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 안짝에 이 세상을 지나가는 덧없는 나그네. 그게 인생길. 이제 남은 생을 들판에서 일하며 만족을 구가하리라, 하득용(52) 씨는 그런 생각으로 산골에 입문했다. 산촌 노장들이 보기엔 짠했던 모양이다. “멀쩡하게 서울에서 그냥 살지 어쩌자고 내려와 생고생이오?” 오나가나 듣는 소리가 늘 그 소리였단다. 그러나 하 씨의 귀엔 맺히는 게 없는 관전평에 불과했다. 귀농에 아무런 회의가 없기에. 자연스러운 귀결이기에.
어릴 적부터 하득용 씨에겐 우렁찬 꿈 하나가 있었다. 바로 농사였다. 농대에 진학한 것도 농사 실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쉰 줄에 접어든 그는 현재 오미자 농원의 쥔장. 말하자면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그는 번쩍거리는 서울의 요지 강남에 살며 근사한 직장을 다녔었다. 그랬던 그의 귀농 뉴스를 접한 초등학교 동창들은 이구동성으로 합창했다지. “야야, 놀랍지 않다. 너는 일찍부터 늘 시골에 살겠다 하지 않았냐.” 그의 오래 숙성된 꿈을 훼방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아내 역시 순순히 부응했다. 뱀이 바람처럼 스며들어 소파 위에서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는 식의 불상사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기꺼이 동행하겠다고 장단을 맞췄다. 그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귀농을 실행했다.
농경은 인류를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준 혁명적 사건이었다. 대략 1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장수 산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나라에서 농업이란 가장 못 믿을 직업으로 밀려나 있다. 무엇보다 허리 휠 신역이 자심한 반면 타산을 맞추기가 영 힘들다. 사정이 이러했지만 하 씨는 밀어붙였다. 자신의 삶의 방향에 관한 확신과 긍지에 찬 귀농임을 이미 알 만하지만, 나는 바보처럼 물었다. 농사의 그 무엇에 매력을 느꼈는가?
“제가 시골 태생입니다. 어린 눈에도 농사란 힘겨운 일로 보였어요. 그러나 꽃과 나무들 속에서 산다는 게 참 좋았어요. 시골의 목가적인 정경이랄까, 그런 게 천성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어렴풋하게나마 농부의 꿈이 발아했던 거죠. 중학생 때 치른 적성검사에선 농학 적성 비율이 98%로 나왔어요. 아, 농부가 나의 길이구나, 일찌감치 확신을 품기 시작했죠. 시골의 자연 풍경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농업이 내겐 가장 잘 어울린다는, 가장 좋은 삶일 거라는 끌림이 있었던 겁니다.”
“농부의 꿈을 품고 살았지만 정작 사회생활은 서울에서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뒤 의심의 여지없이 농대를 선택했고 일본 유학까지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꿈을 접고 서울의 화학 회사에 취직하는 걸로 사회생활에 뛰어들었어요. 처자를 건사하고, 기반을 다져야 했으니까. 10년만 직장생활을 하고 시골로 내려갈 작정이었지만, 20년이 지나고서야 사직을 하고 귀농할 수 있었어요. 여건이 비로소 무르익었다는 판단으로.”
“처음엔 혼자 산골로 들어갔죠? 선발대로 뛰어들어 일단 물정을 익힌 거예요?”
“귀농교육도 받았고, 귀농박람회도 찾아다녔고, 사전에 서울에서 충분히 준비를 해뒀죠. 휴가를 얻어 전국을 돌며 마땅한 귀농지를 물색하기도 했어요. 지리산 자락 하동군 악양이 맘에 들었으나 땅값이 너무 비싸더라고요. ‘귀농의 압구정동’이라 하더군요. 포기했죠. 이후 문경 산북면의 시골 농토와 빈집을 임대해 농사를 짓는 걸로 귀농생활에 돌입했어요. 식구들은 서울에 두고 혼자서 말이죠.”
“차근차근 신중한 수련 과정을 밟으셨구나.”
“단신으로, 초심자로 농사를 한다는 게 예상보다 버거웠어요. 정말 고생했죠. 1식 1찬으로 끼니를 채우며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살이 쭉쭉 빠지더라고요.(웃음) 그러나 꽤나 시골 물정을 터득할 수 있었죠. 1년쯤의 견습기를 지날 즈음, 마침 이화령 산중에 괜찮은 부지가 나와 매입을 하고 이주, 본격적인 귀농생활로 접어들었어요.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식구를 불러들이고, 집을 짓고, 묵정밭을 갈아 농장을 만들고, 그렇게 나름의 공을 들여 꾸려온 게 현재의 모습입니다.”
그의 ‘오래된 미래’는 시골
하 씨 부부가 이화령 기슭에 자리 잡은 건 2013년의 일. 터는 널따랗다. 5000평의 부지를 사들여 3000평을 오미자 농장으로 개발했다.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첨단 단열공법으로 지은 북유럽식 2층 페시브하우스도 큼직하고 준수하다. 자금력이 수반되지 않고선 엄두를 낼 수 없는 행보렷다.
늘그막까지 우리를 일쑤 끙끙거리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돈 문제다. 헐거운 소유로 오히려 진정한 만족을 누리는 도류(道流)도 없지 않지만, 일테면 시골살이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난적이 물적 토대의 여하라는 문제이기 십상이다. 하 씨는 이 난적의 농간을 면제받은 것으로 보인다. 숙원의 해결 또는 삶의 질적 지향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그의 머리는 민첩하게 움직였으며, 준비는 충실했고, 실천은 적시에 행했다. 광란처럼 기똥차게 치솟은 강남의 아파트를 미련 없이 처분, 그의 ‘오래된 미래’인 시골에 무난한 터전을 장만한 행장은 슬기의 소산일지도. 이제 농사 얘기를 들어볼까. 오미자를 주 작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뭘까?
“‘해당 지역의 특산물을 재배하라!’ 귀농교육을 받을 때 자주 들었던 얘기였어요. 합리적인 권장이죠. 이곳 문경의 특산물은 사과와 오미자입니다. 기술 숙달이 필요한 사과 재배는 초보 농부에겐 너무 힘들다 판단해 오미자를 택했어요.”
“약재를 전문으로 하는 어떤 노인께서 제게 권합디다. 구기자와 오미자를 장복하시오! 그 둘의 약성이 탁월하다는 얘기였죠.”
“이왕 농사를 할 바엔 가족들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작물을 하자, 그렇다면 오미자가 적격이다, 그런 판단도 했습니다. 저나 아내나 서울에선 천식과 알레르기에 시달렸는데 그게 싹 사라졌어요. 맑은 공기, 깨끗한 지하수, 그리고 오미자 덕분이라 봅니다.”
“문경은 오미자 주산지로 널리 알려졌어요. 농가들의 경쟁이 치열하겠죠? 하 선생의 생산물은 어떤 특장이 있죠?”
“무농약 고품질 오미자를 생산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습니다. 제대로 된 청정 농산물을 생산하는 게 농사꾼이 할 일이라는 생각을 고수해왔어요. 무엇보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덜 쓰는 게 요체라 봤고요. 과거의 농사엔 화학비료라는 게 쓰이질 않았어요. 자연과 절기에 순응하는 지혜를 필요로 했을 뿐이죠. 어떤 학자는, 철없는 사람들이 철없는 농산물을 먹어 오히려 심신의 건강을 해친다는 투의 말을 했는데, 경청할 만한 얘기이지 않겠어요?”
“요즘의 농작물은 파종 단계에서부터 농약을 투여하죠. 농약이 아니고서는 생육 자체가 어렵도록 농약 의존도가 심화됐어요. 무농약 농사를 실행할 경우엔 생산량도 매우 낮다죠? 결국은 채산성 악화로 이어지고 말이죠.”
“제가 오미자 농원 3000평을 운영하며 목표치로 잡은 게 연매출 5000만 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턱없이 미달이에요. 농업 소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면 생계조차 위태로웠겠죠. 다행히 모아둔 게 좀 있어서 헤쳐 나가고 있어요. 향후 4년쯤 지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봅니다만, 무농약 농사란 어떻게 보자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에요. 생산량은 관행농에 비해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가격은 20% 정도를 더 받을 수 있을 뿐이니 사실상 암담한 상황이라는 거.(웃음)”
적막도 즐길 만한 대상
세상에 유쾌하기만 한 직업은 없다. 설사 안정적인 소득이 보장돼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직업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나를 쏟아 부을 경우엔 문제가 달라진다. 꿈이 실린 직업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준다. 이상으로 삼은 일에의 몰두가 깊을수록 만족감이 커진다. 하 씨의 경우는? 그는 양양하다. 속사정까지야 깊숙이 들여다볼 길이 없지만 그늘이 없다. 말쑥한 언사로 귀농의 만족감을 표한다. 비록 아직은 형편이 열악하지만 성취감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아내와 함께 농장의 풀을 손수 뽑아야 하는 일부터 농사의 전 과정은 고됩니다. 일머리가 서툴러 고생도 많았고, 극심한 가뭄으로 한 해 농사에 완전히 실패하기도 했고, 애환이 많은 게 농사예요. 하지만 매번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농사더라고요. 풀을 뽑고 난 뒤 깨끗해진 농장을 바라볼 때, 하루하루가 다르게 잘 자라 오르는 오미자 덩굴을 바라볼 때, 붉게 물들어가는 열매를 바라볼 때, 그럴 때마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성취감을 톡톡히 맛봐요.”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주로 머리를 썼어요. 귀농 이후엔 달라졌어요. 몸을 덩달아 최대치로 쓰고 있어요. 그러자 머릿속에 가득했던 욕망이나 욕심이 줄어드는 반면, 몸으로 오감으로 느껴지는 성취감이 자주 찾아오더라고요. 좋다, 참 좋다! 속으로 그렇게 탄성을 내지르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다채로운 자연의 변화와 생동감이 주는 즐거움과 활력은 도시에서는 누릴 수 없는 최상의 가치예요.”
“이곳의 산세는 통쾌하고 수려해요. 하지만 적막강산이에요. 아무리 일에 바쁘다지만, 때로 권태롭진 않을까?”
“삶이란 즐기라고 부여된 것. 일의 노예로 산다면 인생이 지루하겠죠. 낮에는 일하고 해 저무는 하오엔 읍에 나가 테니스를 즐깁니다. 한국화도 배우고, 난타와 색소폰도 교습받아요. 적막? 그 역시 즐길 만한 대상이죠. 언젠가 아내와 둘이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참 좋았어요. 고요한 산중 생활에 깃드는 내적인 평화, 이 역시 귀농을 통해 받은 큰 선물이구나, 아내와 둘이 그런 얘길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하 씨의 농사 실적은 아직 시원치 않다. 애당초 귀농 목적을 돈벌이에 두지도 않았다. 가급적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 싶었을 뿐이며, 용무란 농사 그 자체였으며, 마침내 농부로 변신, 결국은 해묵은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러자 또 하나의 세계가 조용하게 열렸다. 자연과 동행하는 삶의 길이 가지런히 펼쳐지고 있는 것. 이미 유년기에 시골에서 싹 텄을 자연에 관한 감수성이 귀농으로 되살아나 생태계를 존중하고 교감하는 버릇이 몸에 배기 시작한 것.
상쾌한 예화 하나를 볼까? 하 씨 부부는 어느 날 숲에서 꿩 둥지를 발견했다. 둥지 안에는 조르르 알들이 놓여 있었다. 알들의 일부는 깨져 있었다지. 뭔가가 둥지를 건드렸다는 증거였다. 일단 둥지가 노출되면 어미 새는 알들을 더 이상 돌보질 않는다. 그걸 알았던 부부는 읍내로 달려가 사온 부화기에 알들을 고이 길러 날려 보냈다.
“어느 날은 새 한 마리가 유리창에 부딪쳐 나동그라졌어요.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숨을 쉬지 않더라고요. 우리는 서둘러 인공호흡에 나섰어요. 저는 놈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줬고, 아내는 부리를 벌려 빨대를 꽂아 숨을 불어넣었어요. 앗, 그러자 살아나 후루룩 날아가는 게 아니겠어요?”
소소하면서도 짜릿한 감흥을 주는, 동화를 닮은 일화다. 보는 눈이 없더라도 그물에 걸린 어린 고기나 금지 어종을 풀어주는 어부라면, 그는 이미 자유로운 영혼이다. 새 한 마리의 목숨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희귀하게도 잘 사는 사람이다. 나이 들어서도 우리의 이기심이 종종 놓치는 건 공생의 가치이지 않던가.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여자들보다 많다. 전문 메이크업 아티스트도 입을 쫙! 하고 벌렸다. 집 안방을 빼곡하게 차지한 아이들(?)의 정체. 스튜디오 사무실 가장 좋은 곳에 자리 잡은 때깔 요망진 것들! 바로 형형색색 다양한 모습의 화장품이다. 그렇다면 주인은 여자? 아니 남자다. ‘댄서킴’으로 불리던 개그맨 김기수가 웃음보따리가 아닌 화장 도구를 들고 나와 대박을 터트렸다. 들어는 봤는가? 뷰티크리에이터 김기수! 어둠 속에서 ‘예뻐지고 싶다!’를 외치던 남자들이여, 이제 당당히 세상 밖으로 나와 김기수와 함께 꽃단장 한번 제대로 해보자.
화장하는 남자의 편견을 깨다
웃기는 일로 오랫동안 사람들 앞에 섰던 김기수. 그가 2016년 11월 말, 세련된 화장을 하고 나와 자신을 뷰티크리에이터라고 소개했다. 뷰티크리에이터란 소위 화장을 통해 ‘예뻐지는 방법’을 알려주는 사람. 그는 현재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youtube.com)와 포털사이트의 동영상 서비스를 통해 ‘꾸미고 가꿔 돋보이게 하는 방법’을 전파한다. 개인 채널과 SBS 모비딕의 ‘예쁘게 살래? 그냥 살래?’를 진행 중. 1년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1억 뷰 돌파! 전 세계 1억 명 이상이 그의 동영상을 시청했다는 뜻이다. 이 여세를 몰아 작년 말 SBS 연애대상에서 모바일 아이콘 상과 한국분장예술인협회에서 주는 메이크업 어워드를 수상했다. 올 초 화장법 노하우를 담은 책 ‘예쁘게 살래? 그냥 살래?’를 출간했고 3월 말에는 자신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운 화장 제품도 출시한다. 북유럽 국가인 노르웨이의 한 방송에서도 김기수를 찾아왔을 정도이니 인기는 상상 그 이상. 대세 중에서도 대세가 바로 맨즈(남자) 뷰티크리에이터 김기수다.
불모지를 앞서 걷는 펭귄의 길을 택하다
개그맨이 아닌 뷰티크리에이터로 전향을 하고 영상을 만들어 인터넷에 올리는 그 과정이 어찌 보면 홧김(?)으로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다. 김기수는 무대 화장을 한 사진을 인터넷에 올렸다가 악성댓글에 시달렸다고. 특히 어머니를 욕하는 것은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중국에서 클럽 DJ로 활동하던 시절이었어요. 제가 트렌스젠더가 됐다는 소문이 빠르게 퍼졌어요. 트랜스젠더가 됐네, 돌려 깎기를 했네, 성괴(성형괴물)네. 일주일 동안 실시간 검색어 1위에서 제 이름이 내려오지 않는 거예요.”
김기수의 성 정체성에 대한 논란은 늘 있어왔지만 자신의 발언으로 성 소수자들이 눈총받을까 말을 아꼈단다.
“나는 그저 내 화장 실력으로 얼굴을 가꾸어서 무대에 올라간 건데 왜 중국 성괴 같다고 그러지? 제가 당시 칩거하고 힘들어하니까 지인과 팬들이 ‘오빠 화장하는 거 영상을 인터넷에 올려보세요’라고 하는 거예요. 저도 유튜버(동영상 사이트에 영상을 올리는 사람) 남성분들의 젠더리스 메이크업(성별을 구분하지 않는 화장)을 많이 눈여겨봤었어요. 그럼 나도 저렇게 해볼까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컴퓨터를 잘 다루지도 못했지만 제대로 해볼 생각에 영상 편집을 배워나갔다.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시간 자면서 영상을 올렸다. 첫 영상을 올리고 난 뒤 일주일 동안 댓글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이 ‘저 정도의 화장 실력이라면 자랑할 만하네?’ 했고, 저를 싫어하던 사람들이 팬으로 돌아서는 기이한 현상이 일어났어요.”
김기수는 자신이 뷰티 채널을 시작하고 1년 사이 사회적으로 맨즈 뷰티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실제로 맨즈 뷰티 산업이 크게 성장하고 있고 화섹남(화장하는 섹시한 남자), 잘생쁨(잘생기고 예쁨)이라는 신조어도 김기수의 등장과 함께 생겨났다. 남성이 당당하게 멋져지고 예뻐지는 시대를 김기수가 열었다고 해도 실로 과언은 아니다. 그는 대열 앞에 서서 걸어가는 퍼스트 펭귄(First penguin)이 바로 자신이라 생각한다.
“누군가가 저에게 화장을 하지 말라 하면 지금 제 일을 그만두라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그리고 남자가 이렇게 화장을 하고 있는데 그 정도의 루머가 또 돌지 않는다면 나는 이일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에요. 관심이 있어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구나. 물론 처음에는 분했어요. 활동을 접을 생각도 했고요. 무엇보다 지금은 저에게 많은 질문을 하십니다. 남자분들도 용기를 내서 화장법에 대해 묻고요. 그런 분들을 도와드리는 것이 제 일이죠.”
분장실 옆 아역 탤런트, 화장에 눈뜨다
그렇다면 여기서 질문! 언제부터 화장에 관심이 있었던 것일까? 뜬금없이 왜? 남자 개그맨이? 그리고 근육 팍팍 보이면서 클럽 DJ를 하는 남자가 언제부터 화장에 심취했을까?
“중학교 때부터 아역 탤런트를 했는데 그때 화장에 관심이 생겼어요. 야외 촬영 현장에서 평범한 중년의 엑스트라 두 분이 트레일러에 마련된 간이 분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아름다운 사람이 돼서 나오는 거예요. 너무 놀라웠어요. 쇼킹했어요. 그곳이 마치 마법 상자처럼 보였어요. 불꽃이 막 파파팍! 튀는 느낌?(웃음)”
촬영을 하지 않는 시간에는 계속 분장실을 드나들었다.
“그랬더니 분장사 누나가 저에게 선크림하고 크림을 주더라고요. 써보라면서요. 다음 날 그걸 바르고 현장에 나갔는데 감독님이 ‘야, 너 왜 이렇게 예뻐졌냐?’ 하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대사 한마디 더 주시더라고요. 자신감이 붙었다고나 할까요? 그다음부터 선크림에 맞는 수분크림과 립스틱을 찾고 또 뭔가 발견하고. 코덕(화장품과 덕후의 합성어)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습니다.”
어린아이였음에도 주위의 시선 때문에 다락방에 숨어 화장을 했다. 그때만 해도 남자와 여자의 역할이 극명했다.
“지금도 남성이 화장하는 걸 이상하게 보는 면이 있지만 그때는 더 심했죠. 남자는 화장을 하면 안 된다 뭐 이런 거요. 저 어렸을 때는 크림 바르고 밖에 나가는 남자가 몇 안 됐어요. 저 혼자 그냥 다락방에서 뭐든 발라보고, 어울리는 색을 찾아보면서 저만의 재미에 푹 빠져버렸어요. 어떻게 그렇게 숨어서 했는지 나도 참 기특해.(웃음) 그렇게 30년 동안을 해왔고, 지금 빛을 발하고 있는 거죠.”
남자들이여! 당당히 화장대 앞에 서라!
김기수가 갑자기 목소리를 죽이며 기자에게 물었다.
“요즘 시니어 남성분들 등산 배낭에 뭐가 들어 있는 줄 아세요?”
바로 BB크림이랑 틴트란다. 모두가 그렇다는 뜻은 아니고 꽤 된다는 말. 그들은 곧바로 목적지로 직행하는 것이 아니다. 공중화장실에 들러 BB크림과 틴트를 바른 뒤 산행을 시작한다. 그것을 어떻게 알았냐 했더니 뷰티크리에이터로 일하다 보니 그런 얘기들이 너무나 잘 들려온다 했다. 김기수의 채널 구독자 중 BB크림 바르는 방법을 알려달라는 50대 중반의 남성도 있었다. 올리브영 맨즈뷰티 코너를 서성이는 시니어 남성에게 제품을 권해드리기도 했다.
“사실 남자들이 그루밍하는 것에 편견이 있으면서도 관심들은 다 가지고 계세요. 제가 예약하려던 눈썹 문신 전문점은 3개월 이후나 돼야 예약이 가능하다고 했어요. 80%가 남성 손님이고요. 성형외과 전문의와도 얘기한 적이 있는데 실 리프팅 하러 오시는 중년 남성들이 꽤 많다고 해요. 그렇게들 몰래몰래 자기 관리하면서 화장을 하는데 저는 왜 안 되는 거죠? 관심은 있으면서 대놓고 표현하지 못하는 거뿐이잖아요.”
요즘 김기수의 개인 채널에는 남성들을 위한 화장법을 모아 따로 분류해놓았다.
“3년 동안 취직 안 됐던 남성분이 제가 알려드린 화장을 한 뒤 면접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전해왔어요. 얼마나 기가 막힌 일이에요. 붙었다고 하잖아요. 요즘은 자기관리 잘하는 남자가 칭송받는 시대예요. 깨끗한 인상 주는 게 나쁜 게 아니잖아요.”
제발 좀 꾸미고 멋져지고 싶은 남자들이 숨지 말고 나와서 당당해졌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필자의 집안은 3대가 개띠다. 아버지가 34년 개띠, 필자가 58년 개띠, 둘째아들이 94년 개띠다. 말티즈도 한 마리 키우고 있어 집안이 온통 개판이라고 가끔 농담을 한다. 34년 개띠이신 아버지 세대는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겪으며 생사의 갈림길을 수없이 지나온 분들이다. 비교 대상이 되지 못하지만 58년 개띠도 나름 파란만장한 시대를 살았다. 필자의 초등학교 4학년 성적표를 보면 104번이라는 숫자가 나온다. 한 반이 104명 정도는 되었다는 의미다. 실제로 학생이 너무 많아 3부제 수업을 했다. 콩나물시루 같은 교실이라는 표현은 아마 이때 만들어졌지 싶다.
필자도 그랬지만 그 시절에는 판자촌에 사는 사람이 많았다. 다들 가난했기에 추워도 외투 하나 없이 교복만 입고 다녔다. 겨울엔 참 추웠다. 특히 겨울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 초봄 추위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맹렬했다.
58년 개띠는 고등학교 평준화 1세대다. 그래서 ‘뺑뺑이’ 세대라 표현하기도 한다. 왜 뺑뺑이가 시작되었는지는 만천하가 다 알고 있으니 따로 설명하지 않겠다. 문제는 뺑뺑이 추첨이 가져온 부작용이 너무 컸다는 사실이다. 단적인 예로 역사와 전통이 있는 명문 고등학교에서는 평준화 기수를 후배로 취급하지 않는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평준화 기수들은 선배를 선배로 대우하지 않는다. 필자도 명문 고등학교에 배정을 받았지만 좋아하기엔 교사들과 선배들로부터 마음의 상처를 너무 많이 받았다. 올해가 고등학교 졸업 40주년이 되는 해다. 아직도 동창회에 나오지 않는 친구가 많다. 그들에게 고등학교 시절이 여전히 악몽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공대 건축과를 졸업하고 건축설계사무소에서 몇 년 동안 도제생활을 했다. 담배 피우고 술 몇 번 먹을 정도의 돈을 월급으로 받았다.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하고 대책 없이 사직서를 냈다. 외부와 연락도 끊고 공부를 해서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해 30대 초반에 건축사사무소를 차렸다. 온 나라가 건설 현장 같았던 시절이다. 일도 많았고 그만큼 직원도 늘었다. 결혼하고 전용면적 7평짜리 벌집 아파트에서 전세로 시작했는데 집도 분양받았다. 골프도 쳤고 해외여행도 다녔다. 그러나 언제까지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았던 화려한 30대는 40세로 막 접어드는 해에 터진 IMF와 함께 종말을 고했다. 공황장애와 폐쇄공포, 감각마비가 겹치면서 정신과 몸이 무너졌다. 암흑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데 10년이나 걸렸다.
몇 년 전 필자의 생일에 일어난 일이다. 그날따라 급하게 처리할 일이 생겨 야근을 하게 되었다. 야근하고 간다고 아내에게 카톡을 보냈다. 덤덤한 답변이 돌아왔다. ‘혹시 아내가 내 생일을 잊어버린 건가’ 하고 의심을 하다가 속으로 ‘내가 속을 줄 알고’ 하면서 속아 넘어가는 척했다. 그동안 무슨 기념일이 되면 필자는 깜짝 이벤트를 자주 했다. 전혀 모르는 척하고 있다가 기념일 아침에 꽃을 준비한다든지 돈 봉투나 선물을 내놓는 식이다. 이런 이벤트에 익숙해진 아내는 기념일이 가까워져도 특별히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그날 야근을 마치고 집 앞에 도착하니 밤 11시가 넘어 있었다. 늦었지만 생일 음식을 준비해뒀을 아내와 한잔하려고 가게에서 맥주 몇 병을 사가지고 들어갔다. 현관을 들어설 때 분위기는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개는 반갑게 짖으며 달려 나왔고, 아내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큰아들은 컴퓨터에 앉아 있었다.
검은 비닐봉지에 든 맥주를 보면서 야근하고 오면서 무슨 맥주냐고 아내가 한마디했다. 식탁을 힐끔 보니 텅 비어 있었다. 설마 하면서도 그때까지는 깜짝 이벤트를 하려고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고 화장실을 다녀왔는데도 전혀 상황 변화가 없었다. 시간은 벌써 11시 반을 넘어가고 있었다. 그제야 깜짝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니고 상황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아내와 아들놈을 식탁으로 불렀다. 일단 맥주를 한 잔씩 따르고 말했다. “앞으로 30분만 지나면 여기 있는 두 사람이 오랫동안 심각한 고통에 시달릴 것 같아서 한마디하겠다…. 오늘 내 생일이다!” 사색이 된 두 사람이 벌떡 일어나 호들갑을 떨어 결과적으로 30분 안에 맥주 안주가 준비되긴 했지만 속으로는 좀 섭섭했다. 다행히 다음 날 아침, 전방에서 군 복무하는 아들에게서 온 전화가 위로가 되긴 했다.
“아빠 생신을 엄마도 형도 다 잊어버렸다면서요….”
얼마 전에 ‘어디서 살 것인가?’라는 주제로 시니어에게 강의를 하던 중 환갑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수강생들은 대부분 50대 중반에서 60대 초반이었다. 그날 필자는 감정이 약간 고조되어 있었다. 수강생들에게 이야기한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요즘엔 남 눈치 보느라 환갑잔치를 안 한다고 하는데 왜 남 눈치를 봐야 하는가. 우리 베이비부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어릴 때 판자촌에서 살며 춥고 배고팠던 기억이 다들 있지 않은가. 뒤는 돌아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세월이었다. 잠시 한숨 돌릴 만하던 시기에 IMF로 다시 고꾸라졌다. 그리고 또 일어서서 여기까지 정신없이 달려왔다. 어느 순간 거울에 비친 나를 보니 머리는 허옇고 주름도 많더라. 무엇을 이루려고, 무엇 때문에 이리도 바쁘게 산 것일까 생각하면 허무할 때도 있다. 그러니 우리 환갑상을 꼭 받자. 거창하게 받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가족과 아주 가까운 친구들만이라도 모인 자리에서 술 한잔하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한 위로의 말을 듣고 싶다….”
대충 이런 이야기를 하는데 앞쪽에 앉은 분이 손수건을 꺼내서 눈물을 닦았다. 필자도 감정이 북받쳐 더 이상 말이 이어지지 않았다.
지난해 5월, 퇴직하고 반년 동안 현역일 때보다 더 바쁘게 살았다. 그동안 만나지 못했던 지인들을 만나고 여행도 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찍으러 다녔다. 돌이켜보니 시간이 참 빠르다. 허둥지둥하면서 살았다. 옆을 볼 겨를도 없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이제 좀 느리게 걸으면서 주변을 돌아보고 싶다. 해가 바뀌어 필자도 이제 환갑이다. 주변에서는 크루즈 여행을 간다, 북유럽을 간다, 벌써부터 환갑 계획들을 자랑한다. 필자의 계획은 명확하다. 10년 전, 그러니까 오십이 되던 해부터 매년 한 가지씩 목표를 정해 10년 계획을 실행해왔다. 그동안 이룬 성과로 상담 관련 자격증 네 개를 취득했고 공저로 책을 네 권 냈다. 기타 배우기, 목공예 배우기, 명강사 되기, 글쓰기, 그림 다시 그리기, 새로운 관계 맺기 등의 목표를 이루었다. 수필가로 등단도 했다. 환갑인 올해는 다시 일을 시작하고 또 다른 10년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원년이 될 것이다. 지난 10년간 이룬 성과를 주변과 나누고 공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싶다. 물론 환갑상은 받고 나서.
자작나무는 예로부터 쓸모가 많은 나무 중 하나로 꼽혀왔다. 신랑 신부의 두근거리는 첫날밤을 밝혔던 화촉(樺燭)이 자작나무로 만들어졌고, 천마총의 천마도도 자작나무 수피 위에 그려졌다. 그래도 왜 인기 있는지 묻는다면 수많은 쓸모보다 자작나무의 매력은 역시 외형이 아닐까. 흰옷을 차려입고 굽힘 없이 쭉 뻗은 모습은 마치 고고한 선비를 연상시킨다. 흰 눈이라도 자작나무 숲에 내리면 몽환적인 풍경이 압도적이다. 자작나무 숲 여행은 겨울에 하라고 추천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작나무는 참나무목의 큰키나무로 다 자라면 20m가 넘는 높이를 자랑한다. 시베리아나 북유럽, 캐나다 같은 추운 지방에서 잘 자라는 나무이다 보니 국내에선 강원도에서도 평균기온이 낮은 일부 지역에 생식한다.
국내 최대의 자작나무 숲으로 꼽히는 원대리 자작나무 숲은 인공적으로 만든 숲이다. 1974년부터 1995년까지 자작나무 69만 그루가 심어졌다. 이 중 일부 지역만 개방되어 관광객들을 위한 공간으로 운영되고 있다.
새 고속도로로 관광객 늘어
강원 인제군 인제읍 원남로에 위치한 자작나무 숲은 최근 서울서 한층 가까워졌다. 얼마 전 개통된 서울양양고속도로가 거리를 줄여주는 데 한몫했기 때문이다. 서울 잠실쯤에서 출발하면 도착하는 데 두 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동홍천 IC에서 빠져나와 44번 국도를 타고 달리다 인제 38대교 앞 남전교차로에서 우회전하면 자작나무 숲 입구가 보인다.
실제로 자작나무 숲을 찾는 관광객은 고속도로 개통 이후 부쩍 늘었다고 한다. 서울에서 귀촌했다는 인근 가게 주인장은 “주말이면 수천 명이 찾아요. 관광객이 말도 못하게 많아요. 주변 주차장이 꽉 차서 모자랄 정도니까요”라고 말한다.
자작나무 숲이 유명세를 타는 데에는 방송도 한몫했다. KBS 2TV ‘1박2일’에 소개돼 시청자의 눈을 사로잡았고, SBS 드라마 ‘용팔이’의 촬영지로도 알려졌다.
방문을 위한 채비는 필수
자작나무 숲으로 향하는 여정은 ‘원대리 산림감시초소’에서 시작된다. 방문자 명부에 이름을 적고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임도를 따라 걸으면 된다. 초소를 지나 마침 내려오는 관광객 일행과 마주쳐 숲까지 얼마나 걸으면 되는지 묻자 대뜸 아래쪽을 훑어본다.
“그 등산화로는 무리예요. 저 밑에서 아이젠을 대여해주니까 그걸 차고 가세요. 저도 빌려왔어요.”
겨울철 원대리 자작나무 숲으로 가는 임도에선 아이젠이 필수다. 눈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빙판을 만들기 때문이다. 등산로 수준은 아니어도 경사가 꽤 심하다. 가능하다면 낙상 예방을 위해 등산스틱을 준비하는 것도 좋다.
인대리 자작나무 숲까지의 거리는 초소에서 약 3.2km 정도. 산림자원을 위해 개발된 임도라 구불구불한 모습이지만, 2012년 개장 이후 관광객이 늘면서 정비는 잘되어 있다. 도착지까지 두 번의 ‘깔딱고개’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 알아두면 된다. 입구에서 1.5km 지점까지 오르막이 이어져 방문자들의 숨이 거칠어진다. 두 번째 오르막은 도착 직전에 있다.
늘 손꼽히는 아름다운 숲
차가운 공기를 잔뜩 마시면서 걷다 보면 어느 새 자작나무 숲에 도착한다. 커다란 표지판이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려준다.
인공적으로 만든 숲이라서 그런지 다른 수종은 섞여 있지 않다. 자작나무로만 가득 찬 새하얀 숲을 볼 수 있다. 쉽게 상상하지 못할 풍광이다. 만약 주변에 다른 관광객이 없다면 쉽사리 걸음을 내딛지 못할 만큼 나무 사이를 적막이 메우고 있다.
숲의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은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나보다. 이 숲은 지난해 11월 산림청이 주최한 아름다움 숲 전국대회에서 우수상인 공존상을 받았다. 또 8월에는 국유림 명품숲으로도 뽑혔다.
이곳 숲은 4개 산책로로 구성되어 있다.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 자작나무 코스는 둘러보는 데만 50분 정도가 소요된다. 치유 코스는 1시간 반, 탐험 코스는 40분 정도 걸린다. 힐링 코스는 최장거리인 2.4km. 두 시간을 꼬박 걸어야 한다.
흙빛과 갈색이 어우러진 겨울 숲에 익숙한 우리에게 온통 흰색으로 장식된 자작나무 숲은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겨울은 집 앞도 나서기 어려운 계절이지만, 용기를 조금만 내어 이 특별한 자작나무 숲을 방문해보는 것은 어떨까.
불교에서 우주의 4대 구성요소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라고 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는 우주의 구성 원소를 물, 불, 공기, 흙으로 봤다. 인간이 생존하기 위해, 건강하기 위해 필요한 것 역시 이 4가지라 할 수 있다. 이번 달에는 불, 그중에서도 햇볕에 대해 얘기해보겠다.
태양은 밤낮과 사계절을 주관한다. 해가 뜨면 따뜻해지면서 밝아지고, 해가 지면 서늘해지면서 어두워진다. 태양의 고도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순환이 이루어진다. 하루와 1년의 주재자는 태양이다. 지구상의 생물은 이 리듬에 맞춰 잠을 자고 활동하는데, 이 리듬이 깨지면 병이 생긴다. 한의학의 원전인 에서는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밤낮의 리듬에 맞춰 사는 것이 건강과 치료에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하면서 태양의 리듬을 따르는 자는 흥하고, 태양의 흐름을 거스르는 자는 망한다고 했다.
옛날에는 태양의 흐름에 맞춰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 해가 떠야 일어나 활동할 수 있었으며, 해가 지면 잠들어야 했다. 기름을 써서 불을 밝히는 것은 비싸서 하기 힘들었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태양의 흐름에 맞춰 살기 힘든 시대다. 인공조명이 있어 밤새워 활동할 수 있고, 그러기를 강요당하기도 한다. 실내에 있으면 밖이 어두운지 밝은지 비가 오는지 바람이 부는지 지금이 몇 시쯤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우리는 반세기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자연에서 완전히 멀어져버렸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다. 모든 자연이 태양의 흐름에 맞춰 살아가도록 설정되어 있듯, 인간도 태양의 흐름에 맞춰야 건강할 수 있다. 교대근무, 야간근무, 태양이 들지 않는 지하근무를 오래하면 몸이 나빠진다. 몇백만 년에 걸쳐 누적된 유전자에는 이런 상황에 대한 정보가 없기 때문이다.
땅의 물은 햇볕을 받아 수증기로 변해 하늘로 올라갔다가 다시 비가 되어 땅으로 떨어진다. 이러한 물-수증기-비의 순환은 지표면에서 생명체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만든다. 식물은 공기 중의 이산화탄소와 물을 원료로 하고, 햇볕을 매개체로 해서 광합성을 한다. 동물은 이런 식물을 먹고 산다. 그리고 척추동물들은 햇볕을 받아 털이나 피부에서 비타민D를 합성한다. 비타민D는 뼈를 튼튼하게 하기 때문에 척추동물은 반드시 햇볕을 받아야 한다. 동물인 인간도 일종의 광합성을 해야 한다. 야행성 동물들은 햇볕을 쬐지 못하기 때문에, 비타민D를 합성한 다른 동물들을 잡아먹으며 보충한다.
비타민D가 부족하면 뼈가 약해지고, 불면증, 우울증이 생긴다. 그래서 태양의 고도가 낮은 북유럽에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일광욕을 한다. 아토피피부염이나 건선 또한 비타민D 부족과 관련이 많다. 땀이 쉽게 많이 나는 것 또한 비타민D 부족과 관련이 있다.
태양광선은 적외선, 가시광선, 자외선으로 나눌 수 있다. 적외선은 사람의 몸을 데우고, 식물은 가시광선으로 광합성을 한다. 땅에서 사람이 받는 자외선은 UVA, UVB로 나눌 수 있는데, UVA는 유리창을 통과함은 물론 피부 깊숙이 침투해 주름과 기미, 주근깨를 만들면서 피부를 노화시킨다. UVB는 유리창을 통과하지 못하며 각종 염증과 피부암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바닷가나 높은 산에 갔을 때 피부가 벌겋게 익는 것은 UVB 때문이다. 그렇다면 자외선은 안 좋기만 한 것일까? 자연은 지구라는 환경에서 최적화되도록 진화되었기에 자외선을 포함한 햇볕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요소다. 물론 지나치면 피부암, 기미, 주근깨가 생기기도 한다. 뭐든 적당해야 한다.
현대인 특히 한국인은 비타민D 결핍이 심하다. 햇볕을 쬘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학생, 노동자가 매일 햇볕을 쬐는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것도 창문을 통하지 않고 직접 쬐는 시간 말이다. 비타민D가 부족하면 뼈가 약해지고 면역력이 떨어지며 수면의 질이 떨어진다. 지금은 자외선 과다를 걱정하면서 자외선 차단제를 바를 때가 아니라, 자외선 부족을 걱정해야 할 때다. 주 3회 오전 10시~오후 3시 사이에 20분 정도 햇볕을 쬐는 것이 좋다. 그런데 도시는 미세먼지, 공해, 스모그 등으로 UVB가 지표면에 잘 도달하지 않는다. 바닷가나 고산, 물가가 UVB를 받기에 더 적합하다. 그리고 겨울철에는 UVB가 약하기 때문에 봄, 여름, 가을에 충분히 햇볕을 쬐는 것이 좋다.
낮에 햇볕을 잘 받으면 밤에 심해지는 병증이 호전된다. 밤에 잠 못 이루는 불면증, 밤에 얼굴로 열이 후끈 올라오는 갱년기 조열증, 밤에 심해지는 천식, 밤에 심해지는 두드러기나 아토피피부염 등이 심한 사람은 낮에 햇볕을 받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반대로 낮에 기운이 없고 심해지는 증상은 밤에 잠을 잘 자야 한다.
첫째, 햇볕은 아토피피부염, 건선 등 피부병과 과민성장증후군, 대장암 등 대장 병증, 알레르기비염, 천식 등 폐 병증을 잘 치료해준다. 한의학적으로 폐, 피부, 대장은 같은 그룹이다. 척추동물이 햇볕을 받아 털과 피부에서 비타민D를 합성하는 것은 햇볕이 폐, 피부, 대장을 활성화시켜준다는 의미다. UVB만 효과가 있는 게 아니라 햇볕 전체의 효과다. 요즘은 비타민D를 건강기능식품으로 많이 복용하고 있는데, 피부를 통한 합성보다는 효능이 떨어지며 폐, 피부, 대장을 활성화하는 힘도 약하다.
둘째, 뼈가 약해지는 병증, 갱년기, 성기능쇠약, 자궁암, 전립선암, 골다공증, 성장에 좋다. 한의학적으로 뼈와 생식기는 같은 그룹이다. 인체를 깊이에 따라 나누면 뼈가 가장 깊은 부위이고 그다음으로는 살, 피부, 털의 순서다. 건강할 때는 뼈가 단단하고 농축되어 있지만 병들거나 노화되면 뼈의 골수가 몸 밖으로 새어 나온다. 단백뇨, 당뇨, 땀이 쉽게 나는 증상, 탈모 등이 그 사례다. 햇볕은 뼈를 단단하게 해서 몸 밖으로 새어나오는 것을 막아준다. 단전 회복의 의미도 있다.
셋째, 심장에 좋다. 혈압을 낮춰주고 혈전이 생기는 것을 억제해준다. 심장병과 뇌졸중을 예방해주는 효과도 있다. 우리 몸에서 열을 만들어내는 근원은 심장이다. 즉 우리 몸의 태양은 심장이며, 그 근원은 하늘의 태양이다.
넷째, 우울해서 생긴 병증을 잘 치료해준다. 우울증, 유방암, 불면증 등에 좋다. 습기가 적은 화창한 날에는 우울증이 호전되는데 햇볕의 역할 때문이다. 한의학적으로 표현하면 기가 울체된 것을 풀어준다.
다섯째, 몸의 면역력을 높여주고 해독 효능도 있다. 햇볕은 황달 등 간에 무리가 갔을 때 해독해주는 힘이 있다.
최철한(崔哲漢)
- 본디올대치한의원 원장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졸업. 경희대학교 한의과대학 본초학교실 박사. 생태약초학교 ‘풀과나무’ 교장. 본디올한의원네트워크 약무이사. 저서:
올해부터 버킷리스트에 올라 있던 여행을 위하여 일찍부터 점찍어 두었던 나라가 발트 3국이었다. 발트 3국은 미지의 세계였다. 서 유럽은 재직 시 독일 주재원을 인연으로 직무 상 여러 번 갔었지만, 나머지 유럽은 직무상 다녀 올 일이 없었다. 발트 3국은 지도를 보니 유럽에서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가 있는 북유럽도 아니고 동유럽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동북유럽이라 해야 한다. 북쪽에는 핀란드, 스웨덴이 있고, 동쪽에는 러시아가 있고 남쪽으로 폴란드가 둘러싸고 있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면적도 작아서 생소한 나라들이었다. 비슷한 면적 세 나라 합해서 한 반도의 3분의 2 정도이고 인구도 각국이 각각 리투아니아 300만 명, 라트비아 200만 명, 에스토니아 125만 명으로 세 나라 합계가 625만 명 정도이다.
가이드에게 한 첫 질문이 “발트 3국의 특징은 무엇입니까?”였다. 대답은 “별 다른 특징은 없고 다른 유럽 국가들을 다 보고 나서 마지막으로 들르는 나라가 발트 3국입니다”였다. 그만큼 특별히 볼 것도 없고 빼놓자니 아까운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로마를 먼저 보면, 다른 나라는 시시하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랬다. 그래도 유럽은 유럽이다. 오랜 역사가 있고 석조문화 덕분에 고성, 대성당 같은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종교의 힘 덕분에 불가사의 같은 대성당 등이 지어졌다.
지정학적으로 강국의 틈새에 있으면 시련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다. 잘 알려지지 않았고 소국이라면 우리나라의 운명과 비슷할 거라는 짐작은 했었다. 당연히 이웃나라인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 좀 떨어져 있는 독일에게도 침략 당해 속국이 되었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구가 적으면 국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1차 대전 후 잠시 독립을 했으나 1939년 2차 대전을 앞두고 독일의 히틀러와 소련의 스탈린이 밀약을 하여 발트 3국을 제멋대로 소련 땅으로 하기로 한 것이다. 히틀러가 서유럽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동쪽의 소련이 움직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발트 3국이 독립을 쟁취한 것은 1991년이므로 이제 겨우 26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독립을 위하여 벌인 인간 띠 행사가 1989년 8월23일 독소조약 50주년에 맞춰 600km, 200만 명이 참가했다. 3국의 수도를 인간 띠로 남북으로 잇는 거대한 행사였다. 인구가 적으니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숲과 도로에 사람이 이어서기 위해 인구의 1/3이 나서는 대단한 노력을 한 것이다. 이 행사는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소련 강경파가 제압하려 했으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의회와 방송국들을 시민들이 막아서는 방법으로 자유를 쟁취했다. 소련은 내부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외친 고르바초프를 연금 시킨 3일천하 쿠데타가 있었고 이후 소련 연방 공화국들은 속속 독립을 선언했다.
발트 3국은 각각 각국의 특징이 있다. 우리가 우리를 식민지화 했던 일본을 미워하듯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했으니 소련에게 적대감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직 소련의 유물과 잔재가 존재한다. 에스토니아는 국민의 20%가 러시아계이며 러시아 접경에 몰려 살고 있다. 소련으로부터 독립은 했으나 경제적으로는 자립해야 하니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렇다 할 제조업은 없고 50%가 서비스업, 20%가 농업인데 농업조차 기후와 토양이 맞지 않는다. 그나마 일인당 국민소득은 1만5천불 정도 되니 어느 정도 살만한 나라들이다.
기후는 서울보다 약간 서늘하다. 6월인데도 아침 온도는 10도 이하이고 낮 기온도 22도 정도였다. 서울 날씨와 여러 번 유럽에 기본 경험만 믿고 반팔만 갖고 가기 쉬운데 필히 긴팔 옷을 준비해야 한다.
음식은 서유럽과 비슷하다. 입맛에도 잘 맞는 편이지만, 매일 하루 세 끼를 그렇게 먹다 보니 맵고 짠 한식이 생각난다.
세계 일주 여행을 위해 긴 고민 끝에 32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명예 퇴직한 아버지 정준일(59)씨. 포병장교 전역 3개월 전, 갑작스런 아버지의 세계 일주 제안에 진행 중이던 취업 전형까지 중단하게 된 아들 정재인(29)씨. 가장으로서, 취업준비생으로서 장기 여행은 많은 것을 내려놓는 담대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래서 조금은 두렵기도 했다. 무언가를 잃지는 않을까? 후회는 없을까? 걱정 반, 설렘 반으로 떠난 200일의 세계 일주에서 돌아와 부자는 알게 됐다. 그때의 근심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는 것을.
△ 아버지 정준일
32년간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문득,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해본 적이 없다는 회의감에 평소 꿈꿔왔던 세계 일주를 떠나기로 결심한다. 현재는 기타 연주, 맛집 탐방 등 건강한 노후생활을 즐기고 있다.
△ 아들 정재인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꼰대’ 아버지의 제안으로 얼떨결에 세계 일주를 시작한다. 지금은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며 언젠가 본인도 미래의 아들과 세계 일주를 하겠다는 야무진 꿈을 기획 중이다.
◇ 정준일·정재인, 우리 부자의 여행은?
준비 기간 2개월(이후에는 여행지에서 그때그때 준비)
여행 루트 서유럽-터키-동유럽-북유럽-북/중/남미-오세아니아-동남아시아-인도-아프리카
여행 콘셉트 친해지길 바라!
역할 분담 아버지) 경비 총무와 숙소정리, 아들) 아버지의 보좌관이자 안전책임자
여행 경비 약 6000만원 (아버지 퇴직금 + 아들 장교복무 봉급)
다음 여행 내년에는 아버지, 어머니, 아들, 며느리가 함께하는 이집트 여행 계획
Intro>>우리 과연 친해질 수 있을까?
Q. 세계 일주 여행 파트너로 아내나 친구가 아닌 ‘아들’을 꼽은 이유
아버지: 친구나 아내, 딸과 여행을 가는 것도 좋겠지만 장기간 여행할 수 있는 체력과 외국어 실력을 겸비한 아들과 함께하는 게 가장 마음 편하리라 생각했죠. 주변 사람들을 보면 오랜 시간 함께 여행하면서 생긴 마찰로 평생 보지 않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잖아요. 아들과 함께라면 혹여나 그런 서운한 감정이 생기더라도 잘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사실 여행을 가기 전 아내는 명예 퇴직을 반대했지만, 결정을 내린 후에는 고생했다면서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Q.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이유
아들: 처음 아버지의 제안을 받고 깊은 고민 끝에 거절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얼마 후, 가장 친한 후배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와 소주 한잔을 하게 됐죠. 후배는 아버지에게 해드리지 못한 것이 많다며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며, 문득 ‘만약 아버지가 돌아가신다면?’이라는 생각을 하니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다음 날 바로 아버지께 함께하겠다고 말씀드렸죠.
Q. 여행을 앞두고 기대했던 점과 우려스러웠던 점
아버지: 여행 전, 그동안 영상과 책으로만 접했던 전 세계의 자연환경과 건축물,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죠. 막상 오랜 시간 한국을 떠난다 생각하니 건강이 우려스럽고, 음식이 입에 안 맞아 쫄쫄 굶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앞서더라고요. 여행 중 이탈리아에서 더위를 먹어 앓아눕고, 페루 쿠스코에서 고산병으로 고생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다행히 크게 몸이 아프거나 사고가 일어나지는 않았어요. 처음엔 현지 음식만 먹겠다 다짐했지만, 한국 음식을 먹지 않으니 도저히 힘이 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세계 각지에 있는 한국 음식점을 애용했죠.
아들: 모두가 한 번쯤은 꿈꾸는 세계 일주를 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들떴지만, 아버지와 여행을 해야 한다는 부담과 어색함을 어떻게 극복할지 고민이 많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여행 초기에는 아버지와 특별히 할 말도 없었고, 아버지의 잔소리에 괜히 왔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러다 터키 파묵칼레의 노천 온천탕에서 아버지와 오랜만에 목욕을 하며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고 마음을 열게 됐습니다.
Travelling>> 어리기만 했던 아들, 어느새 든든한 버팀목이 되다
Q. ‘역시 아들이랑 오길 정말 잘했다!’라고 느낀 순간
아버지: 여행 중 만난 사람들(외국인 포함) 대부분이 아들과 세계 일주를 하는 저를 부러워했습니다. 각종 예약, 교통 티켓, 경로를 알아서 잘 짜는 아들이 참 든든했어요. 그럴 때마다 ‘아들이랑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죠.
Q. 중년 여행복의 상징인 아웃도어가 아닌, 아들이 코디해준 옷을 입고 다녔다는데
아버지: 아들 덕분에 한국에서는 상상도 못할 옷들을 마음껏 입고 다녔어요. 처음에는 그런 옷들이 너무나 어색하고 남사스러웠는데, 이왕 여행 와서 많은 것을 보고 배워보기로 한 이상 나부터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다른 사람들 눈치 보지 않고 아들이 권하는 옷들을 입어봤어요. 사람들이 멋지다며 엄지를 치켜 올려줬고, 사진으로 봐도 괜찮은 제 모습을 보며 점점 자신감이 생기더라고요. 지금도 그때의 패션만큼은 아니지만 종종 가벼운 여행을 할 때면 헌팅캡을 쓰곤 합니다.
Q. 아버지와 아들의 여행이기 때문에 벌어진 문제들
아버지: 내게 아들은 늘 어리게만 보여서 이것저것 관심을 보인 것인데 오히려 그것을 잔소리로 여겼는지 참견하지 말라 해서 좀 서운했습니다. 결국 아들을 자기주도적인 결정 아래 책임을 질 줄 아는 어엿한 성인으로 인정하고 모든 걸 믿고 맡기기로 했죠.
아들: 예전의 권위적인 모습 속 말이 통하지 않는 아버지와의 여행이었기 때문에 의사소통 측면에서 문제들이 많았어요. 원체 깔끔한 성격의 아버지가 숙소에 들어올 때마다 어엿한 성인인 제게 잔소리(빨래, 양치질, 정리정돈 등)를 해대셔서 방을 따로 쓰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으니까요. 남들과 여행할 때보다 두 배 세 배 더 신경을 쓸 수밖에 없어 매일 밤을 새워가며 아버지에게 적합한 여행 일정을 짜드리곤 했죠.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쳤지만, 좋든 싫든 하나밖에 없는 아버지이기 때문에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가끔 “아버지와 여행하려니 힘들지? 고생이 많다”라는 아버지의 말이 큰 힘이 됐죠.
Q. 아들이 아버지에게 의지했던 부분은?
아들: 저는 성격이 급하고 계획적이라 무언가 일정에 어긋나는 일이 생기면 스트레스를 받곤 해요.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연속인 배낭여행에서 제가 초조해하거나 힘들어할 때 아버지께서 “괜찮다, 그럴 수도 있다”라며 정신적으로 안정시켜주셨죠. 청결하신 아버지께서 늘 위생에 신경 쓰신 덕분에 깨끗한 숙소에서 묵고 건강한 음식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Outro>> 아들에게 아들이 생긴다면? 세계여행 강추!
Q. 만약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아버지: 여행을 통해 세계 여러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직·간접적으로 체험하면서 나를 둘러싸고 있던 고정관념과 고집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예전에는 ‘당연히 ~해야지’, ‘무조건 ~다’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그럴 수도 있지’라며 너그럽게 넘어가는 성격으로 변했죠.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퇴직한 베이비붐 세대들이 겪는 우울감을 느꼈을 거예요. 여행을 다녀온 후 태어나 처음으로 책도 써보고, 인터뷰도 해보고, 방송도 출연하고, 그렇게 새로운 경험들과 연계해 제3의 인생을 시작하는 기분이에요. 여행이 아니었다면 결코 일어날 수 없었던 꿈만 같은 일들입니다.
아들: 우선 아버지가 굉장히 편해졌습니다. 예전의 수직적인 관계가 수평적으로 변해서 어떤 대화도 편하게 나눌 수 있게 됐습니다. 아버지와의 관계가 편해지니 예전엔 ‘꼰대’라고 생각했던 아저씨들의 행동과 말들도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됐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취업 빙하기인 요즘, 아버지와의 세계 일주를 좋게 봐주신 인사 담당자 덕분에 좋은 직장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만약 여행을 다녀오지 않았다면 부자간의 관계도 예전처럼 서먹했을 테고, 취업도 어찌 됐을지 모릅니다.
Q. 처음은 늘 아쉬운 법! 다시 여행을 떠난다면?
아버지: 너무 체면을 차리느라 외국인들과 적극적으로 대화하지 못했고, 액티비티도 참여하지 않았어요. 다시 여행을 간다면 나이와 체면 생각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외국인들과 소통하고 투어 활동도 해보고 싶습니다.
아들: 계획을 너무 타이트하게 짜서 여행 중 여유시간을 충분히 즐기지 못한 것이 아쉽습니다. 다시 여행을 떠난다면 휴식시간을 통해 나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요가체험, 템플스테이 등)을 갖고 싶습니다.
Q. ‘아들도 아들의 아들과 여행하길 바란다’고 말한 아버지, 그때의 아들에게 하고 싶은 말
아버지: 아들이 나중에 손자를 낳아서 여행을 하게 된다면 지금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내 기분을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나는 아들에게 부족한 아버지였지만, 아들은 손자를 더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멋진 아버지가 되었으면 합니다. 또 나는 가정을 위해서 나부터 엄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시대가 변했기에 아들은 아이와 더 많이 소통하는 아버지가 되면 좋겠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아버지이고 아들은 늘 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너무 내 기준으로만 자식을 바라보지 말고 너그럽게 이해하고 포용하는 아버지가 되길 바랍니다.
서양 미술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듯싶다.
또한 파리를 다녀온 사람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루브르 박물관 관람을 빼놓지 않았을 것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레오나르도 다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의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 얽힌 이야기는 한도 끝도 없을 정도다. 그중 기억나는 일화는 1963년 가 삼엄한 경호를 받으며 대형 여객선으로 미국 나들이에 나설 때 전 유럽이 떠들썩했던 일이다.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사고라고 발생할까봐 온통 난리를 피웠던 것이다. 이는 유럽인들이 를 얼마나 소중히 아끼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 유명한 모나리자의 초상화를 아무리 열심히 봐도 눈썹이 보이지 않는다. 모나리자의 눈썹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은 필자의 직업적 본능과도 무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래서 필자는 다빈치와 가깝게 교분을 나누던, 순결·사랑·아름다움을 상징하는 을 그린 화가 라파엘로(Sanzio Raffaelo, 1483~1520)의 작품 막달레나(Maddalena Doni) 초상화와 비교해보기로 했다.
살펴보니 라파엘로 역시 그가 그린 초상화에서 눈썹을 아주 흐리게 처리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당시 상류층 여인들 사이에서 ‘눈썹 제거하기’가 상당히 성행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유추(類推)를 가능하게 했다.
그 후에도 여인을 그린 초상화에서 ‘눈썹 없는 여인’들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많은 초상화를 남긴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 1세의 초상화들을 보면, 경우에 따라 눈썹이 짙게 그려지기도 하고, 옅게 그려지기도 했다.
이런 맥락에서 ‘북유럽의 모나리자’로 불리면서 많은 미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는 요하네스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의 작품 를 감상해보니 초상화의 중심이 되는 소녀의 아름다운 눈초리에 매료되면서도 소녀가 머리에 쓴 ‘터번(Turban)’형 머리덮개가 화려하지만 왠지 어울리지 않는 점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원작을 다시 보았을 때 ‘속눈썹’ 역시 그려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소녀가 ‘전신성 무모증(全身性無毛症, Alopecia totalis)’에 시달렸을 거라는 임상적 진단을 내렸다.
새로운 시각으로 그 유명한 ‘북유럽의 모나리자’를 본다는 기쁨은 잠깐, 소녀가 겪어야만 했던 가슴앓이를 생각하며 마음이 무거웠던 시간을 기억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 애잔한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를 쓴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올리비에는 퇴임 후 예순두 살의 나이로 이스탄불과 중국의 시안(西安)을 잇는 1만2000km에 이르는 길을 걷는다. “침대에서 죽느니 길에서 죽는 게 낫다”고 말한 그는 은퇴 이후 사회적 소수자가 되어버린 자신의 삶을 여행을 통해 꼼꼼히 기록했다. ‘나이 듦’은 생각하기에 따라 젊음보다 오히려 장점이 많을 수 있다. 속도를 늦춰 살고 여유 있게 세상을 바라보면 된다. 이미 쓴 노트의 페이지는 되돌릴 수 없다. 아직 남아 있는 빈 여백에 새로운 인생 이야기를 쓰는 일, 지금 바로 시작하자.
이 글은 필자의 현장 경험을 가감 없이 반영한 ‘생생 정보’다.
여행지 선택, 어떻게 해야 하나?
전 세계의 유명인들이 망명국으로 선택한 곳은 유럽이다. 프랑스, 스위스, 이탈리아 등 그들이 유럽을 정착지로 선택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유럽은 소도시별로 다양한 매력이 있다. 유럽 여행 좀 했다고 말하는 이들은 여행지를 나라가 아닌 도시로 구분 짓는다. 다양한 ‘인문’을 접할 수 있는 것 이 유럽 여행의 큰 매력이다. 또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사계절이 뚜렷한 편이라서 운치 있는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어느 계절이 여행하기 좋을까?
여행 갈 때는 좋은 계절을 선택하는 것이 기본이다. 봄이 가장 좋다. 여름이나 가을도 무난하다. 유럽의 여름은 지중해성 기후라 한국보다 훨씬 뜨겁지만 대신 습도가 낮다. 더우면 바닷가 근처에서 머물며 해수욕을 즐기면 된다. 가을 단풍은 그다지 아름답지 않으며, 겨울에는 설경을 감상할 목적이 아니라면 피하는 것이 좋다. 특히 북유럽 쪽의 겨울은 낮이 아주 짧다. 오후 3시쯤 해가 지기 때문에 관광할 시간이 너무 짧다. 겨울 여행은 긴긴 밤 속에서 보내는 날이 많을 수도 있다. 젊은 나이도 아닌데 굳이 타지에서 돈 써가면서 고생할 필요는 없다.
비자 등 각 나라별로 주의해야 할 사항
유럽의 많은 나라가 솅겐조약(Schengen Agreement)을 맺었다. 솅겐조약은 180일 이내에 90일까지 무비자 체류가 가능하다는 규정이다. 그래서 솅겐국 내에서 총 체류가 90일을 초과하지 않으면 된다. 한 달 체류는 문제되지 않는다. 참고로 유럽연합(EU)은 회원국 총 28개국에서 영국이 탈퇴(2016년)하면서 27개국이 되었다. 알기 쉽게 권역별로 정리하면, 서유럽권(프랑스, 이탈리아, 몰타, 네덜란드, 룩셈부르크, 벨기에, 독일,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 동유럽권(그리스, 루마니아, 불가리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오스트리아, 체코, 크로아티아, 키프로스, 폴란드, 헝가리), 북유럽권(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발트 3국(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이다.
숙소 구하기와 추천 사이트 소개
여행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숙박이다. 상황에 따라 선택이 달라지겠지만 밥을 해먹을 수 있는 독채를 빌려 쓰는 게 좋다. 외국에는 캠핑시설이 엄청 잘되어 있다. 자동차를 렌트해서 여행할 경우 캠핑장을 적극 활용하면 된다. 외국의 시니어들은 값싼 호스텔을 많이 애용한다. 단, 호스텔은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 휴식을 취하기 힘들다. 숙박기간은 미리 정할 필요가 없다. 일단 며칠 동안 지내보고 더 연장할 것인지는 그때 정해도 늦지 않다. 사람 마음은 늘 바뀌게 마련이다. 또 한 가지, 숙소를 서로 바꿔서 지내는 방법도 있다.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에서도 가능하다. 이동을 많이 하지 않으면 경비 절약에 큰 도움이 된다.
추천할 수 있는 대표적 해외숙박사이트
에어비앤비www.airbnb.co.kr
트립어드바이저www.tripadvisor.co.kr
익스피디아www.expedia.co.kr
부킹닷컴www.booking.com
여행 경비 줄이는 방법
우리나라 환율을 기준해서 환율이 낮은 나라를 선택하면 된다. 참고로 동유럽이나 발트 3국은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을 할 수 있다. 피서철의 유명 관광지를 피하는 것도 경비를 아끼는 방법이다. 환율이 낮은 나라라도 피서철에는 여행객들에게 ‘바가지’ 씌우는 행태가 일상화되어 있어 조심해야 한다. 선진국도 다르지 않다.
신용카드와 현금, 어떻게 관리해야 하나?
해외에서 신용카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여행 중에 쓸 카드는 미리 만들어가는 게 좋다. 분실이 염려되겠지만 해외 현지인들이 한국에서 만든 카드를 쓸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기 때문에 큰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비상시에 쓸 현금은 옷 속이나 자신만 아는 비밀스러운 곳에 넣어둔다.
여행 가방은 최대한 간편하게 싸라
여행은 가볍게 해야 한다. 휴식을 하러 떠난 여행지에서 많이 가져간 짐 때문에 이런저런 부담을 감수하는 사람들이 많다. 유럽의 골목들은 한국과 달리 엄청나게 울퉁불퉁하다. 옛것을 오랫동안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거운 짐을 들고 다니기에 결코 편한 길이 아니다. 부족한 물품은 현지에서 구입하면 된다. 실제로 의류 등은 한국보다 훨씬 싸다.
최악의 영어 실력, 여행지에서 괜찮을까?
각 나라별 언어를 익힐 시간은 없다. 영어만 할 줄 알면 어디선가 영어를 구사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영어 실력이 최악이라면 짧고 간단하게 말하면 된다. 어린아이가 이해할 정도로 쉽게 언어를 구사하면 상대가 충분히 알아듣는다. 영어권이 아닌 나라의 현지인들도 영어 실력은 나와 별 차이가 없다. 그러니 영어를 못한다고 절대 고민하지 말라. 무엇보다 전 세계 공용어인 ‘제스처’가 있으니 여행에 있어 언어는 큰 문제가 아니다.
해본 적 없는 배낭여행, 어떻게 하나?
모든 일이 숙달되기까지는 누구나 초보 시절을 겪어야 한다. 처음부터 베테랑은 없다. 패키지여행에 길들여진 사람들은 배낭여행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고생하고 돈 많이 쓰는 여행을 왜 하는지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에게는 배낭여행의 매력을 백번 설명해봤자 입만 아플 뿐이다. 그러나 그동안 살아온 방식을 지금이라도 바꿔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방법이 있다. 패키지여행을 자유여행으로 바꾸면 된다. 패키지여행을 가서 가이드 안내대로 따라다니지 않고 일행들에서 빠져나와 자유여행을 해보는 것이다. 특히 요즘은 패키지여행 반 자유여행 반으로 구성된 이색적인 여행 프로그램들이 많다. 패키지여행이 온전한 배낭여행보다는 안전성을 보장해주니, 그렇게 몇 번 실행해보라. 어느새 배낭여행에 대한 자신감이 생길 것이다.
여행자 보험, 반드시 들어야 하나?
여행자 보험은 3개월을 기준으로 한다. 물건을 잃어버리면 그 지역 경찰서에 가서 확인서를 받아오면 된다. 한국에 돌아와서 보험을 청구하면 의외로 황당할 때가 많다. 잃어버린 물건 가격에 상관없이 소정의 액수만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물건 변상은 기대 이상으로 박하지만 한 푼도 못 받는 것보다는 낫다. 또 현지에서 몸이 아플 경우 병원에 가는 데 도움을 준다.
강도를 만났을 때 대처법
여행지에서는 가끔 ‘강도’를 만나기도 한다. 특히 치안이 안 좋은 나라에서는 강도를 만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워 여행에 집중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여행지의 도둑들은 혼자 행동하지 않고 대부분 두세 명이 함께 움직인다. 이들은 처음에는 ‘여행자’인 척하고 따라 붙는다. 그러고는 경찰이라고 하면서 ‘여권’을 보여달라고 한다. 이럴 때는 재빨리 상황 판단을 해야 한다. 제복을 입었는지 확인부터 하라. 말대꾸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도 방법이다. 또 그들의 허점을 먼저 공략하면 된다. “제복을 입지 않았군요?”라고 말하거나 ‘경찰 증명서’를 보여달라고 하면 그들은 도망가기 바쁘다. 동양인들에게 접근하는 이들은 ‘푼돈’을 뜯으려는 자들이지 사람까지 해치려는 생각은 안 한다.
예방접종주사, 꼭 맞고 가야 하나?
예방접종을 하고 가면 훨씬 안전한 여행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예방주사 비용은 생각보다 비싸다. 특별히 ‘위험지역’이라는 보도가 없는 나라는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 여러 지역을 자주 이동하지 않는다면 전염병이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여행지에서 아플 때 도움 받는 법
현지 약국에서 약을 구입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단 젊은 약사가 있는 곳을 선택하라. 나이든 약사는 대부분 영어를 잘 못해서 설명이 어렵다. 현지에서 병원에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아픈 곳에 대해 유창한 영어로 설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언어가 통하지 않으면 치료를 안 해주는 병원도 있다. 이럴 때는 현지인이 운영하는 민박집 도움을 받아라. 한국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 도움을 받는 방법도 있다. 인터넷으로 찾으면 가능하다.
교통수단 이용 방법
여행지에서 이동은 필수다. 인터넷으로 미리 교통 정보를 알아보고 가겠지만 이 방법보다 유용한 것은 현지에 도착해 ‘인포메이션 데스크’를 찾는 것이다. 친절한 가이드가 있는 곳도 있고 달랑 지도 한 장만 주는 곳도 있다. 상황에 따라 가이드에게 질문을 하면 된다. 특히 어려운 지명은 발음이 어려워 상대가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으니 메모지에 써서 보여줘라. 그들은 전문가다. “싼 것을 원한다”고 말하면 2클래스를 알아서 척척 끊어줄 것이다. 이런 과정이 익숙해져도 직접 티켓 창구로 가서 가이드의 안내를 받아라. 자동기계를 잘못 이용하면 티켓 값을 순식간에 날릴 수 있다. 티켓을 발부받으면 정확한 날짜에 예약이 되었는지 꼭 확인해야 한다. 정확한 날짜가 아닌 ‘이틀 뒤’라는 식으로 말하면 그들의 날짜 계산이 잘못될 수도 있다.
여권을 잊어버렸을 때, 어떻게 해야 하나?
여행 중에 여권은 생명줄과도 같다. 복사본을 준비해가지만 도움이 되지 않을 때가 많다. 여권을 다시 만들어야 할 경우를 대비해 증명사진 두 장 정도는 미리 준비해가는 것이 좋다. 여권을 잃어버리면 가까운 경찰서에 가서 신고를 해야 하는데, 큰 도시의 경찰서는 이런 과정이 훨씬 복잡하게 진행된다. 그래서 작은 파출소를 선택해서 신고하는 것도 방법이다. 신고 후 그 나라의 수도에 있는 한국 대사관을 찾아가면 임시 여권을 만들어준다. 계획했던 여행 날짜만큼 충분히 머물 수 있다.
국세환급금(Tax Refund) 받는 요령은?
여행지에서 특산물을 살때는 ‘Tax Refund’가 표시된 현지 숍에서 사라. 물건을 구매했다고 말하면 영수증을 발급해준다. 말하지 않으면 절대 영수증 발급을 안 해준다. 영수증은 모아놨다가 마지막으로 여행하는 나라 공항에서 제출하면 된다. 대부분은 자국의 영수증만 환급해준다. 다른 나라의 영수증은 ‘Tax Refund’ 바로 옆에 있는 ‘우체통’에 넣으면 된다. 푼돈이라도 아끼면 적지 않은 돈이 된다.
기타 주의해야 할 사항들
여행지에서는 늘 변수가 있다. 이럴 때는 벌어진 상황에 맞춰 계획을 빨리 바꿔야 한다. “끝까지 해볼 테야” 하는 고집이 더 큰 변수를 일으킬 수 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에 한국에 비상연락책을 두어 명 구해놓는다. 현지에서 일이 생기면 필자의 블로그(www.sinhwada.com)에 댓글을 남겨도 된다. 인터넷의 세상은 생각보다 도움이 많이 되고 가깝고 빠르다.
풍차의 고장, 네덜란드에서도 옛 모습 그대로의 ‘전통 풍차’ 마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킨더다이크-엘샤우트(Kinderdijk-Elshout)는 ‘풍차’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풍차마을은 캘린더 속 그림처럼 아름답다. 또한 세계에서 손꼽히는 장수마을이기도 하다. 근교에 위치한 로테르담에서는 영화제가 한창이다. 이곳에서 건강도 다지고 문화 충전도 하면 인생이 훨씬 다이내믹해지지 않을까?
수줍은 처녀의 모습 같은 풍차마을
로테르담(Rotterdam)은 게스트하우스로 이용되고 있는 큐브하우스, 펜슬하우스 그리고 거대 쇼핑몰 마크트할레 등 온 도시가 건축학도의 실험실을 연상케 한다. 로테르담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공습으로 처참하게 파괴되었다가 재건되면서 실험적 건축물들이 도시 전체를 장식하게 됐다. 한국의 리움 미술관과 서울대 미술관을 건축한 렘 콜하스(1944년~)가 이 도시 출신이다. 특히 박물관 단지는 창의적인 예술작품들 말고도 200년이 넘는 나무숲과 운하가 어우러져 마치 북유럽의 자연친화적 도시 같은 분위기를 드러낸다. 숙소지기가 알려준 네덜란드 전통 음식점에서 스탬폿(stamppot)을 먹는다. 식당에서 만난 손님은 “스탬폿은 대부분 집에서 해먹는 음식이라서 일부러 식당에서 사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풍차마을을 가겠다는 필자에게 킨더다이크와 잔세스칸스(Zaanse Schans)는 다른 곳이라고 일러준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가서 만난 킨더다이크는 로테르담에서 고작 16km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그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갈대밭에 숨어 있는 몇 채의 건물들, 운하와 그 위에 떠 있는 유람선 그리고 운하를 따라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시골의 풍차마을은 도심과는 오랫동안 담을 쌓고 살아온 듯하다. 마치 수줍은 처녀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저지대의 애환을 보듬은 1700년대 풍차들
운하를 사이에 두고 사람 키보다 더 웃자란 갈대밭 ‘풍차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눈으로는 19개의 전통 풍차 수를 헤아리고 있다. 그저 카메라 셔터만 누르면 달력 사진이 될 정도로 아름답다. 썰렁한 겨울 풍경조차 아름다운 킨더다이크의 풍차마을은 시간의 빛에 따라 그 느낌도 다르다. 사람들은 많지 않다. 눈으로는 아름다운 풍차가 가득 담기지만 이 마을의 애환이 담긴 현실도 있다. ‘킨더다이크’라는 지명은 ‘어린이의 둑’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이 지역은 알블라서바르드(Alblasserwaard) 해안의 해수면보다 6m나 낮아 항상 거센 밀물과 썰물의 피해를 입어야 했다. 1421년, 일명 ‘성 엘리자베스’라는 대홍수가 발생했는데 요람에 쌓여 있던 어린아이가 물 위를 둥둥 떠다니다 둑 위에 얹혔다고 한다. 풍차는 네덜란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도구였다. 배수용으로 만들어진 1700년대의 풍차들은 200년 넘게 해안 간척지의 물을 빼내 주변 지역에 홍수가 나지 않도록 해줬다. 이 마을에는 레크 강과 왈 강 사이의 평지 위로 오래된 8각 원추형의 풍차들이 이어져 있는데 그중 한 곳은 풍차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매표원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풍차 안에서 지금도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풍차에는 이 지역 주민들의 삶의 무게가 아직도 묵중하게 실려 있다. 풍차 안으로 들어서면 팽팽 돌아가는 방향기에 따라 톱니바퀴처럼 돌고 있는 거대한 나무 기둥이 있는데, 실내 공간을 절반 이상이나 차지하고 있어 생활공간이 비좁아 보인다. 또 풍차 소리가 너무 커 기찻길 옆 오막살이가 연상된다. 지독한 악조건 속에 마련된 주거공간이다. 좁은 공간을 활용한 가파른 계단은 위층으로 이어진다. 층의 여백마다에는 가족들의 공간이 마련돼 있다. 부엌, 화덕, 거실, 부부의 침실, 아이들의 좁은 방들이 절묘하게 보일 정도로 옹기종기 배치돼 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수년, 수십 년간 풍차 집에서 생활했을 주민들. 지금은 관광지로 거듭났지만 과거 주민들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짐작이 된다.
장수비결? 가족 간의 사랑이 최고야!
야모리 일본 교토대 의대 교수와 세계보건기구(WHO)의 협력으로 10년간 세계 25개국 57개 장수마을을 대상으로 연구가 진행됐는데, 그 연구마을 중 한 곳이 킨더다이크다. 관광안내소 지킴이에게 “이 지역이 장수마을로 알려져 있는데 장수비결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장수 비결은 없다. 그냥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았다”고 말한다. 특별한 비결은 없는지도 모른다. 만약 비결이 있다면 열악한 풍차 집에서도 알콩달콩 지낸 가족 간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차가운 바람을 피해 로테르담 에라스무스 다리 근처로 가 마스 강으로 지는 해를 바라본다. 그날따라 마스 강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해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을 글썽였다. “나 죽으면 이곳에 뼛가루를 뿌릴까?” 그날 서글픈 내 마음을 알기나 했을까? 우연히 만난 헬스 트레이너 에밀레가 날 웃게 만들었다. 그는 요새도 내게 묻는다. “리, 언제 다시 올 거니?” 스쳐 지나간 인연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는 더치(duch)인들. 그들이 사는 도시가 그리워지는 날이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로테르담에서 전철이나 기차를 타고 주드플렌(Zuidplein) 역(D, E라인)에서 하차 후 154번 버스를 타면 된다. 45분 정도 소요된다. 로테르담 에라스무스 다리 옆 스피도 선착장에서 배를 타도 된다.
로테르담 현지 교통 정보 시내 일일권 교통카드를 사면 편리하다. 지하철, 버스 등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로테르담 시내버스에는 승무원이 있다. 필히 교통카드를 구입해야 한다. 장기 체류 시에는 지하철역에서 일일권을 사면 된다.
별미 음식 네덜란드인들은 청어 요리인 더치헤링과 발효식품인 하우다 치즈, 요구르트 등을 자주 먹는다. 이러한 식습관이 장수 비결이 됐다. 요즘은 삼발 울렉(인도네시아 고추장)이 건강식으로 인기다. 네덜란드는 팁 문화가 없기 때문에 식당에서 팁을 주지 않아도 된다.
숙박 정보 킨더다이크에는 숙박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로테르담에 싼 값의 숙박지가 아주 많다.
한 달 여행 포인트 로테르담에서 머물면서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 좋다. 거대 쇼핑몰 마크트할레에서는 다양한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2017년 제46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1월 25일~2월 5일, iffr.com)도 펼쳐진다. ‘조선’에서 14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하멜(1630~1692)의 고향인 호르큄(Gorcum) 시도 멀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와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하고 있다. 헤이그도 30분이면 닿는다.
단기 숙소 렌트 방법 유럽에서는 가정집 등을 단기 렌트하는 업체들이 일반화되어 있다. 에어비앤비가 유명하다. 숏스테이그룹(shortstaygroup.com)은 네덜란드, 파리, 바르셀로나의 숙박지를 전문으로 제공한다.
로테르담 시니어 여행 포인트 암스테르담보다 물가가 싸다. 시니어는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지하철, 국철 등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어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