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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대 재미교포 여성운동가, 그레이스 김의 망부가(忘夫歌)
- 미주 한인 사회에서 지식인의 멘토로 불렸던 노부부가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로 UC데이비스 의과대학에서 35년간 교수로 근무했던 故 김익창 박사와,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25년간 교사로 일했던 그레이스 김(한국명 전경자·86)씨다. 부부는 평생 소외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힘썼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 53년을 함께하는 동안 그들은 최고의 동지이자 친구였으며 연인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아내는 여전히 열심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 “You should keep going.” 당신은 계속 그렇게 살아 달라는 것이 남편의 바람이었다. 사랑스러운 사회운동가 “동호회에서 주최하는 클래식 음악회 준비로 정신이 없어요. 오후에는 신문사에 음악회 기사를 전달하러 가야 해요. 오늘도 너무 바쁘네요!” 그녀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친다. 3년 전, 애너하임의 한 노인병원에서 김익창 박사와 그레이스 김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김익창 박사는 파킨슨병으로 상당히 힘들어하면서도 아내와의 인터뷰를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당시 인터뷰 주제는 ‘부부’였는데 김 박사는 “부부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남편은 나를 커뮤니티 액티비스트(사회운동가)라고 별명처럼 불렀어요. 조용하고 신중했던 그와 달리 나는 말도 많았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곤 했는데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을 사랑해줬지요. 우리는 6·25전쟁을 눈앞에서 겪은 세대입니다. 모두가 못 배우고 가난한 시절에 그래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우리는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소외받는 곳,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늘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1931년 중국 상해에서 나고 자란 김씨는 해방이 되던 해 부친의 고향이었던 평안북도로 돌아왔고, 남북으로 갈리게 되자 다시 38선을 넘어 왔다. 이 과정에서 막내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은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상해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은 임시정부에 돈을 보내며 독립운동을 도왔고, 주위에 고학을 하는 한국 유학생이 있으면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그 시대에 평양신학교를 나온 신여성으로서 이웃과 나누는 것을 평생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고. “여고 시절 내 꿈은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서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일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화여대 의대로 진학했지요. 그런데 입학한 그해 6·25전쟁이 터졌어요. 산속으로 피난을 갔다가 와 보니 집이며 모든 것이 폭격으로 사라져버렸더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군에 입대해 총 들고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어린 아가씨가 얼마나 맹랑했겠어요. 그때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목사님이 하루는 보여줄 곳이 있다면서 저를 데리고 가신 곳이 있어요. 바로 고아원이었죠.” 폭격을 맞고 부서진 학교 건물에 임시로 마련된 고아원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밤낮으로 울부짖었고 아프고 굶주린 아이들을 돌봐줄 손길은 없었다. 그렇게 김씨는 여군 대신 고아원 선생님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김씨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재입학한다. “등록금을 댈 형편이 아니었어요. 서울대 사범대가 등록금도 싸기도 하고 모자라는 교사를 길러내기 위해 장학금도 많이 준다고 하니 좋았지요. 또 고아원 선생을 하면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도 알게 되었고요. 무엇보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으니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요?”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 그녀는 남학생들이 데이트 신청이 쇄도할 만큼 인기가 있었지만 모두 퇴짜를 놓아 별명이 ‘NO’였을 정도로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그중 유일하게 ‘YES’를 한 것이 남편 김익창 박사의 오페라 데이트 신청이었다고. 생전 김익창 박사는 인터뷰 때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탁월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아내를 향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1956년, 김익창 박사가 미국 유학을 떠난 이후 6년 동안, 두 사람은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다. 그 사이 김씨는 숭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용산직업학교를 세워 불우한 형편의 아이들을 지도했다. “6년 동안 우리는 떨어져 있으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았는지 몰라요. 삶에 대한 가치관, 철학, 문학, 음악, 예술, 종교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닮아 있는지 알게 되었죠. 그 시간 동안 다져진 신뢰는 남녀의 사랑 그 이상이었어요.” ‘Dear, Grace’ 1962년, 마침내 두 사람은 미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김익창 박사가 샌프란시스코 마운트 자이언(Mt. Zion) 병원에서 인턴십을 하는 동안 두 아들 데이비드와 다니엘이 태어났고, 남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병원 응급실에서 일해야 했다. 잠을 잊고 살아야 했던 고된 시절이었다. “대단한 정신력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3년 만에 박사과정을 끝내더라고요. 레지던트를 마칠 무렵 남편이 내게 공부를 해보라고 제안했어요. 너무 기뻤죠. 내가 너무나 원하던 거였으니까요.” 김씨는 그 길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원에 진학, 1969년 상담학과 아동발달학으로 교육 석사학위를 받는다. 캘리포니아의 진취적인 교육 도시 데이비스에 정착하면서 부부는 본격적으로 소수민족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게 된다. 김익창 박사는 임상정신과 의사로서 평생 소수민족의 정신의학에 관심을 두었다. UC데이비스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문화가 다른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들의 이해’를 강조하며 대학에 강좌를 만들고 끊임없이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다문화 정신의학 분야의 권위자로 자리 잡았고 그의 노력으로 현재 미국 정신의학협회에는 ‘화병’이 정식 병명으로 등록되어 있다. 김씨는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언어와 문화 차이로 어려움을 겪는 소수인종 학부모들과 학교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청했다. 특히 인종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차별도 받지 않도록 앞장섰다. 특히 1980년부터 시작했던 미주 한국일보의 질문과 응답 형식의 칼럼 ‘Dear, Grace (그레이스에게)’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날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부모들이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려움이 많다고요.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궁금한 것을 편지로 보내면 답을 주겠다고 했는데… 세상에, 편지가 어마어마하게 와서 너무 놀랐어요. 궁금한 것은 많은데 어디에 물을 곳이 없었던 거예요. 한국말을 하는 선생님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 학교와의 마찰, 인종문제를 비롯해 마약, 섹스, 가출 문제까지. 그레이스 김은 한인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고 칼럼은 1990년까지 계속됐다. 나눔, 그 위대한 유산 이들 부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부’에 대한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입양아 단체, 아시안 청소년 장학재단 등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하고, 무료 진료와 상담 등의 봉사활동을 해왔던 부부가 은퇴하면서 제대로 일을 치른 것이다. 2006년 김익창 박사가 35년간 몸담았던 UC데이비스 대학에서 나왔을 때, 이들은 캘리포니아 실비치의 한 은퇴촌에 작은 집을 마련한 뒤 나머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20여 개 단체에 전달한 기부금은 적게는 5만 달러, 많게는 25만 달러에 이르렀다. 모두 익명으로 한 기부였다. 이 놀라운 기부는 당시 UC데이비스대학에서 이들이 내놓은 기부금 25만 달러로 ‘다문화정신의학센터’를 만들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사실 그만한 목돈이 생긴 데는 숨은 사연이 있어요(웃음). 젊은 시절 내가 하도 많이 기부를 하고 다니니까 남편이 매달 월급의 반만 받고 나머지는 은퇴연금으로 저축을 하자고 한 거예요. 은퇴할 때 그렇게 돈이 쌓인 줄 몰랐어요. 평소 돕고 싶었던 단체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는데 얼마나 신이 나던지. 남편과 아주 펑펑 잘 썼어요!” 고마운 것은 부모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여준 두 아들이었다. “그때 아이들이 한 말이 잊히지 않아요. 돈이 필요하면 지금 이야기하라고 했죠. 두 아이 모두 자신들을 키워준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며 원하는 곳에 다 쓰라고 하더라고요. 아, 우리가 아이들을 잘 키웠구나. 갑절로 행복해지더라고요. 두 아들 내외 역시 어려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기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2009년 데이비드 김씨가 지난 오바마 정부의 교통부 차관보에 임명됐을 때, 그가 남긴 말이 있다.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만 있다면 언제나 남을 도울 힘이 있다고요.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다른 방식으로 도울 수 있다는 거죠. 바로 그 나눔의 정신이 우리 가족을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고개 들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인은 돈을 많이 벌어도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의 삶은 제 미래를 위한 최고의 투자였습니다. 부모님의 기부가 저를 성공적으로 키운 셈입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가와 유학생을 돕던 부모에게서 김씨에게로, 이것이 다시 김씨의 아들들에게로 이어진, 참으로 위대한 유산이다. To my forever love… ‘김 여사의 해피 에너지’는 은퇴촌에서도 빛을 발했다. 김씨는 입주한 은퇴촌 실비치 레저월드의 한인회 회장이 되어 커뮤니티 간 화합에 앞장섰다. 한인 노인들을 위해 각종 세미나와 교양 프로그램을 속속 만들어내는가 하면 지역구 선거에 한인 후보자가 나오면 발벗고 나서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물론 그 뒤에서 묵묵히 김씨를 돕는 사람은 남편 김익창 박사였다. 이 무렵 김익창 박사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면서 부부에게는 예상치 못한 슬픔이 찾아왔지만 이 또한 차분히 받아들였다. “한동안 멍했지요. 왜 이런 병에 걸리게 됐을까. 젊었을 때 잠을 너무 못 자고 힘들어서였을까…. 하지만 남편은 곧 받아들이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어요. 파킨슨병은 관리만 잘하면 당장 어떻게 되는 병이 아니라면서요. 그렇게 8년을 투병했지요. 그 사이 자신의 인생을 덤덤히 돌아보며 두 권의 자서전도 집필했고요.” 병세가 악화되어 노인병원에 입원하고 2년 동안, 부부는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기분이었다고. 아내는 매일 아침 예쁘게 화장을 하고 직접 구운 쿠키를 만들어 남편을 만나러 갔고, 남편도 눈을 뜨면 아내를 기다렸다. 전립선암이 발병했을 때는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김 박사는 항상 웃는 얼굴로 아내를 맞아주었다. 병원 스태프에게 ‘She is my forever love’라고 소개해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편지 한 장을 건네더라고요. ‘결혼해줘서 고맙고 행복했다. 아파서 미안했고 먼저 가서 또 미안하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슬픈 삶을 살까봐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끝에는 늘 하던 말, ‘my forever love’라고 적어놓았더군요. 마지막 러브레터였어요(웃음).” 김익창 박사가 떠난 후, 그녀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문득 자신이 이렇게 될까봐 걱정하며 병실에서 간신히 손을 움직여 편지를 썼을 남편이 떠올랐다. “아니다. 남편이 가장 좋아했던 내 모습으로 끝까지 열심히, 즐겁게 살자. 그렇게 결심했어요. 나는 지금 아주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은퇴촌에서 음악회도 열고 노래도 부르고 세미나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러다 남편이 너무 그리울 때는 조용히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준비되었으니 이제 데려가셔도 됩니다. 루크를 만나게 해주세요…’ 라고요(웃음).” 오랜 대화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열심히 포즈를 취해주는 그녀의 미소가 캘리포니아 햇살만큼이나 화사하다. 누구에게나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이런 모습을 남편은 사랑했으리라. “Good to see you!” 쿨하게 인사를 남기며 보무당당히 사라지는 ‘유쾌한 그레이스씨’. 그녀와의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
- 2017-11-13 1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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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의 명상]올 추석에 꼭 해봐야 할 고민
- 금년은 유래 없는 10일간의 추석 명절 휴일로 국민들은 긴 휴식의 시간을 맞이하게 됐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젊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으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뉴스를 내보낸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명절을 중시하는 어른들에게는 괘씸한 젊은이들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우리 국민 가운데는 명절만 되면 매년 두 번씩 반복되는 교통체증을 겪으면서도 성묘를 하기 위해 고향을 찾는 사람이 많다. 꼭 성묘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가족과 지인들을 만난다는 즐거움으로 고향을 찾는다. 그런데 명절이 끝난 후에는 부작용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가족 간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고 이혼율이 급격히 높아진다는 통계도 보인다. 어찌된 일일까? 즐거운 명절이 행복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명절의 의미를 되새겨봐야 한다. 명절은 오랜 전통을 계승하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 속에는 우리 민족이 가진 특성과 농경문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계승과 소멸을 되풀이하면서 전통은 우리 앞에 서 있다. 관혼상제를 중시하던 문화를 돌아보면 지금 우리의 전통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관례는 단발령을 계기로 자취를 감춰버렸고, 혼례는 서양식으로 대부분 진행되고, 상례 역시 장례식장이라는 장소를 설치해 상조회사에서 대신 치루고 있다. 그나마 남은 것이 제사인데 그 역시 원형이 변형되고 있다. 이번 추석 명절에도 조상들의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하고 차례를 지낼 것이다. 그런데 농경사회에서 만들어진 성묘의 풍습은 급속한 도시화와 핵가족화로 인해 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장례 방식이 매장에서 화장으로 옮겨가면서 묘지 문제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지 오래되었다. 이러한 형태로 진행되면 성묘를 가는 사람들도 줄어들 것이고, 한 세대만 지나면 성묘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70~80세가 넘은 어른들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 조상의 묘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는 일일 텐데, 그 후손들은 그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마음도 있고, 심지어 손자 세대로 가게 된다면 이마저 사라질 처지에 놓여 있다. 변화는 자연스런 이치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고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과거에서 현대로, 현대에서 미래로 변화하는 것을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게는 성묘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에는 제사를 언제 지낼 것인가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집안도 많다. 과거에는 늦은 밤 시간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났지만 요즘에는 직장 문제로 늦은 시간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이 불편해서 제사시간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만약 시간을 바꾸지 않으면 다음 날 결근을 하거나 휴가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제사를 지내는 일 자체가 후손으로서의 의무감 이외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제사 절차나 상차림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제사를 지내지 않거나 다른 종교 시설에 모시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기 싫어서 종교를 바꾸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씁쓸할 뿐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정말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 성묘의 방법을 바꾼 가족이나 문중도 많다. 흩어진 조상님들의 산소를 찾아 성묘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비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제는 조상들의 산소를 한곳에 모아놓고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는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이러한 문제를 두고 심하게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성묘나 제사가 사라지는 것보다 오히려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켜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통을 지키자니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고, 전통을 버리자니 불효자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 현실 속에서 누구나 진퇴양난의 고민을 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예학자였던 신의경 선생은 개장(改葬)을 논의하면서 “옛날의 개장은 분묘가 어떤 이유에서 붕괴되어 시신이나 관이 없어질 우려가 있을 때 하는 것이었으나, 요즈음에는 풍수설에 현혹되어 아무 이유가 없이도 천장(遷葬, 천묘)을 하는데, 이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장(移葬)이나 개장은 특별한 이유 없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이것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훼손되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집안이 번창하기를 기대하면서 조상의 묘를 함부로 이전하거나 개장하는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상을 한곳에 모시고 성묘를 하는 것은 부득이한 선택일지 모른다. 과거 매장하던 풍습에서 화장하는 풍습으로 바뀐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지만 이제 70% 정도의 국민이 화장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신을 화장해 그 유골을 그릇에 담아 봉안당(奉安堂)에 모시는 가족이 늘고 있다.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국가의 정책으로 화장을 권장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봉안당이나 수목장이 관심을 받는 것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필자가 평소에 노인을 많이 상대하고 있지만, 과거처럼 매장을 고집하는 사람은 드물다. 조상들의 묘를 돌보는 것은 자신들의 책무이지만 정작 본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후손들이 잘 해내기도 어렵고 선산에 묻혀도 수시로 돌볼 자녀도 많지 많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스스로 미래에 대해 포기하는 것일까.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선진국이 자신의 정체성을 전통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의 고민은 불편한 진실도 아니고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질문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를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해준 조상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죽음의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시대가 달라지면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도 달라지고 방법도 달라진다.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이 세상에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가족과 친척 혹은 문중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좋은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어떨까. 그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도리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다. 이번 추석은 행복한 명절이 되기 위한 지혜를 모아보면 좋겠다.
- 2017-09-30 1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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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장년 연예인, 예능 프로그램 통해 화려하게 부활!
- 70세의 중견 배우 윤여정이 인기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 바로 젊은 연예인과 신세대 스타들의 전쟁터로 변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예능 프로그램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윤여정은 인도네시아 발리 인근 섬에서 작은 한식당을 열고 운영하는 과정을 관찰 예능으로 담아낸 tvN 에서 사장 겸 요리사로 나섰다. 윤여정은 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젊은이들에게 꼰대 짓을 하지 않는 바람직한 어른 이미지를 보여주며 시청자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상승한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맹활약하고 있다. 에서 특유의 소탈함과 함께 현명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 81세의 신구 역시 에서 아르바이트 점원으로 열심히 일하면서도 젊은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고 KBS 에 출연해 기상천외한 입담을 과시하며 장·노년 연예인 예능 스타 붐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70세의 여배우, 81세의 원로 남자 연기자. 한국 대중문화와 연예계에서 이들은 어떤 의미일까. 이 나이쯤 되면 일반적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은커녕 비중 있는 조연 맡기도 힘들다. 가족이 밥 먹는 장면에만 출연하는 ‘식탁용 배우’로의 전락을 감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견 연예인들의 의미 있는 반란과 도전이 시작됐다. 그 반란과 도전의 진원지는 바로 젊은 연예인의 전유물이자 10~30대 젊은 시청자들이 주로 시청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중장년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와 끼, 면모를 보여주고 친근감을 배가시키며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한 이미지의 확장과 인기 상승을 바탕으로 드라마와 영화의 주연으로 나서는 선순환이 이뤄지면서 중장년 연예인의 재스타화가 속속 이뤄지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중장년 연예인의 재발견 창구로 부상시킨 것은 바로 2013년 방송된 tvN 다. 황혼의 해외 배낭여행 포맷으로 진행된 는 파격적으로 노년(老年) 예능을 표방하며 당시 78세였던 이순재, 77세 신구, 73세 박근형, 69세 백일섭을 출연시켰다. 를 연출한 나영석 PD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많은 우려를 했다. 중장년 예능 프로그램이 전무한데다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는 주로 젊은 층이었기 때문이다. 촬영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원로 연기자 이순재·신구·박근형·백일섭씨의 모습을 보면서 성공을 예감했다”고 말했다.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은 에서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하고 의외의 재미있는 모습을 드러낸데다 연륜이 주는 현명함까지 전달돼 할배 신드롬이 일었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장·노년 출연자가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의 성공 이후 방송사들은 경쟁적으로 중장년 연예인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쏟아냈다. 또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젊은 연예인들과 함께 고정 멤버로 출연하는 중장년 연예인도 많아졌다. 결혼을 졸업했다는 고백으로 우리 사회에 ‘졸혼(卒婚)’을 화두로 던지며 공론화했던 백일섭(73)과 이혼 이후 혼자 살며 다양한 취미생활과 여행을 하며 활기차게 장년의 삶을 사는 김용건(71)은 각각 KBS 과 MBC 를 통해 살림살이에서 여가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들은 혼자 사는 장·노년 사람들의 생활 트렌드를 이끌 뿐만 아니라 유익한 삶의 정보까지 제공해 사랑을 받고 있다. 김국진(52), 강수지(50) 등이 출연하는 SBS 과 김건모(50)가 나오는 SBS 는 중년 연예인의 이미지 확장과 인기 부활 예능 프로그램 역할을 하고 있다. 혼자 사는 중년 연예인들이 여행을 하거나 미션, 놀이를 하면서 싱글 중년의 삶과 문화,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실태와 인식을 보여주는 에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로맨틱한 김국진의 모습, 소탈한 김완선의 이미지 등을 엿보면서 많은 사람이 중년 연예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의 출연을 통해 천진무구한 모습과 충격적인 행태를 보인 김건모에게 대중은 더욱더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이순재·윤여정, 백일섭·신구·김용건·이한위·김구라를 비롯한 중년 및 장·노년 연예인들이 이미지를 확장하고 새로운 모습과 끼를 선보이며 예능 스타 반열에 오르고 있다. 김용건은 “를 통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는 사적인 부분을 편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하더라.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이 드라마나 영화의 캐릭터 확장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며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중년, 장·노년 연예인의 재발견과 인기 부활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젊은 시청자들에게 중장년, 노년층에 대한 이해의 접점을 확장하는 계기도 마련해준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노년 예능 프로그램을 선보인 나영석 PD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장·노년 연예인의 모습을 보면서 젊은 시청자들이 이들 세대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알게 되고 이해의 범위도 넓어져 세대갈등 해소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백일섭은 “드라마와 영화를 할 때는 중장년 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와 등 예능 프로그램을 하면서 10~30대 젊은 팬이 많이 생겼다. 거리에서 젊은이들이 사인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 2017-07-17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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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라이프] 중장년 연예인, 예능 프로그램 통해 화려하게 부활!
- 70세의 중견 배우 윤여정이 인기 고공비행을 하고 있다. 바로 젊은 연예인과 신세대 스타들의 전쟁터로 변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다. 예능 프로그램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윤여정은 인도네시아 발리 인근 섬에서 작은 한식당을 열고 운영하는 과정을 관찰 예능으로 담아낸 tvN 에서 사장 겸 요리사로 나섰다. 윤여정은 에서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면서도 젊은이들에게 꼰대 짓을 하지 않는 바람직한 어른 이미지를 보여주며 시청자의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상승한 인기를 바탕으로 영화와 드라마에서도 맹활약하고 있다. 에서 특유의 소탈함과 함께 현명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준 81세의 신구 역시 에서 아르바이트 점원으로 열심히 일하면서도 젊은 사람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였고 KBS 에 출연해 기상천외한 입담을 과시하며 장·노년 연예인 예능 스타 붐의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70세의 여배우, 81세의 원로 남자 연기자. 한국 대중문화와 연예계에서 이들은 어떤 의미일까. 이 나이쯤 되면 일반적으로 드라마나 영화에서 주인공은커녕 비중 있는 조연 맡기도 힘들다. 가족이 밥 먹는 장면에만 출연하는 ‘식탁용 배우’로의 전락을 감수해야만 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중견 연예인들의 의미 있는 반란과 도전이 시작됐다. 그 반란과 도전의 진원지는 바로 젊은 연예인의 전유물이자 10~30대 젊은 시청자들이 주로 시청하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중장년 연예인들이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이미지와 끼, 면모를 보여주고 친근감을 배가시키며 시청자의 사랑을 받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통한 이미지의 확장과 인기 상승을 바탕으로 드라마와 영화의 주연으로 나서는 선순환이 이뤄지면서 중장년 연예인의 재스타화가 속속 이뤄지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을 중장년 연예인의 재발견 창구로 부상시킨 것은 바로 2013년 방송된 tvN 다. 황혼의 해외 배낭여행 포맷으로 진행된 는 파격적으로 노년(老年) 예능을 표방하며 당시 78세였던 이순재, 77세 신구, 73세 박근형, 69세 백일섭을 출연시켰다. 를 연출한 나영석 PD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많은 우려를 했다. 중장년 예능 프로그램이 전무한데다 예능 프로그램의 시청자는 주로 젊은 층이었기 때문이다. 촬영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원로 연기자 이순재·신구·박근형·백일섭씨의 모습을 보면서 성공을 예감했다”고 말했다. 이순재, 신구, 박근형, 백일섭은 에서 드라마나 영화 등에서 볼 수 없었던 신선하고 의외의 재미있는 모습을 드러낸데다 연륜이 주는 현명함까지 전달돼 할배 신드롬이 일었고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장·노년 출연자가 인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의 성공 이후 방송사들은 경쟁적으로 중장년 연예인이 출연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쏟아냈다. 또한 예능 프로그램에서 젊은 연예인들과 함께 고정 멤버로 출연하는 중장년 연예인도 많아졌다. 결혼을 졸업했다는 고백으로 우리 사회에 ‘졸혼(卒婚)’을 화두로 던지며 공론화했던 백일섭(73)과 이혼 이후 혼자 살며 다양한 취미생활과 여행을 하며 활기차게 장년의 삶을 사는 김용건(71)은 각각 KBS 과 MBC 를 통해 살림살이에서 여가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모습을 보여줬다. 그들은 혼자 사는 장·노년 사람들의 생활 트렌드를 이끌 뿐만 아니라 유익한 삶의 정보까지 제공해 사랑을 받고 있다. 김국진(52), 강수지(50) 등이 출연하는 SBS 과 김건모(50)가 나오는 SBS 는 중년 연예인의 이미지 확장과 인기 부활 예능 프로그램 역할을 하고 있다. 혼자 사는 중년 연예인들이 여행을 하거나 미션, 놀이를 하면서 싱글 중년의 삶과 문화, 그리고 사랑에 대한 실태와 인식을 보여주는 에서 예전에는 볼 수 없었던 로맨틱한 김국진의 모습, 소탈한 김완선의 이미지 등을 엿보면서 많은 사람이 중년 연예인들에게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의 출연을 통해 천진무구한 모습과 충격적인 행태를 보인 김건모에게 대중은 더욱더 친근감을 느끼고 있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이순재·윤여정, 백일섭·신구·김용건·이한위·김구라를 비롯한 중년 및 장·노년 연예인들이 이미지를 확장하고 새로운 모습과 끼를 선보이며 예능 스타 반열에 오르고 있다. 김용건은 “를 통해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여줄 수 없는 사적인 부분을 편하게 보여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나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부분이 많았다고 하더라. 예능 프로그램의 출연이 드라마나 영화의 캐릭터 확장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며 예능 프로그램 출연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중년, 장·노년 연예인의 재발견과 인기 부활의 전진기지 역할을 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젊은 시청자들에게 중장년, 노년층에 대한 이해의 접점을 확장하는 계기도 마련해준다. 에서 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노년 예능 프로그램을 선보인 나영석 PD는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장·노년 연예인의 모습을 보면서 젊은 시청자들이 이들 세대에 대해 더 많은 부분을 알게 되고 이해의 범위도 넓어져 세대갈등 해소에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백일섭은 “드라마와 영화를 할 때는 중장년 사람들이 나에게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와 등 예능 프로그램을 하면서 10~30대 젊은 팬이 많이 생겼다. 거리에서 젊은이들이 사인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 2017-07-13 0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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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호근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학문의 메마름, 문학으로 적시다'
- , , 등을 통해 우리 사회에 대한 치밀한 분석과 통찰을 담아냈던 송호근(宋虎根·61)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사회학자로 저명한 그가 이번에는 소설가로서 대중과 만났다. 논문이나 칼럼이 아닌 소설을 통해 송 교수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성과 지혜를 를 통해 나누고자 한다. 송호근 교수의 첫 소설 는 지난해 말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소추안이 국회를 통과할 무렵부터 두 달여에 걸쳐 쓴 작품이다. 그는 조선 후기의 무신이자 외교관이었던 신헌(申櫶, 1810~1884)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신헌은 봉건과 근대 사이에 선 경계인이자, 강화도조약을 협상하며 제국의 도래를 내다봤던 선각자로 그려진다. 신헌이 살던 19세기의 모습과 진영논리가 대치하는 21세기 우리 사회의 모습은 송 교수의 머릿속에서 자연스레 오버랩됐다.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신헌이 쓴 가 바탕이 된 소설인데, 당시와 현재 우리의 처지가 많이 닮았더라고요. 미국과 중국의 함대가 맞붙고, 사드 배치 문제가 뜨거운 이슈가 되었는데 내부 싸움에 여념이 없는 현실을 보며 느낀 답답함을 소설의 언어로 표현했어요. 소설이라는 새로운 작법이 낯설긴 했지만, 한번 해보자 하는 마음으로 도전하게 됐죠.” 감성의 바다에서 건진 위로 그렇다면 왜 소설이라는 장르를 택한 것일까? 평소 그가 쓰던 사회과학서나 논문 등으로 보여주는 게 더 편리하지 않았을까? 이에 그는 ‘감동’의 유무 때문이라고 했다. “최근 일어난 사태들을 가지고 논리로만 표현하면 별 감동이 없어요. 140년 전에도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그럼 우린 어떻게 할 거냐, 이 시대에 신헌 같은 인물이 필요하다. 이렇게 규범적으로만 끝나버리죠. 논리만으로는 화해하기 어려운 감정이 있거든요. 사회과학이 다루는 이성보다는, 소설의 언어와 감성이 사람들을 움직일 때가 있죠. 지식의 공유가 아닌 그런 지혜를 나누고 싶었어요.” 사실 그에게 소설은 낯선 장르가 아니다. 대학 시절 문학평론을 쓰며 가까이했고 여전히 소설을 통해 삶의 실마리를 찾곤 한다. “학창 시절에는 줄곧 문학만 봤어요. 현실에 불만이 많아서 그랬던 거 같아요. 현실을 뛰어넘는 방법은 종교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젊을 때이니 종교에 빠지긴 어렵고, 사랑은 가능하긴 하고. 어쨌든 그 두 가지를 리허설해볼 수 있는 방법은 문학밖에 없었으니까요. 문학의 세계가 워낙 넓잖아요. 그 감성의 바다를 유영하면서 살아가는 원칙을 건지거나 신념과 조우하기도 하는 거죠. 소설에는 대개 영웅보다는 요즘 말로 루저(loser)들이 등장하는데, 그들에게 나를 투영하면서 세상을 들여다보기도 했고요. 문학은 내가 사회과학을 하는 힘이자 문제의식의 창고를 마련해주는 존재로 늘 함께했죠.” 감성의 바다에 흠뻑 젖어 지내던 시절을 지나, 사회학자로서 현실을 바라보고 분석하는 동안 그는 갈증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점에서 는 가뭄의 단비처럼 촉촉하게 송 교수의 마음을 적셔주었다. “논리는 사람을 만족시키지 못해요. 어떤 논리를 완결해놓아도 조그만 한 부분에 불과하니까. 그걸 학문이라고 말하죠. 학문은 곧 인식론인데, 그건 이미 루트나 패러다임이 정해져 있어요. 그러니 뭘 해도 배고프죠. 집을 지을 때 뼈대가 학문이라면, 그 집을 어린이집으로 지을지 귀신의 집으로 지을지 정체성을 부여하는 건 문학이에요. 산을 볼 때도 문학이나 예술은 색깔도 모양도 다르게 보는데, 사회과학은 그냥 ‘산’이거든요. 그게 리얼리티이고, 그것을 포착하고 분석하는 데 익숙해져 있죠. 말하자면 메마른 지식인 셈인데, 지식은 위로가 되질 않더라고요. 이번 소설을 쓰면서는 그런 허기를 달랠 수 있었어요.” 경계인의 고독, 공(共)으로 채워야 소설을 읽다 보면 이따금 작가의 모습이 투영된 인물을 발견하게 된다. 에서 자신의 모습을 이입한 인물이 있냐고 묻자, 그는 단번에 “신헌 그 자체”라고 대답했다. 작가와 주인공,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무엇일까? “경계인이라는 점이 같아요. 신헌은 문과 무를 겸한 유장인데, 중세와 근대가 마주치고, 유교와 천주교가 공존하는 경계에 서 있던 인물이죠. 나 역시 과거와 미래, 내부와 외부를 오가며 시세와 처지를 엿보고 있잖아요. 최근 일어난 사건들만 봐도 지식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어요. 학자는 선택하지 않아도 되거든요. 결정은 정치인이 하는 거죠. 그저 경계인으로서 담벼락만 걷고 있을 뿐이에요. 양쪽을 흘깃흘깃 쳐다보고 고민하고, 계속 가슴속에서 갈등하고. 그런 모습이 신헌에게 투사된 거죠.” 베이비붐 세대의 맏형뻘인 그는 또 다른 경계에 서 있다. 바로 세대 간의 경계다. 아버지 세대를 봉양하고 아들 세대를 부양하는 끼인 세대로서 그는 불만과 설움보다는 자책과 인정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베이비부머는 세대와 권력의 경계에서 밀려나고 있죠. 그 설움이 대단할 거예요. 물론 우리도 한때는 내 아버지 세대를 밀어냈죠. 그러나 베이비붐 세대가 유독 예민한 것은 그 짐이 증폭된 세대이기 때문이에요. 흔히 경제성장의 주역이라고들 하잖아요. GNP(국민총생산)만 해도 1970년대와 현재가 100배 이상 뛰었으니까요. 그만큼 경제적 부담, 양육의 부담, 효도의 부담 등이 증폭된 거예요. 또 부모 세대에게 받은 게 없으니 자식 세대에게 그 한을 많이 풀었죠. 지금의 혼수문화도 돌이켜보면 다 우리 세대가 만들어놓은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그 덫에 우리가 걸려들어버렸죠. 그러니 다 큰 자식 껴안고 살 수밖에요.” 송 교수가 베이비붐 세대의 삶을 그린 라는 책 제목처럼, 세대의 경계에 선 그들은 소리내 울 수조차 없는 처지에 놓였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상황일수록 나 자신만이 아닌 ‘공(共)’의 개념을 생각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세대는 평생 사(私)를 위해 살았거든요. 나의 가족, 나의 직장 이게 세계관의 전부예요. 공적인 자산? 그건 내가 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해왔죠. 그러나 서양의 경우를 보면 ‘사’가 너무 힘들다 보니 ‘공’으로 돌리는 방법을 찾거든요. 그게 바로 복지죠. 아주 작은 일이라도 좋아요. 아이들 등하굣길을 돕거나 동네 청소를 하거나 구청에 작은 사랑방을 얻어 주니어 멘토링을 한다거나. 그래야 세대 간 조화를 이루고, 일종의 소득 자원도 창출할 수 있다고 봐요.” 그 언젠가 어느 경계에서 또다시 로 시작한 대화는 자연스레 우리 사회에 대한 고찰로 이어졌다. 소설가로 마주했던 그는 어느 순간 다시 사회학자의 모습으로, 그렇게 학문과 문학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었다. 혹시 이번 기회에 소설가의 길로 접어드는 것은 아닌지 슬쩍 질문을 던지자 역시 경계인다운(?) 대답을 내놓았다. “갑자기 소설가로 등단했다기보다는 예전부터 갖고 있던 것 중 하나를 드러낸 것에 불과해요. 앞으로는 뭘 할지 모르는 거죠. 희곡이나 시나리오를 쓸 수도 있고. 소재도 생각해놓은 것은 많아요. 다만 어느 순간에 절박한 무언가와 만나서 터져 나올 때, 그때 잠시 논리 밖으로 외출하게 되겠죠. 탄핵처럼… 아마 또 그런 계기가 있지 않겠어요? 암울하잖아요. 우리가 도대체 어떻게 살아왔나. 또 그 속에서 생기는 딜레마. 논리로 풀 수 없는 세상과의 부딪침. 그런 게 터져 나오는 거죠. 뭐, 그렇게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어요. 돼도 안 돼도 그만인 거고요.”
- 2017-07-12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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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월의 추천 전시, 도서, 영화, 공연
- ◇ exhibition 보그 라이크 어 페인팅: 사진과 명화 이야기 일정 10월 7일까지 장소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창간 125주년을 맞은 잡지 의 아카이브에서 엄선한 이미지들로 패션 사진과 명화의 관계를 재조명한다. 세계 3대 패션 사진작가로 불리는 파울로 로베르시, 피터 린드버그, 어빙 펜 등의 작품들을 통해 고흐, 달리, 클림트 등의 명화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사진의 대상이나 구성, 기술은 피카소의 입체파 회화에서 앤디 워홀의 팝 아트에 이르기까지 시대와 장르를 아우른다. 특별 섹션으로 마련한 ‘보그 코리아’에서는 전통 수묵화의 절제미와 여백이 드러나는 패션 이미지들을 소개한다. 김영태의 편지들: 문인교신전 일정 7월 12일까지 장소 영인문학관 초개 김영태 시인의 서거 10주기를 맞아, 그가 생전 문인들과 주고받은 편지들을 모았다. 아울러 시인으로부터 편지를 받은 이들의 자료까지 대여받아 함께 살펴볼 수 있도록 전시했다. 문인들의 편지인 데다가, 두 사람 간 주고받은 편지가 모두 남아 있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그 의미와 특별함을 더한다. 특히 마종기 시인과 주고받은 편지는 160통에 달한다. 안수길, 어효선, 김구용, 박재삼 등 작고한 문인들의 편지뿐만 아니라 초개 선생이 직접 그린 이병주, 최인훈, 최인호 등의 캐리커처까지 만날 수 있다. ◇ book 인생의 재발견(바버라 브래들리 해거티 저·스몰빅인사이트) 탐사 전문기자로 30년간 지낸 저자가 중년을 둘러싼 8가지 질문에 대한 해답을 직접 파헤친다. 심리학, 생물학, 사회학 등 각 분야 전문가들의 인터뷰와 상실을 경험한 이들의 사례를 통해 중년 이후 삶의 의미를 이야기한다. 전문가와 함께 준비하는 스마트 라이프 디자인(삼성생명 은퇴연구소·미래의창) 연금, 재테크, 상속 문제에서부터 건강, 여가, 관계, 자기계발에 이르기까지 노후 대비에 관련한 전반적인 정보를 담았다. 중장년은 물론 2030세대에게도 도움이 되는 전문가의 현실적인 조언이 실려 있다. ◇ movie 플립(Flipped) 를 연출한 롭 라이너 감독이 2010년 미국에서 발표했던 영화로, 네티즌의 성원에 힘입어 국내 개봉을 확정지었다. 공식 개봉 전부터 네이버에서 영화 평점 10점 만점의 9.45점을 기록하는 등 호평을 얻었다. 포스터 속 ‘누구나 일생에 한 번 무지개처럼 찬란한 사람을 만난단다’라는 문구는 영화 속 주인공의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하는 대사로 애틋한 감성이 묻어난다. 개봉 7월 13일 장르 로맨스 감독 롭 라이너 출연 매들린 캐롤, 캘런 맥오리피, 존 마호니 등 프란츠(Frantz) 상실을 경험한 독일 여자와 비밀을 간직한 프랑스 남자 사이의 거짓과 진실, 용서와 사랑이라는 미묘한 감정을 그렸다. 프랑스와 독일이 겪은 전쟁의 아픔을 실질적으로 담아내는 등 리얼리즘에 초점을 둔 작품이다. 주인공의 내적 갈등을 섬세하고 깊이 있게 표현한 여주인공 폴라 비어는 이 영화로 2016 베니스영화제 신인여우상을 받았다. 흑백과 파스텔 톤으로 담아낸 영상은 클래식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개봉 7월 20일 장르 드라마 감독 프랑수아 오종 출연 피에르 니네이, 폴라 비어 등 ◇ stage 김씨네 편의점 캐나다에서 편의점을 운영하는 ‘미스터 김’의 인생 후반전과 가족의 모습을 그렸다. 자신의 인생 이야기가 자식을 통해 이어지길 바라는 부모 세대, 그리고 그런 부모와는 다른 정체성으로 살고자 하는 자녀 세대의 갈등을 유쾌하게 풀어나간다. 장소 백성희장민호극장 일정 7월 13~23일 연출 오세혁 출연 장용철, 최현미, 이화정 등 나폴레옹 나폴레옹과 그의 연인 조제핀, 노련한 정치가 탈레랑, 세 사람을 주축으로 한 나폴레옹의 웅장한 여정이 펼쳐진다. 객석과 무대에 40문의 대포가 설치될 ‘워털루 전투’, 다비드의 명화 ‘나폴레옹의 대관식’ 등 역사적 사건을 생생하게 재현한다. 장소 샤롯데씨어터 일정 7월 15일~10월 22일 연출 리처드 오조니언 출연 임태경, 한지상 등 캣츠 화려한 무대와 음악으로 남녀노소에게 사랑받는 뮤지컬 의 오리지널 팀이 내한한다. 이번 공연은 더욱 역동적인 군무와 더불어 의상의 색깔이나 패턴, 헤어스타일 등이 업그레이드돼 이전 공연과는 또 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장소 국립극장 해오름 일정 7월 11일~9월 10일 출연 맷 안토누치, 애덤 배일리, 로라 에밋 등 1945 동아연극상에 빛나는 작가 배삼식이 이후 6년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1945년 해방 직후, 위안소를 탈출한 명숙과 미즈코의 역경을 통해 요동치는 시대 속 민족의식과 생존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이들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장소 명동예술극장 일정 7월 5~30일 연출 류주연 출연 박윤희, 김정은, 성여진 등
- 2017-07-07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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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 저는요…”, “딸아, 엄마는…”
- 엄마와 딸 사이는 참 신기하다.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이자 함께 의지하고 걸어가는 동반자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해답 없는 갈등 속에서 헤매기도 한다. 서로 상처를 주기도 하고 상처를 치유받기도 한다. 딸이 고집불통이라고 생각하는 엄마와 엄마는 잔소리만 늘어놓는다고 생각하는 딸. 과연 세대 차이일까? 대화의 부재일까? 엄마 박현주(54)씨와 딸 김정윤(24)씨를 만나 속 얘기를 들어봤다. 진로갈등 “운동할래요” vs “공부해라” 체육학과에 재학 중인 김정윤씨는 라크로스 국가대표이자 럭비 국가대표다. 이뿐만 아니라 전국 생활체육 복싱 50kg 이하급에서 우승했을 정도로 타고난 스포츠인이다. 하지만 그가 체육학과에 진학하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엄마의 반대가 심했기 때문이다. “어릴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어요. 하는 운동마다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올 만큼 잘하기도 했죠. 육상이면 육상. 축구면 축구. 하지만 운동하고 싶다고 말하면 돌아오는 엄마의 대답은 ‘안 돼!’ 딱 그 말뿐이었어요. 저는 운동을 정말 하고 싶었는데 부모님이 공부하라고 잘라서 말씀하시니깐 제 입장에선 많이 서운했죠.” 김정윤씨는 자기가 원하는 걸 못하게 하는 엄마를 이해하지 못했다. 엄마의 답변은 그가 운동을 포기해야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운동을 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공부도 어느 정도 하는 애가 어느 날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를 하니까… 아쉬운 마음에 하지 말라고 했죠. 그냥 남들처럼 평범하게 공부하며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엄마는 운동 자체가 싫은 게 아니라 스포츠인으로 살아갈 딸의 불투명한 미래와 현실이 걱정이 됐다. 엘리트 선수가 된다 해도 그 과정까지의 육체적인 고통을 딸이 겪을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끝까지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엄마는 딸을 학원에 보내며 마음을 돌려보려 했다. “여러 학원을 다니면 지칠 법도 한데 그 일정 속에서도 운동을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수학학원 다니니까 검도 보내줘’ 하는 식으로 제게 딜을 해왔어요. 그때마다 허락하면서 ‘아 정윤이는 정말 운동을 해야 되나보다’ 했지만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딸이 체고를 가고 싶다고 했을 땐 무시했어요. 못 들은 척하고…. 그러다 보니 사이가 엄청 안 좋아지더라고요.” 로스쿨 학생인 첫째와 외고를 다니는 셋째, 그 사이에서 운동을 좋아하는 둘째 김정윤씨. 부모 입장에선 그런 딸이 이해가 안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둘째의 부담도 컸으리라. 가장 의지하고 싶었던 존재인 부모에게 지지를 받지 못한 딸과 끝까지 운동은 시키고 싶지 않았던 엄마. “저의 심한 반대에 체육을 하고 싶다는 말을 못해서 정윤이가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성적이 떨어지면 ‘나를 포기하겠지’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이런 상황에 성적까지 떨어지니 상황은 더 나빠졌죠. 눈만 마주쳤다 하면 싸움판이었어요. 전쟁터가 따로 없었죠.” 딸은 엄마가 생각하는 것보다 운동을 더 좋아했다. 그의 체대 진학에 대한 목표는 뚜렷했고 엄마조차 그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왜 부모님은 운동을 한다면 무조건 땀 흘리고 고생하고 힘든 이미지로만 보는 걸까요? 체육학과를 간다고 해서 모두가 운동선수가 되는 건 아니에요. 체육도 하나의 교육과목이자 지식인데. 그 지식으로 뻗어갈 수 있는 건 한계가 없죠. 노인체육, 스포츠마케팅, 스포츠의학, 선수에이전트, 스포츠기자 등 졸업 후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무궁무진한데요. 엄마의 경험으로만 바라보는 시선과 잣대는 불편해요. 저는 제 인생을 살고 싶은걸요.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직업으로도 삼을 수 있다면 정말 매력적인 삶이 될 거예요.” 결국 체대에 들어간 김정윤씨는 물 만난 물고기마냥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취미로 시작한 라크로스는 시작한 지 1년 만에 국가대표가 됐고, 럭비는 친구 따라 갔다 감독님 눈에 띄어 국가대표가 됐다. 그때마다 김정윤씨는 자기도 모르게 서프라이즈 이벤트꾼이 됐다. “귀가하더니 언제부터 언제까지 집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거예요. 왜냐고 물으면 글쎄 럭비 국가대표가 됐다고 합숙을 가야 한다고 그제야 말하는 거 있죠? 그리고 또 다른 날은 트로피를 턱턱 가지고 와요. 이건 또 뭔가… 해서 보면 ‘라크로스 최우수 선수상’ 이렇게 씌어 있어요. 딸이 도대체 어디를 갔다 오는 건지, 뭘 하고 다니는 건지. 볼 때마다 놀랍기도 하고 무서워요(웃음).” 하루아침에 딸은 국가대표가 됐다. 그런 사실을 몰랐던 엄마는 내심 섭섭하다. 비록 딸 앞에서는 투덜대지만 친구들 앞에선 딸 자랑을 늘어놓기 바쁘다. 모든 엄마처럼 말이다. “제가 운동하는 걸 싫어하시니까 이제는 ‘뭐 한다, 어디 간다’ 말 안 하고 다녀와요. 좋은 소리 못 들으니까요. 결과가 좋을 때만 말하는 편이에요. 안 그래도 운동 싫어하시는데 결과까지 나쁘면 더 싫어하실 것 아니에요(웃음). ” 요즘 엄마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다. 라크로스에 이어 럭비와 복싱을 시작한 딸이 혹여나 다치진 않을까 조마조마하다. “럭비가 제일 걱정이죠. 하지 말라고 몇 번을 말렸어요. 잘못하면 크게 다칠 수 있으니까요. 자기는 포지션이 윙인지 윈인지… 다칠 위험이 적다고는 하는데 걱정되는 건 매한가지죠.” “윙이라고! 윙! 말해줘도 모르니 내가 말을 안 하지.” “복싱을 한다고 했을 땐 정윤이 아빠도 반대를 많이 했어요. ‘음침한 곳에서 혼자 샌드백 뚜들기고 있고… 난 너무 싫어’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직접 가보고 정말 아니다 싶으면 그때 다시 생각해봐요’ 하고 우선 설득했죠. 복싱장에 가보니 저희가 생각한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어요. 물론 스파링은 안 했으면 하지만…. 딸은 꼭 제가 우려하는 건 다 하더라고요. 이왕 좋아해서 하는 운동 다치지나 않으면 좋겠어요.” 취업갈등 “사업할래요” vs “취업해야지” 김정윤씨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체육 사업을 시작하는 것이다. “요즘 체육관이 많이 생기고 있잖아요. 운동이 좋아서 왔는데 재미는 없고, 힘들고. 그래서 다시 떠나는 사람들도 많죠. 운동을 배우고 싶어서 온 사람, 그 열정을 끌어올려서 더 흥미를 느낄 수 있게 해주는 체육관을 여는 게 제 꿈이에요.” 이제는 사업이라니! 오늘도 엄마의 한숨은 깊어만 간다. 어른들은 뻥쟁이다. ‘내가 20대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으로 시작해 ‘경험할 수 있는 거 다 해봐. 그때 아니면 못해!’라고 말하며 청춘에게 도전과 희망의 메세지를 던진다. 하지만 정작 본인의 자식이 그러겠다고 하면 반대한다. 참 묘하다. 연예갈등 “하고 싶을 때 하는 것” vs “할 수 있을 때 하는 것” 연애갈등은 연인끼리만 겪는 일이 아니다. 엄마는 도통 딸의 연애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나이에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아 안타까운 마음에 소개팅 자리도 마련해봤지만 딸 김정윤씨는 관심이 없다. “연애는 제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하고 싶을 때 하고 싶어요. 엄마는 할 수 있을 때 해야 한다고 하지만 저의 우선순위는 연애가 아니라 운동인걸요.” 모녀관계는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런데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건 서로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치 않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도 내일도, 또 다른 갈등은 끊임없이 생겨나겠지만 이 또한 모녀 사이에 누릴 수 있는 특권이라 생각해본다.
- 2017-06-26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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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정의 달, 효도를 다시 생각하자
-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효도를 바라보는 관점에 있어서 부모 세대와 자녀 세대 간 인식 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효도를 하여야 하고, 받아야 하는 입장에 선 시니어들은 고민이 깊어간다. 즐거워야 할 가정의 달에 설ㆍ추석 명절 스트레스처럼 ‘가정의 달 스트레스’를 어깨에 짊어진 안타까운 현실이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오면 반갑고, 가면 시원하다고 한다. 효도를 받는 입장에서는 이처럼 전통적인 혈연ㆍ정서적 의미의 효도를 바라고 있다. 필자는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입이 귀에 붙는다. 옛날 할아버지ㆍ할머니께서 손자들에게 내리 사랑하셨던 것처럼 손주가 있는 자체가 축복이다. 뺨을 비비고 껴안아주면서 따뜻한 체온을 느끼는 것이 행복이다. 효도를 하는 입장인 자녀 세대는 용돈, 비상시 목돈 등 부양료 지급 등을 우선순위로 꼽아 경제ㆍ물질적 지원 의미로 해석하는 경우가 많은 것이 지금의 세태다. 지금은 맞벌이하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형편이다. 숨 가쁜 직장생활과 고달픈 육아 등으로 부모가 원하는 효도의 실천이 쉽지 않다. 시니어 세대처럼 전업주부는 꿈꾸기 어려운 옛 이야기가 되었다. 오히려 시니어는 손주들을 돌보는 일을 즐거운 마음으로 도맡아야 주어야 한다. 이것이 정서적 교감을 하는 좋은 계기가 된다. 자녀 세대가 효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하는 것을 단순히 물질만능주의로 해석해서 안 되는 것이 현실이다.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 효도의 개념도 변하고 있음을 속히 인식하여야 한다. 자녀들이 부모가 필요할 때 미리 알아서 티 나지 않게 보살펴주는 지혜를 익혀야 한다. 내가 필요하다고 부르거나 찾아가는 일을 삼가야 한다. 그들은 시니어보다 더 어렵게 살고 있다고 이해하여야 한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자식이 그 후에는 부모 봉양을 나 몰라라 해서 결국 효도계약서까지 쓰는 게 세간의 화제였다. 효도의 정도에 따라 자식을 차별하여 상속분쟁ㆍ폭탄이 터져 풍비박산한 경우도 종종 보아왔다. 부모와 자식 세대 간 갈등이 계속 늘어나자 국회에서는 불효자방지법이 발의돼 계류 중이다. 아무리 법으로 효도와 부양 의무를 규정하더라도 효도의 총량을 수치적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부모와 자식이 평상시 대화를 통해 인식의 차를 좁혀 가는 게 가장 중요하다.
- 2017-05-08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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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낙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 “지인들이 부르면 불원천리,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요”
- 미술을 애호하는 의사? 의료활동을 가끔 하는 미술 전문가? 이성낙 가천의과대 명예총장(79)을 지칭할 때 헷갈리는 이름표다. 베체트병 최고의 권위자인 그는 가천의과대 총장 퇴임 이후 일흔의 나이에 미술사 공부를 본격 시작했다. 의학 박사이자 미술사학 박사로서 그는 (사)현대미술관회 회장, (재)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을 지내는 한편, 다양한 매체에 문화 관련 칼럼을 기고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젠 문화인으로서의 명성과 활동이 의료인의 경력을 압도할 정도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장 인터뷰를 약속한 날, 그는 최근 한 달여 유럽 미술관 전시회를 혼자 순례하고 왔다며 문화의 향취에 젖은 표정이 역력했다. 사진 촬영을 생각지 못하고 평상복(?) 차림으로 와 어쩌냐고 걱정을 했지만 중절모에 세련된 비즈니스 캐주얼, 적당히 손때 묻은 가죽가방을 멘 차림은 단아한 문화인 그 자체였다. 퇴임 후 미술사 공부를 시작, 박사학위를 받으셨습니다. 취미로 즐기셔도 될 텐데 굳이(?) 박사학위에 도전하신 이유가 있었나요? “한국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연구, 이것은 한국에서 저 말고는 할 수 없는 분야란 절박감과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내가 그간 모은 자료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가 된다. 내가 책임지고 반듯한 논문으로 남겨야 국내외로 인용될 것 아닌가’라는 사명감에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2008년 총장직을 사임하고, 사석에서 ‘초상화에 나타난 피부병 관련 자료가 많은데 어떻게 넘겨줄지 고민 중’이라고 털어놓았습니다. 그때 좌중에 있던 유홍준, 이태호 교수가 ‘대학원에 들어와 연구’를 하라는 조언을 하더군요. 그 말이 제가 평소에 갖고 있던 사명감을 부추겼다고나 할까요.” 그가 피부과 교수로서 초상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64년 뮌헨의과대학 졸업 종강강의 ‘예술작품에 나타난 피부병’을 듣고부터다. 당시 청년 의사 이성낙은 ‘예술을 의학적 시각에서도 접근할 수 있겠구나’ 하고 비로소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이후 유럽 미술관을 다니며 자료 수집을 하고 틈틈이 공부도 해왔다. 그 열매가 50여 년 만에 맺어진 셈이다. 피부병변을 통해 밝힌 한국 초상화의 특징은 무엇인가요?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우리 선비문화의 정직성입니다. 죽기 전 영정에 해당하는 초상화들을 보면 중국, 일본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바로 정직성입니다. 자료를 본격 수집하기 전엔 우리나라 초상화에는 피부병이 나타나 있지 않은 줄 알았어요. 그런데 막상 관찰해보니 우리나라 초상화의 83%에서 피부병이 확인되어 깜짝 놀랐습니다. 단지 17%만이 정상적인 피부란 이야기인데요. 예컨대 서예가 추사 김정희 선생님은 살짝 곰보였습니다. 이는 전기 등엔 안 나오는 사실이지요. 초상화들을 보면 곰보 자국, 여드름 자국, 다모증 등 실물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시의 초상화는 수염을 그리지 않았지요. 다시 말해 그리는 사람이나 초상화를 요청한 사람이나 담담하게 가식 없이 있는 그대로를 표현하고 그리게 한 것이지요. 피사체가 장바닥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사회의 상위층 양반 그룹이라 지시를 통해 그리지 말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도 담담하게 다 드러내 그리도록 한 것이지요. 조선 선비정신의 진수를 보는 것 같아 희열을 느꼈습니다.” 일흔의 나이에 전혀 다른 분야, 늦깎이 공부에 도전하셨습니다. 취미로 하셨다 해도 녹록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대학원생이나 교수진이 부담스러워하진 않던가요? “퇴직하고, 2009년에 명지대에서 미술사 석·박사과정을 밟기 시작했지요. 공부도 힘들고, 주위의 눈길도 신경 쓰이긴 했지요. 또 뭘 읽어도 금방 잊어버리고…. 그렇다고 포기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한 번 읽었다면 지금은 두세 번 반복해 읽는 노력이 필요할 뿐이지요(하하). 입학 전부터 전직(前職) 명함의 권위에 기대지 않겠다고, 그런 뒷소리를 듣지 않겠다고 단단히 각오했어요. 내 전직이 무엇인지 다 아는데, 불성실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엄청 노력했답니다. 설렁설렁 한다고 할까봐 강의 15분 전에 출석하고, 강의가 끝나면 맨 마지막에 나오는 등 성실한 학생으로서의 책임을 다했습니다. 100퍼센트 출석은 물론이고요. 무엇보다 큰 기쁨은 강의를 통해 그간의 부분적 지식들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입니다. 구슬이 한 줄로 꿰어지는 기쁨에 비유할 수 있어요. 늘 가르치던 입장에서 배우는 입장으로 돌아가 젊은 30대들과 동료가 된 재미도 적지 않았습니다.” 아주대 의대 학장과 가천의과대 총장으로 지내던 시절, 예술·인문·문화학을 정규 강좌로 개설해놓고 의학도들에게 의무적으로 듣도록 하셨습니다. 인문학을 이처럼 앞장서 강조해온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인문학은 공감학입니다. 여유가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고 성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요. 공연, 전시회, 책을 보며 우린 사람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지 돌아보고 경계하게 됩니다. 영국에선 유명 연극배우에게 ‘Sir’라는 칭호를 줍니다. 정치가, 기업인보다 높이 평가하는 거지요. 배우는 황제, 살인자, 거지 등 인간의 다양한 삶을 펼쳐 보이며 다양한 인격을 구현해냅니다. 또 문학 서적을 읽으며 그 안에서 비겁한 사람도 보고, 정의로운 사람도 보고, 용감한 사람도 봅니다. 그들의 갈등을 제3자의 눈으로 보며 경계하고 배울 것이 무엇인지 의식을 갖게 하는 것, 그것 때문에 예술과 인문학이 중요하지요. 생명을 다루는 직업인 의료인에게도 특히 필요한 학문입니다.” 실제로 총장님 삶에서 인문학과 예술이 문제해결의 마스터키로 작용한 적이 있는지요? “(하하) 네, 제가 독일 유학을 갔을 때입니다. 1950년대 말이니 한국인 유학생이 흔치 않을 때였지요. 기숙사 룸메이트가 저를 노골적으로 무시했습니다. 늦은 가을 기숙사로 들어가는데 룸메이트가 베토벤의 을 듣고 있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베토벤!’ 하고 탄성을 질렀지요. 그날 그 말을 들은 친구와 밤새도록 베토벤 얘기를 했어요. 그 전까지는 한 달 동안 서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사이였는데 말이죠. 문화 예술을 통해 서로 소통하고 공감한 덕분이지요.” 인문학은 세대, 국가, 민족을 넘어 소통과 공감의 가교로 자리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는 “진정한 교육은 잘난 사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못난 사람, 없는 사람을 어떻게 일으켜 세우는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명문대 진학률을 평가의 잣대로 삼는 현행 입시체제는 잘못됐다, 사람의 아픔에 연민을 느끼고, 함께 나누고자 하는 인문학적 교육 인식이 필요하다”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흔히 십년지기(十年知己)라는 말도 있듯이 십 년 이상 알고 지낸 사이를 오래된 인연이라 표현합니다. 총장님을 안 지 저도 십 년 이상 됐는데요. 뵈면 ‘70년지기’ 유치원 친구들과 서로 이름을 부르며 친하게 지내시는 모습이 참 정겹습니다. 인연을 오래 유지하시는 비결이 무엇인가요? “살아보니 사람에게 복 중의 최고 복은 인복(人福)이더군요. 돌이켜보면 친구, 학교 은사 등 제 주위엔 늘 인간적으로 훌륭하신 분이 많았습니다. 천운이라 생각하며 감사한 마음입니다. 그분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가슴이 떨리고 행복해져요. 이들과의 귀한 인연을 돌이켜보니 공통점은 지속성입니다. 인간관계를 오래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가꿔나가야 합니다. ‘이 사람이 유용하다, 아니다’라는 계산에서 탈피해 순수하게요. 생각에만 그치지 않고 용건이 없어도 안부를 묻고 꾸준히 관심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나의 우정 유지 방법입니다.” 그는 마르부르크대 의예과에 들어가 처음 만난 독일 친구와 아직까지도 연락을 주고받고 있다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요즘도 일주일에 한 번은 전화를 하고 2014년 박사학위를 받을 때는 부부가 함께 한국까지 일부러 와서 축하를 해주었다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에는 신록의 연둣빛에 감탄해 “문득 네가 생각났다”는 메시지와 함께 사진을 보내니 바로 “어디에서든 우리에겐 봄소식이 들려온다”고 답장이 왔단다. 삶의 진정한 행복은 큰 행운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들과의 소소한 일상 나눔에 있다는 고백이었다. 그의 말을 들으며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에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어른들은 신세대에게 자신들의 풍부한 경험을 나눠주고 싶어 합니다. 신세대는 ‘꼰대의 잔소리’로 거부감부터 표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총장님의 세대 간 소통의 지혜는 어떤 것인지요? “한마디로 역지사지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들으면 어떤 기분이 들까, 입장을 바꿔 미리 생각해보는 것입니다. 또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되도록 가르치려 들지 않아요. 지나가는 말처럼 사례를 들어 이야기하지요.” 이외에도 이 총장이 잘 쓰는 세대 간 소통 방법은 시사 현안을 갖고 그때그때 간단한 화두를 던지는 것이다. 그는 미술을 전공하는 손녀와도 현안에 관한 미니토론을 카톡으로 소소하게 나누곤 한다. 얼마 전 마네의 그림 를 패러디한 을 국회의원회관에 전시한 것이 문제됐을 때도 “예술에 있어서 역지사지란 무엇인가, 예술가는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가 등을 생각해보면 좋겠구나” 하는 식으로 질문을 던지고, 간단히 코멘트를 해주며 손녀와 대화를 했다. 일방적인 주입보다는 사고의 확장을 이끌어내기 위해 인도하는 식의 대화 방식이다. 자제, 제자분들에게 평소 강조하시는 인생의 가치는 무엇인지요. “첫째도 둘째도 정직입니다. 제가 의미하는 정직은 자기관리를 솔선수범해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퇴직할 때 ‘대과(大過) 없이 마쳤다’란 말을 관용어처럼 쓰지 않습니까. 그러나 혼탁한 현실에서 막상 이를 실천하려면 쉽지 않습니다. 부정이 만연한 사회에서 대과 없이 살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소극적으로 들리지만 적극적 행동강령이에요. 운도 정직에서 비롯되고, 불운도 정직하지 못한 데서 온 것입니다. 예전에 선현들은 무첨(無添), 즉 선조에게 죄를 더하지 말라는 말을 자주 하셨어요. 욕되게 하지 말라는 뜻이지요. 고리타분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살수록 진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선조, 가족, 자식 앞에 부끄럽지 않고, 그들의 이름을 더럽히지 않고 당당한 삶을 사는 것, 그것 이상이 있을까요. 담담해야 당당할 수 있고 욕심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의 아들이 회사에 갓 입사했을 때 제일 먼저 강조한 것도 돈에 대한 정직이었다. 그것의 구체적 행동강령으로 ‘현금을 수금할 때 당일 보고, 당일 입금’을 실행할 것을 당부했다고 한다. 이 총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혹시라도 먼저 입사했다고 친구들에게 밥 살 일 있으면 쩨쩨하게 굴지 말고 아버지 이름 대고 밥 사라’고 자신의 단골식당을 아들과 함께 돌아다니며 일일이 인사시켰다고. 마지막으로 현역 프리랜서로서 ‘인생의 브라보’를 외칠 수 있는 조언을 들려주시겠습니까? “호기심과 활력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꾸 힘들다, 어렵다, 귀찮다 생각하면 도태되고 배제돼요. 행동반경이 좁아지면 사고반경, 사람반경도 좁아집니다.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저는 지인들이 부르면 불원천리, 산 넘고 물 건너 달려가고요. 지하철에선 되도록 자리를 양보받지 않아요.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서 있으면 오히려 균형력 강화에 좋습니다. 휴대폰은 신제품 출시 소식이 나오면 즉시 바꾸는 얼리어답터입니다. 지금 편한 것에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해야 해요. 아웃 오브 사이트, 아웃 오브 마인드.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잊힙니다.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새로운 공부, 도구, 환경에 도전하세요.”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 2017-04-28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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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 잡히고 해외여행을 떠나라니요
- 가슴 떨릴 때 세계여행을 떠나야지 늙어서 다리 떨릴 때 여행 가면 사서 개고생이라고 어느 장년모임에서 젊은 강사가 말한다. 돈이 있어야 세계여행을 다녀올 텐데 무슨 돈으로 여행을 가라는 말이냐는 청중들의 질문에 강사는 답변을 준비한 듯 꼭 집어서 집을 잡히고 그 돈으로 여행을 가라고 한다. 주택 역모기지론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강사는 신바람이 나서 자식이 부모를 모시는 시대는 지나갔다, 집을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 하지 말고 신나게 폼 나게 다 쓰고 한 푼도 자식에게 줄 생각을 하지 말라고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셀프부양 시대라며 자신의 몸은 스스로 돌봐야지 자식이 나를 부양해줄 것이라는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고 한다. 유튜브에서 인기가 있는 어느 스님은 고부간의 갈등이나 부모 자식 간의 트러블을 예방하기 위해서 자식이 20세가 지나면 부모 자식 간 정을 끊고 서로 간섭을 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들의 세계를 봐도 다 큰 자식을 끼고 사는 동물은 없다고 한다. 자식들이 바쁘다는 핑계로 부모님을 자주 찾아보지 못하고 전화도 제대로 하지 않는 세태에 이런 달콤한 강의는 자식들에게는 면죄부를 주고, 부모 세대에는 찾아오지 않는 자식을 탓하기에 앞서 변화된 시대를 탓하고 자식들을 억지 이해하게 만든다. 심지어는 우리 세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지막 세대이며 자식에게는 버림받는 첫 세대라고 자학적으로 말한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탓에 모 대학에서 대학생들을 상대로 부모를 누가 모셔야 하느냐는 설문조사를 했는데 무려 70%가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젊어서 국가에 열심히 세금을 납부했으니 늙어서는 국가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자식을 열심히 키워준 것에 대한 대답은 없었다. 사자가 다 큰 자식 사자를 돌보는 일은 없다, 젊은 자식 개가 늙은 어미 개에게 먹이를 갖다 주는 일도 없다는 등 짐승의 행태를 사람에게 비유해 부모 자식 간에도 남남처럼 서로 간섭하지 말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홍보하고 사회 분위기를 조장하는 모든 행위에 서글픔을 느낀다. 사람은 동물이지만 짐승은 아니다. 남녀가 성년이 되어 결혼하고 자식들이 태어나고 재롱떨며 자라는 모습을 보는 것이 살아가는 즐거움이다. 짐승이 자식에게 먹이를 주는 본능과는 또 다른 이성이 사람에게는 있어 만물의 영장이라 한다. 옛날부터 세상에서 보기 좋은 것이 두 가지가 있는데, 마른 논에 물들어가는 것과 자식 입에 밥 넘어가는 것이라고 했다. 자식을 위해 하는 모든 행위는 부모의 즐거움이다. 여기에 대한 보답으로 늙은 부모를 모시는 것은 수천 년 동안 해온 인류역사다. 이것이 사람과 짐승과 다른 점이다. 자식이 스무 살이 넘었다고 쫓아낸 후 나 몰라라 하고 해외여행 다니면 부모 마음이 편할까. 부모는 개천에서 뒹구는데 자식인 나만 잘살면 행복할까. 부모 자식 간은 한 몸과 같다. 오른팔이 아픈데 왼팔이 희희낙락할 수 없다. 부모와 자식 사이를 동물에 빗대어 억지로 떼어놓고 행복 운운하는 것에는 수긍할 수 없다. 행복의 최소 단위는 가족이고 가족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하다. 가족을 모아주는 정책을 개발하고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한 가족의 개념을 해체하지 않고 함께 살게 하는 묘수를 찾아야 한다. 핵가족화가 고착화되다 보니 가족의 개념도 희미해져간다. 초등학생이 함께 사는 강아지는 가족이라 하고 따로 사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가족이 아니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내가 번 돈 내가 다 쓰고 죽는다고 신나게 쓰다가 돈이 떨어지는 날 죽지 않으면 어찌하는가. 인명은 재천이라고 했다. 점쟁이도 아닌데 죽는 날을 어찌 안단 말인가. 나는 해외여행보다 일하며 돈 버는 것이 좋다. 누군가 그렇게 일만 하다가 죽을 것이냐고 물어보면 일하다 죽는 것이 해외여행하다 죽는 것보다 낫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여행은 절대 안 하고 자린고비처럼 돈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해외여행을 갈 기회가 있으면 즐거운 마음으로 가겠지만 집을 저당 잡혀서까지 해외여행 갈 마음은 없다. 내 입에 고기반찬 들어가는 즐거움보다 손자 입에 사탕 하나 물려주는 것이 할아버지의 기쁨이다. 이제는 농경사회도 아니고 직장 때문에 핵가족은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노골적으로 유명 강사들이 핵가족을 찬양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대가족 단위로 함께 사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임은 자명하다. 지금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무식하지도 않고 위생관념도 투철하기 때문에 손주들의 양육 면에서도 함께 사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맞벌이 부부가 대세인 요즘, 아이들을 맡길 곳이 마땅치 않아 아이 돌보는 양육자가 바뀌고 있다. 미안한 부모는 돈으로 아이들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 어느 초등학생이 생일파티라며 4만원짜리 뷔페에 친구들을 데리고 오는 것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부모가 아이들을 직접 관리하지 못하니까 혹 나쁜 길로 빠질까봐 이런저런 생각을 못하게 여러 학원을 투어하도록 교육 프로그램도 짠다. 아이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불안하고 인격형성에도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정부는 대가족제도의 장점을 홍보해야 한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영어선생, 수학선생을 하면 일거양득이다. 대가족으로 함께 사는 지혜를 정책으로 반영 보급하도록 정부는 앞장서야 할 것이다.
- 2017-02-01 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