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종양은 뇌를 둘러싸고 있는 두개골 안에 생기는 모든 종양을 말한다. 지난해 발표된 중앙암등록본부 자료에 따르면 2020년 국내에서 발생한 신규 뇌종양 환자는 1785명으로 전체 신규 암 환자 24만7952명의 0.7%를 차지했다. 대한뇌종양학회는 현재 국내에서 뇌종양으로 고통받는 환자를 2만여 명으로 추정하고 있다. 유병률은 일반에 알려진 두려움에 비해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뇌에 생기는 악성종양, 즉 뇌종양을 뇌암으로 부르지 않는 이유는 뇌종양의 일반적인 암과 다른 특성 때문이다. 먼저 뇌종양은 다른 기관으로 전이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뇌가 다른 기관과 혈관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뇌의 혈관에는 ‘뇌혈관장벽(BBB, Blood Brain Barrier)’이라는 촘촘한 경계선이 있어 뇌 안에서 종양이 발생하더라도 혈관을 타고 다른 기관으로 전이가 잘되지 않는다.
또 뇌종양은 보통 병기로 구분하는 다른 암과 달리 등급으로 분류한다. 종양 세포의 분열 속도 등으로 고려해 등급을 나눈다. 보통 1등급은 양성, 2등급은 경계성, 3~4등급은 악성이다. 다만 뇌종양은 1·2등급이라도 경우에 따라 임상적 악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윤완수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뇌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뇌종양은 ‘뇌’라는 미지의 영역에 또 다른 미지의 질환인 ‘종양’이 발생하는 병으로 일반인의 경우 이름이 주는 두려움과 어려움을 모두 가지기 쉽다”면서도 “비록 뇌종양이 심각한 장애를 초래하거나 심하면 사망에까지 이를 수 있는 질병이긴 하지만 최근 수십 년간 의학과 기술의 발달로 치료에 많은 발전이 있었고 새로운 치료법이 계속 보고되고 있는 만큼 조기에 병원을 찾아 치료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당부했다.
가장 흔한 증상은 ‘두통’
뇌종양은 양성과 악성을 모두 포함한다. 양성종양에는 뇌수막종, 신경초종, 뇌하수체선종 등이 있고, 악성종양은 신경교종, 전이성 뇌종양, 림프종 등이 포함된다. 또 발생 부위에 따라 원발성과 전이성으로 구분하는데 뇌 조직이나 뇌막 등에서 발생하면 원발성 뇌종양, 신체의 다른 암으로부터 혈관을 타고 전이된 경우를 전이성 또는 이차성 뇌종양으로 부른다. 이 가운데 가장 흔한 원발성 뇌종양의 경우 뇌수막종이 약 35%로 가장 많고 신경교종 25%, 뇌하수체선종 20%, 신경초종 10%, 기타 종양 10%를 각각 차지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뇌종양의 발생 원인은 아직 명확하지 않다. 다만 뇌 손상, 방사선, 유전, 연령 등이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흡연이 악성 신경교종의 발생위험을 1.22배 증가시킨다는 국내 연구도 있다.
증상은 발생 위치나 크기, 종류, 커지는 속도 등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대표적인 증상은 두통, 성격 변화, 편측 마비, 언어장애, 발기부전, 시력 저하, 어지럼증, 청력감소, 경련 등이다. 노인의 경우 치매와 같은 기억력 저하나 행동 이상 등 인지기능의 이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다만 증상만으로 뇌종양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가장 흔한 증상은 두통이다. 두통이 생기는 이유는 뇌종양 때문에 뇌 부피가 늘어나 뇌 내 압력이 올라가기 때문이다. 뇌종양 환자의 약 70%에서 두통을 호소한다. 특히 아침에 일어날 때 또는 새벽에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뇌신경에 종양이 있으면 후각·시각·청각 장애와 어지럼증, 안면마비, 연하장애, 음성변화 등이 생길 수 있다. 뇌하수체에 발생하면 부피가 커지면서 시신경을 압박해 시야장애를 동반한다. 소뇌와 뇌간에 발생하면 균형감각을 잃고 술 취한 사람처럼 걷는 운동장애가 나타나기도 한다.
뇌의 좌측 측두엽에 발생하면 단어가 잘 생각나지 않거나 기억력이 떨어지고 망상이나 경련을 보일 수 있다. 두정엽에 발생하면 편측으로 운동 또는 감각 마비가 발생하고 단어의 발음에 부조화를 보인다. 또 공간 지각력이 떨어지고 좌우를 혼동하거나 계산능력이 떨어지며 글을 쓰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전두엽 부위에 생기면 성격이 변하거나 기억력 장애, 언어장애와 인지기능이 낮아지기도 한다.
윤완수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뇌병원 신경외과 교수는 “평소 두통이나 시력저하, 기억력 장애 같은 증상을 노화나 스트레스로 인한 일시적인 증세라고 소홀히 여기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며 “특히 노인의 경우 기억력 저하 등 인지기능 변화는 환자 본인 스스로 판단할 수 없고 주위에 명확하게 표현되기 전까지는 가족들도 알아차리기 어렵기 때문에 세심한 관찰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환자·의사 대화하며 진행하는 각성 수술도 진행
뇌종양의 치료는 종양의 종류, 위치, 증상에 따라 결정된다. 노인의 경우 연령이나 기저질환 여부도 중요하게 고려한다. 뇌수막종, 신경초종, 뇌하수체선종 같은 양성종양은 수술이 원칙이다. 다만 수술이 어렵거나 거부감을 가진 환자는 방사선치료를 진행한다. 증상이 없거나 크기가 작으면 수술 없이 경과 관찰을 하기도 한다. 악성종양은 환자의 연령과 기저질환을 고려해 치료 방법을 결정한다. 외과적 절제술이 원칙이지만 기저질환이 심각한 노인의 경우 수술이 항상 우선되지는 않는다.
뇌종양 수술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두개골을 여는 개두술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최근에는 뇌종양 수술의 상당수는 뇌내시경수술(Endoscopic neurosurgery)로 진행된다. 뇌의 가장 밑바닥 부위인 뇌 기저부에 발생하는 뇌수막종, 뇌하수체종양, 두개인두종 등이 주요 적용 대상이다.
뇌내시경수술은 뇌조직의 손상을 최소화하고 수술 흉터가 거의 남지 않아 환자의 수술 부담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 수술 후 출혈과 통증이 적어 입원 기간을 단축시킨다. 환자 콧속으로 내시경을 넣어 뇌의 바깥쪽에서 종양 부위로 접근해 뇌 손상과 수술 후 상처 없이 종양을 제거한다. 경우에 따라 눈썹 주름선을 따라 2~3㎝만 절개하고 뇌종양을 떼어내기도 한다.
환자와 의사가 대화를 하면서 진행하는 각성 수술도 있다. 각성 수술은 종양과 정상 뇌와의 경계가 모호한 종양을 잘라낼 때, 정상적인 뇌 기능 손실을 최소화하면서 가급적 많은 종양을 떼어내 종양과 뇌 기능의 밸런스를 맞출 때 시행된다. 윤완수 교수는 “각성 수술이 필요한 이유는 위치에 따른 뇌 기능이 100% 동일하지 않다는 점에 있다”며 “개인별로 뇌의 발달 과정이 다르기 때문에 뇌의 각 영역의 기능이 비슷할 수는 있어도 동일하지는 않다. 특히 인지 및 언어기능과 같은 상위 뇌 기능은 개인별로 큰 차이를 보인다”고 설명했다.
“군자는 남의 아름다움을 이뤄주고, 남의 추함을 이뤄주지 않으나, 소인은 이와 반대로 한다.(君子成人之美, 不成人之惡, 小人反是.)”
-‘논어’ 안연편
필자가 오늘 소개할 세 사람은 바로 군자(君子)가 추구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늘 자기를 살펴 고치고, 그동안 해온 업(業)을 배움과 덕으로 더욱 널리 펼치는 모습이 지극히 아름답고 숭고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새해가 된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 어느결에 새 마음이 헌 마음이 되었습니다. 다져 먹었던 결심과 각오는 흔들리고, 마음에 새겼던 약속은 또 다른 변명과 구실을 찾느라 분주합니다. 영웅호걸 찾기 힘든 시절, 업을 이어 승화시킴으로써 세상에 나누는 여장부(女丈夫) 세 사람 이야기를 함께 나누려 합니다.
대설 내리는 날, 구둣방에서
혹독한 한파가 몇 날 며칠 계속되더니 드디어 큰 눈이 펑펑 내렸습니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한 날 이른 점심을 먹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동안 미루고 미루던 남편 등산화 수선을 맡기러 평소 눈여겨보던 답십리 사거리 구둣방을 찾은 것입니다. 하필이면 대설로 천지 분간도 안 되는 날을 잡았지 뭡니까. 교차로 신호등이 바뀌기 무섭게 잰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서는데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 저만치 백열등 알전구가 노란 불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휴, 다행이다. 속으로 안심하며 드르륵 가게 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사장님?” 인사를 건넵니다.
이곳은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구두 수선집입니다. 40년 가까이 해온 이 일의 진짜 주인은 남자 사장님이었습니다. 언제부터인지 여자분이 가게에 종종 보이더니 아예 사장님 자리를 꿰찼네요. 이게 어찌된 영문인지 몰라 조심스레 여쭤보았습니다.
“사장님이 바뀌셨나요? 남자 어르신은 이제 안 보이시네요. 어디 편찮으신가요?”
대답을 듣지 못해 민망해진 필자는 더는 묻지 못하고 본론을 꺼냈습니다. 등산화 바닥이 많이 망가져서 고칠 수 있는지 물어보았지요.
세상 뜬 남편 대신 업을 이어 붙이며
“한 3년 됐어요.”
낡은 신발 바닥을 잘라내고, 덧대고, 기우고, 못질로 신발 몸체와 단단히 연결시키는 과정을 빨려들듯 지켜보느라 처음에는 제대로 듣지 못했습니다. 아무 대꾸도 않는 제게 그녀는 다시, “칠십도 안 된 남편, 담낭암과 황달로 3년 전에 보냈어요. 그이 생전에 어깨너머 배운 것과 밖에서 제대로 교육받은 걸로 닫았던 가게 문 다시 열었어요.”
왜 맨손으로 작업하시느냐 물으니 장갑을 끼면 감각이 무뎌져 정교함을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손톱 밑이며 손바닥과 손등까지 시커멓게 변한 손이 마치 ‘뻬빠’(사포) 같습니다. 거친 자신의 몸을 문대어 운동화며 구두며 장화며 부드럽고 매끄럽게 하니까요.
신발 바닥 덧대는 여자
요즘엔 서방 알기를 개떡같이 아는 세상이 되어서인지 몰라도 남편 구두 반짝반짝 닦아 현관에 대령은커녕 벗어놓은 신발 걷어차거나 밟지 않으면 다행이라고들 합니다. (이 말은 제 뒤에 앵클부츠 한 짝을 들고 온 초로의 여자분이 필자에게 요즘 젊은 것들 흉보며 한 말입니다.) 필자 역시 별다르지 않아서 먼지투성이 남편 신발을 꺼내놓자니 갑자기 부끄러워지더라고요. 한데 구둣방 여주인은 험하고 더러운 데며 온갖 곳을 돌아다녔을 등산화를 소중히 안고 구석구석 매만지고 살피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를 헤매고 다녔는지,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되었는지, 왜 관리는 제때 안 했는지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그 자그맣고 여린 손으로 낡고 더러워진 신발을 귀한 물건인 양 정성스레 대하는 그녀 머리 뒤로 후광이 퍼지는 듯 마음이 짜르르해졌습니다. 아프고 상처 난 마음, 억울함과 분노로 막히고 뭉친 마음에 반창고 붙인다고 다니는 필자는 그날 비좁은 구둣방에서 숨고 싶어질 만큼 작아졌습니다.
숟가락 장단에 희로애락 담아
‘찐찐찐찐 찐이야 완전 찐이야 진짜가 나타났다 지금’
나무 숟가락 두 개를 한 손에 쥐고 유행가 따라 장단을 맞추며 춤추는 이복자 숟가락난타협회 대표. 실용음악 재즈피아노를 전공하고 음악치료 석사과정을 공부한 이 대표는 일평생 음악학원을 하며 생업을 이어오다, 환갑이 되면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도전했습니다. 이 대표는 평소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도 형편이 되지 않아 아예 시도하지 못하거나, 배우는 과정이 어려워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를 안타까워했습니다. 이에 일상에서 흔히 쓰는 도구를 악기 삼아 연구하고 연습하면서 누구나 쉽게 접근해 즐길 수 있도록 악보를 배우고 익히는 과정을 단순명료하게 만들었습니다. 세모, 네모, 별, 화살표, 이렇게 딱 네 개 기호만으로 만든 그녀만의 악보는 화살표를 따라가다 보면 별도 볼 수 있고, 세모, 네모 다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음악에 대한 갈증을 쉬운 악보와 도구로 풀어준 이 대표는 숟가락 난타를 본격적으로 무대에 올린 장본인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 위기가 가져온 인생 반전
이 대표는 숟가락난타협회를 만들어 울산을 시작으로 전국을 돌며 대면, 비대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강사 양성과 공연에 열중했습니다. 그 공로로 2021년 제40회 스승의 날 기념 ‘한국강사신문이 선정한 제1회 대한민국 명강사 12인’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숟가락 난타 강사이자 음악가로 활동하며 자신이 양성한 제자들이 전국 방방곡곡 숟가락 난타 열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힐링·음악치료 분야에서 수상한 만큼 그 정성과 열정을 인정받은 셈이지요.
어쩌면 코로나19는 이 대표에게 인생 2막을 열어준 전화위복의 불씨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면 수업 중심이던 음악학원이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아 모든 활동이 멈췄을 때 비대면 온라인 교육을 접하며 활로를 모색할 수 있었으니까요. 30년이 훌쩍 넘도록 운영해온 음악학원을 딸에게 물려준 이 대표는 ‘내 삶의 주인공’으로 세상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노후에 펼칠 로망으로 간직했던 꿈을 실행에 옮긴 것입니다. 음악 분야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악기와 음악을 쉽게 접하고 누구나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일을 더 늦기 전에 펼치게 되었지요. 오랜 궁리 끝에 ‘세상에서 가장 쉽고 빠르게 배워서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바로 숟가락 난타라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합니다. 악기 가운데 관객 호응이 가장 좋은 점도 함께 즐기기 안성맞춤이고요.
마음 장단 맞추기는 참 어려워요
흥과 끼라면 지구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우리 민족은 악기가 있건 없건 가락과 장단에 맞춰 잘 놀 줄 압니다. 쿵짜락 쿵짝 삐약삐약. 왕년에 젓가락 장단에 맞춰 노래하고 춤춰보셨습니까. 지역마다 독특한 장단이 있습니다. 장단 맞추기 쉬울까요? 즐겁고 행복한 인생 2막을 위해 숟가락 난타를 개발해 전국을 다니며 장단 맞추기를 가르쳐온 이 대표에게도 가장 어려웠던 것은 인간관계에서 부딪히는 갈등이라고 합니다. 어제 막역한 친구였다 생각했던 사람이 어느 날 적이 되어 자신을 공격해오는 경우는 정말 마음이 힘들었다고 하네요. 평생 음악학원에서 십대 안팎 어린 교육생들만 상대하다 숟가락 들고 만나는 어른들은 영판 달랐으니까요. 스스로 마음 단련하는 법을 익히느라 고생도 했지만, 숟가락 두드리며 가슴속 진심이 상대에게 전해져서 서로 위안이 되는 따뜻함을 나누었으면 하는 게 이 대표의 바람입니다. 밥 먹던 숟가락이 이제는 신명과 즐거움을 먹고 그 행복을 베풀게 되었습니다.
높이 말고 낮게, 예술을 나누는 천사
하프 소리는 사람이 듣기에 가장 좋은 음파를 낸다고 합니다. 서툰 연주도 신경을 긁지 않고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할까요. 초보자가 연주해도 아름답게 들린다는 게 하프가 지닌 강점이라네요. 심금을 울린다는 말이 그런 게 아닐까요. 하늘에서만 연주할 것 같은 고상하기 그지없는 하프를 지상으로 가져와 누구든지 어디에서나 배우고 연주할 수 있도록 만든 이가 바로 안영숙 한국하프교육협회 회장입니다. 사실 회장보다 교수라는 호칭으로 오랜 세월 살아온 안 회장은 한국에서 하프 연주자, 일명 하피스트 1세대로 불리는 유학생 1호입니다.
악기 제작자로 변신한 하피스트
하프 대중화라는 목표에는 우리 국민의 마음이 정서적으로 따뜻해지기를 바라는 안 회장의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하프는 이동과 보관이 너무 불편할 뿐 아니라 실제 연주할 때도 불편을 넘어 고통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은, 정말 까다롭고 비싼 악기입니다. 이런데도 그동안 아무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은 걸 이상하다고 느낀 안 회장은 자신이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해보겠다고 용감하게 뛰어들었습니다. 주변의 무관심과 싸늘한 시선을 뒤로하고 결국 목공학교를 5년이나 다니면서 사서 고생을 한 끝에 미니 하프 ‘줄리’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배운 것을 나누고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정서적으로 풍부하게 만들겠다는 사명감이 아니었다면, 그 힘든 시간을 어떻게 견뎌냈을까요.
그녀의 노고는 속속 결실을 맺고 있습니다. 2022년 12월 10일 제1회 줄리 하프 국제 콩쿠르 본선을 한국영상대학교에서 열어, 초등부에서 실버 부문까지 전 연령대에 걸쳐 수상자를 선정하며 하프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또 12월 21일에는 ‘2022 한국 소비자 베스트 브랜드 대상’ 악기 개발 및 하프 교육 부문에서 1위를 차지했습니다. 직접 만든 소형 하프로 하프 대중화와 악기 시장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안영숙 회장. 줄리 하프는 해외 시장에도 진출해 악기 수출뿐 아니라 교육센터를 통해 누구나 쉽게 하프에 접근해 즐길 수 있도록 저변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충남 공주시 단골 철물점에서 직접 고른 철사줄을 매어 하프를 손보던 안 회장은 가게에서 즉석 연주를 합니다. 오드리 헵번이 영화 ‘티파니에서 아침을’에서 연주했던 ‘문 리버’(Moon River)가 그녀의 손을 타고 계룡산까지 울려 퍼지는 듯합니다.
오늘도 헌 구두 하나 꺼내며
옆 사람 표정과 눈빛에 상처 입고, 가족이 내뱉은 말 한마디가 폐부 깊이 찌르는 송곳이 되어 아플 때. 이런 날이면 필자는 신발장을 기웃거립니다. 뭐 고칠 것 없을까 공연히 이 신 저 신 꺼내놓습니다. 오늘은 아들 구두 손볼 차례입니다. 새 신 바닥 앞뒤로 미리 고무창을 덧대면 발바닥도 덜 아프고, 우툴두툴 고무 요철이 미끄럼도 막아주고, 신발 수명도 늘려준다고 하니 일석삼조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구둣방에 미리 오신 옆자리 손님은 자기 것과 딸내미 롱부츠까지 바닥 창을 덧대달라는 주문을 하네요. 구두처럼 우리 마음에도 다치기 전, 아프기 전 미리 반창고 하나씩 붙여보실까요.
이제 다시 시작이다, 찬란한 내 인생
좋은 꿈 꾸셨습니까? 마음 반창고 새해 첫 번째 이야기는 내가 가장 빛났던 순간 혹은 내가 제일 잘나갔던 순간, 그도 아니면 내가 가장 찬란해질 그 순간을 떠올리며 시작합니다. 우리 삶을 춘하추동(春夏秋冬) 네 계절에 피는 꽃으로 비유해볼까요. 아직은 한참 먼 봄소식을 가장 빨리 알려주는 산수유를 시작으로 봄철에는 매화, 목련, 진달래, 개나리, 살구꽃, 복사꽃, 벚꽃이 우리를 맞이합니다. 햇살이 더욱 눈부신 여름이 되면 무궁화부터 찔레꽃, 작약, 패랭이꽃, 장미가 형형색색 산천을 장식합니다. 코스모스, 국화, 과꽃, 나팔꽃, 도라지꽃은 가을을 알리는 전령사입니다. 동백꽃은 단연코 외로운 겨울을 홀로 지킵니다.
이처럼 꽃도 피우는 시기가 다 다릅니다. 차례대로 자기 순서에 맞춰 꽃을 피웁니다. 식물은 계절의 변화를 인지하고 낮의 길이와 온도 같은 최적의 조건이 무르익었을 때 꽃을 피우는 정교한 작동원리를 갖고 있습니다. 식물과 마찬가지로 결정적인 바로 그 순간은 사람마다 다른 시간에 찾아옵니다. 저마다 꽃 피우는 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나다라 배우며 글꽃을 찾은 마음
오십 해가 넘도록 시장통에서 생선 비린내 맡으며 자식 키우고 살아낸 정백안(79세), 서경임(74세) 부부는 영암에서 목포까지 칠흑같이 깜깜한 새벽길을 하루도 빠짐없이 학교에 갑니다. 오가는 데 무려 네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를 오일장 서는 날을 빼고는 거르지 않습니다. 지난 11월에는 전남인재평생교육원에서 주최한 평생교육수기 공모에서 경임 씨가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열여섯에 처음 만난 내 이름, 일흔 넘어 활짝 핀 글자꽃’이란 제목으로 상도 받고, 이름 없이 사느라 아팠던 마음도 아름다운 글꽃으로 승화시킵니다. 세 살에 부모를 여의고 제때 배우지 못한 아픔을 늦깎이 학생이 되어 글로 녹여내며 지난 삶을 돌아보고 멍들었던 마음도 구석구석 어루만지고 있습니다.
온통 눈물과 서러움뿐이었던 삶이 배움을 통해 재밌는 살판으로 바뀌었다는 부부. 학교에 다니면서 어딜 가도, 누굴 만나도 당당하다는 경임 씨는 쓰는 글마다 큰 상을 받으며 웃음이 끊이지 않습니다. ‘둥지 속에 갇힌 새처럼 세상 밖 외면하고 일만 하던’ 경임 씨에게 배움의 기쁨은 기적처럼 찾아온 행운입니다. 호미자루 연필 삼고 밭고랑 공책 삼아 마음을 써내려가는 지금이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화려한 날이 아닐까 미소 짓습니다.
쏜살같은 세월에 지지 않고, 해마다 먹는 나이에 꺾이지 않고 자기 때와 자기 사람을 기다린 이가 있습니다. 무려 72년을 기다린 주인공은 바로 강태공입니다. 3000년 전의 인물로 알려진 강태공의 본명은 강상(姜尙)으로, 선조가 여(呂) 땅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다고 하여 여상(呂尙)이라고도 불립니다. 훗날 주나라 문왕이 되는 서백(西伯)이 강태공을 초빙하며 선왕 태공이 간절히 바라던(望) 성인(聖人)이라고 일컬었기 때문에, ‘태공망’(太公望)이라는 이름도 얻었습니다.
강태공이 버린 낚시 3600개
위수(渭水)에서 낚시 3600개를 버려가며 문왕을 기다렸던 강태공은 일흔두 살이 될 때까지 매우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극진(棘津)이라는 나루터에서 지내며 하는 일이라고는 독서와 낚시뿐이었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물고기를 잘 잡았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드리운 낚시에는 바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늘이 있었지만 곧게 펴져 있었다는 말도 있습니다. 아무튼 물고기를 잡으려고 낚싯대를 드리운 것이 아니니까요. 강태공이 낚시터에서 기다린 것은 물고기가 아니라, ‘때’였습니다. 자신을 알아주는 바로 그 사람을 만나, 자신의 재능과 실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는 기회. 강태공은 ‘그 때’와 ‘그 사람’을 만나기 위해 72년을 기다린 것입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
문왕을 만나기 전까지 강태공은 어떻게 지냈을까요.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에 이르러 집안이 몰락한 강태공은 천문, 지리, 병학(兵學) 등 온갖 학문에 능통한 희대의 천재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의 학식과 통찰력 그리고 큰 뜻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오로지 책만 읽으며 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러다 보니 집안 살림에 도통 관심이 없는 강태공 대신 그 책임을 아내 마 씨(馬氏)가 모두 떠맡게 됩니다. 찢어지게 가난한 살림에 지친 아내는 날마다 남편을 닦달하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태공은 여느 때처럼 책에 파묻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가 오거든 마당에 널어놓은 강피(곡식의 한 종류)를 꼭 거두라고 신신당부한 아내 말을 까맣게 잊은 채 소나기에 그만 강피를 모두 쓸려 보내고 말았습니다. 이에 진절머리가 난 아내는 그 길로 이혼을 선언하고 집을 나갔다고 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될 것을….” 강태공은 떠나는 아내를 향해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고 전해집니다.
나의 꿈은 꺾이지 않았다
혼자서 살림까지 도맡아야 했던 강태공은 오십이 넘도록 여관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들게 살았고, 그 뒤로는 백정 일을 했는데 도마 위에 놓은 고기가 썩을 때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마침내 위수가로 옮겨 낚시를 시작했고 오랜 세월 끝에 문왕과 만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중국은 은나라의 마지막 왕이었던 주왕(紂王)이 달기의 치마폭에 싸여 폭정을 일삼아 민심이 크게 동요하던 때였습니다. 이와 반대로 덕망이 있었던 문왕은 자신을 도와 천하를 다스릴 인재를 찾던 어느 날 사냥을 나가기 전 사관 편(編)에게 점을 치게 했습니다. “위수에서 사냥을 하면 장차 큰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용도 이무기도 아니고, 호랑이도 곰도 아닙니다. 장차 패왕을 보필할 스승이며 그 공이 3대(代)에까지 미칠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문왕은 3일 동안 목욕재계를 한 후 위수로 사냥을 떠났고, 강태공과 극적으로 만난 것입니다. 비록 낡은 옷의 초라한 늙은이가 낚시를 하고 있었지만 문왕은 한눈에 그가 비범한 사람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강태공 역시 자신의 뜻을 알아줄 현자가 나타나리라는 것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학문과 수양에 매진하며 그 긴 세월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다. 강태공은 자신의 성공과 명예, 부귀영화보다 남을 잘 되게 하려는 마음으로 부국강병의 술법을 끊임없이 공부하고 마음을 닦으며 10년 동안 3600개의 낚시를 버리면서 때를 기다린 것입니다. 강태공이 지쳐 포기했다면, 언제 찾아올지 모를 ‘자신의 때’를 끝내 기다리지 못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오랜 세월을 견뎌내며 자신이 쓰일 때를 기다리고 준비했기에 ‘강태공’, ‘태공망’이라는 이름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지요.
차근차근, 차곡차곡, 차례차례
반면에 필자는 조급함, 성급함이 얼마나 자신을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고, 외롭게 하고, 또 때로는 절망하게 하고, 화나게 하는지 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2018년 12월 말에 첫 책 ‘혼자 술 마시는 여자’를 나이 오십에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그동안 미루고 도망가다 만들어진 책인 데다 제 생애 모든 것 사랑, 열정, 가족까지 다 녹였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엄청 기대가 컸습니다. 욕심도 너무 많았습니다. 책이 딱 나오면 세상이 바뀔 줄 알았습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유명 작가가 되어 텔레비전 프로그램 ‘아침마당’에 초대되고, ‘인간극장’에 출연하는 상상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상상과 현실은 참 달랐습니다. 이게 하루아침에 될 수 없는 건데, 머리로는 알지만 막상 책을 내고 보니 그건 다 잊어버린 채 금방 유명해질 줄 알고 커다란 꿈과 야망, 욕심과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 욕심 때문에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겁니다. 주변 지인들과 가족들한테 더 실망하게 되고요.
‘나를 조금 더 챙겨주지.’
‘왜 책을 안 사줄까.’
‘나를 잘 아는 사람이 왜 책을 안 알려줄까, 다른 사람 책은 홍보해주면서.’
마음에 별의별 부정적인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더라고요. 마치 고구마 줄기 걷어 올릴 때 한 넝쿨에 끝도 없이 흙 속에서 끌려나오는 것처럼요. 책을 구매하고 SNS에 소개해준 사람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잠시뿐이고, 관심도 없고 구매도 홍보도 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에게 서운해하면서 원망하는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그렇게 괴로워하던 어느 하루. 필자 대학원 논문 심사위원이었던 주철환 교수님께 책 소식을 전해드렸습니다.
‘차근차근, 차곡차곡, 차례차례’.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답장으로 주신 세 마디가 다른 어떤 말보다 큰 위로가 되고, 대단한 응원이 되었습니다. 그래, 차근차근 가야지.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인데 한 발짝 한 발짝 떼어야지. 차곡차곡 쌓아야지, 돌담을 쌓듯이. 크고 작은 자갈, 큰 돌, 작은 돌이 사이사이에 다 채워져야 탄탄한 울타리가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주 교수님의 말은 필자가 힘들고 지칠 때마다 자신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해줍니다. 나만의 때와 사람을 기다리며 차츰차츰 나아갈 용기가 생깁니다.
시유기시 인유기인
아, 왜 이렇게 삶이 힘들까?
아, 왜 이렇게 일이 안 풀릴까?
아, 왜 이렇게 인간관계가 꼬일까?
‘시유기시 인유기인’(時有基時 人有基人), ‘때에도 그 때가 있고, 사람도 그 사람이 있다’는 뜻입니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거나 앞으로 일을 펼칠 때 길잡이가 되고 안내가 되는 말입니다. 어떤 일을 도모할 때 타이밍이 안 맞아서 실패하거나 어긋나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일이 거의 다 만들어지고 프로젝트가 왕성하게 되어 있는데, 꼭 ‘그 사람’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강태공이 그토록 오랜 세월을 기다린 것처럼, 경임 씨가 글꽃을 피우며 만학도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처럼 필자도 차근차근, 차곡차곡, 차례차례 다음 책을 준비하며 새로운 사람들, 시절인연 만날 설렘을 안고 강의실로 들어갑니다. 자기 걸음에 집중하면서 말입니다.
주변을 원망하거나 자책하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속도와 방향에만 신경 쓰며 새해 새 사람, 새 때를 기다려볼까요. 당신의 화양연화(花樣年華)는 아직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 무렵 일상이 심드렁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사상 최고의 폭염이라는 여름도 간신히 버텨냈고 슬슬 가을이 되고 있었다. 툭하면 머리가 지끈지끈거렸고 개운치 않은 컨디션은 때로 우울하게 했다. 누군가의 낯부끄러운 이기심을 보며 가까이한 것을 후회했고 어떤 이의 유치하고 얄팍한 이중성은 슬프거나 정 떨어졌다. 그럼에도 이 모든 것들을 아무렇지도 않은 척 살아내야 하는 소심함이 힘겨웠다. 무엇이 기다릴지 몰라도 잠깐이라도 여길 벗어나야 한다는 조바심이 들끓던 중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파리를 제안해 왔다. 거기서 며칠 쉬다가 세비야와 마드리드를 거쳐서 돌아오자고 말하는 남편의 생각에 묻지도 따질 것도 없이 동의했다. 눈 빠지게 그의 휴가 승인을 기다리느라 하루하루가 지루했다.
파리를 거쳐 또 다른 유럽으로 가는 일정이다. 파리를 또 가게 될 줄은 몰랐다. 거쳐가는 도시로 파리가 좋았다. 잠깐이어도 괜찮다. 스치듯 지나쳐온 단 이틀간의 파리가 가라앉은 내 심장을 조금씩 살아나게 했으니까.
예측하지 못했던 일로 지치고 기운 다 빠졌던 드골공항에서 탄 RER 열차가 뤽상부르 역에 닿았다. 파리다. 파리라는 것만으로도 슬슬 기분전환이 되기 시작한다.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기차 안에서 살짝 어이없는 일이 있었지만 가라앉았던 기분은 집어치우자며 심기일전의 심호흡을 길게 했다.
숙소로 가는 길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며 날린다. 여기도 가을과 겨울 사이쯤이다. 마음껏 늦가을을 즐기는 파리지엔들 틈에서 내 기분도 조금씩 생생해졌다. 빵집 진열장의 알록달록한 마카롱 더미를 보면서 아하, 파리구나 했고 샹송에서나 듣던 어조를 지나가는 연인들의 말소리에서 들으며 나 떠나왔구나 실감했다.
떠나옴을 느끼게 하는 것들이 주변을 온통 둘러쌌다. 거리의 밤바람이 그랬다. 걸을 때마다 눈앞 여행지의 이야기가 나온다. 일상의 이야기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발 딛고 서 있는 낯선 풍경 속에서 심장의 동요가 느껴지는 것, 이미 두근거리는 여행의 시작이었다.
소르본 대학 주변의 숙소에서 내려다보는 거리는 대학가의 학구열보다는 어렴풋한 소설의 한 장면이 먼저 떠올랐다. 제목도 내용도 기억에 없지만 희미한 가로등 불빛 한 점 빛나던 소르본의 골목 풍경을 읽었던 듯했다. 어렴풋한 기억이 오히려 아련한 기분으로 감성을 부추긴다.
그리고 문득 시몬느 드 보부아르와 재클린이 생각났다. 소르본이라는 이름으로 얼핏 그 두 명이 떠올랐던 것이다. 고작 대중적 인지도만으로 떠올려지는 내 수준으로 연결되는 소르본 골목이지만 그것만으로도 한결 친근하다. 연상법의 흐름이란 참 편리하다. 그녀들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문학적 배경이 되고 그녀들의 빛났던 인생의 초석을 이루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며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또 하나 있다. 영화 비포 선라이즈의 여자가 소르본 대학 학생이었다. 비엔나행 열차에서 만난 남녀의 끊이지 않던 대화가 영화 한 편을 만들어낸 것으로 기억한다. 어딜 가든 영화 속의 풍경이나 ost가 순간순간 떠오르거나 책 속의 배경이나 여행지와 관련된 이야기가 시도 때도 없이 생뚱맞게 불쑥 오버랩되는 건 오랜 내 습관이다.
무엇보다도 어둔 밤거리가 활기차다. 구획이나 담장도 없고 대문도 없는 생미셸 거리의 대학가는 가을바람이 휙휙 불어대는 쌀쌀함 덕분인지 순식간에 상쾌하게 기분전환이 된다. 백 년 전에도 있었을 듯한 골목이다. 대학 건물 벽의 오래된 낙서가 이야기가 있는 벽화처럼 재미있는 볼거리다. 길 가다 손잡이를 열면 나를 압도할 그들의 견고한 학문이 맞아줄 것 같은 상상을 하며 그 담벼락 옆 소르본의 골목길을 느릿느릿 걸었다.
빗방울이 떨어지고 젖은 낙엽이 발에 밟히는 거리 주점에선 젊은이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밤늦도록 들려왔다. 숙소 창문을 열고 그런 시간들이 켜켜이 쌓이고 스민 골목을 자정이 넘도록 내다보았다. 노천카페와 서점들로 이어지는 소르본 대학 주변을 산책하며 비로소 심폐 소생하듯 되살아나는 기분을 감지했다.
소르본 근처 호텔의 아침식사는 간단했다. 그런데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며 신기한 실내 구조를 보며 놀랐다. 마치 마리앙뜨와넷뜨나 루이 14세 시절에 죄수나 반역자들을 가두었던 지하 감옥이 떠올려진다. 언젠가 책에서 그 옛날 프랑스 어느 지하 감옥이 대학 주점으로 변모한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그 또한 떠올려졌다. 역사가 느껴지는 특별한 실내 분위기였다. 참 쓸데없는 상상력이란.
천정이나 벽이 울퉁불퉁하다. 실내가 네모거나 원형도 아닌 멋대로 삐뚜름한 내부 공간에 정갈한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요란하게 잘 차려진 아침이라기보다는, 갓 구운 빵 냄새가 솔솔 나는 누군가의 소박한 주방의 간편한 아침시간 같은~수수한 듯 참 인상적인 분위기여서 기억에 오래 남는다.
특히 뭐니 뭐니 해도 바게트 맛은 내가 맛본 중에서 가장 최고다. 쌉싸래한 커피와도 잘 어울린다. 통통한 빵의 굵기와 겉 부분의 크러스트가 단단하지만 씹을수록 고소하다. 그 안의 빵 결은 촉촉하고 쫄깃해서 물리지 않고 끝없이 먹게 된다. 그 맛에 배가 부른데도 마구 먹어댔다.
우리의 주식은 밥이기에 빵만으로는 오래 먹기 쉽지 않다. 우리는 밥심으로 산다고 하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빵심으로 산다는 걸 이해하겠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맛이다. 다음에 또 갈 일이 있을까만 만일 다시 간다면 맛있는 바게트를 찾아서 실컷 먹고 올 생각이다. 빵이 맛있던 소르본 어드메의 골목길이 유난히 떠오른다.
김혜숙(63) 씨는 전남 여수의 쌍봉종합사회복지관에서 10년째 장애인 활동지원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우리는 일상을 사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지만, 장애인은 모든 게 불편하다. 작은 도움이지만 장애인과 나누고 싶었다”면서 일을 시작하게 된 배경을 말했다.
김혜숙 씨는 봉사활동에 워낙 관심이 많았다고 밝혔다. 과거 과외 교사였던 그는 학생들과 함께 장애인 시설 등에 봉사활동을 가고는 했다고. 김혜숙 씨는 “돌이켜 보면 그때의 경험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벌써 10년. 그가 일하면서 느낀 직업의 장단점은 무엇일까. 장점에 대해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 변한 게 느껴지고, 작은 도움이지만 그들의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반면 단점으로는 소통이 안 될 때를 꼽았다. 장애인 활동지원사는 대소변 받기는 물론 청개구리처럼 행동하는 장애인의 고집을 꺾어야만 한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이라 소통이 중요하더라고요. 신체는 중증이라도 소통은 잘 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소통에서는 지적장애인 분들이 더 힘들더라고요. 막무가내에 고집이 센 분들이 많죠. 특히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활동지원사는 많이 당황하게 됩니다.”
또 다른 단점으로 김혜숙 씨 역시 급여 문제를 얘기했다. 시급이 신입이건 10년 이상 일한 사람이건 똑같다 보니 대부분의 장애인 활동지원사가 불만을 품은 부분이다. 김혜숙 씨는 “연차에 상관없이 일한 만큼 돈을 버는 것이다. 시급의 차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복지관에서는 자체적으로 주휴수당, 연차수당을 챙겨준다고는 한다.
김혜숙 씨는 휴게시간 문제도 지적했다. 현장에서 일해 본 사람만이 아는 고충. 근로기준법에 따라 활동지원사는 4시간을 일하면 30분, 8시간을 일하면 1시간의 휴게시간을 가져야 한다. 휴게시간이 되면 근무시간 기록용 단말기에 카드를 접촉해 근무시간을 종료해야 한다.
김혜숙 씨는 “장애인을 돌볼 때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고, 쉴 수가 없다”면서 휴게시간 시스템의 개선 필요성을 토로했다. 법적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휴게시간을 갖지만, 휴식도 어려운데다 수입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 실제로 이 휴게시간 문제는 업계에서도 지속적으로 개선 필요성이 거론되고 있다고.
장애인 활동지원사는 1:1 매칭 시스템으로 운영되며, 한 번 장애인을 맡으면 오래 간다고 한다. 김혜숙 씨는 현재 맡은 2명의 장애인도 몇 년째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장애인이 아니라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애인은 누구일까. 김혜숙 씨는 초기에 만난 장애인 학생을 얘기했다. 시각과 청각 장애가 있는데 뇌성마비 증상도 가진 중증장애인이었다.
김혜숙 씨는 “그때는 나도 초보였기 때문에 정말 난감하고 어떻게 하지 싶었다. 아이의 등하교가 나의 의무였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됐고, 아이가 학교에 갔다 오면 말은 안 해도 얼굴이 환한 게 느껴졌다. 집에만 있으면 폐쇄적이 되는데 친구들을 만나고 규칙적인 삶을 사니깐 아이가 밝아졌고 나도 행복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김혜숙 씨가 돈을 바라고 일했다면 지금까지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더 소중한 가치와 행복을 얻었다. 김혜숙 씨는 동년배들도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길 바란다. “중장년이 직업을 잃으면 막막함을 느끼지만, 조직에 속해 사회적 활동을 하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면서 장애인 활동지원사를 추천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일할 수 있고,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해요. 경제적 보상도 따르면서 일의 보람도 느끼잖아요. 꼭 규칙적으로 일하지 않고, 힘들면 적게 일해도 되죠. 그래서 중장년에게 장애인 활동지원사를 추천해주고 싶어요. 누구든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도전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가까운 사이일수록 동업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있다. ‘관계를 끝장내고 싶으면 그와 동업하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동업은 단순히 사업체를 함께 운영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 투자부터 노무 관계까지 다양한 사정으로 얽히기 때문이다. 서영열, 권순희 부부는 주변의 걱정을 딛고 연 매출 50억 원을 달성하며 ‘장사의 달인’이 됐다. 부부야말로 최고의 동업 파트너라 말하는 그들을 만나 가족 창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서영열, 권순희 부부는 32년간 협업해온 ‘장사의 베테랑’이다. 경기도 수원시 근교의 논밭 터에서 ‘기와집’과 ‘초가집’을 운영했다. 현재 낙지를 판매하는 초가집은 친척에게 넘기고, 기와집에서 손님을 맞고 있다.
기와집의 대표 메뉴는 장어구이다. 두툼한 두께에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을 자랑한다. 양념장은 구기자, 계피, 오미자, 감초 등의 한약재를 포함한 23가지 재료를 넣어 만든다. 장어는 소금구이와 양념구이, 탕으로 즐길 수 있으며, 전복구이와 잔치국수도 마련돼 있다. 이 집의 요리는 모두 연잎이 들어가는 게 특징이다.
기와집장어는 수원에서 이미 소문난 맛집이다. 하루 최고 매출은 6700만 원. 코로나19의 습격에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켰다. 예비 창업자, 다른 지역의 자영업자, 유명 프랜차이즈 CEO 등 다양한 사람이 찾아와 부부에게 비법을 묻곤 한다. 폐쇄적 경영, 다양성 부재, 실패에 대한 부담 증가 등 가족 창업의 여러 위험을 뒤로하고 어떻게 부부 동업으로 우뚝 설 수 있었을까?
Q. 황제식당, 행운정육점, 육일축산, 초가집과 기와집장어 순으로 업을 이어오셨습니다. 안정적인 성장의 비결은 무엇인가요?
경사진 비탈길, 테이블 서너 개 놓고 시작한 설렁탕집부터 2층짜리 장어집까지 철저한 계획과 연구, 그리고 노력이 있었죠. 그러나 이 모든 과정은 아무래도 든든한 파트너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거예요.
Q. 가까운 관계일수록, 특히 가족끼리는 동업하지 말라는 말도 있어요.
물론 한 공간에 하루 종일 같이 있다 보면 부딪치는 일이 많고 미운 마음이 들기도 하겠지요. 가족이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서로 예의와 자질을 갖춰야 합니다. 대화도 많이 해야 하죠. 우리는 시시콜콜한 것 하나까지 의견을 주고받았습니다. ‘메뉴판의 글씨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할까? 대문에 붙일 문구는 흐르는 느낌의 글씨체로 쓸까?’라면서요. 상대의 의견을 존중한다는 의미예요. 더 나아가 대화를 통해 서로의 특성과 장단점을 이해하고 사업에 접목시켰어요. 남편은 추진력이 엄청난 사람이라 한번 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어떻게든 해내고 말죠. 그럴 때마다 아내인 제가 중간중간 빠진 부분은 없는지, 이 방향이 맞는지 꼼꼼하게 점검해요.
Q. 의견이 맞지 않을 때는 어떻게 하시나요?
‘남이면 그럴 수 있지’ 하며 넘어갈 일도 서로 잘 안다고 생각하는 가까운 관계에서 말을 쉽게 내뱉다 보면 갈등이 심화될 수 있어요. 뻔한 이야기일 수 있지만, 둘 중 하나가 져주는 것이 좋습니다. 각자의 색깔이 너무 뚜렷하면 융화될 수 없죠. 그리고 일을 할 때 문제가 생기면 일에 대한 이야기만 해야지, 부부 사이에 있었던 일까지 들먹이면 안 돼요. 그런 면에서 우리 부부는 분명한 원칙이 있었죠. 집안일은 집에 가서 생각하자!
Q. 안팎으로 모든 일을 함께하다 보면 가족일지라도 서로에 대한 피로가 쌓이지 않을까요. 부부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은 무엇인가요?
요식업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에요. 서비스를 제공해야 하는 터라 많은 사람을 먼저 배려하고 일일이 맞춰줘야 하죠. 하루 종일 감정 노동을 하다 보면 정작 같이 일하는 사람끼리는 소홀하기 쉬워요. 별것 아닌 일에 섭섭해질 때도 있고요. 그래도 고생한 덕에 우리 생활이 안정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스려요. 바쁘지만 함께 ‘식당 투어’를 명목으로 데이트를 하기도 합니다. 개업한 식당에 찾아가 보고, 유명한 가게에서 배워올 건 없는지 살펴봐요. 전국 방방곡곡 어디든 시간 날 때마다 다니고 있어요.
Q. 가족끼리 동업을 할 때 꼭 지켜야 할 철칙이 있을까요?
서로 역할 분담을 명확히 하고, 영역을 넘나들지 않아야 합니다. 한식구다 보니 책임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있는데요. 서로의 업무를 미리 숙지하되 담당자를 정해두고, 해당 분야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그의 말을 따르는 편이 좋습니다. 가게도 엄연한 직장이에요. ‘내가 안 하면 아내가 하겠지’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각자의 휴무일도 미리 정해두고 움직이는 것이 갈등을 줄이는 방법입니다.
Q. 창업 준비는 언제부터 해야 하나요?
저성장시대에는 섣불리 창업하지 않는 편이 좋아요. 많은 돈을 벌 욕심에 준비되지 않은 채 직장을 그만둔다면 실패할 확률이 높죠. 여생을 함께할 ‘내 가게’를 여는 것이 목표라면, 우선 다니는 직장에서 일하며 최대한 자본을 벌어두는 것이 유리해요. 혹은 우리 부부처럼 남편은 직장 생활을 하고 아내가 먼저 사업을 시작해본 뒤, 어느 정도 안정됐을 때 함께 일하는 방식도 괜찮아요.
Q. 창업을 앞둔 중장년이 꼭 알아야 할 점이 있다면요?
중장년은 청년에 비해 가진 자본이 꽤 될 거예요. 하지만 돈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지 않아요. 장사를 쉽게 생각하면 안 돼요.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하다 안 되면 식당이나 하지 뭐”라고 내뱉는 분도 있어요. 인건비, 재료비, 임대료, 각종 세금 등을 감당하면서 이익을 내는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언젠가 유명 프랜차이즈 CEO가 “규모만 클 뿐 늘 인건비 때문에 허덕이고 있어 실속이 없습니다. 혹시 제가 놓치는 부분은 없는지 배우러 왔습니다”라며 도움을 청한 적이 있어요. 규모가 크고 자본이 많다고 무조건 성공하는 건 아니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사업을 확장하더라도, 처음에는 가족끼리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소규모 창업을 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연 매출 50억 부부의 ‘밥장사’ 노하우
1. 올인은 금물, 항상 앞뒤를 재야 한다
“단순하지만 가장 기본적인 이야기입니다. 많은 사람이 뭔가를 시작할 때 성공한다는 전제로 가진 자본을 쏟아부어요. 하지만 결과가 좋지 않을 때를 항상 생각해야 합니다. 치킨집을 차렸는데 하루아침에 조류독감이 퍼질지, 고깃집을 차렸는데 구제역이 올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요. 부부 중 한 사람의 은퇴가 몇 년 남았다면 돈을 최대한 벌고, 나머지 한 사람이 먼저 시작해보면서 자리를 잡는 편이 좋아요. 섣불리 둘 다 하던 일을 내던지고 모험을 하다 갖고 있던 것도 날려버릴 수 있으니까요.”
2. 음식에도 유행이 있다
“각자 주어진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어떤 아이템이 좋다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음식도 유행이나 계절을 타죠. 경기가 어려울 땐 자극적인 음식으로, 비교적 안정적일 땐 한식이나 발효음식으로 고객들의 선호도가 바뀌어요. ‘요즘 이 아이템이 대세래’라며 성급하게 창업하면 실패할 확률이 큽니다. 10년 이상 한자리에서 성업 중인 식당들의 주 메뉴를 분석해보고, 공통적인 키워드를 뽑아보는 것도 참고가 되겠네요.”
3. 핵심은 현장에서만 얻을 수 있다
“자영업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면 원하는 아이템을 잘 활용하고 있는 가게에 가서 일을 해보는 것도 방법입니다. 우리 부부는 같은 메뉴로 대박 난 식당에 출퇴근하면서 몸으로 배웠어요. 그 가게만의 흐름을 이해하고, 보완할 점을 연구하다 보면 내 가게를 열 때 도움이 되지요. 이론도 중요하지만, 진정한 장사의 민낯을 보려면 현장에서 부딪히며 익히는 게 훨씬 효과적이에요. 돈도 벌고 기술도 터득하고, 일석이조 아닌가요?”
4. 동선만 잘 짜도 인건비를 아낄 수 있다
“식당이든 다른 자영업이든 매출 대비 수익을 판가름하는 것은 의외로 손님 수가 아니라 인건비입니다. 장사가 잘돼도 임대료와 식재료비, 인건비를 빼면 남는 게 없다고들 해요. 그럴 땐 가게 내부의 동선을 가장 먼저 분석해야 합니다. 동선만 잘 짜도 한 사람분의 인건비를 아낄 수 있어요. 우선 기와집과 초가집에는 문턱이 없습니다. 문지방 하나, 계단 한 칸이 일의 효율을 꽤나 좌우해요. 또 손님을 더 받기 위해 테이블을 더 두는 경우가 있는데요. 통로가 좁아져 서빙하기 힘들고, 손님들은 불편해합니다. 주방도 마찬가지예요. 조리 시설을 갖추기 전에 동선을 짜고, 움직여보며 연습해봐야 합니다. 주방 일을 맡는 사람이 오른손잡이인지 왼손잡이인지에 따라서 냉장고나 세척기의 위치도 달라지겠죠.”
5. 손님이 손님을 부른다
“장사의 목적은 다른 고객을 확보해주는 고객을 만드는 것이란 말이 있어요. 음식 장사는 입소문이 절반이죠. 한 번 방문한 손님이 두 번째 방문할 때 다른 일행과 함께 오고, 그 일행이 또 다른 이들과 함께 방문하는 문어발식 마케팅이 잘 먹히는 업종입니다. 어떤 상황이든 손님이 하는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면, 그 손님은 스스로 최고의 영업사원이 돼줘요. 우리는 ‘미소를 짓지 않으려면 장사를 하지 마라’는 중국 속담을 매일 떠올리곤 합니다.”
연 매출 2조 원을 바라보는 국내 아웃소싱 기업 1위 삼구아이앤씨. 이곳 총수의 집무실에는 ‘책임대표사원’이라는 독특한 문패가 달렸다. 안으로 들어서니 더 인상적이다. 비좁은 방 크기, 드넓은 세계를 담은 지구본, 박스 테이프로 덧붙인 40년 차 사무용 의자.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주인, 여든의 구자관 책임대표사원이 젊은 기자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하며 다가왔다.
“사무실은 한정적인데 내 방을 크게 하면 직원들 공간이 좁아지잖아요. 이만하면 일하는 데 충분합니다. 이 오래된 의자도 아무 문제 없고요.(웃음)”
구자관 책임대표사원(이하 대표)은 자신의 공간을 줄이는 대신 직원들에게 넓은 책상을 놓아줬다. 책상의 크기만큼 생각도 넓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렇게 하고도 남는 공간은 휴게실, 드레스룸 등 모두 직원들을 위해 쓰였다. 훗날 여건이 된다면 건물 한 층을 임직원의 가족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보리라는 즐거운 상상도 해본다. 늘 직원의 편의와 행복을 우선으로 여기는 구 대표. 그가 ‘책임대표사원’을 자처한 이유도 마찬가지다.
“회사가 전통적으로 해오던 일들과 달리 신규 채용, 신생 사업 등 새로운 시도에는 변수가 따릅니다. 직원들이 문제가 생기거나, 사업이 실패할 수도 있으니까요. 그런 리스크까지 담당자가 모두 책임지려면 부담이 크겠죠.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근다고, 일이 잘못될까봐 기회를 주저하는 상황도 생길 테고요. 때문에 다른 일은 다 전결해도 딱 두 가지, 사람을 뽑거나 사업을 시작할 때는 반드시 직접 결재합니다. 문제가 생길 경우 최종 승인자인 내가 책임지게끔 하기 위해서죠. 그렇게 직원들이 다른 걱정 말고 맘 편히 일했으면 좋겠습니다.”
시간과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
회사 식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구 대표. 그런 그에게 가장 잊지 못할 직원이 있으니, 바로 박복순 여사님(삼구아이앤씨에서 청소 용역을 담당하는 여직원을 부르는 명칭)이다. 수십 년 전 일임에도 그 이름 석 자만큼이나 각인된 일화가 있다.
“사업 초창기에는 저도 현장에서 청소를 했어요. 하루는 고객사와 약속한 시간 안에 일을 못 마치겠더라고요. 함께하는 여사님들을 채근하기 시작했죠. 그랬더니 박복순 여사님이 그러시는 거예요. ‘사장님, 뜨는 해는 잡을 수 있는데, 지는 해는 못 잡아요. 이럴 거면 더 일찍 나오라고 하셨어야죠.’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다가, 갑자기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그래, 마감 시간은 우리가 못 바꿔도 시작 시간을 앞당길 순 있지!’ 인생에 빗대본다면 지는 해를 맞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찾아오지만, 뜨는 해를 맞는 시간은 자기 노력에 따라 달라질 수 있잖아요. 여사님의 한마디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이 일로 구 대표는 아침형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다. 어려운 형편 탓에 새벽일을 하며 아침을 허투루 보낸 적 없는 그였지만, 그날 이후 하루를 관조하는 자세가 사뭇 달라졌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조찬회와 대학 CEO 강의 등에 참여하며 사업에 필요한 지식을 두루 익혔다. 나태해지는 날이면 새벽 4시부터 일터에 나가 있을 여사님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뜨는 해를 앞당긴 덕분일까, 구 대표는 언젠가 찾아올 ‘지는 해’, 즉 죽음에 대해서도 두려움이 없었다. 그는 이미 주변에 자신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묘비 하나 남기지 말라 당부했다. 다만 살아 있을 때 열심히, 최선을 다하겠노라 말한다. 이는 여한 없는 삶을 살겠다는 이야기로도 들린다. 구 대표가 중년 이후 해온 도전들만 보더라도 그러하다. 56세에 스키, 65세 할리데이비슨 면허 취득, 69세에 승마, 70세에 수상스키, 71세에 비행기 조종, 74세에 뉴질랜드 밀포드사운드 트레킹 완주 등. 젊은이도 시도하기 어려운 도전들임에도 그는 망설임이 없다. 더 정확히는 망설일 수가 없다.
“예순이라서? 칠순이라서? 그렇게 늦었다고 한탄하고 미루다 100세가 되면요? 그때라도 할 걸 후회하지 않을까요? 건강이 허락하고, 즐길 만한 여건이 된다면 지금이라도 해야죠.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위험한 거 하다 잘못되면 어쩔거냐 그래요. 이 나이에 다치는 게 더 두렵지, 죽는 건 두렵지 않아요. 다쳐서 운 나쁘면 병원에 누워 연명하는 신세가 되니까요. 올해 여든에는 미국에서 낙하산 없이 뛰어내리는 스카이점프를 해볼 겁니다. 그리고 85세가 되면 뉴질랜드에 가서 밀포드사운드 트레킹에 재도전할 거예요. 현재 세계 최고령 완주자가 84세라고 하더군요. 그 기록 한번 깨보렵니다.”
고령 인력 위해 불태운 노년 학구열
구자관 대표가 레포츠 분야에만 도전을 일궈온 것은 아니다. 61세에 용인대 경찰행정학과에 입학해 64세에 졸업장을 땄고, 66세에는 서강대 경제대학원에 입학해 68세에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단순히 학력을 쌓기 위한 흐름으로 보이겠지만, 그에겐 남다른 목표가 있었다.
“삼구아이앤씨는 다른 회사에 비해 중장년이 적지 않은 편이죠. 50~60대는 물론 70대도 꽤 있으니까요. 이분들을 접하다 보니, 다가올 백세시대에 고령 인력이 중요해지겠다 싶더군요. 평균 수명이 70세 전후였던 시절에야 60세에 은퇴하고도 그럭저럭 여생 즐기다 갈 만했겠지만, 요즘처럼 평균 수명이 80세가 넘는 시대에는 일 없이 버티기 어렵죠. 그런 고민과 메시지를 나누고 싶은데, 그냥 말하는 것보다 논문을 내면 더 힘을 실을 수 있겠더라고요. 후속 연구도 이뤄질 수 있고요. 근데 논문을 쓰려면 대학원에 가야 하고, 그전에 대학을 나와야 하잖아요. 당시 고졸 학력이 전부였던 터라, 예순 넘어 긴 여정을 택할 수밖에 없었죠.”
보통은 학업을 이수하는 과정에서 논문의 주제와 방향을 정하는데, 구 대표는 그 반대였던 셈이다. 어렵사리 졸업 시험을 통과했고, 손꼽아 기다리던 논문 작업에 착수했다. 최근에야 한국이 고령사회로 접어들며 관련 연구가 활발해졌지만, 그가 고민을 시작한 2000년대 초만 하더라도 학계의 움직임은 저조했다. 연구할 표본이나 참고할 자료가 턱없이 부족한 상황. 난항을 겪던 차, 구 대표는 직원들에게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애초에 논문도 우리 회사 고령 직원들을 생각해 시작한 것이니, 결국 그들을 대상으로 연구하면 되겠더라고요. 먼저 데이터를 만들기 위해 설문조사를 계획했죠. 당시 담당 교수들이 우려했어요. 보통 답변 회수율이 10% 정도밖에 안 된다면서요. 요즘처럼 모바일을 활용하던 때도 아니니까요. 설문지를 꾸려 삼구아이앤씨에 다녔거나 다니는 70대분들에게 드렸는데, 600장 중 540장이 회수됐어요. 그것도 일주일 만에요. 덕분에 논문을 잘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제 이름으로 나왔지만, 직원들과 함께 만든 결과라 말하고 싶어요.”
구 대표가 내놓은 ‘고령화 사회의 고령 인력 취업에 관한 연구’는 서강대 대학원 학위수여식에서 우수논문상까지 받을 정도로 호평을 얻었다. 그는 당시 논문을 통해 임금피크제 및 건강 나이를 기준으로 한 정년제 도입 등을 이야기했다.
“근래 들어 정년 나이나 생산연령(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연령)을 높이자는 이야기가 많이 나옵니다. 여기서 나아가 생물학적 나이가 아닌, 개인의 건강 나이를 기준으로 노동력을 평가했으면 해요. 가령 내 나이가 팔십인데, 지금도 밖에 나가 땅도 파고 청소도 할 수 있어요. 그런데 같은 나이라도 그게 어려운 분들이 있잖아요. 물론 그들에게도 단순노동 등 적합한 일자리를 마련해주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복지랍시고 그냥 돈을 주는 것보다는 소일거리라도 주고 소득을 얻게 하는 편이 낫습니다. 꼭 돈의 효용만을 따져서는 아니에요. 노인 스스로 일하고 노후를 개척할 때 자긍심과 보람을 얻을 수 있어요. 출퇴근을 하면 일상에 루틴과 활력이 생기고, 그렇게 노인의 심신이 건강해지면 역으로 복지비용은 줄어들 수도 있다고 봐요.”
1등을 넘어 일류를 꿈꾸다
인터뷰 당일 아침 팔굽혀펴기 50개, 제자리뛰기 600개를 하고 나왔다는 구 대표. 논문에서 밝혔듯 자신 역시 고령 인력으로서 건강 나이 관리에 힘쓰는 모습이다. 이토록 노력하는 이유는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았다는 뜻일 테다. 홀로 양동이와 걸레를 들고 다니며 식당 화장실을 닦던 청년이 4만여 명의 직원을 거느린 업계 1위 기업의 총수가 됐다. 자수성가를 이룬 그에게 더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무엇일까?
“여느 기업가처럼 한때는 업계 1위가 되는 게 꿈이었죠. 그런데 2018년에 매출 1조 원을 달성하고 그 꿈을 이룬 순간 목표를 재설정했습니다. 1등이 아닌 일류가 되자고 말이죠. 숫자로 정해지는 1등은 우리가 부진하면 언제든 바뀔 수 있지만, 일류가 지닌 품격은 세월이 지나도 쉽게 변하지 않거든요. 그 목표는 기업의 문화, 정신, 자세, 사회적 역할, 국가적 책임 등 모든 것을 아울러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아직 할 일이 많습니다.”
구 대표는 30여 년 전부터 매년 회사의 경영지침을 새롭게 정한다. 2022년은 ‘한즉자주 수즉자거’(旱則資舟 水則資車)였다. ‘화식열전’에 나오는 말로, 가뭄이 들 때 배를 준비하고 홍수가 나면 수레를 준비하라는 뜻이다. 올해의 경기 침체를 예견한 듯, 삼구아이앤씨 식구들은 그 지침에 따라 위기에 대비하는 한 해를 보냈다. 인터뷰 당시 2023년의 경영지침을 고민 중이었다. 내일 죽더라도 모레 일어날 일을 오늘 대비하겠다는 구 대표. 그런 그가 자신의 은퇴 시점을 염두에 두고 있을지 궁금했다.
“요즘 하는 일은 육체적인 것보다는 정신적인 부분이 크죠. 나이 들었다고 그마저도 안 하고 은퇴한다? 그럼 아마 제 삶이 금세 망가질 것 같아요. 선친께서 말씀하시길 노인 근력 좋은 것과 겨울 날씨는 믿지 말랬어요. 그만큼 갑자기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거죠. 만약 내가 내일 없더라도 직원들은 출근을 하고 회사는 돌아가야 하잖아요. 내가 살아 있는 한 그들이 이곳에서 오래오래 미래를 설계하도록 토대를 만들어줘야죠. 그러려면 한시가 바쁜데 은퇴를 생각할 새가 어디 있어요. 그냥 이렇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구자관이 세상 떠났대, 그런데 다음 날 삼구아이앤씨에 아무 문제도 없대. 그때야 비로소 제가 은퇴하는 날입니다.”
2022년도 역시 다사다난했다. 윤석열 정부가 출범했고, 국민MC 송해도 세상을 떠났다. 10월 29일에는 비극적인 이태원 참사도 있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는 연말을 맞아 중장년 관련 2022년 10대 뉴스를 꼽아봤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제20대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5월 10일 공식 취임했다. 1960년생인 윤 대통령은 검찰총장 출신의 첫 대통령이라는 역사를 썼다. 김건희 여사 리스크와 대통령실 이전 논란, 이태원 참사 등의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여론은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회복세를 보이고 있다.
최근 4개 여론조사기관 공동 NBS(전국지표조사)에 따르면, 윤석열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은 ‘잘하고 있다’(매우+잘함)라는 긍정적 평가는 34%를 차지했다. ‘잘못하고 있다’(매우+못함)라는 부정적 평가는 56%였다. 특히 60대(52% 대 44%), 70대 이상(61% 대 26%)에서 긍정평가가 부정평가보다 높게 나타나면서 중장년층의 대통령에 대한 긍정적 평가를 확인케 했다.
◇노인 일자리 축소 논란
정부는 2004년부터 ‘노인 일자리 및 사회활동 지원 사업’을 시행, 만 60세 이상 어르신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지난 8월 2023년도 예산안이 공개됐는데, 노인 일자리 수는 올해 84만 5000개보다 2만 3000개 줄은 82만 2000개였다.
그중에서도 정부는 공공형 일자리를 올해 60만 8000개에서 내년 54만 7000개로 6만 1000개로 대폭 축소했다. 공공형 일자리 참여자는 기초연금을 받는 저소득층 노인이 대부분이다. 때문에 정부의 정책은 노인빈곤율 심화 우려를 낳았다.
그러나 정부는 노인 일자리가 축소된 것이 아니라는 견해다. 공공형 일자리는 줄였지만, 민간·사회서비스형 노인 일자리는 3만 8000개 늘려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한다는 입장이다.
◇송해 별세
“전국노래자랑!” 일요일 아침마다 들리던 송해의 힘찬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게 됐다. ‘국민 MC’ 송해가 지난 6월 8일 세상을 떠났다. 향년 95세. 백세 인생의 아이콘이자 살아있는 전설로 통한 송해의 사망은 대한민국에 슬픔을 안겼다.
송해는 1988년부터 34년간 KBS ‘전국노래자랑’의 진행을 맡았다. 국내 최장수 MC를 넘어 지난 4월 ‘최고령 TV 음악 경연 진행자’로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렸다. 송해의 후임으로 김신영이 ‘전국노래자랑’을 진행하고 있다.
올해는 유독 슬픈 소식이 많았다. KBS ‘가족오락관’을 25년간 진행한 또 다른 ‘국민 MC’ 허참과 ‘원조 월드 스타’ 배우 강수연도 세상을 떠났다. 해외의 유명인들도 세상을 떠나 별이 되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은 96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일본의 아베 신조 전 총리는 피살 사건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동산 시장 급락
글로벌 경제 위기 속에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급등하던 부동산이 꺾였다. 올해 들어서만 부동산 가격이 10% 이상 급락했다. 과거 부동산 침체기와 달리 매매·전세 가격이 동반 하락했다. 서울 강남 아파트에 대한 수요마저 줄었다. 한국은행 보고서는 전세 가격 10% 하락 시 4만 가구가, 40% 급락 시 13만 가구가 보증금을 돌려받기 힘들 것으로 분석했다.
정부는 부동산 규제 정책을 마련했다. 8·12%로 설정된 다주택자 대상 취득세 중과세율은 4·6%로 완화한다. 내년 5월까지 한시 유예 중인 양도소득세 중과배제 조치는 일단 1년 연장한 후 근본적인 개편 방안을 찾기로 했다.
◇고독사 증가
한국의 1인 가구가 많아지면서 고독사 문제가 심화하고 있다. 더욱이 고독사 10명 중 5명은 50· 60대의 중년 남성인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4일 보건복지부는 ‘2022년 고독사 실태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2017년부터 2021년까지 5년간 실태를 조사한 것이다. 고독사 사망자는 지난해 3378명으로 2017년 2412명보다 40.0% 증가했다.
노년층보다 50·60대 중장년층 남성의 고독사가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50대가 1001명(29.6%)으로 가장 많았고, 60대가 981건(29.0%)으로 뒤를 이었다. 50·60대 중장년층이 60% 가까이(58.6%) 차지한 셈이다.
보건복지부는 “전체 사망자는 고연령층일수록 많지만 고독사는 50대~60대가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는 특징이 있다”며 “50대 남성은 건강관리와 가사노동에 익숙지 못하며 실직·이혼 등으로 삶의 만족도가 급격히 감소할 수 있는 특징이 있다”고 설명했다.
◇기업들 희망퇴직 시작
금리 인상으로 올해 큰 실적을 거둔 시중 은행들이 희망퇴직을 실시하며 적극적인 감원에 나섰다. 최대 5억 원에 달하는 퇴직금을 조건으로 내걸면서 내년 초까지 약 2000명의 은행원이 짐을 쌀 것으로 예상된다.
그동안 은행은 한 번 들어가면 정년까지 다닌다는 이른바 ‘철밥통’ 직장으로 여겨졌다. 디지털 전환 바람으로 기류가 바뀌었다. 앱 비대면 서비스 이용객이 늘면서 인력 효율화를 노려야 하는 은행의 상황과 핀테크 기업 등 인터넷 은행으로 이직하고 싶어하는 은행원들의 바람이 맞아 떨어진 것으로 풀이된다.
이러한 현상은 은행권에 국한된 것은 아니어서, 2023년에는 많은 기업이 구조조정에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오징어 게임’, 에미상 수상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에서 인정받았다. ‘오징어 게임’은 지난 9월 미국 에미상 시상식에서 감독상(황동혁 감독), 남우주연상(이정재)을 포함해 6관왕을 차지했다. 비영어권 작품이 시상식에 후보로 오른 것도 상을 받은 것도 모두 최초였다.
‘오징어 게임’은 한국 문화의 새 역사를 썼다. 우리의 전통 놀이문화가 외국에서도 통한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K-컬처의 위상이 더욱 드높아졌다.
◇ 이태원 10·29 참사
지난 10월 29일 이태원에서는 악몽 같은 참사가 발생했다. 핼러윈을 즐기기 위한 엄청난 인파가 몰렸지만, 공권력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서 압사 사고가 발생한 것. 총 158명이 사망했고, 196명이 부상을 입었다. 희생자 대부분이 2~30대 젊은이들로, 어린 자녀를 둔 중장년들을 더욱 비통케 만들었다.
10·29 참사는 정부가 이전과는 다른 대응 태도를 보이면서, 영정 없는 분향소, 뒤집힌 근조 리본, 희생자 표현 사용 금지, 마약 부검 등 다양한 논란을 낳기도 했다.
희생자의 이름과 영정이 공개된 합동 분향소는 참사 후 한 달이 넘은 지난 14일에야 차려졌다. 현재는 분향소 설치를 반대하는 일부 보수단체 항의의 대상이 되면서 조롱과 멸시가 도를 넘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누리호 발사 성공
올해 우리나라는 7대 우주 강국으로 우뚝섰다. 지난 6월 21일 한국형 발사체 ‘누리호’(KSLV-Ⅱ)가 발사에 성공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달 탐사선 ‘다누리’도 8월 5일 발사에 성공, 달 궤도에 안착했다.
누리호 프로젝트는 2010년 3월 시작돼 2022년 6월 발사에 성공하기까지 장장 1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총예산 1조 9572억 원이 투입됐다. 누리호의 성공 뒤에는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연구진 250명의 피, 땀, 눈물이 서린 노력이 있었다.
성공의 주역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조기주 항우연 발사체추진기관체계팀장은 “2002년 나로호 사업을 시작으로 항공우주연구원이 되었고, 벌써 20년이 지났다. 나로호, 누리호 발사체 개발을 하면서 연구·개발하는 모든 것이 우리나라 우주 개척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라 생각했고, 그 자긍심으로 지금까지 버텨온 것 같다”면서 감격의 소감을 본지에 전한 바 있다.
◇월드컵 16강 진출
‘2022 월드컵’에 대한 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지친 국민을 위로해줬다. 이번 월드컵은 카타르에서 열려 경기가 늦은 밤 또는 새벽에 진행됐지만 많은 국민은 경기를 시청하면서 대한민국을 응원했다. 이번 월드컵에 대한 열기는 2002년 월드컵에 비교할만하다. 그때의 추억을 안은 중장년층은 특히 열광했다.
국민들의 응원에 힘입어 한국은 12년 만에 월드컵 16강에 진출하는 쾌거를 이뤘다. 축구 강국을 이기고 얻은 성과로 대한민국의 저력을 입증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어느 새 12월, 당신의 생일과 기일이 함께 있는 달이 돌아왔군요. 가는 해와 오는 해가 조우하는 달 12월. 당신은 그렇게 12월 중에 세상을 오고 갔네요. 당신 기억해요? 우리가 처음 만난 때도 12월이었다는 걸. 물론 기억하실 테지요. 만난 지 꼭 1년 되던 해, 그날에 결혼했으니까요. 우린 평범하게 만났지만 애틋한 사랑의 씨줄과 날줄을 엮기 위해 로맨틱한 무언가를 연출하고 만들어내곤 했지요. 처음 만난 날짜에 맞춰 결혼하기로 한 것도 그중 하나였고요. 그러고는 처음 만난 날에 헤어진 것도…. 하지만 그건 로맨틱한 결정이 아니었기에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리고 쓰리네요.
남편의 폭력, 어이없는 감금 불러
“내 동생한테 감히 손찌검을 해요? 당장 헤어지세요. 폭력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앞으로 다시는 만날 생각 말라고요.”
“처형, 집사람에게 손을 댄 건 정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제가 지금 처형댁 문 앞에 있습니다.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제가 무릎 꿇고 빌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용서를 구한 후 다시 잘살아보겠습니다.”
나는 그날 당신이 집에까지 찾아온 것도 몰랐어요. 언니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방에서 훌쩍이느라 문 앞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몰랐던 거죠. 하긴 문자로 주고받았으니 큰 소리는 고사하고 작은 소리도 들렸을 리가 없지요. 난 지금도 그 점이 의아해요. 언니처럼 성질 급하고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라면 냅다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이 문 앞에 당사자를 두고 어떻게 그렇게 차분히 문자 소통을 할 수 있었는지. 하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그 후로도 계속됐지만.
당신한테 한 대 맞고는 속이 상해서 언니 집으로 달려갔지만, 이후 사실상 나는 언니네에 감금당한 꼴이 되었지요. 언니가 집으로 돌려보내 주질 않았으니까요. 난 그때까지만 해도 언니가 나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철없는 나보다 더 나를 염려해서 그런다고만 생각했어요. 왜 안 그랬겠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우리 자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한날한시에 여의고 중 3, 중 1이던 언니와 나는 친척집을 전전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서 둘이 생활하게 되었지요.
친척들의 도움도 언니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였으니, 졸업 후 바로 취업이 되지 않아 전세금을 빼서 보증금을 얼마간 넣고 월세를 살면서 그 돈을 야금야금 생활비로 썼지요. 둘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버텨나갔지만,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던 언니는 아르바이트에 대한 열의를 잃고 그렇다고 마음 다잡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 말하자면 방황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생활에 대한 부담은 내가 다 져야 할 형편이었지요. 하지만 운 좋게도 그런 와중에 나는 대학에 가게 됐고, 졸업하고 취업하던 무렵 당신을 만났던 거예요.
내가 만남 100일 기념 이벤트다 뭐다 하면서 애들마냥 유치하게 굴었던 것도 충분히 받지 못한 부모님 사랑에 대한 굶주림 탓이었다고 봐요. 그걸 당신한테 받으려 했으니 당신도 피곤했을 것 같네요. 하지만 당신은 날 기쁘게 해주려고, 내 기대에 맞춰주려고 나름 최선을 다했어요. 인정합니다.
다만 그날 결혼 후 처음으로 부부 싸움이 격렬했던 날, 당신이 나를 때린 것이 내게는 충격이었어요. 어떻게 날 때릴 수 있는지…. 무엇 때문에 싸웠죠, 우리?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걸 보면 사소한 일이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길로 헤어지게 되었지요.
언니의 시기 동생 부부 갈라놔
“언니, 나 이만 집에 돌아갈래. 그 사람이 걱정돼. 보고 싶기도 하고.”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야? 한 번 때린 사람은 또 때리게 되어 있어. 계속 맞고 살래? 네가 뭐가 모자라서?”
“그 사람이 사과했어. 여기 있는 동안 문자도 오고, 전화도 오고.”
“뭐라고? 이리 내놔 봐.”
그래요, 언니는 분명 과잉, 과민반응을 했던 거예요. 처음에는 나를 걱정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점차 그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무엇보다 부부 문제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아무리 동생이고, 다른 집과는 다른 각별한 자매라 해도.
언니는 결국 대학에 가지 못했어요. 학비 부담 때문이라고 본인은 포기의 이유를 댔지만 그건 핑계고 실은 성적이 안 됐던 탓이었죠. 대학생의 꿈도 멀어지고 다시 취업하기에도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졌던 언니는 그때부터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아요. 그럴 만도 하지요. 부모님을 하루아침에 잃고 동생과 단둘이 남아, 당시엔 자신이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얼마나 컸겠어요. 대학에라도 합격했다면 그나마 우울증은 피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부턴 내가 언니의 보호자로 실질적 가장이 되었지요. 언니는 우울증 치료를 위해 병원을 가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조차 곧 그만두더라고요. 치료비 부담보다 정신과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언니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하냐고요? 언니가 내게 주는 영향은 보통 이상이었기 때문이에요. 정상이 아니었죠. 언니는 내게 시기심을 느끼고 있었던 거예요. 물론 무의식적으로요. 비록 전문대지만 대학도 나왔고, 취업도 바로 되었고, 곧 결혼도 할 나에 비해 본인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여긴 것 같아요. 더구나 당신과 난 간호사로 같은 병원에서 만났고, 함께 장래의 꿈을 키워가는 걸 부러워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언니가 나의 불행을 바랐다는 뜻은 아니에요.
남편의 교통사고, 생일이 기일 되다
“처형이 당신 걱정을 하는 건 당연히 이해하지만 당신이 미성년자도 아니고 너무 간섭이 심한 거 아니야? 도가 지나치잖아. 사과를 하려면 당신을 만날 기회를 줘야 하는데.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사과를 했고 당신도 이미 나를 용서한 마당에 처형이 왜 쌍지팡이를 짚고 나서냐고?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당신이 전화로 했던 말 기억나죠? 결국 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한 당신은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의 심정으로, 일단 언니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시간을 벌겠다는 마음으로 2년 기한의 외국 병원 근무를 택했지요. 그리고 3개월 만에 현지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마침 당신 생일에. 그래서 생일이 기일이 되고 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운명의 남자.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군요.
청천벽력이란 그럴 때 쓰는 말이더군요. 나도 그땐 언니하고 사이가 나빠져서 서로 얼굴도 안 보고 지낼 때였지요. 고집을 피울 걸 피워야지, 당신이 그렇게 떠나니 괜한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막무가내인 언니가 꼴도 보기 싫더라고요.
물론 우리는 그때 얼마든지 다시 만났어도 되는 거였어요. 언니가 우리를 미행할 것도 아니고, 내 다리를 묶어 한쪽 끈을 붙잡고 있을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때 언니의 우울증이 심해져서 혼자 둘 수 없어 당분간 같이 지내게 되었고, 그 점이 당신을 답답하고 화나게 했던 것 같아요. 나까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겼던 거죠. 그 무렵 우리 사이가 서먹해진 것도 사실이었고요.
이래저래 심란하던 차에 바람도 쐴 겸 보수도 더 나은 곳에서 한 2년 일하고 오겠다고 했을 때, 내가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도 어차피 나는 언니 옆에 있어야 해서 였어요. 당신의 손찌검이 빌미가 되어 별거를 원한다는 오해를 당신에게 주고 싶지 않아 당신의 결정을 존중했던 거지요. 그것이 당신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요. 당신이 그렇게 세상을 뜨자 언니는 뒤늦게 자신 탓이라며 자살을 시도했고, 반복되는 자살 시도로 지금도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는 중이랍니다.
남편 떠난 빈자리 채우는 유복녀
당신 그렇게 가고 나는 어떻게 살았냐고요? 나 당신한테 고백할 게 있어요. 당신이 외국으로 떠났을 때 나는 임신한 상태였어요.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말하려고 했지요. 근데 당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요. 그전에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언니 때문이었어요. 가뜩이나 내게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 질투와 시기심에 더 상태가 나빠질까봐 조심스러웠어요. 당신한테만 살짝 말하면 되지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당신은 몰랐지만 언니는 그때 나와 당신의 통화 내용, 주고받은 문자를 다 체크하고 있었어요.
언니는 그때 당신이 나와 아주 헤어져서 떠났다고 믿고 있었거든요.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임신 사실을 바로 말할 수 있었겠어요. 물론 방법을 찾고 있었지요. 언니 몰래 알릴 수 있는 길을. 편지를 쓸 수도 있었고요. 하지만 당신이 너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도저도 소용이 없었던 거지요.
이름은 혜원이에요. 당신과 나를 반반 닮았어요. 당신 떠난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똑똑하고 예쁜 딸이에요. 혜원이는 이담에 커서 아빠, 엄마처럼 간호사가 되고 싶대요. 아, 그리고 나는 공부를 더해 정식 간호사가 되었어요.
이제 또 한 해가 저무네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당신과 결혼하고, 또 당신을 떠나보낸 12월이 이렇게 막을 내리려나 봅니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