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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술가가 말하는 잘되는 집, 잘 풀리는 집
- 사람과 공간이 조화롭게 사는 방법을 연구하는 게 풍수학이다. 그런 면에서 풍수는 집을 살 때뿐만이 아니라 집을 단장할 때도 유용하다. 물론 누군가는 풍수를 ‘미신’이라 할 수도 있고, 또 누군가는 ‘현대적 삶과 맞지 않는 비합리적 이론’이라 할 수도 있지만,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분명 귀 기울일 내용이 없지 않다. 원래 풍수라는 말의 어원은 ‘장풍득수(藏風得水)’다. ‘바람을 갈무리하고 물을 얻는다’는 의미로 농사짓기 좋은 최적의 터를 찾는다는 뜻이다. 하지만 좋은 환경이란 시대가 바뀌면서 달라지게 마련이다. 합리적 사고를 중시하는 유럽이나 미국에서도 풍수가 적용된 사례가 많다. 이미 알려진 사례를 보더라도, 홍콩의 47층 건물인 홍콩상하이빌딩을 짓는 데 풍수사가 적극적으로 관여했고,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도 풍수를 고려해 백악관 집무실을 개조했다. 또 축구선수였던 데이비드 베컴 부부도 딸 하퍼의 방을 풍수지리학자에게 보여준 뒤 자문을 해서 꾸몄다. 우리나라도 대기업 총수의 집과 사옥은 처음부터 풍수를 고려해 입지를 선정하고, 그 대지에 맞는 건물을 풍수를 따져 디자인하는 게 일반적이다. 특히 기업가처럼 큰돈을 만지거나 잃을 것이 많은 사람이 풍수에 관심이 많다. 풍수의 적용 풍수학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이 쌓아온 경험의 통계자료다. 집의 건축 요소, 가구, 가전제품 등을 자연의 원리와 닮게 배치해 기의 흐름을 순조롭게 만들어줌으로써 편안하고 건강한 생활은 물론, 흔히 운명이라고 부르는 인생의 큰 줄기를 올바르고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바로잡아주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물론 대지 계획부터 평면 계획까지 풍수를 고려할 수 있다면 가장 좋다. 하지만 우리는 아파트, 오피스텔에 사는 게 일반적이고, 공간이 주어지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 따라서 가구나 소품을 바꾸고 그 위치를 바꾸는 식의 풍수가 더 현실적이다. 가령, 예전의 집들은 현관을 열면 바로 욕실이 보이는 구조가 많았다. 그런데 이는 돈이 빠져나가는 구조다. 이럴 때 현관에 중문을 설치해주거나 가벽을 설치해 돌아가는 방식으로 구성을 바꿔줄 수 있는 것이다. 집 안 특정 공간의 컬러를 바꾸거나 벽지 등을 바꾸는 식으로 크게 돈 들이지 않고도 충분히 풍수를 적용할 수 있다. 시작은 ‘비우기’부터 집에 생기를 불어넣으려면 우선 공간에 여력이 있어야 한다. 일단 빈 공간이 있어야 디자인을 할 수 있고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만인 사람이 근육이 탐스러운 몸을 만들 때 우선 살을 빼야 하는 것과 비슷하다. 풍수나 인테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비우기’다. 풍수 인테리어의 기본은 쓰지 않는 물건은 버리고, 남아 있는 물건의 정리정돈을 잘하면서 정갈한 상태를 유지하고 채광, 통풍, 환기가 잘되게 하는 것이다. 먼저 집이나 방에 있는 모든 물건을 꺼내 불필요한 물건이나 잘 쓰지 않는 물건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하자. 1년 동안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면 과감히 버리자. 그리고 방이든 거실이든 너른 시선으로 한 번 둘러보자. 그런 다음 구입했을 때의 가격을 떠나 왠지 싫거나 불편한 물건이 있는지 체크하자. 그런 물건이 있다면 그것들을 다른 곳으로 옮겨서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아니면 눈에 띄지 않게 버릴 것인지 결정을 해야 한다. 마음의 평안이 기준 돈의 개념으로 판단하지 말고, 마음의 안정과 심리적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생활 공간을 만든다는 데 중점을 두고 생각해야 한다. 버리는 게 익숙해지면 삶은 놀랄 만큼 단순해지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것만으로도 당신은 충분히 집 안의 운수를 끌어올리는 풍수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고 남은 물건들은 사용 빈도, 계절에 맞게 잘 수납하는 것이 중요하다. 수납할 때도 빈틈없이 채우기보다는 조금 여유 있는 공간을 만들어 수납해야 좋은 기운이 통한다. 진정한 ‘집’의 의미 집이라는 공간은 딱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다. 보편적일 수 없다는 의미다.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자연환경과 기후, 풍토, 토질, 문화와 역사 등이 반영되어 있다. 여기에 자신이 가장 편하게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개성을 입혔을 때 비로소 자신의 집이 만들어진다. 또 집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기준으로 만들어질 수 없고 만들어져서도 안 된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오랜 시간을 통해 만들어낸 공간이야말로 ‘집’이고 자신의 공간이 된다. 그러니 집은 순식간에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인테리어 업체에 맡겨서 다른 사람이 사는 집과 비슷하게 몇 주 만에 만들어진 공간에서는 통찰력과 창의력을 기대할 수 없다. 천천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자신의 공간을 만들어갈 때 그곳은 어느새 편안하고 행복한 ‘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 곁에 있게 될 것이다. 물리적인 공간인 ‘하우스(house)’에서 벗어나 따뜻하고 정감이 있는 자신과 가족의 공간인 ‘홈(home)’을 만들어야 할 때다. >글 : 박성준 건축가·역술가 - 홍익대 건축학과를 졸업했으며 집과 건물을 짓는 건축가. 사람과 땅의 기운을 함께 보는 풍수 컨설턴트이면서, 또 한 사람의 생년월일시 기운과 얼굴을 통해 그 사람을 읽어내는 젊은 역술가이기도 하다. 풍수와 인테리어를 접목시킨 풍수 인테리어를 제안하고 있으며, 풍수 이론에만 그치지 않고 실제 기업의 사옥과 주거공간의 콘셉트 디자인 및 설계를 하는 등 풍수에 맞는 공간을 구현하고 있다.
- 2018-02-02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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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시립미술관, 까르티에 현대미술재단 컬렉션 전시
- 2017년 5년30일부터 8월15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은 올해 열리는 전시 중 손꼽히는 주요 전시다. 매주 토요일 오후 2시에 하는 필자의 전시 도슨트를 원고로 옮겨, 현장감을 느끼며 작품 감상을 할 수 있도록 정리했다. 글 옥선희 동년기자 국내 최초로 선보이는 프랑스의 까르티에 현대미술재단 소장전은 서울시립미술관과 끼르티에 현대미술 재단의 공동 기획전입니다. 즉 까르티에 재단 작품을 일방적으로 소개하는 게 아니라, 까르티에 측 제안을 받고 2015년부터 전 과정에 서울시립미술관이 참여하여 기획된 전시입니다. 카르티에 현대 미술재단 Fondation Cartier pour l'art contemporain은 까르티에라는 명품 기업 후원으로 출발했지만, 100% 독립된 비영리 재단입니다. 프랑스에서 현대 미술을 지원하는 첫 기업 재단으로 출발했습니다. 설립자이자 현재까지 대표를 맡고 있는 알랭 도미니크 패랭이 프랑스 문화부 의뢰로 만든 기업의 미술 후원 보고서 초안 ‘레오타르법’이 현재 프랑스에서 공식적인 예술 후원법 기초가 되었습니다. 기업 메세나의 혁신적 모델인 재단은 1984년 베르사이유 궁 근처 조각공원에서 다양한 전시와 레지던시 프로그램(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10년 간 운영했다. 젊은 작가 발굴 - 지속적 지원 - 세계적 작가로 키우기/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 페이 다웨이, 후 한루 같은 큐레이터와 비평가 배출/ 학제적(學際的) 접근, 즉 다양한 분야 학자와 예술가의 협업을 꾀했는데요. 전시 디자인을 일러스트레이션 디자이너에게 맡기는 식이 그것입니다. 이번 서울전은 이세영 -논 스탠다드 스튜디오가 전시 디자인을 맡았습니다. 재단이 출범한 1984년은 백남준 작가가 3부작 위성 시리즈 첫 작품 을 선보인 기념비적 해입니다. 은 파리 퐁피두센터에서도 생방송 중계되어, 비서구권 미술, 타자가 서구에서 가시화되는 출발선이 되었습니다. 주목하지 않았던 비 유럽계 작가에게 전시 기회를 주고, 전시를 갖지 못했던 젊은 작가가 방향을 설정하도록 도와온 재단 출범 년도가 1984년이란 점은 그래서 의미심장합니다. 이후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천안문 사태 발생 등으로 젊은 작가의 분출은 가속됩니다. 재단 건물 1994년 몽빠르나스14구 라스파일 대로에 재단 건물을 지어 이전했는데, 프랑스 건축가 장 누벨 Jean Nouvel이 설계한 재단 건물은 인공과 자연이 어우러진 절제미와 아름다움을 자랑합니다. 나무가 무성한 중정을 품은 강화 유리와 메탈로 지어진 사각형 건물로, 1층은 정원으로 완전히 열려 있으며, 천정 높이가 7미터에 이르는 모듈 형식이라, 프로젝션이나 비디오 설치 작업을 위해서는 공간을 어둡게 조정할 수도 있고, 대작 전시도 가능합니다. 유리로 된 구역을 옆으로 밀어 시야를 트이게 만들면, 건물이 정원 쪽으로 열린 경사로에 놓인 거대한 구조물로 변형됩니다. 건물의 유리 표면을 통해 전시 중인 작품을 볼 수 있게 하였고, 반대로 구름이나 도시 공간을 반사시켜 시간대에 따라 건물이 변화하게 만들었습니다. ‹밤까지› 전시의 경우 건물 전체가 검게 덮였고, ‹자연으로 존재하기› 전시 기간에는 완벽하게 투명함을 유지했으며, 이세이 미야케는 건물을 거대한 디스플레이 윈도우로 변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인공과 자연과 변환 가능한 건축미를 높이 사 1995년, 이탈리아 거장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에 이어 독일 중견 빔 벤더스가 완성한 옴니버스영화 에서 장 르노의 저택으로 등장했습니다. 1994년 부임한 에르메 샹데스 Herve Chandes 관장이 현재까지 관장 직을 유지하고 있는데요. 긴 재임이 말해주듯 큐레이팅도 직접 하는 문화 권력이자, 외교관이라는 평판을 듣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작가나 주제를 선택해 작가에게 시각화해달라고해서 독창적인 커미션 작품을 탄생시키고 전시 기획, 최종 소장 결정까지 하는 것이지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존재하도록 시각화해달라고 주문하는 커미션(commission) 방식은 까르티에현대미술재단의 특징입니다. 작품 의뢰에서 완성품까지 3년 정도 기간을 주고 5억원정도를 지원하는 등, 기간과 제작비 구애를 받지 않도록 자유를 주며, 한 번 관계를 맺으면 가족 개념으로 관계를 유지합니다. 즉 경매를 통한 구입이 아닌, 직접 작가 발굴과 작품 의뢰를 통해 수집품을 늘려가고 있습니다. 1년에 다섯 번 정도 큰 전시가 있는데요. 개인전과 기획전을 번갈아 여는 데 디자인, 사진, 회화, 비디오아트, 조각, 설치 , 미디어아트, 패션, 퍼포먼스 등 현대 예술의 창조적 분야와 장르를 아우릅니다. 인문과학, 환경, 생태학, 도시학, 경제, 생태, 이주 등 다양한 사회적 주제를 시 청각화하므로 미술가뿐만 아니라 영화감독, 대중음악가, 도시학자, 생태음향가, 디자이너, 과학자, 사상가, 철학자, 인류학자, 수학자, 사회학자 등 광범위한 네트워크를 유지합니다. 1층에서 보게 될 작품 처럼, 도시학자의 아이디어를 디자인 건축가 그룹이 시각화하는 식입니다. 30년 간 200회 전시를 열어 전 세계 350여명 작가의 1,500점을 소장하고 있는데요. 작품 소장 기준은 엄격함과 탁월함의 결합/ 풍부한 독창성과 위험 감수 성향 고려/ 평범하고 예견가능하며 상식적인 가치 대신 전 방위적 개방성을 추구합니다. ‘흥미로운 현대 예술 작품으로 전시 이상의 경험을 제공하고 싶다. 세계를 향해 질문 던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전시 작품을 봐주었으면 한다’는 것이 까르티에 현대미술재단 컬렉션 디렉터 그라치아 콰로니 Grazia Quaroni의 전언입니다. 서울 전시작은 사라 지, 론 뮤익, 뫼비우스 등 재단을 대표하는 작품은 물론 국가, 인종, 젠더를 초월하는 공통 관심사를 반영한 사회 현상을 다룬 100점을 골랐습니다. 한국을 위한 특화된 선택 작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장 미셀 알베롤라와 마크 쿠르티에 등이 내한하여 직접 벽면 작업을 했습니다. 아시아 투어 중 서울에서 처음으로 열게 되었고, 내년 초 상하이, 홍콩을 거쳐 도쿄 올림픽에서 마무리 될 예정입니다.
- 2017-06-14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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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짙푸른 소나무 사이 농촌계몽운동의 기억이 살아있는 곳 '심훈기념관'
- 눈 녹지 않은 시골길을 굽이굽이 지났다. 길게 늘어진 소나무의 그림자는 쓸쓸하고 차가웠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끼 낀 옛 유적을 찾아가는 기분. 굽이치는 소나무 숲길을 지나 만난 심훈기념관(충남 당진시 상록수길 97)에는 소설 의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 그리고 작가 심훈이 옛이야기를 나누 듯 서 있다. , 로 대표되는 심훈(1901~1936)은 한국 근대사에 한 획을 그은 문학가로만 말하기에는 다재다능했고 여러 방면에 관심이 많았다. 문학인으로 각인돼 있지만 영화인이었고, 방송사와 신문사에서 일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에 저항과 계몽의식을 잃지 않고 살아온 지표 같은 인물이었다. 1919년 3·1운동 가담으로 3월 5일 투옥됐다가 8개월 만인 11월 6일 석방된 심훈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로 돌아가는 대신 중국으로 망명했다. 말이 좋아 망명이지 밀항을 선택해 지인의 집을 떠돌아다니며 생활했다. 1923년 다시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 난징과 상하이, 항저우 등에 머물며 견문을 넓히며 수학했다. 영화인, 소설가, 시인으로서의 삶 귀국 후 연극과 영화,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흥미를 가졌던 분야는 영화였다. 1924년 첫 부인 이해영과 이혼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한 뒤에도 영화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25년 조일제가 번안한 소설 이 영화화됐을 때는 이수일 역을 맡은 배우로도 도전했으며 192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다음 해에 일본에서 제대로 된 영화 수업을 받고 돌아온 심훈은 영화 원작 집필·각색·감독에 제작까지 도맡았다. 단성사에서 개봉해 큰 성공을 거뒀지만 심훈이 마지막으로 제작한 영화가 됐다. 1928년에는 조선일보에 입사해 2년 후 무용수였던 안정옥과 재혼했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이직하지만 사상 문제에 부딪혀 퇴사하고 말았다. 소설에 마지막 힘을 쏟다 영화 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성공적 데뷔를 한 후에는 신문 연재소설에도 관심을 갖고 매진했지만 검열 장벽에 막혀 1930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과 가 연재 도중 중단됐다. 같은 해 저항시 또한 검열로 빛을 보지 못한 채 심훈이 세상을 뜬 후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됐다. 1933년 장편소설 (조선중앙일보), 1934년 장편소설 (조선중앙일보)이 연재됐고 1935년 심훈의 대표작인 장편소설이자 유작인 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됐다. 1936년에는 단편소설 (신동아)를 발표했다. 뜻밖의 관심, 시에 담다 심훈은 저항시인이자 농촌계몽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지만 작품세계는 꼭 그렇지 않다. 그가 쓴 작품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랑에 아파하는 마음, 동성애, 스포츠를 다룬 작품도 눈에 띈다. ‘오오, 조선의 자매여’는 1931년 4월 영등포역 기차선로에 뛰어든 홍옥임과 김용주의 이야기를 접하고 쓴 시다. 결핍과 금지, 검열의 시대에 동성애 그리고 자살을 선택했던 여성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그의 유작시인 ‘오오, 조선의 남아여’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호외 뒷면에 쓴 시로 손기정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우승을 접한 감격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1929년에 쓰인 ‘야구’ 또한 흥미롭다. 야구 시즌을 기다리고 있는 시점이라 그런가 야구장의 함성이, 홈런의 짜릿함이 시에서 느껴진다. 무엇보다 1929년에도 지금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야구를 보고 느끼고 시로 표현했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 시를 계기로 심훈의 종손 심천보씨는 심훈 80주기였던 작년 9월 16일 한화 이글스 홈경기 시구에 나선 바 있다. 심훈기념관과 집필 장소인 필경사 심훈기념관 이야기를 하면서 유작 소설인 를 빼놓을 수 없다. 심훈기념관 옆에는 가 집필된 곳으로 알려진 필경사와 심훈의 묘가 나란히 있다. 기념관 일대는 의 실제 배경이 된 곳이다. 소설 속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했던 남자 주인공 박동혁의 실제 모델은 심훈의 장조카 심재영이다. 당시 심재영은 청년들과 함께 당진 부곡리에서 공동경작회를 조직,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심훈기념관에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농우회’ 회원의 실제 주인공들 단체 사진과 개인 사진들이 하나하나 전시돼 있다. 심훈은 1932년 서울에서 가족의 터전인 당진으로 내려와 를 집필하고 난 뒤 1936년 장티푸스로 생을 마감했다. >>관람 정보 개관시간 10:00~17:00 입장료 무료 문의전화 041-360-6883 휴관일 매주 월요일 주소 충남 당진시 상록수길 97 ✽자가용 이용 바람
- 2017-03-06 0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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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과 사람 PART 7] 이 남자의 서재, 책 말고 다른 물건(?)도 많다
- 함께 있다 보면 닮게 된다. 같은 관심사가 생기고 비슷한 부분에서 웃고, 울고, 기억을 저장하고 추억하다 보면 그렇게 된다. 한성대학교 문화인류학 교수이자 (사)글로벌발전연구원장(ReDI) 이태주(李泰周·54)의 서재가 그렇다. 함께해 온 흔적과 이야기, 좋아하는 것,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책 사이이 남자의 서재, 책 말고 다른 물건(?)도 많다와 책상 위에 있다. 멀리 한국으로 여행 온 남태평양의 조각들 하나하나가 호탕한 웃음, 장난 가득한 이태주의 눈 코 입과 사뭇 닮았다. 한성대학교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는 이태주 교수는 그밖에도 하는 일이 많다. 한국의 국제개발협력의 불씨를 키웠으며 눈에 잘 띄지 않는 해외지원 자금이 잘 쓰이는지 감시하는 시민운동단체의 대표로 10년간 일해 왔다. 코이카, 문화관광부, 외교부 등 정부기관 정책자문과 관련한 서류작업은 늘 끊이지 않는다. 이태주 교수의 서재 이야기를 해 보자. 한성대 연구관에 있는 그의 서재는 서재라기보다 놀이터 같은 느낌을 풍긴다. “여름방학 동안 서재 중앙에 있었던 탁상을 치웠어요. 피곤하면 바닥에 눕기도 하고, 물구나무도 서고 혼자 별짓 다 합니다.” 이 교수의 서재는 작은 공간에 미닫이로 된 책꽂이를 원래의 서가 앞에 덧대어 실용성을 높였다. 해외지원, 정책, 공적 자금 감시 관리 관련 서류들이 미닫이 책꽂이 뒤로 빼곡하게 쌓여 있다. 책이 몇 권 정도가 되느냐 혹은 책을 분리하는 기준이 있냐는 질문에 “할 일 없냐!”며 웃어 제낀다. “분리할 수준을 넘어섰어요. 빈 공간만 있으면 아무 곳에나 처박아 놔. 오래된 책은 잘 보지는 않지만 버리지는 못하고 있어요. 20년 된 책들은 미닫이 안쪽으로 보내 버렸어요. 최근에는 국제개발 쪽 일을 많이 하니까 그 옆에는 최근 관련 서류들이죠. 감당 못해요. 좋아하는 책을 따로 모아놓지도 않았습니다.” 많은 책을 보유한 이 교수는 기본적으로 책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 사회적으로 지탄 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적당하게 가지고 있다가 어느 시점이 됐을 때 기증하든가 나누어 써야 하는 공유재산이란 생각 때문이다. 책, 사서 보는 나이가 따로 있다 요즘은 기증받는 책들이 많지만 5년 전까지만 해도 책은 100% 돈을 주고 사서 봤다. “그러고 보니까 책 사는 나이가 있는 거 같아요. 한참 연구할 때요. 교수도 정교수가 되기 전까지 해마다 논문 몇 편을 써야 해요. 논문 쓰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니까 계속 자료도 봐야 합니다. 필요하면 아마존닷컴(외국인터넷서점)에서 외국서적도 사야 하고 꾸준히 도서를 구매했죠. 뭐 요즘은 남들이 책을 냈다 그러면 주는 거만 받아요(웃음). 곧바로 책꽂이로 들어가요.” 이 교수의 책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무난하고 말랑한 것들을 찾아볼 수 없다. 가령 소설이라든지 만화책 말이다. 문화인류학에 관련된 책도 많고 국제개발 분야가 서재 한가득하다. “개발, 발전문제 그게 한 분류입니다. 한참 내가 공부할 때는 남태평양에서 연구했어요. 사모아, 피지, 통가, 파푸아뉴기니, 솔로몬제도 이런 곳에서요. 한쪽 서가 서너 개 정도는 전부 남태평양과 관련된 책들입니다. 또 20대 때, 대학에 들어와서 본격적으로 관심 있는 책들을 읽기 시작했던 거 같아요. 20대부터 50대까지 관심 영역이 어떻게 바뀌었는가를 책을 보면 알 수 있어요. 굉장히 많이 달라졌죠.” 이태주의 서재에는 세계가 있다 이 교수의 서재에서 의미를 찾으라면 우리에게 생소한 국가나 지역에서 직접 사들인 책들이 많다는 점. “아프리카 여행할 때 아프리카 책, 인도 책, 유럽 책, 이집트에 가면 이집트 사람이 쓴 책 등. 나는 인류학자이기 때문에 그 지역 문명과 인류, 문화 다양성 등을 알 수 있는 책에 관심이 많아요. 이런 책은 국내 도서관 어디에 가도 없어요.” 이 교수의 첫 직장이 유네스코였기에 유네스코 관련된 책들도 많다. 베트남어로 된 책들도 여러 권 보였다. 1992년 베트남과 수교를 맺은 뒤 이 교수는 한국인 최초 베트남 연구자가 되겠다는 생각에 베트남에서 6개월여 생활했다. “시클로를 타고 구석구석 다니고 베트남어도 좀 그때는 했습니다. 여기 있는 책이 현지에서도 얼마 안 되는 베트남 책을 모은 것입니다. 뒤 칸에 보면 베트남 관련된 서가가 또 있어요. 현지어로 된 건데 제목하고 목차 정도는 읽을 줄 압니다.” 서재에서 주로 놉니다 이태주 교수가 제일 잘하는 것이 있다. 바로 우리나라의 공적 개발 원조를 어떻게 효율화할 것인가에 대해 분석하는 것이다. “어떻게 통합해서 효과적으로 할 것이냐. 국민 세금 낭비하지 않고 개발도상국을 제대로 도울 것이냐. 이런 것을 정리해서 정부에 만들어 줍니다.” 정년이 보장된 편한 교수 생활을 하는 줄 알았더니 서류 작업이 끊이지 않는단다. 그럼에도 그는 이게 바로 진짜 제대로 노는 것이라고 말한다. “놀지 않는 게 아니고 종일 놀아요. 사실 노는 거하고 일하는 게 구분이 안 돼야 성숙한 사람입니다. 젊었을 때는 일하느라고 ‘아! 맘에 안 든다’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런데 나는 한 번도 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글 쓸 때는 밤도 새울 수도 있고, 밤을 새워도 피곤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왜 내가 하고 싶은 글 쓰는 건데 뭐. 몰입해서 하는 일이잖아요?” 서재에서 그는 글 쓰는 것 외에 낮잠도 자고 운동도 한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서재 말고 놀이터란 말이 어울리는 공간이다. 이 남자의 서재는 ‘삶의 이력서’ 사실 이 교수의 서재에서 책 다음으로 눈길이 가는 것은 외국을 다니며 전리품처럼 모아 놓은 가면을 비롯한 기념품이다. 아프리카에서 사 온 전통 북을 보고 신기하게 봤더니 직접 북을 멋지게 연주한다. “다른 나라에 갈 때마다 하나씩 가져다 놓은 것들이에요. 처음 이 방에 들어오는 사람들 누구나 신기해하죠. 서가 위와 창문 주위에 올려놓은 물건(?)들에 정신을 놓더라고요.” 아프리카나 서태평양에서 가지고 온 가면뿐만 아니라 중국 진시황릉 병마용 조각도 눈에 띈다. 그렇다면 당신에게 있어 서재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이력서지”라고 운을 뗀다. “삶의 이력서지. 그때그때 나의 흔적을 뒤져볼 수 있잖아요? 물론 내가 쓴 노트나 메모가 흔적일 수 있지만 ‘아, 내가 80년대에는 이런 책을 봤구나. 30대에는 이런 책을 봤구나’ 그런 거죠. 그때는 몰입해서 살았던 거 같아요. 치열했죠. 요즘은 책을 잘 읽지 않는데 그때는 밑줄을 그어 가면서 봤어요. 언젠가는 버리겠죠? 내가 은퇴할 때쯤 되면 좋은 책들은 좀 정리를 하고 보고서 같은 건 다 버릴 생각입니다. 리포트는 평생 간직할 책은 아니잖아요. 서류 모아 놓은 것은 언젠가는 책 쓸 때 써 먹으려고요.” 그의 서재 현관에는 2019년 9월이라고 쓰여 있다. 그때는 연구년으로 어디로 갈지 고민 중이다. 예전에는 네덜란드의 국경도시 마스트리트에 베이스캠프를 치고 동구 분쟁지역, 발칸반도, 사라예보 등지를 다녔다. 이번에는 중국의 상하이 혹은 브라질의 리우를 연구년 베이스 캠프로로 고려하고 있다. 또한 2027년 2월 28일이라고도 쓰여 있다. 그날이 바로 정년이라고. 매일 매일을 즐기며 살지만 삶이 유한하기 때문에 그날을 향해 가고 있다. 그의 서재에는 세계와 함께 과거, 현재, 미래가 함께 살고 있다. 하루하루 모래시계를 바라보듯. “저기 책꽂이에 걸어놓은 건 콜롬비아에서 사온 것입니다. 콜롬비아에 갔다가 정말 놀랐어요. 일반 레스토랑인데 연인이 딱 들어와서 주문하자마자 바로 테이블에서 춤추더라고요. 밥 먹고 춤추고 그러더라고요.”
- 2016-10-11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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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ULTURE] 9월의 추천 전시ㆍ도서ㆍ영화ㆍ공연
- ◇ 전시(Exhibition) 앤서니 브라운 전-행복한 미술관 (Anthony Browne Exhibition-Happy Museum) 일정 9월 25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세계적인 그림책 작가 앤서니 브라운(Anthony Browne)의 기발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그림 200여 점을 만날 수 있는 대규모 전시다. ‘행복한 미술관’이라는 부제로 기획된 이번 전시는 6월 개막 첫 주에 1만여 명의 관객이 다녀갔다. 남녀노소가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이색적인 그림들과 더불어 앤서니 브라운의 책들을 마음껏 읽을 수 있는 ‘행복한 도서관’ 코너도 마련돼 있다. 전시장에서 관람한 그림들을 책을 통해 다시 감상할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 좋다. 2016 광주비엔날레 ‘제8기후대(THE EIGHT CLIMATE)’ 일정 9월 2일~11월 6일 장소 광주 비엔날레전시관, 아시아문화전당, 무등현대미술관 등 ‘제8기후대’라는 콘셉트로 열리는 전람회인 만큼 전시 공간마다 온도, 밀도, 분위기, 기압 등 다양한 기후 환경을 연출한다. 절제된 색과 요소들로 표현한 이번 공식 포스터에는 예술의 역동적인 움직임과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담겨 있다. 방향성, 발전, 흐름, 변화하는 움직임, 목표를 향한 전진 등을 의미하는 화살표를 통해 ‘예술은 무엇을 하는가?’라는 물음을 던진다. 37개국 97팀(119명)의 다양한 작품을 만날 수 있다. ◇ 도서(Book) 세종의 서재(박현모 외 11명 공저ㆍ서해문집) 여주대 ‘세종시대 문헌연구팀’의 심층해제문 중에서 ‘세종시대를 잘 드러내는 문헌’과 ‘세종을 만든 책’을 선별해 담았다. ‘1부-세종시대가 만든 책’, ‘2부-세종을 만든 책’으로 크게 분류해 등 12권의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헌별로 전문가들의 해제와 더불어 그 책이 세종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설명한다. 도넛을 구멍만 남기고 먹는 방법(오사카대학 쇼세키카 프로젝트ㆍ글항아리) 도넛을 구멍만 남기고 먹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상식을 의심해 보는 것에서 시작하는 책이다. 수학, 공학, 미학, 역사학, 법학, 화학, 경제학, 정신의학 등 다양한 학문의 관점에서 ‘도넛의 구멍’이라는 개념에 대해 파헤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학문과 탐구라는 영역을 더 흥미롭게 접하고 새로운 지식을 얻을 수 있도록 했다. ◇ 영화(Movie) 평범한 50대 주부가 찾은 인생의 행복 개봉 9월 29일 장르 드라마 감독 미아 한센 러브 출연 이자벨 위페르, 로만 콜린카, 에디뜨 스콥 등 2016 베를린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프랑스 신예 감독 미아 한센 러브의 신작이다. 한 가정의 아내·엄마이자, 존경받는 교사로 평범하게 살던 50대 여성이 갑작스러운 남편의 고백 이후 불안한 삶 속에서 자신만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이야기다. 평온했던 일상이 파괴되며 새롭게 다가오는 것들을 마주하는 주인공 역에 세계 3대 영화제(칸·베를린·베니스)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던 배우 이자벨 위페르가 캐스팅돼 기대를 모았다. 폭탄 달린 경성행 열차에 탄 두 남자 개봉 9월 7일 장르 액션, 드라마 감독 김지운 출연 송강호, 공유, 한지민, 엄태구, 신성록 등 1920년대 말,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경성으로 폭탄을 들여오려는 의열단과 이를 쫓는 조선인 일본 경찰의 갈등과 우정을 그렸다. 김지운 감독은 과 에 이어 이번 영화로도 토론토 국제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김 감독과 네 번째 영화를 작업하는 배우 송강호가 조선인 일본 경찰 역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흥행작 의 주인공 공유가 의열단의 리더를 맡아 미묘한 두 남자의 관계를 연기한다. ◇ 공연(Stage) 부를수록 그리운 어머니의 사랑 일정 9월 10일~10월 30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극장 용 연출 이종훈 출연 고두심, 김영옥, 이홍렬, 이종원 등 1998년 세종문화회관 초연 당시 전회 매진을 기록한 작품으로, 1990년대 대표 악극 중 하나다. 올해는 원작 내용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해석과 세련된 무대 연출로 50일간 공연한다. 이전보다 젊은 배우들을 캐스팅해 그간의 신파형 악극을 탈피하고, 우리 춤과 노래를 보강했다. 아름다운 초상화에 가려진 욕망 일정 9월 3일~10월 29일 장소 성남아트센터 오페라하우스 연출 이지나 출연 김준수, 박은태, 최재웅, 홍서영 등 오스카 와일드의 장편 소설 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다. 불멸의 아름다움을 얻고자 했던 도리안의 삶과 깨달음을 노래한다. 체코 프라하의 이국적 풍경에 몽환적인 색감이 어우러진 포스터가 인상적이다. 20년 전 사라진 그날의 사건 일정 11월 6일까지 장소 충무아트홀 대극장 연출 장유정 출연 유준상, 지창욱, 오만석, 오종혁 등 고(故) 김광석이 불렀던 노래와 더불어 청와대 경호관이라는 인물을 통해 펼쳐지는 미스터리한 전개가 돋보이는 창작 뮤지컬이다. 2013년 초연부터 참여한 배우 유준상과 지창욱을 비롯해 장유정 연출, 장소영 음악감독, 신선호 안무 감독이 함께해 완성도를 높였다. 음악으로 만나는 서울 일정 9월 8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M씨어터 연출 황준연 출연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서울의 620년 역사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관현악 연주회다. 북한산, 청계천 광통교 서화시장, 보신각, 전차 등 서울이 걸어 온 자취와 미래의 모습을 담은 음악들을 감상할 수 있다. 자동차가 달리고 고층빌딩으로 가득한 오늘의 서울, 산과 들, 강이 어우러진 옛 한양의 모습을 담았다.
- 2016-09-13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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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세대 이야기] 1955년생, 나의 글쓰기는 혼자 밀크캐러멜 먹기
- 글 한만수 소설가 어린 시절을 보낸 충북 영동은 워낙 산골이라서 전국적으로 소문난 난시청 지역이다. 1시간 거리에 있는 대전이며 김천만 가도 몇 개의 라디오 프로가 나오지만 영동은 FM 주파수 하나만 간신히 잡힌다. 그 시절 라든지 라는 심야 방송이 유행했었다. 별도 새도 잠든 한밤중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듣는 프로그램은 내게 신세계였다. DJ의 감미로운 목소리도 좋았지만 시청자들이 보내는 엽서의 내용이 가슴의 심장 박동 수를 빠르게 했다. 쿵작쿵작하는 트로트 선율에 길들여져 있던 내게 ‘상하이 트위스트’ 라든지 ‘울리불리 트위스트’, 톰 존스의 ‘킵 온 러닝’ 같은 신나는 노래는 가슴을 확 트이게 하는 청량음료였다. 그 밖에도 비틀스, 롤링스톤스, 사이먼 앤 가펑클 등의 목소리는 14세 중학생의 가슴 깊은 곳에 흐르는 감성의 강물에 뜨겁게 소용돌이쳐갔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서커스단이 들어왔다. 가수가 엘비스 프레슬리 흉내를 내며 ‘하운드 독(Hound dog)’을 불렀다. 가수가 무대에 섰을 때 막 밀크캐러멜 포장을 뜯고 한 개를 입에 넣었다. 가능한 한 아껴 먹으려고 밀크캐러멜을 천천히 빨았다. 노래가 끝났을 때는 언제 먹었는지 열두 개의 캐러멜을 모두 먹어 버렸다. 그는 다른 가수들처럼 마이크 앞에서 얌전히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요란한 밴드 음악에 몸을 맡기고 ‘개다리춤’을 추면서 부르는 노래는 완전히 충격이었다. 소풍을 가면 기껏해야 남진의 ‘님과 함께’를 함창하면서 손뼉이나 치고 있던 그 시절. 도시학생들처럼 나팔바지를 입고 야외전축에서 흘러나오는 팝송에 맞춰 개다리춤과 트위스트를 추었다. 친구들 앞에서 미친 듯이 몸을 흔들어 되긴 했지만 성격은 지극히 내성적이어서 글쓰기를 좋아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시절 나는 아무도 모르는 광기를 품고 있었다. 나만 광기를 품고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시절은 요즘과 달라서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야 살아갈 수 있는 시대다. 부모님에게 상속받을 유산도 없었지만, 세상은 어차피 혼자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자라던 시대라서 모두들 미래에 대한 광기를 품고 있었을 것이다.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처음 한 것은 중학교 2학년 때이다. 백일장에서 ‘운동장’이란 제목으로 산문을 써서 당선된 날 밤이다. 우등상도 아니고 모범상도 아닌 그저 글 잘 써서 받은 상은 집에서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혼자 밤중에 상장을 쓰다듬으면서 이다음에 작가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은 은행원이 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은행배지를 양복 재킷 깃에 찬란하게 달고, 잘 마시며 잘 먹다가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는 졸병 시절부터 우연찮은 기회로 선임들의 펜팔편지, 혹은 연애편지를 대필해 주기 시작했다. 글은 쓰면 쓸수록 는다. 편지를 잘 쓴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 나갔다. 동기들이 그늘 밑에서 휴식을 취할 때 나는 연애편지를 대필했다. 일요일에도 동기들은 화장실 뒤에 숨어 과자를 나누어 먹을 때 나는 나무 그늘 밑에서 선임이 사다 준 초코파이를 먹으면서 편지를 썼고, 동기들이 칼바람을 맞으며 얼차려를 받을 때 나는 내무반 페치카 옆에서 편지를 썼다. 어느 날 문득 중학교 2학년 때 작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때부터 시간이 있을 때마다 소설을 썼다. 지금 생각해 보면 소설이라 할 것도 없다. 연재 형태로 써서 내무반에 돌렸는데 세월이 고래심줄처럼 질길 때여서 나름 인기는 있었다. 전역을 하고 복직을 했지만 작가의 꿈은 버려지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사표를 내고 절간에 들어가거나, 어떤 소설가처럼 영등포역 근처 닭장 방을 한 칸 얻어서 글을 쓰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못했다. 결정적으로 직장을 그만두고 작가의 길을 걷게 된 것은 나이 36세 때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꾸준히 습작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원치 않은 부서로 발령이 났다. 그날 혼자 술을 마시면서 고민을 했다. 새로운 임지로 가면 똑같은 날이 계속될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출근을 하고, 때가 되면 보너스를 타고, 또 한 해가 가고, 결국 나이가 들면 퇴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남은 인생을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 아주 싫었다. 고생이 되더라도 내가 쓰고 싶은 글을 쓰면서 남은 생을 살면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식 형제가 눈에 걸렸다. 전업주부로 사는 아내의 얼굴도 지워지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임지로 전출 인사를 하러 가는 대신 사직서를 제출했다. 사직서를 제출하기까지는 갈등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밀려왔다. 막상 사표를 내니까 오히려 초연해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지만 지점장은 형식적인 반려와 함께 사표를 받아들였다. 서운함보다는 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뼈가 저리도록 느꼈다. 세월은 결코 움켜잡을 수가 없고, 흘러간 세월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만약 그때 상사들이 사직서를 반려했더라면 나는 지금쯤 은퇴자로 아파트 경비를 서고 있거나, 등산복을 입고 산에 오르거나, 선글라스 쓴 얼굴에 강아지를 끌고 공원 산책을 하며 물에 물탄 듯 술에 술탄 것 같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산골 고등학교 출신의 사직서는 대학을 졸업한 지점장의 눈에는 퇴직금 청구서 그 이상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그 점이 내게 축포를 터트려 준 셈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가장 어려웠던 점은 경제적 곤란이다. 그다음으로 새털처럼 많은 시간을 다스릴 수가 없었다. 서른여섯 살이 되도록 타인의 시간에서 살아왔던 탓에 내가 직접 시간을 조정하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마음은 어서 빨리 글을 써야 경제적인 문제가 풀린다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현실은 그걸 허용하지 않았다. 매일 집에 있으니까 아침부터 술을 마셔도 되고, 새벽까지 마시고 늦잠을 자도 되는 생활이 이어졌다. 나는 결국 1년 만에 서울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시절에는 자식들을 서울로 유학 보내지 못해 부모들이 안달을 하던 시절이다. 책 한 권 없는 내가 글을 쓰겠다고 고향에 내려가니 모두들 수상쩍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내 어린 시절의 영혼을 나누어 가졌던 초등학교 동창들도 모임을 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가입 권유를 한 것은 무려 4년 쯤 뒤다. 무엇보다 힘들었던 것은 생존해 계시던 아버님의 절망과, 형제들의 보이지 않는 무시였다. 글을 쓴다는 것은 사서 고생을 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형제들의 눈에는 내가 글을 쓰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었다는 것은 그저 핑계일 뿐일 것이다. 무슨 횡령이나, 사고를 쳐서 잘린 것이라고 자기네들끼리 단정을 지었던 것 같았다. 지금은 사정이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가족들에게 그 시절에는 왜 나를 그렇게 대했냐고 묻지를 않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까 나라도 가족들과 같은 시선으로 못마땅해하고 동네 사람들 보기에 창피했을 것 같았다. 글을 써서 먹고산다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았다. 원고가 완성돼서 출판사에 우송하면 대답이 없다. 기다리다 못해 전화를 해 보면 “원고는 좋지만 우리 출판사와 색깔이 다르다”라는 무성의한 대답을 수없이 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식으로 문학수업도 들어 보지 못한 내가, 간신히 소설 쓰는 것을 배워서 출판사에 제출했으니 채택되지 않는 것이 당연했지만 그때는 피를 말리는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 무렵 ‘천리안’ 이라는 PC통신이 생겼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새로운 것들에 대한 목마름이 강하다. 태블릿 PC도 일찌감치 구입을 했다. 스마트폰의 웹 활용법이라든지, 내 또래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액정 태블릿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것도 성격 탓이다. 그 당시도 나는 보기 드물게 16비트 중고 컴퓨터와 ‘도트프린터’를 가지고 있었다. 서울에서 내려갈 때 청계천 전자상가에서 산 것으로 워드 기능은 있는데 통신을 할 수가 없었다. 통신을 하려면 단말기가 있어야한다. 담뱃값이 없어서 100원짜리 환희를 피우고 있는 내게 통신을 할 수 있는 단말기는 그림의 떡이다. 그런데 어느 날 동생이 집으로 왔다. 한국통신에서 ‘하이텔’ 이라는 통신을 개설하면서 농민후계자들에게 단말기를 한 대씩 대여해준다는 것이다. 천리안이며 하이텔 통신은 문학의 아웃사이더였던 내게 밀크캐러멜 같은 것이었다. 내 시야는 PC통신으로 인하여 전국적으로 넓어졌다. 동호회에 가입을 하고, 작품을 평하고, 가끔은 회원들을 영동 산골로 불러 내려서 밤을 새우며 문학을 토론하고, 소설을 이야기하고 시를 논했다. 유니텔이라는 통신회사가 생겨나면서 통신업계는 3파전이 됐다. 더불어서 대학생과 전문가들 전용이던 통신 세대는 고등학생부터 일반 직장인들까지 넓어졌다. 통신이 보편화 되면서 유료소설 사이트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통신에서 익명으로 글을 올리던 작가들은 급속하게 유료소설 사이트로 편입이 됐다. 나는 유료사이트에 글을 쓰면서 두 마리 토끼를 노렸다. 연재가 끝나면 종이책을 내겠다는 계획이다. 통신으로 보는 문장과 종이책으로 보는 문장은 여러 부분으로 많은 차이점을 보인다. 통신 세대들의 가독률쪽에서 보면 종이책의 문장은 무겁다. 나는 그 점을 재미와 신선한 스토리로 보완 하며 내 존재감을 드러냈다. 컴퓨터가 ‘286’으로 진화를 하면서 윈도라는 것이 생겼다. 윈도는 과거 텍스트 위주의 통신에 새로운 바람을 집어넣었다. 초등학생들까지 키보드를 두들기면서 유료소설 사이트는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PC통신에 연재를 하던 작가들은 모두 자기만의 숲에 고요히 잠겨들었지만 나는 본격적으로 종이책을 출간하기 시작했다. 거의 10년간 하루 12시간 이상, 많을 때는 14시간 동안 손가락에 굳은살이 생기도록 키보드를 두들겼다. 통신에 연재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늘어난 필력이 있었기에 시간이 없어서 글을 못 쓰면 못 썼지.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아서 글을 못 쓴 적은 없었다. 글쓰기에 대한 자신감이 붙을 무렵 서서히 회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빵을 살 생각으로 소설을 쓴다는 것은 다이아몬드로 연탄집게를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가라면 적어도 펄 벅의 같은 소설을 써야한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어깨를 짓누르는 날들이 하루가 다르게 크기를 더해갔다. 나는 2002년 5년 정도 기한을 잡고 현대사 반세기를 배경으로 한 장편소설 집필에 들어갔다. 계획과 다르게 12년 6개월 만에 원고지 2만5000매 분량의 15권짜리 이 완간됐다. 교보문고 광화문점에서 2015년 1월에 ‘작가의 만남’ 행사를 가졌다. 많은 분들이 참석을 해서 성황을 이루었다. 하나같이 “이제 그만 쓰고 쉬어라, 쉬는 것이 어려우면 몇 년 쉬고 다시 시작하라”는 등 그동안의 여정을 치하했다. 나는 그 다음 날 새벽 6시 20분에 컴퓨터 앞에 앉았다. 을 쓰면서 창작노트에 메모해 두었던 장편소설 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늘도 나는 소설을 쓰고 있다. 내게 소설을 쓰는 시간은 밀크캐러멜의 맛을 아무도 모르게 음미하는 시간들이다. 내 사직서를 선뜻 받아 준 상사분들에게 땡규!를 보내면서.
- 2016-08-26 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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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임시정부
- 얼마 전 여행으로 중국 상하이(上海)에 다녀왔다. 먹을 거리와 볼거리의 색다름에 취해서 이틀을 보내고 가벼운 마음으로 ‘상하이임시정부청사’에 들렀다. 일본에 빼앗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이 일했던 곳이라는 피상적인 생각으로 건물 앞에 섰다.그러나 임시정부라 하기엔, 청사는 너무나 작고 초라했다. 자그만 3층 건물로 들어서자 좁고 가파른 계단은 삐꺽 거리고 집무실, 부엌, 화장실, 놓인 소품들도 무척이나 소박해서 그 시절의 어려움을 말하는 듯 했다. 그 곳에서는 독립운동의 장기화에 대비하고, 민족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한인 2세의 교육에 힘쓰고, 일제침략의 부당성과 한국독립의 당위성을 알리는 외교활동을 했다. 일제의 탄압과 여건 악화로 임시정부의 활동이 일시적으로 침체되자 한인애국단의 이봉창열사, 윤봉길의사의 의거를 결행했다. 이를 계기로 임시정부의 존재를 알리게 되었다고 한다. 거사 전 찍은 두 청년의 사진은 울컥하게 했다. 거칠지도 강해보이지도 않는 체구로 보였지만 가슴 속 조국해방을 위한 염원만은 용암 같았을까? 가족도 사랑하는 사람도 뒤로 하고 죽음의 길을 걸은 그 들의 아픔이 녹아 조국이란 이름으로 ‘붉은 꽃’이 된 듯했다. 관람실을 돌다가 시간이 멈춘 듯 정지하고 말았다. 흑백사진 속에 있는 젊은 청년들이 눈에 들어 왔다. 후원자와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초라한 옷차림이지만 단정했고 이목구비가 분명하고 눈에서는 광채가 뿜어져 나오는 생명체가 그 곳에 있었다. 나라를 빼앗긴 채로는 이대로 죽을 수 없다는 결기가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구릿빛 얼굴과 결연한 의지는 100년이 지난 지금의 가슴도 떨리도록 아직도 조국을 놓지 않았나 보다. 그리고 주루룩 눈물이 흘렀다. 이 아까운 청년들이 일제의 총과 칼, 모진 고문에 피를 흘리며 죽어가야 했다니! 무능한 나라는 얼마나 큰 죄악인가? 무수한 생명을 흔적도 없이 스러지게 하는 대학살자이다. 한숨을 토해내며 그들의 한 맺힌 노력과 피를 헛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피를 솟구치게 했다. 잊지 말자. 그것이 패배거나 승리거나 수치라 할지라도 우리가 뿌리내린 역사이므로 교훈이 되어야 한다. 초라한 임시정부청사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자원도 없고 일제의 수탈로 재정도 빈약한 나라가 한국전쟁을 겪고도 GDP 세계 11위가 된 것은 이 초라한 건물에서도 우리 독립 운동가들이 원대한 꿈을 꾸었기 때문에 이룰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감사라고 표현하기에도 미안한 마음으로 고개를 숙였다.
- 2016-06-29 0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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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ML 칼럼] 어버이께 드린 효도 자식이 갚아준다
- 우리말을 하는 한, 그 우리말에 한자어가 들어 있는 한 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새기려면 한자의 어원부터 따져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자는 사물의 모양을 본떠 그린 상형(象形)을 비롯해 지사(指事) 회의(會意) 형성(形聲) 전주(轉注) 가차(假借) 등 여섯 가지 방법으로 만들어진 문자입니다. 이른바 육서(六書)입니다. 부모를 잘 섬기는 효도를 말할 때 쓰이는 孝라는 글자는 老[늙을 로]와 子[아들 자]를 합쳐서 만든 회의자라고 합니다. 글자 자체에 아들(그러니까 자식)이 부모를 잘 섬긴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효도를 강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똑같습니다. 모세가 시나이산에서 받은 10계명 중 다섯 번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입니다. “자녀 된 사람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신 계명은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이것은 신약성서 에베소서 6장에 나오는 말입니다. 공자는 위정(爲政)편에서 제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합니다. “요즘에 말하는 효는 봉양을 잘하는 것에 불과하다. 개나 말들도 집안에서 봉양을 하고 있지 않은가? 우리가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개나 말들과 무슨 구별이 있겠는가?[今之孝者 是謂能養 至於犬馬 皆能有養 不敬 何以別乎] 인간의 본성은 아무리 시대가 바뀐다 해도 달라지는 게 없다던데, 공자의 시대에도 벌써 이렇게 ‘요즘 세태’를 한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오늘날의 효도야 더 말할 게 있겠습니까? 효의 전통이 무너진 지 오래이고 효도를 하려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게 된 세상이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효도는커녕 부모를 버리는 걸 넘어 살부 살모의 존속살해 범죄가 비일비재한 현실입니다. 중국 상하이에서는 5월 1일부로 강제적인 ‘효도법’이 발효됐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을 찾아뵙지 않을 경우 신용등급을 나쁘게 매겨 집을 사거나 도서관을 이용할 때 불이익을 당하게 하는 내용입니다. 특히 부모가 불효자식을 고소할 수 있고 양로원이나 요양원 노인들도 소송을 제기할 수 있게 하는 한편 양로원·요양원 측이 장기간 부모를 방기하는 자식들에게 찾아오라고 연락하는 것도 의무화했습니다. 베이징(北京)과 광둥(廣東)성 장쑤(江蘇)성 등은 이미 2013년부터 노인권익보호법을 시행하고 있습니다. 이 법은 정기적으로 찾아뵙지 않고 부모에 대한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식들을 고소하거나 정부에 중재를 요청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19대 국회에 효도법(이른바 ‘불효자 방지법’) 법안 2건이 제출됐다가 국회 폐회와 더불어 자동 폐기됐습니다. 부모를 잘 모시는 자녀에게는 상속세 증여세를 경감해주고, 재산을 증여받은 자식이 부양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언제든 그 재산을 환수할 수 있도록 제도화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현행 민법 556조는 ‘부모가 자녀에게 재산을 증여하기로 약속한 경우 자녀가 부모에게 범죄행위를 하거나 부양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는 증여를 해제(취소)할 수 있다’고 돼 있습니다. ‘증여를 이미 이행한 때는 증여를 해제(취소)할 수 없다’(민법 558조)는 조건도 달려 있지요. 하지만 사실상 부모가 자녀의 범죄·패륜 행위나 불효를 입증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법원이 이미 작성되어서 효력을 발휘할 수 있는 효도계약서 등의 서면 계약을 중시하는 것도 이 같은 현실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의된 개정안은 자식이 부모를 학대하거나 부양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는 물론 현저하게 부당한 대우를 할 경우까지 포함해서, 효도계약서 등의 서면에 의하지 않은 증여계약을 해지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이미 증여한 재산도 전부 회수할 수 있도록 보완했는데, 사실상 민법 558조를 없애야 한다는 취지인 셈입니다. 또 형법상의 존속폭행죄에서 피해자가 원치 않을 때는 처벌할 수 없도록 규정한 반의사불벌(反意思不罰) 조항을 삭제하자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우리 정서상 부모가 자식들에게 폭행을 당하더라도 처벌을 원하는 경우는 드물어 현행 법은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돼 왔습니다. 증여 해제권 행사 기간도 현행 6개월에서 ‘해제 원인을 알게 된 날로부터 1년 또는 증여한 날부터 5년’으로 늘리도록 하고 있습니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은 부모에 대한 배신이나 배은망덕한 행위가 있을 때 부모가 증여한 재산을 1년 이내에 돌려받을 수 있게 하고 있답니다. 이런 ‘불효자 방지법’은 내년이 대선의 해이므로 노인층의 표를 겨냥한 정치권이 다시 국회에 법안을 제출해 더 활발하게 논의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실 효도법에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법으로 강제하는 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겠느냐, 부작용이 더 커질 수 있다는 거지요. 땅 덩어리가 넓은 중국의 경우 부모를 자주 찾아뵙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가 봅니다. 비행기나 열차 교통비 마련은 둘째 치고, 며칠 이상씩 휴가를 낼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고비를 받고 대신 찾아가주는 ‘부모님 방문 서비스’라는 신종 사업이 생겨 성업 중이라고 합니다. 한국인들은 영리하니 새 법이 발효되면 이런 것들보다 한층 더 기발한 ‘효도사업’이 생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조선 영조 때의 효자 정방(鄭枋)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효자가’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전남 담양에 살았던 전우창(全禹昌)의 효행을 읊은 노래입니다. 그 가사 중 “상분도천(嘗糞禱天) 못 다하야/단지용혈(斷指用血) 하는구나”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운명하려 하자 병세를 알아보기 위해 아버지의 대변을 맛보고 하늘에 빌면서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 드렸다는 내용입니다. 옛 글에 나타난 효행 중 대표적인 것은 혼정신성(昏定晨省), 저녁엔 잠자리를 보아 드리고 아침엔 문안(問安)을 드리고, 동온하정(冬溫夏凊), 겨울엔 따뜻하게 해드리고 여름엔 시원하게 해드리면서 병이 나시면 상분도천, 단지용혈로 간병을 하다가 돌아가시면 삼년시묘(三年侍墓)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은 그냥 정성에서 우러나고 자발적인 효심으로만 행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보고 배우고 본받아야 할 일입니다. 그러니까 孝는 본받는다는 ‘效(효)’이면서 가르친다는 ‘敎(교)’일 수 있습니다. 내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걸 내 자식에게 보여줘야 나도 나중에 그렇게 효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부모가 온 효자가 돼야 자식이 반 효자가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를 포함해서 실제로 그렇게 잘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이런 글을 쓰기가 어려운 것은 언행이 일치하지 못하면 글에 실속이 없고 거짓과 과장이 섞이기 때문입니다. 겨우 겨우 썼습니다.
- 2016-06-27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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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중년·꽃중년 새 바람, 학교 가는 사람들] Part 2-3. 미니인터뷰 - 이희범 aSSIST 총원우회 회장
- 아침 교육현장에서 열성 참석자를 만났다. 경제 관료로 엘리트 코스를 밟고, 경제 부분 전문성의 최고 자리라 할 수 있는 산업자원부 장관까지 지낸 이다. 그것도 모자라 경제 5단체 가운데 2개 단체의 수장을 지내고, 대기업 CEO도 두 번이나 맡는 진기록도 보유했다. 바로 현 LG상사 고문이자, 제8대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낸 이희범(李熙範·66) 회장의 이야기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그런 그가 평범한 화요일 새벽 조찬 포럼에 나타났다. 형식적인 참석도 아니었다. 그 자리에서 그는 포럼의 참석자 대표라 할 수 있는 총원우회 회장을 맡고, 이·취임식까지 가졌다.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aSSIST(서울과학종합대학원)의 CEO 포럼과의 인연을 묻자 그는 처음엔 입장이 달랐다고 했다. “이 포럼이 처음 생긴 것이 2005년이니까, 장관 재직시절이었어요. aSSIST측에서 요청이 와서 CEO 과정의 강사로써 인연을 맺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좋은 분들과의 매력을 느껴 눌러앉게 되었고,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아마 현재 서울 시내에만 경영자 포럼이나 모임이 100개 이상 되겠지만, 여기가 교육과정이나 내용이 다양하다고 생각됩니다. 참석자들도 중견기업의 CEO나 공직자, 민간연구소 연구원 등 다양해서, 여러 입장에서의 다채로운 의견을 들을 수 있어 좋습니다. 이 안에서 비즈니스도 이뤄지고, 그 과정에서 식견도 넓어지기도 하고 말이죠.” 10년이 넘는 세월동안 한 모임을 참석해 열의를 보인다는 것 자체가 형식적인 것과 거리가 있다. 그의 배움에 대한 진정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유독 국내에서 이렇게 조찬 모임이나 경영자 과정의 인기가 많은 것은 한국의 높은 교육열이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도 한국의 높은 교육열을 칭찬한 적이 있잖아요. 제가 공직 시절 대통령을 보좌해서 헝가리를 방문했을 때, 현지 관계부처 장관과의 미팅을 조찬으로 추진했던 적이 있어요. 그런데 그 쪽에서 놀라더라고요. 아침은 가족과 함께 먹는 것 아니냐고. 아예 조찬회동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는 것이죠. 결국 빠듯한 일정 탓에 무리하게 오전에 약속을 잡아서는, 수위도 출근 안 한 건물의 어두컴컴한 사무실에 그 장관과 단 둘이 마주앉아 회의를 진행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다면 이런 현상이 꼭 우리만의 일일까? 이에 대해 이제 우리보다 더한 곳이 있다고 했다. 바로 중국이다. “중국에서도 우리와 같은 경영자 모임이 점차 활성화되고 있습니다. 6개월 과정의 비용이 4만달러 수준이니 가격은 국내 수준보다 훨씬 높은 편이죠. 게다가 모임도 오전에 잠깐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주말에 베이징(北京)이나 상하이(上海), 선전(深?) 등을 돌며 1박 2일 일정으로 해요. 그들에게 힘들거나 비싸지 않으냐고 물어보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봐요. 이곳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상품 하나를 잘 만들게 되면 그를 통해 얻는 수익이 얼마인데 그런 소리를 하냐는 것이죠. 그들의 정보와 아이디어에 대한 가치 평가는 어떤지, 기업 경영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높은지 알 수 있는 경험이었죠. 매일 빅데이터들이 계속 쌓이고 이를 활용하는 기업의 패러다임이 매일 변화하는 상황 속에서 경영자들에게 이런 모임들은 트렌드를 읽고, 도움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행정가에서 기업가로 변화하는 동안 그는 다양한 기관, 다양한 조직에서 변화의 순간을 맞이했고, 그 과정에서 그는 이 모임을 놓지 않았다. CEO 포럼에 대한 애정도 있었지만, 의식을 변화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말했다. “아마 산업자원부 차관을 맡은 뒤 바로 장관에 임명됐으면 많은 어려움을 느꼈을 겁니다. 그 사이에 한국생산성본부 회장과 서울산업대학교 총장을 맡으면서 관료 시절엔 알 수 없었던 다양한 경험들을 체득하게 됐죠. 우리가 흔히 이야기하는 우문현답, ‘우리의 문제는 현장에 답이 있다’라는 것도 이때 깨닫게 되었습니다. 산업부 후배들도 이제 1일(日) 1사(社) 방문을 유지하고, 현장의 요구사항을 경청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또 경영자가 되고 나서는 그간 몰랐던 것들을 많이 배웠다고 했다. 공직과 기업 간 시각차가 분명히 존재하고, 공직자들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자세로 애정을 갖고 기업을 바라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의 이야기에는 겸손이 섞여 있지만, 실제로 그는 현장을 찾아가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 2000년 산업자원부 자원정책실장 시절, 발전사업 분할 때 한국전력 노조가 전면 파업을 선언하자, 신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노조원들의 집결지를 찾아 사태 해결에 앞장선 일화는 유명하다. 또 장관 재임 시절에는 직원들과 정기적으로 ‘도시락 미팅’을 가지며, 일선의 목소리를 듣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그의 수첩 사이에 노란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흔히 포스트잇으로 부르는 접착식 메모지다. 그는 미소지으며 “제가 가장 애용하는 것 중 하나입니다. ‘창조의 노란 패드’라고 부르고 있어요. 작성한 정보가 완료되지 않고 계속 업데이트할 수 있어 애용하고 있습니다”라고 설명했다. 사실 이 수첩 안 메모지는 또 다른 별명이 있다. ‘공포의 노란 패드’. 사무관, 서기관 때부터 일벌레로 유명했던 그를 지칭한 별명이다. 수치 하나까지 틀림없이 기억하려는 철저한 그에 대한 평가가 아닐까. 따로 묻진 않았지만 또 다른 별명은 아마 그도 알고 있으리라. 그의 꼼꼼함을 알 수 있는 또다른 모습은 안주머니 가득 자리 잡고 있는 샤프들이다. 몽블랑 같은 명품이 자리 잡고 있을 줄 알았는데 의외다. 샤프 중에서도 흔히 우리가 ‘제도 샤프’라 부르는 흔하디 흔한 물건이다. 그는 “샤프로 작성하면 쓰고 지울 수 있으니까, 다양한 수치나 정보를 기억할 수 있어서 좋아요”라고 설명했다. 결국 두 가지 키워드다. 정보와 업데이트. 여러 가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총원우회 회장을 수락한 배경에 대해서는 이제 좀 한가해졌다고 대답하며 소탈한 웃음을 보였다. 한국경영자총협회장에서 물러난 후 30개가 넘는 직함을 함께 내려놓았다. 한때는 국내뿐만 아니라 두바이 아부다비 왕립 연구소 자문위원이나, 에티오피아의 경제발전경험 공유사업 참여 등 여러 활동에 참여했던 그다. “10기까지는 신입 기수 내에서 회장을 뽑았지만, 이제 모임이 성장한 만큼 본격적인 사업진행을 위한 변화가 필요하다는 공감이 형성되면서 요청이 있었어요. 저도 나이나 신분과 상관없이 교류를 강화하는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단순 교류를 떠나 전체 790명 회원을 위해 소모임을 활성화하고, 문화예술 공연 지원이나 사회공헌 사업에 적극적으로 나설 계획입니다.” 이희범 회장은? 경북 안동 출신으로 정무직 공무원을 거친 뒤 기업인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현재는 LG상사 고문을 맡고 있다. 서울대 공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행정대학원으로 진학했다. 이공계 출신 최초의 행시 수석 합격자로도 잘 알려졌다. 상공자원부 사무관을 시작으로, 주EU사무관, 대통령비서실 행정관, 산업자원부 차관 등 경제 관료로 이름을 알렸고, 공직에서 물러난 뒤 한국생산성본부 회장, 서울산업대학교 총장을 역임했다. 2003년 12월부터 2006년 2월까지 제8대 산업자원부 장관을 지냈다. 장관 퇴임 뒤에는 한국무역협회장을 역임하고, 2009년 STX그룹 에너지 부문 총괄 회장으로 영입되며 기업인으로 첫발을 내딛었다. 이후 2013년 LG상사 고문으로 이직해 현재까지 활동 중이다.
- 2016-03-25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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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른이 읽는 동화] 바람이 데려다 주겠지
- 이사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두 아이가 각자 자취와 유학으로 집을 떠나고 나니 덩치 큰 집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포장이사를 예약해 두었지만 미리 짐 정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말숙씨입니다. 우선 옷장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원피스, 바지, 블라우스, 재킷 등은 물론 모자, 스카프, 가방까지 어마어마하게 많은 옷가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손질해서 입을 옷, 버릴 것, 누군가에게 주면 좋을 것 등을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 입지 않아 새것과 다름없지만, 오십이 넘은 말숙씨의 몸에는 이제 맞지 않는 옷들도 여러 벌 있습니다. 옷 정리를 하는 도중 말숙씨는 자주 난감해집니다. 다시 입을 수도, 버릴 수도, 남에게 줄 수도 없는 옷들 때문입니다. 처치곤란. 그것은 바로 여행의 추억이 담긴 옷들입니다. 신혼여행지에서 남편과 똑같이 입고 다녔던 줄무늬 커플 티에는 아직도 오색약수 물비린내가 나는 듯합니다. 동료 교사들과 함께 떠난 유럽에서 입고 다녔던 분홍 원피스에는 파리의 낭만적인 거리가 골목골목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고 동창들과 놀러 간 상하이에서 사 입은 푸른 꽃무늬 블라우스는 와이탄의 야경으로 눈이 부십니다. 이제 너무 낡거나 작아져서 입을 수도 없는데,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몸에 맞는 누군가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 ‘추억이란 이렇게도 질긴 인연을 맺고야 마는구나.’ 말숙씨의 난감한 짐 정리는 옷가지들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좀처럼 들춰보지 않는 사진첩도 너무 많았고, 1년 내내 바깥 구경 한번 못하고 차곡차곡 쌓인 그릇들, 먼지 앉은 책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사용했던 물건들, 여행지에 다닐 때마다 사 모은 각종 기념품과 장식품들이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집을 좁혀 가는 것이니 짐도 줄여야 합니다. 정리를 한다는 것은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말숙씨에게 여행의 추억은 정리되지 않는 견고함으로 꿋꿋이 남아 있습니다. 옷이며 가방이며 기념품마다 함께한 사람들이 있고, 놀라며 감탄하던 아름다운 장소들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하나 추억을 사 모은 것이었습니다. 말숙씨는 문득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여행의 추억들이 하나같이 물건에 담겨 있다는 게 쓸쓸하게 여겨졌습니다. ‘나에게 여행은 사람들과 우르르 놀러 가서 구경하고 기념품을 사는 게 고작이었나.’ 짐 정리를 대강 마무리하던 날, 말숙씨는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제주도 여행을 결심했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말숙씨에게 이번 여행만큼은 완전히 새롭고 낯선 경험입니다. 며칠 동안 짐 정리를 하며 들었던 생각을 감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번 여행을 위해 말숙씨는 자신과 몇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첫째,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 둘째, 완벽한 계획을 갖지 않을 것. 셋째, 기념품을 사지 않을 것. 마치 20대 젊은이들이 배낭여행을 떠나듯이 그렇게 여행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남편은 가는 날 아침까지 극구 반대를 했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이사도 며칠 안 남았는데, 주말에 나랑 같이 가자”, “진짜 이유가 뭔지 솔직히 말해봐라”, “아줌마라도 여자 혼자는 위험하다”고 하다가 결국은 매일 수시로 안부 전화를 하는 조건으로 내키지 않는 허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제주 공항에 내리는 순간, 들떴던 마음은 이내 가라앉고 말숙씨는 막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버스는 어떻게 타야 하나’, ‘호텔을 미리 정해둘 걸 그랬나’ 등 이미 여러 번 왔던 제주도인데도 불구하고 낯설고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의 여행에서는 늘 누군가 리더가 있었습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가이드든 누군가가 좋다는 곳, 유명하다는 곳을 추천하고 데려가 주었습니다. 막막한 적도, 불안한 적도 없이 마음 편히 따라다녔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여태껏 일행을 따라다녀놓고 말숙씨는 함께 여행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관광을 다녀놓고 여행을 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올레로 하자! 혼자 하는 여행은 올레길 걷기가 제격일 거야.’ 말숙씨는 공항에서 올레길로 가는 버스 가운데 하나를 찾아 타고 창가에 앉았습니다. 습기 가득한 제주의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훅훅 들어왔습니다.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십니다. 혼자 온전히 만끽하는 바람의 냄새도, 소리도 처음입니다. 바람이 이렇게 생생히 살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 바람이 데려다 주겠지.’ 어디서 내리든 길이 시작될 거라는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말숙씨는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드디어 처음으로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 2015-07-20 09: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