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를 살았던 국민이라면 밤 12시에 울리는 사이렌 소리를 기억한다. 24년 전인
1982년 1월 5일, 광복 후 줄곧 갇혀 있었던 대한민국의 밤이 세상에 풀려났다. 밤 12시~새벽 4시의 야간 통행금지(통금)가 해제된 날이다. 전국 도시의 거리에 사람이 오가게 된 것도, 새벽까지 마셔야 직성이 풀리는 한국인의 술자리 습관도 모두 이때 시작됐다. 글 유충현 기자 lamuziq@etoday.co.kr
“네온불이 쓸쓸하게 꺼져가는 삼거리 / 이별 앞에 너와 나는 / 한없이 울었다 / 추억만 남겨놓은 젊은 날의 불장난 / 원점으로 돌아가는 0시처럼”
가수 배호의 노래 ‘0시의 이별’ 가사다. 통금과 함께 불 꺼지는 거리 풍경과 이별할 수밖에 없는 연인들의 안타까운 심정이 나타난다. ‘0시의 이별’에는 금지곡 딱지가 붙었다. 남녀가 0시에 헤어진다면 통행금지 위반인데 가사가 통금위반을 부추긴다는 이유였다고 한다.
밤과 낮의 구분 없이 거의 모든 생활이 가능한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이야기지만, 광복 후 37년간 한국인들은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집 바깥을 돌아다닐 수 없었다. 미군정 시절 북한의 간첩을 경계한다는 목적으로 도입됐지만, 이후 정부는 ‘범죄예방’ 등의 명목으로 통행금지 조치를 존속시켰다. 전쟁이나 재해 재난이 아닌 상황의 평시통금은 세계적으로도 사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때 그 밤문화…11시 30분 되면 귀가전쟁 시작
자정이 되면 ‘애~앵~’ 사이렌 소리가 울려 펴지고 서대문 로터리에는 철제 바리케이드가 설치됐다. 2인1조로 이뤄진 야경꾼들은 나무로 만든 딱따기를 치며 “통금!” 이라고 길게 소리친다. 단속은 엄혹했다.
김근석 전 경정(1970~80년대 서울 종로구 필동파출소에서 순경으로 근무)은 “귀가전쟁이 시작되면 번화가 입구쪽 차선이 사람으로 빽빽했다. 택시를 잡기 위해 합승은 기본이었고 ‘따블’이나 ‘따따블’ 요금을 부르는 게 일상적이었다”고 회상했다.
국민들의 밤문화는 완전히 달랐다. 혹시라도 통금에 걸리면 보통 곤욕이 아니었다. 일단 파출소에 잡혀갔다가 즉결심판에 넘겨져 벌금을 물었다. 예전 회사들은 별도의 숙직실을 두고 있었다. 통행금지가 있던 시대의 유물이다. 술꾼들은 10시30분 정도가 되면 슬슬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거나 술집 문을 닫고 밤새 마시는 선택을 해야 했다.
반대로 통행금지가 오히려 외박의 빌미가 되기도 했다. 일부러 애인과 술을 마시다가 깜빡한 척하고 통금을 넘겨버리는 수법은 당시 젊은 남녀들에게 흔했다. 덕분에 여인숙이나 여관 같은 서민형 숙박업이 높은 수익을 올리던 시기이기도 했다. 남자들은 굳이 섬에 가서 배를 놓친다든가, 두메산골에서 술이 떡이 되어 운전 못 한다고 버티는 등의 영웅담(?)도 심심찮게 회자됐다.
국가는 아주 가끔씩 통행금지를 풀어줬다. 1년에 단 두 번 통행금지가 해제된 날이 있었는데, 크리스마스와 12월31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때에만 해방감을 만끽하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왔는데, 이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크리스마스는 성스러운 휴일이 아니라 ‘해방의 날’이었다. 서울 명동과 충무로, 종로 일대가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대한민국 밤의 족쇄를 풀어준 88올림픽 유치
대한민국의 밤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준 것은 다름아닌 1988년 서울올림픽이었다. 1981년 9월 독일(당시 서독)의 바덴바덴에서 전해진 올림픽 개최지 선정 소식은 한국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통행금지가 있는 상태에서 올림픽을 치를 수는 없었다. 사회에 팽배한 민주화 요구도 어떤 형태로든 숨통을 터 줘야 했다.
1981년 11월 19일 전국경제인연합회관 19층 중국음식점에서 여야 중진 국회의원들의 회동이 있었다. 권정달 민정당 사무총장은 이날 갑자기 통금해제안을 꺼냈다. 이견이 나오지 않아 4분 만에 논의가 끝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두환 당시 대통령은 가급적 이른 시일 안에 통금을 해제하겠다고 밝혔다.
1982년 1월 5일 새벽 4시를 기해 50개시 139개군 지역의 야간 통행금지 조치가 해제됐다. 나라를 되찾은 뒤 처음으로 밤이 국민들에게 돌아왔다. 시민들은 잠을 잊은 채 37년 만에 되찾은 자유를 환호하며 거리를 활보했다. 적지 않은 인원이 새벽 1시에 길거리로 나와 만세를 불렀을 정도였다고 한다. 밤을 되찾은 시민들은 한풀이라도 하듯 거리로 쏟아져 나와 새벽 서울시청 시계 앞에서 사진을 찍었다.
심야극장도 이 시절 생겨났다. 통금이 해제된 지 꼭 한 달 뒤인 2월6일 첫 심야 상영영화인 이 개봉했다. 개봉 첫날 밀려드는 인파에 극장 유리창이 깨졌다는 보도기록물은 처음 맛보는 자유를 만끽하고자 했던 당시의 분위기를 설명해 준다. 심야영화의 흥행몰이는 을 필두로 , 등으로 이어지는 에로영화 전성기를 만들기도 했다.
술문화도 변했다. 오늘날까지도 이어지는 룸살롱, 단란주점 등 새벽까지 이어지는 한국의 밤문화도 이때 시작됐다고 한다. 이전에는 최대한 급하게 마시던 국민들이 새벽까지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통금 이후 급등한 민간소비, 오일쇼크 극복 원동력
1982년의 통금해제는 국민의식이 자유로워지고 성숙해진 계기로 평가된다. 통금이 해제되면서 범죄율이 높아질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으나 큰 혼란은 없었다.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돌려받은 4시간의 자유’는 37년간 계속되어온 억압을 빠르게 지워갔다. 버스와 지하철은 자정 이후까지 연장 운행됐고 택시 영업도 밤새 계속됐다. 철야 영업 간판을 내건 가게들도 속속 등장했다. 통제에 익숙하던 사회에 자율적 질서가 자리를 잡아갔다.
기대 이상의 경제적 효과도 뒤따랐다. 서비스 부문의 고용이 늘고 얼어붙은 기업 마인드와 소비심리가 살아났다. 비행기의 이착륙 시간도 구속에서 풀려나 바이어와 관광객의 입국도 늘었다. 1980년 마이너스 0.2%를 기록한 민간소비 증가율이 1982년 6.9%, 1983년 9.0%로 높아졌다. 우리 경제는 1982년 7.2%, 1983년 10.7%라는 고성장을 기록하며 2차 오일 쇼크 등으로 인한 국제적 경제 침체에서 빠르게 벗어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야간 통행금지 해제 무렵부터 디스코텍과 카바레, 룸살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고 대형 폭력조직이 생겨났으며 퇴폐향락문화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는 주장도 있다. 에너지 사용량이 증가하였고, 유흥업소의 영업시간 연장으로 향락적인 사회 환경이 조성되었으며,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한 청소년 범죄가 발생하여 사회적인 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간 통행금지 해제는 국민의 기본권과 자율성 회복의 상징적인 조치였다.
미술 작품이 여기저기에 걸려 있고, 아름다운 재즈 선율과 즐거운 웃음소리가 흐르는
이곳이 ‘남자만을 위한 요리교실’? 사실이다.
이것이 바로 남자의, 남자에 의한, 남자를 위한 요리교실인 행복남 요리 교실의 모습.
쿠킹앤 행복남 요리교실은 복잡한 레시피에 지친 남자들을 위해 쉬운 요리 방법에
특유의 센스를 더한 수업으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요리를 통해 삶을 한층 풍부하게 만들고 싶어 하는 맛과 멋을 아는
남자들의 요리교실을 살펴보았다.
밤섬과 한강 야경이 한눈에 보이는 서울 마포구 상수동에 위치한 쿠킹앤의 행복남 요리교실은 남성들만을 위한 특화된 요리교실로 유명하다.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나 임직원, 대학교수, 금융기관 은퇴자 등 사회 고위층 남성들이 주 수강생이다. 한희원 행복남 요리교실 대표는 SK, 도래이첨단소재, 신한은행, 롯데 등 기업들과 함께 ‘쿠킹&팀워크’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요리에 소외된 사람들을 중시하자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개인보다는 조직을, 그리고 요리 교육에 쉬이 접근할 수 있는 여자와 아동을 빼면 청소년과 남자가 남더군요.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요리 교육은 힘들 것 같았습니다. 남자를 대상으로 하는 요리 교육을 하자고 결정하게 됐습니다. 요리를 배우려고 찾아봤는데 자격증 위주로 된 곳만 많다는 하소연도 그 결정에 한 몫 했죠.”
여자의 요리는 직관적, 남자의 요리는 매뉴얼적
한희원 대표가 작금의 남자 셰프 붐보다 앞서서 ‘남자를 위한 요리교실’을 만들기로 한 것은 블루오션을 찾기 위한 모색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게 어느새 3년 차.
“주 연령대는 40대 후반부터 50대 이후가 많습니다. 그 정도 나이대가 되어야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게 가능해져요. 교육은 1조를 2인에서 4인의 구성으로 만들어 진행합니다. 너무 인원이 많아지면 교육의 의미가 없거든요. 그리고 남자분들은 손이 많이 가요(웃음).”
한 대표는 여자들은 요리를 직관적으로 많이 하는 편이라고 평가했다. 여자인 만큼 요리에 관해서는 살아오면서 봐온 것이 많기에 그런 것이다. 그래서 의외로 여자들 중에서는 레시피대로 안 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반면 남자들은 레시피의 토씨 하나도 안 틀리고 그대로 하려고 한단다. 또한 요리에 대해 계속적인 관심을 가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요리는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남자의 비법
“저희는 남자들이 요리를 배워서 집에서 계속 요리를 하게 만드는 게 현실적으로 힘들다고 봅니다. 그래서 남자가 요리로 가족이나 지인들과 어떻게 소통할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사실 열심히 일하는 아버지일수록 가정에서는 헛돌게 되기 마련이다. 아버지들이 겪어야 하는 주말의 집안 풍경을 떠올려 보자. 아이들은 모두 스마트폰만 보고 있고 아내는 아내대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다. 고된 노동의 나날을 마치고 얻게 된 쉬는 날, 아버지가 가정 안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 없다. 집에 있어도 자신은 없는 존재 같다고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 현실을 극복하고 가족과 함께 어우러질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요리다. 그래서 한 대표는 ‘요리를 한 가지라도 하셔라’라고 말한다.
“그래서 일상식 계열보다는 스페셜한 이벤트성 요리를 가르칩니다. 만들어서 내놨을 때 가족들이 ‘우와, 이걸 아빠가 했어’ 하는 그런 반응을 얻을 수 있는 요리 말이죠. 남자는 리액션이 있어야 의욕이 생기거든요(웃음).”
한 대표는 일상식으로서의 밑반찬은 만들기가 의외로 어렵다고 설명했다. 매일 먹어도 물리지 않는 맛의 요리가 나와야 할 텐데 그 맛이 안 날 수도 있고, 그러면 좌절하게 되고 요리에 관한 관심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관심이 생기면 앞으로 더 나아갈 수 있는 법이다.
요리를 통해 무엇을 하느냐가 중요
한 대표는 남자 요리교실이 단순히 요리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문화를 접하게 하기 위한 준비가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저희들은 요리하는 사람이지만 요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리를 갖고 무얼 하느냐가 중요하죠.”
한 대표의 기억에 남는 수강생 중 70대 CEO가 있다. 부인이 몸이 안 좋아진 상황이었고, 개인적으로 요리를 배우고 싶었는데 일 때문에 못한 이였다. 그는 70대라는 나이가 되니 부담 없이 갈 데도 없어진 상황에서 소개를 받고 요리교실에 들어오게 됐다.
그의 집에는 주말이면 아들이 며느리와 함께 방문한다. 그런데 며느리가 음식을 안 해서, 결혼 후에 단 한 번도 며느리의 요리를 먹어본 적이 없었다. 요리교실을 다니게 된 후, 하루는 주말에 그가 요리를 해서 아들 부부에게 내놓았다. 의외의 상황에 며느리가 깜짝 놀랐다. 더군다나 맛있기까지 했다. 며느리는 ‘제가 해야 하는데…’라며 말을 흐렸다. 그러나 이내 분위기는 굉장히 좋아졌고 그 다음 주에는 아들의 결혼 이후 처음으로 며느리가 음식을 준비하는 모습을 보게 됐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할 줄 아는 감식안 있어야
남자요리가 콘텐츠의 대세가 된 현재를 한 대표는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녀는 요리에 대해 쉽게 접근하자는 관점은 좋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걸 염두에 뒀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요리를 할 때는 제철 식재료를 사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먹거나 만드는 음식에 뭐가 들어가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좋은 것이 뭔지, 나쁜 것이 뭔지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거죠. 그런데 요즘 트렌드는 너무 간결하고 빠르게 만든다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그 부분이 취약해지고 있어요. 모르면 속게 되어 있어요. 요새는 먹거리로 장난을 많이 치니까요.”
한 대표는 요리교실의 미래를 소통이라는 키워드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밥상에 소통을 더하다’라는 주제로 강의를 하기도 한다. 한국인이면 밥은 삼시세끼를 먹게 된다. 한 대표 생각에는 하루에 세 번이라는 그 좋은 소통의 기회를 사람들이 잘 이용하지 못하고 있다.
“뺏어먹을까 봐 걱정하는 것처럼 먹느라 소통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에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밥 좀 처먹지 마세요(웃음).’ 함께 먹는 사람을 생각해야죠. 아무 말도 없이 밥만 먹는 사람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들겠어요? 그런 사람을 보면 밥맛 떨어진다고 하죠. 배려하지 않는 식사이기 때문이에요. 그게 비즈니스 자리라면, 거래는 끝난 거나 마찬가지죠. 그러나 문제는 대부분의 한국 남자 직장인들은 그렇게 먹는다는 겁니다. 우리가 못 먹어서 밥을 먹는 게 아니잖아요? 맛집을 찾아가면 뭐해요? 거기 가도 그렇게 먹을 텐데. 뭘 먹었는지 누구와 먹었는지 기억 못하는 사람이 많아요.”
요리로, 식사로 소통할 줄 아는 사람이 되자
한 대표는 식사가 곧 소통이 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어도 실천을 못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좀 더 주어진 것을 즐기고 소통을 즐기라는 게 그녀의 조언이었다.
“왜 공기밥은 맛없을까요? 꾹꾹 눌러 담아서 그래요. 그래서 저희는 밥 푸는 법도 가르쳐요. 주걱으로 던지듯이 퍼담는 건 안 되죠. 아래 위를 잘 섞어서 공기가 잘 들어가도록 토실토실하게, 밥알을 살리듯이 담아야 합니다. 그러면 ‘아 옛날에 어머니가 이렇게 담았지. 복 들어가라고’라며 새삼 깨달으시더군요.”
남자들에게 ‘요리’가 단순히 음식을 만들거나 끼니를 때우기 위한 행동을 넘어 가족 간의 사이를 좁혀주는 ‘소통’이며 70 평생 근처에도 얼씬거리지 않았던 주방을 기웃거리게 만드는 ‘관심’이고 서툴지만 정성 가득한 한 상을 아내에게 바치는 ‘희생’이 될 수 있다는 걸 한 대표는 보여주고 있었다.
나를 위한 것이 아닌 상대를 위해 만드는 즐거운 놀이로서 요리에 접근해보자. 삶의 변화와 기쁨이 보장된, 그것만큼 즐거운 놀이가 어디 있을까?
이사가 한 달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두 아이가 각자 자취와 유학으로 집을 떠나고 나니 덩치 큰 집이 부담스러워졌습니다.
포장이사를 예약해 두었지만 미리 짐 정리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말숙씨입니다. 우선 옷장 정리를 시작했습니다. 원피스, 바지, 블라우스, 재킷 등은 물론 모자, 스카프, 가방까지 어마어마하게 많은 옷가지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손질해서 입을 옷, 버릴 것, 누군가에게 주면 좋을 것 등을 분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번 입지 않아 새것과 다름없지만, 오십이 넘은 말숙씨의 몸에는 이제 맞지 않는 옷들도 여러 벌 있습니다. 옷 정리를 하는 도중 말숙씨는 자주 난감해집니다. 다시 입을 수도, 버릴 수도, 남에게 줄 수도 없는 옷들 때문입니다. 처치곤란. 그것은 바로 여행의 추억이 담긴 옷들입니다.
신혼여행지에서 남편과 똑같이 입고 다녔던 줄무늬 커플 티에는 아직도 오색약수 물비린내가 나는 듯합니다. 동료 교사들과 함께 떠난 유럽에서 입고 다녔던 분홍 원피스에는 파리의 낭만적인 거리가 골목골목 이어지고 있습니다. 여고 동창들과 놀러 간 상하이에서 사 입은 푸른 꽃무늬 블라우스는 와이탄의 야경으로 눈이 부십니다. 이제 너무 낡거나 작아져서 입을 수도 없는데,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몸에 맞는 누군가에게 줄 수도 없습니다.
‘추억이란 이렇게도 질긴 인연을 맺고야 마는구나.’
말숙씨의 난감한 짐 정리는 옷가지들로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좀처럼 들춰보지 않는 사진첩도 너무 많았고, 1년 내내 바깥 구경 한번 못하고 차곡차곡 쌓인 그릇들, 먼지 앉은 책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사용했던 물건들, 여행지에 다닐 때마다 사 모은 각종 기념품과 장식품들이 집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습니다. 집을 좁혀 가는 것이니 짐도 줄여야 합니다. 정리를 한다는 것은 버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말숙씨에게 여행의 추억은 정리되지 않는 견고함으로 꿋꿋이 남아 있습니다. 옷이며 가방이며 기념품마다 함께한 사람들이 있고, 놀라며 감탄하던 아름다운 장소들이 남아 있습니다. 하나하나 추억을 사 모은 것이었습니다. 말숙씨는 문득 쓴웃음이 나왔습니다. 여행의 추억들이 하나같이 물건에 담겨 있다는 게 쓸쓸하게 여겨졌습니다.
‘나에게 여행은 사람들과 우르르 놀러 가서 구경하고 기념품을 사는 게 고작이었나.’
짐 정리를 대강 마무리하던 날, 말숙씨는 여행을 떠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처음으로 혼자 떠나는 제주도 여행을 결심했습니다. 여행을 좋아하는 말숙씨에게 이번 여행만큼은 완전히 새롭고 낯선 경험입니다. 며칠 동안 짐 정리를 하며 들었던 생각을 감행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번 여행을 위해 말숙씨는 자신과 몇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첫째,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 둘째, 완벽한 계획을 갖지 않을 것. 셋째, 기념품을 사지 않을 것.
마치 20대 젊은이들이 배낭여행을 떠나듯이 그렇게 여행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물론 남편은 가는 날 아침까지 극구 반대를 했습니다. “갑자기 무슨 일이냐”, “이사도 며칠 안 남았는데, 주말에 나랑 같이 가자”, “진짜 이유가 뭔지 솔직히 말해봐라”, “아줌마라도 여자 혼자는 위험하다”고 하다가 결국은 매일 수시로 안부 전화를 하는 조건으로 내키지 않는 허락을 하고 말았습니다.
제주 공항에 내리는 순간, 들떴던 마음은 이내 가라앉고 말숙씨는 막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버스는 어떻게 타야 하나’, ‘호텔을 미리 정해둘 걸 그랬나’ 등 이미 여러 번 왔던 제주도인데도 불구하고 낯설고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동안의 여행에서는 늘 누군가 리더가 있었습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가이드든 누군가가 좋다는 곳, 유명하다는 곳을 추천하고 데려가 주었습니다. 막막한 적도, 불안한 적도 없이 마음 편히 따라다녔다는 것을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여태껏 일행을 따라다녀놓고 말숙씨는 함께 여행했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관광을 다녀놓고 여행을 했다고 착각했던 것입니다.
‘올레로 하자! 혼자 하는 여행은 올레길 걷기가 제격일 거야.’
말숙씨는 공항에서 올레길로 가는 버스 가운데 하나를 찾아 타고 창가에 앉았습니다. 습기 가득한 제주의 바람이 열린 창문으로 훅훅 들어왔습니다.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십니다. 혼자 온전히 만끽하는 바람의 냄새도, 소리도 처음입니다. 바람이 이렇게 생생히 살아 있다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그래, 바람이 데려다 주겠지.’ 어디서 내리든 길이 시작될 거라는 확신이 생겨났습니다. 말숙씨는 창문을 활짝 열었습니다. 드디어 처음으로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바야흐로 봄이다. 봄을 나타내는 한자인 ‘춘(春)’은 원래 풀초(?)에 새싹이 돋아나는 모습을 나타내는 둔(屯)에다가 마지막으로 날일(日)을 합쳐서 만들어진 글자이다. 새봄을 맞아 그 감흥을 노래한 한시는 셀 수도 없을 만큼 많다.
그중 유명한 글들을 살펴보면, 우리나라에서는 가사문학으로 조선 초 정극인(丁克仁)이 에서 ‘엇그제 겨을 지나 새봄이 도라오니, 도화행화(桃花杏花)는 석양(夕陽)리예 퓌여 잇고, 녹양방초(綠楊芳草)는 세우(細雨) 중에 프르도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역대 우리나라 한시 중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고려시대 정지상(鄭知常)의 에서는 ‘우헐장제초색다(雨歇長堤草色多) 송군남포동비가(送君南浦動悲歌), 비 갠 강둑엔 풀빛이 푸르고, 임 보내는 남포엔 슬픈 노래가 울리네’라고 노래하였다. 이 유명한 시는 1962년 이수복이란 시인에 의해 ‘이 비 그치면, 내 마음 강나루 긴 언덕에, 서러운 풀빛이 짙어오것다.’란 구절의 란 시로 재탄생된다.
중국에서는 도연명(陶淵明)이 에서 ‘춘수만사택(春水滿四澤) 봄 물은 연못에 가득하고’란 유명한 구절을 남겼고, 당(唐)나라 때 맹호연(孟浩然)은 에서 ‘야래풍우성(夜來風雨聲) 화락지다소(花落知多少) 지난 밤 세찬 비바람 소리에, 얼마나 많은 꽃잎이 떨어졌을까!’란 명구를 남겼다.
이백(李白)은 에서 ‘도화유수묘연거(桃花流水杳然去)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 복사꽃 흩날려, 흐르는 물에 고요히 떠내려가니, 또 다른 별천지, 인간세상이 아니로세’라고 봄날의 정경을 노래하였다. 두보(杜甫)는 에서 ‘好雨知時節(호우지시절) 當春乃發生(당춘내발생)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나니, 봄이 되니 만물을 움트게 하네.’라고 봄비를 노래하였다.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鄭夢周)는 봄비를 ‘춘우세부적(春雨細不滴) 야중미유성(夜中微有聲) 봄비가 가늘어서 방울지지 않지만, 밤중이라 그런지 가는 소리가 나누나’라고 이란 시에서 노래하였다. 봄의 야경(夜景)을 노래한 글로는 이백의 란 천고의 명문(名文)이 있으며, 고려조 왕석(王錫)의 ‘춘강양안백화심(春江兩岸百花深) 호월비공설만림(晧月飛空雪滿林) 봄 강 양쪽 언덕에 온갖 꽃이 짙게 피니, 허공에 뜬 밝은 달에 숲이 온통 희도다’란 란 시가 있다.
이처럼 수도 없이 많은 시들 중, 어느 시 구절이 가장 유명하다 꼽을 수 있을까? 아마도 중국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 사령운(謝靈運)의 중 ‘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 원류변명금(園柳變鳴禽) 연못 가에 봄풀이 돋아나니, 동산의 버들에는 새 소리도 바뀌었네’란 구절이 아닐까 한다. 사령운 자신이 말하길, ‘일찍 영가(永嘉)가 서당(西堂)에서 시를 생각하다가 온종일 못 지었는데, 문득 세상을 떠난 종제(從弟)인 혜련을 꿈에 보고 지당생춘초(池塘生春草)라는 구를 얻었다. 그것은 신공(神功)이지, 내 말이 아니다’라고 했다.
그로부터 더욱 유명해진 이 구절은 금(金)나라 원호문(元好問)이 ‘지당춘초사가춘(池塘春草謝家春) 만고천추오자신(萬古千秋五字新)’이라 극찬한 이래, 가장 유명한 봄의 구절이 되어 대대로 회자되어 오고 있다. 주자(朱子)의 중 ‘미각지당춘초몽(未覺池塘春草夢)’이 바로 이것이다.
한국사람 치고 경주에 가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친숙하고 특별한 도시다. 신라 천년고도의 숨결을 오롯이 머금은 역사의 땅. 언제 가도 반갑고, 가고 또 가도 새롭다. 경주는 그런 곳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역사유적지구’
말 그대로 찬란하다. 하지만 제대로 알까. 그토록 찬란하다고 말하는 이유를. 잘 안다고 하면 만용이다. 가벼이 몇 번 다녀온 나그네 발걸음이면 그렇다는 얘기다. 경주는 도시 자체가 박물관이라 불릴 정도로 발길 닿는 곳마다 모두 문화유산이다. 화려했던 역사를 대변하듯 고적과 보물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다양한 색깔을 지닌 경주의 역사유적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이기도 하다. 유적의 성격에 따라 5개 지구로 나뉜다. 천년왕조의 궁궐터인 월성지구, 왕과 귀족들의 무덤군인 대릉원지구, 불교미술의 보고인 남산지구, 신라불교의 정수인 황룡사지구, 도성 방어시설의 핵심인 산성지구로 구분하고 있다.
대릉원 건너편에 있는 월성지구는 왕궁이 있던 자리다. 신라의 정치 중심지였던 곳으로 신라의 발전 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이곳에 신라 김씨 왕조의 시조인 김알지의 전설이 깃든 숲이 있다. 신라의 신성한 숲으로 여겨지던 계림이다. 고목이 울창한 계림의 서쪽에는 내물왕릉을 중심으로 3기의 왕릉이 있으며 첨성대, 월성, 동궁과 월지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복원 중인 월정교와 교동 최씨고택이 가까운 거리에 있어 함께 둘러보면 좋다.
반달모양을 닮아 반월성이라고도 부르는 월성에는 아쉽게도 아무런 건물이 남아있지 않다. 봉긋하게 솟아오른 언덕에 잔디가 깔려있을 뿐이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걷다 보면 궁궐터라는 사실조차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찬란했던 신라를 상상하며 궁성을 여유롭게 산책할 수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다.
◇아! 신라의 밤이여
경주의 또 다른 매력은 바로 야경이다. 해가 기울고 저녁 어스름이 찾아들면 경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다. 은은한 빛깔에 물든 신라의 밤은 여행자의 마음을 로맨틱하게 만들어준다. 그렇다면 야경을 감상할 장소로 어디가 좋을까. 그 역시 월성지구가 정답. 고즈넉한 밤 풍경을 즐기며 산책하기에 이만한 곳도 없다. 대릉원을 출발해 첨성대를 거쳐 동궁과 월지에 이르는 코스가 일품이다.
밤에 만난 첨성대는 낮보다 더 각별하게 다가온다. 그윽하게 빛나는 신비로운 자태가 한순간에 마음을 빼앗아 간다. 첨성대는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유명하다. 하지만 명확한 자료가 없어 다양한 학설이 제기되며 여러 가지 추측을 낳기도 했다. 어쨌든 과학적인 우수성과 상징적인 가치에는 이견이 없는 우리의 국보로 그저 자랑스럽기만 하다.
◇야경의 화룡점정 ‘동궁과 월지’
야경의 하이라이트는 단연 동궁과 월지이다. 월성에서 도로를 건너 만나게 되는 이곳은 우리가 흔히 임해전지와 안압지로 알고 있는 곳이다. 임해전은 통일신라 시대를 연 문무왕이 지은 궁궐로 왕자가 머물던 동궁이다.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고 한편으로 당나라에 통일 왕조의 힘을 보여주기 위해 건설했다. 또한, 임해전 안에 연못을 파고 산을 만들었으며, 화초를 심고 진기한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이곳에서 왕과 신하들이 국사를 논하고, 귀한 손님을 맞이하거나 경사가 있을 때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연못에 반영된 야경을 보고 있으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신라를 여행하듯 몽롱한 기분에 젖어든다.
‘달이 비치는 연못’이란 뜻의 월지가 안압지로 불렸던 까닭은 이렇다. 신라가 멸망하고 임해전은 폐허가 되었다. 그것을 본 시인과 묵객들이 “화려한 궁궐은 간데없고, 연못에 오리와 기러기만 날아든다”는 구절을 읊조렸고, 그 후로 기러기 ‘안(雁)’자와 오리 ‘압(鴨)’자를 써서 ‘안압지(雁鴨池)’로 불리게 된 것이다.
80년대 안압지에서 발굴된 토기 파편에 ‘월지(月池)’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기에 원래 이름을 되찾을 수 있었다. 당시 발굴 작업에서 출토된 유물이 무려 3만여 점이다. 통일신라의 문화와 왕실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유물로 국립경주박물관 월지관에 전시되고 있다.
동궁과 월지의 야경은 ‘신라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을 만큼 화려하다. 고요한 연못 위로 내려앉은 풍경은 아름답다 못해 황홀하다. 꿈속을 헤매듯 신비로운 광경에 사로잡혀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슬며시 밀려오는 아쉬움에 선뜻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다시 누각 주변으로 몰려든다. 신라의 달밤, 그 풍경 속에 조금 더 머물고 싶은 마음은 모두가 같지 않을까.
◇여행가이드
- 동궁과 월지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원화로 102
문의 : 054-779-8795~7
관람시간 : 09:00~22:00(입장 21:30까지)
입장료 : 어린이 600원 / 청소년 1,200원 / 어른 2,000원 / 무료(만 6세 이하, 만 65세 이상, 경주시민)
- 첨성대
주소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839-1
관람시간 : 09:00~22:00
입장료 : 무료
벌어지는 입을 닫을 수 없다. 피곤한 하루를 마친 태양. 잠에 들려는 듯 바다 속으로 사라지며 물결을 빨갛게 물들인다. 그 순간 잡념은 사라지고 도시에 아름다움에 흠뻑 취한다. 어떤 이들은 그 순간을 간직하기 위해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고, 어떤 이들은 아무 방해도 받기 싫다는 듯 멍하니 그 장관을 음미한다.
지중해에서 가장 큰 섬. 이탈리아의 최남단에 위치한 시칠리아. 영화 대부, 시네마 천국, 그랑블루 등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 될 만큼 그 자연 풍광과 도시의 모습이 아름답다. 독일 문학의 상징 괴테도 말했다. “시칠리아를 보지 않고서는 이탈리아를 봤다고 말할 수 없다.”
◇ 괴테가 사랑한 도시 ‘팔레르모’
시칠리아 안에서도 괴테가 세계 최고도시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은 곳이 있다. 북부에 위치한 팔레르모다. 영화 ‘대부’의 배경으로 유명한 이 곳에는 ‘4개의 모서리’를 뜻하는 콰트로 콴티(Quattro Canti)와 팔레르모 두오모 성당이 있다. 콰트로 콴티는 예술작품으로 꾸민 3층 건물 4채를 말한다. 1층은 사계절 여신들의 조각상이 있는 분수, 2층은 시칠리아를 지배한 왕들, 3층에는 성녀의 모습이 담긴 조각상이 있어 콰트로 콴티만의 세련미를 느낄 수 있다. 1184년 팔레르모 대주교에 의해 세워진 팔레르모 두오모 성당에서는 다양한 건축 양식을 엿볼 수 있다. 이 성당은 팔레르모를 지배한 여려 세력의 다양한 건축 양식이 섞여있다. 외부는 고딕 양식, 남쪽 현관은 카탈로니아 양식, 돔은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혼합돼 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내부에 있는 왕들의 무덤과 보물을 구경하는 것도 팔레르모 두오모 성당을 즐기는 색다른 요소다.
◇ 시네마천국의 배경 ‘체팔루’
영화 ‘시네마 천국’에서 주인공 토토가 데이트를 하던 낭만적인 해변 마을을 기억하는가. 유럽 왕족과 유명 인사들이 가장 선호한다는 체팔루다. 이러한 명성에 걸맞게 건물과 해변,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그 속에 있는 사람을 영화 속 주인공처럼 만들어준다. 팔레르모 두오모 성당 보다는 작지만 그보다 화려한 모자이크가 있는 체팔루 두오모 성당과 페스카라 문도 으뜸이지만, 무엇보다 해안도로를 따라 이어지는 절경을 빼놓고 체팔루를 얘기 할 수 없다. 해안가 따라 이어진 다소 이탈리아 정서의 소박하고 낡은 건물과 고즈넉한 해변이 드넓은 바다와 조화를 이뤄 보는 이들의 혼을 빼놓는다. 한 폭의 그림. 환상적인 도시. 그 이상의 수식어를 더 넣을 수 있다면 그것은 체팔루다.
◇ 시칠리아 최고의 휴양지 ‘타오르미나’
시칠리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휴양지 타오르미나. 영화 ‘그랑블루’ 배경지이기도 하다. 타오르미나 절벽 위에 세워진 그리스극장은 이 도시의 대표적인 볼거리다. 기원전 3세기 때 지어진 이 야외극장은 눈앞에 바다가 펼쳐진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특히 여름에는 발레나 음악회 등이 열려 로맨틱한 분위기를 연출한다. 아기자기한 상점이 들어서 있는 움베르토 1세 거리는 저녁이 되면 많은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예쁜 도자기와 기념품, 장식품을 전시하는 상점이 많아 유쾌함 넘치는 곳이다.
◇ 아르키메데스의 고향 ‘시라쿠사’
거리 자체가 중후한 멋을 뽐내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두오모 광장, 아레투사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강의 신’ 알페오스가 샘에 뛰어들어 스스로 강이 되었다고 전해지는 아레투사의 샘, 1만6천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그리스 극장부터 검투경기를 즐기기 위해 만들어진 로마원형 경기장까지. 이 모든 것을 둘러볼 수 있는 곳이 있다. 고대 그리고 최고의 수학자 아르키메데스의 고향 시라쿠사다. 거리의 야경이 유난히 빛나는 시라쿠사는 낭만과 역사가 공존한다.
◇ 유럽 최대의 활화산이 있는 ‘에트나’
유럽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 에트나산(3350m). 기원전 2700년부터 화산활동을 한 세계에서 가장 긴 역사를 가진 화산답게 최근까지 그 위력을 보여주고 있다. ‘불의 신’ 불카누스의 대장간이라는 별칭이 붙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에트나 화산은 2013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 됐다.
투어2000에서는 시칠리아를 포함한 이탈리아 8박 9일 일정의 패키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올 여름 지중해의 보배, 시칠리아의 낭만에 취해보는 것은 어떨지.
사진 : 투어2000 / 문의 : 투어2000(02-2021-2000)
※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독자 이기섭(92)씨가 보내주신 사연입니다. 두 아들과 함께 딸과 사위가 있는 오스트리아와 체코 여행기입니다. 이기섭씨 처럼 독자 여러분의 희로애락이 담긴 사연을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항상 기다립니다.
프라하는 연간 약 3천만명의 관광객이 방문한다는 동유럽의 대표적인 관광지이다. 비엔나에서 프라하까지는 고속버스를 이용했는데, 전망 좋은 앞자리를 미리 예약해 왕복 10시간 도로 주변 경관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다.
나는 버스, 지하철, 비행기를 타고 자 본적이 거의 없다. 잠이 안 든다. 그런데 옆자리에 앉은 아들은 잠도 잘 자고, 좌석에 부착된 장치를 이용해 영화나 음악을 혼자 잘 즐기는 것 같았다. 아무튼 프라하는 짧은 일정 때문에 프라하 성, 카를교, 구시가지 등을 주마간산 격으로 볼 수밖에 없었다. 프라하에서 비엔나로 돌아오는 버스에선 나도 모르게 틈틈이 잠이 들었는데, 강행군에 몸이 상당히 고단했던 모양이다.
체코는 다른 유럽 국가와 다르게 그들만의 화폐를 사용한다. 그렇다 보니 거리 곳곳 환전소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많이 바꿨다가 나중에 체코 돈이 남으면 어쩌나 걱정도 되었다.
일정이 짧아 호텔에 짐을 맡기자마자 택시타고 프라하 성으로 향했다. 오후 늦게 경로우대로 입장한 프라하성은 폐장시간이 가까워 다른 관광객을 뒤따라 여기저기 다니기 바빴다. 빠른 걸음으로 다니다가 연금술사가 작업하던 공간에 들렸는데, 그들이 쓰던 각종 도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침 같이 있던 며느리가 연금술 덕분에 화학이라는 학문이 발전할 수 있었고 그래서 남편이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하고, 그 덕에 지금 먹고 살게 된 것 같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말로만 듣던 아기예수성당이 프라하 성 가까이에 있어 들렀다. 하느님의 배려인지 마침 저녁미사가 있었다. 포도주에 담근 영성체를 영하게 되어 뜻 깊게 생각했다.
호텔로 돌아가면서 카를교에 들렸다. 프라하성과 구시가지를 연결하는 다리로 자동차는 다니지 않았다. 역시 소문대로 많은 관광객이 몰려있었다. 긴 다리를 따라 양편에는 교황, 성인 등 성서에 등장하는 인물 조각상들이 고풍스런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작은 노점상들, 거리 악사의 연주, 관광객의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 등 카를교는 거리 예술가들의 아름다운 무대였다. 아들이 사준 달콤한 즉석 구이 빵을 먹으며 많은 조각상을 하나하나 살펴보며 천천히 구경했다.
저녁식사를 한 후 호텔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면서, 천년 古都 프라하 역사가 만들어낸 건축물들을 구경했다. 건축박물관이라 불릴 만큼 각기 다른 시대에 다양한 양식의 건축물들이 구시가지 광장을 둘러싸고 있었다. 은은한 조명의 야경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묵었던 호텔은 현대적인 인테리어이고 부엌과 세탁기까지 딸린 곳으로 5인이 머무르기에 충분했다. 아침 뷔페식사도 다양한 종류로 푸짐하고 맛있었다.
문화재청은 봄꽃 피는 시기에 맞춰 창경궁과 경복궁을 각각 12일간 야간 개방한다.
개방 기간은 △ 창경궁 4월29일~5월11일(5월5일 휴관) △ 경복궁 4월30일~5월12일(5월6일 휴관)이다.
1일 최대 관람인원은 △ 창경궁 2천200명(인터넷 2천70매, 현장판매 130매) △ 경복궁 2천명(인터넷 1천890매, 현장판매 110매)이며, 관람 시간은 저녁 7~10시다.
창경궁은 홍화문·명정전·통명전·춘당지 권역, 경복궁은 광화문·흥례문·근정전·경회루 권역을 개방한다.
입장 마감 시간은 관람종료 1시간 전인 오후 9시이며, 관람료는 주간과 같아 창경궁은 1천 원 경복궁은 3천 원이다. 관람권은 1인당 2매 이내로 구입한다.
인터넷 예매는 옥션티켓(http://ticket.auction.co.kr)에서 한다. 창경궁은 4월22일 오후 2시부터, 경복궁은 4월23일 오후 2시부터 가능하다. 인터넷 활용이 어려운 만 65세 이상 노인과 외국인은 일부 전화 예매가 가능하고 현장에서도 판매한다.
또 장애인과 국가유공자 각 50명(보호자 1명 포함 무료) 총 100명과 부모와 동반한 영·유아(6세 이하)는 현장에서 무료 입장한다.
http://blog.yonhapnews.co.kr/ts1406
국립용화산자연휴양림은 강원도 춘천시 사북면 고성리에 위치한다. 서울과 원주에서는 2시간 이내면 충분히 도착되는 도심과 가까운 휴양림 중 하나다.
서울과 원주에서 용화산자연휴양림을 가는 길은 서울춘천고속도로를 이용하거나 중앙고속도로(춘천방향)를 이용, 춘천IC에 내려 5번 국도로 시내를 통과한 후 화천방향으로 이동한다. 북한강 옆으로 화천방향 407번 지방도를 이용해 20분 정도 이동하면 용화산자연휴양림으로 진입하는 이정표가 나온다.
산에서 지네와 뱀이 서로 싸우다 이긴 쪽이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 하여 용화산(龍華山)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한다. 용화산성, 용화사, 용흥사 등이 있고, 준령 북쪽의 성불령에 성불사 터가 있다. 용마굴, 장수굴, 백운대, 은선암, 현선암, 득남바위, 층계바위 등 각종 전설을 간직한 기암이 많고, 폭포도 6개나 되어 경치가 아름답다.
인근 주민의 정신적 영산(靈山)이자 명산으로 옛날에는 가뭄이 들면 화천군에서 군수가 제주(祭主)가 되어 기우제를 지냈다. 지금도 해마다 열리는 용화축전 때 산신제를 지낸다고 한다.
용화산 남동쪽 자락에 위치하는 국립용화산자연휴양림은 빙벽 및 암벽등반을 빼놓고는 이야기를 시작할 수 없다. 깊은 계곡에 위치해 있으며, 춘천 특유의 추운 날씨로 계곡이 금방 얼어버린다. 단단하게 얼어버린 계곡에는 천연 빙벽체험장이 생겨난다.
용화산자연휴양림 계곡은 길고 깨끗해 여름철이면 많은 피서객들로 계곡을 메운다. 며칠 전 내렸던 눈이 계곡의 크고 작은 바위에 소복이 쌓여 있어 손으로 그린 그림처럼 아름다운 겨울의 모습을 볼 수 있다.
2006년 개장되어 쾌적한 산림휴양시설을 자랑한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휴양림까지 이어진 소나무숲이 휴양림의 멋진 모습을 한층 높여주며, 용화산 자락의 사여령 고개로 가는 등산로 우측에는 쭉쭉 뻗은 낙엽송이 대면적으로 조림되어 있어 등산객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준다.
단체 이용객을 위한 숲속 수련장은 6인실, 7인실, 10인실과 세미나실로 구성되어 있으며, 수련장 앞에는 운동장이 있어 단체운동 경기를 할 수 있다.
용화산자연휴양림은 야영객을 위한 일반야영데크(18개), 오토캠핑장(9개), 몽골텐트(9개)를 갖추고 있다. 야영장이 계곡과 바로 연접해 있어 여름철에는 더위를 시원하게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다.
용화산자연휴양림은 야경이 참 아름답다. 물론 야간조명이 야경 등급의 90%를 차지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숲과 객실 그리고 가로등의 환상적 조합을 이루고 쾌적한 자연환경이 그것을 뒷받침해줘 더욱더 아름다운 것 같다.
용화산자연휴양림에서 자동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화천에는 겨울철 유명한 축제가 열린다. 그래서 그 축제에 참가하고 휴양림에서 아늑한 휴식을 취하는 인파들로 용화산자연휴양림은 1월에는 성수기 못지않은 인파로 붐빈다. 화천 산천어축제는 1월 5일부터 27일까지 열리는데 화천천이 두껍게 얼어 그 얼음을 뚫고 낚시를 한다. 어른 팔뚝 만한 산천어들이 잡혀 체험하는 이들이 지루하지 않아 보인다. 평일인 데도 불구하고 많은 인파가 몰려 겨울철 인기 축제임을 실감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