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가 광복 72주년 보신각 타종 행사에 ‘군함도’로 강제징용 갔다 돌아온 생환자를 포함시켰다. 늦었지만 반가운 일이다.
72주년 광복절을 맞아 아내와 영화 군함도를 관람했다. 영화에서 본 강제징용도 역사적 사실만큼 끔찍했다. 2차 세계대전 말기 일제는 한 명의 조선인이라도 더 끌고 가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강제징용에 끌려간 조선인은 사람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군수품이고 소모품이었다. 군함도의 조선인들은 날이 채 밝기도 전에 굴속에 들어가 삽질을 시작했고 날이 저물어 삽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맞아가며 가혹한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흙탕물로 갈증을 달래며 삽질을 했고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쓰러지거나 죽어야만 실려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유승완 감독의 군함도는 거기까지였다. 영화는 조선인을 학대한 조선인에게 포커스가 맞춰졌고, 조선인을 배반하고 우롱하는 독립투사에게 맞춰졌다. 일제에 의한 핍박과 역사적 사실의 조명보다 조선인과 조선인이 싸우는 허리우드식 블록버스터가 되고 말았다. 일제 강점기에도 조선인에게 유독 악질적으로 대한 조선인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역사적 사실을 서술할 때는 신중해야 한다. 아무리 재미를 추구해야 하는 영화라 해도 악질적 조선인이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어떻게 이런 자학적 시나리오가 가능했을까. 젊은이들이 비슷한 시기에 개봉한 ‘덩케르크’에 더 높은 점수를 준 것도, 영화의 기저에 친일적 사고가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세간의 의혹도 바로 이 때문이다.
전쟁을 위해 강제징용으로 희생된 조선인은 부지기수였다. 한 철도 공사장에서는 철도 교각에 조선인 시체를 넣고 시멘트로 봉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숨이 붙어 있는 산사람까지 생매장을 했다니 공사장은 글자 그대로 조선인의 무덤이었다. 강제징용의 피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발생했다. 국회에 제출된 자료에 의하면, 1938년 4월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일제는 국내에서 6956곳의 작업장을 운영했으며, 그 기간 중에 강제 동원된 조선인은 648만 8000명이나 됐던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조선인구가 삼천만 명이 되지 못했으니 그 숫자만으로 강제징용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다시 군함도로 가보자. 1890년 하시마(군함도)섬을 인수한 미쓰비시는 전쟁이 한창이던 1940년부터 패할 때까지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에게 석탄을 채굴토록 했다. 전범기업 미쓰비시는 강제노역으로 캔 석탄을 이용해 전쟁 물자를 생산했고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군함도는 잊혀졌다. 강제징용된 조선인들은 군함도를 떠났고, 1974년 지옥 같았던 탄광이 석탄산업의 쇠락과 함께 마침내 폐쇄됐기 때문이다. 조선인의 강제징용 사실을 숨긴 일본은 2015년 7월 군함도 전체를 관광자원화 하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그동안 강제징용에 대한 보상은커녕 제대로 된 사과도 없었다. 일본의 인접 피해국에 대한 역사인식의 한계가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뿐이었다. 위안부 문제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마치 위안부 문제가 그랬던 것처럼 군함도에서 조선인 징용자들이 겪은 고통도 뒤늦게 생존자를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일제의 강제징용을 고발하고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조선인을 위로하기 위한 ‘강제징용 노동자상’이 서울 용산역 광장에 건립됐다. 그 건립 과정이나 목적이 위안부 소녀상을 빼닮았다. 그러나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군함도에서 희생된 조선인 강제징용 희생자들에 대한 일본의 사과는 없다. 아직 위안부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고 있는 일본 정부가 강제징용으로 희생된 조선인에 대해서 쉽게 사과할 것 같지도 않다.
영화 군함도를 관람한 후 일제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역사의식이 부족한 우리에게 일본이 과연 제대로 된 사과를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드는 것은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왜곡된 역사인식으로 인하여 영화가 손익분기점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는 보도가 씁쓸하다.
오드리 헵번의 영화나 사진을 보면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맑은 눈과 예쁜 미소를 지닐 수 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만인의 연인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그녀가 주연을 맡은 몇 편의 영화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대표작 에서는 멋진 파티 걸로, 싸구려 패스트푸드로 아침식사를 하면서도 유명한 보석가게 티파니의 쇼윈도를 구경하는 가난한 아가씨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연기해 잊지 못하는 장면으로 남게 해주었으며, 비상계단의 창가에 앉아 기타를 치며 ‘문 리버’ 라는 노래를 정말 달콤하게 불러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에서는 작은 나라 공주님으로 여러 나라를 순방하던 중 공식적인 행사에 지쳐 잠시 뛰쳐나와 일반인처럼 로마의 이곳저곳을 경험하는 아름다운 아가씨 역을 연기했다. 경호원을 따돌리려고 미장원에서 머리를 짧게 자르는 장면은 너무나 귀여웠다. 그 당시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그녀의 헤어스타일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다고 한다. 정말 상큼하고 예쁜 모습이었다. 이외에도 많은 영화를 통해 즐거움과 감동을 줬던 오드리 헵번이 유니세프 홍보대사를 하면서 죽을 때까지 봉사활동을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젊었을 때는 아름다웠지만 나이 들어 그 모습을 잃어버리는 여배우들도 많다. 그러나 오드리 헵번은 나이 들어서도 얼굴에 주름살만 생겼을 뿐 체형도 그대로인 채 미모가 여전했다. 게다가 좋은 일까지 많이 하니 또 다른 아름다운 모습도 있었다.
오드리 헵번이 봉사활동을 그렇게 열심히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벨기에에서 영국인 은행가 아버지와 네덜란드 귀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나치에 협력하면서 독일의 침략을 받은 벨기에에서 살던 어린 그녀와 어머니를 버렸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와 네덜란드로 이주한 뒤 아주 힘든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끌고 가는 광경을 보고 아버지를 떠올리며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배우로 성공한 후 그녀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편지를 전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나치 추종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배우로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에 어머니가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그녀에게 영화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다. 많은 여배우들이 욕심을 내는 역이었지만 몇 날을 고민한 끝에 그녀는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주연 캐스팅을 거절했다. 그 후 는 아카데미 3개 부문 수상을 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안네 역할을 꼭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나치 협력 때문에 양심상 수락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60년, 영국에서 홀로 살고 있던 아버지를 찾아간 그녀는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 봉사하기로 결심하고 유니세프 홍보대사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말년에 대장암에 걸렸는데도 자신의 몸을 돌보기보다는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나 남미, 아시아에 도움의 손길을 펼쳤다. 보기만 해도 행복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오드리 헵번에게 이런 사연이 있었다니….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 봉사를 시작했다는 그녀의 이야기가 참 슬프고 가슴 아프다.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던 날,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다. 방송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식보다 오드리 헵번의 사망 소식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외모만큼 마음도 아름다웠던 오드리 헵번. 영화배우만이 아닌 진실한 사람으로 언제까지나 필자에게 기억될 아름다운 여인이다.
문학작품을 고를 때 작가가 누군지 반드시 확인하면서 영화를 볼 때는 대부분 제목만 보고 선택해왔음을 고백해야겠다. 그러니까 그렇게 많은 영화를 봐왔으면서도 필자에게 영화는 감독의 메시지나 예술적 성취보다는 그저 한 시간 반 정도 즐기는 가벼운 문화적 소비재에 불과했던 것이다. 적어도 무더위가 절정에 오른 지난 주말까지는.
더위에 지친 날 영화를 보자는 제의는 반가웠다. 적어도 영화관은 시원한 곳이니. 게다가 모처럼 남편의 제의라 제목도 묻지 않고 따라나섰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 전쟁영화란다. 남편은 감독의 전작들을 언급하면서 그의 예술적 성취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으나 생소한 이야기였고 더욱이 전쟁영화는 필자가 선호하는 장르도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려면 어떠랴. 이 더위를 피할 수만 있다면.
상영시간이 임박해서인지 좌석이 첫 줄밖에 없었다. 아이맥스에서 보고 싶어 했던 남편은 오히려 앞줄이라 좋단다. 우리는 그렇게 그날의 현장으로 휩쓸려 들어갔다.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포위되어 프랑스 북부 덩케르크 해변에 고립된 연합군 40만 명을 도버해협 건너 영국으로 철수시키는, 실제 있었던 기적 같은 작전을 영화로 재현한 것이다.
그런데 도무지 스토리다운 스토리가 없었다. 영웅 같은 주인공도 없었다. 곳곳에서 살아남으려는 아우성만 가득했다. 그렇다고 처절한 살육 장면도 없었다. 독일군에 포위되어 있다는 설정만 있을 뿐 독일군도 보이지 않았고 본격적인 접전도 없었다. 보통 전쟁영화에서 흔히 보여주는 익숙한 장면들이 보이지 않았다. 배경만 전쟁영화일 뿐 실제로는 재난영화라고 분류해야 할 지경이었다.
감독은 이 영화를 배에 오르는 잔교에서의 일주일, 바다에서의 1일, 하늘에서의 1시간 등 세 가지 시퀀스로 나누어 각기 다른 서술자의 시각으로 교차해가면서 보여준다. 영화 전반부는 서로 소통되지 않는 각각의 상황에서 처절한 사투만이 이어진다. 잔교에서 하염없이 배를 기다리다 적기의 사격으로 속절없이 죽어가는 병사들. 징발된 작은 배를 몰고 전장으로 가는 이름 없는 어선들. 연료가 떨어져가는데 적기로부터 아군을 지켜야 하는 조종사. 거대한 전장을 교직하는 이름 없는 사람들.
이런 아수라장 속에 감독은 세 개의 작은 이야기를 배치한다. 수많은 병사 중 카메라는 토미(핀 화이트헤드)와 남의 이름을 도용한 깁슨(아뉴린 바나드)의 동선을 따라간다. 그들은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행동하지만, 서로 돕는 인간애를 지니고 있다. 징발된 요트를 몰고 나가는 도슨 부자는 따라나선 소년 조지가 바다에서 구해준 병사의 우발적 폭력으로 죽게 되지만 임무를 완수한다.
이 모든 흐름이 하나로 합일되는 시점은 조종사 콜린스가 적기에 격추되어 바다에 추락하고 도슨 부자가 그를 구하는 장면일 것이다. 이들은 각자 자신의 전쟁을 치르고 있지만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한다. 또 이들은 서로 돕고 피해를 주기도 하지만, 감독의 시선은 선악을 판정하지 않는다. 그들 모두는 살아남으려는 평범한 인간들일 뿐이다.
이 영화는 전쟁을 정의하려 하지도 않고 선악으로 재단하지도 않는다. 아마 감독의 보여주려고 한 메시지는 살아 돌아온 병사들을 환영하면서 한 시각장애인이 “살아서 돌아온 것으로 충분해”라고 한 말일 것이다. 우리를 한 시간 반 넘게 이 품격 있는 전쟁터에 몰입시킨 것은 단연코 음악이다. 시계 초침소리 등 다양한 소리들을 변주하며 줄곧 내장을 울렸던 음악이 시간과 더위를 잊게 해준 공신이었다.
이 영화는 단언컨대 감독의 영화다. 마지막 파리어(톰 하디)의 비행기가 연료가 떨어져 무동력으로 하늘을 비행하는 장면은 압권이다. 이 순간 일주일, 하루, 한 시간이라는 서로 다른 시간의 부조화가 하나로 합일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것이다. 크리스토퍼 놀란은 천재다.
필자가 화가 케테 콜비츠(Käthe Koll witz, 1867~1945)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지인이 얼마 전 독일 언론 매체에 실린 케테 콜비츠 탄생 150주년과 관련한 칼럼을 보내왔다. ‘반전(反戰) 화가’이자 ‘인권 화가’인 케테 콜비츠의 출생 연도가 1867년에다 생일이 7월 8일이라 적절한 시기에 그녀를 재조명한 것이다.
‘케테 콜비츠’는 작품을 통해 끈질기게 당대의 굶주림, 가난, 탄압, 인권유린, 전쟁을 고발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녀의 작품들에는 웃음이 없고 무거운 기류가 잔뜩 흐른다. 그녀는 다양한 색채를 거부하고 오직 검은색만 고집했는데 이를 통해 작품의 밑바탕에 흐르는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콜비츠는 비교적 여유 있는 집안에서 성장했다. 변호사였던 그녀의 아버지(Schmidt)는 당시 보수파였던 비스마르크 정권의 월급을 받아 가정을 유지하기 싫다며 공무원 되기를 거부할 만큼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이러한 아버지의 영향과 더불어 노벨문학상을 수상(1912)한 당대의 지성인 게르하르트 하웁트만(Gerhart Hauptmann, 1862~1946)과의 개인적인 만남을 통해 사회 비판적 세계관을 갖게 된다. 그녀는 특히 하웁트만이 선보인 무대 작품 에서 큰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둘째 아들 페터가 자원해 나간 전쟁터에서 전사한다. 아들을 잃은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겠는가! 1924년에 그린 [그림 1]이란 작품은 작가의 반전주의 사상을 대변한다. 콜비츠는 평화주의자의 기수로 두각을 드러내면서 사회 빈곤 문제도 작품에 반영한다. 그러나 1930년대에 나치가 정권을 잡자, 다시 수모와 시련을 겪는다. 나치는 그녀의 작품을 ‘타락한 예술’로 분류하고, 게슈타포는 콜비츠를 체포하려고 조사 협박한다. 콜비츠는 자신을 체포하면 국제적으로 억압 사실을 알리겠다고 저항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한다. 해외 구명운동도 도움이 됐다. 1941년에는 손자마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망했다는 비보를 듣는다. 그 무렵 반전 작가로서의 메시지는 더욱 뚜렷해진다.
콜비츠는 세계대전의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을 비롯해 , , , , , , , 등의 작품을 남겼다. 자신이 살던 사회의 아픔을 그림에 담아낸 케테 콜비츠. 탄생 150주년을 맞이해 그녀 작품의 위대한 원천인 모성애를 다시 생각해본다[그림 2].
>>이성낙(李成洛) 현대미술관회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회장(현), 간송미술재단 이사(현).
체코, 오스트리아, 폴란드에 끼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유럽의 배꼽’이라 불리는 슬로바키아는 한국인에게 여행지로 잘 알려진 곳이 아니다. 유명세는 적지만 매력이 폴폴 넘치는 곳. 사람들은 흥이 많고 무엇보다 물가가 싸니 이보다 좋은 곳도 드물다. 한국 기업들이 속속 자리를 튼 이유일 것이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는 유럽에서 가장 작은 수도다. 시내라고 해야 차로 2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다.
11세기의 브라티슬라바 성에서 다뉴브 강 조망
한국의 많은 이가 아직도 슬로바키아를 ‘체코 슬로바키아’로 안다. 현지인들에게 나라 명을 잘못 말하면 발끈하면서 다시 일러줄 것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93년 1월 1일, 독립국으로 분리되었다.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시내는 걸어서 여행해도 충분하다.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호조로 광장에는 대통령 관저가 있다. 1760년에 건축된 그라살코비크 궁전을 현재 관저로 이용하고 있다. 광장에서 고개를 들면 브라티슬라바 성이 보인다. 테이블을 거꾸로 놓은 듯해서 ‘테이블 캐슬’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납작한 사각형 상이 뒤엎어져 상다리 4개가 솟아오른 듯하다. 11세기에 지어진 후 1800년대 헝가리의 지배 때 파괴됐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된 성이다. 성안에 스바토플룩
1세와 모라비아인 동상이 있는 것은 당시 모라비아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킨 가장 위대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성 내부는 갤러리로 이용하고, 외부에는 성녀 엘리자베스의 동상과 부서진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무엇보다 성 니콜라이 교회의 첨탑 밑으로 보이는 구시가지의 지붕들, 다뉴브 강을 잇는 노비 모스트(Novy′ Most, 새로운 다리란 뜻), 성곽 옆으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강변 풍치가 아름답다. 간헐적으로 운행되는 도심 투어용 빨간 꼬마 열차도 예쁘다.
중세의 물결 일렁대는 올드 타운에 남은 교회와 건물들
성곽을 비껴 조약돌이 박힌 옛 골목길을 걸어 성벽 샛길로 들어서면 올드 타운이다. 성벽 앞에는 십자군 중세 군인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관광객들에게 체험을 유도하고 있다. 카피툴스카 좁은 골목에서 만난 바는 와인이 맛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포도 줄기를 넝쿨 채 치장했다. 해묵은 골목 바에 앉은 연인들의 속닥임이 잘 숙성된 포도주 향처럼 진하게 번진다. 회색빛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마르틴 대성당(2002년 국가문화재로 지정)은 웅장하고 고풍스러움이 가득하다. 무려 230여 년(1221~1452)에 걸쳐 완성된 성당에서는 합스부르크 왕 11명의 대관식이 치러졌고 베토벤(1770~1827)이 4년 동안 매달려 만든 ‘장엄미사(1823년 완성)’가 초연되었다. 이 도시를 사랑한 베토벤은 ‘월광 소나타(1801년 작곡)’를 만들었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살아생전 15번이나 방문했다. 특히 브라티슬라바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리스트는 사망하기 1년 전(1885년)에도 이 성당을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영혼의 안식을 찾곤 했다고 한다. 또 성 프란시스칸 교회와 성녀 엘리자베스를 봉헌한 성 엘리자베스 교회도 유명하다. 특히 성 엘리자베스 교회는 유명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로 건물 내·외부가 모두 푸른색이라 ‘블루처치’라고도 불린다. 헝가리 왕 앤드류 2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공주는 14세에 독일 튜링가와 정략결혼을 했으나 20세에 미망인이 된다. 이후 그녀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혼신을 다 바쳤다.
골목 속에 숨은 스토리텔링 조각상 찾기
올드 타운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골목은 더 규칙 없는 미로다. 국민 시인, 파볼 오르사그 흐비에즈도슬라브(1849~1921)의 이름을 붙인 광장에는 1572년, 막시밀리안 2세가 만든 분수대(롤랑드)가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주변에는 구시청사, 국립미술관 등을 비롯해 온통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다. 특히 숨은 스토리텔링 조각상들을 찾는 재미가 있다. 메인 광장 벤치에서 ‘대화를 엿듣는 나폴레옹’, ‘추밀(Cumil)’은 맨홀 뚜껑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 추밀의 동상 머리가 반질반질한 것은 만지면 행복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또 벽 뒤에 숨은 파파라치, 중절모를 벗고 인사하는 노신사 등. 모두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로 만든 볼거리들이다. 길거리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과 쉽게 구분되지 않아 동상을 발견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구시청사에서는 수시로 축제가 열린다. 때마침 중세 복장을 한 까마귀 무술단원들이 공연시간을 알리면서 손님몰이를 한다. 펜싱과 총을 들고 싸우는 전통극의 스토리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현지의 속살을 들여다본 듯 흐뭇하다. 타운 골목을 배회하다 보면 14세기의 미하엘 성문이 있는 벤투르스카 거리에 이른다. 옛 도시 성벽의 4개 성문 중 유일하게 남은 성문 주변은 중세 분위기다. 오래된 약국은 박물관이 되었고 연륜 깊은 레스토랑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다. 길거리에서는 ‘섹시한 여성’이 와인 시음판을 펼치고 있다.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브라티슬라바. 경제 발전이 되지 않아 그대로 간직된 유적들이 여행객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프란츠 리스트의 운명을 가른 도시
벤투르스카 골목의 데 파울리(De Pauli, 11번지) 궁 외벽에는 세기적인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를 기념하는 명판이 새겨져 있다. “9세에 이 연주회를 발판으로 개선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당시 헝가리 땅 도보르얀(현재 오스트리아의 라이딩)에서 태어난 리스트.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 귀족 에스테르하지(Esterha′zy) 가의 토지 관리인이면서 궁정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주자였다. 6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신동으로 주목받았던 리스트는 9세(1820년 11월 26일) 때 이 궁전에서 첫 연주회를 갖는다. 당시 이 도시의 귀족은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리스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고 그다음에는 즉흥 연주를 했다. 몇몇 귀족이 내민 악보의 난해한 곡도 거침없이 연주해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완전한 음악교육을 시킬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귀족들은 즉시 기부금을 모았고 더 나아가 그를 6년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로 했다. 후원자 중에는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에스테르하지 가의 니콜라우스 후작도 있었다. 예술을 대대적으로 사랑하는 이 가문은 당시 궁정음악가로 하이든을 두었다. 이후 리스트는 19세기 전반에 유럽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기교를 자랑하는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다. 리스트가 이 도시를 잊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올드 타운의 관광안내소 건물은 음악가 요한 네포묵 후멜(1778~1837)이 태어난 곳이다. 그는 피아노 교본을 써서 이름을 널리 알린 인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모차르트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유럽 여러 곳에서 활동했던 피아노의 거장이다. 당시 베토벤과 비교될 정도로 뛰어난 작곡가였지만 사후에는 거의 잊히고 말았다. 또 이 도시가 음악의 도시임을 알려주는 멋진 국립극장도 있다.
Travel Data
가는 길 한국에서 체코 프라하나 오스트리아 빈 직항을 이용하면 된다. 빈의 수드반호프 역에서는 평균 한 시간 단위로 열차가 다닌다. 1시간(50㎞ 정도) 정도 소요된다. 프라하나 부다페스트에서 버스나 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물가 정보 오스트리아, 체코 프라하보다 저렴하다.
맛집과 숙박정보 올드 타운의 레스토랑에서는 적당한 가격에 푸짐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 또 도시에서 가장 큰 즐라테 피에스키 호수 옆 해산물 요리가 일품이다. 역피라미드 모양의 시내 라디오 방송국의 송전탑 위의 회전 레스토랑에서는 브라티슬라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주류로는 와인은 물론 자두 증류주인 슬리보비츠가 괜찮다. 숙박은 올드 타운이나 시내 중심가를 이용하면 된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슬로바키아 북서부의 트르나바 주에 있는 피에스타니는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스파 도시다. 수질과 효능이 좋아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온천 단지다. 숙박시설 등을 잘 갖추고 있어 휴양지로 아주 좋다. 또 폴란드의 슐레지엔(Schlesien, 폴란드어로는 실롱스크, 체코어로는 슬레스코, 영어로는 실레지아) 산간 지역에도 수많은 온천이 있다. 슬로바키아 하면 떠오르는 ‘의적’ 유라이 야노식(Juraj Ja′nos˘k, 1688~1713)이 태어난 테르초바에서는 유네스코에 지정된 전통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을 여행하면 3개월 이상도 모자랄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즐겨도 경제적 부담이 적은 나라, 기억해둬야 할 곳이다.
오키나와에서 돌아오는 날 비행기가 저녁시간이었기 때문에 오전에는 슈리성을 가보기로 했다. 그리고 오후에는 시내를 돌아보며 가벼운 쇼핑을 한 후 호텔에 맡겨둔 여행가방을 찾아 공항으로 가는 일정이었다.
슈리성은 숙소가 있는 국제거리에서 모놀 레일을 타고 6~7 정거장을 지나 내려 택시로 기본요금 거리 정도 되었다. 걸어서 20분쯤으로 알고 왔기에 날씨만 좋으면 여유 있게 산책하듯 걸어가려 했는데 비도 조금씩 뿌리는 데다가 후텁지근해서 택시를 탔다.
슈리성은 2차 대전 때 소실되었으나 다시 복원되어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니 그들의 노력이 가상하다. 건물들이 붉은 계통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중국풍인 듯 느껴진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을 융합시킨 건축물이라고 한다.
사실 슈리성 건물 안으로 들어가 볼 만한 호기심은 안 생겼지만 여기까지 왔으니 안 볼 수 있겠느냐는 일반적인 생각으로 일단 들어가 본다. 만일 다음에 다시 온다면 굳이 성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지 않을까. 주변의 자연스러운 정원이나 작은 숲이 이쁘니까 성 주변을 둘러보거나 산책하는 시간으로 이용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 본즉 역시 예상했던 대로 류큐왕국의 영화(榮華)를 보여주는 생활상과 전시물품들이 있다. 또한 각종 전시실이나 기획전시실, 왕조시대의 공예품 들을 볼 수 있다. 난 그저 쓰윽 들러본다. 군데군데 지키고 있는 안내원들의 밝은 미소가 보기 좋다. 게다가 뭔가 감시하거나 지키고 있다는 느낌보다는 도와주려는 모습으로 거부감 없는 자세로 보인다. 실내에서 바라보는 슈리성의 정원이 촉촉하니 고즈넉하다. 처마 밑에 앉아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노라니 새삼스러운 정취를 느끼게 한다.
대충 훑어보고 나오니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 마침 하루에 두 번씩 하는 공연이 곧 시작한다고 해서 보기로 했다. 일본 전통의상을 입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움직이며 표정 없는 얼굴로 절도 있는 리듬감 표현의 춤이다. 몇 개의 무대를 보았는데 이를테면 우리의 꼭두각시 춤이나 민중들의 노동춤, 또는 민속춤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별 기대 없이 봤는데 그런대로 재미있었다. 일본어를 모르긴 하지만 자막에 한자도 많이 섞여있고 눈치로 대충 짐작이 되는 내용들이었다. 우리의 민속춤도 그렇듯이 손끝과 발끝의 섬세한 놀림이 춤을 보는 묘미를 준다.
그 사이 비가 조금 그쳐서 성곽으로 올라갔다. 천년만년 그 자리를 지킨 이끼 낀 긴 성벽을 보면서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낀다. 얽히고 설킨 나무뿌리들이 그 땅을 단단히 해주었겠다.
일본의 옛 국왕들이 머물던 성곽에 서서 오키나와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내겐 아무런 의미도 되어주지 않지만 이젠 단순히 그들의 역사적 자취가 남겨진 공원에서 적당히 휴식의 시간을 즐길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거길 내려와 시내로 나오는 모노레일에 오르니 또 비가 내린다. 내 기억 속의 오키나와는 두고두고 무덥고 비 내리는 오키나와 일 것이다. 모노레일에 오르니 주룩주룩 내리는 비가 창 밖으로 흐른다. 우산을 든 여행자들, 더러는 비 오는 날의 불편한 여행으로 기억하겠지만 훗날 그 또한 즐거운 기억일 것이다. 여행이란 그런 것.
올해부터 버킷리스트에 올라 있던 여행을 위하여 일찍부터 점찍어 두었던 나라가 발트 3국이었다. 발트 3국은 미지의 세계였다. 서 유럽은 재직 시 독일 주재원을 인연으로 직무 상 여러 번 갔었지만, 나머지 유럽은 직무상 다녀 올 일이 없었다. 발트 3국은 지도를 보니 유럽에서도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스칸디나비아가 있는 북유럽도 아니고 동유럽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했다. 동북유럽이라 해야 한다. 북쪽에는 핀란드, 스웨덴이 있고, 동쪽에는 러시아가 있고 남쪽으로 폴란드가 둘러싸고 있다.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면적도 작아서 생소한 나라들이었다. 비슷한 면적 세 나라 합해서 한 반도의 3분의 2 정도이고 인구도 각국이 각각 리투아니아 300만 명, 라트비아 200만 명, 에스토니아 125만 명으로 세 나라 합계가 625만 명 정도이다.
가이드에게 한 첫 질문이 “발트 3국의 특징은 무엇입니까?”였다. 대답은 “별 다른 특징은 없고 다른 유럽 국가들을 다 보고 나서 마지막으로 들르는 나라가 발트 3국입니다”였다. 그만큼 특별히 볼 것도 없고 빼놓자니 아까운 지역이라는 것이었다. “로마를 먼저 보면, 다른 나라는 시시하다”는 말이 있다. 과연 그랬다. 그래도 유럽은 유럽이다. 오랜 역사가 있고 석조문화 덕분에 고성, 대성당 같은 유물이 많이 남아 있다. 종교의 힘 덕분에 불가사의 같은 대성당 등이 지어졌다.
지정학적으로 강국의 틈새에 있으면 시련을 많이 겪을 수밖에 없다. 잘 알려지지 않았고 소국이라면 우리나라의 운명과 비슷할 거라는 짐작은 했었다. 당연히 이웃나라인 스웨덴, 폴란드, 러시아, 좀 떨어져 있는 독일에게도 침략 당해 속국이 되었던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인구가 적으면 국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1차 대전 후 잠시 독립을 했으나 1939년 2차 대전을 앞두고 독일의 히틀러와 소련의 스탈린이 밀약을 하여 발트 3국을 제멋대로 소련 땅으로 하기로 한 것이다. 히틀러가 서유럽을 침공하기 위해서는 동쪽의 소련이 움직이지 않도록 한 것이다.
발트 3국이 독립을 쟁취한 것은 1991년이므로 이제 겨우 26년의 역사를 가진 셈이다. 독립을 위하여 벌인 인간 띠 행사가 1989년 8월23일 독소조약 50주년에 맞춰 600km, 200만 명이 참가했다. 3국의 수도를 인간 띠로 남북으로 잇는 거대한 행사였다. 인구가 적으니 가도 가도 끝없이 펼쳐진 숲과 도로에 사람이 이어서기 위해 인구의 1/3이 나서는 대단한 노력을 한 것이다. 이 행사는 전 세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소련 강경파가 제압하려 했으나 역시 같은 방법으로 의회와 방송국들을 시민들이 막아서는 방법으로 자유를 쟁취했다. 소련은 내부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외친 고르바초프를 연금 시킨 3일천하 쿠데타가 있었고 이후 소련 연방 공화국들은 속속 독립을 선언했다.
발트 3국은 각각 각국의 특징이 있다. 우리가 우리를 식민지화 했던 일본을 미워하듯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했으니 소련에게 적대감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직 소련의 유물과 잔재가 존재한다. 에스토니아는 국민의 20%가 러시아계이며 러시아 접경에 몰려 살고 있다. 소련으로부터 독립은 했으나 경제적으로는 자립해야 하니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다. 이렇다 할 제조업은 없고 50%가 서비스업, 20%가 농업인데 농업조차 기후와 토양이 맞지 않는다. 그나마 일인당 국민소득은 1만5천불 정도 되니 어느 정도 살만한 나라들이다.
기후는 서울보다 약간 서늘하다. 6월인데도 아침 온도는 10도 이하이고 낮 기온도 22도 정도였다. 서울 날씨와 여러 번 유럽에 기본 경험만 믿고 반팔만 갖고 가기 쉬운데 필히 긴팔 옷을 준비해야 한다.
음식은 서유럽과 비슷하다. 입맛에도 잘 맞는 편이지만, 매일 하루 세 끼를 그렇게 먹다 보니 맵고 짠 한식이 생각난다.
골목길은 어쩐지 큰길보다는 뭔가 비밀스럽고 은밀한 느낌이 있다. 어린 시절 숨바꼭질이나
술래잡기하던 정다움도 느껴지고 꽃다운 젊은 날 좋아하는 사람과 거닐며 가슴 떨렸던 수줍
은 기억도 떠오른다.
어린 시절 필자는 10살까지 대전의 대흥동 주택가에서 살았다.
골목 안쪽에 우리 집이 있었는데 그 골목은 다른 곳보다 무척이나 좁았다.
어릴 땐 몰랐지만, 어른이 되어 그리움에 한 번 찾아가 보니 뚱뚱한 사람은 통과하기 좀 힘
들 정도로 좁은 길이었다.
그래도 그 골목은 좁아서인지 더욱 골목 안 우리 친구들의 천국과 같은 놀이터였다.
지금과는 달리 어릴 때의 필자는 매우 개구쟁이였던 모양이다.
노래도 잘했다는데 아이들의 동요가 아닌 당시 유행하던 강화도령이나 제목도 모르지만 ‘반
짝이는 불빛 아래 소곤소곤 소곤대던 그으 나알밤~’이란 가요를 구성지게 잘도 불러 재껴
서 동네 어른들은 필자만 보면 “노래 한 자락 해봐라.”고 하셨다.
그 골목에서 즐거웠던 일은 동네 아이들과 연극을 해보자고 작당했던 일이다.
무대는 좁은 골목 안 용호네 대문 위쪽과 반대편 전봇대에 줄을 매달고 담요를 걸쳐 만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큰 무대를 만든 것처럼 즐거웠고 춘향전을 한다며 담요를 들치고 나와
연기를 펼치며 깔깔대었다.
정말 그땐 어른들도 볼거리가 없었던지 철부지 동네 꼬마들이 하는 연극에 신문지나 가마니
를 깔고 앉아 귀엽다며 칭찬하고 웃어주셨다.
그렇게 골목길은 필자의 어린 시절 잊지못할 추억을 만들어 주기도 한 곳이다.
작년에 우리 동네 뒤쪽으로 산책로가 새로 조성되었다.
2km의 길이로 펼쳐진 산책길은 중간 한 부분 100여 미터 정도 골목길을 통하게 되어있다.
처음 그 골목을 지나며 필자는 깜짝 놀랐고 낯설지 않은 느낌에 내심 반갑기도 했다.
좁다란 골목이 어린 날 개구쟁이 모여 놀던 그 골목과 매우 닮았기 때문이었다.
약간은 후줄그레한 지저분한 회색 담벼락이 이어졌는데 어느 날 지나다 보니 담장 치장이
한창이었다.
아마 개인이 하는 건 아니고 지자체에서 골목단장사업을 하는 것 같다.
연말이 가까워져 오면 할당받은 예산을 없애기 위해 잘 깔려있는 멀쩡한 보도블록도 교체하
는 등 무리하게 예산 집행을 한다는 말을 들은 적 있다.
그러나 이렇게 골목을 깔끔하게 단장하는 데 쓰인다면 칭찬해 줘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산책 때문이든 그저 통과하는 것이든 골목을 지나는 사람들에게 산뜻하고 기분 좋은 느낌을 줄 수 있어서이다.
각 집마다 색상을 달리해서 칠하는 페인트의 색이 너무 고와 어느 집 담장이 더 예쁜지 감상해 보는 것도 즐거운 눈요깃거리가 되었다.
파스텔 톤으로 인디언핑크, 연하늘색, 연보라 연노랑 등 은은한 색의 담장이 뽐내듯 이어졌
고 골목 끝 부분의 좀 큰 담장에는 사계절을 표현한 벽화가 그려졌다.
이제는 골목을 지나며 우중충한 모습을 보지 않게 되어 기분이 좋다.
봄을 상징하는 꽃잎 담장도 있고 가을 단풍을 그려놓은 담장도 있다.
동심의 세계로 이끌 것만 같은 겨울 눈 내리는 공간에 다정히 서 있는 눈사람 한 쌍도 정겨
운 풍경이다.
누구의 발상으로 수십 년간 우중충했던 골목을 이렇게 예쁘게 바꾸게 되었을까?
골목 안 주민들도 좋겠지만 화사한 골목길을 지나는 나그네들도 산뜻한 기분일 것 같다.
오늘도 골목을 지나며 어떤 담장이 더 예쁜지 기분 좋은 감상을 했다.
무관심 속에 성장하는 퇴직연금
사회보장제도의 마지막 퍼즐이었던 퇴직연금이 도입된 지 10년이 넘었다. 1988년에 국민연금이 도입되었고, 연금저축으로 일컬어지는 세제적격 개인연금이 도입된 것은 1994년이다. 퇴직연금은 이보다 11년이나 늦은 2005년 12월에야 도입되었다. 퇴직연금 도입까지 걸린 시간이 길어진 것은 퇴직연금 관련 이해관계자들의 이해 조정에 많은 노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퇴직연금이 각자의 이해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라 여겼고, 그만큼 법안 하나하나에 관심을 기울였다.
제도 도입 초기의 치열한 관심과 달리 퇴직연금이라는 열차가 괘도를 달리기 시작하자 열의는 식기 시작했다. 근로자퇴직급여보장법 전면 개정안이 통과되는 데 3년이나 걸렸고, 2차 개정안이 국회에 상정된 지 꽤 시간이 지났음에도 통과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이해관계자들의 관심과 열의가 식지 않았다면 과연 개정안이 국회에서 그토록 오랜 낮잠을 즐길 수 있을까? 아직도 퇴직연금의 기본개념조차 이해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소식을 들으면 서글퍼지기까지 한다. 저출산 고령화의 큰 파고 앞에서 위기에 처해 있는 100세 시대의 노후생활을 생각하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노후준비가 국민적 스트레스로 거론되고 있는 상황에서 노후준비 핵심 축의 하나인 퇴직연금이 관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은 아이러니를 넘어 배임행위라 여겨질 정도다.
이런 상황에서도 퇴직연금시장은 높은 성장세를 구현해왔다. 2016년 3분기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는 130조원으로 전년 동기(111조원) 대비 17.1% 증가했다. 전년 동기 대비 기준으로 2012~2015년의 성장률은 20%를 훌쩍 넘어선다([표1] 참조). 극심한 경기침체 상황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성장률이 아닐 수 없다. ‘관심의 불황과 시장의 급성장!’ 불황형 흑자를 떠올리게 한다. [표1]에서 보는 것처럼 문제는 성장률이 감소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관심의 불황과 시장의 정체’라는 불황형 적자의 시대가 올까봐 걱정스럽다.
퇴직연금, 쉽고 효율적인 노후준비 방법!
기업·근로자·금융기관 등 퇴직연금 핵심 이해관계자들의 열의가 식는다고 해서 개인 및 사회에 대한 퇴직연금의 영향력이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제반 상황을 감안하면 퇴직연금의 영향력은 오히려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퇴직연금 적립금이 늘어날수록 기업에 미치는 영향력은 커질 수밖에 없다. 가계부채와 늘어만 가는 후반 인생을 생각하면 근로자에 대한 퇴직연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마땅한 신수종 사업이 없는 상황에서 여전히 고도성장을 하고 있는 퇴직연금은 금융기관에게 아주 매력적인 시장이다.
무엇보다도 퇴직연금은 가장 쉽고 효율적인 노후준비 방법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근로자가 노후자금을 마련하려면 적잖은 부담을 감수해야만 한다. 별도의 자금을 염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퇴직연금은 다르다. 퇴직연금에 적립되는 부담금을 기업이 내기 때문이다. 근로자는 퇴직연금 적립금을 쌓기 위해 자신의 주머니에 손댈 필요가 없는 셈이다. 빠듯한 가계 상황을 걱정하지 않고도 노후를 준비할 수 있으니 얼마나 쉽고 좋은가! 또한 퇴직연금에 가입하면 적립금 운용수익에 대한 세금이 인출하는 시점까지 이연되는 등 많은 세제혜택을 누릴 수 있다. 세금으로 내야 하는 돈이 다음 해 원금에 추가되니 ‘이자에 이자가 붙는’ 복리효과가 극대화된다. “그까짓 이자가 얼마나 된다고?” 하며 얕보다간 큰코다칠 수 있다. 한두 해 일하고 그만둘 것은 아니지 않는가. 게다가 보험료를 내고도 운용 과정에 전혀 참여할 수 없는 국민연금과 달리 퇴직연금에 가입하면 각자의 상황에 맞는 운용 방법을 유연하게 선택하고 변경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문가 집단의 도움을 거의 무료로 받을 수 있으니 노후자금을 불리는 방법으로 이만큼 효율적인 수단은 찾기 힘들다.
근로자들이 이런 장점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옷이라도 쇼윈도 안의 마네킹이 입고 있으면 별무소용이다. 마네킹이 입고 있는 옷을 벗겨 내 손에 넣어야 비로소 내 옷이 되는 법이다. 퇴직연금도 마찬가지다. 제도적으로 아무리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 한들 근로자들이 이를 활용하지 않으면 진열장에 전시된 제품에 불과하다. 아이쇼핑은 심리적 만족감을 주지만, 활용하지 않는 제도적 장점은 공약(空約)의 씁쓸함을 가져다줄 뿐이다. ‘톡!’ 건드리기만 하면 터져 씨앗을 사방으로 퍼트리는 잘 익은 봉숭아처럼 전국 방방곡곡 모든 계층의 근로자들이 혜택을 받아 노후준비를 제고할 수 있도록 퇴직연금에 대한 관심과 열의에 불을 지펴야 한다.
퇴직연금에 대한 근로자의 관심과 열의에 불을 지피기 위해서는 기본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기본을 다지는 출발점은 퇴직연금의 본질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다. 퇴직연금의 본질을 꿰뚫고 이를 이해하기 쉽게 전파한다면 식어버린 관심과 열의를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지 않을까! 두 가지 측면에서 퇴직연금의 본질을 살펴보자.
퇴직연금은 제2의 임금
‘퇴직연금은 제2의 임금’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퇴직연금의 법적 성질과 관련한 학설로는 노후보장·공로보상설·임금후불설 등이 있다. 노후보장설은 퇴직연금을 사용자가 선의로 근로자의 노후보장을 지원하기 위한 것이라 보며, 공로보상설은 그동안 일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퇴직연금을 지급하는 것이라고 본다. 임금후불설은 매달 임금으로 지불해야 할 것의 일부를 나중에 퇴직할 때 지불하는 것이 퇴직연금이라고 보는 학설이다.
정설은 임금후불설이다. 퇴직연금의 법적 성질을 임금후불설로 보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있다. 글로벌 퇴직연금시장에서 세계적 표준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 곳은 미국이다. 미국의 퇴직연금은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때에 비약적인 성장의 토대를 마련한다. 전시통제정책의 하나였던 임금통제정책 때문이다. 원활한 전시물자 보급을 위해 취한 임금통제정책으로 기업들은 근로자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물건을 만들기만 하면 팔리는 상황에서 물건 만들 인력이 부족하니 얼마나 속이 타들어갔겠는가.
기업의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여성을 일터로 끌어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가급여(fringe benefits)로서 퇴직연금을 도입하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미국의 성인 여성들은 전업주부로서 주로 가사를 담당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쟁터로 나간 젊은 남성들을 대신해 여성들이 노동력 부족 사태를 해결하려 대거 사회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불러온 예상치 못한 사회 변화였다. 퇴직연금과 같은 부가급여는 전시임금통제정책의 대상이 아니었다. 임금을 올려줄 수 없는 상황에서 중장년 남성 인력은 물론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한 여성 인력을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다른 대책이 필요했다. 지금 당장 임금을 올려줄 수 없으니 나중에 올려주겠다는 당근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바로 퇴직연금이었다. 즉 임금으로 줘야 할 것 중 일부를 퇴직연금이라는 형태로 해당 근로자가 퇴직할 때 지급하기로 한 것이다. 미국 연금회계기준서에는 퇴직연금을 임금후불이라고 못을 박아놓았다.
이처럼 퇴직연금은 단순한 인센티브가 아니다. 당연히 받아야 할 임금을 어떤 배경으로 인해 지급을 뒤로 미룬 임금의 일부인 것이다. 퇴직연금을 제2의 임금이라 부르는 이유다. 모든 근로자들은 임금협상철만 되면 신경이 곤두선다. 과연 올해는 임금이 얼마나 오를까? 최소한 물가인상률만큼은 올라야 할 텐데… 임금이 오르면 가계의 재정상태도 좀 나아지겠지. 이런 기대를 하며 임금투쟁에 적극 나선다. 기대에 어긋나면 파업까지 불사한다. 근로자의 당연한 권리 중 하나다.
그런데 제2의 임금이라는 퇴직연금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도입 당시 타오르던 관심이 금방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당장 내 호주머니에 들어오지 않는 돈이라고 관심 영역 밖으로 밀려난 퇴직연금은 주인을 잘못 만난 화초처럼 생기를 잃고 시들어갔다. 내 퇴직연금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는 것은 애교에 가깝다. 내가 가입한 퇴직연금이 어떤 종류인지, 어느 퇴직연금사업자에 내 적립금 운용을 맡겼는지 모르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필자의 경험으로 볼 때 내 퇴직연금이 안녕한지 그렇지 못한지 알고 있는 사람은 30%도 채 되지 않는다.
자신의 임금에 이처럼 무관심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음지에서 시들어가고 있는 퇴직연금을 양지로 끌어내야 한다. 퇴직연금의 본질은 3층 사회보장제도의 하나로서 노후준비의 한 수단이 아니라 제2의 임금이다.
노후준비 수단은 임금을 활용하는 한 형태일 따름이다. 최소한 1년에 한 번만이라도 퇴직연금에 관심을 기울이고 점검하자. 그 결과 변화가 필요하다면 사업자를 바꾸거나 상품을 바꾸거나 자산배분을 바꿔보자. 시들해진 퇴직연금이 되살아날 것이다.
퇴직연금 가입자는 잠재적 액티브 시니어
퇴직연금의 본질과 관련해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포인트의 하나는 퇴직연금 가입자에 대한 것이다. 바로 퇴직연금 가입 근로자는 모두 잠재적 액티브 시니어라는 점이다. 누구나 은퇴 후 활기차고 행복한 노후를 꿈꾼다. 이 점에서 퇴직연금 가입자는 특히 더 그러하다고 할 수 있다. 퇴직연금을 도입할 때 근로자의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근로자가 퇴직연금 도입에 동의할 때 동의를 해달라니 마지못해 동의할까, 아니면 노후에 대한 희망을 안고 동의할까? 비록 지금은 잃어버렸다 하더라도 대부분의 근로자들은 도입 당시 각자 나름의 꿈과 희망을 퇴직연금에 담았을 것이다.
퇴직연금은 액티브 시니어가 되기 위한 중요한 물적 기반이다. 이전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액티브 시니어란 육체적·정신적 건강함을 기반으로 일정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연장자’를 뜻한다.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육체적·정신적 건강함과 함께 재무적 탄탄함을 필요로 한다. ‘가난한 강남 부자’라는 말이 암시하듯 아무리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더라도 현금흐름이 말라버리면 사회적 활동은커녕 움직이기조차 힘들다. 퇴직연금은 재산이 적더라도 현금흐름이 풍부한 시민이 되기 위한 초석이다. 많은 근로자들은 이런 심정으로 퇴직연금 도입에 동의하고, 퇴직연금사업자를 선정하고, 적립금 운용 방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퇴직연금을 잘 가꿔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행복한 노후를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한바탕 바람이 일고 난 뒤 일상으로 돌아오면 꿈은 사라지고 일상의 권태와 피로에 지배당하고 만다. 이 권태와 피로를 잊게 하고 생활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이 꿈임을 이성적으로는 알지만 그 이성을 일깨우는 데에는 게으르다. 안다고 할 수 없는 셈이다. 퇴직연금은 제2의 임금임을 회상하며 다시 꿈을 일깨우자. 근로자 입장에서 퇴직연금은 은퇴 이후에 받는 또 다른 임금이다.
임금 인상 여부에 일희일비하던 기억을 퇴직연금에 접목해보자. 그러면 꿈은 되살아나고 삶에 대한 구체적 그림이 보일 것이다. 그 구체적 그림 속에서 퇴직연금의 역할을 부여해보자. 그러면 현재 나의 퇴직연금은 안녕한지 불편한 상태인지 보일 것이다. 안녕한 상태라면 잘 유지하고, 불편한 상태라면 상품·사업자·자산배분 등을 조정해 더 나은 상태로 바꿀 필요가 있다.
5월, 캘리포니아는 눈부시다. 겨울 내내 인심 좋게 내린 비에 캘리포니아는 몇 년째 심각했던 가뭄이 완전히 해갈됐다. 덕분에 온갖 풀이며 나무들이 싱그럽게 초록을 품었고 꽃들은 만개했다. 도저히 집 안에서는 감당이 안 되는 날씨. 꽃무늬 스카프라도 두르고 나서보기로 했다.
마침 시간을 내서 꼭 한 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언젠가 ‘LA 인근 가볼 만한 곳’이라는 검색어로 눈에 담아두었던 곳이다. 남가주에서 프러포즈와 결혼식 장소로 손꼽힌다는 곳. 그러나 이름만 들어서는 전혀 로맨틱할 것 같지 않은 ‘닉슨 기념관’이다.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의 작은 도시 요바린다는 미국의 37대 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의(1913~1994) 고향이다. 요바린다 시에 있는 닉슨 기념관은 미국 내 13개의 전직 대통령 기념관 중 하나로 대통령 기록 전시관, 닉슨 생가 그리고 닉슨 부부의 묘지가 있다. 총 9에이커(약 1만1000평)에 이르는 이곳은 원래 닉슨의 아버지 프랭크 닉슨의 오렌지 농장이었다. 1990년 닉슨의 가족과 지지자들이 닉슨 재단을 설립해 기념관을 만들어 관리하다가 지금은 미국 문서보관소가 운영하고 있다. 중앙 홀에 들어서는 순간 한눈에 닉슨의 대형 초상화가 눈에 들어왔다. 그의 이름 앞에 항상 붙어 다니는 ‘임기 중 불명예 퇴진한, 미국 역사상 가장 불명예스러운 대통령’이라는 수식어 때문일까. 그림 속 그의 눈빛엔 회한이 담겨 있는 듯하다. 비슷한 상황에 있는 고국의 한 얼굴이 떠올랐다. 아마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렇지 않을까. 조금 무거워지는 마음에 봄나들이 장소를 잘못 택한 것이 아닐까 후회하며 한 무리의 사람들을 따라 걸음을 옮겨본다. 빨강머리 앤이 살고 있을 것 같은 하얀 이층집이 눈에 들어오자 마음엔 다시 봄바람이 분다. 지금도 사람이 사는 것처럼 잘 보존되어 있는 닉슨의 생가다. 완벽히 어울리는 커다란 호두나무는 수령이 100년도 넘은 고목이다. 닉슨은 이곳에서 5형제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나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우등생이었던 닉슨은 하버드대학으로부터 입학 허가를 받지만 집안 사정으로 인해 근처 휘티어칼리지에 입학한다. 후에 듀크대학 대학원에서 법학을 전공, 변호사가 되지만 워싱턴 정가에서 그는 학력으로 인한 콤플렉스가 적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해군에서 군복무를 마친 닉슨은 1946년 공화당 하원의원으로 정치인생을 시작한다. 이후 상원의원에 이어 1952년 아이젠하워의 러닝메이트로 나와 부통령에 당선된다.
1960년 기세를 몰아 대통령에 출마하지만 젊고 파워풀한 이미지의 존 F. 케네디에게 패배하고 만다. 그 유명한 TV 생방송 토론이 바로 이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8년 후, 닉슨은 결국 미국 37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이때부터 닉슨은 어쩌면 미국의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기록되었을 만한 많은 업적을 만들어낸다. 닉슨독트린 발표로 베트남전을 끝내고 중국과의 수교로 냉전시대를 종식시킨 평화 대통령. 그는 세계사를 다시 만든 인물이었다. 적어도 ‘워터게이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닉슨의 업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기념관을 지나면 마지막 ‘워터게이트’ 전시관에 닿게 된다. 전시 내용은 이곳이 닉슨기념관이라는 사실이 민망할 정도로 노골적이다. 이전까지 닉슨의 업적과 미국의 위대함에 감동하던 관람객들은 하나같이 얼굴이 굳어진다. 닉슨의 수치이자 미국의 민낯이기 때문이다. ‘워터게이트’는 미국 역사상 최대의 정치 스캔들이다. 1972년, 워싱턴 D.C.의 ‘워터게이트’ 건물에 입주한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에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던 침입자들이 체포된다. 이들은 공화당 비밀조직 멤버들. 당시 재선 선거운동 중이던 닉슨은 자신의 관련 여부를 단호히 부인했고 그해 압도적인 표 차이로 재선에 성공, 38대 대통령에 취임한다. 하지만 그의 부정 행위는 결국 서서히 드러난다. 닉슨은 기자회견에서 “나는 사기꾼이 아니다”라며 기자들을 쏘아붙였지만 결국 그가 가담했다는 증거가 담긴 비밀 테이프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진다. 국회청문회가 열렸고 끝까지 아니라고 잡아떼던 닉슨은 결국 18분 30초가 사라진, 편집된 녹음 테이프를 내놓았다. 거짓말을 일삼고 국민과 국회를 기만한 대통령은 신임을 잃었다. 국회에서 탄핵소추안이 통과되고 탄핵이 확실시되자 1974년, 닉슨은 스스로 사임한다. 장장 2년에 걸친 싸움이었다. 전시관은 이 모든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심지어 헬기에 올라 백악관을 떠나던 닉슨 부부의 모습이 비디오로 무한 리플레이되고 있다. 닉슨의 생가 뒤편에는 닉슨과 그의 아내 패트 여사의 묘지가 있다.
퇴임 후 포드 대통령의 사면으로 법정에 서지는 않았지만 닉슨은 변호사 자격까지 박탈당하고 1994년 뇌졸중으로 사망할 때까지 20년을 초야에 묻혀 살았다. 바로 이곳에서 거행되었던 닉슨의 장례식에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클린턴과 포드, 카터, 레이건, 부시 전 대통령이 참석했고 전 국민의 애도 속에 그 어느 전직 대통령의 장례식보다 성대하게 치러졌다. 전시관에는 그의 마지막 생전 인터뷰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저는 사랑하는 친구, 내 조국 그리고 나의 정부를 실망시켰습니다. 또 무엇보다 조국을 위해 일하기를 꿈꾸는 젊은이들에게 정부와 공무원들이 부패한 집단이라는 인식을 심어주었습니다…. 남은 평생을 저는 이 엄청난 짐을 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1977년 인터뷰 중) 실패한 대통령이지만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처절하게 사죄한 닉슨. 역사는 그의 업적과 잘못 모두를 공평하게 끌어안고 있었다. 그 영욕을 담고 있는 장소는 아이러니하게도 젊은이들이 사랑을 속삭이며 미래를 약속하는 명소가 되어 있다. ‘지도자의 자격’이라는 말이 그 어느 때보다 피부로 다가오는 지금, 닉슨 기념관은 봄나들이 이상의 의미를 안겨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