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허구가 만들어낸 제2의 바이러스
- 바이러스는 오래전부터 인류를 위협해왔다. 질병을 일으키고 전염시키면서 수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왔다. 심지어 ‘가짜 정보’가 나돌아 피해가 커지는 경우도 있다. 인터넷과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는 잘못된 바이러스 정보는 이제 또 다른 공포가 됐다.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공포가 계속되고 있다. 언제 어떻게 감염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사람이 몰리는 곳을 피하고, 마스크를 착용하고, 틈 날 때마다 손소독제를 사용하는 수준이다. 아직 백신이나 치료제가 개발되지 않아서 더 무섭다. 과거에 발생한 전염병부터 최근 코로나19까지 전 세계로 확산되는 바이러스의 위협을 보고 있으면 마치 영화 속 재난이 현실화되는 것 같다. 2002년 겨울 중국에서 발생한 사스코로나바이러스(사스)는 10%의 치사율을 보이며 이듬해까지 전 세계 774명의 생명을 빼앗았다. 2012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처음 등장한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이 돌았다. 치사율 38%의 메르스는 2015년까지 전 세계 528명의 목숨을 가져간 후에야 조용해졌다. 이외에 조류독감, 에볼라, 신종플루 등의 바이러스도 빠르게 퍼져나가며 인류를 위협했다. 최근 확산되고 있는 코로나19로 인한 피해 규모는 어마어마하다. 지난 4월 14일 기준으로 전 세계 확진자가 200만 명이 넘었고, 13만3400명이 사망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확진자가 1만 명 이상이고, 약 230명이 목숨을 잃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계속 늘어나는 상황이라 피해는 더욱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 코로나19 사태가 종식되더라도 생명을 위협하는 또 다른 바이러스가 나타날 수도 있다. 눈으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존재가 우리에게 감당하기 힘든 공포를 안겨주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공포, 근거 없는 가짜 정보 잊을 만하면 발생해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신종 바이러스도 무섭지만, 최근엔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함께 확산되는 ‘가짜 정보’로 인한 ‘인포데믹’(정보전염병)도 심각하다. ‘표백제가 코로나19를 치료한다’거나 ‘알코올로 입을 헹구면 낫는다’는 등의 의학적 근거가 없는 거짓 정보가 자칫 실제 치료법인 양 떠돌아다니고 있다. 이런 루머는 세균이나 곰팡이를 사멸시키는 약효가 체내 바이러스까지 없앨 것이라는 잘못된 생각에서 나온 발상으로 또 다른 피해를 양산할 수 있다. 심지어 가짜 정보는 갈수록 진화하고 있다. 일반인이 구별하기 어려울 만큼 리얼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진 유언비어가 나돌 정도다. ‘확진자 아버지가 양성 판정을 받았다’거나 ‘○○카페에 확진자가 다녀갔다’는 등 마치 실제 행정기관이 발표한 것처럼 ‘의무팀’이라는 명칭도 썼다. 이로 인해 자영업자와 소상공인들이 큰 피해를 입고, 해당 지역의 주민들은 코로나19 공포에 따른 불안증을 호소하고 있다. 가짜 정보는 해외에서도 유행하고 있다. 급기야 가짜 정보로 생명을 잃은 사례까지 발생해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지난 3월 이란에서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라온 ‘메탄올이 코로나19를 치료한다’는 유언비어에 속아 술을 직접 제조해 마신 300여 명이 사망했다. 같은 달 미국 애리조나 주에서는 한 시민이 말라리아 치료제인 하이드록시클로로퀸을 복용한 후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최근에는 5세대(5G) 이동통신이 코로나19 사태를 악화시킨다는 내용도 등장했다. 유튜브에 실린 인터뷰에서 영국의 음모론 전문가 데이비드 아이크는 “앞으로 개발될 코로나19 백신에는 나노기술 마이크로칩이 포함돼 사람을 통제할 것”이라며 “개발을 지원하는 빌 게이츠를 체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유튜브는 관련 동영상을 모두 삭제했다. ◇전염병보다 빠르게 퍼지는 유언비어 이런 가짜 정보는 전염병이 퍼질 때마다 비슷한 유형으로 등장했다. 성균관대학교 이재국 교수팀이 최근 발표한 ‘가짜 뉴스 확산 경로 추적’ 연구에 따르면, 조작된 거짓 정보는 주기적으로 되풀이되는 ‘반복성’을 지닌다. 지난 1월 말 ‘○○마트 화장실에서 피 묻은 마스크 발견’이란 글과 사진이 유포되면서 경찰과 보건당국이 발칵 뒤집혔다. 2015년 메르스가 유행할 때도 ‘감염자 A 씨가 ○○학원에 다녀갔다’, ‘바셀린을 콧속에 바르면 안 걸린다’ 등의 거짓 정보가 나돌았다. 이외에도 방송통신심의위원회가 접속을 차단하거나 삭제한 허위 게시물만 170개가 넘는다. 가짜 정보는 SNS 등 인터넷을 통해 빠르게 확산되고 있어 피해 규모를 가늠하기 어렵다. 일부 극단적인 성향을 보이는 커뮤니티가 가짜 뉴스의 단초를 제공하고, 회원들이 인터넷에 퍼다 나르면서 불특정 다수가 피해를 입고 있다. 또 정치인이나 연예인, 방송인 등이 언급할 경우 ‘인플루언서 효과’로 파급력이 엄청나게 커진다. 이재국 교수는 “가짜 뉴스가 반복해서 쏟아지고, 각종 커뮤니티에 축적된 음모론이 유튜브를 통해 재생산되고 있어서 새로운 정보를 접할 때는 항상 주의 깊게 살펴야 한다”며 “언론 역시 속보 경쟁이 아니라, 철저한 사실 확인을 통한 검증된 정보를 제공하는 데 충실해야 한다”고 말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영화 속 허구 가짜 정보는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한 재난을 소재로 한 영화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가짜 뉴스와 목적은 다르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영화 속 이야기에 빠져들면 관객은 허구를 사실로 오인할 수 있다. 실제로 재난 영화 속 설정이나 주인공의 행동은 현실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될 것처럼 묘사된다. 하지만 영화 자체가 ‘픽션’(허구)을 기반으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대표적인 한국 영화는 2013년 개봉한 ‘감기’다. 이 영화 속에 등장한 바이러스는 초당 3.4명에게 전파되고, 감염되면 2~3일 안에 모두 죽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불가능한 얘기다. 치사율이 100%일 경우에는 이런 전염 속도가 나올 수 없다. 바이러스는 숙주를 매개로 전염되기 때문에, 감염자가 죽으면 전파될 기회가 그만큼 낮아진다. 90% 치사율을 가진 에볼라바이러스가 최초 발생지인 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빼고 자연적으로 전파되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다. 반대로 1918년에 발생해 1919년까지 전 세계 5000만여 명의 생명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의 치사율은 10% 내외였다. 영화 속에서 성남시 분당 인구 48만 명을 구할 수 있는 시간은 5일 남짓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기간 안에 인플루엔자 백신을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인플루엔자 백신 생산 과정은 최소 6개월에서 1년 이상 걸린다. 최근 동물세포에 바이러스를 배양하는 방식의 생산법이 새롭게 고안됐으나, 이 역시 3개월 이상 소요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구 속 또 다른 거짓 설정 허구성이 극대화된 사례이기는 하지만 바이러스에 감염된 좀비물 영화에도 거짓 설정을 찾아볼 수 있다. 1968년 작품 ‘살아 있는 시체들의 밤’ 이후에 제작된 영화들은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이라는 콘셉트로 어느 정도 궁금증이 풀린다. 하지만 바이러스는 숙주가 살아 있지 않으면 증식이 불가능한데 죽은 시체를 움직인다는 설정은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2007년 작품 ‘나는 전설이다’는 바이러스가 확산된 상황에서 살아남은 주인공이 다른 생존자들을 찾아다니지만 그가 그토록 애타게 찾았던 생존자는 극소수뿐이고 대부분 바이러스에 감염된 ‘변종 인류’ 좀비들이었다. 이 영화에서 좀비는 인류보다 숫자가 많다. 물론 바이러스 자체가 사람을 직접적으로 죽이는 건 아니다. 하지만 바이러스 감염으로 면역력이 약화된 상태에서는 2차적인 병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다. 2017년에 개봉한 영화 ‘메이즈러너: 데스 큐어’에는 공기를 통해 전파되는 좀비 바이러스가 등장한다. 영화 속 단체 ‘위키드’는 얼마 남지 않은 지구의 자원으로는 한정된 수의 인간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해 바이러스로 일정 수의 사람을 없애려고 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공기를 통해 감염되는 바이러스는 전파 경로를 파악하기가 매우 어렵다. 여기에 인수공통감염이 동반되면 날아다니는 새가 바이러스를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트릴 것이다. 결국 위키드 구성원도 생명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인간은 하루에 평균 3600번 정도 사물을 만진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코로나19가 계속 확산되고 있다. 만약 공기를 통해 바이러스에 감염된다면 그 피해는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일 것이다. ◇주인공의 행동, 현실에선 처벌 대상 바이러스가 창궐할 때 영화 속 주인공처럼 행동했다간 낭패를 볼 수 있다. 영화 ‘감기’ 속 주인공은 자신의 딸이 바이러스 감염 의심자로 분류되자 검사를 피하지만 별다른 처벌 같은 건 없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 같은 행동은 허용되지 않는다.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 제79조의3, 제80조에 따르면 감염병 의심자가 의료진의 입원 및 격리조치에 불응할 경우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또 감염병 병원체 검사를 거부할 경우 300만 원 이하의 벌금 처벌을 받을 수 있다. 2011년 개봉한 영화 ‘컨테이젼’은 박쥐의 배설물을 먹고 자란 돼지를 요리한 셰프로부터 바이러스가 전파되는 내용이 코로나19의 최초 숙주가 박쥐로 예상되는 것과 흡사해 주목받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는 사람들이 생필품을 사재기하는 모습이 나온다. 실제로 올 초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소비자의 불안심리를 이용해 마스크 등을 매점매석해 폭리를 취하는 행위가 사회적 문제로 떠올랐다. ‘보건용 마스크 및 손소독제 매점매석 행위 금지 등에 관산 고시’에 따르면, 마스크 및 손소독제 매점매석 행위를 한 자에 대해 2년 이하의 징역 또는 50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할 수 있다.
- 2020-05-14 08:00
-
- "라이벌이 된 우정"
- 시대를 앞서간 명사들의 삶과 명작 속에는 주저하지 않고 멈추지 않았던 사유와 실천이 있다. 우리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자유와 사랑과 우정 이야기가 있다. 그 속에서 인생의 방향을 생각해본다. 이번 호에는 질투로 얼룩졌던 마티스와 피카소의 우정을 소개한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젊은 예술가들의 산실로 불리던 파리에는 다양한 국적의 보헤미안들이 몰려들었다. 스페인에서 온 풋내기 청년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도 그들 중 한 명이었다. 1906년 그는 그곳에서 운명처럼 한 사람을 만난다. 바로 당대 프랑스 화단에서 이름을 날리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였다. 프랑스 북부 시골에서 태어난 마티스는 법학을 공부하다 그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20대 초반 파리로 갔다. 이후 회화 양식과 색채와 빛을 표현하는 다양한 방법을 연구해 명성을 얻었고 야수파의 우두머리가 됐다. ‘색채의 혁명가’, ‘색채의 마술사’로 불리던 이 대작가는 무명작가인 피카소의 그림을 보자마자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이 만남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각별한 인연을 이어갔다. 마티스를 뛰어넘고 싶었던 피카소 그 무렵 마티스는 아프리카 원주민이 만든 조각품의 신비로움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골동품 가게에서 콩고 조각품을 구입한 그는 동료 화가들과 함께 감상하고 싶어 예술가들로 북적이던 아지트로 향했다. 마침 피카소도 그곳에 와 있었다. 그는 마티스가 가져온 ‘흑인 두상’ 나무 조각을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간다는 말도 없이 황급히 일어나 자신의 작업실로 향했다. 두 사람이 각자 다른 방식으로 원시 아프리카 미술을 재해석해 화폭에 옮기기 시작한 건 그때부터였다. 마티스는 아프리카 조각을 통해 인체의 비율과 ‘색채’를 고민했고, 피카소는 마법처럼 느껴지는 ‘초월적 힘’에 심취했다. 마티스가 아프리카 조각품의 원시성에서 영감을 받고 그린 ‘삶의 기쁨’(1906)과 ‘푸른 누드’(1907)가 발표됐을 때 비평가들은 “불편한 느낌을 주는 도발적인 작품”이라며 주목했다. 하지만 웬일인지 피카소는 비판을 쏟아냈다. “무릇 화가라면 단순한 색깔로만 변화를 주는 게 아니라 형태적인 면에서도 새로운 시각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며 그의 작품을 깎아내렸던 것. “색이 무엇인지 인류에게 가르쳐준 스승”이라는 말로 칭송되던 마티스의 작품에 대한 도전적 발언이었다. 피카소는 변신을 거듭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찾았다. 마티스가 활용한 기법들은 철저히 지양했다. 자연과 인간의 경계가 있는 듯 없는 듯 곡선으로 처리하고 강렬한 색으로 아우라를 발산한 ‘삶의 기쁨’은 피카소에겐 매우 중요한 도전 대상이었다. 그는 바짝 긴장했고, 힘찬 직선으로 원시적 생명력을 표현한 ‘아비뇽의 처녀들’(1907)로 응수했다. 입체파의 시작을 알린 작품은 그렇게 탄생했다. 평론가들은 그림 경쟁을 벌이게 된 두 사람의 비밀스러운 ‘심리’를 분석하며 마티스보다 더 뛰어나고 싶었던 피카소의 속내를 지적했다. 자신만의 영역을 확보해 미술계의 1인자가 되고 싶었던 피카소가 스승처럼 따랐던 마티스를 경쟁상대로 만들며 자신의 욕구를 드러냈다는 것이다. 흠모와 질투의 ‘붓 대결’ 마티스는 신중하고 사색적인 사람이라 홀로 조용히 작업하는 걸 좋아한 반면, 피카소는 사람들과 왁자지껄 어울리며 작업을 했다. 비슷한 취향은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지만 두 사람은 늘 서로의 작품에 끌렸다. 누가 먼저 시작했든 마티스와 피카소의 이른바 ‘붓 대결’은 그렇게 흠모에서 질투, 그리고 경쟁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피카소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맞춰 그림을 그리는 마티스를 강박증 환자로 몰아세우며 공격했다. 마티스도 이에 질세라 피카소의 콜라주 기법을 쓰레기라 비웃었다. 급기야는 서로가 자신의 작품을 표절했다고 주장하며 헐뜯었다. 피카소에게 실망한 마티스는 더 이상 그를 보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교류를 끊었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흘렀고 두 사람의 입장은 뒤바뀌었다. 피카소가 미술계의 거장이 됐을 때 병약해진 마티스는 조용히 여생을 보내다가 1954년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그러나 그가 생을 마무리하면서 남겼다는 한마디는 피카소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내 그림과 피카소의 그림을 함께 전시하지 말아주게. 불꽃같이 강렬하고 번득이는 그의 그림들 옆에서 내 그림들이 초라해 보이지 않게.” 마티스의 사망 소식을 듣던 날 피카소는 슬픈 얼굴로 창밖을 보며 “마티스가 죽었어, 마티스가 죽었어”라고 중얼거렸다고 한다. 자책감 때문에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한 그는 ‘캘리포니아 아틀리에’를 그리며 떠나간 마티스를 추억하고 애도했다. “다시 태어나 그림을 그린다면 마티스처럼 그리고 싶다”고 말했던 피카소는 1973년 92세에 눈을 감았다.
- 2020-05-02 08:00
-
- 오욕 딛고 일어선 거장 '비제이 싱'
- 오욕(汚辱)을 뒤집어쓰면 삶이 어떻게 될까? 그것도 외길 인생을 걷다가 앞길이 창창한 젊은 나이에 그랬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오늘은 그런 오욕을 딛고 일어서 마침내 거장이 된 사람 얘기를 해보려 한다. 누구 얘기냐고? 자주 그랬듯이 문제 나간다. 미국 프로골프투어(PGA투어)에서 역대 누적 상금이 가장 많은 선수는 누구일까? 에이, 너무 쉬운 문제라고? 타이거 우즈 아니냐고? 맞다. 상금 랭킹 누적 2위가 누군지도 맞힐 수 있을 것이다. 타이거의 라이벌이다. 그렇다. 필 미켈슨이다. 그렇다면 상금 랭킹 누적 3위는 누굴까? 통 짐작이 가지 않는다고? 마찬가지로 힌트를 주겠다.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꺽다리 선수다. 늘 선캡을 눌러쓰고 경기하는 선수 말이다. 어렴풋이 짐작이 간다고? 남태평양 작은 섬나라 피지 출신이라면 알겠는가? 그렇다. 바로 비제이 싱(Vijay Singh)이다. 비제이 싱은 지금까지 PGA투어에서 상금으로 7100만 달러 넘게 벌었다. 타이거 우즈 누적 상금 1억2000만 달러와 비교하면 어떤가? 대단하지 않은가? 나는 그의 한없이 부드러운 스윙에서 영감을 얻어 스윙을 많이 고쳤다. 에이! 뱁새 김 프로 스윙 보니 거칠게 휘두르는 모양새가 프로 아닌 것 같던데 무슨 소리냐고? 흠흠. 기껏 고친 게 그 모양이다. 아차, 얘기가 딴 데로 샜다. 다시 비제이 싱 얘기로 돌아가자. 그가 PGA투어에서만 34승을 올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눈썰미가 틀리지 않았다고 흡족해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그의 얘기를 조금 더 찾아보다가 그에게 기가 막힌 사연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그가 말로 할 수 없는 오욕을 딛고 일어서 인간승리를 거둔 사실을 말이다. 칼리만탄(흔히 보르네오라고 알고 있는 큰 섬) 북쪽 바닷가에 ‘미리’라는 도시가 있다. ‘미리’는 ‘아름다운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한자 ‘미리’(美理)를 그대로 읽은 것이다. 화교가 유전을 개발하면서 모여든 곳으로 중국 문화가 물씬 풍기는 도시다. 지명도 중국어 그대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말레이시아 사라왁 주에 속하는 미리 바닷가에는 ‘미리 골프 클럽’이 있다. 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이곳에 비제이 싱 눈물이 깃들어 있다. 1985년 인도네시아 오픈 2라운가 끝나고 나서다. 비제이 싱은 컷을 통과하고 주말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기절초풍할 통보를 받았다. 그가 제출한 스코어 카드가 실제보다 한 타 적다는 내용이었다. 그건 점수를 실제보다 좋게 써서 스코어 카드를 냈다는 얘기다. 조사 결과 사실로 드러났다. 그가 그 대회에서 실격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아시안투어는 비제이 싱을 영구 제명했다. 그는 고의로 그런 것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다. 말레이시아 VIP의 아들인 마커(같은 조 선수로서 해당 선수를 감시하는 역할)가 잘못 써서 넘겨준 스코어 카드에 무심코 사인을 했다고 변명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골프 규칙상 제출한 스코어에 대한 최종 책임은 선수 자신이 져야 하니까. 나는 그가 마커가 건넨 스코어 카드가 틀린 것을 알고도 ‘덥석’ 사인하고 제출했을 거라고 짐작해본다. 당시 그는 겨우 스물두 살이었으니까 말이다. 바로 한 해 전인 1984년 프로 데뷔 2년 만에 말레이시아 PGA 챔피언십에서 첫 승을 올린 그였다. 첫 승을 하고 청운을 꿈꿨을 청년이 투어 참가를 영구 금지한다는 결정을 통보받고 얼마나 참담했을까? 유혹을 참지 못하고 미래를 망친 자신에 대한 원망으로 눈앞이 깜깜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낙담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처지였다. 어떻게든 생계를 꾸려야 했다. 부양해야 할 가족까지 막 생긴 터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스코어를 속이는 부정행위를 했다는 불명예 꼬리표가 붙은 그를 반기는 곳이 있었겠는가? 이리저리 떠돌다가 겨우 자리를 잡은 곳이 바로 ‘미리 골프 클럽’이다. 그곳에서 그는 수년간 헤드 프로로 일했다. 골프 인구가 많지 않은 곳이다 보니 수입도 넉넉지 않았다. 곤궁이 주는 비참함은 말할 것도 없었다. 비제이 싱은 그곳에서 피눈물을 흘리며 칼을 갈았다. 빼어난 실력 덕분이었을까? 후원자가 나타난 것은 기적이었다. 그는 후원을 받아 아프리카에서 열리는 시합에 나갔다. 흔히 ‘사파리 투어’라고 부르는 투어의 원조격인 대회들이었다. 그러다 1988년 나이지리아 오픈에서 우승한다. 이듬해에는 유러피언 투어 퀄리파잉 스쿨을 통과해 유럽으로 건너갈 수 있었다. 건너가자마자 그는 볼보 오픈 챔피언십에서 첫 승을 거뒀다. 유럽에서 몇 년간 경험을 쌓은 그가 PGA투어로 건너간 것은 1993년이었다. 그해 뷰익 클래식에서 연장전 접전 끝에 우승을 하면서 화려하게 루키로 데뷔했다. 2000년에는 메이저 대회인 마스터즈에서도 우승한다. 이때부터 그의 전성기가 시작된다. 마흔 살이 넘어서 말이다. 이어 2004년에는 마침내 세계 랭킹 1위에 오른다. 그해 비제이 싱은 메이저 대회인 PGA 챔피언십을 포함해 무려 9승을 거둔다. 9승, 절정 기량을 뽐내던 타이거 우즈도 그를 말릴 수 없었던 해였다. PGA투어 최초로 한 해 상금 1000만 달러를 넘기는 기록까지 세웠다. 1963년생인 비제이 싱은 요즘 PGA투어 챔피언스에서 뛰고 있다. 명예를 잃고 좌절하고 있는 독자가 있다면 그를 보고 용기를 얻기 바란다. 물 흐르듯 하는 그의 스윙도 함께 마음에 담으면서 말이다. >>김용준 한마디로 소개하면 ‘골프에 미친놈’이다. 서른여섯 살에 골프채를 처음 잡았고 독학으로 마흔네 살에 한국프로골프협회(KPGA) 프로가 됐다. 영국왕립골프협회(R&A)가 주관하는 교육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KPGA 경기위원으로, 골프채널코리아에서 골프 중계 해설을 맡고 있다.
- 2020-05-01 08:00
-
- 어르신 1인 미디어 도전기 '슈퍼시니어' 예능 제작
- 시니어 세대에게 평생 직업의 대안을 제시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제작된다. 아프리카TV 자회사 프리콩은 20일 MBC D.크리에이티브센터와 함께 시니어들이 다양한 미션을 수행하며 ‘1인 미디어 크리에이터’에 도전해 새로운 직업을 찾아가는 관찰형 서바이벌 디지털 예능 프로그램 ‘슈퍼시니어’를 공동으로 기획 제작한다고 밝혔다. 최근 시니어들의 1인 미디어 이용률이 빠르게 증가하고, 이들의 오픈마켓, 소셜커머스 등을 통한 구매량이 크게 증가함에 따라 많은 브랜드와 기업이 홍보, 마케팅을 위해 다양한 시니어 크리에이터 발굴 및 양성에 나서고 있다. ‘슈퍼시니어’는 100세 시대를 맞은 시니어들에게 1인 미디어를 통해 인생 제2막을 엶과 동시에 수익 창출의 기회를 제공할 전망이다. 기업들에게는 방송을 통해 성장한 시니어 크리에이터를 직접 연결해 주는 오작교 역할을 수행할 것으로 기대된다. MC로는 방송인 하하와 아프리카TV 먹방계의 명실상부 원톱 BJ ‘쯔양, 국내 최정상 유튜버 도티’가 참여한다. 3MC들의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SNS 구독자와 팔로워 수가 도합 800만에 육박해 방송 협찬에 참여한 브랜드들에게 파급력 있는 제품 홍보 가능성을 제공할 전망이다. ‘슈퍼시니어’는 오는 5월부터 프로그램에 참여할 시니어들을 모집하고 본격적인 제작 일정에 돌입한다. 본인의 끼와 장기를 어필할 수 있는 시니어는 영상을 찍어 제출하면 된다. 자세한 일정 및 신청 방법은 별도 공지될 예정이다. ‘슈퍼시니어’ 첫 방송은 오는 6월부터 MBC 엔터테인먼트 유튜브 채널 및 아프리카TV를 통해 선보일 예정이다.
- 2020-04-20 10:16
-
- 여러 나라의 아열대식물이 한 곳에
- 제주감귤박물관에 아열대식물원이 있다. 아열대식물은 열대식물과 온대식물의 중간기후에 잘 자라는 식물군이다. 아열대식물원은 제주감귤박물관 부지 내에 별도의 유리온실로 시설되어 있다. 키 큰 나무인 교목류가 82종, 키 작은 나무인 관목류가 83종 그리고 초화류가 89종으로 총 254개의 종에 7,272주가 전시돼 있다. 감귤박물관의 입장료 1,500원만 내면 감귤박물원, 전통농가전시실, 아열대식물원을 모두 둘러볼 수 있다. 만 65세 이상은 무료다. 선인장류, 야자류, 다육식물류(알로에베라 등)까지 다양하게 볼 수 있다. 제주도 내 학생들의 학습의 장은 물론 국내외 여행객들의 여행코스로 이용된다. 다양한 야자류 종류가 눈에 가장 잘 띈다. 주병야자는 야자과 식물로 브라질과 볼리비아에 분포한 마스카르네 제도가 원산지다. 10m 이상 자란다. 술병 모양과 비슷해서 주병야자라고 이름지어졌다. 곤봉야자도 야자과 식물로 줄기가 곤봉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 외 카나리야자, 피닉스야자, 워싱톤야자, 아메리카야자, 여우코리야자 등도 볼 수 있다. 덕구리란은 백합과 식물로 멕시코 동남부가 원산지이다. 멕시코 서부 건조지역이나 관목지대에 분포하고 있으며 비대한 줄기에 물을 저장하는 초대형 다육식물이다. 자생지에서는 크게 자라지만 화분에 재배할 경우에는 성장이 느리고 어느 정도까지만 자라게 된다. 벤자민고무나무는 뽕나무뭇과로 인도가 원산지이다. 높이가 20m 이상까지 자라며 가지는 가늘고 길며 늘어진다. 재배온도는 15~35도에서 잘 자라며 번식은 꺾꽂이로 한다. 실내에서 주로 키운다. 킹벤자민도 뽕나무과로 인도서부와 말레이시아가 원산지다. 박쥐난은 고란초과로 원산지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이다. 나무나 바위에서 기생하여 사는 착생식물이다. 공중에 있는 습기를 먹고 살기 때문에 많은 물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잎 끝에 달린 포자로 번식을 한다. 꽃기린은 대극과로 원산지는 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가 원산지다. 1년 내내 피는 때도 있다. 꽃의 색깔도 빨간색, 분홍색, 노란색, 하얀색 등으로 다양하고 추운 겨울철에도 꽃을 볼 수 있다. 극락조화는 극락조화과로 원산지는 남아프리카다. 뉴기니와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서식하는 새인 극락조가 있는데 새를 닮아서 “극락조화”라고 불리게 되었다. 꽃이 상당히 크며 신비롭게 생겼다. 꽃이 아름답고 잎의 모양도 보기가 좋다. 미국, 유럽 등 화훼 선진국에서는 꽃꽂이를 만드는 주재료로 흔히 쓰인다. 꽃말이 “영구불변”이다. 호주 바오밤나무는 오스트레일리아 북부가 원산지이며 높이가 9m 정도까지 자라는 낙엽교목이다. 성목의 줄기의 지름이 2.7m 정도로 크게 자란다. 나무껍질은 갈색이 도는 녹색으로 연하다. 꽃이 10cm 정도로 흰색볼 형태이다. 점토질의 토양을 좋아한다. 원종바나나는 원산지가 인도와 히말라야이며 대형 다년초로서 크기는 2~6m다. 줄기 위에서 1개의 꽃이 나와 밑으로 자라며 품종에 따라 1개의 과방에 20~30kg의 열매가 달린다. 바나나 열매는 종류에 따라 생식용과 요리용으로 이용된다. 커피나무는 원산지가 아프리카이며 높이는 6~8m 정도이다. 가지는 옆으로 퍼지고 잎은 마주 보고 긴 타원 모양이며 두껍고 가장자리가 밋밋하다. 잎 표면은 짙은 녹색이고 광택이 있다.
- 2020-03-02 17:14
-
- 오렌지빛 겨울 노을을 슬그머니 담아 온 지중해 여행
- 창밖에 하얀 눈이 소복이 쌓여있는 겨울밤에 따뜻한 솜이불 속으로 몸을 담그는 순간 느껴지는 행복감. 그 포근하고 편안한 느낌이 겨울 여행의 맛이다. 뻔한 새해맞이를 하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겨울 여행에 갈증을 느꼈다. 그때 하나의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지중해는 푸른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황금빛 방울처럼 딸랑딸랑 울리던 곳…” 레몬 향 실린 따스한 바람과 지중해가 반사한 겨울 햇살이 내 영혼을 포근하게 적셔줄 것 같았다. 오렌지빛 겨울 노을을 가슴 속에 슬그머니 담고 싶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크레타섬’이다. 겨울에 만난 크레타 섬 크레타(Creta) 섬은 그리스 본토와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각각 300km 떨어진 정확히 중간 지점에 있다. 그리스에서 다섯 번째 큰 섬으로 제주도 면적의 4.5배 크기다. 아테네의 피레우스(Piraeus) 항구에서 밤 페리선을 타고 크레타 섬으로 향했다. 밭이랑을 세우듯 하얗게 물이랑을 일으키는 파도를 밤새도록 넘어 이른 새벽에 크레타의 이라클리온(Heraklion) 항구에 도착했다. 지중해의 겨울은 날씨를 예측할 수 없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바람과 비가 세차게 내리고 있었다. 세찬 바람이지만 찬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겨울바람이다. 살갗을 쓰다듬어주는 바람이 피부에 착착 달라붙었다. 나도 모르게 한 마디가 나왔다. “아! 바람 좋다.” 잠시 후 새벽 여명과 함께 나타난 야자수와 파릇파릇한 나무들은 멀리 동쪽에서 찾아온 여행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이라클리온의 중심지는 베니젤로(Venizelos) 광장이다. 광장 가운데 있는 1600년대에 만든 사자분수를 중심으로 수많은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주변에 있다. 비수기여서인지 문을 닫은 가게들이 눈에 띄었다. 하지만 밤이 되자 광장 주변은 물론 골목길에 있는 작은 카페와 바까지도 사람들로 가득 찼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다가 어두워진 후에서야 이렇게 나타나는지 놀라웠다. 그때부터 사람들은 밤이 하얗게 새도록 이야기를 나눈다. 이곳 사람들의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은 긴 겨울밤 내내 공감과 소통을 하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중해의 겨울밤은 하얀색 이야기의 성(城)이다. 겨울 석양을 맞이하기 위해 바닷가 길을 걸었다. 해안가를 따라 즐비하게 늘어선 예쁜 카페 거리가 아니라 황갈색 바위의 방파제 길을 걸었다. 길 중간에서 1500년대에 만들어진 ‘베네치아 요새’를 만났다. 크레타 섬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배를 받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지어진 군사시설이다. 겨울 지중해는 해 질 녘 주황색 하늘을 나에게 선사하지 않았다. 아마 겨울이 오면 여름을 기다리는 섬사람들의 마음을 알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람에게 선사하기 위해서 참았을 것이다. 방파제에 앉아 한숨을 쉬며 파도로 해변을 핥는 겨울 바다를 지켜보았다. 바다를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내가 바다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바다가 나를 지켜주는 것 같은 포근함이 밀려왔다. 미노스 문명의 크레타 섬, 크노소스 궁전 크레타 섬은 고대 그리스 문명에 영향을 준 미노스 문명의 중심지였다. 시내에 있는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에는 놀라울 정도로 발달한 청동기 시대 미노스 문명의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 앞에서 버스를 타고 2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크노소스 궁전’으로 갔다. 겨울이라 관광객도 거의 없이 한산해서 여유롭게 궁전을 둘러볼 수 있었다. 크노소스 궁전은 우리가 많이 알고 있는 그리스 전설 속의 반은 인간, 반은 황소였던 ‘미노타우로스’가 살았다는 전설로 유명한 곳이다. 미로 같은 건물로 지었다는 이야기가 충분히 나올 만한 규모와 구조였다. 서로 연결된 방이 무려 1,400개라고 한다. 벤치에 앉아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궁전에 얽힌 인물과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꿰어 보는 시간을 가졌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만나다 크레타섬 출신으로 유명한 사람을 꼽는다면 화가 ‘엘그레꼬’, 가수 ‘나나 무스끄리’와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를 뽑을 수 있다. 이라클리온을 둘러싼 성벽 위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가 있다. “최후의 유혹”이라는 작품으로 인해 그리스정교회와 로마가톨릭으로부터 파문을 당했기 때문에 공동묘지에 묻히지 못하고 성벽 위에 있었다. 바람 부는 성벽 위, 그의 묘는 소박했다. 묘비의 글처럼 죽어서도 욕심내지 않은 모습이었다. 평평한 돌과 묘석 그리고 나무 십자가 그것이 모두였다. 묘비에는 그의 소설에서 따온 유명한 문장이 새겨져 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욕심과 욕망을 버리고, 자유롭게 삶을 즐기라는 그의 외침이 바람에 실려 귓가를 맴돌았다. 자유를 갈망하며 거칠고 힘든 삶을 살았지만, 탁 트인 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지금의 자리가 그의 영원한 안식처로 선택된 것은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 고개를 돌리면 조금 떨어진 곳에 니코스 카잔차키스 문학의 동료이자 사랑을 알려 준 두 번째 부인 엘리니의 묘가 있다. 그녀의 묘 역시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묘 주변을 둘러볼 때 벤치에 앉아 색연필로 그림을 그리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파리에서 프랑스 문학을 가르치고 있는 ‘페르(Ferr)’였다. 한국에서 교환학생으로 1년 동안 공부했었다는 그녀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와 크레타 섬을 정말 좋아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그의 문학과 그의 외침 ‘자유’에 열광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유롭지 못해서 더 자유를 열망하는 것은 아닐까. 사람과 시간, 사연이 오가는 겨울의 항구 크레타 섬에서 이라클리온 다음으로 큰 도시는 하니아(Chania)다. 이곳 역시 베네치아 공화국과 오스만 튀르크의 지배를 받았었다. 여러 문화가 공존하는 낭만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의 작은 예쁜 항구다. 하니아는 이라클리온에서 시외버스를 타고 3시간을 가야 하는 거리에 있다. 하니아로 가는 도로는 해변을 따라가는 풍경이 아름다운 길이다. 가는 내내 올리브 나무가 지천에 깔려있는 구릉지들이 바다와 함께 길옆으로 함께 달린다. 크레타 섬에는 30,000그루의 올리브 나무가 있다고 한다. 자연스럽게 올리브 관련 상품들이 특산품으로 많이 판매되고 있었다. 하니아 베네치아 항구의 작은 카페에 앉아 한가로운 시간을 보냈다. 지중해의 겨울 햇살이 내 몸을 관통하고 있었다. 항구는 배만 오가는 곳이 아니었다. 수많은 사람과 시간, 사연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안에 나의 시간도 있었다. 지금까지 나를 지키는 것조차 버거워 얼마나 많은 것들을 외면해 왔는지 크고 작은 것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조르바의 말처럼 매사를 정밀하게 재는 저울 한 벌을 내 안에 가지고 있었다. 이제 저울을 버릴 때다. 필요한 건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다. △ 지중해 섬 여행 정보 Tip (아테네에서 크레타 섬 가는 방법 중심으로) - 아테네 피레우스 항구에서 페리를 타면 된다. ‘미노안 라인’과 ‘블루 스타 페리’ 두 개 노선이 있으며 크레타 섬까지는 9시간 정도 걸린다. - 피레우스(Pireaus) 역까지는 지하철(Metro) M1 노선을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 피레우스 항구 입구에는 배를 타는 각 게이트로 가는 무료 셔틀버스를 운행하고 있다. . - 예약서를 페리 타는 게이트(Exit)에 있는 부스에서 탑승권으로 교환하면 된다. 혹은 직접 구매해도 된다. ▪ 미노안 라인 예약 홈페이지 www.ferries.gr/ ▪ 블루 스타 페리 예약 홈페이지 www.bluestarferries.com ※ 크레타 섬 외에 산토리니 등 다른 섬을 가기 위한 예약과 승선도 동일한 방법으로 하면 된다. ※ 겨울철에는 숙박비, 렌트비 등 모든 요금이 절반 정도로 싼 편이다. 하지만, 바람이 불고 파도가 높으면 배가 출항을 못 해 발이 묶여 있을 수도 있다. (물론, 비행기를 이용하는 방법도 있다) 겨울철 지중해 섬 여행은 반드시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일정이어야 한다. △ 크레타 섬 추천 먹거리 베니젤로 광장 꼬치구이 전문점
- 2020-01-14 14:32
-
- 비행기 여행, 더 편하게
- 연말연시, 장거리 여행을 많이 다니는 때다. 항공기 이용은 장거리 여행의 출발점이다. 고급 좌석이면 더없이 좋겠으나 경비 부담으로 일반석을 이용할 때 좁은 좌석이라도 편하게 갈 방법이 있다면 관심 가져 볼 만하겠다. 스스로 좌석을 관리해보는 요령 몇 개. 첫 번째는 창문 쪽 좌석이냐, 통로 쪽이냐다. 선택의 여지가 없으면 몰라도 좌석을 고를 수 있다면 신경을 쓰는 것이 여행을 즐겁게 하는 조건일 테다. 창문 쪽이 좋을까, 아니면 통로 쪽을 선택해야 할까? 동남아 지역이나 중국, 일본 등 가까운 나라로 갈 때는 창가 쪽이 좋다. 왜냐하면, 바깥 경치를 구경할 수 있어서다. 장거리, 즉 아프리카, 미국, 유럽 등의 여행은 통로 쪽이 편하다. 화장실을 이용할 때 전등을 끈 시간대라면 옆 좌석의 사람을 깨우기가 곤란해서다. 특히 나이가 들어 화장실을 자주 가야 하는 사람이나 여성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아울러 장거리 비행은 단거리에 비해 높은 고도로 비행하기에 외부 온도가 낮아 창문 쪽이 더 춥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두 번째는 앞쪽 좌석이냐, 뒤쪽 좌석이냐다. 앞 좌석은 먼저 내릴 수 있어서 출입국 수속을 빠르게 할 수 있는 이점이 있고 흔들림이 적은 편이어서 멀미를 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된다. 다른 위치보다 공간이 너른 편이어서 배정받기 쉽지 않다. 마일리지가 많은 고객 등에 우선한다. 날개 부분의 좌석도 덜 흔들린다. 또한, 단체여행객이 탑승했을 때는 다소 소란스러워진다. 그들의 소음에서 벗어나는 위치도 앞쪽이다. 그밖에 또 하나는 좀 더 나은 쪽의 좌석으로 변경하는 방법이다. 쌓아둔 마일리지가 많으면 좋은 좌석 발권을 받을 수 있다.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놓치고는 있지 않을까? 칠순이나 결혼기념일 등 특별한 목적의 여행일 때 항공사에 이야기하면 더 편안한 좌석을 배정받을 수도 있다고 한다. 물론 확실하지는 않아도 밑져야 본전이니 한 번 시도해 볼 만하다. 그뿐만 아니라 옆자리 아이가 심하게 우는 경우라든지 배정된 좌석의 등받이 등에 불편한 점이 있으면 다른 좌석으로 옮겨 주기도 한다는 것을 알아두면 도움이 되지 싶다. 해외여행은 그 출발과 마무리가 비행기 안에서 이루어진다. 여행 추억의 시작이고 끝을 장식하므로 편안하고 편리한 좌석 관리는 여행을 즐겁게 하는 요소다. 활용할 수 있는 좌석 관리 팁들을 여행 계획에서 놓치지 말자.
- 2019-12-24 09:54
-
- 차 마시는 도예가 모임 ‘다유(茶裕)’
- 차는 오묘하다. 차의 맛과 향을 살리는 것은 찻잎과 물, 그릇, 그리고 사람이다. 최고의 맛을 찾아가는 여정이 즐거워 차를 마시게 된다. 특히 차는 담아내는 찻그릇이 있어야 하고, 찻그릇 또한 차가 담겨야 존재의 이유를 드러내게 된다. 찻그릇의 고마움을 아는 차인과 차의 맛을 보다 깊게 담아내고자 하는 도예가가 넉넉한 마음으로 만나 차를 나누게 됐다. 차를 마시는 도예가들 모임 ‘다유(茶裕)’다. ‘다유’는 경기도 여주시에서 활동하는 도예가 모임이다. 찻그릇을 빚는 이들의 모임은 선향다례원 구자완 원장의 권유로 시작해 10년 넘게 차와 함께하고 있다. 현재는 유만 이청욱, 유담 문찬석, 유장 최민록, 아얼 이성현 작가가 다유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곳은 최민록 작가의 도자기 작업장 겸 전시장인 민토. 흙이 켜켜이 쌓인 작업장을 통과해 밖으로 난 철 계단을 올라가니 다양한 찻그릇이 진열돼 있는 전시장이 모습을 보였다. 차인답게 전시장 안은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으로도 활용하고 있었다. 문찬석 구자완 원장님을 만나 뵙기 4~5년 전부터 여주의 ‘도자기를 사랑하는 모임’ 도예가 20명 정도가 이미 모여서 차를 마셨습니다. 도자기 관련 연구를 하는 모임이었는데 차에 대해서도 많은 얘기를 해보자고 해서 시작했죠. 구 원장님은 2005년 여주도자기축제 행사장에서 만났습니다. 그 인연이 모임 다유로 이어진 것이죠. 2007년 9월부터 정식으로 차를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구자완 원장은 차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찻그릇이 필요했고 차를 좀 아는 사람들이 찻그릇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하고 있었다. 이후 다유 회원들은 구 원장으로부터 우리나라 차를 기본으로 중국 차, 일본 차 등 각 나라 차의 역사를 배워나갔다. 행다(行茶) 실습도 꾸준히 했다. 제다(製茶)하는 곳에도 찾아갔다. 녹차잎을 하나하나 직접 따고 무쇠솥에 덖어 1년 치 녹차도 만들고, 발효차인 황차를 만드는 과정도 체험했다. 여주 출신인 구 원장은 고향 도예 작가들에게 본인이 쌓아온 차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나누어주면 한층 더 높은 예술 세계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매주 서울과 여주를 오가며 차 공부를 이어갔다. 구자완 원장 다유를 통해 여주의 도자기를 알리고 싶어서 제안했습니다. 도예가들이 차를 알아야 찻그릇을 더 잘 만들 테니까요. 그리고 다유 회원들과 서울에서 만나 함께 전시회에 가서 감상도 하고요. 10여 년 함께 공부를 하면서 알게 모르게 차원이 높아진 것이 사실입니다. 다유의 도예가들은 구 원장에게서 다호(茶號)를 받았다. 차를 3년쯤 공부하면 선생으로부터 받게 된다고. 이들이 다호를 받던 해, 구 원장 산하 차회의 돌림자가 넉넉할 유(裕)자였기 때문에 유장(裕匠), 유만(裕滿), 유담(裕潭) 등의 호가 내려졌다. 차생활을 하는 사람으로 정식 인정을 받았다는 의미다. 이청욱 배우고 익혔으니 이제 차인이 된 것이죠. 저희는 차를 마시는 도예가입니다. 다유의 근원은 차를 통해 도자기를 보다 더 깊이 있게 알아가자는 의미에서 출발합니다. 술보다는 차를 마시면서 만나는 것이 훨씬 좋잖아요. 정식으로 배우면서 그 깊이를 알아가는 중입니다. 차 맛을 알기 전에는 찻그릇에 대한 차인들의 평가에 중심이 흐트러지기도 했다. 예술가로서 어떤 것이 옳고 그른 것인지 갈피를 잡기 위해 애쓰기를 반복했다. 차생활을 하면서 찻그릇을 빚고 대하는 마음이 많이 변했다. 최민록 차를 배우기 전에는 찻그릇을 주문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좌우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도예가도 결국은 도자기를 만드는 제조자잖아요. 이용자의 요구에 귀 기울여야만 했습니다. 차를 배우게 된 이유는 찻그릇을 보러 오시는 분마다 선생이시더라고요. 지역마다, 사람마다 의견이 참 많이 달랐습니다. 차를 모르던 제 입장에서 기준을 정하는 게 어려우니 수긍하며 작업해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차나 그릇에 대해 의견을 나눌 수 있어서 좋습니다. 차 도구에도 유행이 있어요. 예를 들어 예전에는 크고 투박한 문경 쪽 다기가 유행했다면 요즘은 중국 차를 많이 마시게 되면서 다기도 작아지고 잔도 좀 더 얇아졌어요. 그런 변화들을 가늠하는 것도 쉽고요. 차 공부 이후 다양한 찻그릇을 만들고 있습니다. 다유 활동을 하면서 가장 의미 있는 행사는 ‘장작가마 문화제’다. 원래는 다유 회원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다유 브랜드 데이’ 행사로 5년여 이어오다 좀 더 전통적인 방법으로 도자기 굽는 모습을 재연해보자는 의미로 확장했다. 여주 신륵사의 전통가마에서 구워낸 찻그릇을 꺼내고 감상하고 저렴하게 판매도 한다. 특히 이때 헌다례(獻茶禮,제례의 한 순서라는 의미 외에도 종교적 대상에게 예배의 한 행위로서 차를 올리는 것) 시연을 다유 회원들이 직접 한다는 점. 차 공부를 하는 인구 대부분이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 차인이 시연하는 모습은 ‘장작가마 페스티벌’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올해 행사는 아프리카 돼지열병 파장으로 전면 취소됐다고. 이청욱 다유 회원의 기본은 차를 배운 사람으로서 차 도구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저희만큼 시간도 낼 수 있어야 해요. 차도 마셔야 하고 행다 연습도 해야 하기 때문이에요. 또 새로운 작품에 대한 의견도 나누고 다례 행사가 있으면 동작도 맞춰봐야 합니다. 이런 작업들 외에도 할애해야 할 시간이 많습니다. 가끔 저희가 행사에서 행다 혹은 헌다례 시연을 할 때도 있거든요. 차가 어려운 게 아니라 시간을 내는 것이 어렵습니다. 이성현 다유 회원으로 활동하고 싶어 하는 분들이 더 계시지만 전문적으로 차 도구를 빚는 분이 드뭅니다. 회원 기본 조건에 안 맞는 분들의 가입을 허락해드리지 못할 때는 저희도 많이 아쉽습니다. 다유 회원이 되기를 원한다면 차생활도 해야 합니다. 다유는 이런 기본적인 요건들이 충족 안 될 때는 신입회원으로 가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주가 도자기로 유명한 도시이기는 하나 찻그릇을 만드는 작가들보다 생활자기를 만드는 이가 훨씬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활발해지는데 여주는 문경이나 이천 같은 곳에 비해 차 마시는 인구가 적고, 전문 차인 단체가 미미한 수준이라고 다유 회원은 입을 모았다. 최민록 여주에는 차 마시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아요. 차 모임이 아주 드물죠. 그래도 차과 관련해서 명성왕후 탄신제와 여주문화원에서 차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여주에서 차를 중심으로 모이는 사람들은 다유밖에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변이 확대되는 것도 참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행위를 해도 홍보도 안 되고 즐기는 사람이 없으면 이 일이 재미없어질 수도 있겠죠. 찻그릇을 제대로 만들기 위해 수년간 차를 배운 사람들의 모임인 다유 작가들과의 만남. 한참을 앉아 차를 마시는 도예가가 엄선한 차를 나눠 마셨다. 차를 이해하는 작가가 우리의 흙으로 빚고 장작 가마에서 구운 찻그릇이 상에 올라왔다. 그리고 이 찻그릇에 우려먹는 차 맛이란? 말로 표현이 가능하겠는가! 감동 그 자체다.
- 2019-11-15 08:57
-
- 가을 여행으로 ‘1밀리미터 변한 나’
- 사람들은 제각각 피로를 벗어나는 자신만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내 경우에는 ‘나‘를 벗어나 조금이나마 ’다른 존재‘로 살아보기 위해 아무 연고가 없는 곳으로 여행을 떠나곤 한다. 이번 가을에도 그런 이유로 가방 하나 달랑 들고 찾은 곳이 동해시다. 오래전부터 두타산과 청옥산의 무릉계곡이 있는 동해시에 가고 싶었다. 동해시의 무릉계곡은 백두대간의 줄기로 동서 간 분수령을 이루는 깊고 험준한 두타산과 서쪽의 청옥산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곳이다. 내가 동해시의 무릉계곡에 갔을 때 두타산과 청옥산의 능선에 내려온 가을은 노랑, 빨강의 색들이 서로 합쳐지며 있었다. 그들은 서로 뒤엉키고 섞이면서 하나의 층을 이루었다. 가을 햇빛은 차가운 공기와 잘 어우러졌다. 언제 이렇게 여름이 가고 가을이 왔는지. 갈색 나뭇잎들은 가지를 길게 빼고 툭툭 떨어졌다. 숲속 길에, 골짜기 흐르는 물 위에. 아프리카 격언- ‘너무 빨리 걷지 말아라. 영혼이 따라올 시간을 주어라.’ 그렇게 걸을 수 있는 길이 무릉계곡의 길이다. 가파르지 않은 산길을 ‘남’이 되어 걸으면서 ‘나’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길이다. 입구의 관리사무소를 지나 조금 걸어가면 계곡 바로 옆에 있는 1,500평 정도의 넓은 반석을 만나게 된다. 이 반석 위에는 이곳에 왔던 명필가와 묵객들이 새겨놓은 수 많은 크고 작은 석각들이 있다. 그 글 중 이 계곡을 무릉선원(武陵仙源)으로 표현한 글귀가 있다. 무릉반석 위쪽에는 유서 깊은 사찰인 삼화사가 있다. 신라 시대 선덕여왕 11년(642년)에 창건한 사찰로 고려 태조 때 ‘삼화사’로 개칭되었다. 이곳에는 보물로 지정된 삼층석탑과 ‘철조 노사나불 좌상’이 있다. 길을 따라 서 있는 사찰의 담에는 배고픈 담쟁이덩굴이 벽을 타고 기어 올라가고 있었다. 계곡을 따라가는 길에서 만나게 되는 절경들로 학소대, 관음폭포, 선녀탕, 쌍폭포, 용추폭포 등이 있다. 화강암 암반 위에서 떨어지는 이 폭포와 소(沼)들에는 저마다의 사연과 풍경이 있다. 각각의 이야기와 풍경을 함께 하다 보면 유체 이탈된 나를 만나게 된다. 무릉계곡 입구 맞은편에 맑은 공기와 물소리, 새소리로 신선한 기운을 찾을 수 있는 ‘동해무릉 건강숲’이 있다. 이곳은 심각해지는 환경성 질환을 예방하고 교육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설이다. 하루 100여 명이 이용할 수 있는 친환경 숙박동과 테마체험실, 자연식 건강 식당 등을 갖추고 있다. 친환경 숙박 시설은 황토와 편백나무 등 친환경 자재를 이용해 만든 숙박 시설로 38개의 객실이 있다. 테마체험실에는 건강에 좋은 소금 동굴 등 각종 찜질방과 산소힐링방 등을 갖추고 있다. ‘동해 무릉 건강 숲’에서 힐링의 밤을 보낸 다음 날 ‘한국인이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에 선정되었던 ‘추암촛대바위’가 있는 해안으로 갔다. 미묘한 해안 절벽을 따라 만들어진 길에서부터 이어진 추암근린공원까지 잘 조성된 하나의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그중에서도 동해의 맑은 바닷물과 크고 작은 바위에 잘게 부서지는 파도, 그리움이 배인 촛대바위는 해안의 주인공이었다. 촛대바위의 하늘을 찌를 듯 솟은 그리움이 가슴 깊이 새겨졌다. 그 그리움은 단지 힘이 세다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었다. 그리움의 힘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나에게 물었다. 움츠러든 가을 여행자의 마음을 토닥거려주었다. 동해시는 너무 볼 것이 많아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자연체험 학습장인 ‘천곡천연동굴’도 도심에서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VR 체험 시설과 함께 석회암 동굴의 모든 것을 경험할 수 있는 곳이다. 한국에서 가장 긴 걷는 길인 ‘해파랑길’에 속하는 바닷가 길도 동해시에 있다. 해파랑길은 총 길이 770km로 부산의 오륙도에서부터 고성군의 통일전망대까지 동해안을 따라 걷는 ‘태양과 걷는 사색의 길’이다. 이중 ‘해파랑길 33코스’와 ‘34코스’가 동해시에 속하는 길이다. 한섬에서 출발해 천곡항을 향해 걸었다. 동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았다. 바다를 낀 소나무 숲길도 좋았고, 잘 닦여진 데크의 계단에 앉아 바라보는 바다도 좋았다. ‘우리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해파랑길을 걸을 때 들었다. 누구라도 무엇엔가 사로잡혀 있지 않은 인생을 살고 싶어 하는데... 아직도 현실에 존재하는 나와 내가 꿈꾸는 나가 내 안에서 두 개의 심연으로 존재하고 있음이 느껴졌다. ‘그래, 언제까지고 가슴 아픈 방황을 계속해보자. 내 마음 깊은 곳의 온갖 울림과 떨림, 미세한 균열과 변화의 틈새를 지켜보자. 조금씩 전과 다른 나를 향해 아주 느리게 변해가는 나를 발견해보자.’ 가을의 어느 날에 간 동해시 여행을 통해 1㎜(밀리미터) 변한 내가 보였다. ▪ 무릉계곡: 강원도 동해시 삼화로 538. ▪ 동해 무릉 건강 숲: 관련내용 홈페이지 참조 (http://forest.dh.go.kr) ▪ 천곡천연동굴: 강원도 동해시 동굴로 50. ▪ 추암촛대바위: 강원도 동해시 촛대바위길 6. ▪ 해파랑길: 동해시청 관광과
- 2019-11-13 09:12
-
- 산야에 은둔했으나 창작욕의 화톳불은 활활!
- 예술이 인간을 구원하고 영혼을 인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건 좀 과한 예찬일지도. 사르트르의 말마따나, 굶주려 죽어가는 아이 앞에서 예술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예술은 현실의 벽을 으라차차 걷어차는 행위라는 점에서 위력적이다. 종교, 사상, 철학을 부수거나 뛰어넘는 곳에 예술이 있지 않던가. 그런데, 창작이란 지병에 시달리는 것처럼 끔찍한 싸움이다. 거역할 수 없는 유령에게 덜미를 잡히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진짜 예술가’의 경우에 말이다. 도예가 신상호(72). 웅장한 창의적 행보로 ‘거장’이라는 평을 듣는 인물이다. 그는 어떻게 사나. 예술과 맞붙어 무엇을 얻나. 도예란 흙과 불을 다뤄 도자(陶磁)를 만드는 장르다. 그러나 신상호의 작업엔 이미 형식이 없으며, 경계가 없다. 일찍이 전통 도예의 권위자로 부상했던 그는 무적함대, 또는 해적선과도 같은 거침없는 도발과 활보로 혁신적 현대 도예를 구현했다. 그의 작업은 진즉에 조각으로, 회화로, 심지어 건축 영역으로까지 대차게 확장됐다. 실험적 현대 도예의 전위이자 전사다. 신상호의 작업실 ‘부곡도방’은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야산 자락에 있다. 45년째 이곳에 산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장직을 박차고 나온 2008년 이후엔 일체의 외부 일을 작파, 붙박이 장롱처럼 이곳에만 틀어박혀 창작에 진력해왔다. 부곡도방은 살림채, 작업실, 전시장, 휴게실 등속으로 이루어졌다. 놀랍게도 건물과 공간과 사물의 거의 모든 게 작품이다. 학교 운동장처럼 널찍한 마당에 늘비한 대형 조각과 소조들. 건물의 내부는 물론 외벽 도처에 조직적으로 부착한 세라믹 작품들. 창작에 혼을 빼앗긴 한 남자의 일상적 관습이 어떤 식의 지독한 양상인가를 한눈에 알게 하는 풍경이다. 가슴 깊이 제 할일을 품은 자는 제 할일 외엔 관심이 없는 법. 그는 무위(無爲)로 구하는 정신세계에는 더더구나 관심이 없으니 앉으나 서나 작업에 분망하다. 산야에 은둔했으나 심중엔 창작욕의 화톳불이 활활! 45년 전, 이곳에 들어온 이유는? “어릴 적에 경험한 어머니의 된장찌개 맛을 잊지 못하는 것처럼, 사람에겐 자연을 찾는 본능이 있지 않던가. 그게 간절하면 회귀할 수밖에 없다. 흙과 불을 다루는 직업적 특성상 산야에 사는 게 적합하기도 하고.” 과거 청년기엔 경기도 이천에 작업장을 두었다. 당시의 작업 내용은 어땠나? “현대 도예와 전통 도예 작업을 병행했다. 한국인으로서 전통에도 애정을 가지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뭘 하든 도예로 먹고살기가 쉽지 않다. 나 역시 이천에선 판매 위주의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그러자 회의가 몰려들더라고.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하자! 그런 생각으로 이천과 작별했다.” 국내외로 신상호는 도예의 첨단을 활주하는 작가로 알려졌다. 많은 작가가 시대의 첨단 트렌드에 천착한다. 그들과 당신은 어떻게 다른가? “미술은 새로워야 예술이다. 나는 끊임없이 나만의 새로운 아이디어로 나만의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는 데에 주력했다. 단순히 신사조를 뒤따라가는 식의 첨단성과는 다르다. 남이 이미 시도한 걸 비슷하게 흉내 내는 방식, 난 그런 걸 극단적으로 두려워한다.” 예술에 있어서 새로움이란 날마다 눈뜨면 자동으로 다시 맞이하는 새아침과 다르다. 시대의 증상을 읽는 안목과, 고도로 발달한 직관과 센스가 합세하지 않고서는 구하기 힘든 질료다. 신상호는 실험정신이라는 갈고리로, 범속한 세상 징후들의 안과 밖에 감춰진 새로운 테마와 소재를 찍어내는 것 같다. 실험정신이라는 에너지의 배양을 위해 그는 많은 여행을 했다. 여행 견문이 안목과 관점을 갱신해주기 때문에. 충실한 독서생활 역시 그의 수칙이다. 지적 단련이 선행되지 않으면 창의도 돋지 않아서겠지. 예술이 사기라는 말은 진리다 나는 신상호의 작품에 쓰러질 것 같은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아프리카 토템 조각상에서 영감을 받아 그가 제작한 동물 두상(頭像) 시리즈물에서였다. 이는 기묘한 추상 도조로 형상의 압도적인 이색, 그리고 관람자에게 즉각 원초적 상상력을 촉발시키는 감염력으로 탁월했다. 전대미문의 도예로 평가된 이 작품들은 그의 이름을 세계에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지금도 장작 가마로 작품을 굽는가? “미술도 과학을 피해갈 수 없다. 특히 가마 작업이 중요한 도예엔 과학이 붙어야 한다. 장작 가마를 고집할 일이 아닌 거다. 난 나무 가마를 가스 가마로 전환한 최초의 작가였다. 비난이 쏟아지더군. 매국노라는 소리까지 들었다.” 해외에서 호평을 받는 반면, 국내에선 오히려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한다. 정말 그런가? “나는 아웃사이더다. 그게 나의 강점이지. 뭐 국내건 국외건, 평판엔 관심 없고. 나름의 정직한 작업을 계속해왔다는 걸 자족할 뿐이다. 게다가 작가로서 충분히 다양한 경험도 쌓았다. 미국과 영국의 대학에서 교환교수를 하면서는 세계의 흐름을 보고 듣고 배웠다. 세계 무대에서 경쟁해야 할 필요성도 깨달았지. 그러나 이미 배운 지식과 경험에 안주하는 건 우습다. 다 놔야 하지 않겠나. 고정관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이다. 쥐었던 걸 거듭 놔야만 새로 채울 수 있다는 얘기다.”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 선생은 “예술은 사기”라 했다. 혹세무민이나 착취가 없는데, 예술이 어떻게 사기가 되지? “예술이 사기라는 말, 그거 진리다. 일테면 미술시장을 보라. 장삿속에 이골 난 화상들이 한마디로 사기를 치고 있지 않은가? 이건 세계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나라의 경우엔 안목 없는 소비자들이 대부분이라 사기가 더 쉽지. 이렇게 예술작품이 사기 수단으로 전락한 현실 풍토. 그걸 꼬집는 데에 백남준 선생의 뜻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뉴욕 소호의 길거리에서 난 자주 선생을 만났다. 그는 늘 말했다. ‘나, 사기치러 가!’ 하하핫. 여하튼, 선생은 한국에서 나온 유일한 세계적 작가였다.” 어떤 기자가 왜 뉴욕을 좋아하느냐고 묻자 “범죄가 많아서 좋다”는 백남준의 답이 돌아왔다. “사회가 썩고 인생이 썩어야 예술이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 화통한 백남준은 때로 돈에 시달렸다. 지구 전체에 이름이 났지만 현실이 그랬다. 무소유가 좋다지만 그건 이미 가진 사람의 허세일 가능성이 크다. 세사에 둔하게 마련인 예술가에겐 흔히 궁핍이 따개비처럼 들러붙는다. “백남준 선생이 값싼 고물 TV로 작업을 한 것도 주머니 사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폭넓고 깊이 있는 예술작업을 일관해 성공했다. 특유의 천재적인 쇼맨십과 타협적 기질 역시 그의 강점이었지. 돈 문제에서도 그런 강점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을 거다. 그런데, 난 그게 안 된다.” 작품이 팔리지 않는가?” “안 팔려. 죽겠어.” 왜지? “비싸서.” 화상들이 드나들 것 아닌가? “내가 있어 보여서일까? 아예 접근하지 않는다. 약해 보이는 구석이 있어야 파고들 텐데 그렇질 않아서일 거다. 저놈은 빈틈이 없다! 그렇게 보는 거겠지. 물론 나는 강인하고 직정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내 인생은 허점투성이다.” 작가란 고난을 자양으로 해 성장한다. 불편과 불안을 절호의 찬스로 여기는 게 진정 자유로운 삶일 테고. “불편은 맛이 있다. 어떻게든 해결하게 되는 맛도 괜찮고. 그런데 왜 모두들 이악스럽게 돈 하나만 좇나? 돈에서만 행복이 나오던가? 나이 든 사람들도 그렇고, 모두들 공부를 하지 않아서 생긴 폐단이라 본다. 거듭 자신을 씹어 고통스럽게 반추해야 한다. 정체되면 썩을 수밖에 없다. 어떤 화가가 그러더군. ‘내겐 돈 버는 게 예술이다’라고. 야, 별게 다 예술이구나.” 불편과 고독과 고난, 이 모든 고통을 예찬할 일은 아니지만, 고통을 일부러 추구할 것까지야 없겠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고통을 경유하지 않고는 좀체 길이 열리지 않는다. 진흙을 딛지 않고 피는 연꽃이 있으랴. 궁지에 몰린 쥐는 고양이를 물지만, 불편에 쫓긴 작가는 퍼뜩 빛나는 작품을 건져 올리기도 한다. 일상의 불편과 치열하게 맞서는 힘. 그게 신상호의 타고난 근성이자 예술혼의 토대일지도. 후회? 그런 건 하지 않는다 도예 창작이란 왜가리가 유유히 강을 건너는 일과 달라 최후의 기력 한 방울까지 쥐어짜야 가능한 행위다. 정신을 쏟아야 하며, 흙을 움켜쥔 손으로 고강도의 노동을 치러야 한다. 그러자면 강건한 체력이 필수. 의외로 많은 작가가, 체력에 기반을 둔 집요한 깡이 결과를 가른다고 말한다. 신상호 나이 어언 70대. 그러나 그에겐 체력 여부를 초월하는 갈증과 열망이라는 게 있다. “나이 먹어서도 해낼 수 있는 작업을 찾으면 된다. 작업이 나를 늘 들뜨게 하는 것이지. 작업 외에 다른 것엔 관심도 미련도 없다.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도 않다. 새벽 3시에 일어나 작업실로 들어가 오후 4시까지 일을 한다. 단순한 나날들이 이렇게 흘러간다. 요즘은 친구도 없다. 그게 난 좋다. 사람을 만나면 스트레스를 받을 뿐이니까.” 예술가는 창조의 충동에 사는 사람이라는 점으로 다른 사람과 구분된다. 그들은 상식이나 모럴을 넘나든다. 자의식도 강해 누가 뭐라 하건 귀 기울이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자기에게 내린 명령에 따를 뿐이다. 그들은 권력에 꼬리치지는 않지만, 세상이 그에게 부여한 명예에 취해 스스로 권력이 되기도 한다. 조지 오웰이 말하길, 예술가의 열정은 순전한 이기심, 즉 명예욕에서 추동된다고 했다. 당신을 추동해온 동기는 무엇이라 보는지. “내게도 그런 게 왜 없겠는가. 평생 자신과의 싸움으로 작품을 해왔지만 강한 명예욕, 그걸 떨치긴 어려웠다. 허욕이고 허영이겠지. 그런 군더더기를 죽기 전엔 다 깎아내고 싶다. 내가 다 옳은 건 아니다.” 별안간 보고 싶어지곤 하는 얼굴이 있다면? “없다. 예전엔 다양한 인간관계가 있었지만 일부러 다 끊었거든. 그런 내게 작가들에게 흔한 무슨 일탈 같은 건 없었다. 염문을 뿌린 적도 없고, 아내와 불편한 관계에 빠진 일도 없다. 연애감정과는 다른 돈독한 정, 아내와의 사이엔 그게 있어 나를 행복하게 한다. 알고 보면 당신은 참 품성이 선해! 아내가 그렇게 치켜세우면 나는 설렌다.” 이제 와 생각하자니 크게 후회되는 일이 있다면? “후회? 그런 걸 왜 하나.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온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지 않겠는가. 참혹한 실패의 경험으로 오래 괴로운 적은 있었다. 또 하나 자인할 것은, 나와 주변과의 관계를 객관화해서 느긋이 관조할 만한 거리를 가질 수 있는 교양을 결여한 흠, 그것이다. 난 지금도 싫은 사람과 마주앉기를 질색한다. 당장에 쫓아낼 지경으로.” 추방령을 다반사로 내린다는 일. 그건 아마도 내부에 서린 파시즘이라기보다 홀로 생태계를 이룬 사람의 특유의 수비 방식이겠지. 미술작업이라는 믿을 만한 벙커에 들어앉은 자존감의 표명일 테고. 신상호가 살기등등한 송골매는 아니지만, 창작에 취한 그의 냉정한 열정엔 으스스한 뭔가가 들어 있다.
- 2019-11-11 08: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