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우짜우짜우짜짜’라는 ‘우스개 표현’이 있었다. ‘웃기는 짬뽕, 날으는(나는) 골뱅이’라는 표현도 있다. 1980년대 후반, 이 말을 처음 쓴 사람은, 영화감독 이규형 씨다. 중식, 그중에서도 자장면, 짬뽕이 널리 퍼졌던 시기다.
자장면은 역사가 길다. 중국 서민의 음식이다. 한반도도 마찬가지. 한반도로 건너온 가난한 이들, 화교들의 길거리에서 한 끼 때우는 간단한 음식이었다. 한반도에서 새롭게 만든 음식도 아니다. 원래부터 중국 서민들의 식사였다. 우리로 치자면 된장찌개, 김치찌개 정도의 음식이다. 이것이 식당의 정식 메뉴가 되었다.
자장면은 한반도의 한식을 잘 보여준다. “자장면이 무슨 한식의 특징?”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이도 많겠다. 잘 몰라서 하는 소리다. 자장면은 이제 한식이 되었다. 중국의 원형 자장면과는 맛이 완전히 다르다. 원본은 중국의 것이지만 우리의 ‘웃기는 짬뽕’이나 ‘우짜우짜’는 한반도의 음식이 되었다.
‘우짜’는 우동과 자장면(짜장면)을 의미하는 말이다. 사무실에서 야근을 할 때면 “난 우동, 난 짜장”이라고 외쳤다.
“우동이 웬 중식?” 하며 의심할 필요는 없다. 짬뽕의 원형은 우동이다. 짬뽕은 오랫동안 ‘중화(中華)우동’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일본에는 지금도 ‘중화우동’이 있다는 사실이다. ‘주카우동’이라고 표현한다.
우리는 중화우동 메뉴를 없앴다. 대신 가락국수, 일본식 우동 그리고 짬뽕을 남겼다. 한반도의 짬뽕은 요란하다. 종류가 많아졌다. 해물짬뽕이 있는가 하면, 매운 짬뽕도 등장한다. 채소짬뽕, 김치짬뽕도 있다. 일부 지방에는 돼지고기를 얹은 돼지짬뽕이라는 메뉴도 있다. 그야말로 짬뽕 천지다.
자장면도 마찬가지. 중국에도 없는 간자장에 느닷없는 삼선자장까지 생겼다. 삼선은 ‘삼선(三鮮)’이다. 신선한 해물 세 가지라는데, 물론 엉터리 조어다. 원래 중식당에서 사용했던 ‘해선(海鮮)’과 ‘삼(三)’을 더한 한국식 조어다.
한반도는 ‘음식의 용광로’다
자장면은 작장면(炸醬麵)이다. 중국식 발음으로 ‘자장미엔’쯤 된다. 자장미엔이 한반도에서 자장면으로 바뀌었다. 작장면(炸醬麵)의 ‘작(炸)’은 ‘터지다’, ‘튀기다’라는 뜻이 다. ‘튀기거나 터트린 장을 면에 얹은 음식’이 자장면이다. 기름을 두른 웍(wok)에 장을 볶으면 마치 기름에 장을 튀기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고열 상태에서는 장이 마치 작은 폭죽처럼 터지는 현상도 볼 수 있다. 웍에 장을 볶아보면 ‘자장[炸醬]’이란 이름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중국 자장미엔의 핵심은 장(醬)이다. 장 중에서도 중국식 ‘첨면장(甛麵醬)’이다. ‘첨(甛)’은 ‘달 감(甘)’과 ‘혀 설(舌)’이 어우러진 글자다. ‘혀에 달다’는 뜻이다. 첨면장은 면을 달게 만드는 장이다. 국수를 먹는데 그 국수를 달게 만들어, 잘 먹게 만든다는 뜻이다.
국수에 볶은 첨면장을 얹어서 먹는 음식은 된장찌개에 밥을 비빈 우리 음식과 비슷하다. 가장 기본적인 서민의 음식이다. 중국 산동성 등에서 널리 먹었다.
흔히 ‘북경 자장면’이라고 하는데 북경 자장면도 유래는 산동성 언저리다. 중국 역시 1950~60년대에 ‘국민 건강을 위해’ 돼지고기 등을 널리 보급했다. 국수[麵, 면]에 장(醬)을 더한, 가난한 이들의 음식에 영양분이 많은 돼지고기를 더한 것이다. 중국 첨면장을 넣고 잘게 썬 돼지고기를 볶는다. 볶은 장을 국수에 얹어서 비벼서 먹는다. 현대적인 중국 자장면이다. 돼지고기와 기름이 장과 어우러져 맛을 더한다.
첨면장은 밀가루와 콩을 이용해 만든다. 콩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지만, 산동성 등지에서는 ‘밀가루+콩’으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한반도로 건너온 화교들도 첨면장을 만들었다. 오늘날 ‘춘장’이라고 부르는 장이다. 중국 첨면장의 변화는 한반도 자장면의 변화다. 첨면장이 바뀌면서 ‘중국 작장면’이 한반도의 자장면으로 바뀐다.
자장면이 처음 한반도에 등장한 것은 1894년 청일전쟁 무렵이다. 많은 중국 병사가 한반도로 건너왔다. 군대가 움직이면 군인, 상인, 가난한 서민들이 따라 움직인다. 중국 대륙 역시 기근, 홍수, 각종 질병에 시달렸다. 가난한 이들이 군대를 따라 대거 인천으로 몰려들어 중국인 거주 지역에 모여 살았다. 바로 차이나타운이다. 항구는 교통의 요지다. 사람과 물자가 움직이고, 이들이 사용하는 물건, 용역을 공급하는 이들이 나타난다. 가난한 이들이 살 수 있는 터전이다.
자장면은 이들의 일상적인 식사였다. 길거리에서도 그릇 하나에 면과 볶은 첨면장을 더한 다음 비벼 먹었다. 이 음식이 당시의 ‘공화춘’을 비롯한 여러 중화요릿집 메뉴로 등재되었다.
당시 유명 식당 중 하나였던 ‘공화춘’의 후손이 현재 인천 차이나타운에서 ‘신승반점’을 운영하고 있다. ‘신승반점’에는 유니자장이 있다. ‘유니[肉泥]자장’은 돼지고기를 잘게 썰거나 다진 다음 첨면장에 볶아서 만든다. 일반적인 자장면이 아니라 돼지고기를 듬뿍 넣은 자장면이다.
중식당의 원래 이름은 청요릿집이었다. ‘청’은 청나라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후까지 중식당은 청요릿집으로 불렸다. 음식 가격은 비쌌다. 서민들이 가기에는 부담스러운 장소. 음식점도 아니고 요릿집이었다. 팔보채, 난자완스, 탕수육, 양장피 등 고급 안주, 요리를 내놓던 곳이었다. 자장면은 예나 지금이나 가격이 싼 중국 서민들의 식사였다. 고급 청요릿집에 ‘주인공’으로 끼어들기는 힘들었다. 유니자장 같이 비교적 고급스러운 음식은 청요릿집 코스 중 하나였다.
첨면장의 진화, ‘자장면’
공식적으로 1955~65년까지 11년 동안 미국의 잉여농산물인 밀가루가 한반도에 대량 공급되었다. 1955년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된 미국의 밀가루 대량 공급은 끼니가 힘들었던 가난한 한반도의 식량난을 어느 정도 해결했다. 국수 공장이 대거 들어서고 수제비가 가난한 이들의 끼니가 되었다. 중식당에서는 밀가루를 이용한 그들 스타일의 ‘자장면’을 만들기 시작했다. ‘국수+첨면장’으로 만드는 자장면. 밀가루가 해결되고 나니, 이번엔 첨면장이 문제였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까지 화교 중식당들은 인근 화교 가정에서 만든 첨면장을 사용했다. 일상적으로 먹고 남은 첨면장을 화교 식당에 공급했다. 자장면이 급속히 확대, 공급되었다. 문제는 역시 첨면장이었다. 화교 민가에서 모으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가내수공업 식으로 만들어도 공급은 한계가 있었다. 외식을 할 만한 식당이 터무니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중식당의 자장면 수요가 급격히 늘어나자 공장에서 대량으로 첨면장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색깔이 검지 않다. 오래 묵은 첨면장은 색깔이 검다. 검은 색깔? 캐러멜 색소로 해결했다. 여기서 다시 한 번 한반도의 자장면, 첨면장은 진화한다.
원형 첨면장은 농도가 짙다. 뻑뻑하다. 잘 비벼지지 않는다. 지금도 북경 등에서 만나는 자장면은 뻑뻑해서 비비기가 힘들다. 그래서 자장 소스를 묽게 만들었다. 전분을 풀고 양파나 감자, 당근, 대파, 호박 등을 썰어 넣었다. 한국인들은 돼지고기가 들어간,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느끼한 음식은 반드시 채소와 더불어 먹는다. 그래서 자장 소스에 각종 채소, 캐러멜색소, 각종 감미제, 조미료를 넣었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자장면 소스다. 중국 첨면장에서 출발했지만 한반도 방식으로 대거 바뀌었다.
1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자장면은 심하게 변화, 왜곡되었다. 원형 자장면은 돼지기름을 사용했다. 어느 순간 “동물성 기름보다는 식물성 기름이 건강에 좋다”는 엉뚱한 오해가 널리 퍼졌다. 전 세계의 중식당들은 대부분 ‘라드(rard)’라고 부르는 돼지비계를 사용한다. 우리나라는 돼지고기 기름을 콩기름으로 바꿨다.
“중국에 자장면이 있다? 없다?”를 묻는 질문은 얼마 전까지도 상당히 어려운 퀴즈였다. 중국에는 자장면이 있기도 하지만 없다고 해도 옳다. 이도저도 아닌 대답인데, 이게 정답이다. 한반도의 자장면은 변형이다. 비비기 좋고, 튀기거나 볶는 것보다는 채소를 많이 넣고 끓이는 방법을 택했다. 중국 자장면과 다르다. 중국인들은 우리 자장면을 ‘한청자장미엔[漢城炸醬麵]’이라고 부른다. 한성, 서울식, 한국식 자장면이라는 뜻이다. 좋든 싫든 자장면은 이제, 한식이 되었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지나고 나면 인터넷에는 많은 후일담이 쏟아진다. 주로 젊은 자녀나 며느리들의 얘기다. 할 말들이 그렇게 없는지 매번 자신들같은 ‘약자’들이 듣기 싫어하는 얘기들 뿐이라는 불평이다. “취직은 했느냐”, “결혼은 언제 하느냐“, ”애는 언제 가질 거냐“.
안부를 묻는 것이며 근황에 대한 관심을 표시하는 것일 뿐인데 그게 무슨 문제냐고 항변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런 무심한 질문들이 듣는 이에겐 지겹고도 치명적인 돌멩이가 될 수도 있다는 게 문제다. 그 말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얼마 전 서울대 김영민 교수가 쓴 재미있는 칼럼이 생각난다. 아마도 이런 세대 갈등을 보다 못해 쓴 글일텐데 미소를 짓게 하는 칼럼이었다. 친척이 명절을 핑계로 집요하게 당신의 인생을 캐물어 오면 그들이 평소에 직면하지 않았을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고 조언해준다. 삼촌이 “너 언제 취직할 거니?” 하고 물어오면 “뭐, 언제 하겠죠.”라고 얼버무리지 말고 “삼촌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 “추석에 그런 것도 못 물어보니?” 하거든 “추석이란 무엇인가”라고 대답하라는 내용이었다.
부분만 인용하여 재미가 덜하지만, 당시 젊은이들에게 인기가 높았던 칼럼이었다.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성찰이 부족하여 상대방이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모르는 게으른 이들에게 재치 있는 일침을 가하는 글이었다. 세상이 바뀌었는지도 모르면서 과거의 사유 구조에 머물러 있다면 어느새 자기도 모른 채 ‘꼰대’가 되어버리는 세상이다. 그렇다면 기성세대가 새롭게 성찰해야 할 ‘꼰대’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요즘 젊은이들 간에 유행하는 ‘꼰대 육하원칙’이란 것이 있다. WHO(내가 누군지 알아), WHAT(뭘 안다고), WHERE(어딜 감히), WHEN(내가 왕년에), HOW(어떻게 나에게), WHY(내게 그걸 왜)이란다. 말하자면 권위주의적 태도로 자신의 기득권을 사수하면서도 어렵고 힘든 일에는 나서지 않고 젊은이들에게 미루는 어른들쯤 될 것같다.
수백 년이 지나도 사회변화가 없던 과거 농경시대라면 어른이 폼을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빛의 속도로 변하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어른들의 기술과 지식은 무용지물이 되었다. 오히려 새로운 기술과 정보의 습득은 젊은이들을 따라갈 수 없다. 그러니 젊은이들의 항변이 더 설득력 있는 시대가 됐다. 그들과 대화할 기회가 오거든 가르치려 들지 말라. 거꾸로 진지하게 그들에게 묻자. “젊음이란 무엇인가?”라고.
연기를 하는 것이 평생 꿈이던 시니어 세대에게 연극을 할 기회는 종종 있다. 몇몇 지자체가 운영하는 시민배우 제도와 다양한 세대들이 모인 연극 동아리들. 가끔 소극장을 빌려 그들만의 공연을 열어 이루지 못한 이상에 잠시 동안만이라도 빠지는 사람들. 이들의 무한한 잠재력을 일깨우고 더 늦기 전에 열정을 담아 무대에 서기를 응원하기 위해 (사)한국생활연극협회가 문을 열었다.
‘생활체육’은 있는데 ‘생활문화’는 없다? 이 질문은 (사)한국생활연극협회를 있게 한 초석과도 같은 질문이었다. 생활체육은 동네마다 지자체에서 시설도 마련해주고 뭐든 다할 수 있게 해주는데 생활문화는 미비하기 이를 데 없다. 알음알음 만나 무대를 찾고 조명 아래 서는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들을 제대로 이끄는 단체나 체계적인 방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사)한국생활연극협회의 정중헌 이사장은 무대에 서고 싶은 욕망이 있거나 꿈이 있는 아마추어를 무대에 설 수 있도록 해주고 싶어 협회를 만들었다고 했다.
“현재 한국생활연극협회는 미주 지역을 포함해 12개 지회와 30여 개 지부가 있습니다. 전문 연극인들이 임원진으로 구성돼 있고, 회원은 200여 명 됩니다. 여성들은 대부분 50~60대이고 남성들은 은퇴하신 분들이 참여하고 계신데 60대가 많습니다. 78세 최고령자도 있습니다. 이분들이 젊은 시절부터 바라던 꿈을 이루면서 노후 설계를 하고 인생을 더 풍요롭고 활기차게 보낼 수 있게 하자는 게 협회의 취지입니다. 특히 공연 전문가들과 비전문 연극인을 연결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아마추어 연극인에게 무대 본능을 깨우다
협회는 2017년 7월 창립 기념 세미나를 열고 생활연극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부터 계획은 확실했다. 기자 출신에 문화계에서 잔뼈가 굵은 이사장의 기획력을 바탕으로 한국 연극을 대표하는 전문 스태프가 장을 마련해놓으면 비전문 연극인은 그 시스템 속에 들어와 순수하게 연극에만 집중한다. 그리고 공연은 반드시 대학로에서 올린다. 비전문인이 이루고 싶은 소망이 바로 한국 연극의 메카인 대학로 무대에 서보는 것이기 때문. 실제로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테네시 윌리엄스 작·최영환 연출)를 제외한 대부분의 작품은 동숭동의 크고 작은 극장에 올려졌다.
“대학로 바닥에서 공연할 수 있을 정도로 철저히 지도합니다. 전문 연극인이 아닐지라도 그분들이 가진 능력을 더 최대한 이끌어내려고요.”
덕분에 우리나라 연극계 대가인 강영걸 씨가 연출했던 ‘작은 할머니’(엄인희 작)는 큰 호응을 얻었다. 이 작품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대가와 함께하는 연극이 어떤 차이가 나는지 알게 됐다.
“지난 6월에 ‘강영걸 연기·화술 아카데미’를 열었어요. 연극 연습만으로는 부족한 부분을 수업으로 보충하기 위해서죠. 제대로 기초를 배우며 발성과 발음, 똑바로 서기, 앉기, 방향 바꾸기 등 대사 분석과 동작을 체계적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 송년 공연은 강영걸 씨가 연출할 예정입니다. 이번 수업을 들은 분들 중에서 우선적으로 캐스팅할 계획입니다.”
연극의 맛을 알아가는 생활연극인들
한국생활연극협회에는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곳을 통해 새로운 삶의 행복을 느끼고 있는 회원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 무대 위 특별한 자신을 발견한다. 그만큼 순수한 열정이 넘치는 곳이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 주인공의 여동생인 스텔라 역을 맡았던 이주연 씨는 국어선생입니다. 1년만 있으면 연금이 나오는 상황인데 연극을 하겠다며 장문의 편지를 보내왔어요. 학교보다 연극이 좋다면서요. 물론 주변 사람들이 조금만 더 참으라고 말리고 다독여서 지금 잘 참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생활연극인으로 무대로 멋지게 돌아오겠죠.”
회원들과 함께 서울 인근으로 단합대회를 갔을 때 저마다 ‘왜 생활연극을 하게 됐는가’를 이야기하면서 서로 감동하고 깊은 마음을 나누기도 했다.
“어떤 분은 남편이 사업에 실패해서 변두리로 이사를 갔답니다. 삶의 의욕도 없이 무기력하게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전봇대에 연극 포스터 하나가 붙어 있더라는 거예요. ‘어렸을 때부터 연극을 하고 싶었는데 나 같은 아마추어도 활동할 곳이 있을까?’ 궁금했답니다. 그러다가 우리와 함께 연극을 하게 되신 거죠. 연극을 시작하고 사업도 잘되고 삶의 활력을 얻었다는 분도 있어요. 다들 참 많은 사연들이 있더군요.”
아이 셋 키우고 남편 시중만 들다 연극을 통해 세상을 접했더니 잔병도 없어지고 근심도 사라졌다는 여성 회원부터, 연기자 지망생이던 20대 시절 프랑스인 남편을 만나 그곳에서 살다가 사별 후 40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연기자의 꿈을 꾸게 된 회원까지. 모두가 크고 작은 아픔도 있고 은은한 삶의 향기도 지니고 있었다.
“누군가는 쉽게 기회를 얻기도 하겠지만 열정과 능력이 있어도 무대에 못 서는 사람도 참 많습니다. 우리 협회의 생활연극이 지금까지 이어져오면서 양적, 질적인 면에서 큰 성장을 하고 관심을 받게 된 것은 평생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회원들의 꿈을 발휘할 수 있게 해줬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8월 말에는 한국생활연극협회가 주최하는 생활연극축제(8.30.~9.1.)가 충북 영동군 심천면 영동국악체험존에서 열린다. 이번이 2회째다. 전국의 생활연극인의 공연은 물론이고 국악, 춤, 시낭송, 버스킹 등을 하면서 즐기는 한판 놀이마당이 될 것이라고. 드라마를 보다가 문득 자신도 모르게 대사를 따라하는 독자가 있다면 지금 바로 생활연극협회 문을 두드려보는 것 어떨까? (생활연극협회 k-act.co.kr)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인생을 재밌고 멋지게 사는 액티브 시니어가 많다지만 세대를 뛰어넘어 이리도 신나게 유쾌하게 사는 사람이 또 있을까. 마치 나이를 거꾸로 거스르며 사는 사람 같았다. 말투건 표현이건 도무지 언제 태어났는지 가늠 불가다. 그의 취미는 디제잉과 수상 스포츠. 그리고 라틴댄스도 요즘 온몸으로 접수 중이다. 올해 나이 64세, 젊음 지수는 딱 그 반의반으로 느껴지는 이 사람. 전 홍익대학교 건축도시 대학원 겸임교수이자 아방디자인그룹의 최범찬(崔範瓚·64) 소장을 서울마리나에서 만났다.
“이런 거 봤어요? 얼마나 폼나요. 카카오톡,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전화번호까지 다 적혀 있잖아요. 이런 명함 처음 볼 거예요. 게다가 이 작은 명함을 뒤집으면 승선권이에요.”
서울마리나(서울 영등포구 여의서로)의 노천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으니 최범찬 소장이 가방에서 명함 몇 가지를 찾아 테이블에 올려놓는다. ‘아방가르드호 요트 탑승권’이라고 쓰여 있는 명함에는 요트를 조종하는 선장이라는 뜻의 스키퍼로 자신을 명명해놓았다. 최범찬 소장은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건축 업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능력자로 살았다고 자부한다. 올해 홍익대학교 건축도시 대학원 겸임교수에서 온전하게 물러나면서 요트와 취미에 투자하는 시간이 좀 많이 늘어났을 뿐. 늘 그랬듯이 젊은이들과 어울리며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고 있다.
꼴찌 학생, 건축에 매료되다
“제 인생이 꽤나 재미있어요. 영등포구 당산동이 제 고향입니다. 파란만장했던 시절 제 일터였던 곳이 바로 여의도고요. 정년 마치고 당산역 근처 한강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잖아요. 제가 나고 젊은 시절을 보낸 곳에 돌아와 있는 느낌은 매번 좋습니다.”
요트를 타고, 홍대 클럽 구석구석 안 가본 곳 없다는 60대. 젊음의 거리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구태의연함을 증명하며 사는 사람. 인생에 있어 결정적인 사건은 바로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입학이었다고 입을 뗐다.
“운명이죠. 홍대 건축학과에 들어간 거 말입니다. 대학 시험을 앞두고 뭐에 홀리듯 놀아서 홍대 건축학과를 최하위로 아슬아슬하게 합격했더군요. 35명 중에 34등이었어요. 다행이었던 점은 전공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는 겁니다.”
최하위 등수로 입학했지만 전공에 대한 매력에 흠뻑 젖어 살았다. 친구들 놀러 다닐 때 최대한 자제했다고. 대신 돈이 모이면 외국 건축 서적을 구해봤다. 꼴찌 학생에서 장학생으로 환골탈태했다. 건축학도로서 학업에 대한 깊은 애정은 대기업 마다하고 힘들기로 정평이 난 한국의 건축 거장인 김중업 선생의 건축연구소에 들어가게 했다. 하지만 가시밭길에 고행이었다.
“당시 각 대학교에서 공부 잘하던 사람들이 일곱 명이나 김중업 선생 밑으로 들어왔습니다. 2년 사이에 다 떠나고 저 혼자만 남더라고요. 아버지 같고 너무 좋아했지만 넘지 못하는 큰 바위 같은 존재였죠. 제가 학교 다닐 때 체격이 좋았어요. 그런데 김중업 선생님 사무실 그만둘 때가 64kg이었습니다. 이후에 위암수술도 했는데 그때는 74kg이었어요. 힘들고 외롭고 정신적으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선생님을 두고 다른 회사로 가는 모습이 제 생각에는 좋지 않아 모교 대학원에 진학해 조교 생활을 병행했습니다.”
사막 한가운데서 발견한 바다
석사학위를 마치고 난 뒤 몸담은 곳은 일리노이공과대(IIT) 학장을 지냈던 김종성 교수가 문을 연 서울건축종합건축사 사무소였다. 중동 건설 현장 사업 수주가 많던 시절 최범찬 소장은 힘겹던 리비아 현장에서 완벽한 인생의 터닝 포인트, 바로 수상 스포츠 세계에 눈을 뜨게 된다.
“저는 리비아 정부 종합청사 프로젝트 설계팀에서 1년 반을 근무했어요. 리비아 내전 훨씬 전이었는데 수도 트리폴리의 항구가 세계적인 미항으로 꼽히던 곳입니다. 부호들이 출입하는 고급 마리나(요트나 모터보트의 계류·연료 보급 등을 위한 기지)가 많아서 다양한 요트도 보게 됐어요. 그때 스쿠버 다이빙도 배웠습니다. 돈이 생기면 외국산 수상 장비들을 사 모았죠.”
리비아 시절 뭔가 잘 안 풀리면 넋 놓고 바라보던 달력이 하나 있었다고 했다. 항공사 이름이 새겨진 달력이었는데 다이빙, 요트를 비롯해 각종 수상 스포츠의 시원한 사진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줬다. 훗날 다시 보니 그 달력에 소개된 수상 스포츠들을 다 섭렵했더란다.
“아직도 당시의 달력을 가지고 있어요. 리비아 시절 눈과 마음으로 담았던 것들을 실현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리비아 업무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는 과장 명찰을 달기도 전에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대학 동창들과 함께 작은 건축인테리어 사무실을 열고 사업을 시작했다. 인테리어 분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성과를 내면서 오랜 시간 승승장구했다. 홍익대학교 야간대학원 출강은 1997년도부터 했다. 학생들은 현업에서 10년 이상 일하고 있는 경험자들. 최범찬 소장은 그들 앞에 설 수 있는 적임자였다. 스스로도 50세 정도에 명예롭게 대학 강단에 서보겠노라 생각했는데 10년 앞당겨 강단에 섰다. 성공가도와도 같던 인생이었지만 IMF 금융위기가 발목을 잡았다. 병마와도 싸워서 이겨내야만 했다.
암에는 해피바이러스가 특효, 요트에 입문하다
“2002년도에 사업체를 부도 처리하고 등촌동에 사시던 누님 집에서 살았어요. 학교 수업만 신경 쓰면서 프리랜서로 일했습니다. 그런데 2010년도에 위암이 발병했어요. 가톨릭병원에서 수술을 했는데 잘라낸 암 부위가 워낙 컸나봐요. 11cm에 가까웠대요. 수련의가 제 수술 장면을 참관할 정도였답니다. 수술 후 시간이 많아 빈둥거릴 때 리비아에서 가져온 달력을 꺼내봤습니다. 문득 ‘내 소원 중 하나가 요트 타는 거였지!’ 하고 요트를 배우게 됐습니다.”
1980년대 말 사업을 시작했을 때 윈드서핑을 좀 배웠는데 바람을 이용하는 것이 비슷해서 그런지 요트에도 금방 적응했다.
“암 투병하고, 항암치료제를 먹으면서 요트를 배웠어요. 왜냐?! 죽기 전에 타야 하잖아요.(웃음) 사실 암 걸리기 전에도 요트에 관심이 많아서 서울마리나 분양 카탈로그를 가지고 다녔어요.”
현재 최범찬 소장이 운영하는 ‘아방가르드호’는 J/24 기종으로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연안용 요트다. 10명이 공동 출자해서 산 중고 요트인데 지금은 멤버들이 다 떠나고 요트만 남았다. 돈이 좀 생기면 사비를 들여 요트를 유지 관리했고 지금껏 즐기고 있다.
“정년퇴임 이후 저의 놀거리를 위해서 요트 조정을 배운 것일 수도 있습니다. 서울마리나 창립 때부터 이곳에 나왔어요. 그러니까 제가 소속해 있는 탑세일 요트클럽이 가장 오래됐습니다.”
사실 요트는 혼자서만 타는 것이 아니다. 요트를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권해도 보고 편하게 탈 수 있게 도와주고 있다고 했다.
“제가 홍대에서 DJ를 하니까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에게도 요트를 타보라고 권합니다. 서울마리나에서 요트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가서 한 번씩 말하죠. 어렵게 생각 말고 일단 요트에 와보라고요.”
홍대 놀이터의 늦은 밤은 ‘DJ 차니’
수상 스포츠에 대한 갈망과 함께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이 바로 음악 이야기였다. 홍대 앞 젊은이들이 모여 춤을 추고 버스킹을 하는 문화 공간에 떡하니 자리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최범찬, ‘DJ 차니’다.
“저 젊을 때만 해도 그랜드하얏트호텔 JJ마호니가 최고 클럽이었어요. 저는 그곳 VVIP 단골일 정도로 많이 갔어요. 건축 일과 관련한 사람들도 주로 그곳에서 만났죠. 그리고 홍대건 이태원 클럽이건 음악을 들으러 다녔어요. 춤추는 거도 좋아했고요. 주말마다 한 20군데 돌아다니다 보니까 딱 클럽마다 일정하게 음악을 트는 패턴이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싫증나더라고요. 직접 해보고 싶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DJ 개인 강습을 받았어요. 3년 동안 암 투병하면서요.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라 수업 끝나고 학교 앞 놀이터에서 음악 틀고, 그 옆 피시방에서 먹고 자고 하면서 살았어요. 피시방은 인터넷 속도가 빠르니까 웹서핑하기가 너무 좋잖아요. 지금은 제가 홍대 놀이터에 등장하면 애들이 자리를 비워줍니다.”
최근에 젊은 사람들이 주로 추는 라틴댄스인 살사에도 도전했다. ‘DJ 차니’로 활동하다 보니 주어진 미션과도 같았다.
“지난해 11월부터 살사를 배우고 있는데 잘 안 늘어요. 배우게 된 동기는 제가 라틴팝 음악을 틀었는데 남미에서 온 외국인들 호응이 좋더라고요. 뭐든 올인하는 성격이라서 열심히 배우고 있어요. 서울마리나 루프톱에서 살사 파티 같은 걸 열어볼까 생각도 하고 있어요. 멋있을 것 같아요.”
큰 암 덩어리를 잘라내고 시작한 요트와 DJ, 같은 세대라면 선택하지 않았을 젊음의 춤 살사 도전까지. 나이를 짐작하기 힘들 만큼 건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암은 완치 판정을 받았어요. 행운이죠 두 번 사는 거니까요. 그리고 이 나이에 요트도 타고 춤까지 배우고 있으니 즐거운 인생이죠.”
세상에 참 많은 것을 가진 사람 같다. 그러나 정작 그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말했다.
“사실 사업체 부도가 크게 나서 제 소유로 아무것도 가질 수가 없어요. 제가 가지고 있는 것들의 실제 소유주는 다 다른 사람이에요. 요트도 운영은 제가 하지만 동호회 요트잖아요. 저에게는 소유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참 속 편하게 살고 있죠?”
행복하게 살다 고민 없이 세상과 이별할 계획이지만 언제든지 실내 건축가로서 현장에 뛰어들 생각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지금도 좋은 일이 있으면 할 준비가 되어 있어요. 전 제 일을 정말 사랑하니까요. 단 아무 일이나 안 하겠죠. 정말 내가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해야죠. 그나저나 지금 제 바람은 살사 춤 실력이 좀 빨리 늘었으면 하는 겁니다.(웃음)”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더운 여름철에 엉뚱하게 비빔밥 이야기를 한다. 나름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보양식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이가 많다. 지난번에도 ‘보양식은 없다’고 말했다. 비빔밥이 여름철 보양식이다. 굳이 찾자면 우리가 ‘환자식’이라 부르는 죽(粥)이 바로 보양식이다. 한식에는 보양식이 없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매스컴까지 나서서 복날 음식 특집을 방송하는 지경이다.
외국 어느 나라도 매스컴까지 나서서 복날 음식을 소개하는 경우는 없다. 우리나라보다 경제적으로 약한 나라들도 이렇게 ‘보양’을 찾아서 헤매지는 않는다. 우리만 튼튼하고 보양식을 먹지 않는 외국인들은 여름철이면 비실비실한가?
보양식 관련해서 한국은 문화적 후진국이다. ‘문화적 문맹’ 수준이다. 1년 내내 ‘치맥’을 먹는 한국인들이 보양식으로 또 닭을 먹는 것도 코미디다. 정작 인삼 소비는 나날이 줄고 있다. 일상에서는 인삼을 거의 찾지 않으면서, 복날에만 인삼 들어간 삼계탕을 먹는 것도 우습다. 치맥은 건강에 좋든 나쁘든,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다. 그뿐이다.
한식이 추구하는 바는 평(平)의 세계다. 음식을 평하는 게 하는 일이니, 여름철만 되면 보양식 원고청탁과 더불어 ‘보양식 강의’도 심심치 않다. 백화점 문화강좌나 공무원, 회사원 연수 프로그램 등에서도 ‘보양식 강좌’를 청한다.
강의를 할 경우 “한식은 평의 음식이다. 그러므로 보양식은 없다”고 미리 선을 긋는다.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상당히 실망하는 눈치다. 더러, “에이, 뭐야?” 하는 이도 있다. “오늘 낮에도 여름철 보양식으로 삼계탕을 먹었는데 보양식이 없다니 그럼 삼계탕, 자라, 장어, 민어를 먹고 힘이 나는 건 뭐지?”라고 묻는 이들도 있다.
겨우 21일 자란 병아리 수준의 닭을 먹고, 내 몸에 보양을 했다고 좋아하는 것은 슬프지 않냐고 묻는다. 그 닭이 항생제, 성장촉진제 등을 먹으며 A4 용지보다 좁은 바닥에서 자랐음을 아냐고 묻는다. 그제야 고개를 갸웃하며 한편으로는 고개를 주억거린다.
끝내 조선시대에 왕실이나 반가에는 보양식이 있지 않았냐고 따지는 이들도 있다. 굳이 보양식으로 꼽자면 죽과 동짓날 팥죽이라고 말해준다. 그리고 비빔밥이다.
비빈다? 여러 음식을 골고루 먹다
1994년,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 선생의 인터뷰.
“내 예술은 비빔밥 예술이다. 동양과 서양, 일본과 한국 그리고 과거와 현대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을 한 그릇에 넣고 비빈다. 그릇 속에서 여러 요소들이 뒤섞이고 충돌, 화합한다. 제3의 맛을 만들어낸다. 내 예술은 비빔밥 예술이다.”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그리고 덧붙인다.
“비빔밥을 비빌 수 있는 한국 사람들은 앞으로 디지털 시대에 선두에 설 것이다.”
25년 전의 인터뷰 내용이다. 인터넷이 아직 민간에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무렵이다. 스마트폰도 없었다. 백남준 선생은 마치 예언 같은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 예언은 맞았다.
미국 가수 마이클 잭슨이 한국에 와서 여러 번 비빔밥을 먹었다고 자랑하지 말자. 어느 항공사에서 비즈니스 클래스 이상의 기내식으로 비빔밥이 가장 인기가 높았다고 우쭐할 일도 아니다. 백남준 선생이 먼저 비빔밥, 비빔밥 문화를 정확하게 예언(?)했다.
비빔밥은 여러 가지 식재료를 동시에 섞고 비비는 것이다. 비빔밥을 먹는 민족은 우리밖에 없다. ‘여러 가지 식재료를 골고루’라고 말한다. 이게 건강에 좋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여러 가지, 골고루 먹으면 다양한 영양분을 골고루 섭취할 수 있다. 보양식이다.
한국 사람들은 이런 ‘여러 가지 식재료’를 섞은 맛을 정확하게 구분한다. “◯◯가 비빈 비빔밥이 제일 맛있다”는 표현도 있다.
전북 전주의 한 비빔밥 집에서는 늘 주인이 밥을 비벼준다. 비빔밥을 비빌 줄 모르는 이는 없다. 이 가게에 가면 필자도 늘 “비벼주세요”라고 청한다. 주인이 ‘숟가락 두 벌로’ 쓱쓱 비벼주면 희한하게 맛있다. 전주 사람들이 설마 비빔밥을 비빌 줄 모르랴? 현지 주민들도 늘 “비벼주세요” 한다.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비빔밥을 위한 변명
비빔밥의 역사는 길고 넓다.
조선시대 중기 문신 박동량(朴東亮, 1569∼1635)이 쓴 ‘기재잡기’에는 무관 전임(田霖, ?∼1509)과 혼돈반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혼돈반은 비빔밥이다.
한 대접에다가 생선과 채소를 섞어 세상에서 말하는 이른바 ‘혼돈반’과 같이 만들어 내놓으니, 전임이 두어 숟갈에 그 밥을 다 먹어 치웠다.
무관 전임은 조선시대 전기의 관리다. 15세기 중후반과 16세기 초반을 살았던 이다. 지금을 기점으로 셈하자면 500년 훨씬 전의 사람이다. 그때도 비빔밥이 있었다, 100년 이상 뒤의 사람인 문신 박동량이 그 내용을 남겼다. 특별하게 설명하지도 않고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혼돈반’이라고 했다. 흔하게 볼 수 있었다는 뜻이다.
전임이 먹었던 것은 생선과 채소를 넣고 비빈 밥이다. ‘혼돈반=비빔밥’이다. ‘혼돈’은 뒤섞여 어지러운 상태다. 혼란, ‘골동(骨董)’과도 비슷하다. 비빔밥을 ‘골동반’이라 부르고,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끓인 국물을 골동갱(骨董羹)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자연스레 받아들이지만, 외국인에게 비빔밥은 어렵다.
일본 언론인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씨는 “비빔밥은 양두구육의 음식”이라고 했다. ‘양두구육’은 전임의 혼돈반과 닮았다. “처음 그릇에 내올 때는 굉장히 아름다운데 그걸 마구잡이로 섞어서 먹는다. 처음과 끝이 전혀 다른 음식이다.”
일본인의 시각으로 보기에 한국 음식, 비빔밥은 그야말로 뒤죽박죽, 아름다움을 파괴한 음식이다. 처음은 멀쩡한데 막상 먹을 때는 뒤섞어서 엉망으로 만든 음식이다. 겉으로는 ‘양 대가리’를 걸어놓고, 정작 ‘개고기’를 파는 식이다.
일본인들의 가마메시[釜飯, 부반]는 솥밥이다. 한국 비빔밥과 닮았지만 전혀 다른 음식이다. 비빔밥은 비비지만 가마메시는 간장을 얹어서 떠먹는 식이다. 한반도의 돌솥밥은 비비지만, 일본의 가마솥 밥은 마지막까지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가마메시가 아름답다고 말하지만 우리는 비빔밥이 맛있다고 이야기한다.
일본의 가마메시는 닫힌 음식이다. 고명을 더하거나 빼지 못한다. 처음 나온 형태를 무너뜨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고수한다. 정해진 식재료와 정해진 방식을 따른다.
한국 비빔밥은 열린 음식이다. 정교한 아름다움만 자랑하는 닫힌 음식이 아니다. 비비다가 말고 나물을 더 넣기도 하고, 밥이나 장을 더하기도 한다. 뒤죽박죽인 듯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비비는 비빔밥의 ‘설계도’를 머리에 넣고 있다.
비빔밥, 평(平)을 향하다
너른 들판. 동네 사람들이 두레로 일을 한다. 논주인은 새참과 식사를 준비한다. 광주리에 여러 나물을 준비하고 밥을 큰 그릇에 담은 다음, 들판에 와서 광주리를 펼친다.
일하던 동네 사람들이 광주리 주변에 모여든다. 큰 그릇을 하나씩 받아든다. 그다음부터는 자유다. 밥을 얼마나 퍼 담든, 어떤 나물을 담든, 모두 자유다. 싫어하는 나물은 먹지 않아도 된다. 좋아하는 나물은 많이 넣어도 된다. 고추장을 넣든 된장을 넣든 모두 개인의 취향이다.
‘흔한 식재료를 귀하게’ 사용하는 것이 한식의 길이다. 나물 잎사귀와 뿌리, 줄기의 맛이 다름을 우리 조상들은 알았다. 전 세계에서 산나물을 이렇게 흔하게, 자주, 많이 먹는 민족은 없다. 산나물, 들나물로 밥상도 차렸다. 나물들을 넣고 비비면 산채비빔밥, 산나물비빔밥이다.
세상의 모든 산에는 산나물이 있다. 세상의 어떤 민족도 산나물을 넣고 비비는 ‘산채비빔밥’을 식당 메뉴로 내놓지 않는다. 산나물과 비빔밥은 우리 고유의 건강식이다. 산나물을 이토록 다양하게 먹는 나라는 없다. 비빔밥을 먹는 민족도 없다. 산나물 비빔밥은 우리 고유의 것이고 조상들의 지혜가 담긴 보양식이다.
여름철이면 몸의 영양 균형이 무너진다. ‘영양 부족’이 아니라 균형이 깨지는 것이다. 균형이 허물어지면 영양을 더할 것이 아니라 균형을 잡아야 한다. 특정 고기와 생선 등을 탐할 일이 아니다. 다양한 식재료를 동시에 섞은 비빔밥이 보약이자 여름철 보양식이다. 여러 영양소와 미네랄, 효소 등으로 몸의 균형을 잡아주니 건강식이다.
현대인들은 영양 부족이 아니라 영양 과잉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기름 파이프가 고장 난 차량에 자꾸 휘발유를 부을 일은 아니다. 영양 과잉으로 힘든 몸에 영양분을 더할 일은 아니다. 여러 가지를 넣고, 섞고 비빈 음식, 비빔밥은 균형을 잡는 데 도움이 된다.
국민소득 3만 달러의 시대다. ‘더하는 음식’, 호화로운 식재료가 아니라 ‘빼는 음식’, 소박한 음식이 필요한 시대다. 여름철, 시큼한 열무물김치, 보리밥, 고추장 조금 넣은 열무김치비빔밥이 그립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
오래전 TV에서 전자회사 광고를 보다가 눈이 크게 뜨고 화면을 본 적이 있다. 당시 신인 연기자였던 김태희가 스페인 전통 의상을 입고 이국적인 풍경의 광장에서 플라멩코 춤을 추는 영상이었다. 배경이 된 아름다운 광장이 어디인지 궁금했다. 그곳이 스페인 세비야에 있는 ‘스페인 광장’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 내 버킷 리스트 목록에 들어갔다.
세비야는 스페인에서 네 번째로 큰 도시다. 구시가지 옆으로 ‘과달키비르 강’이 흐르는 이 도시는 이슬람 왕조 점령기에는 ‘이스빌리아’로 불렸다. 이사벨 여왕 시대에 되찾은 뒤에는 무역 중심지로 성장해 스페인에서 인구가 가장 많은 도시가 됐다. 그러나 16세기 후반에 ‘카디스’에 항구가 개발되면서 서서히 내리막길을 걷게 되었다.
세비야를 배경으로 하는 예술 작품도 많다. 로시니의 ‘세비야의 이발사’, 비제의 ‘카르멘’,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과 ‘돈 조반니’를 꼽을 수 있다. 최근에는 영화 ‘스타워즈 에피소드2: 클론의 습격’ 편의 배경 도시로 나오기도 했다.
다양한 아름다움 지닌 스페인 광장
스페인 광장은 1929년 ‘라틴아메리카 박람회’를 위해 20세기 스페인 최고의 건축가 아니발 곤살레스가 지었다. 반원의 형태로 바로크 양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이 혼합된 건물이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건물 양쪽 끝에는 이슬람풍의 힐랄다 탑을 본떠 만든 탑이 있고, 광장과 건물 사이에는 수로가 있다. 광장과 건물을 연결하는 건 타일이 붙여진 아치형 다리다. 채색된 타일과 갈색 벽돌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광장을 보고 있는 건물 벽은 스페인의 역사적 사건들을 타일 모자이크로 장식해놨다. 건물 아래에는 이슬람풍 타일로 만든 벤치에 스페인 58개 도시의 이름과 그 도시를 상징하는 역사적 사건이 그려져 있다. 타일의 선명한 색과 아름다움에 그저 감탄사만 나온다.
고인 빗물에 광장과 건물이 반사되면 그 아름다움을 언어로 표현할 방법이 없다. 더욱이 해가 지면 켜지기 시작하는 주황색 조명은 모든 선과 색을 더 환상적으로 만든다. 수로의 물에 반사되는 주황색 가로등과 건물, 아치형 다리, 타일, 그리고 광장의 분수에서 솟구쳐 오르는 초록, 분홍, 보라색 물줄기…. 어둠이 내린 젖은 광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콩닥콩닥 뛴다.
플라멩코 공연장 ‘카사 데 라 메모리아’
세비야는 그 유명한 ‘플라멩코’의 발상지다. 스페인 예술의 꽃인 플라멩코는 2010년 유네스코 지정 세계무형문화유산에 지정되었다. 플라멩코라는 이름은 ‘불꽃’, ‘열정’을 뜻하는 ‘플라마(Flama)’를 집시들이 은어로 사용한 데서 유래되었다는 이야기와 댄서의 손 모양이 플라망고 새와 비슷해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 등 다양하다.
흔히 플라멩코를 춤으로 알고 있는데, 춤이 아니고 공연 예술이다. 춤(Baile), 기타(Toque), 노래(Cante), 손뼉과 추임새(Jaleo) 등 4가지 요소로 구성된 공연이다. 전통 플라멩코의 매력을 확인하려면 ‘플라멩코 문화센터(Centro Cultural Flamenco)’에 가면 된다. 추억의 집(Casa de la memoria)에서 플라멩코 춤을 관람할 수 있다. 입장료는 1인당 18유로이고 오후 7시 30분과 9시 하루에 두 번 공연한다.
무대가 작은 실내에 설치돼 있어 출연자의 숨소리까지 들렸다. 기타 연주자 한 명, 가수 두 명, 그리고 남녀 댄서가 한 명씩 출연했다. 플라멩코 음악에는 비장함이 담겨 있다. 댄서의 눈빛과 춤사위는 극장 안에 있는 관객들을 몰입하게 한다. 특히 역동적인 동작과 누구라도 빨아들일 것 같은 여자 댄서의 깊고 검은 눈에서 집시의 애환이 느껴졌다. 마치 사라사테의 ‘지고이네르바이젠’을 연주하는 바이올린의 선율처럼. 플라멩코는 관객과 공연자의 벽을 허물어뜨린다.
세비야에서 꼭 가봐야 할 곳
세비야 대성당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성당이다. 원래 있던 이슬람 사원을 허물고 1402년부터 1528년까지 1세기에 걸쳐 지었다. 고딕 양식, 신고딕 양식, 르네상스 양식이 혼재되어 있다. 스페인의 옛 왕국인 ‘레온’, ‘카스티야’, ‘나바라’, ‘아라곤’의 왕을 상징하는 조각상이 콜럼버스의 관을 메고 있는 ‘콜럼버스의 묘’도 볼 수 있다.
히랄다 탑 대성당 앞에 있는 104m 높이의 종루다. 왕이 말을 타고 종루에 올라가기 위해 탑 안의 통로를 계단이 아닌 나선형의 경사로로 만들었다. 세비야 시내를 전망할 수 있다.
알카사르 요새로 건설되었지만, 나중에 궁전으로 개조했다. ‘작은 알함브라’라는 별칭에 어울리는 중정 형식의 건물에 아름다운 정원을 가지고 있다. 벽돌을 주로 사용했다. 섬세한 문양의 타일 패턴으로 벽과 바닥에 장식하는 무데하르 양식을 살렸다. 르네상스 양식의 기둥과 아치들을 절묘하게 결합한 빛나는 건축물이다. 환상적인 정원을 안 보면 후회할 수 있다.
마리아 루이사 공원 유럽 도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중 한 곳이다. 스페인 광장 맞은편에 있다. 1893년 궁전 주인인 ‘마리아 루이사 페르난다’ 공작 부인이 시에 기증했다. 공원 끝에 있는, 각기 다른 양식으로 지어진 세 개의 궁전에 둘러싸인 ‘아메리카 광장’까지 걸으면서 호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메트로 폴 파라솔 21세기 건축의 새 트렌드를 상징하는 건물이다. 지붕의 스카이라인이 특징인 건물로 세비야의 해질녘 풍경과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세계 최대 목제 건물로 ‘빅 머시룸’, ‘안달루시아의 버섯’ 등으로 불린다.
황금의 탑 이슬람 ‘알모하데 왕조’가 적의 침입을 감시하기 위한 망루로 사용하려고 1220년에 세운 탑이다. 마젤란이 세계일주 항해를 떠난 역사적 의미를 지닌 곳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해양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점프슈트를 입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방미가 소녀처럼 웃었다. 특유의 눈웃음, 그리고 다부진 몸매, 허스키한 목소리로 팬들의 마음을 흔들며 데뷔한 40년 전의 얼굴 그대로라면 믿겠는가. 부동산 관련 책을 출간하고 저자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는 요즘 ‘BangmeTV’ 제작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면서 맨 얼굴로 그날그날의 이슈와 생각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재미와 의미가 더해지는 작업이란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는 여자 방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봤다.
MBC 2기 공채 개그맨으로 1978년 연예계에 데뷔한 방미는 1980년 ‘날 보러 와요’로 한국 가요계를 휩쓸었고 동명의 영화 출연료를 종잣돈으로 국내 부동산 투자를 시작해 해외 부동산까지 성공, 서울 강남은 물론 제주도까지 섭렵하며 큰 부를 쌓았다.
“1983년 LA 공연차 미국을 방문한 뒤 해외 진출과 비즈니스를 꿈꿨어요. 그러다 1993년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발표한 후 연예계를 떠났고 미국 뉴욕으로 갔어요. 2007년 거기서 이모가 하던 주얼리숍 등을 운영하면서 뉴욕, 로스앤젤레스, 하와이 등의 부동산에 투자했어요. 성공을 거둔 건 맞아요. 이 모든 것들이 근검절약하고 노력한 덕분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어요.”
연예인을 하면 돈 좀 벌 수 있을까 하고 시작했다는 그녀는 그동안 전심전력하며 열심히 살았던 젊은 날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육십의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에 호탕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너무 반갑다.
사람들은 아직도 감칠맛 나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한다. 그녀를 ‘날 보러 와요’를 부른 1980년대 인기가수로만 여기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2007년에 가수생활 종료를 선언하고 재야의 부동산 투자 고수로서 활약한 지 오래다.
언니, 아직 죽지 않았다요?
서울 신사동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지금 한국 사회는 뭔가 안 풀리고 답답한 상태라며 쓴소리를 한다. 그 답답함이 너무 싫어서인지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그녀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런 시원시원함이 나이를 거스르는 듯한 그녀의 외모와 잘 어울렸다.
방미는 2018년부터 유튜브를 통해 ‘BangmeTV’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 삶의 이야기, 헬스, 부동산 투자, 정치에 대한 얘기들을 풀어내는 출구다. 그런데 그녀의 채널은 댓글을 달 수 없게 해놨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맥락 없는 비난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나를 꼴 보기 싫어해요. ‘너는 뭐냐. 뭔데 잘난 척이냐’라는 식으로 말하죠. 하지만 저는 전혀 신경 안 써요. 버닝썬 사건처럼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잘난 척하는데 알고 보니 ‘바지사장’인 경우 많잖아요? 심지어 나를 사기꾼이라고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세금 안 내고 사기꾼이었으면 가만 놔뒀겠어요?”
그녀의 솔직 담백함은 지독히 가난했던 ‘흙수저’ 시절을 극복한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듯싶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어렵게 살다가 출세를 하고 돈을 벌고 명예를 얻었죠. 돈을 벌기 시작한 건 ‘날 보러 와요’를 부를 무렵이었고, 버는 대로 저축했어요. 시작과 동시에 계획을 잘 짰어요. 돈에 대한 플랜을 말이죠. 적금을 부어 오백만 원을 모으면 차를 사고 전세를 얻을 수 있겠다 하는 식으로 구상이 늘 있었죠. 그게 습관이 됐어요. 그렇게 지금까지 계획에 맞춰 살아왔죠.”
물론 그녀의 삶이 생각한 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젊었을 때는 굉장히 싸가지 없었다”라고 표현하는 그녀는 20여 년 전, 믿었던 사람에게서 10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사기를 당한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하고는 자신의 교만함을 반성하고 깨닫게 됐다고 한다.
잘 하는 일 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계획을 중시하는 방미답게 오래전부터 유튜브 방송도 차근차근 준비했다. 사실 그녀는 유튜브를 하기 전에 이미 10년 넘게 블로그 ‘악질 방미’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었다.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가수를 그만뒀어도 ‘연예인’이라는 자신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번 연예인은 영원한 연예인이죠. 방미가 죽으면 신문에 ‘가수 방미’라고 기사화될 테니까요. 그러니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가볍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행사를 하거나 신곡을 또 내기는 싫었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블로거에서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또 다른 모험을 하며 그녀는 제작, 연출, 각본, 진행 등 실로 다양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중이다. 현재 구독자 수는 1만6000여 명.
“아직 폭발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지는 않고 있어요. 50대, 60대가 시청자의 주류이다 보니 구독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분위기는 아니예요. 그게 좀 아쉽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제가 여전히 무대 체질인 거 같기는 해요. 유튜브를 하면 신나거든요.”
유튜브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고 싶은 마음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 특히 비중을 두고 방송을 하는 분야는 재테크다.
“제가 현물은 잘 모르지만 부동산은 40년간 발로 뛰면서 많은 정보를 얻었어요. 그래서 알려줄 게 많아요. 20년은 한국에서, 20년은 미국에서 부동산 투자를 하며 보냈으니까요.”
‘나는 해외 투자로 글로벌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
사실 방미는 그동안 세 권의 책을 낸 저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가장 최근에 낸 책은 ‘나는 해외 투자로 글로벌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로,
5월 초에 발간되어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보를 쉽게 얻기 힘든 해외 부동산 투자에 대한 내용을 다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그녀가 실제로 수익을 낸 지역들을 예로 들어 비자 발급, 관련 용어 설명, 미국의 각 지역 정보에서부터 수수료와 세금까지 다양하고도 실전적인 투자 정보를 담고 있다. 해외 투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주목할 수밖에 없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그녀는 지금도 국내외를 오가며 지내고 있지만 현재는 청담동에서 거주하고 있다. 사무실은 압구정동에 있다. 그리고 작년에 제주도에 리조트도 마련했다.
“해외에서 살다 보니 한국에 왔을 때는 꼭 자연을 충분히 느낄 수 이 있는 곳이어야 하더라고요. 이장희 ‘형’(그녀는 이장희에게 노래 ‘주저하지 말아요’를 받으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도 울릉도에 사는 이유가 그래서일 거예요. 산과 바다 등 자연을 보면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부동산 관련 책을 출간한 의미까지 듣고 나니 부동산 투자가로서의 방미가 궁금해졌다. 특히 제주도는 10여 년간 계속 투자가들의 관심을 끌었기에 그녀가 전문가로서 제주도의 부동산 가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슬쩍 듣고 싶었다. 독자들을 위해 제주도 투자에 대한 그녀만의 노하우를 청했다.
제주도 투자, 이것만은 명심하라
“제주도는 집을 잘 선택해야 해요.”
그 이유는 중국인들이 이미 많은 땅을 선점했고 매체의 영향으로 제주도 붐까지 일어나면서 난개발을 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 속에 지어진 집들이 문제점이 많다는 게 방미의 진단이다.
“제주도는 섬이고 초원이다 보니 야생동물, 바퀴, 개미 등 벌레가 많아요. 그리고 하수구 등 배수 문제도 있고요. 나이 들어서 거기 가서 영원히 살겠다? 그건 무리라고 봐요. 제주도 초원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죠. 그런데 가서 막상 살면 한 달도 못 견뎌요.”
방미는 제주도에서의 집은 세컨드하우스 개념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세컨드하우스로 살 때 제주도의 분위기를 한껏 내보겠다고 검은 화산석으로 치장한 집을 사는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말리고 싶어요. 제주도 돌은 TV에서나 다른 사람 집 보면서 감상하고, 정말 편하고 세련된 집을 선택해야 해요. 집 밖으로 나갔을 때 KFC도 있고 스타벅스도 있는 편의성이 있는 곳에 마련하는 게 좋아요.”
그녀는 사방이 펼쳐져 마치 그림 같은 풍광을 자랑하는 곳은 오히려 불편함이 많다고 지적했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문화를 즐길 수 있고 편리함이 있는 곳, 인프라 접근성과 재밋거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재야의 부동산 고수로서 한마디
“그래서 제주도는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집을 사면 안 돼요. 그건 하와이도 그래요. 철칙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
바닷가 앞에 있는 집에는 필연적으로 벌레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습한 날씨가 많은 섬에서 바닷가까지 앞에 있으면 생활 환경이 최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제주도는 쉬려고 가는 곳이지 고생하려고 가는 게 아니라는 게 그녀의 관점이다. 얘기를 듣고 보니 그녀가 주택이 아닌 리조트를 선택한 것이 당연해 보였다. 리조트나 레지던스는 청소와 식사 등 필요한 서비스들을 기본으로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투자처로서의 제주도는 지금 어떨까? 그녀는 제주도의 부동산 경제 사정이 현재 최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되려 그렇기 때문에 투자처로서의 가치는 높아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눈여겨보고 있어요. 올 하반기가 투자할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삼방산 밑 지역과 서귀포 중문 관광단지 쪽이 괜찮아 보여요. 삼방산은 요즘 방송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예전부터 핫한 곳이었어요.”
최소한 10년 계획을 세운다
부동산 투자에서 전문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그녀를 보니 현재의 방미에게 가수로서의 욕구는 더 이상 없다고 봐도 좋을 듯했다. 사실 그녀는 꼭 참석해야 할 행사가 있어도 가서 노래는 절대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설 수 있는 무대들은 이제 후배에게 물려줘야죠. 그 자리 외에도 내가 활동할 수 있는 자리들이 있을 테니까요.”
가수로서 최선을 다한 시절이 있기에 후배의 자리를 뺏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인간에 대한 배려와 정의(正義)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가수가 아닌 부동산 투자 강의를 하는 방미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제 강의료가 1000만 원이에요. 그렇게 금액을 정한 건 강의를 꼭 들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시라는 의미도 있지만 너무 비싸니까 부르지 말라는 의미도 있어요. 하지만 정말 의미가 있는 자리에서 강연을 할 때는 돈을 받지 않으려고 해요.”
그녀는 삶을 충분히 즐겼다고 말한다. 해외에서의 삶도 풍족했다. 뉴욕에서 10년 번 돈으로 LA에서 5년 동안 즐겁게 살았다. 이제 그녀는 4~5개월은 한국에서, 3개월은 미국에서, 나머지는 여행을 하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잘살았어요. 이제 내일모레가 칠십(?)인데 인생 정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해봐야죠. 그러니 더 돈을 벌겠다, 다시 노래 좀 불러볼까 하는 욕심은 없어요.”
방미는 모든 계획의 단위가 최소한 10년이라고 했다.
내 마음대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
그녀는 유튜버 활동이 큰 욕심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매력이 있단다. 그걸로 돈을 벌기는커녕 되려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며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으니 그 정도 자유는 당연하지 않냐는 게 그녀의 말이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쉬운 길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앞으로 10년 동안은 내 맘대로 살고자 해요. 이제는 나한테 투자를 하고 싶어요. 우선 충분히 잘 멋지게 쓰고 행복해지는 데 집중하자, 그러니 미리 고민하지 말자는 생각이죠.”
물론 늘 계획하고 사는 게 습관이 된 그녀가 모든 걸 내려놓을 리는 없다. 우선 유튜브 구독자 수를 올해 말까지 3만 명 정도까지 늘리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스튜디오를 만들고 싶어요. 강연과 세미나, 공연, 요가, 운동, 놀이터 등이 가능한 만남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은 거죠. 요즘 시니어는 예전에 비해 훨씬 건강해요. 베네피트에 공감하며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브라보는 젊은 애들이 잘 안 하는 말이다. 진정 우리 나이여야 할 수 있는 말”이라면서 멋지게 정리해버리는 방미는 그야말로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고 외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브라보’스러운 미래 계획은 또 어떻게 세울지 궁금해졌다.
삼성동 코엑스에서 리모델링 개장 2주년 기념으로 6월 한 달 동안 특별행사를 하고 있다. 매주 금요일 오후 7시 명사 초청 특별 강연. 하나같이 놓치기 아까운 강연들이다.
지난 6일은 특별히 한국인이 사랑하는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 강연이 있었다. 소설 ‘개미’로 세계적 작가로 부상한 이후 ‘타나토노트’, ‘신’, ‘웃음’, ‘나무’ 등 잇따라 화제작을 내놓았다. 35개국 언어로 번역되었고 2천 3백만부 이상이 판매되었다고 한다.
이번엔 ‘죽음’이란 작품 발간 기념으로 3년 만에 한국을 찾았다. 만나보고 싶었던 작가였기에 강연을 듣고 사인까지 받았다. 주어진 육체는 영혼의 세계보다 훨씬 가치가 있고 소중한 것이므로 삶을 최대한 행복하게 살아야 하며 자살 같은 것은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라고 작가는 강연을 통해 강조했다.
7일에 있은 연극배우 손숙씨의 강연에서 손씨는 자신의 삶을 유머와 함께 풀어냈다. 자신의 일생은 어려서부터 책과 연극이었으며 자연과 독서의 어울림이었다고 말했다. 이제는 시력이 떨어져 마음껏 책을 잘 볼 수 없는 것이 가장 안타깝다면서 죽는 날까지 연극무대에 설 수 있다면 행복하겠다고 노배우는 말했다.
14일엔 소설가 공지영 씨, 21일에는 유홍준 교수, 그리고 28일에는 건축가 유현준 교수 시간이 예정되어 있다. 금요일 명사 초청 강연 말고도 수요일. 목요일 오후 7시에 많은 전문 강의가 계획되어있다. 그뿐만 아니라 매주 토요일 3시에는 도서관 콘서트도 열려 힐링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별마당 도서관은 삼성역 스타필드 코엑스 몰에 위치한 열린도서관으로 총 7만여권의 장서를 갖추고 있으며 무료로 즐길 수 있다.
당신의 아지트는 어디인가? 물론 특정한 한 곳만을 아지트로 삼은 사람도 있겠지만 날씨, 기분, 개인 욕구에 따라 가고 싶은 장소가 달라지기도 한다. ‘2019 시니어 아지트’ 설문조사에서 ‘시니어를 위해 생겨났으면 하는 아지트 유형은?’이라는 질문에 대다수가 문화공간, 학습터, 쉼터를 꼽았다. 그래서 준비했다. 즐기고, 마음의 양식을 채우고, 쉬고 싶을 때 찾으면 좋을 공간을 소개한다.
연재 순서 ① 樂(즐기다), ② 學(배우다), ③ 休(쉬다)
學(배우다)
떠나자 북캉스!
서울책보고
최근 문을 연 서울책보고는 서울시가 1465㎡ 규모의 신천유수지 창고를 개조해 만든 공간으로, 국내 최초, 최대 규모의 공공 헌책방이다. 이곳에 들어서면 책벌레를 형상화한 비정형 나선 구조의 거대한 헌책 장서가 눈을 사로잡는다.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 있던 25개의 헌책방을 모집해 10만여 권의 책을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북카페에서는 편하게 책을 읽을 수 있다. 독창성과 희소성 있는 독립출판물 2000여 종과 명사의 기증 도서 1만여 권도 전시되어 있다. 독립출판물과 기증 도서는 구매가 불가하고 서울책보고 내에서 읽는 것만 가능하다. 또 책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절판된 서적도 구매할 수 있으니 추억의 헌책을 만나고 싶은 사람은 서울책보고로 GO!
위치 서울 송파구 오금로1 (잠실나루역 1번 출구 도보 3분)
운영시간 평일 10:30~20:30, 주말 10:00~21:00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연휴 휴무)
청운문학도서관
청운문학도서관은 자연 속에 위치한 한옥형 문학특화도서관이다. 시·소설·수필 위주의 문학 도서를 소장하고 있으며 국내 문학 작품 및 작가 중심의 기획 전시와 인문학 강연, 시 창작 교실 등도 운영한다.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조망을 자랑하고 대중교통 이용도 편리하다. 독서와 사색, 휴식을 즐기기에 안성맞춤인 이 도서관의 또 다른 매력은 ‘문학둘레길’과의 연계다. 문학 둘레길은 인사동, 만해당(한용운 가옥), 보안여관(시인부락), 이상의 집, 윤동주 하숙집 터, 세종대왕 생가 터, 정철 생가 터, 윤동주 시인의 언덕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문학과 자연의 향기에 취하고 도심 속 힐링 공간으로 손색이 없는 곳이다.
위치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36길 40 (경복궁역 3번 출구, 광화문역 2번 출구 → 버스 환승)
운영시간 매일 10:00~19:00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연휴 휴무)
아크앤북
책과 라이프스타일 숍이 결합한 복합문화공간이다. 입구에서부터 세련되면서도 이국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복합문화공간답게 다양한 장르의 도서뿐만 아니라 각종 생활용품 및 잡화도 판매하고 있으며 카페와 음식점도 있다. 서울에서 가장 오래된 제과점 ‘태극당’도 입점해 있어 출출할 때 간식을 즐기기에도 좋다. 편히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공간도 곳곳에 마련되어 있다. 아크앤북에 방문했다면 ‘타센 아트북 스트리트’로 불리는 아치형 책 터널은 꼭 보고 가야 한다. 독일의 예술서적 전문출판사인 타센의 도서 8000권 속에 자석을 넣어 천장을 덮은 특별 인테리어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위치 서울 중구 을지로 29 (을지로입구역 1-1번 출구 도보 1분)
운영시간 매일 10:00~22:00 (연중무휴)
당신의 아지트는 어디인가? 물론 특정한 한 곳만을 아지트로 삼은 사람도 있겠지만 날씨, 기분, 개인 욕구에 따라 가고 싶은 장소가 달라지기도 한다. ‘2019 시니어 아지트’ 설문조사에서 ‘시니어를 위해 생겨났으면 하는 아지트 유형은?’이라는 질문에 대다수가 문화공간, 학습터, 쉼터를 꼽았다. 그래서 준비했다. 즐기고, 마음의 양식을 채우고, 쉬고 싶을 때 찾으면 좋을 공간을 소개한다.
연재 순서 ① 樂(즐기다), ② 學(배우다), ③ 休(쉬다)
樂(즐기다)
색다른 체험
한국전통식품문화관 전통주갤러리
한국전통식품문화관 1층 전통주갤러리에선 ‘이달의 시음주’로 선정된 5개의 전통주를 매달 무료로 맛볼 수 있으며 구매도 가능하다. 무료 시음회는 약 30분간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 3개 국어 해설로 진행된다. 한국어·일본어 해설은 오후 1시, 3시, 5시, 7시(7시는 한국어 해설만 있고 주말엔 없다), 영어 해설은 오후 2시, 4시에 들을 수 있다. 조선 3대 명주를 포함한 프리미엄 전통주를 맛볼 수 있는 특별 시음회도 열린다. 매일 오후 1시, 3시, 5시에 열려 1시간 정도 진행된다. 참가비는 1인당 2만5000원. 4인 이상 10인 이하의 인원이어야 하며 늦어도 하루 전날 예약하는 게 좋다.
위치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5길 51-20 (강남역 11번 출구 도보 6분, 신논현역 5번 출구 도보 8분)
운영시간 매일 10:00~20:00 (월요일 휴무)
예약방법 네이버 예약, 전화(02-555-2283)
한국전통식품문화관 식품명인체험홍보관
한국전통식품문화관 2, 3층에는 식품명인체험홍보관이 있다. 2층은 식품명인카페 ‘이음’과 판매점, 3층은 체험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페 ‘이음’에서는 식품명인의 잎차와 감식초, 식혜 등 전통식품을 활용한 다양한 음료와 간식을 맛볼 수 있다. 평일 오후 5시 30분에는 차, 한과, 전통주를 무료로 시식·시음할 수 있는 프로그램도 열린다. 평일에는 체험관에서 식품명인의 재료와 레시피를 활용한 한과, 전통주, 떡, 조청 만들기 체험 등에 참여할 수 있고, 토요일엔 매주 다른 분야의 명인을 만나 강연도 들을 수 있다. 프로그램 참여 시 예약 필수.
위치 서울 강남구 테헤란로5길 51-20 (강남역 11번 출구 도보 6분, 신논현역 5번 출구 도보 8분)
운영시간 매일 10:00~20:00 (월요일 휴무)
예약방법 네이버 예약, 전화(02-6927-3005/3012)
추억의 영화 감상
청춘극장
서울 서대문구에 위치한 시니어 전용 극장이다. 55세 이상 어르신 및 동반자는 2000원에 1950~90년대 추억의 영화와 공연을 관람할 수 있다. 수요일엔 영화 상영이 없고 ‘시네마테라피’, ‘청춘! 싱어롱’, ‘청춘은 떼창이다’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토요일 오전 11시에는 무료 음악 교실, 오후 1시와 3시에는 ‘청춘유랑극단쇼’가 열린다. 예매는 토요일 오후 3시 20분부터 그다음 주 금요일 오후 3시까지 선착순으로 진행된다. 간식도 마련되어 있는데 가래떡 한 개에 200원, 커피는 한 잔에 100원으로 저렴한 가격에 즐길 수 있다. 자세한 영화 상영, 공연 일정은 청춘극장 카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위치 서울 중구 새문안로 22 (서대문역 5번 출구 도보 2분)
운영 시간 매일 9:30~18:00 (일요일 휴무)
참고 청춘극장 네이버 카페
시네마테크 KOFA
서울 마포구 상암동에 위치한 한국영상자료원에는 누구나 무료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바로 한국영상자료원 지하 1층에 위치한 ‘시네마테크 KOFA’. 상업 영화관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독립영화와 옛날 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다. 입장권이 빠르게 매진되는 경우도 있고, 영화에 따라 상영 후 ‘감독과의 대화’가 마련되기도 하니 홈페이지에서 관람 영화 정보도 얻고 입장권은 미리 예매할 것을 추천한다. 직접 방문하기 어렵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Korean Classic Film)’를 통해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
위치 서울 마포구 월드컵북로 400 (수색역 1번 출구 도보 11분, 디지털미디어시티역 2번출구 도보 21분)
운영시간 시네마테크KOFA-매일, 영화 상영시간에 따라 유동적 / 한국영화박물관, 영상도서관- 10:00~19:00 (휴일엔 18:00까지) (월요일, 1월 1일, 설·추석 연휴, 1월 18일 창립기념일 휴무)
예매방법 시네마테크 KOFA 홈페이지, 현장 예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