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년간 사용하던 스마트폰이 한 달 전부터 몇 가지 기능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카메라 기능이 안 되고, 갤러리가 안 열리니 사진 전송이 안 되는 것이었다. 자주 쓰던 전철 노선도와 사전 기능도 누르면 ‘저장 용량이 모자라니 SD 카드를 장착하라’고 떴다.
이 기회에 새 기종으로 바꿀까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SD카드만 장착하면 그냥 또 쓸 수 있는데 굳이 새 기종으로 바꾼다는 것은 낭비 같았다. 그래서 여기저기 물어 보니 SD카드만 사면 간단히 해결된다는 것이었다.
우선 SD카드를 사는 것이 문제였다. 신천 역 부근에 갈 일이 있어 몇 군데 대리점에 물어 봤더니 SD카드가 없다는 것이었다. 들어갈 때는 환한 미소로 맞아주더니 SD카드 얘기를 하니 퉁명스러워졌다. SD카드를 사려면 제조사에 가야 한다고 해서 어디냐고 물었으나 불친절하게 대충 어디쯤이라고만 했다. 여기저기 지인들에게 물어 보니 ‘삼성 디지털 플라자’에 가면 된다는 것이었다. 강동 역 근처 등 몇 군데 아는 곳은 있으나 일부러 가기도 어려워 미루고 있었다.
어느 날 집근처에서 혹시나 해서 대리점에 들렀더니 SD 카드가 있다는 것이었다. 16기가짜리 인데 2만 5천원이라고 했다. 그래서 장착해달라고 했더니 가위로 포장을 뜯어 장착했다. 그러나 SD카드만 장착하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여전히 작동이 안 되었다. 내 스마트폰은 내부 메모리 장치가 고장 났으니 제조사 A/S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친 김에 물어물어 백제 고분 앞에 있는 삼성디지털센터에 찾아 갔다. 백제 고분 앞이라고 했으면 쉽게 찾았을 텐데, 대리점 마다 ‘방이동’, ‘백제 고분사거리’ 등 애매하게 얘기하는 바람에 찾는데도 힘이 들었다. 접수하고 번호표를 받아 기다리는데 20분 만에 해준 답이 수리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통화와 문자, 카톡은 되니 당분간 그냥 쓰겠다고 했더니 그러다가는 어느 날 기계가 꺼지면서 몽땅 데이터가 다 날아간다는 것이었다. 특히 저장된 전화번호가 날아가면 가장 애를 먹는다는 것이었다. 그러니 서둘러 새 스마트폰으로 교체하라고 권고했다. 그 안에서 안내 받아 새 기종으로 교체해 보려고 했는데 담당자도 자리를 비웠고 별로 관심을 안 두는 것 같아 동네 대리점으로 왔다.
동네 대리점에서는 마침 손님이 필자 혼자라 1:1 상담이 가능했다. 새 기종으로 ‘갤럭시 온7’을 권했다. 한 달에 통신비가 4만 5천 원 정도 나오는데 그 가격에 기계값 1만원 포함해서 24개월 할부로 해준다는 것이다. 2년간 분실 훼손 보험료로 3,500원이 추가된다. 그간 사용하던 기계는 메모리를 다 지워 초기화해서 회사에 넘기는 조건이었다. 가장 중요한 전화번호부를 새 스마트폰에 옮겼다. 밴드도 옮겼다. 그러나 카톡은 계정만 살아 있고 그간 주고받았던 내용은 다 없어졌다. 문자도 다 지워졌다. 메모장에 메모해둔 내용도 다 없어졌다. 사진도 다 없어졌다. 앞으로는 중요한 사진은 반드시 다른데 저장을 해두라는 것이었다. 그리 중요한 사진도 없고 새로 만들면 된다. PC를 몇 번 교체하면서 저장된 것이 없어진 것을 경험했었다. 그래서 전자기기는 믿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새 기종이라 몇 가지 손에 익지 않은 것들이 적응되면 그간 속 썩였던 문제들이 다 해결될 것이다.
5년 만에 몇 군데 대리점의 영업 사원들이나 주인들을 대하고 보니 그간 많이 친절해진 것 같았다. 아직 개인 차가 있지만, 우리 사회에 친절이 점차 자리 잡아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2~3년마다 기계를 바꾸는 것이 좋다는 권고도 들었다. 물론 기계 값이 들지만, 3년이 지나면 여기저기 기능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자동차나 스마트폰을 너무 자주 바꾸는 사람들을 별로 안 좋게 봤었는데 앞으로는 그래야 된다는 것이다. 과연 배터리 성능도 하루 종일 쓸 수 있어 좋고 화면도 밝아 좋았다. 그동안 왜 궁상을 떨며 고생을 감내했나 싶다. 그러나 성격 상 별 일 없으면 또 5년 정도 버틸 것 같다.
올해 정유년(丁酉年)은 열두 동물로 나타내는 12지신 중에서 ‘닭[酉]’띠 해가 된다. 예로부터 중국이나 우리나라에는 새해마다 정해진 열두 동물이 윤회하며 한 해를 상징하는 풍습이 있는데 그로부터 기인된 것이다. 용(龍)을 빼고 열한 동물은 인간 주변에 있는 것들이고, 날개 있는 동물로는 닭이 있을 뿐이다.
중국 서진(西晉)의 진수(陳壽 233~297)가 편찬한 에는 ‘한(韓)에는 꼬리가 5척(尺)이나 되는 세미계(細尾鷄)가 있다’고 적혀 있고, 송(宋)의 범엽(范曄 398~445)이 지었다는 에도 ‘마한(馬韓)에 장미계(長尾鷄)가 있는데 꼬리가 다섯 자[尺]나 된다’는 기록이 있다. 또 당(唐)의 위징(魏徵 580~643)이 지은 에 ‘백제에는 닭이 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우리나라에서 토종화된 닭을 키웠다고 여길 수 있다.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은 ‘닭’의 어원(語源)이 산스크리트어로 해동(海東=우리나라)을 부르던 kukuta[닭] svara[귀함]가 한자로 구구타귀(矩矩吒貴), 계귀(鷄貴)에서 ‘구구, 꼬꼬댁’ 등으로 음전화(音轉化)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한(漢)의 한영(韓嬰 ?~?)이 지은 에는 닭이 다섯 가지 덕(德)이 있는 덕금(德禽)이라 표현되어 있는데 닭 벼슬의 관(冠)은 문(文), 발 갈퀴는 무(武), 죽을 때까지 용감히 싸우는 모습은 용(勇), 먹을 것을 보고 친구를 부르는 행위는 인(仁), 밤을 지켜 때를 잊지 않고 알리는 것을 신(信)이라 표현해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런 거창한 칭송이 아니더라도 닭은 새벽을 알려주는 울음만으로도 신령(神靈)한 동물일 수밖에 없었다. 온갖 악귀(惡鬼)들이나 무서운 맹수들이 활개 치던 길고 두려운 어둠을 그 낭랑한 울음소리와 함께 거둬내고, 밝은 새날을 맞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닭은 태양을 불러오는 상서(祥瑞)로운 동물인 것이다.
새해가 돌아오면 집에 벽사(辟邪)의 의미로 호랑이 그림과 더불어 닭 그림을 붙였다. 와 에 실린 김알지(金閼智 65~?)의 탄생 신화도 닭의 울음에서 비롯된다. 당시 신라 4대 왕 석탈해이사금(昔脫解尼師今 ?~80)은 그 닭이 울던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이라 고쳐 부르고 국호(國號)로 삼았다. 이후 15대 기림왕 10년(307)에 다시 ‘신라’로 바뀔 때까지 계림은 두 세기 이상 국내외에서 통칭되었다.
이만익(李滿益 1938~2012) 화백의 그림 은 여러 ‘닭의 신화’를 모티브로 그린 작품이다. 빛나는 태양과 눈부시게 서기(瑞氣)를 내뿜는 닭 울음의 순간이 가히 백미이다. 간결한 구도와 짙은 색감, 굵은 선이 신화의 한 장면으로 자연스레 이어지고 있다. 닭이 올라앉은 복숭아나무는 꽃이 만개하여 무르익은 봄의 정취도 그만이다. 잘 아는 수집가를 졸라서 입수하게 된 이 그림을 큰아이의 결혼청첩장에 쓰려고 의논하였더니 이 화백도 아주 기뻐하였다. 수집한 미술품으로 가족달력을 만들 때도 온 가족이 손꼽는 작품이다.
이 화백은 황해도 해주에서 출생, 남하하여 서울의 효제초등학교, 경기중·고등학교 시절, 전국의 미술대회를 석권한 빼어난 인재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을 수석 입학하였고 졸업 후 서울예고 등에서 10여 년의 교직 생활 후 파리로 유학, 빈한한 여건 속에 괴츠아카데미(Goetz Academy)에서 앙리 괴츠(Henri Goetz, 프랑스 화가)에게 사사(師事), 그러나 2년여 후에 뜻한 바 있어 귀국하였다.
이후 그는 “우리는 서양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큰 오류를 범해, 우리라는 주체를 잃어버린 채 서양의 재료와 방법을 받아들였다. 우리의 미술 교육이 서양 사람이 되도록 그 감성마저 바꾸어놓았다”고 개탄하며 새로운 작품세계를 구축, 우리나라의 신화와 설화를 주제로 한 독특한 그림을 그렸다. “다시는 서쪽으로 눈 돌리지 않았다”고 천명하기도 하였다. 88서울올림픽 개·폐회식의 미술감독을 맡아 세계에 “한국 고유의 문화를 격조 높게 승화시켰다”는 아낌없는 찬사를 받았다.
조각가 엄태정(嚴泰丁 1938~ )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영국의 세인트 마틴스 미술대학에서 수학했다. 그 후 2004년까지 모교에서 후학을 지도하였다. 그는 재학 시절 스승 우성 김종영(又誠 金鍾瑛 1915~1982)의 첫 철조작품 (1958)을 접하고 “장시간 부식된 철재 판재의 스크랩으로 철재가 지니고 있는 시간성과 사물성을 통해서 교묘한 철재의 공간성과 함께 이 조각 작품에 담겨져 있는 숨겨진 진실이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 많은 시간을 허비했던 기억이 난다”고 그의 책 에 쓰고 있다.
엄 화백은 1972년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도쿄(1975), 런던(1980) 등 국내외에서 개인전과 단체전에 출품하였다. 그의 조각 정체성의 시발점은 세계적인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 1876~1957)의 금속조각에서 받은 깊은 감동에서 비롯된다. 브랑쿠시는 “조각 본래의 요소는 우의적인 사고, 상징, 성스러움 혹은 물질 속에 숨어 있는 본질의 탐구를 의미하지, 결코 외관을 사실적으로 재생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언한 사유(思惟)와 명상(冥想)의 구도자(求道者) 같은 조각가였다. 한때 오귀스트 로댕(Auguste Rodin 1840~1917)의 문하에 들까 하다가 “큰 나무 밑에선 작은 나무도 자랄 수 없다”며 독자의 길을 개척한 현대 추상조각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엄 화백은 “브랑쿠시는 세상의 모든 사물의 대상을 주제로 삼고, 그 속에서 본질을 찾아 조각을 이루며, 형이하학(形而下學)의 물질적 한계를 극복하고 초월하여 빛으로, 하늘로, 대지로 형이상학(形而上學)의 예술적 사물이 되어 조각으로 존재하고 있다”면서 브랑쿠시를 ‘넘어야 할 산’이라 하였다.
1997년 현대갤러리, 2009년 성곡미술관 등 엄태정 조각가의 전시장을 찾아다니며 거대한 금속괴(철, 구리, 알루미늄)를 관류(貫流)하는 스케일 큰 그의 예술세계를 느꼈다. 언제나 그의 조각상을 보고 싶으면, 서울대학교 관악캠퍼스에 시·서·화(詩書畵) 삼절(三絶)의 문인 자하 신위(紫霞 申緯 1769~1847)를 기리는 연못, 자하연(紫霞淵) 앞에 우뚝한 그의 작품
를 찾아간다. 1998년 서울대학교 개교 50주년 기념작인 이 청동 작품은 곧게 뻗은 네 개의 기둥이 공간에서 넓은 나래로 연결되어 사방으로 웅장하고 높은 기운을 내뿜으며, 하늘 높이 비상하고 있다.
그의 소품 조각은 아예 없어서 수집할 길이 없었는데 1998년 10월, 한 옥션에 소품 석 점이 올라왔기에 하도 반가워 이 작품 을 낙찰받았다. 원형의 두툼한 구리판을 열일곱의 크고 작은 세모꼴로 부식시키고 철 기둥에 붙인 이 작품은 원형을 이루며 조응하고 있다. 크고 작은 조각들이 팽팽히 확산과 응집을 이루며 빛을 반사하고 있다. 부식된 자리는 검은 철로 마무리해, 빛의 그늘로 입체감을 주었다. 빛은 밝음이며, 따뜻함이며, 끝없이 밀려오는 환희의 물결이다.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 리뷰어.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감격에 젖은 백전노장은 손을 번쩍 들어 객석과 무대를 향해 감사 인사를 했다. 정확히 27년 만의 커튼콜. 과천시민극장의 연극는 백발이 돼 돌아온 노배우의 재기와 시민들의 소망을 이루어준 ‘꿈의 무대’였다. 두려움을 떨치고 조명 앞에 당당하게 선 그들만의 이야기는 밤새도록 끊일 줄 몰랐다.
과천시민극장의 다섯 번째 연극
작년 12월 1일 과천시민회관 소극장. 공연을 이틀 앞둔 극장 안은 긴장감과 설렘이 감돌았다. 소품을 나르고 무대를 걷는 시민배우들의 모습에서 전문배우 못지않은 집중력마저 느껴졌다. 과천시민극장은 작년까지 5기수의 시민배우를 배출했다. 작년 9월 치열한(?) 오디션을 거쳐 5기 시민배우 12명을 선발했고 출연자가 많은 의 특성상 시민배우 1기에서 4기까지 총출동해 공연을 완성했다. 시민극장이라 해서 수준 이하일 것이라는 생각은 절대 금물. 극단 ‘모시는 사람들(모들)’의 전문배우들이 시민배우를 도와 엑스트라로 출연했다. 백제예대 방송연예과 서민희 교수의 연출, 극단 모들 이재훤 배우의 연기 지도로 전문성을 한층 올렸다. 오랜 호흡을 맞춰온 과천시민극장의 음향과 조명, 무대 스태프 또한 꼼꼼하게 무대를 챙겼다. 과천시민극장의 드림팀은 직장인·주부·선생님·학생, 20대에서 60대 남녀노소 나이를 불문하고 배우를 꿈꾸는 이들을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무대가 그리웠던 그가 돌아왔다, 연극배우 전한원
본지 지난해 11월호 ‘브라보가 만난 사람’에서 찾아뵀던 김정숙 연출가는 인터뷰 당시 시니어 연극을 이야기하다 과천시민극장에 참여하는 60대 배우를 언급한 바 있다. 젊은 시절 연극을 그만뒀던 김정숙 연출가의 극단 선배가 시민배우로 돌아왔다고 했다. “인생이라는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이제 진짜 배우가 될 것 같다”고도 말했다. 그가 바로 무대감독 역의 전한원(65)이다. 전한원은 1989년 연극 공연을 마지막으로 연극계를 떠났다. 이후 평범한 가장과 직장인으로 살아온 그는 은퇴 후 그렇게나 그리워했던 무대로 돌아왔다. 시민극장을 통해서다.
“연극을 그만둔 뒤 대학로를 지나갈 때면 고개를 돌리고 다녔습니다. 아예 그곳에서는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어요. 집에서는 드라마도 안 봤습니다.”
이 작품에서 무대감독은 이 연극을 이끌어가는 주요 배역. 30년 가까이 무대를 떠났던 그에게 맡겨졌다.
“부담스러웠어요. 대본을 딱 읽어보고 이것은 내가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막상 배역이 주어지고 나니까 두렵고 떨렸습니다. 배역 소화를 잘 할 수 있을까? 원래 제가 자신감 덩어리인데 말입니다(웃음). 연습 과정에서 자신감이 떨어지기도 했고 또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제부터 ‘옛날에 내가 배우였지’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조금 편해졌습니다.”
는 사람이 죽고 사는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기에 삶의 깊이를 아는 배우가 필요했다. 무대감독은 전한원이 적역이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노련했고 연기는 더욱 깊어졌다. 은퇴 뒤 넉넉한 웃음과 기품 또한 넘쳤다.
이제 연극이든 영화이든 무조건 도전할 겁니다
에서 의사 깁스 역의 권용각(57)씨는 충훈고등학교 국어 선생님. 잘생긴 이목구비에 나긋하고 지긋한 목소리에 정확한 발음까지. 배우가 아닌 교사가 본업이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하지만 권용각씨도 한때 연극과 멀지 않은 곳에서 살았다. “국어국문학이 전공이지만 대학교 때 연극을 했습니다. 졸업하면서 국립극단에 들어가 연출을 하다가 나왔어요. 과천여고에서는 연극부를 만들어 학생들이랑 연극도 했고요. 대본을 외워 아이들과 하는 독서모임에서 모노드라마 연기도 했습니다. 시민극단은 우연히 오디션 공고를 보고 들어오게 됐습니다.”
작년 2월 권용각씨는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심근경색이었다.
“제가 수술을 한 다음 심근경색으로 죽은 사람을 세 명이나 봤습니다. 아플 때 생각한 것이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한번 해보자’였습니다. 그래서 시민배우에 도전했어요. 지금 너무 행복해요. 무대 위에서 걸어 다니는 게 너무 좋아요. 저는 바로 시작할 겁니다. 안 되면 영화 엑스트라나 하고 다니지요 뭐.”
공연이 끝나고 무대 뒤에서 대기할 때 앉아 있었던 의자와 자신의 그림자를 카메라에 담던 권용각씨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덤덤하게 무대를 거닐던 모습. 이제 아이들의 선생님에서 만인의 배우로 거듭날 것이다. 과천시민극단에서 만난 시민배우들은 직업만큼이나 각자의 이야기 또한 다양했다. 배우의 꿈을 이루고 싶은 전업주부, 전직 연극배우였다가 아이를 다 키우고 다시 돌아온 여배우, 은퇴 후 배우가 되겠다는 직장인, 요가 선생, 방과 후 선생님, 아버지가 돌아가신 충격 속에 농사를 짓다가 오디션에 참가한 배우 등 과천시민극장의
는 사연과 사연이 만나 아름다운 공연을 만들어냈다. 행복한 시민배우들의 공연, 올해 또 이어지기를 바란다.
☞연극
연극 는 미국 북동부 뉴햄프셔 주의 그로버즈 코너즈라는 가상의 마을에서 1901년에서 1913년 사이에 일어난 평범한 일상을 의사인 깁스와 지방신문 편집장 웹의 집을 중심으로 보여주는 연극이다. 극중 주인공인 조지 깁스와 에밀리 웹의 사랑과 결혼 그리고 죽음을 통해 담담하지만 소중한 하루하루를 일깨워주는 작품이다.
11월 첫 휴일, 울긋불긋 가을이 가슴에 딱 닿는 날이었다. 고등학교 동창생 60여 명이 대전 계족산에 모였다. 황톳길에 발자국 찍고, 50여 년 전 처음 만났던 옛날을 삼켰다.
장동삼림욕장 해발 200~300미터에서 펼쳐지는 계족산 황톳길(14킬로미터)은 맨발걷기를 체험 할 수 있는 전국 유일의 관광명소다. 계족산(429미터)은 대전 동쪽에 있으며, 산줄기가 닭발처럼 퍼져나갔다 하여 계족산이라 한다.
백제수도 방어를 위한 요충지로서 그 전략적인 중요성이 매우 컸던 곳이다. 산행에 3시간 정도 소요되었다. 무리 없이 산행을 마친 친구들은 서로의 건강을 축하하였다.
고등학교 동창들은 서울에 서등회(회장 이채운) 광주에 산친회(회장 김성남)을 결성하여 20여 년 전부터 매달 산행을 한다. 해외산행·원거리·근교산행으로 건강을 다지면서 우정을 나누고 있다. 오늘은 연례행사 합동산행으로 중간지대 대전을 찾았다.
산행 후 대청호반에서 뒤풀이 행사를 벌였다. 전문가 경지에 이르는 친구들의 장기자랑에 넋을 잃을 지경이었다. 판소리를 수십 년 수련한 김진환 친구의 “경복궁 창덕궁 이궁 저궁 다 좋지만 자네와 합궁이 최고로세” 궁타령에 손바닥이 불나는 줄 알았다.
하모니카 전문가로 경로시설에서 재능기부 자원봉사를 하는 안수영 친구의 ‘비 내리는 호남선, 흑산도 아가씨’는 가슴을 후볐다. “갑돌이와 갑순이는 한 마을에 살았드래요” 흥겨운 노래로 넘어갔다. 오경교 사회자가 “왜 결혼을 못했나?” 질문을 하였다. “동성이어서“ 대답은 자유였지만, ”땡, 갑씨 성은 없다. 결혼하자는 말을 안 해서!“ 정답은 마음대로였다.
“높 맑은 남쪽 하늘 한가슴 안고 줄기찬 무등뫼에 희망도 크다 홍익의 거룩한 뜻 모아 받들어 온누리 밝혀나갈 젊은이라면---” 외국여행에서 듣는 애국가처럼 언제나 가슴 뭉클한 고등학교 교가다. 혈기왕성한 군대생활 때 불렀던 ‘진짜 사나이’보다 더 큰 메아리가 대청호반을 덮었다.
서쪽 하늘에 저녁노을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헤어져야 할 시각이 되었다. 부둥켜안기도 하고 뺨을 비비기도 하였다. “건강하게 다시 만나자” 눈시울을 훔치면서 내년 이맘때를 기약하였다. 버스 한 대는 서울로 다른 차는 광주를 향하면서 아쉬움을 달랬다. 행사를 주관한 서등회, 산친회 임원진에 감사하면서 친구들 항상 행복하기를 바랐다.
최근 걷기 운동을 하면서 서울에 가볼 만한 박물관과 미술관 등이 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가본 곳도 있지만 이번 기회에 새로 알게 된 곳도 많다. 이런 곳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다니면 관람시간을 배정하기가 쉽지 않다. 또 입장료가 부담스러울 때도 있다. 그러나 입장료가 아주 비싸지 않으면 간 김에 관람을 하는 것이 좋다.
서울의 박물관과 미술관들은 대부분 강북에 위치해 있다. 신흥도시인 서초구, 강남구는 그래서 삭막한 동네다. 강남은 경부고속도로가 생긴 후 새로 형성된 도시라서 역사도 당연히 없겠지만,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짓기에는 땅값이 너무 비싼 것도 문제다.
박물관과 미술관에 가려면 시간을 얼마나 잡을지를 먼저 결정해야 한다. 마음먹고 제대로 돌아볼 생각을 하고 나왔다면 한나절 정도의 시간이면 큰 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다. 그러나 자투리 시간을 활용할 때는 작은 박물관이나 미술관이 좋다. 그래서 어느 지역에 어떤 볼거리가 있는지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다.
큰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둘러보고 싶다면 독립문역 서대문형무소, 이촌역 중앙박물관 및 한글박물관, 삼각지역 전쟁기념관, 한강진역 리움미술관, 풍납토성역 한성백제박물관 등을 추천하고 싶다. 경복궁역 서울역사박물관, 대한민국 역사박물관도 규모가 크다. 시청역 근처 서울시립미술관도 있다. 전철로 가기에는 경복궁역에서는 좀 멀지만 부암동 서울미술관도 가볼 만하다. 월드컵공원역에서 30분은 걸어야 하는 박정희기념관도 그렇다.
작은 박물관으로는 경복궁역 경찰박물관, 농업박물관, 경교장, 동아일보 신문박물관, 동대문역 한양도성박물관, 청계천박물관, 제기역 한방박물관 등이 있다. 양재시민의숲역 윤봉길기념관, 강서 쪽에는 허준박물관도 있다. 인사동에는 작은 미술 전시회들이 상시 열린다.
박물관은 귀한 자료를 한 곳에 모아놓은 곳으로서 국가나 지자체가 만들기도 하고 개인들이 희사해서 만들기도 한다. 역사가 있는 민족이라면 당연히 박물관이 많아야 한다. 미술관도 작가들이 심혈을 기울인 작품을 전시한다는 점을 생각하면 귀중한 장소다. 작품 감상을 제대로 하려면 전시 관련 홍보물이나 작가소개 등을 미리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너무 빨리 변하고 바뀌는 세상이라 그런지 요즘 사람들은 멀쩡한 물건들도 주저 없이 내다버린다. 구식이라거나 공간을 차지한다는 게 이유다. 아파트 같은 공동 주택에서는 공간 활용이 빤하기 때문에 옛 물건들을 무작정 쌓아둘 수 없어 버리기도 한다. 다듬잇돌 등과 같은 옛날에 흔하던 물건은 다 내다버려서 이젠 골동품에 속한다. 혼수용품으로 집집마다 있던 재봉틀도 사라진 지 오래다. 옛 물건들은 이제 거의 사라졌다고 보면 된다. 이제는 추억이 되어버린 옛것들을 그나마 볼 수 있는 곳이 박물관이다. 생활 속에서 친숙하게 봐왔던 것을 보는 시니어들과 어디에 쓰는 용도인지도 모르고 보는 젊은 세대들과 관람하는 느낌은 다르겠지만 각 세대가 공감하고 소통하기 좋은 장소이기도 하다. 올 가을에는 산책과 함께 박물관, 미술관 나들이를 해보자.
신라의 천년고도(千年古都) 경주. 이곳에서 맞는 새벽은 늘 벅차다. 문무대왕의 산골(散骨)이 뿌려진 동녘 끝 감포바다로부터 잘생긴 신라 화랑의 자태를 연상케 하는 감은사지 탑, 너른 황룡사지, 계림의 신비로운 숲과 왕릉들. 어디든 지그시 눈감고 앉아 있으면 그윽한 고도의 기운이 감지되는 곳들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곳을 방문할 때마다 제일 먼저 하는 고민이 ‘과연 어디서 새벽을 맞을 것인가?’ 이다. 어디서 또 신라의 새벽향취를 맡아볼 것인가?
글·사진 남정우 사진가 njkor@naver.com
잠들지 않는 바다 - 감포 대왕암과 이견대, 감은사지
감포의 새벽은 경건하다. 동이 트기 전, 대부분의 동해안처럼 일출을 보러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어느 누구도 들뜨지 않는다. 해안 곳곳에 켜놓은 촛불과 새벽기도를 나선 만신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예사롭지 않은 이 풍경은 해안에서 200m 떨어진 검고 긴 바위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사적 158호로 지정된 이 바위의 이름은 대왕암이다.
668년, 부왕 무열왕시대의 백제 정벌에 이어 고구려마저 정벌한 문무왕은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국토는 여전히 불안정했고, 왜구의 침범까지 빈번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유해를 화장하여 동해바다에 뿌려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죽어서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신념이었다. 유언대로 유해는 대왕암 바위에 뿌려졌다. 호국의 용이 된 문무왕은 대왕암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견대 주변에 종종 모습을 나타냈고 그의 아들 신문왕은 이곳에서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만파식적(萬波息笛)을 얻었다.
대왕암이 있는 해안을 뒤로하고 929번 도로를 따라 500m쯤 가다보면 우측으로 잘생긴 두개의 탑이 모습을 나타낸다. 감은사지다. 문무왕은 대왕암에 자신의 산골처를 정하고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명당에 절을 지어 불력으로 나라를 지키고자 했다. 절을 짓는 공사가 시작되었지만 완성을 못보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그 이듬해 아들 신문왕에 이르러 마침내 절은 완공되었고 부왕의 은혜에 감사드린다는 의미로 신문왕은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감은사지에서는 두 가지를 유심히 볼 필요가 있다. 먼저, 너른 양북면 들녘을 배경으로 우뚝 솟은 두 개의 탑이다. 두 기의 감은사지 삼층석탑은 국보112호로 지정되어 있다. 또 하나는 금당의 바닥구조이다. 특이하게도 불전 밑으로 빈 공간이 형성되어 있는데 이것은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도록 해놓은 것이다. 신문왕의 효심이 만든 독특한 공간이다.
경주 시내유적 답사 - 대릉원, 첨성대, 반월성, 계림
서기 65년 어느 봄밤, 왕은 궁궐 서편의 숲에서 울리는 닭울음 소리를 들었다. 늦은 밤 닭이 우는 까닭이 궁금했으나 밤이 깊었다. 다음 날 아침, 왕은 신하를 시켜 숲으로 가보게 했다. 금빛 궤짝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데, 흰 닭 한 마리가 그 밑에 앉아 울고 있었다. 궤짝을 열어보니 놀랍게도 그 안에 아이가 하나 있었다. 범상치 않은 일임을 직감한 왕은 아이를 거두었고, 알지(閼智)라 이름을 붙였다. 금궤짝에서 태어났다 하여 김(金)씨 성을 붙였으니, 경주 김씨의 시조이다. 이후 이 숲을 신성히 여겼고, 닭계 자를 붙여 계림(鷄林)이라 불렀다.
경주 시내 유적의 중심은 첨성대를 중심으로 반월성, 계림, 인왕동 고분군, 대릉원으로 이어진다. 조금 더 범위를 넓히면, 안압지와 국립경주박물관까지 쉬엄쉬엄 걸어서 돌아볼 수 있다. 경주의 풍경 중 독특하고 인상적인 것이 왕릉이다. 거대한 고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고분군을 이루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대릉원과 인왕동 고분군이다. 대릉원은 23기가 모여 능원을 이루는 곳으로 황남대총과 미추왕릉, 천마총 등이 자리하고 있다. 유일하게 내부가 공개된 천마총에서 신라 왕릉의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인왕동고분군은 계림 서편 너른 공간에 자리하고 있다. 현재는 내물왕릉을 비롯해 5기의 고분이 있지만, 일제 강점기 때까지만 해도 13기 가량이 남아 있던 것으로 전해진다. 첨성대와 계림 사이의 공간에서 바라보면 멀리 선도산 자락과 어우러져 묘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산과 능이 마치 한 무리처럼 보인다. 반달처럼 생겨서 반월성이라고 불렀던 월성은 신라 궁궐이 자리했던 곳이다.
동양 최대 사찰 황룡사지와 분황사
경주시내 동쪽에 자리한 황룡사지는 총 면적이 2만 여평에 달하는 동양 최대의 사찰이었다. 진흥왕 14년(553)에 창건되어 선덕여왕 12년(643)에 완공되었으니 공사 기간만 무려 90년이 걸린 국가의 명운을 건 대공사였다. 애석하게도 1238년 몽고 침략 때 전각들은 모두 불타 없어졌지만, 주춧돌과 초석 등이 남아 절의 규모와 전각의 자리를 유추해볼 수 있다. 황룡사에는 지금 시대로 말하자면 경주의 ‘랜드마크’가 있었다. 높이가 무려 80m에 달했다는 황룡사 구층목탑이다. 경주박물관이나 경주타워에 가보면 옛 경주의 모습을 재현해놓은 디오라마를 볼 수 있는데, 황룡사 구층목탑의 위용을 간접적으로나마 실감해볼 수 있다. 황룡사터 초입에는 분황사가 있다. 선덕여왕 3년(634)에 창건된 분황사는 황룡사지에 비하면 아담한 규모다. 그러나 마찬가지로 신라 중심의 평지에 자리 잡은 유서 깊은 사찰이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이곳을 거쳐 갔고, 독특한 양식의 분황사 석탑이 남겨져 있다. 분황사 석탑은 보기 드문 모전석탑인데, 모전석탑은 중국의 전탑을 모방하여 돌을 벽돌처럼 깎아 쌓은 탑을 말한다. 지금은 3층까지만 남아 있으나, 원래는 9층탑이었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다.
국립경주박물관과 안압지
천년고도 경주의 명성에 걸맞게 경주국립박물관은 중앙국립박물관에 이어 최고의 규모와 전시품을 자랑한다. 모두 3개의 전시관에 2500여 점이 전시되어 있으며 8만여 점의 유물이 보관되어 있다. 선사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는 그야말로 신라의 모든 문화가 압축되어 있다. 전시실의 외부에는 경주 인근에서 옮겨온 국보 38호 고선사지 석탑을 비롯 석조유물들이 경내 곳곳에 가득하며 국보 29호 성덕대왕 신종도 이곳에 보관되어있다. 시주로 바쳐진 어린아이의 울음소리가 에밀레 에밀레하고 들린다 하여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이 종은 경덕왕 시절 부왕인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든 것으로 그 모습만으로도 유려하며 장중함이 느껴진다. 화려한 비천상과 연꽃 등의 조각이 섬세하다. 경주박물관에서 길을 건너 조금만 북쪽으로 가면 안압지가 있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룬 직후, 674년에 못을 파고 679년에 궁궐을 만들어 동궁으로 사용하던 곳이다. 신라의 인공 정원이라 불릴 만한데, 삼국사기 문무왕시대를 보면 “궁 안에 못을 파고 가산을 만들고 화초를 심고 기이한 짐승들을 길렀다”고 기록되어 있다.
경주여행 tip
추천 경주 답사일정 감포 대왕암–감은사지-대릉원-첨성대-계림-반월성-국립경주박물관-황룡사지-분황사-안압지-계림일대 야경
경주의 고택에서 숙박 www.gjgotaek.kr
경주의 먹거리 시내 쪽에서 많이 찾는 것이 쌈밥으로, 대릉원과 첨성대 인근에 쌈밥집이 즐비하다. 보통 1인당 1만원 정도로 푸짐하고 먹을 만하다. 보문호 가는 길 북군동의 맷돌순두부도 많이 찾는 경주 먹거리다.
>>남정우(南晶祐) 사진가·여행작가. 스튜디오 COREE 대표
광고사진을 시작으로 출판, 잡지 등의 분야에서 사진가로 활동 중이다. 19번 국도 도보여행이후 백두대간 종주 등의 경험을 바탕으로 를 집필했다.
문화유적에 관심이 많아 관련 모임을 운영했으며, 문화재청과 수자원공사 등 사보에 기고 중이다.
삼국시대 한반도와 만주에 살고 있던, 오늘날 ‘한국인’이라고 부르는 우리 선조들 간에 말이 통했을까?
언어의 진화 속도는 엄청나게 빠르다. 오늘날 어린아이들이 하는 말을 어른들이 못 알아듣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천년 넘게 고립되어 진화되어 온 제주도 방언을 본토 사람들이 못 알아듣는 건 당연하다. 산이나 강으로 나눠진 채 교류가 없이 지나온 삼국시대 선조들 간의 말이 다를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삼국시대는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사에서 가장 역동적인 시기였다. 삼국 간에는 물론이고 말갈, 부여, 낙랑, 마한, 진한, 변한, 가야, 왜 등 주변 국가들과도 끊임없이 접촉하고 충돌하면서 일면 국제정치의 냉혹함으로 보이지만 동시에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해 나간 시기였다.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언어이다. 같은 말을 쓰고 서로 간에 말이 통하면 ‘우리라는 감정(we-feeling)’을 느끼게 된다. 고대 그리스에서 ‘야만인’은 우선 그리스 말을 쓰지 않아 말이 통하지 않는 이어인(異語人)을 말한다. 언어는 사용하는 사람의 고유한 지식과 역사, 세계관을 담고 있기 때문에 정체성의 출발점이며 문화적 보편성으로, 나아가 오늘날 관점에서 ‘민족’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삼국 간에는 사신이 수시로 교환되었다. 과연 이들이 ‘한국어’의 초기 단계라고 부를 수 있는 ‘우리말’을 사용했을까, 그리고 ‘글’은 중국의 ‘한자’만으로 교신했을까? 필자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원시적인 방법이지만 에 나타난 기록들로부터 유추해 보았다.
자세히 읽어보면 는 삼국 간의 접촉을 기술하는 방법에서 차이를 보인다. 우선 일반적으로 발견되는 표현은 파사 이사금 26년, ‘백제가 사신을 보내 화친을 청했다’, 고구려 동천왕 22년 ‘신라가 사신을 보내와 화친을 맺었다’ 등이다. 이 사례들은 이들이 어떤 ‘말’이나 ‘글’로 의사소통을 했는지 충분한 정보를 주지 않는다.
그러면 다음과 같은 표현들은 어떤가? 내물왕 18년 ‘백제왕이 글을 보내 말하기를[百濟王移書曰]’, ‘우리 왕이 ‘대답해 말하기를[答曰]’, 눌지왕 34년 ‘고구려 사자가 와서 말로 통고하기를[使來告曰]’, 고구려 장수왕 12년 신라의 사신을 ‘왕이 특별히 두텁게 위로했다.[王勞慰之特厚]’, 백제 개로왕 21년 고구려 승려 도림이 ‘문 앞에서 고하기를[詣王門告曰]’, ‘왕을 모시고 앉아 조용히 말하기를[從容曰]’ 등은 표현 방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상의 기록들을 보면 삼국 간에 어느 정도 의사표현이 자유스러웠을 것이라 짐작된다. ‘열전’ 제1 ‘김유신’ 편에는 김춘추가 연개소문에게 백제를 치자고 청한 데 대해 고구려가 거부하는 대화가 나온다. 이후 옥에 갇힌 김춘추가 고구려왕이 총애하는 선도해(先道解)에게 뇌물을 주고 두 사람은 토끼와 거북의 설화를 주제로 ‘농담을 나눈다’ 그리고 ‘석방되어 신라 국경을 넘으면서 고구려 호송인에게 그들을 속였음’을 말한다.
고구려는 개로왕을 잡아 ‘얼굴을 향해 세 번 침을 뱉고 곧 죄목을 헤아린 다음’ 죽였다. 백제 항복 당시 신라 태자 김법민(金法民, 후일 문무왕)이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夫餘隆)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꾸짖는다’. ‘열전’, ‘김인문’ 편에는 고구려가 멸망하고 보장왕이 잡히자 ‘인문이 고구려왕을 당의 영국공(英國公) 이적(李勣) 앞에 꿇어앉히고 그의 죄를 헤아려 꾸짖었다. 고구려왕이 두 번 절을 하자 영국공이 그에게 답례했다’. 김인문은 보장왕에게 직접 말을 했으며 영국공은 보장왕이 절을 하자 몸짓으로 답례했다는 것이다. 그 외 백제 무왕(武王)인 서동(薯童)과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의 설화(, ‘기이’ 제2) 등, 말이 통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되는 부분이 많다.
삼국 간 언어의 차이는 오늘날 서로 다른 방언 정도인 듯하며 이를 극복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오늘날 언어에 관한 간단한 이론 한 가지를 덧붙여 보자. 에 관한 연구로 알려진 앨버트 메라비언은 3V 이론을 제시한다. 얼굴을 마주보는 대화에서 상대방이 전하려는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데 언어의 의미(verbal 혹은 words)가 7%, 말의 억양(vocal 혹은 tone of voice)이 33%, 표정(visual/ facial, body language)이 55%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이 하는 말의 ‘언어적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표정이나 몸짓을 ‘보고’ 혹은 말의 억양을 ‘느끼고’ 상대방이 전하려는 메시지의 ‘의미’를 ‘인지하고’ 받아들인다. 남녀가 싸울 때 여자가 “I hate you(난 네가 싫어!)”라고 해도 남자는 오히려 섹시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최근 국어학자들은 34~37권에서 삼국의 지리가 한자로 기록된 것을 거꾸로 유추하여 당시의 우리말을 찾으려고 한다. 우리글이 존재하지 않던 시대에 원래의 지명을 한자로 음역한 것이 많은데 언어학적 연구를 통해서 그 기원을 추적하면 삼국은 유사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중국 고대 진(秦)에서 수-당 시대 중국어의 변천과 우리말의 변천을 통해 우리말의 원형을 찾아가는 작업인데, 설명이 전문적이어서 필자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예를 들어 44권에 나오는 ‘居柒夫 或云 荒宗(거칠부 혹운 황종)’은 ‘거칠 황’ ‘부와 종은 우두머리’라는 걸 이해하면 ‘거칠부라고 발음하고 (혹은) 이것은 황종으로 쓰는’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중세국어에서 ‘거칠’은 ‘거츨’로 발음된다. 그러면 그 이전인 삼국시대에는 이를 어떻게 발음했는지, 또 ‘거칠’의 의미가 무엇인지, 그리고 삼국이 비슷하게 사용했는지 등은 또 다른 연구가 필요할 것이다.
마지막 단서는 중국 ‘24서’ 중 하나인 , ‘동이열전’, ‘신라’ 편에 나온다. ‘신라는 문자가 없고 나무를 조각하여 편지를 했다. 말은 백제인을 기다려 통했다’는 구절이다. 중국인들이 신라인들과 의사소통을 할 수 있도록 중국과 교류가 잦은 백제인이 통역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백제인과 신라인 간에는 서로 말이 통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증거가 될 것이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고구려의 최전성기는 광개토왕(재위 392~413)과 장수왕(재위 413~491) 시대이다. 아버지 광개토왕의 정복전쟁은 드라마로 만들어질 정도로 크게 평가된다. 그러나 아들 장수왕은 78년 동안 고구려를 다스리면서 영토를 최대로 확장한 군주로만 잘 알려져 있다. 장수왕이 광개토왕의 업적을 비문으로 남겨 후세에 전해주었지만 장수왕의 업적은 에 사실 위주로 짧게 나열되어 감동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는 한국사에서 중국의 여러 왕조들을 상대로 지금은 수치스럽게 느껴지는 조공을 제일 많이 보낸 왕이다.
그러나 장수왕은 분열된 북중국을 중심으로 위-연-유연-송-제-고구려를 둘러싸고 전개된 국제정세의 변화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조공을 외교수단으로 최대한 이용하면서 국가이익을 극대화시킨 인물이다.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가장 위대한 외교군주(diplomat king)라 칭해도 무방할 것이다.
주요한 사건들이 많지만 지면 관계상 몇 가지만 보자. 589년 수(隋)가 통일하기 이전 남북조 시대 중국은 왕조의 교체가 빈번하여 혼란이 극심했다. 그 중심 국가는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北魏)이다. 조조의 위와 구분하여 북위라 부른다. 430년대 중반 북위가 요서와 하북 일대에 근거한 북연(北燕)을 공격하면서 큰 변화가 일어난다. 장수왕이 먼저 435년 위에 조공사절을 보내 사태를 탐색한다. 위도 사신을 보내 답례한다.
그러나 다음해 다시 사신을 파견하여 위-연 전쟁에 ‘참여하지 말 것’, 즉 중립적 자세를 견지할 것을 ‘명령’한다. 한편 연왕 풍홍(馮弘)도 위와의 전쟁에서 사태가 불리해지면 고구려에 의탁했다가 후일을 도모할 것을 생각하고 435년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망명 수락을 요청한다.
위는 다음해 고구려의 중립을 재차 강요하면서 연의 수도 화룡성(和龍城, 오늘날 朝陽, 요하의 서쪽)에 도달한다. 그런데 장수왕은 위의 중립요구에 순응하지 않는다. 두 강대국이 생사를 건 전투에 몰입하고 있는 중간에 과감히 뛰어든 것이다. 고구려군 수만은 위와 거의 동시에 연의 수도에 접근한다. 화룡성 안에서는 친고구려파와 친북위파 간에 내분이 일어나 서로 성 밖에 주둔하고 있던 자기편을 먼저 성 안으로 끌어들이려고 하였다.
친북위파가 먼저 성문을 열고 북위군을 영입하려 했으나 북위군은 의심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이 틈을 타 돌입한 고구려군은 성을 장악해 전리품을 획득하고 연왕과 다수의 주민을 이끌고 동으로 회군한다. 회군할 때 고구려 군세에 위압된 북위군은 공격을 감행하지 못하였다. 고구려군은 무모하게 성 안으로 돌진한 것이 아니라 근왕파이자 친고구려 인사들을 통해 성 안 사정을 파악하고 선수를 친 것이다.
고구려의 간섭을 두 번이나 경고한 북위로서는 연을 멸망시켰지만 연왕은 도망가고 고구려의 반항으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꼴이 되었다. 이에 사신을 고구려에 보내 연왕을 ‘압송’하려 하지만, 고구려는 ‘마땅히 연왕과 함께 위의 교화를 받겠다’는 표문을 바치면서 위의 요청을 피해버린다.
장수왕의 외교는 이제 망명객 연왕 풍홍의 처리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연왕은 화룡성 함락 1년 10개월이 지나서야 요동 고구려 영내에 도달하는데, 장수왕은 그에게 사신을 보내 “용성왕 풍군(馮君)이 야숙하고 있으니 병사와 말들이 얼마나 피곤하겠느냐”고 위로한다. 이것은 북연의 황제로 칭하며 고구려를 업신여겼던 연왕을 이제는 고구려왕의 외신(外臣) ‘군’으로 강등시켜 야유한 것이다.
창피하고도 노여워진 풍흥은 ‘황제의 위세를 내세워’ 장수왕을 꾸짖고 허세를 부린다. 정사와 상벌을 자기 나라에서 하듯이 행했다. 이에 장수왕은 풍홍을 여기저기로 이동시키면서 시종을 빼앗고 태자를 볼모로 데려가는 등 압박을 가한다. 풍홍이 ‘이를 원망하여’ 남쪽 송(宋)에 망명하려 하자 송은 438년 7000 병사를 보내면서 고구려가 이들의 ‘호송을 돕도록’ 지시했다. 장수왕은 풍홍이 남쪽으로 내려가도록 내버려 두었다가 군대를 보내 풍홍을 죽여 버린다.
466년 북위와 고구려 간에는 양국관계의 실상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건이 발생한다. 북위는 황제 현조(顯祖)에게 육궁(六宮)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면서 황제의 비빈으로 고구려왕의 딸을 바칠 것을 요구한다. 외교적 탐색을 가동한 것이다. 북위는 과거 연과 혼인을 한 뒤 얼마 안 돼 연을 쳤는데, 사신들이 오가면서 연나라 지세와 형편을 조사했다고 한다. 고구려에 대해 동일한 수법을 동원한 것이다. (수와 당의 고구려 침공 직전에도 중국은 사신을 보내 고구려 정세를 정탐한다.)
고구려는 장수왕의 딸이 출가했다고 하면서 아우의 딸을 대신할 것을 청하는데 위는 이를 허락한다. 이어 아우의 딸도 죽었다고 둘러댄다. 위 역시 고구려의 의도를 파악한 듯, 엄중히 질책하고 다른 종실의 여자를 보낼 것을 요구하고 고구려는 겉으로 이에 순응하지만 위의 현조가 죽어 이 사건은 흐지부지해진다.
장수왕 시대 고구려의 위상은 절정에 달했다. 484년 고구려는 북위에 사절을 보내는데, 위에서는 고구려가 ‘강성하다(我方强)’하여 여러 나라 사신들의 숙소를 배정할 때 제(齊) 다음으로 큰 관저를 주어 최상급으로 대우한다. 중국 는 이어 위가 여러 사신들을 영접할 때 남제와 고구려의 사신을 나란히 앉게 했다고 북위에게 다음과 같이 불평했다고 적고 있다. “우리와 겨룰 수 있는 나라는 오직 위가 있을 뿐이오. 다른 외방의 오랑캐는 우리 기마가 일으키는 먼지조차 볼 수 없소. 하물며 동이의 조그마한 맥국(貊國, 고구려)은 우리 조정을 신하로서 섬기고 있는데, 오늘 감히 우리와 나란히 서게 할 수 있소?”
장수왕이 죽었을 때 위의 효문제(孝文帝)는 예복을 입고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식을 거행했다. 이것은 김춘추의 사망 당시 당 고종이 행한 의식과 같은 것으로 상존했던 위와의 관계를 장수왕이 마지막까지 훌륭하게 관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중국의 여러 왕조나 백제를 상대로 한 장수왕의 외교는 현장에서 정세의 변화를 읽으면서 직접 지휘한 것 같은 느낌을 준다. 1400년이란 세월을 뛰어넘어 19세기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통일하는 과정에나 그 후 유럽의 국제관계를 운용하면서 정세의 변화에 맞추어 동맹관계를 수시로 변환시킨 능력과 흡사하다면 지나친 표현일까?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
“제가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경험을 학생들에게 전해주는 일이 정말 보람 있어요. 강의하면서 젊은이들의 열정과 신세대의 문화코드를 배우기도 하지요.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학생들로부터 많은 것을 배우기도 해 강단에 서는 것이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입니다.” 드라마, 영화, 연극무대를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중견 연기자 이순재의 또 다른 직업은 가천대 연기예술학과 석좌교수다.
대학가는 3월 입학식과 함께 활기찬 새 학기가 시작된다. 최근 들어 대학 캠퍼스에 교수나 강사로 나선 연예인들의 모습이 크게 늘었다. 방송, 연예, 연극, 영화, 음악 등 연예인 지망생이 급증하면서 대학교들이 경쟁적으로 관련 학과를 신설하거나 학생 수를 늘려 대학 강단에 서는 연예인들도 많아졌다. 무엇보다 방송, 연예, 연극, 영화 관련 학과에선 풍부한 현장 경험과 실무가 중요하므로 학생들이 연예인 교수를 선호한다. 또한, 연예인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전문성, 대중적 인지도가 대학교 홍보나 학생 모집에 큰 도움이 돼 유명 연예인을 교수로 임용하는 대학이 증가하고 있다.
모델 활동을 하면서 대학 강의를 병행하다 전업 교수로 돌아선 김동수 동덕여대 모델학과 교수 같은 경우도 있지만 강단에 서는 연예인 대부분은 연예 활동을 병행하고 있다. 대학 강의를 하는 연기자, 가수, 개그맨, 방송인, 모델 등은 석좌교수, 정교수에서부터 초빙교수, 객원교수, 특임교수, 강사 등 다양한 형태로 강의하고 있다. 출강하는 곳도 4년제 대학에서부터 전문대학, 특수 직업학교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다.
생생한 현장이야기 학생들 좋아해
이순재는 세종대 석좌교수를 거쳐 현재 가천대 석좌교수로 재직하며 20년 넘게 학부생과 대학원생들에게 연기론을 강의하고 있다. 명지전문대 연극영상학과 정교수로 있는 중견 연기자 장미희도 지난 1998년부터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순재나 장미희처럼 대학 강단에 서는 연기자들이 적지 않다. 중견 배우 최란은 한서대 교수를 거쳐 2015년 2학기부터 서강대 영상대학원에서 초빙교수 자격으로 ‘연기 세미나’ 과목을 강의한다. 드라마와 연극무대에서 정교한 연기력을 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하는 정보석은 수원여대 연극영상과 부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스타 연기자 고현정은 2014년부터 동국대학교 연극학부 겸임교수로 위촉돼 매체 연기 과목을 강의하고, 고려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탤런트 배종옥은 중앙대학교 연극영화학부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이 밖에 최불암 유인촌 유동근 서인석 노주현 정동환 이인혜 명세빈 이영하 류승룡 이범수 김성령 남성진 등 많은 연기자가 대학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현재는 강의하고 있지 않지만, 한때 김희애처럼 교수로 재직하며 대학 강단과 인연을 맺었던 연기자들도 적지 않다.
정보석은 “연기자 교수들은 연기 활동을 병행하고 있으므로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실기 강의를 하는 데 유리하다. 연예계에 진출하려는 학생들에게 다양한 경험을 전달하고 조언도 해줘 학생들이 좋아한다”고 말했다. 또한, 최란은 “미디어의 영향력이 점점 더 커지고 있는 시대적 흐름에 맞춰 학생들에게 현장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산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강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최근 가수와 뮤지컬 배우 지망생이 급증하면서 각종 대학의 실용음악과와 뮤지컬학과에서 강의를 하는 가수와 뮤지컬 배우들도 크게 늘었다.
가수 장혜진은 지난 2009년 한양여자대학교 실용음악과 전임교수로 임용돼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장혜진은 “전임교수로 실용음악과 보컬 전공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가수로 활동하고 있기에 가수 지망생인 학생들의 강의 참석률이 매우 높다. 실기뿐만 아니라 이론도 철저히 지도한다”고 강조했다.
가수 옥주현은 겸임교수 자격으로 디지털서울문화예술대 실용음악과에서 강의한 바 있으며 현재 동서울대학 공연예술학부 학생들을 대상으로 뮤지컬을 지도하고 있다. 가수 김연우는 서울종합예술학교 실용음악예술학부 전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인순이는 한국방송예술진흥원 실용음악학부에서 강의하고, 바비킴은 서울예술전문학교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뮤지컬 배우 겸 감독인 박칼린은 호원대학교 방송연예학부의 뮤지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이 밖에 대학 강단에 서는 가수로는 송대관 김경호 알리 등이 있다.
개그맨들의 대학 강단 진출 바람도 거세다. 개그맨 이윤석은 서울예술전문학교 방송연예학부 학과장으로 활약하고 있으며 이봉원, 김한석은 한국방송예술진흥원에서 개그맨 지망생들을 대상으로 희극 연기론을 강의하고 있다. 슬랩스틱 코미디와 다큐 예능의 1인자 김병만은 백제예술대학 방송연예과 겸임교수로, 개그맨 박준형은 경인여자대학 방송연예과에서 강사로 학생들과 만나고 있다. 남희석 이영자 김미연 김수용 등도 대학 강단에 서는 개그맨으로 유명하다.
방송인, 모델, 쇼호스트 역시 속속 대학 강단에 서고 있다. 아나운서로 활동한 뒤 성신여대에서 후학들을 지도했던 손석희 JTBC 사장처럼 아나운서 중에는 대학 강의를 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KBS 등에서 명진행자로 활동하는 아나운서 출신 방송인 이금희는 모교인 숙명여대에서 후배들을 지도하고 있으며 MBC 아나운서 출신인 김경화는 연세대 생활환경대학원 겸임교수로 강단에 서고 있다. 임성민 문지애 박혜진 서현진 김병찬 김성경 등이 아나운서 출신으로 대학 강의를 하는 방송인이다.
일부 연예인 교수들 부실강의로 문제
김동수 동덕여대 모델학과 교수처럼 모델 출신 대학 강사, 교수들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모델 박둘선은 한국예술원 모델과 전임교수로 활동하고, 한국모델협회 교육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조향기는 대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유난희를 비롯한 쇼호스트들 역시 대학의 방송학과나 쇼호스트학과에 출강하고 있다.
이처럼 연예인들이 대학 강단에 서는 이유는 자신이 현장에서 쌓은 경험과 노하우 등을 후학들에게 전수하는 것에 큰 보람을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연예인들이 대학 강의를 하면서 공부와 연구를 통해 새로운 정보와 지식, 이론을 습득해 연기나 무대에 적용해 더 발전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도 대학 강단에 서는 이유다. 이 밖에 대학 강의가 연예인의 이미지 제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점도 대학에 진출하는 원인으로 작용한다.
서인석은 “열정이 넘치는 학생들을 보면서 연기자로서 초심을 잃지 않게 된다. 연기와 대학 강의를 병행하는 것은 힘들지만, 대학 강의를 하면서 새로운 이론을 공부하고 현장에 적용할 수 있어 시너지 효과가 크다”고 설명했다.
상당수 연예인 교수들이 탄탄한 실기 실력과 풍부한 현장 경험으로 학생들에게 유익한 강의를 해 학생들로부터 찬사를 받기도 하지만 일부 연예인 교수들은 부실한 강의 등 문제점도 드러내고 있다. 시간강사, 겸임교수, 초빙교수, 전임교수, 정교수 등 각종 형태로 대학 강단에 서고 있는 연예인 중 일부가 방송연예 활동과 강의를 병행하는 관계로 잦은 수업 결강, 부실한 수업 내용, 신변잡기로 일관하는 강의 등으로 문제가 되고 있다. 적지 않은 학생들이 유명한 연예인 교수 수업을 신청했다가 강의 내용이 부실해 실망을 표하기도 한다. 새 학기에 강단에 서는 연예인 교수들은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해 내실 있는 강의로 학생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기를 원하고 있다. 경북 경산의 대경대학 방송학과 학과장으로 방송 MC 진행 실기, TV 예능 화법, 코멘트론, 아이디어 개발론 등을 강의한 바 있고 요즘에는 특강 형태로 대학생들을 만나고 있는 개그맨 남희석은 “대학 강단에 설 때 학생들이 정말 수강을 잘했다는 말이 나오도록 강의에 최선을 다하려고 했다. 나 한 사람이 잘못하면 연예인 전체에 누를 끼치게 된다. 연예인들은 대학 강단에 서는 순간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국 중 경제나 안보에서 가장 유리한 조건을 갖춘 백제가 제일 먼저 멸망했다. 소정방(蘇定方)이 이끈 당군이 덕물도에 도착한 것이 660년 6월 21일, 당군이 전투를 시작한 것이 7월 10일, 그 하루 전인 9일 황산벌 전투가 있었고, 12일 부여성이 포위되며, 13일 의자왕이 공주성으로 탈출하지만 18일 항복한다.
당군이 백마강에 나타나서 사비성을 에워싼 지 6일 만에, 신라와의 황산벌 전투 후 9일 만에 백제는 사라진 것이다. 한 달이 안 된다. 8월 2일 백제 왕궁에서 열린 승리 축하연에서 단 아래 앉은 의자왕은 단상의 김춘추와 나-당 장수들에게 술을 치는 모욕을 당하고 곧 당나라로 끌려간다.
신라군은 백제인들을 어루만지면서 따뜻하게 대하지 않았다. 무열왕과 아들 법민(후일 문무왕) 등 신라의 최고위층 조차 딸과 누이를 (642년 대야성 전투에서) 잃었다는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지도층이 이러니 승리감에 도취한 일반 군졸들은 닥치는 대로 부수고 학살하여 쓰러진 시체가 풀더미같이 쌓였다.
당은 백제 처리에 대해 명확한 로드맵이 없었던 것 같다. 고구려 공격을 위한 후방 기지가 제일 목표였지만 백제 지역 평정을 위해 백제를 부활시켜 신라의 부용국(속국)으로 존속시키거나 신라와 대등한 지위로 만들려 했다. 당은 663년 의자왕의 아들인 부여융(扶餘隆)을 당에서 데려와 웅진도독과 백제군공으로 임명하고 문무왕과 동격으로 백마의 피를 머금는 맹약을 맺게 한다. 부여융은 문무왕이 태자 시절 백제의 항복을 받으면서 말 아래 꿇려앉혀 침을 뱉으면서 모욕을 준 인물이다.
이 모든 상황이 백제 부흥운동을 위한 분위기를 조성한 것이었다. 백제인들은 왕조의 멸망이 ‘한순간의 실수’로 일어난 것일 뿐 전쟁에서 패배한 것이 아니라고 믿었다. 신라와의 전쟁은 항상 있어왔던 일이다. 서양에서 가장 비겁한 행위로 간주되는 ‘뒤에서 등을 찔린 것(die Dolchstoß Legende)’과 같이, 얼떨결에 뒤통수를 맞고 정신을 잃었는데 깨어보니 전에는 빌빌거리던 놈들이 집을 차지하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제 정신을 차려 한번 진검승부를 해보자고 나선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백제의 부흥운동이 우리의 역사에서 실패한 에피소드나 소극(笑劇)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주요한 의미를 가지는 이유인 것이다.
부흥운동은 멸망 직후 곧 시작된다. 부흥군은 오늘날 대전 유성구와 무주 일대에 진을 치고 당군과 신라군을 공격한다. 무주는 부여-웅진을 잇는 수도 지역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8월 26일 나-당 점령군은 예산의 부흥군을 공격하지만 이기지 못했다. 반대로 부흥군이 9월 23일 사비성에 있던 동료들을 탈취하고 부여 남령(금성산)에 올라 보란 듯이 영채[木柵]를 세우고 사비성을 공격하자 20여개 성이 호응한다. 신라는 10월에 무열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반격에 나선다. 부흥군이 사비성을 공격하자 다음해 661년 2월 황산벌에서 전사한 관창(官昌)의 아버지 김품일(金品日)이 지휘하는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구원하지만 백제군의 기습으로 물러난다.
그러나 백제 부흥운동은 실패했다. 전략적인 측면에서 접근해 보자. 부흥운동이 왕조의 부흥을 목표로 삼았다면 의자왕을 계승할 왕을 세우고 흩어진 부대들을 중앙의 지휘 아래 흡수하며 수도 사비성을 탈취하고 가능하면 많은 성들을 흡수하여 세력을 키우는 등 구체적인 성과를 보여야 할 것이다.
초기에는 일본에서 돌아온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 )과 장군 부여복신(扶餘福信), 승려 도침(道琛) 등이 이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많은 부흥군 부대가 백제의 부활을 확신한 듯 부여풍의 지휘 아래 들어왔다. 그러나 661년 3월 부흥군이 사비성을 포위 공격하면서 신라군과 벌인 웅진강 어귀 전투에서 1만 명의 전사자를 남긴 채 임존성으로 퇴각한다. 신라군 역시 군량이 떨어져 물러난다.
무승부로 끝난 것 같은 이 전투에서 병력 보충이 어려운 부흥군은 치명적 손실을 입으며 이것이 부흥운동의 전환점이 된다. 마치 1908년 의병 부대들이 서울 30리까지 진격했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패퇴한 후 의병의 기세가 꺾인 것과 비슷하다.
의자왕을 계승하는 왕을 세우는 문제는 그의 아들인 부여풍을 영입함으로써 순조로이 해결된 것같이 보이지만 함정이 있다. ‘일본서기’는 661년 8월 ‘복신이 (부여풍을) 마중 나와 절하고 국정을 위임했다’고 하지만 이것은 실력자가 명목상의 군주를 맞이한 것이었다.
각지의 부흥군들은 통합되지 못하고 ‘독립 왕국’으로 존속했으며, 도침이나 복신은 스스로 ‘장군’이라고 칭했다. 이들은 당의 사자에게 거만한 자세로 “등급이 낮아 일국의 대장인 나의 상대가 아니다”라면서 답장도 없이 돌려보낸다. 군사적 대치상황을 외교를 통해 풀어가면서 백제 부흥이라는 최종 목표로 나아가는 안목이 부족했던 것이다. 도침은 백제가 이미 회생한 것같이 ‘일국’의 대장이라고 거드름을 피우지만 험준한 주류성에 처박혀 만족하는 집단으로 전락한 것이다. 당군은 후방을 평정하면서 지구전으로 이들을 옥죄는 전술을 택한다.
부흥군에게 마지막 일격을 가한 것은 내분이었다. 부여복신과 도침이 서로 경계하는 가운데 부여풍은 조정자로서 역할을 하지 못했다. 양측의 갈등은 서로 상대방을 제거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인식될 정도로 커졌다. 먼저 도침이 당한다. 부여풍도 복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제의(祭儀)나 주관할 뿐 실권을 가지지 못한 존재로 전락하자 불만이 증폭된다. 복신이 병을 핑계로 부여풍을 유인하자 부여풍이 선수를 쳐서 그를 제거한다. 부흥운동의 중앙을 지휘하던 3명 중 2명이 사라진 것이다. 이 현상이 권력집중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긍정적으로 평가하겠지만, 부흥군의 분열을 가속화함으로써 부흥운동은 더욱 약화된다.
663년 초 주요 거점에서 저항하던 부흥군이 항복함으로써 백제의 전선은 급속도로 무너진다. 뒤늦게 8월 백제 부흥을 위해 일본 지원군이 금강하구 백강구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과 싸우지만 패배한다. 일본 지원군은 또 다른 이야기이지만 부흥운동이라는 관점에서는 안티 클라이맥스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 구대열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ㆍ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