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계의 개그맨’ 박민수(50) 씨는 순수한 광기를 지닌 유쾌한 인물로 보이지만 실은 그 반대에 가깝다. “돈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면 못 할 게 없다”고 대놓고 말하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이 땅의 아버지다. 쌍둥이 아들을 위해 은퇴도 미뤘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절실하게 하는 중이다.
여의도 증권 유관기관 24년 차 직장인이자 주식투자 1타 강사. 샌드타이거샤크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는 베스트셀러 작가. 그리고 구독자 225만 명을 자랑하는 이말년 작가의 유튜브 채널 ‘침착맨’에서 인지도까지 쌓아 올린 사나이. 박민수 씨와 마주하기 전에는 능력 있는 직장인의 흔한 성공 스토리로 보였다. 주식투자에 성공하면서 업계에 이름을 알린 뒤 실타래 풀리듯 각종 섭외 대상이 되는, 우리네에겐 무척 어렵지만 그 동네에서는 가능한 이야기의 주인공인 줄 알았다. 그래서 50대에도 해맑은 미소를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만나보면 다르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 어쩌다 보니 재미를 주는 캐릭터가 됐는데, 사실 평소에 저는 굉장히 침착해요.”
차분한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그가 들려준 이야기는 더 의외였다. 그들만의 세계에서 일어나는 운이라고 여겼던 영역마다 박민수 씨의 의도와 숨은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을 위해서, 쓸모를 찾아서
직장인은 사표를 가슴속에 품고 다닌다는 말이 있다. 박민수 씨도 그렇다. ‘쓸모’라는 말을 유독 좋아하는 그에게 나이 들어 쓸모없어질 수 있다는 건 실체적 불안 그 이상이었다. “쉰 살이 되기 6~7년 전부터 회사에서의 내 쓸모가 줄어들겠다는 느낌이 왔어요. 회사 밖에서의 쓸모가 비자발적으로 생길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고요. 쉽게 말해 나가라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거죠. 언젠가 생길 일을 미리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 가족을 어떻게 먹여살릴까’ 생각하면 엄청나게 절실해지는 거죠. 굶기면 안 되잖아요?”
박민수 씨는 고3처럼 살아가고 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주식투자 뉴스를 정리해서 네이버 카페에 올리고, 직장으로 가 오전 9시부터 오후 6~7시까지 업무를 본다. 운동 삼아 가급적 목동 집까지 1시간 30여 분 걸어서 퇴근하고, 오후 9시부터 새벽 2시까지 글쓰기 등 자기계발을 한다. 라디오나 유튜브 촬영이 있을 때면 꼬박 며칠을 준비에 매달리기도 한다. 체력의 한계를 느끼지만 루틴에 변함은 없다. “절실함이 원동력인 것 같아요. 가족이 있잖아요. 책임감인지 의무감인지 뭔지 모르겠지만, 가족이라는 존재가 굉장히 에너지를 올려줘요.”
40대 초반까지 그는 쓸모를 회사 안에서만 찾았다. 밤샘 야근을 마다하지 않았고, 술은 마시지도 못하면서 회식 자리는 꼭 참석했다. 그렇게 ‘에이스’라 불리며 승진이 동기보다 2년 이상 빨랐지만, 몸은 정직했다. 버텨내지 못한 것이다. “2018년에 협심증으로 쓰러졌어요. 그때 또 한 번 이런 일이 있으면 큰일 난다는 의사 소견을 들었습니다. 당시 쌍둥이가 초등학생이었어요. 중환자실에 누워서 본 두 아이의 눈빛이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내가 이 아이들을 두고 떠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해야 할 게 있더라고요.”
박민수 씨는 무작정 글을 쓰기 시작했다. 서른여섯에 “넌 뭘 잘하니?”라는 어머니의 말을 듣고 불현듯 ‘주식을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그는 이후 점심도 굶어가며 주식 공부에 매달려 7년 만에 종잣돈 3000만 원을 8억 원으로 불렸다. 그 노하우를 아이들에게 남겨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내가 죽으면 아이들이 물려받을 텐데, 아직 어리잖아요. 쓸데없는 짓 해서 다 까먹을까 봐 걱정되는 거죠. 아빠만의 투자 방법과 원칙을 알려주고 싶었어요. 그렇게 하루에 3시간 자면서 3주 동안 쓰니 책 한 권 분량이 됐어요.”
2018년 9월 출간돼 현재까지 10만 부 이상 팔린 ‘주식 공부 5일 완성’은 이렇게 완성됐다. “인쇄소 가서 그럴듯하게 포장하려 했는데, 사장님이 그러더라고요. ‘내용이 좋으니까 책을 내보라’고요. 그래서 진짜 투고를 해봤어요. 당연히 안 되죠. 그런데 임프린트(한 출판사에 속한 별도의 하위 브랜드)에 원고가 흘러갔나 봐요. 마침 대표가 증권사 경험이 있는 분이라 가치를 알아봤고 출간이 이뤄졌어요.”
책은 2020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대형 재테크 유튜브 채널 ‘신사임당’ 출연이 결정적이었다. 그 계기는 한 통의 메일에서 시작됐다. “제가 먼저 출연 요청을 했습니다. 답변은 2개월 후에 받았어요. 촬영 후 업로드까지 다시 2개월이 걸렸고요. 그리고 다음 날부터 소위 말해 빵 터졌죠. 인생 역전이었습니다.” 또 다른 유명 재테크 유튜브 채널 ‘김작가TV’ 출연도 마찬가지였다. 먼저 문의했고, 정중히 고사하자 재차 어필해 출연 기회를 얻었다. 그 6개월 사이 책 7만여 권이 팔렸다.
최고민수, 침착맨을 만나다
쓸모를 증명하기 위해 애썼던 시간은 의외의 보상을 줬다. ‘침착맨’ 이말년 작가와의 인연이다. 박민수 씨는 2021년 초 MBC 웹예능 전문 유튜브 채널 ‘M드로메다 스튜디오’의 기획 시리즈 ‘말년을 행복하게’에 일일 주식투자 강사로 출연하며 ‘침착맨’과 안면을 텄다. ‘최고민수’라는 애칭도 그때 생겼다. ‘주식계 박찬호’라는 설명이 붙을 만큼 지치지 않는 열강에 ‘침착맨’이 “최고네요, 선생님. 닉네임도 바꾸세요, 최고민수”라고 하면서다.
인연은 ‘침착맨’ 채널까지 이어졌다. 7번 정도 출연했고, 그중 한 콘텐츠는 100만 뷰가 넘었다. “본인 채널에 와서 주식 강의를 1~2시간만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실수를 했어요. 주식 강사로 섭외된 자리에서 쓸데없는 이야기만 한 거예요. 군대 이야기, 축구 이야기, 군대에서 축구 한 이야기 등등 걷잡을 수 없이 말이 새버렸어요. 6시간 방송을 했는데 정작 주식 강의는 20~30분에 불과했죠. 집에 가면서 무지 걱정했어요. 욕먹을 각오를 했는데, 감사하게도 신선하게 봐주셨어요.”
콘텐츠에 대한 열의와 쉬지 않는 입은 이제 박민수 씨의 캐릭터가 됐다. 경제사 특강, 주식 종목 고르는 10단계 특강, 주식 ETF 투자법 7단계 특강 등 평균 6시간에 달하는 장시간 방송은 그 이미지를 굳혔다. 10시간 42분짜리 일본 기타큐슈 여행 브이로그는 그 정수로 꼽힌다. 박민수 씨는 한시도 말을 쉬지 않았고, 구독자는 그 모습을 오롯이 즐겼다. 영상은 90만 뷰를 기록 중이다.
“기타큐슈 여행 브이로그로 인지도가 굉장히 올라갔어요. 어쩌다 보니 재미를 주는 캐릭터가 됐는데, 사실 굉장히 열심히 준비해 가는 사람이에요. 말했잖아요, 저는 ‘쓸모’가 중요한 사람이라고요. 출연 전 일주일 정도 준비에 매달려요. 기타큐슈 여행도 정말 많이 준비했어요. 실은 항일 투어로 계획한 거라 일본 역사까지 속속들이 공부했죠. 내 밥값을 다하기 위해, 내 쓸모를 다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거예요.”
앞으로 3년, 은퇴 후는 내 마음대로
박민수 씨는 3년 뒤 은퇴를 꿈꾸고 있다. 그때가 되면 가장의 부담을 다소 내려놓아도 괜찮을 시점이기 때문이다. “3년 뒤면 아이들이 스무 살이 됩니다.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는 직장인 신분을 유지할 생각이에요. 아빠 이야기가 나왔는데 제가 집에서 쉬고 있는 상황이면 아이들이 움츠러들지 않을까 해서요. 지금은 월급이 소중한 상황이기도 하고요. 은퇴하면 2년 정도 저도 질풍노도의 시기가 될 수 있다고 봐요. 또 다른 일을 할 텐데 그게 잘 될지 안 될지 모르는 거잖아요. 그래서 3년 정도 여유를 두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때까지 준비를 잘 해야죠.”
앞으로 3년, 그는 망가질 준비가 돼 있다. 내성적이지만 가장이라는 무게는 개인 성향을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그는 아예 스스로를 ‘주식계 개그맨’으로 포지셔닝할 정도다. “다들 그래요. 얼굴 내놓고는 못 하겠다고요. 그런데 가장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고서 내가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 거예요. 너무 직설적인 표현인지 모르겠지만,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하면 저는 어떤 것도 할 수 있어요. 카메라 앞에서 웃고 떠드는 일이 쉽지 않아요. 그런데 절실하면 부끄러운 거 없습니다. 일단 하는 거예요. 은퇴를 꿈꾼다면 더욱더요.”
은퇴 후 박민수 씨는 ‘침착맨’ 같은 삶을 꿈꾼다. 예능 PD를 꿈꾸며 방송국 최종 면접까지 본 경험이 있는 그다. 제2의 인생은 보다 즐겁고 자유로운 나날로 채워지길 바라고 있다. 그가 기획하는 프로그램은 ‘최고민수의 중2병’. 박민수 씨는 3년 뒤 유쾌한 방황을 예고했다. “진짜 하고 싶은 일은 여행 유튜버예요. 지난해 빠니보틀(구독자 190만 명의 여행 유튜버)님도 만났어요. 회사를 그만두면, 그때는 진짜 내 맘대로 막 삐뚤어져보고 싶어요.”
중소벤처기업부(이하 중기부)의 로컬브랜드 상권 육성 프로젝트가 이태원에서 시작을 알렸다. 소상공인들을 1조 원의 기업가치가 있는 유니콘 기업형으로 육성하고, 지역의 상권이 글로컬(글로벌+로컬)로 거듭나도록 만들 계획이다.
지난 1일 로컬브랜드 창출사업이자 이태원 상권 회복 프로젝트로 진행된 팝업스토어 ‘헤리티지 맨션’이 문을 열었다.
로컬브랜드 창출사업은 로컬크리에이터와 소상공인의 협업으로 지역의 인적·물적 자산을 연결하고, 상권관리 모델 도입과 자체 역량 강화를 통해 골목상권을 브랜드화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이다.
지난 5월 서울 이태원(어반플레이), 인천 개항로(개항마을), 공주(제민천), 군산 영화타운((주)지방)을 ‘로컬브랜드 상권 창출팀’으로 선정한 바 있다.
이영 중기부 장관은 2일 이태원에서 간담회를 열어 로컬브랜드 창출사업의 시작을 알리고, ‘헤리티지 맨션’을 둘러보며 이태원 소상공인을 응원했다.
이영 장관은 “퇴근하고 대중교통에서 내려 집까지 걸어가는 그 길이 나를 행복하게 해준다면 어떨까? 동네가 바뀌면 온 동네 사람들이 행복해질 것이라 생각했다”고 로컬브랜드 창출사업의 배경을 설명하면서 “생활 속 창업에 개인과 공동체의 행복이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에서 가장 먼저 방문하는 이태원의 독특한 문화, 역사, 가치들을 모아 상권을 개발하고자 했다”면서 이태원 상권 회복을 응원했다.
이태원에서 지역 소상공인들과 협업해 헤리티지 맨션을 기획한 어반플레이 홍주석 대표는 “우리나라 로컬크리에이터의 시작은 이태원”이라면서 “이태원의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상권 활성화를 목적으로, 다양한 문화 프로젝트를 준비했다”고 설명했다.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는 이날 열린 간담회에서 상인 700여 명의 감사의 뜻을 담아 제작한 감사패를 이영 장관에게 깜짝 전달하기도 했다. 유태혁 이태원관광특구연합회 회장은 “(지난해 참사 이후) 정말 고민이 많았는데 (중기부 지원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고 희망을 보게 됐다”고 소감을 전했다.
중기부는 소상공인을 기업가로 키우는 지원 사업들을 연계할 계획이다. 지역의 상인들을 ‘라이콘’(라이프스타일 유니콘)으로 성장시키고, 지역이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하는 글로컬 상권으로 재도약하도록 돕는다는 취지다.
이번 로컬브랜드 창출사업에 선정된 지역 중 이태원 헤리티지 맨션을 시작으로 공주 제민천 창업실험실, 마계인천 유니버스, 군산 술익는 마을 순으로 팝업스토어, 축제, 네트워킹 데이가 연속 개최된다.
이태원의 낮과 밤 담은 “헤리티지 맨션”
헤리티지 맨션은 도시 콘텐츠 전문 기업 어반플레이가 이태원의 로컬크리에이터, 소상공인과 협업해 만든 팝업스토어다. 독특한 지역성을 가진 이태원의 문화와, 시대를 선도하는 문화를 제안해온 이태원 구성원들의 유산을 담은 공간이다.
이날 헤리티지 맨션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방문했다. 오후 4시가 되자 DJ의 디제잉이 이어지며 마치 클럽에 온 듯한 느낌도 주었다. 헤리티지 맨션 자체가 곧 이태원이었다.
최은지 어반플레이 PD는 “9월 한 달 동안 앵커스토어인 헤리티지 맨션 팝업스토어를 중심으로 8군데의 지역 상인들의 공간에서 동시다발적 프로그램이 열린다”고 설명했다.
헤리티지 맨션에 방문하면 누구나 웰컴키트를 받을 수 있다. 이 안에는 이태원의 헤리티지(유산)를 보여주는 헤리티지 프로젝트에 관한 설명과 함께 이태원 일대를 돌아다니며 모을 수 있는 키링이 들어있다. 봉투 안의 키링을 가지고 쿠폰에 적혀있는 공간을 방문해 1만 원 이상의 소비를 하면 각 카테고리별 색깔의 열쇠 모양 키링을 받을 수 있다.
맨션 1층에는 웰컴레코즈(WELCOME RECORDS), 웝트(WARPED)의 제품들을 볼 수 있다. 한 편에는 이들을 지원하는 위스키 브랜드 짐빔의 하이볼을 맛볼 수 있는 부스가 있고, 옆에서는 매주 금, 토, 일 오후 4시부터 저녁 10시까지 DJ들의 릴레이 공연이 이어진다.
2층에는 암스테르담에서 믹스미디어 예술가로 활동하고 있는 전윤일 작가가 이태원에서 7일 동안 실제로 살면서 담은 기록들을 전시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이태원의 색깔을 담은 F&B 부스가 운영된다.
3층에서는 비슬라(VISLA) 매거진의 ‘이태원의 낮과 밤’을 주제로 한 전시를 볼 수 있다. 전시에 담겨있지 않은 이태원 사진들은 포스터로 구매할 수 있다. 한편에는 관광특구도시인 이태원의 특징을 담은 굿즈가 판매된다. 보이롱페이스 작가와 협업해 그래피티를 넣은 티셔츠와 이태원 도시 명칭과 함께 헤리티지 맨션의 위도와 경도가 그려진 수건 등이 있다.
또한 매주 금요일에는 댄스 등의 공연이 열리며 매주 일요일에는 플리마켓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헤리티지 프로젝트는 오는 9월 24일까지 진행된다.
‘이태원’ 하면 떠오르는 것 중 하나는 단연 DJ 문화일 것이다. 웰컴레코즈는 DJ들을 서포트하기 위해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번 헤리티지 프로젝트에서도 DJ를 지원하기 위해 헤리티지 맨션과 컬래버레이션 한 LP를 선보이며, 볼레로(BOLERO)에서 선보일 예정이다.
웝트는 서브컬쳐나 발굴되지 않은 문화를 옷으로 표현한다. 홍콩, 뉴욕 등 전세계 아티스트들의 러브콜을 받는 팀이다. 헤리티지 맨션에서 선보인 옷들은 해외 아티스트들과 작업한 것들로 국내에는 없는 수입 제품들이다.
전윤일 작가는 7일간의 이태원에서의 생활을 기록했다. 실제 이곳에서 소비한 영수증, 필름, 가게의 소품으로 만든 오브제 등을 선보인다. 또한 이태원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태원의 헤리티지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이태원이 어떤 의미인지를 묻고 담은 다큐멘터리도 상영한다. 이태원 곳곳에 그래피티 작업을 한 작가의 그래피티도 감상할 수 있으며 매주 달라지는 F&B도 즐길 수 있다.
종이 잡지로 시작해 글로벌 에이전시로 활동하고 있는 비슬라 매거진은 서브컬쳐를 주류로 끌어오는 힘이 있다. 이태원 출신의 사진작가들을 섭외해 ‘이태원의 낮과 밤’을 담았다. 낮에는 조용하고 비어있는 듯한 이태원이 밤이 되면 화려하고 다양한 문화가 섞이는 이중적인 모습이 이태원의 매력이라는 점을 사진으로 표현했다.
만성 콩팥병은 3개월 이상 콩팥에 손상이 있거나 콩팥 기능이 저하된 상태의 질환을 말한다. 60대 이상이 전체 환자의 79%를 차지한다. 나이가 들수록 신장 기능이 저하되며, 고령자의 대표적인 만성 질환인 고혈압, 당뇨병 등이 신장 질환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만성 콩팥병에 대한 궁금증을 김소연·권순효 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신장내과 교수와 함께 풀어봤다.
콩팥에는 사구체라는 혈액 여과기가 있다. 이곳을 지나며 걸러진 노폐물은 소변으로 배출된다. 만성 콩팥병(만성 신부전증)은 콩팥이 여러 이유로 지속적으로 손상을 받아서 기능이 떨어지는 질환을 말한다. 주요 원인으로 당뇨병과 고혈압이 꼽힌다. 고혈압으로 혈관이 손상되면 콩팥에 이상이 생기며, 당뇨병으로 혈액 속에 당이 많으면 신장 조직에 손상을 유발하기도 한다.
만성 콩팥병은 ‘많고 비싼 병’으로 통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국민관심질병통계에 따르면, 만성 콩팥병 환자는 2017년 20만 3978명에서 2021년 27만 7252명으로 5년 새 36% 증가했다. 국내 성인 7명 중 1명은 질환을 앓고 있는 셈이다. 또한 최근 10년간 만성 콩팥병 진료 환자 수 및 진료비 모두 두 배 이상 증가했으며, 1인당 연평균 진료비는 849만 원이었다. 진료비가 높은 이유는 ‘투석’과 관련 있다.
만성 콩팥병은 진행 상태에 따라 1~5기로 구분한다. 초기 1~2기는 증상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약물 치료와 철저한 관리만으로도 유지가 가능하다. 사구체 여과율 60% 미만의 3기에 이르러야 증상이 나타나는 편이다. 특히 가장 심각한 단계인 5기는 ‘말기 신부전’이라고 하며, 투석 치료나 이식을 받아야 한다. 이 시기에는 5년 생존율도 약 61.5%로 떨어지는데, 이는 일부 암의 5년 생존율보다 더 낮은 수치다. 이에 따라 조기 발견이 중요하며, 건강한 습관으로 병을 예방하는 것이 좋다.
Q. 부종과 같이 뒤늦게 나타나는 만성 콩팥병의 증상에는 무엇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또 자신이 당뇨 환자라면 만성 콩팥병을 의심해보는 것이 좋을까요?
A. 초기에는 별다른 증상을 느끼지 못하지만, 신장 기능이 저하되면서 피곤함, 집중력 저하, 식욕부진, 수면장애, 발목 부종, 야뇨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전신이 붓는 증상은 신장과 심장, 간 등의 질환이 있을 때 생길 수 있습니다. 또한 당뇨병 환자 3~4명 중 1명에게 만성 콩팥병이 생기고, 말기 신부전 환자 2명 중 1명은 당뇨병이 원인일 정도로 당뇨병 환자와 신장 합병증은 관련이 깊습니다. 적절한 식이·운동·약물요법을 통해 혈당 관리를 철저히 해 합병증 발생을 예방하고, 정기적인 소변 검사와 혈액 검사로 신장 합병증을 조기에 진단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2형 당뇨가 있는 사람은 최소 1년에 한 번씩 소변 알부민뇨 검사와 혈액에서 추정하는 사구체여과율 검사를 권장하고 있습니다.
Q. 5기 환자의 경우 5년 사망률이 암보다 높다는 통계를 봤습니다. 위험도가 높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A. 5기 말기 신부전 환자들의 가장 높은 사망 원인은 심혈관 질환입니다. 투석 치료를 받는 환자는 당뇨, 고혈압 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고, 심혈관 질환 위험인자인 요독증, 혈관 석회화, 대사성 산증을 가지고 있어 심혈관 질환으로 인한 사망률이 일반인보다 10~30배 높습니다.
Q. 신장이식 수술은 위험성과 부작용이 잇따를 것 같습니다. 현재 의료진이 이식 수술을 권장하는지, 반대로 지양하는지 추세가 궁금합니다.
A. 말기 신부전 환자에게는 신장이식이나 투석 같은 신 대체요법을 시행합니다. 최근에는 과거보다 신장이식을 받는 환자 수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신장이식이 투석에 비해 장점이 많습니다. 거의 정상 신장 기능을 가지게 되어 투석으로 잘 빠져나가지 않는 노폐물도 제거할 수 있으며, 조혈 호르몬, 활성화 비타민 같은 호르몬이 만들어집니다. 투석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 있으며, 거의 정상적인 식사와 생활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이식할 신장을 제공받기가 쉽지 않으며, 수술에 대한 정신적・육체적・경제적 부담이 있습니다. 또한 이식 후 거부반응이 올 수 있기 때문에 평생 면역억제제를 복용해야 하고, 이로 인해 감염이나 암 같은 면역억제제 부작용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이식을 준비하기에 앞서 이식의 장단점을 잘 따져봐야 합니다.
Q. 만성 콩팥병 환자는 수분을 많이 섭취하는 게 오히려 해가 될 수도 있다고 봤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신장 기능이 심하게 저하된 만성 콩팥병 환자는 수분을 제대로 배출하지 못하는데, 이 상태에서 물을 과다하게 마시면 혈액량, 체액량이 늘어 폐부종이나 부종이 생길 수 있습니다. 다만 무조건 수분 섭취를 제한하면 오히려 탈수로 인한 신장 손상을 유발할 수 있어, 만성 콩팥병 단계와 소변량 등을 살펴보고 주치의와 상의해 적정 수분 섭취량을 결정해야 합니다.
Q. 만성 콩팥병을 예방하기 좋은 음식과 생활 습관에는 무엇이 있는지 설명 부탁드립니다.
A. 만성 콩팥병의 원인이 되는 당뇨, 고혈압을 잘 관리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생활 습관 개선과 적절한 약물 치료를 통해 혈당 및 혈압 관리를 해야 합니다. 균형 잡힌 식사와 규칙적인 운동을 하고 적정 체중을 유지하는 것이 좋습니다. 담배는 반드시 끊고 술은 하루에 한두 잔 이하로 줄이는 것을 독려합니다. 더불어 만성 콩팥병 환자는 충분한 열량과 적당한 양의 단백질을 섭취해야 하며, 염분 섭취를 줄여야 합니다. 또한 포타슘(칼륨)과 인 섭취를 줄여야 합니다. 다만 이와 같은 식이요법은 증상 악화를 막을 수는 있겠지만, 질환 자체를 고칠 수 없다는 점을 알아둬야겠습니다.
내 자식은 취업이 안 돼 애가 타는데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둥, 의사 며느리를 봤다는 둥 묻지도 않은 자기 새끼 자랑하는 동창 녀석이 나를 욱하게 한다. 심지어 자랑질하면서 술값도 밥값도 안 내니 더욱 욱한다.
좋은 대학 졸업시켜놨더니 일할 궁리는 안 하고 독립은커녕 내 연금 타 먹으며 같이 살겠다는 딸이 나를 욱하게 한다.
‘삼식이’ 노릇도 징글징글한데 비만 오면 술 한잔 걸칠 생각에 부침개 부치라고 독촉하는 남편이 나를 욱하게 한다.
육십 평생 뼈 빠지게 일하고 은퇴했더니 내가 번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처자식이 나를 욱하게 한다.
내 얘기에 집중하지 않고 휴대폰만 만지작거리는 친구가 나를 욱하게 한다. 무시당한 것 같아 속에서 천불이 난다.
화장실 휴지가 떨어졌는데 다음 사람 생각도 안 하고 근처에 있는 새 휴지 갈아 끼우지 않고 나간 앞사람이 나를 욱하게 한다.
안톤 슈낙(Anton Schnack, 1892~ 1973)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란 수필을 썼다면, 필자는 ‘우리를 욱하게 하는 것들’을 씁니다.
인디언 추장 이야기
옛날 어느 인디언 추장이 손주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우리 마음 안에는 두 마리 늑대가 살고 있단다. 한 마리는 하얀 늑대로 용기, 희망, 자신감, 신념, 확신 등을 먹고살지. 또 한 마리는 까만 늑대로 분노, 좌절, 공포, 짜증 등을 먹고살아.”
그러자 어린 손주는 “그럼 두 늑대가 싸우면 누가 이기나요?”라고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추장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가 먹이를 주는 쪽이 이긴단다.”
툭하면 욱하는 사람들
하루에도 몇 번씩 욱하고 화내는 이놈의 성질머리를 고치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냐는 75세 사례자 질문에, 법륜스님은 ‘즉문즉설’이라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그 성질 고치지 말고 그냥 살라고 답변합니다. 그래도 꼭 고치고 싶다는 애원에 스님은 주저하다 비방 두 가지를 알려줍니다. 하나는 바로 전기충격기를 사서 욱하고 화가 치밀어오를 때마다 몸에 갖다 대는 것입니다. 죽었다 깨어나지 않으면 그 오랜 습관 고치지 못한다고 하면서요. 다른 한 가지는 화가 날 때마다 3000번 절을 하는 것입니다. 독자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왜 화가 날까요 : 기대와 영역 그리고 비교
화는 보통 상식을 넘어선 말이나 행동, 경우에 맞지 않은 행위를 할 때 일어납니다. 인간이라면 지켜야 할 마땅한 도리를 하지 않았을 때도 화가 솟구칩니다. 그렇다면 상식이나 경우, 도리는 누구의 기준일까요? 사람마다 시대마다 상황마다 기준이 달라 갈등이 생기고 화가 납니다. 내 기준과 기대치를 상대가 충족하지 못할 때,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가 해주지 않을 때 우리는 욱하고, 화내고, 분노합니다. 상대에게 묻지도 않고 나 혼자 세워놓은 기준과 기대를 요구합니다. 또 자신은 바꾸기 싫으면서 상대만 바꾸려고 합니다. 내 영역만 소중하고 상대 영역은 무단침입하려 합니다. 친구와 친척, 이웃과 비교하고 저울질당할 때도 욱합니다.
화(火)의 실체
화는 실체가 있을까요? 화는 실체가 따로 없다고 합니다. 도로에서 앞차가 신호 없이 끼어들 때 어떤 사람은 차를 세워 몽둥이로 상대 운전자를 때리거나 차량을 부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많이 급한가 보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사람, 똑같은 말인데 누구는 격분하고, 누구는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그냥 넘깁니다.
화는 오로지 내가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그 말은 내가 화를 만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화가 났을 때 화내지 않고 꾹 참는 것은 좋은 것일까요? 가족이나 친구, 곁에 있는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았으니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화를 참는 것은 화를 내는 것과 똑같은 에너지, 그 독기(毒氣)와 살기(殺氣)가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가 언젠가는 남에게 폭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참기보다 잘 달래야 합니다.
객기(客氣)와 정기(精氣)
화는 주인이 아닙니다. 내가 반쯤 미쳐 있는 상태입니다. 제정신이 아니란 말입니다. 화는 손님, 객식구입니다. 손님은 잘 대접하고 고이 보내야 하듯 ‘객기’(客氣)인 화도 잘 달래고 풀어줘서 보내야 합니다. 손님을 보내고 ‘정기’(精氣)인 나 자신으로 돌아와 주인 노릇을 해야 합니다. 화는 캔에 든 콜라와 같습니다. 당장의 조갈(燥渴)은 해소하겠지만 좀 있으면 또 목이 마릅니다. 쏟으면 얼룩이 지고 흔들면 폭발합니다. 정기는 맑은 물과 같습니다. 갈증 해소는 물론 쏟아도 흔적이 남지 않습니다. 화를 잘 다스리지 못할 때 오히려 우리는 마음의 주인이 아니라 화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화가 나의 주인 행세를 하게 내버려둘 수는 없지 않을까요.
울화병에 대한 ‘동의보감’ 처방전
욱하고 성내고 화내는 게 잦고 깊어지면 화병(火病)이 되기 쉽습니다. 한의학에서 울화병(鬱火病)으로 불리는 화병은 ‘Hwa-byung’이라는 병명으로 등재될 만큼 공식적인 용어로 자리 잡은 듯합니다. ‘동의보감’(東醫寶鑑) 잡병(雜病)편 화문(火門)에 ‘화를 조절하는 방법’(制火有方)으로 마음을 바르게 하고 마음을 가다듬고 마음을 기르라고 강조한 것은, 화가 함부로 동하고 날뛰는 것을 막는 근본적인 처방이기 때문입니다. 화가 동하는 것은 마음에 그 원인이 있기에 마음을 안정하는 것이 바로 화라는 불길을 끄는 방책이라는 것입니다. 화 일기 쓰기로 그 어렵다는 마음을 다스려볼까요.
화 일기 1
저는 이혼하고 혼자가 된 뒤 오빠 집에 같이 사는데 친정엄마가 밤 10시에 시작하는 ‘미스터 트롯’을 보시는 거예요. 조카들 숙제하고 독서하는 시간을 방해하는 것 같아 올케언니 눈치가 보여서 화가 났어요. 아이들이 실제 공부하는 시간대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버럭 화가 치밀어 엄마한테 막 해댔어요.
저도 기분이 썩 좋지 않았지만 곰곰 생각해보니 제가 엄마의 여가와 즐거움에 대해 인정도 이해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어요. 드라마 보는 것은 죄악이고 성경 읽기만 바람직한 행위라는 이분법에 갇혀 있었던 것 같아요. 드라마를 통해서든 대중가요를 통해서든 종교적 깨달음을 통해서든 삶의 여유와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하는데 말입니다. 또 내가 엄마 인생에 개입해왔네요. 함부로 단죄하고 평가하기를 일삼고 엄마만의 즐거움에 대해 무시하고 모른 체하면서요.
엄마의 사생활과 삶의 즐거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내 기준으로 엄마의 삶을 좌지우지하지 않고 판단하지 말아야겠습니다. 올케 눈치라는 핑곗거리를 내세울 게 아니라 엄마는 엄마대로, 조카는 조카대로 지켜보며 간섭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몇 년 전 필자가 분노 조절 수업에서 같이 나누었던 사례입니다. 화 일기를 쓰면서 화난 자신을 바라보고, 왜 화가 났을까 스스로 분석하다 보면 나와 상대방을 조금은 더 이해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마치 유체이탈(遺體離脫)하듯이 내 몸에서 영혼이 빠져나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하는 셈입니다. 또 다른 화 일기를 볼까요.
화 일기 2
많이 베풀어도 고마움을 모르는 시동생과 동서 때문에 화가 납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 분노가 치밀까 생각해봤습니다.
‘난 왜 꼭 고맙다는 말을 들어야 하지. 내가 뭔가 대가나 보상을 바란 것은 아닐까. 시동생네 살아가는 모습과 내 모습을 끊임없이 비교하면서 괴로워하는구나.’
지금 형편이 많이 여유로워졌는데도 나는 자신을 위해 돈을 쓰지 못하는 반면, 시동생네와 시어머니는 내가 베푼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것 같아 못마땅해하고 있었네요.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내가 간섭할 영역이 아닌데 자꾸 내 잣대로만 평가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내가 원해서 베풀었으면서도 고맙다는 말이나 보상을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사례는 실제 우리 주변에서 비근하게 일어나는 경우입니다. 다행히 당사자는 화가 났다는 것을 얼른 알아차렸고, 자기 마음을 잘 들여다봄으로써 시댁 식구들을 이해하게 된 거죠.
국수 삶기에서 배우는 분노 조절
분노, 화는 글자 그대로 불같은 감정입니다. 불이 타는 듯, 폭발할 듯 끓어오르는 감정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분노 조절에는 두 가지 등급, 고수와 중수의 처방이 있습니다. 국수 삶을 때 물이 끓어 넘치면 어떻게 하나요? 바로 옆에 둔 찬물을 한 사발 붓습니다. 그것도 잠시, 금방 또 끓어오릅니다. 다시 찬물을 붓고 이렇게 세 번쯤은 해야 국수가 쫄깃하니 맛나게 삶아집니다. 내 안의 화도 같지 않을까요. 나만의 찬물이 필요합니다. 심호흡, 1부터 10까지 세기, 산책, 무엇이든 좋습니다.
찬물 처방이 중수라면 끓어 넘치지 않게 국수를 삶는 사람이 바로 고수입니다. 찬물도 필요 없습니다. 그저 크고 깊고 넓은 그릇만 있으면 됩니다. 필자가 직접 실험해봤으니 믿으셔도 됩니다. 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찬물 없이도 내 마음 그릇을 키우면 화를 줄이고 분노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분노 조절의 최종 목표
해와 달은 서로를 비교하는 법이 없습니다. 단지 자신의 시간대에서 빛날 뿐입니다. 타인의 삶과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제 노릇만 그저 할 뿐 비난하거나 평가할 필요가 없습니다. 비교하지 않고, 지나치게 기대하지 않고, 남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면 화가 훨씬 덜 납니다. 나아가 상대를 대할 때 거리낌이 없고 거스름이 없고 막힘이 없는 상태, 화를 안 내는 것이 아니라 진정 화가 안 나는 단계가 분노 조절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이 하는 말이나 행동이 하나도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면 얼마나 평화로울까요. 거창하거나 어렵지 않게 안정과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같이 해보실까요.
▶ “그렇겠네”, “그랬구나” 맞장구치면서 있는 그대로 들어줍니다.
▶ “그러니까 내 말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합니다.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말 끊지 않고 궁금해하며 충분히 말하게 합니다.
“성냄은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정화해야 하는 것이다.”
- 토머스 애덤스
“분노에 집착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던지기 위해 뜨거운 숯을 움켜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 석가모니
건강을 잃고서야 절절한 심정으로 세상과 자신을 돌아보는 게 사람이다. 위중한 병을 얻었을 때 인생의 유한함을, 시간의 소중함을 비로소 뼈저리게 절감하며 새롭게 눈을 뜬다. 함지애(58, ‘지애의 봄향기’ 대표)는 40대 때 폐암 1기 선고를 받고 투병을 했다. 용케 조기에 발견된 암인 데다 수술이 잘돼 예후가 좋았다. 천운으로 병마를 다스렸으니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 듯싶었다. 하지만 얼마 뒤 폐암보다 무섭다는 폐섬유증(폐가 굳어지면서 심각한 호흡 장애를 불러일으키는 질환)이 다시 기습했단다. 어이하나? 어떻게 일어서야 하나? 폐섬유증 수술을 마친 함지애는 고심 끝에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김제로 내려갔다. 그건 요양을 위한 낙향이었지만 귀농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고, 이제 시골에서 제대로 한번 잘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는 점에선 당찬 투신이자 기꺼운 모험이었다.
서울에 살 때 그는 의류유통업을 했다. 중년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을 동대문 상가, 남대문 상가에서 뛰었다. 뛰더라도 그냥 뛴 게 아니라 경주마처럼 열렬한 질주를 했나? 그의 가게엔 자주 고객들이 줄을 섰다지. 아마도 그의 천성일 패기와 근성이 성과를 불러들였던 것 같다. 마침내 자수성가로 우뚝하게 일어선 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다. 몸에 중병이 찾아와 위세를 부리는 일이 없었다면 서울을 뜰 일이 없었으리라. 시골살이? 그건 그의 사전에 아예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시골 생활은 무섭고 싫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을 통과하면서 생각이 변했다. 삶의 방향이 확 바뀌었다. 이렇게 뜻밖에 찾아온 변곡점은 차라리 하나의 기쁜 선물이었다. 낙향 이후의 삶이 한결 새롭고 만족스럽다는 게 아닌가. 시골에 내려와 비로소 인생의 향긋한 열매를 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이왕 삶을 바꿀 거라면 다 내려놓고 가자!”
낙향 때 그의 머리에서 나부낀 기치가 그랬다. 인생을 레이스하는 데 쓸모가 큰 방편으로 여겼던 욕심과 경쟁심을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물질이든 행복이든 가급적 손아귀에 한가득 움켜쥐고자 했던 지난날의 타성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생존의 정글에서 지친 노루가 쉴 만한 물가를 찾아가듯이 마음을 비우고 낙향했다. 사람이 마을을 비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무가치한 것들을 종량제 봉투에 담아 내다 버렸다. 그게 병에서 벗어나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유력한 길이라고 봤다. 함지애가 김제로 내려간 건 2012년. 초기 한동안은 요양에 전념했다.
“텃밭 농사로 거둔 깨끗한 채소류를 먹거나, 산야에서 약초를 얻어 섭취했다. 도시에 비할 수 없이 맑은 공기도 몸에 좋았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시골 생활이 주는 평온함이었다. 마음이 그토록 편안해지다니, 예상과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맛보며 안도했다. 건강도 좋아졌다. 빠른 속도로. 웃음을 달고 살다시피 했으며, 이웃들과 좋은 사이로 지냈다. 아, 시골에 오기를 잘했어. 좀 더 빨리 내려올걸!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유능한 강소농 모델로 떠올라
잃었던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으면서 함지애는 슬슬 농사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고즈넉한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을 해야 성장한다는 게, ‘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열정이 있어야 즐거울 수 있다’는 게 그가 인생에서 배운 일종의 공리다. 농사에 뛰어드는 방식은 다분히 조직적이었다. 여러 농업 교육기관을 통해 공부부터 충실히 하는 한편, 대담하게도 5000여 평의 전답까지 마련해 바닥을 다졌다.
“농토에 벼, 찹쌀, 보리, 콩 등을 재배했다. 농사 방법은 친환경 농업을 추구하기로 했다. 안전하고 깨끗한 농산물로 고추장, 된장, 청국장, 간장을 만들자는 게 기본 방향이었다.”
혼자서 5000평이나 되는 너른 전답에 농사를?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주로 위탁영농 방식으로 농사를 했다. 이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 봄철의 논밭 갈이부터 가을철 수확까지 전 과정을 대행해주니까. 그런데 귀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교육이다. 사전에 부지런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 난 나름대로 열심히 농업을 공부했다. 건강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면서 농사에 뛰어들었지만, 사실 초기 5~6년은 수련기였다. 거의 공부 기간이었다. 이때 다수의 농업 관련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았나?
“전주에 있는 한국농수산대학 가공학과에 적을 두고 배웠다. 버섯과 화훼 공부도 병행했다. 김제에 있는 농업기술센터를 통해서도 배운 게 많았다. 전통장류, 조청, 꽃차 등에 관한 이론과 실재를 교육받았으니까. 이렇게 공부하며 농어촌체험지도사, 전통장류제조사, 꽃차 소믈리에, 천연발효식초 제조관리사 등 자격증 여러 개를 취득했다.”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판로 부문이다. 판로와 관련해서도 사전에 공부해둔 게 있었나?
“판로 문제야말로 농업 경제의 핵심이라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정보화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덕분에 농사 시작과 동시에 SNS 마케팅을 위해 블로그를 운영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농사의 출발은 식초 사업으로 열었다지?
“2018년에 식초 생산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작업장과 체험장을 지어 생산과 체험 교육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가공 분야 가운데 식초를 선택한 이유는?
“아까 말했지만 난 농업 관련 공부에 많은 시간을 썼다. 딴엔 제법 공부를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느 수준인지, 뭐 좀 실력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테스트할 필요가 있었다. 테스트 수단으로 식초 사업을 택한 건 식초가 사람 몸에 가장 좋은 식품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남의 건강을 위해서도 식초만큼 좋은 게 없다고 봤으니까.”
촘촘한 사전 준비에 힘입어 식초 사업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특유의 현미식초를 만들어 특허 등록을 냈으며, 연잎식초라는 희귀한 제품을 만들어 역시 특허를 받았다. 스스로 설정한 테스트를 좋은 성적으로 통과한 셈이다. 이후 그는 식초의 이웃사촌인 술 만들기에 뛰어들었다. 전통주에 관한 공부를 미리 해둔 상황에서였다. 따라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일단 필이 꽂히면 냅다 덤벼들어 몰두하는 평소의 습성과 기량을 풀가동해 전통주 개발과 생산에 주력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가 주어졌다. 각종 경연대회에 출품한 그의 술이 큰 상을 연달아 받으며 일약 알아보는 눈이 꽤 많은 실력자로 부상했다는 게 아닌가. 그는 2019년 충남도 농업기술원이 후원한 ‘우리 발효술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2021년엔 ‘대한민국 명주대상’ 경연에서 청주 부문 대상을, 2022년엔 광주MBC가 주관한 ‘우리 술 어워즈’에서 ‘왕중왕’상을 거머쥐었다. 전통주 초심자가 거둔 만만치 않은 성취였으니 이변이라 말 못 할 것도 없겠다. 이제 그는 술과 더불어 유능한 강소농의 모델로 떠올랐다.
투병 이후의 삶은 덤으로 주어진 것
“난 술에 미친 여자다.(웃음) 좋은 전통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양조엔 디테일한 기술력이 필수다. 누룩에서 발생하는 미생물 효모로 단맛과 신맛 등 풍미를 지닌 술을 빚어내기 위해선 반복적 실험이 선행돼야 한다. 술맛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다. 미치지 않고선 도달할 수 없는 게 양조다.”
어떤 술들을 만들고 있나? 가장 자부하는 술을 꼽는다면?
“현재 6종류의 술을 생산한다. 대표 상품은 ‘초야’(初夜)라는 청주다. 신혼 첫날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술에 담았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탁주인 ‘순애보’ 역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술이다.”
시중에 수많은 민속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당신의 술은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있나?
“남들은 흔히 말한다. 여러 가지 꽃을 양조 재료로 삼은 꽃술은 함지애의 것이 뛰어나다고. 민속주를 만드는 이라면 누구나 ‘이게 바로 한국의 술이야!’라고 자신할 만한 술을 만들고자 노력할 텐데,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술의 풍미 수준을 가르는 건 기술력보다 정성스러운 마음과 손길에 달렸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먹일 음식을 만들 때처럼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마음. 그게 좋은 양조의 비결이라 믿는다.”
양조란 창의적 감각이 요구되는 난해한 장르다. 자력으로 단기간에 일정한 성취를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궁금하다. 누군가에게 도제식 수업을 받은 적은 없었나?
“운 좋게도 좋은 스승들을 만났다. 명품 전통주 ‘호산춘’의 명인 이연호 선생님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한국전통주연구소 소장인 박록담 선생님을 통해서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이 스승들 덕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실 시골에 내려온 이후 나는 이렇다 할 실패나 착오를 겪지 않았다. 이건 순전히 좋은 인간관계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좋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좋은 걸 배웠고, 배운 걸 토대로 일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일뿐만이 아니다. 삶의 질 자체가 아등바등 살았던 서울에서보다 훨씬 좋아졌다.”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일과 생활, 양면에서 선순환을 해왔다는 얘기다. 남의 가르침과 의견을 경청해 피드백으로 삼기. 이웃과 도타운 우정을 나누는 일에도 사업 이상의 정성을 쏟아 감흥을 누리기. 이쯤이면 결함 없는 생활이다. 인생의 중세시대라 할 만한 투병기는 어느덧 종료됐다. 여러 측면에서 서울에 살 때와 완연하게 변했다. 이제 그가 지닌 지배적인 감정은 만족감, 그 하나란다.
다만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지되고 있는 양상이 있으니, 여전히 바쁘게 산다는 게 그렇다. 함지애가 만드는 건 식초와 전통주만이 아니다. 들에선 곡물을 생산하며 장류 사업도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대파에서 피어나는 보랏빛 꽃을 부재료로 가미한 이색 꽃두부도 생산한다. 마을 부녀회장을 맡기도 했던 그다. 김제 시내에 오픈 스튜디오를 두고 대표를 맡고 있는 ‘징게맹갱 우리술 협동조합’의 기지로 활용하고 있기도. 독거노인과 결손가정을 돌보는 자선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시내의 침체된 구역 일부를 놀이문화 공간으로 재생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일의 가짓수가 이토록 넘치다니. 그는 남몰래 비명을 지르는 건 아닐까? 일에 치여 부질없이 소비되는 뭔가가 있는 건 아닐까?
“투병 이후의 삶은 덤으로 주어진 거라고 생각하자 모든 게 감사하게 다가왔다. 희로애락은 여전하고 때로 눈물도 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비로소 하고 있다는 실감으로 행복하다. 돈을 벌려고 바동거렸던 과거에서 벗어난 것만도 어딘가? 밝고 에너지 넘치는 본성을 회복한 건 또 어떻고? 욕심을 내려놓고, 짧고 굵게 살다 가면 된다는 생각이다.”
돈보다 소중한 가치를 가진 게 많다는 걸 알면서도 흔히들 까먹고 산다. ‘욕심에 휘둘리는 삶은 이제 싫어!’ 함지애의 드라마를 난 그런 외침으로 새겨두기로 했다.
함지애가 주는 귀농 Tip
•땅과 집을 마련하기 이전에 귀농 교육부터 충분히 하라. 지자체마다 운영하는 ‘1년 살아보기 프로그램’ 같은 걸 통해 농촌 생활을 미리 경험하는 것도 좋다. 그 과정에서 나의 숨겨진 역량을 발굴할 수 있으며, 과연 귀농을 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귀농 초기 3년 정도는 성공을 위한 수련기로 삼아 나를 알아가는 시간 내지는 농사의 방향을 모색하는 기간으로 활용하자. 농업의 경제 효과는 현명한 운영을 했을 경우에도 대체로 귀농 5년 이후에나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도시에서 쌓은 경륜이나 특기를 살려 재활용하라. 이를테면 꽃에 조예가 있다면 꽃차 사업에 도전하는 식으로.
•여성의 단독 귀농을 두려워하지 마라. 다만 남다른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귀농 초기엔 소득 발생이 전혀 없을 가능성이 많다. 예비비 확보가 필수다.
비가 내린다. 비는 감정의 농도와 온도를 높여준다. 마음을 촉촉이 적시며 억눌렸던 감정을 해방시킨다. 그렇다면 비 내리는 날에 여행을 떠나도 좋으리라. 남원 광한루원(廣寒樓苑)에 장맛비가 내린다. 그래 사람이 거의 없어 적적하다. 비는 쉼 없이 내려 풍경을 변주한다. 미인은 주렴 사이로 보라 했던가. 그래야 운치가 돋는다 했다. 미인뿐이랴. 주렴처럼 드리워지는 빗발 사이로 보이는 광한루원의 풍경 역시 맑은 날과 달라 오히려 이색 정취를 자아낸다. 비에 흥건히 젖은 누정과 수목의 표정을 주시할 만하다. 육안보다 심안으로 봐야 할 것만 같은 내향성이 서려 있다.
광한루원은 남원시의 자랑거리이자 관광명소다. 사시사철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렇게 유명해진 건 광한루원이 고전소설 ‘춘향전’의 무대로 등장해서다. 사람들은 흔히 광한루원과 ‘춘향전’을 동격쯤으로 여긴다. 그래 광한루원에 와서 춘향과 이몽룡이 남긴 열애의 행적을 더듬는다. 그러나 광한루원의 본질은 ‘춘향전’과 무관하다. ‘춘향전’의 한 배경 장소로 쓰였을 뿐, 본래 조선 중기에 지어진 원림(園林)의 귀감이라는 데에 광한루원의 정체성이 있다.
사실관계가 그러하지만 흔히 간과한다. 광한루원에 와서 원림에 꾹 방점을 찍고 답사하는 이가 몇이나 될까? 대부분 춘향의 상열지사를 염두에 두고 풍경을 바라본다. 유심히 살펴보고 감흥을 즐길 만한 조선 원림이 엄연히 이곳에 있으나 ‘춘향전’을 표상하는 구조물들이 혼재해 정작 또렷이 인식하지 못한다. 아쉬운 대목이다. 그렇다면 관점의 조절이 필요할 텐데, 관광 소재로 들어앉은 시설물들을 시야에서 걷어낸 셈치고 원림 풍경을 바라보는 게 좋겠다. 그게 광한루원을 담뿍 마음에 담는 방법일 테다.
광한루원은 관아가 주도해 지은 관아 원림이다. 관아 원림이란 고을의 관원이나 시인 묵객들이 연회와 풍류를 즐긴 야외 정원이다. 광한루원은 중심 누각인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그 일원에 조영된 원림을 통틀어 지칭하는 이름이다. 광한루의 스케일은 매우 웅장하다. 위엄이 넘친다. 상징과 지향을 담은 사물들의 디테일로 아름답기도 하다. 정원과 연못 역시 호방하고 수려하다.
광한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된 팔작지붕 형태의 누각이다. 남쪽에서는 간결한 구조로 보이지만, 북쪽에서는 매우 복잡하고 장식적인 외관에 눈길이 쏠린다. 거기에 세 겹의 작은 지붕 아래로 층계를 설치한 회랑이 있어서다. 월랑(月廊)이라 부르는 묘한 구조물이다. 이걸 조성한 이유가 있다. 광한루는 초창 이후 중수를 거듭했다. 그 와중에 정자의 총량이 너무 과중해 북쪽으로 기울어지기도 했는데, 이 난처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해 계단이 있는 회랑을 덧대어 지지대로 삼았다. 이렇게 해서 여느 정자에서 볼 수 없는 기묘한 형태미와 기능성을 확보하게 됐다. 이와 같은 건축적 개성과 위트를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광한루엔 당대 문호들이 쓴 시문 편액이 즐비하게 걸려 있다. 멋들어진 정자가 있으니 드나든 시인이 한둘이었으랴. 여기에서 붓에 먹을 적신 묵객이 한둘이었으랴. 호남을 지나는 선비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렀다고 한다. 지리산 솔바람이 드나드는 정자 마루에선 청담(淸淡)이 자주 오갔으리라. 끽다와 음풍영월이 있는 풍류도 다반사였을 테고. 조선의 문인 임제가 광한루에 올랐을 때엔 매화라도 피었나? 매화 가지에 달이라도 걸렸나? 반쯤은 취하고 반쯤은 깬 채 밤이 깊어졌다고, 함께 노닌 사람과 헤어질 땐 꽃이 지더라고, 임제는 그렇게 시로 노래했다.
광한루는 세종의 총예를 받았던 명재상 황희가 남원에서 유배를 살 때 지은 작은 누각 광통루에서 유래했다. 광한루라는 이름은 1444년 전라감사 정인지가 “아하, 여기가 바로 달나라의 미인 항아가 산다는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로다!”라고 찬탄한 데에서 비롯됐다. 정인지가 괜히 달나라 운운한 게 아니다. 광한루가 애초 월궁(月宮)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지어졌으니까. 즉 광한루는 천상의 궁궐인 셈이다. 옛사람들은 상상력을 발동해 결국 천상계를 지상으로 끌어내렸다. 천상에 모래알처럼 무수히 뿌려진 것은 별인데, 광한루 전면의 넓고 유려한 연못이 바로 은하수를 상징한다. 연못 가운데엔 섬 세 개를 만들어 삼신산을 표상했다. 광한루원의 기저엔 이렇게 신선 사상이 깔려 있다. 도교, 유교, 음양론, 풍수지리 등이 추구하는 이상향의 상징 구조들로 어우러져 있다. 안팎이 두루 광활한 세계관으로 상통하는 원림이다. 어디에 내놓아도 앞줄에 설 조선 정원이다.
신선을 마음에 들여놓고
다시 빗속을 운전해 정자를 찾아간다. 지리산 기슭, 남원시 산내면 매동마을에 있는 퇴수정(退修亭)이다. 매천 박치기(梅川 朴致箕, 1825~1907)가 1870년에 지은 누정이다. 그는 토목건축을 관장하는 벼슬살이를 하다 은퇴하고 여기 후미진 산골짝에 은거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은 결국 자연으로 흘러가는가? 퇴직 뒤엔 정해진 순서처럼 산림에 여생을 의탁했던 선인들의 유전자가 후세까지 이어지나? 박치기의 고향은 함양군 안의면이다. 그러나 퇴직 후엔 고향을 떠나 이곳에 터를 잡았다. 왜 그랬는지는 기록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그런데 박치기가 지은 퇴수정의 모습이 그의 선조 박명부가 안의면 화림동 계곡에 지은 농월정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닮아 흥미롭다. 경치 좋은 냇가에 지은 정자라는 점에서도 퇴수정과 농월정은 유사하다. 경관을 보는 취향과 정자를 짓는 경향에 집안 내림이라는 게 있지 않았나 싶다.
박치기는 널리 이름난 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근사한 정자를 지어 한몫 단단히 했다. 그의 전공이 건축이었으니 퇴수정에서 구현된 건축 미학의 완성도를 보지 않고도 가늠할 만하지만, 실제 이 정자는 빼어나 인상적이다. 당대 누정 건축의 첨단 기술력으로 빚어낸 작품일 수도 있다. 명품 정자라 추켜세우는 이들도 있을 정도다. 정자의 규모는 작아서 소박미가 물씬하고, 흠결 없는 비례로 조화롭다. 은근한 세련미로 우아하기까지 하다.
퇴수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집이다. 주목할 만한 요소가 많은 정자다. 가령 배흘림기둥을 구사해 시각적 안정감을 부여했다. 조선시대에 일반적이었던 막돌 초석 대신 사각 다듬돌을 놓은 것도 당시로선 획기적인 건축 공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뚜렷한 특징을 꼽자면 훤칠한 냇물과 동행하는 정자라는 점이다. 지리산에서 굴러 나온 계류가 정자의 코앞을 흘러가는 게 아닌가. 기기묘묘한 물가의 암반들과 물속의 바위들까지 퇴수정의 동아리로 삼았다. 전체적으로 보자면 숲과 물 사이에 들어앉은 정자다. 자연과 긴밀하게 얽힌 집이다. 박치기의 생리는 초야를 닮아 거친 나물밥만으로도 자족했다. 퇴수정 마루에 올라서는 곧잘 객과 더불어 술과 거문고를 즐겼다지. 그는 신선을 닮고 싶어 산수에 묻혀 산 인물이다. 속세의 질서와 규율에 속박될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이다. 그러나 마음 안에 신선을 들여놓고 자연에서 노닐 경우엔 경지가 달라진다. 신선을 흠모한다는 건 이미 도(道)에 밝다는 뜻일 테니까.
김주완 남원문화원장
“남원 문화의 성장 지리산의 영향력 덕분”
예로부터 남원을 일컬어 ‘천부지지(天府之地) 옥야백리(沃野百里)의 고을’이라 했다. 하늘이 내린 땅이며, 비옥한 들판이 펼쳐지는 고장이라는 뜻이다. 저 옛날의 농경사회 시절, 땅에서 나오는 생산물이 풍부해 의식주가 넉넉할 경우엔 문화마저 덩달아 융성했다. 남원이 딱 그랬다. 농업이 발달한 덕분에 향토 문화가 꽃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현대에까지 상속된 유형・무형의 문화자산이 수두룩한데, 이를 견인차로 삼아 남원은 문화 관광도시로 부상했다. 이에 대한 김주완 남원문화원장의 얘기는 이렇다.
“농업경제의 힘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먹고사는 게 무난해 예술이 발흥한 거다. 삼국시대부터 남원이 교통의 요충이었다는 점도 문화 발전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교통로를 통한 인적・물적 교류는 물론, 외부의 다양한 문화 유입이 활발했으니까.”
남원은 지리산 자락에 있다. 지리산이 남원 문화에 미친 영향도 클 것 같다.
“남원 사람들에게 지리산은 모든 것을 포용해주는 ‘어머니 산’이다. 삶의 희망과 안식을 지리산을 통해 얻으며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원의 문화예술 역시 지리산의 정기를 받아 성장했다고 본다. 남성적인 판소리 동편제를 완성한 가왕 송흥록의 성취는 지리산이 주는 정신적 영향력에 의해 가능하기도 했다. 남원은 문학의 요람이다. 고전소설 ‘춘향전’과 ‘흥부전’의 무대이자 발상지이며, ‘혼불’의 작가 최명희가 남원 사람이다. 이 모든 문학적 성장의 뿌리 역시 지리산에 있다고 생각한다.”
6년째 남원문화원을 이끌고 있다. 그간에 거둔 성과를 소개한다면?
“큰 성과 하나를 소개하겠다. 과거 정유재란 때 남원에서 일본으로 끌려간 베 짜는 소녀가 있었는데, 우리 문화원은 이 소녀의 스토리를 전해 듣고 전말기를 조사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래서 조사단을 꾸려 일본 현지를 찾아가 여러 기록을 뒤지는 등 많은 노력을 쏟았다. 그 결과 마침내 영상 다큐에 모든 걸 담을 수 있었다.”
매우 뜻깊은 발굴 사업을 성공시킨 셈이다. 소녀는 포로로 끌려갔으나 좌절하지 않고 굳세게 일어섰던 것 같다. 자신이 지닌 직조(織造) 재능을 일본 지역민들에게 전수해 직조산업 발전에 기여했다는 게 아닌가. 소녀의 사후, 일본인들은 존경하는 마음을 내어 추모비를 세웠다 한다. 매년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것이다. 소녀의 명민한 자질에 감동할 수밖에.
소녀 관련 발굴 자료들을 향후 어떻게 활용할 계획인가?
“다큐 상영은 물론, 그림책으로 만들어 널리 보급할 계획이다. 연극이나 창극, 혹은 소설로 가공할 수 있는 콘텐츠도 개발할 것이다.”
문화원마다 지역민들이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고 문화원의 사업과 프로그램에 동참할 수 있는 방안 개발에 고심하는 것 같다. 이 문제엔 어떤 기법이 필요하다 보나?
“외부에서는 문화원이 주민들의 참여나 관심과 동떨어진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이미 가까이에 있다고 본다. 미진한 부분은 지속적으로 채워나가고 있다. 우리는 ‘열린 문화원’을 지향한다. 주민들의 다양한 욕구를 수용하기 위해, 문화 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50대는 각종 삶의 위기를 마주하는 시기다. 그중에서도 남성 1인 가구는 자신의 고민을 나누지 않고 홀로 이 고독을 버티다가 사회로부터 단절된다. 고독사하는 중장년 남성이 가장 많은 이유는 뭘까.
보건복지부 ‘제1차 고독사 예방 기본계획’(2023~2027년)에 따르면 우리나라 1인 가구 수는 717만 명, 이 중 고독사 위험군은 152만 5000명이다. 1인 가구의 21.3%를 차지한다. 1인 가구 중 고독사 위험군으로 꼽힌 사람들의 연령대별 비중을 보자. 40대는 25.8%, 50대는 33.9%였다. 40~50대를 합하면 59.7%로 절반을 훌쩍 넘는다. 60대(30.2%)까지 아울러 보면 89.9%로 약 90%에 이른다. 40~60대가 고독사 고위험군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중장년 남성이 위험하다
보건복지부 ‘2022년 고독사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근 5년간 고독사로 숨진 사람은 남성이 84.2%로 여성보다 5배 많았고, 이 중 50~60대인 중장년층이 58.6%로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60대(29%)까지 고려한다면 87.6%에 이른다. 40~60대는 고독사 고위험군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가장 많이 고독사하는 나이대인 셈이다.
보건복지부 조사에서 1인 가구 중장년층(40~60대)은 경제적인 문제(39.1%)를 가장 힘든 점으로 꼽았다. 복지부는 건강관리와 가사노동에 익숙하지 않은 중장년층이 실직·이혼 등으로 삶의 만족도가 급격하게 떨어져 영향을 주는 것 같다고 분석했다.
황순찬 인하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초빙교수는 본지와의 전화 인터뷰를 통해 중장년 남성의 사회적 고립을 다방면으로 봐야 한다고 조언했다. 황 교수는 “우리는 누군가를 만나 빈번하게 상호작용할 때 자아의 건강성이 유지되며, 고립되면 문제가 생긴다”면서 “(중장년) 남성의 경우 직장 생활을 그만두면서 사회적 관계가 사라지는데, 그렇게 사회와 단절되면서 고립되고 여러 문제가 파생되어 나타나기 시작한다”고 설명했다.
중장년 남성의 사회적 고립은 이들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황 교수는 “사회와 단절되었을 때 유일하게 곁에 남는 게 가족인데, 경제적 문제도 있다 보니 술로 이를 해소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고 가족과 갈등이 심해지면서 해체되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 혼자 지내게 되면서 누군가를 만나는 일이 어려워진다. 중장년 남성은 내가 갖추어져 있고 반듯하게 생활하고 있다면 누군가를 만날 수 있지만, 내세울 것 없고 심리적으로 위축된 상태에서는 만남을 회피한다. 대체로 자존심이 세기 때문이다. 사람을 만나고 도움을 청해야 할 가장 절실한 시기가 가장 자존심이 높을 때이기도 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차단하게 된다는 특징이 있다”라고 분석했다.
고립 심화하는 우울과 남성 갱년기
‘50대 남성’은 여러 가지 변화를 겪는다. 이혼, 실직, 퇴직, 부채, 가족과의 불화, 노화 체감, 노부모 부양에 대한 부담감, 자녀의 독립, 노후에 대한 불안 등 삶의 각종 위기를 마주하는 시기다. 노화의 시작으로 건강도 나빠진다. 국민건강영양조사에 따르면 비만, 당뇨병, 고혈압 등 대부분의 만성질환 유병률은 여성보다 남성에게서 높다.
또 남성 호르몬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한다. 미국 워싱턴대학의 조사에 따르면, 남성 호르몬이 부족한 남성의 56%가 심각한 우울증이나 우울 증상을 겪고 있다는 결과가 나왔다. 남성 호르몬이 줄어들면 남자도 갱년기를 겪는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서서히 낮아지면서 발생하는데, 스위스의 한 연구에 따르면 남성의 갱년기 증상이 심할수록 우울 정도가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40대 남성의 27.4%, 50대의 31.2%가 남성 갱년기에 해당한다.
남성 갱년기의 대표적인 증상은 성욕 저하, 성기능 감퇴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체지방 증가, 탈모, 피로감, 무기력함, 수면장애, 감정기복 심화, 두통, 두근거림, 답답함 등 다양한 증상이 동반된다. 하지만 중장년 남성은 이런 감정을 표현할 곳이 없어 과하게 술을 마시거나 흡연을 하는 등 안 좋은 습관을 키우게 된다.
남성 갱년기는 스스로 알아채기도 쉽지 않다. 여성은 폐경을 겪으며 비슷한 시기에 나타나는 반면, 남성은 개인에 따라 증상이 나타나는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노화로 인해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만성질환의 증상 중 하나로 여기는 경우도 많다. 또 알게 되더라도 자신이 갱년기를 겪고 있다는 상황을 잘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제때 치료가 이뤄지지 않는다. 무엇보다 남성 갱년기는 치료가 필요한 질환이라는 인식도 부족하다.
최근 만성피로와 무기력함, 우울한 기분이 든다면 다음의 자가진단표를 체크해보고, 갱년기가 의심되면 가까운 비뇨기과나 건강클리닉을 찾아 혈액 검사를 통해 남성 호르몬 수치 등을 확인해보자. 갱년기 진단이 내려지면 전문의와의 충분한 상담을 통해 남성 호르몬 보충 치료를 할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만약 갱년기 진단을 받거나 갱년기가 의심된다면 규칙적인 운동, 적절한 단백질 섭취, 적절한 성생활 등의 생활 습관을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생활의 관리를 통해 남성 호르몬 수준을 유지하는 방법도 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 관리가 중요하며, 과도한 흡연과 음주는 금물이다.
중장년 고독사 막아라
정부는 2027년까지 고독사를 20% 줄이기 위해 고독사 예방 대책들을 내놓았다. 이 중에서 가장 위험군으로 꼽히는 중장년의 경제적 문제와 사회적 관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주기적인 보건소 방문 건강관리, 생활 지원 서비스를 신설할 계획이다. 또 조기 퇴직한 중장년 위험군에는 재취업과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할 예정이다.
고독사 대책은 우리나라에서 이번에 처음 마련되는 것이기에 앞으로 조금씩 관련 정책을 다듬어갈 필요가 있다. 중장년 남성의 경우 사회와 단절되기 쉬운 환경에 놓인 데다, 스스로 사회로부터 멀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어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황순찬 교수는 “공공의료 지원, 밑반찬 서비스 등 다양한 지원 정책이 있었지만, 중장년 남성은 이런 지원을 불편해한다. ‘내가 이런 처지에까지 이르게 됐구나’라고 생각해 오히려 우울감이 증가하는 모습도 보인다. 실제로 서울시에서 정신건강의학과 진료에 대한 의료비 지원 정책을 펼쳤지만 좋은 결과를 얻지 못했다. ‘당신들은 도움이 필요한 대상이다’, ‘당신들에게는 이런 것이 필요하니 참여하시오’와 같은 메시지로는 그들을 움직일 수 없다. 오히려 사회와 더 단절시키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중장년 남성의 특성을 고려해 더 세심하게 다가가야 한다는 것.
그럼에도 ‘사회적 고립 및 고독사 예방을 위한 공청회’에서 전문가들이 입을 모은 “사회적 연결을 복원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기억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중장년 남성의 사회적 고립을 막기 위해서는 사회적 연결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제적 지원 외에도 안부를 확인하거나, 이들이 사회와 연결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는 기회와 공간 등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고독사를 최초로 발견하는 사람이 가족뿐 아니라 주변 이웃들도 꽤 있었던 것을 참고해, 각종 지역 네트워크와 다양한 주체를 엮어두어야 한다고 봤다.
황 교수도 사회와의 연결고리를 자연스럽게 이어줘야 한다는 점에 공감했다. 문제를 상담하는 형태를 취하기보다 ‘자원봉사’, ‘일자리 찾기’ 등 어떤 매개를 통해 문제 해결을 확장해나가는 방식이 효과적일 것이라고 제안했다. 특히 일을 매개로 하는 것이 좋다는 조언이다. 그는 “일자리가 없으면 설 자리가 없고, 설 자리가 없으면 살 자리가 없고, 살 자리가 없으면 삶의 끝자리에 놓이게 된다. 일자리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건강 문제가 있다면 건강에 관한 지원을 하면서 일자리를 찾아가는 방식을 취할 수도 있다. 또 전적인 재취업보다 하루 한 시간 혹은 두 시간씩 주기적으로 일할 수 있게 하는, 우선 사회로 나오도록 하는 두 가지 형태의 재취업 지원이 이뤄져야 한다. 실제로 이 과정이 사회적 관계를 다시 형성하는 데 유의미한 결과를 보여주기도 했다”면서 사회와의 관계 유지를 위한 장치들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해외에서는 중장년 남성을 상담으로 이끌기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도되고 있다. 황 교수가 설명한 것처럼 ‘상담’을 목적으로 모이는 프로그램은 아니다. 예를 들면 커피 미팅, 런치 미팅, 스포츠 미팅, 반려견 미팅, 작업장 미팅 등이다. 커피를 마시거나, 밥을 먹거나, 스포츠를 즐기거나, 반려견과 모이거나, 목공 등의 작업을 하는 식이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각자의 고민을 나누기도 하고 상담으로 연계되기도 한다. 많은 연구에서 중장년 남성의 경우 1:1 상담보다 또래 무리와의 집단 면담이 더 효과적이며, 전문의보다는 멘토와 이야기 나누는 것이 더 좋다는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중장년 남성의 또 하나 특징은 혼자 생활하면 식사 관리가 안 된다는 점이다. 지자체에서 중장년 남성을 위한 요리교실 등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거나, 시민단체에서 공동 부엌 등을 운영하는 이유다. 하지만 황 교수는 혼자 사는 중장년 남성의 경우 집에서 요리를 하는 환경이 갖춰지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주거 문제를 먼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여기서도 사회와 연결고리를 만들어두면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이다. 이를테면 셰어하우스 등의 형태로 공유 주방을 사용하거나, 생활체육을 즐기면서 주변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방법이 있다.
중장년 본인도 사회와 벽을 쌓기보다 조금이라도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황순찬 교수는 “직장을 그만두었더라도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갈 곳을 만들어두는 게 중요하다.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상호작용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 두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사회성만은 단절되거나 끊어지지 않는 게 중요하다. 자원봉사를 해보는 것도 좋다. 자원봉사를 통한 야유회나 여행 프로그램에 참가해 다른 삶을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는 것도 좋겠다”고 당부했다.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산 풍경 푸르러 첫눈에 싱그럽다. 청명한 정취를 느끼게 하는 마을이다. 한갓진 산기슭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고택들. 산야의 초록과 고택의 수묵색이 차분하게 어우러져 푸근하다. 안동시 와룡면 오천리에 있는 군자마을이다. 원래 2km 정도 저 아래 ‘외내’에 있었으나 1974년 안동댐이 들어설 때 이곳으로 집단 이주했다. 수몰을 피해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고택과 고택 사람들의 몸살이 자심했을 테다. 억지 춘향으로 밀려났으니까. 군자마을만이 아니라 안동의 많은 전통마을이 불운을 맞이했다. 일부 마을은 그대로 수몰됐으며, 군자마을처럼 문화재로 지정된 마을의 고택은 이건(移建)으로 살아남았다. 당시 안동의 유림에선 논의가 많았더란다. 결국 ‘문중을 지키는 소리(小利)보다 국가가 도모하는 대의(大義)에 승복하자’는 쪽으로 뜻을 모았다고 한다.
군자마을은 ‘외내’에서 통째 옮겨온 고택 20여 채로 이루어져 있다. 이건 이후 어언 반백 년이 지났다. 상처를 씻어주는 건 언제나 세월이라는 약이다. 이건 과정에서 곁들인 새 단장으로 고택 마을 특유의 고졸한 맛은 덜 익었지만 찾아오는 이들이 흔해 생기가 감돈다. 답사객들, 또는 한옥 스테이 같은 체험 프로그램을 즐기려는 이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어서다. 유구한 세거로 이어진 후손들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지금은 소수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러나 마을이 지닌 역사성과 고건축이 지닌 미감을 힘으로 삼아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는 게 아닌가. 옛 마을의 생존 방식과 풍속이 이렇게 진화한다. 마을 앞에 있는 느티나무도 우람하게 자라 너른 그늘을 드리운다. 마을을 에워싼 숲과 전면으로 탁 트인 조망도 빼어나다. 풍경의 절반은 청산이요, 나머지 절반은 하늘이거나 구름이다. 군자마을은 이렇게 자연 안에 있다. 쉴 만한 곳이며, 눈요기할 만한 곳이고, 기억에 남길 만한 곳이다.
군자마을은 광산 김씨(光山金氏) 예안파(禮安派)가 조선 초기부터 600여 년 동안 세거한 곳이다. 입향조는 농수 김효로(聾叟 金孝盧, 1454~1534)다. 그는 생원시(生員試)에 붙었으나 출세에 뜻이 없어 매양 초야에 묻혀 살았다. 퇴계가 김효로를 일컬어 ‘결백한 절개를 지켰다’고 한 걸 보면 정치의 탁류에 발 담그기를 싫어한 인물이었음을 알 만하다. 김효로를 사표로 삼아 성장한 덕분인가? 그의 친손과 외손 중에 학덕 높은 선비들이 많이 나왔다. 이른바 ‘오천 7군자’라 불리는 이들이 바로 그렇다. 조선의 문신이자 학자인 한강 정구(寒岡 鄭逑)는 안동부사로 재임할 때 이곳을 방문했는데, “이 마을엔 군자 아닌 사람이 없다”고 탄복했다지. 이후 군자리라 부르게 됐다.
돌계단을 걸어 올라 후조당(後彫堂) 대종택으로 들어선다. 군자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고택이며, 마을의 깊은 유서를 웅변하는 대표적 건물이다. 입향조 김효로의 장손인 김부필(金富弼, 1516~1577)이 1567년에 초창, 자신을 호를 따 ‘후조당’(後彫堂)이라 이름 붙였다. 후조당은 안채, 사랑채, 사당, 별당 등으로 구성됐다. 대종택답게 규모로나 건축 미학으로나 빼어나다. 특히 후조당 별당의 가구(架構)와 구색이 흥미롭다. 정면 4칸, 측면 2칸의 ‘ㄱ’자형 건물로, 서편엔 6칸 대청을 설치했다. 대청 동편엔 2칸의 온돌방을 배치했고, 잇달아 마루 1칸과 가마 형태의 작은 온돌방 1칸을 덧붙여 위트가 실린 건물 형태를 연출했다. 천장 부위에 설치한 소슬 대공은 매우 희귀한 받침 형식인데, 여말선초의 기법이라 한다. 화각을 한 마루 대공의 화려함도 수작으로 평한다. 6칸 대청의 칸마다 단 사분합문(四分閤門)의 묘미는 또 어떻고? 모조리 들어 올려 걸쇠에 걸면 단박에 외경이 안으로 들이친다. 햇살과 바람이 밀려든다. 사분합문은 이렇게 풍경을 변주한다. 아울러 공간을 확장하는 기능을 해 문중의 제례나 회합 같은 대형 행사를 너끈히 치를 수 있다.
선비가 쓴 요리책 ‘수운잡방’
후조당 별당에 걸린 현판은 퇴계가 썼다. 군자마을 선비들은 다들 퇴계를 스승으로 삼았는데 김부필 역시 제자였다. 후조당에선 놀라운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건을 위한 건물 해체 때 지붕 아래 합각에서 고서, 문집, 교지, 토지문서, 노비문서 등 희귀한 문화유산이 다수 발견돼 큰 화제가 되었던 것. 문중 선조들이 600여 년간 은밀하게 소장했던 고문서와 전적들이 천장에서 쏟아지리라곤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으니 기상천외한 축제 분위기로 들썩였겠다. 당시 발견된 수천 점의 유물 중 일부는 보물 제1018호와 제1019호로 지정됐다. 사람들은 대개 군자마을의 고택에 관심을 갖지만, 이곳 문중 사람들의 자긍심을 돋우는 건 바로 이 기록유산들이다.
그렇다면 군자마을의 군자들이 지닌 정신세계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들은 명민해 학문에 밝고 처신에 맑았다. 흔히 탈속한 풍모와 깨끗한 운신을 일삼아 세상의 농간과 꿍꿍이에 초연했다. 그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할까 싶지만, 도학자란 세속보다 산림에서의 은거와 공부로 오히려 삶의 진수를 건질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이지 않았던가. 군자마을 ‘7군자’의 중심인물이었던 김부필은 과거에 급제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향리에 은둔했다.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았다. 스승 퇴계가 벼슬을 권했지만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때 퇴계가 읊은 칠언절구가 있다. ‘후조당 주인은 소박하고 절개가 굳어/ 임금의 임명장이 내려와도 기뻐하지 않았다/ 매화와 마주 앉아 빙설 같은 향기를 맡으며/ 그저 도(道) 공부에만 매진하더라.’
이제 탁청정(濯淸亭)을 볼까. 입향조 김효로의 둘째 아들 김유(金綏, 1491~1555)가 1541년에 살림집을 지으면서 바로 옆에 함께 건립한 별당 정자다. 군자마을엔 두 개의 종가가 마을의 기풍과 질서를 주도해왔다. 항렬로 보아 큰집인 후조당 종가와 작은집인 탁청정 종가가 바로 그렇다. 탁청정의 이름은 김유의 호에서 따왔으며, 현판 글씨는 명필 한석봉이 썼다. 한석봉은 도산서원의 현판을 쓰기도 했는데, 서예가들에 따르면 탁청정 글씨가 도산서원의 것보다 빼어나다고 한다. 탁청정은 정면 3칸, 옆면 2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정자로 매우 아름답다. 허전한 구석 없이 당당하고 흠결 없이 수려해 당대 최고수 목수가 지은 집임을 짐작케 한다. 영남 지방의 개인 정자치고 탁청정처럼 웅장하고 우아한 정자가 없다는 평을 듣고 있다. 뜰에 있는 연못에선 여름이면 연꽃 향기가 은은하게 피어올라 누각으로 스며든다.
이토록 경탄할 만한 정자를 지어놓고 김유는 무엇으로 소일했나? 그의 뇌에 세팅된 최고의 가치는 유유자적(悠悠自適)이지 않았을까. 그는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무과엔 실패, 그 길로 벼슬을 포기하고 향촌에 살며 도학자로서의 영일(寧日)을 구가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유는 ‘어찌 명리(名利)를 좇으랴. 삶이란 즐거워야 하는 게 아니겠는가?’라는 요지의 말을 했다고 한다. 그의 학덕은 드높았고 인격도 고매했다. 즐기는 방식에도 기품이 있었다. 부모 봉양과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제사를 받들고 손님을 대접함)에 충실함으로써 선비의 본분을 다했다. 특히 접빈객에 공을 들였다. 그는 열 살 연하의 퇴계를 비롯해 당대의 시인 묵객들과 두터운 교유를 했다. 정자 마루에선 청담(淸淡)과 풍류가 화개(花開)처럼 번졌으리라. 이름난 이들만 접대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걸인에게도 대접을 했다는 게 아닌가. 그의 집 주방에선 늘 술이 익어가고 음식이 요리됐다. 김유는 요리책 ‘수운잡방’(需雲雜方, 보물 제2134호)을 저술하기도 했다. 남존여비의 비루한 관념이 엄연하던 시대에 선비가 요리책을? 깜짝 놀랄 만한 일이다. 아마도 김유는 삶이라는 여행을 경계 없이 넘나든 게 아니었을까. 수신(修身)이 깊지 않고선 가능치 않은 경지다.
권석환 안동문화원 원장
유교 자체에 무슨 폐단이 있으랴
‘안동학’이라는 게 있다. 안동 지역의 역사·문화·지리·민속 등을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지역학이다. 이 흔치 않은 학문 장르의 존재를 통해 안동의 문화적 광량(廣量)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안동 사람들은 흔히 유교 문화와 불교 문화는 물론 민속 문화까지 번성한 곳으로 안동을 능가할 지역이 없는 걸로 본다. 권석환 안동문화원 원장을 통해 안동의 문화와 안동문화원의 일에 대해 들었다.
“‘안동정신’의 핵심은 ‘의’(義)를 중시한다는 데 있다. 여기엔 역사적 맥락이 있다. 일찍이 고려 건국 때 안동의 지도자 김선평·권행·장정필이 정의로운 편에 섰다. 일제강점기 때엔 전국 어느 곳보다 많은 이들이 독립운동에 나섰다. 이게 왜 그런가 연구한 학자들에 따르면, 안동 출신으로 성리학의 태두였던 퇴계 선생의 정신에서 영향을 받은 게 그 배경이 됐다. 즉 의리를 본분으로 가르친 퇴계의 정신이 면면히 이어져왔다는 얘기다.”
안동은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를 표방하고 있다. 이른바 ‘선비정신’이 여전히 살아남은 지역이라는 뜻을 담은 슬로건인가?
“현대의 다양화된 사회에서 올곧은 선비정신을 가지고 살 수야 있겠나. 그러나 유교의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하다. 사람이 바르게 사는 길을 가르치는 게 유교니까. 다시 말해 선비정신을 어떻게든 이어가자는 게 안동의 바람이다. 사실 안동은 전통과 예절이 그나마 잘 지켜지고 있는 고장이다.”
개인의 자유와 자아실현을 중시하는 요즘 세상에 유교가 가르치는 모럴이 지닌 폐단은 없을까?
“옳은 삶을 가르치는 유교 자체에 무슨 폐단이 있을까? 다만 가르침을 시늉만 낼 뿐 실제로는 이기심을 채우는 얌체들은 이 지역에도 많다. 매사 조상을 우러러 부끄럽지 않은 처신을 하는 게 좋다는 게 내 생각이다.”
권 원장님은 전통 유가의 후예로 오랫동안 유림활동을 했다. 일상의 처신에서 중시하는 가치들이 있다면?
“기본적인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지키고자 한다. 상경여빈(相敬如), 즉 서로 공경하기를 손님 대하듯이 하라는 가르침과, 입장 바꿔 생각하자는 역지사지(易地思之) 역시 현대사회에서도 요긴한 미덕이라 믿는다.”
얼마 전에 펼쳐진 ‘차전장군 노국공주 축제’는 시민 중심의 참여형 축제로 성황을 이뤄 호평을 받았더라.
“안동문화원이 주관한 축제로 성과가 컸다. 안동문화원이 부각되는 효과를 낳기도 해 보람을 느낀다. 향후 젊은 층을 축제에 적극 끌어들여 질적 성장을 도모할 참이다.”
안동의 문화답사 때 놓치지 않고 찾아보길 바라는 명소를 꼽아달라.
“도산서원을 찾아가 사당에서 절을 하는 걸로 퇴계 선생을 뵙고 그 정신을 담아오면 좋겠다. 애절한 사랑 이야기가 담긴 월영교에서는 사랑의 의미를 생각해보길 바라고. 이 둘만으로도 안동이 오래가는 기억으로 남을 게 틀림없다.”
그는 안동만의 먹거리를 추천하기도 했다. 500년 전통의 종가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수운잡방 체험관’을 통해 음식의 낙원을 경험하라는 것.
은퇴자 채 씨는 지역가입자로서 국민건강보험료를 부담하는 것이 직장 다닐 때와 달리 여간 만만치 않은 상황이다. 그러던 중 선배 은퇴자로부터 고액 의료비 발생 시 국민건강보험에서 제공하는 혜택이 큰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상담을 신청해왔다.
보험급여의 종류
국민건강보험 가입자나 피부양자가 질병 등으로 인해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받는 혜택을 ‘보험급여’라고 한다. 국민건강보험의 보험급여는 요양급여, 요양비, 부가급여, 장애인에 대한 특례, 건강검진으로 나누며, 요양급여를 실시하는 기관을 ‘요양기관’이라고 한다. 보험급여의 종류별로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병원 등의 진료비 영수증을 보면 항목은 ‘급여’와 ‘비급여’로 나누어지고, 급여 항목은 ‘본인일부부담금’과 ‘전액본인부담금’으로 나뉜다. 국민건강보험 가입자나 피부양자가 보험급여 발생 시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아닌 본인이 부담하는 금액을 본인일부부담금이라고 한다.
전액본인부담금은 보험급여에 해당하는 항목임에도 보험료 체납으로 급여가 제한되거나, 요양급여의 절차에 따르지 않고 진료를 받는 경우, 학교폭력 사건에서 가해자인 경우, 보험 재정에 상당히 부담을 주는 것으로 인정될 경우 등의 사정으로 국민건강보험 혜택을 받지 못할 때 본인이 전액 부담하는 금액을 말한다. 비급여는 애초에 해당 항목 자체가 보험급여에 해당하지 않아 본인이 전액 부담하는 금액을 말한다.
대표적인 비급여 항목은 치과보철료(골드크라운, 금니), 시력교정술(라식, 라섹), 성형외과술 등이다. 비급여 항목은 병원마다 금액 차이가 있다. 이에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비급여 진료비 항목의 최저금액, 최빈금액, 중간금액, 최고금액 정보를 기관·병원 규모·지역별로 구분하여 공개하는 ‘비급여 진료비용 공개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이를 통해 환자들은 자신에게 알맞은 병원을 선택할 수 있다.
본인부담상한제
본인일부부담금이라고 해서 본인이 전부 부담하는 것은 아니다. 본인부담상한제를 통해 개인이 부담하는 진료비의 한도를 정해두고 있다. 본인부담상한제는 2004년부터 실시해온 제도로 과도한 의료비로 인한 가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가입자가 부담한 1년간 본인일부부담금(비급여, 선별급여 등은 제외하고 환자 본인이 부담하는 의료비)이 개인별 본인부담상한액을 초과하는 경우 초과금액은 건강보험공단에서 부담하는 제도다.
본인부담상한제는 상한액을 초과하는 금액을 지급하는 방법에 따라 ‘사전급여’와 ‘사후급여’로 나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2023년 본인부담상한액 최고금액을 2022년 기준 연간 598만 원 에서 1014만 원으로 인상 예고했다. 이는 국민건강보험법 시행령이 공포되면 예정대로 실시된다.
본인일부부담금 산정특례제도
본인일부부담금 산정특례제도가 있다. 이 제도는 진료비 본인부담이 높은 암 등 중증질환자와 희귀질환자, 중증난치질환자에 대하여 본인부담률을 경감해주는 제도다.
은퇴자들의 비용 관련한 공통 고민 중 하나가 국민건강보험료다. 직장을 다닐 때와 달리 수입도 줄고 지역가입자로서 보험료도 100% 내야 하기 때문에 부담스러운 것은 사실이지만, 국민건강보험에서 제공하는 의료비 지원제도는 노후에 고액의 의료비를 지급해야 할 경우 든든한 버팀목이 될 수 있다.
“명사들은 어떻게 우리 사회를 움직이며 우리 의식 세계를 지배하는가? 그들이 말하는 명성의 본질과 가치는 무엇이며, 우리는 명성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김정섭 성신여자대학교 문화산업예술학과 교수는 지난 3년간 인간의 ‘명성’(名聲)과 각계의 ‘명사’(名士)를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이 주제를 깊이 연구했다. 그는 관련 이론·데이터 분석, 수양·실천 컨설팅 전략의 발굴 제시는 물론, 각계 명사들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함으로써 학술적 통찰을 끌어냈다. 본지가 이 책의 핵심 내용을 입수해 창간 특집으로 독점 게재한다. 연구 결과물은 ‘셀럽시대’(한울엠플러스)란 책으로 오는 5월 출간될 예정이다.
“사람들은 식당에서 사진을 보고 경탄하며 ‘칠리치즈 프렌치프라이’를 주문해요. 그런데 실제로 나오면 양념이 풍부하고 느끼한 그걸 다 먹어야 하냐는 부담감을 느껴요. 그때 ‘일반 감자튀김’을 시켰다면 더 행복했을 거라고 후회하죠. 인간에게 명성이란 바로 이런 존재예요.”
‘그릿’(Grit, 2016)의 저자이자 심리학자인 앤절라 더크워스(Angela Duckworth)가 2021년 2월 28일 미국 팟캐스트 ‘프리코노믹스 라디오’에 나와서 한 얘기다. ‘명성’은 자아실현 욕구를 지닌 인간의 본능이자 인생의 성공 가도에서 간절하게 그리는 꿈이다. 동시에 앤절라 더크워스의 말처럼 ‘약’과 ‘독’이란 양면성을 지녔다. 명성은 인생 경험과 성과의 소산이자 자신을 웃고 울게 만든 가치이기에 깊은 통찰력과 혜안을 지닌 시니어들에게 더욱 친숙한 어휘다. 명성은 사회적으로 신뢰와 참여를 촉진하고, 정치적으로는 투표율과 지지를 견인하며, 경제적으로는 그 존재량이 희소해 ‘관심경제’는 물론 명성에 대한 선망, 추종, 숭배를 극소수에 집중시키는 ‘슈퍼스타 경제학’을 구성한다. 인터뷰에서 문인·철학자는 대체로 명성을 경계하고, 정치인·경제인·의료인은 능력과 신뢰에 바탕을 둔 적극 활용론을 강조했으며, 예술인·체육인은 조건부 활용론에 방점을 두었다.
명성은 ‘약’과 ‘독’ 양면성 지녀 경계해야
‘풀꽃 시인’ 나태주는 2015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로 꼽은 바 있는 ‘풀꽃(1)’을 썼다. 시구는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인데, 그는 이 시에 대한 폭넓은 사랑으로 ‘국민시인’으로 떠올랐다. 나태주 시인은 ‘명성’에 대해 “전적으로 남이 알아주고 평가해주는 고귀한 가치”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명성을 위해 자신의 존엄성을 버리고 아첨하고, 반칙하며, 사술(詐術)을 부리며 아등바등하는 것은 거부했다. 심지어 신춘문예 당선이나 등단에 조급증을 갖거나 빨리 쓰려고 하는 문단 후배들까지 꾸짖었다.
그는 “명성은 유효기간이 매우 짧은 데다 그것에 집착하다 보면 영혼을 망가뜨리기 쉬우므로 존엄과 품위가 가미되어 더 가치가 있는 ‘명예’를 중시한다. 명성은 물로 씻으면 금방 지워져버리는 젊은이의 ‘화장’과 같고, 명예는 경륜 있는 노인들이 갖는 가슴속 숨겨진 ‘흉터’처럼 잘 드러나지도 않고 잘 지워지지 않아 영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베스트셀러 작가인 철학자 강신주는 철학과 인문학을 인간의 삶에 투영해 저술과 강연을 통해 날이 선 언어로 소통을 확대해왔다. 그는 명성을 절대 추구해서는 안 될 ‘노예의 가치’로 보았다. 그는 “철학과 인문학의 견지에서 명성 추구는 주인인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사는 방법이 아닌, 타인이 원하는 삶을 따라가야 하는 ‘노예의 전략’”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명성을 추구하는 삶은 자기 목소리를 잃고, 자신의 삶도 없고, 허깨비 같은 것을 좇는 것이기에 결국은 꼭두각시의 삶을 사는 것”이라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초래하는 부작용에 초점을 두었다.
정치인 정세균(사람사는세상 노무현재단 이사장)은 국내 헌정사 최초로 여야의 정당 대표, 국회의장, 국무총리를 모두 역임해 ‘대통령만 빼고 다 해본 정치인’으로 통한다. 국회의원(6선), 장관(산업자원부), 원내대표도 지냈다. 그는 “‘명성’은 국민이 어떻게 바라보느냐와 같은 일종의 세평(世評)이지만, 명예는 본인 성과에 대한 자신의 가치판단과 자부심의 척도다. 명성은 반드시 공적으로 좋은 의미를 지닌 일에 열정을 발휘해 얻는 경우에만 가치가 있다”라고 말했다. 국회 ‘한보청문회’(1997년)에서 한보의 로비 자금을 거절한 유일한 국회의원으로 밝혀져 일약 명사로 부상한 이후 지금껏 겪은 성찰을 집약한 것이다. 그는 “국민이 우러러보는 ‘정치인 명사’가 되려면 이해관계를 배제하고 맡은 공직의 무게를 온전히 떠안으며 일하는 ‘책임의식’, 정성과 투명성을 기본으로 국민을 받드는 ‘신뢰성’, 매사 분별력을 발휘하며 신사 숙녀처럼 처신하는 ‘품격’이 몸에 배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김종인, “정직해야 명성 쌓아”
‘카리스마 리더’ 김종인(대한발전전략연구원 이사장)은 내로라하는 경세가다. 5선 국회의원 출신으로 정·관·학의 풍부한 경험 축적은 물론 ‘차르’란 별칭, ‘직업이 비대위원장’이란 비유가 말해주듯 강한 소신과 뚝심으로 진보에서 보수를 망라하는 정당을 모두 이끌었다. 그는 “명성은 국민을 상대로 하는 정치인에게 목숨과 같고, 국민 앞에 서서 정치하는 이유이기도 하다”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정치인이 명성을 갖고 이를 드높여 성공하려면 기본적으로 일을 잘하고 국민에게 믿음을 주는 ‘능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능력이 없으면 국민에게 피해만 준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치인의 명성 축적과 유지의 기본 요소는 정직성, 일관성, 신뢰성인데, 그중에서도 하나만 꼽으라면 단연 정직”이라고 강조했다.
박지원 전 국가정보원장은 정치적 경륜과 지략이 풍부해 ‘정치 9단’으로 불린다. 그는 “정치인은 오늘을 잘해서 내일을 사는 사람이다. 국민의 인정(認定)을 받아야 명성을 얻고, 그 명성을 기반으로 정치력을 발휘하고 정치생명을 이어가기 때문에, 명성은 정치인에게 존재 자체이자 전부”라고 정의했다. 그는 “정치인이 명성을 얻으려면 철두철미하게 지식을 쌓고, 국가 사회와 국민의 관심사를 파악하고, 미래 상황 변화를 예측하고 대비하는 등의 자기계발을 하고, 하루에 만나는 사람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영향력, 기능, 효과 면에서 가장 효율적인 매개체인 언론을 하늘같이 알고 받들어야 목표를 이룰 수 있다”라고 말했다. 그는 특히 “나는 신혼여행 이후로는 아내와 여행 한번 같이 못 갔을 정도로 정치 행위 그 자체를 즐기며 사적 자아와 공적 자아를 아예 동일시(同一視)하며 살았다”라고 회고했다.
김세연 전 의원(청년정치학교 운영자, 3선 의원)은 ‘36살의 집권당 최연소 당선’이란 언론의 조명을 받으며 정계에 입문해 개혁보수와 우파혁신을 주창한 ‘청년정치 리더’의 길을 걸어왔다. 그는 “명성은 오직 정치인 본인의 의도나 의사와 무관하게 공직에 대한 열정적· 헌신적인 봉사를 통해 그 결과물로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이 되어야 한다. 정치인은 외려 명성과 거리를 둘 때 좋은 정치가 가능하다”라고 말했다. 그는 “정치인이 명성을 위해 일하면 공적인 의사결정에 중대한 왜곡이 생기기 때문에 그것을 지향하는 정치를 하면 안 되고, 그런 욕망이나 의도를 가진 사람은 정치를 해서는 절대 안 된다”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한시적으로 위임된 권한과 권력을 사유물인 양 착각한 나머지 여의도 정가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는 ‘명성 지향’, ‘명예 지향’의 정치를 단호히 배격하고 거부한다”라고 덧붙였다.
“일관된 목표·방향성 갖고 혁신경영”
차석용 LG생활건강 전 대표이사 부회장은 평사원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어 조직, 제품, 서비스 혁신 분야에서 남다른 역량을 발휘해 2022년 말 은퇴하기 전까지 무려 18년간이나 최고경영자(CEO)를 지냈다. 그는 “기업과 CEO의 명성은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자산으로서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소비자들의 명민한 감각과 반응으로 시시각각 정확하게 측정되는, 영예롭고도 두려운 양면적 존재”라고 정의했다. 따라서 그는 “기업과 CEO는 소비자를 ‘진정한 보스’로 모시고 기업의 증진을 위해 분명하고 일관된 목표와 방향성을 갖고 혁신경영에 몰두해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가 CEO로서 LG생활건강에서 강조한 기업과 제품의 명성 증진 전략은 정직, 진정성, 신뢰, 디테일(세심함과 정확함)이었다.
이종천 ‘다나딸기농장’ 대표(충남 논산시 부적면 마구평리)는 독보적인 반전의 귀농 성공신화를 쓴 ‘딸기왕’으로 농업계와 지역사회에서 명성이 높다. 이종천 대표는 “농민의 명성은 자신이 재배한 작물이 말해준다. 저에겐 풋풋하고 탐스러운 저 딸기가 그걸 상징한다. 온갖 정성, 노력, 풍상, 고초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농사의 묘미는 자연과 함께 인생을 즐기며 향긋한 결과물을 얻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딸기 특구’이자 딸기 수출 전진기지인 충남 논산의 성공한 농업인이자, 농림축산식품부가 지정·위촉한 농업 후계자를 교육하는 현장의 교수로 활동하며 농촌의 미래를 가꾸는 데 헌신하고 있다. 건설사 임원 출신인 그는 퇴직하고 시작한 통신 서비스 사업의 실패 후 무작정 귀농해 8년간 딸기 농사를 성공적으로 안착시켰다. 현재 비닐하우스 딸기 재배동 7개 동과 딸기 육묘장 2곳, 청년귀농장기교육장과 딸기현장실습교육장을 함께 운영하며 연 7억 원 이상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명성은 존재감 뚜렷한 불편함”
서울 용산의 ‘메이플라워/술술상점 용산’ 정미희 대표는 최근 SNS에서 매우 뜨거운 유명인사다. MZ세대 CEO로서 뛰어난 외적 매력을 바탕으로 최근 10년간 미식 탐방, 새벽시장 장보기, 술 시음과 술집 탐방, 여행과 골프 체험기 같은 일상적 콘텐츠를 페이스북에 게시해 인기를 끌면서 ‘SNS 셀럽’으로 떠올랐다. SNS를 한 시대의 문화로 보고 적극적으로 활용한 결과다. 정 대표는 지난해 미국 ‘뉴욕타임스’(NYT, 2022년 1월 20일 자)에 소개되기도 했다. 그는 “명성은 불편함도 크지만, ‘존재감 미약한 편안함’보다 ‘존재감 뚜렷한 불편함’이란 나의 취향을 충족시킨다. 사업보다 친교에 도움이 된다. 수상한 접근을 하는 ‘가짜 친구’도 많이 생기긴 하지만 일생을 함께할 친구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김형석 미래본병원 대표 원장(신경외과 전문의, 서울 잠실)은 ‘경추·요추 부위 내시경 수술(수술 경력 9000건)의 명인’이다. 김 원장은 “의사의 명성은 환자를 사랑으로 극진히 돌봤는지에 대한 자화상 같은 척도다. 그것은 오직 환자와 직결되며, 환자를 떼놓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의사는 신뢰와 사랑을 토대로 사력을 다해 환자를 보살펴야 한다. ‘좋은 의사’, ‘훌륭한 의사’, ‘명예로운 의사’의 출발점도 이와 같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울러 “의사가 명의(名醫)란 명성을 얻으려면 환자의 아픔을 깊이 헤아리고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는 ‘공감 능력’과 ‘좋은 인품’, 환자를 제때 제대로 치료하는 ‘뛰어난 실력’, 환자에 대한 ‘치료 의지와 자신감 표출’이 꼭 필요하다”라고 강조했다. 아주대 의대 출신으로 군의관 시절 선구적인 내시경술 수련과 아프간 의무부대 참전, 척추 전문 병원인 우리들병원 수련원장과 의무원장, 우리들의료재단 부이사장을 거쳤다. 그는 “높은 명성을 지닌 의사가 반드시 경계해야 할 것은 자만과 오만, 그리고 그것의 연쇄반응으로 나타나는 게으름과 나태함”이라고 지적했다.
“배우에게 명성은 삶의 기적과 고귀”
‘대장금 한류’의 주역 양미경 배우는 MBC 드라마 ‘대장금’에서 ‘한 상궁’ 역을 맡아 드라마가 국내는 물론 동남아·중동 지역까지 크게 히트하면서 스타로 부상했다. 양미경 배우는 “‘명성’은 삶의 기적이며 고귀(高貴) 그 자체다”라고 말했다. 그는 “글자에서 알 수 있듯이 명성(名聲)은 이름이 소리가 나서 형성되는 것이다. 그 소리는 선(善)함을 바탕으로 인고의 노력과 울림을 통해 영롱한 새벽이슬처럼 만들어진 것이기에 ‘명성은 고귀’하다고 말하는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40년간 연기를 통해 맑고 선한 성정, 곱고 단아한 이미지를 각인하는 독보적인 페르소나를 구축해온 명성과 관록에서 나온 통찰이다. 라마단(Ramadan) 기간에도 ‘대장금’을 시청할 정도로 경이적인 시청률(90%)을 나타낸 이란에서 2009년 5월 그를 ‘국빈’(國賓)으로 공식 초대했다. ‘대장금’이 2015년 홍콩에서 방영되었을 때 시민의 약 절반인 328만 명이 시청(최종회 최고 시청점유율 50%)해 홍콩을 방문할 때마다 엄청난 팬들이 몰렸다. 그는 “‘대장금’ 출연 당시 홀연히 찾아온 에너지처럼 새로운 차원의 명성을 느꼈다. 그것은 매우 강한, 삶에서 흔히 만날 수는 없는 특별한 에너지였다”라고 술회했다.
‘골프 여신’ 최나연 프로는 우리나라 ‘여성 골퍼 황금시대’를 이끈 주역이다. 그는 “세계적인 선수라는 명성을 안겨준 원동력은 전적으로 태생적 자질인 강력한 도전정신과 성취욕이다. 나는 일관성과 꾸준함을 가장 잘 보여준 프로 골퍼로 골프사에 기억되고 싶다”라고 말했다. 그는 ‘실력·매력·저력’을 완비한 골퍼로 ‘롱 아이언 샷의 명수’이자 ‘골프계 최고 얼짱 스타’로 불렸다. 2004년 11월 데뷔 후 18년간 미국여자골프(LPGA) 최고의 대회인 ‘US여자오픈’ 우승(2012)은 물론 LPGA 대회에서만 우승 9회, 준우승 12회, 3위 7회의 저력을 보여준 뒤 2022년 말 전격 은퇴했다. 그는 “‘우승’과 ‘준우승’의 차이는 집중력, 경험, 실력, 운(運)이란 4가지 요소가 경기 당일 어떻게 최적의 조합을 이뤄 경기력으로 구현되느냐에 달려 있다. 골프를 잘하려면 기본기에 충실하면서 4가지 요소를 최적으로 관리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아울러 “‘스타 골퍼’들이 자신의 명성을 유지하려면 겸손한 성품, 끊임없는 실력 증진 노력, 선수 자신에 대한 믿음이란 3가지를 반드시 갖춰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명성, 긴장시키고 겸손하게 만들어”
최상훈 ‘뉴욕타임스’ 서울지국장은 한국인 최초로 ‘퓰리처상’을 수상한 명성을 갖고 있다. 그는 “명성이란 사람을 끊임없이 긴장시키고 겸손하게 만드는 두려운 것이다. 내가 기자로서 유명해졌다는 것을 처음 느낀 순간은 이메일과 SNS를 통해 내가 쓴 기사에 대한 공감과 긍·부정의 평가가 쏟아지던 순간이었다. 이런 현상을 보면서 저널리스트로의 명성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두려움이 앞서 균형감각 유지에 대한 강박감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재 32년 차 기자로서 ‘AP통신’ 기자 시절인 1999년 9월 30일 영구적으로 묻힐 뻔한 ‘노근리 양민 학살 사건’을 특종 보도해 2000년 한국인 기자로는 처음으로 서구 언론계에서 ‘언론계 노벨상’으로 불리는 ‘퓰리처상’(탐사보도 부문)을 받아 명사가 되었다. 그는 “오늘날 나를 만든 힘은 강한 성취욕과 성실성이다. 노근리 사건의 취재는 어떤 피해자가 쓴 논픽션 실록의 출판이 당시의 참상을 구체적으로 담은 책 내용에 두려움을 느낀 출판사에 의해 거부되고, 한미 양국이 피해자들을 외면해 항의하는 과정에서 시작되었다”라고 밝혔다.
KBS 박지원 아나운서는 방송계에서 경쾌한 에너지와 톡톡 튀는 매력을 갖춘 ‘MZ세대 아이콘 뉴스앵커’로 통한다. 그는 “나에게 명성은 방송사에서 일을 더 열심히, 더 잘하게 하는 동기부여 요인이자 원동력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2019년 11월부터 공영방송 KBS의 ‘KBS 뉴스 9’(주말) 뉴스 진행을 맡고 있다. 박지원 아나운서는 “방송을 하는 사람에게는 누가 프로그램을 봐주고 인정해주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나한테도 그것이 일할 때 항상 열정을 잃지 않게 해주는 힘이 된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명사로 인정받을 만한 유능한 앵커가 되려면 첫째 기사를 보고 핵심을 파악하고 한 걸음 더 들어가 깊게 질문하는 능력, 둘째 명쾌하고 유려한 전달력, 셋째 진행 능력과 같은 퍼포먼스”라고 말했다.
BTS, “기본적인 것, 결과에 따른 신뢰”
한편 세계 음악 시장을 석권한 그룹 방탄소년단(BTS)과 ‘국민 여동생’으로 사랑을 한몸에 받은 피겨 스타 김연아는 언론 매체를 통해 명성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방탄소년단은 2019년 11월 미국 패션 잡지 ‘페이퍼’(PAPER)와의 화보 인터뷰에서 글로벌 스타로 유명해지면서 점점 높아진 명성에 뒤따르는 부담감을 고백했다. ‘멤버들은 명성이 주는 부담감이 큰가?’란 질문에 대해 “아니라곤 할 수 없지만, 저는 요즘 사명감으로 살고 있어요. ‘완벽해야 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진짜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들, 결과에 따라오는 신뢰를 기억하며 해야 할 일을 할 뿐이죠”(제이홉), “완벽에 가까운 공연을 보여줘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어요”(지민), “압박감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 또한 삶의 일부라고 생각해요”(슈가), “여전히 우리는 무대 위에서 정말 잘하고 싶어요”(리더 RM)라고 각각 답했다.
김연아는 명성의 유무에 대해 극명하게 대비되는 경험을 털어놓음으로써 운동선수가 갖는 명성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지 역설적으로 보여줬다. 그는 19세 때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2009년 세계선수권대회 우승 직후 인터뷰에서 “3년 전 (나에 대한) 관심이 없었을 때는 혼자 외롭게 싸웠다”라고 울먹였다. 그러나 좋은 성적을 거둬 명사가 된 후에는 “유명해지고 사람들이 알아보고 그러다 보니까 좀 불편한 건 피해갈 수 없는 것 같다. 그런 것 때문에 고민하다가도, ‘그래도 행복한 거지’라는 생각이 드는 것 같다”라고 소회를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