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에서 마라톤 대회가 끝나고 체력을 보충하겠다며 고기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강 건너 유명한 고기집을 필자가 안내하겠다고 했다. 그 동네가 재개발이 되는 바람에 어디로 옮겼는지 몰라 일단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그런데 택시 운전사도 모른다고 했다.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과연 그 집의 위치를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장사가 잘돼 번듯한 건물을 짓고 간판도 크게 달아놓았다.
그런데 좀 일찍 가기는 했지만, 손님이 우리 밖에 없었다.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데이트 족 한 팀이 더 왔을 뿐 손님이 안 오는 것이었다. 다른 한 팀은 종업원과 언쟁이 벌어졌다. “서비스업을 하는 음식점의 종업원이 손님을 이기려 한다”는 것이었다. 필자도 주문하면서 몇 마디 건넸을 때 담당 종업원의 반응이 시큰둥했다. 마치 ‘잡소리하지 말고 고기나 먹고 빨리 가라’는 투였다. 음식 값이 비쌌지만 맛도 별로 없었다. 그러니 손님들의 발길이 줄어든 것이다. 문전성시를 이뤘던 이 음식점이 이 지경이 된 것은 아마 옛날 맛을 잃고 가격도 많이 올랐으며 이런 불친절한 종업원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음식점은 주인이나 종업원의 태도에 따라 손님들이 금방 알아챈다. 불친절한 음식점은 당연히 손님들이 기피한다. 동네에도 비슷한 업종의 두 집이 바로 붙어서 영업을 한다. 한집은 손님이 넘치는데 그 옆집은 파리만 날린다. 늘 가던 집에 자리가 없을 경우 옆집이라도 가자고 했더니 일행 중 여러 명이 그 집은 가지 말라며 말렸다. 우리가 가던 음식점에 손님이 넘쳐 밖에 상차림을 했는데 그 음식점 주인이 투덜대더라는 것이다. 만약 웃는 인상으로 대했다면 늘 가던 집에 자리가 없으면 자연스럽게 그 음식점도 이용했을 것이다.
음식점 주인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싼 메뉴를 주문했을 때의 반응이 달라지는 것이다. 생선회집에 갔는데 비싼 생선회는 주문 안하고 간단한 멍게 해삼을 주문하면 안색이 달라지는 것이다. 들어갔을 때는 반색을 하더니 싼 메뉴를 시키자 돌변하며 주방에 대고 실망스러운 표시를 한다. 그러면 그 음식점은 안 가게 된다.
욕쟁이 할머니 음식점이 전국 여기저기에서 화두에 오른 적이 있다. 겉으로 말은 거칠지만, 속뜻은 그렇지 않기에 감수하고 드나들었던 것이다. 가격에 비해 푸짐하고 맛도 좋았기에 거친 말을 들어도 웃고 넘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시니어들은 더 이상 그런 음식점에는 가지 않는다. 요즘이라면 갔다가는 싸움이라도 날 것이다.
손님 중에는 갑질하는 진상들도 있다. 종업원들에게 반말을 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상식적으로는 나이가 많고 적고 간에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반말을 하면 안 된다. 옛 성현의 일화중에 그 집에 갔을 때 하인이 문을 열어주기에 존댓말을 했더니 그 집 주인이 하인인데 굳이 존댓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랬더니 당신에게는 하인이지만, 내게는 내 하인이 아니고 초면이니 존댓말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시니어들은 음식점이나 카페 주인, 종업원들이 아들이나 딸처럼 보이기도 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초면인데도 반말을 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 “아들딸 뻘이니 말을 낮춰서 되지?”하면 싫더라도 “안 된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싫은지 좋은지 표정을 보면 알 수 있다.
외식을 자주 하게 되면서 음식점이나 손님이나 서로 접할 기회가 늘어난다. 서로 기분 좋게 대하면 서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한쪽이 기분을 상하게 하면 다른 한 쪽은 상처를 입는다. 외식문화의 수준은 서로 존중하고 고마워하는데서 올라간다.
경남 양산시쯤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다시 오늘의 목적지인 창원시 수산대교를 향해 힘차게 페달을 밟았는데 밀양시를 지나면서 긴급 상황이 발생하고 말았다. 라이딩 중에 한 대원의 자전거 체인이 끊어졌는데 선두를 이끌던 필자는 배낭에 넣어 두었던 전화벨 소리를 듣지 못한 채, 또 한 명의 대원을 뒤에 달고 밀양시 삼랑진읍까지 달리고 말았다. 미안했다. 필자가 왔던 길을 되돌아오면서 허비한 시간 때문에 예정된 3박 4일 안에 모든 일정을 소화할 수 없게 됐다.
결국 밀양시 근처에서 라이딩을 끝내고 궁리 끝에 장비를 차에 싣고 첫날밤에 묵었던 산수정으로 철수했다. 첫날 산수정을 떠나면서 기회가 되면 다음에 꼭 다시 한 번 더 들르겠노라고 인사했으나 불과 이틀 만에 다시 그 집을 찾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으리라. 걸걸한 여주인도 흔한 인사말 정도로 생각했을 터인데 실제 약속이 지켜지자 반가운 마음에서인지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정성을 다해 상차림을 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밤 10시가 다 돼 도착해서 허기진 배를 채우고 술과 노래방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특별히 기분이 좋으셨던 여사장님의 깜짝 등장으로 분위기는 한껏 고조됐고 노랫소리는 자정을 훌쩍 넘겨 새벽 3시까지 낙동강 강가에 울려 퍼졌다.
광란의 밤이 지나고 산새들이 지절대는 아침이 밝았다. 날이 밝자 어둠 속에 잠겼던 강물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평화롭게 흐르고 있었다. 영풍교(경북 문경시-예천군) 밑 출렁이는 강물 위에도 고운 햇살이 내려앉았다. 4일 중에 이날이 가장 날씨가 쾌청하면서 미세먼지도 별로 없어 자전거 타기 딱 좋은 날이었다. 아쉬운 마음에 서울을 향해 2~3시간 라이딩하기로 하고 차에서 자전거를 다시 내렸다. 그동안 뻐근했던 다리도 풀리고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없던 힘도 불끈 솟았다. 강둑을 지나고 농로를 따라 한참을 달리자 드디어 상주시를 벗어나 문경새재길로 접어들었다.
문경세재길에 접어든 뒤에도 힘찬 라이딩을 계속했고, 이윽고 새재길 옆 주평마을로 들어섰다. 시계를 보니 당시 시각은 낮 12시 30분. 이날은 마침 어버이날이어서 늦어도 저녁은 서울에 올라가 가족들과 함께하기로 했기 때문에 더 가는 건 무리라 여겨 여기서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문경새재를 눈앞에 두고 강가 옆 마을 입구 팔각정에 앉아 시원한 강바람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으로 3박 4일간의 피로를 털어내면서 모든 일정을 끝냈다.
필자는 살아가면서 늘 새로운 도전에 목말라 했다. 자전거 라이딩도 시작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자전거 라이딩에 대한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물론 지금보다 훨씬 업그레이드된 형태로!
낙동강 700리 길 자전거 라이딩을 무사히 마칠 수 있게 해준 필자의 건강과 비록 이제는 주인을 닮아 낡아가고 있지만 이 길 위에서 한 번도 말썽을 부리지 않고 보필해 주었던 필자의 애마, 자전거에도 한없는 애정과 감사의 뜻을 표한다. 또한 어려웠던 시간을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며 보냈던 SD21 동료들에게도 감사드리고 모두에게 사랑의 하트를 뿅 보낸다.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었던 경복궁 소주방에서 식사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4월 29일부터 5월 8일까지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대장금이 나인 시절 근무했던 궁중의 부엌, 소주방에서 궁중음식을 체험할 수 있다. 비빔밥 도시락과 12가지 반찬이 나오는 수라상 등 왕과 왕비가 먹던 음식을 체험할 수 있는 수라간 ‘시식공감’을 사전예약해서 다녀왔다.
도슭 수라상은 왕과 왕비만 받을 수 있는 12첩 반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합에 조금씩 담아냈다. 육포장아찌, 더덕구이, 오이송송이, 탕평채 등 우리 전통음식의 정수라 할 수 있는 궁중음식을 1인 상차림으로 내니 귀하게 대접받는 느낌이 들었다.
골동반(비빔밥)은 궁중에서도 즐기던 전통 음식이다. 올리는 나물은 제철에 나는 신선한 것을 썼으며 흰색, 푸른색, 갈색 등 색색의 나물을 섞어 보기 좋게 냈다. 비빔 나물을 따로 담고 달걀지단 대신 달걀찜을 가운데 올려 부드럽게 비벼지도록 한 것이 이채로웠다.
음식 구성도 정갈하고 맛도 좋았다. 전국에서 진상한 식재료로 최고의 주방 상궁이 만든 특별한 음식만 임금님 상에 올랐을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고 한다. 장아찌, 젓갈, 마른 찬 등 우리가 먹는 음식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함께 간 가족들과 정다운 시간을 보내며 오랜 시간 전승돼 온 우리 음식의 맛과 멋을 체험하는 즐거운 자리였다.
문화재청의 2016 궁중문화축전의 다양한 프로그램 중 하나인 수라간 ‘시식공감’은 점심과 저녁, 1일 2회 차려지며 1회 60명 현장 접수할 수 있다.
그녀에게 인터뷰 요청을 하자 어머니 생각을 하며 3일 동안 고심하며 쓴 A4용지 4장 분량의 원고를 보내왔다. 어머니에 대한 내용이었다. 영락없는 조선시대 어머니의 모습이다. 한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아내, 시부모님께 효도하는 며느리, 그리고 자애로운 어머니. 그래서 안영의 어머니는 신사임당을 닮았다. 이 글은 안 씨가 보낸 글을 바탕으로 했는데, 기자와의 인터뷰도 더해졌다.
그녀는 지금도 또렷이 기억했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던 날 밤, 어머니의 숨소리가 더 거칠어진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아침이 되자 철없는 그녀와 자매들은 동구 밖으로 은행을 주우러 갔다. 동구 밖 여러 그루의 은행나무에선 비바람 부는 날이면 은행이 후드득 떨어져 온 동네 사람들이 은행을 줍겠다고 모여들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모두 나와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은행을 줍고 있었다. 그 속에 섞여 언니들과 신나게 주운 은행을 한 소쿠리에 채워 돌아오니, 어머니는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곧 사랑채에 계시던 할아버지도 모셔오고, 온 가족이 어머니 주위에 둘러앉았다. 숨이 가빠 어쩔 줄 모르던 어머니는 막내인 그녀와 눈을 맞추며 안쓰러워 하셨다. 그렇게 어머니와 작별을 했다. 전쟁 통에 아버지를 보낸 지 5년 만에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가셨다. 그때 그녀의 나이 16세, 여고 1학년이었다.
◇“모두들 어머니를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한학자였던 할아버지에겐 방문객이 정말 많았어요. 그때마다 모든 상차림은 어머니가 맡았죠. 손님뿐만이 아니었어요. 서울에 있을 때도 늘 고향 친척이 함께 묵었고 광주, 전주에 있을 때도 사촌 형제들이 함께 와서 학교를 다녔으니 언제나 대가족이었죠. 어떤 경우에도 자기를 희생하며 모든 사람에게 친절을 베푼 어머니를 친척들은 ‘보살’이라고 불렀어요.”
어머니의 음식 솜씨와 바느질 솜씨 그리고 바른 품행은 시부모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시부모(안씨의 조부모)는 존중과 사랑으로 며느리를 지극히 아꼈다. 시아버지는 훗날 며느리의 병상이 깊어지자 온갖 한약을 지어다 손수 약탕관에 달이며 정성을 다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 사랑을 받는 것도 당연한 것이 안씨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집에 오는 손님을 잘 대접해야 한다며 예절을 가르치고 바삐 움직이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시부모의 입장에서는 흐뭇한 미소가 일어나는 건은 당연지사였다.
그러나 안씨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가부장적인 남편이었다. 막내인 안씨를 끔찍하게 귀여워했지만, 어머니를 생각하면 아버지가 밉다는 안씨다. 아버지는 해방 후 군정 당시 중앙청 인사행정처 총무과장, 전라남도 도청 지방 행정 인사처장, 전주 도청 상공 국장, 초대 전주시장 등을 해 전근을 수도 없이 했다. 때문에 공직자들은 물론 이름 있는 예술인들, 안씨 종친들까지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손님들이 오시면 어머니가 음식을 하셨어요. 손님들은 이 산골 벽지에 어찌 이토록 격식 있는 음식이 나오느냐고 놀란 적도 많아요. 큰 손님이 올 때면 아버지는 기생들도 데려다 가야금을 켜게 하셨는데, 어머니는 그때마다 불평 한마디 없이 온갖 음식을 만들어 밥상을 차리셨어요. 어머니의 그 인내와 음식 솜씨는 제가 평생 살아도 따라가지 못하겠더라고요.”
◇6·25, 아버지를 잃고
할아버지는 꿈자리가 사납다고 했다. 공산군이 집을 차지하고 피난 간 아버지가 어디 숨었냐며 안씨 자매의 목에 칼을 들이밀고 얼마 후의 일이다. 그 고약한 꿈자리가 맞는지 확인하기 하기 위해 칠순이 넘은 할아버지는 괴나리봇짐을 등에 지고 50리를 걸었다. 한달음에 달려간 피난처에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동행했던 오빠가 어제 저녁 아버지가 붙잡혀 갔다면서 벌벌 떨고 있더란다. 마침 동네 아주머니로부터 산을 넘어오다가 시체를 여러 구 봤다는 제보를 받고 할아버지는 오빠를 데리고 산자락을 뒤졌다. 아버지의 몸은 차가웠다. 7월 25일, 전쟁이 난 지 꼭 한 달 만에 아버지는 그렇게 공산군에게 총살당했다.
“할아버지는 오빠와 둘이 아버지의 피 묻은 옷을 그대로 산자락에 묻었다고 해요. 그 사실을 어머니에게만 알리고, 어머니는 오랫동안 감추셨어요. 우리들이 놀랄까 봐 울지도 못하고 슬픔을 삼키셨겠죠. 그때 제 나이 11살, 초등학교 5학년이었어요.”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 작전에 성공했다. 방마다 들어와 있던 공산당 무리도 나갔다. 정부는 동사무소 단위로 공안 위원을 뽑아 공산군 색출에 나섰다. 안씨의 오빠는 공안위원으로 뽑혀 공산군에게 복수할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어머니의 생각은 달랐다. 복수의 칼날이 시퍼렇게 서 있기는커녕 회의에 참석하는 아들에게 말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도량이 넓은 어머니였다.
“동네 사람들이 공산군과 합세해 우리에게 모질게 굴었지만 복수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셨어요. 혹여 오빠 말 한마디로 양민증을 못 얻는 사람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말이죠. 당시에는 위원 중 한 사람만 거부해도 양민증을 받을 수 없었는데, 그 양민증이 없으면 아무데도 못 가거든요.”
◇신앙과 가족 그리고 문학
“사춘기 소녀 시절 부모가 안 계신다는 상실감은 참으로 견디기 어려웠어요. 할아버지께서는 걱정이 되셨는지 편지로 항상 ‘바르게 크거라’라고 말씀해 주시곤 했죠. 그래서 매일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 형식의 일기를 쓰면서 고독을 달랬어요. 그리고 부모님 이름에 누가 될까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바르게 살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워 준 것은 문학과 가족, 그리고 신앙이었다. 여고 시절 성당에서 울려오는 종소리에 이끌려 들어간 성당 안. 그 성당 한가운데 맨발로 팔 벌려 서 있는 성모상에서 버선발로 달려와 그녀를 반겨주는 어머니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 이후에 대학을 졸업하고 천주교에 입교해 하느님을 아버지로, 성모님을 어머니로 모시고 의지하며 마음의 안정을 얻었어요.”
때로는 헛헛한 마음을 채워주지 못할 때 신앙의 힘으로 버텨낸 그녀였다. 그녀는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어머니지만, 가장 존경하는 사람은 할아버지라고 했다. 그녀의 소녀 시절 인성 교육에 올바른 길잡이가 돼 주었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부모 없이 커가는 손녀에게 펜을 들어 편지를 썼다. 어머니의 베푸는 삶과 할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은 그녀가 문학소녀로 바르게 성장하는 초석이 됐다.
“제가 25세 때 황순원 선생님께서 등단 추천을 할지 말지 고민을 하셨어요. 그러시더니 집에 가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봐야겠다고 하시더군요. 정말로 저희 할아버지가 계신 광양 집에 오시더니 할아버지의 선비 정신에 매료되셨는지 흔쾌히 추천을 해주시더라고요.”
그 계기로 문학계에 등단한 지 올해로 50년, 천주교에 입교한 지도 50년이다. 등단 이후 수많은 수필과 소설 등의 글을 써 왔다. 특히, 그녀의 장편소설 에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져있다. 신사임당을 닮은 어머니 말이다. 효도만 잘 가르쳐도 더불어 잘 사는 사회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녀다. 그런 확신을 펼쳐 보고자 효도로 극진한 신사임당 가정을 택했다고 한다.
글ㆍ사진| 정성기
치아가 부실한 징글맘께서는 쇠고기 스테이크를 드시고 싶어도 씹을 수가 없어서 그림의 떡이라 오늘은 두부와 다진 돼지고기를 이용하여 특식으로 '노인들의 영양식인 두부스테이크'를 개발하여 그 요리과정을 재미있게 소개하려고 해요.
두부스테이크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두부 150g과 다진 돼지고기 150g을 1:1 비율로 배합하고 다진 마늘 30g과 양파 썬 것 70g에 당근 6쪽에 양배추 썬 것을 약간 준비하고 참깨흑임자소스 115g과 굴소스 30cc에 타르타르소스와 토마토케첩을 약간 첨가하고 계란은 후라이용으로 사용하고 적포도주를 준비합니다.
우선 양념으로 다진 마늘과 썬 양파를 이렇게 준비해야지요.
당근은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 알맞은 사이즈로 이렇게 준비하였답니다.
양배추는 스테이크에도 필요하지만, 함께 먹을 야채수프를 위해서도 꼭 필요해요.
우선 속궁합이 찰떡궁합인 두부와 다진 돼지고기를 이렇게 큰 그릇에 담았답니다.
두부와 다진 돼지고기를 이렇게 으깨고 비벼서 요리 준비를 하는데 꼭 뭐를 몇 년 굶은 함평 윤 과수와 지냈던 그 날 밤처럼 어제 요리를 준비하는데 이 영감탱이의 이마와 등에 진땀이 나더군요.
다진 돼지고기와 두부를 배합한 그릇에 다진 마늘과 썬 양파를 부으면 됩니다.
이 참깨흑임자는 샤브샤브와 두부 샐러드에 좋은 소스로 풀무원 제품인데 115g짜리를 다 사용하였지요.
참깨흑임자와 굴소스를 붓고 아주 신 나게 비비고 주물러서 두부스테이크를 만드는데 정말 이 단계에서는 고난도 기술이 필요한데 춤을 출 때도 남자가 쉬운 피겨를 써서 여자를 부드럽게 리드하고 여자는 남자의 리드에 즐겁게 따라가는 것이 하늘의 뜻처럼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듯이 요리도 바로 음양의 순리인 것 같습니다.
당근도 함께 익히려고 프라이팬에 같이 올려서 스테이크를 익히는데 화력 조절과 함께 두부스테이크를 앞으로 굽고 뒤로 굽는 것은 여인을 다루듯 하지 않으면 두부스테이크가 깨지고 또는 홀딱 타버려서 정말 조심스럽게 애무하듯 다루어야 하는 것은 춤을 출 때 게거품을 하며 응큼한 생각만 하고 설치다 숙녀의 이브닝드레스를 찢는 실수를 하는 무뢰한처럼 될 수 있으니 정말 은근하게 리드해야겠지요.
타르타르소스는 생선가스나 돈가스를 먹을 때 찍어 먹어도 무척 상큼한 소스로 마요네즈보다 한 단계 위라고 보면 좋은데 오늘은 청정원 제품으로 준비했습니다.
야채에 토마토케첩을 발라 먹어야 좋아 오늘은 오뚜기 제품으로 준비했어요.
이렇게 접시 위에 완성된 두부스테이크 요리를 준비하여 올렸는데 그럴듯하게 보이고 먹음직스럽게 보이는데 이렇게 성공하려면 무지하게 시행착오를 많이 하는데 왈츠나 폴카도 제대로 배우지 않고 바로 지르박으로 알려진 '지터벅'이나 고상한 '블루스'라고 하는 춤을 역전 카바레에서 느끼하게 껴안고 비비는 춤으로 알고 블루스를 친다고 궁디를 들썩하며 뭣도 모르고 춤을 추다가는 순진한 아줌마도 '국 쏟고 뭐 데고 뺨을 맞는 꼴'처럼 처량한 꼴이 되니 '착하게 살자.'를 복창합시다.
총장님인 징글맘께서 편하게 드시도록 이 늙은 취사병이 이렇게 정성껏 상차림을 하였답니다.
에공, 징글맘께서 계란후라이를 먼저 드시고 스테이크를 타르타르소스에 발라서 맛있게 드시면서 "애비야, 니는 이제 레스토랑을 차려도 되겠다." 하시고 다시 밥도 소스에 발라드시며 기분 좋게 드시는데, 가끔 사진을 올리고 보면 이렇게 모습이 하루하루가 더 약해지셔서 걱정이에요.
이렇게 당근 두 쪽과 양배추 쪼가리만 남기고 다 드시니 이 늙은 취사병이 오늘의 요리는 스스로 보아도 99점은 되는 것 같아 솔직히 기분이 좋았는데, 코팅이 벗겨진 프라이팬이 나쁜 것이라고 지적하시는 분께서 먼저 좋은 냄비와 프라이팬을 보내주시면 아주 감사하고 예뻐하겠으며 앞으로 더 잘~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