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 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를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 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대한민국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낭만’에 대해서 말하려고 했을 때, 1순위로 떠오르는 가수가 있다면 바로 ‘최백호’가 아닐까? 한국의 대표적인 낭만 가객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세월이 지난 지금도 그의 곡 ‘낭만에 대하여’는 여전히 대중에게 각인되고 있다. 요새도 애창곡으로 주저 없이 이 노래를 꼽는 중년들이 많을 것이다. 가수 본인 역시 이 곡을 자신의 인생곡으로 꼽았다.
당시 그는 설거지하는 아내를 보며 어딘가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을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리고 곡을 썼다고 한다. 그가 제일 처음으로 떠올린 가사가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였다. 우연히 김수현 작가도 이 가사 한 줄에 반해서 그의 노래를 KBS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삽입했는데, 그것이 선풍적인 인기의 촉매제가 됐다. 단 한 줄의 가사는 시작을 만들었고, 그 시작의 한 줄은 그에게 또 다른 인기를 안겨다줬다. 한마디로 낭만과 낭만의 만남이라고 해야 할까?
주인공의 놀이
얼마 전 오랜만에 친구와 소주를 한잔 마셨는데, 괴로운 일이 있던 친구가 2차를 가자며 졸랐다. 2차는 젊은 시절의 추억에 젖을 수 있는 음악이 흐르는 곳에서 맛있는 술을 음미하자고 했다. 술 대신 노래에 취하고 싶다는 친구는 “오늘의 기분은 낭만적인 노래로 잊고 싶어!”라고 말했다. 친구의 말 때문에 집에 가고 싶었던 마음을 고스란히 접고, 그날은 함께 근사한 음악을 듣고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날 편의점에서 우산을 사려다 그냥 비를 맞으며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흥얼거렸다. 고된 하루의 끝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 색소폰 소리로 달래고 있을 때, 새빨간 립스틱의 마담이 유혹적인 저음으로 “사장님 참 멋져요!”라고 속삭인다면 어떨까? 친구가 원하는 낭만은 그런 것일까? 겉은 구질구질해 보이는 50대 후반이어도 속은 아직도 멋있고 매력적인 사람이라고 느끼고 싶은.
낭만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일종의 방파제다. 일상은 종종 무의미하고, 삶은 식은 돼지 간처럼 퍽퍽하다. 하지만 누구나 삶을 잘 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서 가혹한 현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수단으로 낭만을 이용한다. 본인 주위를 둘러싼 것들을 감상적이고 이상적으로 파악할 때 경험하는 감미로운 분위기와 기분이 바로 ‘낭만’이다. 객관적 논리에서 조금 벗어나 느끼고 싶은 대로 자신과 세상을 이해하고, 자신을 매력적인 주인공으로 만들 때 낭만을 느끼게 된다.
낭만은 두 가지 특징을 가진다. 하나는 바로 ‘주인공 서사’다. 불만스러운 삶을 사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서사다. 물론 현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 타인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자기기만으로 현실감을 잃지 않을 만큼 부풀려진 삶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다. 자신을 영화 속 주인공으로 만들어 삶의 무료함을 달래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발적인 놀이’다. 모두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기를 원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그 빈틈을 채워주는 자신만의 놀이가 낭만이다. 자발적인 놀이는 재미와 더불어 자부심을 가져다준다. 모두에게 인정받을 필요 없는, 오롯이 자신을 위한 놀이다. 또한 호기심, 창의력 등을 바탕으로 공부하고 노력할수록 낭만의 재미는 더욱 커진다.
삶은 놀이가 필요하다. 니체는 놀이에 열중하는 진지함을 발견할 때 비로소 성숙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낭만과 같은 자발적인 놀이는 삶의 의미를 재발견하고, 더 나아가 조금 더 성숙한 어른으로 거듭날 기회를 우리에게 부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낭만에 열중한다는 건 그만큼 삶을 잘 가꾸고 있다는 증거일지도. 가끔은 잊었던 낭만을 즐길 줄 아는 어른이 되고 싶다.
낭만에 대하여 - 최백호
색소폰 연주자 에이스 캐논(Ace Cannon)의 ‘로라’(Laura)가 흘러나오는 다방에 자주 갔던 최백호의 경험이 담겨 있는 곡이다. 심금을 울리는 가사와 애절하고 허스키한 그의 목소리가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실제로 당시 35만 장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그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당시엔 40대 가수가 큰 히트를 기록하기 어려웠던 만큼 그 의미가 더욱 컸다. 사실 이 곡은 발매 당시엔 인기가 없었다. 하루에 평균 한 장도 안 팔리던 앨범이었는데, 작가 김수현의 KBS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 출연한 장용이 이 곡을 부르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후 최백호는 ‘낭만 전도사’란 별명이 생겼다.
신섭(83) 씨는 젊은 시절 약품을 옮기는 자전거 배달원으로 시작해 30대에 수십 개 회사를 운영하는 CEO로 발돋움했다. 뜻하지 않은 시련으로 몇 번의 좌절을 겪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재기했다. 은퇴 후 현재는 시니어 모델로 활동 중이다. 그를 만나 7전 8기의 여정과 더불어 포기하지 않는 삶의 가치와 의미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두산 등 대기업에서 본부장 및 대표이사를 두루 역임하고, 업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며 가는 곳마다 경영인으로 승승장구했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CEO, 지자체장과 같은 리더를 대상으로 리더십 및 동기 부여에 대해 강연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팬데믹이 닥쳤고, 그것은 하나의 기회이자 또 다른 전환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
“1년의 반은 해외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는데, 팬데믹 때문에 출국이 요원해졌어요. 처음엔 좀 갑갑했지만, 나중엔 방전한 것을 채우라고 준 기회로 여겼죠. 바빠서 못 읽었던 책들도 읽고, 구상했던 책을 출간하기 위해 틈틈이 글도 썼어요. 건강을 위해 사이클도 다시 시작했는데, 우연히 한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시니어 모델 공고를 봤어요. 밑져봐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그때부터 모델 아카데미에 다니기 시작했죠.”
젊은 시절 주위에서 모델을 해보라는 권유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형편이 어렵고 먹고사는 게 바빠서 차마 도전하지 못했던 모델의 꿈이 인생 후반전에 그렇게 찾아왔다.
“그간의 커리어와 다른 길이었지만 정말 열심히 했어요. 모델 아카데미 1등 출석을 한 번도 놓친 적 없을 만큼 열정을 다해서 임했죠. 모델 도전은 처음이라 서툰 게 많았고 힘들기도 했어요. 청년 시절에 운동을 꽤 많이 했던 터라 몸으로 하는 건 자신 있었는데, 모델 동작을 익히는 게 쉽지 않았어요.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다시금 이렇게 설렘을 맛볼 수 있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이었죠.”
첫 무대와 캐스팅
지난 5월 패션모델 선발대회 ‘2020 더룩오브더이어 클래식’(THE LOOK OF THE YEAR CLASSIC)에 시니어 모델로 처음 참여했다. 첫 무대에 선 기분은 어땠을까?
“오랜 세월 강연자로 무대에 섰기 때문에 첫 무대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참가자에 비해 덜했어요. 오히려 연습할 때가 더 힘들었지요. 워킹은 굉장히 근사해 보이지만, 직접 해보니 신체적으론 다소 불편한 걸음이에요. 숙달하려면 적어도 만 번 정도는 연습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더군요. 타고난 끼나 재능은 부족했기에 노력을 많이 했어요. 동작 하나라도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연습했어요. 다행히 본무대는 긴장하지 않고 무사히 마쳤는데, 운 좋게도 포토제닉상을 받았어요.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고, 모델로 나아가는 데 용기를 불어넣어준 상이에요”
한편 포토제닉상은 또 다른 기회로 이어지는 교두보가 됐다. 바로 전속모델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캐스팅을 제안한 알렉스 강 EMA 대표는 “모델에 대한 간절한 의지가 눈망울에서부터 느껴졌다. 7전 8기의 삶에서 마주친 시련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다시금 재기한 끈기와 인내의 여정이 시니어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고, 내면의 미를 가진 모델로서의 가능성을 보았다”라고 말했다.
자전거에서 고급 승용차로
모델 이전의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교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하지만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그는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당시 교사 봉급으론 동생들 뒷바라지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죠. 사업가로 자수성가해서 집안을 일으키고 싶었어요. 차근차근 시작하기 위해 서울의 약국에 약품을 배달하는 자전거 배달원으로 살았어요. 후발주자였던 탓에 도심의 약국으로는 물건을 납품할 수 없었고, 서울의 변두리로 많이 다녔죠. 지금이야 길이 워낙 좋지만, 그 당시엔 정말로 길이 험했어요. 약품 상자를 가득 싣고 무악재 고개 같은 곳을 넘어 다니는 건 상상 이상의 중노동이었죠.”
그는 고구마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부지기수였지만, 영어사전을 곁에 두고 늘 단어를 외웠다. 몇 달 지나자 고정 거래처도 생겼고, 짬이 날 때마다 영어 단어를 외운 덕분에 웬만한 도매상보다 약품을 더 해박하게 알 정도였다. 특유의 수완을 발휘해 차 한 대 분량의 물건을 대형 제약회사로부터 받아 일주일 안에 판 것이 도매상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처음 도매상을 할 때는 화물차를 임대해서 전국으로 다녔어요. 배달량이 많아진 이후로는 아예 화물차를 샀어요. 그것을 발판 삼아 나중엔 운수회사를 차렸죠. 운수회사와 더불어 주유소와 가스충전소도 운영했어요. 그렇게 건설, 중장비 등 관련 있는 사업체를 하나둘씩 늘려서, 30대 초반에 재벌 소리 들을 정도로 경영인으로 성공했죠. 20대 시절 기필코 10년 안에 자전거 대신 고급 승용차를 운전하겠다는 꿈을 세웠는데, 6년 만에 그 꿈을 이뤘어요.”
자살미수와 판매왕
그것도 잠시, 그가 자수성가로 쌓은 부와 명예는 한순간에 먼지처럼 전부 사라졌다. 그때 그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당시 제가 마약을 한다는 등의 음모성 투서부터 시작해 각종 루머와 더불어 세무사찰이 진행됐어요. 물론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사업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결과적으로 회사를 도산해야 했어요. 정말 하늘이 무너진 기분이었죠. 피땀과 눈물로 이룬 성취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면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만, 그때는 그 구멍조차 생각할 여력이 없었어요. 삶을 포기하려고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어요. 물론 가족이나 친척에 의해 미수로 그쳤지만요. 제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이었죠.”
당시 아내의 권유로 3년 반 정도를 기도원에서 지내면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실망 등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버리고,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을 버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몸이 불편한 장애인을 돌보는 것이 제 주요한 일과였는데, 봉사하면서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품었어요. 힘들다고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보람차게 살기 위한 워밍업을 그때 한 거죠. 술과 담배, 골프 같은 유흥도 그때 끊었고, 지금까지 안 하고 있어요.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이자 맹세였거든요. 그곳에서의 시간은 재기의 큰 밑거름이 됐어요.”
기도원에서 나와 미국 브리태니커 한국지사 외판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질은 고급 승용차 한 대 가격과 맞먹었다. 경영인 출신을 우대한다는 공고만 보고 지원했는데 바로 합격했다.
“외판원 이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었거든요. 아이들은 뿔뿔이 남의 하숙집에서 살고, 아내는 아프고, 가족이 한 집에 모이려면 돈을 벌어야 했죠. 그때 체면과 자존심을 다 내려놓았어요. 첫 고객은 회장 시절 운전기사였어요. 가서 무릎 꿇고 사달라고 부탁했죠. 저의 간절함을 보고 흔쾌히 사주더군요. 하지만 파는 일이 마냥 쉽지는 않았어요. CEO를 하는 친구들을 찾아갔는데 회사 앞에서 잡상인 취급받고 쫓겨나기도 했어요. 마지못해 산 친구에게는 다음 날 육필로 쓴 전보를 보냈어요. 정말 미안하고, 앞으로 성공하면 이 빚을 제대로 갚겠노라고. 우여곡절이 참 많았죠.”
그는 “노크를 하고 들어간 방에서 팔지 못하면 시신으로 나오겠다”라는 심정으로 그 일에 임했다. 받을 수 있는 수수료가 매출액의 16%에 불과했지만, 그는 첫 달 월급으로 단칸방을 얻을 만큼 성과를 올렸다. 덕분에 뿔뿔이 흩어졌던 식구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됐다. 그의 절박함과 진심을 눈여겨본 고객들은 그에게 다른 고객들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그는 54개국에서 판매 성적 1위라는 기록을 세웠고, 외판원 시절 글로벌 판매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비우는 삶
판매왕 이후 동아프라임, 한미약품, 일양약품 등 유수의 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경영인으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너무 혹사한 탓일까? 원인 모를 고열로 병원에 40일간 입원하며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기적같이 살아서 돌아온 후 택시 기사로 한동안 살았죠. 그 이후 삶이 더욱 소중해졌어요. 스스로 몸과 마음을 돌보면서 작게나마 선한 영향력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었어요. 당시 IMF 시절이라 스카우트 제의도 뜸했고,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아 지리에 밝았어요. 내비게이션도 없을 때였지만 서울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손님들과 좋은 얘기를 많이 나눴죠. 기사를 하면서 손님들로부터 좋은 기운을 얻은 덕분에 다시 재기할 수 있었고요.”
택시 기사, 외판원 등 자존심과 체면을 내려놓는 선택을 했을 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내와 가족의 묵묵한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우리 가족을 만난 것이에요. 사모님 소리 듣던 사람이 외판원, 택시 기사 아내로 변했는데도 한 번도 만류한 적이 없어요. 묵묵한 내조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택시 기사나 외판원을 할 때 자식들이 저를 창피해하지 않았어요. 그게 제일 고맙고 미안해요. 형편이 어려워서 아내가 면사포를 쓰지 못한 채 시집을 왔는데 올해 아내 생일날 자식들 덕분에 리마인드 웨딩을 할 수 있었어요. 애들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KO를 당하고 다시 일어나 경기에 임하는 권투선수처럼 고비마다 난관을 헤치고 나아갔다. 이러한 삶으로부터 그는 무엇을 배웠을까?
“시련은 위장된 축복일지도 몰라요. 뜨는 해는 언젠가 지는 법이에요. 해가 진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잖아요. 해가 사라지면 별이 가득한 밤을 볼 수 있죠. 그래서 낙심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해요. 건강한 사람에게도 마음의 고통이 있듯이, 알게 모르게 누구나 아픔과 상처가 있죠. 시련 속에 있을 때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요. 자신을 믿고 조금씩이라도 정진하는 자세.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 그게 필요해요.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면 더 멀리 가요.”
끝으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조언과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부둣가에 묶어만 두면 배는 영원히 출항하지 못해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삶이라는 항해에서 출항하지 않는 배로부터는 배울 수 있는 게 적어요. 출항을 시작했으면 목표를 세우고 끝까지 완수해야죠. 인생 2막의 목표는 비우는 삶이에요. 옷이나 책도 다 정리해서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했어요. 산문집과 마케팅 서적을 출간할 예정인데, 이 책의 수익도 다 기부하려고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간소하게 살고 싶어요. 모델이란 꿈을 이뤘지만, 명예에 목을 매고 싶지는 않아요. 무대에 선 그 순간을 즐기는 모델이 되고 싶어요.”
잠시나마 엿본 그의 삶은 마라토너를 닮았다. 그에게 시련은 마라톤의 사점(死點)과 같았다. 마라톤에서는 극한 고통이 따르는 사점을 넘어야 완주가 가능하다. 그는 시련을 극복하면서 자신만의 레이스를 완주했고, 더 나은 단계로 조금씩 나아갔다. 그것은 1등을 하겠다는 조바심이 아니라 완주를 목표로 한 간절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는 인간은 방황하는 한 노력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방향성 없는 방황은 애매한 재능만큼 괴롭다. 시련 속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자신을 믿고, 남들이 비웃을지언정 자신만의 방향성을 잃지 않은 덕분이었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는 힘은 자신의 소신을 잃지 않는 뚝심과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다. 새로운 삶의 출발선에 놓인 그가 새로운 레이스를 멋지게 완주하기를 응원하며 마친다.
인생이 하루살이와 비슷하다지만, 하루라도 온전한 기쁨으로 두근거리며 살기가 쉽지 않다. 나이 들수록 생활도 욕망도 가벼워지면 좋겠지만, 실상은 달라 정반대로 흘러가는 경우가 흔하다. 이럴 때 들솟는 게 변화에의 욕구이며, 시골살이를 하나의 활로로 모색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광주광역시에서 학원 강사로 살았던 강승호(60, ‘지리산과 하나 되기 농원’)의 귀농 역시 활로 찾기의 방편으로 결행되었다.
강승호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전남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 마을로 귀농했다. 귀농의 직접적인 동기는 건강 문제였다고 한다. 그는 대입학원의 유능한 수학강사였다. 입시학원 강사란 피 말리는 직업이다. 긴장과 스트레스를 혹처럼 붙이고 산다. 그럼에도 과속질주를 습으로 삼았고, 마침내 몸에 이상이 온 것이다.
“건강상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동안 주력한 건 등산이었다. 백두대간 산행에 몰두하기도 했다. 산이 주는 좋은 에너지와 자연 생태의 매력에 빠져들게 되더라. 긍정적인 가치를 산에서 발견한 것이다. 그러자 아예 산에서 살고 싶더군. 결국 아내의 동의를 얻어 지리산으로 들어왔다.”
처음의 구상은 간결했다. 조용한 산자락에 작은 집 하나 짓고 텃밭이나 일구며 한가하게 살 계획이었으니까. 일에 덜미 잡히지 않아도 좋을, 덜 벌고 덜 소비하는 산골 생활로 몸은 물론 마음까지 북돋아 진정한 만족을 누리고 싶었다. 단순 소박한 삶이 주는 행복을 원했던 셈이다. 그러나 이게 뜻대로 되지 않았다. 딱히 일 없이 술렁술렁 텃밭이나 가꾸는 생활은 그의 적성에 부합하지 않았다. 단순한 생활이 어디 쉽던가. 채우기보다 어려운 게 비우기다. 일벌레로 살기보다 어려운 게 별 할 일 없이 빈둥거리기다. 게다가 강승호는 일을 거침없이 벌이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다. 일이 없으면 무슨 재미? 적막한 산촌에 들어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독백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테다.
강승호는 일을 도모하기로 작심하고 약초 농사에 뛰어들었다. 한결 야심만만하게 덤벼든 건 토종벌 농사였다. 하지만 보기 좋게 나가떨어졌다. 치사율 90%에 달하는 전염병인 ‘낭충봉아부패병’의 기습으로 벌들이 대부분 괴사했던 것. 이렇게 초장부터 확실하게 실패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들었던 모양이다. 그래 밤잠을 설치며 궁리하고 연구해 찾은 대안이 펜션 운영이었다. 그는 자신이 보유한 최상의 무기에 속할 추진력을 발동했다. 초봄이면 와글와글 피어나는 산수유 노랑꽃 화신(花信)으로 세상의 겨울잠을 깨우는 산수유 마을 중에서도 가장 높고 수려한 언덕배기에 위치한 터를 사들여 펜션을 짓고 이사했다.
“펜션에 어울릴 땅을 마련하는 일부터 쉽지 않았다. 여기저기 뒤져 마음에 드는 터를 발견하고 지주를 찾아 매입한 뒤엔 건축 허가 문제를 해결하느라 뛰어다닌 곳이 많았다. 길을 내기 위해 마을 주민들의 동의서를 받아낸다든가, 처리해야 할 일이 많더라고.”
귀농해서 민박이나 펜션을 차리는 이들이 많지만 실패 사례가 흔하다. 당신의 펜션은 어떤가? 기대치가 있었을 텐데.
“순조롭게 돌아간다. 입지의 자연환경이 좋은 덕분이다. 보다시피 산 중턱에 자리해 조망부터 뛰어나다. 지리산의 풍치를 한눈에 만끽할 수 있는 자리로 여기보다 나은 곳이 없다는 얘기를 흔히 듣거든. 미디어에도 수차례 소개되면서 꽤 알려졌다.”
펜션 투숙객에게 인생을 배워
펜션의 성공 관건은 입지 여건에 달려 있다. 강승호는 썩 이상적인 자리를 잡았다. 터전의 저 아래로 높고 낮은 산들이 펼쳐지고, 골짜기로는 농가들이 올망졸망 들어앉아 정겹다. 그는 조경에도 공을 들였다. 널찍한 잔디 뜰과 정원수를 적절히 조합해 안락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이 집에서만 볼 수 있는 흥미로운 사물도 있다. 하나는 벼락을 맞고 무 토막처럼 통째로 절묘하게 갈라진 벼락바위. 산 너머 어느 집에서 구해왔다는 이 바위 두 덩어리를 그는 열린 문처럼 배치해 펜션의 상징물로 삼았다. 지하수와 약수, 계곡물 세 가지 식수를 세 개의 수도꼭지를 통해 동시에 비교하며 맛볼 수 있는 샘터도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강승호의 재주와 수완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어떻게든 펜션 손님들의 흥미와 호감을 사고 싶었던 것이다.
고객의 뒤치다꺼리로 피곤해지기 쉬운 게 숙박업이다. 강승호가 이를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관점을 달리해 접근했다. 손님들과 요령껏 어울려 산중 생활의 무료감을 달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한 거다.
“도시와 달라 시골에선 사람들과 교유할 기회가 드물다. 고립감을 느낄 수 있다. 투숙객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귀농 이야기, 지리산 이야기 등을 허심탄회하게 나눌 수 있는 숙박업은 그래서 매력적이다. 단지 수익 목적으로만 차린 펜션이 아니라는 얘기다.”
민박집을 하다 평생의 벗을 얻는 경우도 있더라.
“손님들의 요구와 비위를 맞추기가 쉽지는 않다. 주말 밤마다 술 시중꾼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웃음) 그러나 포용해서 함께 어울리다 보면 누구나 마음을 연다. 감동적인 사연을 털어놓기도 한다. 이럴 때면 나는 인생을 배운다.”
이를테면 어떤 사연을?
“꽉 찬 예약으로 공실이 없던 어느 날, 어떤 이가 방을 하나 달라고 간청했다. 그래 예약 손님의 양해를 구해 방을 마련해줬다. 알고 보니 가슴 뭉클한 사연이 있더군. 그날이 아내의 환갑날이라며 ‘오늘을 위해 2년 전부터 색소폰을 배웠다’는 게 아닌가. 색소폰을 연주해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던 거다. 그날 밤 그는 가수 하수영의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연주했다. 잊지 못할 풍경이었다.”
그토록 뜨거운 부부애라니! 수십 년을 함께 살아도 부부 사이에 빙하가 흐를 수 있다. 성공적인 귀농을 위해서는 부부간의 유대가 가장 중요하다고들 한다.
“무조건 아내 말을 따르면 탈 날 게 없다. 남자보다 매사에 현명한 게 여자라는 게 내 생각이다.”
강승호는 지역에서 잘 알려진 귀농인이다. 이름 있는 기관이 주는 상도 받았다. 유기농으로 지은 산수유를 가공해 현대백화점 명인명촌관에 납품도 한다. 물정도 기술도 모르는 초심자로 귀농했지만 거둔 성과가 한둘이 아니다. 아내 이경영(54)의 조력이 있어 가능했던 성적이다. 처음 귀농 제안을 했을 때 아내는 망설였다. 그러나 긴 고민 없이 동의하더란다. ‘그토록 원하는 귀농이라면 당신 뜻에 따르겠어요!’ 그 한마디 던지며.
‘분산 전략’을 구사하다
강승호에겐 할 일이 많고 많다. 벌여놓은 일이 여러 개라 몸이 닳도록 뛰어야 한다. 펜션에 쏟아부은 땀과 정성도 수북할 테지만, 갖가지 약용작물을 기르고, 찻집을 운영하고, 산수유마을학교를 이끌며, 산촌 유학을 테마로 한 마을사업까지 주도한다. 일복이 터졌다. 열심히 몸 놀려 일하는 것만이 유일한 비법이라는 듯 동으로 뛰고 서로 달린다. 여하튼 그의 귀농은 탕탕 순항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만은 않단다.
“시행착오가 적지 않았다. 순탄하게 흘러온 게 아니다. 농산물을 생산해 그대로 파는 1차 농업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가공 판매와 체험 교육까지 접목한 6차 농업을 지향해야 한다. 이게 만만한 일이겠나? 가공 농가가 타산을 맞출 확률은 10% 미만이다.”
귀농 전에 농업 교육은 받았나?
“아니다. 귀농을 하고 나서야 사전 교육의 중요성을 깨달았거든. 뒤늦게 부지런히 기관을 쫓아다니며 배웠다. 숲 해설사, 문화 해설사 등 자격증도 여섯 가지나 땄다. 이렇게 나름대로 분발해 자리를 잡은 편이지만 경제적 애환도 있었다. 그로 인해 아내와 자식들을 고생시켰다. 이건 귀농 이후 내 삶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이다.”
일의 규모와 방향을 과도하게 설정한 걸까?
“농촌에 와서 안타까운 건 주민들의 열악한 현실이었다. 나만 편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했다. 뭔가 작으나마 주민들에게도 도움 되는 일을 하는 게 좋다고 판단한 거다. 귀촌이나 귀농을 해서 이웃들이야 어떻든 나만 즐겁게 살면 된다는 생각, 살다가 정 싫으면 떠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들이 많지만 이는 무모하다. 외지인들이 들락날락하는 바람에 더 힘들어지는 건 원주민 농부들일 뿐이다.”
똑똑하고 이타적인 귀농인이 나서서 마을 공동사업을 추진하더라도 벽에 부닥쳐 좌초하는 사례가 많다. 아예 나서지 않는 게 상책이라 조언하는 이들도 있더군.
“그 대목이 참 어렵다. 원주민들의 동참을 유도하기가 만만치 않아서다. 합리성과 효용성이 명백한 경우에도 색안경부터 쓰는 이들이 있다. 나는 현재 산촌 유학 관련 사회적 기업을 추진하고 있다. 산림청으로부터 이미 승인도 받았다. 그러나 부지 마련이 어려운 상황이다. 일부 주민들이 반대해서지. 귀농인이 선의를 가지고 앞장서도 외지인에 대한 본능적인 불신이랄까, 원주민들에겐 그런 게 있어 난처하다. 차라리 나서지 않는 게 현명한 처신이라는 견해는 어쩌면 탁견이다.”
귀농을 고려하는 사람들 중엔 ‘아주 작은 농사’로 ‘소확행’을 누리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소규모 농사로 최소한의 생활비를 벌어 쓸 수 있을까?
“흠, 가능하다. 작물을 길러 가족이 먹고 남는 걸 수시로 로컬 매장에 가져가 손수 팔면 된다. SNS를 통한 직거래도 유망하다. 이 문제엔 관이 나서야 한다. 소규모 귀농 농가 지원을 위한 연구를 서둘러야 한다.”
강승호는 10여 종의 명함을 지니고 산다. 햐, 그는 문어발식 농업의 선수? 그게 아니란다. 분산 전략이 아니고선 가망성이 낮아 다종다양한 일을 펼쳤다. 지독한 승부욕이 그를 몰아치는 것 같다. 그런데 뜻밖에도 목표는 조신하다. “결론은 비우고 살기다!” 무욕으로 진정한 행복을 맛보겠다는 얘기다.
강승호 씨가 주는 귀촌 Tip
•배우자의 동의를 얻어 함께 귀농하지 않으면 반드시 실패한다.
•이민보다 정착하기 ㅁ더 힘든 게 귀농임을 명심하자.
•원주민과의 갈등이나 마찰을 극구 피하라. 먼저 배려하고 이해하는 게 상책이다.
•작물의 트렌드를 정확하게 읽자.
•종묘상이나 묘목 상인의 얄팍한 상술에 현혹되지 마라.
•농업기관이 주관하는 농업 교육이나 영농 상담 창구를 적극 활용하자.
드문드문 작은 마을을 몇 번 지나고 앞뒤가 온통 논밭인 가을 들판을 지난다. 간간이 길가엔 노송이 세월 속에 서 있고, 그 산하에서 나고 자란 추사 김정희 생가, 윤봉길 의사 유적지, 수덕사 가는 길 표지판이 군데군데 보이기도 한다. 한적하기만 한 너른 들길을 휘돌다 보면 간간이 사과밭이 나타난다. 지금 예산사과농장의 와이너리에서는 사과와인이 숙성되고 있다.
예산사과와인으로 알려진 은성농장으로 들어가는 길은 입구에서부터 기다란 포도밭 길을 달리는 유럽 다큐 영화 같은 느낌을 잠깐 맛보게 한다. 포도와인과는 확연히 다른 맛의 은은하고 상큼한 사과와인을 만들어내는 사과 와이너리. 푸릇푸릇한 연둣빛 사과와 이미 붉은빛으로 감싼 큼지막한 사과가 과수원에 줄지어 선 나무에서 과육의 풍부함을 내뿜는다.
사과와 블루베리로 와인과 소주를 만드는 양조장, 사과농원의 커다란 지하에는 와이너리가 자리 잡았고, 건물 안에는 와이너리 투어를 위한 준비가 잘 갖추어져 있다. 1층에는 카페 레스토랑과 교육 세미나실, 체험장과 전시실, 위층에는 단체 손님들이 이용 가능한 게스트하우스를 갖춘 이른바 유럽 스타일 와이너리다. 그 앞으로 넓게 펼쳐진 사과 과수원은 약 3ha라고 한다. 기계가 드나들며 사과농사를 돕고, 햇빛을 많이 받아 일조량을 충족해야 해서 밭고랑이 제법 넓은데 이 또한 유럽식이라고 한다.
“브랜디의 경우 원료가 과일이고 포도인데, 이곳은 사과니까 이건 사과로 만든 증류주입니다.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에서는 사과발효주를 증류해서 칼바도스를 만들어냈죠. 엄밀히 말하면 칼바도스를 만드는 곳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아주 오래전 읽은 레마르크의 소설 ‘개선문’에 언급되어 회자되었던 ‘칼바도스’(Calvados)를 여기서 듣는다. 소설 속 외과의사 라빅과 무명 여배우 조앙 마두가 서로를 마주 보면서도 고독하게 마시던 술 칼바도스, 예산의 와이너리에 와서 책을 읽었던 고등학교 시절을 단번에 떠올린다. 와인 갤러리 앞에서 소환되는 그 시절 풍경과 함께했던 사람들, 그리고 따사롭던 그 시간 속으로 데려다주다니, 오늘 하루가 그래서 또 행복하다.
문이 열리자마자 술 내음이 진하게 풍겨온다. 발효실, 증류실, 숙성 창고… 와이너리 입구에서부터 여러 군데의 작업 공간을 거치면서 사과와인의 개발 과정을 차근차근 설명해준 김유근 매니저가 덧붙인다.
“작년에는 백종원 씨와 협업해서 추사백이라는 소주를 만들었습니다. 제품의 투명함과 백종원 씨의 백, 그리고 ‘가을 추(秋), 이야기 사(史)’. 착즙한 사과를 가당 후 30일 동안 발효시켜 감압 방식 증류기로 저온 증류한 것입니다. 사과 향이 상큼하게 살아 있고 활용도도 높아 좋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예산은 명필 서화가 추사 김정희가 나고 자란 곳이며, 가을 사과의 함축적인 의미도 포함하여 ‘추사’라는 와인 이름이 세상에 나온 거죠.”
낯선 이름의 외국 브랜드가 난무하는 틈에서 예산사과와인의 자부심이 크다. 특히 코로나19 이전 방문자 중엔 외국인의 비율이 높았다고 한다. 주말이면 주한 미군 가족이나 외국인 여행자들이 이곳을 찾은 것은 한국에서 한국만의 와인을 맛보고 싶은 단순하고도 당연한 이유에서였다. 진정한 소믈리에라면 이미 알려진 맛의 유명 브랜드보다는 한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와인 맛의 독창성을 찾는 것이 지당하다. 이 땅에서 깔끔하게 증류 발효해낸 국내산 와인 맛을 우리는 잘 아는지.
숙성실에서 가득 익어가는 오크통 양면에는 주종, 용량, 날짜 외에도 각각의 특징을 적은 표시가 붙어 있다. 그중에는 개인적인 이름으로 숙성되고 있는 오크통도 여럿 눈에 들어온다. 요즘 요식업계의 대표주자 백종원 씨의 ‘맛있는 술이 익어갑니다. 완벽한 사과술을 기대하면서’라고 쓰인 통이 있고, 만화가 허영만 씨의 귀여운 그림과 함께 ‘3년 후 이 술통은 내 꺼’라고 쓰인 오크통도 보인다.
1층 와인 바에서 분주히 일하던 정제민(54) 대표를 만났다.
“와이너리를 시작한 지는 10년 되었습니다. 캐나다엔 대학교에 양조학과가 있어요. 거기서 12년 살면서 와인 공부도 하고 돌아와 10년 정도 술 제조업을 해보니 인식의 변화가 필요한 걸 느껴요. 해외 살 때 와인 만드는 곳에 돌아다녀 보면 와이너리는 술 공장이 아니고 관광산업입니다.”
이야기하는 중에도 업무상 전화나 방문 문의 전화를 받느라 바쁘다. 그러면서 요즘 변화해가는 추세를 이야기해준다.
“우리나라도 원료와 지역 중심의 술 생산으로 바뀌어가고 있어요. 지역사회와 연계해 스토리텔링이 있는 술 소비를 하자, 그런 추세잖아요. 그래서 뭘 먹어도 이야깃거리가 있는 것으로 먹으려 하죠. 왜냐하면 자기가 먹고 마신 것들을 SNS에 올려야 하니까요. 그런 변화가 생긴 거죠. 지금 전통주 취급하는 곳에서는 사과로 만든 증류주가 젊은 사람들에게 인기입니다. 싼 소주에 길들여졌다가 이처럼 깔끔하고 상큼한 맛, 젊은 친구들이 가는 주점에서 많이 찾고 있죠.”
조금씩 따라주는 와인을 맛본다는 핑계로 나도 모르게 다 마셔버렸다. 예산사과와인의 시그니처라 할 수 있는 추사애플와인, 그리고 추사백. 와인 맛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이스와인의 서늘한 짜릿함에, 그리고 토닉워터를 넣은 부드럽고 시원한 애플토닉 한 모금으로 나른한 오후에 기분이 산뜻해진다.
오래전 캐나다 토론토에서 나이아가라 폭포 쪽으로 달리던 중 유명한 와이너리에 들른 적이 있다. 그때 처음 아이스와인이란 걸 맛보았다. 와인에 길들여지지 않은 사람은 처음부터 와인이 입안에 착 감기지는 않는다. 그런데 아이스와인은 첫 모금부터 맛과 향, 입안의 찬 느낌, 그리고 적당한 취기가 기분 좋았다. 알코올 12%에 예산사과 83%의 멋스럽게 길쭉한 사과와인 한 병 사온 것이 우리 집 냉장고 안에 있다는 것 또한 괜히 기분 좋다.
아이스와인은 차가운 와인이란 말이 아니라 겨울 무렵 겨울바람 맞은 언 포도를 따서 해동 전에 만든 와인으로, 풍미와 당도가 높다. 그러기에 우리나라는 아이스와인이 아닌 아이스와인 스타일이라고 한다. 아이스와인과 아이스와인 스타일로 나눌 수 있는데, 한국은 기후적으로 겨울에 언 포도를 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 아이스와인 제조 조건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원료 처리 방법은 다르지만 제조 공정은 똑같은 것이 아이스와인 스타일이다.
“아이스와인은 국내에도 이미 있었죠. 한국에서 나는 과일로 만드는 술 시장이 크진 않습니다. 게다가 수입하는 와인은 늘어나는데 일반 농가는 영세한 상황이죠. 영동, 영천, 문경 등 전국의 과일로 술을 만드는데 원료의 한계가 있어요. 우리나라에선 복분자주가 가장 많고, 산머루, 포도 순이지만 외국에선 포도가 압도적이죠.”
한국와인생산협회 회장이기도 한 정제민 대표는 국내 와인 시장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는 대한민국 술 품평회에서 대상을 받은 사과와인 ‘추사’를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세계적 품질 평가 기관인 ‘몽드 셀렉션’에서는 동메달을 따내기도 했다. 사과를 발효한 한국 와인으로서 자긍심이 크다.
“와인은 문화상품입니다. 참이슬이냐 처음처럼이냐, 어느 대기업 맥주가 좋으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요즘은 전통주 바람도 불고 있고 마시는 사람들이 술의 스토리에 관심이 많죠. 와이너리 투어도 그래서 필요해요. 시원하게 다 보여주고, 직접 체험도 하며 그렇게 인연을 만들어가는 것. 또한 이런 건 히스토리가 쌓이고 여러 대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대를 이어가는 가업이어야 합니다. 우리 아들도 캐나다에서 와인 공부를 하고 있어요.”
요즘 각 지역별로 로컬 푸드를 알리기 위한 노력이 두드러진다. 예산사과와인은 로컬 푸드이면서 이 땅에서 만들어낸 와인이기도 하다. 풍부한 일조량과 천혜의 기온 덕에 사과 맛이 아주 좋은 청정 예산의 풍미 그윽한 추사애플와인. 대를 이어 축적될 경험을 바탕으로 더욱 익어갈 와인 맛이 기대된다. 예산사과와인이라는 지역성을 강조한 이름만 들어도 저절로 떠올려지는 술이 대대로 뿌리내릴 날도 머지않은 듯하다.
나이가 들면 신체의 여러 기관에 이상이 생기는데, 청각기관 역시 그렇다. 노년에 가까워질수록 작은 소리를 듣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다가, 나중에는 큰 소리도 또렷하게 듣기 어려워지는 현상을 겪는다. 청력 저하를 노화로 인한 자연적 현상으로 내버려 두면, 우울증과 같은 정신 질환이 발생할 수 있고 심하게는 치매로 이어지거나 치료 시기를 놓칠 수 있어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국민건강영양평가조사에 따르면 70대의 66%가 양쪽 귀에 경도 이상의 난청을 갖고 있으며, 그중 26%는 보청기와 인공와우가 필요한 중등도 이상의 난청이다. 난청 환자의 대부분은 ‘노인성 난청’을 앓고 있다.
노화로 인한 ‘노인성 난청’, 방치하면 치매로 이어져
대표적인 노인성 질환인 ‘노인성 난청’은 노화에 의한 고막, 달팽이관 등의 청각기관의 퇴행성 변화에 의한 것으로, 청력이 지속해서 저하하는 양상을 보인다. 대개 고음역부터 서서히 청력 저하가 진행되어 시간이 갈수록 저음역까지 확대된다. 한쪽 또는 양쪽 귀가 먹먹해지거나 이명이 생기기도 한다.
노인성 난청은 서서히 진행되는 만큼, 환자 본인이 질병을 인식하기 어렵고, 난청임을 알게 되더라도 단순한 노화로 여겨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치료 시기를 놓치면 의사소통이 어려워져 소외감과 우울증을 초래하고, 심한 경우 치매까지 앓게 된다. 노화로 인한 인지능력 저하를 막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외부 자극이 대뇌로 전달돼야 하는데, 난청으로 인해 청각 정보를 통한 자극이 단절된다.
실제로 2011년 발표된 미국 존스홉킨스의대의 연구에 따르면 정상 청력과 비교해 경도·중도·고도 난청일 때 치매 발병률은 각각 1.89배, 3배, 4.94배나 높았다.
이명 동반한 ‘돌발성 난청’, 뇌질환 신호일 수도
갑작스러운 이명과 함께 소리가 잘 안 들린다면, 치명적 뇌질환인 뇌종양의 징조일 수 있다. 귀에서 ‘삐~’하는 소리가 들리는 이명을 동반한 난청 증세가 갑자기 찾아온다면 ‘돌발성 난청’을 의심해야 한다. 돌발성 난청은 건강했던 귀가 갑자기 청력 저하 현상을 겪는 질환이다. 발병 원인이 분명하지 않고 발병 연령대가 다양하다. 중년층에서 가장 많이 발병된다.
서울시보라매병원 이비인후과 김영호 교수 연구에 따르면, 돌발성 난청 환자 535명의 뇌 MRI 영상을 분석한 결과 3.4%(18명)에서 뇌종양이 발견됐다. 이들은 난청 외에 뇌종양을 의심할만한 증상이 확인되지 않아 단순 이명으로 착각하기 쉽고, 결국 뇌종양이 치료되지 않고 악화할 위험이 크다. 김 교수는 “돌발성 난청이 나타날 때는 바로 이비인후과를 방문해 면밀한 검사를 받아보는 게 좋다”고 당부했다.
조기 진단과 생활습관 개선을 통한 예방이 중요
노인성 난청, 돌발성 난청 이외에도 소음으로 인한 ‘소음성 난청’, 고막 안쪽 중이에 염증이 생기는 ‘중이염’ 등이 청력저하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원인에 따른 적절한 대처와 적절한 시기를 놓치면 회복될 가능성이 급격히 떨어진다. 청력저하 자가진단을 통해 증상이 의심된다면 신속히 진료를 받아볼 필요가 있다.
청력과 귀 건강을 지키고 난청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청각에 좋은 음식들은 대체로 심장 건강에 좋은 식단이다. 먼저 브로콜리, 시금치 등의 녹황색 채소가 좋다. 녹황색 채소에 들어있는 엽산은 세로토닌을 합성하는 데 사용되는 영양소인데, 2009년 미국 이비인후과학회 발표에 따르면, 엽산 수치가 높은 60대 이상의 남성에게서 난청 위험이 약 20% 감소하는 효과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한 연어, 고등어, 삼치 등의 생선도 좋다. 오메가3 지방산은 노화에 따른 청력 손실을 감소시키는 효과가 있어, 일주일에 두 번 정도 이런 생선들을 섭취하면 청력에 도움이 된다. 또 호두, 땅콩 등의 견과류에는 청신경의 활동을 돕고 노화 방지에 효과적인 아연 성분이 풍부하게 함유돼 귀 건강의 유지를 돕는다.
또 난청을 예방하려면 생활습관을 개선해야 한다. 큰 소음과 압력을 피해야 하며 이어폰, 헤드셋을 이용할 때는 낮은 음량으로 단기간 사용을 권한다. 전체 볼륨의 60% 미만으로 줄여서 듣고, 50분마다 10~15분 정도 귀가 휴식을 취하도록 해야 한다. 소음이 큰 노래방이나 클럽 이용도 자제하는 게 좋다. 또 혈액순환을 방해하는 음주, 흡연, 기름지거나 짠 음식은 청력에 안 좋은 영향을 주기 때문에 술과 담배를 피하고 건강한 식습관을 들여야 한다.
명절이 기다려지는 이유 중 하나는 평소에 자주 먹지 못하는 맛있는 ‘명절 음식’에 대한 기대다. 전과 갈비, 잡채 같은 명절 음식은 하나같이 기름지고 맛있다. 오랜만에 만난 친인척들과 고칼로리 명절 음식에 술 한 잔까지 곁들이면 완벽한 명절 풍경이 완성된다. 명절이 끝나고 나면 ‘급찐살’(급하게 찐 살)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급하게 찐 살은 급하게 빠져야 한다는 의미의 용어 ‘급찐급빠’가 명절 이후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하고 있다. 그런데 ‘급찐급빠’는 근거 없는 단순한 유행어가 아닌 과학적으로 유효한 용어다. 갑자기 찐 살은 지방이 아닌 ‘글리코겐’이 일시적으로 증가한 것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글리코겐은 근육을 움직일 때 필요한 에너지원으로, 짧은 기간 동안 평소보다 더 많은 탄수화물을 섭취하면 쓰고 남은 에너지가 글리코겐 형태로 흡수된다. 이 글리코겐은 분해 속도가 빨라 빼기가 쉽다. 하지만 쌓인 채로 2주 정도가 지나면 체지방으로 넘어간다. 즉 2주 간의 골드타임에 집중적으로 글리코겐을 소비해야 쉽게 체중 감량에 성공할 수 있다.
유안정형외과 비만항노화클리닉 안지현 원장은 “단기간에 갑자기 2~3kg이 늘었다면 글리코겐이 수분을 많이 끌어당겨 몸무게가 늘어났을 가능성이 높다”며 “같은 운동을 해도 글리코겐은 지방보다 7배 빠르게 뺄 수 있어, 글리코겐이 지방으로 바뀌기까지 걸리는 2주 동안 빼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급찐살을 뺄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방법은 식단조절과 운동으로 나뉜다. 우선 식단으로는 명절 연휴 동안 쌓인 인슐린을 리셋(초기화)할 수 있는 ‘리셋식단’을 권한다. 안 원장은 “고칼로리 탄수화물을 섭취하면 몸 안의 인슐린이 크게 증가하는데, 이 인슐린은 지방분해를 방해하기 때문에 이를 리셋하는 것이 관건”이라며 다음과 같은 식단을 추천한다.
일주일 식단에서 첫 이틀은 단백질만 섭취한다. 단백질 쉐이크를 아침, 점심, 저녁으로 먹어도 좋고, 단백질 쉐이크가 싫다면 달걀, 두부, 샐러드 등 단백질 위주로 짠 식단으로 이틀을 보낸다. 나머지 5일은 밥, 빵, 면과 같은 탄수화물, 포도당을 50g 이하로 최소화해 섭취하고 단백질과 좋은 지방 위주로 구성된 음식을 섭취한다. 이 일주일 식단을 2주 반복하면, 부족한 에너지를 채우기 위해 체내에 저장된 글리코겐이 분해되고 갑자기 찐 몸무게를 줄일 수 있다.
이어 안 원장은 “며칠 많이 먹었다고 하루나 이틀 동안 단식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있는데, 오히려 요요를 유발할 가능성이 크다”며 “리셋식단으로 건강하게 몸을 되돌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글리코겐은 무리한 고강도 운동이 아닌, 30분 안팎의 중강도 유산소 운동만으로도 분해할 수 있다. 가까운 거리를 걸어서 이동하거나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하는 등 일상 속에서 신체활동을 늘리는 것이 좋은 방법이다.
정해진 시간 동안 집에서 간편하게 유산소 운동을 하고자 하는 시니어들을 위해 준비물이나 도구가 필요 없는 ‘홈트레이닝’ 운동법 세 가지를 소개한다.
가장 먼저 소개할 운동법은 구독자 296만 명을 보유한 유튜버 ‘땅끄부부’의 ‘칼로리 소모 폭탄’ 시리즈다. 고강도 운동으로 칼로리 소모가 높으면서도 무릎을 비롯한 관절 부담을 줄이는 동작들을 엄선했다. 신나는 배경음악과 땅끄부부의 동작 설명으로 지루하지 않게 운동을 이어갈 수 있다.
다음은 구독자가 26만 명인 유튜버 ‘빵느’의 ‘기초체력 기르는 20분 전신 유산소 운동’이다. 스쿼트나 런지, 플랭크 같은 어려운 근력운동을 제외한 간단한 유산소 동작으로 구성해 무리없이 운동을 하면서도, 기초체력을 기르고 칼로리를 소모할 수 있는 운동법이다.
마지막으로 구독자가 7만 명인 시니어 유튜버 ‘먹고빼고 EATFIT’의 ‘관절에 무리 안 가는 유산소운동’이다.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는 동작들로 무릎이 좋지 않은 시니어들이 따라하기에 좋다. 특히 중장년이 관심이 많은 뱃살을 집중적으로 공략해 뱃살도 효과적으로 뺄 수 있는 운동법이다.
1991년 한국 여성 최초로 히말라야 동계 등정에 성공했으며, 이후 가셔브룸 2봉을 포함한 여러 고봉을 등정했다. 베테랑 산악인 박경이(57)는 교사, 국제 산악스키 심판, 산악전문지 편집장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했고, 현재는 국립산악박물관 학예연구실장으로 활동 중이다. 산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는 그녀를 만나서, 그간의 여정과 더불어 알피니즘(Alpinism)의 가치와 매력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그녀는 1985년 대학교 산악부를 시작으로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산악인으로 살아왔다. 최근엔 그간의 세월을 정리하며 책 ‘영혼을 품다, 히말라야’를 출간했다.
“산악인으로 살았던 시간을 글로 정리하고 싶었다. 직접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고산 등반에 도전했던 동료에 관한 기록, 고산 등반의 의미와 산에서의 죽음의 가치에 대해 논픽션처럼 담담하게 풀어내고 싶었다. 더불어 이 책이 이제는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고산 트레킹에 관한 정보와 지식을 전달하는 유용한 지침서가 되기를 바랐다. 마스크 없이 트레킹하는 날이 얼른 왔으면 좋겠다.”
얼마 전 김홍빈 대장은 히말라야의 브로드피크 등반 후 실종되는 사고를 당했다. 책의 첫 장에도 나오지만, 추억을 나눈 동료 중에는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떠나신 분이 많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김홍빈 대장과 밤새도록 인터뷰를 했었고, 내밀한 얘기를 나눌 정도로 많이 친했다. 동료를 잃는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슬프다. 다만 등반가가 산에서 죽는 것은 숙명인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곳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것. 그것은 어쩌면 글을 쓰다가 책상에 앉아서 마지막을 맞이하는 작가의 숭고함 같은 것이 아닐까? 함께 늙어갈 수 없어서 슬프지만, 이제는 히말라야가 된 그들의 영혼이 부디 그곳에서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 책은 그들에 대한 헌사인 동시에 그리움을 품고 있다.”
어쩌다 산악인의 운명
친척의 권유로 성적에 맞춰서 교대에 입학했는데, 우연히 들어간 산악부는 삶의 이정표를 바꾸는 터닝포인트가 됐다.
“어쩌다 산악인이 됐지만, 뒤돌아보니 그 선택이 운명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산악부라고 해서 계곡 가서 기타 치고 노는 동아리인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부원으로 처음 한 것이 암벽등반이었다. 도봉산의 오봉에 올라가 암벽등반을 처음 했는데, 정말로 아찔했다. 선배들은 가느다란 줄 하나를 믿고 올라오라고 하는데 오금이 절로 저렸다. 가뜩이나 고소공포증이 있어서 엉엉 울다가 내려왔다. 이후에 선배들이 ‘쟤는 곧 나가겠다’고 했지만 오기가 생겨 이 악물고 버텼다. 그때 신입생으로 13명이 들어왔는데, 2학년 때는 나 포함 3명이 남았다. 당시에 선배들한테 끈기와 실력으로 인정받았다.”
4학년 때는 한국대학산악연맹 부회장을 맡아서 백두대간 종주를 기획했다.
“84학번 선배들이 백두대간과 조선 시대 지리서 ‘산경표’ 연구자인 이우영 선생님과 백두대간 종주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다만 선배들이 끝내지 못해서 자연스럽게 바로 아래 학번 집행부였던 우리가 이어나갔다. 백두대간 개념이 생소하던 때라서, 집행부가 약 4달 동안 지도 수십 장을 강의실에 깔아놓고 ‘산경표’를 바탕으로 지도의 능선을 잇는 작업을 했다. 지금이야 백두대간이 널리 알려졌지만, 그때는 정보도 없고 개인이나 산악회 차원에서 실행하기 어려운 프로젝트였다. 백두대간을 15구간으로 나눈 후 우여곡절 끝에 완성한 지도를 들고 7월에 4박 5일간의 종주를 시작했다.”
지금이야 GPS 기술이 발달해서 문제가 없겠지만, 그때는 개념조차 없을 때라 상당히 열악했을 것 같은데 실제론 어땠을까?
“당시 이화령에서 속리산까지 내려가는 구간의 대장이었다. 지도가 있어도 구간의 지형이 불확실한 탓에 나무 위에 올라가서 지형을 살펴봤다. 여름이라 물이 굉장히 중요했는데, 덤불 지대를 지나다가 후배들이 배낭에 달아놓은 물통을 잃어버리기도 했다. 결국 찾지 못한 채 근처에 있는 오디로 목을 축였다. 구간에서 잠시 벗어나 샘이 있을 것 같은 골짜기로 내려가서 물을 채워오기도 했다. 당시에 수월하게 종주한 팀이 없었다. 종주 후에 우리가 쓴 보고서가 발표되고, 1990년대부터 백두대간 종주 붐이 일어났다.”
언니와 형, 그리고 가족을 위해
그녀는 건장한 청년들도 올라가면 쓰러진다는 고봉을 두 번이나 올랐다. 첫 원정은 아마다블람(6856m)이었다.
“첫 원정은 제일 좋아하던 4학년 언니와 84학번 형(선배) 때문이었다. 둘과 정말 친했다. 언니는 나랑 통하는 구석이 많았고, 나중에 꼭 히말라야에 같이 가자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형은 에베레스트에서, 언니는 설악산에서 돌아오지 못했다. 술만 먹으면 둘이 자꾸 눈에 아른거려서 매일 울었다. 꿈에도 자주 나왔다. 등반을 통해 그들의 못다 이룬 꿈과 한을 풀어주고 싶었다. 정상에 올랐을 때, 꼭 형과 언니가 나를 지켜보는 것 같았다. 이후엔 그들이 꿈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게 언니와 형은 히말라야가 됐다.”
신들의 허락이 있어야만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히말라야의 고봉, 그곳에 오르면서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
“두 번째 원정은 히말라야 14좌 중 하나인 가셔브룸 2봉(8035m)으로 갔는데, 정상을 앞두고 얼음 화살이 온몸에 꽂히는 기분이었다. 동상으로 손가락과 발가락을 잘라야 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하지만 손가락이 잘려도 정상에 꼭 오르고 싶었다. 학교의 졸업생 대표로 왔다는 책임감, 가족의 희생에 대한 미안함,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질 수 없었다. 흔히 고산에서는 정신을 잃는다고 하는데, 나도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다행히 정상을 찍고 무사히 귀환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지만, 그것이 처음이자 마지막 8000m가 됐다.
“가셔브룸 2봉은 결혼 후 다녀온 원정이었는데, 당시 위성 전화로 아이들과 통화할 때 매번 눈물이 날 정도로 보고 싶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공항에서 아이들을 마주했는데,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안 놓더라. 엄마의 부재가 아이들에게 엄청난 트라우마를 남긴 것 같았다. 만일 내가 혹시 잘못됐을 때 자식들에게 남을 상처를 생각하니 맘이 아팠다. 그때부터는 낮고 안전한 구간의 산으로 다녔다. 산악인이기 전에 엄마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산과 사람
8000m를 대신하여 낮고 짧은 구간의 산을 다녔고, 아이들과 어울리기 위해 겨울마다 스키를 탔다. 공교롭게도 산악스키 선수로 거듭나는 계기가 됐다.
“한창 스키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스키를 탈 때가 있었다. 우연히 산악계 선배가 그 모습을 보고 산악스키 아시안컵 대회를 권유했다. 등산과 스키를 워낙 좋아했는데, 둘 다 할 수 있는 장르가 산악스키더라. 당시 대중적인 스포츠가 아니라서 장비를 어렵게 구했다. 발 사이즈보다 큰 부츠라 경기 내내 물집으로 고생했지만, 3위란 기록을 세웠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국제 산악스키 심판 자격증을 취득하고, 이후엔 실업팀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가르치는 게 천성인 것 같다.(웃음) 내 자식에게는 소고기를 못 사줘도 선수들과는 자주 소고기 회식을 할 정도로 공을 많이 들였다.”
뿐만 아니라 스포츠아웃도어학과 교수, 산악잡지 편집장, 산악박물관 학예연구실장 등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했는데, 이렇게 달려올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산에서 단련하고 쌓아온 경험과 교육자로서의 DNA가 많은 도움을 줬다. 교사를 그만둔 후 운명처럼 교수 제의가 왔는데, 그간 교사와 산악인으로 쌓은 내공 덕분에 무사히 할 수 있었다. 다만 끝까지 함께하지 못해 제자들과 학교에 미안함이 크다. 편집장 시절엔 전문성 있는 기사를 쓰기 위해 노력했고, 학예사로서는 산악인들과의 적극적인 소통을 통해 자칫하면 사라질 뻔했던 유물을 박물관 수장고로 가져왔다. 이 모든 건 산을 좋아했기에 가능했지만, 무엇보다 산을 통해 연을 맺은 이들의 격려와 신뢰 덕분이었다. 나의 쓰임새를 알아봐 준 이들에게 항상 감사한 맘으로 살고 있다. 그들에게 마음의 빚이 많다.”
현재 그녀가 일하고 있는 국립산악박물관은 2014년에 산악 문화의 대중화를 목표로 개관했다. 매년 10만 명 이상이 방문하고 있으며, 유물 수집 및 보존, 연구와 교육, 전시 및 학술 업무 등을 통해 산악 문화의 저변 확대에 힘쓰고 있다. 산악 문화의 역사를 온몸으로 습득한 그녀는 편집장 이력과 교수 시절에 진행했던 전시와 학술 업무 경험을 바탕으로 학예 연구에 매진 중이다.
경이로운 삶
하지만 늘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남성 위주의 문화 때문에 여성 산악인으로서 힘들었던 경험도 있었을 터.
“대학 시절엔 여자들도 함께 등반했는데, 주위에서 여자들은 졸업하면 나오지 말고 집에서 애들 잘 키우라고 그랬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오기와 승부욕이 생겨서, 오히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산에 다녔다. 실제로 언니들은 다 결혼 후엔 등반을 안 했다. 나만 아직 유일하게 등반을 한다. 예전에 산 관련 일을 할 때 여자가 업무 분담과 지시를 한다고 말을 안 듣는 남자 분들이 더러 있었다. 결국 그들의 일도 내 몫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꿋꿋이 버텼다. 언제나 ‘여자’가 아니라 동등한 ‘산악인’으로 평가받고 싶다.”
알피니스트로서 30년 이상 산에 올랐는데, 산은 그녀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산 덕분에 경이로운 삶을 살았다. 등반은 한계를 넘기 위한 행위이자 몰입도가 높은 스포츠다. 한계가 높을수록 도전하는 짜릿함이 크다. 그것을 극복했을 때 생기는 성취감과 자신감은 삶에 활력을 불어넣는 에너지가 됐다. 올림픽 메달처럼 외적 보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내적 보상이 크다. 도전을 완수하는 과정, 이 자체가 하나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본다. 일상에서는 평범한 아줌마 박경이라 할지라도, 산에 올라서 정상에 서는 순간 ‘산악인 박경이’로서 깃발을 꽂는 것이다. 한계, 몰입, 성취. 이 3박자가 내 삶에 큰 행복이었다.”
끝으로 트레킹 입문자에 대한 조언과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을 말했다.
“고산 트레킹을 꿈꾸는 중년이 많은데 국내에서도 준비할 수 있다. 겨울의 설악산이나 한라산은 히말라야에 버금가는 강추위와 거친 환경을 자랑한다. 실제로 그곳에서 연습을 많이 했다. 낮더라도 그런 산에 익숙해지는 것이 좋다. 개인적으론 마스크가 사라지는 세상이 오면, 가족과 함께 트레킹을 떠나는 것이 소박한 목표다. 공적으로는 여성 산악인의 역사를 깊이 있게 연구하고 관련된 내용을 책으로 엮어서, 역사에 가려진 여성 산악인을 조명하는 일에 기여하고 싶다.”
그녀는 이 모든 것이 “열등감에서 나온 오기였다”라고 말했다. 여자, 작은 체구, 고소공포증. 핸디캡으로부터 생긴 열등감을 그대로 방치했다면 패배감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그 오기를 꾸준한 실천으로 옮겼고, 목표를 이루겠다는 집념과 끈기는 여러 분야에서 활동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알피니스트의 경험은 그렇게 그녀의 삶을 바꿨다.
진정한 알피니즘의 조건은 “미터가 아니라 태도”라며 “결과보다는 과정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말했다. 높은 봉우리에 오르는 것이 산악인의 전부가 아니다. 실전을 위해서 훈련을 꾸준하게 하고, 극한의 순간일지라도 동료와의 협동심을 발휘해야 비로소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이러한 과정 없이는 결과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산이 좋아도, 신뢰할 수 있는 동료와 연습을 통해 쌓은 내공이 없다면 정상에 도달할 수 없다. 그녀의 경이로운 삶은 좋아하는 산과 좋은 사람들이 있었기에 더욱 빛날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했던 아름다운 과정은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다. 결국 유종의 미는 과정의 아름다움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아름다운 과정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목표를 멋지게 완수하기를 응원하며 마친다.
습관이라는 단어를 보고 있노라니 가파른 언덕이 떠오른다. 꼭대기를 쳐다보면 한두 번 한숨이 쉬어지고 마음을 다잡아야 비로소 첫걸음이 내디뎌지는 기나긴 비탈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누구나 알다시피 습관에는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이 있다.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을 똑같이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좋은 습관이란 예를 들어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운동을 한다거나 혹은 매일 한 시간씩 일찍 일어나 책을 읽는다거나 하는 행동일 것이다. 그런 행동이 몸에 배려면, 비탈길을 한 걸음씩 쉬지 않고 올라갈 때처럼 몸을 뒤로 잡아당기는 무거운 저항과 오래 싸워야 한다. 익숙해져서 저항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되어도, 이번에는 자잘한 지루함이나 피로를 견뎌야 한다. 좋은 습관이란 아무리 몸에 익어도 의식적으로 애써서 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쁜 습관은 그렇지 않다.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는 것처럼 그다지 어렵지 않게 몸에 붙는다. 심지어 언제 내 몸이 그런 행동을 시작했는지 의식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몸에 붙는 것은 쉽지만 멈추기는 힘들다. 나쁜 습관을 버리려면, 좋은 습관을 몸에 배게 할 때처럼 의식적으로 꾸준히 통제해야만 한다.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을 유지하는 것은 마치 가파른 언덕의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과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것처럼 전혀 다르다. 그러니 똑같이 습관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고 해서 두 가지 행동을 동일한 범주에 집어넣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혼자 와인 한두 잔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모른다. 집 밖에서는 아무래도 귀갓길 걱정도 있고 해서 마음 놓고 술을 마시지 못한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여운이 남은 한두 잔을 보충하다가 습관이 되었을 것이다. 습관이 되고 난 다음에는 와인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한두 잔이 아니라 반 병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마시고 어떻게 쓰러져 잤는지 모르는 경우도 가끔 생겼다. 당연히 다음 날에는 두통에 시달리고 몸이 무거워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었다. 굳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좋은 습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침마다 황폐한 기분으로 죄책감을 느끼며 일어나고,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하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와인을 사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제는 그만 마셔야겠다고 몇 번을 결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슈퍼마켓에 가면 저절로 와인 판매대 앞으로 발길이 옮겨졌다. 이런저런 와인 병의 라벨에 적힌 품종이나 제조연도를 읽어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자줏빛으로, 혹은 옅은 라임빛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병들은 어쩌면 그렇게 완벽한 곡선을 지니고 있는지! 그냥 돌아서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마지막으로 딱 한 병이라고 다짐하면서 장바구니에 담는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애써 와인 사는 횟수를 줄이는 데는 성공했으나 완전히 끊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건강에 이상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어서 똑바로 걷기도 힘들었다. 인터넷에서 증상을 검색해보다 ‘이석증’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비인후과를 찾아갔다. 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와 치료를 받고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다. 이후 와인 마시는 습관을 끊을 수 있었다. 이석증과 음주가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가 완전히 사라졌다. 어쩌다 사람들과 어울려 한두 잔 마시면 어지럽고 메슥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끊으려고 애썼던 나쁜 습관이 결국 몸이 거부하니 저절로 사라지고 말았다.
날마다 와인 마시는 습관을 이어간 것은 잠이 오지 않아서라는 핑계도 있었지만,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 좋은 느낌이 더 증폭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맨정신으로 보면 무심하게 넘어갔을 문장이나 흘려듣게 되는 선율이 더 감동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모든 사물의 이면에 깊고 신비한 의미가 감춰져 있는 듯 느껴지던 사춘기 시절의 감수성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책상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달콤한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몸이 분명한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는.
나이 들고 노년기를 코앞에 두면서 점점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몸의 신호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젊은 시절에는 하루이틀 잠들지 않고 시험 공부를 하거나, 친구들과 술 마시고 놀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가능했다. 몸이 우리의 의지나 감정에 따라주었고, 견뎌주기도 했다. 물론 나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거나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이의 욕망과 감정이 격렬할 수 있는 것은 몸이 충분히 받쳐주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몸이 달라졌는데 마음이 착각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마음은 과거의 빛나는 경험을 쉽게 잊지 못한다. 이제는 다른 몸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의 지혜를 배우고 행동을 모방하려 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의 외모나 행동을 따라 하려 애쓴다. 이따금 나는 스스로 묻는다. 젊은 시절이 지금보다 더 행복했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 그리고 아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젊은 외모나 건강한 신체 때문이 아니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그때 좀 더 지혜로운 선택을 해서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회한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나 자신이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과 불안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온갖 억압과 저임금과 소외감에 시달려야 한다면, 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래서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을 때, 나는 생각했다. 지혜로운 선택을 해서 다른 삶을 사는 것은 굳이 젊은 시절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여전히 가능한 일 아닐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하던 일들을 조금씩 정리하고, 하고 싶었으나 이제까지 못 했던 일들을 하면 어떨까?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기 위해 이런저런 인문학 강좌를 듣기도 하고 장편 소설 읽기 세미나나 독서 모임 같은 곳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강좌나 모임에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일상에서는 만날 일이 없던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이와 학력과 직업이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나 함께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니, 일신상의 정보나 주고받는 대화가 아닌 새로운 유형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것이 나에게 가장 필요한 ‘다른 삶’이었고, 무의식 속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아쉽게도 새로운 대화 이상의 깊은 교류를 맺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수강한 철학 강좌의 강사가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 나오는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은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간’이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약속하는 나’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렵고도 세세한 설명은 듣고 곧 잊었으나, 사례로 들었던 강사 자신의 이야기는 잊을 수 없었다. 그분은 15년 전쯤 건강이 나빠져서 요가를 배웠는데 놀랍게도 건강이 점차 좋아지는 기미가 보였다. 그래서 어느 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죽는 날까지 매일 요가를 하겠다고. 그날부터 그분은 정말로 하루도 빠짐없이 요가를 했다고 한다. 자그마치 15년 동안!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매우 놀랐고, 설마 하루도 안 빠졌을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아플 수도 있고 너무 바쁠 수도 있고 그냥 까맣게 잊는 날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고는 해도 거의 빠지지 않고 매일 요가를 했으니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하는 나’라는 구절이 내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몇 달 전 허리 통증이 심각해지면서 아침마다 간단한 스트레칭에 가까운 요가를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일주일에 적어도 네다섯 번은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요가를 하면 저녁 무렵에는 반드시 한 시간쯤 동네 공원을 걷게 된다. 이상하게도 요가를 하지 않은 날에는 걷는 운동도 내키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는 일에는 확실히 관성이 작용하는 것 같다. 어쨌든 평생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았는데, 규칙적으로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뭔가 큰 변화를 이룬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노년이란 찬란하거나 아름다운 성취를 위한 시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부록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의무적으로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본문과 달리 맘 편히 설렁설렁 읽을 수 있는 보너스 같은 내용이 담긴 게 부록일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부록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본문보다 치열하게 부록을 읽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나의 바람은 적절하게 독립적이고 적절하게 치열한 노년이다. 이제까지 습관적으로 하던 일들을 가능한 한 하지 않고, 습관을 거스르는 새로운 습관이 몸에 배도록 하고 싶다. 직업 탓인지 성향 탓인지 살아오는 동안 사람들과 교류가 적었고 인간관계가 편협했다. 이제는 사회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는 폭을 넓히고 싶다. 주위에는 이제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거나 만나고 싶지 않다는 친구들이 가끔 있다. 지금까지의 인간관계만으로도 피로감을 느낀다고 호소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 여전히 낯선 이들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다. 평생 직접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책 속의 인물과 더 가깝게 만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만남을 후회하지는 않으나 내가 놓쳤던 경험을 한번 붙잡아보려는 시도는 하고 싶다. 나이나 계층이나 직업 같은 경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현실의 사람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또한 홀로 생활하는 데 어렵지 않도록 건강에 큰 문제가 없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몸을 잘 돌봐야 할 것이다. 가벼운 운동을 계속하고, 생활하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자질구레한 집안일도 손에서 놓지 않을 작정이다. 죽을 때까지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고, 내가 사는 집을 청소하고, 내가 입을 옷을 손질하는 게 나의 목표이면서 약속이기도 하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이따금 낯설고 먼 곳으로 여행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면 좋겠다. 너무 큰 욕심일까?
‘약속하는 나’라는 구절은 나에게 와서 ‘좋은 습관을 유지하는 나’로 바뀐 것 같다. 흔히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라고들 한다. 알고 보면 내가 나라고 믿고 있는 정체성은 주위 사람들과의 교류, 그리고 오래 지속되어온 나의 습관적 사유와 행동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비탈진 언덕길을 날마다 한 걸음씩 힘들게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풍경이 변화하는 지점이 나타날 것이다. 습관이 인생을 바꿀 수 있음을 믿게 되는 순간이다. 약속하는 내가 미래의 나를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겠다.
최근 ‘한사랑산악회’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한사랑산악회는 진짜 산악회가 아니라 2019년 만들어진 유튜브 채널 ‘피식대학’의 한 코너다. 김민수, 이창호, 이용주, 정재형 4명의 30대 개그맨들이 각각 산악회에 소속돼 있는 50대 중년 김영남, 이택조, 배용길, 정광용을 연기한다.
이들은 주변에 꼭 한 명쯤은 있을 것 같은 아저씨의 모습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배까지 끌어 올린 바지, 가죽 케이스를 씌운 스마트폰, 귀 뒤까지 싹싹 씻는 약수터 세수 등 완벽한 고증도 묘미다. 실제로 개그맨 정재형과 김민수는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 “한사랑산악회 속 캐릭터는 아버지를 모델 삼아 만들었다”고 밝힌 바 있다.
한사랑산악회로 들여다본 중년
회장 김영남 씨는 항상 ‘열정’을 외치는 기운 넘치는 경상도 아저씨다. 사투리 영향으로 시옷 발음이 상당히 새는 게 특징이다. 리더십, 꼰대 기질, 급한 성격, 큰 목소리까지 두루 갖췄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회원들과 마찰을 빚고 분위기를 망치기도 한다. 하지만 정이 많고 회장으로서의 리더십이 출중해 회원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
부회장 이택조 씨는 육두문자를 입에 달고 살 정도로 거친 말투를 사용한다. 능청스럽고 언제나 술에 취한 듯 흥이 많고 자기만의 유머에 자부심이 있다. 위생 개념이 철저해서 약수터 세수를 즐기는데, 매번 얼굴은 물론 귀 뒤까지 거칠게 씻으며 요란한 소리를 낸다. 종종 영남 회장과 대립해 욕을 하기도 하지만 속은 다정하다.
회원 배용길 씨는 1970년대에 미국에서 살다 귀국해 영어가 유창하며 ‘엘비스프레슬리’라는 엘피(LP) 바를 운영하고 있다. 잡학 다식에 온화한 성품으로 모임의 중재자 역할을 한다. 정광용 씨는 배재고등학교 물리 교사다. 조용하고 느릿한 말투 때문에 학생들 사이에서 별명이 제물포(‘쟤 때문에 물리 포기’의 줄임말)다. 당뇨 때문에 집안에서 단 음식을 못 먹게 하는지라 밖에서 달달한 주전부리를 보면 행동이 상당히 재빨라진다. 술을 마시면 다소 거칠어지기도 한다.
한사랑산악회의 영상을 본 누리꾼들은 “아빠한테 보여줬는데 친구 중에 진짜 저런 사람이 있다면서 엄청 웃더라”, “광용 쌤 진짜 학교에서 인기 없고 학생들이 쉽게 보는 선생님 같아서 볼 때마다 마음이 짠하다” 등 현실에 있을 법한 자세한 캐릭터 설정에 호평했다.
‘꼰대’ 싫어하는 젊은 세대를 홀리다
한사랑산악회 구성원은 모두 50대다. 젊은 세대가 보기에 이들은 시끄럽고, 막무가내다. 조금 촌스럽기도 하다. 그러나 시청자의 80%는 20~30대다. 이들의 영상은 가뿐하게 100만 조회 수를 넘긴다.
한사랑산악회의 콘텐츠가 ‘꼰대’를 싫어하는 젊은 세대를 50대 아저씨에 열광하게끔 해 세대 간의 이해와 소통을 돕고 있다는 의견도 나온다. 누리꾼들은 “지하철이나 공공장소에서 시끄럽게 통화하고 수다 떠는 아저씨를 보면 사실 짜증 나고 싫었다. 그런데 한사랑산악회를 보고 난 뒤로는 그런 어르신들을 보면 왠지 귀여워 보인다”, “아버지 세대를 불편해하던 젊은 세대의 시선이 따뜻하게 바뀌는 신기한 현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 같다”며 긍정적인 반응을 드러내기도 했다.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이 같은 현상을 “세대 공감의 일환”이라고 정의했다. 또 “최근 복고풍이 새롭게 유행하는 현상을 뜻하는 ‘뉴트로’의 개념으로도 접근할 수 있다”며 최근 불어온 뉴트로 열풍과 일맥상통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예를 들면 젊은 세대는 한사랑산악회의 패션이 마냥 촌스럽다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원색의 조합과 과감한 디자인의 믹스매치를 ‘힙하다’며 개성으로 보기도 한다”며 “어디서나 볼 법한 촘촘한 캐릭터 설정으로 가짜지만 진짜 같은 모습에 재미를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다.
KBS TV에서 PD로 근무하던 심웅섭(62)은 어느 날 퇴근길에 뜬금없는 우울감에 사로잡혔다. 자신의 아파트를 올려다보면서였다. 저 메마른 잿빛 콘크리트 상자 안에 살다니, 이거 실화냐? 그렇게 중얼거렸던 모양이다. 심웅섭의 말에 따르면 눈물까지 핑 돌더란다. 그날 밤 그는 아내에게 선언했다. “나 아파트에서 못 살겠어!” 이후 그는 도시 변두리의 단독주택으로 이사해 살았는데, 그즈음 내심에선 귀촌을 향한 희망의 싹눈이 돋았다.
말하자면 심웅섭에게 귀촌은 일종의 묵은 숙원이었다. 늘 시골을 마음에 담고 살았으니까. 그의 근무지는 서울에서 충주로, 다시 청주로 바뀌었다. 청주에 살면서는 시골티가 나는 외곽의 단독주택에서 살았다. 그러나 성에 차지 않았고,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에 마침내 꽤 깊숙한 산골에 집을 짓고 귀촌을 했다. 충북 보은군 회인면의 산촌으로.
“내가 시골 태생이다. 과수원집 막내아들이었다. 과수원에서 강아지와 함께 뛰어놀며 사과를 따 먹던 추억이라거나, 그리운 게 너무도 많았다. 때가 되면 시골에서 살고 싶었다. 하지만 직장이 있으니 쉬운 일은 아니었지. 그렇다고 미루기도 싫어 보은에서 청주로 출퇴근을 하기로 하고 이주했던 거다. 물론 아내의 동의를 얻어서였다.”
당시 불운하게도 그의 아내 홍근옥(59)은 암 투병 중이었다. 아내의 요양을 위해서도 물 좋고 공기 맑은 시골살이가 이상적이었을 테다. 청주로 출퇴근을 하며 시골 맛을 누리는 생활은 길게 이어졌다. 2년 전에야 퇴직을 하고 온전한 산골 생활로 접어들었으니까.
부부는 아주 오래전부터 기(氣) 수련에 열중했다. 계룡산에 있는 수련원을 드나들면서였다. 귀촌을 추동한 요인 중에는 자연 속에 살며 영성이라는 걸 북돋우고 싶다는 바람도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엔 귀촌지를 아예 수련하기 좋은 계룡산 자락으로 정하려 했다. 그러나 적당한 터를 찾지 못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마음에 드는 땅을 만나기도 했으나 계약 단계에서 확인해보니 집을 지을 수 없거나 길이 없는 터였다. 부부 연분처럼 땅하고도 인연이 돼야 일이 성사되는 것 같았다. 이곳 보은의 터와는 좋은 인연으로 만난 셈이다. 수월하게 터를 잡았으니까.”
어떤 경로로 매입했기에?
“인터넷에 나온 매물을 보고 답사를 왔는데, 용케 호의를 베푸는 주민을 만나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그는 초면임에도 가격을 좀 깎아서 살 수 있도록 땅 주인에게 다리를 놔주겠다고 하더니 정말 그렇게 해주었다. 집을 지을 때도 이모저모 도움을 받았다.”
집이며 조경이며 수려하고 안락한 모습이다. 어떤 기본 구상을 가지고 집짓기에 착수했을까?
“생태주의랄까, 생활 방식은 좀 간결한 게 좋다는 생각을 평소에 지녔기에 가급적 작은 집을 짓기로 했다. 그래서 바닥 면적 18평짜리 목조주택을 지었다. 나중에 자그만 황토방을 추가로 지은 건 필요성이 커서였다. 남들에게도 권하고 싶다. 일단 작게 짓고, 차후 꼭 필요하다면 부속 건물을 지으라고.”
목공실도 있네?
“집짓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 일찍이 목공학교를 다니며 기술을 배웠다. 덕분에 갖가지 생활가구를 직접 만들어 쓸 수 있게 됐다. 집 안에 있는 탁자, 의자, 책장은 모두 직접 만든 것들이다. 문짝도 만들어 쓴다. 나무로 뭔가를 만든다는 건 신나는 일이다. 직접 만들었다는 자부심으로 즐거워지거든.”
도시보다 생활비 30% 덜 들어
심웅섭이 손수 가구를 만들어 쓰는 데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생활비를 절약할 수 있다는 게 바로 그렇다. 그는 알뜰한 소비를 지향한다. 무슨 ‘짠돌이’ 계열의 성향이어서가 아니다. 통장 잔고가 불어나는 재미로 낙을 삼는 습성의 소유자도 아닌 것 같다. ‘그저 빠듯하게 살 뿐’이라는 얘기로 보자면 쟁여놓은 부가 있는 것도 아닐 거다. 여하튼 돈에 관한 주관이 뚜렷하다. 돈과 행복의 상관관계가 크지 않다고 믿는 그는 과도한 물욕의 추구만큼은 자제하고 싶다.
“농사엔 햇빛이 필수지만 지나치게 높은 광도는 오히려 생산성을 떨어뜨린다. 이걸 광포화(光飽和) 현상이라고 하더라. 돈이나 물질도 마찬가지다. 과잉 추구하느니 자제하는 게 낫다.”
돈이 행복을 가져다주는 건 아니라는 믿음을 진심으로 간직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나? 그건 이상적인 신념이지만 돈이라면 영혼까지 거래하는 게 현실이다.
“돈이 안 들거나 덜 드는 방식의 삶이 그래서 필요하다. 가령 내가 필요한 가구를 마트에서 사들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원하지 않는 일에도 진땀을 쏟아야 하고, 여기에서 삶의 질이 떨어지는 게 아닐까. 필요한 가구를 직접 만들어 쓸 경우에는 문제가 달라진다.”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매력 가운데 하나로 꼽는다.
“도시에서보다 30%쯤 생활비가 덜 드는 것 같다. 돈이 덜 들어 돈 버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원하는 일에 선용할 수 있다는 건 시골 생활의 큰 장점이다. 우리 부부는 가급적 산길을 많이 걷고자 한다. 여기에 무슨 돈이 들겠나?”
그의 집 주변은 온통 산이다. 숲을 흔들며 불어온 바람이 솔향기를 흩뿌린다. 숲속의 인기 가수들인 온갖 새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지구재재구 명랑한 노래를 협연한다. 이 찬탄할 만한 오케스트라 공연엔 입장료가 없다. 산나물은 또 어떻고? 아내 홍근옥은 귀촌 이후 완연히 건강을 회복했다. 그녀가 누리는 최상의 기쁨은 산나물 뜯기인데, 앞산 뒷산에서 얻어온 풋것들로 몸도 씽씽해졌다. 그렇더라도 때로 무료하지 않을까? 산중의 반복되는 일상에 심심하지 않을까?
“귀촌 5년 차쯤 되면 슬슬 심심해진다고들 하던데 정말 그렇긴 하다.(웃음) 그렇다고 심각하게 무료한 건 없다. 사실 시골에서 할 수 없는 일은 거의 없다. 우리가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사는 것도 아니고, 충분히 다양하게 즐길 수 있는 게 요즘의 시골이다. 차로 40분이면 닿는 청주로 나가 갑갑증을 해갈하는 식으로.”
부부 사이에 갈등이 늘어날 수 있는 게 귀촌 생활이다. 종일 함께 지내다 보면 불편한 일도 생기는 거라서. 상대의 장점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뭐든 항상 같이 한다. 소소한 다툼은 있지만 서로 조금씩 양보하는 태도로 풀어나간다. 세상에 부부 사이보다 더 귀하고 좋은 게 있을까?
햐, 부부간에 ‘귀차니즘’이 증대될 나이인데.
“우리 부부는 오랫동안 함께 영성 수련을 해왔다. 영성, 이건 함부로 말할 건 아니지만 자연 속에서 영성을 생각하며 사는 삶이 좋은 거라는 생각 정도는 하고 산다. 배우자는 물론 모든 사람이 영적인 존재일 수 있다는 생각을 하면 안도감이 느껴진다.”
독서는 주로 어떤 분야의 책으로 하지?
“우주에 관한 책이 재미있다.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나 평행이론을 알게 하는 책들을 좋아한다. 우주에 관심을 갖다 보면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라는 걸 깨우칠 수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가 유일한 우주가 아닐 수 있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사실 내가 아는 게 별로 없지만, 영적인 존재든 우주든 그것들이 나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럴 때면 깊은 위안을 얻는다.”
산야의 들풀 한 포기와 인간이 크게 다를 게 없다고 느껴질 때도 뭔가 삶이 더 넓게 보이는 것 같더라. 자연과 가까이 지낼 수 있는 귀촌 생활의 유익함은 한둘이 아닌 셈이다. 그런데 산중의 낙은 달밤에 한잔 마시는 데에도 있다. 음주는 간혹 즐기나?
“술은 전혀 못 마신다.(웃음) 명상 수련을 하면서 생활 패턴이 조용한 쪽으로 바뀌기도 해 술자리에 섞이지 않는 편이다.”
시골에서도 다이내믹한 삶이 가능하다
살면 살수록 더 가지고 싶고, 더 벌고 싶고, 더 욕망을 채우고 싶은 게 필부의 속성이다. 심웅섭은 여기에서 좀 벗어나 살고 싶은 것이다. 때로 산골 생활이 무료하지만 방안을 찾아 해소한다. 오디오 장비를 마련해 레코드 음악 감상에 입문하는 식으로. 이웃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서도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남들에게 피해 주는 일을 삼가는 데에서 나아가, 뭔가 도움 되는 일을 하는 게 좋은 삶이라는 생각도 강화됐다.
“방송사 PD로 일할 때 휴먼 영상 다큐를 자주 만들었다. 이 경험을 살려 요즘 농촌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스마트폰으로 만드는 영상 자서전’ 강의를 하고 있다. 인근의 젊은 귀촌인들과 함께 ‘해바라기 문화공작소’를 만들기도 했다. 영상을 매개로 지역 문화를 돋우는 활동을 하기 위한 동아리다. 아내 역시 면 소재지에 꾸린 ‘작은 도서관’에서 일한다. 이건 봉사활동이자 알바다.”
시골이 따분한 곳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심웅섭에 따르면 그건 좁은 선입견에 불과하다. 생각과 행동의 외연을 확장할 경우 다이내믹한 삶을 영위할 수도 있는 게 귀촌 생활이라고 본다.
“집에 폭 파묻혀 풀만 뽑는 식의 스타일에서 벗어나 다양한 방식의 삶을 시도해볼 만한 게 시골이다. 이 점에서 귀촌은 하나의 도전 행위다. 그 무엇보다,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을 하면 즐거움이 커진다.”
심웅섭 씨가 주는 귀촌 Tip
•귀촌·귀농인들이 겪는 애환 중 가장 큰 건 원주민과의 갈등에서 발생한다. 문제의 원인이 어느 한편에만 있는 건 아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알력과 닮았다. 일단 우월감을 버려야 한다. 배운 건 많지 않더라도, 대체로 나쁜 맘 없이 진솔하고 순수한 면이 있는 게 시골 사람들이다. 그들의 삶에 녹아든 지혜를 배운다는 태도로 존중해주는 게 현명하다. 좋은 관계 맺기에 정 자신이 없다면 마을과 떨어진 곳에 터를 잡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