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질투로 아파하는 당신에게… “나부터 행복해집시다”
-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1989)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시인은 자신이 지나온 모든 시간이 머뭇거림과 탄식과 질투로 가득했다고 고백합니다. 끝없이 타인의 인정과 사랑을 갈구했지만 끝내 한순간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음을 참회합니다. 혹시 질투의 불길 속에서 자신을 태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질투로 아파하는 모든 분과 마음 미장공 아홉 번째 이야기 함께하겠습니다. 아직도 질투에 사로잡힌 당신에게 살림하는 전업주부로 산 세월이 많던 시절, 무릎 나온 바지에 애들 안 입는 낡은 티셔츠 입고 음식물쓰레기 봉투를 든 날 아침, 승강기에 같이 탄 이웃을 나도 모르게 훔쳐보게 됩니다. 옷차림부터 머리 매무새며, 들고 있는 서류가방, 풍기는 향수 냄새까지. 저는 물론 세수도 하지 않은 채입니다. 머리부터 발끝, 아니 구두 끝까지 제대로 갖춰 입은 또래로 보이는 여인. 역한 냄새 나는 쓰레기봉투를 든 나와 예쁜 백을 단정하게 든 그녀. ‘아 저 여자는 무슨 일을 할까? 얼마나 전문적이고 근사한 직종에 있는 걸까? 출근해서는 얼마나 재미 있고 또 의미 있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올까?’ 부러움 가득한 시선으로 보던 때도 많았습니다. 시부모님과 같이 살면서 아이들 챙기느라 자신을 가꿀 수 없었던 제 모습이 창피스럽기도 했습니다. 발코니에서 내려다보이는 사람들 모습, TV에 나오는 유명인이나 드라마 속 주인공을 보다가 당신은 시기와 질투, 시샘하는 마음이 올라온 적이 있습니까? 이 감정이 도대체 뭐길래 나를 초라하게 하고 내 신세를 형편없는 것처럼 느껴지게 할까요. 질투의 대상과 거리 : 최소한 사촌은 돼야 배가 아프다 친구가 성공할 때마다 나는 조금씩 죽는다. -고어 비달, 미국 소설가 영성이 높은 한 수도사가 금식 기도하며 수련 중에 있습니다. 마귀가 아무리 유혹하고 훼방하려 해도 안 통합니다. “그런데 말이야, 오늘 교구 인사에서 당신 동생이 주교가 되었다고 하는데….” 말을 맺기도 전에 “진짜? 말도 안 돼” 하며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질투의 대상은 질투의 거리와도 밀접합니다. 부부나 연인, 형제자매, 친구 사이처럼 그 사람이 나와 얼마나 가까운지가 관건입니다. 거론한 대상이 자신과 너무 동떨어지고 격이 차이가 나면 질투가 거의 생기지 않습니다. 또래일 경우 질투의 불길은 활활 타오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사돈의 팔촌이 아니라 나와 가까운 혈연 관계인 사촌이 땅을 샀기 때문에 내 배가 아픈 법입니다. 평생 일면식도 없던 먼 친척이라면 아무런 감정도 일어나지 않기 마련이니까요. 만만할수록 불붙는 질투심 수십조 혹은 수백억 달러를 상속받았다거나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일론 머스크한테 질투를 느끼는 경우는 매우 드물 것입니다. 막연히 부러워하거나 경탄하는 정도에 그칩니다. 그러나 매일 같이 운동하는 이웃이 경매로 작은 아파트 한 채를 샀다거나, 내 옆자리 동료가 주식으로 3000만 원을 벌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상대가 성취한 부와 행복의 크기가 내가 도달할 수 있을 정도로 만만할 때 질투가 솟구칩니다. 또 이미 세상을 떠난 과거의 예술가나 과학자에게 질투가 일어나는 경우는 드뭅니다. 고인(古人)과 경쟁을 하지는 않으니까요. 동시대를 사는,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질투가 한결 커집니다. 질투는 시간적이나 공간적으로 나와 가깝고, 내용이나 크기로도 만만할 때 더 폭발해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질투는 죄가 없다? 질투(嫉妬)라는 글자에서 질(嫉)의 핵심은 계집 녀(女)에 있는 게 아니라 병 질(疾)에 있습니다. 괴로워하고 미워하고 원망하고 증오하고 성급한 마음 때문에 근심하다 결국 나한테 독이 되고 남에게도 독이 되는 것. 이러한 괴로움이 질투에 들어 있는 병이라는 것입니다. 투(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돌을 던졌으니 병이 들 수밖에요. 말이나 행동, 관계 따위로 손해나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병든 상태가 질투입니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서 질투의 신은 누구일까요? 바로 젤로스(Zelos)입니다. 한자 문화권인 동아시아에서는 질투를 칠거지악(七去之惡)의 하나로 꼽을 만큼 여자한테만 덮어씌웠는데, 서양에서 질투를 맡은 젤로스가 남신이라는 점은 흥미롭습니다. 젤로스는 폭력의 신 비아와 권력과 힘의 신 크라토스를 형제로, 승리의 신 니케를 누이로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서양 문화권에서 젤로스는 질투의 개념보다는 경쟁, 열의, 전념 같은 긍정적인 뜻을 더 많이 함축하고 있습니다. 사랑과 질투의 이중주 : 스타 탄생과 몰락 이야기 1937년 ‘스타 탄생’이란 이름으로 처음 영화로 만들어졌고, 2018년 세 번째 리메이크된 ‘스타 이즈 본’(A Star Is Born)은 사랑 영화이자 음악 영화로 알려져 있지만 질투가 주인공 못지않은 역할을 하는 작품입니다. 애리조나 하늘같이 타오르는 그대 눈동자 날 보는 그대 눈길에 불타고 싶어 내 영혼 깊숙이 캘리포니아 황금처럼 묻힌 나도 몰랐던 내 안의 빛을 찾아낸 그대 목이 메고 할 말을 찾지 못해 헤어질 때마다 가슴이 아파 해가 지고 밴드가 연주를 멈출 때 우리 모습 영원히 이대로 기억할 거야 (중략) 그대가 날 바라보면 온 세상이 사라지고 우리 모습 영원히 기억할 거야, 이대로 -OST ‘Always Remember Us This Way’(우리 모습 영원히 이대로 기억해) 중에서 나를 발견해주는 사람을 조심하라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지만 외모가 걸림돌이 되어 낮에는 웨이트리스로, 밤에는 무명 가수로 무대에 오르던 앨리(레이디 가가 분). 천재 기타리스트이자 컨트리 뮤지션으로 명성을 날리는 슈퍼스타 잭 메인(브래들리 쿠퍼 분). 순회공연 중 우연히 찾은 바에서 노래하는 앨리를 보고 잭은 첫눈에 ‘캘리포니아 황금처럼 영혼 깊숙이 묻힌’, 그녀도 몰랐던 내면의 빛을 발견합니다. 나를 찾아내고, 무대에 세우고, 나를 키워주고 응원하는 사람과 결혼한 그녀. 내 진가를 제대로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 자신이 그토록 꿈꾸던 무대에서 직접 만든 노래를 부를 기회를 주었으니, 두 사람은 이제 사랑밖에 할 일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내가 당신을 망쳤어. 당신이 부끄러워. 안쓰럽고 그래. 당신 더럽게 못생겼어. 얼굴에 자신이 없어서 남한테 잘 보이는 게 더럽게 중요하지.” 전성기에서 갈수록 내리막길을 걷고 있는 잭과 달리 앨리는 스타 시스템에 힘입어 대형 토크쇼에 초대되는가 하면, 그래미상 3개 부문 후보로 선정될 정도로 승승장구합니다. 기쁜 소식을 들은 바로 그날, 잭은 술과 마약으로 망가질 대로 망가져서 독설과 폭언을 퍼붓습니다. 심지어 신인상을 받게 되어 시상식에 초대된 날, 앨리가 수상 소감을 말하는 옆에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소변을 보고 맙니다. 그 뒤 마음을 다잡고 알코올 중독 치료도 하는가 싶더니, 아내 앨리의 대형 해외 투어를 앞두고 목을 매달아 세상을 등집니다. 한 여자를 살렸지만 자신은 살리지 못했던, 그녀를 사랑하는 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못했던 남자. 앞선 기형도 시인의 독백과 겹쳐집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죄 질투는 오로지 마음에서 비롯됩니다. 부정적인 감정 상태로 자신을 방치해 병이 되게 해서는 곤란합니다. 열의, 열정, 전념을 담당하는 젤로스 신을 불러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면 어떨까요. 제가 처음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게 된 것은 남편의 공이 큽니다. 그 옛날 원고지에 글 쓰던 시절, 시외삼촌의 권유로 타자를 배운 남편을 보면서 마음에 질투의 불씨가 당겨졌습니다. 하지만 질투에 굴복하지 않고 선의의 경쟁과 열정이란 긍정적인 감정으로 바꾸어 저도 당시 ‘한메타자교사’로 컴퓨터와 친해질 수 있었습니다. 물리적으로 매우 가까이에 있는 친밀한 관계에서 생기는 질투를 내 삶의 좋은 에너지로 바꿀 수 있습니다. 가까운 사람이 뭔가를 해내는 것을 지켜보는 건 자신에게 굉장한 자극을 주기 때문입니다. 질투를 놓아주고 나부터 행복해집시다! : 마음의 주인 노릇 질투에 함몰되어 자기 비하와 자학으로 자신을 파괴할 것인지, 그 감정이 나를 옭아매지 않도록 방향을 선회해 자기 발전, 자존, 자족, 건강한 자극으로 동기를 부여할 것인지 그 선택은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내가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주인이 나일 때만 가능합니다. 마음이 괴로울 때마다 그 마음의 주인이 누구인지 질문해보세요. 질투는 남보다 나를 망칩니다. 내 화살로 나를 쏘는 것과 같습니다. 남을 질투할 시간에 나를 더욱 사랑해보면 어떨까요. 남과 견주며 끝없는 고통과 절망의 나락으로 빠지지 말고 나부터 행복해집시다.
- 2022-09-19 09:30
-
- 파리지앵 농부 충주의 땅을 와인에 담다
- “그렇다면 인생을 바꿔야지!” 새벽 2시, 야근 후 돌아와 죽어도 농부가 되겠다는 남편의 아우성에 아내는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어제까지 넥타이를 매고 출근하던 남편은 청바지를 입고 밭으로 향했다. 땅에 심은 건 포도나무였지만, 부부는 꿈을 심었노라 말한다. 그들의 꿈은 이뤄질 수 있을까? 남편은 뭐든 이뤄진다 하고, 아내는 뭐든 이뤄지지 않아도 괜찮다 한다. 어쨌든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들의 꿈은 자연히, 그리고 자연이 이뤄가리라는 것이다. 테루아(Terroir)는 프랑스어로 ‘땅’을 의미한다. 와인이 만들어진 땅을 가리킬 때 흔히 사용한다. 충주의 와이너리 ‘작은 알자스 레돔 테루아’(이하 작은 알자스)는 소설가 아내 신이현(57)과 농부 남편 도미니크 레몽 에으케(53)의 꿈을 심은 땅이다. 이곳에서 그들은 직접 과일을 농사지어 ‘내추럴 와인’을 만든다. 작은 알자스에 도착했을 때, 부부는 ‘웰컴 드링크’처럼 내추럴 와인을 내왔다. 풋사과 시드르였다. ‘폭’ 하는 경쾌한 소리와 함께 뚜껑이 열리더니, ‘꼬르르르’ 미세한 탄산이 잔을 타고 미끄러졌다. 그 맛은 어떤가 하니, 마치 와인계의 평양냉면이라고 할까? 깔끔하면서도 은은하게 산뜻함이 감돌았다. 단순히 ‘맛있다’라고 표현하기엔 부족했다. 걸맞은 단어를 고르던 차, 아내 신이현이 제대로 설명에 나섰다. “내추럴 와인은 유기농 과일을 수확해 착즙한 뒤 필터링이나 살균 등을 거치지 않고 만든 와인입니다. 흔히 ‘맛있다’고 표현되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추려 인위적인 첨가물을 넣지 않고 자연이 준 그대로 발효해서 만든 거예요. 즉 그 과일이 자란 땅이나 한 해의 기후 등에 대한 솔직한 설명과 같죠. 가령 비옥하지 못한 땅에서 나온 와인은 심플한 맛이 나기도 하는데, 그 역시 나름의 개성으로 보는 거예요. 고로 세상에 맛없는 내추럴 와인은 없습니다. 과일이 자라던 땅과 나무, 바람과 햇볕을 느끼고 즐기면 그뿐이죠.” 열매가 좋아하는 날을 기다리며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술, 내추럴 와인을 한잔 마시는 것은 한 움큼의 땅을 먹는 것과 같다고 했다. 와인 맛이 다른 것은 땅이 다르기 때문이고, 땅이 다른 것은 땅마다 스며 있는 농부의 땀방울이 다름일 테다. 더군다나 오롯이 자연의 흐름에 맡기는 내추럴 와인의 경우엔 가히 그 땅에 농부의 철학이 담겼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도미니크는 어떤 농부라 말할 수 있을까? 그는 “땅을 키우는 농부”라 일컬었다. “농부는 나무만 키우는 게 아니라 땅도 함께 키워야 해요. 일반적으로 포도밭을 한다고 하면 포도가 주렁주렁 많이 열리고, 그것을 수확해 큰돈을 얻는 게 목적이겠죠. 그러나 우리의 목표는 다릅니다. 나무와 땅이 있다면, 우린 땅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지금 당장 열매가 많이 열리는 것보다 땅을 살리는 기쁨이 더 크거든요. 그렇다 보니 농사짓는 방법도 다른 거죠.” 땅을 키우는 차별화된 농법으로 도미니크는 ‘생명역동농법’을 택했다. 생명역동농법이란 한마디로 우주의 기운으로 농사를 짓는 것이다. 식물에 영향을 주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기록한 달력을 농사에 적극 반영한다. 꽃식물이나 잎식물, 열매식물 등 각기 다른 식물은 저마다 좋은 기운이 있는 날엔 활짝 생명을 펼치지만, 그렇지 않은 날엔 조용히 웅크리고 움직이지 않는단다. 이러한 원리에 따라 도미니크는 씨를 뿌리거나 나무를 옮길 때 항상 별자리 달력을 펼쳐놓고 식물에게 좋은 날을 찾는다. 와인 역시 같은 방법으로 만든다. 가령 포도를 따거나 착즙할 때는 열매에게 좋은 날을 골라 작업한다. 씨를 뿌려 열매를 수확하고 내추럴 와인이 탄생하기까지, 모든 과정에 인간은 ‘돕는 자’의 역할을 할 뿐 그밖의 모든 것은 자연의 힘에 맡긴다. 그 이름처럼 ‘내추럴’(Natural)하게 말이다. 애당초 땅에 그러한 철학을 심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들의 삶에도 그러한 양식이 깃들었기에 가능했다. 혹자는 이런 부부를 보고 마치 물 따라 바람 따라 유유자적 산다고 오해할지도 모르겠다. 이에 아내 신이현은 “그저 가만히 내버려둔다고 해서 자연스럽게 살아지는 건 아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가령 농사에서 ‘자연스러운’ 것은 수확을 위해 인간의 손이 가장 덜 가게 하는 거죠. 그런데 그게 가능하려면 실제로는 초반에 아주 많은 손길이 필요해요. 농부의 상당한 노력을 투여해야만 결국 자연스럽게 식물이 자라고 열매 맺는 시간이 찾아오죠. 물론 몸은 고단하고 힘들어요. 그런데도 자연에 맞춰 산다는 게 엄청난 철학이 있어서는 아닌 것 같아요. 그보다는 우리는 그냥 그게 좋더라고요. 자연에 해가 되지 않는 일이 나에게도 즐거움이 되고, 그것을 목표로 삼으니 소소하지만 매 순간 성공하는 듯한 기분도 들고요.” 농업의 꽃 술, 농부의 손으로부터 부부는 매 순간 성공이라 말하지만, 그것은 일종의 정신승리라 하겠다. 물론 그들에게는 그 말이 진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타자로서 일련의 과정을 듣노라면 매 순간 결코 녹록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그 위대한(?) 서막은 그들이 프랑스에서 한국에 오고부터였을지도 모르겠다. 익히 알듯 포도농사와 와인 양조라면 프랑스의 여건이 더 나았을 테다. 농사에 관해선 고집스런 도미니크지만, 한국행을 택한 데에는 아내의 의견이 컸다. 사실 도미니크는 농사만 지을 수 있다면 어느 땅이라도 좋다고 했지만 말이다. “남편이 농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프랑스 남쪽으로 밭을 보러 다녔어요. 피레네산맥 근처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 곳이었는데, 비싸지도 않고 환경도 괜찮았죠. 그런데 제게는 너무나 낯설었어요. 남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포도 따는 외로운 동양 할머니로 늙어갈 걸 상상하니 그건 싫더라고요. 마침 한국에 포도 와인은 많지만 사과로 만든 시드르는 없길래, 도미니크에게 한국은 어떠냐고 권했죠. 그렇게 파리의 아파트를 팔고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단순히 남편은 농사를 짓고 싶고, 아내는 한국에 살고 싶어 무작정 삶의 터전을 바꿨다. 한국의 땅값이 얼마인지, 양조장을 짓는 데 얼마가 들지, 생활비는 어떻게 벌지 등등 구체적인 계획도 대책도 없었다. 원대한 꿈만 가득했다. 불안한 마음이 없지 않았지만 “그래, 망해도 좋다. 적어도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했다는 말은 할 수 있겠지”라며 마음을 다독였다. 그렇게 중고차 한 대를 구입해 새 터를 잡기 위해 대한민국 구석구석을 살피기 시작했다. 농업기술센터에 찾아가 자신들의 처지를 털어놓기도 했고, 공공기관에 도움도 요청했지만 별다른 수확은 없었다. 사과연구소도 가보고 포도작목반에도 갔다. 사람들의 반응은 시큰둥했다. 특히 과일을 직접 농사지어 와인을 만들겠다고 하자 반응은 더욱 냉랭했다. 근처에서 과일을 구입해 양조하는 것이 돈과 수고가 덜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변의 훈수가 더해질수록 도미니크의 철학은 되레 견고해졌다. “농업의 꽃은 술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좋은 술은 농부의 손에서 시작됩니다. 때문에 와이너리에서 농사를 짓는 것은 기본이라고 봐요. 농부가 뙤약볕 아래 허리를 구부려 일하는 것은 배를 채우기 위함, 즉 생존을 위한 것이죠. 그러나 농업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술은 휴식과 즐거움을 위한 액체니까요. 우리가 먹는 쌀, 밀 같은 농산물은 생존을 위한 것이지만, 그 농산물로 만든 술은 온전히 즐거움을 위한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어쩌면 술을 만드는 일 속에서 가장 인간다운 가치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애처롭고도 숭고한 농부의 삶 아쉽지만 첫해 사과 농사는 망했다. 안타깝지만 두 번째 농사도 망했다. 그 후로도 장마, 가뭄, 병충해 등 고난은 계속됐다. 자연의 힘에 맞서기 위해 다른 농부들은 관수를 대고, 비닐을 깔고, 농약을 치기도 했지만, 내추럴 와인을 고집하는 도미니크에겐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자연의 섭리대로 땅을 일궈온 것처럼, 야속할지언정 편법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쓰라린 경험은 고스란히 초보 농부에게 귀한 밑거름이 됐다. “점점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것 같아요. 흉년이든 풍년이든 자연이 주는 것을 우리가 너무 슬퍼할 필요도 없고, 또 너무 기뻐할 필요도 없을 것 같아요.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건데, 그럴수록 나무가 깊게 뿌리 내릴 수 있는 좋은 땅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땅이 좋고 뿌리가 깊이 나면 나무들도 어려운 환경을 스스로 극복할 수 있거든요. 당장은 좀 힘들더라도 먼 훗날을 위해 그 토대를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온종일 땅과 씨름하는 도미니크를 보고 있노라면 아내는 뭉클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애처로운 마음마저 든다. 남편이야 꿈을 이루느라 그렇다 하지만, 소설가 신이현의 꿈이 ‘농부의 아내’는 아니었을 터. 그러나 한국 생활이 서툰 남편의 뒷바라지는 고스란히 아내의 몫이 됐다. 생명역동농법을 위해 소똥이며 꿀벌이며 안 구해본 것이 없고, 갖가지 서류 준비며 비즈니스며 고객 응대며 자신도 처음 해보는 일들을 해내느라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것이 옳고 가치 있는 일임을 알기에 그녀는 오늘도 기꺼이 꿈의 조력자가 된다. “도미니크가 만약 다른 일을 한다면 이렇게까지 열심히 돕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 사람이 하는 일이 굉장히 뜻깊다는 걸 느꼈고, 때론 그 모습이 감동적이기도 해요. 남편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옆에서 보면 ‘아, 저 사람이 하는 일이 굉장히 숭고하다’는 생각이 들죠. 물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집안에서는 인정을 못 받는 것처럼 저도 바가지를 긁곤 해요. 그러고 나면 또 미안하고, 힘들어도 도와주게 되고. 사실 이 나이에 제게 새로운 꿈이랄 건 없지만, 차차 땅과 일이 안정되면 양조장을 떠나 조용한 곳에 가서 판타지 소설이나 써볼까 상상해봅니다.(웃음)” 포도밭에서 피어나는 예술 부부가 그리는 ‘작은 알자스’의 미래는 어떤 모습일지 물었다. 이에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고 했다. 그저 하루하루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만큼 주어진 일을 열심히 그리고 즐겁게 하자는 마음가짐 정도? “시골에 산다고 하면 ‘힘들게 어떻게 사느냐’며 촌이 가진 소외감을 떠올리는 이도 있고, 전원주택 짓고 제2의 인생을 여유롭게 사는 모습을 그리는 사람도 있어요. 그런 식으로 시골이 주는 어떤 정형화된 이미지가 있는데, 우리 생각은 달라요. 가령 문화, 예술 이런 걸 왜 도시에서, 갤러리에서만 해야 한다고 여기는지 모르겠어요. 최근 양조장에서 ‘농부 요리사 예술가’라는 작은 축제를 열었는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거든요. 예술가를 비롯해 마을분들도 오시고 함께 기타 치며 노래도 불렀는데 활기가 넘쳤죠. 그렇게 밭은 수확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지만, 얼마든지 예술을 위한 창작의 장으로도 쓰임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어쩌면 그렇게 자연을 향유할 때 땅도 더 즐겁지 않을까요?” 작은 알자스의 첫 와인이 출시된 지 이제 5년 차. 아직 농부로서도 사업가로서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부부는 서두르지 않는다. 와인 사업이 대박 나서 돈방석에 앉는 것이 목표가 아니기에 그렇다. 그저 현재처럼 원하는 방식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면 그뿐, 수익은 나중 몫이다. 그런데도 주변 이들은 흔히 “대박 나시라! 성공하시라”는 말로 그들을 재촉한다. 이에 그들은 말한다. “그런 응원은 사실 별 의미 없습니다. 이미 원하는 인생을 사는걸요. 어쩌면 남들 눈에는 불안해 보일지라도 지금이 나쁘지 않거든요. 그러니 제발 그런 걱정은 넣어두셨으면 해요.(웃음) 적어도 우리는 지금 후회 없이 꿈꾸고 있다 말할 수 있으니까요.”
- 2022-07-20 08:43
-
- ‘서울국제도서전’, 3년 만의 개막…2만 5000명 방문
- 국내 최대 규모의 책 축제 ‘서울국제도서전’이 3년 만에 열렸다. 책 애호가들의 기쁜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제28회 서울국제도서전’이 지난 1일 서울 강남구 코엑스에서 개막했다. 이번 도서전은 코로나19 여파로 연기ㆍ축소를 거듭하다가 3년 만에 정상적으로 열린 것이다. 주최 측 추산 첫날 방문객은 2만 5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 주요 인사도 행사장을 찾아 축하를 전했다. 오전 11시 30분에 열린 개막식에는 박보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윤철호 대한출판문화협회장 등 출판계 인사들, 도서전 주빈국인 콜롬비아의 아드리아나 파디야 문화부 차관이 참석했다. 박보균 장관은 축사를 통해 “경제력과 군사력, 문화의 힘과 매력이 일류선진국의 조건과 자격이며, 그 문화의 바탕에 책이 존재하고, 한류 문화(케이 컬처)의 경쟁력에도 책이 있다”라고 책의 역할을 강조했다. 특히 올해 주빈국은 우리나라와 수교 60주년을 맞은 콜롬비아로, 중남미 국가로서는 첫 도서전 참가다. 박보균 장관은 콜롬비아의 아드리아나 파디야 문화부 차관의 참석에 감사를 표했다. 아울러 박 장관은 “콜롬비아 주빈국관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자, ‘백 년의 고독’ 작가 가브리엘 마르케스의 작품을 비롯해 콜롬비아의 빼어나고 흥미로운 문학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라고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박보균 장관은 “이 행사를 통해 꿈과 희망을 낚아채고, 상상력과 문학적 감수성을 채울 수 있기를 바란다”라며 행사의 성공을 기원했다. 개막식 이후 박보균 장관은 콜롬비아 주빈국관을 방문해 전시 내용에 대한 설명을 듣고, 많은 분이 주빈국관을 찾아 콜롬비아를 경험하고 양국 간의 문화교류가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격려의 말을 전했다. 올해 도서전의 주제는 ‘반걸음(跬步, One Small Step)’이다. 이는 세상을 바꾼 거대한 변화의 시작점은 기존의 고정관념을 깨고 용기 있게 나아간 ‘반걸음’이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홍보대사는 소설가 김영하·은희경, 퓰리처상을 두 차례 받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작가 콜슨 화이트헤드다. 오는 5일까지 열리는 도서전에는 출판사 195개사(국내 177개사, 해외 14개국 18개사), 저자와 강연자 214명(국내 167명, 해외 12개국 47명)이 참여해 주제 전시와 강연 등 총 306개의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첫날에는 소설가 김영하가 '책은 건축물이다'라는 주제로 종이책의 가치에 관해 이야기했다. 이어 그림책 작가 이수지(‘그림으로 그대에게 반 발짝 다가서기’), 소설가 은희경(‘문학으로 사람을 읽다’), 소설가 한강(‘작별하지 않는 만남’), 가수 장기하(‘상관없는 거 아닌가?’) 등이 주제 강연에 나선다. 더불어 프랑스 공쿠르상 수상작 '아노말리'의 작가 에르베 르 텔리에의 강연,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대표 위르겐 부스, 예테보리 도서전 대표 프리다 에드먼의 대담 등이 열린다. 각종 전시 코너 등도 마련돼 있다.
- 2022-06-02 15:46
-
- 도발과 전복의 메시지를 다탄두로 장착한 백남준의 예술 전당
- 소설가 스티븐 킹은 이런 말을 했다. “소설은 독자를 움켜쥐고 한 대 후려갈기는 것처럼 위력적이어야 한다.” 그는 독자들에게 충격과 전율을 야기하는 작품을 쓰고 싶었던 것이다. 사람의 관습과 관점을 타격하려는 예술가로서의 목적의식이 선명하기로는 비디오아트 창시자 백남준(1932~2006)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기발하고 기이한 작품 행위를 통해 대중의 굳은 의식을 비트는 데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어디로 튈 줄 모르는 럭비공, 그것도 도발과 전복의 메시지를 다탄두로 장착한 럭비공처럼 날아가 사람들의 타성을 가격한 백남준의 작품은 전례 없는 새로운 것이었다는 점에서 창조의 원본이었다. 사람들은 초기 한때 그의 작품에 어지러워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갈채는 뜨거워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이렇게 탁월한 예술혼의 작품 다수를 한꺼번에 만날 수 있는 곳이 있다.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백남준아트센터다. 백남준아트센터는 도시 외곽 야트막한 동산 아래에 있다. 유리로 외부를 두른 3층 규모의 대형 단독 건물을 지어 미술관을 꾸렸다. 첫눈에 감흥을 맛보기는 다소 어려운 형상이다. 물결처럼 굽이치는 건물 뒤편 곡면이 매우 유려하지만 미감을 자극할 만한 디테일 요소는 부족한 편이다. 설계를 주도한 이는 독일 건축가 마리나 스탄코비치. 그는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최우선으로 했으며, 건물 외벽을 유리로 만들어 안과 밖이 연결되도록 했다”고 밝힌 바 있다. 주변 지형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지었다는 점은 이 건물이 지닌 커다란 미덕이다. 건물의 형상은 동서 방향으로 눕혀진 ‘P’자를 닮았다. 주변의 언덕과 골짜기를 배려하 는 한편, 가용 부지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귀결된 형상이 그렇다. 이 ‘P’자 모양은 그랜드피아노의 형태와 비슷하다. 그래서 피아노를 퍼포먼스 오브제로 즐겨 동원했던 백남준의 경향을 이미지화한 건물 형상이라 유추하는 이들이 많다. 설계자가 의도적으로 건축에 담은 백남준의 상징물은 외벽 유리 커튼월에 즐비한 가로줄이다. 이는 백남준이 구사한 작업의 핵심 매개체인 TV 화면의 이미지를 형상화한 것이다. 과거 흑백 TV의 화면 조정 시간 때 지지직거리며 출렁거리는 줄무늬에서 착안한 것. 재미있게 음미할 만한 요소가 적지 않은 건물인 셈이다. 그러나 백남준이라는 거대한 콘텐츠를 담은 그릇치고는 평범하고 소박하다. 실험과 도발을 일삼았던 백남준을 닮았더라면, 건물을 척 보는 순간 감동과 상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솟을 텐데. 세계적 수준의 예술가는 세계적 수준의 건축에 담아야 아귀가 맞는 게 아닐까. 정신의 대륙붕에서 융기한 준봉 이 미술관은 백남준의 작품 130여 점을 소장했다. 해마다 두어 차례 펼쳐지는 백남준 상설전에 소장품 일부를 번갈아 전시한다. 현재 ‘아방가르드는 당당하다’전이 열리고 있다. 올해로 탄생 90주년을 맞이한 백남준의 놀라운 예술 세계를 재조명하기 위해 마련한 전시회다. 1층 전시장에서 맨 먼저 관람객을 맞이하는 작품은 ‘TV정원’이다. 열대성 식물로 채운 인공 정원에 경쾌한 뮤직비디오가 흘러나오는 TV 모니터들을 배치한 이색으로 눈길을 붙잡는 작품이다. 식물과 기계, 또는 자연과 기술의 컬래버레이션이다. 조물주의 작품이라 할 만한 식물을 오브제로 끌어들여 예술의 경계를 확장했다. 언뜻 대수롭지 않은 조합처럼 보이지만 백남준의 작품이라 뭔가 대수로운 걸 열심히 찾아보게 된다. 이게 예술의 소구력이자 백남준의 힘이다. 평범하거나 따분한 세상과 사물을 한 걸음 더 들어가 흥미진진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달아주는 게 그의 예술이지 않던가. 백남준의 예술 여정은 전위음악으로 시작됐다. 1960년 그는 ‘피아노포르테를 위한 연습곡’을 공연하면서 피아노를 박살내고 스승 존 케이지의 넥타이를 잘라 청중을 경악시켰다. 그건 예상을 초월한 급진적 퍼포먼스였다. 텔레비전을 오브제로 동원, 비디오아트의 신호탄을 쏜 건 ‘음악의 전시’라는 개인전을 통해서였는데, 이번엔 잘린 소머리까지 진열했다. 틀에 갇힌 예술 관행을 질타하고, 위선의 이웃사촌인 엄숙주의를 조롱했던 거다. 이때부터 백남준은 ‘문화 테러리스트’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국내에서 백남준을 알아보는 눈은 많지 않았다. 언론의 보도 자체가 드물었다. 기사를 쓰더라도 백남준의 작업이 희한하지만 그게 과연 예술인지 뭔지 모르겠다는 투의 의문을 제기하는 글에 그쳤다. 첼리스트 샬롯 무어만과 나체 퍼포먼스를 하다 경찰에 연행됐다는 외신을 가십으로 전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후 백남준이 비로소 국내에서도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건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계기로 해서였다. 전시장에선 백남준의 출세작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볼 수 있다. 1984년 새해 벽두, 세계 최초의 인공위성 중계로 한국, 미국, 독일, 프랑스에 생방송된 이 퍼포먼스는 현대미술사의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조지 오웰은 소설 ‘1984년’을 통해 기계문명의 폐단을 암울하게 묘사했다. 그러나 백남준은 ‘1984년’을 비디오아트로 패러디, 오웰의 어두운 미래 전망을 뒤엎었다. 기술 발전으로 오히려 인간 해방이 가능하다는 낙관적인 세계관을 개진했다. ‘굿모닝 미스터 오웰’로 백남준은 드디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국내에서도 주목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전시실의 백남준 작품은 10여 점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 시대를 태풍처럼 휩쓴 거장의 작품들이니 반색하지 아니할 수 없다. ‘칭기즈 칸의 복권’에는 말 대신 자전거를 탄 20세기 칭기즈 칸 로봇이 등장한다. 자전거의 짐받이에는 TV가 가득 실려 있다. 왜 칭기즈 칸인가? 백남준은 자신의 진취적 성향의 출처를 ‘몽골 유전자에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비디오아트로 세상의 모든 예술을 압도하겠다는 야심의 표명? 그는 다만 머리와 기교로 예술을 성취하지 않았다. 어릴 적에 가족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만들어 사용할 정도의 기찬 상상력, 어마어마한 독서량, 정밀한 철학적 논문 등 다양한 장르의 글쓰기로 벼린 통찰력…. 그의 예술은 정신의 대륙붕에서 융기한 하나의 준봉이었을지도. 2층 전시실에 있는 ‘메모라빌리아’(Memorabilia)는 뉴욕 소호에 있었던 백남준의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 재현한 공간이다. 백남준의 숨결이 선연히 느껴지는 공간이라 기억에 남겠다. 작품 관람을 마친 뒤엔 건물 뒤편을 굽이치는 산책로를 즐길 일이다. 돌을 바닥에 깔고 경사지의 곡면을 채웠으니 돌의 성채다. 구간은 짧지만 매우 아름다워 강렬하다.
- 2022-05-27 08:40
-
- 배우 강수연·시인 김지하 별세… 잇따라 떨어진 문화계 큰 별
- 영화배우 강수연과 시인 김지하가 세상을 떠났다. 잇단 문화계의 비보에 대중은 큰 슬픔에 빠졌다. 강수연은 지난 7일 향년 55세로 별세했다. 지난 5일 자택에서 뇌출혈로 쓰러진 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 왔지만, 끝내 의식을 찾지 못했다. 강수연의 영결식은 오는 11일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진행된다. 영화진흥위원회 공식 유튜브 채널을 통해 생중계될 예정이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이사장(현 강릉국제영화제 이사장)이 장례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임권택·배창호·임상수·정지영 감독, 안성기·김지미·박정자·손숙·박중훈 배우 등이 장례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4세 때 아역 배우로 활동을 시작한 강수연은 영화 ‘고래 사냥 2’(1985), ‘미미와 철수의 청춘 스케치’(1987) 등에 출연하며 청춘스타로 떠올랐다. 특히 1987년에는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로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월드스타 타이틀을 최초로 거머쥐었다. 삭발을 하며 연기혼을 보여준 ‘아제 아제 바라아제’(1989)로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도 최우수여자배우상을 수상했다. 1990년대에는 영화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경마장 가는 길’(1991), ‘그대 안의 블루’(1992),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1995),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등 숱한 화제작을 내놓았다. 대종상영화제, 백상예술대상, 청룡영화상 등 각종 상을 휩쓸었다. 2001년에는 SBS 드라마 ‘여인천하’의 주인공 정난정 역할로 오랜만에 브라운관에 복귀했다. 이 작품은 최고 시청률 35.4%를 기록하며 공전의 인기를 누렸고, 그해 강수연은 연기대상을 수상했다. 이후 고인은 ‘써클’(2003), ‘한반도’(2006), ‘주리’(2013) 등 영화에 간간이 출연했지만 2010년대 이후로는 작품 활동이 거의 없었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는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최근에는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SF 영화 ‘정이’(가제)에 주연으로 캐스팅돼 단편 ‘주리’(2013) 이후 9년 만에 스크린 복귀를 앞두고 있었다. 그러나 ‘정이’는 고인의 유작이 되고 말았다.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의 작품을 남긴 김지하 시인은 지난 8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81세. 토지문화재단에 따르면 시인은 최근 1년여 동안 투병생활을 한 끝에 강원도 원주 자택에서 타계했다. 빈소는 연세대 원주 세브란스기독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유족으로는 장남 김원보 씨(작가)와 차남 세희 씨(토지문화재단 이사장 겸 토지문학관 관장)가 있다. 1941년 태어난 고인은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했다. 1969년 시 ‘황톳길’로 등단한 후 유신 독재에 저항하는 민족문학 진영의 대표 문인으로 꼽혔다. 이후 1974년 민청학련 사건에 연루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1980년 형 집행정지로 석방됐다. 1973년 소설가 박경리의 딸 김영주와 결혼했으며, 1975년 아시아·아프리카작가회의 로터스상과 1981년 국제시인회 위대한 시인상과 브루노 크라이스키상을 받았다. 전두환 정권 시절인 1982년에는 ‘타는 목마름으로’ 시집을 발표하며 저항시인으로 이름을 떨쳤다. 이외에도 고인의 대표 저서로 ‘생명’, ‘애린’, ‘황토’, ‘대설(大設)’ 등이 있다. 2018년 시집 ‘흰 그늘’ 산문집 ‘우주생명학’을 마지막으로 절필을 선언했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9일 페이스북을 통해 “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은 많은 대한민국 국민들의 마음을 흔들었고 우리 문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고 시인을 추모했다.
- 2022-05-09 10:42
-
- 와인이 주는 인생의 즐거움
- 코로나19로 인해 우리는 과거에 알지 못했던 다양한 불편함을 감수하며 살고 있다. 이러한 불편을 해소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와인이 각광받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에 따라 홈술과 혼술 문화가 확산되고 있는데, 주류 중에서도 특히 와인 소비가 괄목할 정도로 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와인 수입액이 전년 대비 27% 가까이 증가했다. 그 결과 와인은 20%가량 수입이 줄어든 맥주로부터 수입 주류 1위 자리를 넘겨받았다. 올해 와인의 수입 증가폭은 작년보다 훨씬 더 클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러한 와인의 인기를 코로나19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규모가 큰 와인 수입사들이 저렴한 와인을 마트나 편의점을 통해 대량으로 공급함으로써 와인 대중화에 기여했고, 와인의 매력인 감각적인 즐거움과 다양성, 그리고 웰빙에 대한 관심이 근본적인 이유로 작용하고 있다. “우선 와인을 글라스에 따르자 화려한 꽃향기가 피어났다. 난 ‘신의 물방울’의 주인공 시즈쿠처럼 어느 순간 장미꽃이 만발한 꽃밭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입안에 넣자 싱싱한 산딸기를 비롯한 과일 맛에 머리가 아찔해졌다. 이어 달콤하고 부드럽게 입안을 조여주는 타닌(떫은맛)과 정교하게 짠 교토(京都)의 직물처럼 복잡하고 우아하며 섬세한 맛에 혀가 매료됐다. 그리고 어질어질할 정도로 오래 이어지는 여운까지… 번개를 맞은 듯한 충격에 말을 잃고 말았다.” 전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일본 와인 만화 ‘신의 물방울’의 작가 아기 다다시가 1985년 빈티지의 DRC 에세조(Echezeaux) 와인을 마시고 느낀 바를 ‘와인의 기쁨’이라는 책에 이렇게 적었다. 와인을 마실 때 느낄 수 있는 감각적 즐거움에 대해 이보다 멋지게 표현한 것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우리는 보통 ‘맛있다’는 짧은 찬사로 와인의 맛에 대한 만족감을 표현하지 않는가. 독일의 게슈탈트 심리학자 칼 둔커(Karl Duncker)는 와인과 연관해서 아주 흥미로운 분석을 했다. 그는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어떤 객체(object)인가 아니면 그 객체가 주는 즐거움(pleasure)인가?’라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는 즐거움이 무엇이고, 즐거움이 객체와 어떤 관계를 갖는지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가 ‘무엇인가를 즐긴다’ 혹은 ‘무엇을 추구한다’고 말할 때 우리는 객체의 세 가지 단계(level) 중 하나를 적시하는 것이라며, 와인을 예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와인, 와인을 마시는 것(Drinking of the wine), 와인을 마실 때의 감각적 경험(Sensory experience in drinking wine)이 와인이라는 객체의 세 가지 단계다. 와인은 객체 그 자체이고, 와인을 마시는 것은 객체와의 커뮤니케이션이며, 와인을 마실 때의 감각적 경험은 객체와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얻는 경험이다. 와인과 와인을 마시는 것은 객관적인 사실(fact)인 반면, 와인을 마실 때의 감각적 경험은 주관적이다. 와인과 와인을 마시는 것은 즐거움의 수단 혹은 원천이고, 와인을 마실 때의 감각적 경험이 즐거움이다.” 심리학자 둔커의 분석을 바탕으로 우리는 와인을 ‘감각적 경험이라는 즐거움의 수단 혹은 원천’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와인이 감각적 즐거움을 선사하는 알코올 음료라는 것에 공감하지 않을 와인 애호가는 없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와인 애호가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와인이 맛있다’라는 표현보다 훨씬 근사하고 유식해 보인다. 그런데 의문이 하나 생긴다. 와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감각적 즐거움에 국한되는가? 사람들이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와인을 마셔서 행복했다”고 말하는 것을 자주 들을 수 있다. 이러한 행복한 경험에는 와인의 감각적 즐거움(sensory pleasure) 이외에 감정적인 즐거움(emotional pleasure)과 사회적인 즐거움(social pleasure)도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즐거움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와인에 대한 지식 때문에 와인을 마시는 것이 더욱 즐거워질 때 혹은 그러한 지식을 갖춘 사람의 설명을 들으며 와인을 마실 때 우리는 지적인 즐거움(intellectual pleasure)도 가질 수 있다. 종교의식에서 와인을 사용할 때 와인 애호가는 정신적인 즐거움(spiritual pleasure)도 갖게 될 것이다. 프랑스 철학자 티에리 타옹(Thierry Tahon)은 ‘와인의 철학’에서 와인을 분석하는 즐거움과 분석한 것을 말하는 즐거움에 대해 말한다. “대담한, 영감에 찬 코멘트들이 쏟아지면서 아주 재미난 순간이 되기도 한다”고 경험을 들려준다. 즐거움의 종류 중에서 인지의 즐거움(cognitive pleasure)으로 분류할 수 있는 분석하는 즐거움은 사실 와인 경험이 적은 초보자에게는 즐거움이 아니라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 와인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뽐내고 과시하는 수단으로 와인을 전락시키는 누군가 때문에 참기 힘든 괴로운 순간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감각적인 경험은 주관적이라는 사실과, 와인에 대해 느낀 것을 말할 때 와인 전문가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반드시 구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면, 그러한 스트레스를 피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로알드 달(Roald Dahl)이 쓴 책 ‘맛’에서 소개하는 와인에 대한 분석은 주관적이고, 와인 전문가들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흥미롭다. “조신한 포도주로군. 약간 수줍어하고 망설이는 듯하지만 어쨌든 아주 조신해.” “명랑한 포도주로군. 자비롭고 명랑해. 약간 외설적인 것 같기는 하지만. 어쨌든 명랑해.” “아주 재미있고 귀여운 포도주로군. 상냥하고 우아하고, 뒷맛은 거의 여성적이네.” 이와 같이 우리는 와인을 마시면서 다양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그럴수록 와인과 더불어 사는 우리의 삶은 더 행복해진다. 또 어떠한 즐거움을 생각할 수 있을까? 나는 와인의 냄새로 인해 과거의 경험을 회상하는 즐거움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다. 자주 발생하는 일은 아니지만, 우리는 어느 냄새를 맡는 순간 과거의 일이 갑자기 떠오르는 경험을 한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프루스트가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권에는 주인공이 홍차에 적신 마들렌 과자를 먹다가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여기에서 작가의 이름을 딴 ‘프루스트 현상’이라는 용어가 유래한다. 냄새를 통해 과거의 일을 기억해내는 현상을 의미한다. 우리는 와인을 마실 때 코를 아주 활동적으로 만들고, 후각적인 경험을 즐긴다. 그래서 프루스트 현상은 어쩌면 와인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와인 전문가들이 냄새를 과거로 가는 타임머신으로 자주 언급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와인 전문가 마이클 슈스터(Michael Schuster)는 ‘Essential Winetasting’이라는 책에서 “후각은 미각이 주는 육체적인 만족감에 대한 지적인 전주곡으로서 사람, 장소, 상황과 감정 등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떠오르게 한다”고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영국의 와인 전문가 제이미 구드(Jamie Goode)는 ‘와인 테이스팅의 과학’에서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냄새의 힘”에 대해 말한다. 위대한 와인 애호가였던 헤르만 헤세는 1905년에 발표한 수필 ‘와인연구’(Weinstudien)에서 “와인은 내게 컬러가 아니라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유아 시절로 돌려보내는 와인도 있고, 학창 시절이나 여행, 사랑의 경험, 우정 등을 회상시키는 와인도 있다”고 강조했다. 1919년에 출판된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에서는 와인을 ‘갖가지 추억을 여는 열쇠’라고 정의했다. ‘프루스트 현상’보다는 ‘헤세 현상’이라고 표현하고 싶을 정도로 헤세는 자신의 문학 작품에서 와인 한잔 마시며 과거를 회상하는 이야기를 자주 들려준다. 나는 와인을 마실 때 추억이 아련히 떠오르는 경험을 자주 한다. 숙성되어 페트롤 향을 물씬 풍기는 리슬링 와인을 마실 때, 오토바이를 탄 아버지 등에 매달려 논과 밭을 지나고 야산을 넘어 할아버지 산소에 가던 한식과 추석의 날들이 생각난다. 리치 향이 특징인 게뷔르츠트라미너 와인을 마실 때면, 가족과 함께 살던 독일 도시 부퍼탈에서 암스테르담에 당일치기로 놀러 가던 날 네덜란드 고속도로 휴게소에 있는 중국식당에서 리치로 만든 디저트를 먹고 좋아했던 순간이 떠오른다. 프랑스 와인 산지 루시옹에서 그르나슈 그리로 만든 짠맛이 아주 강한 화이트 와인을 마셨을 때, 칠레의 와인 산지 레이다 밸리에서 스테파노 간돌리니(Stefano Gandolini)라는 와인메이커가 만든 짠맛의 소비뇽 블랑을 마셨을 때, 나는 부모님과 처음으로 해수욕장에 갔던 1970년대의 어느 날을 그리워했다. 와인에 대한 이 글을 쓰면서도 다시 와인을 마시는 순간이 기다려진다. 티에리 타옹은 와인을 마시기 전에 ‘상상하는 즐거움’, ‘욕망하는 즐거움’을 가져보라고 권유한다. 이러한 즐거움도 참으로 중요하다. 오늘 저녁 가족과 함께 먹을 음식에 잘 어울릴 만한 와인을 마트에서 장바구니에 담으며 저녁 식사 시간을 기대하는 마음과, 와인 잔에 따른 와인을 바라보며 이 와인은 어떤 향과 맛을 선사할지 궁금해하는 짧은 순간을 상상해보라. 시인 황지우는 시 ‘너를 기다리는 동안’을 통해 기다림의 숨겨진 의미, 즉 능동적인 기다림에 대해 알려주고, 티에리 타옹은 와인을 마시기 전의 능동적인 기다림, 즉 와인을 마시는 다가올 시간을 상상하는 즐거움과 욕망하는 즐거움을 느껴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와인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즐거움은 향과 맛에 의한 감각적 즐거움에 국한되지 않는다. 다양한 즐거움을 추구함으로써 와인 애호가로서의 삶을 더욱 행복하게 만들어보자.
- 2022-01-20 09:51
-
- 중장년에게 추천, 성탄절 어울리는 넷플릭스 크리스마스 영화
- 곳곳에 크리스마스트리가 놓이고 캐롤 음악이 들려오더니 결국 성탄절이 돌아왔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떠들썩한 크리스마스를 만끽하기는 어려워졌지만, 집에서 맛있는 음식과 함께 가족들과 보내는 오붓한 성탄절도 충분히 따뜻하고 즐겁다. 이번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집콕’ 크리스마스를 풍성하게 채워줄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들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러브 액츄얼리 (Love Actually, 2003) 크리스마스에 로맨스를 빼기는 아쉽다. 매해 크리스마스부터 연말연시까지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는 영화 ‘러브 액츄얼리’는 정통 크리스마스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통한다. 2003년 처음으로 개봉한 후 2013년과 2015년, 2017년, 2019년, 2020년에 이어 올해도 12월 23일에 재개봉했다. ‘러브 액츄얼리’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다양한 사랑이야기를 다룬다. 부부간의 사랑부터 남매간의 사랑, 영국수상과 직원의 사랑, 소설가와 가정부의 사랑, 피가 섞이지 않은 아들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 등 저마다의 사랑을 옴니버스 형식으로 따뜻하게 그려낸다. 휴 그랜트, 리암 니슨, 콜린 퍼스, 키이라 나이틀리 등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들이 전하는 여덟 커플의 사랑이야기는 다양한 사연을 담은 만큼 모든 관객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영화로 꼽힌다. 영화에 삽입된 OST는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 ‘Christmas is all around’를 시작으로 비틀스의 ‘All you need is love’, 노라 존스의 ‘Turn me on’, 머라이어 캐리의 ‘All I want for Christmas is you’에 이르기까지 음악과 사랑 이야기가 어우러진다. 8월의 크리스마스 (Christmas In August, 1998) 1998년 개봉한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8월의 크리스마스’는 한국 멜로영화 중 손꼽히는 걸작이다. 크리스마스가 있는 겨울에 죽음을 앞두고 있는 주인공 ‘정원’은 변두리 사진관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살고 있다. 시한부 인생을 받아들이고 가족, 친구들과 담담한 이별을 준비하던 여름의 어느 날, 주차단속요원 ‘다림’을 만나게 되고, 잔잔했던 그의 일상에 햇살처럼 불쑥 찾아온 그녀는 정원의 마지막 여름을 함께한다. 뜨거운 태양의 한여름에서부터 낙엽이 떨어지는 가을을 지나 함박눈이 내리는 겨울에 이르기까지 영화는 시한부 주인공의 사랑이야기를 담담하고 잔잔하게 그려낸다. ‘8월의 크리스마스’는 영화를 제작한 허진호 감독이 가수 김광석의 활짝 웃고 있는 영정사진에서 모티브를 얻어 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허 감독은 “생활에서 나오는 이야기, 그리고 그 속에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통해 일상생활을 더 빛나게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라고 밝혔다. 영화가 그려내는 90년대의 아담하고 소박한 아날로그적인 배경은 중장년층의 추억과 향수를 자극하기도 한다. 빽 투 더 퓨쳐 (Back To The Future, 1985) 크리스마스에 로맨스 영화가 지겹다면, SF 장르의 ‘빽 투 더 퓨쳐’를 추천한다. 시간여행과 그에 따른 타임 패러독스를 다룬 이 영화는 아이부터 어른까지 온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영화다. 1985년부터 1990년에 걸쳐 총 3편의 시리즈로 제작됐는데, 개봉 당시 전 세계 무려 9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인 흥행작으로 알려졌다. 영화는 별 볼 일 없는 가족사를 가진 소년이 기상천외한 시간 여행을 하면서 개인의 역사를 바꾸고 뒤틀린 미래를 바로잡으려는 모험극으로, ‘시간 여행’이라는 모든 세대가 흥미로워 할 주제 안에 역사, 연애, 가족 등의 요소를 유려한 상상력으로 버무렸다. 중장년층에게는 지금은 없어진 유년의 놀이동산에 지금의 자녀와 노니는 기분을 선사한다. 당시 상상하던 미래의 패션과 지금의 패션을 비교해보는 것도 이 영화의 묘미다.
- 2021-12-24 17:31
-
- 후회 없는 이별을 위하여, 가수 임지훈
-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차가운 너의 이별의 말이 마치 날카로운 비수처럼/ 내 마음 깊은 곳을 찌르고 마치 말을 잃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떠나가는 너를 지키고 있네/ 어느새 굵은 눈물 내려와 슬픈 내 마음 적셔주네/ 기억할 수 있는 너의 모든 것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와/ 너의 사랑 없인 더 하루도 견딜 수가 없을 것만 같은데/ (…)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혼자 외로울 수밖엔 없어/(…)” 1985년 내가 겪었던 처절한 이별의 이야기를 담은 노래다. 당시 이별의 아픔을 달래려고 만든 노래를 임지훈에게 들려줬고, 이 노래가 그의 히트곡이 됐다. 이별을 잘하는 것은 어렵다. 어린 시절의 바보 같은 나처럼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날카로운 이별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이별은 늘 난제(難題)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이문세의 노래처럼 “탁자 위에 물로 쓰신 마지막 그 한마디”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기도 한다. 불필요한 감정의 소모를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는지도 모르겠지만. 1987년 이 노래가 발표되었을 때 당시의 청춘들은 이별의 말을 날카로운 비수로 비유한 노랫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사람들은 늘 수많은 이별의 슬픔과 상실의 고통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노래나 이야기를 원한다. 그것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그 노래나 이야기가 마치 자신의 이야기인 것처럼 공감하며 자신의 처지를 이해받는 듯한 위로를 받고 싶을지도 모른다. 사랑 혹은 머물고 싶은 순간들을 지키지 못하고, 제대로 된 이별도 하지 못한 상처를 앓으며 살아가기 때문이리라. 매듭이 필요한 이별 풀린 신발 끈을 묶듯 이별에도 매듭이 필요하다. 바둑의 신이라 불리는 이창호 9단은 “승리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습관을 만들고, 패배한 대국의 복기는 이기는 준비를 만든다”라고 했다. 이별도 마찬가지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헤어져야 할 사람과 관계를 잘 정리하고, 새로 맞이할 관계와 삶의 단계를 준비해야 한다. 꼼꼼하게 매듭을 묶으면 적어도 끈 때문에 넘어질 일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이성적이지 못하다. 교통사고처럼 예기치 못하게 다가오는 것이 이별이라고 했나? 예기치 못한 이별일수록 아픔이 더 크다. 제대로 된 정리를 못 하고 남겨진 사람은 허탈하다. 이별의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혼란만 가중된다. ‘그에게 나는 대체 무엇이었나?’, ‘그에게 나는 소중한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만 남는다. 결국 상대에 대한 분노 혹은 죄책감에 사로잡힌다. 상실을 극복하는 과정이 더뎌지거나 아예 극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후회 없는 이별을 위해서는 나름의 의식이 필요하다. 후회 없는 이별이란 원만하고 균형 잡힌 마무리다. 감사함을 서로 전하고 받을 기회를 갖기 위해, 우리는 이별하기 전에 만나고 함께 식사하고 선물을 교환하고 배웅하는 등의 복잡한 절차를 치른다. 함께했던 추억을 떠올리며 그 행복했던 순간을 서로의 일부로 각인시키는 마지막 과정을 치르는 것이다. 사진을 같이 찍어 남기고, 편지를 보내서 손에 쥐고 기억할 수 있는 소위 ‘기념품’을 남기는 것도 좋은 이별 방법이다. 만날 수 없다면 최소한 통화라도 해서 좋은 감정을 직접 전달해야 한다. 이별은 첫 시작만큼이나 중요하다. 우리가 함께 나눴던 감정에 대해서 다시 나누는 과정이 필요하다. 일종의 정서적 준비가 필요한 셈이다.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끝이 나는 그 순간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좋다. 아무리 해도 모자라겠지만 아낌없이 마음을 전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함께했던 순간들에 대한 명확한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이별의 아쉬움과 그리움을 정확히 전달해야 한다. 함께하지 못한다는 것을 수긍해야 더 좋은 삶의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 가장 고통스러운 이별은 이별하지 못한 이별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이별을 할 때도 이별의 의식이 필요하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잘못한 것들을 후회하며 신년에는 달라질 계획을 세우는 것도 필요하지만, 내가 잘했던 것들, 보람 있었거나 즐거웠던 일들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다. 2021년, 올해도 우리는 꽤 잘 살았다. 사랑의 썰물-임지훈 임지훈은 1980년대 6인조 포크 그룹 ‘김창완과 꾸러기들’ 출신의 포크가수로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통기타 가수 중 하나다. 이 노래는 내 작곡 데뷔곡이자 그의 솔로 데뷔곡이었다. 이 곡을 계기로 산울림의 김창완으로부터 가수 권유를 받아서 이듬해 동물원으로 데뷔했다. 참고로 김광석을 김창완에게 소개해준 이도 임지훈이다. 소설가 이외수가 이 앨범의 속지에 적은 글도 인상적이다. 그는 임지훈의 목소리를 “포유동물만이 가질 수 있는 가장 절실한 그리움이 실린 서정시”라고도 했다. 김창완도 임지훈의 솔로 데뷔에 도움을 줬다. A면 타이틀곡 ‘기다리면 대답해주시겠어요’는 그가 작사·작곡한 곡이다.
- 2021-12-08 10:22
-
- "연말을 즐기자" 12월 문화 소식
- ●Exhibition ◇IN TO THE WILD - 이바 트린쿠나이테 개인전 일정 2022년 1월 8일까지 장소 ART Corner H 발트 3국 아트 신에 등장한 리투아니아 작가 이바 트린쿠나이테(leva Trinkunaite). 그의 개인전 ‘IN TO THE WILD’(인 투 더 와일드)가 햇빛담요재단의 복합문화예술공간 ‘Art Corner H’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리투아니아 루벤 아트 파운데이션(Lewben Art Foundation)의 전폭적인 지지로 성사됐다. 이바 트린쿠나이테는 동물과 자연 그리고 인간 사이의 복잡다단한 관계성을 평면 회화 속에서 조망한다. 작가는 인간과 동물의 생태계적 위치 불평등에 주목했다. 인간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자연이 아닌 자연과 동물이 주체가 되어 인간을 응시하는 듯한 눈빛을 작품에 표현해냈다. 이바 트린쿠나이테는 유럽 신진작가들의 회화 연대기로 평가받는 ‘Young Painter Prize’에서 입상한 바 있으며, 발트 국가 특유의 독특한 정서를 담았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신작 총 13점이 전시되며, 전시 수익금은 보호종료아동의 한 끼를 위한 ‘밥집 알로’의 식사비로 기부된다. ◇ 한글, 공감각을 깨우다 일정 12월 23일까지 장소 사비나미술관 이번 전시의 부제는 ‘눈, 코, 귀, 입, 몸으로 느끼는 우리말’이다. 13명의 작가가 참여했고, 한글의 소리, 형태, 구조 등을 다각도로 탐구해 한글을 다양한 형식의 시각예술로 구현했다. 특히 지구상에 존재하는 문자 중 가장 창의적이고 과학적이라는 평가를 받은 우리 고유의 문자인 한글의 공감각적 요소에 주목했다. 회화,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 총 47점이 소개된다. 오감을 활용해 작품을 느끼고 체험하면서 관객은 즐겁게 작품에 몰입할 수 있다. ●Book ◇플라멩코 추는 남자(허태연·다산책방) 올해 제11회 혼불문학상 수상작인 허태연 작가의 ‘플라멩코 추는 남자’가 장편으로 출간됐다. 은희경, 전성태, 이기호, 편혜영, 백가흠 등 한국 문학 중심에 있는 소설가 심사위원 전원에게 고른 지지를 받은 작품이다. 심사위원회는 “코로나19 시국에 맞는 따뜻한 작품이며, 가독성이 매우 좋다”고 호평했다. 제목만 보면 청춘의 이야기일 것 같지만, 이야기의 주인공은 67세의 허남훈이다. 허남훈은 실제 허태연 작가의 아버지 이름이다. 허 작가는 수상 소감에서 “1997년 겨울,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고 살아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생각하며 이 소설을 썼다. 이야기 속에서라도 그분이 살아 계시길 바라며 아버지의 이름을 주인공에게 줬다”고 말했다. 남훈은 26년 동안 굴착기를 운전하며 반평생을 살았다. 마침내 은퇴를 결심한 그는 자신의 중고 굴착기를 거래하기 위해서 한 청년을 만나게 되고,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나 자신의 굴착기 자랑만 늘어놓다 거래는 불발되고, 이후에도 몇 명을 더 만나지만 거래는 불발된다. 스스로도 ‘전형적인 꼰대’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남훈은 변화를 결심하고, 과제를 마련한다. 남훈의 과제는 ‘청결하고 근사한 노인 되기’ 같은 소박한 것들이지만 ‘스페인어 배우기’, ‘플라멩코 배우기’같이 노인인 그에게 험난할 수 있는 것들도 있다. 특히 남훈의 최종 과제는 스페인에서 ‘진짜 가족’ 만나기다. 남훈의 좌충우돌 가족 찾기는 가족의 의미를 되새기게 하고, 따뜻한 위로를 전해준다. 책을 읽다 보면, 시니어 세대는 나의 이야기 같다며 공감할 것이고, 젊은 세대는 부모님을 떠올릴 것이다.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꿈을 내려놓고 억척스러워질 수 밖에 없었던 부모님. 그만큼 현실적이어서, 더 깊은 감동을 전해준다. ◇어린이 호스피스의 기적(이시아 고타·궁리) 일본 오사카시 공원 한편에는 일본 최초 민간형 어린이 호스피스인 ‘쓰루미 어린이 호스피스’가 있다. 책의 저자인 저널리스트 이시아 고타는 쓰루미 어린이 호스피스를 짓기까지 분투한 사람들의 기록을 담았다.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논픽션 스토리다. ◇탑으로 가는 길(김호경·휴앤스토리) 금융회사 CEO를 마지막으로 은퇴한 증권맨이 문화유산답사기를 책으로 펴냈다. 저자는 2년여에 걸쳐 전탑과 모전석탑을 찾아 나섰다. 전문가는 아니지만 문화재에 진심인 그가 전하는 정보는 유쾌하고 유익하다. ◇냄새들(김수정·꿈꾸는인생) 영화기자로 10년을 일하다 작가가 된 그녀. 에세이 ‘데이트가 피곤해 결혼했더니’ 이후 두 번째 책을 냈다. 들 시리즈 네 번째 책이기도 한 ‘냄새들’은 냄새에 관한 책 같지만 기억에 관한 책이다. 냄새에 예민하지 않아도 괜찮다. 남녀노소 누구나 공감하며 편하게 읽을 수 있다. ●Stage ◇잭 더 리퍼 일정 12월 3일~2022년 2월 6일 장소 한전아트센터 공연장 연출 신성우 출연 엄기준, 이홍기, 남우현, MJ, 인성, 신성우, 김법래, 강태을, 김바울, 이건명 등 3년 만에 돌아오는 뮤지컬 ‘잭 더 리퍼’는 화려한 캐스팅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배우 신성우가 연출을 맡았고, 잭 역을 맡아 연기도 한다. 무엇보다 주인공 다니엘 역에 엄기준, 이홍기, 남우현, MJ, 인성까지, 쟁쟁한 배우들이 캐스팅돼 눈길을 끈다. ‘잭 더 리퍼’는 1888년 회색 도시 런던이 배경이다. 당시 실제로 일어난 미해결 연쇄살인 사건을 다룬 작품으로, 극 중 사건을 따라가는 극 중 극 형태다. 퍼즐 조각처럼 얽힌 살인마의 존재를 파헤쳐가는 스릴러 뮤지컬로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품이다. 이번 시즌 역시 흡인력 있는 스토리와 전개, 클래식하면서도 대중적인 넘버로 강렬한 짜릿감을 선사하며 새로운 흥행 기록을 써 내려갈 예정이다. ◇엘리펀트 송 일정 11월 26일~2022년 2월 13일 장소 예스24스테이지 3관 연출 김지호 출연 전성우, 강승호, 김현진, 신주협, 이석준, 정원조, 정상운, 고수희, 이현진 등 자비에 돌란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잘 알려진 연극 ‘엘리펀트 송’은 돌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의사 로렌스의 행방을 찾기 위해 병원장 그린버그가 로렌스를 마지막으로 목격한 환자 마이클을 찾아오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다. 세 사람의 이야기가 엇갈리며 팽팽한 긴장감을 유발하고, 마침내 밝혀지는 진실과 반전이 극의 포인트다. 2015년 11월 국내 초연 후 매 시즌 관객과 평단의 호평을 받고 있다. ◇썸씽로튼 일정 12월 23일~2022년 4월 10일 장소 유니버설아트센터 연출 이지나 출연 강필석, 이충주, 양요섭, 서경수, 윤지성, 임규형, 황순종, 남경주, 정원영, 이영미, 안유진, 이채민 등 지난해 초연한 ‘썸씽로튼’이 1년 만에 두 번째 시즌으로 돌아온다. 초연을 성공으로 이끈 강필석, 서경수와 함께 뮤지컬 데뷔 10주년을 맞은 양요섭, 전역 후 첫 뮤지컬 복귀를 앞둔 윤지성이 출연을 확정해 기대를 더한다. ‘썸씽로튼’은 1595년 르네상스 시대, 인류 최초로 뮤지컬을 제작한 바텀 형제의 고군분투기를 그린다. 바텀 형제와 함께 셰익스피어, 노스트라다무스 등 톡톡 튀는 캐릭터가 인류 최초의 뮤지컬을 완성하기까지의 여정이 유쾌하게 펼쳐진다.
- 2021-12-03 13:51
-
- "해파랑길 트레킹으로 인생 리셋", 조정선 前 MBC 라디오 PD
- MBC FM 개국 때부터 라디오를 들었던 조정선(62) PD는 37년간 라디오 PD로 활약했다. ‘이종환의 디스크쇼’, ‘이문세의 별이 빛나는 밤’, ‘배철수의 음악캠프’ 등 MBC 대표 라디오 프로그램을 도맡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는 일터이자 놀이터였던 라디오 부스에서 빠져나와, 지난해 퇴직을 맞이하며 해파랑길 트레킹을 다녀왔다. 신간 ‘퇴직, 일단 걸었습니다’는 그 여정의 기록인 동시에 37년간의 삶이 고스란히 담겼다. 이 책은 그의 단짝이자 고등학교 동창 해정 군과 함께 오른 해파랑길의 여정을 기록한 에세이다. 첫 책의 주제로 ‘음악’이 아니라 ‘여행’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틈틈이 써왔던 음악에 관한 원고를 바탕으로 음악 에세이를 내려고 했는데, 해파랑길 트레킹을 다녀온 후 출간 계획을 미뤘다. 매일 원고를 쓰던 버릇이 있어서 그런지 여행하는 동안 기록을 하고 싶더라. 보통 아침 여섯시에 시작하면 오후 세시나 네시쯤 하루 일정이 끝난다. 이른 저녁을 먹고 잠들면 새벽 한시나 두시에 깨더라. 옆 친구한테 방해될까 봐 말도 못 하고, 조용히 한 손으로 스마트폰을 꾹꾹 눌러가며 그날의 감상을 SNS에 올렸다. 의외로 반응이 좋았고, 음악 관련 책 대신 이 기록을 먼저 출간하기로 했다.” 은퇴 기념 첫 번째 프로젝트로 ‘해파랑길 트레킹’을 선택했다. 부산에서 고성까지 770km 거리에 달하는 해파랑길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리셋 버튼을 누르고 새롭게 시작하고 싶었다. 과거에 대한 끝내 못 이룬 아쉬움이나 미련을 털어버리고, 앞으로의 길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싶었다. 원래는 해파랑길이 아니라 산티아고 순례길 코스 중 하나인 프랑스길에 가려고 했다. 사전 교육도 다 받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려고 했지만, 팬데믹이 심해지면서 결국엔 못 갔다. 차선책으로 비슷한 길이의 코스인 해파랑길이 눈에 들어왔다. 갔다 온 친구의 추천도 한몫했다. 차선(次善)으로 택했지만, 돌아오고 나서 보니 오히려 그 선택이 최선(最善)이었던 것 같다.” 나서기 PD의 도전 라디오 PD의 DNA는 사라지지 않는 법. 여행 에세이지만 음악이 빠지지 않았다. 물론 37년간 함께 달려왔던 스태프와 곁에서 지켜봤던 뮤지션에 관한 얘기도 담겼다. “라디오는 삶의 동반자였다. MBC FM 개국부터 라디오를 듣던 꼬마가 실제로 듣던 그 라디오 부스에서 일했다. 음악과 라디오는 내 삶에서 빠질 수 없는 코드였다. 라디오 PD로 일하면서 잊을 수 없는 일들이 많았지만, 그중 하나를 꼽자면 숨은 명곡의 발견이 아닐까? 라디오 PD는 결국 소리로 말하는 직업이기 때문이다. 가령 김수희의 ‘애모’가 그런 경우다. 본인은 ‘서울 여자’를 더 밀었는데, 난 ‘애모’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당시 라디오에서 ‘애모’가 소개된 이후 큰 인기를 끌었다. PD로서 참 뿌듯했다.” 그는 ‘PD’라는 역할에 갇히지 않았다. 주로 작가들이 쓰는 원고를 본인이 직접 쓰고, 게스트로 출연하거나 라디오 DJ로도 활동했다. “끌려다니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일하고 싶었다. DJ에 도전한 것도 그와 비슷한 맥락이다. 하나의 라디오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나만의 생각과 진심을 오롯이 청취자에게 전달하고 싶었다. 반사체로서 마음을 전달하는 것보다 스스로 발광체가 되어 다가가고 싶었다. 물론 첨엔 대본 읽는 게 서툴렀는데 점점 나아지더라. 게스트로 출연하거나 DJ로 활동하는 나더러 한 후배는 ‘나서기 PD’란 별명을 붙여줬다.(웃음)” 그가 변신을 시도하는 동안 라디오란 매체도 숱한 변화를 겪었다. 한때 문화의 전령사로 통했던 라디오의 영향력은 예전보다 줄었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매체다. 그 사이 ‘배철수의 음악 캠프’는 지난해 30주년을 맞이했다. “배캠은 일하는 스태프의 노고를 비롯해 배철수 선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가 가진 팝에 대한 전문성과 해박함은 이미 해외 아티스트에게도 정평이 났다. 또한 선배에게 일하는 마음가짐을 많이 배웠다. 매일 2시간 전부터 와서 원고도 읽고, 노래도 직접 들어본다. 프로그램에 지장이 있는 스케줄을 애초에 잡지 않는다. 30년간 꾸준히 그랬다. 배캠이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선배의 성실함과 책임감 덕분인지도 모른다.” 두 번째 꿈은 히트곡 작곡가 37년간 몸담았던 일터를 떠나, 그간의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기 위해 떠난 해파랑길 트레킹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그 전과 무엇이 달라졌을지 궁금했다. “여행 도중에 가방의 무게를 줄이려고 필요 없는 짐을 택배로 보내는 것이 일이었다. 문득 이제껏 아등바등 살았던 것이 부질없는 욕심처럼 느껴지더라. 또한 좋은 아빠, 좋은 남편, 좋은 상사라는 답안지에 후한 점수를 줄 자신이 없었다. 유명한 소설가는 친절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는데, 모두에게 친절하지 못한 사람으로 기억에 남은 것 같아 못내 아쉽다. 이제는 욕심을 내려놓고 더 베푸는 삶을 지향하고 싶다.” 끝으로 계획하고 있는 두 번째 프로젝트에 관해 물었다. “라디오는 여백을 채우는 상상력의 상자다. 내 삶도 비슷했다. 라디오 부스란 한정된 공간 안에서 늘 새로운 시도와 방향을 고민했다. 동시에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듣고, 재미난 일을 많이 했다. 정말로 행운아였다. 이제는 부스 밖 넓은 세상에서 새롭고 재미난 일을 해보고 싶다. 가령 작곡가로 데뷔해서 히트곡을 만들고 싶다. 두 번째 꿈이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고, 변주는 밋밋한 반주를 다채롭게 한다. 그의 37년은 알을 깨는 변주였다. 안주하지 않고, 늘 새로운 길로 나섰다. 그는 반경 안에 갇히지 않았다. 주도적인 PD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했다. 나서기 PD란 별명은 그 노력의 결과다. 한 시인은 “길은 걷는 자의 것”이라고 했다. 결국 길은 나서는 자에게 열린다. 또 다른 도전을 앞둔 그의 새로운 여정을 응원하며 마친다.
- 2021-12-01 0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