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미술품 수집가
장리석(張利錫, 1916~ ) 화백은 2016년 4월 백세(百歲)를 넘긴, 그러나 아직 화필을 잡는 당당한 현역이다. 평양에서 출생하여 상수보통학교 졸업, 1937~1939년 일본 다마가와(多摩川) 제국미술학교 수학, 귀국해 1940~1945년 평양 미나카이(三中井)백화점 미술부장, 이때 조수로 있다 숨진 화가 최지원(崔志元, ?~1940)을 추모하여 그의 아호를 딴 ‘주호(珠壺)회’를 구성, 박수근(朴壽根, 1914~1965), 이중섭(李仲燮, 1916~1956), 최영림(崔榮林, 1916~1985), 황유엽(黃瑜燁, 1916~2010), 박고석(朴古石, 1917~2002), 박영선(朴泳善, 1910~1994), 윤중식(尹仲植, 1913~2012) 등과 5년간 동인전을 열어 평양 미술인의 자긍심을 높였다.
1950년 7월 북한 노동성에서 건립 중이던 금강산호텔 벽화 작업에 동원되어 평양을 떠난 뒤, 북진(北進)한 국군 원산 해군기지 사령부에 입대, 종군하게 되었다. 혈혈단신으로 1951년 1·4후퇴 때 제주도까지 내려가 4년 여 체류한 인연으로 제주를 제2의 고향으로 삼았다. 1955년 제4회 국전에 이 특선되고, 1958년 제7회 국전에 이 대통령상을 수상하여 화가로서의 입지를 공고히 하였다.
1981년까지 서라벌예대, 수도여자사범대학, 중앙대학교에서 회화과 교수로 재직하며 현대 구상회화의 산증인이 되었다. 주로 제주에 머무르며 서민들의 일상,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해녀 등을 독특한 색감으로 그리고 있다. 2005년에는 제주도에 그림 110여 점을 기증하여 2009년 개관한 제주도립미술관 내의 ‘장리석 기념관’에서 상설 전시되고 있다. 2014년에는 전을 열어 노익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의 그림 속에는 두고 온 고향풍 경도 많이 있는데, 내가 보았던 겨울 풍경은 , , 세 작품이었다. 눈 내린 시골마을, 옹기종기 초가집도 보이고 밤나무 옆길로 엄마와 아기, 소년과 강아지 등이 눈길을 걸어가는 시정어린 그림으로 화가의 유년시절 외가 마을의 설경을 그린 것이다.
바람에 눈발이 날리듯, 노화백의 가슴에 묻혀 있던 아슴푸레한 기억들이 연작으로 화폭에 옮겨져, 보는 이들을 묻혔던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한다. 소복소복 쌓인 눈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적이 따뜻하게 해 준다. 이 작품 은 10여 년 전, 인사동 경매에서 치열한 경쟁 속에 낙찰받은 작품이다. 창밖에 눈이 내리는 날이면, 이 그림 아래 아내와 차를 끓이고, 가야금 산조를 들으며 깊은 감상에 젖곤 한다.
은 박용인(朴容仁, 1944~ ) 화가의 유럽 여행 중의 한 작품이다.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 1981~1983년 프랑스 몽파르나스의 아카데미 드 라그랑 쇼미에르(Académie de la Grande-Chaumière)에서 유학하고 국내 여러 미술대학에서 강의하였다. 북한산, 제주도 등 곳곳의 풍경이나 와인, 과일, 꽃의 정물도 많이 그렸다. “남극과 북극을 빼고 전 세계를 여행했다”는 작가의 말처럼 유럽에 자주 머물며 알프스의 마터호른,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 같은 세계적 명산은 물론 고성(古城)들을 그렸다.
이 화가는 회화의 기법상 캔버스에 나이프를 주로 써서 유화물감을 바른다. 나이프를 쓰면 그림의 두께를 더하여 마티에르(matiere, 물감의 질감)가 무겁고 깊이 있게 보이고, 평면의 화면도 시각적으로 입체적인 양감(量感)을 느끼게 한다. 미술시장에서, 외국 풍경을 그린 작품은 우리나라의 풍경을 그린 작품보다 다소 가격이 낮은 편이다. 그러나 경매에서 이 그림을 살 때에는 그 시작가가 높아 의외였다. “이 작가나 권옥연(權玉淵, 1923~2011) 화백 같은 경우, 외국 풍경이나 인물을 워낙 심도 있게 작품화하기 때문”이라는 경매 회사의 설명이있다.
덴마크 코펜하겐의 교외, 한적한 도로를 건너 왼편으로, 고색창연한 성당의 옆모습이 보인다. 후원에 나뭇잎을 채 떨어뜨리지 못한 나무에도 눈이 덮여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성당의 첨탑도 잿빛 하늘에 묻혀 희미하다. 지붕은 흰 눈으로 적요하다. 고목의 가로수 위에도, 풀밭에도 깊게 눈이 내려 사위가 고요에 휩싸였다. 그림을 보는 찰나, 아늑함과 경건함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속세의 혼탁함을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심경이 화폭에 질펀히 흐르고 있다. ‘잘 된 그림이 반드시 좋은 그림은 아니다’라는 말이 있으나, 이 작품은 아주 잘 된 그림이며, 동시에 좋은 그림이라고 확신한다.
“그의 예술세계는 소재에 대한 친근감과 따뜻한 눈길이 와 닿는다. 거기에는 격정의 향수와 서정성 짙은 은유의 시어(詩語)로 잔잔한 감동이 다가온다. 정직, 성실한 자태와 순수함을 잃지 않는 작가적 심성이 화면 깊숙이 투영되고 있다”고 평자들은 말한다.
화가는 “내 그림을 보고 우리나라에서는 유럽풍이라고 하는데, 오히려 유럽에서는 동양적이라고 한다.”고 미소 짓는다.
사실 화가들은 설경(雪景) 그리기를 꺼리는 경향이 있다. 흰색이 다른 색에 묻히고 그 밋밋함이 화폭을 평이하게 이끌기 때문이다. 동양화에서도 화선지의 흰 여백을 그대로 두어 눈[雪]의 형상화가 어려움을 나타내곤 하였다.
눈 내리는 날은 마음이 설렌다. 온 세상을 하얗게 덮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걷노라면 마음도 경건해진다. 입속으로 가만히 어떤 바람이라도 읊조리고 싶고, 그리운 사람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작은 오두막, 무쇠난로에 장작불을 피우고,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던 한때를 회상해본다. 눈설레 속에서 정겨운 얼굴들이 하나둘 스쳐지나가고, 아르보 페르트(Arvo Pärt 작곡가, 1935~ )의 몇 곡을 듣다 보면 정화(淨化)된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드는 적멸감(寂滅感), 시공을 넘어 유년의 뜰로 이어진다.
‘외가’라는 낱말은 단순히 ‘어머니의 친정’ 이라는 뜻만으로 정의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함축된 말이다. 외가는 외할머니가 계신 곳이고, 언제나 나를 기다리는 곳이며, 내 모든 투정이나 허물도 기꺼이 품어 주는 따뜻한 풀솜 속 같은 곳이다. 아버지나 외할아버지에게선 느껴볼 수 없는 자글자글한 정이, 외할머니 치마폭에서 피어난다. 김칫국물 얼룩진 저고리 냄새가 아직도 코끝에 아릿하다. 어머니의 어머니로 농축된 모정이 “아이고, 내 강아지” 한마디 속에 묻어난다. 진종일 눈사람을 만들다, 강아지와 뛰놀다, 눈이 그치면, 보랏빛 하늘 위에 연을 띄워 날리며 얼레에 대고 ‘우우우’ 입김을 뿜던, 그 아름답던 시절이여!
>> 이재준(李載俊)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아호 송유재(松由齋). 미술품 수집가, 클래식 음반리뷰어.
유난히 겨울이 아름다운 도시가 있다. 그중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곳이 태백시다. 고원의 도시 태백의 겨울은 지루할 만큼 길다. 겨울밤이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밤새 사락사락 눈이 내리는 날, 석탄가루에 뒤범벅된 도시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흰 설원에 감싸인다. 설원은 고산 밑에 납작납작 엎드려 있는, 지붕 낮은 집들의 때 묻은 몸을 잠시 숨겨준다.
글·사진 이신화(on the camino의 저자, www.sinhwada.com)
태백산 당골 눈축제장에서 신나게 놀고 광산 갱도 체험
해발 600m에 위치하고 있는 태백시는 기온이 타 지역보다 낮아 겨울이 길고 눈이 많은 도시다. 해마다 민족의 영산 태백산에서 눈축제(1월 22일~31일)가 열린다. 당골 축제장에 화려한 조명이 켜지면 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인산인해를 이룬다. 이미 대내외적으로 많이 알려진 축제여서 해마다 불야성을 이룬다. 축제장 주변에 만들어진 눈 조각품 등은 눈요기와 볼거리를 주고 다양한 공연은 흥을 돋워준다. 개썰매와 스노모빌 썰매 등 체험거리도 많아 재미가 쏠쏠하다.
거기에 1997년 5월 문을 연, 동양 최대의 석탄박물관은 꼭 찾아봐야 하리. 태백시는 1980년대 후반까지 번성했던 탄광도시였다. 그러다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사업이 시행되고 급격히 무너져 내렸다. 석탄박물관에서는 잊혀가는 그 시절을 상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특히 지하 체험갱도관은 생동감이 넘친다. 전시관을 다 보고 지하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를 타면 실제 탄광 속으로 들어가는 듯하다. 대형 디오라마(모형도)로 갱내 작업을 한눈에 볼 수 있게 했다. 태백산도립공원 입장권으로 관람이 가능하다.
태백산 설경 보면서 천제단까지 산행하기
진정한 설경을 감상하고 싶다면 태백산(1567m) 산행을 감행해야 한다. 코스는 당골매표소와 백단사, 유일사, 사길령 등이 있다. 최단 코스는 백단사나 유일사 코스다. 겨울 산행이 결코 쉽지 않지만 주목 군락지의 설화나 일출 등을 보기 위해 찾아든 등산객들의 수없는 발자국이 찍힌다. 태백산 9부 능선인 1500고지에 오르면 망경사가 있다. 월정사의 말사로 신라 진덕여왕 6년(652년)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1950년 한국전쟁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나중에 복원해 오늘에 이른다.
망경사에는 물을 통해 바다 용왕과 교통한다는 용정이라는 우물이 있고 천제단(중요민속자료 제228호)으로 가는 길목에는 단종비각이 있다. 영월에서 죽은 단종의 혼이 백마를 타고 이곳에 와서 태백산 산신이 되었다는 전설이 흐른다. 망경사에서 조금 더 오르면 산정 허허벌판에 있는 천제단을 만나게 된다. 천제단 주변에는 죽어 천년, 살아 천년이라는 주목 군락지가 있다. 주목 사이로 떠오르는 일출이나 설경 감상은 매년 1월에 한 번은 해봐야 할 일이다. 철저한 등산 채비는 필수다.
고생대자연사박물관의 삼엽충과 구문소 풍치 감상하기
2010년에 개관한 태백 고생대자연사박물관(033-581-3003, 태백로 2249, www.paleozoic.go.kr)이 있다. 이곳에 박물관이 생기게 된 것은 주변에 다양한 고생대 퇴적 침식지형과 삼엽충, 완족류 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관심 없으면 화강암인 듯 생각하기 쉽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지질이 매우 독특하다. 고생대의 바다가 융기해서 생겼기 때문이다. 문화해설사가 친절하게 안내를 해주며 고생대부터 살아온 삼엽충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다.
박물관 가까이에 태백 8경으로 손꼽히는 구문소(천연기념물 제417호)가 있다. 낙동강 상류 황지천의 물이 머물렀다 가는 곳으로 바위에 구멍이 나고 소가 만들어졌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산을 가로지르는 강이다. 고생대에 석회암이 용해되어 생성된 석회동굴은 볼 때마다 신령스럽다. 주변의 얼어붙은 마당소, 삼형제폭포 등의 겨울풍치도 나름 볼만하다. 태백시내에선 낙동강의 발원지로 알려진 둘레 100m가량의 ‘황지연못’도 가볼 만하다. 상지, 중지, 하지로 구분돼 있는데 연못에선 하루 5000톤가량의 물이 자연 용출된다.
상장동 벽화마을과 샘터마을
태백시의 또 다른 볼거리가 상장동 벽화마을이다. 이 마을은 1970년대 광부만 4000여 명이 거주했던 국내 대표적인 광산 사택촌이었다. 저탄장으로 사용된 문곡역을 중심으로 탄가루가 날리고 검게 그을린 광부들의 막장 생활을 달래는 대폿집이 줄지어 있던 번화가였다. 하지만 1989년 석탄산업 합리화 시행으로 폐광이 늘면서 젊은 광부들이 하나둘 떠나 지금은 400여 명의 주민들만 남았다.
지붕 낮은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좁은 골목이 이어지는, 겉으로 보기엔 태백시에 있는 자그마한 시골마을과 다를 바 없다. 마을 골목 벽마다 크고 작은 70여 점의 작품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과 이야기, 사진 등을 통해 옛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검은 황금’으로 불렸던 석탄이 호황을 누리던 시절 ‘지나가던 누렁이 개도 만 원짜리 지폐를 물고 다닌다’는 전설 속의 개를 형상화한 ‘만복이’가 눈길을 끈다. 그 외에도 철암동에 가면 탄광역사촌이 있다. 철암역 앞에 있는 역사촌은 옛 건물을 그대로 살려, 탄광 시절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자작나무 숲과 검룡소 겨울 트레킹
태백산 산행을 못했다면 검룡소로 대신해보자. 검룡소(검룡소길) 주차장에서 왕복 2.6㎞ 정도만 걸으면 된다. 곧게 뻗은 낙엽송 군락지 숲은 한겨울에도 빛이 난다. 검룡소에 이르는 길은 나무 데크가 연결한다. 데크에서 소(沼)를 바라보면 된다. 약 20m 둘레의 암반에서 늘 9℃의 수온을 유지하는 물이 하루 2000~3000톤씩 솟아오른다. 하지만 눈으로는 용출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그래도 이곳의 의미는 크다. 검룡소는 한강의 발원지다. 임계를 지나 정선, 평창, 단양, 충주, 양평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데 36개의 크고 작은 도시들을 지나며 12개의 하천과 만나 한강에 이르게 된다.
◇‘청바지’를 즐겨라
얼마 전 친구들 모임에 갔더니 건배사로 '청바지(청춘은 바로 지금부터)'를 외친다. 연배가 비슷한 또래다 보니 자영업 하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일선에서 물러나 있는 상태다. 그러다 보니 그동안 일에 매달려 잃어버린 청춘에 대한 보상 욕구 심리로 ‘청바지’를 부르짖는 것 같다. 사실 그동안은 모두들 일에 매몰돼 요즈음처럼 자유 시간을 만끽하며 지내오지 못한 것 같다.
내 경우도 1975년 직장 생활을 시작해 잠시 공직, 삼성그룹 간부 임원, (주)신라밀레니엄 CEO, 일요시사 회장 등으로 일에 파묻혀 지내다 2013년부터 자유인이 되어 최근에는 매주 2회 문화 강좌 수강, 1~2회 등산 등으로 바쁘게 지내고 있다. 2013년 8월에는 백두산 서파-북파 트레킹을 계획했는데 폭우로 인한 산사태로 서파, 북파 등정 및 지하삼림 트레킹으로 만족하고 아쉬운 마음에 대신 2014년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를 트레킹하기로 하고 건기에 트레킹이 가능하기 때문에 10월 24일~11월 3일 사이에 친구 3명 등 일행 13명이 H여행사를 통해 카트만두-포카라-푼힐 전망대-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을 하게 되었다.
◇체력, 고산병, 식사 걱정할 필요 없어
안나푸르나 트레킹 계획을 세운 뒤로 히말라야에서 매일 6~9시간씩 총 80km를 팔일 동안 트레킹해야 하고 4000m 이상 고지를 오르는 데 따른 체력과 고산병 문제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체력은 나름대로 일년 넘게 매주 1~2회 4시간 내외 등산을 했기 때문에 별다른 걱정을 안 했으나 4000m 이상 고산 경험은 처음이라 고민이 돼 출발 전 병원에서 다이막스(이뇨제)와 비아그라를 처방받았다.
고산은 산소가 상대적으로 희박해 뇌에 적정한 산소 공급을 위해 혈류량을 늘려주는 비아그라와 이뇨제 이외 별다른 처방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 트레킹 과정에서 현지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어떤 때는 답답할 정도로 천천히 걷고 끼니마다 제공되는 보리차를 물통에 채워 수시로 마신 결과 처방해 갔던 약은 쓸모없는 것이 되었다. 천천히 걷고 물 많이 마시는 것이 고산병의 약인 셈이다.
또한 20여kg의 짐, 식사 등도 걱정되었으나 여행사의 편의 제공으로 걱정 없이 트레킹만 하면 되었다. 식사는 매 끼니 한식이 제공돼 잘 먹고 영양 섭취에 충분했다. 우리 일행 13명을 위해 트레커 개인 짐과 식자재 등에 포터 15명이 동원되고 식사 준비에 조리팀 5명, 전문 안내인을 비롯한 가이드 3명 등 그야말로 ‘황제 트레킹’(그러나 경비는 300만원 미만)이었다. 일행 중 50대 중반 여성이 있었는데 등산 경험도 적어 항상 맨 꼴찌에 처졌으나 마지막 가이드가 따라붙어 전속 가이드 역할을 해 트레킹을 무사히 마쳤다. 아마도 각자 등산 장구를 메고 침식을 하며 안나푸르나를 트레킹하라면 전문 산악인 이외 아무도 엄두를 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봉(高峯) 무리, 일출 황금설경(黃金雪景)은 장관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푼힐 전망대를 경유할 경우 닷새 동안 올라가고 사흘 동안 내려오는 긴 여정이다. 카트만두에서 국내선으로 포카라(40여분 탑승)를 거쳐 버스, 지프로 두 시간 이동 후 맛보기 트레킹을 한 뒤 힐레에 도착하면서 롯지 생활과 트레킹이 시작된다.
둘쨋날 일곱 시간 트레킹 끝에 고라파니에 다다른다. 푼힐 전망대 (3210m)를 들르기 위해서다. 이튿날 새벽 네시반 기상해 한 시간에 걸쳐 등산 후 푼힐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히말라야 준봉에 비치는 일출 광경은 장관이었다. 동쪽에서 뜨는 해가 서쪽에 위치한 다울라기리(8172m), 투크체(6920m), 안나푸르나(8091m) 등 고봉들의 꼭대기 만년설을 비출 때 시시각각 눈이 반사돼 황금색으로 변해가는 모습은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경이다. 이곳은 모든 사람들이 고봉들의 일출 황금설경 장관을 보러 온다. 하산할 때 보니 입장료를 받던 관리인들이 없어졌다. 새벽 등정객 외에는 전망대에 오르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이란다.
아침 식사 후 트레킹을 시작해 때로는 3000개의 계단을 오르내리고 숲속 길도 지나고 만년설이 녹은 장엄한 물소리의 계곡, 수백 미터 높이의 폭포 등을 지나 츄일레 롯지, 시누와 롯지, 데우랄리 롯지 등에서 머문 후 마침내 트레킹 닷새째 저녁 때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3700m)를 지나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4130m) 입구에 이르렀다. 불과 몇km 앞에 펼쳐지는 고봉들이 우리를 반기듯 그동안 끼었던 안개가 걷히고 속살을 드러낼 때 일행은 탄성을 질렀다.
전기 사정으로 일찍 잠자리에 든 후 이튿날 새벽 다섯시에 기상해 몇 백 미터 올라가 일출이 비추는 고봉을 보는 것은 또 다른 장관이었다. 푼힐 전망대는 일출시 멀리서 히말라야 황금 고봉을 감상하는 데 비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바로 지척에서 안나푸르나(8091m), 안나푸르나 사우스 피크(7219m), 강가푸르나(7454m), 안나푸르나III(7555m), 네팔 성산(聖山,등정 불허)인 마차푸차레(6997m) 등의 고봉들이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가까이서 고개를 들고 지켜보는 게 또 다른 매력이다.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는 분지로 돼 있어 가장 가까이 한 곳에서 여러 고봉을 감상할 수 있는 히말라야 가운데 유일한 곳이라서 많은 트레커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하산하는 길은 발길이 한결 가볍다. 하산이라 해도 사흘 내내 오르락 내리락 해야 돼 몸은 고되지만 마음은 가뿐하다.
등정할 때 하산하는 트레커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부러워 보였는데 지금 등정하는 사람들의 우리를 바라보는 심정이 비슷해 보였다. 밤부 롯지, 지누단다 롯지 등에서 머문 뒤 사흘 하산 트레킹을 마치게 되었다. 지누단다에서 노천 온천과 저녁 식사 때의 염소 수육 맛이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포카라에서 국내선을 타고 카트만두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창으로 옆을 보니 히말라야의 만년설에 뒤덮여 줄지어선 고봉들이 정겹게 느껴졌다.
◇궁(窮)하면 통(通)한다
카트만두 도착 첫날과 귀국 전날 밤은 카트만두 최고급 오성 호텔로 과거 궁전이었던 소알티 크라운 플라자 호텔에서 머물렀다. 그러나 둘쨋 날부터는 고산지대여서 숙소가 롯지로 열악해 2~4인실에 투숙하고 공동 변소와 샤워장을 사용해야 했다. 공동 샤워장은 일 달러 지불하면 더운 물을 이용할 수 있으나 고산에서는 머리를 감거나 샤워를 해 자칫 열을 빼앗기면 감기나 고산병에 걸리기 쉽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사전 준비했던 물티슈를 활용해 얼굴, 손발 등 온몸을 씻고 심지어 친구에게 물티슈로 등도 닦아달라고 해 매일 '물티슈 사워'를 했다.
그리고 첫날은 면도를 했으나 둘쨋 날부터는 도저히 면도하기 힘들어 수염을 기르기로 하였다. 일주일 기르니 제법 멋있게 자라 주변에서 ‘만화가 이모(某) 씨 같다’면서 계속 기르라고 권유하기도 하였다. 또한 옷도 등산복, 평상복, 속옷 등을 갈아입을 요량으로 많이 준비했으나 초반 하루 이틀 이외 별로 갈아입지 않게 되었다. 귀찮기도 했지만 땀을 흘려도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고 멋내기도 필요 없었다. 준비해간 체육복은 만사형통이었다.
롯지에 도착해 간편복인 체육복으로 갈아입고 잠잘 때도 보온을 위해 체육복을 입고 침낭에 드는 것이 매일 연속이었다. 그야말로 ‘노숙자’같은 생활이었다.
한 번은 등산 스틱 한 개가 고장나 ‘장애 스틱’이 되어 다소 불편했는데 친구가 맥가이버칼로 등산로 주변에 널려 있는 대나무로 지팡이를 만들어줘 트레킹이 끝날 때까지 ‘대나무 스틱’을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안분지족(安分知足)이 행복의 근원
네팔은 1인당 국민소득이 750달러로 가난한 나라이다. 카트만두 이외 거주 국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해 트레킹하다 보면 수십 계단의 다랑이 논(주로 벼, 조 농사)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밖에 일부 국민이 트레킹 가이드, 포터, 셰르파(전문 산악인 가이드) 등 관광 관련업에 종사하고 있다. 일반 트레킹 포터들이 일주일 동안 짐을 져나르고 몇 십 달러를 받는다는 얘기를 듣고 눈물이 핑돌았다. 이마저도 고루 나누기 위해 마을별로 할당하고 순번을 정해 고용한다고 한다.
2014년 10월18일 에베레스트 남동루트 쿰부 얼음폭포(5800m) 눈사태로 사망 14명, 실종 3명 사고 당시 셰르파 사망 보상금이 1인당 415달러에 불과해 셰르파 300여명이 파업을 벌인 일도 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네팔인들은 대체로 낙천적이다. 40여 kg의 무거운 짐을 이마에 메고 3000 계단을 오르내리느라 힘들겠지만 ‘나마스테(Welcome)’인사하면 웃으면서 ‘나마스테’한다. 저녁 식사 때 포터, 가이드, 조리팀 등 일행은 별도로 식사를 하는데 식사 전, 식사 중, 식사 후 그들 나름의 노래를 부르며 즐긴다.
트레킹하면서 마을을 지날 때 어른, 어린 아이들을 보면 항상 밝게 웃는 낯이고 얼굴이 평화롭다. 카트만두만 해도 거리가 무질서하게 복잡하고 매연이 심해 몇 분만 걸어가도 목구멍이 따가울 정도인데 그래도 네팔인들은 잘도 참고 견디며 산다.
그동안 보도 등에 따르면 가난한 부탄, 네팔 같은 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상대적으로 높다고 한다.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며 큰 욕심 없이 주변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에서 하루 하루 만족스럽게 사는 것이 비결 아닐까?
노자(老子)는 소우주(小宇宙)와 대우주(大宇宙)를 설파하였다. 대우주는 우주의 생성, 존재, 법칙 등 진리로 인간이 인식하든 안 하든 존재하는 것이고 소우주는 인간 각자 거울 속에 비친 인식으로 소우주는 각자의 지식, 경험, 환경에 따라 다르게 인식한다.
네팔인들은 주변 환경이 열악하고 생활 수준 및 문명 정도가 낮은 데다 전기 및 통신 제약으로 받아들이는 정보에 한계가 있을 뿐더러 개별 수준 차이도 별로 없어 그 정도 생활에서 안분지족(安分知足)하는 것 아닌가 생각해본다. 잠시나마 번뇌에서 벗어나 어떻든 그네들의 참삶의 지혜를 맛보면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현실에 감사하며 욕심을 줄이고 남과 더불어 매일 매일 충실하고 즐겁게 살아갈 것을 기약해본다.
오늘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 날인가? 19세기 미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철학자인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이 말한 ‘당신이 쓸모없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누군가가 간절히 원하던 내일이다(Today that you wasted always is tomorrow that the one who died yesterday wanted to have so desperately.)’라는 경구가 새삼 귓전을 때린다.
△ 변종경(65) 일요시사 전 회장은 서울대학교를 졸업(1973)한 뒤 잠시 공직을 거쳐 미국 유학, UCLA 대학원에서 석사 취득(1985) 후 1987년 삼성물산(주) 조사부장, 경영기획부장, 1994년 삼성그룹 비서실 기획 담당 임원(이사,상무,전무), 2004년 삼성 사회공헌위원회 부사장 등 기획 분야에 주로 종사해 '기획통'으로 알려져 있다. 2007년 삼부그룹 계열 ㈜신라밀레니엄 대표이사에 취임해 경영 혁신을 통해 2011년 지식경제부, 중앙일보 주관 '한국을 빛낸 창조 경영인' 대상(혁신 경영 부문)을 수상하였고 2012년 일요시사 회장으로서 언론사 경영에 참여하는 등 경영자로서 경륜을 쌓기도 하였으며 2013년 자유인이 된 뒤 등산, 사진 등 다양한 취미 활동으로 그동안 못 다한 여가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한국 화단의 거목' 장리석(98) 화백의 작품세계와 삶의 여정을 돌아보는 전시가 5월 11일까지 펼쳐진다.
제주도립미술관은 '장리석-백수(白壽)의 화필'전을 4일 개막했다.
장리석 기념관과 기획전시실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는 2005년 장 화백이 도립미술관에 기증했던 작품과 작가 소장품, 아카이브(특정 장르에 속하는 정보를 모아 둔 정보 창고)자료를 중심으로 구성됐다.
이번 전시는 장 화백의 연대별 대표작품을 차례로 보여준다.
장 화백의 작업의식의 뿌리를 살펴보는 '근원'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이어 색과 선이 돋보이는 초기 작업과 해녀 작업, 이북이 고향인 작가의 향수를 그린 '망향', 향토색 짙은 설경 작업까지 작가의 일대기가 펼쳐진다.
이번 전시를 위해 그려진 작품으로, 제주 해녀와 바다 풍경을 담은 작품 '바다와 소라'도 선을 보인다.
1916년 평양에서 출생한 장 화백은 1942년부터 3회 연속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선하며 화단에 데뷔한 이래 현재까지 꾸준히 작품 활동을 벌여왔다. 또한 서구 모더니즘에 밀려가던 한국 구상미술을 지켜온 거장이다.
그는 지난 2005년 제주도에 자신이 소장해 온 작품 110점과 화구를 기증하기 위한 협약을 체결했다. 이를 계기로 도는 도립미술관 내에 장리석기념관을 건립하고 그의 작품을 상설 전시하고 있다.
미술관측은 “가장 오래된 작품인 '방(方)노인상'(1946년 작)부터 2000년대 작업한 작품까지 70여년에 걸친 장 화백의 작품세계를 총체적으로 고찰해보기 위해 이번 전시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문의는 제주도립미술관 064-710-4300.
오대산 자락 가장 북쪽 그리고 첫머리에 위치한 방태산(1435m)은 구룡덕봉(1388m)과 주억봉(1443m) 등의 능선으로 연결돼 있는 강원도에서도 오지 중 오지다. 국내 최고·최대의 자연림을 이루고 있어 산림이 울창하며 원시 형태로 잘 보존돼 있다. 계곡이 깊고 큰 산으로 이뤄져 사계절 내내 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내리며 희귀식물과 어종이 풍부하다.
1997년 개장한 방태산자연휴양림은 구룡덕봉과 주억봉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수원 덕분에 수량이 풍부하고 마당바위와 이단폭포가 방태산자연휴양림의 랜드마크를 이뤄 멋진 절경을 자랑한다.
방태산 숲은 피나무, 박달나무, 소나무, 참나무류 등 수종이 다양한 천연림과 낙엽송 인공림으로 구성돼 계절에 따라 녹음, 단풍, 설경 등 자연경관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열목어, 메기, 꺽지 등의 물고기와 멧돼지, 토끼, 꿩, 노루, 다람쥐 등의 야생동물이 서식하고 있다.
마당바위와 이단폭포는 방태산자연휴양림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소다. 특히 이단폭포의 주변 활엽수림은 가을철 단풍이 들면 폭포와 단풍이 딱 들어맞게 잘 어울려 그 아름다운 모습을 사진에 담기위해 산행객뿐만 아니라 사진작가들이 새벽부터 휴양림 입구에서 진을 치고 기다린다고 한다.
휴양림 입구에 있는 매표소를 통과하면 숲으로 올라가는 외길의 진입로가 있다. 진입로 우측에는 방태산 자락에서 흘러내려오는 계곡의 아름다움으로 인해 국립자연휴양림 중에서 숲과 계곡이 잘 어울어진 휴양림 중 하나다.
매표소에서 약 1km 상부에 위치하는 곳에는 산림문화휴양관과 숲속의 집 그리고 마당바위가 있다. 산림문화휴양관에서 조금 더 올라가면 제1야영장이 있는데 이곳은 10개의 야영데크가 설치돼 있다. 신갈나무를 비롯해 다양한 참나무류가 적절한 공간을 두고 자라고 있으며 곳곳에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사이좋게 잘 자라고 있다.
상부로 10분 정도 더 올라가면 이단폭포를 만나게 된다. 이단폭포를 지나 제2야영장까지 올라가면 숲은 조금 더 원시의 형태를 자랑한다.
방태산자연휴양림은 방태산의 주억봉, 구룡덕봉의 산행자들에게 더 잘 알려진 휴양림이다. 온 숲이 울긋불긋 화려한 단풍옷을 입는 가을의 절정인 10월에는 방태산자연휴양림에서 가을의 정취에 흠뻑 취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