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삶에는 어쩔 수 없이 지나야 하는 많은 관문들이 존재한다. 학교생활이나 입시, 첫사랑 등 사회적, 감정적 과정들을 거친다. 사람의 몸도 비슷하다. 성장에 따른 성장통도 있고, 연령별로 예방을 필요로 하는 질병도 있다. 사춘기도 마찬가지. 갱년기는 그중 가장 대표적인 관문이다. 노화를 비켜갈 수 없는 누구나 이 갱년기를 경험한다. 강동경희대학교한방병원에서 만난 김진분(金珍粉·56)씨 역시 어느 날 갑자기 이 과정을 맞닥뜨린다. 그리고 이어 찾아온 당황스러움은 평범한 중년 여성들과 다르지 않았다.
건강한 남편과 별 탈 없이 잘 자라준 아들 녀석, 곧 취업을 앞둔 딸아이. 김진분씨의 가정은 전형적인 화목한 가정이었다. 마치 행복을 대표하는 광고 속 모델의 미소와 같은 그런 흠잡을 것 없는 나날들이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아차 싶었다. 이미 어둡고 긴 그림자가 그에게 드리워져 있었다. 갱년기였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병, 갱년기증후군
김씨는 처음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이야기한다.
“언젠가부터 목과 어깨가 뭉쳐 아프기 시작했어요. 그저 피로가 좀 덜 풀렸거나 무리한 부분이 있어 그런가 싶었죠. 이러다 말겠지 했는데 도통 사라지질 않았어요. 몸이 불편하니 잠도 잘 안 오고, 잠을 제대로 못 자니 피로는 점점 더 쌓여가고, 악순환이었죠.”
안 되겠다는 생각에 동네에서 마사지도 받아보고, 혹시나 해서 정형외과도 가봤다. 당연히 별 문제 없다는 소리만 들었다. 용하다는 한의원도 가봤는데 역시 허탕이었다. 하지만 증상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냥 찌뿌둥한 것이라고 생각해서 운동량을 늘려보면 어떨까 생각했죠. 그래서 많이 걷고 할 만한 운동을 찾아보려고 했는데 어느 날부터 발바닥이 찌릿찌릿해지면서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졌어요. 몸이 무거워서 좀 움직여보고 싶은데 발이 받쳐주질 않으니 여러모로 곤란했죠.”
그러고 나서 그녀는 갱년기 증상을 겪는 중년 여성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증상과 마주친다. 바로 울화였다. 누군가에게 화를 잘 내지 못하는 김씨의 성격이 더해져 중년의 홍역은 그대로 독이 됐다. 가족이나 누군가에게 윽박지를 법도 한데 모두 다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것이다. 당연히 그렇게 품은 화는 다시 열이 됐다.
“밤에 잠을 못 자겠더라고요. 몸이 덥고 뜨거우니 겨우 잠이 들어도 얼마 안 돼 깨버리는 과정이 반복됐죠. 이런 좋지 않은 과정이 반복되니까 혹시 큰 병은 아닐까 덜컥 겁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병원을 찾기로 마음먹었어요.”
다행히 다시 물색한 병원은 효과가 있었다. 비슷한 증상들로 고생한 지인의 추천 덕분이었다. 그렇게 지난 4월 경희대학교한방병원 한방여성건강클리닉 이창훈(李昌勳·53) 교수를 만났다.
이창훈 교수는 김씨를 갱년기증후군 증상을 겪는 중년 여성의 전형이라고 정의했다. 그중에서도 비교적 초기에 속한다고 설명했다.
“나이를 먹는 과정에서 4명 중 1명은 이런 증상을 겪기 마련이에요. 특히 여성의 경우 폐경을 겪으면서 신체의 급격한 변화를 겪는데요, 사람에 따라 적응을 하기도 하고, 못하는 경우도 생기는 것이지요. 가장 대표적인 증상인 열이나 안면홍조 등도 이 때문이에요. 나이가 많아지면서 마르는 것 역시 열 때문입니다.”
남성보다 여성의 증상이 더 다양
이 교수는 누구나 갱년기를 통해 신체적, 정신적 변화를 겪는데 김씨처럼 신체적 질환으로 나타나는 경우를 갱년기 장애라고 설명했다.
“갱년기는 대개 40대 중반에서 50대 중반 사이를 말하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10여 년 정도 일찍 맞는 경향이 있어요. 남자도 갱년기 증세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자는 남자보다 생리적인 면에서 변화가 많고, 정서적인 면에서도 민감한 편이어서 심신에 다양한 증상이 나타납니다.”
최근의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경향과 달리 갱년기는 심하면 30대 초반에도 증상이 나타나는 조기화를 보이고 있다고 이 교수는 덧붙였다. 잘못된 식습관이나 운동 부족, 스트레스, 환경적 요인 등이 여성호르몬의 감퇴를 촉진한다는 것. 또한 난소낭종 등으로 난소를 일찍 절제했거나, 자궁근종 등으로 자궁을 적출한 경우에도 수년 내 갱년기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단다.
그렇다면 갱년기 증상으로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이 교수가 설명하는 갱년기 증상은 흔히 알려진 것 이상으로 다양했다.
“갱년기 과정에서 겪는 증상들은 셀 수 없이 많아요. 안면홍조에서부터 식은땀, 불안, 가슴 두근거림, 불면증, 잦은 소변, 요실금 등이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갱년기 증상입니다. 하지만 이외에도 두통, 목의 통증, 어깨 결림, 손발 저림, 냉증, 요통, 발 통증, 질 건조로 인한 질염 등이 나타나기도 하고, 빈혈이나 갑상선 이상, 우울증, 유방암, 관상동맥질환, 소화기질환, 담석증, 담낭염, 방광염증, 자궁암, 골다공증, 각종 관절염과 관절 부상 등도 갱년기증후군과 무관하지 않아요.”
또 폐경 후 시간이 지나면서 골다공증이 급속도로 진행되기도 하고, 고지혈증이 증가하면서 고혈압, 심장병, 중풍과 같은 심혈관 질환이 발생한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김씨는 첫날 이 교수를 만나 치료했던 날을 기억했다.
“교수님을 처음 찾은 날 굉장히 힘들었어요. 병명도 모르겠고 게다가 큰 병일지도 모른다는 걱정까지 있었으니까. 처음엔 몰랐었는데, 온갖 걱정을 하고 있었나봐요. 교수님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제 이야기는 하소연으로 바뀌어 있더군요. 교수님께서 너무 공감을 잘 해주신 덕분인 것 같아요. 마지막에는 부끄럽게 눈물까지 들켰으니까요(웃음).”
김씨는 이 교수가 증상에 대해 상세하고 친절한 설명을 해준 덕분에 온갖 걱정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그녀는 “사람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했단다. 특히 “병은 마음에 담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병원에 두고 다니는 것”이라는 이 교수의 조언이 가장 와 닿았다고 말했다.
‘몸의 적응’에 초점 맞추는 한의학
이 교수가 선택한 치료는 초기에 선택하는 치료법 중 하나인 수기치료. 병원에 따라 추나요법으로 불리기도 하는 이 치료법은 굳어져 있는 근육을 풀어 긴장도를 완화하고 몸의 순환을 도와준다.
“양의학이 갱년기로 인한 호르몬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데 집중한다면, 한의학의 관점은 다소 다릅니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몸이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을 씁니다. 노화로 인해 부족함이 계속되더라도 불편함이 생기지 않게 만드는 것이 치료의 지향점입니다.”
좀 더 자세히 풀이하면, 갱년기증후군의 한방치료는 크게 노화로 인한 생식력·생명력 저하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을 개선하는 방법과, 스트레스 등 정서적인 변화로 나타나는 현상을 개선하는 방법으로 구분한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한약치료는 초기 또는 갑자기 나타나는 증상과 만성적으로 나타나는 증상을 구분해서 처방하는데 가미소요산, 시호가용골모려탕, 육미지황탕, 사육탕, 귀비탕 등의 한약이 쓰인다. 이외에 침이나 뜸치료, 수기치료 등 환자에 따라 다양한 치료 방법이 있고, 환자에게 맞는 운동법을 추천해 집에서 하도록 만드는 자율훈련법도 스트레스 완화에 효과가 좋아 자주 쓰인다.
주치의처럼 새로운 동반자로
김씨는 모든 증상이 완치됐지만 계속 병원에 다닐 것이라고 선언했다. 의외였다.
“이번 경험은 제게 건강관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는 계기가 됐어요. 그래도 병이 더 심해지기 전에 맘 맞는 의사를 만나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교수님 조언대로 식생활에도 변화를 주고, 운동도 시작했어요. 아쿠아로빅 수업도 시작했고, 수업이 없는 날을 대비해 헬스클럽도 끊어놨어요. 또 아파트 주변 산책로가 잘되어 있어서 걷기운동도 꾸준히 하려고 해요. 하지만 무엇보다 정기적으로 병원을 찾겠다고 다짐한 것이 가장 큰 변화인 것 같아요. 새롭게 주치의가 생겼다 생각하고 교수님도 뵙고 가족의 건강도 부탁드릴 계획이에요.”
이창훈 교수도 갱년기 증상이 나타나면 무조건 참지 말고 병원을 찾아 도움을 받을 것을 권했다.
“자신의 갱년기 증상이 어떤지는 갱년기지수(Kupperman’s index) 설문지를 통해 어느 정도 체크해볼 수 있어요. 만약 심상치 않다 싶으면 바로 병원을 찾아 조기치료하시길 바랍니다. 요즘 한방병원에서는 적외선 체열촬영법을 통해 상열감은 물론 전신에 나타날 수 있는 통증, 수족냉증, 손발 저림 등을 시각적으로 판단하기도 하고, 수양명경경락기능검사로 스트레스 상태나 민감도, 자율신경 균형 상태 등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참는 것을 미덕으로 여기시는 경우가 많은데 무모한 일이에요. 간단한 치료만으로도 나을 수 있으니 꼭 조기에 찾아주셨으면 합니다.”
라디오를 한창 듣던 시절. 라디오 광고에서 최명희의 장편소설 이 10권을 끝으로 완간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소설가의 의지가 아니었다.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듯 처절했던 몸부림을 생의 마감과 함께 알린 것이다. 길고 긴 소설, 아쉬움 속에 마침표 찍고 너울너울 혼불 돼 날아가버린 작가 최명희. 그녀의 살아생전 활동과 다양한 모습들을 만날 수 있는 최명희문학관에 다녀왔다.
소설 의 작가 최명희를 만나다
거리는 화사했다. 어린 학생들의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상춘객들의 밝은 얼굴. 기분 좋은 전통 도시 전주는 여행객들과 신나게 어울리고 있었다. 이렇게 한옥마을 거리를 걷다 만나는 곳이 최명희문학관이다. 2006년, 전주 지역에 처음으로 세워진 최명희문학관은 전주시가 건설한 뒤 민간 전문가가 운영하고 있다. 작년 최우수 문학관에 뽑힌 최명희문학관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지역주민들과 함께하는 문화예술현장으로 자리 잡았다.
최명희문학관은 말 그대로 작가 최명희를 기리고 만나는 장소다. 1980년에 등단해 1981년부터 대하소설 을 집필하던 도중 1998년 난소암으로 세상을 떠난 작가 최명희. 살아생전 오로지 모국어에 대한 집착스런 사랑과 강한 필력을 바탕으로 마음을 사로잡더니 결국 독자들 가슴에 묻히고 말았다. 그녀의 혼이나마 편히 돌아와 살아 있는 곳이 바로 이곳, 최명희문학관이다. 물론 작가 최명희를 모르고 관심이 없다면 앞문을 통해 뒷문으로 나가는데 단 3초면 된다. 처마 밑에 내려놓은 돌 하나, 목각 하나에 담긴 의미를 되새기고 느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하루 종일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도 멋질 것이다. 문학관 어느 한 공간에도 혼불이, 그리고 최명희가 없는 곳이 없다. 친구 혹은 지인들과 나눴던 엽서들도 전시하고 있다. 특히 드라마 작가 이금림이 기증한 최명희의 이력서가 눈에 띈다.
소설의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다
최명희 하면 을 꼽을 수밖에 없다. 1981년 5월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장편소설 공모전에 당선된 이후 17년간 소설 쓰기에 집중했다. 당시 고료로 받은 2000만원은 강남의 아파트를 살 수 있을 만큼 많은 돈이었다. 최명희는 그 상금으로 강남의 성보아파트를 장만했다. 앉아서 글만 쓴다고 해서 지인들은 그녀의 아파트를 ‘성보암’이라 불렀고 그녀에게는 ‘성보살’이라는 별명을 달아줬다.
은 1930~1940년대 일제강점기의 전라북도 남원이 배경이다. 유서 깊은 가문 ‘매안 이씨’ 문중에서 무너져가는 종가(宗家)를 지키려는 종부(宗婦) 3대와 이씨 문중의 땅을 부치며 살아가는 상민마을 ‘거멍굴’ 사람들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사실 최명희는 10권을 끝으로 을 끝낼 생각이 아니었다. 열 번째 책을 완성할 때쯤 난소암에 걸렸고 더 이상 집필을 할 수 없게 됐다. 최명희가 남긴 취재수첩 속에는 앞으로 쓰려고 했던 목록들이 수십 가지가 있었다. 그녀가 생존했다면 일제강점기 뒤 어떤 이야기가 펼쳐졌을지 아무도 모를 일. 끝을 알 수 없었던 작가 최명희의 열정을 사랑하고 기억하고 싶어 했기에 문학관이 생겨나고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 아닐까.
최명희문학관을 다녀간 이름 하나, 하나…
최명희문학관은 초·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백일장과 문학상 공모뿐만 아니라 전 세대를 아우르는 프로그램으로 대중과 소통하는 살아 있는 문학관이다. 시니어층 참여가 많다는 ‘2017 꽃심소리’는 을 함께 읽어나가는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2006년 개관 때부터 이곳을 찾았던 사람들의 방명록은 모두 아크릴 상자에 담겨 전시되고 있다. 창고에 넣어둘 계획이었으나 공간이 협소해 방명록을 쓰는 한쪽에 놓아두었다. 방명록에 쓴 글은 스캔을 해서 홈페이지에도 올려놓는다. 최명희문학관에 방문해 방명록을 남겼다면 인터넷을 통해 언제든지 자신이 썼던 방명록 글을 찾아볼 수 있다.
여전히 사랑받는 소설가 최명희
하늘의 별이 돼서도 극진한 사랑을 받는 사람이 또 있을까 싶다. 눈과 귀를 자극하는 다양한 매체의 발달로 문학의 설 자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세상이지만 그녀를 기리는 문학관과 공원은 전북 지역에 세 곳이나 된다. 의 배경이 된 남원에는 소설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낸 혼불문학관(2009년 개관)이 있고, 최명희 작가의 모교인 전북대 옆에는 작가의 묘소와 함께 혼불문학공원이 자리하고 있다. 산책로 곳곳에 소설 속 문장을 적어놓은 비석이 인상적이다. 그중에서도 전주한옥마을 속 최명희문학관이 사람들의 발길이 제일 잦은 곳. 다양한 세대와 소통하며 매일이 바쁜 문학관이다. 현대를 살다 간 ‘최명희’라는 작가가 영원히 기억될 수 있는 곳으로 오래오래 함께하길 바라본다.
이용 정보
관람시간 오전 10시~오후 6시
휴관일 매주 월요일, 1월 1일 설날과 추석
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최명희길 29
한밤중 나타났다가 아침이면 사라지는 도깨비처럼, 비밀스러운 거래가 일어나던 도떼기시장을 이른바 ‘도깨비시장’이라 부르곤 했다. 이처럼 특정한 날과 시간이 되면 열리는 장이 있다. 바로 ‘서울밤도깨비야시장’이다. 청계천과 한강공원 등 물가 인근에서 열려 밤공기가 선선한 6월이면 산책 삼아 거닐기 제격이다.
서울밤도깨비야시장(이하 야시장)은 서울시에서 출범해 올해로 3회째를 맞이하는 행사다. 3월부터 10월까지 금·토요일(청계천은 토·일요일) 저녁마다 여의도·반포 한강공원과 청계천, 동대문디자인프라자(DDP)에서 열린다. 청년 상인들이 운영하는 각양각색 푸드트럭과 핸드메이드 숍, 다채로운 공연 무대 등을 만날 수 있다.
‘월드나이트마켓’이라 부르는 여의도 야시장은 한강의 유람선과 마포대교, 쌍둥이빌딩 등에서 비추는 조명이 별처럼 반짝이는 야경을 자랑한다. 잔잔한 강 물결과 어울리는 버스킹(길거리 연주) 공연과 더불어 아시아·유럽·남미의 전통 공연까지 다양하게 펼쳐진다. 한강공원의 너른 잔디밭에는 텐트와 돗자리를 펴고 야시장을 즐기는 이들로 가득하다. 인근 자전거도로와 산책로를 다니다가 반짝이는 야시장의 불빛을 보고 발걸음하기도 한다. 한여름에는 열대야에 더위를 식히기 위해 찾는 방문객이 주를 이룬다. 돗자리만 챙겨간다면 도시락을 싸가지 않고도 여름밤 가족 나들이를 즐길 수 있다.
동대문디자인프라자 ‘청춘런웨이마켓’에서는 신나는 DJ공연과 함께 패션쇼가 열린다. 다른 야시장보다 젊은 층의 비율이 높아 신선하고 활력이 넘치는 분위기다. 패션의 거리인 만큼 신진 디자이너들의 패션쇼와 더불어 개성 넘치는 아이디어 상품과 디자인 소품들을 볼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패션 트렌드와 젊은 세대 문화를 느껴보고 싶은 이들에게 추천한다.
도심의 야경과 분수, 빛과 음악이 흐르는 반포 야시장 ‘낭만달빛마켓’에서는 로맨틱한 재즈, 팝페라, 어쿠스틱 음악 공연이 열린다. 해질 무렵 찾아가면, 붉게 물든 석양 아래 무지갯빛 물줄기가 쏟아지는 낭만적인 광경을 볼 수 있다. 인근 반포대교와 한남대교 등 도심의 야경을 배경으로 이색적인 음식과 시원한 맥주를 곁들이는 이가 많다.
청계천을 따라 펼쳐지는 ‘타임슬립마켓’은 사랑의 자물쇠와 소원의 나무, 도깨비 퍼레이드 등 다양한 이벤트를 운영한다. 평소에는 광통교 일대에서 열리지만, 시즌별로 특정한 날에는 청계광장에서도 야시장을 만날 수 있다(여름 시즌 8월 18~20일). 도심 속 시민들의 쉼터로 자리 잡은 청계천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이 색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각 지역 야시장 종합 안내소 겸 상황실에는 의료지원 본부가 마련돼 있어 응급상황 시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푸드트럭, 점포 정보 및 공연 안내는 서울밤도깨비야시장 홈페이지에서 확인 가능하다.
마로니에 공원의 추억을 들추며
비 내리는 날의 외출이 신나고 즐거울 시기는 지났지만 때론 예외일 때도 있다. 빗속을 뚫고 혜화동의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 도착하니 역시 날씨에는 아랑곳없는 청춘들이 삼삼오오 손잡고 오가고 있었다. 참 오랜만에 와보는 마로니에 공원이지만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한때 젊은이들의 문화를 꽃피웠던 이곳에서 봄날의 파릇함, 낙엽 지던 가을의 스산함을 느끼며 보냈던 한때의 시간이 떠올라서인지도 모르겠다. 누구에게나 있음직한 그런 젊은 시절의 추억이 마로니에 공원에도 있을 것이므로.
이화마을과 낙산공원 산책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낙산공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화마을의 복잡한 골목과 계단을 거쳐야만 하는데 하나하나 눈여겨보면서 걸어가는 재미도 있다. 조금은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오래된 주택가와 상점들이 조금 전 지나왔던 대학로의 첨단거리들과 대조된다.
해발 124미터 높이의 낙산
낙산을 오르다 보면 옛 풍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이화마을이 있다. 우리가 어릴 적 보았던 골목이나 담벼락 풍경에서 푸근함을 얻는다. 아무리 그래도 유의할 점은 현재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 우리의 산책이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우리들에겐 편안한 산책길이고 또는 행복한 데이트일 수도 있지만 그들에겐 스트레스가 될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언덕과 좁은 골목길과 낡은 계단은 계속 이어졌다. 어찌 보면 비좁은 길이 어수선해 보일 수 있지만 길 옆 풀숲이나 비 맞은 꽃과 나무들이 정겹기만 하다. 비 오는 날의 정취가 풍경들을 더 아늑하게 그려낸다. 쭉 걷다 보면 길목마다 친절한 안내 표지판이 곳곳에 있어 헤맬 일도 없으며 길을 선택해서 다닐 수 있다. 이화마을 텃밭, 이화동 대장간, 이화동 벽화마을, 낙산정, 그리고 아기자기한 벽화들과 놀이광장, 쉼터 등 지루할 틈 없는 산책길이다.
한참을 걷다 보니 땀이 흐른다. 이럴 땐 골목 옆의 작은 구멍가게에서 아이스바 하나 사 먹으며 숨을 고르거나 등나무 아래 정자에서 땀을 식히면 된다. 많은 이들이 찾는 곳이다 보니 이쁜 카페도 있고 가락국수이나 초밥을 파는 작고 멋진 음식점뿐 아니라 예술 갤러리도 있다. 먹으며 놀고 즐길거리가 얼마든지 있는 낙산공원이다.
중턱 이상 올라오니 성곽이 보인다. 성곽 길을 중심으로 안과 밖으로 길이 나 있다. 성곽 밖으로는 오래된 주택과 아파트가 보인다. 낙산의 옛 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함께 볼 수 있다. 밤에는 성곽 길에 불을 켜는데 이 불빛이 성벽을 더욱 환상적으로 만들어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특히 사진을 찍는 사람들에겐 낙산의 야경이 인기가 많아 촬영 명소가 되었다.
어느덧 전망대에 올랐다. 비에 젖은 서울이 내려다보인다. 한참을 내려다보며 땀 흘리면서 올라온 이화마을과 낙산을 되짚어 생각해본다. 낙타 모양의 산이어서 낙산이라 이름 붙여진 이곳은 단종비인 정순왕후가 단종 폐위 이후 평민이 되어 살았던 한 서린 곳이다. 평생을 궁 안에서만 살던 정순왕후가 궁 밖으로 나와 단종을 그리워하며 살았을 그 모습을 생각하며 역사의 한 페이지를 떠올려볼 수 있는 곳이다. 온통 도시화되어가던 서울의 한 공간이 이렇게 복원되어 휴식하며 즐길 수 있음은 고마운 일 아닌가. 낙산공원 산책을 마치고 대학로 문화거리로 나가 연극 한 편 보고 맛집을 들르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낙산의 산자락을 따라 동대문으로
시간이 허락된다면 낙산 성곽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동대문의 DDP로 향해보는 것도 좋다. 낙산의 산자락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동대문을 중심으로 하는 시내가 나오고 최첨단 현대 복합 문화시설이 어우러진 동대문 디자인플라자가 있다. 모든 건물들의 겉면이 알루미늄 패널로 되어 있고 밤이면 휘황한 조명으로 멋진 볼거리를 제공한다.
DDP(Dongdaemun Design Plaza)는 3차원 첨단 설계기법 BIM을 도입했다. 이라크 태생의 세계적인 영국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의 작품으로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알림터, 배움터, 살림터, 어울림 광장, 동대문 역사문화공원과 각종 편의시설로 이루어져 있어서 즐길거리가 아주 많다. 특히 우주선을 보는 듯한 눈부신 야경이 일품이다.
쇼핑천국 방산시장과 광장시장의 눈요기와 먹거리
동대문은 우리나라 최고의 상권인 동대문 시장을 중심으로 다양한 볼거리와 먹을거리들이 도처에 있다. 길 건너편으로 건너가면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이 있다. 1945년 광복 이전에 작은 시장이 형성되어 지금까지 발전을 거듭하며 이어져온 방산시장이 바로 앞에 있다. 이곳에서 각종 식료품이나 제과제빵 재료, 포장재와 인테리어 용품들을 시중보다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다.
광장시장은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시장으로 점포 수가 5000개가 넘는 대규모 의류시장이다. 뿐만 아니라 농수산품을 비롯한 먹을거리가 풍부한 시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곳 먹자골목의 녹두전이나 겨자 장에 찍어먹는 마약김밥은 먹지 않고 지나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할 만큼 유명하다. 저렴하고 푸짐한 최고의 메뉴다. 맛있게 잘 먹은 후 그 옆의 시원한 청계천을 바람 쐬며 거닐면 그야말로 완벽한 마무리다.
이렇게 한나절을 보낸다면 서울의 역사 유적을 감상하며 현재의 자신을 생각해볼 시간도 가질 수 있고 치열한 삶의 현장도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다. 산책길 내내 비가 내렸다. 이제 막 시작된 낙산의 여름이 비에 젖어 녹음의 짙푸름이 더했다. 비 오는 날의 외출도 보람 있고 즐거울 수 있음을 확인한 날이다. 동대문 DDP엔 날씨와 상관없이 많은 인파로 붐볐고, 광장시장과 방산시장은 여전히 활기 찬 풍경을 필자에게 보여줬다.
희망설계재능기부연구소 산악회원들은 매달 둘째 주말 산행을 즐긴다. 5월 두 번째 토요일 10시 독립공원에서 9명이 모여 안산자락길 산행을 하였다.
안산은 서울 시내 중심에서 홍제동으로 향하는 통일로를 사이에 두고 인왕산과 마주하고 있는 높이 295.9m 나지막한 도심의 산이다. 독립문역에서 바로 연계되는 대중교통 이용이 편리한 곳이다.
조선시대 인조 때인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전투를 벌였던 곳으로 유명하며, 한국전쟁 때 서울을 수복하기 위한 최후의 격전지였던 곳이다. 잘 정비된 주장애길 오르는 길에는 5월의 여왕 아카시아 천국이다. 향기에 취하여 앞서거니 뒤서거니 정담을 나누면서 걷고 보면 안산의 정상 봉수대에 다다른다.
나무그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 정성껏 준비한 간식이 뷔페식당을 만들었다. 아카시아 그윽한 향기에 싸여 정상주 한 잔 높이 들고 재능기부 자원활동을 서로 격려하였다. 학창시절 소풍 날, 선생님을 피하여 친구들과 돌려가며 마셨던 ‘첫 소주’가 생각났다. 그 첫맛을 못 잊어 소주를 얼마나 좋아했던가.
봉수제는 낮에는 연기를, 밤에는 불을 피워서 변방의 긴급한 사정을 중앙과 해당지역 주민들에게 알리는 통신체계였다. 전국 각지에서 오는 봉수는 모두 남산의 5봉수대에 집결되었다. 평안도 강계-> 황해도-> 경기도-> 서울 무악 동봉수대-> 남산 제3 봉수대로 전달되었다.
안산의 백미는 메타세콰이어 숲길! 독립공원에서 출발하여 한 바퀴 도는 거리는 7㎞이다. 전국에서 최초로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걸을 수 있도록 무장애 길로 조성된 이 산책로는 메타세스콰이어 울창한 숲으로 이루어졌다. 메타세스콰이어(Metasequoia)는 중국이 원산지로 35m까지 자라고 수피는 회색빛을 띤 갈색이고 세로로 벗겨진다.
저 건너편 인왕산을 조망하고 독립공원으로 다시 돌아왔다. 비를 머금은 찬 바람이 일기 시작하였다. 하산을 서둘렀다. 영천시장 골목 족발집으로 빠져들었다. 만원의 행복 차례다. 막걸리 잔이 돌고 소주잔이 비워졌다. 음식이 푸짐하고 맛이 좋고 값이 싸다. 처음으로 회비에서 거스름돈을 받았다.
‘만원의 남는 행복!’
올해 5월은 공휴일과 주말이 겹쳐 징검다리 연휴를 즐길 수 있다. 특히 이번 석가탄신일(3일)은 어린이날과 가까워 손주와 함께 나들이 갈 곳을 찾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와우정사에 들러보고, 인근 용인농촌테마파크까지 즐겨보는 것 어떨까?
세계 각국의 불상 3000여 점을 만나다
경기도 용인시에 위치한 와우정사(臥牛精舍)는 도심에서 가깝고 산수가 아름다워 산책 삼아 거닐기에 안성맞춤이다. 입구로 들어서면 절을 지키고 있는 커다란 ‘불두(佛頭)’가 눈에 띈다. 그 아래에는 아담한 불상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불두 바로 앞 연못에 석가모니의 은은한 미소가 비친다. 영어의 감탄사 ‘와우(wow)’를 연상하게 하는 독특한 명칭은 절이 있는 연화산이, 누운 소[臥牛]의 형상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또 누워 계신 부처님(와불, 臥佛)을 뜻하기도 한다. 열반전에 가면 한 팔을 괴고 누워 있는 석가모니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와불상은 인도네시아에서 들여온 향나무를 다듬어 만들었는데, 길이 12m, 높이 3m인 세계 최대의 목불상으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고 한다.
사찰을 한 바퀴 돌아보는 데 1시간 남짓이면 충분하다. 와불이 봉안된 열반전을 비롯해, 1988년 서울올림픽 당시 타종한 12만 톤짜리 통일의 종, 한국·중국·인도·미얀마·스리랑카 등 아시아 각지에서 들여온 3000여 점의 불상 등을 만날 수 있다. 꼭대기에 있는 대각전의 불고행상(佛苦行像)은 석가모니가 고행 끝에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을 때의 뼈만 앙상하게 남은 모습으로 있어 숙연함이 느껴진다. 대각전 아래 삼성각에서는 원뿔 모양의 돌탑 무더기가 보인다. 그 주변을 살펴보면 방문객들이 저마다의 소원을 빌며 쌓아 올린 작은 돌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 연화산 와우정사
위치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해곡동 산43
◇ 용인농촌 테마파크
사찰만 보고 가기 아쉽다면, 와우정사에서 차로 10분 이내로 갈 수 있는 ‘용인농촌테마파크’에 들러보자. 각양각색의 꽃들로 가득한 ‘들꽃광장’을 비롯해 철쭉이 흐드러진 ‘철쭉원’, 튤립으로 꾸며진 ‘꽃과 바람의 정원’ 등 꽃을 테마로 한 다양한 코스를 즐길 수 있다. 따스한 봄 햇살 아래 테마파크를 둘러싼 잣나무 산책로에서 삼림욕을 하고, 건강지압로를 거닐어보는 것도 좋겠다. 손주와 함께라면 나비, 풍뎅이 등 다양한 곤충류를 체험할 수 있는 ‘곤충전시관’이나, 토끼와 공작 등 동물들이 살고 있는 ‘관상동물농장’에 방문할 것을 추천한다(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원삼면 농촌파크로 80-1).
여수항을 출발한 쾌속선이 손죽도와 초도를 들른 후 남쪽을 향하다 좌우로 요동치기 시작한다. 바람이 제법 부는 탓에 파도가 뱃전에 자꾸 부딪히는 모양이다. 하늘이 도와야 갈 수 있다는 섬 거문도. 내륙과 제주도 중간 망망대해에 위치해 좀처럼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다. 불현듯 우리를 태운 쾌속선이 요동을 멈춘다. 동도, 서도, 고도 세 섬이 병풍처럼 둘러싼 도내해(島內海)에 무사히 안착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마침내 거문도에 첫발을 디뎠다.
동경 127°11′, 북위 34°에 위치한 거문도는 동도(東島), 서도(西島), 고도(古島) 이렇게 세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옛 문헌에는 삼도, 삼산도, 거마도 등으로 기록돼 있는데 현재 거문도로 불리는 데는 두어 가지 설이 전해진다. 첫째는 섬에 아름드리나무로 가득 차 한낮에도 어두웠는데 이때 고유어 ‘검은’을 한자어로 바꿔 거문(巨文)이 됐다는 설이다. 두 번째 설은 중국 청나라 제독 정여창이 섬에 학문이 뛰어난 사람이 많은 것을 보고 문장가들이 많다는 뜻인 ‘거문(巨文)’으로 개칭하도록 건의해 지금의 이름이 됐다는 설이다.
한반도 남쪽 외딴 섬까지 청나라 제독이 찾아온 연유는 거문도의 생김새에서 찾을 수 있다. 거문도를 구성하는 세 섬은 원을 그리듯 포진해 있는데, 덕분에 가운데 위치한 도내해(島內海)는 외부의 험한 날씨 영향을 적게 받는다. 게다가 수심까지 깊어 무리 없이 큰 배가 진입할 수 있고 이는 남해 망망대해에서 천혜의 항구 역할을 하기에 제격인 셈이다. 한반도 침략을 노리는 서구 열강들 중 영국이 먼저 1885년에 거문도 불법점거를 행했고 이때 조선을 대신해 협상을 벌이던 청나라의 장수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옛부터 사람들이 건너와 살았던 동도, 서도와 달리 무인도였던 고도는 영국의 해군기지로 사용되다가 이후 일제의 어업기지로 탈바꿈하면서 세 섬의 행정 중심지로 개발됐다. 때문에 거문도에는 여전히 영국군 묘지나 일제 군사시설 등이 남아 있고 일본식 건축 양식을 가진 주택들도 간간이 눈에 띈다. 거문도가 바다 위 요충지 역할을 했기에 1905년 서도에는 우리나라 남해 연안 최초로 등대가 들어서기도 했다.
망망대해 위를 걷는 길
동도 선착장에 잠시 들렀던 쾌속선이 고도에 위치한 거문도여객선터미널에 정박했다. 흔들리던 여객선에서 덩달아 요동치던 속을 안정시키며 땅을 밟았다. 김유희, 최미연씨도 같이 내린다. 서울서 여수까지 350km, 여수에서 거문도까지 다시 115km. 봄을 찾아 먼 길을 왔다.
터미널 근처 숙소에 짐을 풀어 몸을 가볍게 하고 본격적으로 섬 탐방에 나선다. 오늘 목적지는 거문도 등대. 단, 덕촌리 마을 뒤편 불탄봉을 경유하는 코스를 택해 가벼운 산행을 곁들이기로 한다. 밑으로 배가 지나다닐 수 있게 봉긋한 아치형으로 된 삼호교를 건너 고도에서 서도로 넘어갔다.
산행은 덕촌리 거문중학교 옆길로 시작한다. 가파르지 않은 오르막을 그리 오래 걷지도 않았는데 뒤편으로는 벌써 바다풍경이 펼쳐진다. 등산로 옆으로는 육지에서 보던 것과 다른 생소한 식생들이 보인다. 연평균 14.4℃로 따뜻한 남쪽 기후 때문이다. 시작부터 낯설음이 재미를 준다.
이번 여정 중 가장 높은 불탄봉이 해발 200m가 채 안 돼 거문중학교 담벼락부터 억새밭이 지천인 능선까지는 15분 정도밖에 안 걸렸다. 거문도 등대는 남쪽이지만 우리는 잠시 반대 방향에 있는 불탄봉을 들렀다 가기로 한다. 일제 강점기 지하 관측시설 위에 설치한 불탄봉 데크에서 우리는 첫 거문도 파노라마를 즐겼다. 바람은 사뭇 불었지만 그래도 사방팔방 펼쳐진 섬과 바다 풍경이 시원하다.
다시 방향을 남쪽으로 잡아 억새밭을 지난다. 억새밭 이후에는 동백나무숲이다. 끔벅이는 황소 눈만큼 큰 빨간 동백꽃이 피어 있기도, 이미 떨어져 있기도 하고 이제 피려고 꽃망울을 웅크린 것도 있다. 길은 평탄해 동백나무 터널이 편안하게 느껴진다.
한 차례 오르막과 내리막을 지나자 절벽 해안에 맞닿는다. 앞으로는 망망대해가 펼쳐지고 진행 방향 저 멀리에는 목적지 거문도 하얀 등대가 모습을 드러낸다. 파도에 요동치던 배를 놀이기구 정도로 여긴 유희씨와 달리 고소공포증이 있는 미연씨는 경치를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다. 아찔한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고 짜릿한 절벽 풍경이 주는 유희를 만끽하기 위해 절벽과 조금 거리를 두고 걸었다.
꽃다운 계절, 꽃다운 시절
보로봉까지 절벽 해안길이 이어진 후에는 365계단을 내려간다. 바다에 인접한 목넘이를 지나고 나면 곧 거문도 등대로 이어지는 숲길이다. 동백나무, 생달나무, 해국과 같이 잎이 두텁고 광택이 강한 녹색을 띠는 식생들이 길 옆을 채운다. 느슨한 경사를 오르다 보니 멀리서 보이던 거문도 등대가 어느덧 코앞이다.
등대 앞 관백정에 서서 동쪽을 바라보았다. 백도가 어슴푸레 모습을 드러낸다. 날이 맑은 날에는 제주도까지 조망된다 한다. 수평선 끝에서부터 왔을, 여전히 강한 바람이 불지만 훈훈한 봄기운이 만연한 기색이다. 서서히 해는 지고 있는데 날이 흐릿해 노을이 보이지는 않을 태세다. 목넘어까지 왔던 길을 돌아 나온 뒤 도로를 따라 숙소가 있는 고도로 돌아가기로 한다. 오늘 저녁은 자연산 횟감으로 배를 든든히 채우기로 하고 다소 지친 걸음에 힘을 보탠다.
다음 날. 몸이 제법 찌뿌둥하다. 어제 예상보다 많은 거리를 걸었다. 여독이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12km 정도를 걸었으니 오늘은 조금 편안히 서도 북쪽 끝 녹산등대를 다녀오기로 한다. 택시를 불러 서도 북쪽 끝에 있는 거문초등학교 서도분교장 인근까지 갔다. 오늘은 날이 좋아 차창 밖 바닷물이 반짝이며 생동감을 발산한다.
녹산등대를 향하는 길은 거문초등학교를 기점으로 양옆 두 갈래로 나뉜다. 택시기사는 오른쪽 길에 비해 왼편 길이 완만하다며 왼편으로 들어갔다 오른편으로 나오는 코스를 추천했지만 우리는 오른편을 먼저 택했다. 누적된 피로로 일행들이 오르막보다 내리막이 더 힘들다고 하소연했기 때문이다. 가파르다고 한 오른편 길도 생각만큼 가파르지는 않다. 10분 정도 오르니 얕은 언덕에 가렸던 녹산등대 전경이 드러난다.
풍경은 그림 같다. 기본은 우선 쪽빛 바다와 하늘이다. 여수에서 보던 빛깔보다 더 맑고 밝은 바다, 말 그대로 화창해 온기를 품은 봄 하늘이 캔버스 전체를 가득 채운다. 그다음은 바다 가장자리 하얀 포말 일으키는 해안가 바위와 초원, 잘 정비된 산책로다. 산책로 끝은 녹산등대가 하얀 점을 찍는다.
봄기운 만연한 망망대해 위 산책로로 꽃다운 나이 방년 29세, 25세 아가씨들이 걸어간다. 시간을 확인하니 육지로 나가는 배를 탈 시간까지 아직 넉넉하다. 여유를 부려 천천히 걷는다. 등대 아래서 바람도 느끼고 햇살도 만끽한다. 근처 해변에 들러 투명한 바다도 한눈 가득 담아 넣는다. 꽃다운 계절에 꽃다운 시절, 이제 찬란한 봄이다.
우리 아파트 뒤편의 산책로는 개울을 따라 2km나 이어져 있다.
시니어들의 운동량으로 최적이라는 왕복 4km 걷기 산책길은 동네 사람뿐 아니라 다른 곳에서도 걸으러 오는 명소가 되었다.
산책로를 따라 개천이 이어지고 유명한 절도 지나니 구경하기 좋고 경치 따라 걷다가 삼삼오오 벤치에서 담소를 즐기는 모습은 보는 이의 마음도 흐뭇하게 해준다.
요즘 필자도 틈나는 대로 모자에 선글라스로 중무장하고 열심히 걷고 있다.
운동하러 나선 길이어서 대체로 앞만 보고 빠른 걸음으로 갔다 오기 때문에 양옆에 펼쳐지는 사계절의 풍경을 감상할 여유를 갖지 못할 때가 많지만, 어느 땐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속에 놀고 있는 작은 물고기도 들여다보고 새끼오리를 거느린 청둥오리 가족의 자맥질도 즐겁게 바라보곤 한다.
어느 날 걷기 운동 중 개울을 지나다가 이제까지 관심 두지 않았던 나무로 만든 징검다리를 발견했다.
개천이 길어서 군데군데 돌로 만든 징검다리는 여러 곳 있었는데 나무로 만든 징검다리는 처음 보았다.
아이들을 데리고 산책 나온 아빠가 서로 손을 잡아주며 건너는 징검다리의 모습, 그 풍경은 무언가 아련한 징검다리의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정겹게 보였다.
이쪽저쪽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의 추억은 필자를 어린 시절로 이끌어 주었다.
10살까지 필자는 대전에 살았다. 어린 날 우리 집보다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외삼촌 이모가 사는 번잡한 외갓집을 더 좋아해서 그곳에서 지낸 시간이 많았다.
우리 집은 대흥동이었는데 자주 놀러 간 외가는 삼십 분 정도 걷는 거리의 문창동이었고 그곳에서 지낸 시간이 많은 만큼 어린 시절 친구들도 문창동에 더 많았다.
일본강점기가 끝나고 본국으로 돌아간 일본인의 집인 적산가옥이었던 외가는 어린 날 필자 눈엔 궁궐같이 넓어 보였다.
마당엔 연못이 있고 돌로 만든 거북이도 있었으며 다리 건너편의 작은 동산은 동네 아이들과 숨바꼭질할 정도의 크기였다.
그래서 동네 아이들에게 우리 외가는 들어와 보고 싶은 꿈의 동산 같아서 필자는 덩달아 아이들이 친하게 지내고 싶어 하는 우상처럼 군림할 수 있었다.
문창동의 큰길 쪽으로 보문산으로부터 흘러내려 오는 대전천이 흘렀다. 지금은 어떤 모습일지 모르지만, 그 당시엔 아주 넓은 냇가였다.
냇물 건너편에 있던 동화극장이라는 삼류극장도 생각난다.
벌써 몇 십 년 전이니 개발로 그 동네 풍경이 변하지 않았을 리 없겠다는 마음에 서운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장마철이 아니면 대전천에 물이 그리 깊지는 않았다. 항상 햇빛에 반사해 반짝거리는 맑은 물이 동네 꼬마들이 물놀이하기에 좋을 만큼 흘렀다.
친구들과 빨래를 한다면서 손수건을 들고 냇가의 넓적한 돌에 비벼대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물방울을 튀기는 물싸움으로 깔깔대며 한바탕 옷을 적시기도 했다.
젖은 옷으로 냇물 가운데에 놓인 징검다리 돌 위에 서서 발아래 흐르는 물을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 순간부터 필자 자신이 마구마구 물 위에서 떠내려가는 착각이 들었다.
두 다리에 힘을 주고 균형을 잡으려 버티는 동안 어느만큼 멀리 떠나온 듯한 기분은 정말 스릴 있고 재미있는 경험이었다.
그러다 올려다본 하늘은 너무나도 파랗고 높았고 뭉실 떠 있는 흰 구름은 한 폭의 수채화처럼 가슴에 남았다.
그렇게 냇가에서 물장구치며 놀았던 어린 시절 친구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비록 대전천처럼 크고 넓은 냇가는 아니어도 우리 동네 개울에 놓인 징검다리를 보며 어린 시절을 돌아보았다.
순수했던 날들, 그 시간들이 참으로 그립다.
새봄 냄새가 짙게 풍기는 휴일, 친구들과 을미사변 때 희생된 항일 인물들을 배향하는 장충단에 모였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에서 성곽길을 따라 남산에 올랐다. 차를 타거나 아스팔트를 걷는 것과는 전혀 다른 맛을 느꼈다.
남산에 오르면 고층 빌딩이 가득한 시가지 모습에 감격한다. 높은 건물 몇 개뿐이고 삼일고가도가 웬만한 건물보다 높았던 시절, 반듯한 건물이 언제쯤 들어서나 부러워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남산타워가 우뚝 솟은 262m 높이의 나지막한 남산광장에는 붐비는 여행객 만큼 수많은 사연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지나온 60ㆍ30년이 문득 그리워졌다. 젊은 시절 케이블카를 타려고 줄서서 한참 기다렸었다. 중년이 되어서는 자동차 드라이브를 하였고, 이제는 건강을 위하여 걷기운동을 하는 장년이 되었다.
지금은 9살 손자의 오늘이다. 내 나이에서 60년을 빼면 지금의 손자의 이야기이고, 30년을 지우면 자식의 일이 된다. 손주의 오늘에 60년을 더하면 나의 오늘 모습이 되고 30년을 보태면 아들ㆍ딸의 이야기가 된다. 앞으로 전개될 60ㆍ30년은 내 후손에게 어떻게 다가올까.
남산은 북악산ㆍ낙산ㆍ인왕산 등과 함께 서울분지를 둘러싸고 있는 산의 하나이며 북악산과는 남북으로 마주하고 있다. 남산의 정상에는 5개의 화구를 가진 목멱산 봉수대가 남아있는데 전국에서 올라오는 중요한 봉화가 서울로 집결되는 곳이었다.
남산은 소나무를 비롯한 각종 수목이 이루는 푸른 수림경관이 훌륭한데, 특히 조선시대에 소나무가 많이 자랐다고 전해지며 이곳의 소나무를 함부로 베어내지 못하도록 하였다. 산꼭대기에서는 사방으로 광활하게 펼쳐진 서울 시가지를 볼 수 있다.
수림은 잘 보호되어 대도시 도심부임에도 꿩을 비롯한 각종 산새ㆍ다람쥐 등 산짐승의 보금자리가 되고 있다. 서울시 전망을 조망하는 조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정상부에는 탑골공원의 정자를 본뜬 팔각정과 N서울타워, 박물관, 레스토랑, 카페 등의 시설이 있고, 산정부에 한국의 경위도 원점이 있다.
남산 서쪽은 계단으로 이어진 세 개의 광장이 산허리를 타고 펼쳐져 있다. 맨 아래에 있는 광장은 녹지대를 포함하여 약 2,500평 규모의 어린이 놀이터다. 그 위에는 약 6,000평 규모의 백범광장이 있고, 위쪽 광장에는 남산 분수대를 중심으로 하여 그 북서쪽에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이 있는데 서울시 교육위원회 과학교육원은 어린이회관으로 건립한 18층 건물이다.
그 맞은편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는데 1970년에 건립하여 의사의 사진ㆍ유묵 등을 전시하고 있다. 기념관 주변에는 안중근의사 동상과 휘호ㆍ·장인이 새겨진 비석이 있고, 남산골 한옥마을, 장충단공원, 정도 600년 타임캡슐 등이 주변의 명소들이다.
남산에서 옛일을 회상해 보니 수십 년 세월 동안 쓰레기 분리수거와 야외 취사금지 성공으로 우리 서울이 엄청 깨끗해졌다. 다음 60ㆍ30년에는 더 좋은 발전이 있기 바랐다.
동대입구역으로 내려가는 순환로가 연인들의 산책로로 제격이다. 동대 정문을 거쳐 장충동족발과 막걸리 한 사발로 즐거운 남산 산책을 마무리하였다.
혈당 관리 때문에 억지로라도 운동을 해야 하게 되었다. 우리 아파트 뒤편에 마침 운동에 딱 좋은 왕복 한 시간 거리의 산책로가 생겼다.
몇 해 전에 그렇게나 시끄러운 굉음으로 필자를 괴롭혔던 공사가, 끝나고 보니 이렇게 멋진 운동 코스가 되었다.
참기 힘든 소음 때문에 일부러 외출하는 등 불편을 겪었지만, 결과로 이런 혜택을 받게 되어 짜증을 냈던 게 슬그머니 미안 해 지기도 한다.
북한산 국립공원에서부터 시작되어 2km 되는 정릉 입구까지 큰길 뒤편으로 바닥에 초록색의 폭신한 산책길이 만들어졌는데 담당 의사선생님으로부터 왕복 4km면 하루 운동량에 알맞다는 이야기를 들은지라 매우 기쁜 마음으로 걷기 운동을 하게 되었다.
개천을 따라 걷는 내내 지루하지 않게 다양한 경치와 자연 생태를 볼 수 있어 주민이나 운동하러 나오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아주 좋은 곳이다.
오늘은 기온이 많이 내려갔지만 단단히 차려입고 걸으러 나갔다.
쨍한 차가움이 콧마루를 시큰하게 한다. 그러나 일단 나와 보니 의외로 상쾌하다.
옆쪽의 개천이 한여름엔 북한산에서 흘러내린 물로 폭포처럼 요란한 물줄기를 보이지만 지금은 얼음이 꽁꽁 얼어있다.
개울에 솟아 있는 대로 바위나 작은 돌멩이가 삐쭉 나온 곳을 빼고는 모두 하얀 얼음투성이인데 어느 한 곳을 보니 반반한 얼음판이 보인다.
겨울방학을 맞은 어린이들을 위해 누군가 일부러 물을 채워서 썰매장을 만들어 주신듯하다.
며칠 전엔 그곳에서 몇몇 아이가 놀고 있는 것을 보았다. 비닐봉지를 깔고 앉아 언니가 끌어주는 대로 신 난다고 꺅꺅대던 아이도 있었고 제법 반듯한 나무로 썰매의 모습을 갖추고 씽씽 얼음 지치는 아이도 있었다.
필자도 어릴 적 대전에 살 때 삼촌이 만들어주신 네모난 나무에 쇠붙이를 바닥에 붙인 썰매를 타 본 적이 있다.
친할아버지댁 포도밭 근처에는 겨울에 빈 들판이 많았다. 잘라 낸 볏짚 밑동이 삐죽 솟은 바닥에 물을 대고 차가운 날씨를 기다리면 널따란 스케이트장이 만들어졌었다.
간혹 스케이트를 타는 어른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방학을 맞은 동네 아이들이 썰매를 타는 신 나는 놀이터가 되었다.
삼촌은 긴 꼬챙이의 끝에 뾰족한 못을 박은 썰매 손잡이도 만들어 주었지만 필자는 그걸 사용하지는 않았고 삼촌이 줄을 매어 끌어주는 썰매 타기를 좋아했다.
나무 썰매에 앉아 삼촌이 마구 달리며 끌어주면 스르르 밀려나가던 그 짜릿하고 아슬아슬한 느낌이 잊히지 않으며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오늘은 너무 추워서인지 아무도 나와 놀지 않는 빈 얼음 터를 보니 쓸쓸하다.
역시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노는 모습이 보여야 누군가 만들어 주신 썰매장의 진가가 보일 것 같다.
그래도 몇 명의 아이들이 얼음 덮인 개울에 앉아 노는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추운 날 얼음 위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궁금해지기도 해서 “애들아, 거기서 뭐하니?”하고 물었다.
“얼음 속에 물고기 있나 보려고요.” 날씨도 추운데 자연 속에서 노는 아이들이 귀엽기도 하고 필자 오지랖에 미소가 떠오른다. 개천이 깨끗해지면서 물속에 작은 고기떼가 많이 생겼다. 그래도 이렇게 추운데 물고기들이 그대로 있는지 필자도 궁금하긴 하다.
이 산책로를 따라가다 보면 개울에서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놀고 있는 사이좋은 청둥오리 한 쌍을 볼 수 있다. 꼭 청둥오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초록색과 여러 색이 섞여서 반짝거리는 털을 가졌으니 아마 청둥오리일 것이다.
지난번에 보였던 이 오리 부부도 오늘은 너무 추워서 나오지 않았는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 길지 않은 도심 속 산책로에서 그림 같은 멋진 풍경을 볼 수도 있는데 무리 지어 있는 갈색의 억새풀 숲이다.
이곳을 보면 어디 아주 먼 곳에 여행 와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빠른 걸음으로 산책로를 왕복하니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다음번엔 얼음판에서 신 나게 노는 썰매 타는 아이들도 보고 싶고 개울물 속에서 작은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노는 청둥오리도 보고 싶다.
필자 어린 날 삼촌이 끌어주던 나무썰매를 씽씽타며 즐거워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어 본다. 차가운 겨울날의 하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