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롯한 섬이었다. 세상의 변화로 이제는 더 이상 섬이 아닌 뭍이 되어 자동차로 이어진다. 전북 부안의 계화도를 향해 달리는 새벽길에 정적만 가득하다. 도로 양옆의 들판은 어둠 속에서 박하 향기보다 짙은 기운을 뿜어내고, 새해의 쨍한 새벽 공기는 차창에 서릿발을 만들어낸다. 어스레한 불빛 저편으로 광활한 농경지와 갈대숲이 함께하고 물 빠진 갯벌도 드러난다.
광복 이후 최대의 간척 사업으로 육지가 되었다는 계화도(界火島). 한때 경제개발이 시작되면서 식량 자급을 위한 1호 간척공사로 인접한 부안군 동진면과 방조제로 연결되었다. 바닷가에 둑을 쌓고 고인 물을 빼내니 섬은 곡창지대로 변했다. 농경지 조성이 활기를 띠고 쌀이 생산되면서 전국적인 명성의 계화미(米)를 브랜드화하기도 했다. 계화마을은 여전히 때 묻지 않은 자연환경으로 각종 조류가 서식하고, 겨울철에는 수많은 철새들이 찾아와 겨울을 지내기도 한다. 여전히 계화도라 불리는 섬마을에서 이제는 빼어난 운치의 새해 해맞이를 한다.
계화마을은 여느 시골과 다름없이 소박하다. 들어서자마자 바다를 막은 둑을 따라 길게 늘어선 소나무 행렬이 잔잔한 반영을 이루며 맞는다. 간척지와 마을 사이의 좁고 긴 물길의 계화조류지는 1km에 이르는 방풍림 소나무를 품었다. 언제나 온갖 철새들이 쉬어 가는 곳이다. 검푸른 새벽하늘의 구름과 수면 위로는 물결의 잔상이 신비롭다. 마을을 마주 보는 방죽의 고요함으로 차분해진다.
차츰 주변의 어둠이 옅어지고 이윽고 하늘 저편으로 불그스레한 기운이 번진다. 해 뜨기 직전의 설렘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갑자기 살짝 바람이 불면서 잔잔하던 수면에 파문을 일으킨다. 숨죽이며 정지된 시선은 생동감 있는 자연에 절로 탄성이 터진다. 짧은 순간 고요한 세상을 뒤덮은 매직이다. 단조로운 듯 반듯한 제방 위 소나무 사이를 헤치고 세상을 일깨우는 아침 해의 운치는 계화리 작은 마을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바다 수평선 위에서 솟아오르는 동해의 일출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그렇게 장엄한 해맞이를 하고 새로운 하루가 우리 모두에게 왔다.
눈부신 겨울 서정, 변산해수욕장
해돋이의 위엄으로 얻은 에너지를 장착하고 아침 햇살 반짝이는 해안길을 달린다. 조금 전 일출의 여운을 지닌 채 만난 변산해수욕장은 온 누리가 환하다. 이준익 감독의 영화 ‘변산’에서는 ‘내 고향은 폐항, 내 고향은 가난해서 보여줄 것은 노을밖에 없네’라고 했건만, 하루를 시작하면서부터 일출의 장엄함을 이미 보여주었고, 밀물과 썰물의 변산해수욕장 앞에선 희고 고운 모래가 눈앞에 펼쳐진다. 시리도록 푸른 바다와 하늘을 실컷 볼 수 있는 철 지난 바닷가를 오랫동안 바라보며 두 눈에 꾹꾹 담는다. 송림으로 둘러싸인 백사장과 조화를 이루며 평온하게 휴식의 시간을 안겨주는 여름과는 다른 매력을 풍기는 겨울 바다다.
아득한 전설 속으로, 채석강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물속에 잠겨서 지금에 이르렀다. 파도에 씻기고 기온과 압력의 변화에 따라 형성된 비경을 변산 격포리에 가면 마주 보게 된다. 당나라 시인 이태백이 술을 마시며 놀았다는 중국의 채석강과 흡사하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는 ‘채석강’이다.
자연이 만들어온 억겁의 시간을 이야기할 때 흔히 공룡을 떠올린다. 지질학적으로 공룡 시대보다는 비교적 짧은 약 7000만 년 전부터 형성되어온 채석강의 퇴적암이다. 지금도 암석이 보여주는 신비로운 자연 속으로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는 점이 특별하다. 켜켜이 쌓이고 겹겹이 맞물린 퇴적암 앞에 서면 그동안 자연이 이끌어온 시간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변화무쌍한 파도의 침식을 받으며 쌓아 올린 퇴적암층을 가까이 들여다보면서 문득 아득한 전설 속의 인물이 되는 듯한 느낌이다.
물이 가득 차오른 채석강은 층층의 아찔한 해안 절벽과 먼 바다의 풍경으로 아련하다. 이윽고 물이 빠져나가고 드러난 바닥의 넓은 암반 위로 간간이 파도가 훑다 가기를 끝없이 반복한다. 그 위로 온전히 드러낸 채석강의 비경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이들과 분주히 해식동굴로 향하는 여행자들의 발길이 오간다. 외변산을 대표하는 명승지다. 참고로 격포항 물때를 확인하고 간조 시간 1~2시간 전후로 방문하는 게 좋다.
마음이 새롭게 태어나는 절집, 내소사
능가산내소사(楞伽山來蘇寺) 현판의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 약 600m에 이르는 사철 푸른 전나무 숲길이 사랑받는 내소사. 마치 절 마당에 닿을 때까지 숨을 고르고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도록 마련된 듯한 전나무 숲길이다. 명품 치유의 숲길로도 알려져 있다. 침엽수 특유의 맑고 그윽한 향이 경건함과 마음의 안정을 주는 통과의례의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소사는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려는 듯 하늘을 향해 기세 좋게 쭉쭉 뻗은 전나무 숲길과, 일주문 앞과 천왕문 뒤의 당산나무인 천년의 느티나무를 보는 것만으로도 여행 목적이 되기도 한다. 전나무 숲이 끝나면 벚나무길과 요사채 옆의 보리수와 산수유, 그리고 피안교부터 천왕문 가는 길의 단풍터널이 또한 그렇다. 계절마다 은은하게 자연 속에 푹 잠긴 내소사는 특히 눈 내린 설경 속에 자연과 조화를 이룬 모습이 으뜸이다.
유홍준의 저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는 우리가 보아야 할 곳 중에 내소사를 꼽았다. 자연을 닮은 모습이 조화를 잘 이룬 사찰이라고 했다. 특히 대웅보전의 솟을연꽃살문은 현존하는 사찰의 꽃살문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다. 수백 년을 견뎌낸 나뭇결이 자연 그대로의 색감을 보여주어 눈여겨볼 만하다.
내소사 안에서는 무엇이든 자연스럽다. 절 마당에서 둘러보는 능가산의 산세가 낯선 느낌 없이 편안하다. 무채색의 사찰 색감이 고고하고 정갈하다. 도회인들에게 주는 한적함으로 유달리 힐링을 얻는다. 복잡한 세상에서 수습되지 못한 마음이 새로워지는 기분이다. ‘이곳에 오면 새롭게 태어난다’는 절 이름(來蘇) 때문인지 새해 들어 찾아가 보기에 걸맞은 절집이다.
곰소염전의 겨울
염전의 소금 작업이 이루어지는 시기는 봄부터 가을까지다. 변산반도를 돌아보면서 철이 지났다고 곰소염전을 안 보고 갈 수는 없다. 요즘 후쿠시마 원전 방류 문제로 소금 이야기가 분분한데, 천혜의 땅에서 소금을 만들어내는 곰소염전은 겨울이 되어 쉬는 중이다. 한때 전통 소금을 가장 많이 생산하고 궁(宮)에 진상까지 했다는 곰소염전이다. 지금은 퇴락하여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품질은 최상으로 평가받는다. 군데군데 염부들이 염전을 손질하고 정리하는 모습이 보이고, 건너편 산이 염전 속으로 들어와 반영을 이룬다. 부근의 곰소항으로 가면 곰소젓갈단지에서 질 좋은 젓갈을 구입하고, 감칠맛 나는 젓갈정식을 맛볼 수 있다.
자연의 집, 변산반도 생태탐방원에서 머물다
채석강에서 자동차로 5분 남짓 거리에 위치한 변산반도 생태탐방원은 국립공원공단의 체류형 생태관광 시설이다. 숙소 창밖으로 서해의 해변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호젓한 자연 속 숙소에서 파도치는 바다가 보이고, 노을이나 별을 볼 수도 있다. 2023년 7월에 개원해서 내부 시설이나 집기 등이 깔끔하고, 저렴한 이용료까지 금상첨화다. 숙소를 보유한 본관 건물과 언덕 위 자연의 집이라는 독채 객실의 풍광이나 환경 또한 수준급이다. ‘숲나들e’에서 예약하는 전국 자연휴양림과는 달리 이곳은 국립공원 생태탐방원 홈페이지에서 매월 1일 예약이 시작된다. 생태 프로그램을 필수로 예약해야만 객실 예약이 가능하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서울시 보람일자리 사업을 통해 인생의 재도약을 꿈꾸는 4050 세대를 응원하기 위해, ‘모두 위한 내 꿈, 다시 뛰는 4050’ 캠페인을 펼칩니다. 본지는 서울시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함께한 보람일자리 사업을 통해 사회 곳곳에서 공공에 기여하고 있는 중장년들을 소개합니다.
“A 학생이 지난 학기보다 조금 더 산만해졌어요. 아이의 관심 영역이 확대됐네요.” 보람일자리 참여자는 ‘산만하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특수교사라는 일이 한 아이의 중요한 발달 과정을 함께하는 여정이라는 걸 다시 곱씹게 됐단다. 성내중학교 특수학급 권오성 교사의 이야기다.
특수체육교육을 전공하던 당시 장애 학생들과 체육 프로그램을 하면서 특수교사가 되어야겠다 마음먹은 권오성 교사. 2022년 성내중학교에 첫 발령을 받아 신규 교사로 한 걸음을 뗐다. 막막했던 학교 생활이지만 보람일자리 참여자를 만나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이 더 넓어지는 경험을 했다.
특수학급 아이들의 자신감을 높이다
날씨는 쌀쌀하지만 햇살은 따사로웠던 날, 성내중학교 특수학급을 방문했다. 리모델링을 한 지 얼마 안 돼 넓고 쾌적한 공간이었다. 한쪽에는 다양한 스포츠 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권오성 교사는 이곳에서 7명의 아이들과 생활하고 있다. 교내에 특수교사는 한 명이기 때문에 2022년 첫 발령을 받고 학교에 왔을 때 막막함을 느꼈다. 학교의 행정 업무는 학교 선생님들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학급 운영에 대해서는 동료 특수교사 선후배들에게 하나하나 물어가며 해결했다.
“현장에서 하나씩 배워나가는 게 중요했어요. 사례를 공유하는 연수에 최대한 참여하고, 특수교사를 하는 학교 후배들과 한 달에 한 번 사례를 나누는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해는 보람일자리로 오신 참여자 선생님께도 많이 배웠어요.”
성내중학교는 특수학교가 아니기 때문에 장애 학생과 비장애 학생이 관계를 맺으며 생활한다. 특수학급에 오는 학생들은 평소 다른 아이들과 함께 학급에서 수업을 받다가 국어쪾영어쪾수학 시간에는 특수학급으로 이동해서 권 교사와 수업을 한다. 권 교사는 특수체육을 전공한 점을 살려 다양한 운동발달 수업을 하고 있다.
“신체를 활용한 스포츠를 하면 아이들 정서에 좋고, 자신감을 높여줘요. 자신감 있게 생활하다 보면 학업에도 좋은 영향을 줍니다. 저희 학생들이 실질적인 학급 구성원으로 인식하고 소속감과 책임감을 느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보람일자리 참여자 선생님도 아이들과 가벼운 활동을 하며 함께 놀아주세요.”
지난해 ‘학습도움반’이라는 특수학급 이름을 ‘개별학습실’로 바꿨다. ‘도움’을 받는다는 인상이 특수학급 아이들을 수동적으로 만든다는 판단에서다. 아이들의 학교 적응과 성장을 위해 고려해야 할 점도 많고, 실천해야 할 것들이 많은 상황이었다. 신규 교사로 하나씩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보람일자리 참여자를 만나 함께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었던 건 그에게 ‘큰 행운’이었단다.
아이들의 성장을 바라보는 관점
권오성 교사는 보람일자리 참여자와 함께 일하면서 가장 크게 달라진 점으로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꼽았다. 장애 아이들이 자라는 과정에서 보이는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성장하고 있구나’라고 표현하는 법을 배웠다.
“참여자 선생님이 영국에서 테솔 석사 과정을 마치고 국내에서 교육용 교재 제작 등 다양한 교육 관련 경력을 갖고 계셨어요. 경험으로 다져진 혜안을 바탕으로 단순히 수업 보조만 해주신 게 아니라 아이들 개별 특성까지 엑셀 파일에 꼼꼼히 기록하고 저에게 공유해주셨어요. 어느 날은 한 학생이 1학기보다 산만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냥 문제라고 인식하는 게 아니라 ‘이 아이의 관심 영역이 확대됐다’고 표현하시더라고요. 어떤 아이의 변화가 있을 때 관찰하고 각 아이의 성향에 맞는 수업 아이디어도 제안해주셨죠.”
특수학급 교실 칠판 앞자리에는 참여자의 업무 공간이 있다.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수요일 수업을 마치면 참여자는 자리에서 아이마다 관찰한 일지를 꼼꼼하게 적는다. 그리고 출근한 날 아침 30분씩 해당 내용을 권 교사에게 공유했다.
“아이의 성향을 관찰한 내용에 따라서 제가 어떻게 지도하면 좋을지 조언도 많이 해주셨어요. 예를 들어 한 아이는 동화책으로 배우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겠다면서 동화책을 가져오시기도 했어요. 굉장히 조심스럽게 여러 아이디어를 공유해주셨죠. 참여자 선생님이 일주일에 두 번 나오시는 덕에 저도 수업 시간표를 좀 더 리듬 있게 구성할 수 있었고요.”
교육 과정이 정해진 다른 학급과 달리 특수학급은 개별 맞춤형 수업이 필요하다. 혼자 고민하다 보면 아무래도 한계에 부딪힐 때가 많았는데, 참여자의 꼼꼼한 피드백 덕에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반영하고 수업을 더 풍부하게 할 수 있었단다. 또 혼자였다면 채우지 못했을 영역을 참여자가 연륜으로 보완해주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도 참여자에게 친근감을 가지고 편안함을 느낀다고 했다.
“꼭 교육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따뜻한 마음으로 아이들을 진심으로 돌봐주신다면 아이들에게 도움이 됩니다. 아주 작은 변화라도 교사로서 알아차리는 게 굉장히 중요한데, 섬세한 관찰과 기록이 아이들 성장에도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앞으로도 보람일자리 참여자 선생님과 함께 아이들의 학교 생활을 돕고 싶습니다.”
일본, 세계 최초 고령화사회로 진입한 나라. 100세 이상 노인이 9만 2000명에 달하며, 최고령자 나이는 남자 111세, 여자 115세에 이른다. 인구 10명 중 1명이 80세 이상이다. 일본인들이 65세 정년 이후 어떻게 살아가는지, 이들의 삶을 직접 알아보기 위해 현장을 찾아가서 이야기를 나눴다.
일본은 우리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이웃이지만, 고령화를 먼저 겪어본 선배이기도 합니다. 아직 우리 주변엔 은퇴 후의 삶을 휴식으로만 보내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나이 들어서도 보람 있고 알차게 살아가는 일본 노인들의 삶을 신미화 교수와 함께 들여다봅니다. -편집자 주-
이 글은 70대와 80대 할머니들이 함께 작은 피자 가게를 운영하며 얻는 행복과 소중한 순간을 담은 이야기다. 이들은 작은 가게에서 끊임없이 웃으면서 함께 일하고, 서로를 위로하며 행복을 찾는다. 어떤 목표나 성취보다는 서로의 존재와 관계 속에서 소중한 순간을 찾아가며 행복을 느낀다. 이번 취재를 통해 노년에 친구들과 함께하는 순간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생각해보게 됐다.
시작은 지역 봉사활동으로부터
구름 한 점 없는 7월의 태양은 뜨거웠다. 도쿄에서 전철을 3번 갈아탄 후 다시 택시를 타고 3시간 만에 도착한 곳에는 한적한 들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한쪽 길가에 아담한 가게가 보였다. 간판에는 ‘바바(할머니)피자’라고 적혀있었다.
바바피자는 이름 그대로 73세부터 86세까지 할머니들이 운영하는 피자 전문점이다. 피자 가게 앞 넓은 밭 이름도 BaBa(ばぁば)밭이다. 할머니들이 채소를 직접 재배하고, 그 채소를 피자에 토핑으로 올린다.
2019년 6월 오픈한 바바피자는 매주 금·토·일요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3시까지만 문을 연다. 할머니들은 오전 9시부터 개점 준비로 분주하다. 밭에서 직접 거둔 신선한 재료를 쓰고 인근 항구에서 잡히는 정어리와 대합을 넣어 만든 순수한 맛의 피자. 건강하고 활기찬 할머니 여섯 명(토키·86, 쿄오코·85, 미에코·77, 마츠에·75, 타카코·73, 야스에·73)이 운영하는 곳으로, 매스컴에 알려져 지금은 전국에서 손님들이 방문하는 인기 있는 가게다.
지바현의 한적한 시골 마을인 산무시. 바바피자의 시작은 85세인 쿄오코 씨와 86세인 토키 씨가 50여 년 전에 지역 봉사단체인 부인회에서 만나 아는 사이가 되고부터다.
“남편을 병으로 먼저 떠나보내고 큰아들까지 교통사고로 하늘나라로 보냈죠. 혼자 살고 있던 제가 지주막하출혈로 쓰러졌을 때 가장 가까운 곳에 사는 마츠에 씨가 구급차를 불러주었고 함께 병원으로 가주었어요. 그때 위로해준 사람들이 여기 있는 다섯 명이랍니다”라며 미소 짓는 쿄오코 씨.
2년간 무보수였지만 그만두지 않았다
쿄오코 씨가 건강을 회복하기 위해 그라운드 골프를 시작했고, 마침 골프장에 설치돼 있던 화덕에 피자를 구워 할머니·할아버지들에게 무료로 나누어줬더니 호평이었다. 부인회에서 오랫동안 봉사활동을 함께해온 여섯 명이 모여 가까운 구주쿠리 항구에서 잡은 신선한 대합과 정어리, 산무시 특산물인 파와 양파를 넣어 피자를 만들어 팔자고 의견을 모았다.
쿄오코 씨는 우연히 산무시가 관리하는 집 한 채가 비어 있다는 걸 알았다. 마침 수도 시설도 화장실도 있어서 바로 신청해 무상으로 빌렸다. 워낙 오랜 세월 지역을 위해 봉사활동을 많이 한 할머니들이라 공무원들이 쉽게 승낙해주었다.
하지만 개점 초기 피자 반죽이 잘 늘어나지 않아 고민이 많았다. 가장 젊은 타카코 씨가 고생했던 시절의 이야기를 꺼냈다.
“처음에는 반죽을 둥근 나무봉으로 얇게 밀어도 좀처럼 둥그렇게 되지 않고, 반죽도 찢어져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우연히 TV를 보니 피자 세계 챔피언 대회가 열리고 있었어요. 거기에서 반죽에다 가루를 대량으로 뿌리는 걸 보고 그걸 흉내내니까 잘 만들어졌죠.”
여섯 명이 모이니까 아이디어가 자꾸 나오더라며 말이 끊어질 새 없이 이어졌다.
“이 일을 시작하고 나서 우리 중에 병이 난 사람은 한 명도 없어요. 각자 역할이 나누어져 있어서 쉴 수가 없어요. 우리 중에 제일 건강한 사람은 최고령자인 토키 씨예요.” 이야기를 듣던 야스에 씨가 처음으로 참견하며 말을 보탰다.
“토키 씨는 병원에서 청소하는 일을 매주 이틀씩 하고 있는데, 여기서 약을 먹지 않는 사람은 토키 씨뿐이에요. 우리 젊은 사람들은 혈압약이라든지 한 가지씩은 먹거든요.” 타카코 씨가 덧붙였다.
이들이 선택한 색다른 ‘창업’
“창업 자금은 어떻게 마련하셨죠?” 필자의 전공이 경영학이라 이 질문을 꼭 하고 싶었다.
“제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물었어요. ‘당신은 얼마 낼 수 있죠?’라고 물었고, 각자 낼 수 있는 형편대로 20만 엔, 30만 엔 씩 내서 150만 엔(약 1350만 원)을 모았어요.” 쿄오코 씨가 대답했다.
“그러면 불공평하지 않나요?”
“우린 50년 이상 함께 봉사활동을 하면서 사귄 사람들이라 각자 사정을 다 알아요. 저 집에는 올해 손자가 대학에 입학하니까 축하금이 들어갔다든지, 남편이 입원해서 돈을 써 버리고 없을 거라든지….”
출자금은 150만 엔이었고, 점포 인테리어는 가능하면 돈을 들이지 않기 위해 건설 현장에서 남은 목재를 받아와 만들었다.
“장사를 하려면 손해 보는 건 절대로 해서는 안 되죠. 꼭 이익을 남겨야 하는 게 저의 방침이에요.” 쿄오코 씨가 함박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처음 오픈했을 때는 매출이 오르지 않았고, 이듬해 코로나19가 시작되어 6개월 동안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2년간 보수가 없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만두자고 하지 않았다. 그 후 우연히 지방신문에 소개되어 여섯 명의 할머니가 피자집을 운영한다는 게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후에는 손님이 조금씩 늘어나면서 이익금을 모아 각자 출자한 금액을 모두 돌려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수익이 어느 정도 되나요?”
“1시간에 900엔(약 8100원) 정도.”
“하루 6시간, 금·토•일요일 계산하면 한달에 6만 5000엔 정도네요.”
“요즘 재료비도 오르고 공과금도 올라서 빠듯해요.”
“우린 다들 월•화•수요일 중에 이틀은 다른 아르바이트를 해요. 그러니까 모두들 연금을 받고 있지만, 연금은 쓰지 않고 그대로 저축해도 충분히 생활은 돼요.” 조용히 듣고 있던 미에코 씨가 말했다. 지금 목표는 가능한 한 가게를 오랫동안 운영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에 있는 70대들에게는 80대인 쿄오코 씨와 토키 씨가 목표랍니다. 저희의 롤모델이죠. 그러니까 두 분이 100세까지 일해주셔야 해요. 하하하.” 타카코 씨가 힘주어 말했다.
피자의 마지막 토핑은 ‘웃음’
“제가 오늘 아침 나오면서 남편한테 할머니 여섯 분이 경영하는 바바피자에 취재하러 간다고 하니까, ‘빨리 한국에 할아버지 여섯 명을 모아서 지지(할아버지)파스타를 만들어야겠네’라고 하더라고요.”
“어머머 너무 좋아요! 하하하.”
“이 참에 한일 간 바바와 지지 교류회를 갖는 건 어떨까요?”
“대찬성이에요.”
“선도 보면 어떨까요?”라고 짓궂게 질문을 던져보았다.
“당장 우리 바바부터 한국으로 갈게요. 우리에겐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 아시죠?”
와~ 하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들은 끊임없이 웃는다. 손님과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도 웃고, 주방에서 누군가 실수해도 웃는다. 돌이 굴러가도 깔깔거리는 소녀 같은 웃음을 피자의 마지막 토핑으로 선사한다.
가게에 테이블은 세 개지만 가까운 해수욕장에 들렀다가 오는 포장 손님이 끊임없이 들어와 오후 3시 문을 닫을 때까지 바빴다. 조금 한가한 틈을 찾아 정어리 피자와 대합 피자를 시켜서 먹었는데, 지금까지 먹어보지 못한 순수한 맛이었다. 할머니들이 직접 재배한 양파와 파는 바닷물이 섞인 토양에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아서 그런지 그렇게 달콤할 수가 없었다.
작은 일을 통해 얻는 행복감
“언제가 가장 행복하던가요?”라고 여섯 명에게 질문을 던졌다.
“지금! 지금! 지금! 지금! 지금! 지금!”
모두가 동시에 같은 대답을 하면서 웃음을 터뜨렸다.
“왜죠?”라고 질문하니, 각자 한마디씩 거든다.
“우리는 지금이 가장 행복해요. 즐겁게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잖아요.”
“3시가 되면 가게 문을 닫잖아요? 그때부터 차를 마시면서 반성회를 가져요. ‘오늘 피자에 넣은 정어리는 조금 짠 것 같아. 다음번에는 소금을 적게 넣어야겠어’, ‘오늘 너무 바빠서 포장 손님이 나가실 때 서비스로 드리는 가지하고 피망을 챙겨드리지 못했는데, 다음번에는 좀 더 신경 써야겠어’라고요.”
“무엇보다 여기 오면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너무 행복한 것 같아요.”
“다른 날은 각자 다른 곳에서 일하지만 빨리 금요일이 오길 기다려요.”
할머니들이 작은 일을 통해 하루하루 얻는 행복감. 이 행복은 젊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돈, 명예, 권력, 성공, 성취감, 목표 달성 같은 것이 기준이 아니다. 그런 것들은 찰나에 그치는 일과성에 불과하다.
할머니들이 찾은 행복은 여섯 명의 관계 속에서 켜켜이 쌓여가는 것이 아닐까? 매주 모여 함께 일하고 담소 나누면서, 때로는 고통도 공유하고 우정을 쌓아가면서, 달성해야 할 목표도 없이 오로지 자기들만의 행복한 낙원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닐까?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노년에도 친구와 함께 행복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으로 독자 여러분에게 이 말을 전하고 싶다.
“언제 한번 그들의 피자집을 찾아가 보지 않겠어요?”
글쓰기는 중장년이 늘 품고 사는 꿈입니다. 지나온 삶을 정리하거나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위해 글쓰기를 꿈꾸지만, 늘 어렵기만 합니다. 그래서 독자 여러분을 위해 새로운 선생님을 모셨습니다. ‘글라잡이’ 강원국 작가와 함께 다시 펜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편집자 주-
내 나이 쉰한 살에 직장을 나왔다. 건강 문제도 있었기에 쉴 요량이었다. 아내가 월 200만 원은 벌어와야 한다고 했다. 그깟 200만 원쯤이야. 그런데 막상 할 일이 마땅치 않았다. 내겐 세 가지가 없었다. 우선 운전면허 말고는 어떤 자격증도 없었다. 아, 2급 정교사 자격증이 있지만 무용지물. 뭘 고치거나 만들 수 있는 기술도, 손재주도 없었다. 여기에다 무슨 학위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농사를 짓거나 장사할 수 있는 깜냥도 못 됐다. 그야말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나의 일상 루틴 7단계
지금 내 나이 예순한 살. 그새 10년이 훌쩍 지났다. 나는 글 쓰고 말하는 일로 먹고살았다. 나의 일상은 단순하다. 1단계로 지식이나 정보, 경험, 관계를 ‘수집’한다. 그러기 위해 책을 읽고, 온라인 강의를 듣고, 사람들을 만난다. 강의하고 글 쓰는 것도 내겐 일인 동시에 무언가를 수집하는 행위다. 강의를 준비하면서, 또 글을 쓰면서 새로운 게 입력된다. 그래서인지 나는 강의하러 집을 나설 때 직장 다닐 때처럼 발걸음이 무겁지 않다. 외려 약간의 설렘마저 느껴진다. 오늘은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얻게 될지, 또 어떤 자극을 받고 무슨 경험을 할지 기대된다.
2단계는 모은 것들을 재료로 하는 ‘숙고’다. 하루 세 번, 그러니까 아침에 반신욕할 때, 저녁 먹고 산책하면서, 그리고 잠들기 전에 생각한다. 읽은 것을 복기해보기도 하고, 들은 내용을 곱씹어보기도 한다. 내일 할 일을 떠올려보며 강의는 어떤 내용으로 할지, 써야 할 글은 무슨 내용으로 채울지, 사람을 만나서는 무슨 얘기를 할지 궁리해본다. 나는 평화롭고 안온한 이 시간이 좋다. 무엇보다 이 시간은 수집한 것들을 내 것으로 만드는 시간이다. 책에서 읽거나 강의에서 들은 내용은 온전한 내 것이 아니다. 아직 요리하지 않은 날것의 재료일 뿐이다. 혼자 생각하는 시간을 거쳐야만 비로소 내 것이 된다.
3단계는 ‘메모’다. 메모는 ‘수집’ 과정에서 이뤄지기도 하고, ‘숙고’를 통해서도 나온다. 책에서 한 꼭지 글을 읽으면 다음 꼭지로 넘어가기 전에 반드시 메모할 거리를 챙긴다. 다른 사람의 블로그나 페이스북에서 글을 읽어도, 포털사이트에서 칼럼을 접해도, 유튜브에서 짧은 강의를 들어도 기어이 메모거리를 찾아내고야 만다. 낚지 못하면 재차 읽거나 다시 돌려본다. 나의 뇌는 메모거리 찾기에 혈안이 돼 있다.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누군가와 대화할 때 호시탐탐 찾는다. 메모거리가 잡혔을 때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가끔은 메모가 메모를 낳고 메모가 메모를 불러온다. 수지맞는 기분이다.
4단계는 ‘스몰토킹’이다. 메모한 것을 누군가에게 써먹는다. 나는 주로 아내에게 말해본다. 책에서 읽거나 강의에서 들은 내용, 혼자 생각하다 떠오른 기억, 특정 주제나 사안에 대한 내 생각과 느낌 등을 말해본다. 이렇게 말해보는 것은 중요하다. 말해봐야 내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 알 수 있고, 또 말하면서 그것들에 살이 붙고 정리가 된다. 무엇보다 말해보면 반응을 알 수 있다. 상대방이 어떤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어떤 말은 시원찮아 하는지 말하면서 알 수 있다. 직장에 다니지 않으면서 만들어진 아내라는 말동무는 천군만마 같은 존재다.
5단계는 ‘짧은 글쓰기’다. 말해봐서 반응이 괜찮은 것, 내가 봐도 말이 될 성싶은 것은 내 홈페이지, 네이버 블로그,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트위터, 티스토리, 카카오톡채널, 스레드 등에 짧게 쓴다. 나는 그런 글을 지난 10년 동안 2만 개 가까이 써왔다.
6단계는 ‘말하기’다. 나는 이렇게 만들어진 짧은 글들을 연결하고 조합해 강의하고 방송을 한다. 돈 받는 말하기를 하는 것이다. 2만 개 가까운 말 조각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아무것도 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또 그렇게 말하는 시간이 긴장감 있고 재미도 있다.
마지막 7단계는 바로 ‘글쓰기’다. 앞서 말했듯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고 말할 수 있으므로 이걸 가지고 글을 쓸 수도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나는 아무것도 찾아보지 않는다. 말할 수 있으면 쓸 수 있다. 한글을 모르지 않고서야 쓰지 못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글을 쓰는 데는 돈이 들어가지 않는다. 시간만 들이면 된다. 나는 쉰한 살 이후 시간이 많다. 직장 다닐 적에는 말을 잘 들으면 월급이 나왔다. 시키는 일을 잘 듣고 처리하면 됐다. 하지만 직장을 떠나고 보니 시키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잘 듣는다고 돈을 주지도 않는다. 듣기가 아니라 말하고 써야 돈을 준다.
누구나 언젠가는 직장을 떠난다. 직장을 나와서도 돈을 벌어야 하는 사람에게 글쓰기는 직장 다닐 때보다 더 절실한 과업이다. 글쓰기는 정신 건강을 지키는 데도 도움이 된다. 앞으로 대다수가 백세 장수를 누리게 될 것이다. 문제는 나이와 함께 필연적으로 찾아올 수밖에 없는 뇌의 손상이다. 이를 예방하고 늦추는 데도 글쓰기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다.
인생 2막에 필요한 세 가지
직장을 나와보니 세 가지가 절실하다. 그것은 바로 콘텐츠와 스토리, 그리고 캐릭터다. 직장에 다닐 적엔 소속과 직함으로 모든 게 해결됐다. 그래서 보다 나은 ‘어디’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했고, 들어간 ‘어디’에서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소속과 직함은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줄 뿐 아니라, 인정과 대접도 부여해줬다. 하지만 직장을 나오면 명함도, 계급장도 없다. 온전히 나란 존재 자체로 내 가치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우선 ‘누구’ 하면 떠오르는 콘텐츠가 필요하다. 나는 그걸 ‘글쓰기’로 잡았다. 나의 정체성은 ‘글쓰기에 관해 말하고 쓰는 사람’이다. 이를 위해 관련된 대부분의 책을 찾아 읽고, 유튜브 강의를 들었다. 이런 생활을 시작하고 5년 동안은 글쓰기만 생각하고 글쓰기에 꽂혀 살았다. 또한 글쓰기에 관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등에 무수히 많은 글을 썼다. 이 테마가 지루해지고 할 말이 소진될 즈음 ‘말하기’란 주제를 집어 들었고, 지금은 ‘공부’를 주요 테마로 삼고 있다. 앞으로 ‘인간관계’도 다뤄볼 계획이다.
하지만 콘텐츠만으로는 돈이 되지 않는다. 인터넷 공간에 공짜 콘텐츠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게다가 매우 깊이 있는 콘텐츠가 아니면 재미있기가 어렵다. 그래서 스토리가 필요하다. 스토리가 들어가야 콘텐츠가 재밌어진다. 더욱이 콘텐츠에 자기 스토리를 입혀야 자기만의 콘텐츠가 되고, 그런 콘텐츠여야 사람들이 돈을 지불하고 산다. 그 사람의 스토리가 입혀진 콘텐츠는 그 사람에게서만 들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래서 스토리텔링이 한때 유행을 타고 스토리텔러가 각광받았다.
사람들은 이제 점점 더 감성을 추구하고 있다. 카페를 고를 때 커피 맛과 가격, 위치 등을 따지던 시절을 지나, 사람들은 언젠가부터 ‘어느 카페에 누가 다녀갔대’, ‘누가 하는 카페래’ 하며 이야기를 좇아 카페를 찾았고, 이제는 이야기는 물론 ‘감성’을 자극하는 카페에 사람들이 몰린다. 마음에 들면 아무리 먼 데 있어도 가격 불문하고 찾아간다. 그저 예쁘고 좋다는 게 찾는 이유의 전부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특정 인물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팬덤 문화가 점차 확산되고 있다. 과거 연예인의 전유물이던 팬클럽이 정치인을 넘어 일반인으로까지 전이되고 있다. 출판 시장만 보더라도 저자를 보고 책을 구매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다. 이전에는 내용에 끌리거나 자신이 그런 부류를 좋아해서 책을 구매하는 사람이 대다수였다면, 이젠 특정 저자의 책은 무조건 구매한다는 사람들에 의해 출판 시장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런 팬덤을 거느리는 저자들은 더 이상 콘텐츠나 스토리를 파는 사람이 아니다. 자기 캐릭터를 팔고 있다.
‘메신저가 되라’, ‘백만장자 메신저’의 저자 브렌든 버처드는 말과 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세 부류로 나눴다. 자신이 공부한 결과를 팔고 사는 ‘학습기반형 메신저’, 자기 경험과 이야기를 파는 ‘성과기반형 메신저’, 자신의 삶 자체가 메시지인 ‘롤모델형 메신저’가 그것이다. 바로 ‘롤모델형 메신저’가 자기 캐릭터를 파는 사람이다.
결국은 글쓰기다. 자신에게 콘텐츠와 스토리가 있고, 자기가 어떤 캐릭터인지 무엇으로 보여줄 수 있는가? 바로 글이다. 글을 써야 한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내가 만약 직장생활로 돌아간다면 콘텐츠와 스토리, 캐릭터를 장착하는 준비와 노력을 충실히 할 것이다. 그러면 직장생활도 더 활기차고 열성적으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노년의 목표는 유유자적
노년의 목표는 여유로운 삶이다.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여유 있는 일상을 꾸리고 싶다. 그러기 위해선 지속적으로 글을 써야 한다. 글쓰기로 크든 작든 돈을 벌어야 한다. 글쓰기는 또한 나를 정신적으로 강건하게 한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상처받은 나를 치유해줄 뿐 아니라 매일매일 심기일전하게 한다. 글을 쓰면서 나는 감정의 찌꺼기를 걷어내고 새로운 각오와 희망의 불을 지핀다. 나아가 글쓰기는 자신의 경험이나 지식을 공유하는 일이다. 남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고 내어주는 여유가 있어야 가능하다.
10년 전, 지금 하는 일을 처음 시작할 때 선배에게 ‘지식자작농’으로 사는 게 어떠냐는 얘기를 들었다. 지식 농사지으면서 살라는 얘기였다. 선배는 그러기 위해 우선 책부터 쓰고 온라인 공간에서 자기 영토를 넓혀가라고 주문했다. 10년간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내 땅을 일구고 넓혀왔다. 그리고 2만 개 가까운 글로 그 땅을 가꿔왔고, 10권의 책이라는 열매를 맺었다. 이제 수확하는 기쁨을 넘어, 거둔 과실을 나누는 즐거움을 맛보고 싶다. 그게 바로 노년의 여유 있는 삶이 아닐까 싶다.
새해에 야심 차게 세운 계획이 작심삼일(作心三日)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한민국 1호 기록학자 김익한 명지대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를 만나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한 ‘기록법’을 물어봤다. 그의 조언에 따라 새해에는 ‘기록력’을 길러보자.
“쉬면서 남은 삶을 보내고 싶은 5060이라면, 이 인터뷰는 보지 마세요.”
2024년 새로운 계획을 세우고 지킬 방법을 알려달라고 하자 김 교수는 대뜸 이렇게 말했다. “은퇴 후의 삶이 내 인생의 시작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기록형 인간으로 자신을 바꿔갈 수 없습니다. 처음으로 내가 원하는 인생을 자유롭게 살 엄청난 기회가 왔구나 생각하는 분만 기록할 수 있어요.”
새로운 공부를 하거나, 기록을 습관으로 만들거나, 무엇을 하든 간에 자신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바람이 순수 역동으로 발현되어야 습관을 만들 수 있다는 뜻이다. 김익한 교수는 2024년에 실천해볼 네 가지 방법을 추천하면서 두 가지를 당부했다. 첫째, 꿈을 꿀 것. 둘째, 자신을 완전히 믿을 것.
“그동안 회사에서 열심히 노동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는 일은 아니었던 사람이 100명 중 99명은 될 거예요. 놀랍게도 50대 중반이 넘어가면 많은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진정으로 내가 원하는 삶의 목표가 생기면 간절해지고, 원하는 걸 조금씩 얻어내면 무척 기쁠 겁니다. 자기다운 꿈을 설정하고 나아가는 것에 기쁨을 느낌과 동시에 ‘나는 완전체’라는 명확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다움을 탐구하고 꿈을 찾아서 인생의 목표가 생겼다면, 그것을 이루기 위해 실행해야겠죠. 기록은 자유로운 삶을 위한 ‘무기’이자 ‘도구’가 되어줄 거예요. 2024년에는 기록형 인간이 되어 전략과 능력을 키우고, 남은 30년간 하기만 하면 되는 자유로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응원합니다.”
◇김익한 교수가 추천하는 2024년 5060이 꼭 해야 할 기록법
1. 인생지도 그리기
‘2024년에는 기록을 시작해서 꿈을 찾아보겠다’는 목표를 꼭 세우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나이가 60세여도 앞으로 최소 20년은 청년처럼 살 텐데, 2년 동안 기록을 무기삼아 꿈을 찾아낸다면 남는 장사 아닐까요?
인생지도를 그려보시고, 버킷리스트 9가지를 분기별로 적어보세요. 처음 인생지도를 그릴 때는 꿈을 대략 적어보세요. 관계, 일, 가족, 놀이·쉼, 자기계발 다섯 영역에서 꿈과 관련해 지난달에 했던 걸 2~3개 쓰고 이번 달에 하고 싶은 것을 2~3개만 써보는 겁니다. 꿈과 관련해 하고 싶은 것을 적는 게 핵심입니다. 매월 반복하면 점차 꿈이 구체화됩니다.
버킷리스트는 ‘이것을 하고 죽으면 후회하지 않을 것’입니다. 매일 20분씩 버킷리스트에 대해 생각하고 분기별로 정리해보세요. 반복해서 생각하고, 지우고, 또 쓰는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을 보게 되고, 꿈이 구체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냥 한번 해볼까?’는 버킷리스트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세요.
여러분은 지금 이 시점이 가장 똑똑할 때입니다. 경험, 지식, 철학이 가득 쌓여있으니까요. 이것을 반드시 자각하고 자존감을 세우세요. 허세 부리지 말고, 솔직하게 나 자신을 수용하고 노력해보면 완전히 새로운 걸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겁니다.
2. ‘순간의 생각’ 메모 독서하기
인생지도와 버킷리스트를 그렸다면, 내가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걸 느껴야 확신이 들고 기록도 이어갈 수 있겠죠? 내가 생각할 때 정말 쉬운 책 한 권을 메모 독서법으로 읽어보세요. 먼저 도서관에 가서 내가 원하는 키워드로 검색을 합니다. 예를 들어 ‘습관’을 검색하고 나오는 책 중 아무거나 한 권을 찾아보세요. 분류번호를 찾아 서가에 가면 그 칸에 습관과 관련된 책들이 있을 거예요. 이 중 다섯 권을 골라서 대략 훑어봅니다. 다섯 권 중 가장 쉬운 책 하나를 골라보세요. 괜찮다 싶으면 구매하세요. 5060세대는 큰 글씨 책을 사서 보는 것도 좋습니다.
가장 중요한 점은 ‘순간의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페이지를 읽고 고개를 들어 기억나는 내용을 생각하세요. 10페이지를 읽었다면 5개의 생각이 들었을 겁니다. 순서대로 메모해보세요. 기억이 안 나면 다시 그 페이지로 돌아갑니다. 생각과 메모를 마쳤다면 장별로 5줄만 써보세요. 총 6장으로 구성된 책이라면 30줄을 써야겠죠. 쉬운 책을 골라 딱 3권만 이렇게 읽어보세요.
중요한 것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가 책을 읽고 떠올린 생각을 적는 것입니다. 독서에는 답이 없습니다. 모두가 다른 생각을 적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렇게 해보면 책에 대한 나의 해석이 점점 마음에 들면서, 나의 능력치가 가장 높은 때라는 것을 실제로 조금씩 느끼게 될 겁니다.
3. ‘월간 계획’ 석 달 동안 해보기
새해에는 월간 계획을 최소 석 달 동안 세워보세요. 연간 계획은 리스트처럼 적어서 책상에 붙여두세요. 꿈과 실행을 연결지어주는 핵심 단위는 연간이 아니라 월간입니다. 꿈을 이루기 위한 성공 요인을 항상 생각하고, 어떤 방법으로 어디에 방점을 둘 것인가 고려해 현실적으로 한 달 동안 반드시 해야 할 것을 적습니다.
로드맵이라고 하는데, 한 달 계획을 세웠다면 다시 이 과제들을 주간 단위로 나눕니다. 그러고 나면 주간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매일 아침 해야 할 계획을 세웁니다. 하루 계획을 쓸 때는 시간 단위가 아니라 오전에 하나, 오후에 하나, 저녁에 하나, 이런 식으로 적어보세요. 하루에 할 일은 다섯 개를 넘기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딱 석 달만 해보시면 나의 능력과 생각이 고도화되어가는 걸 느낄 수 있을 거예요.
4. 하루에 4쪽 메모하기
책 읽은 내용, 유튜브 본 내용, 지나가다 본 카페, 친구랑 대화한 내용 등을 매일 4쪽씩 메모해보세요. 지식이 채워지고 잠재력을 끄집어내, 아이디어나 발상이 좋은 기록형 인간으로 바뀌어갑니다.
여기에 더해서 구상 기록을 적어보세요. 친구를 만나기로 했다면 만나기 5분 전에 ‘오늘 이 친구를 만나는 목적이 뭐지?’, ‘대화의 서론, 본론, 결론을 어떻게 할까’, ‘마지막 인사는 어떻게 할까’ 전 과정을 적어보는 겁니다. 물론 실제 만났을 때 이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미리 예습을 해보는 것과 그냥 하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책 읽기 전, 일하기 전, 사람 만나기 전 5분 동안 구상 기록을 해보세요. 하루에 3번 하면, 1년이면 1000번입니다. 자연스럽게 전략을 세우게 되고, 어디에 힘을 주고 빼야 할지 아는 능력이 생길 거예요.
2024년 갑진년(甲辰年) 청룡의 해가 밝았다. 청룡은 사신도 중 하나다. 사신(四神)은 동쪽의 청룡, 서쪽의 백호, 남쪽의 주작, 북쪽의 현무를 말한다. 이는 동서남북을 지키는 수호 동물로 벽사와 음양의 조화를 뜻하는 신령의 동물로 여겨져 왔다. 특히 일출이 시작되는 방향인 동쪽 수호신 청룡은 진취적인 에너지와 희망을 나타내고 용기와 도전을 상징한다고 알려져 있다. 단 실제 갑진년은 2월 10일 설날(음력 1월 1일)을 기점으로 시작한다.
새해에는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도전을 다짐한다. 가족의 건강을 빌고 결혼, 승진, 합격 등 소원 성취를 기원한다. 다이어트, 금주, 연애, 사업, 대인관계 등 자신의 처한 상황에 따라 소원도 제각각이다. 그중 금연은 많은 이들이 매년 도전 과제로 삼는 단골 메뉴다. 담배는 타르, 니코틴, 일산화탄소 등 수십 종 이상의 1급 발암 유발인자를 비롯해 7000가지가 넘는 유해물질을 포함한다.
흡연은 거의 모든 질환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폐질환은 물론 전 세계 사망 원인 1위인 암이 언급될 때도 빠지지 않는다. 뇌졸중으로 대표되는 뇌혈관질환을 비롯해 심혈관질환, 호흡기질환, 위장질환, 구강질환 등에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다만 누구나 이러한 담배의 해로움을 알고 있지만, 중독성이 강해 본인 의지만으로는 성공하기 어려운 게 금연이다.
서민석 가톨릭대학교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금연은 그 자체만으로도 건강한 삶을 위한 가장 훌륭한 치료가 될 수 있다. 흡연은 본인의 건강뿐 아니라 주위 사람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새해에는 꼭 금연에 성공하길 바란다”면서 금연 성공을 위한 조언을 전했다.
금연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
금연을 시작하게 되면 그 효과는 곧바로 나타난다. 금연 20분 후 심박동 수와 혈압이 줄어들고 12시간이 지나면 혈중 일산화탄소 농도가 정상으로 돌아온다. 2주 후에는 혈액순환이 개선되고 폐 기능이 좋아진다. 한 달이 지나면 숨이 덜 차고 기침이 줄며, 호흡기와 같은 상피세포에서 먼지나 이물질을 제거해주는 역할을 하는 섬모가 정상적인 역할을 하면서 기관지에 쌓여 있던 가래가 배출된다. 폐 감염의 위험 역시 감소한다.
금연의 효과는 시간이 지날수록 더 뚜렷해진다. 1년이 지나면 심장혈관 질환 위험성이 흡연자 대비 절반으로 줄고, 2~5년 후 뇌졸중 위험은 비흡연자 수준으로 감소한다. 또 5년 후에는 구강, 인후, 식도, 방광암 위험이 절반으로 낮아진다. 금연 10년 후에는 폐암으로 사망할 확률이 절반으로 떨어지고 인두암과 췌장암의 위험이 감소한다.
서민석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담배 성분 중 하나인 니코틴은 의존성이 있어 금단증상으로 금연을 어렵게 만든다”며 “본인의 강한 의지도 중요하지만 혼자 금연하는 게 어렵다고 생각된다면 전문가와 상담을 통해 금연 치료를 받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금연 생활습관 길러야
하루아침에 바로 담배를 끊기는 쉽지 않다. 금연을 결심했다면 먼저 생활습관을 개선해 보도록 하자. 물은 자주 마시는 것이 좋다. 물은 몸속에 있는 니코틴과 타르 성분을 배출하는 데 도움이 된다. 금연을 위한 식단을 짜는 것도 좋다. 검은콩과 등푸른생선, 당근, 양파 등은 금연에 도움을 주는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검은콩은 이뇨 작용을 통해 체내의 니코틴 등 독소를 체외로 내보내는 역할을 하고, 등푸른생선은 흡연으로 수축된 혈관을 이완시켜 준다. 당근의 터핀 성분은 발암물질을 해독하는 데 도움을 주고, 양파의 퀘르세틴 성분은 체내에 쌓인 니코틴을 무해한 성분으로 바꿔주는 해독제 역할을 한다. 반대로 맛이 강하고 맵고 짠 자극적인 음식은 금연 식단으로 적절하지 않다. 돼지고기나 소고기 등 기름진 음식을 자제하고 술도 삼가는 것이 좋다.
또 각 시·군 보건소와 동네 의원 및 병원에서는 다양한 금연클리닉을 운영하고 개인 상담을 통해 맞춤형 금연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곳에서 약물이나 금연보조제 등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금연보조제는 크게 패치와 껌, 사탕, 약물 등으로 나뉜다. 패치형은 피부를 통해 몸속에 니코틴을 서서히 공급하는 금연보조제다. 다만 패치형은 평소 자신의 흡연량에 맞춘 니코틴 함량의 제품을 사용하기 때문에 패치를 붙인 상태에서 흡연은 심한 어지럼과 두통을 유발할 수 있다. 혈관을 수축시키는 니코틴이 과도하게 체내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또 심근경색 등 심장질환을 앓고 있거나 의심된다면 패치는 사용해서는 안 된다. 니코틴 껌이나 사탕은 속쓰림에 주의해야 하고, 너무 빨리 씹으면 혈중 니코틴 농도가 급격하게 상승하기 때문에 한 개씩 천천히 씹어야 한다.
서민석 가톨릭대 인천성모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생활습관 개선으로 흡연을 피하는 환경을 만들고 전문 의료진 상담을 통해 꾸준히 도전하고 관리한다면 반드시 금연에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며 “2024년에는 금연과 함께 절주, 적절한 운동을 통해 건강 생활을 실천해 보셨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지역 문화유산 순례기’는 한국문화원연합회의 후원으로 제작됩니다. 다양한 지역 문화유산을 만날 수 있는 지역N문화는 한국문화원연합회와 지역문화원이 함께 발굴한 다양한 지역 이야기를 서비스하는 지역문화포털입니다. 기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지역N문화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외암민속마을은 충남 아산시 송악면 설화산 자락에 있는 옛날 마을이다. 일부러 꾸며 만든 눈요기용 민속 마을이 아니다. 단장이야 좀 했지만 겉치레에 흐르지 않았다. 이곳은 500년간 이어진 ‘예안 이씨’ 집성촌이다. 지금도 일부 후손들이 산다. 기와집과 초가집이 즐비해 이색적이며, 하나같이 묵은 시간의 잔영이 더께로 쌓여 고색창연한 마을이다.
마을 길은 일직선으로 뻗어나가는 일 없이 거듭 휘어져 나직한 선율처럼 포근하다. 느린 걸음으로 걷기에 좋은 골목길이다. 발길이 느려지면 풍경이 한결 세밀해져 살갑게 다가온다. 첫눈에 정겨운 건 돌담길이다. 집과 집을,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며 마을 사이사이로 흘러가는 돌담길 길이는 자그마치 5.3km에 이른다. 외암마을의 시그니처 구조물이라 할 만하다. 예로부터 외암은 ‘삼다(三多) 마을’로 통했다. 양반이 많고, 양반들의 글 읽는 소리가 흔하며, 돌이 유독 많다는 건데, 땅을 파면 온통 돌투성이 지질이란다. 따라서 돌담은 자연스러운 귀결로 등장했다. 이는 어쩌면 주민들이 집단으로 창작한 환경미술에 가깝다. 그 이미지는 수더분하나 아름다우며, 기법은 소박하지만 능란한 것이니까. 돌담길은 미로처럼 얽혀 퍼져나간다. 길 끝이란 없다. 끊길 듯하다가도 다시 이어진다. 마치 미로 속에서 길을 찾는 떠돌이 인생의 상징처럼.
신창댁에서 객을 싣고 시동을 건 돌담길은 온 마을을 감고 휘돌며 덩실한 양반 고택들과 조촐한 초가들을 차례로 보여준다. 주요 반가(班家)들은 대체로 마을 안길 북쪽에 있다. 이곳은 일반 민가들이 들어앉은 남쪽보다 상대적으로 고도가 높다. 그래 마을을 보듬은 설화산으로부터 내려오는 계류의 범람을 피할 수 있다. 즉 주거 여건이 좋은 심층부다. 종가, 사당, 송화댁, 참판댁 등 상류층 가옥들이 주로 여기에 산재한다. 개중 핵심은 건재(建齋) 이상익(1848~1897)이 1869년에 지은 건재고택이다.
건재고택은 우람하면서도 정교한 구조를 지닌 집이다. 떡 벌어진 행랑채 중앙에 자리한 솟을대문으로 들어서면 마당과 사랑채가 있고, 그 뒤편에 정갈하고 수려한 구색으로 돋보이는 안채가 있다. 건재고택이 유명한 건 사랑채 앞마당에 조성한 정원 때문이다. 조선의 옛집들을 보면 크거나 작거나 사랑채 마당을 거의 여백으로 남겨둔 걸 알 수 있다. 조경이라야 그저 소나무나 배롱나무 두어 그루 심거나 자그만 화단을 만든 게 고작이다. 옛사람들은 마당에 굳이 나무를 잔뜩 심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집으로 들이치는 산야의 경관을 만끽하며 내면에 자연을 들여놓는 걸 즐겼을 뿐이다. 이와 같은 전통 미학을 차경(借景, ‘풍경을 빌려온다’는 뜻)이라 한다.
그런데 건재고택의 사랑채 마당엔 수목이 빼곡하다. 용트림처럼 절묘하게 비틀린 채 생동하는 노송을 비롯해 갖가지 정원수를 보라. 화려한 정원이다. 괴석과 석조 장식물에 정자까지 다양한 조경 요소를 조밀하게 배치하기도 했다. 당최 여백이 없어 답답한 기분을 불러일으킨다. 허공으로 펼쳐진 나무들의 가지로 인해 한낮에도 어둑하다. 전통 범례를 초월한 이 정원의 이질성은 오히려 묘한 미감을 자아내기도 한다. 미태의 레이스를 펼치는 나무들의 모습에 무슨 결함이 있으랴. 뭔가 웅숭깊은 맛을 자아내는 이곳에서 신령스러움을 느끼는 사람들도 있다. 이 정원을 전문가들은 대체로 일본식 조경 방법을 따른 것으로 본다. 조선식과 일본식이 혼합된 공간으로 보기도 한다. ‘조선집 마당 가운데 나무를 심은 것은 방에 나무를 심은 것과 같다’며 평가절하하는 견해도 있다. 사랑채와 대문이 일직선상에 놓인 바람에 집안의 기(氣)가 빠져나갈 수 있어 비보(裨補) 용도로 나무들을 심었다는 얘기도 있다.
건재고택에선 추사 김정희를 살짝 만날 수 있어 매력을 더한다. 추사체로 쓴 현판과 주련 다수가 걸려 있어 문기(文氣)가 풍긴다. 이 집은 추사의 두 번째 부인 예안 이씨의 친정이다. 이런 인연으로 추사가 글씨를 남겼다. 낙관이 박힌 추사의 친필은 5점 정도로 파악된다. 건재고택엔 오랫동안 빗장이 걸려 있었다. 개인 소유였던 데다 소유권 소송 문제 등이 겹쳐 문을 닫아뒀던 것. 그러다가 2019년 아산시가 인수한 이후 요즘은 하루 두 차례 일정한 시간에 개방한다.
맹사성 고택은 최고(最古) 민간 주택
건재고택 뒤편 저만치엔 참판댁이 있다. 건재고택과 함께 외암리를 대표하는 집이다. 현재 종손 일가가 산다. 여느 빈집과 달리 사람의 온기로 숨을 쉬는 집이다. 규모로나 구조로나 완연한 대갓집이다. 참판 벼슬을 지낸 퇴호 이정렬(1868~1950)의 고택으로 고종이 하사한 집이다. 고종이 왜? 이정렬은 똑 부러지는 기개로 할 말 다하며 살았던 인물이다. 그는 일제의 침략 야욕 저지를 탄원하는 상소를 거듭 올렸다. 하나 반응이 없었다. 그러자 이정렬은 말 등에 거꾸로 올라타고 대궐에 들어가는 진기한 시위를 했다. 조회를 주관하던 고종이 경악할 수밖에. 이 통렬한 장면에 대해 황성신문은 이렇게 썼다. ‘아침 햇살에 봉황이 울었다.’ 이정렬은 종단엔 ‘나라 망하는 꼴은 차마 못 보겠다’며 벼슬을 던지고 낙향했다. 이후의 생활은 매우 곤궁했다지. 그걸 안 고종이 먹고살 만한 재산을 보냈으나 세 차례나 사양하며 돌려보냈고, 이번엔 고종이 낙선재의 축소판쯤 되는 집을 지어줬는데 그게 지금의 참판댁이다. 이 집의 처마엔 금색으로 ‘퇴호거사’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퇴호는 고종이 이정렬에게 내린 별호다. 현판은 고종의 아들 영왕이 9세 때 썼다. 이정렬의 못 말릴 결기와 고종의 대범한 풍모가 겹으로 환히 비치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발길은 이제 설화산 너머 배방읍 중리에 있는 맹씨행단(孟氏杏壇)에 닿는다. 조선의 명재상이자 청백리의 표상인 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의 고택이 있는 곳이다. 이 집의 주인은 본래 고려 말의 무신 최영 장군이었다. 한편 맹사성은 최영의 손녀사위였다. 이런 연고로 최영이 맹사성에게 집을 물려줬다. 집의 형상은 그지없이 조촐하다. 물질에 무심한 청백리의 살림집답게 단출하다. 세월의 풍상을 겪으며 으스러진 게 많은 집이기도 하다. 덩달아 보수와 변형도 잦았다. 엄밀한 분석을 할 경우 종도리를 받치고 있는 복화반 정도가 이 옛집에 남은 원 구조물이라고 한다. 그렇더라도 고려 말에 지어진 집이라는 사실엔 하자가 없다. 우리나라에 남은 최고(最古)의 민간 주택으로 간주되는 집이다.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세종조의 황금기를 쌍두마차처럼 이끌었던 주역이다. 정치인다운 기량은 물론 청렴결백으로 당대의 사표가 된 인물이다. 그의 말년 생활은 소박해, 이를테면 집에서 기르던 소를 타고 돌아다니는 정도에서 자족했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겸손해 신분의 고하를 가리지 않았다. 허름한 이가 방문할 때에도 반드시 예를 갖추어 맞이했다. 매사 목에 힘을 주는 법이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고결한 인품이 흔하던가? 저마다 꿍꿍이와 내숭을 장착하고 각축을 일삼는 게 속세다. 맹사성의 성정은 봄바람처럼 부드러웠다고 한다. 그의 온유한 정신은 세상의 어둠을 감쌀 수 있는 치마폭 같은 것이었다.
정종호 온양문화원 원장
“락페스티벌 펼쳐 성황 이뤄”
아산시는 1995년 1월 아산군과 온양시가 통합되면서 새로운 출발을 했다. 근래엔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대형 산업체들이 입주하면서 지역사회에 역동성을 불어넣고 있다. 지역문화를 향유하는 인구도 늘어났다. “문화원이 해야 할 역할이 많아졌다. 책임감도 느낀다.” 이는 정종호 온양문화원 원장의 얘기다.
“아산시 인구가 38만여 명으로 크게 증가했다. 특히 젊은 세대의 유입이 많았다. 아산에서 출생한 2세대도 많은데, 그들은 아산의 미래를 짊어질 소중한 자산이다. 우리 문화원은 아동이나 청소년은 물론 젊은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문화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있다. 반응은 매우 좋다. ‘전통놀이와 내 고장 알기’ 같은 프로그램에 경쟁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디지털 문화의 위력에 눌려 퇴색하기 쉬운 게 전통문화다. 옛것에 관심을 가지는 젊은 세대가 많다고 보나?
“현대적인 문화를 즐기는 경향에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지역의 옛것에 관한 이해와 관심을 높이기 위한 문화재 탐사 프로그램을 적극 가동하고 있다. 이 역시 참여도가 높다.”
아산은 예로부터 온천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요즘도 온천에 사람들이 몰려드나?
“아산시 온양지구의 온천은 백제 시대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왕실 온천 역할을 할 만큼 유명했다. 1980년대엔 신혼여행지로 각광을 받기도 했다. 이후 생활상의 변화에 따라 한동안 온천의 인기가 저하됐지만 서울-아산 간 전철이 개통되면서 상황이 개선됐다. 전국의 어느 온천 지역보다 양질의 수질을 공급한다는 점도 이 지역 온천의 강점이다.”
요즘 아산시에서 부각된 문화 이슈가 있다면 소개해달라.
“온천 문화의 보고인 ‘온양행궁’의 복원 문제를 꼽을 수 있다. 이는 아산 시민의 숙원이자 지역 발전을 위한 핵심 사업이다. 그러나 재원 문제로 진척을 보지 못하고 있어 아쉽다.”
온양문화원이 추진한 중점 사업과 성과엔 어떤 게 있나?
“신정호수공원을 신정호 아트밸리로 이름을 바꾸고 전국 최고의 명품 공원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미 문화예술과 생태가 어우러진 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또한 온양문화원은 ‘락페스티벌 달그락’을 주관하기도 한다. 지난 8월에 열린 행사엔 노브레인, 육중완밴드, 크라잉넛 등 21개 팀이 참가해 열띤 공연을 펼치며 성황을 이루었다. 전국 최고의 페스티벌로 키워나갈 참이다.”
요즘은 문화원마다 전통문화 보존 활동에서 나아가 한결 트렌디한 콘텐츠를 개발하고 있다. 이는 매우 긍정적인 현상이다.
“문화원이라 하면 흔히 옛날 문화를 축으로 삼아 활동하는 걸로 오해한다. 사실 문화원은 이미 변화했으며, 변신에 더욱 가속을 붙이고 있다. 현대 문화를 적극 수용해야 한다. 온양문화원은 남들이 생각하지 못한 프로그램을 다수 개발했다. 타 문화원에서 벤치마킹을 위해 찾아오는 경우가 잦다.”
미간에 힘을 주고, 목을 긁는다. 허스키한 목소리가 돋보이는 ‘원조 록스타’ 김정민(55)의 창법이다. 유머러스하게 따라 하는 사람도 많지만, 그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 “가수로서 가창력이 뛰어나면 당연히 좋겠죠. 그런데 색깔 있는 사람도 오래 기억된다고 생각합니다. 독특함으로 오랜 시간 생존한 것 같아요.”
“저 옛날 사람 맞는걸요. 하하하.” 어느덧 내년이면 데뷔 30주년을 맞이한다. 1995년 ‘슬픈 언약식’이라는 불후의 명곡을 남긴 김정민은 ‘옛날 사람’이라는 표현을 기분 좋게 받아들인다. 2021년 MBC ‘놀면 뭐하니?’를 통해 결성된 프로젝트 그룹 ‘MSG워너비’ 활동 당시 그는 ‘옛날 사람’으로 불리는 동시에 많은 20·30의 MZ세대 팬을 얻었다. 김정민은 젊은 팬들이 자신을 촌스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존경의 마음을 담아 바라본다고 느낀다.
“제 노래가 요즘 스타일과는 다르니까 옛날 스타일일 수 있죠. 젊은 팬들이 클래식함, 독특함으로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 또 과거 노래 가사는 지금과 달리 극단적인 사랑 이야기가 주를 이뤘습니다. 당시 홍콩 누아르 영화를 봐도 마지막에 주인공은 상대를 구해놓고 죽는 경우가 많았죠. 개인적으로 저는 그 시절의 감성을 좋아하는데, 젊은 팬들도 그런 것 같아요. 구관이 명관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한번 노래 들어보니까 좋다’면서 저의 다른 노래들도 찾아 들어주시더라고요.”
그렇다고 과거 감성에 취해 있고 고집한다는 뜻은 아니다. 요즘 스타일은 수용하면서 자신의 독특함을 지켜나가고 있다. 무엇이 됐든 오랜 세월 인정받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숨은 노력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제가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는 아니에요. 그냥 음색이 독특한 가수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게 많아서 지금도 노래 연습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또 성대도 나이가 들면 늙고 목소리가 변화하기 때문에 매일 노래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어요. 운전할 때 차에서 노래 부르는 걸 좋아합니다. 나만의 공간이니까 내가 뭘 하더라도 아무런 제약이 없죠. 지방에 일이 있어 두 시간 운전해야 한다고 하면, 두 시간 내내 MR을 틀어놓고 노래 연습을 하는 거죠.”
팬과 함께한 ‘영원’
김정민은 11월 17일 고(故) 최진영의 ‘영원’(1999년)을 리메이크한 곡을 발표해 화제를 모았다. 원곡의 감성에 김정민의 색깔을 입혀 색다른 곡으로 재탄생했다. 사실 김정민과 ‘영원’은 인연이 깊다. 원래 이 곡은 김정민에게 갈 예정이었는데, 데모를 들은 최진영이 너무 마음에 들어해 그의 노래가 됐다. 그리고 ‘영원’은 리메이크되어 24년 만에 세상 밖에 다시 나왔다.
“(최)진영 씨와 같은 사무실에 있었어요. 술도 자주 마셨고 여행도 다닐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어요. 진영 씨가 하늘나라로 간 뒤로는 그 충격에 ‘영원’을 못 부르겠더라고요. 한 10년이 지나니까 감정이 조금 무뎌졌는지 부를 수 있었죠. MSG워너비 하면서 블라인드 오디션 때도 ‘영원’을 불렀는데, 음원이 나왔으면 좋겠다는 반응이 많았어요. 그러다가 이번에 용기 내서 진영 씨를 잊지 말자는 마음으로 리메이크곡을 내게 된 거예요. 원곡의 완성도가 워낙 높아서 어설플까 봐 고민이 깊었어요. 편곡도 10번 이상 갈아엎었고, 준비하는 데만 1년이 걸렸습니다.”
‘잘해도 본전’이라고 생각했지만 김정민이 ‘영원’ 발매를 용기 내 강행한 데는 이유가 있다. 팬들과 함께 작업했기 때문이다. 기념 영상의 감독, 촬영, 편집 모두 팬이 맡았다. 이런 대형 프로젝트를 기획할 정도니, 김정민의 ‘팬 사랑’은 말 다 했다. 연예계에서도 익히 유명하다. 추억을 공유하며 나이를 먹어가는 동반자인 팬들에게 그는 감사한 마음뿐이다.
“중·고등학생 팬들이 저를 보겠다고 방송국 앞에서 늦게까지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 ‘밥은 먹었나’, ‘집은 잘 들어갔나’ 걱정이 됐죠. 한번은 추운 겨울날에도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워서 20명에게 짜장면을 사준 적이 있어요. 그랬던 친구들인데, 이제는 자녀들이 성인이 됐죠. 이제 팬들과 여동생, 남동생 같은 사이가 된 것 같아서 좋아요. 팬은 ‘또 다른 김정민’이라고 생각합니다. 팬들이 저를 만들어줬고 지켜줬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들이 아니었으면 지금까지 올 수 없었을 거예요.”
기러기 아빠의 부성애
그는 최근 친구에게 “정민아, 당장 내일 죽는다고 하면 어떨 것 같아?”라는 질문을 받았다. 나이가 들수록 ‘죽음’을 생각하게 되기에 대화 도중 자연스럽게 나온 이야기였다고 한다. 김정민은 ‘아직은 죽을 수 없다’는 답을 했다. 일본 아이돌 출신 타니 루미코와 2006년 결혼해, 슬하에 세 아들을 두고 있는 그는 아빠로서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친구한테 그 질문을 듣고 생각이 많아지더라고요. 막내가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에요. 막내가 성인이 되어 뭘 하는지는 보고 죽어야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사실 막내가 결혼하는 모습까지 보고 싶지만, 그건 욕심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마음뿐입니다.”
그의 부성애는 실로 대단했다. 어떤 질문을 던져도 세 아들에 관한 답으로 귀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버킷리스트를 물었을 때도 “아이들이 운동을 계속해서 어느 팀의 선수가 된다면, 그 팀의 응원가를 헌정하고 싶다”고 말했다. 가수 아빠로서 재능기부인 셈이다. 아이들 이야기를 이어가다가 김정민은 최근 ‘기러기 아빠’가 됐다는 사실을 밝히기도 했다.
“큰아들은 광주FC U18 소속으로 축구를 하고 있어서 광주에 있고요.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은 엄마와 함께 일본으로 갔습니다. 둘째는 축구를 하다가 쉬고 있고, 셋째는 일본에서 축구를 시작했어요. 기러기 아빠를 제 인생에서 그려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이렇게 됐네요. 두 달밖에 안 됐는데도 쉽지 않다고 느껴요. 아내와 아이들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기러기 아빠가 된 후, 홀로 살고 계신 어머님을 더욱 자주 찾아뵙는다고 한다. 일주일에 2~3번은 방문한다는 그는 “할아버지, 할머니는 손주도 물론 보고 싶어 하지만, 사실 아들이나 딸을 보고 싶어 하는 거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머니께 이에 대해 여쭤보니 ‘네 아들은 삼 형제지만, 내 아들은 너잖니’라고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는데 되게 뭉클했고, 그 이후 자주 찾아뵈려고 노력한다”라고 말했다.
자신감 충만한 중년의 내일
김정민의 인스타그램 사진을 보면 세 아들은 하루가 다르게 크고 있다. 반면 50대 중반의 그는 연예계 대표 동안 스타답게 방부제 미모를 과시한다. 이런 반응에 김정민은 “사실 주름도 늘어나고 많이 늙었다”면서도 “젊은 시절의 몸무게를 유지하려고 노력한다”고 관리 비결을 밝혔다. 그만의 철칙은 ‘플러스 마이너스 3kg 넘지 않기’다.
“10kg 이상 갑자기 확 쪘다고 생각해보세요. 살을 빼도 피부가 늘어나니까 성형외과에 가야 할 테고, 돈이 더 들죠. 평소 ‘3kg 관리’를 습관화하면 돈도 안 들고 건강도 유지하고, 좋은 점이 많습니다. 저는 매일 운동을 병행해요. 오늘 아침에도 실내 자전거 40분 타고 왔습니다. 제가 하도 많이 타서 저희 집 실내 자전거는 한 다섯 번은 바꾼 것 같아요. 하하.”
이처럼 건강관리가 최고의 노후 준비라고 생각한다. 특히 막내가 대학교 갈 때까지 10년 정도 남았다면서 그때까지는 건강관리를 게을리하지 않을 것이라고 각오를 다졌다. 자신이 건강해야 일하고 자산도 축적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노후에는 한 번쯤 일본 시골 마을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도 밝혔다.
“사실 제가 서울 마포를 벗어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아이들이 제가 졸업한 학교에 다니기도 했고, 벌써 반백 년을 살았네요. 나중에는 아내와 아이들이 지금 살고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요. 거기가 시골이라서 공기도 좋은데, 없는 게 없더라고요. 아이들은 걸어서 학교를 다니고, 대형 쇼핑센터도 인근에 있어요. 나중에 누가 물어보면 거기서 지낼 거라고 해야지 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이 됐네요.”
김정민은 중년이 된 지금에서야 비로소 자신감을 찾았다고 말한다. 가창 실력이 늘어서도, 외모가 멋있어져서도 아니다. 스스로 마음이 충만해지고 내실을 갖췄다고 느낀다. 그가 지금껏 쏟아부은 노력과 부단한 채찍질이 만든 결과라고 생각한다.
“저는 나름 신조어 같은 것이 있어요. 바로 ‘오늘 하루도 나나 잘하자!’입니다. 톱니바퀴를 보면 한쪽이 돌아가면 반대쪽 바퀴도 돌아가잖아요. 그것처럼 다른 사람을 비방하지 않고 남 탓하지 않으면서 내가 할 일을 잘하면, 이 세상은 잘 돌아간다고 생각합니다. 올해 뮤지컬 ‘맘마미아’를 공연했는데, 무대에 오르기 전에 매일 그 말을 다짐처럼 했죠. 그랬더니 다른 배우들도 공연할 때 그 말이 머릿속에 맴돌아서 연기에 더욱 집중하게 되고 기억에 계속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나의 작은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는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도대체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나 이혼한 거 맞아? 이혼 후 어라? 남편이 둘이 되었네. 두 사람과 재혼했냐고? 에그, 그 무슨 망측한 소리. 일부일처 현행법에 걸릴 일 있나? 더구나 내가 무슨 팜파탈이라고.
내 나이는 60세. 5년 전 이혼했다. 이혼 사유? 그걸 밝힐라치면 내 자신도 움츠러든다. 이럴 때는 남편의 폭력, 외도, 도박 등 누가 들어도 “이혼할 만하네, 그동안 함께 사느라 고생 많았겠네, 왜 그렇게 오래 참고 살았어? 진작에 이혼할 일이지” 등등 공감과 위로가 쏟아지는 이혼 사유가 부럽기조차 하다. 그런 선명하고 명백한 사유가 있다면 남들 앞에서 떳떳하고, 무엇보다 내 자신에게 확신이 들면서 그간의 상처를 훌훌 털고 새 길을 갈 수 있을 것 같다.
내 경우는 남편이 마마보이라서 이혼했다. 어떤가? 20~30대 젊은 부부도 아니고 30년을 함께 산 사람이 마마보이든 파파보이든 그게 왜 새삼 이혼의 빌미가 될까 싶은가? 그냥 남편이 싫증 나서 헤어졌다고 하면 사람들한테 비난받을까 두려워서 이유 같지도 않은 이유를 갖다 붙이는 거 아니냐고?
거봐, 그렇다니까. 이러니 내가 이혼하고도 뭐 보고 뒤 안 닦은 것처럼 개운치 않고 상황에 질질 끌려다니는 기분이라니까. 내가 이러려고 이혼했나….
전남편은 영원한 피터팬
전남편은 가정에 무책임했다. 아니 책임이란 개념조차 없었다. 그 사람 눈에는 처자식의 존재가 보이지도 않는 듯 제멋대로 행동하고 기름처럼 겉돌았다. ‘피터팬 신드롬’이란 게 내 전남편을 두고 하는 말이지 싶다. 몸만 어른이었지 심리적 퇴행 상태에 빠져 어린아이로 머문 채 현 상황에서 주어진 책임과 역할을 거부하는 어른 말이다. 그렇게 영원한 피터팬이었던 남자.
남편은 위로 누나 네 명 둔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의 극진한 사랑(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그 이상을 받은 사람이다. 지독한 편애를 받으며 자란 탓에 세상을 배울 새가 없었다. 땅에 발을 디딘 적 없는 사람이랄까. 말만 하면, 아니 말도 하기 전에 원하는 것을 눈앞에 대령하는 ‘마술세계’에서 성장기를 보냈다. 그런 남편에게 결혼은 엄마의 손에서 아내라는 또 다른 엄마의 손으로 이양되는 절차에 불과했다. 여전히 땅을 디딜 필요가 없는 뽀얀 버선발을 한 채로. 더구나 나는 5남매의 맞이. 밑으로 남동생만 넷을 둔. 남편과는 완전 거꾸로였다. 이거야 원, 오목하고 볼록한 요철처럼 두 사람이 만나도 제대로 만났다고 할지.
어쩌면 나니까 남편과 30년을 함께 살았을지 모른다. 생색 내려는 게 아니라 보살핌을 무조건 받는 사람과 무조건 주는 사람, 우리는 원가족에서부터 그렇게 길들여지며 성장했고, 그래서 남편은 받는 것에, 나는 주는 것에 익숙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 인내심은 30년 만에 바닥을 드러냈다.
남편을 결혼이란 올가미(실상 올가미인 적도 없었지만)에서 벗어나게 해주려고, 그렇게 해서 맘껏 제멋대로 살게 해주려고 이혼했다. 아니, 내가 살기 위해 그와 헤어졌다. 과장을 섞어 말한다면 태어나서 배변 훈련 외에는 그 어떤 훈련도 되지 않은 사람과 함께 살면서 돈 버는 것부터 두 남매 키우는 것까지 모두 내가 도맡아 했다. 그런 생활이 몇 십 년 지속되니 몸은 이미 탈진한 지 오래고, 마치 유령과 사는 것처럼 마침내 영혼까지 묽어지는 느낌이었다. 영, 혼, 육이 탈탈 털려버리는 상황에서 나는 이혼을 택했다. 이혼이라는 매듭이라도 지어야 숨을 쉴 것 같았다.
멀리하기엔 너무 가까운 당신
남편을 두고 아내들은 아들 하나 더 키우는 거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하지만, 내 경우에는 끊어낸 남편이 진짜 아들이 되어 나타날 줄이야! 이혼을 했음에도 그는 여전히 내 곁을 맴돌고 있다. 그것도 본격적으로.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혈연처럼. 그 사람 마음엔 서류상으로만 이혼한 거였을까? 결혼 생활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혼 생활에서도 그는 무책임했던 것이다.
이혼 초기에는 이런 식이었다. 하나뿐인 아들이 이혼한 줄 알면 100살 노모의 충격이 이만저만 아닐 테니 노모를 비롯해 가족들에게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다. 어차피 치매 노인이다. 알면 어떻고 모르면 어떠랴. 다른 가족이라야 만나는 일도 거의 없으니 역시 상관없었다. 나이 50대 중반에(그와 나는 동갑) 이혼을 당했으니 창피하기도 했을 거고.
아이들 생일에 함께 만나자고 하는 것까진 나도 흔쾌히 동의하는 바였다. 부모가 헤어졌다고 아이들에게까지 상처 줄 필요는 없으니. 함께 사는 동안에는 없었던 일이라 고맙기까지 했다. 이 사람이 드디어 철 드는 건가 의아해하면서도 반가웠다. 자기 생일에도 역시 아이들과 함께 만나줄 수 있냐고 해서 매몰차게 거절하지 못했고, 그 보답으로 내 생일을 챙겨주고 싶다기에 얼결에 또 얼굴을 보게 되었다.
이혼 후 더 자주 만나고 더 자주 대화하는 황당하고 당황스런 상황이라니. 사람들은 말할 것이다. 그러면 다시 합치면 되지 않냐고, 남편도 이제 정신 차린 모양이니 앞으로 서로 의지하며 재미있게 살면 되지 않냐고. 나도 처음에는 그런 줄 알았다. 이혼이 그에게 의외의 강처방이 되었을까 하는 의구심 섞인 기대감. 그러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잠자리만 요구 안 했지, 속된 말로 빈대처럼 달라붙었다. 툭하면 이건 어떻게, 저건 어떻게 처리하냐며 시도 때도 없이 연락이 왔다. 생일 만남이니 뭐니는 자기 신변과 생활의 자질구레한 일들을 전처럼 내게 떠넘기기 위한 사탕발림이었을 뿐. 나 이혼한 거 맞아?
상담사가 재혼 남편이 되다
문제는 내가 재혼을 한 상태라는 것이다. 나는 이혼 후 1년 만에 재혼했다. 평생 어린아이 같은 남편과 살다 내가 좀 어린아이 짓을 할 수 있는 사람, 나도 좀 어리광을 피울 수 있는, 그렇게 품이 큰 사람 안에서 쉬고 싶다는 마음이 늘 있었다. 나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 결혼 생활도 아니고, 무엇보다 그런 사람은 없다는 것을 모를 나이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처럼 환상 없는 냉혹한 현실 인식 덕분에 오히려 나는 그런 사람을 만날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지금 남편은 나의 상담사였다. 내가 ‘피터팬 남편’으로 인해 힘들어할 때 내담자와 상담자 관계로 만났다. 나는 그가 사별했다는 것을 상담받는 동안엔 몰랐다. 상담은 내가 받는 거지, 그가 내게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을 일이 없으니. 내가 3년을 상담실에서 고통을 토하는 동안 전남편은 한 번도 상담에 응하지 않았기에 부부 상담을 받은 적이 없어 그는 내 전남편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그가 내 이혼에 어떤 입김을 불어넣었다든가 간접적으로라도 부추긴 적은 전혀 없다. 물론 상담이 이혼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상담의 일반적인 결과이지 그와 나 사이에 특별한 그 무엇이 작용한 건 아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현재의 남편을 변호하는 이유는 그가 참 좋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남편으로서 좋은 그 이상으로, 그는 인간으로서 누구에게나 넓은 가슴을 내줄 수 있는 사람이다.
이혼하고 나서야 그가 사별남이라는 걸 알았고, 3년 남짓 상담하는 동안 내 사정을 깊이 알고 있는 사람이었으니 새삼스럽게 서로에 대해 알아갈 시간도 필요 없었다. 물론 나는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지만 지금까지 보조를 맞춰 잘 살아가고 있으니 그의 성품, 인간 됨됨이는 입증되고도 남는다.
어린아이 같은 전남편이 아직 내 치마꼬리를 잡고 있는 것에 대해 오히려 나를 위로하고 공감해주는 남편. 이상한 삼각관계, 난감한 그림이지만 이 또한 남편이 상담사이기에 수용 가능한 일인 것 같다. 전문가로서 전남편의 심리 역동을 잘 알기 때문에 나의 어쩌지 못하는 모습을 너그럽게 보아주고 있는 것이다.
집안에 암환자가 있으면 가족 모두 암박사가 되는 것처럼 나는 피터팬 남편으로 인해 반 상담사가 되어갔다. 심리학 공부를 꾸준히 하고 틈틈이 상담을 받으면서 그 유체이탈적 결혼 생활을 그나마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결혼 초에 헤어졌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르지만 이제는 다 지난 일이고 결과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그때 그렇게 했다고 해서 더 잘한 선택이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으랴. 다만 이제는 전남편을 놓아야 함에도 아직 그를 완전히 떠나보내지 못하는 것은 확실히 문제다. 30년간 서로에게 길들여진 습관을 하루아침에 바꾸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솔직히 나는 현재 남편이 둘인 것 같다. 물론 지금 남편에게 너무나 미안하다. 훌륭한 성품을 지닌 그가 상담사라는 특별한 위치에 있기에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나를 이해하는 거지만, 그도 사람인데 왜 마음이 상하지 않으랴. 어쩌면 그는 나와 결혼한 후에도 내 심리 치료를 계속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 행동은 분명 정상이 아니기에. 엉거주춤한 내 태도가 전남편에게도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최근 ‘어싱’(Earthing)이 건강에 좋다는 입소문이 퍼지며 중장년층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어싱은 ‘땅’(Earth)과 ‘현재진행형’(ing)의 합성어로 맨발로 땅을 밟으며 걷는 행위를 의미한다. 실제로 주변 공원의 흙길이나 등산로에만 가도 신발과 양말을 벗고 산책을 즐기는 이른바 ‘어싱족’(Earthing族)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유명 관광지마다 맨발 산책로 조성 열풍이 불 정도다.
청명한 가을 날씨에 지역마다 맨발 걷기 인파가 몰리고 있지만, 이러한 유행에 걱정 섞인 시선도 존재한다. 자신의 건강 상태를 고려하지 않은 채 무턱대고 맨발로 걷다 오히려 탈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년 이후에는 발의 지방층이 얇아져 맨발 걷기를 하다 족저근막에 부상을 입기 쉬우니 주의가 필요하다.
족저근막이란 발바닥 근육을 감싸고 있는 얇고 긴 막으로, 발바닥의 탄력과 아치 모양을 유지하고 충격을 흡수하는 역할을 한다. 이러한 족저근막이 지속적인 외부 충격으로 손상을 입으면 염증과 통증이 발생하는데, 이를 ‘족저근막염’이라 한다.
실제로 족저근막염은 중장년층을 중심으로 나타나 경향을 보인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40대 이상 족저근막염 환자는 24만 9265명으로 전체(33만 5754명)의 약 74%에 달했다. 50대가 25%로 가장 많았고, 60대(20%), 40대(18%)가 그 뒤를 이었다. 아침 기상 후 첫발을 디딜 때 밤새 수축해 있던 족저근막이 펼쳐지면서 극심한 통증이 나타나는 것이 주요 증상이다. 또한 오래 걷거나 서 있을수록 통증이 커지는 양상을 보인다. 족저근막염이 생기면 발바닥과 발뒤꿈치 전반에 간헐적으로 통증이 나타난다. 그러다 활동을 지속하다 보면 족저근막이 이완되면서 통증이 줄어들어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은 채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를 방치하면 점점 통증 부위가 넓어지고 발이 뻣뻣해지면서 보행조차 힘들어진다. 따라서 비슷한 증상이 이어진다면 조기에 전문의를 찾아 자신의 발 건강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 좋다.
한방에서는 침·약침 치료, 한약 처방을 통해 족저근막염을 치료한다. 먼저 침 치료는 발바닥 주변 근육과 인대의 긴장을 풀어주고 혈액순환을 촉진해 근막 회복을 돕는다. 또한 순수 한약재 성분을 정제한 신바로약침, 오공약침 등 약침 치료는 염증 해소와 신경 재생에 효과적이다. 이와 함께 환자의 증상과 체질에 맞는 한약 처방을 병행하면 빠른 회복과 재발 방지를 기대할 수 있다.
족저근막염에 대한 약침 치료 효과는 대전자생한방병원과 대전대학교 한의학과 공동 연구팀이 발표한 임상증례 보고 논문에도 소개된 바 있다. 족저근막염 환자를 대상으로 총 4회에 걸쳐 신바로약침 치료를 시행한 결과 통증 숫자평가척도(NRS)가 치료 전 10점에서 치료 후 2점으로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NRS는 환자가 느끼는 통증 정도를 가장 극심한 10점에서 통증이 없는 0점 사이의 숫자로 표시한 척도를 의미한다.
맨발 걷기에 앞서 족저근막염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현재 자신의 발 건강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족저근막염 의심 증상이 있거나 이미 질환을 겪은 경우라면 맨발 걷기를 권장하지 않는다. 특히 진행 경로상 뾰족한 돌부리 같은 요철은 없는지도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 걷기 운동 중에는 틈틈이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귀가 후에는 온수 족욕으로 발을 풀어주는 것도 혈액순환에 도움이 된다. 과체중이나 비만일 경우 보행 시 충격을 줄이기 위해 체중 감량도 필요하다.
11월 11일은 국민 건강 증진을 위해 걷기의 중요성을 알리고자 지정된 ‘보행자의 날’이다. 그만큼 국가적 차원에서도 국민의 건강관리를 위해 걷기 운동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의미다. 하지만 걷기에 앞서 자신의 발 건강을 먼저 살필 필요가 있다. 발은 ‘제2의 심장’으로 불릴 만큼 중요한 신체 부위지만, 우리 몸 가장 아래에 있어 관리에 소홀할 수 있는 기관이기도 하다. 맨발 걷기로 건강을 챙기기 전에 발 건강부터 관심을 갖는 것이 알맞은 순서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