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4월 1일 아이젠하워는 1페이지 분량의 편지를 미국 위스콘신 주에 있는 파커 사로 보냈습니다. 편지를 받은 사람은 케네스 파커. 회사 사장이었습니다. 내용은 대충 이랬습니다. 만년필 선물은 잘 받았고, 유럽에서의 궁극적인 적대 행위의 종식(독일의 항복)에 공식적인 서명이 있다면 나는 그 만년필을 사용하겠다는 것. 이 두 사람은 1937년부터 친분이 있었습니다.
약 한 달 뒤 이 약속은 지켜졌습니다. 5월 7일 프랑스 상파냐 지방 랭스 아이젠하워 장군 사령관실에서 독일의 무조건 항복 조인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조인식에서 미국, 소련, 프랑스, 독일 4개국 대표가 서명을 했고, 여러 기록에 의하면 이때 사용된 만년필은 세 자루였습니다. 뭔가 이상하지 않습니까? 서명한 사람은 4명인데 만년필은 세 자루. 이 중요한 순간에 누군가 한 사람이 실수로 만년필을 가져오지 않은 것일까요. 관련 필름을 찾아봤습니다. 독일 대표는 탁자 중앙에 놓인 만년필을 잡아 다른 종이에 써본 후 서명을 합니다. 펜 끝이 살짝 보이고 클립은 화살클립입니다.
미국과 프랑스 대표 역시 같은 모양의 만년필을 잡았습니다. 소련 대표만 다른 만년필입니다. 화살클립에 펜촉이 살짝 보이는 것은 틀림없는 미국 파커 사의 파커51입니다. 서명식이 끝나고 아이젠하워는 파커51 두 자루로 V자를 만들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편지의 내용과 필름에서 본 것을 종합하면, 추측이지만 실상은 이랬던 것 같습니다. 조인식 전에 연합군 최고 사령관 아이젠하워는 각국 대표에게 만년필을 준비하지 말라는 연락을 했고, 독일과 프랑스는 이 연락대로 했지만 소련은 따르지 않았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사소한 에피소드가 앞으로 있을 미국과 소련의 냉전을 예언처럼 예고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음 달 6월 5일 독일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에 분할 점령되는, 나중에 동서(東西)로 45년간 분단되는 베를린조약 문서에 아이젠하워는 파커51로 서명합니다. 참고로 5월 7일 항복 조인식에서는 아이젠하워가 파커51만 제공하고 서명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되었든 파커51은 항복과 분단까지 이래저래 독일에 아픔을 준 만년필입니다.
파커51 어떻게 생겼을까요?
파커51은 공식적으로 1941년에 처음 출시되었고 1978년에 생산이 중단되었습니다. 펜촉의 대부분은 손잡이 속에 들어가 있고 펜 끝만 살짝 나와 있어 뚜껑을 열어놓아도 잘 마르지 않았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이 만년필의 최대 장점은 매우 튼튼하다는 것입니다. 초기에 생산된 1940년대 것들 중에는 아직 현역(現役)으로 있는 것이 많고 1948년 이후의 것들은 고장 난 것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아이젠하워가 좋아했던 것은 물론 올해 94세인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도 아직까지 파커51을 사용하는데 자주색 몸체에 금색 뚜껑의 모델을 애용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밖에 트루먼 대통령, 니미츠, 마크 클라크 장군이 사용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도 가장 인기 있는 만년필일까요? 이삼십 년 전이라면 몰라도 현재 1위는 정반대편이라고 할 수 있는 독일 몽블랑 사의 마이스터스튁 149입니다. 몽블랑 149는 1952년에 출시되었으니 파커51보다는 열한 살 적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생산되고 있어 현존 최장수 모델이면서 만년필 역사상 가장 나이가 많은 만년필입니다. 펜촉을 보면 파커51처럼 감싸져 있지 않고 시원하게 오픈되어 있습니다. 이런 펜촉을 오픈 펜촉이라고도 하는데 몽블랑 149는 오픈 펜촉의 대표, 파커51은 감싸진 펜촉의 대표입니다. 앞에서 정반대라고 말씀드린 것이 이제는 이해되시죠.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149가 51에게서 1위를 빼앗기도 했지만 1990년 독일의 통일 서명에 사용되었다는 점입니다. 미국의 파커51이 독일을 나누었다면 독일의 몽블랑 149는 독일을 다시 이어준 것입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만년필에는 만년필입니다.
시대를 앞서간 명사들의 삶과 명작 속에는 주저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던 사유와 실천이 있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서 인생의 방향을 생각해본다. 이번 호에는 독일 통일을 이끈 빌리 브란트를 소개한다.
역사의 명장면 중 하나를 꼽으라면, 1970년 폴란드 바르샤바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를 떠올리는 이도 있을 것이다. 추적추적 내리는 겨울비를 맞으며 무릎을 꿇은 채 눈을 감고 있는 그의 모습을 전하며 헝가리의 뉴스 캐스터는 “무릎을 꿇은 것은 브란트 한 사람이지만 일어선 것은 독일 민족이다”라고 말했다. 미리 계획된 행위도, 참모들이 급히 짜낸 전략도 아니었다. 왜 무릎을 꿇었느냐는 질문에 브란트는 “헌화를 하는 순간 머리를 숙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고 고백했다. 나치 강제수용소 생존자였던 폴란드 총리는 그날 브란트를 끌어안고 통곡했다.
성찰과 참회의 힘
아무도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빌리 브란트의 이른바 ‘무릎 사과’는 전 세계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줬다. 하지만 그의 나라 서독에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2년 뒤 치러질 뮌헨 올림픽을 앞두고 유대인들과 동구권 국가들을 의식한 행위라는 비판도 있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독일인들은 하층민 출신인 그에게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게다가 ‘사생아’라는 출생 배경은 사람들 입방아에 자주 오르내렸다.
1913년 독일 북부 뤼벡에서 태어난 그의 본명은 헤르베르트 에른스트 카를 프람(Herbert Ernst Karl Frahm). 빌리 브란트라는 이름은 히틀러의 독재에 맞서 투쟁할 때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지은 가명이다. 어린 시절 그는 아버지의 성을 물려받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미혼모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람’이라는 이름은 그를 비하하고 비방하려는 정적들에게 종종 불려나오곤 했다. 그 때문일까.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한 이후 그는 더 이상 본명을 쓰지 않았다.
정치 망명객으로 지냈던 과거도 그를 꽤나 힘들게 했다. 사회민주당 청년당원으로 활동하다 게슈타포의 표적이 된 그는 노르웨이와 스웨덴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나치 정권에 대항했다. 1938년에는 국적을 박탈당해 노르웨이 국적을 취득했는데 이때의 이력으로 ‘어려운 시절 조국을 버린 배신자’라는 공격을 받아야 했다. 특히 보수 언론과 그와 경쟁 관계에 있던 정치인들은 노르웨이 군복을 입고 나치 독일에 대항했던 과거를 들먹이며 그를 코너로 몰아붙이곤 했다.
하지만 여러 난관 속에서도 브란트는 정치가로서 성공했다. 1949년부터 1992년 사망할 때까지 의원, 시장, 외무부장관, 총리를 역임했고 정파를 떠나 국민과 국익을 먼저 생각하는 지도자로서 신뢰도 얻었다. 1971년에는 동·서독 화해에 기여한 공로로 노벨평화상도 수상했다.
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빌리 브란트가 이처럼 화려한 경력을 쌓을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미·소 냉전시대의 긴장 완화를 위한 ‘동방정책’(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과의 화해 정책)을 펼치고 ‘더 많은 민주주의’를 실천했기 때문이다. 그는 ‘갈등과 대립’으로는 아무것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정치란 체제와 이데올로기가 아닌 인류와 평화에 기여할 때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다. 대화를 통한 협상은 그가 추진했던 동방정책의 핵심이었다. 그 결과 1969년부터 1974년까지 그가 이끌었던 서독 정부는 소련을 비롯해 동유럽 국가들, 그리고 동독과 화해와 협력의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브란트는 권력자가 되면 그 자리에서 바로 보이는 어떤 자세도 취하지 않았다. 문제가 생기면 오래 고민하고 가능한 한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을 좋아했다. 그래서 종종 동료들로부터 “커브 길만 나타나면 차를 조심스럽게 운전하는 노인”과 같다는 볼멘소리를 들어야 했다. 하지만 브란트는 자신의 정치 스타일을 고수하며 뚜벅뚜벅 걸어갔다. 성급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며, 더 궁리하고 관찰하면서 합리적인 방법들을 찾아내려 애썼다. 그리고 더 많은 민주주의가 감행되기를 바랐고 더 많은 자유를 제공하고 더 많은 공동 책임을 요구하는 사회를 원했다.
한 인간으로 볼 때 그는 약점투성이의 인물이었다. 쉽게 상처받고, 예민했고, 갈등을 싫어했다. 누구에게 속마음을 잘 보여주지도 않았고, 더러는 사생활 문제로 참모들의 속을 썩이기도 했다. 이러한 약점들이 오히려 위대한 정치가가 되는 데 특별한 거름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정치에서는 언제나 이길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평화정치를 구현하겠다는 의지는 결코 내려놓지 않았다.
그는 한 연설을 통해 말했다.
“평화가 전부는 아닙니다. 하지만 평화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던 해, 브란트는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독일 통일이 언제 될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을 받고 “내가 살아 있을 때는 보기 힘들 것 같다”고 답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보름 후 장벽은 무너졌다. 우리의 38선은 어떤가. 최근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소식이 들려왔다. 다시 캄캄하다. 그래도 어느 날 벼락같은 큰 소식을 듣고 싶다.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졌을 때 “원래 하나였던 것은 함께 자라야 한다”고 분노했던 빌리 브란트는 1989년 장벽이 무너지자 “원래 하나였던 것이 이제 함께 성장하게 됐다”는 말로 자신의 연설문을 완성했다. 동방정책을 선언한 지 20년 만이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인간의 삶에서 오직 죽음만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인간은 모두 공평하게 한 번은 죽음을 만난다. 죽음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는 행위가 종식되고 운동이 정지하면서 반응이 없어진다. 존재에서 무존재가 되어 모든 계획과 삶이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을 후벼파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독일의 여성 감독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2008)은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후, 곁에 있을 때 못 느꼈던 사랑과 아내가 접어야 했던 꿈을 이해하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린 작품이다. 죽음이 우리 삶에 주는 의미, 그리고 소통과 배려 등 살면서 챙겨야 할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독일 남부의 시골 마을 시청 청소행정과 과장 ‘루디’(엘마 베퍼 역)는 큰 위기 없이 20여 년 공무원 생활을 착실히 해온 평범한 가장이다. 그의 아내 ’트루디‘(한넬로르 엘스너 역)는 무용의 꿈을 접고 내조와 자녀 교육에만 전념해온 전업주부다. 그들에게는 베를린과 일본 도쿄에서 사는 2남 1녀의 자녀가 있다. 트루디는 일본의 ’후지산‘을 가고 싶어 한다.
어느 날 트루디는 남편 루디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의사에게 듣는다. 하지만 트루디는 이 사실을 숨긴 채 베를린의 자녀들을 만나러, 둘이 함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자녀들의 무관심과 세대 차이에 충격을 받고 발트해로 둘만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곳에서 트루디가 먼저 죽음을 맞이한다.
상실의 슬픔과 그리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루디는 아들 칼을 만나러 도쿄로 가지만 바쁜 아들 때문에 홀로 도시를 헤맨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서 부토 춤을 추는 한 소녀를 만나게 되고 소녀와 함께 아내가 가고 싶어 했던 후지산을 찾아간다. 후지산이 선명하게 보이는 새벽녘 푸른 호숫가에서 루디는 아내 트루디와 함께 부토 춤을 춘다.
영화에서는 중요한 두 개의 메타포가 등장한다. 하나는 파리다.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의 창에 붙어 있던 파리의 모습은 이후 벌어질 자녀들과의 세대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예고한다. 식탁에 앉은 파리를 손바닥으로 내려쳐 잡는 젊은 세대와, 작은 생명체 하나도 존중하는 기성세대 간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사전 장치다. 부모 앞에서 레즈비언 행위를 서슴지 않는 딸의 모습과 부모의 반응은 ‘세대 간 차이를 갈등과 대립이 아닌 소통과 배려로 극복해야 함’을 표현하는 서브 텍스트다. 여성 감독이기에 이런 따뜻한 메시지가 더해졌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림자다. 영화 초반 루디의 기계적 일상을 설명하는 트루디의 내레이션에서 시작돼 자주 등장하는 장치다. 이 영화의 큰 축인 부토 춤의 표현이기도 하다. 심리학에서는 그림자를 외부에 드러내기 싫은 나, 그래서 진정한 나에 가까운 것으로 말한다. 억누른 기억과 감정이 모두 담겨 있는 무의식의 거대한 산 같은 것이 그림자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그림자를 존재의 다른 방식으로 때론 타인에게 인식될 수 있고 또 타인과 이어주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사회의 허무주의를 바탕으로 삶과 죽음의 해답을 갈구하는 것 같은 움직임을 묘사한 그림자 춤인 부토 춤을 이 영화에서는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가 통하는 의식으로 설정했다.
결국 루디는 그림자, 그림자 춤을 통해 상실한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인다. 자신의 상처와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마음을 챙기고 ‘그림자 치유’ 과정을 통해 트루디가 있는 세계로 가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다. 부토 춤을 추는 공원의 소녀가 춤출 때 사용한 전화기의 수화기와 선도 중요한 메타포라 할 수 있겠다.
두 사람의 마지막 여행지인 발트해에서 트루디는 계면쩍어하는 루디의 손을 잡고 같이 춤을 춘다. 루디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트루디는 춤을 추면서 어떤 참혹한 상실의 시간이 오더라도 그 시간을 딛고 일어설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을 것이다. 낮에는 해안가에서 추워하는 루디를 위해 스웨터를 함께 입는 세심한 배려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홀로 남게 된 루디의 슬픔, 아픔이 살갗을 뚫는 듯했다. 남겨진 자들의 고통은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잊혀간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가장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루디는 침대 위 자신의 옆자리에 트루디의 잠옷을 펼쳐놓는다. 트루디를 느껴보고 싶어서, 트루디를 기억할 수 있는 작은 것들 하나도 잊지 않으려고…. 그리고 “여보 어디 있어…”라고 속삭인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거대한 상실의 구멍이 생긴 것처럼 슬픔이 스며들었다.
트루디가 죽기 전 발트해의 해안을 둘이 걸을 때 루디가 말했다. “그래, 우린 행운이지. 우린 서로가 있으니까. 그게 젤 큰 행복이야….” 그런데 몇 시간 뒤 루디는 홀로 남겨진다. 루디는 남겨진 자녀들에게 말한다. “이제 익숙해져야겠지.” 일본에서 만난 아들은 왜 좀 더 빨리 두 분이 함께 일본에 오지 않았냐고 묻는다. “시간이 많은 줄 알았다”고 루디는 대답한다.
영화 초반부에 노이슈반스타인 성과 알프스 산맥이 있는 독일 남부의 아름다운 자연이 영상으로 나온다. 후반부에서는 일본의 봄 벚꽃과 후지산의 풍경이 잔잔하게 흐른다. 이야기 전개상 도쿄의 다양한 모습이 보인다. 이 때문에 일본 홍보 영화로 평가절하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독일에서 흥행에 성공하고 각종 영화상도 받은 작품이다. 편견 없이 이 영화를 보면 좋겠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또 하나의 장면은 베를린의 자녀 집에서 잠자리에 누운 트루디가 루디에게 “아이들이 낯설다“고 하면서 손을 내밀어 루디의 손을 꼭 잡는 모습이다. 세상의 남편들이여 오늘은 잠들기 전 옆에 누운 아내의 손을 꼭 잡아보자. 그리고 한마디쯤 하자.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중년에 취미활동이나 외국어 학습, 악기 연주, 유산소 운동 등을 하면 치매를 예방하는 데 좋은 효과가 있다고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갈 때마다 의사가 적당한 운동이나 취미활동을 권유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중년이 되면 유산소 운동에 도전하고 취미활동에 관심을 갖는 경우가 많다. 악기 연주나 외국어 학습도 마찬가지다. 요즘은 온라인에서 혼자 배울 수 있는 다양한 외국어 학습 프로그램이 많다. 굳이 학원을 가지 않아도 집에서 편하게 외국어 공부를 할 수 있다. 나이 들어 외국어 배워서 어디에 써먹을 거냐고 물어본다면 할 말은 없다.
앞으로 코로나가 일상이 될 것 같아 해외여행지에서 써먹기도 힘들 것 같고 원어로 영화나 드라마를 보거나 소설을 읽어보려 외국어 공부를 한다는 게 시간 낭비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하루에 몇 시간씩 외국어를 배우면 뇌 건강은 좋아질 것 같다. 언어도 익히고 치매에 대한 두려움도 떨칠 수 있다면 일석이조 아닌가? 학창 시절에 이루지 못했던 꿈도 이루고 뇌 건강도 챙기고, 그리고 자기계발에도 열심인 나, 상상만 해도 자랑스럽다. 그래서 과거에 이루지 못했던 꿈, 현재의 만족, 미래에 대한 준비까지. 퍼펙트하게 삼위일체를 이루는 외국어 학습을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다양한 온라인 학습 사이트를 찾아봤다.
우리가 365일 매일 24시간 손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애지중지하는 스마트폰은 외국어를 배울 때 매우 유용한 도구다. 특히 전 세계의 빅 브라더라 할 만한 구글의 언어 학습 플랫폼은 놀라운 속도로 업데이트가 이루어진다. 최근 구글 번역기는 103개국 언어로 텍스트 번역이 확대됐다. 게다가 여행 전 미리 다운로드해서 쓸 수 있는 언어가 59개국 언어라 하니 구글 번역기 하나만 있으면 해외에서도 겁날 게 없어진 세상이 됐다. 구글 번역기를 열고 마이크에 대고 언어를 말하면 지정된 언어로 음성이 흘러나오는 동시통역 기능까지 추가돼 해외 언어에 대한 불편함을 덜어주고 있다. 또 스마트폰 카메라를 표지판이나 메뉴판에 대면 38개의 언어로 텍스트를 즉시 번역해주는 기능도 있어 해외여행자들에게 활용도가 높다고 한다.
네이버가 출시한 파파고도 막강한 번역 서비스를 하고 있다. 번역 실력도 생각보다 우수하다. 특히 영어와 한국어 번역은 깜짝 놀랄 정도다. AI가 이 정도까지 발전했다는 걸 생활 속에서 발견한다. 다음은 알아두면 유용한 언어 학습 앱들이다.
▶Duolingo 듀오링고는 모든 연령대의 사용자들이 무료로 외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서비스하고 있다. 게임을 하듯 단계별 학습을 끝내면 다음 스테이지로 넘어간다. 한국어를 비롯해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포루투갈어, 이탈리아어, 그리스어, 체코어, 헝가리어, 루마니아어, 폴란드어, 터키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힌디어, 일본어, 중국어, 러시아어, 인도네시아, 베트남어, 태국어 등 23개 언어 학습을 돕고 있다. 2011년 스타트업으로 시작해, 현재까지 앱 다운로드 수 3억 건을 돌파했다. 2019년도에는 구글 플레이와 애플 앱스토어에서 올해의 앱으로 선정됐다. 2019년 12월에는 구글의 투자를 받아, 벤처 기업의 상징인 유니콘 기업에 올랐다.
▶Rosetta Stone 1992년도에 처음 출시된 로제타 스톤은 외국어 학습시장에서 가장 오래된 플랫폼 중 하나다. 1992년 시디롬으로 10개국의 언어 교습법이 출시된 후, 현재 버전 4까지 업데이트를 계속해 34개의 언어 팩을 지원하고 있다. 초창기에는 시디롬으로만 판매했지만 현재는 온라인에서도 교습이 가능하다. 외국어 학습의 원조라 할 수 있는 이 앱은 사라져가는 미국 소수민족에 대한 언어 지원 프로그램 등 사회적 역할에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 2003년 전 세계의 글로벌화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로제타 스톤도 큰 성장을 맞이했다. 2011년에는 로제타 스톤 코리아가 설립돼 기업체 어학 프로그램 지원 및 어학원 등 오프라인 사업도 하고 있다.
▶Drops 2015년에 론칭된 스타트업 언어학습 앱이다. 헝가리의 스타트업 회사로 현재 한글 학습도 가능한 상태. 한글 ‘ㄱ’ 자도 모르는 외국인에게 ‘가나다’부터 가르쳐주는 앱이다. 2018년에 론칭한 하와이어는 사용 인구가 300명에 불과하지만 사라져가는 언어에 대한 문화인류학적인 어젠다를 발표하는 등 기업의 소명을 중시해 주목을 받고 있다. 현재 31개국 언어가 서비스된다. 2018년 말 기준으로 앱 다운로드 500만 건을 달성했다. 한국보다 해외에서는 주목받는 스타트업 중 하나다.
▶Babbel 2006년 독일 베를린에서 창업했다. 시디롬과 책으로 배우는 외국어 학습 분야에서 온라인 강좌가 곧 대세가 될 것이라는 생각에, 음악 믹싱 프로그램을 개발하던 젊은이들이 만들어낸 앱이다. 단순히 언어만 반복 교육하지 않고 문화마다 다른 손 모양 표시와 비언어 소통법 등도 가르쳐준다. 특히 사업을 하기 위해 언어를 배우는 사람,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 등을 위한 맞춤형 강좌를 개설해 많은 고객을 확보했다. 2015년 펀드레이징에서 2200만 달러를 모았고, 애플 워치에 바벨의 다국어 학습 앱이 탑재되면서 글로벌 무대에 올라섰다. 현재 바벨은 100만 명의 유료 회원을 자랑하며, 1일 다운로드 횟수도 10만여 건에 이르는 등 전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외국어 학습 앱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어 인터페이스는 지원이 안 된다. 영어를 디렉션 언어로 선택해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워야 한다.
▶Busuu 부슈는 듀오링고와 경쟁하는 언어 학습 앱이다. 언어 능력을 고급으로 올리고 싶은 대상자들에게 적합하다. 주제와 형식별로 과정이 세분화돼 있어 언어 능력 향상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에게 유용한 앱이다. 기초 문법과 퀴즈, 언어 학습 기능 모두 유료다. 초보자가 이용하기에는 다소 부담스럽다.
▶TripLingo 해외여행을 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언어 서비스를 제공한다. 식사와 쇼핑, 간단한 대화 등 주제별 문장을 쉽게 연습할 수 있다. 또 문화 관련 안내 및 환전·환율 계산기, 국제 통화요금을 절약할 수 있는 와이파이 전화, 현지 상황을 고려한 팁 계산기, 음성 번역기, 이미지 번역 도구 등 다양한 기능을 제공한다.
폴란드의 한 유태인 마을에 신앙심이 강한 사람들이 죽기 전에 성지 순례를 한번 다녀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사소한 이유들로 미루고 미루다가 결국 가스실 문으로 끌려들어 가며 하던 말이 있다. 그때 갔어야 했는데...
놓친 것이 못내 머릿속을 맴돌 때마다 뜬금없이 류시화 님의 글 중에 라는 글을 자꾸 떠올리게 된다. 이럴 때 딱 맞는 비유의 글은 아니지만 굳이 끼워 맞춰본다. 또한 포기하거나 미루기의 증세가 느껴질 때면 이 글이 떠올라 조바심을 부채질을 한다.
10여 년 전쯤 프라하 여행 중에 뾰족 지붕 아래 전망 좋은 꼭대기 층에서 민박을 한 적이 있다. 아침이면 함께 투숙한 여행자들이 모두 모여 식사를 하면서 그날의 계획을 꺼내놓으며 정보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리고 각자의 여행을 마치고 늦은 밤에 하나 둘 귀가하면 필스너 맥주 한 잔씩 마시면서 그날의 이야기를 펼쳐 놓는다. 여행지에서의 열린 마음들이 거리낌 없는 정보가 되고 공감하는 동지애가 즐거웠던 기억이 있다.
그중에서 중학교 교사였던 젊은 여행자가 그 날 인접국인 드레스덴 다녀온 이야기를 했다. 두 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가서 하루를 보내고 온 이야기였다. 혼자 차분히 느끼며 다닌 그녀의 드레스덴 이야기가 내 마음에 들어와 박혔다. 잠깐 우리도 거기 가볼까 갈등을 했었다. 하지만 그땐 이미 뮌헨으로 넘어갈 일정이 있어서 그곳엘 가질 못했다.
그 후 그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간간히 드레스덴이 생각났다.
그때 갔어야 했는데...
그쪽을 다시 가기가 어디 뭐 쉬운가. 그때가 좋은 기회였는데...
간 김에 그때 하루쯤 시간 만들어 다녀왔으면 좋았을걸.
아무래도 그때 갔어야 했어.
그런 아쉬움의 여파인지 아들이 유럽 여행 중에 들른 드레스덴의 사진을 어느 날 밤 스무 장이 넘게 보내와 자다 말고 일어나 한참을 들여다보았던 적이 있다. 내가 너무 안달을 했나 하는 생각에 언제부턴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잊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 역시 기억하고 있었고 이번 여행에 드레스덴을 집어넣었다. 프라하에서 Flix bus로 드레스덴까지 1시간 55분 걸린다. 물론 국경을 넘으니까 티켓과 함께 여권 검사를 한다. 유럽의 들판을 달리고 숲길을 스치는 풍경은 덤이다.
마치 누군가 날 기다리고 있기나 한 듯 결국 왔어야 할 곳에 온 듯한 기분으로 드레스덴 중앙역 앞에서 내렸다. 역 뒤편에서 내린 줄도 모르고 숙소 쪽으로 향하다가 '어? 이 길이 아닌걸?' 하는데 마침 지나가던 현지인 인듯한 부부가 우리 지도를 들여다보더니 따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한참 걸어서 예약된 숙소 앞까지 우릴 데려다 놓고 그들은 후딱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간다. 고맙다고 인사를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아쉽다. 그 부부의 등 뒤에 대고 우리말로 '감사합니다아~' 크게 외쳤더니 돌아보며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 미소가 기분좋다. 드레스덴 여행의 예감이 좋다.
신기하게도 시작부터 모든 순간들이 거리낌이 없다.
발걸음을 옮기면 마침 그것이 보고 싶었던 것이었다. 앞으로 걸어가는 길에 공기의 저항조차 없이 길을 열어주는 듯하다. 배가 고파서 골목을 돌아서면 맛있는 음식점이 있을 거란 예감이 적중했다. 다리를 쉬고 싶으면 멋진 풍경이 눈앞에 있는 벤치가 나타났다. 이 무슨 신비한 조화인가. 언제까지 이럴 것인지 모르겠지만 드레스덴의 은혜를 마음껏 믿어본다.
머리와 마음을 텅 비워가지고 온 내게 이 도시의 충만한 햇빛과 에너지와 고고한 문화를 채우는 시간은 피곤하도록 길어져도 좋다. 구시가지의 돌길에 내딛는 내 발걸음 소리가 어느 날 역사가 될 거라는 당치도 않은 상상을 하면서.
어째서 낯설지 않은 걸까.
엘베강을 바라보며 오랜 전통의 미술대학이 세워진 것도, 그 강변의 행위 예술가들도, 긴 세월의 든든함 아우구스투스 다리, 폭격에 허물어진 교회 벽돌 하나하나 시민들에게 번호를 부여해서 보관했다가 재건에 사용하던 그 마음이 담긴 교회도 모두 자연스럽게 조화롭다. 온 도시가 2차 대전의 공습으로 불타고 무너져 내렸어도 그 거뭇한 색감조차도 생소하지 않다. 전쟁의 아픔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도시 자체가 가슴으로 다가온다.
브륄의 테라스에서 내려다보는 엘베강은 마치 내가 본 듯한 그 옛날의 강처럼 흐른다. 괴테가 즐겨 산책하며 유럽의 발코니라 일컬었음을 나도 인정하기로 한다. 거길 걷다 보면 그 시가지를 오가는 사람들이 풍경이 된다.
독일의 피렌체라 불릴 만큼 각종 문화유산에서 고풍스러움의 멋이 도시를 채우고 있었다. 왕궁이나 대성당, 오페라하우스나 마차가 다니는 골목길에 스며들어본다는 것은 심장이 두근대는 걸 느끼는 시간이다. 어딜 돌아보아도 감각적인 바로크 건축물들의 위용이 도시의 멋과 고고함에 흠뻑 빠뜨린다.
요하네스 왕 청동 기마상 앞 광장에서 BTS노래를 틀어놓고 춤추던 젊은 청춘들을 보며 어쩐지 가슴 뭉클. 오옷... 이쁘신 우리의 bts~. 길 가다가 갈증 나면 노천카페에 앉아 맥주 한 잔 마시며 이 도시를 넓은 눈으로 둘러본다. 거리의 아티스트가 벌이는 전위 예술도 인상적이었고, 가던 길 멈춰 서서 들었던 숄로스 광장의 털보 악사의 연주도 기억난다. 특히 밤 산책길이 이쁘고 편안했던 시간.
독일 라이프치히 남동쪽으로 마이센과 피르나 사이에 있는 엘베 강 유역에 있는 작센 주의 주도 드레스덴. 게르만의 식민에 의하여 1200년 이전에 성(城)이 구축되고 1206년에 도시가 되었다. 베를린 남쪽 약 189km 지점에 위치했다. 독일의 도시중 외곽으로 멀리 떨어진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슬라브어(語)로 숲 속의 사람이란 뜻의 드레스덴(Dresden), '평야의 삼림 거주민'을 뜻하기도 하는데 드레즈단이라는 슬라브족 촌락으로 시작되었다고 한다.
옛 동독의 古都,
도시가 오가는 이들을 압도할 만큼 크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이쁜 뮌츠 골목도, 강변을 바라보는 나란한 벤치들도, 노란색 트램도, 소소하게 품격을 느끼게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천천히 다닐 수만 있어도 좋은 곳, 이 도시가 폼나니까 그 속에 서 있는 사람들까지 아름답다. 그들의 눈빛은 따뜻하다. 그냥 다녀도 가슴 벅찬데 게다가 마냥 관대해지기까지 한다. 드레스덴은 더없이 은혜로웠다.
그때 갔어야 했는데...
잊을만하면 떠들어댈 만했다. 그리고 오고야 말았다.
▲드레스덴의 맛
독일에는 감자요리가 여러 가지 있다. 그 중에 노천카페에서 먹었던 뢰스티는 우리의 감자채전과 흡사하다. 그 위에 소스와 잘게 썬 베이컨이나 샐러리 등을 뿌리고 채소를 듬뿍 얹어서 먹기 때문에 식후에도 가벼운 느낌이 좋다.
특히 구운 토마토와 콩 요리를 많이 먹었는데 잘 익은 토마토 맛의 풍부함은 최고다. 그리고 드레스덴에 왔으니 흑맥주 한잔쯤 빠뜨릴 수 없다.
세월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장면, 그리고 말이 있습니다. 2015년 7월 31일 독일 통일의 상징인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앞 야외무대에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씨가 오릅니다.
“제가 부를 곡은 저뿐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뿐만 아니라, 세계 사람들이 원하고 갈망하는 곡일 수 있습니다. 통일이 빨리 되어서, 제가 부르는 이 ‘그리운 금강산’이 오늘 이 베를린에서 마지막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이상 그리운 금강산이 아니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강산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겠습니다.”
광복 70주년을 기념해 열린 ‘유라시아친선특급’ 폐막 음악회, 그리고 앙코르 곡으로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기에 앞서 조 씨가 한 말이 4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합니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모스크바와 벨로루시, 폴란드를 거쳐 독일 베를린까지 19박 20일 동안 대륙횡단열차를 탔던 학생, 시인, 소설가, 화가, 경찰, 소방관, 기자, 음악가, 교수, 관료, 정치인, 독립운동가 후손 등 각계각층에서 참여한 원정 대원 400여 명은 조 씨의 발언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며 진한 공감을 표시했습니다.
하지만 조 씨와 원정 대원, 그리고 국민 모두의 간절한 소망과 달리 달라진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사이 남과 북, 미국의 정상이 숨가쁘게 만나는 등 희망을 키우고 있지만 아직 이렇다 할 가시적인 성과는 없습니다. 금강산은 여전히 ‘그리운 금강산’입니다. 여전히 갈 수 없고, 만질 수 없는 그리운 금강산입니다. 그런 씻기지 않는 갈증과 그리움을 다소나마 해소해주는 ‘우리 꽃’이 있습니다. 특산 식물인 봉래꼬리풀이 그 주인공입니다.
봄 금강(金剛), 여름 봉래(蓬萊), 가을 풍악(楓嶽), 겨울 개골(皆骨). 계절마다 각기 다른 풍광을 자랑하기에 그 이름을 달리 불렀다는 금강산. 여름이면 1만2000 봉우리마다 계곡마다 온갖 나무와 풀들이 푸름을 뽐낸다고 해서 쑥과 명아주를 뜻하는 한자어 ‘봉래(蓬萊)’란 이름을 얻은 금강산. 그곳에서 여름철이면 꼬리 모양의 꽃을 피운다고 해서 봉래꼬리풀이란 국명을 얻었습니다. 학명 중 변종명 ‘디아만티아카(diamantiaca)’는 봉래꼬리풀이 처음 채집된 장소가 바로 ‘Diamond Mountain’이라는 영어명으로도 불린 금강산이며, 한국의 고유 식물이었음을 말해줍니다.
높이 20cm 안팎으로 자라며, 달걀 모양으로 마주나는 잎의 표면은 녹색이고 뒷면은 붉은빛이 돕니다. 7~8월 원줄기와 가지 끝에 연한 보라색 꽃이 원뿔 형태로 줄줄이 달립니다.
Where is it?
금강산에 자생하는 봉래꼬리풀이 남한에서 처음 발견된 것은 1990년대 초. ‘설악산의 꽃’을 찾아 나선 식물학자와 야생화 사진작가, 동호인 등이 설악산 마등령과 서북능선, 안산 등지에서 자라는 봉래꼬리풀을 잇따라 확인한 것. 이에 국가생물종지식정보시스템은 봉래꼬리풀이 “금강산 비로봉의 사스래나무와 눈잣나무의 숲속에서 자라며, 강원도 속초시와 인제군에도 분포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케이블카를 타고 5분여 만에 오르는 권금성 바위 더미 사이사이에서도 만날 수 있다. 울창한 숲이었으나 케이블카 운행으로 숱한 관광객이 오가면서 대머리 돌산처럼 변한 권금성 곳곳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어 놀랍고 반갑다. 미시령 옛길 주변에서도 울산바위를 바라보고 당당하게 선 봉래꼬리풀을 만날 수 있다.
겨울의 절정이다. 게다가 미세먼지의 공습이 재난 수준이다. 온화한 기온의 남프랑스에서 긴 겨울을 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일탈하듯 단 일주일 정도의 여행이어도 몸과 마음을 녹일 수 있다. 지중해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서 편안한 휴식이 될 일주일은 엄동설한을 잊게 해줄 것이다.
하루 한 군데에서 느릿하게 놀기
남프랑스의 항만도시 니스는 지중해 연안에 위치해 있다. 연중 평균기온이 15℃이고 대부분 온난한 날씨여서 겨울을 나기엔 좋은 조건을 갖고 있다. 한 시간 내외의 거리에는 모나코, 칸, 생폴 드 방스, 에즈 빌리지도 있다. 또한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접경지역이어서 국경을 넘어가 볼 수도 있다. 지중해의 햇살이 쏟아지는 니스에 숙소를 정하고 날마다 놀이하듯 여유롭게 여행의 맛을 즐기기에 최적이다.
니스의 코발트블루에 빠져들다
여름 피서지나 휴양지로 니스만큼 각광받는 곳이 있을까. 따사로운 니스의 해변은 아름다운 지중해를 품고 있어서 여름이면 피서객으로 북적인다. 피서객이 어마어마하게 넘쳐나는 여름철엔 호텔비가 만만치 않다. 하지만 여름 피서객이 빠져나간 가을과 겨울엔 할인 가격으로 호텔에 묵을 수 있다. 특히 이때 꼼꼼히 찾아보면 지중해의 일출과 일몰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는 전망 좋은 방을 구할 수도 있다.
내가 니스에 갔을 때는 가을이었는데도 해변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풍경이 일상의 모습처럼 자연스러웠다. 해변의 동글동글한 몽돌 위를 맨발로 거닐면 지압을 받는 듯 시원하다. 4~5km에 걸쳐 곡선으로 멋지게 이어진 해변에서 바라보는 코발트블루의 바다는 시원한 색감만으로도 휴식을 준다.
군데군데 이어지는 계단을 통하면 구시가지로 들어가게 된다. 아름다운 성당이나 교회를 지나 영국인의 산책길이라 불리는 길을 걷는다. 탁 트인 광장에 앉아 천천히 도시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 보는 즐거움도 맛볼 수 있다. 또한 샤갈이나 마티스 박물관을 조용히 둘러보는 시간도 행복하다. 꽃시장, 채소시장, 벼룩시장을 지나 고풍스러운 골목길을 걸어 전망대에 올라 광활한 니스의 해안선을 굽어보는 시간은 절대 빠뜨리면 안 된다.
노천카페에서 수많은 사람이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어슬렁거리며 걷다가 지중해 샐러드와 신선한 해산물 요리를 맛보는 것도 당연한 즐거움이다.
동화 속 중세마을 생폴 드 방스
16세기 중세도시 생폴 드 방스는 여행자에게 안식을 주는 동화처럼 예쁜 마을이다. 한적한 골목을 느릿하게 걸으며 세상과는 아랑곳없는 듯한 풍경 속에 빠져든다. 마네, 브라크, 마티스 등의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었던 곳. 특히 샤갈이 사랑한 마을이다. 성벽을 따라 걷다 보면 공동묘지가 있고 그곳에 소박한 샤갈의 묘가 있다. 여행길에서 이만큼 평온한 마을을 만나는 일은 그리 흔치 않다. 생폴 드 방스는 니스의 버스터미널, 그리고 군데군데 있는 버스정류장에서 400번 버스를 타면 한 시간 남짓 걸리는 거리에 있다.
영화제의 도시 칸의 종려나무 해변길
칸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영화제의 도시로 떠올려지는 곳이다. 영화배우 전도연이 레드카펫을 밟고 들어가 영화 '밀양'으로 여우주연상을 탔던 도시다. 칸 영화제는 베니스와 베를린 영화제와 함께 세계 3대 영화제로 알려져 있다. 5월에 가면 영화제로 축제 분위기다. 햇살 쏟아지는 항구에 정박해 있는 눈부신 요트를 눈앞에 두고 커피 한 잔 마셔보는 여유를 가져본다. 종려나무들이 즐비한 해변을 걸으며 세계적인 영화인들의 숨결을 느껴보는 시간 또한 즐겁다. 니스 역에서 기차로 40분 거리다.
하루에 둘러볼 수 있는 모나코와 에즈 빌리지
여배우에서 왕비가 된 그레이스 켈리가 먼저 떠오르는 모나코는 니스에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다. 누구라도 한 번쯤 들러보는 몬테카를로 카지노 앞에는 언제나 여행객들로 붐빈다. 해안가로 나오면 카지노를 즐기러 온 도박꾼들의 화려한 요트를 마음껏 구경할 수 있다. 궁전과 대성당이 있는 구시가지를 지나 해양박물관을 구경해도 좋다. 시간이 충분해 모나코 빌리지의 골목까지 걸어볼 수 있다면 아쉬울 게 없다.
지중해의 선인장 마을
지중해 절벽 위에 13세기에 만들어진 작은 요새 마을이 있다. 수백 가지의 선인장들이 마을 정상에 가꾸어져 있다. 이 마을에 오르면 가슴을 뻥 뚫리게 해주는 아름다운 지중해를 마음껏 바라볼 수 있다. 니체는 이곳을 거닐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구상했다고 한다. 지중해의 아름다움은 이곳에서 바라보는 게 최고였다. 에즈 빌리지와 모나코는 가까이 있다. 두 곳을 하루에 다녀올 수도 있다.
니스 여행은 천천히 느긋하게 어슬렁거리며 해야 한다. 그래야 자연의 질감을 제대로 느낄 수 있다. 해변에는 햇살을 즐기거나 힘차게 달리기를 사람들이 언제나 있다. 추운 겨울에 쏟아지는 태양처럼 환한 그들의 삶을 느껴보자. 역사 속의 또 다른 세상을 걸어보면서 고단한 일상을 잊는 시간도 괜찮다. 사계절 온난한 남프랑스 니스에서 추위를 떨쳐보는 일주일은 짧아도 알차다.
올림픽 폐막식을 앞두고 치러지는 마지막 경기인 마라톤은 ‘올림픽의 꽃’이라고도 불린다. 42.195km를 쉬지 않고 달리고 또 달리다 보면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질주도 끝이 난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2시간 13분 23초의 기록으로 결승 테이프를 끊은 마라톤 금메달의 주인공, 황영조(黃永祚·49)를 만났다.
가난해서 달려야 했던 소년
42.195km를 2시간 15분 안에 들어와야 한다고 가정하면 이는 100m 달리기를 422번, 그것도 한 번도 쉬지 않고 매번 18초의 기록으로 들어와야 가능한 일이다. 상상만 해도 숨이 차고 정신이 아득해진다. 이런 힘든 종목인 마라톤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궁금했다. 그는 뛰고 싶어서 뛴 게 아니라 뛸 수밖에 없었다고 운을 뗐다.
“돈 없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 달리기예요. 특별한 장소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나가서 뛰면 그만이죠. 저에게 마라톤은 가난했던 시절 유일하게 돈을 받으면서 할 수 있었던 운동이었어요.”
강원도 삼척에서 태어난 그는 학교 월사금도 제때 내지 못할 만큼 어려운 집안에서 자랐다. 준비물을 마련하지 못해 항상 야단을 맞았던 미술시간은 그가 제일 싫어하는 과목이었다. 돈이 없어 못 사온 건데 그게 무슨 죄가 된다고 벌을 서야 하는가.
“교통비도 없었기 때문에 제 두 다리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어요. 학교에 가려면 초등학생 땐 왕복 6km를 걸어야 했고, 중학생 땐 어머니가 어렵게 사주신 중고 자전거를 타고 24km를 달려야 했죠. 운동을 하고 싶어서 한 게 아니라 생활 자체가 운동이었던 거죠.”
매일 가파른 언덕과 비탈길을 다니다 보니 자연스럽게 체력이 좋아졌고 중학생 때 이를 눈여겨본 운동부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처음 그가 선택한 종목은 육상이 아닌 사이클이었다. 하지만 장비가 워낙 비쌌고 돈이 많이 드는 종목이라 고등학교 진학 후에도 선수생활을 이어나가기엔 무리였다.
“옛날엔 돈 없으면 고등학교도 못 갔어요. 근데 강릉에 위치한 명륜고등학교에서 먹여주고 재워주고 졸업도 시켜줄 테니 육상부에 들어오라고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거죠. 돈 안 들이고 졸업하면 효도하는 거잖아요. 그래서 바로 종목을 바꿨죠. 처음엔 1500m, 5000m 중장거리 선수로 데뷔했는데 늦은 나이에 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선배들을 가볍게 제쳤어요. 제가 뛰고 있는 구간엔 같이 안 있으려고 할 정도로 두려움의 대상이었죠.(웃음)”
1991년 페이스메이커로 출전한 동아마라톤대회에서 3위를 기록했다. 얼떨결에 그의 마라톤 데뷔전이 된 셈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같은 해에 열린 셰필드 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마라톤 금메달, 1992년 벳푸-오이타 마라톤대회에선 한국 선수 최초로 마의
2시간 10분 벽을 깨고 한국 신기록을 세웠다. 이 기세를 몰아 1992년엔 바르셀로나올림픽에 최연소 선수로 참가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가 올림픽의 피날레를 장식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그는 “금메달은 신이 정해주는 메달”이라고 말한다.
“스포츠는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하잖아요. 마라톤도 아무리 열심히 뛴다 해도 경기가 끝날 때까진 결과를 알 수 없는 종목이죠. 그래서 저는 대회에 나갈 때마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보단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자, 죽을힘을 다해 뛰자고 마음먹었어요.”
혜성같이 나타난 마라톤 영웅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코스는 현재까지 올림픽 사상 가장 어려웠던 난코스로 꼽힌다. 코스를 살펴보면 우선 항구도시 마타로에서 출발해 25km 지점부터 시작되는 오르막길을 지나 그라시아 거리, 카탈루냐 광장을 통과한다. 그러다 38km 부근에 도착하면 그 유명한 ‘몬주익 언덕’이 모습을 드러낸다. 해발 213m의 몬주익 언덕에 오르면 바르셀로나 시내는 물론 넓게 펼쳐진 지중해를 볼 수 있다. 26년 전 이 아름다운 무대에서 치열한 레이스가 펼쳐졌다.
“마라톤 최악의 조건이 덥고, 습하고, 경사가 많은 코스인데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 코스가 기가 막히게 모든 악조건을 다 갖추고 있더라고요. 기온은 30℃를 웃돌았고 바다를 낀 도시답게 엄청나게 습했어요. 이런 날씨에 몬주익 언덕을 뛰어 올라가야 했으니 사전 답사 때 보고 아이고야! 했죠.”
바르셀로나 시내는 선수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리고 오후 6시, 경기 시작을 알리는 총소리에 맞춰 선수들이 뛰기 시작했다.
“출발선을 떠나는 순간 주사위는 던져진 거예요. 죽이 될 수도 밥이 될 수도 있는 거죠. 솔직히 속으론 ‘어느 세월에 다 가냐’ 하는데 한편으론 더 이상 힘든 훈련을 안 해도 된다는 생각에 후련해지기도 해요. 이때부턴 정말 미친 척 뛰기만 하는 거예요. 머릿속도 다 비워야 해요. 이런저런 생각하면 뛸 수가 없거든요.”
30km를 지나자 선두권 그룹에서 뒤처지는 선수들이 생겨났다. 황영조와 속도를 잘 맞춰오던 김완기 선수도 페이스를 잃으면서 본격적으로 황영조, 일본의 모리시타 고이치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됐다. 황영조가 앞으로 치고 나간다 싶으면 모리시타가 뒤를 바짝 쫓았고, 모리시타가 앞서나간다 싶으면 황영조가 냉큼 따라잡았다. 그렇게 서로를 떨어뜨리고 잡기를 반복했다.
“마라톤이라는 게 그냥 뛰면 될 것 같지만 사실은 엄청난 전략싸움이거든요. 속도 조절을 잘하면서 체력을 비축하고 상대가 방심할 때 그 힘을 폭발시켜서 나가야지 거리를 벌릴 수 있어요. 결승지점을 2km 남겨뒀을 때 모리시타가 속도를 줄이더라고요. 아마 스타디움에서 승부를 볼 생각이었나봐요. 이때다 싶었죠. 이때 간격을 더 벌려두지 않으면 금방 따라올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죽을힘을 다해서 뛰었어요. 모리시타가 아차 싶었을 거예요.”
메인 스타디움에 황영조가 모습을 보이자 스타디움은 함성으로 가득 찼다. 그의 옆에 모리시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황영조가 마지막 코너를 돌더니 양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결승선을 향해 뛰어 들어왔다. 그러곤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원래 옆에 사람이 있으면 숨소리가 다 들리거든요. 마지막 코너를 도는데 뭔가 나만 뛰고 있는 느낌이 들어서 뒤를 돌아본 거죠. 아, 내가 금메달이구나 싶었죠. 결승선을 밟는 순간 이제 안 뛰어도 된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어요.(웃음)”
우연의 일치인지 황영조가 금메달을 딴 8월 9일은 손기정 선수가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마라톤 금메달을 딴 날짜와 같았다. 56년 만이었다. 황영조는 스타디움에서 지켜보고 있던 손기정 선수를 찾아가 금메달을 그의 목에 걸어줬다. 당시 외신도 이들의 모습에 주목했다.
“손기정 선생님이 식민지 시절 일장기를 달고 시상식에 올라선 역사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는 큰 아픔이잖아요. 근데 외국인들은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죠. 선생님의 한을 풀어드린 것 같아 행복했어요.”
선수에서 감독의 길로
황영조는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서 딴 마라톤 금메달을 마지막으로 은퇴했다. 이후 2000년부터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선수단 감독을 맡으며 그의 뒤를 이을 선수를 양성하고 있다.
“요즘 친구들을 보면 간절함이 없어 보여요. 조금만 더 하면 되는데 금방 포기해버리니깐 제자리걸음이 될 수밖에 없죠. 훈련할 때도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제일 많이 해요. 그 힘든 순간만 견디고 넘기면 정말로 더 큰 무대를 바라볼 수 있거든요.”
유독 뜨거웠던 8월의 태양을 피해 국민체육진흥공단 마라톤선수단은 강원도 대관령으로 전지훈련을 떠났다. 그나마 더위가 식은 오후 6시에 훈련을 시작했지만 20분이 채 지나지 않아 선수들의 유니폼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이들을 따라가며 “포기하지 마! 바짝 붙어야 해!” 힘껏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쟁쟁하다.
“간혹가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 살아 있음을 느낀다는 둥 심장이 요동칠 때 희열을 느낀다는 둥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정말 죽어라 뛰어보지 않아서 하는 소리예요. 마라톤이 재미있는 운동은 아니에요. 강인한 정신력과 체력이 늘 요구되는 외롭고 힘든 자신과의 싸움이죠. 이런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마라톤에서 앞으로 손기정, 황영조, 이봉주 말고도 언급할 수 있는 선수들이 더 많아졌으면 하는 게 제가 ‘마라토너’로서 가지는 바람입니다.”
기온이 비현실적으로 올라가니 세상도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모든 사물이 흐느적거리고 시간은 느리게 흘러간다.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주인공이 뜨거운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고백이 이해될 지경이다. 문득 카뮈가 겪었던 모로코의 더위가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부극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그렇게 얼굴을 찡그렸던 건 바로 그 황야의 불쾌지수 때문이었으리라.
어디를 간다는 것도 엄두가 나질 않고 집에 있자니 전기료 걱정에 에어컨도 마음대로 켤 수 없다. 저잣거리에서 들리는 소문은 온통 흉흉하고 머릿속으로만 그리던 남쪽 바다는 바닷물 온도마저 30도를 넘어 양식 중이던 물고기가 떼로 죽어 나간다는 소식이다. 예전에는 이런 때가 되면 TV에서 납량특집도 많이 하더니만 요즘은 그것도 뜸하다. 하기야 사는 현실이 하루하루 납량특집이니 흥도 안 나리라.
그나마 요즘 마음속 납량특집 삼아 찾아보는 프로그램이 나영석 PD가 만드는 ‘꽃보다 할배’라는 여행 프로그램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필자는 이 프로가 처음 시작한 때부터 등장하는 할배들에게 감정 이입해가며 즐기다 보니 어느새 5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런데 이번에 방영되는 베를린, 체코, 오스트리아 편을 보니 세월의 흐름이 완연히 느껴진다. 할배들의 기력이 여전만 못함이 드러나 마음이 짠하다.
이 프로그램의 묘미는 뭐니 뭐니 해도 등장하는 인물들의 캐릭터가 주는 재미다. 자신도 모르게 드러나는 갖가지 연출되지 않은 모습과 행동들로 멀게만 느껴지던 배우들의 삶이 우리네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더욱이 드라마로 형성됐던 고정관념을 깨는 순간들이 주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 중 극 중 역할 때문이겠지만, 매우 날카롭고 깐깐해 보였던 박근형이 의외로 로맨티시스트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
순재 할배는 ‘직진순재’라는 별명처럼 여행 초기 일행을 벗어나 항상 돌출행동을 하여 시청자들을 걱정시켰지만, 그것이 끊임없는 지적인 호기심 때문임이 밝혀지면서 나이를 잊고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무언지 알게 해 주었다. 그러나 이번 여행에서는 앞장서서 일행을 이끌던 초기의 활달함이 많이 수그러들었다. 체력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행을 배려하는 마음이 원숙해진 이유도 있으리라.
가장 변화가 많은 문제가 있는 캐릭터는 바로 백일섭이다. 초기에는 자기중심적인 태도로 시청자들에게 불편함을 주기도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것이 불편한 몸 때문임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그 불편함이 심해져 시청자들을 오히려 불편하게 한다. 두 번의 수술로 불어난 체중을 지탱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움을 더하고 그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과장 행동이 안쓰럽다.
이번 여행의 백미는 무엇보다 김용건의 등장이다. 배우로서 몰랐던 그의 진면목이 만천하에 드러나 시청자를 즐겁게 했다. 그의 끊임없는 유머와 농담은 자칫 지루해질 가능성을 차단하고 여행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아울러 그의 시선은 드라마의 균형을 잡듯이 조용한 신구와 소외된 백일섭을 부축하고 견인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삶의 윤활유로서 유머의 가치를 입증한다. 여행 파트너로 우리 식구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선택했다.
프로가 방영되는 한 시간 반 동안 알프스 자락에 자리한 잘츠부르크의 풍광과 볼프강 호수, 그리고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촬영장소를 할배들과 함께 다니느라 더위를 잊었다. ‘그래 더 늦기 전에 우리 할배와 한번 다녀와야지.’ 나만의 즐거운 납량특집이었다.
소풍 때만 되면 새벽같이 일어나 엄마와 함께 김밥을 말았다.
김밥 가게가 생겼을 때 ‘과연 이게 팔려?’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소풍날 아침이면 너도나도 김밥집으로 향한다. 흔하디흔한, 빠르고 간편한 먹거리 김밥. 일상 속에서 쉽게 집어 들던 김밥에 형형색색 특별함을 더해 세계 속에 화려한 모습으로 선보인 이가 있다. 바로 ‘김밥 셰프’로 불리는 김락훈(金樂勳·48) 셰프다. 김밥을 지구촌에 전하다 보니 요즘은 모든 재료의 중심이 되는 우리 농민과 함께 나아가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김밥 세계화를 넘어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며 소통의 물꼬를 트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를 꿈꾸는 김밥
김락훈 셰프를 만난 곳은 서울 종로구 청와대사랑채 한식홍보관. 미국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난 뒤 중국 상하이를 거쳐 전날 밤 한국에 도착했다고 했다. 현재 그는 청와대사랑채 한식홍보관 대표로서 한국 문화와 요리를 알리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오래전에 이미 약속된 시간이었어요. 대림중학교 다문화 학생들과 함께 불고기를 만들고 그것을 넣어 김밥을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외국 관광객 체험 프로그램인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에요. 한국 교육제도 아래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위해 예외 규정을 준 거죠.”
생소한 한국음식을 체험하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흥미롭게 시간을 이끌어가는 김락훈 셰프. 1시간여 진행된 요리교실은 자신들이 만든 김밥을 맛있게 먹는 것으로 끝이 났다.
김밥 세프라는 말이 일단은 생소하다.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가 초밥의 매력에 푹 빠져 결국에는 다다른 곳이 김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김밥 셰프를 자처했을까?
김밥에서 가능성을 보다
“저는 혼자서도 잘 놀아요. 내 만족을 위해 살아왔고 사람들의 평가를 크게 받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내 잔재주를 적용시키기에는 너무나 좋은 콘텐츠가 김밥이더라고요. 누구 하나 접근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예쁘게만 잘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보이면 되는 거고 완성도는 시간이 가면서 축적되는 거고요. 완벽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내가 하는 작업에 대해 물어보면 받아칠 수 있는 수준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일식이면 일식, 멕시칸이면 멕시칸대로 김밥 한 개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생긴 거예요. 멕시칸 푸드로 김밥을 만든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는 범위와 한계 내에서 그들의 관심을 긁어줄 수 있을 만한, 그 정도 지식만 쌓으면 되는 거잖아요.”
김밥 셰프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수준을 위해 공부하다 보니 국내외에서 딴 자격증만 해도 20여 개나 된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세계요리월드컵에서 개인전, 단체전 동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본 수준이 어느 정도이기에 이토록 끊임없이 매달리는 것일까.
“저는 세계 1호 김밥 셰프예요. 저도 저지만 김밥을 의인화해서 셰프란 말을 붙인 거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까요? 저는 레시피를 만들고 요리하는 세프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시스템을 만들거나 조직하는 사람이라고 저를 설명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가령 시니어의 신규 직업층을 만들고 싶어요. 한식의 새로운 분야로 발돋움할 수 있는 하나의 성장 자료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김밥, 세계 속에서 ‘바람’나다
나라 밖에서 한국 김밥을 널리 알리고, 안으로는 농민들과 어떻게 하면 신나고 재미있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는 김락훈 셰프. 우연한 기회에 세계 무대에까지 김밤 셰프로서 얼굴을 알리게 됐다.
“스스로 더 성장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는데 한국 문화를 알려야 하는 중요한 국제 행사에 저를 불러주시더라고요. 물론 김밥 셰프는 저 하나였고 김밥이라면 잘할 자신이 있었죠. 다만 그때의 저는 아직 그런 중요한 자리에 서기에는 검증이 되지 않은 패였습니다. ‘내가 잘못하면 큰일 나겠구나. 정말 잘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한 공식 행사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국제관광박람회(FITUR)였다. 규모 면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다양한 국내외 행사에 참여했지만 뭔지 모를 책임감이 밀려왔다.
“그때 결정했죠. 외국 행사에 집중하자. 처음 나간 박람회였는데 규모가 대단했다는 것을 3년 동안 국제박람회를 다니면서 알았죠. 처음에는 비교 대상이 없어서 몰랐고요. 우리나라 김으로 제대로 된 김밥을 만들어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저도 점점 성장했습니다.”
김락훈 셰프가 만드는 김밥은 일반 김밥이 아니다. 다양한 무늬가 돌돌 말린 김과 밥 사이에 표현되며 배색 또한 예술이다. 일명 ‘파티 김밥’. 곰돌이 모양, 꽃 모양 등이 동그란 김밥 안에 담겨 있다. 길게 김을 이어 붙여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과 김밥을 말기도 했다. 함께 화합해 만드는 의미와 재미도 있고 잘라 먹어보니 맛도 있는 김밥에 세계 각지에서 모인 관람객들이 흥분했다.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였습니다. 그 후에 독일 베를린 국제관광박람회(IBT), 한불수교 130주년, 영국 런던 국제관광박람회(WTM) 등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는 자리에 참석해 ‘김밥 쇼’를 했습니다. 다행히도 가는 곳마다 성황이었어요.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작년 한 해는 평창동계올림픽 성공 유치를 위한 한국 문화 홍보대사 자격으로 전 세계를 누볐다.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였다. 셰프로서는 유일하게 김락훈 셰프가 평창동계올림픽 성화 봉송에 참여했다.
“솔직히 성화 봉송은 하고 싶었어요. 인생에서 의미 있는 한 페이지잖아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최초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미국 선생님들에게도 김밥과 관련한 강의를 해주고 왔습니다. 미국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비빔밥집이 아주 많아요. 그런데 미국 선생님들에게 비빔밥이 아닌 김밥으로 한국 음식 관련 강의를 해온 지가 벌써 4년이나 됩니다. 미국 교육국에 정식으로 등록한 한국 요리 체험 교육도 바로 김밥입니다. 그 전에도 누군가 한국 음식을 가르쳤겠지만 미국 공식 기록에는 음식 체험으로 배운 한국의 첫 요리가 ‘김밥’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흠 잡히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다
놀라운 점은 우리나라 한식 분야에도 명망 있고 이름 있는 요리사가 있을 텐데 김락훈 셰프가 그들을 대신해 국가를 대표하고 신나는 한판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누구의 제자 혹은 정통성을 따져 묻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 궁중 요리도 전통 한식도 아닌 김밥으로 세계 속에 한국 음식을 알리고 다닌 셈이다. 시기나 질투를 받지는 않았을까?
“저는 계파 같은 거 없잖아요. ‘넌 누구니? 쟤는 뭐야?’ 한마디로 이런 거였죠. 김밥 셰프라고는 저밖에 없고 이래라저래라 하기도 뭣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살펴만 봤는데 제가 자리를 지켜냈잖아요. 수면 아래에서 쭉 보고 있다가 지금은 응원도 해주시고, 잘하고 있다고도 말씀해주십니다. 한 3년 전부터인 거 같은데 이쪽 업계 분들은 처음에 제가 이러다가 말겠거니 생각했답니다. 지금은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도 해주십니다.”
사실 잘나간다는 말을 듣고 있을 때 자칫 큰 코를 다칠 뻔도 했다. 하나밖에 없는 김밥 셰프이니 김밥 체인 사업을 해보자는 제안도 있었다. 구체적인 가능성도 열려 있었지만 서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멈췄다. 주위 사람들도 말렸다. 섣불리 결정을 내렸다가는 낭패 볼 것이 뻔했다. 그 또한 제대로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다.
“잘 보고 길을 걸어온 걸까요? 원맨쇼만 하면서 온 건 아닌지. 망가지면 한순간에 무너지고 나쁜 평가를 받게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사업적으로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 편입니다.”
팜파티로 농촌과 도시 유통망을 좁히다
김락훈 셰프는 김밥 안에 들어가는 식재료에 관심을 갖고 전국의 농작물과 농민을 연계하는 일을 벌이고 있다. 한국벤처농업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이유도 농민들과의 교류 목적 때문이다.
“김밥 안에 들어가는 식재료를 다양화하려면 현실적으로 농민과의 접점이 필요하잖아요. 식재료는 농민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김밥이든 건강한 음식을 대접하는 한식집이든 농촌에서 식탁까지 안전한 먹거리가 유통될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 운동의 일환이 제가 4년 동안 우리 농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팜파티’인 것이죠. 여기에 참여하는 농민들은 팜파티 셰프가 되는 것이고요.”
지금까지 국내외 박람회와 각종 행사, 파티를 하면서 쌓아온 모든 노력을 농민의 자립과 건전한 먹거리 유통망을 다지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김락훈 셰프의 계획이자 바람이다. 올해는 외국 활동을 멈추고 한국에 머물면서 농민들과 함께할 사업과 관련해 진지하게 구상 해볼 생각이다.
“요리를 통해 농업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농민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매개체도 필요하고요. 말하자면 한국벤처농업대학교 같은 그림도 필요하고, 요리를 할 줄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판로도 필요하죠. 김밥은 제 스타일로 콘텐츠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따라만 와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을 농민 삐끼(?)라고 불러도 좋단다. 생산자로서 농민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고 싶다고 했다. 7cm 내외 동그란 김밥 안에서 마치 우주를 발견한 사람처럼 농민 이야기에 신이 난 김락훈 셰프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일을 벌이고 한식 세계화를 위해 뛰고 싶어요. 지금 저와 함께하는 농민, 그분들이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