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일곱 번째는 해남 대흥사로 ‘한국의 산사 7곳’을 마무리하는 순서이다.
대흥사는 백제시대에 창건된 유서 깊은 도량으로 옛날에는 두륜산을 대둔산(大芚山), 혹은 한듬산 등으로 불렀기 때문에 대둔사 또는 한듬절이라고도 했다. 근대에 대흥사로 명칭을 바꾸었다. 대흥사 창건은 426년에 정관존자, 혹은 514년에 아도화상, 혹은 신라 말 도선국사가 창건했다는 세 가지 설이 있다.
일찍이 서산대사가 “전쟁을 비롯한 삼재가 미치지 못할 곳(三災不入之處)으로 만년 동안 훼손되지 않는 땅(萬年不毁之地)”이라 하여 묘향산 보현사에서 입적하면서도 그의 의발(衣鉢)을 이곳에 보관한 도량이다.
이후 대흥사는 한국불교의 종통이 이어지는 곳(宗統所歸之處)으로 한국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게 되면서 풍담(風潭) 스님으로부터 초의(草衣)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종사(大宗師)와 만화(萬化) 스님으로부터 범해(梵海) 스님에 이르기까지 열세 분의 대강사(大講師)가 이곳에서 배출되었다.
열세 대종사 가운데 한 분, 초의 선사로 인해 대흥사는 우리나라 차(茶) 문화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서산대사가 모셔짐과 더불어 ‘호국과 차(茶)의 성지’로 불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2교구 본사이자 대흥사 도량 전체가 사적 제508호, 명승 제66호로 지정된 명찰(名刹)이다.
넓은 산간 분지에 위치한 대흥사는 크게 남원과 북원 그리고 별원의 3구역으로 나뉘다. 북원에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침계루, 백설당 등이 위치하고, 남원에는 천불전을 비롯해 용화당, 봉향각, 가허루 등이 있으며, 남원 뒤쪽으로 조금 떨어진 별원에는 서산대사의 사당인 표충사와 대광명전, 성보박물관 등이 있다.
대흥사는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국보 제308호)을 포함하여 탑산사 동종(보물 제88호), 북미륵암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응진전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서산대사 부도(보물 제1347호), 서산대사 유물(보물 제1357호), 천불전(보물 제1807호) 등의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나름대로 구획정리를 잘한 것으로 보이는 사하촌 식당가를 지나면 대흥사가 자랑하는 십리 숲길, 또는 아홉 번 굽었다 하여 구림구곡(九林九曲)이라 부르는 멋진 숲길을 지난다. 걷거나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길인데, 시간이 되면 걸어 들어가기를 권한다.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려는지 숲길의 초입에는 거대한 산문(山門)이 세워져 있고 절 입구에는 통상의 일주문이 서 있는데 사명(寺名)의 변화를 보여주듯 산문에는 두륜산(頭輪山) 대둔사(大芚寺)라고 씌어있고, 일주문에는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현판이 걸려있다.
또한 일주문의 뒷면에는 ‘선림교해만화도량(禪林敎海滿華道場)’ 즉, 선과 교가 활짝 꽃을 피운 도량이라는 의미의 커다란 현판을 달았는데, 선(禪)과 교(敎)의 종원(宗院)으로 동국(東國) 최고의 선원이라는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어 나무로 만든 사찰 정승과 최근 새롭게 깎아 세운 돌 정승이 나란히 서있는 가운데, 13명의 대강사(大講師)를 배출한 자부심이 있는 도량(道場)이라는 석주(石柱)를 지나면 수 십 기의 승탑과 탑비가 보인다. 사명대사와 초의선사 등의 승탑이 모여 있어 발길을 멈추게 된다.
일주문을 지나 승탑들을 둘러본 후 두륜산(頭輪山) 대흥사(大興寺) 현판이 달린 해탈문(解脫門)을 들어서면 비로소 경내로 진입한 것이다. 해탈문에는 좌우로 사자를 탄 문수동자와 코끼리를 탄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대흥사 뒷산이 누워계신 와불(臥佛), 청정법신 비로자나 부처님 모습이라는 설명과 함께 정면의 건물군이 남원, 왼쪽 개울 건너가 북원이며, 오른쪽으로 더 올라가면 표충사 등 별원 지역이다.
우선 대웅보전을 보기 위하여 왼쪽 북원으로 향한다.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하는데 홍교 다리 심진교를 건너 침계루로 들어서면 일직선상에 대웅보전이 마주한다. 좌측으로는 대향각, 우측은 백설당이 가운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ㅁ’ 자형으로 모여 있다.
대웅보전의 정면 계단 소맷돌에는 구한말 일본 석공이 조각했다는 사자머리 한 쌍이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축대 위 고정 쇠고리를 물고 있는 용두(龍頭)가 눈길을 끈다. 또한 대웅보전의 오른쪽 응진전 옆 보물 제320호 삼층석탑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진신사리를 모신 탑이라고 한다.
남원 구역은 천불전을 중심으로 용화당, 봉향각 등이 돌담으로 둘러져 있다. 그 입구는 5칸 건물 가허루(駕虛褸)의 중앙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정면에 천불전(보물 제1807호)이 있고 좌우로 용화당과 봉향각 등이 가운데 중정(中庭)을 중심으로 역시 ‘ㅁ’ 자형으로 모여 있다.
가허루(駕虛褸) 현판 글씨는 비운의 명필 창암(蒼巖) 이삼만(李三晩, 1770~1845)이 썼는데 유배길에 오른 추사 김정희를 모셔 자신의 글씨를 내보이자 ‘시골에서 밥은 먹고 살겠다’는 말로 비꼬았다고 한다. 제주도 유배에서 서예에 새로운 눈을 뜬 추사가 나중에 창암을 찾아 사과하려 했으나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다.
원교 이광사나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한껏 푸대접했던 추사는 제주도에서 돌아와 자신의 무례함을 깨닫고 원교가 쓴 대웅보전 현판은 다시 달도록 하였으며, 창암은 이미 죽고 없자 애통함과 송구함으로 창암의 묘비문을 손수 써주었다고 한다.
남원의 중심건물 천불전(千佛殿)에는 석가모니불과 문수, 보현 보살상과 함께 옥석(玉石)으로 만든 천불을 모셨다. 1813년(순조 13년)에 완호 윤우 선사(玩湖尹佑禪師)가 천불전을 중건하고, 화순 쌍봉사 화승(畵僧) 풍계 대사(楓溪大師)의 총지휘 하에 경주 불석산에서 나오는 옥(玉)으로 10명의 대흥사 스님들이 직접 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하였다.
각기 다른 형태로 조각한 천불은 두 척의 배에 실려 경주를 떠났는데 그중 한 척의 배가 풍랑에 표류하다가 일본까지 흘러갔다. 기쁜 마음에 일본인들이 불상을 봉안하려 하자 현감의 꿈에 현몽하여 대흥사로 가던 길이라고 알려주어 다시 돌려보냈다는데, 그렇게 일본에 갔던 불상들 밑면에는 ‘日’자가 새겨져 있다고 한다.
남원의 오른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성보박물관을 지나 초의선사 동상이 있고 그 위로 표충사가 있다. 이곳은 서산대사와 사명당 유정, 뇌묵당 처영 스님의 화상을 봉안한 유교 형식의 사당으로 절집에서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유물전시관에는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 친필 선시, 신발, 선조가 내린 교지 등 유물과 정조가 내린 금 병풍 등이 보관되어 있다. 초의선사 동상 옆에는 장군 샘이라 부르는 샘이 있고 호국문을 지나 내삼문 격인 예제문(禮齊門)을 들어서면 표충사와 비각이 있다.
표충사 오른쪽으로는 표충비각이, 왼쪽으로는 조사당이 있는데, 유가(儒家) 형식의 사당을 꾸며 매년 서산대사의 가르침을 받드는 제례와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을 접하고 나니 대흥사를 호국의 성지라고 하는 까닭이 이해되었다.
별원 지역의 표충사를 보고 나서 내친김에 발걸음을 계속 위로 향하니 호젓하게 절에서 멀어지면서 대광명전 지역이 나왔다. 동국선원이 있어 지금은 선원(禪院)으로 쓰고 있는데, 일반인의 출입을 금하는 곳이다.
부득이 추사의 친필이 있다는 동국선원을 지나쳐 산으로 오른다. 험한 산길을 40분 넘게 숨이 턱에 닿도록 오르니 북미륵암이다. 북암이라고도 부르는 이곳의 창건에 관한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1754년에 중수했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북미륵암에는 국보 제308호 마애여래좌상을 모신 용화전(龍華殿)과 보물 제301호 삼층석탑이 있고 맞은편에는 지방문화재 삼층석탑(전남 문화재자료 제245호)이 하나 더 있다. 힘들게 올라가 볼 만한 곳이다.
열성 답사꾼이거나 불심이 깊은 신도가 아니면 찾기 힘든 북미륵암에 올라 국보 마애불상을 친견하고 나니 대흥사가 과연 명불허전임을 알겠다. 그 옛날 이토록 힘든 곳에 불상을 새긴 것은 과연 누구의 손길이며, 부처의 가피로 무엇을 이루고자 열망하였을까.
산사 일곱 곳 답사를 마치며
111년 만의 폭염이었다는 금년 여름 8월 한 달 동안 열세 번째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곱 곳 산사에 대한 연속 답사를 모두 마쳤다. 마곡사를 시작으로 법주사, 봉정사, 선암사, 부석사, 통도사에 이어 대흥사까지 돌아보고 나니 성취감과 함께 뿌듯한 자부심이 가득하다.
다시 한 번 열세 번째 세계유산 등재를 축하하며, 이제 우리의 보물이 아닌 세계의 보물,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되었으니, 답사를 마친 후 느낀 소감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세계유산 등재를 자축하거나 자화자찬에 열중할 게 아니라 세계에 내놓아 부끄럽거나 부족한 건 없는지부터 살펴볼 일이다. 필요하다면 문화재청과 소속 지방자치단체, 유관 시민사회단체, 그리고 해당 사찰 관계자들이나 조계종과 태고종 실무자가 연합하여 시정, 보완해주기 바란다.
먼저 일곱 곳 산사를 돌아보니 충실하게 준비한 소개자료, 즉 브로슈어(brochure)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그나마 통도사가 영어, 일어, 중국어 등 주요 외국어를 포함해 잘 준비하였으며 법주사 정도가 인쇄물 형태로 건네주었다. 선암사는 자체 제작한 듯 성의껏 자료를 준비하였으나 다소 미흡했고, 사찰을 소개하는 안내 자료 한 장 없는 곳이 많았다.
또한 일곱 곳 사찰 입장료도 최소 1200원부터 최대 4000원까지 몇 배의 차이가 났다. 여전히 카드결재는 안 되고 현금만 가능하다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 사찰 매표소 직원들이 절집과는 무관한 듯 세련되지 못하거나 불친절한 것이 거슬렸다.
이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촬영 금지가 지나치다. 예불이 진행 중이거나 행사 등에 방해가 되면 안 되겠지만 이유 막론하고 촬영을 하지 말라는 것은 세계유산에 등재하고, 세계에 알린다는 취지에 맞지 않는 일이다. 오히려 친절하게 설명해주고 안내해주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안내와 설명에 필요한 인원, 표지판 등이 많이 부족하다. 세계유산이 된 이상 외국어 능력도 구비한 안내요원이 상주해며, 적재적소에 다양한 언어로 설명을 비치하여 방문객의 이해를 도와야 할 것이다.
그밖에 화장실과 세면장, 음료수 급수대, 휴게시설 등을 수준 높게 구비하길 바란다. 과거에 비해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부족한 게 현실이다. 비록 종교시설이고 보호해야 할 문화재도 많지만 방문객을 배려하는 마음도 넓어지기를 기대한다.
숲으로 들어서자 솔 그늘이 짙다. 부소(扶蘇)란 ‘솔뫼’, 즉 소나무가 많은 산을 일컫는 백제 말이란다. 부소에 산성을 쌓았으니 부소산성이다. 백제 당시에는 사비성이라 불렀다. 산의 높이는 겨우 106m. 낮고 평평하나, 이 야산에 서린 역사가 애달파 수수롭다. 부소산성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백제의 도성(都城). 백제 최후의 비운과 아비규환이 화인(火印)처럼 새겨진 현장. 숲길은 참신하지만 106m 높이로 퇴적된 한(限)과 비애가 비쳐 서글프다.
8월의 지독한 폭염 아래서도 숲은 싱그럽다. 잎잎이 푸른 여름 나무들. 열정처럼, 정념처럼, 눈부시게 환히 너울거리는 저 초록 불꽃들. 매혹될 수밖에. 태풍처럼 휘몰아치는 초록의 사태는 어디까지나 고요해 평화롭다. 지친 마음을 숲길에 부려놓기 적격이다. 번잡하게 날뛰는 마음의 날치를 평온하게 길들여볼 만한 시간이다. 하지만 평온한 시간은 짧게 지난다. 평화로운 시국도 그리 길지 않다. 공주에서 부여로 천도했던 백제의 국력은 강성했다. 강성해서 평화로웠다. 하지만 종단엔 추락했다.
뭐 볼 게 있다고 부여를 여행하나? 흔히들 하는 야박한 소리가 그렇다. ‘백제문화제’가 열렬히 펼쳐지고, 백제 문화유산을 재현한 ‘백제문화단지’가 웅장한 규모로 조성됐지만 백제 당시의 유적은 놀랍게도 소소하다. 정림사지와 능산리 고분, 궁남지, 테뫼식과 포곡식 산성이 혼합된 부소산성의 흔적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문화강국 백제의 다채롭게 빛났을 유적들을 옹골차게 접할 길이 아예 없다. 참혹한 전화(戰禍)에 스러지고, 점령군의 횡포에 찢겨서다. 시절의 평화도, 문화의 정채(精彩)도 이렇게 한순간에 산산조각 난다. 오호 통재라, 망국이란 실로 완전한 소진이다. 숲의 저 천진한 생동과 우수에 찬 역사의 배치(背馳)라니.
백제의 융성한 문화는 일찍이 일본으로 흘러 일본 고대 문화의 끌텅을 이루었다. 신라 왕경 경주의 랜드마크였던 황룡사 9층 목탑은 백제의 명장 아비지의 작품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백제의 궁궐 건축을 평하길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 했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던’ 백제의 정신과 백제인의 마음을 헤아리자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찬사와 조의를 함께 표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숲의 초록 사이로 어둑한 소로가 거듭 이어진다. 뙤약볕이 간간이 스며들어 흰 강아지처럼 길에 드러눕는다. 가파를 게 없는 숲길이니 더위에 절여진 몸으로도 헐떡일 일은 없다. 길섶엔 백제를 상기시키는 건조물들이 들어서 있다. 백제의 세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의 영정을 모신 삼충사를 비롯해 군창지, 궁녀사, 영일루, 반월루, 사자루 등이 있다. 모두 백제 이후에 발굴되거나 복원되거나 현대에 이르러 신축됐다.
부소산성은 도성의 방어 기지이면서 왕궁의 후원 역할도 겸한 걸로 추정된다. 왕족들의 소풍과 산책이 숲에서 숲길에서 다반사로 펼쳐졌을 게다. 질박한 흙길로 자못 심원한 정취를 자아내는 태자골 숲길은 왕자들의 산책로였다지. 철부지 어린 왕자들이 간혹 참새처럼 조잘대며 이 숲에서 뛰놀았을까?
숲이 무성하니 고목도 숱하다. 상흔으로 겨우 선 나무도, 썩어가며 곰팡이에 몸통을 내주는 나무도 많다. 재난과 수난을 피할 길 없는 게 생태계이지만 생명은 이어진다. 한 줌 거름으로 돌아가 다른 생명의 밥이 되는 나무의 순환은 고고하다. 삶 안에 죽음이 있듯이 죽음 안에도 삶이 있다. 오직 사람만이 한 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 낙화암 벼랑에서 꽃처럼 분분히 떨어져 죽었다는 삼천궁녀들은 언제 다시 오려나.
궁녀들뿐이었겠는가. 망국과 함께 노을처럼 시든 수많은 부녀와 노약과 군병들이 백마강의 고혼으로 떠돌겠지. 백제의 마지막 임금 의자왕은 ‘해동증자(海東曾子)’로 칭송된 인물이었다. ‘과단성 있고 침착하며 사려가 깊어 명성이 홀로 높았다’는 기록 역시 의자왕이 준재였음을 웅변한다. 하지만 승자의 각색 속에 나오는 의자왕은 궁녀들과 더불어 음란과 향락에 취한 얼간이. 해서, 고인 물처럼 썩어 무너진 게 백제였다는 투의 오진이 활개를 쳤다. 낙화암 ‘삼천궁녀 전설’ 역시 승자들이 부풀린 조작일 뿐이다. 패자의 봉욕이란 슬픈 과보란 말인가. 백마강 수면에 물살이 어린다. 쏴아, 황량한 바람이 유령처럼 허공에 일어 숲을 흔든다.
탐방 Tip
부소산성 숲길 탐방엔 한두 시간이 걸린다. 산을 끼고 도는 백마강 나루에서 황포돛배 유람선을 탈 수도 있다. 인근 부여읍내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 궁남지, 국립부여박물관을 함께 탐방해 백제 문화를 살펴본다. 신동엽 시인의 생가와 문학관도 둘러보자.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네 번째는 순천 선암사이다. 선암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승주읍 조계산 동쪽에 위치하며, 숲으로 둘러싸인 넓은 터에 가람을 배치하였다. 많은 대중이 생활하는 대규모 산사였기 때문에 사방으로 둘러싸인 ‘ㅁ’자 형태인 건물이 많이 건립되었다.
절 서쪽에 신선이 바둑을 두던 평평한 바위가 있어 ‘선암사’라 이름 붙였다는 전설이 있는데, 백제 성왕 5년(527)에 아도화상(阿度和尙)이 현재의 비로암지에 창건하였고 청량산(淸凉山) 해천사(海川寺)라 하였다.
이창주 도선국사는 현 위치로 절을 옮겨 중창하였으며 1철불 2보탑 3승탑을 세웠다. 삼창주 의천 대각국사는 대각암에 주석하면서 선암사를 중창하여 호남의 중심 사찰로 키웠는데 정유재란 때 큰 피해를 당한 이후 여러 차례 중창 복원과 화재 등이 반복되면서 절 이름도 조계산 선암사로 다시 청량산 해천사로 개칭, 복칭을 반복하다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선암사는 (승려들이 결혼할 수 있는) 태고종의 총본산이며 유일한 태고총림(太古叢林)이다. 총림(叢林)이란 승려들이 참선 수행하는 선원(禪院)과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교육기관인 율원(律院)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하는데 조계종에 5대 총림(조계, 영축, 가야, 덕숭, 고불총림)이 있고, 태고종 유일 태고총림이 있다.
정조 13년(1789), 임금이 후사가 없자 눌암이 원통전에서, 해붕이 대각암에서 100일 기도를 하여 1790년 순조 임금 출생하였으며, 순조는 즉위 후 선암사에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 편액과 은향로, 쌍용문가사, 금병풍, 가마 등을 하사하였다.
선암사 일원은 사적 제07호로 지정되었으며 보유 문화재에 국보는 없으나 보물 제395호 삼층석탑과 400호 승선교 등 14점의 보물 및 다수의 유무형 지방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특히 선암매(천연기념물 제88호)로 부르는 400년 이상 된 우리 토종 고매화(古梅花)가 유명하다.
조계산(曹溪山) 선암사(仙巖寺)
선암사는 순천시 서북쪽 상사호 상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는데 조계산의 동쪽이며 반대쪽 조계산 서쪽에는 송광사가 위치하고 있다. 트래킹 코스로 선암사-송광사 구간을 찾는 사람도 많다. 절 아래 식당가를 지나 매표소부터 절집까지 이십 분 남짓 숲길을 걸어 올라간다.
특히 계곡을 따라 올라가다 만나는 승선교(昇仙橋)는 선녀들이 목욕을 하고 하늘로 오른다는 다리인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무지개다리로 손꼽힌다. 숙종 24년(1698) 호암 대사가 백일기도에도 관음보살을 뵙지 못하자 벼랑에서 몸을 던졌는데 이때 관음보살이 나타나 받아주시니 감동하여 원통전과 승선교를 세웠다고 한다.
예전에는 승선교를 지나 계곡을 건너야 절에 갈 수 있었는지 모르나 지금은 계곡을 건널 일 없이 절까지 큰길을 따라가므로 무심코 지나칠 수 있다. 승선교를 지나려면 그 아래 작은 무지개다리를 건너갔다가 승선교로 다시 건너와야 한다.
승선교 뒤에 있는 강선루 역시 오른쪽에서 흘러와 큰 개울과 합쳐지는 작은 시냇물 위의 선원교(仙源橋)라는 작은 다리 위에 세워진 2층 누각으로, 예전에는 누각 아래로 다리를 건너다녔겠지만 지금은 그 옆으로 넓은 길이 나 있어 옛 맛을 잃어 아쉽다.
승선교에 못미처 2개의 승탑군(부도전)이 있는데 먼저 만나는 곳이 숲속의 비석거리이고 두 번째가 선암사 동승탑군(東僧塔群)인데 이곳에 눈길을 끄는 탑비가 있어 발길을 멈추게 한다.
19세기 큰 스님으로 추앙을 받던 상월 스님의 탑비는 후학들을 사랑했던 스님을 기려 제자를 가르치던 강원(講院)을 향해 비석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승탑군을 지나 승선교를 건너 강선루 아래로 숲길을 걸어 올라가면 선암사에 도착한다. 방문객을 처음 맞이하는 건 일주문이 아니라 삼인당이라는 멋스러운 원형 연못이다. 대개 절집은 앞마당쯤에 연지(蓮池)를 꾸며놓고 있지만 선암사 삼인당은 조금 다르다.
삼인당 앞에는 전통찻집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다. 창 넓은 찻집에서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듯 전통찻집에 앉아서 삼인당 연못을 바라보는 멋스러움이 나름 괜찮은 곳이다.
선암사 숲길 내내 이어지는 순탄한 오르막 지형은 삼인당 연못을 지나도 계속 이어지는데 아직 일주문은 보이지 않고 한번 휘돌아 꺾어진 길 오른쪽으로는 계곡물이 흐른다. 그 너머에는 차밭이 늘 푸르게 깔려 있으며 왼쪽 높은 언덕 위에는 주목받지 못하는 하마비(下馬碑) 하나가 서 있다.
조금은 급격해지는 오르막 경사로가 한 번 더 굽어지면 비로소 일주문이 나타난다. 몇 개의 계단 위에 화려한 지붕을 이고 선 일주문은 좌우로 담장이 이어진 특이한 형태로 여느 사찰의 일주문과 달리 특정한 영역이나 큰 건물로 들어서는 대문의 느낌이다.
일주문을 들어서면 오르막 계단 위에 범종루가 있고 범종루 아래로 누하진입(樓下進入)을 하면 만세루가 나온다. 만세루는 누하(樓下) 없이 좌우로 돌아 들어가니 바로 대웅전이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일주문을 지난 후 천왕문, 금강문, 인왕문 등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선암사의 3무(無)에 기인하는데 조계산의 주봉이 장군봉인지라 불교의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며, 두 번째는 대웅전에 부처님을 혼자 모셨으니 좌우 협시불이 없다는 것이다. 대웅전 가운데에 큰스님이 드나드는 전용문을 어간문(御間門)이라고 하여 신도들은 못 드나들게 하는데 선암사에서는 부처님처럼 깨달은 분만 드나든다고 하여 가운데에 사람 출입을 위한 문은 없다는 것이다.
만세루는 원래 강당으로 총림에서 많은 학승에게 강학을 하는 곳이다. 원래 강당은 금당의 뒤쪽에 있어야 하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대웅전 앞에 위치하게 되었다. 예불 시 큰 스님 몇 분만 대웅전에 들어가고 나머지 스님들과 재가불자들은 강당에서 예불에 동참하는 형태로 진행되다가 지금은 모두 대웅전에 들어가서 올린다고 한다.
대웅전 영역은 이렇게 만세루와 대웅전이 마주 보며 가운데 마당에 석탑 2기가 세워져 있고 왼쪽에는 설선당, 오른쪽에는 심검당이 있는 ‘ㅁ’자형 네모꼴 구조이다. 대웅전의 왼쪽에는 음향각이 오른쪽에는 지장전이 있으며 심검당 아래 만세루 옆으로는 범종각이 있다.
범종각에는 종을 치는 나무, 즉 당목(撞木)이 있는데 종을 매다는 용뉴(龍鈕)가 사실은 용의 셋째 아들 포뢰(蒲牢)이다. 이 포뢰는 고래를 무서워하여 당목을 고래 모양으로 만들어서 두드리면 종이 더 크게 운다는 것이고 그래서 선운사의 당목이 고래 모양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답사 결과 고래 모양이라던 선운사 당목은 머리 부분을 잘라낸 모양이어서 충격적이었다. 원래 이런 모양이었는지 아니면 용 이야기를 모르는 채 무심코 잘라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아쉬웠다. 생각 없이 자른 결과가 아니기 바란다.
대웅전 영역 뒤로는 조사전, 불조전, 팔상전이 나란히 있고 그 뒤로 순조 임금 출생을 기도한 원통전이다. 원통전은 주원융통(周圓融通)한 자비를 구한다는 뜻인데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으로 관음전이라고도 한다. 많은 사람이 찾아와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곳이다.
원통전의 뒤쪽은 응진당 영역이며 그 오른쪽은 무우전 영역인데 그 사잇길이 유명한 선암매가 피는 공간이다. 응진당 출입문에는 ‘湖南第一禪院’(호남제일선원) 현판이 달려 있다. 응진당을 중심으로 몇 개의 당우가 있으며 응진당 뒤에는 작은 산신각이 다소 옹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선암매 공간을 건너 오른쪽 무우전은 태고종정이 머무는 공간으로 비공개지역이다. 그런데 그 뒤에는 각황전이며 여기에 철불이 모셔져 있어 답사객들은 자꾸만 들여다보고 싶은 것이다.
더 뒤로 나가면 숲속에 숙종 때 세운 중수비(전남 유형문화재 제92호)와 1929년 세운 선암사 사적비가 서 있고 일반인 출입을 금지한 선원 뒤쪽으로 동부도(보물 제1185호)와 북부도(보물 제1184호)가 있다. 답사꾼들에게는 필수 지역이지만 금지구역이라 아쉽다.
또 하나 선암사의 명물은 ‘뒷간’이다. ‘깐뒤’라고 우스개 소리하는 선암사 뒷간은 전라남도 지정 문화재자료 제214호로 영월 보덕사 해우소와 함께 도지정 문화재 화장실로 지정된 곳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에 가서 실컷 울어라
해우소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으면
죽은 소나무 뿌리가 기어다니고
목어가 푸른 하늘을 날아다닌다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주고
새들이 가슴속으로 날아와 종소리를 울린다
눈물이 나면 걸어서라도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 앞
등 굽은 소나무에 기대어 통곡하라
-정호승
지난 6월 30일(현지시각),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의 산사(山寺) 7곳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열세 번째 유네스코 세계 유산을 갖게 되었으니 7곳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다.
당초 통도사와 부석사, 법주사, 대흥사 등 4곳만 등재될 듯하였고, 봉정사, 마곡사, 선암사 등 3곳은 보류될 처지였으나 세계유산위원회의 21개 위원국이 만장일치로 한국이 신청한 7곳 모두를 받아들여 등재되었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등재된 7개 산사 외에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단한 절집들, 예컨대 송광사나 해인사, 화엄사, 직지사, 수덕사 등은 왜 누락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하기 위하여 전국의 절집들을 대상으로 전통사찰, 산지입지,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여부 등을 1차 선별기준으로 적용하여보니 전통사찰법에 의거 인정된 곳이 952곳이었으며, 이중 산지입지 조건을 충족시킨 곳이 785곳, 여기에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기준을 대입하니 63곳이 일차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7~9세기 창건 여부와 창건 시기를 증빙할 자료를 확인해본 결과 다음 25곳으로 압축되었으니 관룡사, 귀신사, 금산사, 기림사, 내소사, 대흥사, 마곡사, 무량사, 무위사, 범어사, 법주사, 봉암사, 봉정사, 부석사, 불영사, 쌍계사, 선암사, 선운사, 수덕사, 용문사, 운문사, 장곡사, 전등사, 직지사, 통도사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원(禪院)의 운영과 원래 지형을 유지하는지 여부 등을 확인하니 최종적으로 위 7곳이 선정되어 등재 신청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쟁쟁한 사찰들이 누락된 이유는 무엇인가.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경우, 9세기 무렵 길상사라는 암자로 시작하였으나 지금의 대찰은 12세기 후반 보조국사 지눌에 의한 것이다. 7~9세기 창건에 한참 늦었으며 삼보사찰 중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법보사찰 해인사의 경우 9세기 창건의 기록은 확인되었으나 이후 고려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팔만대장경은 조선시대에 해인사로 옮겨진 것이며 특히나 근래 사찰의 원형을 변형시킬 만큼 많은 공사가 있었음이 그 이유였다.
또한 화엄사의 경우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사찰의 중수나 중창 자료가 불충분하며 직지사나 범어사, 선운사 등은 건물의 상당 부분이 변형되거나 원형 유지가 애매한 점 등이 그 이유였다. 여기서 최근 유서 깊은 절집들의 무분별한 중창불사나 대규모 확장 건설공사가 역사성이나 문화적 가치에 반하는 일임이 드러났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을 하나씩 답사해보기로 한다.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이다.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명종 때인 1172년 보조국사가 중수하고 범일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신라 보철화상 때 설법을 듣기 위해 계곡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형태가 삼밭의 삼대, 즉 마(麻)와 같다 해서 마곡사(麻谷寺)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도선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세조가 이 절에 들려 ‘만세에 망하지 않을 땅(萬世不忘之地)’이라 평가하고 영산전(靈山殿) 현판을 사액한 일도 있었다.
마곡사가 위치한 공주 유구 지역은 정감록 등 각종 비결서(秘訣書)에 전해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이며,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고 하여 봄날 생기 움트는 나무와 봄꽃들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이다.
마곡사에 아쉽게도 국보급 문화재는 없으나 5층 석탑(보물 제799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과 제6권(보물 제270호)이 있으며 범종과 청동향로 등 지방문화재와 세조가 타고 왔다가 두고 갔다는 연(輦)이 있어 오랜 전통과 유서 깊은 절임을 말해준다.
또한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일본군 장교를 살해 후 숨어들어 승려로 지내기도 했던 곳으로 해방 후 찾아와 심은 향나무가 지금도 자라고 있어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는 곳이다. 불화(佛畵)를 그리는 화승(畵僧)들이 많이 활동하여 오늘날까지 화승들을 추모하는 다례제를 지내는 화소사찰(畵所寺刹)이다.
예전에 마곡사는 개울을 멀리 돌지 않고 허리를 뚝 잘라 옆구리로 진입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진입로를 잘 정비하고 주차장을 갖추어 놓아 누구나 자연스럽게 입구로 들어와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 북원 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진입로 중간에 있는 일주문은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사실상 해탈문(충남문화재자료 제66호)이 마곡사의 첫 관문인 셈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중앙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면서 양편에는 금강역사상(인왕상)과 문수 및 보현동자상을 봉헌하였다.
해탈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충남문화재자료 제62호)이 나오는데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상하던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수미산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마곡사 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소조불로 봉안되었으며 발밑에 악귀상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왼쪽의 영산전 영역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계류를 흐르는 다리를 건너니 마곡사의 중심영역인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오층석탑(보물 제799호) 꼭대기에는 보기 드물게 청동제 머리 장식을 얹었는데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들의 라마탑을 본떠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층 남쪽에는 자물쇠 모양을 새겼으며, 2층에는 사방에 불상을 새겼고 지붕돌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5층 지붕돌에만 1개가 매달려 있다.
마곡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모셔져 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의 주인으로 서쪽에 앉아계신다지만 비로자나불을 왜 서쪽에 앉혔는지는 알 수 없어 궁금하다.
대광보전 뒤에 솟아오른 2층 지붕은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인데 안에는 석가모니와 서쪽에 아미타, 동쪽에 약사여래를 모셨는데 약사여래불이 약합을 들지 않고 아미타여래와 같은 수인을 하고 있다.
마곡사의 중심 영역 서쪽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白凡堂)이 있으며 그 옆으로는 1946년 이곳을 다시 찾은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마곡사 개울가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삭발 바위가 있어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이렇듯 마곡사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에 돌아 나오는 길에 해탈문과 사천왕문 옆 영산전을 찾아본다. 영산전(보물 제800호)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러 찾아왔다가 못 만나자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마곡사. 승가 공동체의 생활과 전통양식을 잘 보전하여 ‘한국의 산사’ 7곳에 포함되었고 불화를 그리는 유명 화승(畵僧)들의 맥을 이어가는 절집이다.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무등산 자락에 가면 ‘생오지문예창작촌’을 만날 수 있다. 소설가 문순태(文淳太·80) 씨가 추구하는 문학의 열정을 증명하는 이곳 주변의 도로명은 생오지길. 원래는 만월2구라 불렸다고 한다. 그 이름을 바꾼 것이 바로 문 작가다. 그가 어린 시절 이곳을 생오지라고 불렀던 기억을 되살려 문학의 집을 만들어 생오지라고 이름 붙인 것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소설 ‘징소리’와 ‘타오르는 강’ 등으로 한국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깊게 새긴 그가 말하는 고향과 문학, 그리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인생을 들여다봤다.
문순태 작가가 생오지에 자리를 잡은 지는 어느덧 13년째, 그동안 그는 이곳에서 문학제를 열고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을 완성했으며 창작집 두 권과 에세이집, 시집 등 다양한 책들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시 쓰기에 열중하고 있다.
“나이가 드니 소설 쓰기가 힘들어요. 수술을 여러 번 하기도 했고 기억력도 쇠퇴해서. 대신 자꾸 시가 써지네. 시는 누워서 앓고 있어도 영감으로 쓰는 게 가능하니까요.”
그는 지난 1년 동안 장편소설 ‘광주 가는 길’을 집필했다. 그 와중에 쓴 시들을 모아 ‘생오지 생각’이라 이름 붙이고 얼마 전 출판사로 넘겼다. 새삼 그가 1939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올해 팔순의 나이.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창창했고 문학가로서의 그의 업 또한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후배 소설가 김영현 씨는 얼마 전 전주에서 열린 혼불문학상에서 그를 만나 자신의 롤모델이, 문 작가처럼 80대까지 살아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다. 자신의 나이를 언급하는 말을 듣고 문 작가는 다소 슬픈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언제 죽어도 미련이 없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사후에도 영원히 남을 작품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량이었죠. 농사는 안 짓고 첩을 둘이나 두신 분이었으니. 반면 어머니는 전형적인 농사꾼이셨어요. 저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습니다. 덕분에 일찍부터 땅의 소중함을 알게 됐죠.”
문 작가는 당시 ‘아무나 못 들어가는’ 광주고등학교를 들어갔고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문학을 만나게 됐다.
“2학년 국어선생님이 수필가였는데 글을 써내라고 해서 에세이를 썼어요. 그런데 그 에세이를 엄청 칭찬하는 거예요. 너무 잘 썼다면서 문예부에 들어오기를 권했고 들어가니 이성부, 조태일 같은 친구들이 있어서 함께 어울렸죠. 특히 시인인 김현승 선생님을 너무 존경했어요. 고등학생인 우리를 데리고 숲 산책을 하면서 시는 무엇이고 인생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죠. 사실 김현승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 시를 쓰게 된 거예요.”
1965년 ‘현대문학’에 시 ‘천재들’이 추천되어 등단한 문 작가는 전남대학교 철학과, 숭실대학교 기독철학과를 거쳐 조선대학교 국문과를 다니면서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에서 독일어 강사를 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삶이라고 보기 힘들었기에 내심 답답했던 그는 신문사로 갔다. 신문사에서 일하며 독일 연수를 다녀오니 유신이 나라를 뒤집어놨다. 절박해진 현실에서 소설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게 됐고, 마침내 1974년에 ‘백제의 미소’가 ‘한국문학’에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명찰을 달았다.
“그때가 서른네 살이었으니 늦게 된 편이었죠. 쓰고 싶은 욕망이 넘쳤고 너무 많이 썼어요. 그런데 내가 죽은 후에 이 많은 작품들 중 몇 편이나 살아남을까 싶어요. 살아남을 수 있는 작품을 쓸걸 하는 아쉬움이 있죠. 최하림, 이청준, 조태일을 보세요.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그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쳐났어요. ‘야, 이청준이도 아직 살아 있고 최하림도 살아 있네’ 했죠. 단 한 작품이라도 시공을 초월해 살아 있으면 돼요. 그걸 일찍 깨달으면 많이 쓸 필요가 없어요. 작가들은 헛된 욕심 때문에 막 쓰게 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괴로운 존재죠.”
문학은 역사의 칼
문 작가가 오래 살아남을 작품을 못 썼다는 자괴감을 갖고 있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그에겐 이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대표작 ‘징소리’와 ‘타오르는 강’이 있지 않은가. 이제 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볼 차례였다. 그의 초기 작품세계는 누가 봐도 철저한 리얼리스트의 감성을 보여준다.
“문학은 역사의 칼이다, 잘못된 역사는 문학이란 칼로 베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창작과비평사 외에는 내 글을 안 받아주더군요. 주변에서도 ‘너무 색깔이 강하다,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그는 ‘빼앗기고 짓밟혔을 때 울부짖는 소리야말로 문학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문학은 관념이 아니라고 봤던 것이다. 철학과 출신으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어까지 배운 그가 그렇게 말한다는 게 이채롭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알 만큼 알기 때문에’ 내놓을 수 있는 말일 수도 있다.
“관념적 주제를 만들기는 굉장히 쉬워요. 황석영이 한 말이 있는데, 관념은 보기 좋은 상자를 보기 좋은 종이로 싸서 계속 끌러 봐도 상자들만 나오다가 맨 마지막에 찌그러진 성냥통을 보면서 ‘휴, 소설 쓰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거라고 한 적이 있어요. 저도 똑같은 생각이었죠. 우리 삶의 실체를 보고 거기서 주제를 이끌어내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징소리’가 주는 울림
문 작가의 신념과는 달리 주변에서 그의 소설을 보고 자꾸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럼 한번 해보겠다’며 작심하고 내놓은 소설이 ‘징소리’였다.
교과서에도 수록되며 많은 독자에게 읽혀온 문순태 작가의 대표작 ‘징소리’. 이 작품에서 그는 20세기를 고향 상실의 시대로 정의하고 고향을 관념화해 인간성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래서 ‘징소리’에서는 ‘고향은 무엇인가’를 물으며 인간 존재의 양식으로서의 고향을 보여주길 시도했다. 그 결과 평론가들의 찬사가 이어졌고 ‘징소리’는 그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됐다. 그는 그때를 계기로 문학 예술성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그에게 문학은 어떻게 정의되고 있을까?
“육십이 되니 ‘문학은 역사의 칼에서 삶의 길 찾기로 변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됐어요. 문학은 시대정신을 꿰뚫어보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혜를 빌려주는, 그래서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에 대한 길 찾기가 돼야 한다고 봐요. 이제는 ‘성찰의 거울’이 되길 바랄뿐이에요.”
얼마 전 국민대학교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나이 들어 그가 갖게 된 문학관을 설명하자, 학생 한 명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선생님도 도인이 됐다는 소리군요?”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 소리였다고 한다. 물론 문학에서의 깨달음은 중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은 자칫 작가로 하여금 현실과 유리된 세계 속에 빠뜨려 방관자로서의 공허한 외침만 반복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철저한 리얼리스트였던 그는 순간 당황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역사라는 칼은 주머니칼로 변해서 아직 내 주머니에 있다’고 답했다. 그것을 증명하는 작품이 그 자신이 진정한 대표작이라 여기는 ‘타오르는 강’이다.
평범한 사람이 바꾸는 세상을 꿈꾸다
36년.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 전 9권의 완결을 맺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말 그대로 문순태 작가의 반생이 담긴 작품이다.
그가 1970년 무렵 신문사 문화부 기자였을 때 나주 양반집 취재를 간 적이 있었다. 1886년에 노비제가 폐지되면서 노비문서를 나눠줬는데, 그 집 할머니가 문서를 보여주며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때 당시 노비들은 울면서 내쫓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노비들은 자의적인 삶을 산 사람들이 아니니 그런 반응이 나온다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는 얘기를 듣는 순간 ‘아 이건 뭐가 있다’ 싶어서 노비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기사화했다. 그리고 이를 소설로 써서 ‘월간중앙’에 연재한 것이 바로 ‘타오르는 강’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꿈이 있어요. 제 소설에서는 의도적으로 지식인을 등장시키지 않아요. 평론가들은 지식인이 등장해야 소설이 고급화된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긴 해요. 그런데 지식인들은 세상을 정직하게 보지 않습니다. 굴절시키고 자기화하죠. 그러나 무지렁이는 있는 그대로 보고 전달합니다. 나 또한 지식인이지만 지식인처럼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지식인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내 소설을 받아들이고 삶의 변화를 가져오길 바라는 마음이 ‘타오르는 강’을 쓴 동기였죠.”
작가는 언어의 채굴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그는 ‘타오르는 강’에 심혈을 기울여 전라도의 정서와 역사를 담아냈다. 한 국어학자는 문 작가를 가리켜 우리나라 소설가 중 전라도 토박이말을 가장 폭넓게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만큼 향토색이 가득한 작품이다.
“‘타오르는 강’이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을 때 잘 안 팔렸어요. 어떤 사람이 사투리를 전부 표준어로 바꿔라, 그러면 팔릴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그 책을 읽고 있던 법정 스님이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듣고는 ‘어떤 미친놈이 그런 말을 하냐’고 화를 내셨습니다. 토박이말은 그 지역의 혼이 담겨 있는 것이라면서요. 그래서 아예 3년에 걸쳐 ‘타오르는 강’ 토박이말 사전을 별도로 만들었어요. 그 뒤로 단어를 모르겠다는 전화가 오면 그거 읽어보라고 했죠.(웃음)”
관계를 끊어야 본래의 나를 찾는다
‘타오르는 강’을 집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전라도를 떠나본 적이 없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특히 광주는 계속해서 일하며 지낸 운명적 장소다. 전남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주필까지 한 그는 작년까지도 유니버시아드의 오프닝과 폐막 시나리오, 광주전남연구원 이사장 등 사회적인 역할을 계속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정리할 때라고 보고 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서 지갑을 자주 열고 좋은 말을 해줘야 하는 법이죠. 그런데 관계를 정리하느라 하나하나 끊을 때마다 외롭긴 해요.”
인간은 욕망이 무한한 존재이기에 욕구충족을 위한 경쟁을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욕망이 의미 없다는 걸 깨닫고 버리게 된다. 그래서 문 작가에게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본래의 나로 돌아오는 일이다.
“관계를 많이 유지하며 죽는 것은 괴로워요. 그러나 나에게로 돌아와서 죽는 것은 멋진 일이죠. 나이 들수록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욕망을 가진 채로는 죽음에 대한 준비가 절대로 안 돼요. 죽음도 존엄하지 않고요.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때 존엄한 죽음이 가능하죠. 제가 고향에 돌아온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
작은 것에서 감동받는 게 삶의 희망
문 작가는 “풀벌레와 나비와 경쟁할 거냐?”고 되물으며 웃었다. 고향의 자연 속에 있다 보니 한없이 낮아진 자신을 발견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작가는 미세한 존재를 통해 우주를 보는 사람입니다. 작은 곤충 속에서 우주를 보니 제가 낮아져요. 무라카미 하루키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인 ‘소확행’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죠. 젊을 때는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보여요. 빨간 것은 빨간색으로밖에 안 보이죠. 그러나 나이 들면 빨간색 안에 많은 색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총체적으로 보는 안목이 생기니까, 나이 들어가면서 시력은 점점 더 나빠지지만 세상은 더 잘 보여요.”
최근 핸드드립 커피에 푹 빠져 지내는 그는 과테말라산 ‘안티구아’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과테말라 정부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커피농장 노동자 2만여 명을 학살한 역사가 떠올라서 슬픈 영혼들을 생각하며 ‘검은 눈물’을 마신다고 말했다. 수많은 작은 것들에는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를 삶과 역사가 새겨져 있다. 그래서 삶은 작은 것에서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매사에 의미를 부여해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남 험담하고 쓸데없는 것에 시간 보낼 필요 없잖아요. 사실 우리는 감동받을 게 굉장히 많은데, 지금까지 너무 냉정하게 살았어요. 작은 것에서부터 감동을 받는 것, 이것이 삶의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읍내’ 작가 쏜톤 와일더 말처럼 ‘인생은 커피 마시고 싶을 때 커피 마시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는 것’인가보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순수하고 맑은 성정을 가진 문순태 작가와의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무등산 자락 산골 생오지의 고추잠자리를 보았다.
문순태 소설가
1939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광주고등학교, 조선대학교 문학부와 숭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었고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징소리’, ‘고향으로 가는 바람’, ‘철쭉제’, ‘된장’, ‘울타리’, ‘생오지 뜸부기’ 등과 장편소설 ‘걸어서 하늘까지’, ‘그들의 새벽’, ‘41년생 소년’, ‘도리화가’, ‘소쇄원에서 꿈을 꾸다’,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전 9권) 외에 시집 ‘생오지에 누워’가 있다. 순천대학교와 광주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고향 담양에서 ‘생오지문예창작촌’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숫자는 아라비아 숫자라고 한다. 원래 숫자는 인도에서 만들어졌지만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유럽에 전해져 오늘날 유럽의 찬란한 문화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로마숫자나 한자로 된 숫자도 있지만 사용의 편리성에 있어 아라비아 숫자를 따라 갈 수가 없다.
재미있는 것은 숫자를 만들 때 기본원리가 각의 개수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요즘에도 서양인들은 ‘1’이라는 숫자를 쓸 때 1 위에 살짝 선을 그어 각을 이루도록 하는 습관이 있다. ‘2’자도 선으로 그어서 표시하면 각이 2개가 나오고, ‘3’도 각이 3개가 나오고 이렇게 각을 만들어 ‘9’까지 숫자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서양인들은 ‘7’자도 중간에 선을 하나 더 그어 사용한다. 그래야 7개의 각이 보인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더 정확한 기수법인 것 같다.
그렇다면 고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했던 숫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최근 천호 지역으로 이사 온 뒤 ‘즈믄’이라는 단어를 종종 보게 되었다. 아내의 생일에 큰아들 내외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아파트 명칭에 ‘즈믄’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을 봤다. 생소하여 무슨 뜻인지 궁금해 아들에게 물어보니 숫자 ‘1000(천)’을 의미한단다. 듣고 보니 우리의 고어에 ‘즈믄’이 1000을 뜻한다는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갑자기 순수한 우리말의 수에 대해 궁금해졌다. 우리 숫자에 대한 기원을 찾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시대 명수법은 ‘우차운홀’, ‘난은별’, ‘덕둔홀’로 ‘우차’, ‘난은’, ‘덕둔’이 각각 숫자 5, 7, 10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고 기록된다. 백제에서는 관직 이름에 달솔, 은솔, 덕솔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 달은 열 명, 은은 백 명, 달은 천 명을 나타내며 솔은 ‘거느리다’라는 뜻이라 한다. 여기까지 조사를 하다 보니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오늘날 사용하는 '하나', '둘'은 아마 고려시대에 그 어원을 찾아 볼 수 있는 것 같다. 하나를 하둔, 둘은 도패, 셋은 주단주절, 넷은 내, 다섯은 타슬, 여섯은 일술, 일곱은 일급, 여덟은 일답, 아홉은 아호, 열은 일, 스물은 술몰, 서른은 실한, 백은 온, 천은 천이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우리 스스로 숫자를 셀 수 있는 고유의 말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자랑스럽다. 아라비아 숫자가 각의 개수를 헤아려 만든 것이라면 우리의 숫자 읽기는 무엇에 근간을 두고 있을까?
국어학자들은 천을 ‘즈믄’ 만을 ‘두맨’ 이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새천년에 태어난 아이를 ‘즈믄동이’, 지류가 만 개인 강을 ‘두만강’이라 표현한데서 그 어원을 밝힌다. 큰 숫자인 ‘경’을 나타내는 우리말에는 ‘골’이라는 것이 있었다. ‘골백번’이라는 말은 무수히 많은 것을 뜻한다.
항상 궁금하게 생각하던 군대 계급의 호칭이 하나 있다. 왜 막대기 같은 것이 하나면 일등병이 아니고 이등병인가? 하는 것이다. 진급을 하여 막대기가 둘이면 이등병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말로는 일등병이라 부른다. 언제인가 중국어를 공부하다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중국어로는 이(1), 얼(2), 산(3)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뿐 아니다.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가 한국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나이는 미국인들이 네를 발음할 때 편하게 ‘나이’로 했으며 ‘가라’는 가람(강)이라는 우리말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현대’를 외국인들은 ‘현다이’라고 말하는 습성에서 유추해 보면 상당히 논리적으로 상통할 수 있는 이야기다. 외국인을 만나 ‘현대’라고 발음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니 발음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단지 글자대로 읽는 습성이 그렇게 발음하도록 만들어진 것 같았다.
숫자의 기원을 알고 나니 왜 서양인들이 그렇게 글자를 쓰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고, 이유 없이 글자에 첨자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옛날 아라비아 상인이 유명했던 것처럼 숫자가 발달된 나라가 상업이 왕성했던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이제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우수한 한글과 숫자를 지렛대로 삼아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갔으면 한다.
봄비가 촉촉이 내리는 토요일,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부여를 여행했다. 부추겉절이를 넣어 먹는 독특한 곰탕으로 따뜻하게 점심을 먹은 뒤 궁남지를 찾았다. 가늘게 내리는 빗속의 궁남지 분위기는 그윽하다.
궁남지는 백제 무왕(634년) 때 만든 왕궁의 정원이라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빨리 만든 연못으로 삼국 중, 백제의 정원 기술이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10여 년 전, 궁남지를 찾았을 때는 초여름이었다. 남편의 직장 따라 대전에 와서 살 때였고 서울에서 놀러 온 두 친구에게 충청 지역의 뭔가를 보여주고 싶어서였다. 마침 궁남지 연꽃에 관한 신문기사를 읽었던 터라 함께 갔다. 엄청나게 큰 연못 가득히 피어 있는 연꽃도 놀라웠지만 세숫대야만한 연잎과 연꽃으로 눈이 동그래졌다. 연잎은 우산으로 삼을 만큼 정말 컸다. 사진작가들이 떼 지어 몰려와 연못 곳곳에서 사진 찍느라 몰입해 있었는데 충분히 가치 있어 보였다. 친구들이 궁남지에 만족한 것은 물론이다. 그 뒤 한강 두물머리 세미원의 연꽃을 보면서도 감탄하였지만 내 기억 속에 ‘연꽃 1번지’는 여전히 '궁남지'이다.
그런 연꽃을 기대하기는 이른 오늘, 뜻밖에 연못 가득히 수련이 피어있다. 흰색, 붉은색, 노랑어리연까지.
연못 주변을 천천히 산책한다. 이 고즈넉한 풍경을 가리기 싫어 우산을 접고 비옷만 입고서. 자연의 생동 발랄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낀다. 문득 스치는 달콤하고 익숙한 향기가 있다. 찔레꽃이다. 며칠 전 다녀온 북한산에도 찔레꽃이 많지만, 아직 피기 전이었다. 빗속에 깨끗하게 핀 찔레꽃에 코를 가까이 대어본다. 역시 매혹적인 냄새다. 마치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반가운 친구 같다.
숲으로 가는 산언저리마다 눈부시다. 밭두렁에 애기똥풀 흐드러져 숫제 샛노란 화단이다. 다랑논 이고 있는 석축에 어린 그늘이 푸르도록 짙은 건, 5월 한낮의 봄 햇살이 밝아서다. 민들레는 수과(瘦果)를 매단 채, 건듯 부는 미풍에 갓털을 휘날린다. 진초록으로 이미 농익은 초목 잎사귀들. 산야에 뿌리박은 식물마다 의기양양하다. 길로 나다니는 사람만이 계절을 타 들썩인다.
개심사(開心寺) 일주문을 지나자, 일변 눈으로 가득 차오르는 소나무들. 고찰(古刹)치고 들머리 풍광 허술한 곳이 드물다. 개심사 숲길도 기중 반열에 든다. 솔숲에 불그레한 빛살이 어린다. 적송(赤松)들이어서다. 미끈한 붉은 살갗에 건강한 지체, 게다가 저마다 미묘하게 굽어 허리를 요리저리 비트니 수려하다 못해 관능적이다. 흐뭇하면 안고 싶고, 심취하면 안기고 싶어진다. 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만은 아니다.
굽고 휜 소나무는 내심 안도할 게다. 쭉쭉 곧게 자란 나무들보다 더 온전하게 수명을 누릴 수 있으니까. 목수의 도끼날을 피할 수 있어서다. 목재로서는 별 쓸모가 없게 생긴 덕분이다. 목수의 눈엔 무용지물이지만 소나무 입장에선 천행이다. 그게 나무만의 일이랴. 우리네 인생사에도 자주 적용되는, 일종의 이치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에 실린 메시지를 생각해보라.
물매진 들머리 숲길, 그 이후로는 돌계단길이 가지런하다. 여기서도 소나무들의 전시회가 성황리에 펼쳐진다. 나무들의 청신한 향이 그윽하게 번진다. 개심사 전각들 지붕마다 초록이 서린다. 초록 숲 안의 산사여서다.
뜰에 걸린 연등들로 경내가 환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뒤면 석탄일이다. 숨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꿈꾸지 않으면 오를 수 없다. 그리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연등공양이란 부처를 숨 쉬고 꿈꾸고 그리는 일이겠지. 나를 낮추고 나를 비우고, 그리해서 나를 찾아가는 기도일 게다.
천년도량의 위세에 걸맞게 개심사 전각들은 방정하거나 준수하다. 혹은 허심히 잘 늙은 고로(古老)처럼 고졸하다. 전각 속엔 나무가 박혀 있다. 휜 채로, 비틀어진 채로, 그러니까 굽은 원목 그대로를 베어 말려 기둥을 삼고 들보로 채택했다. 주야로 법당의 향훈을 취할 저 고색창연한 재목들. 남벌 탓에 곧은 목재를 구할 수 없어 굽은 나무를 그냥 그대로 썼을까? 쓸모없어 보였을 나무가 쓸모 있게 쓰였다. 거룩한 불상과 동거하며, 더 온전히 살아남았다. ‘곡즉전(曲則全)’이라, ‘굽어서(曲) 온전할(全) 수 있다’는 묘리를 전갈한 이는 노자였다.
개심사는 실로 수목의 향연장이다. 그 친숙한 명성으로 한 벼슬 걸친 거목들의 장원이다. 소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모과나무, 배롱나무, 전나무, 서어나무, 왕벚나무…. 국내엔 이곳에만 있다는 청벚나무에선, 시나브로 봄이 가건만 여전히 끝물 꽃잎들 분분히 낙화한다.
개심사를 벗어나 다시 숲길을 오른다. 낙락장송 휘늘어진 숲 사이로 구불구불 길이 이어진다. 키 작은 관목들. 곧게 뻗어 하늘 한 자락 움켜쥐는 활엽 교목들. 온갖 나무들이 빼곡 들어차 기세를 돋운다.
인간의 도시는 삼엄한 사각의 링을 닮았다. 나무들은 코피를 쏟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경쟁을 능사로 삼는 대신, 상호 의존의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한다. 바위 벼랑에 위태롭게 매달린 소나무만 해도 그렇다. 곰팡이와 공생해 균근(菌根)을 만들고, 그 균근에서 발달한 팡이실로 바위 틈새의 수분과 양분을 빨아들인다. 이렇게 소나무는 공생과 상생, 인류의 그 오래된 이상(理想)을 소리 소문 없이 오롯이 구가한다.
숲길에 하오의 놀빛이 어린다. 폐사지 보원사지에 간신히 남은 석탑에도 황혼녘 주황물이 흥건하다. 간절한 탑돌이를 하며 합장 비손했을 옛사람들, 지금은 천상의 어느 푸른 공간에 머무시나. 옛사람들에겐 나무도 석탑과 매한가지였다. 성황당 신목(神木)에 의지해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꿈과 희망을 천상에 탄원했다. 삶이, 영혼이, 견딜 수 없이 슬플 땐, 조용히 숲에 들어가 하늘을 우러렀다. 그래서 숲은 일쑤 정결한 지성소였다. 그들은 숲에서 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탐방 Tip
개심사와 보원사지를 잇는 숲길은, 충남 내포 지역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내포문화숲길’ 코스들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구간이다. 개심사에서 보원사지까지는 약 2km 거리. 산마루를 넘자면 오르막과 내리막을 경유하지만 가파르지 않다. 보원사지에서 1.3km를 더 내려가면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을 만날 수 있다.
시니어가 걷기 좋으려면 무리하지 않고, 대중교통으로 쉽게 갈 수 있고, 쾌적한 길이어야 한다. 피톤치드 향기 가득한 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 원시림 부암동 백사실 계곡, 도심의 섬 아차산을 걷기 좋은 길로 추천한다.
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
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은 관악산 입구에서 석수역까지 7km에 이르는 서울 둘레길 5-2구간의 중간 호압사 뒤에 있다. 지하철 2호선 신림역이나 서울대입구역에서 버스를 갈아타면 관악산 입구에 쉽게 갈 수 있다. 관악산자연공원 입구에서 산책로를 잠시 걸으면 우측으로 서울둘레길 이정표가 나온다. 능선으로 곧장 걸으면 등산로이고, 중간 둘레길이 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으로 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흙길이었으나 몇 년 전 휠체어나 유모차를 가지고 갈 수 있는 무장애길이 함께 조성되었다. 취향에 따라 마음에 드는 길을 선택하면 된다.
잣나무 잎이 두툼하게 쌓인 이곳은 남향이라서 눈이 많은 겨울철에도 따뜻하다. 올해처럼 강추위가 몰아칠 때 꼭 찾고 싶은, 서울에서 보기 드문 천혜의 삼림욕장이다. 늘 푸른 잣나무의 피톤치드 덕분에 여름철에도 하루살이, 모기 등 해충이 없다. 쾌적한 공기에 가슴이 뻥 뚫리는 곳이다. 그늘이 크고 시원해 자리 깔고 쉬어가기에도 좋다. “내년 여름에는 여기에서 꼭 피서를 해야지!”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서 한 번쯤 터지는 감탄사다.
원시림 부암동 백사실 계곡
부암동 백사실 계곡은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서 창의문까지 걷거나 버스를 타면 갈 수 있다. 서울이면서도 서울 같지 않은 곳, 나무와 바위에는 푸른 이끼들이 가득하다. 계곡에는 1급수에만 산다는 버들치가 떼를 지어 놀고 있다. 울창한 나무가 하늘과 햇빛을 가려 낮에도 어스름한 달밤 같다.
옛 여인들이 모여 빨래를 하던 풍경이 절로 떠오르는 펑퍼짐한 바위도 보인다. 군데군데 도롱뇽, 두꺼비, 개구리가 서식하는 아름다운 생태 지역을 보존하자는 팻말이 보인다. 도심 속 원시의 비경이 오래도록 보존되면 좋겠다.
도심의 섬 아차산
아차산은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아차산역, 7호선 용마산역에서 바로 오를 수 있다. 일출과 일몰이 좋고 야간 산행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산이다. 야트막하고 산세가 험하지 않아 누구나 오르기 쉽고, 산책로도 잘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과 다녀와도 좋다. 연결된 용마산이나 망우리 공원까지 산행을 즐길 수도 있다. 동쪽은 구리시 전경이 같은 듯 다른 모습을 뽐내어 보여주고 남쪽은 푸른 한강이, 서쪽에는 도심의 건물들이 조개껍질처럼 발아래 엎드려 있다. 마치 도심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같다.
이곳이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각축장이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아차산 보루군은 분포 지역으로 볼 때 고구려가 5세기 후반에 한강 유역을 진압한 후 신라와 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6세기 중반까지 한강 유역을 둘러싼 3국의 정세를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고구려정, 해맞이광장, 아차산 5보루 등 전망 좋은 곳이 많아 굳이 정상까지 가지 않아도 아차산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50여 년간 장미를 그려온 화가의 심상은 무엇일까? 그것도 화병에 꽂은 정물이 대부분일 때는 의아할 수밖에 없다. 장미의 화가라면 김인승(金仁承, 1910~2001)이나 황염수(黃廉秀, 1917~2008) 화백이 떠오르지만, 성백주(成百冑, 1927~) 화백만큼 긴 세월 ‘장미’라는 주제에 천착해오지는 않았다.
성백주 화백은 화필이 무르익은 중년을 지나는 1960년대 말부터 장미만 그려왔다. 물론 바닷가 풍경이나 누드화도 간간이 눈에 띄지만, 아주 드문 편이다. 성 화백은 경북 상주에서 출생해 초·중등학교 교사, 지방 방송국 편성부 등에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부산 권역을 벗어나지 않고 동아대학교, 부산여자대학교에도 출강했다. 1955년 부산에서 ‘민주신보 창간 10주년 기념 초대전’이 열린 것을 보면, 1948년 초등학교 교사로 첫 부임한 이래 그림에 정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72년, 1975년 서울 명동화랑과 공간화랑의 전시가 중앙 화단에 진출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그리고 1992년의 여의도 정송갤러리 초대전이 전국적으로 자신의 그림 세계를 각인시키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 무렵부터는 장미 그림만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두어 점의 풍경이나 누드화가 겻들여지기도 했으나 장미만큼 압도하지는 못했다. 그의 장미는 꽃병에 꽂힌, 그래서 식탁이나 서재 책상 위에 무심코 놓인 정물화다. 청화백자 항아리나 유리단지에 성기게 꽂힌 몇 송이 혹은 꽉 찬 아름진 장미 다발이 언제나 맑은 향을 뿜는다.
“그는 꽃의 실제적 형상을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감성의 파상적 율동에 의해 창출되어 나온 선과 터치에 의한 궤적이다. 꽃을 응시하고 연후에 그것을 화면 형상으로 바꿀 때 표현은 부드럽고 경쾌하며 리드미컬하다. 담채와 농채가 적절히 배분된 화면은 활기차 보이며 따스한 온기가 감돈다”라고 평자는 말한다.
주로 정물을 그리는 화가들을 만나보면 “꽃, 그것도 장미 그리기가 제일 어렵다”고 말한다. 장미는 그 종류만 수백 종에 색깔도 가지각색일 뿐만 아니라, 꽃잎이 수십 장 포개져 있어 입체감의 표현과 꽃잎마다 빛의 반사가 다채로워 평면화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성 화백의 장미는 극사실의 요염한 자태가 아니다.
“나는 그동안 장미를 많이 그렸지만, 한 번도 장미라는 물질적 속성을 생각해본 일이 없다. 화폭에 어떻게 조형성을 심어가느냐의 문제였다. 항상 그랬듯이 남에게 보이기보다 내 작업을 연출된 공간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성찰해보는 기회라고 생각한다.” 어느 전시회를 앞두고 그가 한 말이다.
이 그림[사진1]은 1992년, 서울 여의도 정송갤러리에 전시 출품되었던 작품이다. 청화백자 항아리에 꽃송이와 줄기가 얼비추어 푸르른 그림자를 만들고 속도감 있게 처리된 배경과 꽃잎 끝에 건듯 묻어나는 옅은 색깔, 꽃송이와 봉오리에 깊은 마티에르가 하모니를 이룬 회심작이라 생각한다. 식탁에 걸어놓고 맑은 향을 맡는다.
한때 나팔꽃을 좋아해서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나팔꽃 덩굴을 만나면, 씨가 여물 때를 기다려 몇 알씩 따두었다가 이른 봄, 마당 창가나 담장 아래 씨앗을 틔워 줄기가 늘어뜨린 끈을 감고 공중에 꽃 피우는 신선함을 즐겼다.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지고 마는…” 가요의 가사처럼 짧은 꽃피움이 애잔했다. 나팔꽃 기르기를 좋아하던 서예가와 경기도 여주의 도예촌을 동행하며, ‘백제도예연구소’의 정지현(1958~) 도예가를 찾았다. 몇 차례의 방문이라 익숙하게 후원을 빙 돌며 작약이며 들꽃 틈에 깨뜨려버린 도자기를 휘감은 나팔꽃 덩굴의 진분홍 꽃을 감상했다.
“어느 날 새벽 도자기 작품 구상이 안 떠올라 이곳을 거닐다가 무심코 도자 파편 위 저 나팔꽃이 이슬을 머금고 활짝 핀 모습을 보고 큰 영감을 받았어요. 그래서 나팔꽃 이미지를 도자로 빚어보았지요.”
작업실 안에는 철화와 진사채로 완성된 나팔꽃 이미지의 아름드리 대형 도자기와 초벌구이한 도자기가 나란히 있었다. 정지현 도예가는 뒤늦게 도예에 입문해 예술자기와 생활자기 사이에서 많은 고뇌를 했다. 현실적 생활고도 체감했다. 이제는 일본이나 유럽으로 생활자기를 수출하며 경제적 안정을 얻었지만, 문득 일상의 쓰임을 벗어난 도자에 예술혼을 굽고 있다 고백했다.
이 대형 푼주[사진2]는 몇 달 후 그날 동행했던 서예가가 우리 집까지 날라준 크나큰 선물이다. 혼자 들기도 버거워 아내와 거실 탁자 위에 놓고 마음 깊게 감상했다. 겉은 정지현이 개발한 특유의 연록빛 유약이 자연스레 흘러넘쳐서 나팔꽃 줄기와 잎의 싱싱함을 나타내었다. 입술부터 안쪽으로는 붉은 진사의 유약을 두텁게 발라 고상함을 더해주고 있다. 도자기 속에다 속삭이면 그 잔잔한 울림이 좋았다. 이 푼주의 쓰임을 놓고 가족회의도 열어보았다. 겉과 속을 두루두루 볼 수 있는 낮은 탁자 위가 제자리다 싶으면, 찻잔을 나르거나 과일을 나르다 부딪힐까봐 조바심되었다. 마침내 거실 큰 유리문 앞 튼튼하고 낮은 탁자를 따로 마련해 옆에 백자 달항아리를 나란히 두어, 사계절 남향 타고 스미는 햇빛이 부서지는 반사광까지 즐기고 있다.
“가마에서 활활 타오르던 불길이 사위고 첫닭이 우는 새벽, 부끄럽고 두려움에 떨면서 죄를 짓고 용서를 비는 심정으로 도자기를 꺼내죠. 무슨 항아리가, 어떤 작품이 나올지 몰라요. 반은 내가 만들고 반은 불이 만들거든요. 꿈꾸던 작품을 얻었을 때의 감동과 희열, 그건 맛본 사람들만 알아요. 도예가들의 삶의 원천이죠.”
어느 일간지 인터뷰에서 정 도예가가 한 말이다.
꽃은 인류가 문명세계를 열기 이전부터 생명의 원천이었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꽃은 기쁨의 표상이고 추모의 상징이다. 구순 넘긴 노 화백의 여린 붓끝에서 피어나는 장미에서 인생의 환희를 느끼고 연륜 깊은 향을 맡는다. 하늘을 향해 입 벌린 푼주에서도 ‘아침의 영광(Morning glory)’을 듣는다.
>>이재준(李載俊)
아호 송유재(松由齋). 1950년 경기 화성에서 태어났고 미술품 수집가로 활동 중이다. 중학교 3학년 때 ‘달과 6펜스’, ‘사랑과 인식의 출발’을 읽고, 붉은 노을에 젖은 바닷가에서 스케치와 깊은 사색으로 화가의 꿈을 키웠다. 1990년부터 개인 미술관을 세울 꿈으로 미술품을 수집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