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30일(현지시각),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의 산사(山寺) 7곳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열세 번째 유네스코 세계 유산을 갖게 되었으니 7곳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다.
당초 통도사와 부석사, 법주사, 대흥사 등 4곳만 등재될 듯하였고, 봉정사, 마곡사, 선암사 등 3곳은 보류될 처지였으나 세계유산위원회의 21개 위원국이 만장일치로 한국이 신청한 7곳 모두를 받아들여 등재되었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등재된 7개 산사 외에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단한 절집들, 예컨대 송광사나 해인사, 화엄사, 직지사, 수덕사 등은 왜 누락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하기 위하여 전국의 절집들을 대상으로 전통사찰, 산지입지,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여부 등을 1차 선별기준으로 적용하여보니 전통사찰법에 의거 인정된 곳이 952곳이었으며, 이중 산지입지 조건을 충족시킨 곳이 785곳, 여기에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기준을 대입하니 63곳이 일차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7~9세기 창건 여부와 창건 시기를 증빙할 자료를 확인해본 결과 다음 25곳으로 압축되었으니 관룡사, 귀신사, 금산사, 기림사, 내소사, 대흥사, 마곡사, 무량사, 무위사, 범어사, 법주사, 봉암사, 봉정사, 부석사, 불영사, 쌍계사, 선암사, 선운사, 수덕사, 용문사, 운문사, 장곡사, 전등사, 직지사, 통도사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원(禪院)의 운영과 원래 지형을 유지하는지 여부 등을 확인하니 최종적으로 위 7곳이 선정되어 등재 신청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쟁쟁한 사찰들이 누락된 이유는 무엇인가.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경우, 9세기 무렵 길상사라는 암자로 시작하였으나 지금의 대찰은 12세기 후반 보조국사 지눌에 의한 것이다. 7~9세기 창건에 한참 늦었으며 삼보사찰 중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법보사찰 해인사의 경우 9세기 창건의 기록은 확인되었으나 이후 고려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팔만대장경은 조선시대에 해인사로 옮겨진 것이며 특히나 근래 사찰의 원형을 변형시킬 만큼 많은 공사가 있었음이 그 이유였다.
또한 화엄사의 경우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사찰의 중수나 중창 자료가 불충분하며 직지사나 범어사, 선운사 등은 건물의 상당 부분이 변형되거나 원형 유지가 애매한 점 등이 그 이유였다. 여기서 최근 유서 깊은 절집들의 무분별한 중창불사나 대규모 확장 건설공사가 역사성이나 문화적 가치에 반하는 일임이 드러났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을 하나씩 답사해보기로 한다.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이다.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명종 때인 1172년 보조국사가 중수하고 범일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신라 보철화상 때 설법을 듣기 위해 계곡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형태가 삼밭의 삼대, 즉 마(麻)와 같다 해서 마곡사(麻谷寺)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도선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세조가 이 절에 들려 ‘만세에 망하지 않을 땅(萬世不忘之地)’이라 평가하고 영산전(靈山殿) 현판을 사액한 일도 있었다.
마곡사가 위치한 공주 유구 지역은 정감록 등 각종 비결서(秘訣書)에 전해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이며,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고 하여 봄날 생기 움트는 나무와 봄꽃들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이다.
마곡사에 아쉽게도 국보급 문화재는 없으나 5층 석탑(보물 제799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과 제6권(보물 제270호)이 있으며 범종과 청동향로 등 지방문화재와 세조가 타고 왔다가 두고 갔다는 연(輦)이 있어 오랜 전통과 유서 깊은 절임을 말해준다.
또한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일본군 장교를 살해 후 숨어들어 승려로 지내기도 했던 곳으로 해방 후 찾아와 심은 향나무가 지금도 자라고 있어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는 곳이다. 불화(佛畵)를 그리는 화승(畵僧)들이 많이 활동하여 오늘날까지 화승들을 추모하는 다례제를 지내는 화소사찰(畵所寺刹)이다.
예전에 마곡사는 개울을 멀리 돌지 않고 허리를 뚝 잘라 옆구리로 진입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진입로를 잘 정비하고 주차장을 갖추어 놓아 누구나 자연스럽게 입구로 들어와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 북원 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진입로 중간에 있는 일주문은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사실상 해탈문(충남문화재자료 제66호)이 마곡사의 첫 관문인 셈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중앙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면서 양편에는 금강역사상(인왕상)과 문수 및 보현동자상을 봉헌하였다.
해탈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충남문화재자료 제62호)이 나오는데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상하던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수미산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마곡사 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소조불로 봉안되었으며 발밑에 악귀상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왼쪽의 영산전 영역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계류를 흐르는 다리를 건너니 마곡사의 중심영역인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오층석탑(보물 제799호) 꼭대기에는 보기 드물게 청동제 머리 장식을 얹었는데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들의 라마탑을 본떠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층 남쪽에는 자물쇠 모양을 새겼으며, 2층에는 사방에 불상을 새겼고 지붕돌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5층 지붕돌에만 1개가 매달려 있다.
마곡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모셔져 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의 주인으로 서쪽에 앉아계신다지만 비로자나불을 왜 서쪽에 앉혔는지는 알 수 없어 궁금하다.
대광보전 뒤에 솟아오른 2층 지붕은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인데 안에는 석가모니와 서쪽에 아미타, 동쪽에 약사여래를 모셨는데 약사여래불이 약합을 들지 않고 아미타여래와 같은 수인을 하고 있다.
마곡사의 중심 영역 서쪽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白凡堂)이 있으며 그 옆으로는 1946년 이곳을 다시 찾은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마곡사 개울가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삭발 바위가 있어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이렇듯 마곡사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에 돌아 나오는 길에 해탈문과 사천왕문 옆 영산전을 찾아본다. 영산전(보물 제800호)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러 찾아왔다가 못 만나자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마곡사. 승가 공동체의 생활과 전통양식을 잘 보전하여 ‘한국의 산사’ 7곳에 포함되었고 불화를 그리는 유명 화승(畵僧)들의 맥을 이어가는 절집이다.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 무등산 자락에 가면 ‘생오지문예창작촌’을 만날 수 있다. 소설가 문순태(文淳太·80) 씨가 추구하는 문학의 열정을 증명하는 이곳 주변의 도로명은 생오지길. 원래는 만월2구라 불렸다고 한다. 그 이름을 바꾼 것이 바로 문 작가다. 그가 어린 시절 이곳을 생오지라고 불렀던 기억을 되살려 문학의 집을 만들어 생오지라고 이름 붙인 것이 지금에 이른 것이다. 소설 ‘징소리’와 ‘타오르는 강’ 등으로 한국문학사에 자신의 이름을 깊게 새긴 그가 말하는 고향과 문학, 그리고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인생을 들여다봤다.
문순태 작가가 생오지에 자리를 잡은 지는 어느덧 13년째, 그동안 그는 이곳에서 문학제를 열고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을 완성했으며 창작집 두 권과 에세이집, 시집 등 다양한 책들을 만들었다. 최근에는 시 쓰기에 열중하고 있다.
“나이가 드니 소설 쓰기가 힘들어요. 수술을 여러 번 하기도 했고 기억력도 쇠퇴해서. 대신 자꾸 시가 써지네. 시는 누워서 앓고 있어도 영감으로 쓰는 게 가능하니까요.”
그는 지난 1년 동안 장편소설 ‘광주 가는 길’을 집필했다. 그 와중에 쓴 시들을 모아 ‘생오지 생각’이라 이름 붙이고 얼마 전 출판사로 넘겼다. 새삼 그가 1939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올해 팔순의 나이.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창창했고 문학가로서의 그의 업 또한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후배 소설가 김영현 씨는 얼마 전 전주에서 열린 혼불문학상에서 그를 만나 자신의 롤모델이, 문 작가처럼 80대까지 살아서 현역으로 활동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한다. 자신의 나이를 언급하는 말을 듣고 문 작가는 다소 슬픈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 큰 위로가 되기도 했다. 언제 죽어도 미련이 없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사후에도 영원히 남을 작품
“아버지는 전형적인 한량이었죠. 농사는 안 짓고 첩을 둘이나 두신 분이었으니. 반면 어머니는 전형적인 농사꾼이셨어요. 저는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으며 자랐습니다. 덕분에 일찍부터 땅의 소중함을 알게 됐죠.”
문 작가는 당시 ‘아무나 못 들어가는’ 광주고등학교를 들어갔고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문학을 만나게 됐다.
“2학년 국어선생님이 수필가였는데 글을 써내라고 해서 에세이를 썼어요. 그런데 그 에세이를 엄청 칭찬하는 거예요. 너무 잘 썼다면서 문예부에 들어오기를 권했고 들어가니 이성부, 조태일 같은 친구들이 있어서 함께 어울렸죠. 특히 시인인 김현승 선생님을 너무 존경했어요. 고등학생인 우리를 데리고 숲 산책을 하면서 시는 무엇이고 인생은 무엇인지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죠. 사실 김현승 선생님처럼 되고 싶어 시를 쓰게 된 거예요.”
1965년 ‘현대문학’에 시 ‘천재들’이 추천되어 등단한 문 작가는 전남대학교 철학과, 숭실대학교 기독철학과를 거쳐 조선대학교 국문과를 다니면서 조선대학교 부속고등학교에서 독일어 강사를 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삶이라고 보기 힘들었기에 내심 답답했던 그는 신문사로 갔다. 신문사에서 일하며 독일 연수를 다녀오니 유신이 나라를 뒤집어놨다. 절박해진 현실에서 소설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다지게 됐고, 마침내 1974년에 ‘백제의 미소’가 ‘한국문학’에 당선되어 소설가라는 명찰을 달았다.
“그때가 서른네 살이었으니 늦게 된 편이었죠. 쓰고 싶은 욕망이 넘쳤고 너무 많이 썼어요. 그런데 내가 죽은 후에 이 많은 작품들 중 몇 편이나 살아남을까 싶어요. 살아남을 수 있는 작품을 쓸걸 하는 아쉬움이 있죠. 최하림, 이청준, 조태일을 보세요. 인터넷에 들어가 보니 그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넘쳐났어요. ‘야, 이청준이도 아직 살아 있고 최하림도 살아 있네’ 했죠. 단 한 작품이라도 시공을 초월해 살아 있으면 돼요. 그걸 일찍 깨달으면 많이 쓸 필요가 없어요. 작가들은 헛된 욕심 때문에 막 쓰게 되는 겁니다. 그런 면에서 작가는 괴로운 존재죠.”
문학은 역사의 칼
문 작가가 오래 살아남을 작품을 못 썼다는 자괴감을 갖고 있는 것은 조금 이상했다. 그에겐 이미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대표작 ‘징소리’와 ‘타오르는 강’이 있지 않은가. 이제 그의 작품세계를 들여다볼 차례였다. 그의 초기 작품세계는 누가 봐도 철저한 리얼리스트의 감성을 보여준다.
“문학은 역사의 칼이다, 잘못된 역사는 문학이란 칼로 베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창작과비평사 외에는 내 글을 안 받아주더군요. 주변에서도 ‘너무 색깔이 강하다,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말을 자주 했어요.”
그는 ‘빼앗기고 짓밟혔을 때 울부짖는 소리야말로 문학의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문학은 관념이 아니라고 봤던 것이다. 철학과 출신으로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독일어까지 배운 그가 그렇게 말한다는 게 이채롭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은 ‘알 만큼 알기 때문에’ 내놓을 수 있는 말일 수도 있다.
“관념적 주제를 만들기는 굉장히 쉬워요. 황석영이 한 말이 있는데, 관념은 보기 좋은 상자를 보기 좋은 종이로 싸서 계속 끌러 봐도 상자들만 나오다가 맨 마지막에 찌그러진 성냥통을 보면서 ‘휴, 소설 쓰기 어렵다’라고 말하는 거라고 한 적이 있어요. 저도 똑같은 생각이었죠. 우리 삶의 실체를 보고 거기서 주제를 이끌어내는 게 정말 어려운 일이에요.”
‘징소리’가 주는 울림
문 작가의 신념과는 달리 주변에서 그의 소설을 보고 자꾸 예술성이 떨어진다는 소리를 했으니 화가 날 만도 했다. ‘그럼 한번 해보겠다’며 작심하고 내놓은 소설이 ‘징소리’였다.
교과서에도 수록되며 많은 독자에게 읽혀온 문순태 작가의 대표작 ‘징소리’. 이 작품에서 그는 20세기를 고향 상실의 시대로 정의하고 고향을 관념화해 인간성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래서 ‘징소리’에서는 ‘고향은 무엇인가’를 물으며 인간 존재의 양식으로서의 고향을 보여주길 시도했다. 그 결과 평론가들의 찬사가 이어졌고 ‘징소리’는 그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됐다. 그는 그때를 계기로 문학 예술성을 다시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 그에게 문학은 어떻게 정의되고 있을까?
“육십이 되니 ‘문학은 역사의 칼에서 삶의 길 찾기로 변했다’고 말할 수 있게 됐어요. 문학은 시대정신을 꿰뚫어보되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혜를 빌려주는, 그래서 무엇이 인간다운 삶인가에 대한 길 찾기가 돼야 한다고 봐요. 이제는 ‘성찰의 거울’이 되길 바랄뿐이에요.”
얼마 전 국민대학교에서 교수와 학생들이 그를 찾아왔다. 그 자리에서 나이 들어 그가 갖게 된 문학관을 설명하자, 학생 한 명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선생님도 도인이 됐다는 소리군요?”
가슴을 철렁 내려앉게 한 소리였다고 한다. 물론 문학에서의 깨달음은 중요하다. 그러나 깨달음은 자칫 작가로 하여금 현실과 유리된 세계 속에 빠뜨려 방관자로서의 공허한 외침만 반복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철저한 리얼리스트였던 그는 순간 당황했던 것이리라. 그러나 그는 ‘역사라는 칼은 주머니칼로 변해서 아직 내 주머니에 있다’고 답했다. 그것을 증명하는 작품이 그 자신이 진정한 대표작이라 여기는 ‘타오르는 강’이다.
평범한 사람이 바꾸는 세상을 꿈꾸다
36년.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 전 9권의 완결을 맺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말 그대로 문순태 작가의 반생이 담긴 작품이다.
그가 1970년 무렵 신문사 문화부 기자였을 때 나주 양반집 취재를 간 적이 있었다. 1886년에 노비제가 폐지되면서 노비문서를 나눠줬는데, 그 집 할머니가 문서를 보여주며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런데 그때 당시 노비들은 울면서 내쫓지 말아 달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노비들은 자의적인 삶을 산 사람들이 아니니 그런 반응이 나온다 해도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는 얘기를 듣는 순간 ‘아 이건 뭐가 있다’ 싶어서 노비들의 이야기를 시리즈로 기사화했다. 그리고 이를 소설로 써서 ‘월간중앙’에 연재한 것이 바로 ‘타오르는 강’이다.
“작가는 작품을 통해 사람과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꿈이 있어요. 제 소설에서는 의도적으로 지식인을 등장시키지 않아요. 평론가들은 지식인이 등장해야 소설이 고급화된다고 하는데, 맞는 말이긴 해요. 그런데 지식인들은 세상을 정직하게 보지 않습니다. 굴절시키고 자기화하죠. 그러나 무지렁이는 있는 그대로 보고 전달합니다. 나 또한 지식인이지만 지식인처럼 그러고 싶지는 않았어요. 지식인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내 소설을 받아들이고 삶의 변화를 가져오길 바라는 마음이 ‘타오르는 강’을 쓴 동기였죠.”
작가는 언어의 채굴자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 그는 ‘타오르는 강’에 심혈을 기울여 전라도의 정서와 역사를 담아냈다. 한 국어학자는 문 작가를 가리켜 우리나라 소설가 중 전라도 토박이말을 가장 폭넓게 구사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만큼 향토색이 가득한 작품이다.
“‘타오르는 강’이 창작과비평사에서 나왔을 때 잘 안 팔렸어요. 어떤 사람이 사투리를 전부 표준어로 바꿔라, 그러면 팔릴 것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그 책을 읽고 있던 법정 스님이 누군가에게 그 말을 듣고는 ‘어떤 미친놈이 그런 말을 하냐’고 화를 내셨습니다. 토박이말은 그 지역의 혼이 담겨 있는 것이라면서요. 그래서 아예 3년에 걸쳐 ‘타오르는 강’ 토박이말 사전을 별도로 만들었어요. 그 뒤로 단어를 모르겠다는 전화가 오면 그거 읽어보라고 했죠.(웃음)”
관계를 끊어야 본래의 나를 찾는다
‘타오르는 강’을 집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전라도를 떠나본 적이 없는 작가이기 때문이다. 특히 광주는 계속해서 일하며 지낸 운명적 장소다. 전남일보 편집국장을 거쳐 주필까지 한 그는 작년까지도 유니버시아드의 오프닝과 폐막 시나리오, 광주전남연구원 이사장 등 사회적인 역할을 계속 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정리할 때라고 보고 있다.
“나이 많은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서 지갑을 자주 열고 좋은 말을 해줘야 하는 법이죠. 그런데 관계를 정리하느라 하나하나 끊을 때마다 외롭긴 해요.”
인간은 욕망이 무한한 존재이기에 욕구충족을 위한 경쟁을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욕망이 의미 없다는 걸 깨닫고 버리게 된다. 그래서 문 작가에게 세상과의 관계를 끊는 것은 본래의 나로 돌아오는 일이다.
“관계를 많이 유지하며 죽는 것은 괴로워요. 그러나 나에게로 돌아와서 죽는 것은 멋진 일이죠. 나이 들수록 죽음에 대한 준비를 해야 하는데 욕망을 가진 채로는 죽음에 대한 준비가 절대로 안 돼요. 죽음도 존엄하지 않고요. 모든 것에서 자유로울 때 존엄한 죽음이 가능하죠. 제가 고향에 돌아온 것도 그걸 위해서예요.”
작은 것에서 감동받는 게 삶의 희망
문 작가는 “풀벌레와 나비와 경쟁할 거냐?”고 되물으며 웃었다. 고향의 자연 속에 있다 보니 한없이 낮아진 자신을 발견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작가는 미세한 존재를 통해 우주를 보는 사람입니다. 작은 곤충 속에서 우주를 보니 제가 낮아져요. 무라카미 하루키도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인 ‘소확행’을 추구해야 한다고 말했죠. 젊을 때는 세상이 자기중심으로 보여요. 빨간 것은 빨간색으로밖에 안 보이죠. 그러나 나이 들면 빨간색 안에 많은 색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렇게 총체적으로 보는 안목이 생기니까, 나이 들어가면서 시력은 점점 더 나빠지지만 세상은 더 잘 보여요.”
최근 핸드드립 커피에 푹 빠져 지내는 그는 과테말라산 ‘안티구아’ 커피를 마신다고 한다. 과테말라 정부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후 커피농장 노동자 2만여 명을 학살한 역사가 떠올라서 슬픈 영혼들을 생각하며 ‘검은 눈물’을 마신다고 말했다. 수많은 작은 것들에는 우리가 눈여겨보지 않으면 모를 삶과 역사가 새겨져 있다. 그래서 삶은 작은 것에서 감동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요즘은 매사에 의미를 부여해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남 험담하고 쓸데없는 것에 시간 보낼 필요 없잖아요. 사실 우리는 감동받을 게 굉장히 많은데, 지금까지 너무 냉정하게 살았어요. 작은 것에서부터 감동을 받는 것, 이것이 삶의 희망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읍내’ 작가 쏜톤 와일더 말처럼 ‘인생은 커피 마시고 싶을 때 커피 마시고 만나고 싶은 사람 만나는 것’인가보다. 그토록 만나고 싶었던, 순수하고 맑은 성정을 가진 문순태 작가와의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에 무등산 자락 산골 생오지의 고추잠자리를 보았다.
문순태 소설가
1939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광주고등학교, 조선대학교 문학부와 숭실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5년 ‘현대문학’에 시가 추천되었고 1974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소설이 당선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징소리’, ‘고향으로 가는 바람’, ‘철쭉제’, ‘된장’, ‘울타리’, ‘생오지 뜸부기’ 등과 장편소설 ‘걸어서 하늘까지’, ‘그들의 새벽’, ‘41년생 소년’, ‘도리화가’, ‘소쇄원에서 꿈을 꾸다’,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전 9권) 외에 시집 ‘생오지에 누워’가 있다. 순천대학교와 광주대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는 고향 담양에서 ‘생오지문예창작촌’을 열어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
우리가 현재 사용하는 숫자는 아라비아 숫자라고 한다. 원래 숫자는 인도에서 만들어졌지만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해 유럽에 전해져 오늘날 유럽의 찬란한 문화를 이루었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로마숫자나 한자로 된 숫자도 있지만 사용의 편리성에 있어 아라비아 숫자를 따라 갈 수가 없다.
재미있는 것은 숫자를 만들 때 기본원리가 각의 개수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요즘에도 서양인들은 ‘1’이라는 숫자를 쓸 때 1 위에 살짝 선을 그어 각을 이루도록 하는 습관이 있다. ‘2’자도 선으로 그어서 표시하면 각이 2개가 나오고, ‘3’도 각이 3개가 나오고 이렇게 각을 만들어 ‘9’까지 숫자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서양인들은 ‘7’자도 중간에 선을 하나 더 그어 사용한다. 그래야 7개의 각이 보인다는 측면에서 오히려 더 정확한 기수법인 것 같다.
그렇다면 고대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용했던 숫자는 어떤 것이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최근 천호 지역으로 이사 온 뒤 ‘즈믄’이라는 단어를 종종 보게 되었다. 아내의 생일에 큰아들 내외와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면서 아파트 명칭에 ‘즈믄’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것을 봤다. 생소하여 무슨 뜻인지 궁금해 아들에게 물어보니 숫자 ‘1000(천)’을 의미한단다. 듣고 보니 우리의 고어에 ‘즈믄’이 1000을 뜻한다는 것이 불현듯 떠올랐다.
갑자기 순수한 우리말의 수에 대해 궁금해졌다. 우리 숫자에 대한 기원을 찾다가 재미있는 사실을 발견했다. 삼국사기에 고구려 시대 명수법은 ‘우차운홀’, ‘난은별’, ‘덕둔홀’로 ‘우차’, ‘난은’, ‘덕둔’이 각각 숫자 5, 7, 10을 표현하는 방법이었다고 기록된다. 백제에서는 관직 이름에 달솔, 은솔, 덕솔이라는 것이 나오는데, 여기서 달은 열 명, 은은 백 명, 달은 천 명을 나타내며 솔은 ‘거느리다’라는 뜻이라 한다. 여기까지 조사를 하다 보니 학창시절 역사 시간에 배웠던 기억이 아스라이 떠오른다.
오늘날 사용하는 '하나', '둘'은 아마 고려시대에 그 어원을 찾아 볼 수 있는 것 같다. 하나를 하둔, 둘은 도패, 셋은 주단주절, 넷은 내, 다섯은 타슬, 여섯은 일술, 일곱은 일급, 여덟은 일답, 아홉은 아호, 열은 일, 스물은 술몰, 서른은 실한, 백은 온, 천은 천이라고 하였다고 되어 있다. 우리 스스로 숫자를 셀 수 있는 고유의 말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정말 자랑스럽다. 아라비아 숫자가 각의 개수를 헤아려 만든 것이라면 우리의 숫자 읽기는 무엇에 근간을 두고 있을까?
국어학자들은 천을 ‘즈믄’ 만을 ‘두맨’ 이라고 했다고 주장한다. 새천년에 태어난 아이를 ‘즈믄동이’, 지류가 만 개인 강을 ‘두만강’이라 표현한데서 그 어원을 밝힌다. 큰 숫자인 ‘경’을 나타내는 우리말에는 ‘골’이라는 것이 있었다. ‘골백번’이라는 말은 무수히 많은 것을 뜻한다.
항상 궁금하게 생각하던 군대 계급의 호칭이 하나 있다. 왜 막대기 같은 것이 하나면 일등병이 아니고 이등병인가? 하는 것이다. 진급을 하여 막대기가 둘이면 이등병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말로는 일등병이라 부른다. 언제인가 중국어를 공부하다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중국어로는 이(1), 얼(2), 산(3)으로 발음되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뿐 아니다. 미국의 나이아가라 폭포가 한국말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나이는 미국인들이 네를 발음할 때 편하게 ‘나이’로 했으며 ‘가라’는 가람(강)이라는 우리말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현대’를 외국인들은 ‘현다이’라고 말하는 습성에서 유추해 보면 상당히 논리적으로 상통할 수 있는 이야기다. 외국인을 만나 ‘현대’라고 발음할 수 있는지 확인해보니 발음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단지 글자대로 읽는 습성이 그렇게 발음하도록 만들어진 것 같았다.
숫자의 기원을 알고 나니 왜 서양인들이 그렇게 글자를 쓰는지 비로소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없는 결과가 없고, 이유 없이 글자에 첨자가 없다는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옛날 아라비아 상인이 유명했던 것처럼 숫자가 발달된 나라가 상업이 왕성했던 것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이제 바야흐로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우수한 한글과 숫자를 지렛대로 삼아 새로운 시대를 열어나갔으면 한다.
숲으로 가는 산언저리마다 눈부시다. 밭두렁에 애기똥풀 흐드러져 숫제 샛노란 화단이다. 다랑논 이고 있는 석축에 어린 그늘이 푸르도록 짙은 건, 5월 한낮의 봄 햇살이 밝아서다. 민들레는 수과(瘦果)를 매단 채, 건듯 부는 미풍에 갓털을 휘날린다. 진초록으로 이미 농익은 초목 잎사귀들. 산야에 뿌리박은 식물마다 의기양양하다. 길로 나다니는 사람만이 계절을 타 들썩인다.
개심사(開心寺) 일주문을 지나자, 일변 눈으로 가득 차오르는 소나무들. 고찰(古刹)치고 들머리 풍광 허술한 곳이 드물다. 개심사 숲길도 기중 반열에 든다. 솔숲에 불그레한 빛살이 어린다. 적송(赤松)들이어서다. 미끈한 붉은 살갗에 건강한 지체, 게다가 저마다 미묘하게 굽어 허리를 요리저리 비트니 수려하다 못해 관능적이다. 흐뭇하면 안고 싶고, 심취하면 안기고 싶어진다. 이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만은 아니다.
굽고 휜 소나무는 내심 안도할 게다. 쭉쭉 곧게 자란 나무들보다 더 온전하게 수명을 누릴 수 있으니까. 목수의 도끼날을 피할 수 있어서다. 목재로서는 별 쓸모가 없게 생긴 덕분이다. 목수의 눈엔 무용지물이지만 소나무 입장에선 천행이다. 그게 나무만의 일이랴. 우리네 인생사에도 자주 적용되는, 일종의 이치다. ‘굽은 나무가 선산을 지킨다’는 속담에 실린 메시지를 생각해보라.
물매진 들머리 숲길, 그 이후로는 돌계단길이 가지런하다. 여기서도 소나무들의 전시회가 성황리에 펼쳐진다. 나무들의 청신한 향이 그윽하게 번진다. 개심사 전각들 지붕마다 초록이 서린다. 초록 숲 안의 산사여서다.
뜰에 걸린 연등들로 경내가 환하다. 그러고 보니 얼마 뒤면 석탄일이다. 숨 쉬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꿈꾸지 않으면 오를 수 없다. 그리지 않으면 만날 수 없다. 연등공양이란 부처를 숨 쉬고 꿈꾸고 그리는 일이겠지. 나를 낮추고 나를 비우고, 그리해서 나를 찾아가는 기도일 게다.
천년도량의 위세에 걸맞게 개심사 전각들은 방정하거나 준수하다. 혹은 허심히 잘 늙은 고로(古老)처럼 고졸하다. 전각 속엔 나무가 박혀 있다. 휜 채로, 비틀어진 채로, 그러니까 굽은 원목 그대로를 베어 말려 기둥을 삼고 들보로 채택했다. 주야로 법당의 향훈을 취할 저 고색창연한 재목들. 남벌 탓에 곧은 목재를 구할 수 없어 굽은 나무를 그냥 그대로 썼을까? 쓸모없어 보였을 나무가 쓸모 있게 쓰였다. 거룩한 불상과 동거하며, 더 온전히 살아남았다. ‘곡즉전(曲則全)’이라, ‘굽어서(曲) 온전할(全) 수 있다’는 묘리를 전갈한 이는 노자였다.
개심사는 실로 수목의 향연장이다. 그 친숙한 명성으로 한 벼슬 걸친 거목들의 장원이다. 소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모과나무, 배롱나무, 전나무, 서어나무, 왕벚나무…. 국내엔 이곳에만 있다는 청벚나무에선, 시나브로 봄이 가건만 여전히 끝물 꽃잎들 분분히 낙화한다.
개심사를 벗어나 다시 숲길을 오른다. 낙락장송 휘늘어진 숲 사이로 구불구불 길이 이어진다. 키 작은 관목들. 곧게 뻗어 하늘 한 자락 움켜쥐는 활엽 교목들. 온갖 나무들이 빼곡 들어차 기세를 돋운다.
인간의 도시는 삼엄한 사각의 링을 닮았다. 나무들은 코피를 쏟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 경쟁을 능사로 삼는 대신, 상호 의존의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생존을 도모한다. 바위 벼랑에 위태롭게 매달린 소나무만 해도 그렇다. 곰팡이와 공생해 균근(菌根)을 만들고, 그 균근에서 발달한 팡이실로 바위 틈새의 수분과 양분을 빨아들인다. 이렇게 소나무는 공생과 상생, 인류의 그 오래된 이상(理想)을 소리 소문 없이 오롯이 구가한다.
숲길에 하오의 놀빛이 어린다. 폐사지 보원사지에 간신히 남은 석탑에도 황혼녘 주황물이 흥건하다. 간절한 탑돌이를 하며 합장 비손했을 옛사람들, 지금은 천상의 어느 푸른 공간에 머무시나. 옛사람들에겐 나무도 석탑과 매한가지였다. 성황당 신목(神木)에 의지해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꿈과 희망을 천상에 탄원했다. 삶이, 영혼이, 견딜 수 없이 슬플 땐, 조용히 숲에 들어가 하늘을 우러렀다. 그래서 숲은 일쑤 정결한 지성소였다. 그들은 숲에서 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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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심사와 보원사지를 잇는 숲길은, 충남 내포 지역을 광범위하게 포괄하는 ‘내포문화숲길’ 코스들 중에서도 백미로 꼽히는 구간이다. 개심사에서 보원사지까지는 약 2km 거리. 산마루를 넘자면 오르막과 내리막을 경유하지만 가파르지 않다. 보원사지에서 1.3km를 더 내려가면 ‘백제의 미소’로 유명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을 만날 수 있다.
뉴스를 보는데 새만금사업이 박차를 가해 진행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새만금은 원래 민간주도로 시작되었지만, 긴 시간이 지난 이번 문재인정부에서 공공주도로 진행하게 되어 관련 예산을 편성하고 내부개발이 진행될 것이며 새만금개발공사를 만들어 전담추진체계를 마련해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고 한다.
지난 6월 필자는 새만금 노마드 축제에 다녀왔다.
그날 새만금 방조제를 따라 달리면서 보았던 느낌은 참으로 벅찼는데 바다를 메워 우리의 국토를 이렇게 확장했다는데 감동적이었다.
얼마나 큰 산업 일꾼들의 노력이 있었을지 새만금 홍보관에서 사진으로 영상으로 지켜보며 숙연했다.
방조제를 사이에 두고 이쪽저쪽 바다와 호수의 물빛이 다른 점도 신기했다.
축제장의 광활한 대지를 보고 또 한 번 놀랐다.
그러면서 이곳이 일회성의 이벤트가 아닌 후손들에게 길이 남겨줄 문화 인프라가 구축되기를 기대했다.
얼마 전에 종로의 랜드마크인 종로타워 20층 새만금개발청에서 새만금 토크콘서트가 있었다.
새만금투자전시관인 이곳은 투자유치 지원과 수도권 고객, 국내외 투자자들의 접근성과 편의성 제고, 서울에서 새만금을 체험할 수 있게 하고 새만금홍보 등 대외 협력강화를 위해 개관했다.
일본기업대상 투자 설명회, 글로벌금융사와 개도국 공무원 초청행사, 중학생 진로체험프로그램, 일반 방문객 대상으로 새만금홍보를 했다.
새만금은 바다를 메워 서울의 3분의 2에 달하는 넓은 땅을 만들어 우리나라 지도의 모습을 바꾸었고 방조제는 33.9km 길이로 세계에서 가장 길어서 기네스북에 올랐다.
새만금 프로젝트를 산업프로젝트로만 생각하지 않고 문화적인 측면을 더하고자 했고 선진문화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문화까지 함께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하고 싶다는 담당자의 인터뷰도 있었다.
새만금은 만경평야와 김제평야에서 한자씩 따온 이름이라고 한다.
토크콘서트에 참석하신 사무관님의 말을 들어보니 새만금개발은 1991년에 시작되었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찾아보면 이곳은 303년 백제 시대 때부터 개발되었고 ‘벽골제’라는 길이 3km의 제방과 저수지가 있어 깊은 문화적 뿌리로, 개발될 수밖에 없는 여건을 가졌다고 한다.
조선왕조를 유지할 수 있도록 한 것도 이 일대에서 나오는 곡식이었고 고군산군도는 모두 왕조의 터였다며 새만금이 만들어지고 있는 건 역사적 구조적으로 필연적이고 그래서 새만금지역이 중심지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견해를 들려주었다.
원래 새만금은 민간주도로 이루어지도록 계획되었지만, 문재인정부에서 공공주도로 진행하게 되어 관련 예산을 편성하고 내부개발이 진행될 것이며 새만금개발공사를 만들어 전담추진체계를 마련하게 되었다.
2023년 열리는 세계 잼보리 대회를 이미 유치했고, 앞으로 세계 잼버리 대회를 비롯하여 여러 행사를 많이 유치하고 제3세계 국가를 방문해 대사관이나 민간단체를 이용 새만금을 홍보하며, 국내에서도 학교나 가족 단위로 야영을 할 수 있도록 편의시설을 확충하고 노마드축제 등 각종 축제를 개최하는 새만금을 개발하는 구체적인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토크 콘서트에서 새만금 주제곡을 만든 작곡가 스티브 바라캇의 이 음악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여정을 소개하는 영상을 보았다.
스티븐 바라캇은 캐나다 출신 세계적인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로 캘리포니아 바이브스(KTX 안내방송 배경음)과 럴러바이(유니세프 주제곡) 등을 작곡한 분으로 유니세프에서의 인연으로 새만금 주제곡을 작곡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큐멘터리를 보니 이 음악가가 얼마나 새만금 주제곡을 완성하기까지 애정을 가지고 열정을 다 해 만들었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이 기회를 정말 영광스럽게 생각했고 큰 책임도 느꼈다고 했다.
아무리 훌륭한 건물, 혹은 세계 최고의 시설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도시의 성공은 사람에 달려있다며 새만금 주제곡은 ‘사람‘ 에서 시작하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새만금 주제가 마지막 부분 우리 대금연주자의 피날레가 너무나 감동적이고 멋지게 들렸다.
아시아의 허브, 미래의 심장이라는 슬로건의 새만금이 큰 성공을 거두어 우리나라 발전에 한 획을 긋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토크 콘서트를 마쳤다.
무언가 기대한다는 건 가슴 벅차고 즐거운 일이다.
우리에게 근대의 흔적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는 일반적으로 개항의 기점이 된 강화도조약(1876년)에서 광복을 통해 주권을 회복한 1945년까지로 본다. 조용했던 나라 조선에 서양문물이 파도처럼 밀려와 변화와 갈등이 들끓었던 시기. 그 시기의 유산들은 한국전쟁과 경제개발을 거치며 사라졌다. 조용히 걸으며 당시의 건물들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에 공주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백제문화의 중심지로만 알려진 공주의 숨겨진 근대 시대 모습은 어떨지 찾아가보았다.
사실 공주에게 근대 시기는 즐거운 추억이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철도 경부선이 공주를 비켜가면서 악몽이 시작됐다. 조선시대의 공주는 충주, 청주, 홍주와 함께 충청도의 4대 목(牧)이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해왔다. 충청도의 제1도시였던 셈이다. 그러다 대전역이 생기면서 산업체와 인구는 대전으로 빠져나갔고, 전라선까지 대전을 거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대화, 산업화와는 조금 비껴나게 되었지만 대신 공주를 위안한 것이 있었다. 종교였다.
근대화의 중심 ‘공주제일교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공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바로 공주제일교회의 존재 때문이다. 공주제일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02년 김동현 전도사가 초가 1동을 구입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후 교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예배당이 절실해졌는데, 1909년 우산을 쓴 익명의 후원자가 나타난다. 그의 헌금으로 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고, 교인들은 후원인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곳을 협산자(挾傘者, 우산을 쓴 사람) 예배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협산자 예배당도 좁아지자, 교인들은 1931년 지금의 ‘문화재 예배당’을 건립한다. 장소는 협산자 예배당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다 문화재 예배당은 한국전쟁에 휘말린다. 폭격으로 일부 벽과 굴뚝만 남긴 채 파괴되었지만 교인들은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중대한 결심을 한다. 새 예배당 건립을 위해 이웃해 있던 협산자 예배당을 자재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재건 과정에는 교인들만 참여했다. 1956년의 일이다. 1979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교회 전면에 배치하는 등의 증축이 이뤄졌다.
역사 속에서 공주제일교회는 종교기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공주 지역의 학교, 유치원, 병원 등 주요 시설의 건립에 교회와 선교사들이 관여했다. 또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1919년 4월 1일 공주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 독립운동의 한가운데에 공주제일교회의 현석칠 목사와 감리회 공동체가 있었다.
현재 교회 건물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식 명칭도 ‘공주기독교박물관’이 됐다. 2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공주 지역 기독교 역사와 성장 과정, 문화재 예배당 건축사, 독립을 위해 힘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각종 역사적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를 체험하는 ‘공주역사영상관’
공주제일교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는 공주역사영상관이 있다. 공주의 역사적 배경이나 당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이곳이 제격이다. 이 건물은 1920년 충남금융조합연합회 회관으로 건립됐다. 그래서인지 건물 규모에 비해 입구가 웅장하고, 1층의 천장도 높다. 1930년부터 1985년까지는 공주읍사무소로 쓰이다 1986년 공주시로 승격되면서 건물도 ‘시청’으로 승진했다. 1989년 새 건물로 시청이 옮겨가면서 실직했다가, 2010년 공주시의 구도심 활용 계획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1층에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각종 영상 자료와 멀티미디어 장비가 갖춰져 있고, 2층은 역사 속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사진자료실로 꾸며져 있다.
공주역사영상관에서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방향으로 다시 20분 정도 걸어가면 천주교 중동성당이 나온다. 서양의 고딕양식을 따르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이다. 1898년 프랑스 출신 진 베드로 신부가 이곳에 교당을 세우고 교지 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교가 자리 잡게 됐다. 본당과 사제관이 나란히 있는데, 사제관은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된다. 1997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성당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했고,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됐다.
숨겨진 근대 건축물 ‘풀꽃문학관’
다시 남쪽으로 2km 정도 내려와 영명고등학교 뒤편 언덕 마을로 올라서면 선교사 가옥이 보인다. 3층짜리 건물이다.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공주 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영명학교의 활동이 시작된 장소로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도 영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다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
이곳은 관리가 잘되는 문화재는 아니지만, 산책 삼아 가볼 만하다. 공주고등학교 정문에서부터 이어진 언덕길 풍경은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선교사 가옥 옆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선교사 묘역을 만날 수 있다.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선교사 자녀들의 작은 무덤들이 당시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대변해주는 것 같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공주의 근대 건축물 중 하나는 바로 2014년 설립된 풀꽃문학관이다. 시집 로 잘 알려진 나태주(羅泰柱) 시인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과거 헌병대장의 관사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을 공주시가 사들여 문학관 측에 관리를 위탁했다. 지금은 공주 지역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하늘을 뒤덮은 미세먼지, 쾨쾨한 매연, 고막을 괴롭히는 소음…. 공해로 얼룩진 도시의 묵은 때를 자연의 민낯처럼 깨끗이 씻어내고 싶다. 일상의 번잡함일랑 잠시 내려두고 너른 자연의 품 안에 뛰어들어보자. 갑자기 떠날 곳이 막막하다면, 전국 방방곡곡에 있는 ‘국립자연휴양림’을 이용해보는 것 어떨까?
◇ 수도권
아쉽게도 서울에는 국립자연휴양림이 없지만, 도심에서 가까운 경기도에는 5곳이 있다. 그중에서도 ‘산음자연휴양림’은 3km 거리의 ‘치유의 숲길’, 산림치유프로그램, 건강증진센터 등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방문객을 대상으로 산림치유지도사가 진행하는 다양한 치유 프로그램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양주시에 위치한 ‘아세안자연휴양림’은 필리핀, 미얀마,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10개국의 전통가옥과 놀이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이색적인 곳이다. ‘유명산자연휴양림’은 우리 꽃 자생식물원이 있어 아이들과 함께라면 유익하다.
-산음자연휴양림(양평군) 산림치유지도사 상주
-아세안자연휴양림(양주시) 이국적인 객실 외관
-운악산자연휴양림(포천시) 가마터 향토유적지 인근
-유명산자연휴양림(가평군) 우리 꽃 자생식물원 보유
-중미산자연휴양림(양평군) 산림레포츠 오리엔티어링
◇ 경상도
한려해상국립공원 북단에 위치한 ‘남해편백자연휴양림’은 피톤치드를 뿜어내는 편백나무 숲이 조성돼 있어 삼림욕을 즐기기 좋다. 아울러 전남 여수와 경남 남해 앞바다를 가까이에서 볼 수 있다. ‘통고산자연휴양림’은 불영사 계곡, 덕구온천, 백암온천, 동해안 해수욕장 등과 연계한 관광 코스로 이른바 3욕(금강소나무숲 삼림욕, 해수욕, 온천욕)을 함께 체험할 수 있다. 더불어 관동 8경 중 하나인 월송정과 명사십리의 풍경이 한눈에 보이는 망양정도 가까워 즐길거리, 볼거리가 풍성하다.
-검마산자연휴양림(영양군) 책 4000여 권의 숲속도서관 운영
-남해편백자연휴양림(남해군) 편백나무숲 산림욕, 나비더테마파크
-대야산자연휴양림(문경시) 문경 8경 중심부, 천연염색체험
-신불산폭포자연휴양림(울주군) 통행차량이 없는 고즈넉한 분위기
-운문산자연휴양림(청도군) 야생식물관찰원, 농경시대 귀틀집
-지리산자연휴양림(함양군) 토요 숲속야학, 한지체험관 운영
-청옥산자연휴양림(봉화군) 그린스쿨, 자연학습 체험 교육
-칠보산자연휴양림(영덕군) 금강송숲 탐방, 숲속 작은 음악회
-통고산자연휴양림(울진군) 3욕(삼림욕·해수욕·온천욕) 체험
◇ 충청도
충남 서부의 최고 명산으로 불리는 오서산 자락에 있는 ‘오서산자연휴양림’은 가족 단위 방문객이 편히 쉴 수 있는 휴양관과 물놀이장, 야영장, 숲속교실 등을 고루 갖췄다. 휴양림에 자생하는 대나무 숲을 거닐며 숲 해설은 물론, 활쏘기 투호 등 놀이체험과 목공예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희리산해송자연휴양림’은 산 전체가 해송(海松)으로 뒤덮인 희리산의 푸름을 만끽할 수 있는 명소다. 휴양림 수종의 95%가량을 차지하는 해송에서 피톤치드와 테르핀 성분이 다량 분비돼 삼림욕을 하기에도 제격이다.
-상당산성자연휴양림(청주시) 유아, 학생 대상 산림교육 프로그램
-속리산말티재자연휴양림(보은군) 휴양림 내 토속 식용·약용식물 자생
-오서산자연휴양림(보령시) 어린이물놀이장, 대나무숲 체험장
-용현자연휴양림(서산시) 백제 후기 문화유산·유적지 인근
-황정산자연휴양림(단양군) 황정산 암벽지대 소나무 군락 경치
-희리산해송자연휴양림(서천군) 해송 삼림욕, 솔방울 공예 체험
◇ 전라도
‘방장산자연휴양림’ 내 ‘에코어드벤처’에서는 숲속 나무와 나무 사이를 이동하면서 자연을 감상하는 친환경 레포츠 ‘집라인(zipline)’을 경험할 수 있다. 이외에도 편백나무를 이용한 비누, 문패, 액자 만들기 프로그램 등이 마련돼 있어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 좋은 곳이다. 낙안읍성민속마을 2km 지점에 자리한 ‘낙안민속자연휴양림’, 덕유산국립공원, 무주리조트 등과 가까운 ‘덕유산자연휴양림’, 변산반도국립공원에 위치한 ‘변산자연휴양림’ 등은 주변 관광지, 휴양지와의 접근이 편리하다.
-낙안민속자연휴양림(순천시) 낙안읍성민속마을 주변 경관
-덕유산자연휴양림(무주군) 야생식물관찰원, 반딧불이 관찰
-방장산자연휴양림(장성군) 에코어드벤처 친환경 레포츠
-변산자연휴양림(부안군) 모항해수욕장, 변산해수욕장 인근
-운장산자연휴양림(진안군) 휴양림 내 7km의 갈거계곡
-진도자연휴양림(진도군) 2017년 개장, 남도소리체험관
-천관산자연휴양림(장흥군) 휴양림 진입로에 동백·비자나무숲
-회문산자연휴양림(순창군) 유아·청소년 대상 ‘열려라곤충나라’
◇ 강원도
1989년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자연휴양림 ‘대관령자연휴양림’은 울창한 소나무 숲이 어우러진 대관령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휴양림 내 50~200년생 아름드리 소나무 숲 중 일부는 1920년대 인공으로 소나무 씨를 뿌려 조성해 학술적으로도 가치가 높다. 다양한 목공예 프로그램을 즐기고 싶다면 ‘백운산자연휴양림’을 추천한다. 휴양림 내 ‘숲속공예교실’은 2013년 유네스코한국위원회로부터 지속가능한 발전교육(ISD) 공식프로젝트로 인정받았다. 또한 대한걷기연맹에서 지정한 ‘제1호 건강숲길’로도 잘 알려져 있다.
-가리왕산자연휴양림(정선군) 정선오일장(아리랑시장) 인근
-검봉산자연휴양림(삼척시) 오토캠핑장, 산림문화 프로그램
-대관령자연휴양림(강릉시) 숯가마를 활용한 체험·공예 프로그램
-두타산자연휴양림(평창군) 두타산 두근두근둘레길 탐방
-미천골자연휴양림(양양군) 휴양림 내 통일신라시대 선림원지
-방태산자연휴양림(인제군) 인근 내린천 래프팅 체험
-백운산자연휴양림(원주시) 숲속공예교실 문화 프로그램 특화
-복주산자연휴양림(철원군) 용탕골 계곡과 잠곡리 경관 수려
-삼봉자연휴양림(홍천군) 오대산국립공원 인근 활엽수
-용대자연휴양림(인제군) 다람쥐 등 다양한 야생동물 서식
-용화산자연휴양림(춘천시) 등산·캠핑 전문 산림레포츠 휴양림
-청태산자연휴양림(횡성군) DIY목공교실, 인도네시아전통전시관
지난 5월 익산 관광 때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 유적을 둘러본 적이 있다. 그러나 발굴 중이라 땅만 파놓았지 막상 볼 것이 없어 실망했다. 제대로 보려면 익산까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함께 지정된 공주 부여를 돌아봐야 한다고 들었다. 검색으로 공주는 볼 것이 그리 많지 않고 부여에 유적지가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부여로 향했다.
폭염의 날씨라 목적지는 실내 위주로 짤 수밖에 없었다. 첫 목적지는 부여 박물관이었다. 경로 우대를 생각하고 갔는데 무료입장이었다. 입구의 어린이박물관은 백제문화를 어린이들 눈높이에 맞게 잘 꾸며놓았다. 백제시대의 의상을 입고 사진을 찍을 수도 있는데 이 또한 무료였다. 바로 옆에서 왕흥사 특별전이 열리고 있었다. 본관으로 들어가니 천장에서 자연광이 들어오는 스카이라이트 지붕 아래 커다란 돌그릇이 있었다.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등 시대별로 그릇, 무기의 변화를 유적으로 잘 전시해놓았다. 이 박물관의 대표 유물은 황금대향로였다. 백제문화를 대표하는 유물이라 그런지 특별실에 따로 전시되어 있었다. 발굴 당시 얼마나 큰 감동이 있었을까 상상이 되었다. 크기로나 모양으로나 과연 대단한 보물처럼 보였다.
백제문화는 너무 오래된 역사이기 때문에 친숙하지 않다. 더구나 한성백제 500년도 있어 분산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일본 문화가 백제의 영향을 받았고 한때는 한반도를 지배하기도 했던 백제였으므로 재조명을 해볼 필요는 있겠다고 생각한다. 어렸을 때 낙화암에 갔다가 실망하고 온 적이 있다. 3천 궁녀가 신라의 침략에 강으로 투신했다는 야사만 기억에 있지, 정작 볼 것은 없다는 기억에 날씨도 더워 가지 않았다. 그 대신 동네 사람들의 추천을 받아 부여 박물관 인근에 있는 신동엽문학관을 찾아갔다. 39세에 요절한 민족 시인이란다. 대표작으로 ‘껍데기는 가라’가 있다. 범상치 않은 외관이어서 알아보니 유명한 건축가가 지은 건물이라고 했다. 바로 옆에 있는 생가에 육필 원고와 신동엽 평전 등 관련 책자 등이 비교적 잘 보존되어 있었다.
다음 행선지는 궁남지였다. 7~8월이 절정이라는 연꽃을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인공 연못이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고 한다. 군에서 인근 논밭을 사서 계속 궁남지를 늘려간다고 했다. 과연 사람 키보다 더 큰 연꽃잎과 탐스러운 연꽃들이 볼만했다. 인근 음식점에서는 연밥을 팔고 있었다. 잡곡밥을 연잎에 싸서 내오는 것인데 다른 반찬은 평범했다. 원래 충청도 음식은 별 특징이 없다.
백제 하면 떠오르는 것이 도자기류다. 백제요 등 도자기 굽는 가마가 근처에 있다 해서 찾아가 봤다. 거대한 가마가 공룡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30분마다 버스가 있고 두 시간이면 도착한다. 유적지가 많아 당일로는 좀 빡빡하다. 여름은 너무 더우니 서늘한 봄가을에 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거기, 아무 것도 없어”
공주와 부여, 익산 일원의 백제역사유적지구 팸투어를 간다는 말에 지인이 한 마디 툭 내뱉었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가방을 메고 출발하는데 김빠지는 소리였다. 그러나 공주 공산성에서 시작해 공주와 부여 일원을 둘러보자, 지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짐작이 됐다. 기원 전 18년, 고구려에서 쫓겨난 비류와 온조가 한강유역 위례성에 세운 백제는, 고구려의 남하로 한성을 내주고 웅진(공주)으로 쫓겨 내려갔다가 사비(부여)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지만, 결국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멸망하고 만다. 패배의 역사로 얼룩진 백제역사유적지구엔 눈으로 볼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아무 것도 없는 벌판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며 1500년 전 그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발자취를 더듬어내야 했다.
백제인들의 삶은 고단했으리라. 삼국은 늘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고, 한성에서 공주, 사비로 수도를 옮길 때마다 새로운 성을 쌓느라 백성들은 과도한 노동에 시달렸을 것이다. 성 안에 있던 커다란 사찰에도 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리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백제인들이 남긴 유물이나 유적들을 들여다 보면 온화하고 부드럽다. 모든 왕릉이 도굴 당했지만 고맙게도 무령왕릉 하나가 온전히 남아있어 백제인들의 세련되고 앞선 문화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유네스코는 백제역사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하며 국제성과 개방성을 갖춘 보편적 가치를 인정했다.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고분은 한국관광공사가 선정한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한국관광 100선’에 포함돼 있기도 하다.
공주 공산성에서 시작해 1박 2일 백제역사유적지구를 둘러보았다. 백마강이 내려다 보이는 공산성이나 소나무가 울창한 부소산성을 걷고, 유람선을 타고 아찔하게 깍아내린 낙화암을 보았다. 또한 정림사지에선 정림사 5층 석탑을 보며 돌을 쪼던 백제인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가장 인상적인 곳은 무왕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었던 익산이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서동요를 부르게 해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와 결혼한 무왕 이야기가 유명하지만, 사실 무왕은 호방하고 걸출한 기상을 지닌 왕이었다고 한다. 익산에서 백제의 영광을 재현하려 했던 무왕은 엄청난 크기의 왕궁과 사찰을 지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절터인 미륵사지는 건물은 다 사라지고 터만 남았다. 그리고 지금 그곳에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탑의 복원작업이 한창이다. 절 터엔 복원을 위해 번호를 매겨 놓은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백제역사유적지구 투어는 과거의 흔적들을 더듬으며 퍼즐조각을 맞추는 게임 같았다. 대부분의 유적들은 사라지고 덩그러니 터만 남아있는 그 곳에서 옛사람들의 숨결을 듣고 목소리를 되살리고 기상을 느껴보려 애썼다. 그러자 보이지 않던 것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과 일본을 넘나들며 동아시아 교류의 중심에 있던 무령왕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무령왕의 어진 위로 새로 선출된 대통령 얼굴이 떠오르며 우리나라도 하루 빨리 동아시아에서 제 위치를 찾을 수 있길 빌어보았다.
뉴욕이나 도쿄 등 선진국 대도시에 가면 말 그대로 없는 게 없다. 전 세계 여러 나라의 음식과 술은 물론 오페라와 뮤지컬, 연극 등 다양한 문화를 쉽게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적지 않은 돈이 필요하겠지만 각 나라 방문 비용을 생각하면 엄청나게 싼 값으로 먼 나라의 문화를 맛보고 즐길 수 있다. 이때 제시할 수 있는 단어가 ‘문화력(文化力·Cultural power)’이다. 인터넷 백과사전에서는 문화력을 국가와 국민이 갖는 매력이면서 한 국가의 브랜드 파워로 풀이하고 있다. ‘경제력(經濟力·Economic power)’이 경제적 능력을 의미하는 것처럼 문화력도 문화적 능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필자가 말하고 싶은 문화력은 그 도시를 찾는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문화 또는 문화적 매력 정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한 도시에서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문화의 정도를 문화력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겠다.
만약 ‘문화력지수(Cultural power index)’를 만들어 주요 도시들을 비교한다면 우리나라의 서울은 매우 높은 점수를 받을 것이다. 음식과 술의 종류가 다양하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오페라, 뮤지컬, 연극 등도 수시로 무대에 오른다. 잊을 만하면 찾아오는 각설이처럼 몇 년에 한 번씩 찾아와서 오리지널 공연임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요즘엔 일부 대형 영화관에서 해외 유명 오페라 또는 콘서트를 녹화해서 방영하거나 생중계하기도 한다. 이태원이나 홍대 앞 거리에는 각 나라의 음식점들이 즐비하다. 요르단,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터키 등 다 비슷해 보이는 음식 같아도 조금씩 다르다. 중남미는 물론 우리에게는 매우 낯선 아프리카 음식점도 있다.
필자는 운 좋게도 뮤지컬 , 오페라 를 워싱턴과 뉴욕 그리고 서울에서 여러 번 봤다. 그래서 가끔 무대와 의상, 주연배우 등을 비교해보기도 한다. 프랑스 3대 뮤지컬인 , , 도 외국과 서울에서 번갈아 가며 관람했다. 는 하도 많이 봐서 주인공 이름은 물론 대사를 듣지 않아도 어떤 대화가 오가는지 대강 알 수 있다.
무슨 큰 자랑처럼 필자의 경험담을 늘어놓는 이유는 문화력지수가 높은 서울을 잘 활용해 개인별 문화력지수를 키우자고 제안하기 위해서다. 서울뿐 아니라 부산과 대구 같은 대도시만 활용해도 문화적 욕구를 상당히 해소할 수 있다. 가끔 1박 2일 코스로 서울을 방문해 다양한 문화 체험과 함께 음식점 등을 순례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을 것이다. 최근에는 주말마다 광화문 근처 호텔 방들이 만석이라고 한다. 지방에 사는 가족들이 촛불 집회 참가 겸 서울 나들이를 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내일만 사는 놈은 오늘만 사는 놈한테 죽는다.”
영화 에서 주인공 태식(원빈 분)이 하는 말이다.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필자는 “오늘 놀고 쓰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을 내일로 미루지 말자”라고 해석하고 싶다. 열심히 일해서 모았든, 투자와 사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든,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든 늙어 죽을 때까지 쓸 돈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가장 먼저 고민할 일은 ‘돈을 어떻게 쓰다가 죽을 것인가?’ 아닐까?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데 내일 또 내일 하며 미루다 보면 어느새 다리에 힘이 빠져 돌아다닐 기력마저 없어진 뒤일 수도 있다. “여행은 다리 떨릴 때 하는 게 아니라 가슴 떨릴 때 해야 한다.” 이 말은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말이다. 돈을 쓸 때도 다 때가 있다. 나이 들면 쓰고 싶어도 쓸 수가 없다. 물론 자녀나 친인척들에게 주거나 사회에 기부하겠다면 말릴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요즘엔 강의하러 가면 자신만의 ‘버킷리스트’를 만들어보라고 자주 청중들을 부추긴다. 버킷리스트의 사전적 의미는 ‘죽기 전에 꼭 해야 할 일이나 달성하고 싶은 목표 리스트’다. 대단한 일처럼 느낄 수도 있지만 사실 별거 아니다. 이렇게 한번 짜보자. ‘올해에는 오페라를 두 개 보고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영화를 보자.’ 오페라나 영화를 보러 갈 때 괜찮은 음식점에 들러 식사까지 할 수 있다면금상첨화. 이처럼 평소 하고 싶었던 것들을 목록으로 정리해서 실천해보자.
오페라와 영화에는 취미가 없고 여행을 더 선호한다면 목록을 바꾸면 된다. 문화력지수가 꼭 오페라와 영화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신라, 백제, 고구려 등 역사 유적지를 탐방할 수도 있고 박물관이나 유배지를 찾아 나설 수도 있다. 섬이나 폐사지(廢寺地), 전적지(戰跡地), 이름난 고택(古宅), 습지(濕地), 유명 사찰, 교회(성당) 등도 좋은 선택지다. 술과 음식을 좋아한다면 지역 양조장이나 맛있는 음식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근교의 산들을 섭렵하는 것도 좋은 버킷리스트가 될 수 있다. 서울만 해도 가까운 산이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먹거리, 볼거리도 많다.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은 오페라 이름 하나, 산 이름 하나, 음식점과 양조장 이름 하나를 지울 때마다 느끼는 뿌듯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버킷리스트는 문화력지수를 키우기 위한 일종의 계획서 역할을 해준다. 되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 떠나는 것도 좋지만 전국 지도를 놓고 여기저기 갈 만한 곳들을 기웃거려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오페라와 뮤지컬도 익숙한 작품에서부터 좀 낯선 작품들까지 죽 적어보라. 다 못 보고 죽을 만큼의 목록이 나올 수도 있지만 욕심 많다고 누구에게 야단맞을 일도 아니지 않는가. 할 수 있는 것까지 하고,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다가 쉬고 싶으면 쉬는 것이 인생이다.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은 목표를 반드시 달성해보겠다는 다짐도 좋지만 중간에 다른 게 더 재밌어지면 지우고 새로운 리스트를 만들면 된다.
중요한 것은 유인(誘引)과 동력(動力)이다. 이것에 시동이 걸려야 하고 싶은 일과 목표에 따라 스스로 움직이고 노력한다. 은퇴 후 나이 탓이나 하면서 넋 놓고 앉아 있다가는 뒷방 노인네 취급받기 십상이다. 당장 버킷리스트를 만들어 계획대로 움직여보자. 적절한 스트레스와 긴장감은 ‘필요악(必要惡·Necessary evil)’이라는 말이 있다. 버킷리스트는 필요악을 넘어 ‘필요선(必要善·Necessary virtue)’이다. 비가 올 때 필요한 것은 걱정이 아니라 우산이다. 우산처럼 버킷(양동이)도 기왕이면 여러 개가 더 좋지 않을까.
>>최성환(崔聖煥) 한화생명 은퇴연구소장·고려대 국제대학원 겸임교수
한국은행 과장, 조선일보 경제전문기자, 고려대 국제전문대학원·경영대학원 겸임교수, 한화생명 경제연구원 상무, 은퇴연구소장 등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