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파이크 서브를 언급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한국 최초로 스파이크 서브를 선보인 장윤창(張允昌·59). 마치 돌고래가 수면 위를 튀어 오르듯 날아올라 상대 코트에 날카로운 서브를 꽂아 넣는 그의 ‘돌고래 스파이크 서브’는 수많은 배구 팬들을 매료시켰다. 15년간 국내 배구 코트를 지킨 장윤창 현 경기대학교 체육학과 교수를 만났다.
“옛날에 종이학 천 마리를 접으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말이 있었잖아요, 거의 수만 마리는 받은 것 같아요. 또 팬레터의 80~90%는 ‘오빠랑 결혼할 거다’라는 내용이었죠. 그래서 제가 답장을 못했어요.(웃음)”
1980~90년대의 한국 남자 배구는 지금까지 통틀어 최고의 인기를 자랑했다. 그 중심에는 ‘왼손 거포’ 장윤창이 있었다. 수많은 배구 팬들이 그의 시원시원한 공격과 스파이크 서브를 보기 위해 경기장에 몰려와 전 좌석을 꽉꽉 채우곤 했다. 그는 아니라며 수줍게 부인했지만, 그가 받았다는 팬레터와 무수한 종이학이 그의 인기를 증명해줬다.
사실 198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 남자 배구는 1976년 몬트리올올림픽에서 구기 종목 사상 처음으로 동메달을 거머쥔 여자 배구팀에 가려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1978년 세계배구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4강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면서 국민들의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그때 대표팀에는 강만수, 김호철, 강두태를 비롯해 고등학교 2학년의 장윤창도 있었다.
“배구를 처음 시작할 때 장충체육관에서 공이 찌그러질 정도로 때리던 대선배들의 모습을 보면서 꼭 국가대표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렇게 꿈에 그리던 선배들과 함께 태릉선수촌에서 운동할 수 있었다는 건 그 나이에 저로서는 큰 행운이었죠.”
한국 남자 배구팀은 세계선수권 4강 진출의 기세를 몰아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 1979년 유니버시아드대회에서 우승을 거뒀다. 국제대회에서의 선전으로 당시 베스트 멤버였던 강만수, 김호철, 이인 등 국가대표 주전들이 잇달아 해외로 진출했다. 웬일인지 ‘철벽 블로커’로 이름을 알린 장윤창은 국내에만 머물렀단 사실이 의아했다.
“아랍에미리트에서 3개월 동안 뛰면 20만 달러를 주겠다는 조건을 걸고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었어요. 그 당시에 20만 달러면 강남에 있는 아파트 8채를 살 수 있는 금액인데 협회에서 저도 모르게 거절했더라고요. 국가대표 주축 선수들이 다 외국으로 나가 있으니깐 저까지 빠지면 전력 손실이 너무 크다고 판단한 거죠. 사실 이때 분노의 스파이크 서브가 탄생했어요.(웃음)”
당시 실망감으로 가득 찬 그는 중동으로 전지훈련을 떠난 대표팀을 뒤로 한 채 한국에서 홀로 방황하는 시절을 보냈다.
“원로 선배들이 ‘아직 앞길이 창창한데 이래서 되겠냐’ 하면서 다시 대표팀에 합류하라고 설득하셨죠. 결국 그분들의 말을 듣고 전지훈련에 합류했어요. 솔직히 연습도 하기 싫은데 스파이크 서브나 한번 해보자 해서 시도한 거죠. 근데 아무도 못 받더라고요. ‘아, 이거 조금만 다듬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스파이크 서브’라는 무기까지 장착한 그는 1984년 처음 열린 대통령배 배구대회에서 고려증권을 우승으로 이끌고 MVP, 베스트6, 인기상까지 휩쓸었다.
15년간의 선수 생활
비교적 선수 생활이 짧은 배구 종목에서 그가 15년이라는 세월 동안 코트를 지킬 수 있었던 비결이 궁금했다.
“워낙 어린 나이 때부터 운동을 시작해서 그런지 5년이 지나도 제가 대학생이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팀에서 최고참 선수가 됐고 리더 역할을 해야 했어요. 놀고 싶어도 못 놀고, 딴짓할 생각조차도 못했죠. 어릴 땐 죽어라 뛰었고 나이가 들어선 후배한테 지지 않으려고 죽어라 연습했죠. 속에선 불이 나는데 안 나는 척, 숨이 차서 심장이 터질 것 같지만 괜찮은 척.(웃음) 항상 뒤처지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지금 생각해보면 왜 그렇게 집착을 했을까, 좀 멍청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는 지금도 그렇지만 선수 생활 내내 몸에 나쁘다는 술과 담배는 일절 입에 대지 않았다. 덕분에(?) 술에 관한 에피소드는 없다고. 그럼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따로 있었냐는 물음에 “개인 연습을 더 하고 등산을 했다”는… 정말 배구만 바라봤던 ‘장윤창’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동안 수많은 경기를 치러왔지만, 그중에서도 그는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예선전에서 일본과 겨룬 경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그 당시 우리나라가 배구를 일본한테 배우다 보니 일본팀에게 상당히 약한 모습을 보였어요. 일본과 붙으면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을 정도로요. 그래서 패배를 맛본 선배들은 일본과 맞붙는 걸 좀 두려워했어요. 반면 저나 김호철, 강두태 이렇게 세 명은 그런 상황을 몰랐으니까 두려움이 없었던 거죠. 그렇게 신구(新舊)의 조화가 잘 이뤄지다 보니 2대 0으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 3대 2로 역전승을 거뒀어요. 일본을 상대로 거둔 첫 승리였죠.”
네트를 사이에 두고 팀 간 신경전은 없었을까.
“대표적으로 득점에 성공하면 포효하는 방법이 있어요. 기를 확 눌러버리는 거죠.(웃음) 사실 신경전은 바깥이 아닌 코트 안에서 벌어지는 일이 많아요. 공이 공중에 떴을 때 공격하는 사람과 블로킹을 하는 수비수 사이의 눈치싸움처럼요.”
배구선수로서 나름 명성과 내공을 쌓은 그가 왜 배구 지도자의 길이 아닌 교수의 길을 선택했는지 궁금했다.
“사람들은 제가 은퇴하고 갑자기 사라졌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어릴 때부터 주목을 많이 받다 보니까 중압감이 컸어요. 팀이 이기면 ‘장윤창 팀’이라는 수식어가 붙었고 지면 ‘장윤창이 못해서’라고 하니 그 부담감 때문에 한 번도 마음 편히 운동을 쉬어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렇게 생활하다 보니 은퇴 후에는 현장이 아니라 내가 못 해본 공부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경기대학교에서 교직에 몸담은 지도 어언 10여 년째. 그는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한다.
“대부분의 학생이 교수와 면담한다고 하면 어색하고 불편하게 생각하는데 제 연구실을 찾아오는 학생들은 편하게 와주는 것 같아 고마워요. 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요?(웃음) 제가 학교에 발 담그고 있는 동안에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알려줄 수 있는 그런 교수가 되고 싶어요.”
받은 사랑 베풀며 살고파
‘함께하는 사람들’은 1999년 장윤창이 창단한 봉사단체로 황영조, 전이경, 유남규, 현정화, 장재근 등 국민의 사랑을 받은 스포츠 스타들이 한마음 한뜻을 모아 매월 양로원, 보육원 등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곳을 찾아간다.
“한 번은 비닐하우스 한 동에 70~80명이 사는 곳에 봉사활동을 간 적이 있어요. 그때가 한창 겨울이었는데 통풍이 안 돼서 그런지 옴진드기가 있는 거예요. 한쪽에서는 옷을 빨고 한쪽에서는 샤워를 시켜주고. 근데 옴이 옮는다고 하잖아요, 저도 모르게 끝나고 샤워하러 가서 소금물로 씻고 또 씻었던 기억이 아직까지도 좀 죄스러워요.”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묻는 질문에 그는 “그동안 잠시 쉬어왔던 봉사활동을 본격적으로 다시 시작하려 한다”고 답했다.
“일하면서 봉사를 한다는 게 쉽지 않더라고요. 한 3년간 황영조 선수에게 운영을 부탁했는데 이제 다시 돌아가려고요. 아내가 그 노력을 가정에도 좀 쏟으라고 잔소리하는데…(웃음) 그래도 이해해줘서 항상 고맙죠. 때론 힘들어서 그만해야지, 그만해야지 했는데 이전에 봤던 친구들의 모습이 눈에 밟혀서 그만두는 건 쉽지 않을 거 같아요. 국민들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으니 그 사랑을 돌려드려야죠.”
어느 시대에나 그 시대를 상징하는 ‘오빠’들이 있다. 그런데 남진이라는 이름 두 글자가 사람들에게 전해주는 울림은 수많은 ‘오빠’들 중에서도 독보적이다. 일찍이 나훈아와 함께 라이벌 구도를 만들며 전설적인 남진 시대를 만든 그가 70이 넘어 펼치는 요즘 공연을 보라. 여전히 무대 위를 날아다닌다. 과거와 다를 바 없이 변치 않는 에너지와 무대를 휘어잡는 여유, 특유의 인간적인 매너는 그를 영원한 오빠라고 부를 수 있는 이유다. 더없이 남진다운 유쾌함과 호탕함이 어우러진 인터뷰에서 남진을 느껴보자.
“50년 넘게 부른 노래는 제 인생의 전부죠. 때론 하기 싫을 때도 있었고 슬럼프도 있었지만…. 지금은 내가 ‘노래’고, 노래가 ‘나’이구나 싶어요. 노래는 그냥 자기를 표현하는 거예요. 그걸 안 느낄 수가 없죠.”
그렇게 말해도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가수, 남진과의 대화는 펄펄 끓는 에너지에 끌려다닐 수밖에 없는 시간이었다. 노래 장르를 설명하며 각 장르의 박자와 멜로디를 구성지게 재현해내는 그의 모습에서 자연스럽게 넘실대는 흥이 느껴졌다.
“‘님과 함께’가 트로트라고요? 전혀 아니에요. 그런데 옛 가수들을 무조건 트로트 가수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에요.”
사실 남진은 한국 대중가요사에서 독특한 존재로 알려져 있다. 그 당시 가요계의 주류인 트로트의 기조와는 다른 결을 추구해온 가수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가 애초에 가요가 아니라 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음악을 시작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의 기억에서 음악에 대한 가장 강렬했던 첫 경험은 중학교 3학년 때 들은 닐 세다카의 ‘Oh! Carol’이었다. 그 노래에 충격을 받고 그는 폴 앵카, 엘비스 프레슬리 등 스탠더드 팝과 로큰롤의 세계로 들어간다. 남진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세련미는 거기서부터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때 저는 가요의 ‘가’ 자도 몰랐던 사람이에요. 어릴 때 한 번도 불러본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노래는 팝을 좋아했지만 가수가 되기 위해선 가요를 해야 했죠. 솔직히 그때는 옛날 노래들이 촌스럽다는 느낌밖에 안 들었고 나와 안 맞더라고요.”
나이 들며 배우는 옛 노래의 역사와 혼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세월이 지나고 나니 ‘아 이게 우리 노래구나’ 하며 깨닫게 되는 것이 많다. 그 맛을 느끼고 배우고 싶어서 그는 요즘 남인수, 현인, 백년설 등의 노래를 들으며 공부하고 있다. 나이가 70이 넘어서도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는 비결이 그 꾸준한 학구열 덕분이 아닐까 싶다. 문득 그의 요즘 노래가 풍성해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는 나이 들수록 더 깊은 울림을 주고 묵은지 맛 같은 풍미를 느끼게 해주는 노래로 사랑받고 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전쟁도 치렀던 그 역사와 혼이 옛 노래에 다 담겨 있어요. 요즘은 그때처럼 애절하고 한이 서린 노래가 없어요. 젊은 사람들이 부르는 트로트에 깊은 감동이 있나요? 물론 기술적으로는 훌륭하죠. 다만 옛날 사람들과 같은 경험이 없으니….”
새롭게 깨달은 선배들의 업적은 그에게 세상을 보는 눈을 갖게 해줬다. 그는 제2회 남인수가요제에 참석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남인수 선생 고향이 진주인데 가보니 어디를 봐도 그의 이름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작년에 가요제도 했잖아요, 근데 왜 이름이 없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분이 일제강점기 때 일본 노래를 불러서 없앴다는 거예요. 속으로 ‘우리나라 큰일 났다’ 싶었죠. 그 사람이 무슨 죄가 있어요? 나라가 잘못한 거지. 어떻게 사람을, 한 시대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를 이렇게까지 매도할 수 있나 싶어서 그다음부터는 안 갔어요.”
엄격한 아버지, 여성의 힘을 알려준 어머니
남진에게는 일곱 살짜리, 다섯 살짜리 손자가 있다. 손녀를 원하는데 마음대로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세 딸과는 자주 얘기를 하지만 아들과는 그렇게 살갑게 지내는 게 잘 안 된다고 했다. 그는 그 이유가 자신이 아버지를 닮아서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그의 아버지는 목포일보의 발행인이자 제5대 국회의원을 지낸 고 김문옥 씨. 호남에서 가장 큰 정미소를 운영하기도 했다. 그의 기억 속에 아버지는 말씀이 적고 보수적인, ‘그 시대 아버지’였다.
“딸 여섯을 낳고 쉰하나에 절 낳으셨어요. 얼마나 귀했겠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전혀 내색을 하지 않고 엄하셨어요. 평생 머리 한 번 안 쓰다듬어줬고 엉덩이도 안 두들기셨죠. 나는 아들에게는 안 그래야지 했는데 결국 아버지랑 똑같네요.(웃음)”
많고 많은 직업 중 왜 하필 ‘풍각쟁이’냐며 만류하셨던 아버지. 그런 엄격한 아버지가 어려워 그는 어머니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자랐다. 어머니 장기순 씨는 그 시절에 일본에서 유학을 하고 일본 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던 흔치 않은 여성이었다.
“어머니의 사랑과 교육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가장 큰 힘이었어요. 보통 분이 아니셨어요. 그리고 여성의 힘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셨어요.”
목숨을 잃을 뻔한 순간들
아버지 몰래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해 배우의 꿈을 키우다 우연히 친구들과 노래하며 놀다 캐스팅이 돼 1965년 1집 앨범 ‘서울 플레이보이’를 발매하며 데뷔했다.
부유한 집안, 이른 성공, 지속적인 인기, 귀공자 이미지 등으로 남진이 어려움 없이 순탄하게 산 걸로 사람들은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삶은 의외로 거친 순간들이 가득하다. 심지어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도 여러 번 있었다.
“아마 제가 싸우다 칼 맞은 몇 안 되는 대한민국 연예인일 거예요. 그때 대동맥을 5mm 비껴 지나갔는데 0.1mm만 칼이 틀어졌어도 죽었다고 하더군요. 서른아홉 살 때였어요.”
그러고 보니 그는 해병대에 입대해 베트남전에 파병되기도 했다. 전쟁터는 죽음이 일상인 공간이다. 그곳에서도 당연히 죽을 고비를 꽤 넘겼다.
“베트남전에 파병됐을 때 바로 앞에서 폭탄이 터지기도 했죠. 총알이 아슬아슬하게 지나간 적도 있고. 그때가 스물서너 살, 이십대 초반이었어요. 겁 없을 때니까 해병대에 자원해서 갔던 거죠.”
당시 베트남전 파병은 원래 특수병과가 아니면 1년 이상 못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무슨 호기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여단장에게 기간을 더 연장해 달라 하고 만 2년을 그곳에서 보냈다고 한다.
“그게 의문이야. 여단장이 ‘야, 이놈아 딴 놈들은 하루라도 빨리 보내 달라고 하는데 너는 왜 안 가려고 그래?’ 하더군요. 이십대면 여자도 보고 싶고 날아다닐 때인데 그런 생각 막아주고 거기서 머무르게 해서 제대하면 바로 활동하게 한 어떤 존재가 있는 것 같은데… 지금도 의문이야. 지금 그렇게 하라면 절대 못할 거 같아.(웃음) 아마 하느님이 가수로 성공하라고 인도한 거 같아요. 감사하죠.”
수많은 인연이 만들어준 남진 시대
남진은 운명적인 인연을 믿는다. 그래서 감사하는 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우선 팬들. 그들이 없었으면 나도 없었죠. 큰 축복입니다. 그리고 TBC의 ‘쇼쇼쇼’를 연출한 황정태 PD, MBC의 전우중 PD가 있죠. 사실상 그분들이 저를 예뻐해주셔서 최고의 스타가 됐고 남진 시대를 만들 수 있었어요. 노래 못하면 연습하다 ‘야, 똥가수 나와!’ 하고 대놓고 소리를 지를 정도로 성질은 좀 거친 분이셨지만.(웃음)”
그를 21세기의 현역으로 만든 히트곡 ‘둥지’의 탄생도 드라마틱하다. 전두환 집권 시기에 제재를 받아 방송 출연도 못하고 고향에 내려가서 지내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가수가 운명이었던 그는 노래가 하고 싶어 3년 동안 곡을 모으고 연습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앨범 녹음을 끝내고 발매를 앞둔 시점이었다. 어느 날 지방에 갔다 오니 사무실에 데모곡이 담긴 카세트가 하나 들어와 있었다.
“틀어서 노래를 듣는데 소름이 쫙 돋는 거야. 편곡하는 사람 빨리 오라고 해서 편곡했죠. 그리고 녹음을 하려는데 배일호가 내가 녹음하고 싶은 날에 녹음실을 빌린 상태더라고. 그래도 무조건 가보자 해서 갔죠. 그러고는 배일호에게 ‘내가 급하게 해야 할 녹음이 있는데 이삼십 분만 빌려 달라’고 부탁해서 겨우 녹음했죠.”
대박을 터뜨린 남진의 뚝심
3년 동안 준비한 노래를 뒤로 미루고 순식간에 녹음된 ‘둥지’를 타이틀곡으로 한 앨범이 나왔다. 마침 라디오에 지인들이 있어서 신곡 나왔으니 신경 좀 써 달라고 부탁도 했다. 그런데 한 6개월 지난 후에 라디오 부장이 ‘둥지’가 아닌 다른 곡으로 타이틀곡을 바꾸는 게 어떻겠냐고 의사를 물어왔다.
“이게 반응이 전혀 없으니까, 같은 앨범 안에 실린 다른 노래가 홍보에 더 낫겠다는 거였어요. 그런데 사실 ‘둥지’는 일반 트로트곡이 아니야. 재즈지. 난 그게 좋아서 한 거거든. 그때 바꿨으면 ‘둥지’는 끝이었죠. 하지만 ‘이 음악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그냥 이걸로 하겠다’ 해서 그대로 밀고 갔어요.”
남진의 뚝심은 통했다. 1년 정도 지나자 사람들이 슬슬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고 이내 대박이 터졌다. 그 후로 ‘둥지’는 20년째 남진의 전성기를 만들어준 노래가 됐다.
“이 세상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영이고, 그런 영을 주는 게 신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더 멋진 영을 달라고 기도하죠.”
남진의 인생을 돌아보니 그가 신앙을 말하는 것이 그리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요즘 다시 흥이 나는 참이다. 마음에 드는 곡을 만나는 게 쉽지 않은데, 이번에 나온 신곡 ‘남자다잉’이 그의 기준을 만족시키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로큰롤에 기반해 만들어진 이 노래는 듣자마자 ‘남진은 역시 남진이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야말로 남진다운 에너지로 채워져 있기에 그의 만족감이 얼마나 큰지 저절로 이해가 간다.
노래의 본질로 회귀 중
“요즘은 과다한 치장을 빼려고 연습하고 있어요. 묵은 때를 벗겨내는 연습인데 얼마나 어려운지 몰라요. 정신에서 때가 떨어져나가야 소리에서도 때가 벗겨져요. 마음이 와야 소리가 되는 법이니까. 그런데 50년 동안 쌓인 걸 털어낸다는 게 쉽지 않아요.”
50여 년에 걸친 가수생활, 남진은 지금 ‘본질로의 집중’이라는 화두에 몰두해 있다. 그가 요즘 가사에 신경 쓰는 이유도 그러한 본질로의 추구와도 관련 있어 보였다. 요즘은 노래방 시대인 만큼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아야 사람들이 그 노래를 부른다는 그의 진단은 예리했다.
“진솔하게 부르고 싶어요. 그런데 나이가 있으니까 노래 한 곡 부를 때마다 죽겠어.(웃음) 열심히 운동해야지.(웃음) 건강관리는 수영으로 하고 있어요. 제가 목포 놈이잖아요. 수영은 일곱 살 때부터 했죠.”
어렸을 때부터 맞은 바닷바람은 그의 폐를 단련시켜줬다. 노래는 호흡으로 하는 것이기에, 그의 단련된 몸은 아직도 여전한 ‘남진다움’을 유지시켜주는 비결이기도 하다.
“감성은 생각이고 소리는 폐로 합니다. 폐가 안 좋으면 힘 조절이 안 돼요. 그래서 우리는 소리 들으면 그 가수가 어떤 상태인지 딱 알아요.”
그는 건강에 있어 중요한 게 마음이라고 말한다.
“나이를 먹으면 마음을 놓아야 하는데 반대가 돼요.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서운한 게 많아지고…. 그럴 때마다 자신이 싫어져요. 그래서 믿음이 필요한 거예요.”
영원한 오빠, 역사를 만들다
현재 고흥에서는 남진기념관이 만들어지고 있다. 비용은 남진이 마련해서 짓는다. 박병종 전 고흥군수와의 인연으로 성사된 이 작업은 내년에 마무리되어 상반기 중에 문을 열 예정이다. 남진이라는 가수가 가요사에 남긴 업적을 생각하면 기념관이 만들어지는 건 이상하기는커녕 늦은 감마저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에게 붙는 부담스러운 칭호들에 한사코 손사래를 친다.
“노래에 왕이 어딨어요? 왕은 군림하는 건데, 노래는 다 다른 거잖아요. 예를 들어 내가 나훈아 씨 노래를 부르라면 흉내는 낼 수 있겠지만 그 감정을 그만큼 내겠냐고요. 못 내. 최백호 씨나 송창식 씨 노래도 애창하는데, 흉내를 내는 거지. 십 분의 일이나 비슷하면 다행인 거예요.”
그 얘기를 들으며 남진 또한 누구와 비교될 수 있을까를 생각해봤다. 불가능하다. 그만큼 남진 역시 우리 가요사가 만들어낸 독보적인 존재 아니던가.
“무슨 왕이니 황제니, 방송 나가서 사회자나 작가가 나를 그렇게 칭하는 말들을 들으면 불러서 얘기해요. ‘난 딱 한마디야. 가요계의 영원한 오빠. 오빠의 원조. 그거면 끝이야.’ 삶이 힘들어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남자다잉~~~~.(웃음)”
1970년대, 육상 투척 종목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깜짝 스타가 등장했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투포환 종목에서 금메달을 휩쓴 ‘아시아의 마녀’ 백옥자(68)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어쩌다 그에게 마녀라는 수식어가 붙었을까? 현재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있는 그를 만나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부모님 몰래 시작한 투포환
남들보다 큰 키와 순발력,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운동신경과 체격을 갖춘 백옥자는 중학생 때부터 농구와 배구를 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구기 종목도 꾸준히 했으면 좋은 성적을 거뒀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왜 농구와 배구에서 손을 떼고 투포환을 시작했을까. 그 이유가 궁금했다.
“처음에는 투포환이 뭔지도 몰랐어요. 어린 마음에 올림픽에는 나가고 싶은데 팀 운동보단 개인 운동을 해서 나가는 게 빠르겠다 싶어서 도전한 거죠. 때마침 인천 지역 신인발굴대회가 있었는데 체육 선생님이 투포환을 해보라며 권유하더라고요.”
그렇게 중학생 소녀의 손에 4kg의 둥근 쇳덩이가 쥐어졌다. 첫 만남이 썩 좋지는 않았다. 하필 해도 괴팍해 보이는 종목이라니… 집에서도 ‘이상한 운동’ 하지 말라며 반대했다.
“처음엔 도시락도 안 싸줬어요. 그래서 용돈으로 자장면, 우동을 사 먹으며 끼니를 해결했죠. 또 훈련하느라 늦는 날엔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집으로 전력 질주했어요. 1분이라도 일찍 들어가서 운동 안 했다고 거짓말하려고요.”
몰래 운동을 이어가던 그는 중학교 3학년, 신인발굴대회에서 신인선수로 발탁됐다. 한국신기록이었다. 언론은 그를 육상 유망주로 소개하며 보도하기 바빴다. 다행히도 이 사건은 부모님의 마음을 돌려놓는 계기가 됐다. 부모의 인정을 받은 그는 곧바로 태릉선수촌에 들어갔다. 1968년 멕시코올림픽 출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세계의 벽은 높았다. 별다른 성과 없이 귀국했지만, 육상연맹은 그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또다시 선수촌행이었다.
“집이 인천이었기 때문에 태릉선수촌이 곧 제 집이었죠. 그 당시만 해도 교통이 안 좋아서 왔다 갔다 하기가 힘들었거든요. 그래서 경기가 잡히면 전화로 ‘엄마 나 지금 중국 가’, ‘지금 싱가포르 가’ 하면서 당일 통보했죠.”
아시안게임 2연패, 전성기를 맞이하다
1970년대는 그야말로 백옥자의 전성기였다.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 땐 14m 57cm를 던져 금메달을 땄다. 이뿐만 아니라 재미 삼아 출전했던 투원반 종목에서도 동메달을 목에 걸었다.
“동인천역 광장에서 인천시장의 영접을 받았어요. 검은 지프를 타고 시청(현 중구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했죠.” 매번 경신되는 기록과 메달 행진에 세계도 그를 주목했다. 하지만 좋은 성적을 내지 못했을 땐 ‘연애 중이라 성적이 안 좋다’, ‘백옥자의 시대는 지났다’ 등 그에게 쏠린 기대만큼 억측성 보도도 함께 쏟아졌다.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백옥자는 그동안의 설움을 떨쳐내듯 또 한 번 신기록을 세우는 데 성공했다. 당시 그는 신우염을 앓고 있었고 무릎 부상으로 인해 컨디션이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심지어 중화인민공화국(현 중국)이 출전을 알리면서 체격이 좋은 선수들을 대거 내보냈다. 자연스럽게 언론도 백옥자의 2연패냐, 처음 출전한 중국의 메달이냐를 놓고 저울질을 했다.
“다들 180cm가 넘었어요. 거기에 체격까지 엄청나니까 거인 같았죠. 안 그래도 긴장해 있는데 더 무서운 소문까지 돌았어요. 북한도 그 당시 처음 출전했는데 잘하는 남한 선수들을 납치해가니 조심하라고요.(웃음)”
‘삐빅’ 하는 호각소리에 백옥자가 있는 힘껏 포환을 던졌다.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진 지점은 16m 28cm. 아시아 신기록이었다. 테헤란 아시안게임은 아시아 신기록을 세웠다는 점에서도 특별하지만, 자신의 별명 ‘아시아의 마녀’가 탄생한 대회이기 때문에 더욱 각별하다고 그는 말한다.
“싱가포르 기자가 처음 쓰기 시작한 단어예요. 경기 끝나고 저한테 오더니 ‘마녀’라고 써도 되겠냐고 물어보더라고요. 마녀는 좀 그렇지 않나… 했더니 자기 나라에선 마녀가 무서운 이미지가 아니라 마법을 부리는, 멋있는 존재라고 괜찮다는 거예요.(웃음) 에라 모르겠다, 그래라 한 거죠. 그렇게 ‘아시아의 마녀’가 탄생했어요.”
그에게 ‘아시아의 마녀’라는 호칭이 마음에 드는지 물어봤다.
“처음엔 어색했는데 차라리 여신이니 미녀니 하는 것보단 마녀가 나은 것 같아요.(웃음) 그 기자 덕분에 지금까지 불리는 멋있는 호칭이 생겼으니 오히려 고맙죠.”
2연패를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청와대 초청을 받았다. 만찬회 자리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딸 박근혜가 ‘결혼은 한국 남자와 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지 말고 꼭 한국에 살라’고 당부했단다. 당시 잘나가던 스포츠 스타는 거의 미국으로 이민을 가는 추세였기 때문에 한국 투척 종목의 일인자이던 백옥자마저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마음이 아니었을까.
꿈의 광장이자 지옥이었던 선수촌
아시안게임 2연패는 그의 엄청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태릉선수촌에서도 그는 이미 유명한 연습벌레였다. 비가 오는 날에도, 눈이 쌓인 날에도 쉬지 않았다. 그가 연습했던 자리엔 포탄을 맞은 것처럼 움푹 패인 자국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그 자리를 ‘백옥자 자리’라고 불렀다 한다.
“겨울엔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투포환이라는 게 포환을 턱 아래에 대고 던져야 하거든요. 꽁꽁 언 모래들이 포환에 묻어서 던질 때마다 턱을 쓸고 갔죠. 그럼 턱이 다 찢어져서 피가 나고 그랬어요.”
인터뷰 도중 그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손이 엄청 크기도 했지만, 오른손과 왼손이 좀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손 한번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전 누가 손 보여 달라 그러면 왼쪽 손을 보여줘요. 오른손은 못생겼으니깐.(웃음)”
그의 오른손엔 당시 노력한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검지, 중지, 약지는 4kg 포환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듯 옆으로 휘어져 있었다. 말 못할 고통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맞기도 많이 맞았다. 체벌을 받아 엉덩이엔 피멍이 들었고 뺨도 맞아가며 연습했다.
“지금은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만, 그 당시만 해도 ‘누구한테 말해야겠다’, ‘신고해야겠다’ 이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 그냥 더 좋은 성적을 거두라고 그러나보다 이렇게 생각했죠.”
힘들 땐 몰래 선수촌을 탈출하기도 했다. 들어오는 길엔 후배를 위해 쭈쭈바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외출하려면 도장으로 허락을 받아야 했어요. 근데 못 받았을 땐 경비 아저씨한테 살짝 윙크 한번 날리는 거죠. 그럼 아저씨가 이해해주시고 슬쩍 내보내주셨어요.(웃음) 지금은 선수촌 안에서도 아이스크림이니 우유니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데 그때만 해도 그럴 수 없었거든요. 우유 하나 더 먹으려면 아주머니께 인사를 100번은 해야 얻을 수 있었어요.”
선수촌의 규율은 까다롭기로 유명했다. 특히 남자와 여자가 같이 있는 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점심시간이 달랐고 휴게실에 있는 텔레비전을 볼 때도 함께 있을 수 없었다. 만약 같이 있는 장면이 목격되는 날에는 풍기문란이라는 명목하에 퇴촌이라는 무시무시한 벌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감시가 빡빡한 일상생활에서도 그의 유일한 해방구가 있었으니, 바로 국제대회를 나가는 날이었다.
“국제대회를 나가면 경기장 주변에 항상 클럽이 있었어요. 경기가 끝나면 할 것도 없고 혼자 심심하니까 클럽에 가서 노래도 듣고 했죠. 같이 대회 나간 선배들이 ‘백옥자 어디 있냐’ 하면서 찾으면 후배들이 ‘시끄러운 곳 가면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말하곤 했대요.”
인생 3막은 지금부터
20대 중반 건국대학교 체육과 동기인 김진도 씨와 결혼한 그는 은퇴 이후 남편을 따라 교직생활을 했다. 더불어 여자 농구선수인 딸 김계령 씨를 돌보느라 여러모로 바쁜 나날을 보냈다고. 근데 이제는 더 바빠졌단다. 얼마 전 부천대학교에서 은퇴한 그는 대한육상연맹 부회장으로 선출돼 새로운 출발을 했다.
“옛날 아시안게임 때 만났던 선수들도 이제는 임원이 돼서 한국을 방문하는데 감회가 색다르더라고요. 저도 더 늙기 전에 연맹에 보탬이 되는 부분은 돕고 그래야지요. 또 새로운 육상 인재를 발굴하는 게 목표예요. 우리나라 육상도 어서 부흥기를 맞이했으면 좋겠어요.”
한 시대를 풍미하고 아스라이 손 흔들며 사라졌던 대형 가수가 있었다. 화려한 드레스와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나와 1980년대 가요계를 주름잡던 가수, 바로 김연자(金蓮子·58)다. 오랜 시간 일본에서 ‘엔카(えんか)의 여왕’으로 군림하던 그녀. 한국으로 돌아와 조용히 활동하는가 싶더니 8년 만에 시대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트로트도 엔카도 아닌 강렬한 사운드의 댄스음악 이른바 EDM으로 말이다. 세대를 뛰어넘어 젊은이들의 마음까지 단숨에 사로잡은 김연자와의 만남. 수은등 불빛 아래를 지나 찬란한 인생을 다시금 맞이한 그녀는 이렇게 외친다. 아모르파티(Amor Fati!)!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고.
김연자는 몰라도 ‘아모르파티’는 안다
가수 김연자가 부른 ‘아모르파티’의 인기는 대단하다. 좋아하는 연령대도 어린이에서부터 시니어 세대까지 다양하다. TV는 말할 것도 없고 거리 곳곳에서 심심치 않게 ‘아모르파티’가 흘러나온다. 한 번 들으면 헤어 나올 수 없는 전자악기 리듬에 몸을 맡기다가 결국에는 가사의 매력에 더 빠져버리고 마는 노래가 ‘아모르파티’다.
“이 곡을 쓴 작곡가 윤일상씨가 어떤 음악을 만들고 싶냐고 묻더라고요. 지금까지 내가 굴곡진 인생을 살았지만 이 모든 것이 앞으로 다가올 내 인생을 위해서 있는 거라고 말했습니다. 후회하지 않고 앞만 보고 살겠다는 ‘인생 찬가’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죠. 그렇게 탄생한 곡이 ‘아모르파티’입니다. 가사는 ‘철이와 미애’의 신철씨가 써줬어요. 아모르파티란 운명을 사랑하라는 뜻이라 하더군요.”
‘아모르파티’는 2013년 발표곡이다. 윤일상씨는 이 노래가 뮤직비디오를 만들어놓아야 할 대박곡이라고 예견했지만 지금과 같이 폭발적이지 않았다. 노래가 빠르다 보니 따라 부르기 힘들어 중년 팬들에게 어려운 곡이었다. 4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 곡의 매력 포인트를 찾아낸 이들은 중년 팬이 아닌 10대 팬들. 올해 TV의 한 음악 프로그램을 방청한 10대들이 김연자가 부르는 ‘아모르파티’를 듣고 SNS에 퍼트린 것. 신나고 모든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음악을 유행에 민감한 젊은이들이 찾아내 그들의 문화로 김연자와 ‘아모르파티’를 끌어당긴 것이다. 음악 순위 역주행 신화는 이렇게 탄생했다.
“어제 무주 구천동에서 노래를 하고 무대에서 내려왔는데 학생들이 ‘꺅! 언니!’ 하고 난리가 났어요. 저인 줄 몰랐는데 시선이 저를 향하고 있더라고요. 어머니들이 환호해 주시는 건 있었어도 이런 기분 처음이죠.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거든요. 근데 어쩜 그렇게 꺅 하고 소리를 잘 내요(웃음)? 육십을 바라보는 나한테 언니래요. 근데 너무 좋더라고요. 새로운 행복감에 젖어 있어요.”
국보급 가수 한류 열풍 초석을 다지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전후하여 김연자의 인기는 톱스타란 말로 부족했다. TV만 틀면 안 나오는 곳이 없었다. 가요 프로그램이며 합동 공연이며 대미는 늘 김연자 차지.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간드러지면서도 폭발적인 목소리는 국보급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홀연히 사라졌다. 너무 갑작스러운 행보. 대스타가 한순간에 떠나는 일이 있었던가.
“사라진 게 아니에요. 시댁이 일본이었고, 속으로 늘 그곳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때 우리나라에서 계속 일이 잘되니까 갈 기회를 놓치고 있었던 거죠. 마침 무슨 사정인지 당시 매니저가 일본에 가도 된다고 했어요. 이때다 싶어 얼른 간 거죠. 그런데 그때가 일본에 처음 간 것은 아니었어요.”
이발소를 하던 아버지 손에 이끌려 열네 살 어린 나이에 가요계에 데뷔한 김연자는 일본 음반회사 오디션을 통해 일본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다. 그때 나이가 열여덟이었다.
“제가 운이 좋은지 주위 사람들 도움으로 좋은 기획사에 들어갔어요. 월급이 꽤 괜찮았던 곳입니다. 25만엔을 벌면 집으로 20만엔을 보냈어요. 엔화 가치가 높을 때라 그런지 한국에 갈 때마다 집이 바뀌더라고요.”
김포공항으로 가족이 마중 나오지 않으면 집을 찾아갈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 일본 생활을 접고 들어갔을 때는 작은 연립주택을 장만했다. 일본에서 보낸 돈을 어머니께서 열심히 모아주신 덕이다.
“3년 동안의 일본 생활이 성공적이지 않았지만 제 인생에는 많은 도움이 됐어요. 실패의 원인을 생각해봤는데 일본을 갈 때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더라고요. 진짜 몸만 갔죠. 일본에 다시 가려면 일본에 대해서 알아야겠다 싶어서 일본어와 일본 문화, 한문 등을 따로 공부했어요. 스물아홉 살에 다시 갔을 때는 마음이 참 편했어요.”
한류의 원조, 20년 생활의 막을 열다
서울올림픽 찬가였던 ‘아침의 나라에서’를 일본어로 번안해 부르며 자연스럽게 일본 음악계에 진출했다. 각종 공연이며 TV며 행사며 한국에서는 대형 가수였지만 신인의 자세로 매사 임했다. 언어의 장벽도 내려앉았다. 일본인들도 감탄하면서 그녀의 노력에 박수를 보냈고 응원해줬다.
“다 내려놓고 마음만은 스타라는 생각으로 갔어요. 캠페인에도 나가고요, 일본 신인들하고 똑같이 했죠.”
유독 공연 무대가 많은 일본에서는 노래 가사를 완벽하게 외우는 것만이 살 길이었다. 엔카 가수이지만 탱고, 블루스, 발라드 등 다양한 노래를 배우고 관객 앞에서 선보이는 것이 일상이었다. 무대에서 최소 20곡은 소화해야 하는 강행군. 한국어도 아니고 일본어로 된 노래를 부른다는 것은 솔직히 어려운 일이었다.
“매년 가을에 3400석 규모의 NHK홀에서 콘서트를 했어요. 공연을 위해서 여름에는 계속 노래 연습을 했어요. 가끔 쉴 때는 집 앞 공원으로 반려견들을 데리고 나가 산책하면서 노래 가사도 외우고 그랬어요. 사람들이 없으면 노래 연습을 하느라 중얼중얼… 그때 당시 저희 집에 많을 때는 반려견이 다섯 마리도 있었는데 사람들이 저를 얼마나 이상하게 생각했겠어요(웃음). 일본에서의 여름은 그렇게 보냈습니다.”
나도 뮤지컬 배우였다!
일본에서의 다양한 활동 이야기를 하다 보니 뮤지컬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자연스럽게 김연자의 뮤지컬 도전기로 이어졌다.
“니나가와 유키오(1935~2016)라는 유명한 연출가가 계셨는데 제 목소리가 좋다고 불러주셨어요. 라는 작품에서 집시 역할을 맡았어요. 연기 진짜 어렵더라고요. 노래는 5절까지 이어져도 하나도 안 잊어버리는데 대사는 맨날 까먹는 거예요(웃음).”
역시 김연자의 이름에 걸맞게 개런티도 주연배우 다음으로 많이 받았다고. 그런데 개런티로 받은 돈을 의상비로 다 써버렸다는 톱스타 김연자.
“사실 말이 좋아 주인공 다음이지 뮤지컬 한 달 하고 받은 개런티가 제가 노래 하루 불러서 받는 개런티에도 못 미쳤어요. 원래 의상팀에서 의상을 다 준비해주기는 했는데 너무 값싸 보이는 거예요. 역할이 집시이지만 밍크도 가짜고, 자존심이 너무 상했어요. 그래서 선생님께 제 옷으로 다 하겠다고 허락받고 따로 준비했어요. 그랬더니 개런티가 그렇게 없어지더군요(웃음).”
동경과 오사카에서 공연하는 동안 동생들도 공연을 관람하러 왔다고.
“나 같지가 않았나봐요. 저는 노래 부를 때 외에는 저 같지가 않아요. 다른 거 하면 작아 보이고 불안해 보이고요. 아, 연기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구나. 그때 알았죠.”
단 한 번의 배우 체험 뒤 연기 분야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일본에서 한국 가수 그리고 한국 사람
지금 젊은이들에게는 생소하겠지만 김연자가 일본으로 무대를 옮겼을 때는 일본 문화가 개방되기 전이었다. 문화·정치적으로 냉랭하던 시절을 버티고 이겨내 엔카 여왕의 자리에 앉은 김연자. 결코 쉬운 일도 아니었고 모두에게 허락된 일도 아니었다. 처음보다 마음이 편했다지만 한국인으로서 막중한 책임감은 물론이고 숱한 편견과 맞서야 했다.
“제가 그냥 보통 가수였다면 진작 문제 일으키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거예요.”
한창 일본에서 활동할 때 일이 힘들면 여권을 들고 길을 나서기도 했다는 충격 발언.
“한국에 가려고 공항으로 갈 택시를 잡는 거죠(웃음). 그런데 살던 동네가 시내와 너무 떨어져서 택시가 안 오는 거예요. 그러면 택시 기다리다 생각을 하는 거죠. 가수 김연자에 대한 것은 참겠는데 ‘한국 가수’ 김연자가 뭘 잘못했다는 기사는 견디기 힘들더라고요. 내가 한국으로 가버리면 이런저런 매스컴에서 ‘한국 가수’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떠들어댈 것이 뻔하잖아요. 한국 사람으로서 어떤 부정적인 말 한마디도 듣기 싫었어요.”
길에 서서 망설였던 적이 몇 번인지 모른다 했다. 그때마다 다음 날 신문에 올라갈 지독한 기사 제목이 떠올랐다. ‘한국 가수 김연자가 스케줄 펑크 내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래, 우리나라를 힘들게 하면 안 되겠지. 그러고는 마음 다잡고 집으로 돌아갔어요. 도망가고 싶을 때마다 ‘한국 사람’이라는 사실 하나 때문에 내 감정을 억누른 것 같아요. 그렇게 20년을 일본에서 생활했어요.”
아버지 때문에 한국행을 결심하다
“우리 아버지는 말이 안 통했어요.”
이렇게 말하면서도 아련하게 말끝이 잦아든다. 광주에서 이발소를 하시던 아버지에게 노래 잘 부르는 딸은 그저 자랑이었다. 아버지의 “야! 너 서울 가서 가수 돼!” 한마디에 무대에 올라갔다가 아직도 그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삶을 살고 있다.
“아버지 때문에 가수가 된 거죠. 감사하죠. 가수 될 운명을 알아보시고 어린 시절에 빨리 뭔가를 겪게 해주셨죠. 한국 복귀도 아버지 때문이었고요.”
8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가족들은 바쁜 김연자에게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돌아가시고 열흘이 지난 다음에 엄마가 전화를 하셨어요. 스케줄이 있는지 물으셔서 없다고 했더니 그제야 아버지가 떠났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날 일본의 작은 고깃집에 앉아서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아버지도 공연 보러 일본에 많이 오셨었죠.”
아버지가 타계한 후 한국으로 돌아온 김연자는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오가며 활동 중이다. 그사이 재일교포 남편과는 각자의 길을 가기로 하고 헤어졌다. 김연자가 일본에서 거액의 돈을 벌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남겨진 재산은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매니저 겸 밴드 단장이던 전 남편을 평생 동반자로 생각했기에 쓰지 않았던 계약서가 문제였다. 일본에서는 계약서를 쓰지 않은 김연자를 오히려 더 이상하게 생각했다. 일본 팬들과 연예 관계자들을 마주하면서 사정을 얘기했고 조금씩 김연자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전 남편과 지낸 세월이 아깝지 않은지 물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거액은 숫자일 뿐이죠. 제 눈에 현금이 오가는 것도 아니고요. 사실 제가 후회를 별로 안 해요. 이 순간이 제일 중요해요. 지금이 이 순간이 있어야 내일도 있잖아요. 난 항상 그렇게 살기 때문에. 어떨 때는 좋은 기억이건 나쁜 기억이건 다 잊어버려요(웃음). 단념도 빠르고 꿈도 빨리 꾸고. 그런 거 없어요. 그리고 저는 부자는 아니지만 하루 삼시 세끼 잘 챙겨먹고 사니까 괜찮아요. 나름 부동산도 있고 집도 있어요.”
어렸을 때 많이 의지했던 전 남편에 대해 그녀는 남은 감정이 없는 듯했다. 오히려 고마운 마음을 내보였다.
“솔직히 저나 전 남편이나 0에서 시작했죠. 오랜 시간 정신적으로 의지했어요. 일본 연예계에 대해서도 그 사람이 전부 알려줬어요. 서로 상부상조한 거죠 뭐.”
미국에 셰어가 있다면 한국에는 김연자!
“어머니가 오래전 저에 관한 점을 보셨다는데 제가 일흔까지 노래를 부른대요.”
처음에 그 얘기를 우습게 들었는데 이제 슬슬 현실이 돼가는 느낌이 밀려온다고. 하고 싶은 공연만 하고 여유롭게 사는 것을 꿈꿨는데 젊은 가수들하고 똑같이 뛰고 있어 자기 모습이 아닌 것 같으면서도 좋다.
김연자와 인터뷰를 마치고 미국 가수 셰어(Cher)가 떠올랐다. 1960년대까지 포크 가수로 활약하던 셰어. 한참을 배우로 지내더니 1999년 ‘빌리브(Believe)’란 음악을 선보이며 전 세계를 전자 음악 열풍에 빠뜨렸다. 올해 71세인 셰어는 지난 5월 빌보드 뮤직 어워드에서 빌보드 아이콘 어워드를 수상했다.
김연자 또한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성인 팬을 상대로 노래 부르다 어느 날 갑자기 세대를 뛰어넘어 EDM 열풍에 불을 지폈다. 71세의 셰어 언니도 망사옷 입고 무대를 누비고 있으니 한국 ‘EDM 대모’, ‘연자방아’로 거듭난 70세 김연자의 무대도 기대한다.
소녀들이 떼를 지어 노래하고 춤추는 이른바 걸그룹. 하루가 멀다 하고 생겼다 사라지는 이들에게도 조상은 있다. 바로 ‘김시스터즈’다. 한국전쟁 전후 미군 앞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 세 자매. 가수 싸이보다 훨씬 오래전 한국을 넘어 미국 전역을 흥분시킨 주인공들이다. 노래뿐만 아니라 춤, 악기에도 뛰어났던 한국 원조 걸그룹 김시스터즈. 다큐멘터리 영화 이 그들의 파란만장 이야기를 담았다.
미국 무대! 무한 가능성, 겁 없는 도전!
숙자, 애자, 민자 세 명으로 구성된 ‘김시스터즈’는 1953년 미8군 무대를 통해 데뷔했다. 배고픈 시절 가족의 생계를 위해 파란 눈의 병사 앞에 올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노래를 부른 대가로 위스키 같은 현물을 받았다고. 이를 팔아 가족의 허기를 달랬으며 또 미래를 꿈꿨다. 노래뿐만 아니라 춤이면 춤, 악기면 악기 뭐든 주어지면 완벽한 하모니로 무대를 장악했다. 미8군에서 그들의 무대를 본 다수의 이방인은 김시스터즈라면 미국 무대에서도 통할 것이라며 입을 모아 말했다. 무한한 가능성에 모험을 걸었다. 미국 라스베이거스로 건너가 한 호텔의 전속 가수로 이름을 알리다 1959년 미국의 인기 TV 쇼 에 화려하게 등장했다.
는 비틀스, 엘비스 프레슬리, 롤링 스톤즈 등 당대 최고의 스타들만 서는 꿈의 무대. 상상불가이지만 김시스터즈는 에 비틀스보다 더 많은, 20회 이상의 출연 회수를 기록했다. 또 시카고 팔머하우스에서 공연을 하는 등 1960년대 미국 전역에서 화제의 동양 연예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원조 K-POP 스타를 이야기하다
은 아시아 최초로 미국 라스베이거스에 진출한 걸그룹, 원조 K-POP 스타인 김시스터즈의 음악 여정을 담아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뜯기고 찢긴 세월 속에서 탄생한 김시스터즈. 이들은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적 증거이고 폐허 속에서도 화려하게 꽃을 피운 자랑스러운 ‘우리’였다. 무엇보다 그들의 성공이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라 피나는 노력과 땀의 결과물이었다는 사실이 김시스터즈 막내였던 민자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하게 전달되고 있다. 음식과 언어 소통 문제로 힘들었던 시간, 고된 연습 과정 등 화려한 이면 뒤에 가려진 ‘김시스터즈’ 각자의 인생 이야기도 영화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우월 유전자에 노력이 더해진 국내 최초 걸그룹
대한민국 최초 걸그룹, 김시스터즈의 온몸에는 전설적인 천재 음악가 집안의 우월 유전자(?)가 흐르고 있다. 은 한국 대중음악 역사의 시작점에 있는 김시스터즈의 어머니와 아버지 등 가족의 모습을 함께 담았다. 김시스터즈 멤버 숙자와 애자는 ‘목포의 눈물’로 유명한 이난영과 천재 작곡가 김해송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룹의 막내인 민자는 이난영의 오빠이자 작곡가인 이봉룡의 딸. 언니들과 견주어 절대 뒤지지 않는 재능을 지녔다. 그들은 우월 유전자를 과신하지 않고 진짜 자기의 것으로 만드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이난영은 김시스터즈 성공의 일등공신이다. 그룹을 결성한 뒤 노래와 춤, 악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훈련을 도맡았던 프로듀서가 바로 가왕 이난영이다. 아버지 김해송은 재즈, 만요(漫謠), 오페라 등 장르를 가리지 않던 작곡가이며 ‘오빠는 풍각쟁이야’, ‘연락선은 떠난다’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민자의 아버지 이봉룡도 ‘연락선은 떠난다’, ‘낙화유수’ 등 명곡을 작곡한 당대 유명 작곡가다.
은 ‘김시스터즈’의 성공 이야기와 그들의 가족 이야기 더 나아야 한국 대중음악의 시초를 찾아가는 역사 여행이기도 하다.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작곡가 손목인의 아내 오정심과 ‘노란 샤쓰의 사나이’ 작곡가인 손석우가 등장해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를 육성으로 들려준다.
음악에 무게중심을 두다
은 음악 다큐멘터리다. 김시스터즈가 활약했던 영상을 토대로 ‘김치 깍두기’, ‘아리랑’, ‘트라이 투 리멤버(Try to Remember)’, ‘찰리 브라운(Charlie Brown)’, ‘마이클 노를 저어라(Michael Row the Boat Ashore)’를 보고 들을 수 있다. ‘찰리 브라운’은 김시스터즈가 의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노래. 미국 보컬그룹 코스터스(The Coasters)의 히트곡을 리메이크한 곡이다. 특히 김시스터즈가 미국에서 활동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담아낸 ‘김치 깍두기’는 음악을 넘어 시대와 가슴 아픈 추억을 담아냈다. 시간이 지나도 가슴을 울리는, 잊을 수 없는 그 시절의 명곡들을 생생하게 만날 수 있는 은 열정 가득한 공연 장면들이 그 어떤 대규모 콘서트보다 더 흥겨운 재미와 감동을 안겨준다. 영화의 명장면을 꼽으라면 단연 김시스터즈와 이난영이 함께한 공연이다. 한복을 곱게 입은 이난영이 구성진 목소리로 ‘목포의 눈물’을 부르는 모습을 본 적은 익히 있지만 무릎까지 오는 플레어스커트에 세련된 화장과 머리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은 상상해본 적 없다. 그녀를 중심으로 율동을 하고 화음을 맞추는 김시스터즈의 모습은 온몸에 전율과 감동을 전하기에 충분하다.
>>영화정보
감독 김대현
출연 김민자, 김숙자, 김애자, 이난영 등
러닝타임 70분
만화로 보는 패션디자이너 히스토리이다. 에르메스, 루이뷔통, 버버리, 구찌, 페라가모, 샤넬, 크리스찬 디오르 등 26명의 명품 역사에 관한 책이다. 2011년 초판을발행하여 2016년에 무려 22쇄를 기록한 책이다. 패션일러스트인 강민지씨가 글과 그림으로 만든 책이며 루비박스에서 출판했다. 책값이 18,900원으로 다소 비싼 편이나 410쪽의 방대한 분량이라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하다. 만화가 아니었으면 이 계통의 전문가가 아니면 보기 어려웠을 것이다.
프랑스처럼 샤넬, 크리스찬 디오르, 루이 뷔통 등 여러 유명 명품을 거느린 나라를 보면 부럽다. 브랜드 매출이 수억 불이다. 브랜드 하나가 어지간한 나라의 섬유 수출 총액을 넘어선다. 그러나 국가적인 자존심도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섬유왕국’이라는 소리를 오래전부터 들었지만 아직 세계에서 알아주는 명품에서는 미약하다는 점은 아쉬운 일이다. 가까운 일본의 이세이 미야케, 요지 아마모토 등도 있고 중국계 미국인인 베라 왕도 있다.
이 책을 보면 명품 탄생의 조건을 알 수 있다. 명품 브랜드들의 탄생은 창립자들의 어린 시절부터 달랐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재봉 일을 하는 부모 영향을 받았거나 백화점, 부티크에서 일한 경험 등이 작용했다. 패션학교에서 배워 이미 20대부터는 각광을 받았다. 그런데 우리 실정은 패션을 그리 촉망되는 직업으로 보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패션을 제대로 배울 환경이 안 되는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이 들어 패션에 입문하면 창의성에서부터 늦다.
명품 브랜드가 되려면 마케팅이 중요하다. 스타 마케팅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명품들은 연예계 스타들이나 영화, 아카데미 시상식 등에서 스타들이 입었을 때 입소문을 탄다. 그레이스 켈리, 제인 버킨, 오드리 헵번 같은 유명인들이 가방을 들고 나타나면 금방 유명세를 타고 켈리가방, 버킨 가방 등으로 명명되기도 한다. 영화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덕분에 프라다는 제2의 도약을 하기도 했다. 영화 ‘애수’ 등에서 주연 배우가 입고 나와 더욱 우명해진 버버리 코트는 어지간한 전쟁 영화에 다 나온다. 윈스턴 처칠을 비롯해 오늘날 조지 부시, 빌 클린턴 같은 사람도 입어서 유명하다. 페라가모는 마릴린 몬로가 ‘7년만의 외출’ 영화에서 스커트가 날리는 유명한 장면 덕분에 그때 신었던 구두로 유명해졌다.
명품은 선진국 부유층의 취향에 맞춘 옷이라야 한다. 아니면 유명 스타들이 입어줘야 한다. 길은 많다. 세계 유명 패션학교의 문을 두드리거나 패션 콘테스트 입상 같은 방법도 있다.
명품들은 맞춤복인 오트 쿠튀르 의상을 연상하지만, 명품들의 성장과정을 보면 그렇지도 않다. 말안장엣 시작하여 가방으로 유명해진 에르메스도 있고, 모자부터 시작한 샤넬도 있다. 나중에는 향수까지 카테고리를 넓혔다.
이들 명품 브랜드들은 대부분 가족 경영을 했다. 그래야 특성을 이어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디자이너를 영입하는 경우도 있다. 명품 브랜드를 여러개 소유한 회사에서 키우는 방법도 있다.
이 책을 보면 명품 브랜드들의 탄생과 성장과정을 알 수 있다.
두 질문의 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운동인 씨름과 씨름 선수다.
최근 급격하게 인기가 떨어졌지만 1980~90년대, 장충체육관을 비롯한 전국 곳곳에 있는 체육관은 연중 열리는 민속 씨름 경기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짧은 시간에 불꽃같이 피어오른 민속 씨름 인기의 중심에 ‘만 가지 기술’을 구사한다는 이만기가 있었다.
민속 씨름이라는 이름은 1983년 씨름이 프로화되면서 기존의 아마추어 씨름과 구분하기 위해 만든 명칭이다. 씨름은 모두가 알고 있듯이 아주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이 즐긴 전통의 스포츠다.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몽골 스페인 스위스 일본 등지에 씨름과 비슷한 운동이 있고 민속 씨름 전성기에는 몽골 스페인 등과 교류하기도 했다.
근대적 스포츠로서 씨름은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나타난다. 이 무렵 단성사의 소유주 박승필(朴承弼, 1875~1932)이 조직한 ‘유각권투구락부’에서 회원들에게 씨름과 유도, 복싱을 익히도록 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1912년 10월 7일 단성사에서 씨름과 유도, 복싱 3개 종목 경기가 열려 점수제에 의해 우열을 가리고 상품을 줬다는 기록도 있다.
야구 농구 배구 등을 보급하며 한국 근대 스포츠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서울YMCA는 민족 스포츠인 씨름을 장려하기 위해 1928년부터 1936년까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의 스타는 김윤근(金潤根)이었다. 1930년대의 이만기인 셈이다. 김윤근은 이 대회를 비롯해 선수 시절 200여 차례 씨름대회에서 황소 200여 마리, 우승기 88개를 차지한 스타플레이어였다. 김윤근은 1945년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뒤에는 대한씨름협회 회장을 지냈고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국민방위군 사령관을 맡았으나 방위군 비리와 관련해 사형됐다. 씨름계로서는 큰 인물이었지만 역사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1927년 12월 27일 창립한 조선씨름협회는 농구 축구와 함께 일제 강점기에 우리 힘으로 만든 몇 안 되는 경기 단체 가운데 하나다. 그 시기 거의 모든 종목은 조선체육회가 대회를 주관하고 주최했다. 서울YMCA가 전조선씨름대회를 개최한 1년 뒤인 1929년 9월 28일 조선체육회는 휘문고보 운동장에서 조선씨름협회와 공동 주최로 제 1회 전조선씨름대회를 열었다. 경신학교와 휘문고보, 중동학교, 양정고보, 중앙고보, 협성실업, 보성고보, 숭인상업 등 8개 팀이 출전한 단체전 결승에서 경신학교는 보성고보를 접전 끝에 7-6으로 누르고 첫 우승의 영예를 안았다. 개인전 결승에서는 이도남이 최재빈을 물리치고 첫 패권을 차지했다.
조선체육회는 제 16회 전조선종합경기대회를 1935년 10월 22일부터 나흘 동안 경성운동장을 중심으로 열었다. 이 대회는 지난 대회의 육상과 축구, 농구, 야구, 정구 등 5개 종목에 씨름, 유도, 역기(역도), 검도 등 4개 종목을 추가했다. 씨름이 오늘날 전국체육대회의 정식 종목이 된 것이다.
이런 역사 속에 씨름은 우리 민족의 혼을 이어 주는 운동으로 꾸준히 발전했고 프로화된 민속 씨름 직전의 스타플레이어로는 이만기의 직계 선배라고 할 수 있는 김성률 장사를 꼽을 수 있다. 김성률 장사는 1970년대 최고의 씨름 선수였고 운동 능력이 뛰어나 레슬링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1974년 제 55회 대회부터 1976년 제 57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 레슬링 슈퍼헤비급 자유형과 그레코로만형 2관왕을 3년 연속 차지한 것을 비롯해 1983년 제 63회 대회까지 전국체육대회에서 금메달 12개와 은메달 2개, 동메달 3개를 목에 걸었다. 쉽게 믿기 어려운 성적이다. 하형주가 씨름 기술을 응용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95kg급에서 금메달을 차지한 것은 씨름과 레슬링, 유도로 이어지는 연계성 그리고 씨름 기술의 우수성을 입증한다.
1983년 4월 17일 장충체육관, 약관의 이만기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고 장소다. 초등학교 때 씨름을 배운 지 10년 만에 이룬 첫 개인전 우승이자 프로화된 씨름 사상 첫 천하장사 타이틀을 딴 날이고 장소이기 때문이다. 이후 1990년 27세의 나이로 은퇴하기 전까지 천하장사 10번, 한라장사 7번, 백두장사 19번 그리고 11차례의 번외 경기까지 이만기는 길지 않은 선수 생활 동안 47차례 우승의 놀라운 성적을 올렸다. 상금이 아니고 예전처럼 황소를 줬으면 큰 농장을 차려도 됐을 것이다.
초대 천하장사 이만기의 빛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스포츠팬들이 잊고 있지만 1980년대 초반 씨름판에는 내로라하는 장사들이 군웅할거했다.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 ‘인간 기중기’ 이봉걸, ‘털보' 이승삼 그리고 홍현욱, 최욱진 등이 유력한 초대 천하장사 후보들이었다. 지방대회든 전국대회든 우승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이만기는 경력도 그렇고 나이도 어려 우승 후보군에 들 수가 없었다. 그때 이만기는 지방에 있는 대학(경남대학교 2학년)에서 씨름을 하는 무명의 선수였을 뿐이다.
천하장사 경기가 열리기 하루 전인 4월 16일 펼쳐진 한라장사 결승전은 약관의 천하장사 탄생 예고편이었다. 그 무렵 최고 수준의 기술 씨름을 자랑하던 최욱진(경상대학교 3학년)은 이만기를 3-2로 누르고 한라장사 꽃가마에 올랐다. “나는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가 보다.” 이만기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게다가 체격이 이만기보다 작은 최욱진이 자세를 낮추며 파고드는 바람에 가슴에 약간의 부상까지 있었다.
민속 씨름의 성공적인 출발을 알리는 초대 천하장사 결승전 카드는 절묘하게 이뤄졌다. 키 172cm의 최욱진이 준결승에서 182cm의 홍현욱을 누르고 결승에 올랐다. 한라장사와 천하장사 두 개의 타이틀이 눈앞에 다가왔다. 8강을 목표로 했던 이만기(182cm)는 준결승에서 ‘한 번만 이겨 봤으면 좋겠다’고 마음속으로 수없이 생각했던 이준희(195cm)를 꺾고 결승에 진출했다. 몸무게에 관계없이 겨루는 천하장사 경기에서 기술 씨름의 두 달인이 한 체급 위인 백두급 장사들을 모조리 쓰러뜨리고 결승전 모래판에서 마주 서게 된 것이다.
기술 씨름 달인들의 팽팽한 접전이 이어지는 동안 장충체육관의 열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지 2년여가 지난 그때 전국 방방곡곡의 가정에서는 총천연색으로 중계되는 씨름 경기를 보는 이들이 넘쳐 났다. 요즘처럼 시청률 자료가 나왔다면 ‘국민 드라마’의 수치를 가볍게 넘어섰을 것이다.
2-2로 맞선 가운데 이룰 만큼 이룬 이만기로서는 심적 부담이 상대적으로 적었고 최욱진은 한 판만 잡으면 한라장사에 이어 천하장사까지 차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니 상대적으로 심적 부담이 더했을 것이다. 이때 이만기는 평소 연습을 거의 해 보지 않았던 호미걸이를 승부수로 던졌다. 씨름계에서 쓰는 표현인, ‘뽑아 드는’ 들배지기가 이만기의 상징적인 기술이고 이외 밭다리, 잡채기, 뒤집기 등 다양한 기술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이후 7년여 동안 모래판을 평정하게 되는 이만기지만 이날 구사한 호미걸이 기술은 이제 와 생각해도 ‘왜 그때 그 기술을 썼는지 알 수 없다’고 한다. 유도 기술과 비슷한 호미걸이 기술로 이만기는 자신의 선수 생활 첫 개인전 우승이자 천하장사 우승을 이뤘다.
천하장사 이만기하면 떠오르는 첫 번째 이미지가 모래판에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모래를 흩뿌리며 포효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장면을 찍은 수많은 사진에는 비밀이 숨어 있다. 이만기는 1980년대 스포츠 전문 사진기자로 활동한 R씨와 매우 친했다. 이만기는 승리 세리머니를 할 때마다 R 기자가 카메라를 들고 있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봇물처럼 터진 프로화의 물결
8월을 스포츠 열기로 뜨겁게 달군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선수단 가운데에는 적지 않은 프로 선수들이 있었다. 24세 이상 와일드카드 3명의 선수를 포함한 18명의 남자 축구 대표팀과 여자 배구 대표팀은 전원이 프로 선수였다. 축구는 잉글랜드 독일 포르투갈 오스트리아 중국 일본 등 외국 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가 7명이나 됐다.
한국 스포츠로서는 1982년을 아마추어와 프로 양대 축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원년으로 기록할 만하다. 물론 이때 이전에도 프로 종목은 있었다.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 김기수가 대표하는 프로 복싱과 1960~70년대 최고 선수였던 한장상으로 대표되는 골프가 1980년대 이전의 몇 안 되는 프로 종목이었다. 그러나 이들 종목은 개인 종목으로 시장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다.
1982년 단체 종목인 야구가 프로화하면서 국내 스포츠계는 본격적인 프로화 시대를 맞게 됐다. 그리고 이듬해인 1983년 아마추어 팀을 포함한 축구 프로 리그인 슈퍼리그(K리그의 전신)가 출범했다. 민속 경기인 씨름도 같은 해 프로화가 돼 이만기 등 신예의 등장과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굳이 순서를 따지면 1982년 3월 프로 야구, 1983년 4월 민속 씨름, 1983년 5월 프로 축구다. 이들 종목은 앞서기니 뒤서거니 프로화 물결에 합류했다.
잠시 끊겼던 프로화 물결은 1990년대 중반 농구대잔치를 무대로 펼쳐진 대학 농구의 폭발적인 인기에 힘입어 1997년 남자 농구가 프로화되고 이어 여자 농구, 그리고 2000년대 들어서 남녀 배구가 프로화가 되면서 국내 인기 종목 대부분이 프로로 재탄생했다.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다. 또 프로화가 되면서 해당 종목의 경기력이 크게 향상돼 축구는 숙원이었던 월드컵 본선 진출을 1986년 멕시코 대회에서 이룰 수 있었고 이후 201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회까지 8회 연속 월드컵 본선에 나서는 기록을 세웠다. 올림픽에서도 자동 출전한 1988년 서울 대회를 시작으로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 대회까지 8회 연속 본선에 올랐다. 이 사이 2012년 런던 대회에서는 동메달을 차지했다.
1992년 바르셀로나 대회 때 뒤늦게 올림픽 정식 종목이 된 야구는 프로화를 기반으로 끌어올린 경기력으로 2000년 시드니 대회 동메달, 2008년 베이징 대회 금메달의 성과를 이뤘다. 한국 야구는 정식 종목 재진입이 확실시되는 2020년 도쿄 올림픽에서 다시 한번 메달에 도전할 만한 경기력을 유지하고 있다.
1980년대 프로화 3총사 가운데 씨름은 2000년대 들어 급격한 인기 하락과 함께 프로 종목으로서 내세울 만한 콘텐츠 없이 암흑기를 겪고 있어 스포츠 팬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글 신명철 편집위원, 전 편집국장 smc6404@naver.com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제가 어린데 (노래가)좋네요. 저도 나이 곧 들겠지요.”(박혜인) “올해 29세인데 이 노래가 심금을 울려요.”(lemon77) “나이 들어 들으니 정말 와 닿는 가사네요.”(강경숙) “중학교 때 눈물 흘리며 듣던 곡인데 50 가까운 지금 들어도 눈물이 나요.”(원석정)…
한 노래에 대한 네티즌의 반응이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 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올해 초 큰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에 OST로 삽입된 출신 가수 김필과 김창완의 콜라보레이션(collaboration)을 통해 재탄생한 ‘청춘’이다. 신세대 가수 김필과 중견 가수 김창완의 콜라보레이션곡 ‘청춘’은 원곡이 발표된 지 3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되살리는 음악으로, 신세대에게 요즘 대중음악에서 접할 수 없는 정서와 의미가 담보된 노래로 다가간다.
최백호와 후배 가수 린이 5월 14일 방송된 KBS 에서 1982년 발표해 대중의 폭발적 사랑을 받은 김수희의 ‘멍에’를 새로운 감각으로 편곡해 신선한 콜라보 무대를 선보여 관객과 시청자의 큰 박수를 받았다.
요즘 대중음악의 가장 큰 트렌드이자 키워드는 콜라보다. 콜라보레이션은 마케팅에서 각기 다른 분야에서 지명도가 높은 둘 이상의 브랜드가 손잡고 새로운 브랜드나 소비자를 공략하는 기법으로, 주로 패션계에서 디자이너 간의 공동 작업을 일컫는 용어로 사용됐다. 최근 들어 콜라보는 대중음악에서 가수와 가수 등 음악가끼리, 혹은 다른 분야의 아티스트 등과 일시적으로 팀을 이뤄 작업하는 것을 의미하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2014년 남자 가수 정기고와 걸그룹 씨스타 멤버 소유의 콜라보곡 ‘썸’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가수들의 콜라보가 하나의 인기 트렌드로 강력하게 부상했다. JYP엔터테인먼트 소속의 미쓰에이 수지와 SM엔터테인먼트 소속 엑소 백현을 비롯한 소속사가 다른 가수들, 록그룹 국카스텐의 하현우와 트로트 가수 주현미 등 장르가 다른 가수 등 다양한 형태의 가수들의 콜라보를 통해 탄생한 노래들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김창환-아이유의 ‘너의 의미’, 비와 태진아의 ‘라송’등 세대가 다른 가수들의 콜라보는 큰 관심을 끌고 있다. 1980~1990년대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낸 독특한 음색의 이광조와 인디 가수 요조의 ‘케이팝 클래식(K-POP CLASSIC)’을 비롯해 아이유와 양희은, 이문세와 슈퍼주니어의 규현 등 40~60대 가수와 10~20대 가수 및 아이돌 그룹의 콜라보 음반에서부터 공연까지 신구 세대 가수의 콜라보 작업이 왕성하게 전개되고 있다.
음반 기획자들은 “대중음악계에서 요즘 전개되는 가수들의 콜라보는 다양한 형태로 진행돼 앞으로 더 영향력이 커질 것이다. 아이돌 가수의 경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레전드 가수와 호흡을 맞출 수 있고, 중견 가수의 경우 젊고 역량 있는 후배와 신선한 조합으로 색다른 감성을 전달할 수 있다”며 대중음악계에서의 가수들의 콜라보 전망을 긍정적으로 진단했다.
이처럼 신구 세대 가수의 콜라보를 비롯한 가수들의 콜라보가 성행하는 이유는 뭘까. 성격이 다른 가수들의 콜라보는 기존 활동했던 모습이나 음악에서 벗어나 대중에게 새로운 음악 스타일을 전달할 수 있고, 음악의 스펙트럼을 확장할 수 있는 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양희은, 김창완, 이문세 등 선배 가수들과 콜라보를 자주한 아이유는 “선배들과의 콜라보는 또래 뮤지션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음악적 정서와 감성, 스타일을 배울 소중한 기회다. 선배 가수들과의 콜라보를 통해 내 음악의 스펙트럼도 확장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또한, 음원과 디지털 싱글 등 대중음악 시장이 디지털 온라인 중심으로 전환한 것도 가수들의 콜라보가 급증한 이유의 하나로 꼽힌다. 디지털 중심의 대중음악 환경에서는 적은 제작비로 쉽게 디지털 싱글을 제작할 수 있어 다양한 콜라보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KBS , SBS , MBC , JTBC 등 음악 예능 프로그램이 많이 늘어난 것도 다양한 가수들의 콜라보 등장을 낳게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음악과 게임, 경연 등 다양한 예능 장치를 음악과 혼합한 음악 예능이 늘어나면서 가수들의 콜라보 무대 수요가 급증했다.
여기에 드라마와 영화, 예능 프로그램에서 1970~1990년대 복고 바람이 강타한 것도 가수들의 콜라보를 대중음악의 인기 트렌드로 부상시킨 원동력이다. 최근 드라마 , 예능 프로그램 등 대중문화 전반에 복고 바람이 불며 1970~1990년대를 소환하는 경우가 부쩍 많아졌다.
드라마, 영화, 예능 프로그램의 복고 신드롬은 자연스럽게 1970~1990년대의 노래와 가수들의 소환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과거 전성기를 누린 가수들의 원곡 그대로가 아닌 원곡 가수와 신세대 가수들의 콜라보를 통해 새롭게 재탄생한 노래들이 큰 사랑을 받았다. 이 때문에 대중문화 전반에 복고 코드 득세와 함께 가수들의 콜라보 특히 신구 세대 가수의 콜라보가 성행하게 됐다.
대중음악에 강력한 트렌드이자 키워드로 떠오른 콜라보는 긍정적인 부분이 많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다른 장르 간, 신구 세대 간, 다른 소속사 간 가수들의 콜라보를 통해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하면서 대중음악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고 가수들 역시 자신들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확대할 수 있다.
록밴드 국카스텐과 콜라보 무대를 가졌던 트로트 가수 주현미는 “국카스텐과 콜라보하면서 내 노래가 색다르게 다가왔다. 국카스텐과의 콜라보를 통해 내가 하는 트로트도 얼마든지 젊은 감각으로 재탄생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또한, 콜라보를 통해 대중음악 수용자를 확장할 수 있다는 이점도 있다. 대중음악 평론가들은 가수들의 다양한 형태의 콜라보가 진행되면서 작업에 참여한 가수들의 팬덤이 합쳐지며 시너지를 내고 이것이 팬층의 확장으로 이어진다고 말한다. 특히 신구 세대 가수의 콜라보의 경우, 선배 가수들이 인기가 높은 신세대 가수와의 콜라보를 통해 신선한 감각과 신곡에 민감한 젊은 층을 공략할 수 있고 신세대 가수들은 전설적인 선배 가수들과의 콜라보를 통해 음악 완성도를 높이고 기성세대에게도 존재감을 알리는 효과가 크다. 신구 세대 가수의 콜라보는 음악 시장의 주요 소비층인 10∼20대에게 부모 세대의 음악을 이해하게 하고, 기성세대에게는 젊은 스타의 최신 음악에 관심을 끌게 해 10~20대 젊은 층 위주의 국내 음악 시장 한계를 극복하는 돌파구 역할도 한다.
회사원 장동수(48) 씨는 “의 OST ‘청춘’을 통해 김창완과 콜라보한 김필이라는 가수를 처음으로 알게 됐고 그의 음악에 관심을 두게 됐다. 고교생 딸은 반대로 ‘청춘’을 통해 김창완의 노래를 좋아하게 되고 음반까지 구입했다”고 말했다. 가수들의 다양한 형태의 콜라보는 무엇보다 취향 간, 세대 간, 스타 팬덤 간의 벽과 단절을 허물고 이해와 교류, 소통의 접점을 확장하는 의미 있는 결과도 낳고 있다. 아이돌과 7080 가수와의 콜라보는 신세대는 부모 세대의 문화를, 부모 세대는 젊은이들의 문화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진단이다.
아이유, 장기하와 얼굴들, 김필 등 젊은 가수들과의 왕성한 콜라보를 진행하고 있는 김창완은 “가수들의 콜라보는 상이한 연령, 취미 등을 가진 사람들 상호 간의 이해의 장을 마련해줘 대중음악 소비층의 확장뿐만 아니라 세대 갈등 등 사회적 문제 해소에도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장동건, 현빈, 장근석, 송승헌, 이영애, 송혜교, 고현정, 전지현, 손예진, 이병헌 등은 드라마 회당 출연료로 5000만~2억 원을 받는 스타들이다. 김태희, 수지, 유재석, 이승기 등은 광고 한 편 출연하는 데 모델료로 10억 원 안팎을 받는 톱스타들이다. 김수현, 이민호는 중국 CF 한 편 출연료로 20억 원 정도를 받는 한류스타다. 송강호, 하정우 등은 영화 한 편 출연료로 6억~7억 원을 받는 스크린 스타다. 엑소는 지난해 10월 11일 서울 고척돔 하루 공연으로 티켓 수입 등 22억 원의 매출을 기록한 스타 아이돌그룹이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몸값을 자랑하는 스타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스타화의 경로나 연예인으로 발탁되는 유형이 모두 다르다. 이병헌은 KBS 탤런트 공채를 통해 발굴된 스타이고 이영애는 연예기획사 백기획에 의해 발탁돼 스타가 됐다. 고현정은 미스코리아 대회 출전이 계기가 돼 방송사 연기자가 되면서 스타가 됐고 전지현은 정훈탁 싸이더스 대표가 잡지에 실린 사진을 보고 발굴해 스타로 부상했다. 이처럼 이들은 연예인 지망생에서 스타로 부상하기까지 과정은 각각 다르다. 이들이 스타가 되는 과정에 개입한 스타 시스템도 차이가 있다.
이병헌은 “나는 KBS 탤런트 공채가 없었으면 연예인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며 “KBS 공채로 연기를 처음 시작했고 이름이 알려져 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게 됐다”고 말했고, 이영애를 발굴해 스타로 키운 백기획의 백남수 대표는 “잡지에 실린 이영애의 모습을 보자마자 스타 재목감임을 직감하고 영입했다. 연기 훈련부터 드라마 데뷔까지, 그리고 스타가 된 뒤로도 기획사가 관리했다”고 밝혔다.
이제 재능과 끼, 외모, 노력, 그리고 운이라는 변수에 의존해 우연히 스타가 되는 시대는 지났다. 정교하게 체계화한 체제로 움직이는 스타 시스템에 의존하지 않으면 스타는 탄생할 수 없는, 스타는 만들어지는 시대다. 수많은 스타 뒤에는 엄청난 투자와 장기간의 교육, 치밀한 데뷔 전략, 주도면밀한 이미지 조형, 막대한 홍보 마케팅이 자리한다.
스타 시스템은 스타와 시스템의 합성어로 신인이나 연예인 지망생 중 일부를 발탁해 연기자나 가수로 키워 스타로 부상시키는 시스템이다. 즉 스타의 생산, 거래, 활용, 관리, 소비의 전체적인 순환 메커니즘을 주관하는 체계를 스타 시스템이라고 한다. 저자 김호석 박사는 “스타 시스템은 신인이나 연예인 지망생을 최단 시간에 최대한 인기를 얻는 스타로 부상시켜 가장 높은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체계”라고 설명한다.
문화산업 시장의 규모, 대중매체의 판도, 팬 층의 규모와 구성 분포 등에 따라 스타 시스템의 구조와 주체가 변해왔다.
KBS, MBC 등 방송사가 연기자와 개그맨 등 연예인을 선발해 전속제를 실시하던 1960~1980년대까지는 방송사가 연기자를 발굴, 유통, 관리하며 스타 시스템의 주도적 역할을 했다. 당시 스타의 신변이나 스케줄 관리 등 부차적 업무를 수행했던 연예기획사와 매니저는 1990년대 방송사 연기자 공채가 사라지면서 신인을 발굴해 스타로 부상시키고 스타의 이윤창출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펼치는 스타 시스템의 핵심적인 주체로 자리 잡았다.
특히 1995년 가수 출신인 이수만 대표가 설립한 SM엔터테인먼트가 CAA(Creative Artist Agency) 등 미국 유명 스타 에이전시와 쟈니스(ジャニ-ズ )프로덕션을 비롯한 일본 프로덕션 등 스타를 양성하고 매니지먼트를 하는 선진 스타 시스템을 일부 도입하면서 연예기획사 주도의 스타 시스템이 안착하게 됐다.
이수만 SM 대표는 “미국에 유학하면서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살펴볼 기회가 있었고 스타를 키우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절감했다”며 “한국에 돌아와서 체계화하고 전문화된 스타 시스템을 도입해 만든 것이 바로 SM엔터테인먼트”라고 SM 설립 배경을 말했다.
SM 설립 이후 DSP미디어, JYP엔터테인먼트, YG엔터테인먼트 등 가수와 아이돌그룹을 집중적으로 육성하는 연예기획사가 속속 등장했다. 한편으로 영화배우, 탤런트 등 연기자를 전문적으로 키우는 싸이더스, 에이스타스 등 연기자 전문 연예기획사도 지속해서 생겨났다.
2000년대 들어 한 연예인이 연기, 음악, 예능 등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분야에서 활동하는 것이 일반화하면서 스타 시스템의 중추적 역할을 하던 연예기획사들도 가수와 연기자, 예능인 등 다양한 연예인을 양성하는 종합 연예기획사로 변모했다. 연예기획사는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드라마, 영화, 음반 등 콘텐츠를 제작하는 사업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명실상부한 스타 시스템의 핵심으로 완전하게 자리를 잡았다.
SM, YG, FNC, JYP, 싸이더스, 키이스트, 나무엑터스, 웰메이드 예당, DSP미디어, BH엔터테인먼트, 스타하우스엔터테인먼트 등 중대형 연예기획사들이 한국 대중문화 판도를 주도하는 스타 시스템의 주역들이다.
나무엑터스 김종도 대표는 “과거에는 영화사나 방송사가 신인을 발굴해 스타를 만드는 역할을 했지만, 최근에는 연예기획사를 거치지 않고서는 스타가 될 수 없을 정도로 연예기획사가 전문적인 스타 양성기관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며 “우리 대중문화계에서 톱스타로 활동하는 전지현, 김태희, 비, 이민호, 김수현, 수지, 엑소, 빅뱅, 소녀시대 등이 모두 연예기획사에서 만들어진 스타들인 것만 봐도 연예기획사의 위력을 단적으로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연예기획사들이 연예인 지망생을 발굴해 스타로 만드는 스타화 경로 역시 근래 들어 전문화하고 체계적으로 변모했다. 오디션, 길거리 캐스팅, 미인대회, 오디션 프로그램, 인터넷 등 매스미디어를 통해 연예인 지망생을 연습생으로 뽑은 뒤 2~6년 동안 연기, 댄스, 노래, 예능 개인기 등을 교육한다. 연습생 생활을 마친 뒤 TV, 광고, 영화, 콘서트, 뮤지컬 등을 통해 신인으로 데뷔시켜 연예인으로 대중에게 존재감을 알리고 인기를 얻는 사람을 스타로 키운다.
이 과정에서 막대한 비용과 노력, 시간이 투여된다. 연습생 생활을 마치고 방송무대를 통한 데뷔까지 비용은 엄청나다. 지난해 10월 보고서 ‘스타가 되기까지’를 발표한 흥국증권 최용재 연구원은 “5인 멤버의 아이돌 그룹을 데뷔시키는 데 약 10억 원의 비용이 소요된다. 5인이 2~3년간의 연습생 생활을 보내는 데 5억 원 정도 들어가고, 사전 마케팅부터 KBS, MBC 등 지상파 3사 음악방송 활동까지 6주간의 데뷔 활동 기간에 소요되는 비용이 5억 원에 달한다”고 분석했다.
연예기획사들은 신인을 스타로 키우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스타들의 위기 관리도 담당한다. 대중의 비난을 불러왔던 스캔들로 추락할 위기에 몰렸던 이병헌 등 수많은 스타가 연예기획사의 뛰어난 관리로 스타의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서는 연예기획사 주도의 스타 시스템이 중국, 태국, 대만, 인도네시아 등에 수출되기도 한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외국인이 한국 연예기획사를 통해 연예인으로 데뷔하기 위해 한국을 찾고 있다. 2PM의 닉쿤, 미쓰에이의 지아·페이, 에프엑스의 빅토리아, 엠버, 트와이스의 쯔위 등이 연예기획사 중심의 스타 시스템을 통해 교육받고 국내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외국인들이다. 최고 인기 아이돌그룹 엑소 멤버로 활동하다 탈퇴를 선언하고 중국에서 활동하는 크리스, 루한, 타오도 SM엔터테이먼트에서 육성됐다.
JYP엔터테인먼트 정욱 대표는 “스타를 육성하는 체계화된 한국 스타 시스템은 세계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미국도 이 정도는 아니다. 연예기획사 주도의 스타 시스템은 외국으로까지 수출되고 있는 한류 상품으로 주목받고 있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물론 국내외에서 경쟁력을 인정받고 있는 한국 스타 시스템에도 문제는 적지 않다. ‘노예계약’으로 명명되는 연예기획사와 소속 연예인의 불공정한 계약 관행, 소속 연예인의 사생활과 인권침해, 미성년자 연예인의 학습권 미보장, 소속 연예인과 연습생에 대한 성폭행 등 일부 소속사 관계자의 범죄 등이 연예기획사 주도의 스타 시스템이 명실상부한 선진 스타 시스템으로 도약하기 위해 선결돼야 할 과제들이다.
필자의 ‘버킷리스트 여행지’ 중의 한 곳은 영국의 ‘리버풀’이었다. 리버풀엔 ‘비틀스’가 있기 때문이다. 통기타로 번안 곡들을 들으며 젊은 시대를 보낸 사람들. 소위 말하는 ‘팝송 세대’들은 여전히 올드 팝을 들으면서 스멀스멀 옛 추억을 떠올리면서 감성에 젖곤 한다. 젊을 적 추억은 팝송 음률에 남아 첫사랑을 그리워하듯, 명치끝을 아프게 꼭꼭 찌른다. 비틀스 노래를 들으며 ‘지역 맥주’를 마시던 ‘캐번 바’를 내 어찌 잊으리오.
◇ 매튜 골목에서 만나는 비틀스 첫 무대 캐번 클럽
영국 북서부의 맨체스터(Manchester), 리버풀(liverpool)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익숙한 것은 축구 때문이다. 우리나라 유명 축구선수들이 이 도시에서 선수로 뛰고 있다. 리버풀은 맨체스터를 거쳐 가게 된다. 리버풀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Liverpool and Manchester Railway) 주변의 대로변 옆으로는 오래된 건축물들이 열 지어 있다. 세인트 조지 홀(St. George's Hall)을 비롯해 엠파이어 극장, 아트 갤러리, 도서관 등.
특히 빅토리아 여왕(1819~1901년)의 대관식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세인트 조지 홀의 규모(51m 길이, 22m 넓이)가 커서 눈길을 잡아끈다. 1838년에 초석을 마련해 1854년에야 완공된 최초의 네오클래식 건물은 법정과 콘서트홀이라는 목적으로 지어졌다. 건물 정면에는 빅토리아 여왕과 부군인 앨버트 공의 동상과 참전 기념비가 서 있다. 이 건물들은 빅토리아 여왕 시대의 활황을 기억케 한다. 실내에는 영국에서 가장 큰 거대한 파이프 오르간(1871년)과 12개의 동상이 있다. 현재는 각종 전시회, 연회, 축제 등의 행사장으로 이용된다.
무엇보다 리버풀을 찾는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게 하는 곳은 ‘비틀스(The Beatles)’에 대한 흔적이다. 도심 곳곳에서 비틀스의 흔적을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존 레논의 이름을 딴 공항, 폴 매카트니가 살았던 집(20 Forthlin Road), 애비 로드와 스트로베리 필드 등 그들 노래에 영감을 준 장소들, ‘비틀스 스토리(www.beatlesstory.com)’를 비롯한 여러 기념관들. 그중에서 여행자들이 ‘비틀스 일번지’로 찾는 곳은 매튜거리(Mathew street)다. 매튜 골목에는 5~6개의 퍼브와 클럽이 뒤섞여 있다.
숨은 그림 찾듯이 비틀스를 기념하는 조형물들을 찾아내면서 걷다 보면 골목 끝자락에 비스듬히 서 있는 존 레논 동상을 만난다. 비틀스가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는 캐번 1클럽(The Cavern Club) 앞이다. 리버풀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난 네 명의 청년이 만들어 낸 비틀스. 존 레논(John W. Lennon 1940~1980), 폴 매카트니(James Paul McCartney 1942~),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 1943~2001), 링고 스타(Ringo Starr 본명 Richard Starkey 1940~) 등. 비틀스는 이곳에서 근 2년간(1961년~63년) 292회 공연을 했다. 세월이 흐르면서 지금은 두 곳으로 나뉘어 있다. 분위기는 약간 다르다. 첫 번째 클럽이 클래식하다면, 동굴 형태로 된 제 2클럽은 춤이 함께 어우러져 더 왁자하다.
◇ 매일 클럽에서 울려 퍼지는 비틀스 음악
먼저 비틀스가 첫 무대에 올랐다는 캐번 1클럽의 지하 계단을 따라 내려간다. 온통 비틀스의 흔적으로 장식한 인테리어. 실내에는 작은 무대가 있고 한쪽에는 바 카운터와 초라한 의자들이 놓여 있다. 유행 지난 촌스러움, 칙칙함, 퀴퀴함이 함께 아우러진다. 대낮부터 찾아온 손님들은 가볍게 잔술을 마신다. 신 맛과 정제되지 않은 맛을 내는 지역 생맥주는 마실수록 묘하게 매력적이다. 해가 어둑해지면 어김없이 통기타를 두드리는 무명 가수의 라이브 무대가 펼쳐진다.
퇴색한 컨트리 가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의 주인공인 제프 브리지스(Jeff Bridges)를 닮은 듯한 무명 가수가 이미 귀에 익숙한 팝송을 부른다. ‘렛 잇 비(Let It Be)’, ‘러브 미 두(Love Me Do)’, ‘이매진(Imagine)’ 등등. 가수는 힘겨운지 간간이 맥주로 목을 축이면서 노래를 불러 젖힌다. 흥에 겨운 손님들은 무대에 나가 음률에 맞춰 막춤을 춘다. 술에 취하고 음악에 취하는 매튜거리의 밤은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으로 새겨진다.
무수한 사연과 이야기를 남긴 비틀스 멤버 네 사람의 삶을 일일이 조명할 수는 없다. 단 놀라운 것은 이들은 악보를 볼 수 없는 문맹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무수한 히트곡을 만들어 낸 신화 같은 존재. 그들을 더 이해하려면 바닷가 근처에 있는 ‘비틀스 스토리’를 찾으면 된다. 애비로드 스튜디오와 캐번클럽, 스타클럽 등의 명소들을 재현해 놓았다. 또 비틀스가 출연했던 뮤직 비디오 등의 영상자료를 비디오로 볼 수 있다. 비틀스의 오리지널 무대 의상과 존 레논이 연주했던 피아노, 그들이 출연했던 영화 등 다채로운 볼거리가 준비되어 있다. 세기의 뮤지션 비틀스는 리버풀을 늘 빛내고 있다. ‘리버풀의 비틀스’가 아니라, ‘비틀스의 리버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도시 곳곳에는 이 전설적인 밴드의 흔적들이 새겨져 있다.
영화 를 보면 좋다. 13명의 배우들이 영화 스토리에 걸맞게 비틀스 음악을 잘 매치해 놓았다. 이 영화는 우리나라 여배우의 전 애인으로도 알려진 짐 스터게스의 첫 출연작이기도 하다. 또 ‘비긴즈-노 웨어 보이(Begins-Nowhere boy, 2009)’에서는 존 레논의 삶을 조명해주면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비틀스, 오노 요코 등과의 관계를 이해하게 한다. 올해 5월, 73세의 노장 폴 매카트니는 내한공연을 했다. 비록 공연은 보지 못했지만 그의 전설은 이어졌다. 이구동성으로 ‘판타스틱’을 외쳐댔다. 라는 다큐영화를 보면 2년 전의 폴 매카트니가 출연해 녹음하는 장면이 나온다. 비틀스라는 그룹은 오래전에 흩어졌지만 단 한 명의 뮤지션이 남아 그 전설을 이어가고 있음에 고마울 따름이다. 하지만 리버풀 클럽에서 만취하는 것은 절대 금기사항이다. 클럽 앞에는 술 취한 사람들을 정리, 통제하는 지킴이들이 있다. 그들은 ‘필자처럼 좋은 사람(?)’만 클럽을 이용할 수 있다고 내게 말했다.
◇ 해양 무역도시의 옛 잔상들, 노예 거래
리버풀은 바닷가가 있는 항구 도시다. 오래전부터 해양 무역 도시였고 20세기 초, ‘대영 제국 제2의 도시’로 불렸다. 그러다 제1, 2차 세계대전으로 심히 파괴되었다. 특히 리버풀은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영국 내 다른 어떤 도시보다 심한 폭격을 받았으나 전쟁 이후 재건 사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그래서 항구 주변은 휘황한 현대적인 건물이 대부분이다. 그중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알버트 독(Albert Dock)이 있다. 이 건물에는 머시사이드 해양 박물관(Merseyside Maritime Museum), 국제 노예박물관(International Slavery Museum), 테이트 리버풀(Tate Liverpool) 등의 명소들이 자리 잡고 있다.
국제 노예박물관이 관심을 끈다. 흑인을 사람 취급하지 않았던 오래전, 이 항구에는 가나, 자메이카 인 등 무수한 노예들의 거래가 이뤄졌었다. 빅토리아 여왕 시절이다. 국제노예박물관을 둘러보면, 죄의식조차 없던 그 시절의 영국민들의 잔인함이 떠올려진다.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역사의 흔적들은 가슴을 답답하게 만든다. 영국은 1807년 노예무역을 폐지했다. 관련된 많은 영화, 다큐들이 있지만 최신작이면서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를 보면 그때의 잔인성과 몰인간적인 영국 귀족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이 영화에 출연한 베네딕트 컴버배치(Benedict Cumberbatch)라는 현재 유명 배우의 출연 계기가 독특하다. ‘컴버배치’라는 성씨는 카리브 해 섬나라에서 노예를 부렸던 조상의 흔적이었다. 당시 바베이도스에서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며 노예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에이브러햄 컴버배치(1726~1785년)가 그의 조상이다. 베네딕트의 어머니인 여배우 완다 벤담은 노예제 보상 피소를 우려해 본명으로 배우활동을 하지 말라고 권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속죄하는 의미를 담아 이 영화에 적극 출연했다. 에서는 선량한 백인 윌리엄 포드로 분했다.
또 영화로 익숙한 타이타닉호도 리버풀과 무관치 않다. 타이타닉 호는 영국 사우스햄튼(1912년 4월 10일)에서 출발해 뉴욕으로 항해하다 빙산에 부딪혀 침몰한 초대형 여객선. 대서양 횡단여행의 시대를 개척하기 위해 건조된 이 배의 공식항구는 리버풀이었고, 승무원과 승객의 상당수도 리버풀 사람들이었다. 타이타닉호의 탄생과 침몰 및 각종 배의 모형을 전시한 곳이 해양박물관이다. 해질 무렵, 리버풀 대성당(Liverpool Cathedral)을 향한다. 영국 국교회의 성당으로는 세계 최대의 크기다. 20세기에 만들어진 건축물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탑 위로 올라가 바라본 리버풀 도심은 규모가 생각보다 크다. 성냥갑처럼 작아 보이는 건물들. 그곳에서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만들어지고 있을까? 리버풀을 떠나면 다시 오기 어려운 것을 알기에 그날 바라본 낙조는 유난히 쓸쓸했다.
◇ Travel Tip
- 현지 교통 정보 런던에서 지방 이동은 특급기차나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에서 익스프레스 고속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기차는 예약하지 않으면 버스보다 가격이 몇 배나 비싸다.
영국 대표 음식들 영국의 아침 식사는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양이나 메뉴가 풍성하다. 영국인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으로는 샌드위치와 피시 앤드 칩스를 들 수 있다. 카드놀이를 좋아했던 샌드위치 백작이 카드놀이를 하면서도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고안해 냈다는 샌드위치는 영국인의 일반적인 점심 메뉴다.
시차 우리나라보다 9시간 늦다. 3월 마지막 일요일부터 10월 마지막 일요일까지는 서머타임으로 8시간 느리다.
전압 다른 유럽권역과는 많은 차이가 난다. 꼭 어댑터가 필요하다. 표준전압은 230/240V, 50㎐. 플러그는 발이 3개 달린 BF 타입.
화폐 단위 파운드를 이용한다.
연계 도시 여행 시작을 런던에서 했다면 리버풀을 거쳐 스코틀랜드 글래스고(glasgow) ~ 에든버러(Edinburgh)로 가면 된다. 글래스고는 공업도시이고 에든버러는 옛 향기가 그대로 남아 있는 고도(古都)다. 특히 에든버러는 198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아주 멋진 도시다.
추천 스코틀랜드 산 스카치위스키(Scotch whisky) : 스카치위스키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술. 그중 오직 맥아의 과정을 거친 보리 한 가지로 만들어지며 동일한 증류소에서 생산되는 싱글몰트위스키(Single Malt Whisky)가 최고다. 현지인에게 추천 받은 브랜드로는 Glenfiddich, Jura, Talisker가 있다. 특히 탈리스커는 한국인 술 마니아에게 큰 인기다. 맥주는 이니스 앤 건스(innis & gunns)가 맛있다.
>> 이신화 여행작가
이립(而立)에 여행작가로 시작해 어언 지천명(知天命)에 다다랐다.
그동안 ‘걸어서 상쾌한 사계절 트레킹’, ‘대한민국 100배 즐기기’, ‘on the camino’ 등
여행서 총 14권을 출간했다. ‘인생이 짧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 지난해 홀로 197일간 30개국의 유럽 배낭 여행을 했다. ‘살아 있을 때 떠나자’가 삶의 모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