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같은 밤’, ‘가까이 하기에 너무 먼 당신’ 등의 메가 히트곡들로 7080세대에게 깊이 각인된 가수 이광조를 한마디로 정의하면 ‘자유로운 영혼’이다. 거친 가요계에서 수십 년 동안 매니저와 기획사도 없이 자신이 마음에 드는 공연과 음악활동을 했다. 사정이 그러니 당연히 아무런 홍보도 없이 음반을 냈다. 그런데도 노래가 ‘알아서’ 성공했다는 점은 숙명론적이기까지 하다. 그런 그가 최근 생애 최초로 신성사업단을 자신의 기획사로 삼아 새롭게 가수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무엇이든 거침없이 말하며 자신의 인생에 머뭇거림이 없는 남자, 이광조만의 특별한 삶과 생각을 만나봤다.
자유롭다. 이광조와 인터뷰를 하면서 느낀 것은 자유 그 자체인 사람이라는 인상이었다. 말하자면 진짜 보헤미안이다.
“저는 여태까지 유명한 사람들에게 곡을 받은 적이 별로 없어요. 그 사람들이 별로 유명하지 않을 때 가서 ‘한번 들려줘봐’ 하고 듣고 나선 할 건가 안 할 건가를 결정했죠. 어차피 매니저도 기획사도 없었고. 저는 자유스러운 걸 좋아해서 남에게 묶이는 걸 못해요.”
구애받는 걸 못 참는 자유 영혼
그는 심지어 “지금 노래는 하고 싶어서 하는 거 아니에요”라고까지 말한다. 바로 옆에 최근 그와 손잡은 기획사 대표 겸 매니저가 있는데도 말이다.
“안 하려고 했는데 홍순호 대표가 ‘안 하면 안 된다’ 해서 한 거죠.(대표 웃음) 어쩔 수 없이 친구 때문에 이렇게 트로트도, 유튜브도 하고요. 저는 실은 아무것도 안 하는 걸 제일 좋아해요. 럭셔리하게는 못 살아도 길거리에서는 살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어떻게든 일을 시키려는 기획사 대표와 산전수전 다 겪은 가수가 티격태격하는 걸 보고 있자니 웃음이 절로 났다. 사실 두 사람은 초등학교, 중학교 선후배 사이다. 그리고 이 둘의 관계에는 계약서도 없다.
“‘계약하면 안 한다, 그 대신 의리는 지킨다’ 했죠. 10년이면 10년, 20년이면 20년 안 변할 테니까. 지금 돈도 못 버는데도 같이 있잖아요.(대표 웃음) 매니저 없이 일하다가 이런 큰마음을 먹은 이유요? 늙었으니까.(웃음) 아아 농담이고요, 늙었다기보다는 한 인간(홍 대표)을 살려야겠다, 물론 나도 살고요. 그래서 한 거죠.”
부끄럽게 말하는 그가 귀엽다.
독설에는 애정이 있어야 한다
이광조는 한때 가요계에서 독립군으로 불렸다고 한다. PD에게 안 눌리고 혼자서 하고 싶은 걸 하고 사는 그였기에 붙은 별명이었다.
“우리 집이 60년대에 차가 두 대나 있을 정도로 잘살던 집이었는데, 중학교 때 폭삭 망했어요. 집에 돈이 없어 학교 공부도 제대로 못했지만 그래도 제 성격 때문인지 초라하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요. 그런데 가수들 보면 유명해지면 악착같이 돈을 막 벌어서 자기 집 살리려고 하잖아요. 부모님에게 미안했던 건 제가 떴을 때도 이상한 곳이면 안 가고 제 기준에 하면 안 되는 일이다 싶으면 절대 안 했어요. 매니저를 못 구한 것도 그런 성격 때문이었어요.”
어떤 때는 그에게 독설이 심하다는 비판이 날아오기도 했다. 그는 사실 그랬다고 순순히 인정했다. 참지 못하는 성미 때문이었다. 모 방송 가요 프로그램에 나가서 노래를 듣고 대놓고 독설을 한 적도 있다. ‘노래를 이런 식으로 하면 안 되지’ 싶어서였다.
“그런데 말을 안 하는 건 애정이 없다는 거죠. 요즘은 너무 거짓말이 많아요. 못하는데도 아주 잘한다 하고. 예를 들어 제가 활동하던 시절에 노래를 할 때는 목소리에 에코를 안 넣었죠. 그런데 요새는 에코를 다 넣어요. 그렇게 하면 더 잘 부르는 것처럼 들리거든.”
무대는 지금도 떨린다
그에게 할 일 하고 할 말 다 하는 배짱이 두둑한 이유는 어쩌면 그의 가수생활이 흘러가듯 자연스레 도착한 것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제가 대학교를 졸업할 때쯤 서울대 미대 출신 가수가 김민기, 현경과 영애, 이정선 등이 있었어요. 그런데 우리 홍익대에는 아무도 없어서 ‘야 너 한번 나가봐’ 하고 미는 바람에 노래를 하게 됐어요. 그리고 1976년에 데뷔했죠. 맨 처음에 가수 해보라는 권유를 받았을 때 고민이 많았어요. 가수 되면 남들이 다 알게 될 텐데, 그래도 노래를 해야 돈을 벌 수 있겠다 싶었죠.”
그때 그는 지구레코드와 전속 계약을 맺고 생애 최초 계약서를 썼다. 그런데 데뷔 앨범은 다 만들어졌는데 레코드 회사가 3개월이 지나도 발표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노래가 너무 어렵고 대중적이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 그가 받은 계약금은 100만 원이라는 거액. 그러나 그는 성질이 나서 돈을 갖다 주고 계약을 파기했다.
“계약 파기하고 나간다고 하면 승낙을 잘 안 해주잖아요? 사장이 절 불러서 ‘너 다른 데 가려고 하지?’라고 묻는 거예요. 안 보내줄 것 같아서 ‘그게 아니다. 연극을 하려고 그런다’라고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했죠. 사실 내 연극 포스터가 붙어 있던 때였거든. 100만 원을 돌려주기 전에 이불 밑에 깔고 세고 세고 얼마나 또 샜는데…. 그 후 오기가 나서 진짜로 가수활동을 시작했죠.”
그에게 있어 가수생활은 어쩔 수 없이 된 거니까 한 거고, 그러다 보니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어쩌면 그러한 계기는 그를 여전히 순수한 가수로서 남게 해주는 원동력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무대 뒤에서는 무지하게 떨어요. 그러나 정작 무대에 나가 조명을 받으면 내 안방 같죠. 콘서트 때도 첫 번째 두 번째 곡을 부를 때까지는 속에서 전쟁이 일어나죠. 그러다 점차 노래를 하면서 좋아져요. 내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면 그렇게 영광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수치스럽지도 않아요. 하지만 ‘내가 이랬습니다’ 하고 드러내기는 싫어요. 누가 나에 대해 물어봐도 ‘그냥 노래하는 가수예요’라고 말하는 정도죠.”
트로트, 싫다?
무념무상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이광조의 삶에도 간절함과 절박함이란 단어가 어울릴까? 그는 왜 절박하고 간절한 게 없었겠느냐고 되물었다. 그러나 얘기를 들어보니 그 또한 그리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50대 시절, 삶의 고독이나 고뇌가 아니라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이 변화무쌍했어요. 미국에서 지내던 때였죠. 미국은 좋았어요. 여길 왜 왔나 싶어.(웃음) 거기 있을 때는 세상에 그런 한량도 없었어.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에서 살았는데 버스를 타면 20분이면 바닷가에 갈 수 있었어요. 음악활동은 전혀 안 했죠. 그냥 바다를 보는 게 전부였어요. 어느 날엔가는 밤에 바닷가에서 린다 론스태드의 ‘Long Long Time’을 듣는데 안개가 마치 뛰어가는 듯하더군요. 노래는 들리고 파도는 치고 있고 삶의 연민이 느껴져서 너무 좋았어요. 그런데 사실 낮에 가면 개똥밖에 없어.(웃음)”
낮에는 개똥, 밤에는 안개가 깔리는 한적한 바다를 보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철저한 보헤미안으로서 십수 년을 미국에서 지내던 그였지만 이제 최첨단 미디어의 도시 서울에 오게 됐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한국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구십이 넘은 어머니에게 매일매일 문안인사 드리는 효자다. 그의 삶이 최근에 바뀔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트로트도 불러봤다는 그에게 요즘 가요계의 ‘대세’인 트로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슬쩍 물어봤다.
“나는 좀 부담스러워요.”
역시 그다운 직선적인 대답이었다. 어쩌면 그 취향은 우리나라 컨템포러리 가요계의 역사에 길이 남을 묵직한 발라드 히트 넘버를 가진 가수로선 자연스러운 것일 수도 있겠다.
“우리 트로트는 너무 말초신경만 자극하는 것 같아요. 그런 것도 필요는 하겠지만… 너무 가볍지만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물론 제 시각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어요. 하지만 제 생각은 그렇다는 거죠.”
현재진행형 ‘유튜버’는 모험이다
이광조와 요즘 시대의 접점이 또 하나 있다. 바로 유튜브다. ‘철저한 아날로그 인간일 것 같은 이광조가?’ 싶지만 사실이며, 이광조 TV라는 채널도 갖고 있는 엄연한 ‘유튜버’다. 심지어 그는 웹예능까지 찍었는데, 그 시리즈 제목이 ‘레트로맨’이다. 그 이름을 듣자마자 그가 격하게 웃으며 비명을 질렀다.
“어우, 말도 안 돼. 그 얘기를 할게요. 나는 그런 걸 ‘너무너무’ 싫어해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하는데, 신경질을 빡 부렸어. 안 해! 그래서 안 하게 됐어요.”
‘레트로맨’에서 이광조는 풍물시장이나 다방, 성수동 등지를 다니며 동네 여행을 하고 VR도 해보면서 신문물 체험 활동을 보여준다. 비슷한 구성으로 큰 인기를 끈 ‘와썹맨’, ‘워크맨’같은 ‘맨’ 시리즈 벤치마킹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손사래를 치지만 유튜브 채널에서 아직 감상 가능한 공식 ‘흑역사’다.
“지금 올리는 영상들은 어쩌면 제 노래를 듣고 싶었던 사람에겐 좋은 걸지도 몰라요. 팝송까지 합하면 200곡이 넘어요. 그걸 일주일에 하나씩 요새 목소리로 다시 녹음해서 올리는 건데, 쉽지는 않아요. 나는 노래하는 거 아니면 안 한다 그랬어요. ‘레트로맨’은 나는 몰라.(웃음)”
참, 인위적인 것을 싫어하는 그답다. 여하튼 욕심 한 스푼, 미련 한 톨도 남아 있지 않은 그다.
소년이라는 말, 듣기 좋다
이광조는 요즘 행복하다고 말한다. 그냥 좋단다.
“가끔은 떡볶이를 먹고 싶다, 그러면 떡볶이 찾아 삼만 리야. 그런 게 행복이야. 순간순간 느끼는 행복.”
그는 한 일흔다섯 살까지만 살면 굉장히 잘 살았구나 생각할 거 같다고 말한다. 여든몇 살 돼서 정신 흐트러져 잊어버리는 건 싫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흔다섯 살까지 맑은 정신으로 살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자신이 늙은 소년이길 바란다. 맑고 변치 않는 사람으로서.
“조용히 산 게 잘한 일 같아요. 남에게 ‘이거 한 사람이야’라고 말 안 하고 산 거. 그 외에는 잘한 게 별로 없어서.(웃음) 뮤지션으로서 남기고 싶은 게 있냐고요? 없어요.”
그는 철저한 소멸을 꿈꾼다. 음악도 그냥 하게 돼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자연스레 충족된 삶으로서 그는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지금의 이광조 자신이 된 것이리라.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은 싫고, 먼지도 싫고, 그냥 없어지면 좋겠어요. 입에서 입으로 안 전해지고 그냥 갔으면. 지금 살아 있을 때 얘기 듣는 게 좋지 그다음은 의미가 없는 거 같아요.”
그의 대답을 듣고 입에서 저절로 솔직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자 그가 웃으며 말했다.
“솔직하지 않을 게 없죠. 죽을 때까지 이렇게 갈 거예요. 제가 바뀌길 기대하는 사람들은 포기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웃음)”
지하철 1호선 인천행 종점인 인천역에 내리면 눈앞에 바로 차이나타운으로 향하는 휘황찬란한 붉은색 패루가 보인다. 북적거리는 중국 거리를 지나 걷다 보면 시대를 관통하는 예술의 거리 인천아트플랫폼이 있다. 예술가 창작활동 지원과 일반 시민을 위한 복합 문화예술 공간으로 2009년 조성됐다. 인기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알려지더니 차이나타운과 함께 인천을 대표하는 랜드마크로 급부상했다.
개항 역사와 함께하는 공간
인천아트플랫폼이 특별한 이유는 근대 건축물을 기반으로 리모델링하거나 그 분위기와 어우러지게 신축했다는 점이다. 인천아트플랫폼이 자리하고 있는 인천 중구 해안동은 1883년 개항기 이후 건립된 건축문화재와 건물이 잘 보존된 역사보존지구라고 할 만하다.
강화도조약(1876) 이후 갑작스러운 문호 개방은 외국에서 들여온 신문물과 함께 건축 양식도 흡수했다. 인천 차이나타운을 지나 맥아더 장군상이 있는 자유공원, 서양인의 사교장이던 제물포구락부(인천유형문화재 제17호) 등을 찾아 걷다 보면 당시 인천의 모습이 언뜻 스쳐지나간다. 인천아트플랫폼도 옛 역사와 함께한다. 무엇보다 공간의 가치를 제대로 살리고 활용하기를 원하던 시민의 뜻과 인천시의 노력이 빚은 합작품이다.
1888년에 지어져 개항 이후 인천 해운업을 독점했던 일본 우선(郵船) 주식회사(등록문화재 제248호) 건물은 사무실(D동)로 리모델링했고, 1930~40년대에 창고나 각종 작업실로 사용했던 곳은 공연장, 전시실, 생활문화센터 등으로 모습을 바꿨다. 새롭게 단장한 건물 구석에는 옛 모습을 담은 사진을 부착해 세월의 흐름을 가늠하게 해준다. 총 13개동, 다양한 공간과 규모로 꾸며진 아트플랫폼은 옛 향기와 현대적 감각이 교감하는 예술 문화 놀이터다.
예술을 만드는 문화발전소
인천아트플랫폼은 국내외 다양한 분야에서 작가를 선발해 창작활동을 지원한다. 마침 취재 당일 2018년도 입주 작가로 선발된 모 시라(Mo Sirra)를 만날 수 있었다. 취재를 위해 사진 한 장을 찍자고 했더니 어디선가 ‘예술가는 부재 중. 나는 공연 중(The artist is absent. I am performing)’이라고 쓰인 명찰을 가슴에 달고 나타난다. 말 그대로 그는 작업을 마치고 관람객을 맞이하는 예술가가 아니라 전시가 이뤄지는 내내 끊임없이 작업에 참여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공연자였다.
“요즘 예술은 꼭 패스트푸드점의 햄버거 같아요. 금방 생겨났다가 사라지기도 하고 세계 어디를 가도 먹을 수 있는 거 말이죠. 저는 정크푸드 같은 예술에 저항합니다.”
리-퍼블릭 더 폴리틱스(Re-public the Politics)라고 이름 붙인 모 시라의 공연 전시는 익숙해져 가치를 잃어버린 정치와 예술 등에 질문을 던지는 작업이라고 했다.
“유럽의 경우 정치는 그저 정치가의 직업이 됐습니다. 예술 또한 지금의 정치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해요. 요즘 예술에는 목소리가 없습니다. 나에게 있어 예술의 의미는 도전이고, 도전을 현실화하는 것이고, 도전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세계를 돌며 작품 활동을 이어가는 작가들에게는 새로운 창작공간을, 관람하는 이들에게는 세상을 보는 창을 제공하는 곳이 바로 인천아트플랫폼이 아닐까? 날씨도 좋고 나들이 나가고 싶다면 역사와 예술이 제대로 배색된 인천아트플랫폼으로 가보시라.
전기 보급과 함께 빠르게 사라져버린 것이 있다. 등잔이다.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막대 사이에 흙으로 빚은 잔을 끼워놓은 것. 잔 안에 심지를 넣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이면 어두웠던 세상이 밝아졌다. 과거 인간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지만 지금은 없다. 신문물의 등장으로 기억에서 빠르게 잊혔지만 등잔은 우리 삶에 있어 고마운 물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마구 버려졌던 가치를 마음에 새기고 100년 넘게 모아놓은 등잔을 마주하러 한국등잔박물관에 찾아갔다.
金家三代, 등잔의 소중함을 알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사람 길보다 바람 길이 더 많이 나 있는 인적 드문 곳에 한국등잔박물관(재단법인 한국등잔박물관 문화재단)이 있다. 같은 자리에서 박물관을 지키고 있는 세월만도 21년째. 한국등잔박물관의 전신인 고등기(古燈器)전시관(1969년 수원에서 개관)부터 따진다면 49년 전통에 특색까지 갖춘 독보적인 박물관이다. 한국등잔박물관은 미래를 볼 줄 아는 한 가족의 뜻과 의지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2대에 걸쳐 관장을 역임하고 있는 김형구 관장은 선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정성이 깃든 한국등잔박물관에 대해 찬찬히 설명했다.
“옛날부터 그림이나 골동품 등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사서 모았습니다. 은행이 없을 때는 더 했었죠. 물론 저희 집안에서도 고가의 예술품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희 삼대가 열심히 모았던 것이 바로 등잔입니다.”
등잔은 모아봤자 돈 되는 물품이 아니었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쓸모없어져버리고 가치가 떨어져 애물단지가 됐다. 그러게 왜 돈 안 되는 등잔인가?
“우리 인간의 삶에 해가 지고 나서 전기가 없을 때 등잔이 없으면 밤에 생활이 안 되잖아요. 인생의 반이 밤이잖아요. 밤을 밝혀준 중요한 물건을 아무도 모으지 않는 거야. 수집하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 집안에서 하게 된 겁니다. 나, 아버지, 할아버지가 100년 넘게 모은 등잔이 박물관 곳곳에 다 있습니다.”
가문의 재산이 모두의 자산이 되다
한국등잔박물관은 1대 관장이자 설립자인 김동휘(1918~2011) 관장이 운영하던 산부인과 2층에서 고등기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김동휘 관장은 경기도 일대에서 유명하던 산부인과 의사이면서 예술에 조예가 깊어 경기 지역 문화 사업에 기여를 많이 해온 인물이었다. 은퇴 뒤 모아둔 유물의 관리, 보관 활용에 대한 고민이 박물관 개관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등잔박물관은 현재 재단법인에서 운영하고 있다. 1999년 유물과 건물, 대지까지 150억 원 가까이 되는 재산을 재단법인 설립과 함께 사회에 환원했다. 대한민국이 있는 한 한국등잔박물관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등잔박물관은 왜 한국에만 있을까?
김형구 관장은 등잔이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라고 주장한다. 장례 문화였던 고인돌이 온돌 생활로 이어져 생겨난 민족의 슬기라고 강조했다.
“우선 온돌 문화는 고인돌에 쓰이는 돌을 깨는 기술에서 왔습니다. 온돌 바닥에 사용하는 구들장 깨는 기술로 전이된 것이죠. 바닥에 앉아서 생활하는데 등을 땅바닥에 그대로 놓아두면 빛의 효율이 떨어지잖아요. 앉아 있는 상태의 눈높이로 불을 끌어올려 허공에 띄워놓은 것이 등잔입니다. 전국이 온돌문화권이었으니 등잔을 사용한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결국 세계 유일의 박물관일 수밖에요.”
한국등잔박물관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다양한 등기구가 전시돼 있다. 불교국가로서 문화의 꽃을 피우던 고려시대 등잔대에서는 주로 염주와 연꽃 모양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에는 의리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의 죽절 무늬가 눈에 많이 띈다. 등잔을 재떨이로도 사용했고 새색시 혼수품으로 가져가기도 했다고. 박물관 1층에는 등잔을 사용하던 때 남자와 여자의 방, 부엌이 꾸며져 있어 당시 모습과 함께 등잔의 이용을 엿 볼 수 있다. 2층은 시대별로 등잔을 분류해놓았다. 실제 쓰던 대청마루를 원형 그대로 옮겨와 한국등잔박물관과 등잔 관련 기록들을 볼 수 있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관람안내
관람시간 (10월~3월) 오전 10:00 ~ 오후 5:00 / (4월~9월) 오전 10:00 ~ 오후 5:30
휴관일 월·화요일
입장료 (개인) 성인 4000원 / 중·고·대학생·노인·어린이 2500원
(단체) 성인 3000 / 중·고·대학생·노인·어린이 2,000 원
*부모동반시 미취학어린이 무료입장.
* 단체관람은 사전에 ☎ (031) 334-0797로 문의 예약.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깨어나서 반성하라’고 말한 도산 안창호는 그 모든 위업을 아우를 수 있기에 진실이 화두인 요즈음,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태산처럼 서 있는 거목이다. 대학 시절 처음 도산의 존재를 접한 후 평생 동안 그를 사숙했다. 일과 삶 모두에 도산의 정신을 새기기 위해 산 김재실(金在實)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은 지금 시대야말로 도산의 신념과 철학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광복 72주년을 맞이한 올해 72세인 그가 평생을 바칠 정도였던, 도산에게서 발견한 거대한 화두란 무엇일까?
우리나라 역사에서 도산 안창호는 유독 커다란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그는 1878년에 평안남도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한 후 언더우드 학당에서 수학했다. 그야말로 조선 말기의 혼돈과 신문물의 합리주의를 동시에 겪으면서 자라난 세대였다. 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에 참여하여 탁월한 연설을 통해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일찌감치 국가의 미래를 걱정하는 활동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줬다.
지적이고 신중한 조직가였던 도산 안창호
이후 미국으로 건너간 안창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하여 재미동포들이 민족의식을 자각하는 데 일조했으며 일제가 나라를 빼앗으려 하자 바로 귀국하여 신민회를 조직, 대성학교와 태극서관을 설립해 민족운동을 펼쳐나갔다.
안창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가 무력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기보다는 지적인 조직가로서 신중한 행보를 거듭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신중함은 머뭇거림이 아니다. 그가 그 누구보다도 확고한 민족의식과 미래에 대한 굳은 의지를 바탕으로 이뤄진 커다란 그림을 그리고 있었음은 일제강점기 동안 세계 이곳저곳을 오가며 벌인 그의 행적을 보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정신은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를 통해 오늘날에도 표표히 흐르고 있다.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린다”
“도산 안창호 선생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자 미국으로 망명하여 1913년에 흥사단을 창립했어요. 흥사단은 민족운동에 매진할 인재를 모으고 양성하기 위해 조직됐죠. 흥사단 일을 하느라 대학교를 휴학했던 게 기억나네요. 그때는 도산 선생의 이념을 어떻게 실천하느냐, 흥사단을 어떻게 전파하느냐만 생각하며 살았죠.”
김재실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오롯이 도산에게 바친 것으로도 모자라 그 후 기업 경영을 하면서도 50여 년에 가까운 세월을 도산의 정신을 실천한다는 마음가짐으로 살아왔다고 말한다. 그는 충남 천안이 고향이며 병천중학교를 거쳐 서울대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마침내 도산 안창호와 만나게 된다.
“1963년 대학 1학년 때였습니다. 도산 서거 25주년 추모식장에 걸린 ‘참배나무에는 참배가 돌배나무에는 돌배가 열린다’는 글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죠. 이를 계기로 흥사단 대학생 아카데미 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흥사단은 유력한 사회인사들이 청년 시절 거치는 대표적인 모임이기도 했다. 전남도지사를 지낸 박준영, 순천향대학교 부총장을 지낸 이윤배, 교육부장관을 지낸 황우여가 그 면면이다.
흥사단에 바친 청춘
흥사단 활동은 김 회장의 젊은 시절 꿈이 신문기자가 되게 하는 데도 영향을 줬다.
“흥사단에서 라는 잡지가 나와요. 왜 인가 하면 도산 선생의 말씀 중에 ‘기러기는 항상 줄을 맞춰 다닌다’는 말에서 따온 거예요. 그래서 흥사단의 상징이 기러기이기도 하죠. 이걸 제가 3년 동안 편집하고 책을 냈어요. 그래서 언론계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 했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동생 여섯을 책임지는 가장이 됐기 때문이다. 가장이 되자 그는 생활인으로서 충실한 선택을 했다. 한국산업은행에 입사한 그는 핵심 요직을 두루 거쳤고 2000년부터는 산은캐피탈 사장으로 활동했다.
“산은캐피탈 CEO가 된 뒤 180여 명의 직원들을 책임져야 했죠. 그 고민이 매우 컸습니다. 굉장히 열심히 일했어요. 그 와중에도 도산 선생의 정신을 경영에 도입하고자 노력했죠.”
도산의 삶에서 배운 교육자의 삶
산은을 나온 김 회장은 중앙일보 시사미디어 상임고문과 대통령 자문 동북아경제추진위원회 자문위원을 지내며 잠시 동안 공직에서의 모험을 하고, 다시 기업계로 돌아왔다. 대아건설 감사와 경남기업 관리총괄 사장, 성신양회 대표이사 사장, 태강코퍼레이션 고문을 거쳐 현재는 동양시멘트(삼표시멘트) 상임감사로 있다. 다양한 조직의 요직을 거치면서도, 그는 도산이라는 자신의 롤모델을 놓치지 않았다. 숭실대와 성균관대, 성신여대에서 ‘경제통계학’, ‘경제수학’, ‘경영정책’ 등을 강의하고 대학 재학 중 도시 빈민 미취학 아동을 위해 청영고등공민학교(야학)를 설립·운영했으며, 흥사단 이외 ‘나라발전연구회’ 총무를 맡는 등 교육이라는 도산의 삶의 중요한 부분을 자신의 삶에 심는 데도 주저하지 않았다.
“흥사단은 나이 제한이 없어요. 흥사단 후배들을 제가 많이 만났죠. 대학생활 아카데미 회장, 고등학생 아카데미 지도교사도 했으니. 그때 가르친 고등학생들이 지금 칠십이 다 됐어요(웃음).”
도산 사상의 중심은 ‘진실’
그렇다면 도산 사상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도산 사상의 중심은 진실입니다. 그는 나라가 망한 것도 이완용 때문이 아니라 거짓 때문이라고 하실 정도였죠.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야 한다’, ‘농담으로라도 거짓말을 말아라. 꿈에라도 성실을 잃었거든 통회하라’고 했습니다.”
김 회장은 우리나라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도층이 진실하지 못한 것을 지적했다.
“다른 문제는 아무것도 없어요. 지도층이 거짓말을 하는 게 가장 큰 문제예요.”
도산은 진실을 위해서라면 자신에게 다가온 커다란 유혹도 매몰차게 거절하는 이였다.
“1907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도산을 중심으로 청년내각을 만들려고 했어요. 그때 도산이 그 제안을 거절했죠.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는 도산을 중심으로 만들어졌다고 봐야 해요. 상해 임시정부는 1919년 4월에 설립됐는데 도산이 5월 25일에 미국에서 상해로 와서 임시정부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서리로 취임해 독립운동에 매진했죠. 또 미국과 상해를 오가며 대독립당 결성 운동을 전개하고 임시정부 경제후원회를 조직했어요. 당시 미국에 있는 교포들이 돈을 모아서 상해에 지원금을 보낸 것도 도산의 공이라 할 수 있죠.”
‘도산의 희망편지’로 청년들에게 희망을
김 회장은 도산을 가리켜 ‘사람을 만드는 사람’이었다고 설명했다.
“도산 선생이 다른 독립운동가와 다른 것은 그가 인격 훈련을 중시한 사람이었다는 겁니다. 도산 선생은 항상 교육을 강조했고 ‘사람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곤 했어요. 그래서 다른 어떤 독립운동가들보다도 더 우리가 생활 속에서 닮을 수 있는 사람으로 남게 됐죠.”
그는 도산의 사상이 현재진행형이라고 말한다. 그는 그 근거를 도산의 말들에서 찾는다.
“도산 선생은 힘을 길러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 힘이란 신용의 힘, 그리고 지식의 자본, 마지막으로 금전 자본을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진실을 통한 관계를 중요시했고, 한 사람이 한 가지 이상의 기술을 갖게끔 공부를 하라고 했으며 돈을 벌어서 저축하여 돈의 힘을 가지라고 말씀하셨죠. 이건 현재에도 그대로 통용될 수 있는 얘기입니다.”
김 회장은 도산이 말한 ‘힘’을 믿고 ‘도산의 희망편지’ 보내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SNS를 활용하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일이죠. 2016년 3월 10일 선생 서거 78주년이 되는 날부터 시작한 일입니다. 요즘 희망을 잃어가는 청년들에게 도산의 말씀 중 한 구절씩을 선정해 매주 목요일에 이메일로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대략 2만여 명에게 보내고 있고, 받고 싶은 사람들은 언제라도 연락하면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기회가 되는 대로 그 글귀들을 모아서 책자로 발간할 계획입니다.”
여생은 도산 안창호 기념사업에
도산 안창호 선생 기념사업회가 하는 일은 다양하다. 1973년, 사업회는 도산의 묘소를 서울 망우리 산꼭대기에서 도산공원으로 이장했다. 1998년에는 도산기념관 건립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마다 3월 10일이 되면 도산의 추모식을 거행한다.
“1937년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 때 도산 선생은 일제에 붙잡혀 취조를 받게 됐어요. 그 사건에 도산의 제자 60여 명이 잡혔기 때문이죠. 고문을 당하면서도 도산은 초인간적인 면모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12월에 병보석을 나와서 다음 해
3월 10일에 사망하시고 말았죠.”
또한 도산학회를 조직해 도산 사상에 대한 논문집도 내고 있고, 연설문이나 서신 등도 책자로 발간했다. 청소년들 대상으로는 도산 정신을 2세들에게 널리 알리자는 취지로 체험학습 프로그램을 전개하고 있는데 매년 2000명이 넘게 참여한다고 한다. 글짓기 공모도 매년 실시하여 도산의 탄신일인 11월 3일에 시상식을 하고 있으며 미국에서 국제학술대회도 열고 있다. 그야말로 도산 안창호와 관련한 모든 것을 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멈추지 않고 살아야 멋지게 나이 든다
사업회가 하고 있는 다양한 사업들은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에 대한 김 회장의 정의와 묘하게 부합되는 면이 있다. 어쩌면 그 많은 사업들을 추진하는 에너지가 바로 거기에서부터 비롯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김 회장이 말하는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방법’이란 바로 ‘뭔가를 쉬지 않고 계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멈추면 안 되죠. 생각으로 하든 몸으로 하든, 쉬지 말아야 멋지게 나이 드는 겁니다.”
그가 말하는 멋지게 나이 드는 또 하나의 방법은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것’이다.
“도산은 사람을 좋아했어요. 그는 사람을 만나면 성의를 갖고 만나는 사람이었죠. 그렇게 나이 들어서도 사람을 많이 만나는 게 좋습니다. 그런데 사람을 만나는 데 돈이 많이 든다고 안 만나는 사람들이 있어요. 돈이 많이 드는 걸 피하려면 공동체에 속하는 게 좋습니다.”
점점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적어질 수밖에 없는 시니어에게 커뮤니티는 삶의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김 회장은 사람 대하는 법을 간략하게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라고 요약했다.
“요즘은 이메일도 있고 전화도 있고 문자도 있잖아요. 그런 도구들로 관심을 가져주고 표현하다 보면 함께 식사를 할 수도 있는 거죠.”
도산 정신이 뿌리 내리도록 전파
“도산 선생은 정말 성실하고 매사를 철저히 챙기면서도 크게 생각하신 분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그런 도산의 생활 태도를 닮아보려고 노력한 결과가 아닐까 합니다.”
자신의 일과 삶에 대해 정의하면서 김 회장은 다시 한 번 도산을 불러왔다. 사람을 키우는 일을 그 무엇보다도 중시했던 도산의 마음은 김 회장을 통해서 그대로 실천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대한 김 회장의 대답은 단호하면서도 그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 자체를 응축하고 있었다.
“날 기억할 게 뭐가 있어요? 저는 앞으로도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묵묵하게 도산 사상 전파 운동을 할 것입니다.”
김재실 회장은 “1947년 사업회 출범 이래 신익희 선생이나 강영훈 전 국무총리처럼 사회적 지위와 덕망이 높으신 분들이 이끌어왔는데 부족한 제가 회장이 돼 송구스럽고, 두려움이 앞선다”고 밝혔다.
거주하고 있는 지역의 구청에서 1998년 컴퓨터교실이 처음 만들어졌지만 필자는 신청을 미적거렸다. 컴퓨터나 인터넷이 지금같이 ‘대단한 물건’이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통장인데 어쩌겠는가. 참여할 수밖에. 그리고 ‘한글 문서의 달인’으로 대변신하고 싶은 맘도 있었다.
그러나 문외한이 뭔가를 배우는 데는 엄청난 고통이 수반하는 법. 그놈의 클릭을 수없이 반복하느라 어깨, 손목이 뻐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래도 필자는 원래 ‘의지녀’로 전 세계에 명성이 자자했던 터라 포기하지 않고 1년을 버텼다. ‘어깨, 손목은 원래 필자의 것이 아니다’란 생각으로.
그렇게 정말 힘들게 1년을 배우고 나니 실로 놀라운 변화가 생겼다. 필자가 관심 있는 단어를 능숙하게 검색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능숙한 검색이 가능해지자 필자가 눈을 돌린 건 바로 이벤트 응모. 평소 ‘도전 정신’으로 무장돼 있던 필자에게 ‘몇 번에 한 번은 기대도 안 해도 당첨 소식이 올 수 있다.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쉬운 이벤트 공모도 많다’는 이벤트의 법칙은 대단히 매력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벤트’나 ‘공모’란 단어만 인터넷에 뜨면 찾아 들어가 ‘응모’ 글자를 마구 눌러댔다. 그리고 성공률도 꽤 높았다.
그다음 필자가 꽂힌 것은 온라인의 기업 정보였다.
온라인에는 실로 엄청난 양의 기업 정보가 뜬다. 특히 생활용품·식품·전자제품 생산 업체나 백화점, 방송사, 건설사는 소비자에 대한 민감도가 높아 관련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한다. 그래서 필자는 바로 이런 기업이 띄운 다양한 정보에 대해 모니터 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다양한 업체의 제품에 대해 ‘생활 속 비범한 의견’을 내면 물건을 공짜로 받거나 일정 기간 무료로 사용해볼 수 있다. 이런 혜택은 가정 살림에 크게 도움이 됐다.
기업에 대한 모니터 활동을 통해 그냥 애들만 키우던 아줌마가 뭔가 이 세상에 이바지하는 느낌이 들어 자부심과 보람도 생겼다.
네이버 블로그는 누적 방문객 수가 368만 명 이상이 된다. 이젠 소통의 통로로 단연 SNS가 뜨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도 블로그는 물론,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폴라, 카카오까지 다양하게 활용해 대화하고 있다.
컴퓨터를 열어 마우스로 클릭만 할 줄 알고, 한글이나 영어 자판을 독수리타법으로라도 누를 수 있다면 온라인에서 대부분의 정보를 검색할 수 있는 것은 물론, 블로그 등 가입도 쉽게 할 수 있다.
인터넷으로 각종 정보도 얻고, 소통도 하고, 경제적인 도움까지 받다 보니 필자는 갱년기가 뭔지, 우울증이 뭔지 모르고 19년을 살았다. 다른 중·노년도 가능한 일이다.
지난 6일 서울 교보문고 영등포점에서 책을 보고 있던 직장인 김기용(28·서울 관악구 신림동)씨에게 사고자 하는 책을 정했느냐고 묻자 그는 “영화를 보러왔는데 시간이 남아 둘러보는 중일 뿐”이라고 했다. 지난해 읽은 책 중 기억에 남은 책이 있느냐고 다시 묻자 대답을 주저했다. 그는 “제대로 읽은 책이 한 권도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김씨는 “올해는 책을 한 권이라도 읽을 생각이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성인의 일반도서 독서율(1년간 책을 한 권 이상 읽은 사람의 비율)은 66.8%다. 김씨만 책을 안 읽는 특별한 사람이 아니었다.
◇이청준 ‘당신들의 천국’ 소록도 나환자촌 배경
일년에 한 권의 책만 읽는 사람에게 책을 추천한다면 어떤 책이 좋겠느냐는 질문에 홍정선 문학평론가는 소설가 이청준의 장편 ‘당신들의 천국’을 꼽았다. 그는 “지금 우리나라는 복지와 사회문제에 대한 논란이 심각하다. (이 책은) 지배와 복종-저항-자유의 복합적인 상관관계를 공유하게 한다”고 답했다.
이 작품은 나환자들이 모여 사는 소록도에 낙토 건설을 명분으로 부임한 의사 조백헌 원장과 이를 끊임없이 견제하는 이상욱 보건과장의 대립이 이야기의 큰 줄기를 이룬다. 홍 평론가는 “유신정권에 대한 심도 있는 반성을 이끌어낸다. 민주화가 됐어도 대단히 가치가 높은 소설이다. 우리에게 깊이 있는 반성을 제기한다”고 전했다.
◇기형도 ‘입 속의 검은 잎’ 1980년대 우울한 사회 속 개인 심리 드러내
고(故) 기형도 시인의 ‘입 속의 검은 잎’은 시의 참맛을 전해주는 시집이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저자의 유고 시집이며, 일상 속에 내재하는 공포의 심리구조를 추억의 형식을 통해 표현한 60편을 모았다. 이 책을 추천한 권성우 문학평론가는 “1980년대 시인의 우울함과 슬픔, 비극을 아주 생생하게 표현하고, 독특한 문학적 분위기를 통해 전달한다. 시집을 읽는 데 익숙하지 않다면, 이 한 권의 시집을 통해서 ‘시의 매력이 이런 거구나’하는 걸 느낄 것”이라고 극찬했다.
◇황석영 ‘여울물 소리’ 1894년 동학혁명 이야기
2014년 화두 ‘경장(更張)’의 의미를 되새기는 책도 추천책 리스트에 올랐다. 방민호 문학평론가는 소설가 황석영의 ‘여울물 소리’에 대해 “1894년 동학혁명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다. 올해 또한 갑오년이라서 그 의미가 남다르게 전해지는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방 평론가는 “황석영은 오랫동안 동아시아 전통 서사와 한국의 전통 서사 등 역사 사건들을 오랫동안 소설로 다뤄왔다”며 “그의 심도 있는 이야기 전개가 일품”이라고 했다. 외세와 신문물이 들어오며 봉건적 신분질서가 무너져가던 격변의 19세기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이야기꾼 이신통의 일생을 추적한다.
◇노명우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 저자의 생생한 체험 담아
이권우 도서평론가는 노명우 교수(아주대 사회학)의 ‘혼자 산다는 것에 대하여’를 권했다. 이 평론가는 “주제가 독특하고 읽어 볼 만한 책이다”며 “사회학적 주제임에도 어렵지 않게 풀어낸다”고 말했다.
이 책은 ‘혼자 살기’의 삶이 가진 의미를 다루며, 다양한 고통과 즐거움의 문제들을 대변하고 있다. 혼자 사는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에 대한 생생한 체험과 그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아냈다.
◇피츠제럴드 ‘위대한 개츠비’ 자본주의 시대에 꿈, 이상 등 삶의 가치 재조명
한 남자의 삶을 통해 자본주의 속 새로운 삶의 가치를 주장하는 작품인 ‘위대한 개츠비’(F. 스콧 피츠제럴드)는 강유정 문학평론가에게 인상적인 작품이다. 그는 “20대 에 접할 때와 30대에 다시 봤을 때 느낌이 사뭇 다를 정도로 깊이 있는 해석을 요구하기도 한다”고 했다.
강 평론가는 “21세기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위대함이란 어떤 것인지 고민하게 하는 작품이다. 자본이 주인공이 되는 세상에서 개츠비는 자신의 꿈과 이상, 사소한 것들을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한다. 우리는 과연 그럴 수 있을까”라고 반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