷해서 어떤 때는 물구나무서듯해서 꺼내야 할 때도 있었다. 또 김치를 손에 잡기는 했는데 절반쯤 빠져 있는 몸을 들어 올리지 못해 낑낑댈 때도 있었다. 독 속에서 엄마를 부르면 오빠나 언니가 달려와서 필자 다리를 끌어당겼다. 그 시절 “엄마~” 하고 불렀던 소리가 아직 메아리처럼 들리는 듯한데 이제 엄마는 떠나시고 나만 남았다. 모든 생명은 끝이 있지만 그리움의 끝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필자도 아이들에게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게 되기를 바란다.
- 2017-01-11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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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설날 음식] 명절 음식 하느라 고생 안 하는 이유
- 설날 음식을 위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명절 며칠 전부터 만나서 준비하는 것은 이젠 그만 해야 하지 않나 싶다. 며느리를 맞이하고 첫 설날, 시어머니의 위상을 세우기 위해 어려운 음식을 해내고 싶은 마음과 그냥 편하게 보내자 하는 두 마음의 갈등이 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즈음 외부에서 할 일들이 이어졌다. 그래서 명절 음식은 대부분 백화점에서 사고 몇 가지의 요리만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동태전, 버섯전, 동그랑땡 등을 구색 맞춰 구입한다. 나물도 고사리, 시금치, 도라지 등 삶은 것으로 구입한다. 필자가 직접 만든 것은 갈비찜을 비롯해 몇 가지뿐이다. 아들과 며느리에게 명절날 오라고 하니 매우 좋아하는 눈치다. 드디어 명절날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한다. 아들과 며느리가 도착하기 전에 필자는 음식을 모두 데우고 볶고 플레이팅한다. 이 일도 결코 쉽지 않다. 새삼스럽게 친정어머니와 올케들에게 고개가 숙여진다. 친정어머니는 며느리가 사용할 깨끗한 그릇과 이불과 요를 준비하고 집 안의 청결함까지 보여주고 싶었는지 그릇을 다 꺼내어 닦고, 이불과 요 커버도 시침질하고 대청소까지 하셨다. 왜 그렇게까지 하실까 했는데 며느리를 맞이하고 보니 알겠다. 필자도 신경이 쓰인다. 며느리만 신경 쓰이는 명절이 아니다. 시어머니도 예민해지는 명절이다. 냄비를 닦다가 힘들어서 같은 브랜드로 아예 새로 구입했다. 명절날 온 가족이 음식을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낀다. 심지어 며느리가 “어머니 맛있어요~” 한다. 양만 많으면 포장해서 보내고 싶다. 이 대목에서 필자는 아들과 며느리에게 솔직히 고백한다. “엄마가 한 요리는 세 가지뿐이야. 그 외에는 모두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구입한 것이니 오늘 맛있게 먹고 가면 대만족이야. 포장을 해달라거나 어떻게 만든 거냐고 자세히 묻지 마.” 유머 있게 한마디 했더니 웃으며 이미 눈치 챘다고 한다. 며느리도 누구네 집 딸이다. 결혼했다고 해서 시댁에만 충실할 필요 없다. 시누이나 친척이 오면 꼼짝 못하고 수발 들다 친정도 못 가 뒤늦게 형제자매들이 다 가버린 썰렁한 친정집에 잠깐 들러 친정어머니 얼굴만 겨우 보고 온다는 불평을 이미 동네 분들에게 들었기에 필자는 명절 음식 만드는 데 드는 시간과 수고를 덜고 싶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필자도 아들 내외 보내고 친정에 계신 오빠들 내외와 함께 놀기 위해 달려가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가 직접 만들어준 맞춤 커피는 한 잔 마셔야지~~.” 아들의 말에 행복해져서 바리스타 엄마의 커피 제대로 만들어서 과일과 함께 내어준다. 친구들과 맘껏 즐길 시간이 없었던 학창 시절 학창 시절 필자는 또래 아이들과 다른 인생을 살았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개인 집 과외 선생을 했다. 교사였던 아버지가 퇴직하면서 출판사 사업을 하다가 몇 차례 실패하면서 퇴직금은 물론 집까지 없어져 단칸방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집주인의 아이들은 네 명이었는데 숙제만 봐줘도 감사하게도 성적이 올라가니 아예 자신의 집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의 성적관리, 생활관리를 해달라 부탁했다. 그렇게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입주 과외를 시작했다. 공부는 물론 잘 때는 입던 옷을 개어 머리맡에 놓고 자는 바른생활 습관도 함께 가르쳤다. 둘째였던 큰아들이 필자가 잘 가르쳐줘서 공부에 재미가 생겼고 그 덕에 최고의 대학에 들어갔다고 길에서 아버지와 마주한 주인댁 아저씨가 한 말씀 하시더란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절 용돈도 받아가면서, 가정 형편이 좋은 댁에서 과일도 먹고 나이가 어려도 선생님 대접을 해준 게 필자는 고맙다. 그 시절 친구들은 함께 독서실에서 공부하고 여기저기 몰려다녔다. 그러나 필자는 학교 수업만 끝나면 합창반 연습시간 외에는 맡은 바 책임을 다하려고 집으로 달려왔던 기억이 난다. 주인댁 아저씨가 아이들 데리고 신림동에 새로 생긴 신림극장에서 영화를 보라며 종종 돈을 줘서 아이들과 재미있게 영화를 관람했던 기억도 난다. 새로 오픈한 극장이라 들어오는 손님을 무조건 받았는지 잘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몇 세 이하 입장 불가도 없었다. 그때 국내외 고전영화를 참 많이도 봤다. 필자는 네이버 고전영화카페에 가입해 10년 이상 활동 중이다. 중요한 모임이 있어도 웬만하면 정기 상영회는 빠지지 않는다. 지금도 보고 싶은 영화는 개봉일을 기다렸다가 개봉하자마자 가장 먼저 달려가서 본다. 학창 시절부터 영화를 자주 보던 습관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주인집에서 이사한 뒤로는 집 근처에서 다른 집 남매에게 또 과외를 했다. 그 집 남편은 이란으로 돈 벌러 갔다 했다. 남매의 어머니는 일단 아이들이 고등학교에 합격하는 게 최고의 소원이었다. 고등학교 합격이 걱정일 정도로 공부를 못했던 터라 필자는 맘이 급했고 급기야 스스로 짐을 싸서 그 집으로 입주했다. 아예 지키고 앉아서 아이들을 공부시키고 필자도 공부하며 밤을 새울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어디선가 함께 나이 들어가고 있겠지만 순수하고 착했던 그 아이들이 오늘따라 기억이 많이 난다. 고등학교 합격 소식이 있던 날, 아이들 어머니는 필자에게 고맙다며 겨울 외투를 사주었다. 그 댁 아이들과 아주머니의 안부가 가끔씩 궁금하다. 그 뒤로 필자는 대학 두 곳을 모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잘 마쳤다. 어린 시절부터 해온 개인과외, 그룹과외, 입주과외는 필자에게도 많은 공부가 되었다.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공부하면서 필자 자신도 많은 실력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대학교 4학년 때오빠들은 혼자서 잘 살아가는 필자가 기특하고 안쓰러워 보였는지 등록금을 마련해줬다. 대학 졸업식 때는 여러 가지 생각에 눈물이 앞을 가렸다. 그날 오빠들과 찍은 사진 속에서 필자는 울고 있었다. 다시 학창 시절이 돌아오면 남들 공부 봐주는 일은 하고 싶지 않다. 그 나이에 맞게 친구들과 발랄하게 웃고 떠들면서 시간도 보내고 내 공부를 더 충실히 하고 싶다.
- 2017-01-0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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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캐럴송이 사라져버린 크리스마스
- 세월 따라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마는 크리스마스 날이 예전과 다르게 이렇게 조용하게 변할지는 몰랐다. 어릴 적 크리스마스이브는 무조건 교회 가는 날이었다. 교회 가는 목적은 단 하나, 종이봉투 속에 빵과 사탕 몇 개를 담은 선물 봉지를 받고 싶어서다. 그 당시 시골 아이가 크림이 들어 있는 단맛 나는 빵과 알록달록한 사탕과 과자를 얻어먹는다는 것은 횡재라고 부를 만큼 기쁜 일이었다. 제삿날 밤늦게 기다리다 얻어먹던 하얀 쌀밥에 참기름 넣은 나물 무침과 상어고기 한 토막과는 또 다른 맛이었다. 예전에는 크리스마스 무렵이 되면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전자제품 A/S센터가 없던 시절이라 골목마다 라디오 고치는 전파사가 있었는데 하루 종일 징글벨 노래가 울려 펴졌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루돌프 사슴코 노래도 엄청 들었고 창밖을 보라, 실버 벨, 기쁘다 구주 오셨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등 메들리 캐럴송이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교회에서는 긴 망토를 입은 세 명의 동방박사가 예수님 탄신을 경배하기 위해 찾아가고 예수님은 구유에서 태어나시는 모습을 주제로 한 연극을 했고 어린이 관객은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필자가 고등학생일 무렵에도 떠들썩한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변함이 없었다. 교회 다니는 신도들보다 교회 다니지 않는 친구들이 더 야단이었다. ‘광란의 올나이트’라고 이름 붙이고 밤새 춤추고 노래 부르며 놀았다. 그날만큼은 통행금지도 없었고 교인들의 행렬도 장관이었다. 특히 연인들은 그날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만나야 하는 날이었다. 필자가 초년 직장인이었던 시절에는 경제 부흥의 여파로 세상이 역동적이고 경기도 좋았다. 크리스마스를 시발점으로 하여 연말연시는 늘 시끌벅적했다. ‘Ma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라는, 즉 크리스마스와 새해 신년인사를 함께 하는 카드를 주고받는 것이 유행이었다. 일 년 내내 소식 한 번 전하지 않고 지내다가도 이때 다양한 카드를 주고받으면 모든 죄(?)가 용서되었다. 그림 솜씨가 좋은 학생들은 직접 그린 수제 카드를 길거리에서 팔았다. 그림이나 글귀가 좋은 것은 책상 유리 밑에 끼워두고 오래 보기도 했다. 요즘은 크리스마스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고 넘어간다. 길거리에서도 캐럴송을 들어본 지 오래다. 캐럴송이 사라진 이유는 저적권법에 걸려 고액의 사용료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노랫소리가 듣기 싫은 사람들이 소음공해로 민원을 제기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TV 방송이나 라디오에서도 예전만큼의 캐럴송이나 크리스마스를 주제로 한 가슴 훈훈한 이야기들을 특별히 소개해주지 않는다. 부처님 오신 날이든 예수님 탄신일이든 정부에서 경축 기념일로 정한 날은 세상이 좋은 쪽으로 조금은 시끌벅적하면 좋겠다. 해당 종교를 안 믿는 사람에게도 공휴일의 혜택은 다 같이 주어지기 때문에 종교 기념일이라고 굳이 색안경을 끼고 반대할 명분도 약하다. 해당 종교를 믿든 안 믿든 기쁜 날로 생각하며 시끌벅적 사람 사는 냄새가 나면 좋겠다. 브라질의 삼바 춤 축제는 열흘이나 이어진다고 한다. 일본에도 지역별로 진행되는 다수의 ‘마츠리’ 축제가 있다. 건강, 사업 번창 등을 기원하는 일종의 종교행사다. 우리나라도 예전부터 농한기가 되면 풍악을 울리고 명절 때는 마을마다 다양한 놀이가 있었다. 이런 자발적인 축제는 이제 다 없어지고 얼토당토않은 관 주도의 행사에 뒷말만 많다. 크리스마스 날만이라도 저작권료나 소음공해민원 걱정 없이 신나는 캐럴송이 온 나라에 울려 퍼지는 좀 시끌벅적한 날이 되면 좋겠다.
- 2016-11-30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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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나 가야 할 곳을 바라보는 시간
- 앞서거니 뒤서거니 아침에 눈을 뜨면 처음 생각나는 사람, 그 사람이 친구고 보약 같은 친구란다. 가요 노랫말이다. 지금은 하늘나라에서 편안히 계실 필자의 어머니는 아흔이 지나면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어릴 때부터 함께했던 친구에게 안부전화를 하면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어느 날은 어머니가, 어느 날은 친구분이 먼저 전화하셨다 특별히 그러자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닌데 한 분이 먼저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매일매일 지켜진 약속이었다. 지난 9월, 두 분의 형님이 돌아가셨다. 여든여덟의 동갑내기 시누이올케 관계다. 몇 해 전부터 집안 모임에서 만나실 때마다 두 분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올해는 우리 둘 중 한 사람은 꼭 갈 것이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을 만날 때마다 여러 번 반복해서 다른 가족들은 나이든 분들이 하는 넋두리려니 했다. 그러고는 두 분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한 달을 시차로 돌아가셨다. 덮지도 춥지도 않은 계절에 편안한 곳으로 동무해서 가신 거다. 평균수명은 채웠고 고통스럽지 않은 마지막이었다. 복 받은 거로 생각하자는 주고받기 위로가 있었지만 떨어지는 낙엽만큼 덧없는 인생을 생각하느라 서로의 깊어진 표정은 어쩔 수 없었다. 낙엽 지듯이 오랜만에 뉴욕의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서는 맥 빠진 목소리로 *살맛 잃어 죽을 지경이라고 한다. 친구는 노인아파트에서 5년째 살고 있는데 건강하게 자기 시간을 잘 요리하며 산다. 취미도 다양하지만 은퇴 후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배워둔 것이 많아 은퇴 전보다 더 바쁘게 산다. 은퇴는 또 다른 시작이라며, 살짝 가려진 다른 세상으로의 여행일 뿐 겁먹을 것도 안달할 것도 없다며 씩씩하게 말하는 친구다. 지난 두 주 동안 같은 아파트의 입주자 다섯 분이 타계했단다. 물론 연령은 80대 후반에서 90대 초반이지만 사는 게 너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어 우울하다고 했다. 노인아파트에 입주하는 시기에는 누구나 한 번쯤 심도 있게 점점 더 다가오는 죽음을 생각하게 된다. 이를테면 앞으로 갈 길 닦으려는 준비다. 누구나 가야 할 곳을 바라보는 시간이다. 여로의 동반자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 그 길이 당연하고 피할 수 없는 길임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한꺼번에 떠나는 사람들을 보니 강철 여인도 어쩔 수 없는 감상에 빠졌나보다. 장의사도 성수기가 있고 비철이 있단다. 처음에 들었을 때는 이해할 수 없었다. 죽음은 계획하거나 예약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저승사자의 출두시간을 관장하는 존재라도 있다는 말인가. 그러고 보니 명절 후나 큰 가족 행사 후 세상을 뜨는 노인분들이 많다는 통계도 있다. 물론 신체 건강한 분이 그러는 경우는 드물겠지만 만약 죽음의 시간이 정해져 있다면 천당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 보고, 하고 싶은 말 하고, 친지들과도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기회를 저승사자라도 빼앗을 수는 없겠다. 명절이나 가족의 중요한 행사에 마지막으로 동참하고 싶은 열망은, 그리고 그 열망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신이 주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의 아름다움을 마지막으로 완성하고 싶은 인간의 의지일지도 모르겠다.
- 2016-10-21 16: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