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꽃 저 꽃 좋아라고 다투어 피어나지만 결국은 모두 진다. 사람의 일도 이와 같아 종국엔 모두 지상을 떠난다. 이 단순한 진실을 흔히들 잊고 산다, 천년만년 살 것처럼 흥청망청 시간을 허비한다. 장례 명장 유재철(61)은 이 기이한 착오에서 인생의 많은 병통이 생긴다고 본다. 그는 외치고 싶다. 기억하시오, 언젠간 닥쳐올 죽음을!
그리스의 어떤 신은 인간을 부러워한다. 신은 죽을 수 없지만 인간은 죽을 수 있어서. “야야 인간들아, 너희는 죽을 운명이기에 삶의 매순간을 마지막 순간인 양 절절하게 살 수 있잖니? 그래서 인간의 삶이 아름다운 거 아니겠어?” 죽음을 맛볼 수 없는 불운을 영탄하며 인간의 죽을 운명을 질투하는 신. 그러하니 신이 전하는 뉴스의 뜻도 유재철의 전언과 이하동문이겠다. 삶과 죽음이 한몸에 붙어 있는 의미를 잊지 말라, 그런.
유재철인들 원래부터 매양 죽음을 생각하고 살았을 리가. 서른이 넘어서까지 그도 죽음을 남의 일로만 알고 살았다. 그저 출세와 돈을 좇아 치닫는 걸로 자신의 인생에 충성했다. 뿔을 벼려 들이밀고 생존의 들판을 뛰어 먹이를 물어와야만 하는 의무는 면제받을 길 없는 인간의 숙명. 그런데 이 사냥꾼은 그다지 노련하지 못했던 듯 발밑에 도사린 지뢰를 밟았다. 사업으로 애써 모은 걸 날려 결국은 난감한 상황에 이르렀다. 그때 모친의 인도로 인연을 맺은 게 불교. 그는 재가 불자로 법정 스님에게 법명을 받았고 포교사 자격증도 얻었다. 비승비속(非僧非俗)이라, 반쯤은 중으로 살았던 셈이다. 마음 안에 부처를 들여놓자 실성할 지경으로 자심했던 파산의 상처가 비로소 씻기더란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부처님은 업무에 바빠 그의 입에 밥까지 떠 넣어주진 않았다.
염 작업은 ‘기도’이자 ‘참선’이다
아이고, 뭘 해서 먹고사나? 궁리하고 연구하고 관찰한 끝에 덜커덕 뛰어든 게 장의업계였다. 사자(死者)의 몸을 씻기고 단장해 저승으로 고이 모시는 염습(殮襲)에 입문했던 것. 이게 탁월한 선택이었단다. 꿈자리부터 뒤숭숭할 업종일 것 같지만 그에겐 적성과 잘 어울려 일취월장한 게 아닌가. 시간이 흐르고 캐리어가 붙으면서 업계의 강자로 부상했다.
오나가나 그가 늘 듣는 소리가 있다. ‘대통령 염장이’가 그것. 최규하·노무현·김대중·김영삼 전 대통령의 시신을 염습하거나 장례를 맡아 붙은 별명이다. 하지만 애당초 염장이로 나설 생각은 없었단다.
“친구가 장의사(葬儀社)를 운영했는데 잘되더라고. 아하, 저걸 하면 돈벌이가 되겠구나, 그런 판단으로 친구의 회사에 취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처음부터 염을 맡기더라. 내 목적은 사업이지 염장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친구가 시키는 대로 따랐다.”
어땠나? 잘 해냈나? “너, 체질이다! 곁에서 염습을 도왔던 친구가 찬사를 늘어놓았다. 이후 본격적으로 공부를 해 실력을 길렀다. 그러나 염을 한 뒤 며칠씩 꿈에 고인의 얼굴이 보이기도 했다. 이런 내게 백양사 암도 스님께서 호통을 치셨다. ‘대체 무슨 마음으로 염을 했느냐?’ 하며 한 수 가르쳐주셨던 거다.”
어떤 가르침을? “좋은 데로 가시라는 마음으로 염을 했다고 답하자 그건 틀려먹은 태도라 하셨다. 염장이가 주검에 너무 집착하면 영가(靈駕, 죽은 사람의 넋)가 떠나지 못한다는 거였다. 그저 최선을 다해 염만 잘하면 된다는 얘기였다. ‘염이 너의 기도이자 참선이니라!’ 이후 스님의 분부대로 따랐다. 그러자 편해지더라고. 어느 시점부터서는 무념무상으로 일하게 됐다. 기도는 날마다 한다. 새벽에 일어나 ‘나무아미타불!’을 천 번씩 암송하거든.”
당신은 업계에서 알아주는 인물이다. 성공 비결이 뭐라 보나? “소는 코뚜레를 뚫어 움직이지만 사람은 마음을 사 움직여야 한다. 기능의 숙련을 위해 열심히 공부해왔지만, 내가 더 주력한 건 유족에게 안심을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자면 좋은 매너가 필요하지. 10여 년 전만 해도 이 바닥엔 사기꾼들이 들끓었다. 굳이 바가지를 씌우거나 팁을 뜯어내지 않아도 대기업 연봉보다 나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게 장례 사업이다. 그러나 욕심들을 부렸다. 난 장의사를 운영하며 처음부터 정찰제를 도입하는 등 전혀 다른 방식을 택했다. 그러자 빠른 속도로 입소문이 났다.”
장례 기획과 연출은 혼자 해낸다
그는 지난 30여 년간 3000여 건의 염을 했다. 윤달이면 숱하게 주문이 들어오는 개장유골 염까지 포함한 수치다. 도가 트일 만한 이력이다. 기능도 매너도 무르익을 수밖에 없는 경륜이지 않은가. 그는 여하튼 선의라는 걸 염의 정신으로 삼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재능은 공부 습성. 기량의 완숙을 위해 누구라도 쫓아다니며 배웠고 미국의 장의대학에서도 연수를 했다. 동국대학교 대학원에 장례문화학과 개설을 제안해 성사시키기도 했다. 쉰 살 넘은 나이에 쓴 논문 ‘한국의 국가장(國家葬)’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강단에도 섰다. 2017년엔 ‘전통장례명장(제1호)’에 선정됐다. 줄기차게 실력을 닦아 영역을 확장해왔던 셈. 그는 여전히 ‘염장이’로 불리는 걸 좋아한다지만 염만이 업무는 아니다. 장례의 전 과정을 도맡아 처리하니까. 가장 힘들었던 사례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였단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영화배우 여운계 씨의 염을 하던 중에 노 대통령의 작고 소식을 들었다. 서둘러 기차를 타고 무조건 내려가는데 행자부에서 연락이 오더라. 유 교수, 지금 어디에 있느냐, 부산대 병원으로 가 김경수와 안희정을 만나라! 그런 요청을 받았다.”
관의 연락을 받기도 전에 일단 무조건 내려갔다고? 왜지? “내가 도와드릴 일이 있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결국 염은 물론 장례의전 전체를 감독했다. 노 대통령의 피에 덮인 시신에 몹시 황망하더군. 피부터 닦아드리고 시신을 방부처리한 뒤 관에 모셨다. 장례의 모든 과정이 힘들었다. 만장 2000개를 만들어내는 일부터, 근 200여 개에 이르는 갖가지 결정 사항들에 벅찼다. 모든 게 드라마틱했지. 당시 정부는 별 도움을 주지 않았다.”
참혹한 상태의 주검을 만난 일이 잦았겠다. “몸의 5분의 1이 불에 타 사라진 시신을 염한 적이 있다. 이럴 땐 솜으로 형태를 만들고 한지로 싸 복원해드린다. 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난 염장이 일을 때려치울 생각을 한 번도 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재미가 점점 커졌다. 장례의 기획, 구성, 연출을 혼자 해내는 재미라니. 실용적 매력도 많은 게 장례 사업이다.”
어떤 매력? “별 투자하지 않고도 성취할 수 있다. 게다가 정년이 없는 직업이지 않은가. 관건은 실력과 극진한 정성에 달려 있다. 장례 후 내게 찜찜한 기분이 남는다면 영가도 찜찜해 이승을 가뿐히 뜨지 못할 거라는 생각으로 매번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염 자체가 기도이니 성심을 다해야 하는 거다.”
가장 까다로웠던 법정 스님의 ‘다비’
염이라는 기도. 기도라는 최대치의 선의. 이미 차갑게 식어 세상에 대한 그리움도, 사람의 손길을 향한 기다림도 더 이상 필요치 않은 게 주검이다. 그러나 염장이에게 주검은 완전한 종언이 아닌 게다. 넋이 남아 그의 마지막 배웅을 기다린다고 볼 테니까. 이왕 가시는 길, 사뿐히 가소서. 그는 그런 축원을 담은 기도로 사자와 소통하는 게 아닐까. 이런 선의를 사랑이라고 말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인가. 그가 염장이 직업에 옹골찬 자부심을 느끼는 까닭을 납득할 만하다.
유재철은 내로라하는 다비(茶毘, 불가의 화장 장례의식) 전문가이기도 하다. 거의 모든 국내 사찰의 다비가 그에게 맡겨진다.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세상에 거저 주어지는 복이 있던가? 이 바닥인들 경쟁과 각축이 없겠는가? 그는 각별한 연구를 통해 세 건의 특허를 받는 등 다비 관련 실력을 쌓아 마침내 시장을 평정했다.
“25년 전, 내가 햇병아리였을 때 서경보 스님의 다비를 맡았다가 잔뜩 야단을 맞았다. 스님들이 까다롭기도 하지만 내가 서툴러서였다. 쓴맛은 항상 일찍 보는 게 낫더라. 혼쭐난 덕분에 오기가 생겨 전국 사찰을 돌아다니며 다비 공부를 열심히 했거든. 더 배울 게 없을 때까지 배우자 일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다비에 어떤 특장이 있기에? “다비 시간, 즉 장작불 때는 시간부터 3시간으로 현격히 줄였다. 이게 나만의 노하우인데, 장작더미 밑바닥에 바람구멍을 설치해 화력을 높임으로써 얻은 효과다. 시간이 줄면서 비용도 반값으로 충분했지. 그러자 스님들 사이에 호평이 퍼진 거다.”
법정 스님 다비도 맡았다지? 이 스님은 “일체의 장례의식을 행하지 말라”고 유언하셨다. 다비는 어떻게 진행했나? “내가 경험한 가장 까다로운 의식이었다. 관마저 사용하지 말라 하셨으니 운구 수단부터가 난감했다. 스님의 생시 거처였던 오대산 토굴에서 부랴부랴 가져온 평상 위에 시신을 모시고 다비장까지 간신히 운구할 수 있었지. 49재 때엔 비바람이 엄청 거칠었다. ‘야 이놈들아, 이런 건 왜 하냐? 아무것도 하지 말랬잖아!’ 비바람 소리가 법정 스님의 호통으로 들렸다.(웃음)”
도력이 높아 앉은 채 열반에 드는 스님도 있다 들었다. 이 경우 운구는 어떻게 하지? “1957년, 백양사 만암 스님께서 좌탈입망(坐脫立亡)했다. 관 대신 상자 형태의 감실(監室)을 짜 다비했다고 하더라.”
다비 염불에 ‘쾌활 쾌활!’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니 이 얼마나 좋으냐는 거다. 죽음 뒤엔 무엇이 온다고 보나? “그걸 무슨 수로 알겠나? 다만 영가가 있다는 걸 가끔 실감할 뿐이다.”
돌아간 이의 넋이 염장이의 눈엔 보인다는 말인가? “아니다. 큰스님들의 영가는 짓궂은 장난으로 자신의 존재를 표시한다. 염을 하다 보면 가위 등 분명히 방금 전까지 옆에 있던 물건이 엉뚱한 곳에 가 있는 경우가 있다. 처음 이런 일을 겪었을 땐 너무도 당혹스러웠으나 거듭되자 예사로 넘기게 됐다. 뭐 그냥 그렇다는 얘기다.(웃음) 나는 영가들의 보호 덕분에 이만치 성장했다고 믿는다. 그러니 영가들이 평안하도록 염을 진짜 잘 해야 한다. 염을 대충 하는 직원을 난 용납하지 않는다.”
염 판타지? 이승을 떠나는 영에게 무슨 미련이 있어 살아남은 자에게 호의를 베풀까보냐. 하지만 그게 꼭 그렇기만 할까. 사람의 상상력은 삶의 경험에 의해 지배된다. 평생 구두를 만들어 밥을 버는 사람에겐 구두가 그의 하늘일 수 있지 않겠는가. 구두가 고마울 게 아닌가. 유재철은 영혼의 초월적 힘까지 말하고 있지만 그가 그리 믿으면 그에겐 진실이다. 그가 이번엔 ‘영혼의 무게’를 얘기한다.
“어느 비구니 스님이 겨울 산중에서 추락해 돌아가셨다. 그의 몸은 가녀렸으나 염을 하다 보니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어 힘들었다. 불의의 추락사가 서러워 영가가 떠나지 않겠다고 떼쓰는 게 아닐까 싶었다. 죽음의 양상에 따라 ‘영혼의 무게’라는 게 가변적일 수 있다고 느꼈다.”
가뿐한 죽음이랄까, 그런 걸 거쳐 원만하게 돌아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지? “‘당하는 죽음’이 아니라 ‘맞이하는 죽음’이라면 산뜻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평소 죽음을 자주 생각하며 준비를 하는 게 현명하겠지. 스티브 잡스는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며 오늘이 마지막 하루라 되뇌었다 하지 않던가. 간단한 진리이지만, 죽음을 생각하면 삶이 더욱 소중해진다. 마치 안 죽을 것처럼 사는 인생처럼 무모한 인생이 다시 있겠나?”
우주라는 미지의 이벤트 속으로 들어가는 죽음을 미리 두려워할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장례식을 연주와 노래, 시가 있는 추모제로 치르는 방법도 죽음에 대한 적극적인 예우일 수 있다. 우울한 장례식을 능사로 삼을 일 아니다. 대만에서는 고인이 생시에 스트립쇼를 좋아했다면 장례에도 스트립쇼를 펼친다. 이게 무슨 허물이 되겠나? 안 그런가?”
자연과 건축은 좋은 사이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건축은 자주 자연을 도발한다. 도시 근교 산자락을 파 젖히고 들어앉은 건물들의 현란한 형형색색을 보라. 자연하고 불화를 즐기는 취향? 심술? 그러려면 그러라지, 자연이야 대범하여 그저 태연하다. 지나다니며 풍경을 바라보는 사람들만 피곤하다. ‘이응노의 집’을 향해 걸어가며 떠오르는 생각들이 이러하다. 자연과 친화 관계 맺기에 성공한 건축을 만나는 즐거움의 반향이다. 자연과 좋은 사이로 지내는 미술관을 보고 싶으신가? 그렇다면 ‘이응노의 집’으로 고고싱!
‘이응노의 집’은 고암 이응노 화백(1904~1989)의 생가 터에 지은 기념관이자 미술관이다. 이응노는 생의 후반을 줄곧 파리에서 살았으나 고향을 못내 못 잊어했다. “나는 충청도 홍성 사람이외다!” 그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고향 땅이 그리워 자랑처럼 흔히 홍성을 얘기했다. 그리운 게 고향의 산천뿐이었겠는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성장기의 순수했던 ‘나’에 대한 그리움도 컸을 게다. 고향이란 인간의 욕망이 회항하는 귀소(歸巢)다. 영혼마저 한 자락 실린 고감도의 어떤 차원이다.
한국을 넘어 유럽으로 창작활동의 범주를 확장했던 거목 이응노. 그의 창작력은 한 번 터져 멈출 줄 모르는 활화산처럼 격렬했다. 미술의 온갖 장르를 편력하며 쏟아 부은 다재다능은 또 어떻고? 이 걸출한 화가는 미술에 목숨을 걸어 얻을 걸 다 얻고 돌아갔다.
그러나 ‘이응노의 집’을 건립할 때 눈총들이 쏟아졌다. 싫어하는 소리들과 반대하는 입장들이 분분했다. 이응노라 하면 ‘동백림 사건’부터 떠올리며 ‘불온한 인물’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드물지 않았던 것이다. 재판에 의해 왜곡된 혐의는 벗겨졌고, 마땅히 받아야 할 처벌은 2년 6개월간의 옥고로 갚았음에도 여전히 잔존하는 여파. 미술계 내부에서조차 불편해하는 눈들이 있었다. ‘이응노의 집’은 이 일각의 소음과 맞선 단호한 결행으로 건립되었다. 건립 주체는 홍성군 당국. 그들은 2011년, 마침내 ‘이응노의 집’을 개관해 지자체가 멀뚱히 앉아 한심하게도 펜대만 굴리는 ‘철밥통’ 집단이 아니라는 걸 보여줬다.
고개 숙이고 마을 일원으로 끼어든 품새
‘이응노의 집’은 2만6000㎡(약 8000평)의 널찍한 부지에 조성되었다. 991㎡(약 300평)의 미술관을 본동으로 하고 북 카페와 다목적실을 곁에 배치했다. 원래 있었던 지형을 그대로 두고 조경을 한 야외정원은 순박하면서 평온하다. 떠올랐다 가라앉는 상념처럼 일렁이는 정원의 저 부드러운 곡선들. 돌처럼 가만히 앉아 쉬기에 좋은 공간이다. 정원 전면엔 연(蓮)이 자라는 못이 펼쳐진다. 연못과 정원을 거쳐 뒷산으로 흘러들어가는 산책로 역시 그지없이 자연스럽다. 무리가 없어 순리를 느끼게 하는 이 모든 유순한 외경들. 처음 방문한 사람에게 하등의 낯설음을 야기하지 않는 풍경들의 협연. 티 나지 않게 공들인 결과일 게다.
본동 건축을 볼까. 지나치게 크지 않은 사이즈로 지어져 소박하다. 위압이나 위세가 없어 얌전하나 은근히 세련돼 당당하다. 그 무엇보다 멀고 가까운 곳의 지세 성격과 산세 리듬에 조응해 정당하다. 과거부터 터를 잡고 존재해온 마을과 마을 사람들까지 고려한 수굿한 모습이라 안성맞춤이다.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마을의 일원으로 끼어든 품새이지 않은가. 이런 구색, 이런 조합이 어디 흔할까보냐. 설계자의 의도가 정밀하게 구현된 걸 느낄 수 있다.
미술관 벽채의 색상을 보자. 황토를 이기고 다져 발랐으니 황토색이다. 굳이 황토를 채택한 건 그게 향토의 빛깔을 뿜어서일 게다. 대지의 살갗 색깔 말이다. 그러나 온통 황토색 일색이면 지루하겠지. 외벽을 분할하며 개입한 흑회색 벽면이 대비와 조화를 이루어 조용히 생동한다. ‘이응노의 집’을 설계한 이는 중견 건축가 조성룡. 그는 건축물이 튀거나 돋보이는 걸 질색으로 여긴다. 인위가 자연을 짓눌러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서일 게다. 사람의 기술이 자연과 풍속을 말처럼 타고앉아서는 무례하다 봐서일 게다.
홍성군청과 설계자는 생가 터만 휑하게 남은 부지에서 이응노의 형적을 찾는 일로부터 사업을 착수했을 것이다. 화가는 이곳에서 열일곱 살까지 살았다. 그러나 생가는 물론, 뭐 하나 남아 있는 유적이 없는 상태였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심정으로 생가를 복원했을 테다. 다행히 소년 이응노에게 미술의 싹눈을 틔워준 자연은 옛날 모습 그대로여서 안도하지 않았을까. 나지막한 산들은 충청도 말씨처럼 느릿느릿 푸근하게 품을 펼친다. 저만치 띄엄띄엄 산재한 농가들의 지붕 위로는 새가 기쁘게 날고 솔바람이 감나무를 흔들며 지나간다. 인근에서 소음을 쏟아내며 물방개처럼 허우적거리는 차량만 아니라면 마냥 예스러울 농촌 풍경이다. 이응노는 고향에서의 성장기를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열일곱 살까지 자연 속에서 자랐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했지만 그런 나를 도와주려고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오히려 방해했다. 나는 남몰래 그리고 또 그렸다. 땅 위에, 담벼락에, 눈 위에, 검게 그을린 내 살갗에…. 손가락으로, 나뭇가지로, 혹은 조약돌로. 그러면서 외로움을 잊었다.”
찡하지 않은가. 고향 산천은 이응노를 길러 그림에 눈뜨게 했으나, 다만 홀로 외로이 온갖 것에다 끼적거릴 수밖에 없었다지 않은가. 홀로 외로이! 이는 예술을 부양할 수 있는 본성의 토대이며 모든 인간의 어찌할 수 없는 숙명이다. 이응노는 고향의 자연과 고향 사람들의 당연한 무신경을 통해, 어차피 홀로 가야 하는 창작의 외길을 견딜 고독의 힘과 강철 같은 인내심을 기른 게 아니었을까. 이응노의 광적인 창작 욕구와 믿어지지 않을 지경의 다산성(그는 자그마치 3만여 점의 작품을 생산했다!)의 싹은 이미 고향에서 발아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이쯤에서 이응노의 눈으로 이곳의 평범한 자연을 평범치 않은 기분으로 다시 바라보게 된다. 이응노의 숨결을 느끼기 위해 이곳을 찾아왔음을 상기하며.
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었던 작가
미술관 내부로 들어선다. 로비를 돌아서자 외부처럼 수수한 실내 정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치레와 꾸밈을 한껏 자제해 담박하다. 혹여 전시공간의 장식성이 전시작품으로 향하는 시선들의 집중도를 해할까 염려해 꾸린 의도가 완연하다. 외형에서와 마찬가지로 설계자는 자신의 존재는 물론 공간 자체의 미감까지 과하게 부각되지 않도록 신중한 고려를 했다. 그럼에도 멋 부린 티 없이 멋스러운 게 있다. 벽과 벽 사이에 설치한 대형 유리창으로 들이치는 자연 채광이 자아내는 효과가 그렇다. 빛과 그림자의 대비, 밝음과 어둠의 공존으로 공간에 깊이감과 긴장감을 부여했다.
전시실은 네 개로 구성됐다. 현재 ‘고암 이응노의 사생과 소묘’라는 타이틀의 전람회가 진행 중이다. 전시 작품들은 물론 ‘이응노의 집’의 소장품들이다. 이 미술관은 1000여 점에 달하는 이응노의 작품과 유품을 소장했다. 화가의 유족들과 뜻있는 사람들에 의한 기증품이 많지만 홍성군이 직접 구입한 작품들도 있다. 앞으로도 계속 사들일 작정이라 한다. 군 단위 지자체가 예술품 구입에 적극 나선다? 아마도 드문 일일 게다. 지역 정책에 예술이 가세하고서야 유토피아를 꿈꿀 수 있을 터. 시대를 읽는 홍성군의 촉이 예리하다.
이제 전시회에 나온 그림을 둘러볼까? 해방 이후부터 1950년대 중반까지, 이응노가 전국을 기행하며 사생한 그림들 120여 점을 감상할 수 있다. 습작처럼 가볍게 스케치한 작품들 일색이어서 살짝 아쉽다. 그러나 대가의 노련한 필치와 호방한 운필을 느끼기엔 부족함이 없다. 우리는 흔히 이응노가 말년에 그린 ‘군상’ 시리즈를 기억한다. 하지만 그는 부단히 화풍을 변주하고 전복해 경계를 무너뜨렸다. 어느새 저기까지 갔나 했더니 또 저만치로 내달리는 폭주 열차? 그는 혈관에 팽배한 아드레날린을 주체 못하는 사람처럼 격렬하게 그리고 또 그렸다. 추상미술이 판치는 파리에서 동양의 정신을 기저로 한 ‘문자 추상’ 또는 ‘서예적 추상’으로 유럽 화단의 지지를 받았다. 그의 작품에서 유럽인들은 ‘범신론적 미학’을, ‘주술적 매력’을 발견했다. 주술! 작품 이전에 이응노 자신이 이미 주술의 올가미에 걸린 게 아니었을까. 미술이라는 주술에. 그는 입버릇처럼 말했다.
“나는 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는다.”
이응노의 예술은 만발했다. 그러나 삶엔 그늘이 서려 불운했다. 옥고도 고난이었지만, 이후의 시간들도 밝을 수만은 없었으니. 정치적 파랑에 휩쓸리다 조국을 떠나 프랑스로 건너가야 했으니. 그는 파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토록 그리워했던 고향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로. ‘이응노의 집’ 허공에 서늘한 바람 한 점 서성이걸랑 고인을 기릴 일이다. 바람이 그의 기척인 양.
‘이응노의 집’ 설계한 건축가 조성룡
거장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도록 설계해
“그거 아는가? ‘이응노의 집’은 참으로 눈물겹게 지은 기념관이라는 거.”
조성룡 선생의 첫마디에 저릿하다. ‘이응노의 집’ 설계자인 그는 건립 과정상의 곡절을 누구보다 잘 안다. “눈물겹게 지었다”는 한마디에 이미 모든 게 들어 있지만, 그는 ‘이응노의 집’이 여느 미술관과 다르게 많은 애환을 거쳐 건립된 공간이라는 걸 놓치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
사실 ‘이응노의 집’은 손쉽게 지어진 기념관이 아니다. “좌파 화가에게 무슨 기념관이냐? 어림없다!” 홍성군에 의해 기념관 기본 계획이 수립되면서부터 일부 주민들 속에서 반대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고 한다. 이에 홍성군은 ‘이응노의 집’이 지역의 문화예술 역량을 북돋울 견인차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주민들을 설득했다. 준공 직후에도 논란은 이어졌다. 건축물의 모양새가 너무 소박하다는 비판이 제기된 것. 고암 이응노의 담백한 예술정신을 담고자 한 설계자의 진중한 의도를 납득하지 못했던 셈이다.
“홍성은 고암의 예술혼이라는 켜가 잠재한 곳이다. 나는 그 ‘켜의 드러내기’를 설계의 지향점으로 삼았다.”
‘켜’를 드러내기 위해 어떤 걸 주안점으로 했나? “고암이 성장기에 보고 자란 자연 환경을 존중해 일을 진행했다. 이곳의 수려한 용봉산과 월산은 물론, 평온한 마을 풍경은 한 소년을 예술로 이끌어준 벗이자 스승이지 않았겠는가. 그렇다면 자연 경관을 고려해 건축을 하는 게 필수적이라는 생각이었다.”
건축물은 물론,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러운 외부 정원에서도 설계자의 의도가 느껴진다. “관람객이 이곳 쌍바위마을 사람들의 일상적 통행로인 다리와 농로를 거쳐 정원과 만나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그런 동선을 통해야 고암 선생이 늘 바라보았을 시골 풍경의 정취를 누릴 수 있어서다.”
생가 복원엔 본으로 삼은 자료가 있었나? “어느 시골집을 그린 고암의 풍경화를 참고로 했다. 생가 뒤편에서 울타리를 이룬 대숲과 채마밭도 원래 있었을 것으로 가정하고 되살렸다.”
상업적 의도를 중심에 둔 미술관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런 곳에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이 점에서 농촌의 한적한 자리에 있는 ‘이응노의 집’은 매우 귀하게 느껴진다. “거장의 소장품이 있고, 아울러 자연과 어우러진 풍경이 있는 이 미술관은 특유의 공간이다. 그 무엇보다 고암의 숨결이 배인 장소라 소중하다. 농촌에 있는 미술관치고는 관람객도 많은 편이다.”
조성룡 선생은 소마미술관과 의재미술관도 설계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한다. 자신의 건축 철학을 담은 책 ‘건축과 풍화’를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풍화’의 개념을 이런 요지로 설명했다.
“건축물은 완성되는 순간부터 기의 영향으로 낡기 시작한다. 따라서 가급적 풍화를 지연시키기, 노화가 되더라도 자연스럽게 보이게 짓기. 이게 나의 목표이자 사상이다.”
소나무들 휘늘어져 산사 초입이 시퍼렇다. 나무 중 매양 으뜸으로 치는 게 소나무다. 고난이 덮쳐도 떠나지 않는 친구가 소나무라 했다. 사명대사는 한술 더 떠 ‘초목의 군자’라 일렀다. 솔에 달빛이 부서지면 그걸 경(經)으로 읽는 게 수행자다. 산사에 꽉 찬 솔의 푸름을, 그린 이 없이 그려진 선화(禪畵)라 해야 할까보다.
오래 묵어 한결 운치 있는 암자 세 곳을 둘러볼 수 있는 숲길이다. 매표소 앞 공터에 주차한 뒤, 봉정사와 영산암을 거쳐 1km쯤 산길을 오르면 개목사다. 천등산(해발 574m) 정상까지 오른 뒤 하산하는 코스(4km)엔 두 시간 반 정도가 소요된다.
안동 봉정사. 규모보다는 잘 늙은 전각들로 이름난 절이다.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인 극락전을 비롯해 국보와 보물이 많다. 늙어 쇠락하기는커녕 웅숭깊은 격조로 아름다운 전각들. 풍상을 겪으면 겪을수록 환한 진면목이 드러나는가. 오랜 침묵과 풍화로 이미 해탈한 전각의 고색창연에 형언하기 어려운 깊이가 서려 있다. 법당의 갈라진 기둥에 시간의 불가해한 손길이 아른거린다. 시간은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무수한 빗금으로 터진 기둥이 통째로 시간의 족적이지 않은가.
고승의 법문은 심오해 더러 지루하다. 무심히 낡고 닳은 전각에 더 끌린다. 하염없이 늙었으니 가만히 조는 게 나의 일, 무슨 말이 필요하랴! 전각이 전하는 뜻이라면 그쯤일 게다. 그 완전한 방임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진다. 전에 한국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보고 싶다”고 해 데려간 곳이 봉정사다. 여왕은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나. 무애행(無碍行)으로 세상을 건넌 경허. 그는 “홀연히 생각하니 몽중(夢中)이라” 했다. 집착도 욕망도, 풍경도 법당도 헛꿈 아닌 게 없더란 얘기다. 꿈에서, 미망에서 조속히 깨어나는 걸 깨달음이라 했다. 전각만 곱살하랴. 깨친 눈엔 미추(美醜)도 생사도 하나일 게다.
큰 돌 잔돌 잘 끼워 맞춰 쌓은, 길고 높은 계단을 오르면 영산암이다. 봉정사와 이마를 맞댄 암자다. 절이 쌍으로 앉았으니 겹으로 포개진 극락인가. 초목들이 기차게 뿜는 초록 속에 앉아 있기는 영산암도 마찬가지다. 작아서 안온하고, 고요해서 그윽한 암자다. 뜰에선 꽃이 핀다. 부처의 말씀을 머금고 다소곳이 개화해 향화(香火)처럼 갸륵하다. 전각들의 노구마다 인자한 미소 같은 게 어려 통으로 관음보살이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이 암자에서 찍은 까닭을 짐작할 만하다.
제자들이 어느 날 조주에게 물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유를. 이에 조주가 아주 알쏭달쏭한 답을 했다. “옜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다!” 판때기 이빨에 털 났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썰? 다 닥치고 의단(疑團, 의심을 일으키는 실마리) 하나로 맞짱 뜨라고 던져준 솔루션이었다. 불가의 전언들은 묘해서 일단 골치 아프다. 그러나 멍청이가 아닌 이상 끝내 쿨하게 알아먹지 못할 게 없다.
암자 뒤편으로 난 산길을 오른다. 소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 소사나무 등속이 평범하게 어우러졌다. 아뜩한 벼랑이 없어 볼만한 게 드물지만, 술렁술렁 한가하게 걸을 만한 숲길이다. 스님들이 포행삼아 오르내리는 길일 게다. 불당만이 도량이랴. 금칠을 자신 불상만이 불상이랴. 삼라만상이 화엄경이니 나무도 숲도 경전으로 족하다. 곰삭은 둥치에 새 가지들 돋아 길길이 치오르는 저 고목을 보라. 죽어가며 살아 있으니 굳세어 선객(禪客)이다. 한 번 태어난 이승, 그냥 가기 섭섭해 마지막 기름을 짜 불을 댕기나? 백척간두진일보! 이미 종을 친 생이나 한 발 더 허공으로 내딛는다. 내가 삶에 바치고 싶은 기도는 대체로 저런 모습이다.
나무들이 분비하는 에테르를 머금어 공기는 그지없이 청량하다. 산 아래엔 바이러스가 들끓는다. 구차한 일상에 감염병까지 겹쳤다. 모두들 마스크로 입을 틀어막고 돌아다니는 세상을 상상이나 해봤던가. 모두들 용을 쓰나 저놈이 쎈 놈이다. 황소고집을 부린다. 코뚜레를 뚫을 곳이 없다. 천국의 한 치 곁에 지옥이 있고, 지옥의 한 치 곁에 천국이 있다 했다. 불가의 화법으로는 절체절명과 고립무원이 오히려 찬스다. 아픈 세상, 함께 아파하며 갈 수밖에 없다. 나무들처럼 사람도 더불어 살면 숲이다. 숲에 무슨 낙심이 있으며 무슨 패닉이 있겠나.
산길이 끝나는 자리엔 또 암자가 있다. 개목사다. 여기엔 바람소리와 새소리만 있다. 스님은 고적해 간혹 좀이 쑤실 게다. 오늘은 일삼아 일을 만든 날? 연장을 들고 활개 치는 몸짓이 흥겨워 댄스는 저리 가라다.
내비게이션을 따르다 보니 차가 산으로 들어간다. 자연을 한 자락 슬쩍 걸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자연 속에 있는 미술관이라 들었다. 그러나 이토록 깊은 산중일 줄이야. 씨억씨억 초록을 뿜는 숲 사이 언덕을 올라 주차장에 도착하자 아예 산꼭대기이지 않은가. 기발하게도 산정(山亭) 미술관이다. 그래서 뮤지엄 산(山)? 그러나 ‘山’이 아니라 ‘SAN’이다. 공간(space), 예술(art), 자연(nature)을 합성한 약자다.
산정이라 사방에 보이느니 산이다. 세상을 분할한 하늘 절반, 산봉우리들 절반. 하늘과 산 사이에 뮤지엄이 슬쩍 끼어든 형국이다. 간신히 자연에 가담한 약세(弱勢)가 아니다. 부지는 넓고 건물은 우람해 훤칠하다. 우람하나 이물감이 없다. 건물의 태와 됨됨이에 뾰족하게 튀는 게 없어 자연과 불화 없이 조응한다. ‘건축의 철학자’로 불리는 안도 다다오(安藤忠雄·79)의 작품이다. 그는 자연과 건축, 그리고 인간 사이의 조화로운 관계를 본때 있게 구현하는 건축가로 유명하다.
이 뮤지엄의 설립자는 어떻게 산꼭대기에다 일을 벌일 발상을 했을까? 자연을 애호하는 못 말릴 취향과 세상의 추세를 읽는 시퍼런 촉이 아니고선 감행하기 어려운 역사(役事)다. 삼성가 이병철 회장의 장녀로 한솔그룹을 이끌었던 이인희 고문(2019년 작고)이 세웠다. 그는 열렬한 아트컬렉터. 평생 모은 소장품을 자연으로 끌어들여 건립한 산상 미술관으로 허를 찌르듯 관습을 흔들었다. 뮤지엄 산의 태동부터가 이렇게 전위적이다.
판석을 깐 진입로를 따라 ‘플라워 가든’으로 들어선다. 뮤지엄의 초입일 뿐이지만 완상할 게 많아 벌써 다른 세상이다. 패랭이꽃 군락과 하얀 자작나무들, 조각정원이 어울려 뮤지엄의 서장을 열어준다. 산정의 적막한 허공엔 흩날리는 꽃잎들. 피어나는 봄꽃들 지천이라 몸에 묻을 듯 농밀한 건 꽃향기. 길은 곧게 나아가다 휘어지거나 급하게 꺾인다. 간헐적으로 등장하는 콘크리트 담장이 보도의 흐름에 편승해 시야를 슬쩍 가려주거나 별안간 확 트이게 한다. 인위적으로 풍경의 변주를 꾀한 설치다. 정교한 의도에 따른 구성이다. 직설적으로 다가오는 풍경은 여실해 명쾌하지만, 보일 듯 말 듯, 보였다 안 보였다 변전하는 풍경은 삶을 은유한다. 노골적이어서 온전한 게 있던가. 보이면 있고 안 보이면 없는가. 높낮이와 커브의 각도를 세밀하게 재단해 조성한 담장의 효과로 풍경에 철학이 실린다. 이건 뮤지엄의 절정을 보러 가는 길목에서 만난 전희? 애피타이저? 풍경을 요리하는 수완에 즐겁다.
시각적 충격에 걸음 멎어
이제 ‘워터 가든’이다. 뮤지엄 산의 예술적인 외부 공간들 가운데 아마도 가장 유별한 곳이다. 여기에 존재할 것 같지 않은 풍경이 존재한다. 산상 대지에 물을 가득 채워 꾸민 ‘물의 소국’(小國)이 있으니 말이다. 널따란 사각형 수조들에 담긴 물과 물빛으로 찬연한 공간이다. 갑작스런 물의 등장, 그 급속한 풍경의 변이라니. 시각적 충격에 걸음이 멎는다. 나는 지금, 물을 분할하며 본관으로 관입하는 보도 위에 서 있지만 수면을 밟고 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보도와 수면이 수평을 이루어서다.
워터 가든의 물 경치에 흥취를 느끼는 사람이 많다. 수변 테라스엔 커피를 마시며 물과 산과 하늘을 바라보기에 적격인 벤치가 놓여 있다. 거기에 앉고 싶지만 이미 사람들이 앉아 있다. 도시라는 욕망의 경기장을 벗어나 고요한 수변에서 차를 마시며 모처럼 자연을 만끽하는 사람의 행복이여! 행복이 아니라 고독이면 어떤가. 물가에선 ‘나’를 바라보기 좋다. 저 투명한 물빛처럼 나도 한때 순수했다고, 내 안에도 물이 있어 눈물도 많아 슬프다고, 저 무심한 수면에 물살을 일으키는 실바람은 어디로 가며 나는 흘러 어디로 가는가, 라고 요모조모 쓸모 있는 상념을 굴려볼 만한 물가이지 않은가. 그러라고 안도 다다오가 워터 가든을 설계했다.
그의 건축적 오브제는 물, 햇빛, 바람 등 자연의 질료들이다. 그의 정신적 테마는 관조(觀照) 혹은 명상이다. 자연을 불러들인 건축으로 사람의 오감과 내면을 일깨우는 건축가! 안도 다다오를 일컬어 노상 하는 말들의 요점이 그렇다. ‘뮤지엄 산’이 완성됐을 때 그는 “그저 조용한 상자 같은 미술관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고 술회했다. “사람들 모두가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성이 풍부해져, 새로운 자신을 발견하고 살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고도 썼다.
본관 복도로 들어서자 조명부터 침침해 구미에 맞다. 미술관들의 과한 조명에 나는 일쑤 김새더라. 인공조명은 안도 다다오의 자연주의에 위배된다. 가급적 자제! 그는 집요하게 자연의 빛을 건물 내부로 끌어들였다. 복도 벽면의 상부와 하부에 낸 창으로 빛이 들이치게 했다. 천장을 뻥 뚫어 빛과 함께 하늘을 수용한 전시실도 있다. 노출 콘크리트 벽과 기둥, 기하학적 선형, 번뜩이는 예각 구조물, 텅 빈 중정(中庭)…. 그의 건축적 키워드를 이루는 형태와 기법이 거대한 미술관의 세부에서 깨알처럼 구현돼 요동친다.
거장들의 작품 번갈아 전시
아이들은 천진해 이 웅장하고 복잡한 미술관에서 ‘비밀의 성’(城)을 본다. 상상을 펼쳐서다. 어른들은 압도될 테다. 상상을 잃어서다. 예술이 위대한 건 상상력의 거친 날개로 신과 맞먹으려 비상한다는 데에 있지 않을까. 상상력 외에 자유정신의 높이, 자연을 읽는 섬려한 안목,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무한한 존중. 그런 게 안도 다다오의 건축세계를 가능케 했을 터인데, 햐, 그는 말하길 ‘창의적 체력’이야말로 개중에 관건이라 했다. 창의적 체력이란 건강한 몸뚱이의 에너지를 말한다. 79세 노인인 그는 오늘 아침에도 들입다 뛰었을 게 틀림없다. 흥미로운 유형의 인간이지 싶다. 그에겐 세상을 달관한 시늉이 없어 미덥다. ‘목숨을 건 강인한 도전 정신’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적 건축을 추구하는 리얼리즘과 적당한 금욕 추구도 멋있다. 뮤지엄 산의 건축미를 즐기기 위해선 안도 다다오의 이러한 성향들을 참고하는 게 좋겠다.
뮤지엄의 많은 전시실 가운데 인기를 누리는 공간을 볼까? 페이퍼 갤러리. 이곳은 종이의 역사와 가치를 알리는 국내 최초의 종이 전문 박물관이다. 종이 관련 국보와 보물, 진귀한 유물과 공예품을 전시한다. 약하디약한 게 종이이지만 강하디강한 게 또한 종이. 인류의 역사는 종이의 발명과 함께 진보하지 않았던가. 사람은 이기심으로 살고 종이는 이타심으로 존재한다. 아낌없이 나를 내주길 운명으로 삼은 종이이니 이미 득도했다. 페이퍼 갤러리에 머문 시간은 ‘종이부처’와 만난 추억을 안겨줄 것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이 종이 재료로 쓴 파피루스도 여기에 있다. 유리온실 안에서 억새와 비슷한 파피루스가 푸르게 자란다. 순전히 파피루스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오는 관람객도 있다. 청조갤러리는 뮤지엄 산이 소장한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이쾌대 등 거장들의 작품을 번갈아 상설 전시한다. 매년 두 차례 기획전도 열린다. 현재 ‘회화와 서사’ 전이 진행 중이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을 위해서는 특별히 독립공간을 마련했다. ‘백남준 홀’로 작품 ‘커뮤니케이션 타워’를 전시했다. 전깃줄을 뭉쳐 만든 타워 형태의 기반에 TV와 민속탈을 주렁주렁 매단 작품. 이게 뭔가? 현대와 전통의 통섭? 문명 굿판? 자화상? 어떻게 봐도 답일 게다. 엿장수 맘대로! 그냥 그렇게 내가 느끼는 대로 보고 즐기면 일단 그만이지 않을까. 현미경을 들이대고 종일 초파리의 겨드랑이 털 개수를 세는 곤충 학자처럼 골똘히 미술작품을 파고들 일 아니다. 궁리를 너무 하면 왜곡이 쉽고, 생각을 너무 조이면 좁아진다. 백남준이 금언을 설했다. “옷도 헐렁하고, 생각도 헐렁하고, 행동도 헐렁헐렁, 헐렁이가 일을 낸다구. 진짜 예술가는 헐렁이야!” 삶도 예술도 틀을 만들면 갇힌다는 얘기이겠다. 예술의 헐거운 정신을 보는 게 작품 감상법이라 들어도 무방하다. 백남준은 노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그때 더듬더듬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중얼거림은 뜻밖에도 쓸쓸한 것이었다. “신은 참 불공평해. 내가 왜 쓰러져야 하나?”
아주 특별한 두 곳
마침내 자문하게 된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의 마음이란 물결처럼 요동치기 쉬운 것. 이걸 어떻게 다잡아야 할까. 뮤지엄 산에선 명상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뮤지엄 내·외부 공간에 있는 미술작품 감상 자체가 명상적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명상 체험을 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 두 곳이 있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
제임스 터렐(James Turrell)은 ‘빛의 예술가’로 세계에 알려진 작가다. 화가라면 당연히 ‘빛’과 무관할 수 없다. 빛을 탐구하고 묘사하는 게 화가의 본분이니까. 그러나 제임스 터렐의 작업은 많이 다르다. 그는 빛을 ‘묘사하는’ 게 아니라 빛을 ‘사용해’ 작품을 만든다. 일정한 공간에 빛을 집어넣으면, 즉 빛과 공간이 조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관한 오랜 실험 끝에 그는 놀랄 만한 ‘빛의 아트’를 정립했다.
터렐의 작품은 빛과 공간, 그리고 프로그램으로 구성된다. 프로그램에 의해 세밀하게 조정된 자연광이나 인공광을 공간에 투입, 작품을 완성한다. 다시 말해 공간이라는 캔버스에 빛이라는 물감을 투사, 다양한 테마를 신비스럽게 풀어낸다. 터렐 전시관에서 관객은 네 가지 작품에 참여할 수 있다. 가장 기이한(?) 작품은 간츠펠트(Ganzfeld, ‘완전한 영역’이라는 뜻)로 동굴 형태의 공간에 50여 종의 LED 빛을 순차적으로 살포하면서 작업을 진행한다. 이 작업의 목적은 관객에게 착시를 경험하도록 하는 데 있다. 동굴 속에 들어간 관객은 형언하기 어려운 신비와 환영에 즉각적으로 빠져들고 만다. 예컨대 공간 가득 짙은 안개가 끼고, 좁았던 공간이 무한히 확장된다. 이 돌연한 환각에 관객은 신비감과 황홀감 또는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그리고 작업 종료 뒤, 빛이 보여준 강렬한 환상의 의미를 자문하기에 이른다. 여기서부터는 명상이다. 내가 빛을 보고 살았다, 하지만 빛이 보여준 게 참일까? 삶과 세상은 허상이지 않을까? 남에게 나는 허상으로 비치지 않을까? 이 일련의 의식 흐름을 통해 마침내 묻는다. 그렇다면 나는 누구?
명상관
지난해, 뮤지엄 산 개관 5주년 기념으로 개설했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해 만든 돔 형태의 건물이다. 바닥에서 천장으로 길게 이어지며 초승달 모양으로 뚫린 틈새로 하늘이 보이고 빛이 들이친다. 쉼 명상, 여유 명상, 싱잉볼 명상 등을 전문가가 도와준다.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지만 입소문이 나 참가자가 많다. 안도 다다오는 다음처럼 명상관의 의도를 피력했다. “태양의 움직임과 함께하는 공간에서의 명상으로, 자연과 우주를 만나 교감할 수 있을 것이다.” 제임스 터렐 전시관과 마찬가지로 명상관을 이용하려면 별도의 입장권을 사야 한다.
종교를 뛰어넘는 곳에 예술이 있을 것이다. 예술이란 자유로운 정신의 산물이기에. 그 어떤 권능에도 휘둘리거나 꼬리치지 않는 자율적 행위이기에. 그러나 자유 혹은 자율을 근간으로 삼기가 쉽던가. 매사 스텝이 꼬이고 뒤엉겨 좁은 세계에 갇히는 게 사람이다. 신의 이름을 간절히 불러 위안을 구하고서도 돌아서면 외로워 보채는 게 사람이다. 도돌이표처럼 자주 되돌아오는 자문은 하나. 나는 누구인가?
경주시 남산 자락 소나무 숲속에 사는 정미연(65)은 성화(聖畫)로 이름을 얻은 화가다. 얻을 만하기에 얻은 이름이다. 무겁지 않을까, 이름이라는 것. 얻으면 얻을수록 어깨에 얹히는 하중도 커지는 게 이름이다. 더구나 성화란 성(聖)을, 지고지순을, 염결(廉潔)을 구현하는 그림이니 속세에 몸을 둔 화가로서는 얻는 게 있을수록 버거워 불편감에 사로잡힐 수 있을 게다. 그림은 고결하나 삶은 어이 부박한가? 이런 의문이 들솟아서.
그러나 그는 세속을 어지간히 건넜다고 한다. 신앙으로, 기도로, 그림으로 부박한 삶의 때를 어지간히 헹구어 이젠 마음의 소란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갈 길이 멀다. 어지간히 건넜다는 안도감, 그게 때로 순간의 착시처럼 흩어지는가. 그는 여전히 남은 갈등과 갈증을 해 저물기 전에 처리하고 싶다. 살면서 내내 움켜쥐었던 ‘나는 누구인가?’라는 화두를 더 옹글게 타야 할 필연을 느낀다는 거다.
“어떤 선각자가 말했다. 인생은 선반 위에 내려앉은 먼지를 닦는 것과 같다고. 잠시라도 닦지 않으면 먼지가 쌓인다고. 실로 그렇다. 잠시만 방심하면 유혹이 스며드는 게 인생이지 않던가. 내 안의 나는 누구인가? 나는 줄곧 그런 물음을 품고 살아왔다. 신앙으로 그 답을 얻기도 했다. 그러나 마음 안에는 여전히 갈등이 도사려 있다. 갈등과 자주 싸운다.”
“당신이 알아낸 당신은 누구인가?”
“창조주의 피조물이다. 여기엔 아무런 회의가 없다. 신의 사랑 속에서 살고 있다는, 내 존재의 근원이 창조주와 연결돼 있다는 확신이 깊어져서다. 그러나 여전히 삶에 서툴다. 나는 누구인가 파고들어 매번 깨닫는 또 하나의 진실은 내가 부족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신달자 시인은 정미연의 성화가 ‘천상의 모습은 물론, 천상의 평안마저 확신을 가지고 바라보게 한다’고 극찬했더라. 성화가 지닌 감화력의 원천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작가의 기량? 태도?”
“나에게 성화 그리기는 기도다. 신앙이 무르익기를 염원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얘기지. 절실한 신앙으로 영성을 갈구하는 마음, 정신, 그런 게 그림에 담기기를 희구해왔다. 이 과정에서 작으나마 성취가 있었다면 그건 주님이 주신 선물일 뿐이다.”
“화가란 천성적으로 일탈자일 수 있다. 어떤 규율에 길들여지기를 싫어하는 성향이 있지 않던가. 종교생활에서 오는 구속감이 따분하진 않나?”
“초기엔 구속감이 싫었다. 아이고, 나 늙으면 열심히 믿을래! 그런 비명을 지르기도 했다.(웃음) 그러나 모든 게 운명처럼 돼버렸다. 성화 작가로 자리매김이 되면서 빼도 박도 못할 상황에 들어가게 되더라. 그 역시 신의 사랑이었다. 결국은 신앙의 진정성, 나의 정체성을 확보하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생래적으로는 좀 도발적이지.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싸움도 불사하는 기질이 다분했거든.”
“가령 어떤 싸움?”
“나의 아버지는 완고해 딸의 미대 진학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법대에 가 법관이 되길 바라는 일념으로. 그러나 난 삐딱선을 탔다. 미술에 품은 뜻을 굽힐 수 없어 정면으로 맞붙어 결국은 고집쟁이 아버지를 꺾었다. 그 시절의 기질대로 살았다면 성화를 그릴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묵주기도책과 성화
아비들은 흔히 살아온 공력으로 현명하나 고루하다. 외눈으로 자식을 바라봐 일방적인 통제와 선동을 일삼기 십상이다. 사막에서 태어난 아이에게 물고기처럼 수영하길 바란다. 그러나 그 역시 사랑이 아니라 할 것도 없다. 모순이 없는 사랑이 있던가. 신의 사랑으로 사는 정미연의 눈은 광각렌즈라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서 사랑을 발견한다. 그러하니 완고했던 아버지를 두고서도 사랑 이외에 무엇을 더 말하랴. 어머니는 온전한 사랑의 화신이었던 모양이다. 살아생전 ‘성모님’이라 불린 분이었다지. 결혼 전 가톨릭에 입문했으나 ‘한동안 날라리 신자로 살았다’는 정미연이 성화를 그리기 시작한 건 그 어머니가 남긴 묵주기도책 때문이었다.
“심한 관절염으로 30여 년을 걷지 못한 채로 지내면서도 8남매를 어엿하게 길러낸 어머니였다. 노년엔 촛불을 밝히고 앉아 묵주기도를 바치는 일로 일관하셨지. 어머니의 표정도 기운도 얼마나 맑았던지, 어린 내 가슴에 어머니를 향한 애정과 갈증이 일렁이곤 했다. 사람들이 찾아와 절을 올리는 일도 잦았다. 그런 어머니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낡은 묵주기도책을 펼쳐들었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게 성화를 그리기 시작한 계기였다.”
“어머니가 남긴 성스러운 이미지에서 성화 그리기를 착상했다는 얘기?”
“그것만은 아니다. 묵주기도책을 만들어 어머니 영전에 봉헌하고 싶었다. 묵주기도책은 성모님과 예수님의 일생을 그린 성화와 묵상기도문들로 이루어지는데 성화를 내 손으로 그리고 싶었던 거다. 완성까진 오랜 시간이 걸렸다. 죽을 만치 앓기도 했다. 기도문은 신달자 선생이 맡아주셨다. 과분하게도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주목했다. 가톨릭 성도들에게 묵주기도책은 흔히 후손에게 상속할 신앙의 유산이자 가보로 간주된다.”
성화로 방향을 바꾸기 이전, 정미연의 그림은 사뭇 달랐다. 아름답거나 미묘하거나, 억눌리거나 튀어나오거나, 인간이 지닌 복잡한 내면을 자유분방한 혹은 고즈넉한 작풍으로 표출하기에 능했다. 그러다가 기도와 관조를 실은 성화로 이행했던 것. 그런데 묵주기도책을 위한 성화를 그릴 때 정미연은 한 가지 재미있는 발상을 했다. 기존 성화들이 답습해온 서구적 양식에서 좀 벗어나 한국적 전통 양식을 가미하자는 착안을 했더란다. 그는 예수의 옷을 한복으로 갈아입혔으며, 성모에겐 잔주름 곱살한 한국 어머니의 얼굴을 부여했다. 석굴암 전실이나 에밀레종 비천상을 성화에 끌어들이기도 했다.
“한국적이고 토착적인 성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불안했다. 이거 제대로 그리는 거 맞아? 혼자 고민하다 정교회 한국대교구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대주교님(91, 그리스 태생)이 미술에 조예가 깊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가 감수를 청했다. 그림을 본 대주교님께서 흡족해 이러시더라. ‘나를 아버지로 여기라!’ 이후 각별한 은혜를 입었다. 그분의 소박한 삶과 실천에는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어떤 분이기에?”
“하염없이 높은 분이 늘 하염없이 낮은 자리에 임하셨다. 생활부터 극도로 검소해 입은 옷은 바늘로 꿰맨 자국투성이였다. 조용한 눈빛과 절제된 언어엔 자비와 존엄이 서려 세상 사람 같지가 않을 지경이었지. 신령스럽다, 그런 표현이 맞을라나?”
“깨달은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천진한 어린애로 돌아간다고 들었다. 삶에 대한 모든 욕심과 의문이 사라져서.”
“영성으로 충만한 존재. 대주교님은 그런 분이었다. 그저 소리 없이 빙긋이 웃어주시는 표정만으로도 깊은 위안과 기쁨을 느끼게 했다. ‘제가요, 당뇨도 있고요, 약도 한 움큼씩 먹고요, 저 앞으로 어떡해요?’ 그렇게 내가 방방거리면 ‘오늘 하루의 걱정거리는 오늘 하루로 족해!’ 하시더라. 내일 일을 미리 걱정할 것 없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내 안의 근심이 순간에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게 아닌가. 이 특별한 분과 함께 그리스의 수도원들을 한 달간 순례하기도 했는데 실로 값진 여행이었다.”
“수도원 순례라. 문외한들은 생각하기 힘든 여행이다. 정결하고 엄숙할 수도원의 무거운 공기부터 연상돼서.”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봉쇄 수도원에 머물기도 했다. 대주교님과 동행했기에 가능한 여정이었지. 며칠씩 머무는 곳마다 나를 사로잡더라. 고뇌와 기쁨으로 신을 찬미하는 수도자들, 헌신을 다투고 사랑을 경쟁하는 수녀들, 성스럽고 아름다운 미사, 놀라운 성화들, 고요한 밤에 은총처럼 창밖으로 내리는 눈송이…. 성모님의 음성이 나를 부르는 것 같은 전율을 느끼곤 했다. 무지렁이 같은 나를 보듬는 예수님의 손길을 깨닫기도 했다. 귀국해서는 평화신문에 순례기를 연재했지. 대주교님께선 글을, 나는 성화를 맡았다.”
고통은 신에게 더 가까이 가는 기회
민첩한 거동, 자주 터져 나오는 웃음소리, 분위기에 생기를 집어넣는 순간순간의 센스. 돌돌돌 명랑하게 흐르는 시냇물쯤? 그의 언동엔 거침이 없어 청명한 물살을 연상시킨다. 기도로 진리를 간구하고, 성화 그리기로 영성에 찬 삶을 갈구해왔으니 파란만장 세상사야 이미 관통해 가뿐한가? 그는 ‘모든 것이 주님의 선물’이라는 믿음과 실감으로 기쁘다지. 기쁘기에 평화로운 내부엔 에너지가 샘물처럼 고인단다. 흔히들 방울방울 피를 뿜듯이 진을 빼며 그림과 씨름하지만 그는 색과 선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에세이도 많이 썼다. 그간 여러 권의 서화집을 출간했다.
“내가 다작을 한다. 일단 구상을 하고 나면 작업에 속도가 붙어 손쉽게 그림을 완성한다. 남편의 적절한 통제가 아니었다면 이미 죽었을지도 모른다. 몰입이 지나쳐 건강을 해쳤거든.”
“고 김수환 추기경을 기리는 기념관엔 당신이 만든 성상(聖像) 조각 작품들이 들어가 있다. 성화 작가로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 셈이다.”
“이름이나 위상에 무슨 의미가 있겠나. 미술계에선 성화를 쳐주지도 않는다. 외도로 여긴다. 한때 이름에 욕심이 생기기도 했지만 낮은 자리로 내려가는 게 본분임을 알고선 부끄러웠다. 성화는 순수하지 않으면 그릴 수 없다. 영혼을 다한 작업을 하지 않으면 성화가 나올 수 없거든.”
“사람이 순수할 수만 있겠는가? 진정으로 순수해지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던걸. 신의 숲, 그 안전지대에 들어간 당신은 어떤가?”
“아집과 불순에 휘말린 마음이 망둥이처럼 날뛰기도 한다. 그러나 믿는 자는 믿으면 믿는 대로 된다는 걸 알기에 믿음의 힘으로 망둥이놈을 수월하게 밀어내지. 진실한 신앙인들은 안다. 천사가 늘 우리를 보호한다는 걸. 기적은 성경 안에만 있지 않다. 삶이란 온통 기적이지 않던가? 그렇지 아니한가? 날마다 이어지는 우리의 들숨과 날숨 자체부터가 기적이지 않은가. 세상엔 위선과 탐욕이 횡행하지만 삶을 기적으로 받아들일 경우엔 부정적인 마인드라는 게 들러붙을 자리가 없어진다.”
“인도의 어떤 수행 무리는 이런 노래를 부른다. ‘신이여, 나는 당신을 사랑하는데 왜 이토록 외롭죠? 왜 이토록 괴롭죠?’ 천사가 우리 곁에 있을지라도, 세상의 암초에 부딪히지 않기 위해선 홀로 고통스럽게 계속 노를 저어갈 수밖에 없는 게 인간의 초라한 숙명이지 않나?”
“삶은 고통스럽지만 나는 고통을 고통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는다. 신에게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경로이자 기회로 삼는다. 신을 섬기는 자에게 극복하지 못할 고통은 없다. 있다면 그건 신의 소관사항이지. 신에게 맡기면 그만이지. 그렇다면 삶을 통째 긍정하지 못할 게 뭐란 말인가. 부족한 나는 부끄러워 성경 한 구절의 말씀이나마 실천으로 이루고자 노력한다. 이젠 더 먼 길을 떠나고 싶다. 삭발 수도자로 살고 싶다. 그렇게 될 거다. 가족은 어쩔 거냐고? 부부가 함께 간다. 남편도 공감하니까.”
그는, 나다운 나를 찾아가는 삶에 올인하는 거다. 내 삶이 꼬였다 느껴지는 건 내가 나를 잘 모른다는 걸 알 때다. 어라, 내가 생각했던 내가 아니네? 이 새삼스러운 발견은 괴롭지만 문제를 풀 실마리? 정미연의 드라마는 ‘나는 누구인가?’에서 시작해 다시금 ‘나는 누구인가?’로 꼬리에 꼬리를 물고 흘러간다.
봄볕이 포근히 내려앉은 숲길이다. 풀 틈새엔 홀로 암팡지게 피어난 노란 민들레꽃. 언제부터 몸을 들이민 놈일까, 벌이 꽃 속에서 삼매경에 잠겼다. 미동조차 없으니 이미 취해 혼곤한 게다. 영락없이 낮술에 대취해 엎어진 한량 꼴이다. 봄이란 탐닉하기 좋은 철이다. 그렇다고 다 가질 수야 있겠나. 꽃을 밝히는 벌인들 무슨 수가 있으랴. 무릇 아름다운 것들은 차지하기 어렵다. 차지할 수 없어 아름답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경북 문경시 마성면 진남휴게소에 주차하고 토끼비리를 오른다. 풍경보다 천년 벼랑길의 뜻을 음미하는 데 의미를 두면 좋다. 토끼비리의 길이는 불과 500m. 나머지 길들은 숲으로 변해 갈 수 없다. 일부 좀 위험한 구간이 있어 신경 써야 한다. 고모산성과 신라고분군도 둘러볼 만하다. 영강변에 뒤엉긴 여러 도로들에서 들려오는 차량 소음은 옥에 티.
봄이 좋다지만 움켜쥘 수 없다. 말뚝에 잡아매둘 수 없다. 온 줄을 알자마자 저만치 가는 게 봄이지 않던가. 연분홍 치맛자락 흩날리며 요리조리 내빼 산등성이 너머로 후루룩 사라지는 가인(佳人). 내가 아는 봄이 그렇게 무정하다. 그렇기에 봄이면 푼수처럼 들썩이다 헛물을 켠다. 결핍이 많은 자는 충만한 봄에도 이렇게 실속이 없다. 그저 아득해지더라. 그런 줄을 알면서도 봄날의 치맛자락 거머쥐는 심사로, 지금 산길을 오르는 중이다.
‘토끼비리’라 부르는 옛길이다. ‘비리’란 높이 솟은 벼랑을 뜻하는 ‘벼루’의 사투리이니 ‘토끼벼랑’이다. 이 길엔 유서(由緖)가 있다. 후백제 견훤을 치기 위해 진격하던 고려 왕건이 이곳 영강(穎江)변 산허리에서 길을 잃었더란다. 한데 어디선가 나타난 토끼가 벼랑 위를 내달리더라는 것. 왕건은 옳다구나, 토끼가 달린 벼랑길을 따라 군사를 몰아갔다. 조선의 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전하는 역사다.
토끼비리길은 영남과 한양을 잇는 조선의 핵심 도로 인프라였던 영남대로의 한 구간이기도 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갔겠는가. 암벽을 까내고 축대를 쌓고, 인마(人馬)의 내왕이 잦아지며 추가 공사도 잦았을 게다. 선조들이 다듬은 흔적과 공들인 자취가 완연하다. 현재는 안전 데크를 설치해 꽤나 수월한 길이 됐지만 방심하면 큰일날 곳이 군데군데 있다. 조선의 서거정은 토끼비리를 일러 “기이하기가 양의 창자와도 같다”고 했다. 어변갑이라는 문신은 두려워 좀 얼었던가보다. ‘빨리 가다 보면 자빠지니 나는 기어가네, 부디 꾸짖지들 마소!’ 그런 내용의 시 구절이 보인다. 삐끗 자칫 실족하면 아스라한 절벽 아래로 한참이나 걸려 떨어질 참이라 미리 설설 기는 게 여기선 요령이었을지도.
위험한 길이라도 가야 할 길이면 가는 게 사람이다. 벼랑에 선반처럼 얹힌 길이라고 가지 못할쏘냐.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토끼비리를 밟았는지 바윗길이 닳고 닳았다. 유리알처럼 반질반질 바위에서 광이 난다. 천년을 밟고 지난 길인데 오죽하랴. 흔히 이 길은 한양으로 과거시험 치러 가는 이들이 애용했다고 한다. 그러나 볼일 보러 오간 이들이 그뿐이랴. 잘난 인생, 못난 인생, 서러운 인생, 뒤집힌 인생, 꿈 많은 인생, 각양각색의 군상이 토끼비리를 지나갔을 것이다. 굶주린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쫓아와 등을 후벼파는 밤에도 기어이 넘어야 할 길이라 얼어터진 맨발로 넘은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천년에 걸쳐 지나간 발길들이 빛나도록 닦은 토끼비리는, 잊힌 삶의 흔적이자 잊히지 않아야 할 팔만대장경이다. 세상에서 가장 넓은 바다, 가장 넓은 하늘의 압축파일인 것은, 사람이라는 소우주의 형적이 여기에 화인처럼 박혀 있기 때문이다.
풍경도 좋을시고! 벼랑 저 아래로 굽이치는 영강의 사행(蛇行)이 볼 만해 그렇게 감탄하다가도 멈출 수밖에 없는 건, 강물을 얼싸절싸 휘감고 혼재한 고속도로와 국도와 철로가 어지러워서다. 그러나 국도와 토끼벼랑길이 본질적으로 다를 게 뭔가. 인간의 기쁨과 슬픔, 애환과 희망을 품고 흘러가는 삶의 물결이라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천년이 흐른 뒤에는 저 국도마저 고고학으로 발굴돼 인간의 족적과 영욕을 웅변할 게다. 천년을 묵은 길에 서린 도(道)와 영혼의 얼굴을 드러낼지도 모를 일이다.
토끼비리길은 고모산성으로 이어지며 끝난다. 고모산성과 겹으로 지어진 석현성 안엔 고색창연한 성황당이 있다. 과거 보러 가는 총각을 사랑했으나 끝내는 배신당하고 목숨을 끊은 어떤 색시의 고혼을 달래느라 지어진 서낭당이다. 풋정을 애정으로 오해했다. 풋정일 땐 온통 꽃밭이지만 정작 진정일 땐 지옥이다. 봄바람 살랑인다고 함부로 윙크할 일 아니다. 할 때 하더라도 풋정은 풋정으로만 즐길 일이다.
● Exhibition
◇ 프렌치 모던: 모네에서 마티스까지, 1850-1950
일정 6월 14일까지 장소 고양아람누리 아람미술관
미국 최초로 인상주의 전시를 열었던 브루클린 미술관의 유럽 컬렉션 중 59점의 대표작을 만날 기회다. 이번 전시에서는 19세기부터 20세기 중반까지의 프랑스 모더니즘 예술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폴 세잔, 마르크 샤갈, 앙리 마티스, 클로드 모네 등 총 45명 작가의 작품들을 풍경, 정물, 인물, 누드 등 4개의 섹션으로 구성했다. 각 작품의 의미와 특성을 통해 모더니즘 전반에 걸친 미술사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시간대별 관람 인원을 제한하며, 고양문화재단 홈페이지에서 사전 접수 후 입장 가능하다.
◇ 가능성에 대한 가능성: 오브제 시리즈
일정 7월 28일까지 장소 아이러브아트센터 셀린박 갤러리
개인과 사회, 정치적 이슈를 테마로 2017년부터 2020년까지 셀린박 디자이너가 작업한 사물 시리즈 전이다. 앞서 2018년 런던 빅토리아 알버트 박물관과 2019년 주 프랑스 한국문화원에 초청돼 전시한 바 있다. 비판적 디자인을 기반으로 사회 구조의 이면적인 모습을 사물기호증(움직이지 않는 특정 물체에 초점을 둔 성도착증의 일종)과 관련지어 예술작품으로 표현한 점이 돋보인다. 여러 각도에서 바라본 사회적 이슈를 드러내고 이를 통해 관객 스스로 구조와 제도의 모순으로 생긴 결함을 통찰하도록 이끈다.
◇ 모두의 건축 소장품
일정 6월 14일까지 장소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전관
서소문 본관 ‘모두의 소장품’ 전과 연계한 전시로, 동시대 수집의 범위와 행위를 성찰하고 미래의 소장품 형식을 탐색한다. 1980년대 초반 중구 회현동에서 현재 관악구 남현동으로 이축된 서양 고전양식의 구 벨기에 영사관을 중심으로 건축 수집의 기원, 의미, 방법을 체험하는 2개의 섹션으로 마련했다. 건축을 수집하는 8개 국·공·사립 기관과 40여 명의 건축가가 함께한 150여 점의 전통 건축과 근·현대 건축자료를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코로나19로 인한 잠정 휴관으로 서울시립미술관 SNS 채널을 통해 온라인으로 관람할 수 있다.
◇ 메이커 탐구생활
일정 9월 30일까지 장소 크리타
과학과 예술의 유쾌한 연결을 이어가는 메이커 세 팀이 함께한 전시다. 50만 구독자를 보유한 공학 유튜버 ‘긱불’(GEEKBLE), 을지로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디자인과 메이커의 경계를 허무는 ‘프래그’(PRAG), 가족과 어린이를 위한 메이커테인먼트 콘텐츠를 선보이는 ‘크리타’(CR!TA)가 참여했다.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은 일상의 탐구에서 시작된다”라는 메시지 전달을 위해 전시품 외 큐레이터 기획공간을 별도로 꾸렸다. ‘사회적 거리 두기’의 실천으로 최대 10인까지 입장 가능한 소규모 전시 예약제를 잠정 운영하며, 일일 8회 진행된다.
● Stage
◇ 2020 디즈니 인 콘서트
일정 5월 23~24일 장소 세종문화회관대극장 출연 디즈니 콘서트 싱어즈, 디토 오케스트라
미국 월트 디즈니 본사의 프로듀서이자 음악 작·편곡가로 활동해온 테드 리케츠가 전 세계를 무대로 선보였던 오리지널 프로덕션 공연이다. ‘인어공주’, ‘신데렐라’,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 ‘알라딘’을 비롯해 ‘겨울왕국 2’까지, 디즈니 대표 명작들을 대형 LED 화면과 더불어 60인조 이상의 풀 오케스트라 연주로 즐길 수 있다. 화려한 무대와 아름다운 선율의 향연으로, 손주와 함께라면 더더욱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소중한 시간이 될 것이다.
◇ 로빈
일정 5월 1일~8월 2일 장소 KT&G 상상마당 대치아트홀 연출 정태영 출연 김대종, 임찬빈, 박정원 등
지구 밖 행성을 배경으로, 유능한 과학자이지만 자식과의 교감에 서툰 아빠와, 답답한 우주를 벗어나 지구로 돌아가려는 딸의 갈등과 화해를 그린다. 부녀 사이에 중재자로 나선 로봇 ‘레온’을 통해 인간의 감정과 기억, 가족의 사랑에 대한 의미를 일깨운다.
◇ 오페라의 유령 월드투어
일정 6월 27일까지 장소 블루스퀘어 인터파크홀 출연 클레어 라이언, 맷 레이시, 커트 올즈 등
프랑스 소설가 가스통 르루의 동명 소설이 원작인 작품이다. 브로드웨이에서 최초 1만 회 공연을 돌파하며 가장 오래된 뮤지컬 중 하나로 손꼽힌다. 새롭게 단장한 월드 프로덕션 팀이 8년 만에 한국 관객을 찾아 더욱 압도적인 스케일의 무대와 진한 감동을 선사할 예정이다.
● Movie
◇ 나는 보리
개봉 5월 21일 장르 드라마 감독 김진유 출연 김아송, 이린하, 곽진석, 허지나 등
농인 가족 사이에서 유일하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11세 ‘보리’는 왠지 모를 외로움을 느끼는 아이다. 그런 보리가 소외감을 벗어나기 위해 특별한 소원을 빌게 되며 벌어지는 일련의 성장 스토리를 담았다. 정겨운 바닷가 마을을 배경으로 보리네 가족의 일상과 주인공의 고민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감독상, 제24회 독일 슈링겔국제영화제 관객상과 켐니츠상, 제20회 가치봄영화제 대상 등을 수상해 국내외적으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 레미제라블: 뮤지컬 콘서트
개봉 5월 14일 장르 공연실황 감독 제임스 파우웰, 장 피에르 출연 마이클 볼, 알피 보 등
지난해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선보였던 ‘레미제라블: 뮤지컬 콘서트’를 스크린에서 만나게 됐다. 콘서트 형식의 작품으로 모든 대사가 노래로 진행되는 송스루 공연의 생생한 현장을 담았다
◇ 보이콰이어
개봉 5월 14일 장르 드라마 감독 프랑수와 지라르 출연 더스틴 호프만, 캐시 베이츠 등
상처가 있는 소년이 국립 소년합창단에서 인생 스승을 만나며 행복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아카데미 주연상에 빛나는 더스틴 호프만과 캐시 베이츠 등 연기파 배우들의 참여로 기대를 모은다.
● Book
◇ 백세 일기 (김형서 저ㆍ김영사)
올해 4월, 만 100세 생일을 맞아 펴낸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의 신간. 소박하지만 특별한 ‘일상’, 온몸으로 겪어온 격랑의 ‘지난날’, 100세의 지혜가 깃든 ‘삶의 철학’, 고맙고 사랑하고 그리운 ‘사람’ 등 4가지 주제로 70여 편의 글을 엮었다. 한 세기를 살아보니 알게 된 깨달음과 솔직한 심정, 그간의 희로애락 등을 담담하면서도 재치 있게 들려준다.
◇ 천년의 수업 (김헌 저ㆍ다산초당)
존재와 죽음, 자존과 행복, 타인과의 관계 등 인생에서 주요한 9가지 질문에 대해 통찰한다.
수천 년 동안 서양 고전이 던져온 물음들을 통해 ‘나다운 삶은 무엇인가’를 고찰하게 한다.
◇ 50, 이제 나를 위해 산다 (호사카 다카시 저ㆍ상상출판)
50세를 앞두거나 접어든 사람이 참고할 만한 ‘행복 습관’ 80가지를 정리했다. 취미, 공부, 인간관계, 건강, 마음가짐 등 행복한 노후를 위해 실천할 수 있는 일상의 노하우를 소개한다.
◇ 더 월 (론 란체스터 저ㆍ서울문화사)
2019년 부커상 후보에 오른 작품으로 기후 변화로 인해 황폐해진 미래 세상에서 벌어질 문제를 그린다. 시사적이고 풍자적인 시선으로 갈등을 드러내면서 경고의 메시지도 담았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세요. 이번 호에는 박형숙 소설가가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당신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년 전 봄날의 어느 오후입니다. 그전까지는, 미안하지만, 당신을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요즘에 당신 같은 손님은 희귀하지도 않아서 쉬이 오간다는 소식도 건성으로 들었을 뿐입니다.
정기건강검진 후 여의사가 내민 진료의뢰서에는 당신을 암시하는 문구가 있었지요. 담담했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수술대에 올라섰을 때도, 수술 후 조직검사 판정에서 8개월에 걸친 치료에 대한 안내를 받으면서도 흔히 이런 경우 떠올린다는 “내게 왜 이런 일이?” 같은 물음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그냥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래, 그렇지, 그럴 거야.” 마치 언젠가 약속을 해둔 것처럼, 그렇게 약속한 사람이 날 찾아온 것처럼, 당신이 친밀하게 느껴졌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그동안 당신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어떤 기미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그렇다고 당신이 반가웠던 것은 아닙니다. 결국엔 만날 수밖에 없으리라는 체념 같은 수긍이라고 해야 할까요? 어쩌면 당신이 남길 변화에 묘한 설렘마저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2cm의 작은 덩어리. 가슴 오른쪽과 왼쪽에 자리 잡은 당신은 고작해야 새끼손가락 마디보다 작은 크기였어요. 한 번 밟으면 단박에 으스러질 것처럼요. 하지만 당신의 생명력은 강인해서 날카로운 메스로 도려내도 온전히 떠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당신이 남긴 흔적들이 온몸에 퍼져 있을지도 모른다고요. 가슴이나 생식기, 내장 어느 뒤편 구석이나 뇌수, 뼛속 사이, 혈액 어디든 머물러 반란을 일으킨다고요. 반란 끝에 생사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게 한다고요. 온몸 가득 퍼져 있을지도 모를 당신을 생각하니, 참, 아득하네요. 도대체 당신은 언제부터 내 안에 머물러 있었나요?
젊은 시절, 안하무인의 그 시절이 생각나네요.
그때는 가진 것이 없는 자의 당당함으로 거칠 것이 없었지요. 제도에, 관습에, 이해관계에, 심지어는 생존에 구속된 사람들마저 마음껏 비웃었습니다. 세상은 즐겨 읽던 책 크기로 축소되어 보였고 단번에 뒤집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치기를 용기로, 만용을 자유의 행사로, 과로와 무절제를 열정으로 여겼습니다. 사회 변화에 가장 앞서가는 이의 곁에 있다고 생각했고, 사회 변화를 가로막는 자들을 증오했습니다. 가난했지만 부끄럽지 않았지요. 이따금, 언제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도 같습니다. 그때부터 당신이 내 주변에 어슬렁거렸을까요?
차츰 소유물이 생겼습니다. 아파트, 자동차, 사회적 지위, 가족관계, 철마다 바뀌는 구두들, 가방들, 최신형 TV, 오디오 세트, 맛집 카탈로그, 항공예약권…. 가진 것이 많아질수록 만족은 점점 줄어들었지요. 이제 누군가의 용기는 치기로, 자유의 행사는 만용으로, 열정은 무절제로 여겨집니다. 사회의 변화를 바란다고 믿고 있지만, 급격한 변화 앞에서 한발 뒤로 물러서며 움츠립니다. 이제 가난하지는 않지만 부끄러움 대신 불쾌감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이따금, 예상보다 빨리 죽게 될까봐 두렵습니다. 욕구불만이 목까지 차오르던 그때였을까요? 당신이 내 곁에 머물렀던 것은?
언젠가 “죽도록 달린다”라는 제목의 연극을 본 적이 있습니다. 연극 내용은 어렴풋한데 배우들이 원형의 무대 위에서 죽도록 달리던 모습은 지금껏 생생합니다. 그래요. 나 자신이 종종 죽도록 달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지하철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할인기간을 지나치지 않기 위해, 접수마감을 넘기지 않기 위해, 인기를 위해, 인정을 위해, 세상의 정보를 발밑에 두고 있다는 자만심을 유지하기 위해 죽도록 달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요.
그토록 달리는 순간, 당신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어느 틈에 내 어깨에 올라탔겠죠. 그러고는 누군가의 성공을 부러워할 때 방심한 듯 열려 있던 빈 구멍들로 들어왔겠죠. 질투와 시기심으로 쿵쾅거리는 가슴 언저리에 자리를 잡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죽음에 대한 공포심을 자양분으로 쑥쑥 자랐을 테죠.
당신을 떠나보내는 일은 힘겨웠습니다. 한 번 맞으면 혼절해서는 자신이 아주 작고 작은 벌레처럼 힘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여덟 번의 독한 주사 때문만은 아닙니다. 내 안의 탐욕과 아집과 독선이 어느새 당신과 한몸이 되어 떨어질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당신이 머물다 간 그 자리에서 신호가 옵니다. 찌르르르. 가슴 언저리에서 오는 그 신호로 당신의 존재를 실감합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었다는 사실을요. 어쩌면 당신은 아주 떠난 것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괜찮습니다. 홀로 있는 법, 한 발씩 내딛는 법,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법, 오래 들여다보는 법. 이런 것들은 당신이 아니었다면 몰랐을 것입니다. 내 발밑의 작은 꽃들과 벌레들, 코끝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흙냄새에 다시 눈뜨게 해준 것도 당신인걸요.
찌르르르.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몸의 감각이 서서히 깨어납니다.
박형숙 소설가
인생의 갖가지 터널을 통과해보고 싶은 사람, 인간의 갖가지 개성에 부딪쳐보고 싶은 사람. 소설집으로 ‘부치지 않은 편지’와 ‘아홉 번째 고독’이 있다.
거실에 앉아 VOD로 영화보기를 했다. 가까운 지인들과 집안에서 멋진 대화를 나누던 ‘영화 논-픽션’을 택했다. 1년 전에 영화관에서 매혹되었던 이들의 지적인 토크, 특히 요리가 담긴 넓은 접시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대화를 나누던 풍경을 다시 보고 싶었다.
종이책과 e-Book간의 선택이나 문제는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도 진행 중인 고민이다. 책이나 신문이 인터넷 사이트라는 시공간을 넘어 순간적으로 먼저 전한다. 이런 현실에 현대인들은 이미 익숙하다. 이 영화를 만든 올리비에 아사야스 감독은 "우리가 사는 세계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디지털화는 일어나고 있다. '논-픽션'은 그러한 변화에 우리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대한 영화"라며 "그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물살에 몸을 맡기는 것뿐이다"라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출판사를 운영하는 성공한 편집장 알랭이 작가 레오나르와 새 책 출판에 대한 진지한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시작이 된다. 알랭은 레오나르가 자신의 사적인 경험을 창작에 적용하는 것을 회의적으로 대꾸한다. 그러다가 EU 정책에 대한 토론까지 나아간다.
편집장 알랭은 퇴근한 뒤에도 그런 시간이 계속된다. 영화배우인 아내와 친구 부부 등이 모여서 자신들만의 의견을 자유롭게 피력한다. 블로그 조회 수와 책 판매에 관한 비교, 그리고 읽고 쓰는 사람들의 생각을 말한다.
각자의 무릎 위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올려놓고 지적인 토크가 쏟아져 나오는 풍경은 생경하다 못해 경이롭다. 책을 중심으로 한 출판이나 정치와 문화 민주주의, 디지털화에 따른 대중의 취향과 그들의 삶에 대한 담론이 위트 있고 아름답다. 개운하고 유쾌하다.
일상에서 늘 만나는 이웃이나 친구들의 대화가 마냥 수다가 아니다. 비판이나 세상의 문제제기, 그리고 문제 해결에 따른 의견들이 담담하면서도 빛나는 사유의 언어로 나타난다. 영화의 모든 대사가 탄탄하고 시원하게 터져 나온다. 도서 출판계의 위기가 다가온 세상에 현재와 미래의 고민이 무겁고 지루할 만 한데 영화 보는 내내 시종일관 귀 기울여 경청하게 된다.
게다가 그들만의 각자의 연애가 유지되고 있음을 서로 눈치채고 있는 중이었다. 알랭의 아내 셀레나와 작가 레오나르가 오랜 연인 관계였다. 물론 알랭도 회사의 젊은 디지털 마케터 로르와 연애 중이다. 이런 아슬아슬하기만 한 일상이 복잡하게 얽히는 감정 씬 하나 없이 가볍게 해결해 나간다. 섬세한 감정의 흐름을 굳이 차단하지 않는다.
작가 레오나르가 부인에게 결국 고백한다. “사실 나 바람피웠어” 놀라운 이 말에 “알고 있었어. 당신 책도 순 그 얘기잖아”영화를 보는 사람이 더 놀라울 뿐이다.
우리의 보편적 정서로는 가능키 어렵겠지만 그들은 결국 공존을 택한다. 막장을 우아하게 승화시켰나 잠깐 시큰둥했지만 파리지앵들의 쿨한 감정 정리가 시원하기까지 하다. 완벽하게 쿨하다. 이 또한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벗어나게 하는 유쾌한 장치가 되어준다.
특히 작가 레오나르가 서점에서 진행되는 소설가와의 대화 장면이 있다. 독자와 작가와의 자유로운 비판은 간간히 가슴이 쫄깃해진다. 직설적이면서 촌철살인의 질문과 대답은 바라보며 멋지기까지 하다. 때로 영화 전편으로 음악으로 채운 듯한 작품을 볼 때가 있다.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대화가 가득한 영화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영화를 보기 전부터 줄리엣 비노슈가 나온다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 아주 오래전 그녀가 출연했던 영화 ‘초콜릿’을 떠올렸다. '세상의 모든 초콜릿'이라는 이름의 초콜릿 가게를 연 그녀에게 집시의 자유분방한 기질을 가진 조니 뎁이 나타나던 영화. 그때의 신비로운 아름다움과는 다르게 인생의 내공이 조금 더 묻어나는 연기를 한 줄리엣 비노쉬가 반가웠다.
얼마 전 박수근 그림 한 점을 강원도 양구군에서 사들였다는 기사가 났다. 박수근의 그림 ‘나무와 두 여인’ 시리즈 6점 중 한 점이다. 구매 가격이 무려 약 8억 원이다. 시골 재정이 어려운데도 이러한 과감한 결정을 한 양구군에 경의를 표한다.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해 방학이나 휴가철에 자주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지구촌 사람들 삶의 모습이나 환경을 보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힐링도 하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신비로운 자연경관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마다 찬란한 문화유산은 자랑거리다. 여행 중 어디를 가든 빼놓지 않고 가는 곳이 박물관이요 미술관이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가면 레오나르도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을 봐야 하고, 네덜란드에 가면 뭉크의 ‘절규’를 봐야 한다. 유명한 그림 한 점이 있는 곳에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사진 한 장 찍기도 어렵다.
지난번 오스트리아 빈에 갔을 때 벨베데레 궁전을 들렸을 때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처음 그의 진품 ‘키스’작품이 공개된다는 거였다. 우리가 사진이나 서적을 통해서 많이 봐왔던 작품이다. 그런데 그의 진품이 100년 만에 전시되는 것이고 또다시 진품을 만나려면 100년을 기다려야 한단다. 이번에 못 보면 내 생애 진품은 구경도 못 하는 것이 된다. 아니나 다를까 기념관에 도착하니 관람 인파로 가득하다. 요즘은 사진기술도 발달하고 복제품도 얼마든지 있는 시대다. 유튜브에는 클림트의 ‘키스’작품 제작 방법까지 알려져 많은 사람들 따라 그리고 있다. 그렇게 쉽게 볼 수 있건만 이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을 품고 몇 시간을 기다려 진품 앞에 섰을 때의 그 짜릿한 느낌과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평생을 두고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마치 작가의 고뇌와 영혼이 전이되어 오는 느낌이다.
또 한 번은 일본 다카마쓰 나오시마 지중미술관을 갔을 때이다. 모네의 ‘수련’시리즈 몇 점이 전시되어있다고 했다. 또 긴 줄을 서야 했다. 여긴 더 엄격하다. 한 번에 꼭 열다섯 명씩만 들어간다. 앞 조가 다 보고 나서야 다음 조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들어간 전시장은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로 빽빽이 붐비던 생각을 하면 천양지차이다. 모네의 진품 한 점이 지역경제에 큰 힘이 되는 셈이다. 유명 화가의 진품을 보는 것 자체만도 감동이었지만 그 쾌적한 공간에 그림 감상을 한 경험이야말로 특별히 대우를 받은 느낌이었다. 사진 촬영이 금지라 사진 한 장 없지만, 눈과 마음으로 찍어온 감동이 지금도 짜릿하게 전해온다.
양구군이 박수근(1914~1965)의 대표작품 '나무와 두 여인' 을 7억 8750만 원을 들여 구매했다고 한다.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1년 치 작품구매 예산을 몽땅 투입해 27×19.5cm짜리 손바닥만 한 그림에 투입한 셈이다. 소장자도 박수근 미술관을 위해 1억 원의 통 큰 할인을 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특히 소설가 박완서 ‘나목(裸木)’의 영감이 된 작품으로 유명하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1952년 당시 미군 기념품 판매점 내 초상화 부에서 박수근과 박완서가 있었다. 훗날 작가 박완서가 함께 일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박수근을 주인공으로 쓴 작품이 나목이다. 처음엔 잎도 없는 ‘고목’이라 생각했으나 그 그림이 시든 ‘고목(古木)’이 아니라 언젠가 싹을 틔울 봄날을 기다리는 ‘나목(裸木)이었음을 깨닫는다’는 이야기다. 박수근의 이 그림은 당시 가난했던 서민의 삶의 모습을 연민의 시선을 담아 그린 그림이라 한다.
이러한 미술품이 장차 지역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문화 브랜드임을 믿는다. 그림 구매를 위해 백방으로 뛰며 설득한 미술관 관장과 이를 만장일치로 찬성한 양구 군청의 결정에 찬사를 보낸다. 이 작품은 오는 5월 6일부터 열리는 특별전 ‘나목: 박수근과 박완서’에서 선보인다고 하니 나도 꼭 찾아가서 관람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