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다섯 번째는 영주 부석사이다.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이며 배흘림기둥으로 유명한 무량수전이 있는 천년고찰 부석사는 당나라 종남산 화엄사에서 지엄에게 불도를 닦던 의상이 670년에 당나라의 침공 소식을 전하고 돌아와, 5년 동안 양양 낙산사를 비롯하여 전국을 다니다가 마침내 수도처로 자리 잡아 신라 문무왕 16년(676)에 창건하였다.
당시에는 현재의 규모는 아니었으며 초가나 토굴을 짓고 화엄세계의 심오한 뜻을 닦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의상의 제자 신림 이후 국가지원 등으로 크게 중흥하여 대사찰의 건립이 이루어졌는데, 부석사에서는 신라 왕을 그려 벽화로 걸어놓고 있을 정도였다. 후삼국 시기에 궁예가 이곳에 이르러 칼을 뽑아 내리쳤는데 그 흔적이 고려 때까지 남아 있었다고 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우측에 위치한 선묘각은 용으로 변하여 의상대사를 도왔던 선묘 낭자의 초상을 봉안한 건물이다. 창건설화를 계승한 융합적 신앙을 보여주는데, 설화의 주인공을 모신 전각을 유지하며 받드는 모습이 익숙하지는 않다.
부석사는 석등(국보 제17호), 무량수전(국보 제18호), 조사당(국보 제19호), 아미타여래좌상(국보 제45호), 조사당벽화(국보 제46호) 등 5점의 국보와 보물 6점을 갖춘 유서 깊은 절집이며, 아미타신앙의 성지이다.
태백산(太白山) 부석사(浮石寺)
부석사 일주문에는 태백산(太白山) 부석사(浮石寺) 현판이 걸려있으며 범종루에는 봉황산(鳳凰山) 부석사(浮石寺) 현판이 걸려 있다. 또한 절 입구에는 소백산과 태백산 설명이 장황하게 쓰여 있다. 결론은 태백산 지역의 마지막 부분이 소백산 지역에 편입되어 있으나 착오 없기 바란다는 말이니, 부석사가 소백산 국립공원이 아닌 태백산 국립공원 지역이라는 것이다.
즉, 부석사는 태백산 국립공원과 소백산 국립공원 사이에 있고 거리상으로는 소백산이 더 가깝지만 지형상 부석사가 자리한 봉황산은 그 뒤편 선달산으로 이어지면서 태백산 줄기에 속한다. 그래서 (소백산이 아니라) 태백산 부석사라는 것이다.
일주문 안쪽에 당간지주가 서 있는 것이 의아하다. 1980년 전후 사천왕문과 일주문을 새로 세웠으며 그전까지는 지금의 사천왕문 자리가 일주문이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래야 일주문 밖에 당간지주를 세우는 논리에 맞는다. 아마 사찰의 영역을 키우고 싶었나 보다.
매표소부터 일주문, 당간지주, 천왕문까지 험난하지는 않지만 꾸준히 이어지는 오르막 지형을 따라 올라가야 한다. 천왕문부터 범종루, 안양루를 지나 무량수전까지는 3개의 큰 석축을 올라야 하며, 이 석축들은 다시 작은 경계로 나누어져 불교의 구품만다라를 상징한다고 한다.
즉, 구품만다라의 맨 위에는 극락을 상징하는 안양루와 극락을 주재하는 아마타부처님을 모신 무량수전이 위치한 매우 이상적인 구조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 무량수전의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아름다움의 뜻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는 최순우 선생의 답사기는 지금도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명구(名句)가 되었다.
천왕문을 들어서서 범종루를 오르기 전 잠시 평탄해지는 지형의 왼쪽에는 종무소가 위치하고 있다. 앞마당에는 삼층석탑 2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이 석탑들은 원래 이곳이 아니라 인근 옛 절터에서 옮겨왔다는 이건비(移建碑)와 함께 세워져 있다.
삼층석탑 위로는 날아갈 듯 솟아있는 2층 건물 범종각이 보이는데 정면에 마주 보이는 면이 건물의 측면으로 팔작지붕의 합각이 방문객을 향해 날개처럼 펼쳐져 있다. 1층은 누하진입으로 계단을 통해 올라서는 구조이며 2층 누각에는 법고와 목어, 운판이 있다.
범종각은 1층으로 누하진입하여 2층 누마루 중앙 아래로 계단을 올라가게 된다. 그 정면으로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지는 장면은 부석사의 하이라이트 안양루와 무량수전으로 안양루(安養樓)의 안양(安養)은 극락을 의미한다. 구품만다라를 올라 극락에 도달하는 마지막 과정을 상징한다.
안양루에 올라서면 국보 제18호 무량수전이며 이곳에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다는 무량수불, 아미타여래를 모셨다. 이 소조 아미타여래좌상은 국보 제45호이며 무량수전 앞마당에 있는 석등이 또한 국보 제17호이다.
부석사가 보유한 국보 5점 중 이곳에만 석 점이 모여 있는데, 무심코 뒤돌아보면 멀리 이어지는 높고 낮은 산자락들이 이어지는 풍광의 멋스러움에 대한 감탄과 함께 무량수전 어느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바라보았는지 사뭇 궁금해진다.
무량수전 앞마당에는 석등 하나 있을 뿐, 별다른 치장이나 장엄을 위한 설치물 하나 없다. 그러나 석등은 높이가 3m쯤 되어 마주 서도 우러러 보아야 하며 석등 앞 배례석과 함께 말없이 무겁게 다가오니 과연 국보급 석등답다.
1919년 일제강점기 때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였는데 이때 무량수전에서 석등까지 땅 밑으로 석룡(石龍)이 묻혀 있었으며 허리가 잘렸다고 한다. 그때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선묘 낭자의 전설이 기억나 사뭇 아쉽기만 하다.
안양루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엎드려 모여 있는 경내 여러 건물의 지붕과 멀리 펼쳐진 소백의 연봉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아스라이 보이는 소백산맥의 산과 들이 마치 정원이라도 되듯 눈앞으로 다가온다. 뛰어난 경관이지만 지금은 안양루 2층에 올라갈 수 없어 아쉽다.
안양루와 마주 보는 무량수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 하나로 손꼽히는 국보 건물이다. 비록 봉정사 극락전에 최고의 자리를 내주었지만 어차피 건물의 중수 기록이 앞선다는 것일 뿐 창건 일자가 밝혀진 것은 아니기에 무량수전의 비중이 덜하다고 할 수는 없다.
무량수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 형식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강릉의 객사문 다음으로 심한 배흘림기둥을 갖추었으며 평면의 안허리곡(曲), 기둥의 안쏠림과 귀솟음 등을 적용한 뛰어난 건축물로 고대 불전 형식 연구에 기준이 되는 중요한 건물이다.
무량수전 정면 중앙 칸에 걸린 편액은 고려 공민왕의 글씨로 홍건적의 난을 피하여 안동으로 몽진 왔다가 부석사에 들렀을 때 썼다고 한다.
무량수전에는 고려시대에 조성한 소조여래좌상(국보 제45호)을 모셨는데 협시보살 없이 독존으로 동향(東向)하도록 앉힌 점이 특이하며 이는 아미타불이 서방 극락세계의 주인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은 우리나라에서 소조불상 중 가장 크고 오래된 작품이며 손 모양(수인)은 석가모니불이 취하는 항마촉지인으로 아미타불이 맞나 의심이 들지만 원융 국사 탑비 비문에 아미타불을 만들어 모셨다는 기록 등으로 보아 조선시대에 불상을 수리하면서 그리 된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절집을 답사하노라면 ‘실내 촬영금지’에 난감할 때가 많은데 부석사 무량수전은 특히 더 심한 편이다. 심지어 촬영금지 글씨가 안 보이냐고 힐난하거나 감히 부처님을 사진 찍을 수 있냐고 하니, 불상과 부처를 구분하지 못하고 문화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듯싶어 답답했다.
아무튼 무량수전을 둘러보고 밖으로 나오니 동편 언덕 위에 삼층석탑이 하나 보인다. 금당 앞에 석탑은 당연한데 이 탑은 동쪽에 세워져 있다. 아마도 아마타불이 서편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니 그 정면에 탑을 세운 것으로 이해하였다.
이제 다 보았나 하는데 석등 위로 산길이 이어진다. 갑자기 속세를 벗어난 듯 이어지는 오솔길을 따라 가보니 조사당(祖師堂)이 나타난다. 조사(祖師)는 불교의 한 종(宗)이나 파(派)를 세워서 그 종지(宗旨)를 열어 개창한 승려에게 붙여지는 칭호로 의상대사를 기리는 전각이다.
신라 교종 화엄종 본찰에서 선종의 구산선문이 개창조를 섬기듯 하는 것이 조금은 낯설어 보이지만 의상 직후에는 없었으나 선종이 유행하면서 화엄종도 이를 따라간 것이 아닌가 싶다.
조사당의 왼쪽에는 자인당과 응진전, 단하각 등이 있으며 자인당에 모신 석불 3기 중 좌우 비로자나불은 보물 제220호, 가운데 아미타불은 보물 제1636호이다. 1칸짜리 단하각은 지신(地神)을 모시는 전각이라는 말도 있으나 확실치는 않다.
여기까지 둘러본 후 올라온 길을 다시 내려오면서 부석사 오른쪽 산길로 접어드니 그 너머에 원융국사비(경북 유형문화재 제127호)가 있었다. 고려 정종 때 왕사, 문종 때 국사가 된 그는 1053년 세수 90세, 법랍 78세로 입적하자 원융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를 세워주었다.
원융국사비를 둘러보고 지장전 앞으로 오니 아까 올라갈 때는 범종각에서 비껴간 각도로 보이던 안양루와 무량수전이 이쪽에서는 정확하게 일치하는 모습이다. ‘아’ 하는 가벼운 감탄으로 바라보는데 문득 안양루 공포와 공포 사이 빈 공간에 앉아계신 부처님이 보인다. 현현불이다.
상식을 깨고 편견을 뛰어넘는다. 말 참 쉽다. 상식을 깰 때는 식상함과 맞서야 한다. 편견을 넘어설 때는 ‘적당히 살라’는 기운 빠지는 사견에 귀를 막아야 한다. “할머니들이 가능하겠어?” 수군거리는 대중 앞에 마음 졸이며 섰던 게 벌써 10년 전이다. 평생을 아줌마, 할머니 소리 듣던 사람들이 ‘신선하다’, ‘충격적이다’란 말을 들으며 사랑받기 시작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나타났다 사라지는 걸그룹도 많은데 평균 나이 69세, 데뷔 11년 차 진짜 왕언니들만 모인 시니어 걸그룹 ‘왕언니 클럽’을 만났다. 그들의 매력 넘치는 이야기를 살짝이 엿봤다.
동대문구 답십리동 ‘동대문문화원’ 지하 연습실. 매주 화요일, 금요일이 되면 ‘왕언니 클럽’은 시간 맞춰 모여 노래하고 춤추기를 반복한다. 전 단원, 전곡 완전정복이 목표다. 어느 때이고 공연 무대에 재깍재깍 올라갈 수 있을 정도로 준비하고 또 준비한다. 창단 초석이 된 고참부터 5개월 신참까지 현재 16명이 활동 중이다. ‘왕언니 클럽’의 이정자(74) 회장에게 왕언니 클럽이 뭐하는 모임이냐 물으니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밝게 웃으며 말을 이어간다.
“어르신들 계신 곳에 가면 옛날 노래로 즐겁게 해드려요. 그곳에서 봉사하는 분들을 위해서는 요즘 걸그룹 노래도 하고요. ‘왕언니 클럽’ 활동을 하면서 진짜 즐겁게 살고 있습니다.”
노인복지관 위문공연 봉사는 물론이고 ‘왕언니 클럽’의 공연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활기와 생기를 불어넣는 에너지를 발산한다. 옛 가요는 기본이고 인기 있는 걸그룹 노래와 춤, 팝송에도 도전한다. 단, 역동적인 걸그룹 춤은 관절 건강을 생각해 안무를 새롭게 짜는데 전 단원이 함께 의견을 모은다.
관객에 따라서 선곡이 달라지다 보니 개인 무대 의상만 10벌 이상은 된다. 다소 야한(?) 의상도 있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창피했는데 무대에 오르는 일이 잦아지면서 이제는 아무렇지 않다고. 현재까지 방송 출연만 100여 회, 공연은 연간 20회에서 30회를 소화하고 있다. 해외 공연도 전문 그룹 못지않다. 중국, 미국, 룩셈부르크, 태국 등지에서도 초청받아 무대에 올랐다.
환갑이 아니면 아직은 예비 단원
나이 지긋한 언니(?)들이 ‘왕언니 클럽’이란 이름으로 팀을 결성한 것은 2007년이다. 동대문문
화원 강임원 사무국장은 늘어나는 시니어 세대와 신나는 무엇인가를 좀 해봐야겠다는 생각에서 ‘왕언니 클럽’을 창단했다.
“고령화가 빨리 진행된다는 얘기가 흘러나올 때였습니다. 그때만 해도 시니어들이 할 만한 것이 한국무용, 민요교실 정도밖에 없었어요. 그냥 재밌게 놀면서 할 거 뭐 없을까? 그래서 중창팀을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가만히 서서 노래 부르는 것 말고 간단하게 안무도 가미하자고 했습니다.”
‘왕언니 클럽’을 모집하고 지금까지 정말 많은 여성 시니어가 문을 두드렸다. 걸그룹 못지않은 연습량을 이기지 못하고 도중하차하는 일이 많았다고. 기본 4개월은 버텨야 이제 좀 ‘왕언니 클럽’에 적응할 수 있겠구나 체감을 한다고 했다. 연차가 높아져도 나이 60이 안 되면 무대에 서기도 어렵다. 나이가 많을수록 대우받는 걸그룹이라니. 하루라도 빨리 나이가 익기를 바라는 기이한 현상을 이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올해로 2년 차인 배현자 씨의 나이는 55세. 젊다는 이유(?)로 무대에 오르는 선배들 돕기에 바쁘다.
“가끔씩 저를 무대에 올려주시기도 해요. 더러 앞에도 세워주시고요. 여기서는 60세는 돼야 해요. 아직 5년은 더 해야 무대에 설 수 있어요. 제가 배우고 있는 것이 많습니다.”
오래오래 건강하게, 신나게
10여 년 이어온 그룹답게 선후배 사이 기강도 확실하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제법 프로답다. 무엇보다 그녀들이 전문 공연자들이라고 생각되는 부분은 가정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점. 바깥 활동한다는 이유로 가사를 돌보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 회장은 말한다.
“무대에서 화려하게 춤추고 노래하지만 저희도 어쩔 수 없는 옛날 사람이잖아요. ‘왕언니 클럽’을 잘해내기 위해서 밖에 나올 때는 더 완벽하게 집안일을 해놓고 나와요. 오래도록 활동하고 싶거든요.”
해외 공연에 청와대 초청, 시니어가 등장하는 방송 프로그램은 전부 섭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언니 클럽’으로서 꿈이 뭐냐고 물어보니 큰 무대에 서보는 일이란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모두가 건강을 잘 유지하길 바란다고 이 회장은 덧붙였다.
“70대와 60대는 아주 천지 차이더라고요. 다들 오래오래 같이 무대에 서야죠. 함께 건강하게 즐기며 살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나이 먹는 게 즐거움이라는 생각을 왕언니 클럽을 통해 해봤다. 그들의 매력 발산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 라이프@이 독자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소개하고 싶은 동창회, 동호회 등이 있다면 bravo@etoday.co.kr로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시대와 맞물려 자연스럽게 생겨나는 것이 예술이다. 토양의 기운과 그 땅을 디디고 사는 사람들의 기질이 조화를 이뤄내는 것은 전통예술이다. 역사의 질곡에 이은 현대사회 전환기에 살았던 한 소년. 그는 음악에 눈뜨면서 막중한 임무처럼 국악계의 문을 두드렸다. 전통음악의 한계를 허물고 한국 예술 전반에 주춧돌을 쌓다 보니 어느덧 30여 년 세월. 우리 음악이고 예술이고 하고 싶은 것이 여전히 많다고 말하는 KBS국악관현악단 이준호(李準鎬·59) 상임지휘자. 대금과 소금 연주자를 거쳐, 작곡가 그리고 대한민국 예술의 중심에서 명성 높은 국악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국악, 문턱 낮추고 저변을 넓히다
햇볕이 강하게 내리쬐던 7월의 어느 날, 여의도 너른 길을 걸어 한국방송공사(KBS)로 향했다. 24시간 잠들지 않는 방송사. 일하러 오는 사람과 그들을 보러 오는 사람으로 매일 인산인해인 곳. 여기에 KBS국악관현악단이 있다. 오전 연주 연습을 마치고 단원들과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고 있는 이준호 상임지휘자와 마주했다.
KBS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로 살아온 지 올해로 14년째. 국악기를 손에 쥔 사람들 정중앙에서 음악이 갈 길을 제시하고 함께 호흡한다. 1985년 소금 연주자이자 창단 단원으로 KBS국악관현악단과 처음 인연을 맺었으며, 같은 해에는 국악실내악단 ‘슬기둥’을 결성해 대중과 눈 맞춤하기에 앞장섰다. 대금과 소금 연주자로서 활약은 물론, 작곡가로서 친근한 국악 창작을 위해 지금도 노력 중이다. 한국청소년국악관현악단(1988)과 경기도립국악단(1996) 창단에도 힘을 보탰다. 두 단체에서 또한 상임지휘자를 맡아 활동했다. 지난 6월에는 대금연구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우리 고유의 악기 대금 보존과 계승, 발전에 한걸음 더 나아가고자 한다.
‘슬기둥’, 국악이 변화하다
지금은 소규모 국악 그룹이 넘쳐나지만 ‘슬기둥’의 등장은 파격 그 자체였다. 이준호 지휘자와 함께 KBS국악관현악단 창단 동기인 강호중, 김영동, 민의식 등 20대 국악 연주가들은 경계 없는 신선한 음악을 해보자는 마음에 ‘슬기둥’을 결성했다. 그들은 모두가 공감하고 나누는 친숙한 예술을 선보이려고 애썼다. 특히 ‘슬기둥’이 세상에 나오면서 국악은 관객과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던 옛것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슬기둥 1집에 발표된 ‘산도깨비’와 ‘소금장수’는 교과서에도 실렸습니다. 슬기둥을 창단했던 저와 제 친구들의 선택이 맞았습니다. 모두가 국악의 정통성을 외칠 때였어요. 그런 역할은 국립국악원에서 충분히 하고 있잖아요. 영산회상(조선시대 후기 기악곡 형태의 풍류음악)이나 수제천(관악합주곡, 원곡명 ‘정읍(井邑)’)으로는 사람들이 접근할 수 없어요. 일반 대중이 국악을 쉽게 느낄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뭘까 생각했습니다. 국악가요 같은 것을 따라 부르면 더 편하지 않나요? 민요도 전통음악이잖아요. 슬기둥을 만들어 활동하면서, 제가 작곡에 열을 올게 된 것이죠. 198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이준호 지휘자는 지금까지 국악을 바탕으로 1000곡 가까이 창작해왔다. 무용극, 뮤지컬, 연극, 창극, 마당극에 사용하는 공연음악과 TV드라마 음악 등 국악이 필요한 곳이라면 어디든지 달려가 국악의 대중화에 발 벗고 나섰다. 20여 편 되는 MBC마당극 중 일곱 개의 작품도 작곡가 이준호의 손에서 탄생했다. 국악과 현대음악을 접목시키고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고자 노력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후배들이 설 자리를 마련해주고 싶었다.
“새로운 장르를 개발해서 국악에 몸담고 있는 후배들이 갈 길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길이 있어야 젊은 친구들이 국악을 공부하며 열정을 보일 거 아니에요. 전통음악이든 현대음악이든 음악계 전체가 풍성해져야죠.”
새로운 국악을 주창했던 슬기둥 원년 멤버들은 모두 국악과 교수로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이준호 지휘자도 4년 전부터 모교인 추계예술대학교에서 대금과 작곡, 지휘를 가르치고 있다.
“음악 만들면서 현장에 있는 게 좋지, 학교에 있는 걸 원하지는 않았어요. 이제 제가 나이를 꽤 먹었다는 거겠죠.(웃음)”
트럼펫 대신 대금을 손에 쥐다
경기도 이천에서 태어난 이준호 지휘자는 음악 하는 외삼촌들의 영향을 받으며 성장했다.
“특히 외삼촌 주변에 학교 다니면서 브라스 밴드 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동네에서 행진곡 합주를 들을 기회가 많았는데 영향이 저한테 굉장했죠.”
그는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브라스 밴드에 들어갔다. 다양한 서양악기를 접했고 트럼펫을 배우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러던 어느 날 국립국악원 연수를 한 달 정도 다녀온 음악선생님으로 인해 국악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어느 날 선생님이 밤낚시를 가자고 하시더군요. 그곳에서 국악에 대한 깊이와 역사를 이야기하시면서 ‘국악을 해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습니다. 듣고 잊어버려야 했는데 그 말씀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대전환이었다. 그때부터 트럼펫을 내려놓고 국립국악고등학교를 목표로 고입 준비를 해 입학했다. 대금과의 인연도 국립국악고등학고 입학과 함께였다.
“국악을 처음 접하는 거라 뭐든 생소했어요. 악기 주법과 모양새도 그랬고요. 국악기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이 학교에 들어갔어요. 결국에는 대금을 선택했는데 나하고 잘 맞았던 거죠.”
젊음으로 한바탕 놀다
이준호 지휘자가 추구하고 생각하는 국악의 장점은 언제든 변형 가능하고 다른 장르와도 잘 어우러진다는 점이다. 국악 활동을 본격적으로 하면서부터 다양한 음악, 예술 장르와의 협연을 끊임없이 모색했다. KBS국악관현악단 혹은 슬기둥으로 대한민국을 대표해서 해외 여러 나라에 나갔다. 그리고 우리 가락의 흥을 가지각색 협연 무대로 펼쳐 보이기도 했다. 사물놀이패는 물론이고 비보잉, 재즈, 록 등 국악과 접목할 수 있다면 뭐든 함께 무대에 세우고 실험을 이어갔다.
“언젠가 카자흐스탄에 한국어과가 있는 대학교에서 특강을 해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아무리 통역을 붙여 강의한다고 해도 재미없을 것 같아서 비보잉 그룹과 함께 갔습니다. ‘10분에서 15분만 내가 할 테니까 나머지는 너희들이 해라!’ 하고요.(웃음)”
우리나라 문화를 잠깐 소개하고 비보잉 그룹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 곳에서도 비보잉이 인기가 있었는지 20여 명되는 팬이 몰렸다. 우리 가락에 맞춰 한국 비보이에게 동작을 배웠다.
“그때 국악과 비보잉의 결합은 새로운 방식의 문화 융합이었습니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에서 열리는 하라레축제에 갔을 때는 기타리스트 김도균과 색소폰 연주자 이정식과 함께 공연했습니다. 그들에게 국악과 록의 접목을 보여주고 싶었죠. 그런데 공연 끝나고 뒤풀이가 더 오래 걸렸어요. 우리 예술인과 깜짝 협연이 열린거죠. 아프리카 사람들이 리듬을 좀 알잖아요. 우리 것을 다른 나라에 알리고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은 의미 있고 좋은 일입니다.”
창작은 멈추지 않는다
인터뷰를 하면서 인상적이었던 공간은 바로 국악관현악단의 연습실이었다. 방송 전파를 위해 존재하는 방송사 공간에 공연을 준비하는 이들의 아지트가 있다는 게 특별하게 다가왔다.
“KBS국악관현악단이 생기고 30년 동안 제대로 된 연습실이 없었어요. 라디오 공개홀에서 본관 뉴스센터, KBS별관으로 옮겨 다녔어요. 제가 여기 창단 멤버이고 오래 활동해서 아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3년 전에 공간 좀 제발 마련해 달라고 강하게 요구했습니다. 그때까지 국악관현악단 명의로 된 연습실이 없었답니다.”
방송사 건물이 한정적인 데다 사람과 장비가 늘어나 이해는 했지만 오랜 세월을 참고 참다 큰맘 먹고 연습실 문제를 알렸던 것이다.
“사실 방송사 내에 사무실 없는 분들도 있으니 그 사정은 지금도 이해가 돼요. 어쨌든 요즘은 연습이 중단되고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일이 없어서 단원들이 좋아해요. 대신 저희는 열심히 뛰어야겠죠. 연주회도 하고 좋은 레퍼토리도 만들고요. 한국음악을 접하지 못하는 소외 지역이나 교도소, 군부대 등도 저희가 찾아가서 음악회를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더 나은 공연으로 국민들에게 보답하면 됩니다.”
KBS국악관현악단 상임지휘자라는 높은 위치가 늘 행복하고 달가운 자리만은 아니다. 현재 이끌고 있는 악단과 단원들을 위해서 책임지고 해야 할 일이 있으면 나서야 했다. 정권이 바뀔 때 생각지도 못한 오해를 받거나 힘든 일을 겪기도 했다. 국민의 시선이 쏠려 있는 공영방송사 한 분야의 수장으로서 말을 아끼는 것이 ‘최고의 수’라는 것도 나이가 익어가면서 알아갔다. 그래도 꿋꿋하게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옆에 있는 단원들과 함께하는 예술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앞으로 어떤 것을 더 하고 싶냐고 물으니 당연히 국악 얘기로 다시 돌아온다.
“곡 써야죠. 작곡가니까. 판소리 5마당 중에서 심청가만 남았어요. 판소리만 한 대목 한 대목 연주해왔는데 그걸 전체 다 오케스트라로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영산회상 전 바탕, 종묘제례악 합창가….”
지금까지 1000곡 가까이 작곡했다는 분이 아직도 정리할 곡도 많고 할 일이 많단다. 시간이 나면 KBS 신관 길 건너 연구동 5층 사무실에서 곡 쓰는 것이 낙이라고 한다. 이 열정을 어찌 말릴 수 있을까 모르겠다. 언젠가 휴식의 시간이 찾아온다면 펜도, 지휘봉도, 대금도 다 내려놓고 좀 쉬시기를 간청드려본다.
얼마 전 딸네 집에 들렀다가 초등학교 2학년 외손녀 책장에서 공자의 ‘논어’와 노자의 ‘도덕경’을 발견했다. 초등학생이 읽기에는 수준이 너무 높을 것 같아 호기심에 ‘논어’를 펼쳐보았다. 아이들 수준에 맞추었다곤 하지만 역시 어렵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논어’를 가끔 읽어 ‘공자 왈, 맹자 왈’ 할 정도는 아니지만, 대충 공자의 이야기는 귀에 익은 편이었다. 그러나 정작 공자의 출생에 대해선 문외한이었고 관심을 가져 본 바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 본 어린이용 ‘논어’에는 공자의 출생 내력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돼 있었다. 공자는 석가, 소크라테스, 예수 등과 함께 4대 성인으로 불린다. 이 중에 소크라테스 대신 무함마드(마호메트)를 넣느냐 마느냐 논란이 있지만 여기선 논외로 한다.
옛 성인들의 탄생 설화는 대체로 신비롭다. 석가모니는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나고, 예수는 성령으로 태어났다고 하는데, 공자는 일설에 의하면 ‘야합(野合)’으로 태어났다고 할 정도로 탄생설이 뒤숭숭하다.
공자 세 살 때 부친이 돌아가셔서 그는 당연히 아버지가 누구인지 궁금했지만, 공자의 어머니는 이에 대해선 일언반구 말이 없었다 한다. 공자의 아버지는 춘추시대 노(魯)나라 사람으로, 성은 공(公)이고 이름은 흘(紇)이며 자(子)가 숙량(叔梁)이다.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공자는 스스로 젊어선 비천한 일을 많이 했다고 밝힌 바 있듯 숱한 고생을 했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의 키는 비공식적으로 10척이라는 설이 있지만, 공자의 키는 정확히 9척 6촌이라고 전해지는데 이는 지금의 키로 환산하면 190cm에 달하는 거구이다. 하급 무사였지만 거구였던 아버지를 닮아 공자 역시 기골이 장대했다 한다. 공자의 별명이 ‘키 큰 사람’이었다 하니 키가 크긴 컸나 보다.
남편도 없이 몸짓만 큰 아들을 홀로 키운 공자 어머니의 노고는 역사에 한 줄의 기술도 없다. 공자 왈, 맹자 왈 할 때, 맹자 어머니는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라는 고사로 역사에 남아 있기라도 하다.
맹자의 어머니도 맹자 때문에 맘고생을 퍽 하신 분이다. ‘맹모삼천지교’ 후 맹자가 10대 후반, 갑자기 집으로 돌아와 “이제 공부가 재미가 없어 때려치우겠다"고 하자, 한참 잘 짜던 비단을 다 잘라내며 “이렇게 다 돼가던 비단도 잘라버리면 소용없다”고 충격요법을 행한 “맹모단기(孟母斷機)”라는 고사도 있으니 말이다.
간단히 공자와 맹자의 어머니만 비교해 보더라도, 공자의 어머니는 너무 폄하돼 있지 않나 싶다. 공자의 생애도 파란만장했지만, 그 어머니의 생애는 더 파란만장했던 것 같다.
공자 아버지의 조강지처는 딸만 9명을 내리 낳는 바람에 둘째 부인을 들여 겨우 아들을 낳았지만, 맹피(孟皮)라는 이름의 그 아들마저 시원치가 않아 다시 66세의 나이에 열여섯 살짜리 무녀(巫女)인 안징재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해 공자를 얻은 것으로 전해진다.
안징재는 나중에도 공자에게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 주지 않고 2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는데, 후한의 학자들은 안징재가 숙량흘과 관계를 맺었던 것을 부끄럽게 여겼기 때문일 것이라고 기록했다.
무궁화가 우리나라 꽃이라는 노래도 있고 애국가 가사에도 들어있지만 법적으로 나라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드물다. 우리나라 최고훈장 명칭이 무궁화 대훈장, 국기의 깃봉은 무궁화 봉우리 모양 등 국화(國花)가 무궁화임을 전제하는 규정들은 다수 존재하는데도 나라꽃으로 지정받지 못한 이유를 자료를 통해 알아봤다.
무궁화를 국화로 법제화해야 한다는 측 주장은 무궁화는 1000년 이상을 우리 겨레와 함께한 꽃으로 일제강점기에는 민족혼의 꽃이라고 말살 정책을 폈다는 것이다. 애국가 가사에도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들어가 있다. 많은 독립운동가가 무궁화의 수호·보급을 위해 헌신하는 등 무궁화는 한민족을 상징하는 역사성이 있는 꽃이다. 국화로 지정하여 국가의 정체성을 대표하고 내부적으로 국민의 단합을 도모하자는 뜻으로 법제화를 찬성한다.
무궁화를 국화로 법제화하는데 반대하는 논거는 무궁화는 황해도 이북에서 잘 자라지 않는 지역적 제한성이 있어 남북통일 후에 말썽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또한 무궁화는 교잡이 쉬워 국내에 도입된 무궁화의 품종이 다종다양한 관계로 어떤 품종을 국화로 해야 할지 법제화가 쉽지 않다. 인도 원산의 외래종이며 병충해에 취약하고 개화 기간이 7~9월로 짧다는 등의 이유가 열거되어 있다.
외국의 입법례를 보더라도 헌법·법령·관습 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나는 국기·국가(國歌)의 경우와 달리, 연방법으로 장미를 법제화한 미국 외의 대다수 국가가 국화에 관한 법령상의 근거 없이 관습에 따르고 있다는 점도 법제화를 서두르지 않는 큰 이유 중의 하나인 것 같다.
이미 대다수 국민들이 무궁화가 나라꽃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우수한 품종을 정해서 국화로 인정하면 될 것이다. 무궁화를 대대적으로 피우는 금강 자연휴양림에 있는 무궁화동산에 가보면 놀랄 만큼 무궁화가 싱싱하게 잘 피어있다. 무궁화 가꾸기 팻말을 읽어보니 무궁화는 햇볕과 거름을 좋아해서 일반 나무보다 50% 정도 비료나 거름을 많이 줘야 한다는 재배법이 있다. 그냥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니라 가지치기와 가지고르기를 자주 하여 꽃눈이 많이 생기게 하고 무궁화는 새싹이 나올 때 진딧물이 많이 생기므로 디프테렉스나 메타시록스 등 살충제 1000배액(물 1000cc에 살충제 1cc)을 골고루 뿌려줘야 한다는 설명이다.
무궁화즙은 무좀, 설사, 눈병, 생리 불순, 위장병 등의 여러 질환에 효과가 있다는 설이 있지만 현재는 무궁화의 성분 분석이 없는 상태다. 그만큼 무궁화에 대한 국화로서의 대접이 소홀하다. 무궁화 뿌리나 줄기, 나아가 잎이나 꽃의 성분을 분석하여 효용 가치를 더 발견하면 얼마나 좋을까? 우리나라 국화인 무궁화를 우리가 모르면 누가 알아주겠는가? 무궁화가 국화가 된다면 무궁화 가꾸는 방법을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어 어릴 적부터 교육하면 될 일이다. 애국가 가사처럼 무궁화강산을 만들고 외국인을 초청한다면 새로운 관광자원이 될 것이다.
평범하게 사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라고들 한다. 1990년대 후반 IMF를 악으로 깡으로 견뎌야 했던 부모 세대에게 묻는다면 ‘평범했노라’ 회상하는 이는 극히 드물 것이다. 넥타이를 매던 손놀림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된 어느 날 아침부터 부지런히 살아야만 했던 수많은 아버지 중 변용도 동년기자도 있었다. 남들보다 이른 ‘용도폐기’ 인생을 딛고 잇따른 ‘용도변경’ 요구에도 능숙 능란 살아온 인생. 세월 역경을 딛고 여유로운 귀촌생활에 도시생활 잘 섞어가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어봤다.
푸른 들판이 바라보이는 땅콩집에 산다
인터뷰가 있기 며칠 전, 변용도 동년기자와 점심식사를 하다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아내와 가깝게 지내던 이웃사촌 부부와 마음이 맞아 경기도 고양시에 대지를 사들이고 건물을 지어 두 가구가 같이 사는 이른바 ‘땅콩하우스’에 산다고 했다. 텃밭을 일궈 봄부터 가을까지 다양한 채소를 따먹고 집 주위 논밭 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한다. 변용도 동년기자는 우렁이 알과 관련한 기사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온라인에 게재하며 귀촌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아침마다 찾아오는 참새에게 모이도 가끔 준다고. 서울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누리는 귀촌생활이라니. 마침
8월호 커버스토리가 귀농·귀촌 이야기라 변용도 동년기자의 집에 방문하기로 했다. 햇빛 잘 드는 텃밭에서는 상추, 오이, 가지, 파 등이 잘 자라고 있었다. 집 안 마당에 깔아놓은 잔디도 깔끔하게 정돈돼 있었다. 아내 이흥열 씨가 집에서 딴 부추로 만들었다며 부추전을 부쳐 내오신다.
“논에 가면 우렁이도 있고 오리도 봅니다. 가을이면 밤도 많이 떨어져요. 사실 이곳에는 안사람 때문에 왔습니다. 이렇게 한번 살아보고 싶다 하더라고요. 대신 아내가 제 매니저 역할을 종종 해줍니다. 지방 강의가 있을 때 운전을 해주기도 하고 주변 역까지 차로 바래다주고 마중도 나오고 말이죠.”
‘좌절할 시간에 뭐든 했다
멀리 내다보이는 들이며 밭이며 마음 참 편안하게 해주는 곳에 사는 것을 보니 부럽기도 하다. 이 정도면 성공한 인생을 사는 사람 아닐까? 현재 변용도 동년기자의 직업은 전문강사다. 여가 설계와 생애 재설계뿐만 아니라 사진이나 스마트폰으로 찍는 사진 등을 또래 시니어에게 가르친다.
“정년퇴임 후 여가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취미생활이라든지 봉사활동, 학습 이런 것들에 관해 강연합니다. 제 경험을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요. 다행히 강의를 듣는 분들이 잘 호응해주셔서 강의시간이 즐겁습니다.”
뿐만 아니다. SBS러브FM ‘유영미의 마음은 언제나 청춘’ 리포터로 시니어 소식을 전하고 있다. 시니어 자격으로 노크할 수 있는 매체란 매체는 두루 섭렵했다. 글을 좋아하다 보니 저서도 출간했고 육십 넘어서부터는 사진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최근에는 연기에 관심이 생겨 연극무대에 설 준비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미투 운동을 ‘춘향전’에 접목한 창극 ‘어화둥둥 아.우.성’에서 변사또 역으로 출연합니다. 50플러스영등포센터에 있는 연극 소모임 작품인데 저는 회원은 아니고 이름이 특이해서 뽑혔대요. 이래봬도 제가 고등학교 때와 군 시절에 연극무대에 서본 경험이 있거든요. 7월 30일 공연이고 10월에도 서울시청에서 공연한다는군요.”
말 그대로 액티브 시니어의 삶을 살고 있는 이가 바로 변용도 동년기자다. 하지만 은퇴는 그의 생각보다 빨랐다.
“마흔일곱 살에 회사 그만뒀거든요. 쌍용화재 영남권 본부장이었는데 IMF 앞두고 하루아침에 해임됐습니다.”
꽤나 잘나가던 시절이었다. 우리나라 보험 상품을 최초로 개발한 이들 중 한 사람이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낚시보험, 골프보험 등 특색 있는 보험에서부터 가정종합보험, 해양시추보험 등을 개발했다. 텃새 심한 제주도권 본부장으로 지낼 때 만났던 직원들은 아직까지도 변용도 동년기자가 제주에 떴다 하면 만나기를 청한다.
“회사에서 나오고 나서 참 많은 일을 했어요. 청학동 산골에서 나고 자라다 대학교를 다녀야해서 서울로 왔고 졸업한 뒤로 회사에만 있었으니 제가 뭘 어떻게 했겠어요. 회사 나와서 처음으로 한 사업이 만화방이었습니다. 화정 L마트 옆에서 한 3년 했어요. 요즘 만화방이 유행이던데, 예전에 집에서 만화 보던 식대로 드러누워서 만화를 볼 수 있게 만들었는데 잘됐어요. 처제에게 인수하고 부대찌개 집을 한 1년 했습니다. 술도 팔다 보니 늦게 끝났습니다. 안사람 고생이 심했죠.”
힘에 부쳐 부대찌개 가게를 팔았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들어간 곳이 당시 호황을 누리던 생활정보지 회사 건물. 보직은 조경관리사였다.
“고양, 일산 이쪽에서 생활정보지가 상당히 잘됐습니다. 그 회사 건물에서 조경관리사를 뽑더라고요. 말이 좋아 조경관리사지 쓰레기도 치우고 허드렛일 다 했죠. 그때 월급이 40만 원이었습니다. 제가 가끔 강의할 때 그 시절 이야기를 하는데 ‘명색이 대기업 임원이던 양반이 대비전 마당쇠 했다’ 그래요.”
나무 좀 가꾸다 쓰레기 치우고, 단풍 치우고, 잔디도 깎았다. 마음이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런 것도 기회라 생각했다. 열심히 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일이 생겼다.
“한창 정육식당 바람이 불 때였어요. 생활정보지 회사가 500평 정도 잔디밭을 가지고 있었어요. 거기다 정육식당 하면 딱 좋겠다 생각하고 회사에 건의를 했더니 그럼 저더러 점장을 하라더군요. 마당 쓸다가 대형 식당 점장이 된 거죠. 처음엔 젊은 사람 시키라면서 못하겠다고 고사했는데 그동안 제 얘기를 들었는지 믿고 맡기더라고요.”
마음에 안 차도 열심히 덤벼들었더니 새로운 길이 열렸다. IMF 때는 드라마 엑스트라 출연도 해봤다. 정치인의 주례가 잠시 금지됐던 시절에는 예식장 전속 주례사도 했다.
“여하튼 돈 되는 일이라면 다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잘했든 못했든 이 모든 것들이 나중에 큰 자산이 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제가 사람들 앞에서 웃으면서 얘기할 수 있는 거예요. 어쨌든 기회가 되면 그냥 한번 도전해보자고요. 규모가 작건 소소하건 해보면 뭐든 얻는 것이 있습니다.”
‘중요한 한 가지, 하고 싶은 것을 한다
변용도 동년기자를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안 해본 일이 거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제대로 인정받을 때까지 파고드는 근성은 타고난 것 같다. 가족을 위해 살고 자신의 행복을 찾기 위해 쉬지 않고 문을 두드리고 찾아다니게 된 계기가 있다고 했다.
“두 친구가 비슷한 시기에 죽었어요. 건강하던 친구들이 하루아침에 한 명은 산에 갔다가, 한 명은 차를 몰고 가다가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간 거야. 술도 안 먹고 건강관리도 잘했어요. 다른 친구는 100억대 자산가였고요.”
죽고 나니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게 어느 날 허망하게 갈 수도 있는 인생,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바람처럼 불었다. 그래서 시작한 게 사진이었다.
“어렸을 때 친구 권유로 ‘촌놈의 세상보기’라는 문패를 달고 인터넷 사이트에 글을 쓰고 있을 때였습니다. 디지털 카메라가 마침 있어 글 쓸 때마다 사진과 같이 올렸어요. 좀 더 잘 찍고 싶고 배우고 싶은 마음이 생겼어요. 두 친구가 죽고 난 뒤에 사진에 대한 생각이 깊어지기 시작했죠.”
점점 사진에 취미가 붙으면서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까 고민을 하게 됐다. 일산동구청에서 하는 무료 사진교실이 있다기에 찾아가 일주일에 두 번 사진도 배웠다.
“때마침 첫째 아들이 대학교 1학년을 마치고 온라인 쇼핑몰 사업을 하겠다며 사두었던 카메라가 있었어요. 아이가 그 사업을 접으면서 카메라를 저에게 줬습니다.”
2010년 7월에 사진 공부를 시작했고, 그해 10월에 공모전에 당선됐다. 스물여덟 번 도전 끝에 이뤄낸 결과였다. 시니어 기자로서 다양한 방면에서 두각을 보이고 블로그에서도 덤덤하게 인생 표현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방송 프로그램 출연 요청이 들어왔다. 케이블TV 출연 뒤 KBS ‘아침마당’에 은퇴준비 전문강사 중 사진 분야 강사로 출연하며 인생에 큰 계기를 맞이했다. 진짜 다른 사람들 삶에 귀감이 되는 전문강사가 된 것이다.
“육십이 돼서 사진을 배우기 전까지는 먹고살기 위해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제 여유가 좀 생겼어요. 요즘은 아침이 되면 사진기를 들고 나갑니다. 장애인 시설에 가서 사진 찍어주는 봉사도 하고요.”
물론 변용도 동년기자의 사진 실력은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도 빛을 발한다. 온라인에 게재하는 기사에 적절한 사진은 기본이고 다른 동년기자 취재에도 사진기자로 참여한다.
“2017년 1월호 ‘브라보 마이 라이프’ 커버스토리에 장영희 동년기자가 취재했을 때 제가 사진을 찍어드렸습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물으니 사진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변용도 동년기자의 집 3층은 개인 사진 전시 공간으로 쓰인다. 최근 ‘한 달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통해 써낸 자서전에서 자신을 청학빛그림학교 교장으로 소개한 바 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죠. 영상도 배우고 싶고, 책도 3년에 한 권은 내고 싶어요. 무엇보다 사진을 더 잘 찍고 싶고 말이죠. 사진이 빛그림이잖아요. 사진은 카메라로 쓰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또는 카메라로 그리는 수채화이기도 하고요. 제 사진 전시회 제목도 ‘카메라로 그리는 수채화’였습니다. 저희 집 3층도 좋은 전시 공간이니 야외전시도 할 수 있겠죠. 두세 명은 이곳에서 충분히 합숙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아침에 주변을 돌변서 산책도 하고요.”
훗날 때가 되면 아내 이흥열 씨와 함께 이 지역 저 지역을 돌아다니며 살고 싶다고 했다. 집의 규모를 땅콩하우스로 줄인 것도 훗날 여행을 하면서 살 계획이 있기 때문이란다.
“이곳저곳 다니면서 사진도 찍지만 사람들을 찾아가 봉사도 하니 찾아가는 사진교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사람하고도 오랫동안 얘기했습니다. 지금은 강아지 때문에 못 가요. 아직은 챙겨줘야 하니까.”
집 안 가장 따뜻한 자리에서 이불 깔고 사는 반려견 헨리 때문에 아직은 계획을 이행할 수 없다고 했다. 함께 산 지 19년, 앞도 잘 못 보고 귀가 나빠져 잘 듣지도 못해 재롱도 부리지 않지만 가족이기에 늘 마음이 쓰인다.
‘용도변경’ 그리고 ‘다쓰가’
인터뷰를 마치고 변용도 동년기자가 메시지를 보내왔다. 자신을 뒷받침하는 두 가지 용어인 ‘용도변경’과 ‘다쓰가’에 대한 설명이었다.
“첫째 사자성어가 용도변경입니다. 후반생을 바쁘고 즐겁게 살자고 만든 말입니다. 60세에 제 삶을 용도변경했습니다. 사진이 그 출발점이었고요. 취미에 머물지 않고 영역을 확대해 강사로 방송인으로 사진강사로 저술로 활동하고 있죠. 현재 사진작가로 나름의 브랜드도 만들었고요. 포토스토리텔러, 제가 만든 세계 유일한 말이에요. 마지막으로 ‘다쓰가’는 ‘다 쓰고 가자!’를 세 글자로 줄인 말입니다. 은혜를 되갚고 경험과 지혜, 재물을 다 쓰고 가는 것을 후반생 삶의 철학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터뷰가 있던 날에도, 뭔가 물어보려 연락했던 오늘도, 여전히 바삐 살고 있는 변용도 동년기자. 그렇게 부지런히 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미 걸음을 옮겨 어디론가 떠나 걷고 있다. 너무도 이른 절망 속에서 희망의 빛을 찾고 행복한 삶을 사는 모습에 미소가 절로 스민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시니어들이 즐길 수 있는 취미는 다양하겠지만 당구를 추천하고 싶다.
당구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15세기에 크리켓과 비슷한 옥외 스포츠를 실내 게임으로 개량한 뒤 유럽 각지에서 오락으로 발달시켰다는 것이 정설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 당구가 도입된 것은 1912년. 순종이 창덕궁에서 ‘옥돌대’라는 이름의 당구대 두 대를 설치한 것이 시초라고 한다.
요즘에는 어느 동네이든 당구장이 많다. 당구는 남녀노소가 사시사철 저렴한 비용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스포츠다. 게다가 2018년 1월부터 당구장이 금연지역으로 지정되어 더 건전한 스포츠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당구의 운동 효과는 이동거리에 있다. 운동량이 부족한 시니어에게는 안성맞춤인 스포츠다. 당구대의 둘레는 크기에 따라 7m에서 10m 정도 된다. 한 시간 당구를 즐길 경우, 약 2km를 걷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공을 맞추기 위해 노력을 하다 보면 집중력도 좋아진다. 당구를 칠 때 여러 가지 경우의 수가 있기 때문에 기술을 익히게 되는데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 또 당구장에 가면 모르는 사람과도 쉽게 어울릴 수 있어 우울증 예방에도 좋다.
당구 게임비는 평균 10분에 1500~1600원 정도 한다. 65세 이상이면 할인을 해주는 곳도 있다. 당구장에 잘 다니는 분들에게 묻거나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저렴하게 당구를 즐길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있다.
당구의 종류는 다양하다. 기본적으로 사구 게임, 포켓 게임, 스리쿠션 게임이 있는데, 요즘은 어느 당구장에 가나 스리쿠션 게임이 대세다. 스리쿠션 게임은 빨간 공, 하얀 공, 노란 공 각각 1개씩 3개의 공으로 게임을 한다. 점수는 제1적구를 맞추고 난 뒤 3쿠션 이상을 맞추고 제2적구를 맞추거나, 쿠션을 3번 이상 맞추고 제1적구 및 제2적구를 맞추면 1점을 획득한다.
당구 실력을 향상시키려면 무엇을 먼저 배워야 할까? 가장 중요한 것은 당구의 기본기다. 기본기에는 큐의 중심점 확인하기, 몸의 밸런스 잡기, 발의 위치 정하기, 그립 포인트 확인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리고 내가 당구를 쳐본 경험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브리지다. 브리지는 큐를 겨냥대로 정확히 쳐내는 토대가 되는 부분이다. 브리지를 잘 잡지 않으면 겨냥을 해도 그 포인트에 큐 끝의 탭을 맞출 수가 없고 큐 미스를 하기 쉽다.
당구는 지인들과 함께 게임을 하면서 배울 수도 있고, 책이나 동영상을 통해 혼자 익힐 수도 있다. 짧은 기간에 당구 실력을 향상시키고 처음부터 탄탄한 기본기를 갖추려면, 당구 아카데미를 찾으면 된다. 일반인들은 1개월에 30만~50만 원 정도면 배울 수 있다. 운동신경이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의 결과가 다르겠지만 3개월 정도 배우면 웬만한 실력의 친구들과 무리 없이 당구를 즐길 수 있다.
나는 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 처음 당구장에 갔는데 여러 번 패배를 당한 후, 그 즉시 가까운 헌책방에 가서 당구교본을 샀다. 그리고 이틀 만에 독파하고 다시 당구장에 갔다. 결과는 놀라웠다. 당시 당구장에 처음 가면 4구 경기에서 자기점수 30점을 놓고 치는데 책을 보고 간 두 번째 날에 친구들을 계속 이겨 80점이나 놓게 되었다. 그래서 “책 속에 길이 있다”는 오래된 금언을 새삼 실감하기도 했다.
당구를 칠 때는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에티켓이다. 당구도 승패가 있는 게임이라서 승부욕에 너무 집착하다 보면 상대에게 실례를 범할 수 있다. 의도하지 않은 샷이 성공할 경우에는 반드시 인사로 미안함을 표시하고, 상대방의 플레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언행을 삼가야 한다. 술을 마시거나 잡담으로 다른 테이블 경기에 영향을 주어서도 안 된다. 이 외에도 지켜야 할 예절이 있겠지만 어디에서나 상식에 맞는 행동을 하면 된다. 노년에 당구를 즐기면 건강도 유지하고 매너 있는 신사가 될 수 있다. 내가 당구를 취미로 권장하는 이유다.
숙주나물은 녹두의 싹을 틔워서 만든 채소다. 한국 요리에는 빠짐없이 등장한다. 만두, 베트남 쌀국수, 일본식 요리 주점 등에서도 빠지지 않는 식재료이다.
숙주나물의 유래가 재미있다. 숙주나물이라는 명칭은 신숙주라는 조선 시대 신하의 이름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신숙주는 세조 때 단종에게 충성을 맹세한 여섯 신하를 고변했다. 그 때문에 성삼문 등 여섯 신하가 희생되어 사육신으로 불린다. 이 일로 백성들이 신숙주를 미워하여 만두소를 만들 때 숙주나물을 짓이겨 넣으면서 숙주나물이라고 지었다는 설이 있다.
스페인 중소도시 발렌시아에 몇 번 출장 간 일이 있다. 그리 큰 도시가 아닌데 골목을 누비다 보니 뜻밖에도 한국식당이 하나 있었다. 들어가 보니 주인이 한국 사람이었다. 다른 손님도 없으니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이 양반이 이 동네에 처음 왔을 때 이상하게도 동네에 숙주나물이 없더라는 것이었다. 숙주나물은 기본적으로 중국요리에도 들어가고 일본 요리에도 들어간다. 일본, 중국 요리가 아니어도 채소를 좋아하는 스페인 사람들이 거부감을 가질 이유가 없는데 숙주나물의 존재조차 모르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숙주나물을 재배하여 백화점에 들고 갔다. 틀림없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가 있을 테니 팔아보자고 했다. 주변 중국 식당에 연락해서 숙주나물이 백화점에 있다고 하자 중국 식당들이 몰려왔다. 그 덕분에 큰돈을 벌었다.
사우디아라비아 건설 현장에서 근무하던 시절 숙주나물이 매일 반찬으로 나왔다. 한국과 거리도 멀고 해서 다른 나물은 공급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콩나물은 이상하게도 기후가 안 맞는지 기르는 과정에서 썩어 계속 실패한다고 했다. 그렇게 숙주나물이 매일 나오니 질릴 정도였다. 다른 회사 현장도 마찬가지여서 근로자들이 남자들만 있으니 성욕을 감퇴시키려고 일부러 숙주나물을 매일 먹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고사리와 숙주나물은 성욕을 억제해 불공드리는 스님들 상에 자주 오른다는 얘기는 있었다. 사우디 건설현장에서는 돼지고기를 살 수가 없으니 매일 닭고기와 숙주나물이 단골 메뉴로 올라왔다. 같은 메뉴를 매일 먹어도 질리지 않는 사람만이 오래 현장 근무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숙주나물의 효능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기본적으로 채소이니 식이섬유가 많아 장 건강에 좋다. 연동운동을 활발하게 해줘서 소화에도 좋고 변비도 예방해준다. 콩나물보다 열량은 떨어지는 편이나 비타민A는 콩나물보다 훨씬 많다. 그러므로 당연히 다이어트에도 좋다. 비타민 A가 많으니 눈 건강에도 좋다. 스마트 폰이나 컴퓨터, 게임 등으로 눈이 쉽게 피로해지고 시력이 떨어지는 요즘 시대 사람들에게 잘 맞는 음식이다. 숙주나물은 인과 칼슘이 풍부해서 치아와 뼈를 튼튼하게 만들어 주고 관절염 예방에도 좋으니 자라나는 아이들이나 노인들에게도 좋다. 활성산소를 제거해주는 성분이 있어서 세포를 활력 있게 유지해줘서 피부 미용에도 좋다고 한다. 숙주나물에도 콩나물처럼 아스파라긴산이 많이 들어있어 숙취 해소에도 좋다. 그러니 모든 나이에 도움이 되는 채소이다.
액션, 공포, 애니메이션 등 몇 장르 영화는 극도의 피로감으로 보는 게 두려울 지경이다. 반면에 시대극, 서부극, 뮤지컬, 전기 영화는 시사회 초대를 마다하지 않는다. 최근 관심 갖고 본 다큐멘터리 알렉산드라 딘의 ‘밤쉘(Bombshell: The Hedy Lamarr Story, 2017)’과 스티븐 노무라 쉬블의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RYUICHI SAKAMOTO: CODA, 2017)’는 추억을 떠올리며 공부하는 자세로 보았다.
국내 영화 팬들이 류이치 사카모토를 알게 된 작품은 ‘마지막 황제’(1987)일 것이다. 편협한 일본 장교로 출연해 무척 의아하게 여겼는데 이름난 작곡가, 영화음악가로 알려졌기 때문이다. 콧수염마저 얄밉게 보였던 그는 “왜 일본이 그토록 삭막한 만주 땅을 얻으려 했는지 모르겠다”라며 소신 인터뷰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류이치 사카모토는 ‘메리 크리스마스 미스터 로렌스’(1983)에서도 장도를 휘두르는 일본 장교로 출연한 바 있는데, 군더더기 없는 몸매에 강파른 얼굴 덕분이 아닌가 싶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와 오시마 나기사가 영화 음악 작곡과 연기를 다 요구했다니, 영화적 얼굴이라고 해석할 수밖에.
류이치 사카모토의 영화 음악 덕분에 심취했던 작품을 열거하는 건 예의가 아니다. 영화 팬이라면 기본적으로 본 영화들일 테니. 그중에서도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영화음악 작곡가로서의 사카모토를 잘 정리해주고 있다. 특히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2015)에서 주인공이 광막한 설원 저 너머로부터 한 발 한 발 힘겹게 걸어와 관객 앞에 설 때까지 흐르던 음악은 압권이라는 표현이 과하지 않다.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에서 사막 아지랑이 속에 한 점이 나타나고 점점 커진 그 점이 알리 족장임을 알게 되는, 너무도 유명한 롱 테이크 장면에의 헌정이다. 이는 ‘평원의 무법자’(1973)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등장하는 장면만큼이나 근사하고 감동적이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에서 류이치 사카모토는 당시 암으로 투병 중이었지만, 너무도 좋아하고 존경하는 감독 알레한드로 곤잘레츠 이냐리투의 제안이라서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작곡을 마다할 수 없었다고 밝힌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2012년, 인후암 판정을 받고 모든 활동을 중단했던 류이치 사카모토가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음악 작업으로 활동을 재개한 전후 5년여를 기록한다. 후쿠시마 지진과 쓰나미에 살아남은 망가진 피아노를 연주하고, 핵발전소 재가동 반대 시위에 참석해 발언하고, 암 판정 당시 심경을 고백하고, 숲과 남극 등을 다니며 소리를 채집하여 젊은 시절부터 함께 했던 컴퓨터와 피아노로 작곡하는 모습이 젊은 시절 활동 영상과 영화 출연 장면 등을 곁들여 소개된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감독 영화에 나오는 음악과 바흐의 코랄전주곡 같은 느낌의 음악, 약해지지 않고 울림이 오래가는 음을 찾고 있다는 등, 그가 현재 추구하는 음악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전한다.
9·11 테러 당시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그가 찍은 세계무역센터(WTC) 쌍둥이 빌딩의 사진을 보면 사진작가로서의 재능도 적지 않은 것 같다. 검버섯 가득한 얼굴과 백발에 표범 가죽 문양 안경을 쓴 그가 곱게 깎은 연필을 들고 오선지에 음표를 그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또 오로지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지구 이 끝에서 저 끝을 방문하는 집념을 보노라면, 세상에서 가장 고매한 직업은 예술 창작뿐이구나, 눈물이 날 지경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인물 다큐멘터리도 그 인물에 얼마나 매료되었는가, 존경하는가에 따라 감상 진폭이 달라진다. ‘류이치 사카모토: 코다’는 감독 후샤오시엔, 오시마 나기사, 알프리드 히치콕, 데이비드 린치 등의 다큐멘터리와 더불어 영화 세상에 사는 행복을 만끽하게 해준다.
‘걷기’가 열풍을 넘어 생활이 됐다지만 지역마다 생겨난 ‘길’을 제대로 찾아 걷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혼자 걷다 보니 계획했던 길을 찾지 못할 때가 있고 결국 ‘중도 포기’란 말로 마침표를 찍기 마련. 어디든 아무 곳이나 막 걷는 것이 아니라 완주의 기쁨을 느끼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꼭 주목하기 바란다. 매년 봄가을 함께 걷는 행복과 즐거움을 알기 위해 100명의 사람이 뭉친다. 바로 서울둘레길 100인 원정대다. 건강을 위해 걷고 행복한 삶을 찾아 떠나는 이들과 길을 나섰다.
춘풍 맞으며 자연과 맞닿은 길을 걷다
봄꽃이 피기 시작한 어느 주말 아침, 서울둘레길 100인 원정대(이하 100인 원정대)가 서울 지하철 6호선 화랑대역 4번 출구 앞 공원으로 속속 모이기 시작했다. 함께 걷기로 한 곳은 서울둘레길 2코스(용마산·아차산)로 12.6km, 5시간 10분이 걸리는 난이도가 그리 높지 않은 곳이었다. 3월 17일 오리엔테이션을 시작으로 서울둘레길 걷기를 시작한 100인 원정대는 6월 9일 서울둘레길 8코스인 북한산 구간을 끝으로 마무리한다. 묵동천, 망우산, 용마산, 아차산을 연결해 걷기 길을 조성한 2코스는 서울둘레길 중 풍광이 뛰어나 추천하는 이들이 많았다. 애국지사 묘역인 망우묘지공원과 아차산 보루 등 역사와 문화유산이 어우러진 곳이기도 하다.
걷기에 앞서 원정대원들이 둘레길 우체통 앞에 길게 줄을 늘어섰다. 서울둘레길 스탬프북에 도장을 찍기 위해서였다. 도장으로 스탬프북을 다 채우면 서울둘레길 완주 증명서를 발급받게 된다고. 요즘에는 스마트폰에 스탬프북 애플리케이션이 있어서 도장을 찍기 위해 줄 설 필요가 없다. 그래도 도장은 직접 찍어야 제 맛. 보라색 다양한 문양의 도장으로 채워지는 원정대의 스템프북을 옆에서 보고 있자니 부럽기까지 했다.
인원 체크를 끝낸 진행요원과 원정대원들은 간단하게 몸을 풀고 난 뒤 묵동천을 따라 걷는 것으로 서울둘레길 2코스 완주길에 올랐다. 시냇가를 지나고 밭도 지나다 보니 진달래가 곳곳에 피어 원정대의 발길을 잡아끌기도 했다. 경의중앙선 양원역을 지나 중랑캠핑숲에서 잠시 쉰 원정대는 망우묘지공원 산책로를 밟았다. 10개 조로 나뉜 100명의 원정대원은 트레킹 전문가와 함께 속도를 맞춰가며 걷는다. 초보자에게 100인 원정대를 권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안전하게 완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건강을 걷기로 챙길 수 있을까요?
100인 원정대는 2014년 가을 서울둘레길 개통에 맞춰 대원을 선발하기 시작해 올봄 여덟 번째 기수를 맞았다. 서울시와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 주관으로 봄가을 두 번 100인 원정대를 모집한다.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한 세대가 모여 매주 토요일 지정한 코스를 함께 완주한다. 첫 만남은 어색하지만 헤어질 때가 되면 가족만큼이나 가까워진다고. 서로 도우며 넘은 산이며 들에 추억이 쌓이다 정도 든다. 사실 100인 원정대가 생겨난 이유는 간단했다. ‘새로운 걷기 길 홍보’다. 4년이 지난 지금은 홍보를 넘어 시민 복지와 건강에 초점을 맞춰 원정대를 운영하고 있다.
특히 이번 기수의 경우 건강 측정도 함께 진행했다. 걷기 전, 걷는 중간, 둘레길 완주 뒤 체중과, 체지방률, 근골격량, 기초대사량을 측정해 건강이 개선된 우수대원에게 시상도 계획했다. 결과는 100인 원정대 8기가 활동을 마무리하는 6월 9일 이후 공개한다. 100인 원정대를 통해 서울둘레길에 애정을 갖게 된 대원은 한국등산트레킹지원센터에서 아카데미 교육을 이수한 뒤 리본 달기를 비롯한 다양한 자원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다. 오는 9월이 되면 9기 100인 원정대를 선발한다. 원하는 사람은 서울두드림길 홈페이지(gil.seoul.go.kr)를 참조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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