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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 그 아이러니 <랜드 오브 마인>
- 전쟁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상대방을 죽이기 위한 맹목의 뜨거운 싸움이 끝나면 이제부터 그 땅에 살아남아야 하는 개인들의, 살벌하고 차가운 또 다른 전쟁터가 열린다. 그래서 전쟁은 더욱 참혹하다. 전쟁은 늘 고상한 명분을 앞세우고 시작되지만,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선과 악의 경계가 모호하고 불분명한 법이다. 전쟁은 그래서 더욱 추악하다. 전쟁영화 하면 식의 영웅담이 먼저 떠오른다. 승자 의식을 고취시키고 역사의 주도권을 확인하는 주류 영화들이다. 이런 영화들은 대부분 스펙터클하고 승자의 미담이 주를 이룬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우리는 아픔을 이런 식으로 봉합해왔다. 그러나 전쟁의 상처가 아물면서 이젠 전쟁 그 자체를 똑바로 직시하는 영화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은 전쟁이 끝난 이후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총소리 한방 들리지 않지만, 전쟁보다 더 스릴 넘치고, 오감과 심장을 쥐어짜고, 정서의 참담함을 성취한다. 이 기이한 전쟁영화는 전쟁이 얼마나 인간을 잔인하게 만들고 도덕성을 황폐시키는지, 그리고 그러한 폐허에서 인간은 어떻게 구원받을 수 있는지를 잔잔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덴마크 서부해변은 독일군이 매설한 200여만 개의 지뢰가 남아 있었다. 승전한 연합군 측은 이 지뢰를 독일군 포로들을 동원해 제거하려 한다. 그중 영화 속의 ‘스캘링엔’ 지역을 담당한 것은 주로 독일의 소년병들이었다. 그들은 작업이 끝나면 고향으로 돌려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믿고 죽음에 내몰린다. 소년병들이 지뢰 해체에 익숙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 게다가 장비도 없이 작은 탐지봉 하나에 의지하여 모래밭을 기어가며 생사의 기로를 넘나든다. 아름다운 해변의 모래사장이 그들에겐 죽음의 땅인 셈이다. 영화는 그들 중 일부인 ‘칼 상사(로랜드 몰러)’ 휘하 소년병들의 이야기를 통해 종전되었지만, 결코 끝나지 않은 전쟁의 깊은 상처를 증언하고 있다. 조금만 방심하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독일에 대한 증오심에 불타는 덴마크 군인 ‘칼 상사’에겐 소년들은 소모품에 불과하다. 때문에 소년병들에게는 식사도 제대로 주지 않고 허름한 판잣집에 몰아넣은 채 지뢰 제거 작업에만 몰두하게 한다. 한때는 연합군의 일원으로 나치 독일이라는 괴물과 싸웠지만, 이제는 그 자신이 괴물이 되어가는 것이다. 영화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원제는 덴마크어로 ‘모래 아래(under sandet)’라는 뜻이었지만, 영어 제목으로 바뀌면서 ‘지뢰의 땅’이라는 의미와 ‘나의 땅’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게 됐다. 그러니까 소년병들에겐 이 땅의 절망과 나의 집으로 돌아간다는 희망이 늘 교차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의 이 간절한 소망이 그들을 살리는 힘이며 칼 상사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된다. 지뢰가 폭발하면 팔다리가 찢어지는 이 지옥의 땅도 눈을 들어 보면 평화롭고 아름다운 해변이듯, 상사의 증오로 이글거리는 눈빛도 부모의 마음으로 보면 그들도 그저 순박한 아이들일 뿐이다. 상황이 만들어낸 잔인한 ‘칼 상사’도 소년들의 선한 눈망울을 보며 점차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하며 구원의 길로 나아간다. 우리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덴마크의 마틴 잔드블리엣 감독은 무명에 가까운 배우와 평범한 소년들을 통해 선과 악, 가해자와 피해자를 분간하기 어려운 전쟁의 진실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전쟁이란 본디 아이러니로 가득한 인간들의 맹목임을.
- 2017-04-26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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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닷가 소년 임충휴 나전칠기 명장이 되다
- 이맘때쯤이었다. 1962년 완도 앞바다의 햇살은 따뜻했다. 바닷가엔 조개껍데기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뱃머리에 선 소년은 이 정도 기온이면 다시는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 안심했다. 당시만 해도 전라남도 완도에서 서울로 가려면 배를 두 번 타야 했고,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14세 소년은 멀고 긴 상경길이 걱정되지 않았다. 고향에는 다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금의환향을 위해서는 차라리 먼 여정이 낫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눈 앞의 조개들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나전칠기 대한민국명장 임충휴(任忠休·67)씨다. “원래 어릴 때부터 공부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했죠. 신문팔이며 구두닦이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서울의 추위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한 달 만에 집으로 도망쳐왔어요. 그리고 날이 좀 풀렸을 때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동네 이장이셨던 아버지는 그때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다시 도망쳐올 것 같으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성공하려면 인내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임충휴 명장은 그날부터 아버지의 조언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다. 그의 작업실 한쪽에는 큼지막하게 쓰인 ‘忍耐’라는 글자 액자가 걸려 있다. 그는 두 번째 상경 때 생각을 바꿨다. 무작정 돈을 좇기보다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천의 라이터 공장에 들어갔다. 그의 성실함이 통했는지 후암동의 한 공장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전칠기 공장이었다. 나전칠기를 처음 본 소년은 바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영롱한 빛깔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전복 껍질은 지천에 널린 흔한 것이었지만, 주걱 대신 무엇을 긁을 때 말고는 쓸모가 없었다. 그런 하찮은 것이 이렇게 아름답게 변하다니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그는 이 기술을 꼭 자기 것으로 만들겠노라 다짐한다. 월급·휴일 없어도 감지덕지 그러나 기술을 익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 3년간은 월급도 받지 못했다. 그저 명절 때 주는 옷 한 벌과 간식 정도 사먹을 수 있는 용돈이 전부였다. 일요일도 없었다. 휴일은 한 달에 한 번뿐이었다. 그래도 숙식을 해결하며 어깨너머 기술을 훔쳐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작업만 고됐던 것이 아니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청소를 하느라 손과 무릎에는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아직도 그의 몸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말도 못하게 힘들었죠. 어린아이에게는 벅찬 일들뿐이었어요. 당시엔 기술자 중 상당수가 통영 분들이었는데, 연장 명칭은 죄다 일본어였죠. 전라도 출신 아이가 일본어가 섞인 경상도 사투리를 어떻게 알아듣겠어요. 그런데 말도 못 알아듣는다고 혼났죠(웃음).” 엄격한 교육은 요령을 부리지 않고 길고 번거로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제대로 된 완성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도록 해줬다. 전통 공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그는 이미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중일(잡부가 아닌 정식 기술자의 초보 단계) 자리를 줄 테니 공장을 옮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된 공장은 보문동의 조안공예사. 이곳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김태희 선생의 제자 안승권씨가 운영하던 공장이었다. 임충휴 명장은 아직도 당시에 인연을 맺은 13명과 친목회를 통해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그를 담금질한 성공과 고난의 시간들 제대로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날아갈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순탄하지는 않았다. 옻칠에 사용되는 고운 토분(土粉)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흙먼지를 마셔야 했고, 나무판자 표면을 곱게 고르는 작업에 종일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또 정신없이 5년을 보내고 나니, 임충휴 명장은 업계에서 꽤 알려진 기술자가 돼 있었다. 탐을 내는 사람도 많았다. 말 그대로 어엿한 기술자였다. 웬만한 화장대나 문갑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실력이 됐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스카웃 제의가 있었다. 이번에는 김호창 선생이었다. “김호창 선생님 덕분에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죠. 제 성실함을 눈여겨보셨는지 4년 만에 그 공장에서 공장장을 맡게 됐어요.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많고, 실력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악착같은 제 모습이 맘에 드셨나봐요. 그곳에서 공장장으로 일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제 회사를 차리게 됐어요. 독립하고 나서도 선생님이 하청을 주고 신경을 써주셔서 자리 잡는 데 큰 고생은 하지 않았어요.” 어렵게 융통한 300만원이 밑천이 됐다. 시작은 직원들 먹일 밥 지을 곳이 없어 비 맞으며 음식을 할 정도로 열악했다. 전라도 사람을 차별하는 풍토도 있어 어떻게든 신용만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성공이라는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그때는 9자 나전칠기 장롱이 300만원 정도 했어요. 그 돈이면 당시 시골에서 논 20마지기(약 6000평)를 살 수 있었어요. 고향에서 장롱이 그 가격이라고 하면 믿지 않았으니까요(웃음). 덕분에 여러 고관대작의 집에 들락날락했는데 그분들 중에 재벌이나 국회의원, 장관도 있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삼성종합건설의 부탁으로 쿠웨이트 영빈관에 줄 선물로 자개병풍을 만든 것이에요. 사진이라도 하나 남겨놨으면 좋았을 텐데….” 인내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뚝섬과 성남에 나눠져 있던 그의 작업장에는 직원이 어느 새 100명에 달했다. 제대로 된 9자 나전칠기 장롱이 만들어지는 데는 6개월이 걸리는데, 그의 작업장에서는 하루에 하나꼴로 완성됐다. 그만큼 꾸준한 수요가 이어졌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사랑받았다. “당시 나전칠기 장롱은 주부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어요. 누구나 갖고 싶어 했고, 부의 상징이었죠. 실제로 정부에서는 이 장롱을 사치품으로 간주해 특소세 인지가 있어야 거래가 가능하도록 했어요. 주부들이 자개장을 갖기 위해 계모임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어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어려움이 닥쳤다. 1978년 2차 유류 파동에 잠시 휘청했던 사업이 좀 견뎌지나 싶더니 1997년 IMF라는 직격탄을 맞고 말았다. 현찰 대신 받았던 어음들은 줄줄이 부도가 났다. 당시 부도난 어음의 총규모는 12억8000만원 정도. 개인사업자가 넘길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당시 인사동과 명동, 신설동에 거래하던 가게들이 많았죠. 물론 대부분 어음으로 거래를 했어요. 받지 못한 돈이 12억이 넘었어도 절 믿고 따라준 거래처, 직원들을 실망시킬 순 없었죠. 몇 채 가지고 있던 집들을 모두 처분하고 빚잔치를 했죠. 직원들에게 퇴직금도 조금씩 챙겨주고. 그러고는 칠기와는 인연을 끊으려 했죠.” 실제로 그는 칠기와 잠시 이별했지만 다시 돌아왔다. 그도 천직을 잊기 어려웠지만, 그의 솜씨가 사장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주변의 만류도 컸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진성옻칠공예가 다시 부활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과거의 제작 방식과 전통 소재에 더욱 집중했고, 이러한 노력은 2004년 노동부의 칠기 분야 명장 지정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는 명장 지정 이후에도, 전승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 한국옻칠공예대전 금상 수상, 대한민국명장회 최우수 명장 위촉 등으로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고 있다.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냈다며 주는 상 같았어요. 그간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습니다.” 그는 명장 제도가 기능인들의 사기를 살리고, 상공인들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칠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나전칠기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자개 장식에 관한 것. 나전칠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자개 장식이다. 이 자개 장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구는 높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일까? 임 명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칠기의 생명은 곱고 투명하게 옻칠을 하는 실력과 옻칠의 재료인 칠액에 있어요. 칠액은 옻나무의 수액을 정제해서 만드는데 1Kg에 70만원을 호가하기도 해요. 그래서 예전엔 저렴한 동남아에서 캐슈(cashews) 나무 수액으로 만든 칠액을 쓰는 곳도 있었어요. 사실 자개가 가구 표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넓으면 넓을수록 만드는 과정은 쉬워요. 또 자개 재료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요. 그래서 자개는 약간의 장식으로만 쓰인 옻칠 가구가 훨씬 귀하고 비쌉니다.” 또 옻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조금 다른 방법으로 진행된다. 말리는 과정이 그렇다. 칠액을 바르고 말리고 바르고 말리는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어야 제대로 된 옻칠의 광택이 살아난다. 투명 옻칠은 이 과정을 스무 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보통 말린다는 표현은 수분이 날아가 표면이 단단하게 굳는 것을 의미하지만, 옻칠은 물로 말린다. 습도가 80% 이상 되는 곳에서 표면을 굳혀야 특유의 투명함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업실의 건조장 바닥은 늘 흥건하다. 이렇게 천연재료로 만들어진 칠기는 모양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훌륭한 생활 도구가 된다. 환경호르몬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아토피 같은 질환을 예방하는 데도 좋은 친환경 재료로 알려져 있다. 칠기 가구가 아기용 옷장으로 입소문이 난 것도 이 때문이다. 잘 썩지도 않고 불도 잘 붙지 않는다. 후진 양성을 위한 노력 임충휴 명장은 최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옻칠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보통의 장인이라면 옻칠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 마음먹은 제자들 중에서 후계자를 골라 기술을 전수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업계의 가장 큰 문제는 일할 장인이 없다는 것이에요. 특히 자개장 같은 건 기능인이 부족해서 웬만한 곳에서는 만들 엄두도 못 내요. 50세 정도는 이제 현장에서 젊은 축에 듭니다. 예전엔 옻칠조합 회원이 100명도 더 됐는데, 이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가 돼서 조합도 없어졌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후진 양성이다. 군포시에 위치한 서울남부기술교육원 옻칠나전학과에서 취업이나 취미를 목적으로 모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술을 가르친 지 2년이 됐다. 이제 그를 사사한 학생이 100명이 넘는다. 장인에게 기술은 밥줄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는 교육원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전통공예를 현대적 디자인에 접목하고 싶어도 매일 비슷한 것만 만들어온 사람들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칠기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한데 말이죠. 그런데 교육원에서 학생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제가 배우는 기분이에요. 실제로 미술 전공자들도 많이 있고요. 이제 교육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일은 제 인생에서 보람 있는 일 중 하나가 됐어요.”
- 2017-04-03 1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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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기 일본 상품
- 단체 관광은 중간에 쇼핑 시간을 많이 준다. 여행사나 가이드 팁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손님들이 요구하기도 한다. 쇼핑 재미도 여행의 큰 재미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잘 모르지만, 여성들은 입소문으로 들은 것이 많다. 주변에서 일본 간다고 하면 사다 달라고 부탁 받은 것도 있다. 그리고 가이드의 추천에 쉽게 따라간다. 일단 일본은 장수국가이다. 노벨상을 탄 학자도 24명이나 된다. 경제분야를 빼고는 기초과학분야에서 거의 수상했다. 2차 대전 때 생체실험을 통해 많은 의학적 자료를 쌓았다. 건강을 가장 중요시 하는 민족이다. 그러니 그들이 먹는 음식이나 요령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일본은 요즘 농축의학시대라고 한다. 고농도의 약제를 만들고 소화 잘 되게 만드는 것이 기술이란다. 서양인의 금발이 부러워 세계 최초로 염색약을 만들었다고 한다. 화장품 회사로 유명한 시셰이도는 미백크림으로 떼돈을 벌었다는 것이다. 지금은 특허 기간인 60년이 지나 다른 회사에서도 비슷한 제품을 만든다고 한다. 가격이 비싼 것이 함량이 많은 것이라며 추천한다. 가이드가 추천하는 건강보조식품으로 ‘나토키나제’라는 것이 있다. 콜레스테롤을 낮추고 피를 묽게 한다는 것이다. 매일 마시는 커피 값 수준이라는데 일 년 치가 80만원이다.‘보행왕’이라고도 있다. 관절에 좋다는데 20만원 수준이다. 식물성 농축단백질은 엽록소는 높이고 나트륨은 낮췄다는데 아이들 성장에 좋다지만, 역시 20만원 수준이다. 발바닥 파스도 인기 상품인데 우리나라 파스도 발바닥에 붙이면 효과는 비슷하단다. 동전 파스라고 또한 인기인데 피부가 약한 사람은 쓰지 말라고 한다. 8만 원 대로 오래 쓰면 간까지 손상이 올 수 있다는 것이다. 게르마늄 온천석으로 팔찌와 목걸이를 만들어 파는데 근육 뭉친데와 통증이 잇는데 효과가 있다고 한다. 목걸이 80만원, 팔찌 40만원 수준이다. 수소생성기라고 엉성하게 생긴 물병같은 것이 50만원 수준이다 가장 저렴한 것이 홋카이도가 말을 많이 사육해서 말기름인 마유가 8만원, 설사를 막아 준다는 정로환이 2만 원 대이다. 우리나라 제품 정관장이 20만 원대로 대우를 받고 있었다. 남산이라는 사케는 고급 위스키 수준이다. 로이스 쵸코렛 등 이미 서울에 들어와 있는 상품들이 많은데 너무 달아서 입맛에 안 맞는데 여자들은 좋아한다. 남자들은 이런데 가면 죽을 맛이다. 아내들은 혈안이 되어 이것저것 집어 드는데 합산해보면 엄청나다. 지불은 남편 몫인 것이다. 나처럼 혼자인 사람은 살 것도 없고 혼자 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도 고역이다. ‘북해도 한정품’이라는 것이 있다. 북해도 외에서는 살 수 없다는 상술이다. 우리나라 천안 호두과자는 전국 어디서나 살 수 있는데 일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2017-02-2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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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 투어] 시니어들의 ‘한 달 별장 만들기’ 좋은 도시들❷
- 풍차의 고장, 네덜란드에서도 옛 모습 그대로의 ‘전통 풍차’ 마을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킨더다이크-엘샤우트(Kinderdijk-Elshout)는 ‘풍차’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곳이다. 풍차마을은 캘린더 속 그림처럼 아름답다. 또한 세계에서 손꼽히는 장수마을이기도 하다. 근교에 위치한 로테르담에서는 영화제가 한창이다. 이곳에서 건강도 다지고 문화 충전도 하면 인생이 훨씬 다이내믹해지지 않을까? 수줍은 처녀의 모습 같은 풍차마을 로테르담(Rotterdam)은 게스트하우스로 이용되고 있는 큐브하우스, 펜슬하우스 그리고 거대 쇼핑몰 마크트할레 등 온 도시가 건축학도의 실험실을 연상케 한다. 로테르담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 공습으로 처참하게 파괴되었다가 재건되면서 실험적 건축물들이 도시 전체를 장식하게 됐다. 한국의 리움 미술관과 서울대 미술관을 건축한 렘 콜하스(1944년~)가 이 도시 출신이다. 특히 박물관 단지는 창의적인 예술작품들 말고도 200년이 넘는 나무숲과 운하가 어우러져 마치 북유럽의 자연친화적 도시 같은 분위기를 드러낸다. 숙소지기가 알려준 네덜란드 전통 음식점에서 스탬폿(stamppot)을 먹는다. 식당에서 만난 손님은 “스탬폿은 대부분 집에서 해먹는 음식이라서 일부러 식당에서 사먹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는 풍차마을을 가겠다는 필자에게 킨더다이크와 잔세스칸스(Zaanse Schans)는 다른 곳이라고 일러준다. 지하철과 버스를 타고 가서 만난 킨더다이크는 로테르담에서 고작 16km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데 그 느낌은 확연히 다르다. 갈대밭에 숨어 있는 몇 채의 건물들, 운하와 그 위에 떠 있는 유람선 그리고 운하를 따라 띄엄띄엄 떨어져 있는 시골의 풍차마을은 도심과는 오랫동안 담을 쌓고 살아온 듯하다. 마치 수줍은 처녀의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저지대의 애환을 보듬은 1700년대 풍차들 운하를 사이에 두고 사람 키보다 더 웃자란 갈대밭 ‘풍차 길’을 따라 천천히 걷는다. 눈으로는 19개의 전통 풍차 수를 헤아리고 있다. 그저 카메라 셔터만 누르면 달력 사진이 될 정도로 아름답다. 썰렁한 겨울 풍경조차 아름다운 킨더다이크의 풍차마을은 시간의 빛에 따라 그 느낌도 다르다. 사람들은 많지 않다. 눈으로는 아름다운 풍차가 가득 담기지만 이 마을의 애환이 담긴 현실도 있다. ‘킨더다이크’라는 지명은 ‘어린이의 둑’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되었다. 이 지역은 알블라서바르드(Alblasserwaard) 해안의 해수면보다 6m나 낮아 항상 거센 밀물과 썰물의 피해를 입어야 했다. 1421년, 일명 ‘성 엘리자베스’라는 대홍수가 발생했는데 요람에 쌓여 있던 어린아이가 물 위를 둥둥 떠다니다 둑 위에 얹혔다고 한다. 풍차는 네덜란드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도구였다. 배수용으로 만들어진 1700년대의 풍차들은 200년 넘게 해안 간척지의 물을 빼내 주변 지역에 홍수가 나지 않도록 해줬다. 이 마을에는 레크 강과 왈 강 사이의 평지 위로 오래된 8각 원추형의 풍차들이 이어져 있는데 그중 한 곳은 풍차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매표원은 이렇게 말한다. “다른 풍차 안에서 지금도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저 아름답게만 보이는 풍차에는 이 지역 주민들의 삶의 무게가 아직도 묵중하게 실려 있다. 풍차 안으로 들어서면 팽팽 돌아가는 방향기에 따라 톱니바퀴처럼 돌고 있는 거대한 나무 기둥이 있는데, 실내 공간을 절반 이상이나 차지하고 있어 생활공간이 비좁아 보인다. 또 풍차 소리가 너무 커 기찻길 옆 오막살이가 연상된다. 지독한 악조건 속에 마련된 주거공간이다. 좁은 공간을 활용한 가파른 계단은 위층으로 이어진다. 층의 여백마다에는 가족들의 공간이 마련돼 있다. 부엌, 화덕, 거실, 부부의 침실, 아이들의 좁은 방들이 절묘하게 보일 정도로 옹기종기 배치돼 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수년, 수십 년간 풍차 집에서 생활했을 주민들. 지금은 관광지로 거듭났지만 과거 주민들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을까 짐작이 된다. 장수비결? 가족 간의 사랑이 최고야! 야모리 일본 교토대 의대 교수와 세계보건기구(WHO)의 협력으로 10년간 세계 25개국 57개 장수마을을 대상으로 연구가 진행됐는데, 그 연구마을 중 한 곳이 킨더다이크다. 관광안내소 지킴이에게 “이 지역이 장수마을로 알려져 있는데 장수비결이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그러자 “장수 비결은 없다. 그냥 자연에 순응하면서 살았다”고 말한다. 특별한 비결은 없는지도 모른다. 만약 비결이 있다면 열악한 풍차 집에서도 알콩달콩 지낸 가족 간의 사랑이 아니었을까? 차가운 바람을 피해 로테르담 에라스무스 다리 근처로 가 마스 강으로 지는 해를 바라본다. 그날따라 마스 강을 붉게 물들이며 떨어지는 해가 너무 아름다워 눈물을 글썽였다. “나 죽으면 이곳에 뼛가루를 뿌릴까?” 그날 서글픈 내 마음을 알기나 했을까? 우연히 만난 헬스 트레이너 에밀레가 날 웃게 만들었다. 그는 요새도 내게 묻는다. “리, 언제 다시 올 거니?” 스쳐 지나간 인연에게도 따뜻한 마음을 보여주는 더치(duch)인들. 그들이 사는 도시가 그리워지는 날이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로테르담에서 전철이나 기차를 타고 주드플렌(Zuidplein) 역(D, E라인)에서 하차 후 154번 버스를 타면 된다. 45분 정도 소요된다. 로테르담 에라스무스 다리 옆 스피도 선착장에서 배를 타도 된다. 로테르담 현지 교통 정보 시내 일일권 교통카드를 사면 편리하다. 지하철, 버스 등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로테르담 시내버스에는 승무원이 있다. 필히 교통카드를 구입해야 한다. 장기 체류 시에는 지하철역에서 일일권을 사면 된다. 별미 음식 네덜란드인들은 청어 요리인 더치헤링과 발효식품인 하우다 치즈, 요구르트 등을 자주 먹는다. 이러한 식습관이 장수 비결이 됐다. 요즘은 삼발 울렉(인도네시아 고추장)이 건강식으로 인기다. 네덜란드는 팁 문화가 없기 때문에 식당에서 팁을 주지 않아도 된다. 숙박 정보 킨더다이크에는 숙박할 만한 곳이 마땅치 않다. 로테르담에 싼 값의 숙박지가 아주 많다. 한 달 여행 포인트 로테르담에서 머물면서 주변을 돌아보는 것이 좋다. 거대 쇼핑몰 마크트할레에서는 다양한 식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2017년 제46회 로테르담 국제영화제(1월 25일~2월 5일, iffr.com)도 펼쳐진다. ‘조선’에서 14년간 억류생활을 했던 하멜(1630~1692)의 고향인 호르큄(Gorcum) 시도 멀지 않다. 현재 우리나라와 활발한 문화적 교류를 하고 있다. 헤이그도 30분이면 닿는다. 단기 숙소 렌트 방법 유럽에서는 가정집 등을 단기 렌트하는 업체들이 일반화되어 있다. 에어비앤비가 유명하다. 숏스테이그룹(shortstaygroup.com)은 네덜란드, 파리, 바르셀로나의 숙박지를 전문으로 제공한다. 로테르담 시니어 여행 포인트 암스테르담보다 물가가 싸다. 시니어는 대중교통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지하철, 국철 등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어 다리가 불편한 사람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다.
- 2017-02-03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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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댄스가 대중화된 역사적 배경
- 춤을 무대 공연으로만 생각해 대중은 무대 위의 댄서가 춤추는 것을 바라만 보던 시대가 있었다. 어릴 때부터 전문적인 교육을 받아야 할 수 있는 발레나 아크로 바틱 등은 일반인이 흉내 낼 수없는 재주였다. 댄스의 역사에서 버논 캐슬 부부의 공로를 크게 봐야 하는 이유는 바로 춤을 대중화시킨 사람이기 때문이다.이들 부부는 20세기 초 자연가로운동을 주창하며 춤은 거리를 걷듯 일반인들도 쉽게 출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기초해 영국이 전 세계 댄스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나라마다 다르고 심지어 같은 나라에서도 춤이 달라 불편했던 것을 통일시키는 작업을 한 것이다. 춤을 일부 전문가만 추는 것이 아니라 일반인들도 쉽게 배우고 즐길 수 있게 한 것이다. 100년 전 일이다. 이런 정리는 왈츠, 탱고, 폭스트로트 같은 볼룸댄스가 먼저 진행됐고 이후 라틴댄스도 같은 방식으로 체계화됐다. 덕분에 댄스가 댄스스포츠로 발전해 오늘날 생활체육으로도 즐길 수 있게 됐다. 이런 작업이 진행된 것은 당시 사회 전반의 분위기 때문이었다. 18세기 영국에서 산업혁명이 일어나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던 시기였다. 제조업이 발달하자 농촌 인구가 줄어들었고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리고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모든 것이 실용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사고도 팽배해졌다. 예를 들면 긴 드레스는 일하는데 비효율적이라 점차 편한 옷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 즈음 영국에서는 여성들의 참정권 요구가 있었다. 일부 돈 있는 남자들에게만 있던 것을 여성들도 권리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요구는 비록 30세 이상의 여성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었지만, 1918년 드디어 받아들여졌다. 남성과 동등한 참정권은 10년 후인 1928년에 이루어졌다. 20세기 초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해 4년간 이어졌다. 전쟁 통에도 사치보다는 실용적인 의상으로의 변화가 요구되었다. 산업 현장에서는 전쟁으로 부족한 일손을 여성들이 담당했고, 전쟁터에서는 직접 탄약을 나르고 간호를 하는 등 바빴다. 해리 폭스라는 사람은 이 무렵 폭스트로트라는 춤을 만들었다. 이때 여성들 드레스 밑단이 1인치 올라가며 비로소 발목이 보이게 됐다. 이전까지 여성의 의상은 발목을 가리는 것이 관습이었다. 초기 발레는 긴 드레스를 입고 췄다. 그러다가 의상이 점점 짧아졌고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클래식 발레에서 보다 자유로운 다리 동작을 위해 드레스가 무릎 위로 올라가는 튀튀가 나오게 됐다. 1920년에는 샤넬라인이 등장했다. 여성의 드레스 밑단이 무릎 아래까지 올라온 것이다. 이는 사람들에게 미니스커트에 못지않은 충격을 줬고 거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1900년 초 이사도라 덩컨이 유럽 무대에서 현대 무용을 펼친 것도 비슷한 시기의 움직임이다. 이전까지 발레는 발레복과 토슈즈가 필수였는데 이사도라 덩컨이 맨발 혹은 헐렁한 옷을 입고 춤을 춰서 그런 형식마저 무너뜨린 것이다. 우리나라도 해방 후 한국전쟁 때 서양 춤이 미군에 의해 본격적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당시 우리나라 여성들의 춤 의상은 긴 치마였다. 하지만 춤추는 데 방해가 되었고 불편했다. 긴 치마라도 관계없이 우리 식으로 발전시킨 춤이 바로 ‘지르박’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지터벅’이다.
- 2016-11-1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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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연극 연출가 김정숙, 연극은 결국 사랑이다!
- 연극 연출가 김정숙(金貞淑·56)에 대해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들었다. “그녀를 존경해”, “멋있어”, “사랑해”. ‘김정숙’이란 이름이 거론되면 하나같이 천사를 만난 경험담(?)을 쏟아내곤 했다. 한 번쯤 만날 수도 있었을 텐데 기회가 없었다. 새뮤얼 베케트의 연극 에서 끝까지 기다려도 오지 않는 고도씨처럼. 만나보자. 예전 같으면 대한늬우스에 나올 만한 국위선양(?)도 하고 돌아왔다. 그럼 한번 소리 소문 좀 내볼까? 김정숙 연출가는 ‘극단 모시는 사람들’(이하 모들)의 대표로 28년째 장기집권(?) 중이다. 스물두 살에 극단 에저또에서 연극을 시작해 스물아홉에 극단 모들을 창단했다. “운명이죠. 고등학교 때 연극을 보고 나서 ‘저 무대에서 평생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극단에 들어간 첫날, 연습실 바닥을 붙잡고 ‘아! 이제 도착했다. 여기서 절대로 떠나지 않겠어’라고 서원처럼 의식을 치르듯 속으로 말했죠. 제자리에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었어요.” 그 후 단 한 번의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연극만을 바라보고 살았다. 연극을 뺀 삶을 살아본 적이 없다는 그녀는 24시간이 늘 아깝고 모자라다. 그런데도 인터뷰 날 자정 전에 책상에서 일어난 일을 제일 잘한 일이라고 스스로를 칭찬하며 뿌듯해한다. “제가 몸 생각하지 않고 연극 생각만 하니까요. 어쩌다 12시가 넘어버리면 4시까지 잠을 못 자더라고요. 그런 날은 다음 날 스케줄에 무리가 있으니까 될 수 있으면 진짜 그러지 말자 해요.” 그녀의 또 다른 이름 ‘극단 모시는 사람들’ 김정숙 연출가의 분신과도 같은 극단 모들은 창단 이후 대중성과 작품성을 인정받으며 관객들에게 꾸준한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연극을 굳이 몰라도 아이부터 어른까지 즐길 수 있는 다양한 레퍼토리를 가지고 있다. , , , 등이 모들의 대표작. 특히 은 토종 창작 뮤지컬 중 최고라는 호평을 들으며 각종 시상식을 휩쓸었다. 뮤지컬로 성공적인 삶의 반열에 오른 것이 아닌가 생각했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브로드웨이 식의 뮤지컬을 꿈꾼 건 아니었어요. 나는 음악의 비중이 크고 내용에 영향을 주는 소리극을 하고 싶었어요. 당시 뮤지컬이라는 장르가 나타나서 편리하게 이용했던 것뿐이죠. 그런데 마치 우리가 브로드웨이를 지향해서 가야 할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내가 원했던 소리극의 형태가 아니어서 음악에 대한 마음이 많이 닫혔어요.” 그래서인지 최근 들어 모들의 창작 뮤지컬을 보기 어렵다. 화려함 대신 소박한 사람 이야기, 고전 속 주변 인물들에 주목하는 연극이 주류를 이룬다. 행복한 연극을 아는 예쁜 사람 모들은 지난 2003년부터 과천시민회관 상주 공연단체로 입주해 있다. 시민극장을 열어 시민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고 있고, 모들의 대표 연극인 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최 프로그램 ‘신나는예술여행’에 선정돼 전국 8개 교도소를 돌며 공연하고 있다. “저는 대학로나 대극장 공연에 연연해하지 않아요. 그보다는 시골학교나 교도소에 가서 평생 연극을 본 적 없는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것이 행복해요. 얼마나 기쁜지 제 마음에서 사랑의 샘이 퐁퐁퐁 솟는 거 같아요. 진짜로요(웃음). 내가 가지고 있는 레퍼토리, 내 보물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최근 2~3년 동안 노력을 많이 했어요. 예를 들어 ‘우리 고향 초등학교에 연극 보여주기’ 이런 걸 하고 싶어 해요. 공연하는 데 300만원이 들면 출신 동창회에 도움을 청하고, 3만원씩 100명이 내주시면 고향 초등학교 어린아이들에게 공연을 보여줄 수 있다고요. 화려하게 신문에 오르내리는 그런 일 말고 진짜 일을 하고 싶어요.” 에든버러를 넘어 케냐까지 한국 연극을 알리다 지난 8월, 김정숙 연출가는 모들 단원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이하 에든버러 프린지) 현장을 누비고 다녔다. 세계 공연예술 축제의 백미인 에든버러축제는 공연 예술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는 꿈의 무대. 축제기간이 되면 전 세계에서 7000여 단체, 3만여 명의 공연자와 관객이 몰려와 도시를 가득 메운다. 에든버러 방문은 이번이 다섯 번째. 좋은 공연이건 나쁜 공연이건 집중해서 볼 수 있는 기회라 김정숙 연출가는 에든버러 프린지를 사랑한다. “2008년에 처음 에든버러 프린지에 이라는 작품을 가지고 갔어요. 당시 단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연극을 해왔는데 뭐했지? 내가 명예를 얻었나, 물질을 얻었나? 나는 연극 안에서 얼마나 행복하지? 하는 말들이 들려오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세계 연극 속에서 우리를 한번 비춰보자. 놓아보자’라는 심정으로 그곳을 가게 됐어요. 처음인데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좋아해줬어요. 매진에 객석 점유율 80%를 넘었고요. 그동안 우물 안 개구리였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순식간에 입소문을 타더니 사람들이 티켓 박스 앞에 줄을 섰습니다. 그때 ‘아! 우리가 제대로 가고 있구나’ 하는 확인을 서로 하게 됐죠.” 올해 모들은 어린이극 과 그리고 위안부 이야기를 다룬 를 가지고 에든버러를 다시 찾았다. 이번 에든버러 프린지 공연은 김정숙 연출가의 치밀한(?) 계산으로 진행됐다. “케냐에서 이 초청을 받았어요. 그래서 예술경영지원센터에 항공권을 지원받을 수 있는지 문의했더니 두 곳은 가야 받을 수 있다더군요. 그래서 에든버러 프린지와 케냐 공연을 엮은 거죠. 그런데 공연만 가지고 가는 게 아까웠어요. 케냐는 처음이지만 에든버러는 벌써 세 번째였거든요. 그래서 후배가 연출한 과 를 에든버러에서 공연해보자 했습니다. 4월까지 필요한 서류를 내야 했는데 그때 는 정말 시놉시스와 사진 한 장밖에 없었어요.” 에든버러축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만들어진 축제다. 전쟁이 끝나서 이런 페스티벌도 생겼지만 우리에게는 아직 끝나지 않은 상처, 바로 위안부 문제가 남아 있었다. 사진 한 장과 시놉시스밖에 없었지만 에든버러 프린지 극장측은 흔쾌히 모들에게 공연장 문을 열어주었다. “이전 축제에 참가했을 때 작품으로도 인정을 받았지만 저희가 거리쇼라든지 홍보 면에서 기여를 많이 했어요. 극장에 우리가 바로 그 팀인데 를 공연할 수 있는 무대를 줄 수 있냐고 물었죠. 바로 OK 하더군요. 그 한마디로 정말 에든버러에 가게 됐어요.” 딱 시놉시스 한 장이었다. 공연에 관한 정보가 적어 일반인 대상의 홍보가 쉽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관객이 를 찾아왔다. “가 위안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키워드를 가지고 있잖아요. 하와이와 뉴질랜드에서 이 공연을 보러 오신 분이 계시더라고요. 80 노구를 이끌고 2차 세계대전을 실제 겪으신 분들이 오신 거예요. 하와이에서 오신 분은 이곳에서 볼 첫 작품으로 를 선택했다고 했어요. 4월에 공연 예매를 미리 해놨다면서 수첩까지 꺼내 보여줬어요. 정말 고마웠습니다.” 김정숙 연출가는 다섯 번의 에든버러 페스티벌 참가 중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인 위안부 할머니 이야기를 무대에 올린 것이 소중했다고 말한다. 모들 단원과 김정숙 연출가는 낮에는 , 저녁에는 를 무대에 올리고, 밤에는 다른 팀의 공연을 보러 열심히 뛰어다녔다. 케냐에서 기립박수 받은 에든버러에서의 한 달 일정을 마치고 케냐 나이로비로 떠났다. NGO의 천국 케냐에는 NGO 활동가와 선교사 자녀들이 다니는 70년 된 국제 학교 로슬린 아카데미(Rosslyn Academy)가 있다. 이곳에서 공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700여 명의 학생이 관객이었는데 이런 공연을 자주 접하는 아이들이 아니었어요. 물론 영어로 공연을 했지만 ‘어떻게 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지?’라고 느낄 정도로 완벽한 시점에 쿵, 짝을 맞추는 겁니다. 공연을 완벽하게 만들어준 최고의 관객을 케냐에서 만났어요.” 게다가 학생들의 자율적인 행동이 몹시 감동스러웠다. “교정 한 곳에서 쿠키를 팔고 있었어요. 먼 나라에서 공연 팀이 왔는데 도움을 주고 싶다면서요. 그런 기획을 어린이들이 했다는 말이죠. 피부색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전 세계 아이들이 모여 편견 없이 대화를 할 수 있는 학교였어요. 에든버러에서는 뛰어다니고 정신없었다면 케냐에서는 큰 위로를 받고 돌아왔습니다.” 관록이 묻어나는 시니어 배우들 모시겠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김정숙 연출가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공연(11.25~26 과천시민회관 소공연장)을 준비 중이고 교정시설 공연도 다녀야 한다. 과천 시민과 함께하는 연극 준비에도 여념이 없다. 시민극장에 시니어 층이 많다는 얘기에 시니어의 연극 참여에 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다. “시민극장에 60대 이상의 나이 드신 분들이 많아요. 배우 중에 저와 어렸을 때 같이 연극하던 선배가 오셨어요. 연극을 하다가 도중에 그만두신 분인데 은퇴하고 나서야 돌아오신 거죠. 오디션 때 너무 멋있었어요. 인생이라는 공부를 열심히 하셔서 이제 진짜 배우가 될 거 같아요. 시니어들은 인생을 다 겪으신 분들이라 어떤 이야기든 무대에서 제대로 표현하실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그분들이 무대로 돌아온다면 100% 환영하고 지원할 겁니다. 잘하실 수 있도록 적극 도와드릴 거예요. 내년에 무대에 올릴 작품에는 등장인물과 같은 나이의 배우들을 참여시킬 계획입니다.” 시간이 흘러 연극 일을 안 하게 되면 무엇을 할 건지 물어봤다. 돌아온 답변이 누룽지를 눌러 파는 누룽지 할머니가 되고 싶단다. 누룽지 한 컵에 1000원, 한 평짜리 가게를 얻어서 누룽지를 팔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마냥 철없고(?) 청순한 소녀 같다. 미래의 모습을 이야기하는데 마치 연극 한 편을 보는 느낌이다. 들을수록 맛있고 찰지다. 영락없는 이야기꾼. 아직은 우리 연극을 위해 할 일이 많아 보인다. 마지막으로 연극이 뭐냐고 물었다. 거침없이 사랑이라고 말했다. “딱 하나인 거 같아요. 어쨌든 작업 안에서 마지막 선택은 항상 사랑이었어요. 일을 하다 보면 나한테 어떤 이득이 될까를 고민하잖아요. 가끔은 흔들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사랑을 선택했어요. 연극을 향한 사랑. ‘세상에 어떤 것도 사랑을 이기는 것은 없다’는 사실, 제가 늘 생각하는 것입니다.” 에든버러축제(Edinburgh Festival)란? 에든버러축제는 1947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시작된 공연 축제다.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들의 정신을 치유하려고 만들어진 이 축제는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Edinburgh International Festival)와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Edinburgh fringe Festival)로 나뉜다. 인터내셔널의 경우 100여 개의 공연을 전 세계에서 엄선하기 때문에 초청되는 것 자체가 영광. 프린지는 1947년 채택되지 못한 공연 팀이 축제가 열리는 주변에서 공연한 것이 지금의 에든버러 프린지 축제로 정착됐다. 올해 ‘극단 모시는 사람들’을 비롯해 한국의 14개 공연 팀이 참여했다. 2011년 에든버러 인터내셔널 축제에 극단 목화의 가 최초로 초청됐으며 ‘헤럴드 에인절스’ 상을 수상했다. 김정숙 극단 모시는 사람들 대표 1982년 극단 에저또 입단 1984년 연출 데뷔 1989년 5월 극단 모시는 사람들 창단 주요 수상경력 -뮤지컬 스포츠조선 뮤지컬 희곡부문 대상, 1996 서울연극제 현대소나타상, 1996 백상예술상 대상, 작품상, 희곡상. 1996 희곡작가협회 올해의 작가상 수상, 2003 -연극 희곡협회 올해의 희곡작가상, 2003 대한민국 국회대상 올해의 연극상, 2011 대한민국 클린콘텐츠 국민운동본부 선정 클린콘텐츠상, 2015
- 2016-11-1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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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투어] 론 알프스의 동화 속 호수 마을 ‘안시’
- 프랑스 남동부, 론 강과 알프스가 합쳐진 지역을 ‘론 알프스(Rhone-Alpes)’라고 한다. 알프스 최고봉인 몽블랑(4807m)이 있고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접경지대다. 스위스 제네바와 이탈리아 토리노, 밀라노와 가깝다. 이 일원을 사부아(Savoie)라 일컫는데 안시(Annecy)는 오트 사부아(Haute-Savoie) 주의 중심 도시다. ‘안시’는 동화 속에서 꿈을 꾸는 듯한 마을이다. 글·사진 이신화(의 저자, www.sinhwada.com) 첫 방랑길에 오른 16세의 루소와 바랑부인이 만난 골목 프랑스 리옹에서 출발한 열차(ter)가 안시에 다다를 즈음, 종일 내리던 가을비는 서서히 멈추고 알프스 산맥에 걸친 구름은 빠르게 하늘로 퍼지고 있다. 안시 역에서 멈춘 기차는 더 이상 가지 않는다. 론 알프스를 기대고 사는 안시는 1860년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좁아진 티우(Thiou) 운하 사잇길에서 장 자크 루소 골목으로 접어든다. 생 피에르 성당(Cathe´drale Saint-Pierre) 옆 작은 마당에는 루소의 흉상이 놓여 있고 이런 문구가 있다. “Jean-Jacques Rousseau rencontrait Ici Madame de Warens(장 자크 루소가 여기에서 바랑 부인을 만났다).” 의 저자로 잘 알려진 루소(1712~1778)는 무작정 16세에 고향 스위스 제네바를 떠나 방랑길에 나선다. 그가 처음 도착한 도시가 안시였다. 그날 성당에서 하룻밤을 보낸 루소는 다음 날 운명의 여인 바랑 부인을 만난다. 그가 ‘엄마’라고 부르던 이 부인은 29세로 루소와는 13년 차이가 났다. 루소는 이리저리 방랑하다가 일이 잘 안 풀리면 바랑 부인을 찾아오던 그 관계는 13년간 이어진다. 바랑 부인은 루소의 후견인이자 연인, 스승이었다. 그의 암흑기나 다름 없던 청년기 추억을 남긴 곳이 안시였다. 티우 운하에서 만난 동화 속 올드 타운 루소 거리를 비껴 운하를 따라 이어지는 소로로 접어든다. 티우 강 구 시가지(Viellie ville) 속으로 이어지는 좁은 길에는 꽃으로 치장한 카페, 레스토랑이 이어진다. 12세기에 지은 중세풍의 건물과 작은 운하가 어우러진 골목은 마치 ‘그림엽서’ 같은 풍경이다. 주황색 석회암으로 지은 건물들 사이로 운하의 물결이 일렁거리면 시간이 멈춰 버린 듯, 내 마음까지 넋을 놓아 버린다. 운하 양쪽을 잇는 페리에르(Perriere) 다리 근처에는 12세기 초에 지어진 팔레 드 릴(Palais de L'lsle)이 있다. 안시를 소개하는 엽서에는 단골로 등장하는 대표적인 이미지다. 운하 한가운데 건축된 건물은 ‘섬의 궁전’이란 뜻이다. 제네바 공작의 거처였던 이곳은 이후 행정관청, 법원청사, 조폐국 등으로 사용되었다. 중세 시대와 2차 세계대전 때는 감옥으로도 쓰였다. 현재는 박물관으로 이용된다. 운하 끝,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헌신회가 보이면서 넓은 호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가을 깊은 호수에서 안시를 조망하다 둘레가 약 40km인 넓디넓은 안시 호수(Lac d’Annecy) 위 저 멀리 산정의 구름들이 하늘로 향한다. 안시 호수에 알프스 산의 반영이 비친다. 유람선은 정박한 채로 있고, 시뉴 섬(Ile des Cygnes)에도 가을색이 짙어지고 있다. 큰 정원을 끼고 에둘러 난 호숫길에는 프랑스의 의사이며 화학자인 클로드 루이 베르톨레(Claude Louis Berthollet, 1748~1822)의 동상이 있다. 그는 안시 근처의 탈루아르 몽맹(Talloires-Montmin) 태생이다. 또 바스(Vasse) 운하의 시작점에는 사랑의 다리(Pont des Amours)가 있다. 마을 언덕 위에는 12~16세기에 지어진 안시 성이 있다. 제네바의 영주들과 느무르 공작들의 거주지였던 이 건물은 1953년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어, 현대미술과 종교미술의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인적 없는 골목을 따라 걸어 오르면 안시의 가장 높은 곳에 다다른다. 그곳에 성모 방문 수녀회(Basilique de la Visitation) 성당이 있다. 작고 조용하며 고풍스러운 안시 가옥의 지붕들을 조망하면서 사르르 상념에 빠져든다. ‘난 지금 그림책에 있는 프랑스 동화마을에 있는 거야’라고 말이다. Travel Tip! 현지 교통편 인근 도시 리옹에서 열차를 이용하면 2시간 정도 소요 된다. 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안시행 정기 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음식과 숙박 관광도시인 만큼 음식들이 맛있다. 퐁듀 등 사부아 지역의 전통 요리(사부아야르드, Savoyarde)가 특색이다. 일요일에는 노천시장이 열린다. 고급 휴양도시여서 명성 있는 국제 호텔은 물론 작은 가족적인 호텔들이 있다. 기타 정보가을에는 안시 이탈리아 영화 축제(10월), 사과와 꿀 페스티벌(11월) 등이 열린다. 겨울에는 알프스 산맥 능선에서 스키를 즐기려는 관광객들이 모여든다. 안시의 스키 리조트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명소로, 동계스포츠의 메카이도 하다. 오트 사부아주 웹사이트(www.haute-savoie.gouv.fr)
- 2016-10-10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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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보 같은 ‘위대한 개츠비’
- 필자는 영화광이다. 어릴 때부터 엄마가 영화관에 가실 때 꼭 필자를 데리고 다녀서일까? 영화로 모르는 남의 인생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영화라면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지만 요즘 유행하는 좀비나 총질로 때려 부스는 건 별로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필자에겐 요즘은 영화도 영화배우도 다 예전만 못하다는 생각이다. 케이블방송 채널을 돌리다 보면 심심치 않게 예전에 즐겼던 명화를 만날 수 있어 반갑다. 오늘은 ‘위대한 개츠비’가 방영되고 있었는데 필자가 젊었을 때 대한극장의 와이드 화면으로 보았던 그 작품은 아니었다. 타이타닉으로 유명해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주인공이니 볼만은 하겠지만, 그 옛날 ‘로버트 레드포드’와 ‘미아 패로’ 주연의 작품에 비할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에도 화면이 매우 화려하고 배우들의 의상이나 머리에 쓴 모자가 뉴요커들의 패션을 보여줘 눈길을 끌었었는데 새로 만들어진 작품은 화려함의 극치가 더한 것 같다. 저택도 멋지고 매일 열리는 파티장면은 눈을 뗄 수 없을 정도였다. 예전 영화에는 멋진 미남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와 그리 미인이라 할 수는 없어도 묘한 매력을 가진 ‘미아 패로’가 주인공으로 흥행도 잘 되었던 영화이다. 필자는 ‘위대한 개츠비’ 영화가 좋기도 하고 싫기도 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도 필자는 신데렐라가 되는 여자 이야기나 한 여자를 사랑해 자신을 돌보지 않고 비극으로 치닫는 남자 이야기를 다룬 스토리를 좋아하지 않았다. 필자가 그런 행운을 얻지 못해서일지 그저 자신의 노력 없이 미모만으로 신분상승과 부를 거머쥐는 여자들을 질투했는지도 모르겠다. ‘위대한 개츠비’의 남자 주인공은 여자를 향한 바보스러울 정도의 순애보를 보여주기 때문에 가슴 아픈 한편 화가 나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무나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라 화려했던 영상과 실속 없이 순수한 사랑만을 갈구했던 한 남자 이야기로만 맴돌 뿐 자세한 내용은 생각나지 않았는데 새로 만들어진 작품을 보며 다시 한 번 감동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다 보고 난 후 남은 씁쓸한 기분은 예전과 똑같았다. 남자들은 왜 그리 바보 같을까? 여자들이 실속 차리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동안 사랑만을 선택해 비극에 빠지는 남자들이 안타깝고 싫다. 필자가 보기에 여자 하나를 잊지 못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는 ‘개츠비’에게 왜 위대하다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의문이 있었다. 자신을 버리고 부유한 남자와 결혼한 그런 여자를 잊지 못하고 자수성가 후 그녀를 되찾으려 했으니 좀 미련해 보이기도 하고 답답하지만 안쓰럽기도 했다. 그래도 1920년대 미국의 물질 만능이 판치는 시대에 사랑에 올인 하는 ‘개츠비’의 모습이 더는 찾아보기 힘든 순수한 사랑의 열정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위대하다고 표현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거의 속물이라 할 수 있는데 ‘데이지’에 대한 사랑만으로 환하게 빛났던 ‘개츠비’는 당시는 물론 요즘에도 찾아보기 힘든 낭만적인 사랑의 화신이라 할 수 있겠다. 영화는 ‘닉’ 이라는 남자의 회상으로 시작된다. ‘닉’은 1922년 뉴욕에 살면서 이웃의 호화스러운 별장 저택에 살고 있는 한 남자에게 관심을 갖게 된다.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후 옥스퍼드에서 공부한 적이 있다는 그 남자 ‘개츠비’는 어딘지 의문스럽고 신비스러운 존재로 다가온다. 베일에 싸인 이 남자는 주말마다 떠들썩한 파티를 열어 많은 손님을 초대한다. 파티에 초대받아 참석한 ‘닉’은 자신의 사촌 ‘데이지’와 ‘개츠비’가 5년 전 연인 사이였다는 걸 알게 된다. 게다가 이 남자가 이렇게 호화로운 파티를 여는 이유는 옛사랑 ‘데이지’가 와 주길 바라서라니 놀랍다. ‘데이지’는 가난한 데다 전쟁터에 나간 ‘개츠비’를 버리고 부자인 ‘톰’과 결혼한 속물 같은 여인이다. 부자로 돌아온 옛 연인을 보고 감정이 싹튼 ‘데이지’는 갈등을 한다. 데이지의 남편은 바람둥이로 주유소 직원의 아내를 정부로 두고 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데이지’는 안락한 생활을 버릴 수 없어 참는 중이었다. 파티에서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 ‘개츠비’는 ‘데이지’에게 같이 떠날 것을 제의하고 ‘데이지’는 고민을 하면서도 확실한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데이지’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개츠비’와 달리 ‘데이지’는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데이지’의 남편 때문에 오해를 사서 총을 맞고 죽어가는 ‘개츠비’를 망설임 없이 떠나는 그녀의 모습은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허망한 ‘개츠비’가 너무나도 불쌍했다. 한 여자에게 집착한 ‘개츠비’가 바보스러우면서도 쓸쓸해서 눈물이 나는 씁쓸한 느낌을 받았다. 아름답고 순수한 사랑도 좋지만 이렇게까지 한 여자에게 집착하고 올인 해서 비극적인 결말을 맞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화려하고 멋진 화면 속에 드리워진 슬픔을 느껴볼 수 있는 재미있는 영화인데 다른 분들은 어떤 느낌을 받을지 궁금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개츠비’의 순수한 열정을 높이 평가할 것인지 그럴만한 가치가 없는 데도 집착한 바보라는 평가를 할지는 보는 사람의 몫일 것이다.
- 2016-09-1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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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 전람회
- 파란 하늘빛으로 상큼한 9월이 시작된 첫 주말에 모처럼 아들, 며느리 손녀 손자와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샤갈, 달리, 뷔페 전시회에 다녀왔다. 초대권이 있어 나서긴 했지만 어린 손녀, 손자와 그림을 감상한다는 게 좀 무리일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있기는 했다. 꼭 보고 싶은 그림전시회인데 아기들이 소란을 피우거나 지루해하면 빨리 퇴장해야 할 테니 아쉬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예술의 전당 광장에서는 시간에 맞추어 분수 쇼도 펼쳐지고 있으니 꼭 그림 감상만 생각하지 않고 즐거운 나들이에 나섰다. 주말이어선지 관람객이 상당히 많았으며 미술 공부하는 학생들인 듯 단체로 온 사람도 꽤 보였다. 마르크 샤갈, 살바도르 달리, 베르나르 뷔페. 이들은 세계 현대 미술을 이끈 거장들이다. 이번 전시회에는 유화, 판화, 드로잉, 조각 작품으로 총 128점이 전시되었는데 수채물감과 비슷한 ‘과슈’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세 사람의 스타일은 각기 다르지만, 평생 독창적인 자신만의 세계를 유지하며 작품 활동을 쉬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 중 샤갈과 달리는 익히 들었던 이름이고 작품도 많이 보았지만, 솔직히 뷔페는 생소해서 작품을 보기 전에 미리 검색해 보았더니 프랑스에서 태어났고 생전에 상업적 성공으로 부유하게 살았지만, 말년에 파킨슨병을 앓다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사람이라 한다. 그런데 전시회 퇴장하는 문 앞에 감동한 세 거장에게 스티커 붙이는 판이 있는데 뷔페의 판에 가장 많은 사람이 스티커를 붙여서 그의 인기를 알 수 있었다. 전에 마크 로스코 전시회 때는 도슨트가 있어 설명을 들으며 작품을 감상했었지만 이번 전시회에 도슨트는 따로 없어 설명문을 열심히 봐야만 했다. “삶이 언젠가 끝나는 것이라면, 삶은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야 한다”고 말한 샤갈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러시아혁명 등 폭풍 같은 세계사를 온몸으로 맞으며 희망과 좌절을 동시에 겪었고 고난 속에 살면서도 자신의 예술세계만은 좌절의 수렁에 빠트리지 않고 꽃과 동물, 자유로운 연인들의 모습 등으로 오늘의 고통 속에서도 아름다운 미래를 그려냈다. “나에게 그림은 창문이다. 나는 그것을 통해 다른 세계로 날아간다.” 샤갈의 작품 속에서 만날 수 있는 풍경이 떠오르는 말이다.미친 사람 같다는 평을 들은 광기 어린 천재 화가 달리는 ‘나는 미치지 않았다’며 세간의 편견을 일축했다. 그가 매우 독특한 인물로 비친 것은 강렬한 콧수염과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표정, 그리고 기발한 아이디어와 예술적 성취에서 비롯되었는데 달리가 말했다. “나는 매일 내가 살바도르 달리라는 최고의 희열과 함께 눈을 뜬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묻는다. 오늘, 나 살바도르 달리는 어떤 놀라운 일을 할 거냐고.” 매우 자신감 넘치는 매력적인 작가로 느껴진다.베르나르 뷔페는 1950년대 당시 ‘모던아트의 모차르트’라는 평을 받으며 피카소의 대항마로 여겨졌다는데 그의 작품은 쓸쓸하고 메말랐으며 삭막하기 짝이 없다. ‘가감 없는 직시와 표현, 쓸데없는 화장으로 희망을 고문하지 말자’가 작품 속에 표현되어 있고 또한. 뷔페는 자신의 화풍에 대해 ‘즐거우려면 서커스에 가라. 미술이 세상을 즐겁게 할 필요는 없다.’ 고 한마디로 정리해 주었다고 한다.다섯 살 어린 손녀의 손을 잡고 감상을 시작했다. 달리의 유명한 늘어진 시계 작품을 본 우리 손녀가 “할머니, 저 시계가 잠자나 봐요, 아니면 녹아내리고 있나?”라고 한다. 매우 정확하고 귀여운 표현에 놀라며 우리 어린 손녀가 벌써 미술 보는 눈이 있는 건가? 팔불출이 발동해 웃음이 절로 나왔다. 아직은 작품을 만지려 하기도 해서 통제하느라 힘들었지만 이런 전시회나 공연에 자주 데리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손자가 지루한지 보채기 시작해 좀 일찍 퇴장했다. 아이스크림도 사 먹고 멋진 음악에 맞춰 피어오르는 분수의 화려한 모습에 아이들과 함께 매우 즐거웠다. 먼 훗날 손녀가 할머니와의 미술전시회 나들이를 즐거웠다고 기억해 준다면 행복할 것 같다.
- 2016-09-1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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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을 부탁해 PART5 ] "잘 자요~ 굿 낮!" 세계명사들이 낮잠을 즐기는 이유
- ‘낮잠 예찬’이라는 말을 들으면 마치 게으름뱅이들의 화려한 변명처럼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레오나르도 다빈치, 나폴레옹, 피카소, 에디슨, 처칠, 루스벨트 등 유명 인사들이 ‘낮잠꾸러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 지도자를 이끄는 원동력 ‘낮잠’ 수많은 낮잠 예찬론자 중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면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1874~1965) 전 영국 총리를 들 수 있다. 처칠은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원동력이 ‘낮잠’이라고 했을 만큼 낮잠의 효과를 믿었고, 힘든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도 매일 낮잠을 잔 덕분이라고 설명했다. 독일이 런던을 폭격할 당시에도 방공호에서 낮잠을 잤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어떤 상황에도 낮잠만큼은 빼먹지 않았다. 누군가 그에게 “낮잠을 자는 게 시간 낭비가 아니냐?”고 묻자, 처칠은 “낮에 잠을 잔다고 해서 일을 덜 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런 생각이야말로 상상이라고는 모르는 아둔함의 극치다”라며 “무슨 일이든 최소한 하루 반나절이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매일 점심과 저녁 사이에 낮잠을 즐겼던 그는 잠깐의 휴식을 통해 일에 열정을 발휘했고, 맑고 가벼운 정신 상태를 유지하며 전략을 짜고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낮잠의 효능에는 혈압 감소, 심혈관 기능 강화, 기억력 증진, 스트레스 해소, 면역력 상승, 심리적 안정 등이 있는데, 처칠은 이러한 긍정적인 효과들을 잘 활용했던 것이다. 처칠과 동시대를 살았던 미국 제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Franklin Roosevelt·1882~1945)도 점심 후엔 꼭 30분씩 낮잠을 즐겼다. 그는 “30분의 낮잠이 밤의 3시간과 같은 가치를 지닌다”고 말했는데, 실제로도 그 덕분에 매일 3시간씩 더 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루스벨트의 뒤를 이은 제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Harry Truman·1884~1972) 역시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눈을 붙였고, 중요한 연설을 앞뒀을 때는 15~30분 정도 잠을 잤다. 낮잠의 효과 중 하나는 집중력 향상이다. 트루먼의 경우 낮잠 덕분에 2시간이 넘는 연설이나 회의에도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작품에 창의력을 더하는 ‘낮잠’ 수면 과학 연구 단체 ‘슬립 포 석세스(Sleep for success)’에 따르면 낮잠은 우리의 뇌가 사용하지 않는 부분을 활성화해 창의력을 높여주는 데 효과적이다. 실제 낮잠을 자고 나면 창의성과 관련한 우뇌의 활동이 급격히 활발해진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야 하는 예술가 중에서도 낮잠을 즐긴 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천재 화가라 불렸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1881~1973)는 아주 짧은 순간 낮잠에 빠지곤 했다. 주로 침대 옆에 양철판을 놓은 채 붓을 손에 들고 낮잠을 즐겼는데, 그가 잠든 시간은 손에 들고 있던 붓이 양철판 위에 떨어지며 소리가 나기까지 단 몇 초에 불과했다고 한다. 짧지만 양질의 잠을 잤던 덕분에 다시 상쾌한 정신으로 작업에 몰두할 수 있었고 창의적인 작품들을 탄생시켰다. 으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프랑스 소설가 앙드레 지드(Andre Gide·1869~1951)도 낮잠 신봉자였다. 그는 매일 두 시간씩 때로는 그 이상 낮잠을 잤고 그런 자신의 일상에 매우 만족스러워했다고 한다. 그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프랑스 시인 샤를 페기(Charles Peguy·1973~1914)도 ‘수면은 신과 인간의 친구’라 표현하며 낮잠을 가까이했다. ◇ CEO의 성공비결 ‘낮잠’ 한때 베스트셀러였던 에는 ‘아침 1시간은 낮의 4시간이다’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다. 아침잠을 줄여 그 시간을 활용하는 게 일의 효율을 높이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책을 좀 더 살펴보면 아침형 인간이 되기 위한 방법으로 ‘낮잠의 도움을 받아라’라는 내용이 나온다. 아침형 인간으로 성공하려면 낮잠을 잘 자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효율적인 시간 관리가 핵심인 CEO 중에서도 자신의 성공 요인 중 하나로 ‘낮잠’을 꼽은 이들이 있다. 미국의 석유 갑부 존 록펠러(John Davison Rockefeller ·1839~1937)는 오후에는 자신의 사무실에 있는 긴 의자에 앉아 반드시 30분 정도 낮잠을 잤다고 한다. 코까지 골며 단잠에 빠지곤 했던 그는 낮잠 시간만큼은 대통령이 불러도 응하지 않았을 만큼 철저히 지켰다. 그 덕분일까? 존 록펠러는 98세까지 장수하며 그가 쌓은 부를 누리고 살았다. 글로벌 생활용품 기업 P&G(Procter & Gamble)의 회장 A. G. 래플리(A.G. Lafley·1947~)가 밝힌 성공 습관을 살펴보면 그에게도 낮잠이 성공의 열쇠로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시간 30분 집중 후 반드시 15분 휴식을 취한다’, ‘하루 15분 산책으로 즐거움을 느낀다’ 등 휴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그의 성공 요인 중에는 ‘30분의 여유가 있다면 낮잠에 투자한다’는 내용도 있다. CEO 컨설팅그룹의 강석진(1939~) 회장은 과거 GE 코리아 회장으로 활동하던 당시 “점심 후 10분의 규칙적인 낮잠은 원활한 하루 스케줄과 아이디어 생산을 도와준다”며 낮잠의 효과를 강조한 바 있다. 미국 신발브랜드 탐스 슈즈(TOMS shoes)의 CEO 블레이크 마이코스키(Blake Mycoskie·1976~)는 한 인터뷰에서 “어려운 결정을 내리는 최고의 방법은 모든 직원의 의견을 듣고 잠을 자고 난 후에 결정을 내리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참고도서 , ,
- 2016-09-05 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