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까지만 해도 떡국은 설이나 결혼식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 명절마다 먹는 음식이 정해져 있어 그날이 되면 색다른 음식을 먹은 이야기가 화제가 되곤 했다. 그러나 요즘은 언제라도 명절 음식을 먹을 수 있고 제철 아닌 과일도 늘 맛볼 수 있다. 기다리는 기쁨을 빼앗긴 기분이다.
설날이 다가오면 장보기와 음식 장만하기가 김장을 하는 것만큼이나 커다란 행사여서 재래시장이 북적이고 정다운 덕담들이 오가곤 했다. 친척들은 돌아가며 청주나 과일을 들고 인사를 왔고 또 싸서 보낼 것을 대비해서 음식 장만이 만만치 않았다.
추운 겨울 새벽에 엄마가 흔들어 깨우면 언니와 필자는 일어나 옷을 주섬주섬 껴입고 불린 쌀을 나누어 이고 방앗간으로 향했다. 방앗간엔 사람들이 주욱 늘어서 차례를 기다렸다. 우리도 그 줄에 서서 기다렸다. 털신을 신고 있어도 발이 엄청 시렸고 볼은 추위에 떨어져나가는 듯했다. 드디어 차례가 되어 방앗간 안으로 들어가면 기계 돌아가는 소리와 뜨거운 떡시루에서 뿜어져 나오는 김으로 온통 뿌옜다. 쌀을 빻고 떡으로 찐 뒤 가래떡 기계에 넣으면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가래떡이 두 줄로 나오기 시작했다. 이때 방앗간 아저씨는 적당한 길이로 잘라 서로 붙지 않게 물에 담갔다가 우리가 준비해간 함지박에 나란히 줄을 세워 담아주었는데 마지막에는 자투리가 두 줄로 끊어지곤 했다.
자투리는 언니와 필자의 몫이었다. 그 가래떡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가래떡에서는 구수한 쌀 냄새가 확 풍겼다. 뜨거운 함지박을 머리에 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갈 때보다 훨씬 따뜻하고 신났다. 언니와 필자는 균형을 잘못 잡아 휘청거리며 걷곤 했는데 그러면서도 함지박이 떨어질까봐 긴장하며 꼬옥 잡고 걸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엄마가 함지박을 반갑게 받고 나면 식구들이 둘러앉아 가래떡을 조청과 간장에 찍어 맛을 보았다. 그 쫄깃하고 폭신폭신한 맛은 방앗간에서 바로 빠져나온 떡이 아니면 맛볼 수 없다.
이후 떡을 가지런히 펴서 밖에 내놓고 적당히 굳어지면 모두 둘러앉아 떡을 칼로 썰었다. 가마솥에선 육수를 내는 구수한 냄새가 밤새도록 났고 엄마는 부엌 불을 밝히고 밤새 음식을 만드셨다. 필자가 잘 때도 일어났을 때도 엄마는 부엌에 계셨다. 도마소리와 기름에 음식 지지는 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대구나 조기, 생태를 사다 눈과 바람에 말렸고 그것을 찜으로 상에 올리시곤 했다.
설날 아침에 상을 차리고 음식이 한둘씩 오르기 시작하면 신이 나고 침이 꼴깍 넘어갔다. 움집에 묻어놓은 김치는 미리 꺼내오면 맛이 없다고 상차리기 바로 전에 꺼내곤 했는데 주로 막내인 필자가 그 일을 담당했다. 김칫독은 필자의 키와 거의 비슷해서 어떤 때는 물구나무서듯해서 꺼내야 할 때도 있었다. 또 김치를 손에 잡기는 했는데 절반쯤 빠져 있는 몸을 들어 올리지 못해 낑낑댈 때도 있었다. 독 속에서 엄마를 부르면 오빠나 언니가 달려와서 필자 다리를 끌어당겼다. 그 시절 “엄마~” 하고 불렀던 소리가 아직 메아리처럼 들리는 듯한데 이제 엄마는 떠나시고 나만 남았다. 모든 생명은 끝이 있지만 그리움의 끝은 없는 것 같다. 그렇게 필자도 아이들에게 아련한 그리움으로 남게 되기를 바란다.
눈부신 조명 아래 화려한 런웨이 위를 당당하게 워킹하는 모델을 보면 ‘나도 저렇게 폼 나고 멋지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골드스톤 그룹의 대표이자 시니어 모델로 활동 중인 김성훈(56)씨 역시 또래 친구들의 부러운 시선을 느끼곤 한다. 고맙고 즐거운 일이지만, 그만큼 부담도 되고 노력할 것도 많다. 박수갈채를 받는 빛나는 겉모습 이면에 부단히 자신을 채찍질해온 그의 속사정 그리고 패션에 대한 애정을 들어봤다.
, 등 영화 속 영웅들은 평상시 유능한 회사 경영자이지만, 사건·사고가 생기면 슈트를 갈아입고 나타나 악당을 물리친다. 그들의 변신을 한눈에 알아보게 하는 것은 바로 패션. 화려한 망토나 로봇 슈트는 아니지만 김 대표 역시 패션을 통해 일상의 변화를 만끽하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꿈꾸던 모습 중 하나였어요. 회사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망토를 두르고 슈트를 입고 ‘부우웅’ 하고 나가서 악당들과 싸우는 영웅! 우연히 찾아온 시니어 모델의 기회이지만, 그런 판타지를 채우고 있죠. 옷을 갈아입고 무대와 카메라 앞에 섰을 때의 쾌감과 스릴이 정말 대단해요.”
2011년, 평소 준비성이 철저한 그는 다가올 인생 2막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지인을 통해 ‘시니어 모델’에 대해 알게 됐고, 50세의 나이로 시니어 모델계에 입성했다. 여자 모델에 비해 남자 모델의 수가 극히 적은 시니어 모델들 사이에서 패셔너블하고 끼가 충만한 그는 단연 돋보일 수밖에 없었다.
“댄스스포츠를 10년 정도 배웠거든요. 그러다 보니 워킹이 자연스럽고 포즈를 취해도 선이 잘 살더라고요. 그 덕분에 패션쇼에서 메인 모델로 설 기회가 많았죠.”
탐나는 삶, 티 내지 않고 살기
자신의 관심사인 패션을 드러내면서 끼와 매력을 뽐낼 수 있기에 즐겁기도 했지만 우려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다. 그의 본업인 회사 경영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 선에서 활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한 회사의 대표로서 긴장하거나 엄격해야 할 때가 있는데 ‘우리 대표는 모델 한다고 일에 소홀하다’는 이야기가 나오면 곤란하잖아요. 직원들에게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니 내 즐거움만 생각할 수는 없죠. 또 경쟁업체 등에서 그런 부분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볼 수 있으니 사생활에서도 행동에 주의하려 해요.”
회사 대표로서도 조심스러운 모습이지만,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는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려 한다. 화려하게 비치는 모델의 특성상 부러움과 시기의 대상이 되기도 하기 때문. 자신의 즐거움을 드러내는 게 다른 이에게는 불편함이나 상처를 줄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그다.
“처음 한두 번 모델로 설 때는 주변에 자랑도 하곤 했는데, 계속 그러니까 친구들도 반기는 표정이 아니더라고요. 내가 일을 안 하는 것도 아니고, 어엿한 회사 대표인 데다가 모델까지 하니까 그렇지 못한 친구들이 볼 땐 부러울 수도 있고, 약이 오를 수도 있겠죠. 오히려 가까운 사이일수록 이런 모습을 드러내는 게 관계에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마음은 그게 아니라도 오해받을 수 있기 때문에 최대한 조용히 즐기고 신중하게 행동하려고 합니다.”
이제는 아내까지 그의 인생을 탐낸다고 한다. 처음에는 그의 모델 활동을 우려했던 아내가 자신도 시니어 모델로 무대에 서겠다고 도전장을 내민 것.
“집사람이 저한테 모델 활동 이전이랑 이후 사진을 보여주면서 사람이 참 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표정이며 분위기가 훨씬 여유롭고 밝아졌다면서요. 특별히 피부 관리를 하거나 머리를 심은 것도 아닌데 내가 봐도 얼굴이 참 좋아졌어요. 그런 변화를 느낀 아내가 올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리는 무대에 나와 함께 서고 싶다는 거예요. 물론 적극적으로 응원하고 있죠.”
최고의 패션 아이템은 ‘건강한 몸매’
어릴 적부터 패션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던 그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은 쇼핑이라고 한다. 시간이 나면 백화점이나 아웃렛에 들러 트렌드를 살피며 스트레스도 풀고 패션 감각을 키운다. 그가 운영하는 회사 중에는 해외 명품 패션 관련 분야도 있어 패션 트렌드에 대한 지식과 안목이 남다르다. 그런 그의 ‘패션 포인트’는 무엇일지 궁금했다.
“포인트를 안 주는 게 포인트입니다. 꾸며보려고 욕심내다가 오히려 촌스럽고 어색해 보일 수 있거든요. 넥타이나 행거칩도 잘 안 하는 편이에요. 포인트는 시계 정도로 하나만 살리고 나머지는 톤을 맞추는 정도로 마무리하죠. 무엇보다 중요한 건 때와 장소에 맞게 연출하는 겁니다. 요즘 중·장년 대부분이 어디서든 등산복을 애용하잖아요. 저마다 개성과 매력이 다른데 등산복이라는 테두리 안에 가두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산에 갈 때는 등산복을 입더라도 크루즈 여행을 갈 때는 드레스도 입어보고, 고궁 나들이 갈 때는 한복도 입어보고 그렇게 다양한 시도를 해야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는 데 도움이 돼요.”
그가 시도 중인 패션은 영화 의 더블 브레스티드 슈트 스타일이다. 슈트 버튼이 양쪽으로 나란히 있어 허리선이 드러나기 때문에 배와 등의 군살이 없어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다.
“제 패션 철학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스타일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완벽한 보디(body)예요. 몸매가 돼야 어떤 옷을 입어도 태가 나고 멋스럽거든요. 그래야 다양한 스타일에 도전할 때 자신감도 붙고 그러면서 나 자신을 좋아하게 되죠. 그러면 삶이 더 즐겁고 행복해져요. 물론 지금 내 몸매가 그런 상태는 아니지만, 오히려 목표가 있고 그것을 성취했을 때의 모습을 상상하면 더 즐거워지곤 해요. 자신만의 롤 모델이나 위시 리스트를 갖는 것도 중요하죠.”
새해부터는 운동과 식단 관리를 통해 꼭 ‘킹스맨 슈트’를 입겠다는 그는 원하는 옷을 입기 위한 노력이지만 육체적·정신적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끝으로 그에게 롤 모델은 누구냐고 물었다.
“영화배우 출신인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 패셔니스타 닉 우스터 등도 롤 모델이라 할 수 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역시 배트맨이 가장 완벽한 제 롤 모델 아닐까요?”
“우리의 영혼은 빈곤합니다.” 한 아이가 허공을 향해 내뱉었다. 열 명이 겨우 설 수 있는 작은 무대. 그리고 그것보다 더 보잘것없는 객석과 몇 명 되지 않는 관객. 그러나 이 외침은 초로를 지난 대배우의 가슴을 울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우리가 한 치의 주저함 없이 ‘국민 배우’라 부를 수 있는 최불암(崔佛岩). 교실에 있어야 할 나이의 이 아이들은 쫓기듯 학교를 나와 이 대배우와 인연을 맺었다. 어떤 인연이었을까.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박규민 실장(스튜디오 봄) parkkyumin@gmail.com
그는 이 아이들을 ‘학교 밖 아이들’이라고 정의했다. 성인도 아닌, 그렇다고 학생도 아닌 불안정한 신분 위에 선 아이들. 몇 명이나 되겠나 싶지만, 교육부 자료를 찾아보니 2010년에서 2014년까지 중도에 학교를 그만두는 누적 학생 수는 36만 명에 달한다. 2016년 초 진주시가 발표한 주민등록상 인구 수가 36만 명이었으니, 한 도시 전체 인구가 전국으로 흩어져 방황하고 있는 셈이다.
이 아이들에게 학교와는 다른 방식으로 교육을 지원하고자 하는 다양한 노력들이 펼쳐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가 그가 이사장으로 있는 사단법인 제로캠프다. 제로캠프는 문화 중심지 홍대에서 청소년들이 문화예술을 통해 꿈을 키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고 있는 단체.
“요즘 스마트폰으로 인터넷이 더욱 발전하면서 스승은 필요 없다고 선언해버리는 아이들이 있어요. 학교에서 잠만 자거나 아예 학교 밖으로 나오는 아이들이죠. 제로캠프는 그 아이들이 문화예술을 제대로 배울 수 있도록 가르치고 있어요. 물론 쉽지 않죠. 많은 아이들이 찾아오지만 그중 선별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실제로 ‘이사장 최불암’과 만난 날은 이렇게 찾아온 아이들이 10주 동안 노래와 춤, 연기, 영화 제작 등의 실무를 교육받고 그 결과를 객석의 관객들에게 선보이는 자리였다. 객석 구석에서 그는 이사장으로, 스승으로 혹은 대선배로 사랑이 가득 담긴 눈길로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가 TV에서 수십 년간 봐왔던 예의 따스한 눈빛으로 말이다.
왜 이렇게 학교 밖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아이들이 늘어나는 걸까. 그는 현재의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낸 결과라고 분석한다.
“우리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살고 있잖아요. 욕망을 따르는 체제. 욕망에 얽혀 있는 사회에서 그 욕구를 제대로 해결 못한 채 살아가려 하니까, 자살률도 높고 아이들도 포기하게 되는 것 같아요. 문화예술은 이런 욕구를 해소시키는 좋은 방안 중 하나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위험 수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손을 내밀어 같이 해보자고 제안하고, 재능에 따라 교육을 지원하고 있어요.”
실제로 그는 많은 아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그 과정에서 보람을 느끼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씩 직접 수업을 진행하는데, 아이들 이름은 기본이고 어떤 아이가 무슨 아르바이트를 하는지, 누구는 무슨 사연이 있는지 다 꿰고 있다. 하지만 그는 무언가 더 해줄 수 없는 한계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여기서 10명 중 한두 명이라도 제대로(데뷔가) 되어야 하는데, 뽑히는 것이 쉽지 않아요. 소속사라도 있어야 기대라도 할 텐데 말이에요. 그래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삶의 가치관을 만들어나가려는 노력은 기특하죠. 예술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그 과정에서 삶의 아름다움을 깨달을 수 있으니까요. 또 그 깨달음을 표현할 수 있는 창의적 수단을 갖는 것은 무척 의미 있는 일이죠.”
그는 이 아이들의 무대를 어떻게 봤을까? 극중 연출가와 배우가 다투는 장면은 마치 ‘연출가 최불암’이 배우를 다그치다 참지 못해 직접 연기를 하게 된 에피소드를 보는 듯했다. 실제로 ‘청년 최불암’은 연극 연출가로 나섰다가 배우의 노인 연기가 마뜩치 않아 직접 배우로 데뷔하게 됐다.
“어떤 틀에 가두지 않고 자기들만의 세계를 완전히 구현했다고 평가해요. 가식이나 가면을 벗어던지고 자기들의 마음을 읽어주길 바란 것 같습니다. 특히 자기들 꿈이 소극장이라고 이야기한 것을 보면 아마 스스로를 표현할 수 있는 무대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요. 아이들은 시간만 나면 바로 이 극장에 모여 앉아 노래하고, 연습하며 자유롭게 생각한 것을 표현할 수 있는 지점을 찾았어요. 자신이 꿈꾸는 바를 그대로 내놓으려 애쓰는 모습은 일종의 자기의 진상(眞相)을 내놓기 위한 절규일지도 모르겠어요.”
스승이자 대선배로, 그가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어떤 것일까. 한 아이는 무대에서 “배우란 남에게 보여주려고 있는 것”이라고 당차게 소리쳤는데, 혹시 눈앞의 스승에게 대선배에게 전한 말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배우란 사회, 사람의 반향판이에요. 관객이 그 배우를 보면서 자기 자신을 순화시키는 거죠. 중국에서는 희곡에 의해 움직인다는 뜻에서 연기자라고 불렀죠. 우리 조상들은 광대(廣大)라고도 했어요. 넓게 포용한다는, 지금으로 치면 매스미디어의 일종이라 할 수 있어요. 실제로 임금에게 국민의 뜻을 전달하기도 했잖아요. 그런 의미를 안고 성장하면 좋겠어요.”
자신이 꿈꾸는 바를 그대로 내놓으려 애쓰는 모습은 일종의 자기의 진상(眞相)을 내놓기 위한 절규일지도 모르겠어요.
지방 근무할 때 퇴근 후 무료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기위해 어학원을 다녔는데 어학원에는 필자의 딸 나이와 버금가는 20대의 여성공무원이 같은 수강생이 있었다. 내친김에 실전경험을 쌓기 위한 개인교습도 받았는데 여성공무원과 단둘이 희망하여 더 많은 시간을 함께했다. 같이 수업을 받으니 자연스럽게 많은 대화를 하면서 신상파악을 할 수 있었다. 예쁘고 활달하고 공무원이라는 신분도 마음에 들어 우리 회사 남자 직원과 짝을 맺어주기로 마음먹었다.
마음에 둔 우리 회사 남자 직원은 집을 떠나 독신으로 타향살이를 하고 있는 성실한 청년이었다. 처녀보다 나이도 2살 정도 많고 이래저래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우선 의사 타진을 양쪽에 했다. 여성은 나를 믿으니 단박에 만나보겠다고 OK 사인을 보내오는데 남자직원은 확실하게 대답을 못하고 망설이기만 했다.
남자직원이 망설이는 이유가 여자에 비해 자신이 꿀린다고 생각하고 혹 여자에게 차이면 직속상사인 나를 보기가 민망해서 머뭇거리는 줄로만 짐작했다. 만나보고 싫으면 그만두면 되니 부담 갖지 말고 나를 믿고 만나보라고 안심시키면서 한쪽으로는 그만한 여성 만나기 어려우니 꼭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호기심이 들도록 충동질까지 했다.
직속상관인 내가 권하니 머뭇머뭇하면서 겨우 만나겠다는 승낙을 했다. 만나보면 대번에 마음이 변할 거라고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솔직히 말해 양쪽을 내 기준으로 저울질해보면 남자보다 여자가 인물이나 학벌 게다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여성공무원으로 한수 위라고 생각 했다.
예전의 중매는 호젓한 다방에서 중매쟁이가 양쪽을 불러 앉혀놓고 인사시키고 중매쟁이가 먼저 일어나는 순서를 밟았다. 심지어 양가 부모님이 나오는 경우까지 있어서 집안에서도 선남선녀의 첫 만남은 큰 사건이었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하고 중매쟁이가 슬그머니 일어나서 나가면 그때부터 남녀가 말문이 터져 대화를 이어갔다. 주로 남자가 대화를 리드해 나갔는데 아주 숙맥 같은 남자는 수줍음을 많이 타서 말을 못해 여자가 리드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상대의 면전에 대고 박절하게 우리는 인연이 아닌 것 같다고 말은 못하고 다음 만날 약속을 하지 않으면 이것이 이별 통보였다.
요즘은 만나게 하는 방법도 아주 간편하다. 양쪽에 전화번호만 알려주고 이런 전화가 오면 그 사람이니 전화를 받고 약속장소와 시간을 서로 정해서 만나보라고 하면 소개자의 임무는 끝이다. 두 사람도 이런 과정을 거쳐 만났다.
다음날 여성에게 호감이 가느냐고 물어보니 좋다고 긍정적인 대답을 하는데 의외로 남자가 아직 결혼 할 마음이 없다고 발을 뺀다. 이친구가 자기 복을 발로 차는구나! 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일 년 뒤 서로 다른 짝을 찾아 결혼을 했다.
결혼 후 남자 직원이 어렵게 내게 말했다. 필자가 중매를 설 때 이미 지금 결혼한 여자와 혼인하기로 서로 언약한 상태였다고 한다. 상사인 내가 중매를 하자 단칼에 거절하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맞선자리에 까지 나가게 되었다고 한다.
만나보니 지금 결혼하기로 약속한 아가씨보다 더 예쁘고 조건도 더 좋아서 마음이 순간 흔들렸다고 한다. 하지만 둘 사이에 철석같이 결혼을 맹서해놓고 조건에 쫓아 혼약을 파기하면 천벌을 받지 하는 생각에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고 용기를 내어 나에게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고 했다.
만약에 서로 다른 짝을 찾았으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인생에 있어서 만약에는 없다. 두 사람이 맺어질 인연이 아니어서 맺어지지 못했고 서로의 좋은 인연을 쫓아 맺어졌다고 본다. 결혼은 우리 인생에서 큰 사건임에는 틀림없고 최고의 인연을 맺어졌다고 믿어야 마음이편하다. 거기서 자식이 태어나면 책임과 의무감이 있어야 한다.
요즘 사귀다가도 조금만 더 낳은 상대가 나타나면 쉽게 돌아서는 사람들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사랑은 영원하지만 그 상대는 변한다는 괴변이 판친다. 결혼하고도 이혼을 쉽게 결정하고 자식의 장래보다 나의 행복이 우선이라는 무책임한 이유를 들면서 갈라선다. 수 십 년을 살고 저승길 떠날 몇 년을 못 참아 황혼이혼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의 부모세대는 얼굴도 모르고 시집와서도 참고 살았다. 무조건 참고 살라는 뜻이 아니라 처음부터 결혼상대를 신중히 선택하고 한번 선택했으면 서로 행복한 가정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결혼해서 덕 보려는 이기심만 없애도 혼인생활이 파탄으로 치닫는 경우는 드물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하는 마음이 세상을 아름답게 한다.
‘생식의 아버지’로 불리는 김수경(金秀經·75) 박사는 식품기술사, 이학박사로서 1988년에 처음으로 케일을 동결건조, 생식제품을 만들었다. 이후 생식 전문기업 ‘다움생식’을 만들어 30여 년째 운영하고 있다. 그는 최근 를 집필하고 있으며 중국 쪽과의 사업을 준비하고 있다. 팔순을 향해 가고 있는 나이이지만 여전히 건강을 지키며 의욕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가 말하는 진정한 건강의 의미를 들어본다.
김수경 박사가 생식 전문기업인 ‘다움생식’을 만들면서 세운 모토가 있다. 바로 ‘모든 인간은 원래 건강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자연의 섭리를 거부하고 모든 것을 인간 위주로 바꾸어갈 때부터 인간의 수명이 짧아지고 질병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새로운 것을 찾을 때가 아니라 원래의 먹거리, 원형에 가까운 먹거리를 찾아야 할 때입니다.”
병이 있는 곳에서 어떻게 병을 고치나
김 박사는 최근 중국 쪽과 긴밀하게 얘기들이 오가고 있다고 소개했다.
“중국에 가서 공산당 간부와 얘기했어요. 산업혁명 이후에 산업이 발전되며 걸어온 길이 미국이 가장 먼저다, 그런데 산업화하면서부터 공해 문제가 발생했다. 중국도 산업사회가 되면 미국이 걸어온 그 길을 걸어갈 것이라고 말해줬죠. 그런데 미국과 중국의 패러다임은 다릅니다. 미국은 예전부터 유목사회였기 때문입니다.”
김 박사는 미국과 중국은 근본적으로 다른 문화이기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부분에서 김 박사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중국 전체 13억 인구 중 당뇨 인구가 1억7000만 명입니다. 그리고 고소득 인구가 5억 명인데 그 5억 명도 다 환자라고 봐야 해요.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결과적으론 삶을 고쳐야 건강해지는데, 건강을 잃은 사람들이 의학적으로만 해결하려고 하니 문제가 되는 거예요.”
건강을 고치려면 삶을 고쳐야 한다. 이것이 김 박사가 지향하는 건강법의 핵심이다.
“병원은 병이 있는 곳이지 건강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병이 있는 곳에 가서 병을 어찌 고칩니까?”
건강은 자신의 삶의 결과
“건강이라는 것이 산에 있는 것도 아니고 들에 있는 것도 아니고 병원에 있는 것도 아냐. 나한테 있는 거예요. 내 안에 있는 걸 발견해야 합니다. 왜 내가 건강이 나빠졌는가, 스스로 화두를 던져야 해요.”
김 박사는 선천적인 핸디캡을 가지고 있다거나 불의의 사고를 겪었다든가 하는 것 외에는 전부 다 어떤 형태가 됐든 병은 자신의 삶의 결과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건강에 대해 말할 때 내가 어떻게 살았느냐로 화두를 던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거지, 남이 사는 게 아닙니다. 잘못 살아놓고 남보고 고쳐달라는 얘기는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부부도 서로를 잘 모른다.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산다. 김 박사는 낮은 밤을 알 수 없고 밤은 낮을 알 수 없으며 낮은 영원히 낮이고 밤은 영원히 밤이라고 했다. 부부는 그런 낮과 밤과 같다. 부부도 서로를 모르는데 의사가 피 몇 방울 뽑아서 분석해보고 CT나 MRI로 조사한다 해도 그것은 그 사람의 일생이 아닐 수밖에 없다. 그저 그 순간 그 사람의 상태일 뿐. 그 정도의 정보로 한 사람의 건강을 논하는 거 자체가 난센스라는 게 김 박사의 주장이다.
내 몸을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그게 바로 건강
김 박사가 바라보는 건강에 대한 시선이나 각도는 일반적인 의료의 정의와는 달랐다. 그것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과도 무관치 않을 것이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아주 안 좋았어요. 초등학교 다닐 때 말라리아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앓았거든요. 당시에는 모기를 쫓는 유일한 방법이 모닥불을 피우는 거였죠. 그런데 그때는 사람들의 삶 자체가 짐승 수준이었어요. 먹는 거, 입는 것이 그랬고, 몸을 씻는 것도 추석 때 한 번, 설 때 한 번 하는 수준이었으니. 아무튼 고등학교 3학년 때는 6개월간 허리를 못 폈어요. 20대에는 편도선염으로 두세 달에 한 번씩 열이 39도로 치솟았고 서른두 살 때는 척추디스크에 걸렸어요, 서른일곱 살 때는 폐결핵, 마흔두 살 때는 통풍이 왔죠. 집사람이 약사이고 주치의가 있었지만 해소가 안 되더군요. 그래서 어떻게 사람이 안 아프고 살 수 있을까가 제게는 가장 중요한 화두였어요.”
병으로 계속됐던 인생이었다. 고통을 통해 치유의 힘을 알았고 스스로의 몸을 낫게 한 것은 자연 치유의 힘이었다고 단정짓는다.
“제 인생이 마흔다섯 살을 기점으로 완전히 달라졌어요. 사업에 실패했고, 온갖 병을 달고 살다 씨눈, 엽록소, 효소를 연구하고 그 식이요법을 직접 실천하면서 심신의 병에서 완전히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확신에 차서 씨눈, 엽록소. 효소를 세상에 알리기 시작했고 1988년 서해식품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생식사업으로 성장하게 됐습니다.”
‘모든 음식물은 자연 형태 그대로 먹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생식사업이어서 그런지 그가 생각하는 건강에 대한 정의는 매우 간단명료했다.
“내 몸을 내 마음대로 자유롭게 할 수 있으면 건강한 겁니다. 나이 들어서의 건강은 자력으로 화장실을 갈 수 있는가에 달려 있죠. 그럴 수 있다면 건강한 겁니다.”
나이 들어서 자력으로 화장실만 가도 건강한 것이다? 너무 늙게 보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아닙니다. 나이가 들면 중풍이 오죠. 그러면 화장실 못 갑니다. 류머티스 관절염에 걸려도 화장실에 자력으로 못 가요. 지팡이 짚고 가면, 그것도 엄밀하게 보면 자력이 아니죠.”
하, 독특하고 확고한 신념이 있으신 분이다. 민망하지만 이를 어째. 어디 더 들어볼까.
매 맞는 남자들의 진짜 비밀
그는 특히 남자들의 건강은 여자들과 잠을 잘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없는지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 여자와 잘 수 없다면 명만 붙어 있는 것이지 생명의 의미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1975년에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게 총 맞아 죽을 때 인천에서 약국을 하고 있었어요. 저는 집사람을 돕는 셔터맨이었죠. 그때 일흔세 살이었던 한 영감님이 ‘이보게 젊은이, 여기 100만원이 있네. 이 돈을 매일 자네에게 줄 테니 날 좀 젊게 해주게’라고 말했어요. 1975년에 100만원이에요. 엄청난 돈이죠.”
노인은 6·25전쟁 때 월남해서 돈을 벌었고 부동산 임대 수입만 월 1억원이 되는 자산가였다. 매일 100만원씩이면 한 달이면 3000만원 정도. 노인은 재차 그렇게 줄 테니 날 좀 젊게 해달라고 사정했다. 노인이 젊게 해달라는 것은 정확하게 말하면 성 기능이었다. 근처 다방 여자에게 빠져 있었던 노인은 절실했다.
“노인의 그런 행동이 내가 70이 되니까 이해가 돼요. 여자들한테 매 맞는 할아버지들 있죠? 그 능력이 안 되면 매를 맞게 돼 있어요. 남자가 힘이 모자라서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점에서 비아그라는 의료혁명입니다. 그건 그냥 의약품이 아니에요.”
중요한 것은 건강에 대한 개념 정립이다
물론 김 박사도 나이듦이 자유롭지는 않았다.
“이 나이 되니 술도 기운으로 먹어요. 친구들과 고스톱을 쳐도 옛날에는 밤을 샜는데 지금은 아파서 택도 없고요. 여자? 양귀비가 만나자고 하면 겁부터 나죠.”
그는 노화를 막을 수는 없다고 단정했다. 다만 지연시킬 수는 있다고 말했다.
“과거에 화장품은 피부를 보호하고 예쁘게 만드는 개념이었죠. 지금은 안티에이징입니다. 주름살을 없애고 지방을 빼는 등 화장품이 의료의 보조 기능을 하고 있죠. 물도 옛날에는 그냥 마시는 것이었지만 이제 물을 말할 때 건강 도모에 치료까지 얘기하고 있어요. 먹거리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사람들이 정말 건강식이란 것을 몰라요. TV에서 선전하는 건 건강식이 아니거든요.”
그는 건강식을 먹을 때 가장 중요한 건 건강식이 아니라 건강이란 개념부터 정립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두 가지 때문에 삽니다. 우선 내 자신이 살기 위해서 살죠. 내가 살기 위해서 숨 쉬고 물 마시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또 하나는 결혼해서 자신을 닮은 다른 나를 만들어서 종족보존을 성공시키는 거죠. 내가 사는 것과 또 다른 나를 살리는 삶이 온전하게 정립될 때가 건강한 삶인 겁니다.”
즐겁고 행복하려면 내려놔야
그는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사람이 사는 것과 야생동물이 사는 것이 다를 게 없었다고 주장했다.
“산업혁명 이전의 삶은 사람이 자연에 순응하고 자연 그대로의 것을 이용하고 먹고사는 것이었습니다. 야생동물과 별 차이 없잖아요? 그런데 산업혁명 이후부터는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어요. 그로 인해 수만 년, 수십만 년 이어온 인류 역사가 200년 만에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그 태풍 속에 있기 때문에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상황이에요. 산업혁명과 통신혁명이 100세 시대를 만들긴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공장에서 찍어내는 제품이 아니라는 게 문제예요.”
케일을 동결건조한 이유도 단순하다. “다른 채소보다 각종 미네랄 등이 많고 ‘야생의 힘’을 온전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란다. 어느 날 아내 엄성희 약사에게 간에 이상이 생긴 환자가 찾아왔다. 동결건조한 케일 분말을 권했더니 환자의 얼굴색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얼마 후 환자는 병원에서 간 완치 통보를 받았다. 그 환자를 통해 약이나 수술이 아닌 자연의 치유력으로 건강과 면역력을 되찾을 수 있다는 믿음을 얻었다. 지금까지 그가 생식 등 건강보조식품을 만들고 있는 이유다.
삶을 건강하게 만들어 병이 저절로 도망가게 만들자는 그의 건강론은 즐겁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인생과 직결된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즐겁고 행복한 삶은 어떤 전제가 있어야 가능할까?
“내려놔야 해요. 내가 김정일과 이건희 회장과 동갑이거든요. 그런데 그들보다 행복해요. 이룬 일이 그들보다 많다는 게 아니라 현 시점에서의 얘기입니다. 한 사람은 엄청난 재산이 있지만 자신의 의지로 돈을 쓸 수 없는 상황이고 한 사람은 죽었잖아요.”
대체의학과 한방을 공부한 그는 ‘자연음식 전문가’ 아내와 경남 사천의 바닷가에 황토집을 짓고 산다. 효소가 살아 있는 생식 밥상으로 건강을 챙기며 치유의 식재료들을 찾고, 개발하고, 널리 알리고 있다.
“‘치료(cure)’는 의료적 행위입니다. 의사는 그래서 치료를 하죠. 우리 할머니들이 아픈 손자의 배를 쓰다듬었던 것은 치유(care)로 치료와는 다른 것이죠. 내가 나 자신을 돌보는 행위도 ‘치유’라고 하죠. 운동을 해서 건강한 몸을 만드는 것은 ‘치유’의 행위입니다. 운동도 우리 몸의 면역력을 높여주기에 치유의 영역인 것이죠. 좋은 음식도 면역력을 높여주기에 역시 치유죠. 그래서 면역에 좋은 음식을 알리겠다는 사명감을 갖고 삽니다.”
△ 김수경(金秀經)
고려대 농학과 졸업, 고려대 식품가공학 석사, 고려대 생명공학원 이학박사, 다움생식 대표.
나이가 들면 세월이 빠르게 흘러간다고들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빠릅니다. 참 빠릅니다. 어느덧 또 새해입니다. 지난 설이 어제 같은데 또 새 설입니다. 날이 빨리 지나기를 손가락 세며 기다려도 더디기만 했던 어렸을 적 새해맞이를 생각하면 어처구니없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런 경험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세월 흐름의 빠름을 느낀다는 것은 결국 그 느낌 주체인 내가 지극히 정태적이지 않으면 지닐 수 없는 일입니다. 세월은 흐르는데도 나는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세월 따라 내 삶이 흘렀다면 흐름의 빠름을 느낄 까닭이 없습니다. 흐름을 좇지 못하는 더딤이 세월의 빠름을 새삼 실감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어렸을 적 기다림은 어쩌면 그때 그 어린아이의 삶이 세월보다 더 빨리 앞으로 내달렸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니까 세월이 더디어 견딜 수 없어 어서 세월이 내 삶을 좇아오라고 손가락을 꼬박꼬박 꼽았을 것입니다.
글쎄요. 늙어감을 무어라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이는 그랬더군요. 몸이 회복 불가능하게 퇴행 과정에 들어서는 것이 노화(老化, aging)라고요. 옳은 말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떨지요. 세월을 좇을 수 없이 삶이 더뎌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 노화라고요. 새해가 되어서 그런지 갑자기 그렇게 말하고 싶어집니다. 나이 들며, 해를 넘기며, 어쩌면 세월은 흐르는데 삶은 쌓여가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흐르지를 않습니다. 그것을 소용돌이에 빠져 허덕이는 것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늪에서의 침잠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새해를 맞으면서 일상에서는 전혀 드러나지 않던 온갖 회한이 새삼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원하지 않았는데도 문득 나도 모르게 멈춰 서서 지난 세월을 마디마디 되새겨보게 되는 것은, 그러다가 참 세월이 빠르다고 읊조리는 것은, 세월을 좇아 흐르지 못하는 내 삶의 무게 탓인 듯한데, 삶이 이렇다는 것을 서서히 곱씹으면서 마침내 나는 늙음의 마디에 깊이 스며드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그래서 그렇겠습니다만 모든 것이 더뎌집니다. 초조하기는 한데 서둘지는 못합니다. 되 지을 수 있다면, 한꺼번에 세월을 뒤집을 수 있다면 좋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가를 내 몸이 먼저 내게 전해줍니다. 지난 삶은 그것대로 귀하지 않은 까닭이 없으니 그것을 내 자존(自尊)의 바탕으로 삼아 의연하게 뚜벅뚜벅 걸어 나아가야겠다고 다짐하지만 내 걸음은 전진도 아니고 후진도 아닌 다만 게걸음의 궤적을 남기고 있음을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이미 압니다. 마지막 발견한 감동스러운 황혼의 아름다움조차 기려 오래 그 찬란함에 머물고 싶지만 세월을 좇을 수 없어 내 삶은 그저 그 아름다운 황혼의 끝자락도 잡지 못한 채 머뭇거리다 곧 어둠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세월은 빠른데 삶은 왜 이리 더딘지요.
가끔 시간을 계측(計測)한 인간의 지혜가 원망스러워지기도 합니다. 시간 안에 있으면서도 시간에 예속당하는 것을 견딜 수 없던 인간이 마련한 시계에서 역(曆, calendar)에 이르는 ‘온갖 시간을 재단하여 이를 관리하고자 했던 묘책’이 성공하지 못했더라면 세월의 빠름과 삶의 더딤이 빚는 황당한 당혹이 덜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실제로 그러한 삶이 없지 않습니다. 이제는 사정이 다릅니다만 전통적인 아프리카 문명에서는 캘린더가 없었습니다. 자연히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비현실적인 생각입니다. 나이를 헤아린다는 사실 자체가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시간과 삶은 더불어 진행합니다. 그 둘이 따로 놀 까닭이 없습니다. 물론 세월을 헤아리는 어떤 ‘단위’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의 시간 계측과는 아주 달랐습니다. 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달이나 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썼습니다. “내가 장가를 든 다음에…”라든지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라든지. 연대기는 없습니다. 자신의 삶이 ‘끊어지고 이어지는 마디’들을 그렇게 일컬으면서 그들은 자신의 삶과 세월을 함께 살았습니다. 더딘 삶도 없고 빠른 세월도 따로 없습니다. 흐르는 세월과 쌓이는 삶이 삐거덕대지도 않습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시간을 단절하여 끝이라 하고 또 시작이라 하면서 삶을 기막히게 경영하여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 한 것은 경탄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낡은 해는 가고 새해가 온다고 하면서 새해를 기리고 새로운 다짐으로 삶을 다시 짙게 채색하는 일을 멈출 수는 없습니다. 가뜩이나 퇴색이 짙은 노년에게 이보다 더 다행스러운 축복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축복조차 감당할 수 없다고 여길 만큼 빠른 세월과 더딘 삶에 시달린다면, 참 많은 경우 그러한데, 우리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해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세월을 좇아 시원하게 함께 흐르면서 더디고 빠른 계측을 아예 넘어서면서 내 삶이 펼쳐질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프리카 문명이 남겨준 흔적처럼 그런 시간 계측의 단위를 마음에 두어보는 것도 괜찮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우리의 삶이 지나치게 연대기에 의해 침윤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아예 이런 것은 어떻겠습니까? 지난해가 없듯이 새해를 맞을 수는 없을까요? 어제가 없듯이 오늘을 시작할 수는 없을까요? 올해를, 오늘을, 생전 처음 맞은 해로, 날로, 그렇게 여기며 살 수는 없을까요? 올해 만난 사람들, 오늘 만난 사람들을 전에 전혀 만난 일이 없는 새 사람으로 만날 수는 없을까요? 모든 일들도 그렇게 부닥치면 어떨지요? 그리고 이 처음 해와 처음 날을 더 다시없는 마지막 해로, 끝 날로 삼을 수는 없을까요? 내일이, 또 다른 새해가 없듯이요.
그럴 수 없는 저리게 아쉬운, 지난 또는 기다리는 세월과 삶이 있으시다면, 그것 여전히 붙들고 조금은 더디지만 게걸음으로라도 세월 따라가며 살겠다고 하시면, 더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 귀하고 귀한 일이니까요.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처음 만남의 황홀한 신비가 아직 내 몸에 남아 있다면, 그래서 내일 다시 만나지 않아도 좋을 만큼 오늘 한껏 행복했다면, 오늘 새날에 옛날 만났던 사람을 처음 만나는 사람으로 만나는 일을 한번 감행해보시지 않으시렵니까? 그렇게 황홀하게 하루를, 한 해를 마음껏 지내시면 혹시 세월이 삶 속에 스미어 스스로 빠름을 누그러트리면서 내 삶을 받쳐줄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세월이 빠르든 삶이 더디든 노년은 길지 않습니다. 맞는 새해가, 새날이, 모두입니다. 실은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는 것이 노년의 하루입니다. 감히 고백하건대 저는 올해, 한 해 동안 주어진 날들을 ‘그날만’으로 삼아 황홀하게 살고 싶습니다. 쌓이는 앞뒤 아무것도 없이요.
지난해가 없듯이 새해를 맞을 수는 없을까요? 어제가 없듯이 오늘을 시작할 수는 없을까요? 올해를, 오늘을, 생전 처음 맞은 해로, 날로, 그렇게 여기며 살 수는 없을까요?
>>정진홍 울산대 석좌교수
1937년생인 정진홍(鄭鎭弘)은 종교학을 공부했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로 있다가 은퇴했다. 아산나눔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지금은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이사장, 울산대학교 석좌교수로 있다. , , , , , 등 20여 권의 저서가 있다.
동대문 하면 떠오르던 이미지는 새벽 의류시장과 길게 늘어선 포장마차, 외국 관광객의 끊임없는 행렬이었다. 소비하고, 먹고, 웃고 떠드는 서민들의 야시장 메카였던 동대문. 최근 이곳이 패션 성지로의 탈바꿈을 모색하는 중이다. 또한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도와 방법으로 많은 이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곳이 apM CUEX(큐엑스)홀이다. 지금 그곳에 가면 태양의 화가 반 고흐의 이야기와 미디어 아트로 제작된 그의 그림들을 감상하고 체험할 수 있다.
패션 중심에서 태양의 화가 반 고흐를 만나다
‘태양의 화가 반 고흐: 빛, 색채 그리고 영혼’
apM CUEX홀은 동대문에 자리한 쇼핑몰 헬로에이피엠(hello apM) 7층에 문을 연 전문 전시공간이다. 이 전시관은 '태양의 화가 반 고흐전'을 시작으로 세계적인 예술가들의 작품 전시를 지속적으로 소개할 예정이다. 무엇보다 최근 들어 문화예술공간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동대문 지역의 이유 있는 변화에 적극 앞장설 계획이라고.
'태양의 화가 반 고흐전'은 지난 7월 중순부터 이어지고 있다. apM 1층에서 CUEX홀로 향하는 엘리베이터를 이용할 것.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반 고흐를 알차게 만날 수 있도록 작품들을 전시해놓았다. 전 세계 미술관에 있는 반 고흐의 작품 130여 점을 미디어 아트를 통해 느껴보시라.
모두 8개 구역으로 나누어 180도 이상의 와이드 스크린을 설치하고 반 고흐의 인생과 그림을 한눈에 볼 수 있게 정리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교류’, ‘대자연’, ‘고흐의 방’, ‘동양의 색채’, ‘초상’, ‘동생 테오와의 편지' 등으로 구성된 각 방에서는 반 고흐의 다양한 시선과 열정을 느낄 수 있다. ‘태양의 화가: 반 고흐전’은 12월 31일까지 전시된다.
관람 정보
장소 헬로에이피엠 서울시 장충단로 253, 2·4호선 /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 14번 출구
관람료 성인 1만5000원, 청소년 1만원, 유아 8000원 관람시간
월~목 11:00-20:00, 금~일 10:30-20:00
상사화의 꽃과 잎은 동시에 볼 수 없다. 그래서 꽃말이 ‘이룰 수 없는 사랑’, ‘이루어지지 않는 사랑’이다. 그날 선운사 산자락 아래 너른 들판은 발 디딜 틈 없이 온통 붉은색이었다. 마치 꽃물에 젖어 치맛자락까지 붉게 물들 것 같은 느낌이었다. 대웅전을 거쳐 작은 선방 주변까지 꽃들의 잔치가 이어졌다. 그러다 한 작은 선방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신발 아래 홀로 외롭게 피어 있는 가녀린 상사화를 보게 되었다. 순간 필자가 알지도 못하는 어느 누군가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 대한 아픔이 전해지면서 가슴속이 뭉클했다.
지금 스님이 되어 선운사 작은 선방에서 수행하고 있는 한 사람. 저 댓돌 위에 놓인 신발의 주인을 무척이나 연모했던 여인이 있었다면 그녀의 영혼이 혹시 상사화로 피어서라도 스님 가까이 있고 싶은 것은 아닐까. 그리고 스님이 신을 신을 때마다 가녀린 꽃술로 바지 자락이라도 만져보고 싶은 것은 아닐까. 하지만 스님은 홀로 피어 있는 꽃을 혹여 밟기라도 할까봐 조심스레 비켜가기만 한다. 상사화는 "난 당신 발에 밟혀 스러져도 좋으니 단 한 번만이라도 저를 바라봐주셔요"라고 외치는 듯 피어 있다. 그러나 스님은 가을바람 속 풍경소리에만 귀 기울이고 있다. "전생에 당신과 내가 함께 나누었던 수많은 言約을 벌써 다 잊으셨는지요. 나는 당신이 너무 그리워 몇 생을 거듭나 새, 나비, 지금은 꽃으로 님의 곁에 와 있는데 당신은 아직도 저를 알아보지 못하십니다. 이렇게 피 토할 듯 붉은 꽃 화관을 머리에 얹은 채 여리고 가는 목 길게 뽑고 당신만 바라보고 정녕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꽃을 바라보다 뭉글해진 마음을 어쩌지 못해 혼자만의 상상으로 그만 소설까지 쓰고 만다. 상사화는 그 이름만으로도 몇 가지 전설이 있다. 어느 스님이 세속의 처녀를 사랑하여 가슴만 태우며 시름시름 앓다가 입적(入寂)한 후 그 자리에 피어났다는 설, 스님을 사모하여 불가로 출가하겠다는 딸을 억지로 결혼시켜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살게 해 이루지 못하는 사랑에 홀로 애태우다 죽은 여인의 넋이 꽃이 되었다는 설, 옛날 한 처녀가 스님을 사모하다가 그 사랑을 전하지도 못해 시름시름 앓다가 눈을 감았는데 스님 방 앞에 어느 날 이름 모를 꽃이 피자 사람들은 상사병으로 죽은 처녀의 넋이 꽃이 되었다고 생각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모든 설들이 한결같이 이루지 못한 사랑의 애절함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어린 친구들이 쓰는 말로 표현하면 ‘성공한 덕후(마니아)’ 같다고. 다른 분야가 아닌 ‘불교 덕후’. 그러자 웃으며 그가 화답했다. “맞아요. 덕후는 나쁜 표현이 아니에요. 결국 한 분야에 능통하고 깊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미래를 주도하며 세상을 바꿀 거예요.” 이렇게 스스로를 덕후라 말하고 있는 그는 바로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이자 치과의사이기도 한 김성철(金星喆·58) 교수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오병돈 프리랜서(Studio Pic) obdlife@gmail.com
“들었어? 남일이가 죽었대. 숙명여고 애들이랑 대성리에 갔잖아. 물에서 못 나왔대.”
서울고등학교 1학년 학생 김성철은 친구의 죽음이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남일이와 같은 미술반이었던 그 역시 그곳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여학교 클럽과의 비공식적인 교류는 학교에서 금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동행하지 않았다. 그저 혼나는 것이 겁이 났기 때문에. 처음엔 무덤덤했다. 그저 교실에 빈자리 하나만 눈에 띌 뿐이었다. 죽음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 사고로 인해 그해 여름방학에 떠난 학교 해양훈련은 엄격해졌다. 선생님들은 안전사고가 생길까 노심초사하며 엄하게 감시를 했다. 아이들은 수군거렸다. 모처럼 신나고 재미있어야 할 행사가 힘들기만 한 것이 죽은 남일이 때문은 아니냐고. 그런 일들을 겪으며 어린 김성철은 조금씩 죽음이라는 것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죽음이라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구나 하고.
김 교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렇게 표현했다. ‘마음의 병’이 시작된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그렇게 마음이 무거워지면서 무작정 책을 보기 시작했어요. 사춘기 소년이었으니까. 알베르 카뮈의 이나 장 폴 사르트르의 와 같은 실존주의 문학 작품들이었죠. 또 엠마누엘 칸트의 같은 철학책들도 있었어요. 뜻도 잘 모르는 책들을 닥치는 대로 읽었죠.”
화가가 되고 싶었던 소년
사실 미술반에 들어갔던 것은 화가가 되고픈 꿈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시절 화가를 꿈꾸는 모든 소년, 소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역시 가족에게 그 꿈을 털어 놓는 것은 쉽지 않았다. 치열한 시대의 평범한 사람들에게 ‘놀고먹는’ 예술에 대한 꿈을 이야기하는 것은 ‘죄악’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좋은 학교에 어려운 시험을 거쳐 들어간 우등생이었기에 주변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었다.
고3이 된 김성철 학생은 이과인 전공에 미술이라는 취미를 덧대려면 건축학과가 좋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건축이라면 그림에 소질 있는 손재주도 살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손재주에 대한 담임선생님의 생각은 좀 달랐다. 선생님이 추천한 것은 ‘치과대학’이었다.
그 추천에 반감이나 저항은 없었다. 무엇보다 치과의사가 되면 근무시간이 짧다는 것이 매력이었다. “치과를 하는 친구는 늦게 출근해서 오후 일찍 퇴근한데, 그리고 골프 치러 간다더라”라는 어느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나머지 시간에 그림을 실컷 그리면 되겠다 싶었다. 그림을 그리며 먹고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니 일석이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그는 큰 고민 없이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에 입학했다.
“치과대에 입학해서도 그림 그리기는 멈추지 않았어요. 학교에서 그림에 관심 있었던 친구들과 함께 아틀리에를 차렸어요. 대학 입학 후 우리가 다니던 화실에 매달 내는 돈만 모아도 월세 정도는 해결할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2년을 열심히 그렸어요. 학교가 있는 서울 관악구 봉천동에서 시작해서, 전공이 다른 친구들 때문에 서대문구 북아현동까지 4번을 옮겨 다녔어요.”
마음의 병에 해답을 얻다
김 교수는 그 와중에서 가슴 한편에 풀리지 않는 무엇이 있었다. 바로 친구의 죽음에서 비롯된 마음의 병이었다. 그러다 만난 것이 이다. 밀교사상과 선종 사상을 설한 대승경전으로, 그는 이 경전을 읽다 죽음에 대한 의문이 조금씩 풀려가는 것을 느꼈다고.
“책에서 변치 않고 죽지 않는 것은 무엇이냐는 파사익(波斯匿)왕의질문에 부처는 이렇게 대답해요. 저 흐르는 강의 모습이 어릴 때와 지금이나 차이가 없듯, 그대 역시 외모는 바뀌었지만 보는 성품은 그대로라고. 원래의 나는 멸(滅)함이 없다는 설명을 듣고 하나의 깨달음과 함께 불교 교리에 대한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허겁지겁 불교에 관한 책을 독파하기 시작했다. 그의 ‘덕후’적인 기질이 발휘된 것이다. 그래서 시중에 출판된 불교 관련 책들을 읽어 나가기 시작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더 이상 읽을 만한 책이 없었다. 서점에 나와 있는 책들을 다 읽고 나니 불교에 관해 더 깊이 알 수 있는 책을 구할 수 있는 곳은 국내에 단 한 곳뿐이었다. 불교학의 요람이라 할 수 있는 동국대학교 도서관. 그 도서관을 편하게 들락날락하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은 동국대학교 학생이 되는 것뿐이었다. 불교연구원을 설립한 이기영(李箕永) 교수의 강의를 청강까지 했지만, 그것 가지고는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1987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했다. 이 교수가 있었던 인도철학과였다.
“치대에서 만난 아내는 처음에 이해를 못했어요. 책 때문에 대학원에 가다니. 그것도 치과의사가 인도철학과에 말이죠. 그래도 2년만 기다리면, 그 이후에는 마음껏 도서관을 다닐 수 있으니 참아 달라고 부탁했죠. 처음엔 학부 출신 학생들에 비해 많이 모자랄 것 같아 걱정했는데, 별 차이가 나진 않았어요. 알고 보니 제가 닥치는 대로 읽었던 책들이 대부분 불교학과 학부생들의 교과서였어요.”
그렇게 대학원을 다녔다. 하지만 불교라는 학문에 대한 갈증은 더 커지기만 했다. 그런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했는지 아내는 이번에는 선선히 응해줬다.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당시엔 이미 치과를 차려 개원한 상태였기 때문에, 치과의사와 박사과정 대학원생이라는 두 가지 신분을 유지하게 됐다.
번역서 통해 불교학계에서 ‘주목’받다
그가 불교계에서 이름이 알려지게 된 것은 그가 번역해 1993년에 발표한 이라는 책 덕분이었다. 은 나가르주나(중국에서는 용수(龍樹)라 불림)라는 1800년 전에 활동한 인도의 고승이 쓴 책으로, 나가르주나가 쓴 책들은 대승불교의 뿌리가 된다. 은 인도철학, 불교철학에 있어 매우 중요한 책이지만, 그동안 이 책은 제대로 번역돼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었다. 그가 번역하기 전까지.
“일반 불교학과는 일본어 정도만 할 줄 알면 됐지만, 인도철학과는 산스크리트어와 티베트어까지 할 줄 알아야 했어요. 영어는 기본이고. 그런데 기대 이상으로 언어를 익히는 것을 잘해서, 그간 번역이 안 된 책들을 읽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내가 불교계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란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씌어진 원전을 직접 번역하고, 주석을 달아 다른 학자들이 원전과 비교하며 연구할 수 있도록 해놓았죠.”
어쩌면 이 선택도 가장 ‘덕후’다운 방법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여하튼 그동안 국내의 많은 불교학자들이 해내지 못했던 일을 현직 치과의사가 이뤘다는 점에서 불교계는 주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95년 대승불교의 공(空) 사상을 체계화한 개론서인 을 번역해 다시 세상에 내놓는다. 인도의 불교학자 무르띠(Murti)가 영어로 저술한 책이다.
그리고 내놓은 세 번째 책 으로 학계의 찬사를 받게 된다. 은 중론을 쓴 나가르주나가 에 대한 비판을 반박한 책이다. 이 책은 현재 산스크리트어 원전과 티베트역본, 한역본이 남아 있는데, 김 교수는 이 3가지 언어를 각각 우리말로 번역해 정확한 뜻과 번역의 배경을 알 수 있게 했다. 물론 후학을 위한 문법적 해설도 잊지 않았다.
3가지 책에 대한 번역이 끝나 있을 때, 그는 이미 불교학계에서 ‘불교에 관심 있는 치과의사’가 아닌 ‘불교학자’로 인정받고 있었다.
치과 폐업하고 대학으로
박사과정을 마치고 나서 그가 준비한 것은, 치과를 쉬고 인도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었다. 불교 발상지에 가서 좀 더 깊은 공부를 하고 싶은 학문적 욕심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불교학에 대한 욕심’을 멈추게 만든 것은 가족도 치과도 아니었다. 바로 동국대학교였다.
“제가 전공한 공(空)사상 분야의 전공교수님이 건강이 나빠져 퇴직하셨다면서, 그 강의를 맡아 달라고 제안이 왔어요. 사실 그 분야는 논리학과 수학이 바탕이 되어야 해서, 일반 불교학자들 중에도 능통한 사람은 많지 않았거든요. 그것을 인연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어요. 물론 치과는 그만뒀고. 단지 강의를 나가는 것이 아니라 치과의사로, 그리고 서울에서의 삶을 포기하는 것이었지만 주저함은 없었어요.”
공사상은 의 ‘색즉시공’을 떠올리면 쉽다. 물질이 곧 비었고 빈 것이 곧 물질이니 감각과 생각과 행함이나 의식이 이와 같다는 뜻이다. 흔히 공(空)을 무(無)와 혼동하기 쉬운데, 공(空)은 아무것도 없다는 무(無)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흔히 우리가 살면서 큰방, 작은방 이런 표현을 하죠. 하지만 어떤 방을 보고 큰방이라고 부를 땐 이미 우리 기준엔 비교할 수 있는 방이 들어서 있는 거예요. 그런 이분법적 생각이 우리를 힘들게 하죠. 게다가 요즘의 승자가 독식하는 신자유주의는 이것을 더욱 부추겨 우리 삶을 어지럽게 하고 있어요. 늘 비교당하고, 경쟁하는 삶 말이에요. 이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경제 원리일 뿐인데 우리는 이것을 행정과 교육, 문화에까지 도입하고 있어요. 예를 들어 나 같은 프로그램을 보세요. 예술을 도구로 경쟁하고 있잖아요. 그 프로그램을 통한 폐해가 여실히 드러나죠. 결국 크게 소리 지르며, 성량이 큰 사람이 이기는 구도로 변질되잖아요. 노래라는 예술이 큰소리를 내는 시합이 아닌데, 경쟁을 통하다 보니 결국 획일화되는 것이죠.”
이런 사회적 변화 속에서 가장 외면 받고 있는 세대 중 하나가 바로 시니어들이다. 육체적 수명은 점점 길어지는데, 성과주의로 인해 설 곳을 잃고 사회적 수명은 짧아졌다. 그들에게 김 교수는 어떤 이야기를 해 주고 싶을까?
죽음에 대한 공포도 나름의 노력과 수행이 더해진다면 극복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타적인 삶을 사세요. 우리는 기본적으로 종족을 보전하고자 하는 본능이 있는데, 자식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돕는 것도 일종의 종족 보전 본능이에요. 나라는 개체를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동족을 보존하면서 그 욕구가 충족되는 셈이죠. 거기에 수행을 통해 내가 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면, 죽음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아울러 하고 싶은 일을 맘껏 할 수 있는 제2의 삶을 살 수도 있고요. 모든 것이 공하다는 것을 머리로 깨닫고, 수행을 통해 마음에서 욕심, 분노, 교만과 같은 번뇌를 지울 수 있다면 가벼워진 스스로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빈자리 채워가며 기여하고파
앞으로 그의 목표는 한국 불교학에서 필요한 부분을 채워나가는 것이다. 그가 그동안 번역서들을 내놓으면서 기여했던 것처럼.
그가 2014년에 내놓은 같은 책들이 대표적이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진화생물학, 일반적으로 종교와 대립각을 세운다고 여겨지는 ‘진화론’을 불교적 관점에서 해석했다. 최근 각광받는 뇌과학도 불교적 관점에 분석해냈다.
“뇌과학에서 밝혀내지 못한 마지막 키워드는 바로 ‘마음’이에요. 뇌파나 뇌의 기능에 대해서 뇌과학자들은 많은 연구결과를 내놓았지만 ‘마음’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죠. 하지만 불교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과학적 연구 결과를 모두 포용하면서 마음이나 윤회(輪廻)까지 설명할 수 있어요. 그게 불교학의 힘이죠.”
커피 하면 봉지커피나 일회용 믹스커피에 익숙한 필자는 젊었을 때는 일회용 커피가 부의 상징인양 너도 나도 즐기던 시절이 있었다.
시간이 흘러 나의 삶과 인생이 점점 익어 가면서 커피는 몸에 해롭다는 다는 것을 깨 닫게 되었는데 요사이 젊은이들은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물마시듯 하고 있지 않은가?
그래서 커피에 대하여 좀 더 깊이 이해하고 맛과 향을 음미 해보기 위해 바리스타를 배워보기로 하였다.
우선 커피 기구들에 대하여 알아보고 드립포트, 드립지, 드립퍼, 그라인더, 저울 등을 준비하고 커피의 유래부터 차근차근 배워 보기로 하였는데 생소한 용어부터 시작하여 또 다른 식품세계에 빠져드는 것 같았다.
커피의 기원은 세가지 설이 있다한다.
첫째, 모하메드 기원설
모하메드가 병상에서 기도 할때 가브리엘이 검음색 음료를 가져다 주는데 이를 마시자 남자 40명을 말안장에서 떨어 뜨리고, 40명의 여인과 사랑을 나눌 힘이 생겼다는 설
둘째, 칼디(Kaldi)의 전설
기원전 6세기경 에디오피아 고원 아비시니아에서 양치기 갈디가 양떼들이 흥분하여 뛰어 노는 것을 보고, 나무의 빨간 열매가 그 원인임을 알게 되고 열매를 끌여 먹어보니 기운이 솟구치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수도원으로부터 나라 각지에 소문이 퍼져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설
셋째, 오마르 전설
1258년 아라비아의 사제 세이크 오마르가 문책을 당해 아라비아의 오사바산(예맨)으로 추방되어 배고품을 못 이겨 산속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다가, 우연히 한 마리의 새가 빨간 열매를 쪼아 먹는 모습을 보고 그 열매를 따 커피를 처음 마신 뒤 전파되었다는 설
커피는 원래 힘을 의미하는 단어 “KAFFA"에서 시작하여 지금까지 왔다한다.
이슬람과 유럽이 만나는 지역, 터키에서 “가베”라고 불렀고, 유럽에서는 카페, 커피라고 불리고 쓰여지고 있다.
우리가 사용하는 COFFE는 영국에서 사용되고, 유럽에서는 “KAFFE"로 쓰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