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햇살 포실히 내린 서울 북촌의 한옥마을 계동. 춘정에 겨운 벌 나비 꼬일 계절이지만 옛날 마을 구경하러 돌아다니는 사람들만 부산하다. 옻칠 공예가 나성숙(68)은 골목 안통에 산다. 운치를 돋워 개축한 한옥에. 그는 이곳에 ‘나성숙 옻칠학교’를 열고 수강생을 가르친다. 코로나19로 다들 고전하지만 나성숙의 학교는 수강생들로 붐빈다. 조신하게 방에 틀어박혀 권태를 해치우기에 전통공예만큼 좋은 게 없다고 보는 사람들이 숱하게 찾아와 기능을 배워간다. 미처 그럴 줄 몰랐던 그는 바야흐로 꽃철을 만났다. 그러나 봄을 견디기 어렵단다. “어쩌나? 봄이면 아직도 가슴이 뜨거워 설레더라고!”
옻나무의 진을 발라 공예품을 만드는 옻칠은 까다롭기 그지없는 장르다. 초칠하기, 말리기, 삼베 붙이기, 사포질하기, 다시 칠하고 말리기 등 30여 가지 공정을 거쳐야 완성에 이른다. 나성숙이 옻칠에 매달려 산 세월이 올해로 16년. 짧지 않은 경륜이라 이룬 게 많다. 가구나 그릇을 만드는 데에서 나아가 옻칠화 개인전도 수차례 펼쳤다. ‘웬 구닥다리 옻칠?’ 처음엔 그리 삐딱하게 보는 눈들이 많았다. 그럴수록 차라리 벋나가는 심사로 버텼던 모양이다. 짱짱한 오기 하나면 파란에 밀릴 게 없다. 그는 딴엔 이제 옻칠에 관한 한 대가 행세를 해도 지나칠 게 없다고 자부한다. 언제 어디서건 기가 팍 꺾이는 법이 없는 기질이지만, ‘칠흑 밤처럼 깊고 어두운 옻빛’에 취해 달려온 와중에 대낮처럼 환하게 열린 게 많았던가 보다.
계동엔 항아리 깨뜨릴 듯 목청 큰 사람이 하나 산다. 바로 나성숙이다. 세레나데에는 어울리지 않을 목소리지만 천둥에 필적할 만한 톤이니 명품을 보유한 셈? 화통한 음색의 임자답게 그는 어려서부터 대차게 놀았다.
“원래부터 성격이 괄괄했다. 초딩 시절엔 내가 깡패였다고.(웃음) 공부엔 아무런 관심 없이 애들 휘어잡는 재미에 빠져 지냈다. 그러다 집안 어른이 나의 장점을 죽 열거하며 칭찬을 해주는 바람에 확 변했지. 별안간 공부벌레가 된 거다.”
그는 서울대 미대 출신이다. 경희대 대학원에서 조경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교수를 역임했다. 들입다 공부에 매진하는 재주를 몸에 붙이지 않고선 얻기 어려운 이력이다. 머리도 기차게 잘 돌아갈 테다. 그런데 천성은 분방해 길길이 들솟는 게 있으면 누르지 않고 곧잘 방목처럼 풀어주었다.
“난 단조로운 걸 참지 못한다. 진폭이 큰 인생이야말로 가치가 있다고 본다. 대학 다닐 때엔 술과 담배를 즐겼다. 한때 중학교 미술교사로 교단에 섰지만 딱 3일 근무하고 그만뒀다.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자니 너무도 고민스럽더라고. 좋은 교사가 될 자신이 없었던 거다.”
이후 언론사에서 일했지?
“일간신문 기획실에서 한동안 일하다 지방대학 강단에 섰다. 내 청춘이 절정에 달한 시절이었다. 주체할 수 없는 열기랄까, 넘치는 에너지로 거침없이 살았다. ‘월화수’엔 얌전한 교수로, ‘목금토’엔 전혀 다른 여자로. ‘야, 이거 내가 두 얼굴의 인간이네?’ 그런 회의가 생기던걸. 그런데 어떤 이가 이러더라. ‘뭘 두 얼굴 가지고 고민이야? 한 열 개쯤은 가져야지!’(웃음)”
하나의 얼굴로 사는 사람이 있겠나? 내숭으로 적당히 포장해 내부의 요지경을 숨길 뿐이다. 당신에겐 그 내숭이라는 게 없는 것 같다.
“나는 실험적이고 발전 지향적인 성향이 다분하다. 게다가 부지런하지. 그래 다양한 경험 속으로 거침없이 뛰어들곤 했다. 때론 방황에 불과한 편력마저 유쾌했다. 그러나 서른다섯 살 노처녀에 이르자 뭔가 비참한 기분이었다. 몸도 아팠고. 그때 결혼을 결심했지. 어떤 사람이든 나에게 청혼하는 첫 번째 남자와 무조건 결혼하기로 나 자신과 약속했다.”
세상이라는 전대미문의 정글엔 ‘늑대’들이 들끓는다. 그러나 그는 다급해 쉰밥 더운밥 따지지 않기로 했던 거다. 이 기이한 구제책은 최근에 내가 들은 가장 구슬픈 얘기에 속한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보니 고고한 기법이다. 천국엔 결혼이 없다 했다. 잠깐 달달하다가 지지고 볶는 게 결혼생활이지 않던가. 겉과 속이 달라 신비한 퍼포먼스가 부부 관계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상대가 누군들 무슨 상관? 통 크게 놀면 큰 걸 얻는다. 게다가 남자라는 복잡한 생물은 저마다 매력이라 할 만한 거 하나쯤은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옻, 방울방울 피처럼 귀한 재료
그의 대범한 ‘노처녀 탈출 작전’은 성공했다. 같은 언론사에 근무했던 두 살 연하 기자와 연을 맺었으니. 그러나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2004년 여름, 중견 언론인이었던 남편이 생을 마감한 것. 날벼락처럼 찾아든 횡액이었다.
“왜 그렇게 훌쩍 서둘러 가버렸는지. 더 사랑해줄걸, 더 품어줄걸, 그런 아쉬움이 길게 남더군. 워낙 과묵해서 말이 없는 남자였다. 아니, 뭐 이런 사람이 있어? 그런 생각, 자주 했거든. 그러나 과묵한 성정으로 매사에 성실했다. 유능한 언론인이었고, 학식이 풍부해 내가 존경했지. 그걸 사랑이라 하나?”
급작스런 사별의 고통을 어떻게 다스렸을까?
“괴롭고 슬프고 막막해 정신 차리기 힘들더군. 술도 많이 마셔댔지만 그게 위안이 되나? 지워지지 않는 남편과의 추억과 회한을 끼적인 에세이들을 책으로 묶어내는 것으로 자위를 했지.”
책 제목은 ‘북어국’이며, 이후 에세이집 ‘유쾌한 반란’과 남편이 생시에 쓴 기사들을 모은 유고집을 펴내기도 했다.
“가장 두려운 건 두 아이를 건사해야 할 가장의 책무가 이제 내게 주어졌다는 거였지. 남편은 섭섭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선 대책을 남기지 않고 떠났다.”
한 번뿐인 인생, 이렇게 황당하게 저무나? 그런 회의에 빠질 겨를조차 없는 현실에 그는 압도됐던 것 같다. 막막해 한동안 부질없이 방황했으나 그걸로 불안을 때려눕힐 수는 없는 일. 그는 맥줏집을 차려 대책으로 삼았다. 하지만 신통치 않았다. ‘야야, 영이 맑아야 사람이 모이고 길이 열리는 것이야!’ 지인에게 보기 좋게 한 방 먹기도 했다.
이러구러 그즈음 만난 게 옻칠이다. 시각디자인 전공자라 입문 이후의 진도가 빨랐다. 과녁을 꿰려는 화살처럼 직진으로 달려가 옻칠에 매달렸다. 그러면서 모래 위에 지은 가건물처럼 불안정했던 자신의 내벽을 단단하게 돋울 수 있었으니, 옻칠로 신세계를 열어젖힌 셈이다.
“옻을 직접 채취해보면 안다. 방울방울 피처럼 귀한 재료라는 걸. 심연처럼 깊은 검정빛은 또 얼마나 매력적인가. 미술에 쓰이는 화학적 물감과 달리 이건 완벽한 자연의 선물이다. 깊이 빠져들 수밖에.”
자연산이라면 뭐든 환영하는 사람이 많다.
“요즘 옻칠 공예품 애호가들이 늘어나고 있다. 웰빙 트렌드와 어울려서다. 옻이 지닌 방균·방부작용이 건강에 매우 좋은 거다. 아마도 향후 밥그릇 국그릇을 옻칠 제품으로 바꾸는 바람이 불 것으로 본다, 유행처럼.”
전통공예는 아름답고 소중하지만 모더니티까지 구사하지 않고선 대중적 지지를 받기 어려울 것 같다. 장인들은 흔히 전통의 보전과 답습에 그쳐 아쉽다.
“장인들은 전통을 고수하지만 나는 옻칠의 현대화에 주력한다. 집중된 노동력으로 굿 디자인을 구현하는 장인과 달리 옻칠의 자연미 자체를 예술로 끌어올린다. 그래픽 디자인을 적극 도입하며 가급적 미니멀하게, 가급적 자유롭게 소재를 조형한다. 이런 나의 공예를 장인들은 미완성 작품인 양 폄하하지만.”
‘고통은 차라리 꿀단지다’
신명이라 하나? 옻칠 얘기에 취해 톤이 더 높아진다. 그가 신바람을 내기론 주변 사람들에 관한 회고와 인물평에서도 마찬가지. 파란만장까지야 아니겠으나, 상당히 알록달록하고 울퉁불퉁하고 기세등등했던 지난 시절에 맺은 근사한 인연, 희한한 사연들을 양동이로 물 쏟아붓듯이 술회한다. 정치인, 교수, 문인, 화가 등 누구나 알 만한 각계의 인물들과 나눈 긴밀한 사교를 통해 인생을 노닐며 배운 우정이야말로 최상의 자산이라는 투로. 우정이란 쓸쓸한 인생을 부축해주는 관계의 마술. 자랑으로 돌아본들 지나칠 건 없다.
“화가 김점선(작고) 언니를 특히나 잊을 수 없다. ‘성숙아, 나 죽을 거 같아!’ 암과의 투병 막바지에 문병을 갔더니 언니가 그러더군. 뼈만 남은 모습에 울컥했으나 뭔가 엉뚱한 얘기로 웃겨주고 싶었다. ‘언니! 걱정 마. 오징어를 먹으면 나을 수 있어!’ 이건 터무니없는 농담이었으나 곧이곧대로 믿더라. 시장에 달려가 내가 사온 오징어를 입에 물고 열심히 우물거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가 돌아간 뒤 한동안 산소를 수없이 찾아가 그리움을 달랬다.”
시인 뮈세가 말하길, ‘세상에서 유일한 진실은 이성을 잃은 사랑에 있다’고 했다. 독신의 좋은 점은 사랑할 기회가 열려 있다는 데에도 있다. 요상하게도 진실보다 이기적 계산을 앞세우는 세상이지만. 이를 어떻게 생각하나?
“내게 이런저런 연애가 왜 없었겠나? 학벌 되지, 미모 되지, 내가 여러모로 꽤 갖춘 여자잖아?(웃음) 그런데 남편만 한 남자가 없더라고. 남자라면 셋을 구비해야 한다. 학식, 돈, 인품, 이것이 내가 가진 판단 기준치다.”
돈까지? 돈보다 사랑의 힘으로 살면 되지 않나?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게 진정한 사랑이다.
“일단 돈 때문에 불편하진 않아야 사랑도 유지될 수 있잖아? 예부터 사람들이 돈의 가치를 중심에 두었던 건 그게 인류에게 필요한 기본이기 때문이겠지. 학벌, 미모, 명예와 마찬가지로 말이야.”
당신이 말한 그 기본이라는 걸 과도하게 추구하면서 세상이 격투기 링으로 변했다.
“물론 사회의 흐름엔 문제가 많다. ‘금수저’로 태어났다고 교만과 위세를 부리는 자들을 보라. 얼마나 가관인가? 좋은 사람들과 유유상종하며 배운 게 많았지만 사실 난 사람을 믿지 않는다. 가령 재벌 부인이 나의 공예 사업을 돕겠다고 하지만 믿지도 않고 속지도 않는다. 거기에 놀아나지 않는다.”
사람에게 받은 상처가 많았나 보다.
“그간 나를 도와준다고 나선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그러나 상처받은 경우가 많고 많았다. 때로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유혹에 넘어가주기도 했지. 왜? 저 사람의 내면에 세모가 있나, 네모가 있나, 대체 뭐가 있나, 그게 궁금해서였다.(웃음)”
우리가 살면서 크게 오버하는 게 있다. 내가 남에게 준 상처는 까먹은 채 남이 준 상처만 고이 간직하는 게 그렇다.
“그야 그렇지. 그리고 상처에서 오는 고통도 딱히 나쁜 것만은 아니다. 고통은 꿀단지라는 게 내 생각이다. 고통과 함께 성숙하는 게 인간이니까. 이제 나는 몹시 냉철해졌다. 옻칠을 만나고 나선 밑도 끝도 없는 방황을 하진 않는다. 삶의 불안감이야 여전하지만 이 역시 성장의 조짐으로 본다. 군살 없이 단순하게 사는 게 가장 좋다는 것도 깨달았다. 근데 진달래며 개나리는 왜 피어 사람을 환장하게 하는지 몰라!(웃음)”
이라고 피는 것들만 지천이랴. 이 꽃이 피면 저 꽃이 진다. 나는 나이 들면서 지는 꽃에도 마음이 가더라. 잘난 인생보다 순리를 아는 인생이 아름답더라. 그의 한옥을 나설 때 그런 생각, 잠깐 머리를 스쳤다.
로코노믹스 (앨런 크루거 저·비씽크)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경제교사인 앨런 크루거의 유작. 콘텐츠 산업 중 가장 큰 변화를 맞고 있는 음악 업계를 통해 최근 경제학의 주요 이슈와 콘텐츠 산업의 미래를 개관한다.
변화는 어떻게 촉발되는가 (캐스 R. 선스타인 저·열린책들)
정책 전문가인 저자가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 과정을 통찰한다. 잠재적 불만의 표출, 집단행동 형성 등 오래된 규범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관이 세워지기까지의 흐름을 예리하게 분석한다.
우주에서 가장 작은 빛 (사라 시거 저·세종)
천체물리학 분야에서 저명한 저자가 우주와 인생의 알레고리를 이야기한다. 지구의 쌍둥이별을 추적하는 놀라운 모험과 사별의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선 그녀의 삶을 평행선처럼 담았다.
1년 후 내가 이 세상에 없다면 (사미즈 켄 저·한빛비즈)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4000명이 넘는 암 환자와 상담하며 깨달은 삶의 교훈을 풀어낸다. 인생의 남은 시간을 마주한 이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통해 후회 없이 사는 법을 역설한다.
구멍가게 이야기 (박혜진 외 공저·책과함께)
지금은 사라져가고 있지만 한때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 역할을 했던 동네 구멍가게의 역사적 변천을 톺아본다. 실제 가게 주인과 단골손님들의 인터뷰가 그 시절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추억하고 말하고 색칠하는 나의 인생 컬러링북 (김보영 저·휴머니스트)
미술심리상담사인 저자가 어르신과 함께한 수업을 바탕으로 만든 컬러링북. 단순히 색칠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림에 관련된 짧은 글을 담아 옛 기억을 떠올리고, 써볼 수 있게 했다.
배우자와의 사별 후 극심한 슬픔에 잠겨 고인의 길을 따라간 이들의 사례를 종종 접한다. 그 밖에 가족이나 친구, 반려동물, 애착했던 인물(연예인이나 정치인 등)의 죽음 뒤 황망한 심정을 떨치지 못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비극은 대개 상심증후군의 악화로 일어나곤 한다. 죽음이 아닌 물리적 단절이나 소외 등으로 같은 증상을 겪기도 하며, 특히 자녀 문제로 인한 상심 증상은 빈둥지증후군이라 일컫는다.
도움말 김동철 심리학 박사(김동철심리케어 원장)
심리학적으로 상심증후군은 애도(哀悼) 증상과 비슷해, 애도증후군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랑했고, 많은 것을 함께했던 사람, 즉 배우자와의 사별은 가장 큰 상심을 안긴다. 일반적으로 6개월, 길게는 1년 정도 애도기간을 보낸 후에도 극도의 슬픔이 지속되거나 눈물이 나고, 이전처럼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다면 상심증후군을 의심해봐야 한다. 고인과 생활하면서 몸에 밴 습관이 바뀌어야 상심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보통 6개월 정도면 뇌가 새로운 습관에 적응하기 때문이다. 봄·여름·가을·겨울 계절마다 함께했던 추억이 떠올라 슬픔에 잠기기도 해, 1년 정도 지나야 회복 가능한 경우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애도기간을 거친 뒤에도 상심이 가시지 않고, 무기력증, 우울증, 분노 등이 동반되거나 면역력 저하 등 신체적 질환까지 나타난다면 곧장 병원이나 심리센터를 찾는 것이 좋다. 상심증후군은 자살과 관계된 척도로 검사가 이뤄질 만큼 위험한 증상으로, 주변에서도 유심히 살피고 도움을 줘야 한다.
사별 아닌 부재도 상심증후군 불러와
# A(68·여) 씨의 남편은 몇 해 전 치매 진단을 받고 결국 요양원에 들어갔다. 요양원은 외진 곳에 있었고, A 씨는 거동이 불편해 남편을 쉽게 볼 수가 없다. 은퇴 후에 일상을 함께 나누던 남편과의 생이별로 그녀는 무기력해졌고 삶의 무의미함마저 느낀다.
A 씨처럼 꼭 사별이 아닌, 배우자의 부재로도 상심증후군을 앓을 수 있다. 특히 치매나 다른 중병으로 온전한 대화와 교감이 어려운 상태에서 홀로 오랜 시간을 보냈다면 사별 못지않은 심리적 스트레스와 상심을 겪게 된다. 심해지면 망상장애나 정신분열증 등의 문제를 일으키기도 하고, 면역력 저하를 비롯한 섭식장애, 근육통, 탈모 등 신체 증상을 호소하기도 한다. 특히 젊은 시절보다 중장년기에 사별(또는 부재)을 겪었을 때 상심증후군에 취약하다. 버팀목이었던 존재가 사라지면서 일상이 무의미하게 느껴져 자신의 삶마저 비관하게 되기 때문이다. 중장년기는 직장생활이나 양육 등의 의무가 줄어드는 시기로 미래 목표의 가치가 흐려져 더욱 무기력해질 수 있다.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누구에게나 사별은 예고된 이별과 다름없다. 상심증후군 예방법 중 하나는 언젠가는 맞이할 수밖에 없는 죽음을 미리 생각해보고, 그에 따른 준비를 해두는 것이다. 꼭 유서를 쓰거나 심각할 필요는 없다. 가령 “내가 죽으면 통장은 OO에 뒀으니 찾으면 돼”, “당신이 먼저 떠나면 난 고향에 내려갈까 해” 등 자연스럽게 죽음 이후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만으로도 상심을 완화할 수 있다. 또, 이별의 아픔을 겪었더라도 작은 목표라도 세워 생활 리듬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 한 달짜리 체크리스트를 만들거나, 하고 싶은 일을 버킷리스트로 정리해보는 것도 좋다. 만약 이러한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면 반드시 전문가의 상담을 받아봐야 한다.
사회적 빈 둥지 함께 겪는 아버지들
# 은행 지점장 출신 B(66·남) 씨는 퇴직과 동시에 인맥이 줄줄이 끊기며 자연스레 약속과 모임도 줄어들었다. 거금을 들여 유학을 다녀온 아들은 진로 문제로 B 씨와 다투더니 독립하겠다며 집을 떠났다. 노후자금도 변변치 않은 상황에서 그는 한없이 우울하다.
자녀의 독립으로 상심과 외로움을 느끼는 증상은 빈둥지증후군이라 한다. 주로 갱년기 여성이 겪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남성도 이러한 증상을 보일 때가 있다. 특히 퇴직 후 심리적으로 위축되거나 소외를 당하면서 ‘사회적 빈둥지증후군’을 호소하는데, 여기에 자녀 문제로 가정에서의 빈둥지증후군까지 겹치면 증상이 악화된다. 그렇다고 전업주부의 증세가 덜한 것은 아니다. 사회생활 대신 아이와 밀착해 육아에 몰입해온 엄마들은 자녀가 떠났을 때의 충격과 슬픔이 더욱 크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만약 갈등이나 배신, 반항심으로 자녀가 떠났다면 부모의 상심은 훨씬 크다. 특히 경제적 어려움이 있거나, 배우자가 없는 상태에서 이러한 상황을 겪는다면 증상 회복이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빈둥지증후군 역시 예측 가능한 상황이기 때문에 ‘자녀 독립 후 계획’을 미리 세워두면 좋다. 또, 자녀가 물리적으로 멀어졌을 뿐 아주 자신을 떠났다고 인식해서는 안 된다. 늘 “나는 혼자가 아니다”라고 여기는 마음의 유대가 중요하다. 실천적 방법으로는 ‘봉사활동’이 있다. 자식에게 헌신했듯, 누군가를 돕는 일로 상심을 달래는 것이다. 이런 활동은 가급적 지속가능하면 더욱 좋다. 무엇보다 누구의 부모가 아닌 오롯이 자신의 인생을 맞이하는 기분으로 빈 둥지를 새로움으로 채운다면 상심은 눈 녹듯 사라질 수 있다.
분노사회’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세상이다. 특히 한국 중장년의 경우 ‘한이 많은 세대’라 불릴 만큼, 노여움과 울분을 적절히 해소하지 못한 이가 대다수다. 누군가는 화를 참지 못해, 또 누군가는 화를 내뱉지 못해 마음의 병을 앓는 것이다. 이러한 화가 자칫 ‘분노증후군’이나 ‘분노조절장애’로 이어진다면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해를 끼칠 수 있다. 분노도 주변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하다.
도움말 김동철 심리학 박사(김동철심리케어 원장)
흔히 ‘화병’(火病) 또는 ‘울화병’(鬱火病)으로 잘 알려진 ‘분노증후군’은 오랜 시간 축적된 화를 표출하지 못해 생기는 증상이다. 이와 반대로 ‘분노조절장애’는 느닷없이 욕을 하거나 폭력을 행하는 등 화를 분출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분노조절장애의 경우 지하철에서 학생에게 시비를 거는 노인이나 묻지마폭행을 가하는 중년남성 등이 표면적 이슈가 되어 이러한 증상을 가진 시니어가 많다고 여기지만, 실상은 그 반대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억압받으며 생계와 가정을 위해 자신을 억누르고 살아온 한국 중장년의 특성상 분노증후군을 겪는 이가 훨씬 많다(분노조절장애는 해외에서, 또 청소년이나 청년 세대에서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나타남). 다만, 가족도 잘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드러나는 증상이 거의 없어 그 심각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것이다. 전조증상이 덜한 암일수록 늦게 발견돼 치료가 어렵고 위험하듯, 분노증후군 역시 같은 맥락에서 세심한 주의가 요구된다.
나도 꿈이 있었는데… 엄마의 울화
# 70대 여성 A 씨는 젊은 시절의 사회 분위기와 가정 사정 등으로 학업을 이어가지 못했다. 그 한을 자녀 교육을 통해 풀고자 했고, 온갖 정성으로 아이들은 고학력에 좋은 직장까지 얻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자녀들은 번번이 어머니의 무지(無知)함을 들먹이며 무시를 일삼았다. 이에 A 씨는 소외감과 우울함으로 지난 세월을 한탄했고, 급기야 극단적 시도까지 생각하게 됐다.
한국의 중장년 여성들은 자기 뜻과 다르게 학력 단절을 겪거나 사회 참여 기회를 박탈당한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전업주부로서 소임을 다했고, 못다 이룬 꿈을 대신 펼쳐줄 자녀들에게 헌신하며 살았다. 그러나 장성한 자녀들은 그런 어머니의 공(功)을 인정하기는커녕 자신의 지식수준과 비교하면서 종종 무시하거나 소외시킨다. 물론 일부러 그런 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본의 아니게 내뱉은 말 등으로도 상처를 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많은 중장년이 박탈감을 갖게 되고 비참한 심정이 되어 분노하게 된다고 한다(남성보다는 여성이 더 많다). 여기에 배우자와의 사별이나 번아웃증후군(소진증후군)까지 겹치면 심한 우울 증세가 나타나고, 상태가 악화하면 극단적인 시도까지 감행한다.
이렇듯 위험한 병이지만, 안타깝게도 자가 확인이 쉽지 않아 예방이 어렵다. 몇 가지의 체크리스트만으로 진단할 수 있는 단순한 심리·정신질환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의 사례와 같은 상황에서 최선의 예방책은 자녀들 손에 달렸다. 보통 젊은 세대는 기성세대의 과거 이야기를 듣기 싫어하고 불편해한다. 그러나 이럴 때 자녀가 따뜻하게 공감해주고 인정하고 칭찬해주면 부모의 울화는 조금씩 누그러진다. 시니어 입장에서는 자녀에게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기가 쉽지 않겠지만 묻어둔 고충을 털어놓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게 좋다.
내가 왜 화를 냈지? 분노 컨트롤이 어려워
# 파킨슨병을 앓고 있는 60대 남성 B 씨는 최근 들어 자괴감이 많이 든다. 자신도 모르게 욱하는 심정이 들어 가족과 주변 사람에게 자주 역정을 내곤 한다. 심할 땐 욕설에 소리까지 지르면서 폭력적으로 변한다. 그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희한할 만큼 기분이 가라앉는데, B 씨는 분노조절이 안 될 때마다 자신의 행동에 대한 후회가 몰려와 괴롭기만 하다.
분노조절장애는 뇌신경이나 호르몬 등의 문제로 스스로 감정 조절이 어려워 뜻하지 않게 폭발적으로 분노를 표출한다. 마치 조울증처럼, 심하게 화를 냈다가 이내 미안해지는 마음이 들곤 한다. 문제는 이런 상황이 자주 반복되면 본인은 물론 주변인까지 상처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는 개인이 마음을 다스린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므로 증상이 의심되면 반드시 정신과 진료와 약물치료 등을 받아야 한다.
특히 과거에 조현병, 우울증, 공황장애를 앓았거나 파킨슨, 치매 등 뇌 질환 환자인 경우는 분노조절장애가 생길 가능성이 더 크다. 또, 교통사고 등으로 인한 뇌수술 후유증으로, 감정조절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망가져 증상이 나타날 수도 있다. 때때로 분노조절장애가 지속되다가 우울증이 오거나, 과격한 행동으로 인한 주변과의 소통 단절을 겪어 분노증후군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특히 중장년은 면역력이 떨어지는 시기에 증상이 더 심해지므로 환절기나 추운 계절엔 더 주의할 필요가 있다. 만약 일주일에 두 번 이상 제어할 수 없을 만큼 화를 낸다면(주변에서 점검해주는 것이 더 정확할 수 있다), 분노조절장애를 의심해보고 정신과 상담과 치료를 병행하길 권한다.
지난 2018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국내 미술평론가 37인에게 한국근현대미술의 대표 작가를 물었다. 1위는 한국추상미술의 개척자인 김환기(1913~1974)가 차지했다. 2위는 백남준, 3위는 박수근이었다. 대중의 갈채를 받는 화가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미친 듯한 집중력과 놀라운 다산성을 특징으로 지닌다. 김환기, 그는 창작 에너지를 이미 과도하게 소비하고도 허기로 괴로워 여분의 에너지까지 또 소모하기 위해 광분한(?) 화가이지 않았을까.
김환기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수필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김용준(1904∼1967)은 이렇게 썼다. “그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김환기의 모든 일상과 모든 생각, 모든 시공간이 예술이었다는 얘기?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환기미술관은, 우리가 눈먼 지지를 보내도 무방할 게 틀림없는 김환기의 작품을 숱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의 유화, 드로잉, 구아슈, 오브제 등 2000여 점의 작품과 유품, 저서, 편지, 다큐멘터리 사진 등속을 소장한 미술관이니까. 명망에 걸맞은 걸작들, 그리고 유품들에 서린 일상의 흔적과 사유를 만날 수 있어 즐겁고 값진 공간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이 겹으로 품을 벌려 사람들을 보듬는 곳. 봄이면 산벚꽃, 개나리, 진달래 등 온갖 어여쁜 꽃순이들이 맨발로 우르르 달려올 듯 반색하는 산동네. 자연 풍치로 낙원을 꾸려 서울에서 드문 이색 지대인 부암동이다. 환기미술관이 이 부암동에 있어 찾아가는 발길이 가뿐하다. 짙푸른 산자락 갈피에 그림엽서처럼 곱상하게 꽂힌 작은 집들과, 저 너머가 문득 궁금해지는 언덕길, 그리고 골목골목에 감도는 의외의 적막감이라니. 이렇게 슬슬 걷기에 좋은 길의 안통, 주택가 고즈넉한 곳에 환기미술관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자 흙 마당이다.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흙내가 훅 끼치려나. 서울에서 토속적인 시골 마당을 보게 되다니. 요란한 이방에서 구수한 고향 원주민을 만난 듯 반갑다. 김환기의 정신을 담은 미술관의 마당답게 자연스런 서정이 깃들어 정겹다.
부정형(不定形)의 경사진 터에 들어앉은 건물은 석 동이다. 본관과 별관, 그리고 달관이 저마다 상이한 형상을 가지고 공간을 분할한다. 넓지 않은 터전에 건물 셋이 있으니 여백이 부족해 옹색할 만도 하지만 층계로 유도되는 동선의 다변성으로 활달하다. 나무 정원의 푸름이 주는 생동감으로 헌칠하다. 건물들의 외양은 언뜻 보면 상자처럼 단순하다.
그러나 일단 기능성을 극대화한 건실한 풍모이며 섬세한 미학이 입혀져 당당하다. 본관의 구성과 디자인은 특히나 옹골차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풍색이다.
환기미술관 설립을 주도한 건 김환기의 아내 고 김향안 여사. 돌아보면 모든 게 사랑이자 백년동맹이었나? “한 사람이 사라졌을 뿐인데 온 우주가 텅 빈 것 같다.” 김향안은 사별의 허탈한 심경을 그렇게 토로했다. 그리고 홀로 남은 생애 중에 해야 할 오직 유일한 일은 남편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에 있다는 양 집념과 뚝심을 다해 미술관을 건립, 1992년에 개관했다. 미국에서 살았던 김향안은 소장하고 있던 남편의 모든 작품을 유럽의 이름난 미술관에 줄 계획이었단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한국에다 아예 미술관을 지어 기증하기로 하고 ‘환기재단’을 만들어 일을 추진했다. 이렇다 할 독지가 하나 없는 상황에서 틈틈이 김환기의 작품을 팔아 자금을 조달했다.
“사람을 울릴 수 있는 미술이어야 한다”
설계자는 재미 건축가 우규승. 콜롬비아대학 유학생 시절부터 김환기 내외를 부모처럼 섬겼던 인물로 김환기의 일기에도 나온다. 과연 어떤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길 것인가. 김향안은 숙고했으리라. 김환기의 분신에 해당할 미술관이니 무엇보다 김환기의 삶과 예술을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았으리라. 기술의 집적이면서 예술까지 발현되는 건축물, 김환기의 작품과 혈연처럼 상통하는 미술관. 김향안이 지향하고 우규승이 추구한 건축은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테다. 이 미술관은 1994년 ‘김수근 건축상’을 받았다. 주변 자연에 순응하고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 건축의 품새, 내부 전시공간의 변화감과 탁월한 전시기능 등을 높이 평가받았던 거다.
김환기는 어떤 화가였나. 밥 먹고 잠을 자는 시간 외엔 온통 그림과 맞붙어 산 인물이었다고 한다. 미술 작업으로 삶을 실감하는 감관의 소유자? 주로 작업실에 붙박이 장롱처럼 붙어살았으니 창작의 충일감이 그의 붓을 노래하게 하고 춤추게 했으리라. 열정, 또는 탐욕스러울 지경의 창작 욕구 자체가 그의 재능이었을지도. 인간사의 모든 경향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예술가는 남다른 노력으로 고귀한 종(種)의 반열에 오르며, 고귀한 영혼은 매너리즘에 사로잡히지 않아 진취적이다. 지금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혜안과 용기. 이것이 김환기라는 예술이 보유한 특별 자산이지 않을까.
르네상스적 지성인이었던 그는 면밀한 성찰과 민감한 촉으로 자신을 읽고 미술을 해부했다. 그러면서 시대의 지도를 읽어 가야 할 좌표를 스스로 찍었으니 그를 일러 ‘한국 현대추상미술의 선구자’라 한다. 독자적인 추상미술의 완숙한 경지에 도달하기 이전에 그가 섭렵한 구상과 반추상의 여정 역시 탁발한 것이었다. 초기의 구상 작품은 다분히 서정적이고 감각적이어서 빼어났다. 이후 달항아리, 학, 매화 등 한국의 민족 정조를 표상하는 소재들을 통해 한결 현대적인 작풍을 시도했고, 마침내 무수히 많은 점을 찍어 그린, 이른바 전면점화(全面點畵)로 순수추상의 극점에 도착하면서 세계적인 작가의 대열에 들어섰다. 조형적 변신을 관습으로, 신세계적 회화 언어의 개발을 본분으로 삼아 거둔 결과물이었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객관에서 주관으로, 현상에서 본질로, 해석에서 관조로, 김환기는 그런 관점 이동을 통해 세상을 더 깊고 넓게 보고자 했나보다. 순수추상으로의 질주 경위를 알게 하는 그의 진술이 여기에 있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라는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보라.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환기미술관은 해마다 두 차례 김환기 기획전을 펼친다. 올 하반기 타이틀은 ‘수화시학’(樹話詩學)전이다. ‘수화’는 김환기의 호. 영리한 애호가들이여, 시에도 조예가 깊어 시적 상상력으로도 그림을 그렸을 김환기의 기재(奇才)와 문재(文才)를 그림에서 명민하게 찾아보시라! 미술관의 기획 취지는 그런 것일 게다. 사실 김환기는 상당한 분량의 시와 산문을 남겼다. 시로써 먼지와 소음에 미만한 세상을 관조했고, 시어의 유희와 조탁으로 예술정신을 표출했다. 그는 “미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거였다. 김환기의 글쓰기와 시학은, 자신의 그림에 최루성(催淚性) 감흥 요소를 어떤 방법으로 주입할 것인가에 관한 모색의 과정에서 나온 게 아니었을까.
김환기의 눈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이 장착된 눈? 그는 세심하게 멀리, 혹은 깊숙이 바라보았다. 비 내리는 날의 전차 내부 풍경을 쓴 다음 글을 보면, 그의 유심한 관찰엔 허비가 없고, 그의 회화정신은 일상에서 무르익은 내공의 산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전차를 탄 승객들이) 짚고 앉은 우산에선, 빗물이 흐르던 정거장까지의 거리 여하에 따라서 가늘게, 굵게, 짧게, 길게, 강하게, 약하게, 리듬 있는 속력을 가지고 물이 흐른다. 선(線)이 가고 오고, 멈추고 흐르고, 곧게 혹은 휘어지고, 서로 뭉치었다 헤어졌다. 인간의 무연(憮然)한 이 합작에서 나는 놀라운 구성미를 알았고, 회화정신으로 돌아가 보기도 한다.”
겉볼안이라고, 겉만 보고도 속을 알 수 있다는 얘기가 있지만 환기미술관 본관의 속은 겉보다 웅숭깊다. 군더더기 없이 명증한 구조로 아름답다. 모든 구성이 김환기를 향한 일종의 헌화인가? 설계자는 위대한 화가의 작품에다 건축의 궁합을 맞추기 위해 진땀깨나 쏟았겠다. 이번 기획전엔 대형 전면점화 10여 점을 비롯해 모두 200여 점을 내걸었다. 김환기 작품의 심원한 숲에선 새가 날고 달이 뜬다. 자연의 숨결이 스멀거리고, 안도할 만한 적막감이 선(禪)처럼 광활한 뉘앙스를 풍긴다. 불멸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리즈’를 보라. 강력한 자장을 발산한다. 화가는 점점이 찍은 무수한 점으로 삶과 사랑을, 자연과 순리를, 해탈과 우주를 이야기했나? 어떻게 보든 무방할 테다. 점 하나하나를 세포 입자로, 그리움을 기록한 엽서로, 도통한 나한(羅漢)의 눈알로, 혹은 우리가 끝내 돌아갈 저 밤하늘의 별로, 그저 이렇게 저렇게 보더라도 답일 거다. 분명한 건, 어떤 거대한 질서가 응축된 하나의 소우주로 다가오는 그림이라는 사실이다.
62세, 교사로서의 35년 삶을 뒤로하고 명예퇴직 후 시작한 택시 운전. 아내와의 유럽여행을 손꼽아 기다리며 제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속쓰림과 몇 번의 토악질 끝에 찾은 응급실에서 시작된 투병생활. 췌장암 진단을 받은 후 2년간 사투를 벌이며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부터 갑자기 배의 통증이 심해졌습니다. 오늘 예약한 외래 진료를 기다리며 진통제를 몇 번이나 먹었는지 모릅니다. 더 이상 항암치료는 권해드릴 수 없다며 호스피스 입원에 필요한 진단서를 써준 의사는 외래 진료실을 나설 때까지 끝내 제 눈을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이제 예정된 시간까지 이 고통을 견디는 일만 남은 걸까요? 차라리 그날이 오늘이면 좋겠습니다.
힘들게 견뎌온 치료에도 불구하고 환자가 말기 상태에 이르렀다고 판단되면 주치의는 환자와 가족들에게 호스피스 입원을 권유할 수 있습니다. 혹은 “병원에서는 더 이상 해드릴 게 없습니다”라고만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의사의 명시적인 말기 진단 이전에 이미 자신의 병이 악화돼가고 있음을 눈치 채는 환자들도 적지 않습니다. 어떤 말기 암 환자 가족들은 인터넷에서 말기 암 환자를 완치시켰다는 ‘OO주사, OO약침, OOO추출물’ 등에 대한 경험담을 보고 매달립니다. “호스피스 알아볼까?”라는 말은 모든 걸 포기하는 것 같아 입안에서만 머뭅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입원한 지 3일이 지나고 있습니다. 집에 있는 동안 밤이 정말 두려웠습니다. 물론 낮에도 통증이 끊임없이 몸을 웅크리게 했지만 특히 밤에 통증이 심해 식은땀이 흘러내렸습니다. 밤새 안절부절못하는 저를 위해 며칠째 밤을 새운 아내도 연신 두통약을 삼키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 아내를 보며 그렇게 망설이던 호스피스 병동 입원을 선택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의 첫인상은 제 예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의외로 병실 복도를 오가며 운동을 하는 환자도 있었고, 다리를 마사지해주는 봉사자들과의 대화 속에 간간이 웃음소리도 섞여 나오곤 하더군요. 저는 아주 엄숙하고 무거운 공기로 숨쉬기 답답한 병실을 예상했거든요. 입원하자마자 담당의사는 통증에 대해 이것저것 한참을 물었습니다. 바로 주사를 한 대 맞았고 수액병이 걸리자 10여 분 후부터 정말 놀라운 시간이 시작됐습니다. 그렇게 고통스럽던 통증이 약간의 불편함 정도로 변해버렸습니다. 통증이 사라지자 정말이지 제가 말기 암 환자라는 사실조차 잊을 수 있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적극적인 통증 조절을 통해 환자가 오늘을 잘 살고 내일을 준비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암 환자의 통증은 소위 ‘총체적 통증’(total pain)이라고 불리듯 신체적 문제뿐 아니라 심리·사회적 요인이 크게 작용할 때가 많습니다. 환자가 겪는 우울, 불안, 분노, 두려움 등의 심리적 문제는 약물 치료와 함께 지지적 상담을 통해 돕다 보면 완화될 수 있습니다.
호스피스 병동에 온 지 이제 3주가 지났습니다. 지난주부터는 물만 마셔도 구토를 해 얼음을 입에 녹여 갈증만 줄이고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입마름 때문에 종종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아 불편하지만 영양제를 맞아서인지 배는 별로 고프지 않습니다. 지난 토요일에는 사회복지사 선생님이 주선해 요법실에서 가족사진을 찍었습니다. 아주 오랜만에 양복을 입었습니다. 올가을에 아들과 결혼 예정인 예비 며느리도 사진 속에 있습니다. 그리고 아내는 말렸지만 고집을 좀 피워 제 영정사진도 부탁해 찍었습니다. 아내와 아이들의 수고를 하나 줄여준 것 같아 내심 마음이 놓입니다. 미용 봉사를 받아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정돈해두길 잘했습니다.
말기 암 환자와 그 가족들에게 임종을 앞둔 마지막 몇 주의 시간은 살아온 시간만큼이나 귀중할 것입니다. 호스피스 팀은 이 기간이 환자와 가족들이 사랑을 확인하고 혹은 갈등을 치유하는 금쪽같은 시간이 되기를 소망하며 다양한 이벤트를 제안할 수도 있습니다. ‘생전 장례식’, ‘자서전 출판기념식’, ‘미술 전시회’, ‘미니 결혼식’, ‘가족사진 촬영’, ‘가족음악회’, ‘가족여행’ 등등 다양한 이벤트가 오로지 ‘한 가족’만을 위해 준비됩니다. 종종 이런 시간들은 환자 사후에 가족들이 잘 견뎌낼 수 있도록 돕는 마법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임종 과정의 환자를 위한 별도의 ‘임종실’(1인실)이 운영됩니다. 호스피스 팀은 임종 과정이 온전히 환자와 가족들이 함께하는 시간이 될 수 있도록 임종기의 신체적 변화에 대해 가족들에게 미리 알려 불필요한 두려움과 오해가 생기지 않게 돕습니다. 또한 처음 경험할 수도 있는 장례 과정 등 사후 절차에 대해 충분한 사전 정보를 제공하고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호스피스 돌봄은 환자가 병동에 머무는 시간뿐 아니라 사후 사별가족들에 대한 지지와 상담 등을 포함합니다. 대부분의 호스피스 전문 의료기관은 체계적인 사별가족 프로그램 및 고위험 사별가족에 대한 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합니다.
누구나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인간의 삶에서 오직 죽음만이 확실하다”고 말했다. 인간은 모두 공평하게 한 번은 죽음을 만난다. 죽음은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죽은 자는 행위가 종식되고 운동이 정지하면서 반응이 없어진다. 존재에서 무존재가 되어 모든 계획과 삶이 끝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영원히 되찾을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을 후벼파는 슬픔으로 다가온다.
독일의 여성 감독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2008)은 사랑하는 아내가 죽은 후, 곁에 있을 때 못 느꼈던 사랑과 아내가 접어야 했던 꿈을 이해하는 과정을 잔잔하게 그린 작품이다. 죽음이 우리 삶에 주는 의미, 그리고 소통과 배려 등 살면서 챙겨야 할 소중한 가치들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독일 남부의 시골 마을 시청 청소행정과 과장 ‘루디’(엘마 베퍼 역)는 큰 위기 없이 20여 년 공무원 생활을 착실히 해온 평범한 가장이다. 그의 아내 ’트루디‘(한넬로르 엘스너 역)는 무용의 꿈을 접고 내조와 자녀 교육에만 전념해온 전업주부다. 그들에게는 베를린과 일본 도쿄에서 사는 2남 1녀의 자녀가 있다. 트루디는 일본의 ’후지산‘을 가고 싶어 한다.
어느 날 트루디는 남편 루디가 암에 걸렸다는 이야기를 의사에게 듣는다. 하지만 트루디는 이 사실을 숨긴 채 베를린의 자녀들을 만나러, 둘이 함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여행을 떠난다. 그곳에서 자녀들의 무관심과 세대 차이에 충격을 받고 발트해로 둘만의 여행을 떠난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곳에서 트루디가 먼저 죽음을 맞이한다.
상실의 슬픔과 그리움에서 헤어나지 못하던 루디는 아들 칼을 만나러 도쿄로 가지만 바쁜 아들 때문에 홀로 도시를 헤맨다. 그러던 어느 날 공원에서 부토 춤을 추는 한 소녀를 만나게 되고 소녀와 함께 아내가 가고 싶어 했던 후지산을 찾아간다. 후지산이 선명하게 보이는 새벽녘 푸른 호숫가에서 루디는 아내 트루디와 함께 부토 춤을 춘다.
영화에서는 중요한 두 개의 메타포가 등장한다. 하나는 파리다.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의 창에 붙어 있던 파리의 모습은 이후 벌어질 자녀들과의 세대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예고한다. 식탁에 앉은 파리를 손바닥으로 내려쳐 잡는 젊은 세대와, 작은 생명체 하나도 존중하는 기성세대 간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한 사전 장치다. 부모 앞에서 레즈비언 행위를 서슴지 않는 딸의 모습과 부모의 반응은 ‘세대 간 차이를 갈등과 대립이 아닌 소통과 배려로 극복해야 함’을 표현하는 서브 텍스트다. 여성 감독이기에 이런 따뜻한 메시지가 더해졌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림자다. 영화 초반 루디의 기계적 일상을 설명하는 트루디의 내레이션에서 시작돼 자주 등장하는 장치다. 이 영화의 큰 축인 부토 춤의 표현이기도 하다. 심리학에서는 그림자를 외부에 드러내기 싫은 나, 그래서 진정한 나에 가까운 것으로 말한다. 억누른 기억과 감정이 모두 담겨 있는 무의식의 거대한 산 같은 것이 그림자다. 그래서 이 영화에서는 그림자를 존재의 다른 방식으로 때론 타인에게 인식될 수 있고 또 타인과 이어주는 방식으로 사용한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사회의 허무주의를 바탕으로 삶과 죽음의 해답을 갈구하는 것 같은 움직임을 묘사한 그림자 춤인 부토 춤을 이 영화에서는 이쪽 세계와 저쪽 세계가 통하는 의식으로 설정했다.
결국 루디는 그림자, 그림자 춤을 통해 상실한 마음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내면의 울림에 귀 기울인다. 자신의 상처와 끊임없이 대화하면서 마음을 챙기고 ‘그림자 치유’ 과정을 통해 트루디가 있는 세계로 가는 블랙홀에 빨려 들어간다. 부토 춤을 추는 공원의 소녀가 춤출 때 사용한 전화기의 수화기와 선도 중요한 메타포라 할 수 있겠다.
두 사람의 마지막 여행지인 발트해에서 트루디는 계면쩍어하는 루디의 손을 잡고 같이 춤을 춘다. 루디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기에 트루디는 춤을 추면서 어떤 참혹한 상실의 시간이 오더라도 그 시간을 딛고 일어설 것이라며 스스로를 다독였을 것이다. 낮에는 해안가에서 추워하는 루디를 위해 스웨터를 함께 입는 세심한 배려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홀로 남게 된 루디의 슬픔, 아픔이 살갗을 뚫는 듯했다. 남겨진 자들의 고통은 떠난 사람을 그리워하는 것보다 잊혀간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가장 큰 슬픔으로 다가온다. 루디는 침대 위 자신의 옆자리에 트루디의 잠옷을 펼쳐놓는다. 트루디를 느껴보고 싶어서, 트루디를 기억할 수 있는 작은 것들 하나도 잊지 않으려고…. 그리고 “여보 어디 있어…”라고 속삭인다. 이 영화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었다. 거대한 상실의 구멍이 생긴 것처럼 슬픔이 스며들었다.
트루디가 죽기 전 발트해의 해안을 둘이 걸을 때 루디가 말했다. “그래, 우린 행운이지. 우린 서로가 있으니까. 그게 젤 큰 행복이야….” 그런데 몇 시간 뒤 루디는 홀로 남겨진다. 루디는 남겨진 자녀들에게 말한다. “이제 익숙해져야겠지.” 일본에서 만난 아들은 왜 좀 더 빨리 두 분이 함께 일본에 오지 않았냐고 묻는다. “시간이 많은 줄 알았다”고 루디는 대답한다.
영화 초반부에 노이슈반스타인 성과 알프스 산맥이 있는 독일 남부의 아름다운 자연이 영상으로 나온다. 후반부에서는 일본의 봄 벚꽃과 후지산의 풍경이 잔잔하게 흐른다. 이야기 전개상 도쿄의 다양한 모습이 보인다. 이 때문에 일본 홍보 영화로 평가절하하는 의견도 있다. 하지만 독일에서 흥행에 성공하고 각종 영화상도 받은 작품이다. 편견 없이 이 영화를 보면 좋겠다.
이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또 하나의 장면은 베를린의 자녀 집에서 잠자리에 누운 트루디가 루디에게 “아이들이 낯설다“고 하면서 손을 내밀어 루디의 손을 꼭 잡는 모습이다. 세상의 남편들이여 오늘은 잠들기 전 옆에 누운 아내의 손을 꼭 잡아보자. 그리고 한마디쯤 하자. “미안합니다. 고맙습니다”라고.
당신이 암에 걸려 절망하고 있을 때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알았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아마 인생 최악의 순간이 되지 않을까? 이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항암치료를 위해 병원에 다녀온 날 우연히 남편의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하는 것으로.
영화 '다시, 뜨겁게 사랑하라!'는 항암 치료 중인 여주인공이 암과 남편의 바람이라는 절망의 순간에 딸의 결혼식이 있는 이탈리아로 혼자 떠나게 되는 과정에서 우연히 딸의 시아버지 될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다.
아이들도 다 자라고 무뚝뚝하지만 평범한 남편과 미용사라는 직업이 있는 ‘이다(트리네 뒤르홀름)’는 갑자기 암 선고를 받고 치료 중에 남편이 젊은 여자와 바람피우는 현장을 목격한다. 남편은 그동안 자신도 힘들었다며 별로 미안한 기색이 없다. 이탈리아에서 하게 될 딸의 결혼식도 따로 가자고 간다. ‘이다’는 그동안의 삶이 한꺼번에 무너지는 것 같은 절망을 느끼고 딸의 결혼식을 위해 이탈리아로 떠난다.
혼자 떠나는 길이 익숙지 않은 ‘이다’는 주차를 하다가 ‘필립’(피어스 브로스넌)의 차를 들이받는다. 알고 보니 '필립'은 딸의 시아버지가 될 사람이었다. 일이 되려고 그랬는지 '필립'은 오래전 아내와 사별하고 홀로 지내는 중이다. 결혼식이 다가오면서 '이다'의 남편은 바람을 피운 젊은 여자와 같이 나타나고 약혼자로 소개한다. 결국 두 사람의 불편한 관계를 모두 알게 된다.
딸의 결혼식은 예기치 않은 상황으로 흘러간다. 빨간 드레스를 입은 '이다'의 모습은 필립의 관심을 끌고 생각이 바뀐 남편은 다시 시작하자고 ‘이다’에게 용서를 구한다. 일상으로 돌아온 '이다'의 미용실에 필립이 찾아온다. '필립'은 '이다'에게 마음을 전하고 떠난다.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심한 '이다'는 남편에게 이별을 통보하고 필립을 찾아간다.
이 영화는 2013년 개봉작이다. '수사네 비르(Susanne Bier)'라는 덴마크 코펜하겐 출신의 여자 감독이 만들었으며 제26회 유럽 영화상을 받았다. 감독의 섬세한 연출과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이 영화를 보는 내내 빠져들게 한다.
요즘 영화 다시 보기를 하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예전에 본 영화를 시간이 지나 다시 보면 처음 봤을 때와 느낌이 다르다는 것이다. 이 영화도 그렇다. 나이가 들면서 감정이 변한 것일까?
누구나 나이가 들면 자신의 의지와 다르게 홀로 남겨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이혼이든 사별이든 어떤 이유로 혼자가 되었을 때 이런 멋진 사랑이 다시 찾아온다면 얼마나 근사할까? 혹시 지금 혼자 있다면 주위를 둘러보라. 영화 속 '필립' 혹은 '이다'처럼 멋진 주인공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다시 뜨겁게 사랑하게 될지도.
자녀의 독립 이후부터 시니어의 주거환경에는 변화가 생긴다. 아이들과 살던 집에서 부부 둘이 지내기도 하지만, 사별이나 졸혼 등으로 혼자 살거나, 자녀 세대와 함께 대가족을 이루기도 한다. 노후에 한 번쯤은 고민해야 할 주거공간, 어떻게 계획하는 것이 좋을까?
도움말 서지은 영남대학교 가족주거학과 교수, 니콜라스 욘슨 이케아 코리아 커머셜 매니저, 한국공인중개사협회
사진 제공 이케아 코리아
◇ 1인 ‘편리와 안전’ vs 다세대 ‘융합과 프라이버시’
[1인 가구] 1인 가구의 경우 인테리어는 자기 마음껏 꾸미면 되지만, 그 전에 따져봐야 할 것은 편리성과 안전성이다. 한적한 외곽을 선호하는 경향도 있는데, 사실상 편리하고 안전한 곳은 도심이다. 대형 병원이나 각종 편의시설이 가까워 위기 대응이 빠르기 때문이다. 이에 최근 생겨나는 노인 대상 아파트의 경우 도심에 짓는 사례가 많아졌다. 또, 다양한 편의 시스템이 접목된 고가의 소형 아파트나 오피스텔, 원룸 등도 주목받는데, 그 활용도가 관건이다. 실제 새로운 기술과 서비스가 많아도 사용법을 몰라 무용지물로 여기는 경우도 적지 않다.
Tip+ 편리하고 안전한 ‘스마트홈 기기’ 활용하기
혼자 살다 보면 만일의 사고에 대한 염려를 놓을 수 없다. 긴급 상황 시 ‘원 터치’(one touch)로 가족 또는 지인에게 긴급 메시지를 전송해주는 SOS 버튼이나 사람의 움직임을 파악해 사이렌이 울리는 동작감지센서 등 스마트홈 기기를 적극 활용해보면 어떨까? 대표적으로는 LG U+ ‘스마트홈 패키지’, SK 브로드밴드 ‘지키미 SOS 버튼’, KT ‘기가 IoT홈’ 등이 있고, 월 1만~2만 원대로 서비스 이용이 가능하다. 괜찮다면 스마트 홈CCTV 등을 설치해 가족과 공유하며 안전을 지키는 것도 방법이다.
[다세대 가구] 다세대 가구는 하드웨어적(건축물의 구조나 구성 등) 측면과 소프트웨어적(거주자 사이의 규칙 등) 측면으로 나눠볼 필요가 있다. 먼저 가족끼리 충분히 논의해 교집합을 찾고 이를 우선순위로 주거지를 찾는다. 이때 개인 공간보다는 공용 공간(거실, 주방, 욕실) 중심으로 보는 것이 좋다. 가령 주방을 자주 쓰는 사람이 누구인지에 따라 방 위치를 정하거나, 여분의 주방이 필요한지 등을 고려한다. 아울러 서로 프라이버시를 존중하기 위한 공용 공간 사용 규칙을 만들고 공과금 문제와 가사 역할 분담에 대해서도 미리 상의한다.
Tip+ 다세대 가구 욕실 딸린 안방, 누가 쓰는 게 좋을까?
다세대의 경우 종종 안방 욕실을 누가 사용할 것인가를 두고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가 의견 차이를 보이곤 한다. 거동이 불편하지 않다면, 가급적 부모 세대와 손주들이 함께 공용 욕실을, 자녀 세대가 안방 욕실을 사용하길 권한다. 활동량이 적은 시니어가 방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하면, 공용 공간 이용이 줄어 자칫 집 안에서 소외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아이와 노인은 안전성 측면에서 안전하게 설계된 욕실을 함께 이용하는 게 좋다. 이때 미끄럼 방지 타일이나 손잡이 등을 설치하면 도움이 된다.
◇ 자녀 출가 후 주인 없는 방 vs 모두가 함께 쓰는 공유 공간
[1인 가구] 자녀가 독립하며 쓰임새를 잃어버린 방은 자칫 주거생활의 활력을 떨어뜨리거나 허전함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이유로 집의 규모를 줄여 원룸이나 스튜디오형 오피스텔을 찾지만, 아무래도 익숙하지 않은 주거 형태이기에 생활의 만족도가 떨어지는 편이다. 딱히 이사 계획이 없다면, 남은 방을 취미를 살리거나 분위기를 업그레이드해줄 공간으로 꾸며보는 것도 방법이다.
Tip+ 나만의 홈 컬렉션(갤러리)
남는 공간을 갤러리처럼 활용하면 다채로운 주거공간이 된다. 컬렉션을 구성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색상별로 아이템을 모으거나, 공간을 한 종류의 장식품으로만 진열하는 것이다. 비슷한 소품은 개별 진열보다 모아놨을 때 더 큰 미적 효과를 발휘한다. 투명한 선반이나 유리도어 수납장 등을 사용하면, 물건을 한층 더 돋보이게 연출할 수 있다.
Tip+ 홈 트레이닝 피트니스 룸
요즘처럼 바이러스나 미세먼지 등으로 바깥 활동을 자제하면 기초대사량과 근육량이 줄어 건강에도 악영향을 끼친다. 여유 공간에 홈 피트니스룸을 만들면 어떨까? 자칫 운동기구들로 바닥이 어질러지거나 공간이 좁아질 수 있는데, 이때 벽면 선반을 설치하면 효율적이다. 선반에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스피커 등을 올려놓고 헬스 동영상을 보며 동작을 따라 할 수 있다. 브래킷 사이 거리를 좁게 설치해 요가매트를 수납하거나, 후크를 달아 훌라후프, 밴드 등을 걸어도 좋다.
[다세대 가구] 함께 쓰는 공유 공간으로 ‘거실’을 꼽을 수 있지만, 대부분 텔레비전을 볼 때만 모여 앉아 있을 뿐 특별한 활동을 기대하기 어렵다. 함께 살면서 교류가 부족하면 집 안 분위기가 무겁고 무미건조해지기 쉽다. 최근에는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없애고 대신 책장을 두어 북카페처럼 공간을 꾸미는 등 가족 간 융합과 커뮤니케이션을 위한 인테리어를 시도하는 가정이 늘고 있다.
Tip+ 가족 전용 홈 시네마
탁 트인 공간이 있다면 가족을 위한 전용 극장으로 꾸며볼 수 있다. 가정용 빔프로젝터를 설치해 실내 한쪽 벽면이나, 옥상·마당에 행거와 흰 천 등을 이용해 스크린을 만들어본다. 편안한 의자와 분위기 있는 조명, 텍스타일까지 준비한다면 더욱 아늑한 공간이 된다. 영화관처럼 상영시간표를 만들거나 팝콘 등을 즐기는 것도 색다른 재미다.
Tip+ 휴대기기 충전 스테이션
식구가 많으면 각자의 스마트폰, 디지털카메라, 노트북 등 휴대기기 충전기만 해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간혹 제품에 맞는 충전기를 찾지 못해 곤혹스러울 때도 있다. 방마다 수납공간을 들쑤시다 보면 쓰임새가 모호한 전선이나 어댑터까지 발견하게 된다. 그렇게 집 안은 어수선해지고 이름 모를 물건은 쌓여간다. 거실이나 공유 공간 한 편에 각종 충전기기를 모아놓으면 이러한 불편을 줄일 수 있다. 때때로 가족이 모여 쓸모없는 충전기나 전선 등을 정리하는 시간도 마련한다.
● Exhibition
◇ 레안드로 에를리치:그림자를 드리우고
일정 3월 31일까지 장소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
아르헨티나 출신의 세계적인 설치 작가 레안드로 에를리치의 개인전이다. 에를리치는 주로 거울을 이용한 착시 현상에 착안해 엘리베이터, 계단, 수영장 등 친숙한 공간을 소재로 한 작품활동을 이어왔다. 특히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물리적 체험까지 가능한 그의 작품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몸소 즐길 수 있다는 점에서 주목받는다. 총 4개의 전시공간으로 구성된 이번 전시는 작가의 작품 이미지를 활용해 제작한 영화 포스터 13점으로 꾸민 ‘커밍 순’으로 시작한다. 이어 ‘탑의 그림자’, ‘자동차 극장’ 등 대형 작품을 비롯해 남·북한 지도를 모티브로 한 ‘구름(남한, 북한)’까지 만날 수 있다.
◇ 뜻밖의 발견, 세렌디피티
일정 4월 25일까지 장소 사비나미술관
‘예술가에게 창의적 아이디어가 떠오른 순간, 뇌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우연한 발견이 예술적 발상과 작품으로 연결되기 위해 필요한 환경적 조건은 무엇인가’ 등의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한 시도로 기획된 전시다. 창작에 영감을 준 이미지를 발견한 당시의 순간과 그 특별한 발견을 작품으로 옮겨나가는 창의적 행위의 과정에 대해 그린다. 이세현, 손봉채, 베른트 할프헤르 등 세렌디피티(뜻밖의 발견)를 경험한 작가 21명의 예술작품 78점과 더불어 흥미로운 일화와 사례, 작가노트 등을 공개한다. 이를 통해 아름다움의 발견에는 의식적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일깨운다.
◇ 환상의 에셔展: EXIT-에셔의 방
일정 4월 30일까지 장소 서울웨이브아트센터
20세기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네덜란드 작가 마우리츠 코르넬리스 에셔의 특별전이다. 이번 전시는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에셔의 그래픽 디자인, 판화 에디션, 아카이브 영상과 더불어 VR 작품과 특별 제작된 대형 오브제 등으로 다채롭게 꾸며졌다. 미술에 수학과 과학을 접목한 작가 특유의 기하학적 구조가 돋보이는 작품들을 통해 예술가의 이성적인 논리와 날카로운 통찰력을 엿볼 수 있다. 특히 ‘뫼비우스의 띠’, ‘펜로즈 삼각형’ 등을 직접 체험하며 작품 속 에셔가 표현했던 원리들을 마치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듯 감상하도록 구성한 점이 흥미롭다.
◇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 2019
일정 4월 23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볼로냐 일러스트 원화전’은 1967년부터 시작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전시로, 매년 세계 80여 개국에서 3000명이 넘는 아티스트가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2019년 볼로냐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수상자 76명의 작품 300여 점을 선보인다. 영향력 있는 심사위원단을 통해 선정된 실험적이고 창의적인 작품들을 만날 기회다. 2019년 수상작 전시 외에도 2018년 수상자 벤디 베르니치의 특별전이 함께 열린다. 더불어 어린이 책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라가치상’ 수상 도서 16권이 전시되는 등 다양한 콘텐츠를 통해
세계 일러스트 트렌드를 살펴볼 수 있다.
● Movie
◇ 찬실이는 복도 많지
개봉 3월 5일 장르 드라마 감독 김초희 출연 윤여정, 강말금, 김영민, 윤승아 등
‘우리 순이’, ‘산나물 처녀’ 등으로 주목받은 김초희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3관왕,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수상 등 작품성과 대중성을 인정받으며 화제를 모았다. 평생 일복에 시달리며(?) 살던 주인공 ‘찬실’에게 전에 없던 행운이 굴러들어오며 벌어지는 에피소드가 유머러스하게 펼쳐진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여성 서사의 작품에 따뜻하고 희망적인 메시지를 더했다. 배우 윤여정은 무심한 듯 보이지만 속정 깊은 주인집 할머니 ‘복실’ 역을 맡아 극에 훈훈한 감동을 불어넣는다.
◇ 다크 워터스
개봉 3월 11일 장르 드라마 감독 토드 헤인즈 출연 마크 러팔로, 앤 해서웨이, 팀 로빈스 등
독성 폐기물 유출로 인류의 99%를 위험에 빠뜨린 미국 최고 화학기업 듀폰. 그들의 만행을 고발하며 전 세계를 뒤흔든 일간지 ‘보스턴글로브’의 심층취재팀 ‘스포트라이트’의 실화를 스크린에 옮겼다.
◇ 리암 갤러거
개봉 3월 12일 장르 다큐멘터리 감독 개빈 피츠 제럴드, 찰리 라이트닝 출연 리암 갤러거 등
세계적인 록밴드 ‘오아시스’의 멤버였던 리암 갤러거의 삶과 음악에 대해 엿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 화려한 시절을 지나 험난한 시간을 보낸 그가 자신의 진솔한 심정을 고백하며 관객과의 소통에 나선다.
● Book
◇ 오팔세대 정기룡, 오늘이 더 행복한 이유 (정기룡 저ㆍ나무생각)
경찰서장을 지내다 정년퇴임 후, 온몸으로 부딪히고 깨지면서 자신의 잠재력을 발견한 오팔세대 가장의 파란만장 인생 후반전을 담았다. 진솔하게 풀어낸 저자의 다채로운 에피소드를 통해 공감뿐만 아니라, 용기와 위로의 메시지도 얻는다.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터득한 은퇴설계 노하우를 아낌없이 공개하며 오늘날 오팔세대의 활기찬 제2인생을 응원한다.
◇품위 있게 나이 드는 법 (버나드 오티스 저ㆍ검둥소)
노년기 마음가짐과 실질적 조언의 비율을 3대 7로 구성해 현명하게 나이 드는 방법을 제시한다. 가입할 보험 조건, 병에 걸렸을 때의 대처, 유언 준비 등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도록 돕는다.
◇ 인간의 모든 죽음 (최현석 저ㆍ서해문집)
현대인의 생활 습관과 죽음의 관계, 죽음의 유형과 특징, 치매·간병·호스피스·사별 등 웰다잉을 위한 실용적 지식을 총망라했다. 죽음에 대한 117개의 키워드를 꼽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 정년 아저씨 개조계획 (가키야 미우 저ㆍ㈜소미미디어)
가부장적인 태도를 지녔던 ‘정년 아저씨’가 손주를 돌보기 시작하며 자신의 편견을 깨 나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 주인공의 인식 전환을 통해 가족과 사회를 위한 긍정적 변화를 촉구한다.
◇ 양준일 MAYBE (양준일 외 공저ㆍ모비딕북스)
최근 JTBC ‘슈가맨’을 통해 19년 만에 돌아온 가수 양준일이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털어놨다. 좌절과 상처를 극복할 수 있었던 그가 깨달은 삶의 본질과 철학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