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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꽃중년을 노크하다 PART5] 여성 속에 있는 여성, 남성 아닌 사회 시스템에 저항하다
- ‘걸크러시(Girl’s Crush)’. 여자가 여자에게 반하거나 동경하는 행위를 의미하는 신조어다. ‘여자의 적(敵)은 여자’라는 옛 말이 무색하게 요즘의 젊은 여성들이 같은 여자를 동경한다. 특히 사회적으로 성공한 중년 여성부호들에게서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찾는 젊은 여성들이 많이 늘었다. 전보다 많은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는 와중에, 권위적이고 남성적인 조직문화에 좌절하지 않고 성공을 이뤄내는 이들의 모습에 반하는 것이다. 김유준 프리랜서 기자 dongbackproject@gmail.com 장르 영화에는 관습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영화 유형에서 보편화된 극적 요소나 제재 또는 양식화된 표현방법’으로, 영어로는 컨벤션(convention)이라고 한다. 이를테면 서부영화에는 정의감 넘치는 주인공이 황야에서 말을 달려 추격을 펼치고 마지막에 결투를 벌여 악당을 물리치고는 고독한 모습으로 떠나는 모습이 종종 그려진다. 주인공이 못나게도 악당 짓을 하거나 “그리하여 스티브는 가족들과 함께 오순도순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하고 끝나는 서부영화를 보기는 쉽지 않다. 그러므로 말, 질주, 추격, 결투, 고독한 주인공 등은 서부 영화의 대표적인 관습이라고 할 수 있다. 말을 타고 달리는 모습이 멋지다는 이유로 벤 존슨이라는 마부가 서부 영화에 기용되어 일약 영화계의 스타가 된 것은 그 덕분이다. 영원한 청춘스타라는 제임스 딘이 남긴 세 작품은 모두 현대극이지만, 그 작품들은 서부 영화의 전통에 따라 젊은 주인공을 고독하고 투쟁적으로 그림으로써 영화의 역사에 이름을 새겼다. 의 이른바 ‘치킨 런’ 장면이 오래도록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청바지를 입었거나 카우보이모자를 쓴 제임스 딘의 스냅 사진이 유독 기억에 남는 것은 그 때문이다. 여성, 과연 걸림돌이었나? 역설적으로,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은 에 등 뒤에서 총 쏘는 것은 예사에다 심지어 화장실에서 일 보는 상대에게 총격을 가하는 등의 비열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관습을 뒤집어 서부극을 사실적으로 승화했다’는 평단의 찬사를 받으며 골든 글로브와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을 석권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관습은 액션이나 스릴러 같은 장르 영화에도 뚜렷이 존재한다. 여성이나 어린아이가 맡는 역할은 대표적인 예. 그들은 불꽃 튀기는 영화에서 자랑스러운 배역들을 맡지 못해왔다. 그들은 언제나 남성 주인공들의 질주를 가로막는다. 주인공이 파죽지세로 적들을 물리치려는 순간, 주인공이 사랑하는 여성은 약속이나 했다는 듯 적에게 인질로 잡힌다. 악당은 여성의 목을 팔로 휘어 감고 여성의 정수리에 총을 겨누고 있다. 그 광경을 남성 주인공은 안타깝게 바라보고 있다. 어떤가? 어디서 많이 본 장면 같지 않은가? 카우보이 영화의 전통을 고스란히 현대에 이어받아 전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한 액션 영화 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형사 존 매클레인(브루스 윌리스)의 부인인 홀리(보니 베델리아)는 마지막 장면에서 한스 그루버(앨런 릭맨)에게 인질로 잡힌다. 매클레인은 등 뒤에 숨겨둔 권총으로 악당을 처치하고 총구에서 피어오르는 연기를 입김으로 훅 분다. 전형적인 서부 영화의 컨벤션이다. 구태여 옛날 작품들을 예로 들 것도 없다. 의 이정범 감독이 장동건을 주연으로 내세운 신작 에서도 이런 장면은 여지없이 등장한다. 지금껏 장르 영화에서 여성은 ‘걸림돌’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사회에서 여성의 지위가 그 정도에 머물렀음을 우회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속 여성, 스토리라인 끌어가고 있다 이제 영화 교과서의 이런 예들은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최근 영화들에서는 더 이상 여성이 나약하게 그려지지 않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영화에서 여성들은 스토리라인을 적극적으로 끌어나가고 있다. 액션 영화 장르의 대표주자 격인 시리즈부터 변화가 뚜렷이 감지된다. 최근작 에서 여주인공 일사(레베카 퍼거슨)는 기존의 여성 배역과 다르다. 누구 못지않은 역량의 소유자로 영화가 진행되는 내내 남자 주인공 에단 헌트(톰 크루즈)를 들었다 놨다 한다. 2000년도에 오우삼 감독이 연출했던 작품과 비교하면 차이는 확연하다. 2편의 니아(탠디 뉴턴)가 헌트에 종속돼 있는 캐릭터라면 일사는 단연 독립적인 존재. 나아가 헌트의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내기도 한다. 조지 밀러 감독의 에서는 숫제 캐릭터의 비중이 뒤바뀌었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최근작 에 이르러 타이틀롤인 맥스(톰 하디)보다 여성 캐릭터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가 더 두드러진다. 외국 영화만 그런 것도 아니다. 우리나라 영화는 오히려 한발 더 앞서 나간다. 일찍이 박찬욱 감독은 라는 완전무결한 ‘여성 주인공의 영화’를 발표한 바 있다. 박찬욱 감독은 제작 발표회에서 “우리나라에서 감독은 두 가지로 나뉜다”며 그 두 종류가 “배우 이영애와 작업해본 감독과 그렇지 못한 감독”이라고 말했다. 그가 얼마나 여성 배우와 캐릭터에 공을 들이는지 알 수 있는 대목. 신작인 또한 제목에서 눈치 챌 수 있듯 여성 중심의 영화가 분명하다. 정확한 구성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귀족 여성과 소매치기 여성이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고 알려졌다. 그와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또 한 명의 거장 봉준호 감독은 라는 걸출한 영화에서 강인한(또는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어머니 상을 표현했다. 신작 에서는 10대 소녀인 여성 주인공이 그 역할을 떠맡는다. 신작을 발표할 때마다 1000만 관객을 불러들이는 최동훈 감독 역시 여성을 보는 시각이 전향적이다. 그의 초기 대표작인 이나 에서부터 여성들이 맡은 배역이 범상치 않았지만, 대단한 흥행을 기록한 에 이르러서는 안옥윤(전지현)이 맡은 비중이 다른 어떤 영화보다 크다. 어떤 평론가는 “전지현에 의한, 전지현을 위한, 전지현의 영화”라고까지 말했을 정도. 할리우드에서 돌아온 김지운 감독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지금 준비하고 있는 작품의 제목은 . 송강호와 공유라는 두 배우가 주연을 맡아 항일무장투쟁 운동을 펼치는데, ‘밀정’이라는 제목 캐릭터가 다름 아닌 여성이라는 후문이다. 여성이 당당히 주역 이런 현상은 영화뿐 아니라 대중문화의 다양한 장르에서 폭 넓게 드러나고 있다. 같은 뮤지컬, 등의 TV 드라마, 같은 게임에서 강인한 여성이 주역을 맡고 있다. 무엇보다 상업성에 민감한 대중예술 제작자들이 여성을 주인공을 내세우는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그러한 여성 캐릭터가 지금의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20세기에는 남성 대중이 혀를 끌끌 찼을 여성 캐릭터들을 요즘 사람들은 바람직하게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알파걸’이니 ‘걸크러시’니 하는 낯선 용어들이 언론과 인터넷을 중심으로 심심찮게 돌아다니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 된 이유에 관해서는 비교적 분석이 완료된 느낌이다. 서울대 배은경 교수(여성학 협동과정)는 대학 저널에 기고한 글에서 ‘20세기 중반 이후 전 세계를 휩쓴 신자유주의적 변화가 이런 현상을 낳았다. 경제적 능력을 통해서만 안정적 자아실현을 이룰 수 있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경제적 지위가 높은 전문직· 고연봉 여성들이 칭송받게 되었다’고 분석했다. 이와 같은 사회적 현상이 대중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쳤다고 보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으로 경제 불황과 연관 지어 설명하는 분석도 많다. 이런 시기라면 남성들이 사회에서 경제력을 잃어가는 대신 여성의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이런 현상이 ‘과거에 비하면 바람직한 편이지만 여성의 활약만 강조되었을 뿐 불평등한 사회 구조는 여전하며 이에 대한 비판도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흥미로운 점은 최근에는 이런 지적에 대한 반성까지 대중문화에 투영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른바 ‘성난 엄마’의 출현이다. 여성 중에서도 어머니들이 나서서 사회 부조리를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에 발표된 같은 영화들은 모두 어머니가 가족을 잃고 복수에 나선다. 영화뿐만 아니다. 지난해 방영된 서울방송의 을 비롯해 올해 문화방송이 공개한 과 서울방송 등은 아예 제목에서부터 어머니가 주인공임을 드러내고 있다. 더불어 그들은 하나같이 여성이나 어린이 같은 약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 권력층의 부패 커넥션 등을 신랄하게 고발하고 있다. 의 주인공 조강자(김희선)는 자녀와 관련된 사회문제에 분노하고, 그 해결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우리 시대의 ‘앵그리 맘’을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은 아예 어머니로서의 주인공보다는 여형사로서의 캐릭터에 더 집중한다. 강력계 형사인 주인공 최영진(김희애)은 누가 봐도 ‘나쁜 아빠’인 강태유(손병호)가 상징하는 남성 중심적 권력의 부조리와 강력히 맞붙어 싸운다. 단지 여성의 몫이 늘어난 정도가 아니라 과거의 투사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회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게 된 것이다. 남성들과 경쟁해 성공한 여성들의 모습은 같은 여성들에게 당연히 쾌감을 준다. ‘롤모델’이 된 여성 리더들은 자신의 경험에 근거한 여권(女權) 문제를 공식석상에서 거론하면서 여성들의 대변인이 돼주기도 한다. 여성의 목소리가 높아지게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여성의 몫이 늘어나기 시작한 20세기 중반부터 그런 양상은 꾸준히 있어왔다. 그러나 최근의 현상들은 지난날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폭발적이며 더불어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과거의 힘센 여성들이 단지 자신들을 핍박하는 남성에게 대항했다면, 요즘 여성들은 사회라는 시스템 자체에 저항하고 있다. 21세기 들어 여성들의 활약은 수준과 차원을 드높이고 있다. 지금의 여성들은 더 이상 무기력하지 않다. # 알파걸 Alpha Girl 공부, 운동, 대인관계 등 모든 분야에서 또래 남학생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의 성과를 보이는 엘리트 계층의 여성을 일컫는다. 그리스 알파벳의 첫 자모인 알파(α)에서 유래됐다. ‘첫째가는 여성’이라는 의미에서 이 같은 이름이 붙었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아동 심리학자인 댄 킨들런 교수가 북미지역에 거주하는 113명의 소녀를 인터뷰하고 남녀학생 900여 명에게 편지로 설문한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만든 개념으로 2006년 그의 저서 <알파걸, 새로운 여성의 탄생>을 통해 사회에 널리 알려졌다. # 걸 크러시 Girl Crush 어떤 여성이 다른 여성에게 느끼는, 일반적으론 섹슈얼한 감정이 동반되지 않은 강렬한 호감 혹은 감탄을 뜻한다. 남성들이 스포츠 스타들에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 케이블 방송에서 방영된 의 여성 래퍼들이 여성 팬들에게 강력하게 지지받은 것은 대표적인 걸 크러시 현상으로 꼽힌다.
- 2015-11-30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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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토리텔링] 육체가 곧 연기인 진정한 액션 스타의 계보
- 우리나라 액션 스타의 계보는 곧 홍콩 스타의 계보다. 액션 영화가 ‘다치마와리’ ‘으악새’ 등으로 폄하되던 한국 영화계에서 토종 액션이 만들어지기는 쉽지 않았다. 홍콩 영화계는 달랐다. 그곳 영화인들은 중국 무술을 떠받들었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스크린에 담으려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꾸준히 이어진 그들의 창의적이고 효과적인 노력은 자국뿐 아니라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글 김유준 ◇ 호금전과 장철, 그리고 왕우 1960년대, 아시아 화교 문화권에서 무협극이 빠르게 인기를 얻어가고 그에 발맞춰 쇼브러더스를 비롯한 홍콩의 영화 스튜디오들이 새로운 무협 영상을 만들려던 시기. 그때 홍콩 영화계에 두 명의 거장이 있었다. 호금전과 장철. 두 감독은 홍콩을 무협 액션의 본거지로 만드는 데 거대한 몫을 담당했다. 호금전은 무술에는 문외한이었다. 칼춤과 경공이 난무하는 스토리를 다루면서 그가 관심을 둔 것은 경극과 무용에 바탕을 둔 아름다운 움직임과 꽉 짜인 미장센이었다. “무협 세계는 대부분 상상임에도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것이 이상하다. 내 관심은 액션과 풍경의 관계에 있다.” 이안 감독의 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를 비롯해 같은 호금전의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영상 그 자체였다. 결투 장면을 액션인 듯 아닌 듯 그려내는 연출 스타일 아래에서 스타가 탄생할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그의 영화에서 정패패 같은 여성 배우가 더 돋보인 것은 그런 연출 스타일과 무관하지 않다. 장철 감독은 정반대였다. 세련된 화법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의 영화에서는 몸과 몸이 맞부딪치는 격렬한 움직임이 속출했고, 카메라는 그에 유치하다 싶을 만큼 급격히 줌인했다. 그런 영상 속에서 무술에 능한 배우가 주목 끌 것은 당연한 일. 장철은 그렇게 왕우(王羽)를 스타로 만들었다. 1967년 으로 합을 맞춰본 장철과 왕우 콤비는 이듬해 를 발표해 홍콩 영화 역사상 최초로 100만 홍콩달러 이상 벌어들이는 대성공을 거뒀다. 이 흥행을 바탕으로 등으로 외팔이 무사(독비도: 獨臂刀) 시리즈가 이어졌고 그 인기는 바다를 넘어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전해졌다. 호금전과 달리 작품을 빨리, 많이 만드는 장철의 연출 스타일에 힘입어 왕우 외에 강대위(깡따위 또는 장다웨이), 적룡 등도 스타덤에 올랐다. 피바람이 몰아치는 장철식 영상이 대세가 되면서 홍콩 무협 액션의 기조까지 뒤바뀌었다. 허황된 칼춤은 시나브로 자취를 감췄고 스크린에서는 팔과 다리가 부러질 듯 맞부딪쳤다. ‘챙챙’ 하는 금속성 음향이 베개를 몽둥이로 두드리는 듯한 효과음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이다. 영화의 시대배경이 점점 더 현대에 가까워지는 경향도 짙어졌다. 이런 현상은 이소룡이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출현함으로써 절정을 맞았다. ◇ 작은 용의 등장과 죽음 이소룡은 실제로 무술의 달인이었다. 영춘권의 일대종사로 영화화되기도 한 엽문, 태권도 고수인 이준구 사범 등은 이소룡의 무술 스승. 이소룡은 그밖에 유도, 가라테, 권투 등 세상의 모든 무술에 관심이 많았다. 아역배우로 활동한 홍콩에서의 유년기 이후 미국에서 청년기를 보낼 즈음에는 무술 연마에만 힘을 쏟아 나중에 절권도라는 무술을 창안하기도 했다. 실력에 비해 영화계에서의 활약은 미미했다. 1966년 미국 무술가의 도움으로 TV시리즈 에 조연으로 출연했지만 반향은 크지 않았다. 이소룡의 진가가 발휘되기 시작한 것은 다시 홍콩으로 돌아오고부터. 1971년 액션 영화의 거장 나유(로웨이) 감독의 에서 주연을 맡아 놀라운 히트를 기록하면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어 가 홍콩과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에서까지 엄청난 인기를 끌었다. 아시아를 뛰어넘는 세계적 스타 ‘브루스 리’가 탄생한 것이다. 이소룡의 트레이드마크는 일그러진 표정과 단순하면서도 폭발적인 움직임. 무도가들은 그 기괴한 기합 소리와 표정을 연기가 아닌 ‘발경(發勁)’의 결과로 이해한다. 무술에서 발경이란 ‘짧은 시간 안에 격렬하게 타격함으로써 상대를 제압하는 기술’. 그런 필살기를 펼치는 순간이라면 소리를 지르고 인상이 일그러지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이소룡의 시대는 화려했으나 길지 않았다. 느닷없이 나타나 3년 동안 온 세상을 흥분시켰다가 1973년 7월, 마지막 주연작 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서른셋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그야말로 혜성처럼 나타나 유성처럼 사라진 것이다. 이후 홍콩 영화계에는 액션 배우의 예명에 용(龍) 자를 붙이는 유행이 생겨나 순식간에 별의별 용들이 군웅할거하며 이소룡의 빈자리를 메우겠다고 나섰다. 성룡 역시 그 가운데 하나였다. ◇ 성룡 액션의 시작 이소룡이 사라지며 액션 영화는 주춤했다. 이소룡의 엄청난 주먹질과 발차기에 맛들인 관객들은 후계자를 자처하는 잡룡(?)들의 몸부림에 좀처럼 열광하지 못했다. 1976년부터 등 소림사 관련 영화들이 히트했고 그와 함께 황가달, 류가휘 같은 스타가 탄생했지만 이소룡이 남겨준 흥분을 잠재울 만큼은 아니었다.짧은 순간의 격렬한 움직임만으로는 도저히 이소룡의 그림자를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일까. 이후 홍콩 영화계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움직임이 태동하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어느 제작자의 감정싸움이었다. 오사원은 뛰어난 프로듀서였지만 쇼브러더스 영화사의 상층부와 다툼이 잦았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프로덕션을 세우리라 결심한 것이 1970년대 후반. 오사원은 평소 눈여겨봤던 무술감독 원화평을 연출자로 키우려 했다(원화평은 나중에 에서 무술감독을 맡았다). 두 사람이 첫 영화의 주연으로 낙점한 배우는 성룡. 성룡은 존재감 없는 외모(쌍꺼풀 수술로 그나마 또렷해졌다)로 한국과 홍콩을 오가며 그저 그런 영화에 출연하던 2류급 배우. 그러나 재빠른 몸동작만큼은 최고였다. 1978년, 초일류 제작자와 초일류 무술감독과 초일류 스턴트 배우라는 삼각 조합은 라는 독특한 영화를 세상에 선보였다. 의 액션은 춤도 아니고 무술도 아니었다. 흡사 우스꽝스러운 광대짓 같았다. 그러나 성룡의 앳된 외모와 걸출한 움직임에 힘입어 장난 같은 동작은 도리어 관객들에게 통쾌한 웃음을 안겨줬다. 이어 성룡은 까지 히트시키며 승승장구한다(우리나라에서는 이 먼저 개봉했다). 이른바 코믹 액션의 전성기가 시작된 것이다. …. 거듭된 성공에도 성룡은 도취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대배경을 현대로 바꾸고 영화의 성격마저 액션 중심에서 코미디 중심으로 뒤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 첫 번째 시도는 홍금보 감독의 (1983년). 성룡은 조연도 마다하지 않으며 절친한 동료의 영화적 실험에 동참했고, 흥행 성공으로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했다. 이어 성룡은 감독, 각본, 주연까지 맡은 를 세계적으로 히트시켰다. …. 성룡의 성공가도는 끝이 없었고 급기야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 영웅, 본색을 드러내다 성룡의 액션은 거의 독과점 상태였다. 구르고 때리고 피하는 액션으로는 어느 누구도 그 아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장철의 조감독 출신인 오우삼은 ‘주먹 아닌 총’으로 블루오션 개척에 나섰다. 은 그 찬란한 결과물이었다. 현대판 협객전이라 할 만한 이 작품은 홍콩뿐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크게 히트했다. 상영 시간이 끝났음에도 관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밤새도록 영사기를 돌렸다는 일화가 전설처럼 내려온다. 이후 액션 영화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다. 협객들은 칼집 대신 홀스터를 찼고, 도복 대신 레인코트를 입었다. 기합과 초식은 자취를 감췄고 방아쇠를 당기는 무심한 표정만이 스크린을 아로새겼다. 권총을 속사포처럼 내갈긴 후 담배를 피워 무는 모습이 가장 멋졌던 배우 주윤발은 그런 영화의 홍수 속에서 독보적으로 빛났다. 장국영, 유덕화, 장학우, 이수현 등이 그 뒤를 따랐고, 적룡을 비롯한 옛 스타들이 다시금 인기를 얻었다. 성룡 액션을 넘어서려는 움직임은 이른바 ‘홍콩 누아르’만이 아니었다. 서극은 일찍이 에서 특수 촬영 기법으로 고대 무협의 세계를 재현하려 했지만 흥행에 실패했다가 1987년 무술감독 출신인 정소동에게 연출을 맡긴 에 이르러 기어이 성공했다. ‘SFX 무협영화’로 불린 이런 흐름 또한 아류작들을 양산하며 오랫동안 유행을 이끌었다. 중국 본토의 무술대회 선수권자인 이연걸을 내세워 정통 권법 영화를 부흥시키려는 움직임도 주목할 만했다. 이연걸은 1979년까지 중국 무술대회를 5연패한 달인. 시리즈로 얼굴을 알린 뒤 서극 감독에게 발탁돼 시리즈를 히트시키며 일약 초일류 액션 스타로 발돋움했다. 액션의 숱한 유행은 21세기가 시작되며 잦아들고 있다. 성룡도, 주윤발도, 이연걸도 예전 같지 않다. 더불어 세계 무술 영화의 거점이던 홍콩 영화계는 힘을 잃었다. 시나리오가 완성되면 다음 날 곧바로 ‘표절작’이 뿌려진다는 후안무치한 골육상쟁의 분위기 속에서 하루하루 스러져갔다. 끊임없이 이어지던 액션 스타의 계보 역시 지금에 이르러 더 이상 쓰이지 않고 있다. 전 세계 영화계에 개인기 대신 규모로 몰아붙이는 대형 액션만 횡행하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이제 육체의 움직임에 관심이 없는지도 모른다. 액션의 일대 위기다. 에서 에단 헌트는 이렇게 말한다. “절박한 순간이라면 필사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지금 액션 영화계는 절박하다. 광야를 내달리는 초인적 영화인의 ‘필사적 조치’가 뒤따르지 않는다면, 육체가 곧 연기인 진정한 의미의 액션 스타는 공룡처럼 멸종할지도 모른다. ◇ 우리나라의 액션 스타 으악새 영화. 한때 우리 관객들은 우리나라 액션 영화를 그렇게 불렀다. 허공을 내지른 주먹에 악당들이 “으악” 하고 제풀에 몸을 날리며 쓰러진다고 해서 붙은, 실로 치욕적인 별명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액션 스타가 탄생하기는 쉽지 않았다. 장동휘, 박노식, 이대근 등이 이른바 ‘다치마와리 영화(몸싸움 영화)’에서 주연을 맡기는 했으나 영화계의 본류는 아니었다. 정창화 감독 같은 액션 전문 연출자, 황정리처럼 액션만 고집한 배우는 척박한 우리나라 영화계 대신 홍콩에서의 활약을 선택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정창화 감독은 등을 히트시키며 일급 감독 반열에 올랐고, 황정리는 성룡의 등에서 악역으로 활약했다. 한용철은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활약한 거의 유일무이한 액션 스타라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재미교포 출신(미국식 이름은 ‘챠리 셀’)으로, 무술의 달인은 아니었으나 발차기가 멋지다는 이유만으로 1973년 새로운 액션 스타를 찾고 있던 이두용 감독에게 발탁됐다. 결과는 대성공. 다리를 쭉 뻗어 순식간에 상대 뺨을 연타하는 광경이 관객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며 인기를 끌었고, 그와 함께 을 비롯해 2년 동안 여섯 편의 액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다. 하지만 지나친 다작 탓인지 인기는 곧 가라앉고 말았다. 챠리 셀 외에 바비 킴이라는 또 한 명의 재미교포 배우가 반짝 활약을 펼치기도 했다(비행기 안에서 소동을 피운 가수와는 다른 사람이다). 연예계 슈퍼스타 겸 액션 영화 애호가 겸 무술인이던 전영록이 이두용 감독과 함께 ‘돌아이’ 시리즈를 선보이며 잠시 인기를 끌기도 했다. >>글 김유준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등을 번역했다. 현재 프리랜서 기자로 활동 중.
- 2015-10-06 0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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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90세 넘어서도 노래하고 싶어요”
- 원로가수 명국환(82)의 명함은 상당히 단순하다. 한문으로 원로가수 明國煥이라고 쓰여 있고 그 밑에 덩그러니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뒷면에는 데뷔연도와 히트곡 4곡이 적혀 있는 것이 전부다. 그러나 무심함 속에 보이는 원로의 품격은 비로소 말을 해보니 알 수 있었다. 지난해 12월, ‘2014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시상식장에 눈썹이 짙은 노신사가 포토월 앞에 섰다. 기자들은 ‘누구지? 일단 찍고 보자’라며 연신 플래시를 터뜨린다. 허나 노신사가 말끔한 정장을 입고 포토월에 서 있으니 어떠한 상을 받는 수상자 정도로만 짐작할 뿐, 그가 누군지 정확하게 이름 석자를 알고 있는 이는 드물다. 무더위가 한창이던 여름 영등포 거리에서 그를 만났다. 수많은 인파 속에 뒤섞여 있었지만, 그를 알아보는 이는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듯한 그의 이름은 명국환. 60년 전에는 한국 가요계를 주름 잡았던 가수, 지금은 원로라는 수식어가 붙은 가수다.데뷔연도는 1954년. 그가 데뷔했을 때 태어난 사람도 이미 환갑을 넘었다. 그 세월만큼이나 가수 명국환이라는 이름 앞에 붙는 단어는 고귀하다. 원로(元老). 한 가지 일에 오래 종사해 경험과 공로가 많은 사람이라는 뜻. 결국 명국환에게 원로라는 말이 붙은 이유는 그가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기여한 바가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난해 참석한 ‘2014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에서 자리를 빛낸 이유도 이와 같다. 우리나라 대중문화 발전에 공로가 큰 점을 인정받아 보관문화훈장을 받기 위해서였다. 이제 그의 나이 여든 둘. 어쩌면 가수 인생의 종착역에 다다랐을지도 모르는 이때. 그는 가장 큰 보상을 받은 셈이다. 노신사 명국환이 인터뷰 도중 노래를 한다. 두 눈을 지긋하게 감고 부르는 그의 노래는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구슬프고 애잔하다. 하지만 그 깊이는 황혼이 돼서야 더욱 은은한 빛을 발산하고 있다.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본 여든 둘의 나이에도 자신은 아직도 ‘노래밖에 모르는 숙맥’이라고 표현하는 명국환. 나이 탓인지 사람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해 대답하는 목소리가 자주 커지지만 옛 시절의 기억들을 토해내는 목소리는 꽤나 또렷하다. ◇악극단원을 꿈꾸던 소년 소년 명국환의 꿈은 악극단원이 되는 것이었다. 악극단원이 돼 전국을 돌아다니며 마음껏 노래하는 것. 그에게 그 꿈은 최고의 낭만이자 로망이었다. 밤이면 동구밖으로 나가 노래를 부르던 소년. 고향 황해도 연백에서 그는 이미 귀여운 스타였다. “노래 한곡 해 보거라”하는 어른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구수하고 애달픈 노래 솜씨를 뽐낸다. 신청하는 노래 대부분 다 불렀을 정도로 음악을 사랑하던 소년 명국환이었다.하지만 그 시절은 목청 하나 믿고 돈을 번다는 것에 부정적인 시기였다. 그의 아버지 또한 그렇게 생각했다. ‘네가 노래를 잘 해봐야 얼마나 잘 하겠느냐’는 생각에 악극단원이 된다는 꿈을 포기하라며 소년 명국환에게 엄포를 놓기도 했다. 그야말로 부모님의 결사반대였던 것이다. “제 성격이 온순해서 그렇지 않은데 그때는 아버지가 반대하시자 대들었어요. 나는 가수가 될 거라면서요. 간섭하면 반항을 하겠다고 역으로 아버지께 엄포를 놓기도 했지요.”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호소력이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는 지역 콩쿠르 대회에서 남인수의 ‘남아일생’을 불러 3등에 입선해 가수가 될 소질을 보이더니, 6·25전쟁이 끝난 직후 열린 전국 콩쿠르 대회에서 우승을 하며 가수의 꿈을 마침내 이룬다. “전국 콩쿠르 대회에서 우승을 하고 나서 그 다음해에 정식적인 가수로 데뷔를 했죠. 그게 1954년입니다. 그때 생각했죠. 시대의 아픔을 노래하는 사람이 돼야겠다고 말이죠.” ◇없어서 못 팔았던 레코드 “6·25전쟁 이후 이북의 실향민을 달래는 노래인 ‘백마야 울지마라’가 엄청난 히트를 쳤어요. 여기에서 ‘백마’는 백의민족을 상징하는 것인데, 그것이 실향민들의 아픔을 잘 보듬어 줬던 것 같습니다.” 절절한 노랫말과 애절한 목소리가 어우러져 명작 한 곡이 탄생했다. ‘백마야 울지 마라’다. 이 노래가 전파를 타자 전국 팔도에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었고, 레코드 상들은 이 레코드를 사기 위해 서울로 모여들었다. 레코드 가게 근처의 여관에서 발매 전날 밤을 새워 사가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만했다. 그가 백마야 울지 마라, 아리조나 카우보이, 방랑시인 김삿갓, 내 고향으로 마차는 간다 등을 잇따라 히트시키던 그 시기에 대중이 그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수단은 레코드가 아니면 라디오뿐이었다. 그마저도 여건이 열악해 사전 녹음방송 같은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래서 라디오 생방송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도 많다. “1960년대 흑백TV의 시대가 도래하기 이전에는 라디오 전성 시대였죠. 그런데 오로지 생방송밖에 할 수 없었죠. 라디오에 출연하면 모든 장르의 노래를 총망라해서 불러야 했는데, 어떤 때는 음정과 가사를 모르는 노래도 불렀습니다. 라디오에도 방청객이 있던 그때에는 가사를 틀리면 그들에게 사과를 하고 다시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네요.” ◇청춘의 삼색 깃발 “장미꽃이 피어나는 새파란 가슴 / 저 하늘에 펄럭이는 청춘의 삼색 깃발 / 달 실은 청노새야 달려가자 / 별 실은 청노새야 달려가자.” 명국환의 노래 ‘청춘의 삼색 깃발’의 가사 중 일부분이다. 그의 이 노래는 당시 우리 사회가 얼마나 폐쇄적이고 통제가 심했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6·25전쟁 이후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절 이 노래는 사찰계(현 국정원)의 타깃이 되기 쉬운 먹잇감이었다. 작사가 손로원은 노랫말을 쓰면서 전후의 아픔을 딛고 더 좋은 미래를 향해 달려가자는 메시지를 담고자 했다. 그러나 그 가사가 발목을 잡았다. ‘장미꽃’과 ‘깃발’ 그리고 ‘달려가자’는 노랫말이 문제였다. 지금이야 장미의 색깔도 가지각색이지만 통상 ‘장미는 빨간색’이라는 통념이 있던 시절, 그것은 공산주의의 빨간색을 상징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다. ‘깃발’ 또한 북을 상징하고 ‘청노새가 달려가자’는 것도 ‘북으로 당장 넘어가자’는 뜻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6·25전쟁 때 뿜었던 피가 채 마르지 않았던 그 시절 그 곡은 그렇게 해석됐다. 작사가 손로원과 명국환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사상이 의심된다며 사찰계에 불려갔던 것도 수차례. 졸지에 ‘빨갱이’로 낙인 찍힐 판이었다. “정말 당혹스러웠죠. 노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빨갱이’로 몰릴 판이었으니까요. 조사 과정에서 손로원 작사가는 전혀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변명을 강하게 했던 것으로 기억해요. 정말 아찔했던 순간이었죠.” ◇원로의 꿈 명국환은 여전히 현역이다. 그리고 왕성하다. 인터뷰가 끝난 다음 날에도 부산에 공연을 하러 갈 만큼 노래를 할 수 있는 곳이라면 전국 팔도를 누빈다. 하지만 이런 현재가 오기까지 오랜 기간의 정처 없는 휴식 기간이 있었다. “1985년에 KBS에 ‘가요무대’가 생기고 나서 무대에 많이 섰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후배들이 자리를 채우면서 제가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더라고요. 어쩔 수 없었죠. 그래서 원하지 않게 계속 쉴 수밖에 없었습니다. 참 미련하죠. 다른 일을 하면서 돈을 벌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노래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으니 다른 일을 못하겠더라고요. 정말 노래밖에 모르는 숙맥이었지 뭐.” 이제는 후배 가수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그. 여든이 넘은 나이지만 품고 있는 꿈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꿈을 말해달라는 기자의 말에 머쓱해 하면서도 기다렸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이야기한다. “남들이 이 나이 들어서 이런 말을 하면 욕심이라고 해요. 앞으로 10년만 더 노래를 하고 싶어요. 사실 제 목소리가 살아 있으니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하지만 이 나이에 현역으로서 노래를 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정말 행운인 것 같아요. 아직도 공연장에 가면 한 차례 공연에 몇 백만원을 받으니 이만한 능력이 어디 있겠어요?” 1970년대부터 KBS 가요무대가 시작됐던 1985년까지 이렇다 할 소득이 없이, 노래만 불렀던 ‘숙맥 원로’ 명국환은 이제 옛 것을 그리워하는 오늘날 더욱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2015-09-21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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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라보가 만난 사람] 김청기는 살아 있다
- ‘빠빠라빠빠 빠빠빠 달려라 달려 로보트야. 날아라 날아라 태권브이’ 이제는 익숙한 이 멜로디. 1970년대 어린이들의 가슴에 승리의 브이를 그려 넣었다. 이제는 그 어린이들이 모두 성인이 돼 또 다른 어린이들의 아버지,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태권브이를 찾는다. 당시에는 우상, 이제는 추억이 돼 버린 태권브이. 그 역사적인 만화 뒤에는 감독 김청기(金靑基·74)가 있었다. 일흔을 넘긴 나이지만 아직까지 왕성하다. 그에게 욕심이 아닌 꿈 그리고 한국 만화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본다. 내년이면 벌써 불혹이다. 사람이냐고? 그게… 사람은 아니고 키가 장장 56m에 달하는 로봇이다. 그러니까 올해 39세. 사람으로 따지면 아직 청춘 그 자체지만, 로봇들 사이에서는 원로 스타이자 대선배님인 ‘로보트 태권V’다. 지난 7월 24일은 태권브이의 39번째 생일이었다. 서울 피규어 뮤지엄W에서는 태권브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는데, 1층 전시장을 태권브이 캐릭터로 가득 채웠다. 그런데 점점 재미있는 상황이 벌어졌다. 태권브이가 처음 나왔을 1970년대에는 상상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태권브이의 피규어와 영화 필름을 들고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성인들(요즘은 ‘키덜트’라 부르는)도 보이고, 아들의 손을 잡고 온 40대 아버지의 모습도 보인다. 이들 모두 1970년대, 그 시절엔 태권브이에서 눈을 떼지 못했던 어린이들이었으리라. 이들은 한 사람을 기다리며 얼굴에 드러나는 기대감과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화백이오’라고 온 세상 사람들에게 표현을 하는 듯 베레모를 쓴 노신사가 등장하자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린다. 바로 ‘태권브이의 아버지’ 김청기 감독이다. 들뜬 것은 그들뿐만 아니었다. 김 감독도 들뜬 감정을 주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정말 기분이 너무 좋아요. 이렇게 제 작품을 기억해주고 아직까지 찾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말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 오니 제가 다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 창작은 늙지 않는다 부천에 있는 작업실에서 만난 김 감독은 색다른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수묵화가 바로 그것. 그런데 특이한 것은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수묵화 사이로 태권브이가 의연하게 솟아 있는 점이다. 고전과 현대의 조화. 일흔 넷의 나이에도 트렌드에 뒤처지지 않는 감각은 바로 꾸준한 창작 활동에 있었다. “창작을 하는 것은 유일하게 제가 젊다고 느끼게 해주는 순간이에요. 창작과 생각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더 좋은 창작물을 만들기 위해 노력합니다. 창작이란 경험과 실패를 딛고 일어나야 멋있고 참신한 것이 나오니 말입니다. 요즘은 상식을 뛰어넘는 엉뚱함이 있어야 합니다. 고정관념에 사로잡히면 절대로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 만화 감독이라는 세계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한 노력은 끝이 없다. 트렌드와 시대 흐름을 분석하는 데 시간을 아끼지 않는다. TV와 드라마, 책 등을 꾸준히 보면서 ‘왜 인기가 많은지’ 또는 ‘어떤 매력으로 대중에게 다가가는지’에 대한 분석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대중의 요구를 파악해 그에 맞는 창작을 하는 밑거름이 되기 때문이다. “수묵화도 새로운 창작을 하는 재미있는 일 중 하나예요. 하지만 제 꿈은 따로 있죠. 어린이뿐만 아니라 남녀노소가 모두 즐길 수 있는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를 만드는 것이에요. 우리나라에서도 디즈니의 같은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 태권브이도 벌써 불혹이야 “저는 태권브이를 기획할 때 이렇게까지 재평가를 받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어요. 재평가 받고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항상 뿌듯합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더 잘 만들 걸 그랬네요.” 1960년 만화가로 입문한 김 감독. 1976년 ‘로보트 태권브이’가 탄생하기 전까지 그는 TV 광고나 프로그램 타이틀 로고를 그리곤 했다. 그러나 그가 꿨던 꿈은 그것이 아니었다. 장편 만화를 그리는 것. 이나 같은 일본 만화가 당시 어린이들을 사로잡던 시절. 대한민국 만화감독 김청기는 위기감과 절박함을 느꼈다. 일본의 문화에 우리나라 문화가 잠식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그 시절 김 감독이 기획했던 태권브이는 그처럼 대한민국 만화 감독으로서의 자존심이 달린 문제였다. 그렇게 태어난 태권브이는 일본 만화에 빼앗겼던 대한민국 만화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데 초석이 됐다. 이렇게 감독의 혼과 작가정신이 담긴 태권브이에 대한 반응이 움트기 시작하면서, 웃지 못할 에피소드도 생겨났다. 밤낮없이 태권브이 작업에 몰두하던 시절이었다. 피로가 몰려와 실수로 주인공 훈이의 얼굴을 약간 찌그러지게 그린 것이다. 작은 선의 변화도 실제 만화에서는 윤곽선이 크게 보이기 때문에 꽤나 큰 실수였다. 그런데 이런 단순한 실수도 대중은 심오하게 해석했다. “당시 피곤이 몰려와 실수를 한 것이었는데, 혹자는 ‘훈이의 얼굴이 찌그러진 것은 작가의 심오한 의도가 들어 있는 것’이라고 해석하려고 하더라고요. 이제야 고백합니다만 그것은 단순한 실수였습니다. 하하.” ◇ 1970년대와 현재 김 감독은 1970년도를 돌아보면 어찌 만화를 그렸나 싶다. 요즘은 케이블TV를 통해서 수많은 만화영화를 볼 수 있지만, 그 당시에는 TV조차 보급이 많이 안 됐던 시기 아닌가. 또, 그 당시 부모들의 인식은 ‘만화영화는 아이들 공부에 방해가 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만화가는 사회적으로 지탄의 대상이었다. 김 감독은 그때 회의감 때문에 펜을 놓고 싶었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40년이나 지난 지금. 그 어린이들이 한 아이의 부모님이 됐다. 김청기 만화를 향유했던 그들은 이제 아이들의 손을 잡고, 태권브이가 있는 곳을 향한다. “그 당시 어린이들을 생각하면 참으로 불쌍해요. 이렇다 할 문화 콘텐츠가 전무했으니까요. 그런데 이제는 그 어린이들이 커서 태권브이를 보는 것을 넘어 캐릭터까지 구매를 하고 있어요. 정말 감회가 새롭습니다.” ◇ 멈추지 않는 도전, 그리고 로봇 김 감독은 자신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준비를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다. 첨단 기술을 사용해 완성도 높은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를 만드는 것이다. 김 감독은 이런 영화를 만들기 위한 인프라가 부족했던 1980년대 실사애니메이션 합성 영화의 시초격인 를 제작한 경험이 있어 자신감도 넘친다. 아직 가제지만 제목도 정해놓았다. ‘RG로봇’이 바로 그것이다. 그는 이 영화에 거는 기대가 상당하다. , 등 성인들도 좋아하는 일본 만화가 전 세계를 강타하는 요즘. 한국에서도 어린이에게만 국한된 영화가 아닌 성인도 좋아하는 만화 영화를 만들어 보겠다는 심산이다. “사실 우리나라의 만화영화는 너무 어린이들에게 편중돼 있는 실정입니다. 이제는 그것을 넘어서야 합니다. 타깃을 조금 더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내년 여름 개봉을 목표로 ‘RG로봇’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저는 시나리오와 기획, 스토리보드 구성을 맡고 있죠.” 김 감독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러나 만화에 대한 욕심이 열정으로 보이는 것은 김 감독의 깊은 고민이 그 꿈에 비치기 때문일 것이다.
- 2015-09-07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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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복 70년] 70년을 빛낸 스포츠 스타들 - 신명철 스포츠 평론가
- 광복 70년을 맞는 2015년 현재, 스포츠는 경제와 함께 신생 대한민국이 압축 성장한 대표적인 분야로 꼽힌다. 대한제국이 제국주의 일본에 병탄된 이후 한국인들의 스포츠 활동은 상당한 제약을 받으면서도 민족의 힘을 기르기 위한 수단으로 1920년 조선체육회(오늘날의 대한체육회)를 창립하는 등 나름대로 발전을 거듭했다. 글 신명철 스포츠 평론가 일제 강점기 식민 지배 아래 한국인의 국제무대 활약상은 극히 제한적이었다. 1932년 제10회 로스앤젤레스 하계대회(마라톤 김은배·권태하, 복싱 황을수), 1936년 베를린 하계대회(마라톤 손기정·남승룡, 축구 김용식, 농구 이성구·장이진·염은현, 복싱 이규환) 그리고 1936년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독일) 동계대회(스피드스케이팅 김정연·이성덕·장우식) 등 총 3차례의 올림픽에 모두 13명의 선수가 출전했을 뿐이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 인도는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었지만 1900년 제2회 파리 대회부터 올림픽에 나섰고, 필리핀도 미국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1924년 제8회 파리 대회에서 올림픽 무대에 데뷔했다. 일본은 1912년 제5회 스톡홀름 대회에 처음 참가한 뒤 1936년 제11회 베를린 대회에서 종합 8위(금 6, 은 4, 동 8)에 오르는 등 1930년대에 이미 세계적인 스포츠 강국으로 발돋움했다. 1945년 해방 이후 한국 스포츠는 세계 수준은커녕 아시아 지역에서도 크게 뒤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반세기가 조금 넘는 기간 안에 한국은 세계 스포츠 10강으로 성장했다. 놀라운 성장 속도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수많은 선수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였던 나라를 먹고살 만한 국가로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던 국민들에게 큰 기쁨과 용기를 줬던 한국 스포츠의 광복 후 70년을 살펴본다. 혼란기 이끈 두 효자 종목 복싱과 역도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미국 등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면서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35년의 일제 강점에서 해방됐으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스포츠도 혼란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대한민국 정부가 태어나기 훨씬 전인 1945년 11월 26일 이 땅의 체육인들은 조선체육회를 재건했다. 경기 단체도 조선육상경기연맹과 조선축구협회 등이 속속 탄생했다. 1945년 10월 27일 열린 자유해방 경축 전국종합경기대회는 제26회 전국체육대회로 이어졌다. 올해 제96회를 맞는 전국체육대회의 기원은 1920년 열린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다. 여러 어려운 여건에서도 조선올림픽위원회는 1947년 국제올림픽위원회에 가입하고 1948년 7월 런던 올림픽에 출전했다. 이 대회에서 역도의 김성집과 복싱의 한수안이 각각 동메달을 따며 신생 대한민국의 존재를 온 세계에 알렸다. 이에 앞서 그해 2월 스위스 생모리츠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 한국은 5명의 선수단을 파견했다. 태극기를 앞세우고 출전했지만 두 대회 모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전에 열렸다. 한국전쟁의 와중에 열린 19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는 역도의 김성집과 복싱의 강준호가 각각 동메달을 차지했다. 특기할 만한 사실은 한국전쟁 기간인 1951년과 1952년에도 전국체육대회를 개최한 것이다. 1951년 뉴델리에서 열린 제1회 아시아경기대회에는 한국전쟁 탓에 참가하지 못했으나 1954년 마닐라에서 개최된 제2회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은 종합 3위를 차지하며 아시아 스포츠 강국으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했다. 1956년 멜버른 올림픽에서 한국은 복싱의 송순천이 올림픽 출전 사상 처음으로 은메달을 따고 역도의 김창희가 동메달을 차지했다. 1940~50년대에 참가한 3차례 올림픽에서 한국의 메달박스는 복싱과 역도였다. 한국 스포츠의 메카 태릉선수촌 개장… 치열한 남북 경쟁 해방 이후 70년, 한국 스포츠 발전 과정에서 태릉선수촌은 절대 빼놓을 수 없다. 이제는 진천선수촌에 자기 자리를 거의 물려줬지만, 아마추어와 프로를 막론하고 태릉선수촌과 인연을 맺지 않은 한국 운동선수는 거의 없다. 196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세계무대로 도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시기로, 국가 대표 선수들의 요람인 태릉선수촌이 1966년 문을 열었다. 1960년대에는 1964년 도쿄 올림픽과 1968년 멕시코 올림픽 그리고 1962년 자카르타 아시아경기대회, 1966년과 1970년 방콕 아시아경기대회 등 국제종합경기대회에서 선전하는 한편 1966년 미국에서 열린 세계아마추어레슬링선수권대회에서 장창선이 해방 이후 종목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처음으로 우승했다. 1967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열린 세계여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는 박신자를 앞세워 준우승을 차지하는 등 각종 국제 대회에서 ‘스포츠 코리아’를 알리기 시작했다. 1963년에는 도쿄 올림픽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한 회담이 스위스와 홍콩에서 3차례에 걸쳐 이뤄졌다. 이렇다 할 소득 없이 끝난 회담이었으나 남북 스포츠 관계자가 분단 이후 처음으로 머리를 맞댔다는 것만으로도 의의가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90년대 초반 탁구와 청소년 축구의 단일팀 구성 그리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과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공동 입장 등 일정한 성과물을 거두게 된다. 1960년대에는 개인 종목의 프로 스포츠가 활기를 띤다. 1966년 6월 김기수가 이탈리아의 니노 벤베누티를 판정으로 꺾고 WBA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올랐고, 김일이 이끈 프로 레슬링은 당시 국내에서 해마다 개최한 유일한 국제 대회인 동남아여자농구대회와 함께 국민적 볼거리로 큰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는 한국 스포츠가 아시아 무대에서 벗어나 세계무대로 나아가는 시기이기도 하고, 1972년 뮌헨 대회 때 처음으로 올림픽에 얼굴을 내민 북한과 치열한 경쟁을 벌인 시기이기도 하다. 북한이 1972년 뮌헨 대회 사격에서 올림픽 금메달을 먼저 따자 한국은 1976년 몬트리올 대회에서 양정모(레슬링)의 금메달로 응수하는 등 1970년대 내내 올림픽과 아시아경기대회(1974년 테헤란·1978년 방콕) 등 여러 국제 대회에서 치열하게 맞붙었다. 체제 경쟁의 측면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한국 스포츠의 전력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됐다. 이 시기, 한국 스포츠를 관통한 표어가 ‘선 체력 후 기술’이었다.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 전관왕에 오른 김진호, 1978년 한국인 선수로는 처음으로 유럽 무대인 서독 분데스리가에 진출한 차범근 등이 이 무렵 한국 스포츠의 슈퍼스타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1988년 서울 올림픽, 한국 스포츠 도약의 발판 1960년대와 70년대에 걸쳐 발전의 토대를 착실하게 만든 한국 스포츠는 1980년대 들어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꽃을 피운다. 서울 올림픽 유치 과정은 한마디로 그동안 쌓아 온 국력의 집결 과정이었다. 1970년 제6회 아시아경기대회를 유치했다가 반납했던 아픈 기억은 두 대회의 성공적인 개최로 완전히 사라졌다. 서울 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은 체제를 넘어서서 세계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동서 화합의 계기가 된 서울 올림픽을 치르면서 국민들은 새로운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됐다. 1980년대에는 프로 야구가 출범하면서 프로 스포츠 시대의 막을 열기도 했다. 1983년에는 축구와 민속 경기인 씨름이 프로화돼 스포츠의 프로화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됐다. 축구의 경우 프로화에 따른 경기력의 발전으로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 1954년 스위스 대회 이후 32년 만에 출전하는 등 성과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1982년 뉴델리 아시아경기대회에서 한국은 금메달 28개와 은메달 28개, 동메달 37개를 획득했고 북한은 금메달 17개와 은메달 19개, 동메달 20개를 차지해 스포츠의 남북 경쟁은 이제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유도 금메달리스트 하형주, 서울 아시안게임 육상 3관왕 임춘애 등은 스포츠 팬들의 기억에 생생한 1980년대의 스타플레이어다. 한국 스포츠 세계 10강을 굳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홈의 이점을 살려 종합 순위 4위(금 12, 은 10, 동 11)에 오른 한국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종합 순위 7위(금 12, 은 5, 동 12)를 차지하면서 스포츠 강국의 위상을 확실히 다졌다. 그해 알베르빌(프랑스)에서 열린 동계 올림픽에서 한국은 쇼트트랙스피드스케이팅에서 2개의 금메달을 획득하며 동계 종목 사상 첫 금메달을 기록하는 성과를 이뤘다. 이후 2006년 토리노 대회까지 한국은 쇼트트랙을 주력 종목으로 동계 올림픽에서도 세계 10위권의 성적을 유지했고, 2010년 밴쿠버 대회에서 피겨스케이팅 김연아와 스피드스케이팅 이상화와 모태범, 이승훈 등의 금메달 6개와 은메달 6개, 동메달 2개로 종합 순위 5위에 오르는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2014년 소치 대회에서는 김연아가 금메달을 도둑맞는 등으로 인해 종합 순위 13위(금 3, 은 3, 동 2)로 주춤했지만 2018년 평창 대회에서는 다시 한 번 좋은 성적이 기대된다. 하계 올림픽에서도 2012년 런던 대회에서 역대 최다인 13개의 금메달(은 8, 동 7)이 쏟아지면서 종합 순위 5위를 기록했다. 원정 대회 최고의 순위였다. 축구가 박주영, 구자철, 기성용 등의 활약에 힘입어 기대하고 기대하던 동메달을 따 국민들에게 금메달 이상의 기쁨을 안겼다. 이에 앞서 2008년 베이징 대회에서는 이승엽, 류현진, 이대호 등이 힘을 모은 야구가 9전 전승 금메달의 쾌거를 이뤘다. 한국 스포츠는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다. 아마추어의 경우 국제 대회 성적이 특정 종목에 치우치지 않고 있으며, 프로에서는 이전 시기와는 비교할 수 없이 많은 선수들이 세계 여러 나라에서 뛰고 있다. 특히 여자 골프는 1998년 미국 여자 프로 골프 투어 4관왕에 오른 데 이어 2015년 현재 통산 25승에 빛나는 박세리의 뒤를 잇는 ‘박세리 키즈들’이 세계의 그린을 휘어잡고 있다. 또 하나 달라진 사실은 모든 종목의 선수들이 ‘1등 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스포츠를 즐기고 있다는 것이다. 신세대 선수들은 동메달을 따도 금메달을 딴 듯 기뻐한다. 한국 스포츠는 올해 프로 야구가 800만 관중을 겨냥하고 있고 다양한 종목의 생활 체육이 활성화돼 있는 데서 알 수 있듯이 보는 스포츠와 즐기는 스포츠가 엘리트 스포츠와 적절하게 균형을 맞추며 발전해 나가고 있다. 해방 후 70년, 속도를 우선시하며 나타난 압축 성장의 폐해를 슬기롭게 극복하고 있는 것이다. △ 신명철(申明徹) 스포츠 평론가 편집국장과 편집위원, 편집위원을 거쳐 편집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1988년 서울 올림픽과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1990년 베이징 아시아경기대회, 1993년 버팔로(뉴욕주) 유니버시아드대회, 1995년 프로 야구 한일슈퍼게임,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등 주요 국제 대회를 취재했다.
- 2015-07-07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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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성찬의 골프 이야기③]‘보일랑 말랑 미니스커트에 눈이 가네’
- 여자프로들의 인기비결은? “나는 남자골프대회는 안 봐. 여자대회만 보지.” 골프마니아 어르신의 이야기다.이유가 궁금하다. 혹시 미니스커트? 필드에 갤러리로 나서거나 TV를 통해보는 대회는 역시 재미를 주는 것은 여자대회다. 눈을 즐겁게 한다. 골프는 남자대회가 더 긴박감 넘치고 흥미를 더한 것이 사실이다. 타이거 우즈(미국)의 플레이와 공인 장타자 버바 왓슨(미국)의 대포알을 쏘는 듯한 400야드 이상 볼을 때리는 것을 보면 환상적이다. 그런데 유독 국내 대회는 여자대회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한국여자오픈에는 갤러리가 무려 3만8000여명이나 몰렸다. 이는 늘씬한 미모와 함께 필드 여신들의 옷맵시도 한 몫 한다. 이전에는 복장에 대한 규제가 심했지만, 이제는 라운드 티셔츠에 민소매까지 규제가 풀리면서 여자선수들은 자신의 미모를 마음껏 과시하고 있다. 특히 요즘은 미니스커트가 대세다. 미니스커트는 무릎 위에 10~20cm까지 올라간 극히 짧은 치마. 1966년 영국의 디자이너 매리 퀀트가 발표해 전 세계에서 선풍적인 인기와 유행을 몰고 온 의상이다. 미니스커트는 선수들이 플레이하는데 지장이 없을까. 한동안 속바지와 치마를 결합한 큐롯팬츠가 유행한 적이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예 미니스커트를 입고 경기를 하는 선수들이 많아 졌다. 최근 출시된 초미니스커트 길이는 33cm. 이 정도면 말 그대로 ‘한뼘 치마’인 셈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아슬아슬하게 한다. 그런데 재미난 사실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선수들이 대부분 늘씬한 몸매에다 기량도 뛰어나 우승도 자주하는 스타플레이어들이다. 초미니스커트로 한껏 멋을 부리며 유행을 선도한 선수는 안신애(24·해운드비치골프앤리조트)다. 섹시함을 강조한 그의 옷차림은 ‘만인의 연인’처럼 골프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에서 2승을 거둔 안신애는 165cm의 키에 미모도 뛰어나 매 대회 때마다 우승자보다도 인기를 끌고 있을 정도다. ‘섹시아이콘’ 양수진(23·파리게이츠)도 팬들을 몰고 다닌다. 통산 5승의 양수진은 귀여움과 섹시함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핫팬츠도 즐겨 입는다. 169cm의 미녀골퍼 김하늘(26·BC카드), 171cm의 윤채영(27·한화), 올 시즌 E1채리티오픈 챔피언 허윤경(24·SBI저축은행)도 뛰어난 기량만큼이나 옷 잘 입는 선수로 알려져 있다. 탄탄한 근육질 몸매의 장하나(22·BC카드)는 164cm로 언제나 미니스커트를 선호한다. 선수들이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 것은 아름다운 몸매를 자랑할 수 있는데다 다리가 길고 늘씬해 보이기 때문이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는 패션모델 산드라 갈(독일)과 ‘핑크공주’ 폴라 크리머(미국)가 미니스커트 마니아로 섹시아이콘의 대명사로 불리고 있다. 미니스커트와 볼륨감 있는 티셔츠 외에도 국내 여자프로들의 경기가 신다는 이유는 더 있을까. 대회마다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면서 ‘신데렐라’가 출현하는가 하면 선두권 선수들의 기량이 비슷해 지면서 치열한 우승경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대회 코스가 길어지면서 단타자 중심에서 장타를 날리는 선수들이 많이 등장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다. 특히 어르신들은 여자대회를 보면서 실전에서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은 동질감을 느껴 더욱 집중하게 된다고 말한다. 남자선수들의 스윙은 파워풀 해 따라 하기가 쉽지 않지만 여자선수들의 코스 매니지먼트를 통한 그린 공략법 등을 보면서 동일하게 플레이하는 느낌을 갖는다는 것이다. 글 안성찬 골프대기자/ 골프문화칼럼니스트 일간스포츠, 문화일보, 스포츠투데이 체육부 골프전문기자 이투데이 부국장겸 스포츠문화부장 뉴스웨이 골프대기자, 골프문화칼럼니스트
- 2014-07-25 0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