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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봄 서비스 정부 아닌 소비자에게 집중되어야”, 케어닥 박재병 대표
- 여느 청년과 마찬가지였다.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몰랐다. 남들 다 하는 ‘취업 준비’는 요즘 말로 ‘현타’를 불렀다. 무엇을 해도 좋은 인생을 만들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마침 머리도 짧게 깎은 김에 절에라도 들어갈까 했지만, 며칠 견디지 못할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무작정 해외로 떠났다. 6개월을 계획하고 떠났지만 돌아오는 데는 3년이 걸렸다. 위험을 각오한 무전여행에서 몇 번의 고비는 그를 변화시켰다. 그리고 그가 찾아낸 것은 ‘잘사는 법’이 아닌 ‘좋은 죽음’에 관한 것이었다. 간병인 중개 플랫폼 스타트업 케어닥의 박재병(33) 대표 이야기다. “삶의 여정은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잖아요. 태어나는 것도 제 의지가 아니었고. 부모를 선택할 수도 없죠. 그러나 죽음은 그렇지 않은 것 아닌가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잘 죽는 것,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누구에게나 중요한 일이고, 개인의 의지가 반영될 수 있으니까요. 죽음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하니까 오히려 삶의 무게감이 가벼워지는 느낌이었죠.”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서 찾은 곳은 저소득층 할머니들이 모여 있던 부산 범일동 쪽방촌이었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일종의 ‘부채감’이라고 이야기했다. 자주 찾지도 못하고 여행 내내 감감무소식이었기 때문에 할머니와 가족에게 미안한 마음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시작한 것이 ‘원스텝모어’라는 서비스다. 할머니들을 돕기 위해 평범한 이들이 사회공헌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들어보고자 시작한 사업이다. 그러나 결과는 실패였다. “세상이 할머니들에게 좀 더 다가갈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였죠. 하지만 항구적인 서비스를 하기에는 여러 문제가 많았어요. 가장 큰 문제는 한 사람의 간병을 간단한 기부 활동으로 해결하기 어렵다는 점이었죠. 제가 가진 돈을 다 쓴다고 할머니들의 삶이 변화되긴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가족 한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치지 않고서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것이죠. 결국 개인의 노력이나 봉사활동 차원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고, 국가마저 해결할 수 없는 복지의 사각지대를 메울 수 있는 시스템을 생각했죠. 그것이 케어닥 탄생의 근간이 되었어요.” 박 대표의 이러한 결정에는 개인적 경험도 밑바탕에 있었다. 농부의 아내로 유복하지 못했던 어머니가 건강도 좋지 않은 상태에서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를 돌본 과정은 지켜보는 사람도 견디기 힘든 경험이었다. 그는 “과연 어머니의 인생은 무엇이었는지 되묻게 됐다”고 설명했다. 간병이라는 것은 결국 한 사람의 인생을 고스란히 바치는 과정이라는 인식이 케어닥에 녹아 있는 셈이다. 단순히 내 병시중을 들 누군가를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환자의 생명과 가족의 삶을 함께 구원해줄 수 있는 서비스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머니의 인생은 무엇이었나?” “예전에는 가족이 간병하는 게 당연시되었잖아요. 특히 며느리나 딸이 그 대상이었죠. 과연 지금 사회에 그러한 체계가 맞는 것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죠. 설사 누군가가 자신의 삶을 포기하고 간병에 전념한다고 해도, 환자에게 전문성 있는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을까요? 그 가족은 벌어지는 상황에 잘 대처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케어닥은 2018년 탄생했다. 단순히 돌봄 인력의 수요와 공급을 연결하는 서비스가 목표는 아니었다. 돌봄을 제공하는 간병인과 요양보호사, 그리고 노인장기요양시설과 요양병원, 요양원 등 요양기관의 정보를 돌봄이 필요한 환자와 가족에게 제공하는 플랫폼이다. 이를 위해서 그는 가장 먼저 넘어야 할 산을 ‘정보의 비대칭’으로 보았다. “단지 사업적 관점에서 정보가 필요했던 것은 아니에요. 소비자 입장에서 화가 날 상황이잖아요. 터치 몇 번으로 동네 짜장면집의 리뷰나 평점은 쉽게 알 수 있는데, 부모님을 맡겨야 하는 요양기관의 정보는 제대로 알 수 없었죠. 5000원짜리 음식이 아니라 매달 수백만 원 간병비가 들어가는 일인데 말이죠. 그래서 정부에 관련 정보 제공을 요청했다가 여러 핀잔을 들었어요. 감당이 가능하겠냐는 얘기도요.” 그러다 2018년 여름 보건복지부가 열었던 보건의료 데이터 활용 공모전이 터닝 포인트가 됐다. 케어닥이 이 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으면서 공공 데이터에 접근할 권한을 확보했다. 케어닥의 ‘장기요양시설 찾기’ 서비스는 각 요양기관의 평가 결과와 함께 의료진, 돌봄 인력의 현황, 입소 인원수, 돌봄 프로그램, 수가 등 정보, 이용자들의 후기를 보여준다. 요양 서비스 핵심은 ‘인력’ 창업 초기의 숙제가 ‘정보의 비대칭’이었다면 앞으로의 과제 중 하나는 ‘인력’이다. 박 대표는 요양 서비스의 수준을 높이는 데 장애물로 작용했던 ‘수가 중심’의 구조를 깨고 환자를 돌보는 인력에게 동기부여 방법을 찾으려 애쓰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지금의 장기요양보험제도에서는 더 나은 품질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가 고착화되고 있어요. 정부의 인력이나 관리 방법은 가이드라인을 지키지 않을 경우 벌주는 것 정도밖에 없어요. 더 잘했을 때의 동기부여는 빠져 있죠. 그러다 보니 정부로부터 ‘수가’를 받는 데에만 최적화되어 있어요. 안 하는 것은 계속 안 하고, 해야 하는 것도 수가 수령에 지장 없으면 안 하는 것이죠. 서비스 대상은 환자지만 사실상 모두 정부만 바라보고 있어요. 환자는 정부 보조금을 받는 수단이 아니라 간병의 대상이자 소비자라는 인식이 생겨나야 더욱 전문적인 서비스를 기대할 수 있겠죠.” 그래서 케어닥에서는 간병인이라는 명칭 대신 ‘케어코디’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요양 체계에 맞춰진 근로자가 아니라 새로운 전문 직종으로 발돋움할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처음에 합류하신 분들은 저희의 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왜 앱에 가입해야 하는지, 면접은 왜 봐야 하는지, 보고는 왜 해야 하는지 의문을 제기했고 공감하지 못했죠. 하지만 그 과정에서 더 나은 처우가 보장되고,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중재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많은 분이 합류했죠.” 요양 서비스 업계는 지금 심한 인력난에 처해 있다. 케어닥도 예외는 아니다.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이러한 인력난은 배가 됐다. 고령화로 계속 수요는 늘어나는데, 간병 업무는 기피 직종이 돼버렸다. 요양기관의 집단 감염이나 코로나19 전파의 원인으로 간병인들이 지목당하면서 기존 간병인 중 업계를 떠난 이들도 많다. 박 대표는 결국 이러한 인력 공백 중 일부는 외국인 간병인들이 해결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우리보다 고령화를 먼저 겪은 일본도 지금 간병인 중 베트남인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요. 그 자리도 원래는 한국인이 하던 것이었죠.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인데 공급이 부족하다고 해서 방치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먼저 해야 할 것은 요양 인력을 전문가로 인식 개선하고 국가적으로 돌봄 종사자를 양산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래도 결국 외국인 요양 인력은 확대될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 과정에서 좋은 인력을 어떻게 필터링하고 교육할지 고민해야죠.” 돌봄 인력에 대한 인식 변화해야 물론 요양 인력에 대한 소비자의 인식 개선도 중요한 과제다. 소비자들이 돌봄 인력을 함부로 대해 발생하는 갈등은 풀어야 할 요양업계의 오래된 과제다. “돌봄 인력을 가정부 정도로 대하면 다행이란 얘기도 우리끼리 해요. 식모나 종으로 대하는 사람들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원래는 가족이 하던 일을 대신 하는 거잖아요. 딸이나 며느리라면 비용 없이 했을 일을 누군가에게 돈을 주고 시키려니 아깝다는 인식이 강한 것 같아요. 업무 범위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죠. 돌봄 인력이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시킬 수 있고, 어떤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지에 대한 가이드가 부족해요. 식사부터 빨래, 집안일까지 디테일한 논의가 필요하죠. 그 고민을 케어코디들과 함께 해나가고 있는데, 돌을 뚫는 과정이라 생각하고 있어요. 자리가 잡히면 쉽게 지나갈 수 있으리란 기대와 함께 말이죠.(웃음)” 그는 마지막으로 독자들에게 인생의 졸업, 마지막을 좀 더 착실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다고 당부했다. “가족끼리 요양시설에 관한 이야기는 기피하는 실정이죠. 일종의 금기처럼 말이에요. 하지만 들어가기 싫다면 싫은 대로, 혹은 지내야 한다면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 스스로 공부가 필요합니다. 상황이 벌어질 때를 대비해 미리 준비하는 자세가 중요해요. 막연히 버티다가는 결국 무작정 비싸고 좋은 곳만 찾거나, 그저 조건에 맞는 곳에 맡기는 선택을 해버리는 경우를 많이 봤어요. 두렵더라도 피하지 않고 학습해보면 막연한 공포를 이기고 더 나은 돌봄, 더 나은 황혼을 맞이할 수 있을 겁니다.”
- 2021-12-16 0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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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업급여 5년 내 3번 넘게 받으면 깍인다
- 앞으로 5년 내에 실업급여(구직급여)를 자주 받으면 받는 금액이 줄어든다. 고용노동부는 9일 고용보험위원회를 열고 구직급여 반복수급에 관한 '고용보험 제도개선 방안'을 의결했다고 밝혔다. 이 방안은 노사 전문가들이 고용보험 재정 건전화를 위해 고용보험 제도개선 태스크포스(TF)에서 지난 4월부터 마련했다. 구직급여 부정수급을 줄여 실업급여가 꼭 필요한 시니어 같은 비자발적 이직자가 제대로 구직급여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고용노동부는 이날 의결한 내용을 토대로 고용보험법과 고용산재보험료징수법 최종 개정안을 마련한 다음, 8월에 입법예고를 할 계획이다. 최종 개정안에 담길 내용을 대략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구직급여를 5년 동안 3번 넘게 받으면 3회째부터 수급 횟수에 따라 단계적으로 감액된다. 예로 하루에 지급하는 구직급여를 5년 동안 3번 받으면 3회 때는 10%, 4회 때는 25% , 5회 때는 40%, 6회가 넘으면 50%를 깎는 방식이다. 구직급여 대기기간도 연장한다. 예로 5년 동안 3회면 2주, 4회가 넘으면 4주가 지나야 구직급여를 받을 수 있는 셈이다. 다만 적극적으로 재취업을 하려고 노력하거나, 임금이 매우 낮은 구직자는 제외한다. 또 입‧이직이 빈번한 일용근로자도 제외한다. 예를 들어 정해진 구직급여 지급 일수가 절반도 지나지 않아 재취업했다면 적극적 재취업자로 판단해 반복수급 횟수에서 뺀다. 구직급여 악용 가능성이 높은 사업장에는 고용보험료를 추가로 부담시키는 방안도 담는다. 사업장에서 3년 동안 발생한 구직급여 수급자 중에서 12개월 미만 근속자 비율이 90% 이상으로 높고, 3년간 부과한 보험료보다 사업장에서 발생한 구직급여 수급액이 일정 수준 이상이면 해당 사업장에 추가 부담료를 청구하는 방식이다. 사업장에 대한 고용보험료 인상은 2025년부터 이뤄진다. 정부가 관련법을 시행한 뒤 3년 동안 실적을 쌓아 이를 기준으로 보험료를 부과할 계획이어서 3년 이상 기간이 더 필요해서다. 또 구직급여를 받을 수 없는 자발적 이직자가 단기일자리에 일시적으로 취업한 다음 비자발적으로 이직해 구직급여를 신청하는 편법을 줄이고자, 이들에게는 4주가 지나야 구직급여를 받을 수 있게 한다. 한편 예술인과 노무제공자 고용보험 적용 최저 연령을 15세로 설정했다. 원하면 임의 가입도 허용한다. 외국인 예술인의 수급 자격을 제한할 수 있도록 하는 근거 규정도 마련한다. 근로자와 예술인, 노무제공자처럼 유형이 다른 여러 피보험자격을 가진 복수 피보험자격자가 구직급여를 받을 때는 불이익을 생기지 않도록 피보험자격 중 하나를 선택해 구직급여를 신청할 수 있도록 제도화 한다.
- 2021-07-09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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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득이 없어도, 가입 가능한 국민연금
- 소득이 없으면 국민연금에 못 가입하나? 폐업하면 국민연금을 반드시 내야할까? 해외에 있을 때는 어떡하지? 이처럼 국민연금의 가입과 탈퇴에 대해서 의문이 생길 때가 있지만, 찾아보지 않으면 알기 쉽지 않다. 다음에서 알아두면 좋은 국민연금 상식을 Q&A 형식으로 살펴보자. Q. 공무원 연금을 받고 있는데 국민연금에 가입할 수 있나요? 국민연금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국내 거주 외국인도 해당) 18세 이상 60세 미만인 분은 누구나 의무가입 대상입니다. 다만 공무원, 군인, 사립학교 교직원, 별정 우체국 직원은 각각 별도의 연금이 있어 가입대상에서 제외됩니다. 그러나 다른 공적 연금을 매월 받더라도 60세 미만이라면 국민연금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이를 임의가입이라 합니다. 2021년 1월 기준 국민연금 전체 지역가입자의 소득 중에서 중위수 소득인 100만 원을 기준으로 매월 9만 원(소득의 9%) 이상을 냅니다. 최소 가입 기간인 10년 이상을 내면 노후에 연금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Q. 연금 보험료를 조정하려면 어떻게 하나요? 지역가입자로서 소득이 현저히 감소한 경우 기준소득월액 변경신청을 하시면 됩니다. 자영업 등을 하는 지역가입자는 특성상 소득이 일정치 않고 변동이 심하므로 가입 중에 소득이 현저히 감소한 경우에는 소득 감소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를 첨부하여 기준소득월액 변경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본인의 노후대비를 위하여 실제 소득보다 높게 결정하여 줄 것을 희망하면 입증 서류 없이 변경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사업장가입자는 전년도 소득을 기준으로 연금 보험료가 부과되는데, 연금 보험료를 내는 시점의 월 소득이 전년도보다 20% 이상 하락 또는 상승하는 경우에는 근로자의 동의를 얻어 사용자가 기준소득월액 변경신청을 할 수 있습니다. 지역가입자와 사업장가입자 모두 신청일이 속한 월의 다음 달부터 변경된 기준소득월액에 의해 새로 조정된 연금 보험료가 반영됩니다. Q. 폐업하면 반드시 국민연금을 내나요? 폐업(휴업)으로 소득이 없으면 납부 예외 신청을 하여 연금 보험료 납부를 일정 기간 면제할 수 있습니다. 18세 이상 60세 미만의 국민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 국민연금에 가입해야 하고 소득 활동에 종사하면 소득에 따른 연금 보험료를 냅니다. 사업자등록을 내서 개인 사업을 하다가 폐업 또는 휴업 신고를 하여 소득이 없다면 납부 예외 신청을 하여 일정 기간 보험료 납부를 면제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납부 예외 기간은 가입 기간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향후에 연금을 받을 때 연금액이 줄어들 수 있습니다. 물론 연금 보험료를 계속 납부하면 가입 기간이 늘어나면서 수령할 연금액이 증가합니다. 납부 예외 신청은 가까운 공단 지사에 방문하거나, 우편, 팩스, 전화(공단에서 휴·폐업 사실 확인 가능 시)로도 가능합니다. 납부 예외 중이라도 다시 소득 활동에 종사하시면 다음 달 15일까지 납부 재개 신고를 해주셔야 합니다. 참고로, 국민연금은 가입 기간과 가입 중의 기준소득월액을 반영하여 연금액이 결정되기 때문에 소득이 없더라도 납부 예외 신청을 하시는 것보다 적은 금액이라도 연금 보험료를 내는 것이 유리합니다. 그리고 납부 예외는 폐업 시 자동으로 처리되지 않기에 반드시 본인의 신청으로 처리됩니다. Q. 소득이 없어도 국민연금에 가입할 수 있나요? 본인이 희망하면 국민연금에 가입할 수 있습니다. 원칙적으로 공무원 연금 등 타 공적 연금에 가입되지 않은 18세 이상 60세 미만의 국민은 국민연금 가입대상입니다. 다만,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의한 수급자, 국민연금 또는 타 공적연금 가입자 또는 수급자의 소득 없는 배우자와 27세 미만으로 소득 없는 분 등은 의무가입 대상에서 제외되고 본인이 원하면 임의가입자로 가입할 수 있습니다. Q. 해외에 있으면 보험료 납부를 일시 정지 할 수 있나요? 단지 해외 체류를 이유로 보험료 납부를 일시 정지할 수는 없습니다. 소득이 있는 경우에는 해외 체류를 이유로 연금 보험료 납부가 면제될 수는 없습니다. 해외 장기 체류자로서 귀국 예정이 없는 자라 하더라도 해외 이주 신고를 하지 않은 자는 국민연금 가입대상입니다. 해외에 있어도 자동 이체·인터넷 납부 등 고지서 없이도 편리하게 내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만, 유학 및 어학연수를 이유로 해외에 나가서 국내에서 발생하는 소득이 없는 경우에는 연금보험료 납부 예외 신청이 가능하고, 국적상실이나 국외 이주 시에는 국민연금 가입자 자격이 상실되며 납부한 연금 보험료를 일시금으로 받으실 수 있습니다. 출처 : 국민연금 100문 100답
- 2021-01-07 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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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발 훈풍 타고 본궤도 오르다
- 수도권 2기 신도시인 경기도 파주시 운정신도시가 ‘완성형 신도시’로 각광받고 있다. 최근에는 역세권 단지를 중심으로 프리미엄이 형성되면서 쌓였던 미분양 가구가 빠르게 소진되고 있다. 3기 신도시에 발목을 잡힐 것이란 우려의 목소리도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완성형 신도시 ‘운정신도시’가 교통개발 호재와 탄탄한 배후수요를 자랑한다. 특히 정부의 고강도 규제로부터 자유로운 비규제 지역의 특권과 풍선효과,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 등 서울행 교통망 확충에 따른 지역가치 상승이 기대된다. 실제 운정신도시는 2018년을 기점으로 지가 상승률을 비롯해 매매가와 전세가 등 시세 오름세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GTX 개통되면 강남까지 30분 운정신도시는 경기도 파주시 동패·목동·야당·와동동 일대 1652만2800㎡의 부지에 조성된 수도권 2기 신도시다. 파주는 그동안 군부대에 의지하는 전방지역 이미지가 짙었지만, 최근 LG그룹 계열사 등이 이전해오고 일반 업무단지가 대거 들어서면서 산업도시로 새롭게 단장하고 있다. 무엇보다 2023년에 개통되는 GTX-A노선과 현재 추진 중인 지하철 3호선 연장선 사업이 가장 큰 호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또한 제2순환고속도로 전 구간(2026년 완공), 서울·문산 간 고속도로(2020년 완공)를 시작으로 파주로, 동서대로, 제2자유로를 통한 사통팔달 교통망이 형성돼 서울로의 직주근접 실현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미 개통된 경의·중앙선 파주 운정역을 통해 서울 홍대까지 30분대, 용산까지 40분대로 이동할 수 있다. 여기에 GTX-A노선이 개통되면 운정신도시역에서 강남 삼성역까지는 30분대로 오갈 수 있게 된다. 한국고속철도(KTX), 수서고속철도(SRT) 등 전국구 광역철도가 운행되는 서울역(20분대), 수서역(30분대)도 비슷한 시간대로 끊을 수 있다. 고종완 한국자산관리연구원장은 “GTX A·B·C 3개 노선 사업 가운데 A노선 사업이 가장 빠르게 진행 중이라는 점도 호재”라며 “일반적으로 교통망은 발표·착공·개통 3단계에 걸쳐 15~20%의 집값을 띄우는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매력적인 완성형 신도시 아파트 운정신도시는 ‘주거쾌적성’과 ‘여가활용성’도 탁월하다. 신도시 내에 이마트, 홈플러스,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 다양한 쇼핑·문화시설이 있어 생활 전반에 편리성을 더한다. 코오롱스포츠센터와 운정체육공원, 맑은물체육공원 등에서는 축구, 농구, 배드민턴 등 다양한 운동을 통한 여가활동이 가능하다. 이뿐만 아니라 운정호수공원, 소리천수변공원, 운정건강공원 등이 있어 친환경 라이프도 누릴 수 있다. 특히 운정호수공원이 주는 혜택이 가장 크다. 신도시라고 하면 비슷비슷한 붕어빵 도시가 연상되는데, 이곳은 호수공원을 품고 있어 타 도시보다 입지조건이 훌륭하다는 평가다. 이 같은 교통호재와 입지조건으로 운정신도시 내 아파트의 인기가 뜨겁다. 신도시가 완성되려면 적어도 수년에서 10년 이상 걸리기 때문에 주변 생활 인프라가 부족하고 공사로 소음이나 분진 등의 피해가 있을 수 있다. 반면 ‘완성형 신도시’는 상가나 문화시설 등 편의시설들이 잘 갖춰진 덕에 주거 인프라가 우수하다. 수요자가 운정신도시에 관심을 갖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6월 파주 운정신도시에 공급된 ‘운정 중흥S-클래스’, ‘운정 1차 대방노블랜드’, ‘운정신도시 파크푸르지오’ 등은 단기간에 분양을 완료했다. 인프라가 잘 갖춰진 파주 운정신도시에 대한 미래 가치와 교통호재가 맞물리면서 분양에 성공했다는 후문이다. 최근까지 아파트 가격도 상승세를 보인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에 따르면, 전용면적 84㎡ 규모의 아파트의 경우 야당역 인근 ‘롯데캐슬 파크타운Ⅱ’의 지난해 12월 매매가는 4억4000만 원이었으나, 올 3월 5억1000만 원에 거래됐다. 또 지난해 11월 3억5000만 원이었던 ‘한빛마을 5단지 캐슬앤칸타빌’의 매매가는 올 3월 4억3000만 원으로 올랐다. 권대중 명지대학교 부동산대학원 교수는 “운정신도시는 운정역과 야당역을 중심으로 GTX-A노선 개통 호재의 영향을 받고 있다”며 “해당 지역은 현재 5000만~1억 원 정도의 프리미엄이 붙은 상태”라고 설명했다. 또 “앞으로 남북관계가 개선되거나 제2개성공단이 파주에 들어서면 기대심리로 인해 아파트 값이 더 오를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싱글 직장인 위한 오피스텔 주목 운정신도시 오피스텔의 경우 지구 서쪽으로 파주출판단지가 있고, 북쪽으로 파주읍과 LCD산업단지를 비롯한 다수의 산업단지가 있는 만큼 배후수요가 탄탄하다. 산업단지와의 거리가 가까워 출퇴근이 수월하고, 전 방위 인프라가 집중 개발돼 독보적 주거환경을 갖췄다는 점에서 최적의 직주근접 배후주거지로 주목받는다. 최근 몇 년간 운정신도시 야당역세권 일대에서는 전용면적 5~8㎡ 규모의 소형 오피스텔들이 1억 원 중반~후반대 분양가를 제시하는 경우가 많았다. 고가 논란에도 해당 상품들은 성황리에 분양과 계약을 마쳤고, 입주를 앞두고 적잖은 프리미엄이 형성됐다. 배후수요가 풍부하다 보니 주택, 비주택을 막론하고 수요자와 투자자가 몰려든 것이다. 이 같은 여건과 상황을 종합해볼 때 운정신도시의 오피스텔 투자는 매력적이다. A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GTX-A노선 개통 호재와 산업단지 조성 등으로 배후수요가 더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에 비교적 소액으로 높은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오피스텔에 투자자가 몰리고 있다”며 “직주근접 주거지를 찾는 싱글 직장인 수요가 높아 운정신도시 오피스텔의 인기는 한동안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부동산 투자수익률을 높이는 첫 단추는 ‘합리적인 분양가’다. 실투자금을 줄여야 전·월세 등 임대수익률을 높이면서 부족한 자금에 대한 대출이자 부담을 덜 수 있다. 따라서 운정신도시 오피스텔 분양가 수준을 봤을 때 앞으로 기대 가능성을 엿볼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국토교통부 실거래가 공개 시스템에 따르면, 야당역 근처 ‘유니타워’(전용면적 23㎡)의 올 2월 매매가는 1억900만 원이고, 지난 5월 보증금 500만 원에 53만 원의 월세 계약이 이뤄졌다. 또 3월에 9200만 원에 거래된 ‘운정유미어스 1차오피스텔’(전용면적 19㎡)은 같은 달 보증금 500만 원에 월세 45만 원의 계약이 성사됐다. 오피스텔 매매가는 점차 오르는 추세다. 야당역 근처에 위치한 ‘디베뉴스타’(전용면적 19㎡)는 지난해 9월 1억 원에 거래됐으나, 올 2월 1억3000만 원으로 뛰었다. 또 ‘문정유미어스 1차오피스스텔’(전용면적 19㎡)은 지난해 12월 1억1300만 원대였으나, 올 4월 1억1900만 원으로 크진 않지만 상승세를 보였다. ◇주거·업무 수요 품은 야당역 상권 운정신도시 상권은 지역별로 다르지만 ‘넘치는 배우수요’로 안정화에 근접했다는 분석이다. 운정신도시는 도시형 교통모델 마을버스 등 5개 노선이 신설될 정도로 인구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파주시청이 집계한 2020년 3월 기준 파주시 내·외국인 인구 총계는 46만6117명으로, 전체의 39%에 해당하는 18만1097명이 운정1~3동에 거주 중이다. 산업단지 배후수요도 운정신도시의 상권 안정화에 힘을 보탠다. 현재 파주시청 홈페이지에 공개된 관내 산업단지는 국가산업단지인 파주출판문화정보산업단지와 파주탄현중소기업전용산업단지, LCD클러스터산업단지, 그 밖의 일반 산업단지들을 포함해 모두 16곳이다. 곳곳에 종사하는 근로자와 관계자 수는 21만 명으로 추산된다. B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는 “앞으로 LCD클러스터산업단지 내 LG디스플레이 공장이 증설되고, GTX 운정신도시역 일대에 운정테크노밸리가 조성되면 고용창출에 따른 추가적인 인구 유입으로 배후수요가 더 늘어날 것”이라며 “운정신도시 내에는 가람마을과 한울마을 등의 상권이 있지만, 투자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은 야당역 일대”라고 귀띔했다. 야당역 상권은 일자로 길게 늘어진 형태로 주거시설과 업무시설에서 발생하는 탄탄한 수요를 갖추고 있다. 이 지역은 현재 개발이 진행 중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빠르게 개발되는 야당역 일대는 앞으로 역세권 상권의 진면목을 드러낼 유망 상권으로 꼽힌다. 야당역 인근에 위치한 공인중개사무소 관계자들의 말을 종합해보면, 현재 일반상가 1층의 임대료는 3.3㎡당 15만 원 수준으로 아직 투자 문턱이 높지 않은 편이다. 물론 운정신도시 가람마을 일대도 먹자상권이 발달했다. 하지만 상가 1층에 공실이 드물게 눈에 띈다. 이 지역은 상권이 분산돼 점점 활력을 잃는 분위기라는 게 인근 주민의 설명이다. 반경 1㎞ 내에 1만3000세대가 포진해 있는 한울마을 상권은 유명 프랜차이즈, 각종 의료시설, 대기업 유명 브랜드 업체들이 입점해 있으나 역세권으로부터 거리가 있는 지역이다.
- 2020-06-03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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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유제품이 허투루 보이지 않는 이유
- 옷값이 싸다 보니 옷을 하찮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심지어는 멀쩡한 옷도 집안 정리한다는 명분으로 내다 버린다. 그런데 옷 만드는 과정을 보면 옷을 허투루 대할 수 없다. 옷은 먼저 디자인이 있어야 한다. 디자인에 맞는 옷감도 골라야 한다. 원단 직조, 염색, 디자인 과정을 거친 후 패턴을 뜬다. 본을 뜬다고도 한다. 그 패턴대로 옷감을 자른다. 재단된 옷감은 재봉틀로 봉제한다. 그다음 주머니, 단추, 지퍼 등을 달아준다. 마지막으로 다리미질을 하면 옷이 완성된다. 지금은 봉제 산업도 많이 기계화되었다. 재단도 컴퓨터가 하고 복잡한 장식품은 컴퓨터가 알아서 자수를 놔준다. 그래도 봉제 산업은 대표적인 노동 집약적 산업이다. 사람 손이 많이 가는 업종인 것이다. 그렇게 많은 수공을 거쳐 만든다. 임금이 싼 나라에서 옷을 만들어 수입하고 있기 때문에 옷값이 싼 것이다. 그렇다고 옷을 허투루 대하는 것은 만든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우리나라는 한때 ‘섬유 왕국’이라는 칭호가 있었다. 수출산업으로 주목받던 시대였다. 그러나 창신동 봉제 골목에 가 보니 이제는 봉제 산업도 대가 끊어지는 듯했다. 이미 나이든 작업자와 외국인 근로자들에 의해 명맥을 간신히 잇고 있다. 88 서울올림픽 시절이었던 1980년도, 그때만 해도 해외 공장에 의존하지 않고 우리 손으로 옷이나 장갑 등 봉제품을 만들던 시절이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인 것이다. 제대로 된 상품을 만들기 위해 각 공정을 꼼꼼하게 관리했다. 납기를 맞추기 위해 밤일도 마다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숙련공이 되려면 보조공부터 시작해서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야 한다. 그렇게 애써서 만든 제품을 볼 때마다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겨울철이면 전철 안에서 불법으로 상인들이 장갑을 1,000원~2,000원에 팔곤 했다. 필자가 직접 장갑을 만들어 보니 재료비에도 못 미치는 가격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가격에 팔 수 있을까? 정상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소요량을 더 받아 재료비가 제로가 되거나 정책적으로 지원을 받아야 재료비가 내려간다. 그리고 대량 생산이다. 원가는 재료비 50% 인건비 20~30%, 나머지가 관리비와 이익이다. 요즘 전철 역사에 많이 보이는 빈티지 의류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5,000원부터 10,000원이 가장 많고 비싸 봐야 20,000원 정도이다. 이런 상인들은 옷을 주로 일본에서 가져온다고 한다. 이월상품이나 재고, 중고의류 등이다. 무게로 옷값을 치르고 가져와서는 세탁, 다리미질해서 판다. 찜찜해서 남이 입던 옷을 어떻게 입느냐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누군가 숙련공이 되어 눈을 비비며 애써서 만든 제품이다. 만든 사람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면 값이 싸더라도 허투루 보이지 않는다. 이탈리아 ‘볼자노’라고 북부 알프스산맥이 보이는 휴양 도시에 출장 간 일이 있다. 여분의 양말을 챙기지 못한 것을 뒤늦게 알고 어지간하면 현지에서 사서 신으려고 했다. 그러나 명품 양말만 팔고 있었다. 가격이 최하 8만 원이었다. 한국에서는 몇천 원이면 살 수 있는 양말인데 아무리 명품이라지만 제정신에 살 수는 없었다. 매일 밤 양말을 빨아 신어야 했다. 한국은 아직도 섬유 왕국인 셈이다.
- 2018-06-07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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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년퇴직 후 한국어 강사로 활약 중인 이상용 씨
- “퇴직 전 교직에 있을 때부터 한국어 강사를 하고 싶었어요.” 현재 다양한 기관에서 한국어 강사로 활동 중인 이상용(李相庸·64) 씨는 평생 초등학교 교단에서 활동해온 교사 출신. 40여 년간을 넘게 학교에서 근무하다 2015년 8월 정년퇴직했다. 원래 영어를 전공한 데다, 학교 내에서 교감과 교장 등 중책을 맡으면서 다양한 다문화가정을 경험했다. 자연스레 그들과 가까워지면서 한국어가 서툰 외국인이나 다문화가족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퇴직 전부터 온라인 교육과 오프라인 실습에 참여해 한국어교원 자격증 2급을 따놨죠. 아무래도 평생을 학생들 가르치는 일을 해온 터라 유리한 부분이 있었어요.” 퇴직 후 2016년부터는 본격적으로 한국어 강사로 데뷔했다. 법무부에서 시행하는 사회통합프로그램을 통해 영주권을 원하는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쳤다. 주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외국인 근로자, 유학생이 많았다. “지난해 말까지 총 6기 교육에 참여했어요. 평생 만나온 어린 학생들과 달리 나이도 많고 사용하는 모국어도 제각각이었지만 가르치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어요. 다들 절실함도 있었고요. 교육 후에는 시험에서 일정 점수 이상을 받아야 해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가르치는 학생도, 과목도, 장소도 달랐지만,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는 여전했던 모양이다. 근무시간에 쫓기는 외국인 근로자의 수업 참여를 위해 고용주를 전화로 설득하기도 했다. 그렇게 맺게 된 사제관계는 4개월 교육기간으로 끝나지 않았다. 지금까지도 메신저를 통해 한국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지도하는 멘토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최근에는 온라인 교육기업 세이글로벌을 통해 전 세계 학생들을 만나고 있다. 그의 한국어 강습 실력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평이 좋아, 강사 중에서도 수강신청이 많은 편에 속한다. 이 씨는 걱정과 달리 온라인 수업에 적응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고 이야기한다. 또 한국어에 대한 지식 전달만큼이나 수업에서 올바른 우리 문화를 전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아무래도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해외에서 인기 있는 다양한 한국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돼요. 그들에게는 한국어 강사가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이라는 나라를 알게 되는 유일한 창구가 되는 것이죠. 이를 통해서 외국인 학생들은 한국의 문화를 이해하게 되고, 동화됩니다.” 그렇다면 좋은 한국어 강사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까? 베테랑 입장에서, 이제 시작하는 한국어 강사에게 어떤 말을 전하고 싶을까. 이 씨는 한국어로 말하고 싶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한국어 수업이라고 해서 다른 수업과 원리가 다르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말할 기회를 만들어주고, 하고 싶어 하는 말을 많이 하도록 입을 열어주는 것이에요. 일방적으로 끌고 나가지 말고 학생 스스로 말하는 것을 터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해요. 물론 강사 경력이 짧다면 그 과정이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그래도 참을 줄 알아야 합니다.” 그는 한국을 알리는 민간외교관으로서의 자긍심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조언한다. “큰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대한민국을 세계에 소개하는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단순한 언어교육 이상의 효과가 있어요. 그만큼 정확한 정보가 전해지도록 노력하고, 서로를 존중하고 인정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합니다.”
- 2018-03-0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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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세계 학생을 제자로, 한국어 강사 돼볼까?
- 요즘 TV 속은 한국말 잘하는 외국인의 전성시대다. 한국어를 잘하면 나라를 대표해 발언권을 얻거나 친구까지 초청해 한국을 소개하기도 한다. 한국어에 능숙한 외국인이 늘면서 달라진 풍속도다. 이렇게 시대가 변하면서 한국어 강사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다. 외국인 근로자와 다문화가족의 증가도 이러한 수요 폭발을 유발했다. 한국어 강사는 언어와 함께 문화를 전한다는 면에서 시니어에게 적합한 직종 중 하나로 꼽힌다. 전 세계 학생들과의 교류에 관심이 있다면 한국어 강사의 문을 두드려보는 것은 어떨까.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한국어에 대한 관심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외국인의 한국어능력시험(TOPIK) 응시 추세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시험을 주관하는 교육부 산하 국립국제교육원은 지난 1월, TOPIK의 응시자가 1회부터 지난해 11월 제55회까지 212만168명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20년 만에 무려 108배나 늘어난 것이다. 한국어 강사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다. 대표적 자격제도인 국립국어원 한국어교원 자격취득 현황을 보면 2007년 790명이었던 심사 신청자는 2016년 6304명을 기록했다. 10년 만에 698% 증가한 셈이다. 강사의 시작은 한국어교원 자격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려면 한국어교원 자격은 필수로 꼽힌다. 문화체육부장관이 부여하는 한국어 교육에 관한 자격제도로 심사와 발급 등의 실무적인 부분은 국립국어원이 맡고 있다. 국립국어원에서는 한국어교원에 대해 “국어를 모어(母語)로 사용하지 않는 외국인, 재외동포를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는 사람을 말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국어교원은 1, 2, 3급으로 나뉜다. 2급은 학위과정으로 한국어학을 전공하거나 관련 과목을 이수한 사람에게 부여되며, 3급은 양성과정으로 학위가 없어도 100시간의 이론과 20시간의 실습교육을 받은 사람이면 누구나 지원이 가능하다. 때문에 학위와 자격증이 동시에 필요하거나 학사학위 소지자의 경우는 비교적 쉽게 2급 지원이 가능하다. 대학이나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을 통해 16과목(48학점)을 이수해 학위를 받으면 별도의 한국어교육능력검정시험을 보지 않고 한국어교원 2급 신청이 가능하다. 이럴 경우 자격 취득까지 1년 6개월 정도의 기간이 걸린다. 학위가 없는 경우에도 사이버대학이나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을 통해 학위 취득과 함께 한국어교원에 도전할 수 있지만 3년 내외의 시간이 소요되는 것이 단점이다. 사이버대학 한국어학과의 경우 시간과 비용 면에서 불리한 대신 졸업장, 학위와 함께 독서논술지도사나 다문화사회전문가 등 관련 자격에도 지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3급은 조금 더 간단하다. 학위가 없는 사람도 120시간의 교육을 받으면 된다. 하지만 한국어교육능력검정시험에 합격해야 하기 때문에 경험자들은 “난이도가 만만치 않다”고 말한다. 교육비에도 차이가 있다. 시중 교육기관에서 3급 과정을 위한 교육비는 총 50만~90만 원 선. 이에 반해 2급 획득을 위한 학점은행제 교육기관의 비용은 일반적으로 과목당 15만 원 이상이 필요하다. 기관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모든 과목을 수료하려면 250만~450만 원가량 든다. 3급은 자격 취득 5년 후 경력 1200시간이 지나면 2급으로 승급 가능하며, 2급은 다시 5년 후 경력 2000시간이 지나면 1급으로 승급할 수 있다. 교육기관을 고르는 가장 기본적인 과정은 자격 과정을 관장하는 국립국어원의 한국어교원 홈페이지(kteacher.korean.go.kr)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대학부설기관이나 학점은행제, 양성과정 등 기관 성격에 따라, 지역에 따라 공인된 교육기관을 찾을 수 있다. 세계 각국에서도 수요 많아 한국어교원 자격을 획득하면 활동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 생각보다 많다. 국내외에 설치된 대학 한국어학당 같은 부설기관이 대표적. 한국에 유학 온 외국인 학생을 위한 정부기관 한국유학종합시스템(www.studyinkorea.go.kr)에 등록된 대학부설 한국어 교육원 수는 192개에 달한다. 또 사설 한국어학원도 한국어 강사로 일할 수 있는 주요 기관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인터넷을 통한 화상교육이 발달하면서 이를 전문으로 한 교육기관도 증가하는 추세다. 이외에도 최근 급증한 다문화가족을 위해 설치되고 있는 다문화가족지원센터가 있다. 각 지자체에서 운영 중인 다문화가족지원센터는 대부분 국제결혼을 통해 한국에 온 이주민이나 자녀를 위한 한국어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또 외국인근로자지원센터, 이민자통합센터, 사회통합프로그램 운영기관 등에서도 각각의 설립 목적에 따라 국내에서 거주 중인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국어 교육을 실시하고 있어, 강사에 대한 수요가 있다. 한국어 수업을 진행하고 있는 주요 기관들은 강사를 선발할 때 경력을 우선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경험삼아 한국어 강사를 하고 싶거나 경력을 쌓고 싶다면 무료 한국어 교육을 실시하는 기관에 자원봉사를 신청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국내에 있는 대표적 무료 한국어 교육기관은 서울글로벌센터, 한국이주노동자복지회, 한국외국인력지원센터, 서울외국인노동자센터가 꼽힌다. 해외에서 일하고 싶을 때도 방법은 있다.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가 대표적이다. 코이카에서는 해외봉사단을 통해 한국어 강사를 세계 여러 곳에 파견하고 있다. 50세 이상의 시니어 단원의 파견도 진행 중이다. 코이카의 해외봉사단 중 한국어 강사 부문은 인기가 매우 높아 10대 1의 경쟁률을 기록한 적도 있다. 한국어 강사 선발이 가장 많은 기관으로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세종학당재단이 꼽힌다. 세종학당재단은 한국어 교육기관인 세종학당을 지난해 8월 기준으로 전 세계 54개국에서 171개소를 운영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한국어 수요가 늘면서 세종학당도 매년 증가 추세에 있다. 지난해 국감에서 보고된 자료에 따르면, 세종학당재단의 한국어교원 파견 인원은 2013년 24명에서 2017년 110명으로 매년 증가해왔다. 이밖에도 일부 대학이 해외에 설립한 한국어 학당이나 해외에 설립된 사설 교육기관, 선교기관 등도 한국어 강사의 수요가 있는 곳으로 꼽힌다. 일부 국가의 경우 국가 차원에서 문화교류를 위해 한국어 강사를 선발하기도 한다. 일본의 JET프로그램(The Japan Exchange and Teaching Programme: 어학 지도 등을 행하는 외국 청년 유치 사업)이 대표적이다. 일본 정부는 매년 각 국가에서 국제 교류를 위한 인원을 선발하고 있는데, 선발된 한국어 강사는 각 학교의 외국어 수업 보조나 특별활동, 지역 교류활동 등을 돕게 된다. 한국어 강사로 활동하기 위해 갖춰야 할 또 하나의 덕목은 ‘외국어 능력’이다. 아무래도 교육 대상이 한국어가 서툰 학생이라 다른 언어로 소통이 가능해야 하기 때문. 그래서 일부 기관에서는 자격증 유무, 경력시간과 함께 영어, 중국어, 일본어 회화 능력을 선발기준으로 삼기도 한다. 국내외 한국어 강사 구인 정보를 알고 싶다면 국립국어원 한국어교원 홈페이지의 구인정보 게시판을 활용하면 된다. 청년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그렇다면 실제 시니어 한국어 강사의 취업 시장 상황은 어떨까. 결론부터 말하면 만만치 않다. 수요는 계속 늘고 있지만 청년층의 유입도 점점 많아지면서 취업 시장이 좁은 문이 됐기 때문이다. 한국어교원 자격을 취득 후 활동 중인 중년의 한 한국어 강사는 “한국어 강사를 찾는 교육기관 중 나이제한을 두는 곳도 적지 않고, 학위 소지자나 경력자를 중심으로 뽑기 때문에 양질의 일자리는 시니어에게까지 차례가 돌아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수입 대신 보람을 우선시하고 눈높이를 낮추면 할 수 있는 일이 없진 않다”고 설명했다. 특히 해외에 있는 한국어 교육기관의 경우는 청년층 선호 현상이 뚜렷하다고 한다. 업계 관계자는 “시니어 세대는 자기주장이 강하고, 체력이나 질환 등에 대한 염려가 있어 장기간 해외에 체류해야 하는 교육기관은 상대적으로 건강하고 젊은 강사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한국어 강사에 대한 인적 수요는 해외에서의 한국어 인기, 온라인 교육 시스템의 대중화로 인해 계속 증가할 것이라는 시각이 일반적이다. 세이글로벌 조연정 대표는 “한국어에 대한 인기는 계속 높아질 것”이라고 단언한다. 세이글로벌은 2014년 용산노인복지관, 미국 프린스턴대학교와의 봉사활동 교류가 계기가 돼 설립된 스타트업 기업으로서 한국어 학습을 원하는 전 세계 외국인들과 한국어 강사를 온라인으로 매칭시키는 사업을 지난해 4월 부터 시작했다. 서울시 50플러스 서부캠퍼스와 함께 한국어튜터되기 과정 수업을 운영 중이며, 수료생 중 일부를 선발해 한국어 강사로 취업 기회를 제공한다. 조 대표는 “10대에서 60대까지 수업을 희망하는 학생층도 넓어지고, 한국 문화에 대한 단순한 애정에서 취업을 위한 것까지 배우고자 하는 목적도 다양해지고 있어 한국어 교육시장도 점차 확대될 것”이라고 전망하며 “삶에 대한 다양한 경험과 지식이 많고 은퇴 후 시간 활용이 쉬운 시니어에게 한국어 강사는 적합한 직업”이라고 설명했다.
- 2018-02-28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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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거에게 듣고 미래에게 말하는 ‘문화해설사’
- 최근 고궁과 같은 사적을 방문하면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역사적 배경을 곁들여 문화재를 설명하는 문화해설사를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전하는 ‘이야기꾼’에서 역사적 사건과 그 배경을 설명하는 ‘역사 선생님’으로서, 때론 유적을 안내하는 ‘안내자’로서의 열정을 보여주는 그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문화해설사에 대한 묘한 매력이 느껴진다. 그 매력에 빠지는 것만큼 문화해설사가 될 수 있는 방법도 쉬울까?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문화해설사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이 직업이 정확히 무슨 일을 하는 직종인지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문화해설사란 전문성을 갖고 사적이나 특정 지역의 역사와 가치, 문화를 알리고 방문객의 이해를 돕는 사람을 지칭한다. 문화해설사제도가 처음 도입될 때만 하더라도 특정 문화재를 대상으로 고정적으로 활동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문화재가 아닌 여러 지역이나 코스를 대상으로 해설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문화해설사라는 명칭 역시 대상이나 주관 기관에 따라 조금씩 달라진다. 문화재청의 경우 제도 시행 초창기에는 문화해설사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현재는 문화재안내해설사라고 구분해 부르고 있다. 광역자치단체에서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문화해설사들은 ‘문화관광해설사’라는 명칭이 사용된다. 문화관광해설사제도는 관광진흥법으로 정해져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 그리고 각 지자체가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이밖에 구 단위 소규모 지자체나 민간단체에서 활동하는 인원은 문화해설사, 역사문화해설사, 문화교류해설사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명칭이 해설 대상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그 취지와 역할은 대동소이하다. 정부 문화관광해설사 취득은 ‘바늘구멍’ 문화해설사 중 가장 대표적인 문화관광해설사제도는 어떻게 운영될까? 안을 들여다보면 다소 복잡하다. 문화관광해설사제도의 설립은 2011년 관광진흥법 개정으로 시작됐다. 2001년 ‘한국 방문의 해’를 맞아 당시 문화관광부가 문화유산해설사를 배출하기 시작한 것이 시초다. 문화관광해설사는 자격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다른 제도와 달리 관광진흥법에 따라 문화체육관광부가 인증한 위탁 교육기관을 수료한 사람만이 지원 가능하다. 위탁 교육기관에서 100시간 교육을 통해 배출된 예비 문화관광해설사는 지자체의 평가와 3개월 이상 실무수습을 마친 후에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을 얻게 된다. 이들 교육기관은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관광공사에게 선발을 위탁하는데, 한국관광공사는 3년에 한 번씩 교육기관의 인증을 갱신한다. 현재 인증된 교육기관은 총 25개소로, 교육 시설을 갖춘 대학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이들 25개 인증 교육기관으로 찾아가면 문화관광해설사가 될 수 있을까? 아니다. 이들 교육기관은 상시적으로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지자체에서 문화관광해설사의 수요가 있을 때마다 교육을 의뢰받아 시행한다. 다시 말하면 서울시와 같은 광역자치단체에서 문화관광해설사에 수요가 있을 때 문화체육관광부와 협의해 선발 계획을 세우면, 공고를 통해 지원자를 선발하고 이들의 교육을 한국관광공사에서 인증한 위탁 교육기관에 의뢰하는 식이다. 의뢰가 있을 때마다 선발된 인원에 대해서만 교육을 진행하기 때문에 교육기관을 찾아간다고 문화관광해설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각 지자체에서 선발 공고를 내면 그 시기에 맞춰 신청해야 자격 취득 기회를 얻을 수 있다. 문제는 문화관광해설사의 수요가 광역자치단체마다 사정이 다르다는 것. 강릉시와 공주시, 경상남도의 경우 올 초 문화관광해설사를 선발해 본격적인 교육에 들어갔다. 이에 반해 국내 최대 규모인 214명의 문화관광해설사를 관리하고 있는 서울시의 경우 올해 추가 인원을 뽑지 않기로 했다. 서울시 서울관광마케팅관광사업팀 관계자는 “모집 여부는 지난해 실적을 고려해 판단하는데, 지금 인원으로 충분하다고 판단돼 올해 추가 모집은 없는 상태”라고 설명했다. 사드 문제로 인한 중국 관광객의 급감도 한몫한 것으로 보인다. 문화관광해설사 자격을 얻으면 운영기관 배치에 따라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하게 된다. 서울시의 경우 문화관광해설사들이 활동 가능한 시간과 지역을 설정해놓으면 서울도보관광(korean.visitseoul.net)에서 신청자들의 예약을 받아 자동으로 연결하는 형태로 운영 중이다. 해설사 운영 지자체도 많아 소규모 지자체에서 모든 과정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문화해설사 과정도 노려볼 만하다. 서울의 경우 중구와 종로구, 영등포구 등이 각 지역의 문화유산을 중심으로 활동할 문화해설사를 선발해 운영 중이다. 선발이나 운영 방식은 각 구별의 특성을 반영해 차이가 있다. 서대문구의 경우 지난 3월 처음으로 해설사 8명을 선발했다. 총 36명의 지원자 중 8명을 뽑았다. 이들은 40시간의 이론·현장 교육을 받은 뒤 5월 하반기부터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해설을 하게 된다. 서대문구 지역활성화과 박홍표 과장은 “서대문구의 역사문화 자원을 발굴하고 알릴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하며 “스토리텔링 개발을 통해 문화재 중심에서 지역을 알리는 골목 해설로의 확대도 검토 중”이라고 설명했다. 문화해설사제도가 지자체의 전유물은 아니다. 서울시 도심권50플러스센터는 지난해 6월 민간단체 한양길라잡이와 함께 세종마을(서촌)해설사 양성 과정을 진행했다. 이들은 7월 23일부터 10월 16일까지 온라인으로 해설 신청을 받아 1개 도보여행 코스를 운영했다. 올해 역시 도심권50플러스센터를 통해 두 번째 세종마을해설사 총 18명을 선발해 지난 3월 수료식을 진행했다. 한양길라잡이 이상욱 대표는 “올해는 해설사 선발에 경력사항을 중점적으로 고려했고, 실제로 반응도 좋다. 지난해보다 단체 신청이 많은 상태”라며, “내년에는 한옥마을로만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갑신정변과 3·1운동의 중심인 북촌과 관련한 프로그램을 운영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민간단체를 통한 경력 확보의 길 현장의 문화해설사들은 문화해설사라는 직업을 쉽게 접하고, 관련 경력을 쌓을 수 있는 방법으로 민간 문화해설 관련 단체를 추천한다. 민간 주도의 ‘재능기부’이기 때문에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 가입이 쉽고, 교육 내용도 관 주도의 교육보다 실질적이고 체계적이라는 평가가 많다. 현재 민간 문화해설사 양성기관 중 대표적인 곳으로는 비영리 민간단체 우리문화숨결이 운영하는 ‘궁궐길라잡이’와 사단법인 한국의재발견이 운영하는 ‘우리궁궐지킴이’가 있다. 두 기관의 뿌리는 서로 다르지만 1999년 공식적인 문화해설 활동을 협력해 시작한 사이로 국내 문화해설 사업을 이야기할 때 두 단체를 빼놓을 수 없다. 실제로 국내 문화해설사 교육 과정에 참여하는 인력 중 상당수는 이들 단체 출신이고, 두 단체 출신은 선발 과정에서 프리미엄이 붙는다는 이야기까지 나돌 정도다. 두 단체는 1년에 한 번 교육생을 모집하고, 총 9개월간의 이론과 실습 교육 과정을 거쳐 문화해설사를 배출한다. 배출된 인원은 문화재청과의 협의를 통해 주요 궁궐을 중심으로 한 사적에 배치돼 방문객을 대상으로 해설 활동을 한다. 서울의 5대 궁궐(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과 종묘에서 궁궐지킴이는 금요일과 토요일, 궁궐길라잡이는 일요일에 해설을 맡는다. 문화재청 소속으로 활동하는 문화재안내해설사들은 평일에 주로 외국인을 상대로 안내 역할을 한다. 큰 수입 기대하면 낭패 직업으로서 문화해설사는 어떨까. 현실적으로 생활에 보탬이 될 만한 수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문화재청 소속의 문화재안내해설사들이 급여가 보장되어 있어 그나마 사정이 가장 낫기는 하지만 기간제근로자(계약직)라서 업무성과 평가 후 1년 단위로 계약이 갱신된다. 모집인원도 문화재마다 1~2명씩 선발하는 것이 고작이어서 도전하기가 쉽지 않다. 광역자치단체의 문화관광해설사를 포함해 소규모 지자체의 문화해설사 역시 대부분 급여의 개념이 아니라 교통비와 활동비 정도만 지원해준다. 1회당 지원금은 2만5000원에서 3만5000원 수준이다. 이마저도 해설을 매일 할 수 없는 상황이어서 수입은 ‘월 소득’이라는 이름을 붙이기 민망한 액수다. 그래서 자긍심과 보람, 열정이 없으면 하기 힘든 일이다. 중국어 전문 서울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 중인 김선희씨는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에게 우리나라의 자랑스러 문화유산을 알릴 수 있는 것이 이 직업의 매력”이라며, “해설을 들은 외국인들이 여행 후에 다시 연락해 감사인사를 전할 때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 2017-04-26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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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나의 삶 나의 길, 사느라고 살았다”
- ◇ 입가에 미소 짓게 하는 어린 시절 탱자나무 울타리가 있고, 그 아래 작은 도랑이 흐르는 포근한 동네…. 막내 오빠와 그 친구들이랑 논밭 사이를 선머슴처럼 마구 뛰놀며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그 시절…. 그랬다. 하늘이 유난히도 파래 눈부시던, 아름다운 경남 진주시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지극히 온화하시고 자상하신 아버지와 적극적이고 생활력이 강하신 어머니께서는 육 남매를 두셨는데, 필자는 그중 다섯 오빠를 둔 막내이자 고명딸로 태어났다. 공무원이신 아버지 덕분으로 필자 가족은 관사에서 생활했다. 관사에는 그리 넓지는 않으나 아담한 텃밭이 있어 여러 가지 농작물을 가꾸며 필자의 정서를 포근하게 살찌워 갈 수 있었다. 그 텃밭 옆에 우물이 하나 있는데, 그 물은 유난히도 차가워 여름날 오빠들의 뜨거운 몸을 식히는 데에 일등 공신이 됐고, 여러 과일을 담가 식힌 뒤 먹기도 좋았다. 과일 접시를 한가운데 두고 온 가족이 평상에 둘러앉아 여름밤을 즐기며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들은 아직도 필자를 미소 짓게 한다. ◇ 교사의 꿈을 꾸기까지의 청소년기 당시 필자가 입학한 진주사범학교부속초등학교는 교복이 있었는데, 입학 당시 엄마는 손수 교복을 지어 입혀 주셨다. 감색 교복은 필자가 옷을 입었다기보다는 교복에 들어갔다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 같은 모습이있지만 ‘이제 나도 어엿한 학생’이란 생각에 교복 입을 때마다 행복감에 져졌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서울로 발령 나시면서, 초등학교 3학년 2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에 서울로 전학하게 됐다. 전입한 서울초등학교의 친구들은 경상도 말씨를 쓰는 필자를 신기해하며 놀렸고, 이 때문에 점점 말이 없는 아이, 폭넓은 친구들의 사귐이 없는 소심한 아이로 변해 갔다. 그러던 중 6학년 때 담임으로 박병직 선생님을 만나게 됐다. 그 선생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점을 잘 파악하셨고, 또 그 부족한 점을 채워 주시기 위해 많은 배려를 아끼지 않으시며 애써 주셨던 고마운 분이셨다. 그분은 내가 성년이 돼 38년 가까운 세월을 교단에 서 있을 수 있도록 첫 디딤돌이 돼 주신 분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중학교의 진학은, 학업 성적이 남달리 월등하지도 못했고, 또 당시 멀미가 심해 버스 통학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걸어서 등하교할 수 있는 가까운 중학교로 진학하게 됐다. 그 당시에는 입시가 있었는데, 그 입시에 아버지와 얽힌 이야기 하나가 있다. 입시 과목은 국어, 산수였는데, 시험을 마친 필자는 공중전화기로 달려가 아버지께 전화했다. 아버지께서는 수고했다면서 대뜸 산수 시험 문제 하나를 거론하시며, 답을 무엇이라고 썼느냐 하시기에 ‘12’라고 말씀드렸더니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수화기를 드신 채 직원들에게 대견한 딸이라 자랑하시는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내 귀에 들려 왔다. 그 날 밤, 당신의 막내딸이 어려운 산수 문제 하나를 맞춘 것이 그리도 신이 나셔서 한턱내셨단다. 별로 뛰어나지도, 그리고 내세울 것도 없는 이 막내딸을 아버지께서는 그렇게 작은 일에도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고, 키가 제법 큰 중학생 딸을 초등학생 때와 다름없이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곧잘 여기저기 다니시기를 즐겨 하셨다. 자상한 아버지 때문에 어머니는 나를 대하실 때 한층 더 엄하셨다. 그것은 막내인 데다가 고명딸이고, 아버지의 절대적인 애정까지 받아 혹 남들로부터 버릇없이 키웠다는 소리를 들으실까 봐 내심 걱정이 많으셨던 것이다. 그땐 정말 철부지였었기에 한때 ‘내 엄마는 혹시 계모가 아닐까’하는 의구심으로 홀로 심히 고민한 적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웃음이 나올 뿐이다. 중학교 2학년 6월 필자는 일생에서 가장 쓰라린 경험을 했다. 그토록 자상하셨던 아버지께서 갑자기 고혈압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그땐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었고, 그 충격으로 필자는 다시 말이 적은 아이가 됐다. 1960년대 후반기에 접어들면서 여고 시절이 시작됐다. 13년 위인 나의 큰오빠는 다섯 동생을 헌신적으로 보살피면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채워 주셨다. 특히 큰올케의 뒷바라지는 나에게 아무 부족함을 느끼지 않게 해 주셨다. 대대로 내려오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인 우리 가족은 서로 양보하고 사랑할 줄 아는 형제들이라는 것을 필자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특히 육 남매를 여자 혼자의 몸으로 자식들을 건강하게 키우시고 올바르게 가르치시느라 그 어느 어머니보다 피땀 흘리시며 사셨던 어머니. 지금도 애틋한 그리움으로 코끝이 시큰해 온다. 나의 신앙생활도 이때 많이 성장했다. 성장한 신앙심과 긍정적인 사고로 생활하다 보니, 중학교와는 달리 일상생활에서 감사가 넘쳤고 생기가 충만했다. 이로 인해 학교에서 임원 활동도 하게 됐다. 특히 교단에 서서 후진 양성에 젊음을 불태우리라는 인생의 꿈을 찾으면서 구체적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한 여고 시절로 기억하고 있다. 나의 대학생활 및 교직 생활 필자는 대학 입시 예비고사는 무난히 합격하였으나, 대학 입시에서는 낙방의 고배를 마셔 후기 대학으로 진학하게 됐다. 진학한 대학은 사범대학으로서 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학교였다. 대학 생활은 순조로웠다. 신입생 시절부터 학보사 기자로 선발돼 적극적이고 활달한 활동을 펼칠 수 있었고, 교수님과 선배들의 각별한 애정과 관심을 받으며, 보다 도전적이며 창의적인 나로 성장하게 하였다. 대학 생활에서 기억에 남는 것은, 뜨거운 열정으로 학과 연극제에서 두 번의 주연으로서 무대에 선 일과 학과의 전 학년 모임이 있을 때마다. 진행을 맡았던 것이다. 비록 낙선은 했지만 학생회 후보로 출마한 일도 잊히지 않는 추억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필자의 가슴 어디에 그러한 열정이 숨죽이고 있다가 폭발했는지 자신도 놀라울 따름이다. 대학 4학년 때, 최선을 다해 순위고사(교사 임용고시)를 준비해야만 했다. 꿈꾸어 오던 교사의 꿈을 이루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기 때문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필자는 무난히 시험에 합격한 후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3월부터 교직 발령이 나 곧바로 교단에 서게 됐다 . 그 후 퇴직하기까지 아홉 개의 학교를 거치면서 약 38년이라는 짧지 않은 교직에 몸을 담았다. 돌이켜 보면, 교직 생활 중에 받은 표창(교육장, 교육감, 교육부 장관, 국무총리 등)들은 내게 더욱 잘하라는 격려와 지지가 돼 힘이 드는 줄 모르고 참으로 신명 나게 교육의 현장을 즐겼다. 49세의 나이로 대학원에 진학해 학문을 논하고, 젊은 교사들과 교육을 고민하며 진지하게 머리를 맞대던 것과 나 자신이 대학원생으로서의 열정과 낭만을 맘껏 즐겼던 2년간의 그 시간도 참 아름답고 소중했다. 그간의 많은 학생, 학부모, 교사 들과 함께 하며 울고 웃었던 많은 일이 지금도 파노라마로 스친다. ◇ 교단을 떠난 후 ‘오늘’지난 2012년 8월, 약 38년간 교단을 지키다가 깊은 번뇌를 거쳐 명예퇴직을 결심하였다. 명퇴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세 가지. 첫째, 인생 후반전에 훌쩍 접어드니, 그간 바쁜 생활로 곁에 있는 사람의 눈과 계절의 변화를 볼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했음이 불현듯 아쉬웠다. 먼저 남편과 마주 보고 도란도란 얘기 나누며 아침 식사를 하고 싶었고, 아름답고 좋은 계절에 사람과 자연을 여유롭게 만나고 싶었다. 둘째, 크리스천으로서 말씀을 가까이하며,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를 깊이 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루의 첫 시간인 새벽기도회에도 참여하고 싶었다. 셋째, 세태의 변화로 평생 천직이라 생각했던 교직에 깊은 회의가 찾아들었다.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스스로 한계를 만났는데, 그것을 뚫고 헤쳐나갈 자신이 없었다. 백수가 과로사한다고 했던가. 퇴직 후 필자는 경험하지 못한 또 다른 기쁨을 느끼며 생활을 만끽하고 있다. 아침 식사는 언제나 남편과 함께 마주 앉아 하고, 신앙의 성장을 위해 성경공부 등을 하며 말씀을 가까이 하고, 새벽기도에 힘쓰고 있다. 그리고 한국에 들어온 외국인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고, 기회 될 때마다 임산부와 어린 친구들에게 태교동화와 구연동화를 들려주고 있으며, 동년기자단으로서의 역할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며 바삐 지내고 있는 요즘이다. 또한 나의 든든한 언덕이 돼 주는 후원자이자 조력자인 남편, 그리고 언제나 제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겨주고, 때론 조언과 정보제공을 아끼지 않는 딸, 사위, 아들, 며느리,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단지 세 손주가 있어 감사하고 감사할 뿐이다. 많은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거나, 성인이 돼 가끔 만나 식사하며 차 마시고, 세상살이 이야기를 하며 같이 늙어가고 있는 제자들이 곁에 있기에 참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 필자가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소풍’을 마치는 그 날이 언제일지 모르겠지만 그날까지 과거와 현재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겸손한 자세로 기도하고 미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디며, 이타적 삶을 살아갈 것을 자신에 주문해 본다.
- 2016-05-12 1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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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착한 환자 좋은 의사 되기] 담낭 담석과 마주친 금융맨과 간담췌외과 교수의 라뽀
- 인체는 그야말로 신비로운 기관이라 어딘가 이상이 생기면 ‘이상 신호’를 보낸다. 그러나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용지물이 된다. 의사들은 실제로 많은 환자들이 나중에서야 그것이 이상을 나타내는 신호였구나 하며 후회한다고 한다. 이번에 만난 홍유식(洪裕植·46)씨 역시 그랬다. 그의 몸이 두 번이나 말을 걸어왔지만,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생명이 위독한 위기를 맞이했지만, 순천향대학교 부천병원 김형철(金炯喆·56) 교수의 도움으로 정상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홍유식씨가 몸에 통증을 처음 느낀 것은 2014년 9월이었다. 여느 때처럼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던 참이었다. 저녁쯤 되었을 때 낯선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평소에 알고 있던 배앓이하고는 고통의 수준도, 시간도 차이가 있었다. 잠을 청해봤지만 통증은 더 심해졌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동네의 큰 병원을 찾았다. “미치겠더라고요. 너무 아파 집 근처의 대학병원에 갔는데, 응급실에서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었어요. X선 촬영과 CT(컴퓨터 단층촬영)를 찍자는데, 공복이 될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더라고요. 결국, 겨우겨우 지쳐 잠이 들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씻은 듯이 나았어요. 별일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응급실의 응대도 맘에 들지 않아 집으로 와버렸죠.” 그렇게 해프닝처럼 지나가나 보다 생각했다. 꽤 이름난 자산운용사의 마케팅 총괄로 근무 중인 홍씨는 몸도 별 탈 없어 건강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에서 지낼 때 즐기던 골프도 이상 없이 쳤다. 다음 통증은 2015년 12월에 찾아왔다. “연말에 집에 있을 때였죠. 갑자기 장이 꼬인 듯한 통증이 찾아왔어요. 고통이 시작되자마자 생각난 것이 1년 전 그때였어요. 안일하게도 그때 떠오른 생각은 또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였어요. ‘ 나쁜 요령이 생긴 거죠. 그래서 무조건 자야 한다고 생각했고, 억지로 잠들었다 일어나니 또 멀쩡하더라고요.” 하지만 나쁜 요령은 다시는 통하지 않았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 고통이 다시 찾아왔다.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다. 올해 2월 1일 홍씨는 똑같은 부위에 또 통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자고 일어나면 괜찮아지겠지 생각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았죠. 다음 날 출근했는데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이전에 찾았던 대학병원을 다시 찾았어요. 다행히 전에 촬영했던 사진들이 그대로 있어 진단에 도움이 됐죠. 담낭에 돌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병원에 도착해 병명도 알았고 치료만 받으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수술 날짜가 문제였다. 병원에서 수술 날짜를 협의한 날이 2월 5일이었는데, 수술은 11일 후인 16일에나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곧 다가올 설 연휴 때문이었다. “명절이 있었으니까 병원으로선 어쩔 수 없었겠죠. 마음으로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몸은 이해해주지 못하는 것 같더라고요. 이 고통을 안고 열흘이나 넘게 버틸 생각을 하니 끔찍했습니다. 그래서 다른 병원을 찾던 중 김형철 교수님을 만나게 됐죠.” 김형철 교수는 그때의 홍씨를 이렇게 기억했다. “담낭 담석이었죠. 이 담낭 담석이라는 건 담낭 안에 작은 결석이 생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평소에는 아무 문제 없다가 갑자기 급성담낭염으로 발전하는 때도 있어요. 염증이 생기는 축농증의 일종입니다. 급성괴사성 담낭염은 바로 조치를 안 하면 패혈증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는 병입니다.” 담낭 담석의 무서움은 무엇보다 통증에 있다고 김 교수는 말한다. “옛날 할머니들이 갑자기 아팠다, 괜찮았다 하는 것을 가슴앓이 한다고 표현하잖아요? 아마 그런 경우 대부분 담낭 담석으로 봐도 틀리지 않을겁니다. 숫자로 따지면 10단계에서 9에서 10 정도의 심한 통증을 동반합니다. 이런 통증을 앓는 환자에게 며칠이나 기다렸다 수술받으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죠. 당시 홍씨는 복막염까지 의심되는 소견이었어요. 그래서 바로 수술을 진행했죠.” 홍씨는 김 교수의 신속한 조치로 제때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그때가 설날을 이틀 앞둔 2월 6일이었다. 홍씨가 김 교수를 만난 것은 행운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김 교수는 어려운 외과 수술로 꼽히는 복강경 담낭절제술을 5000건 가까이 성공시킨 명의로 꼽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뿐만 아니라 50회 이상의 간이식수술과 무수혈 간이식수술로도 병원을 알렸다. 수술은 복강경 담낭 제거 수술로 진행됐는데, 평균적인 수술 시간보다 두 배 이상 소요됐다. 담낭에 고인 고름이 생각보다 심해 시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복강경 수술은 몸에 작은 구멍을 뚫어 카메라와 조명, 수술도구가 달린 작은 관을 넣어 수술하는 방식. 개복수술과 달리 환자 몸의 절개부위를 최소화하기 때문에 환자의 회복속도가 굉장히 빠른 장점이 있지만, 시야가 좁고 수술 부위에서 도구의 움직임이 제한적이기 때문에 집도의의 능력에 따라 수술 성공률이 달라진다. 김 교수는 당시 수술부위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고 했다. “환부가 고름으로 덮여 수술에 애를 먹었습니다. 담낭 제거 수술의 어려운 점 중 하나는 간에서 내려오는 총수담관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인데, 고름과 섬유화변성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어요. 예를 들자면 억수같이 비가 쏟아지는 밤에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 것과 비슷하죠. 그래서 시간이 좀 더 걸리긴 했지만,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 가지 의문이 든다. 담낭을 그냥 떼어내도 괜찮은 걸까? 담석만 떼어낼 수는 없는 것인지 질문하니 불가능하다고 김 교수는 답한다. “반복적인 염증으로 담낭은 이미 그 기능을 잃은 상태이기 때문에 절제할 수밖에 없습니다. 담낭은 소화에 필요한 쓸개즙을 분비하는 역할을 하지만, 이것이 없다고 해서 우리 몸에 큰 문제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장기적으로 약을 먹을 필요도 없고, 오래 지나지 않아 자연스럽게 몸이 적응하게 됩니다.” 우리 몸에서 생기는 담석의 종류는 세 가지라고 김 교수는 이야기한다. 담석은 성분에 따라 일반적으로 콜레스테롤 담석(cholesterol gallstone)과 색소성 담석(pigment gallstone), 혼합형 담석으로 크게 나눈다. 이런 담석이 당낭은 물론이고 간 내외의 담도에 발생하는 것을 담석증이라 부르고, 담석이 담낭에 생길 때 이를 담낭결석이라고 부른다. 담석증은 급성 담낭염이나 폐쇄성 황달, 심한 담도염의 원인이 되고, 췌장염까지 유발하기도 한다. “과거에는 색소성 담석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콜레스테롤 담석이 압도적입니다. 콜레스테롤 담석은 콜레스테롤 수치가 증가해 침전되면서 담석이 형성되는 것인데, 원인으로는 서구적인 식생활로 생활환경이 바뀌면서 나타나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한정식처럼 육류와 채소를 골고루 먹을 수 있는 균형 잡힌 식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홍씨는 다행히 수술이 잘 마무리돼 며칠만에 퇴원할 수 있었다. “수술 후 생활이요? 많이 바뀌었죠. 2013년 이후 운동을 끊었었는데, 다시 시작했어요. 콜레스테롤 담석이라고 해서 음식에 주의하고 있죠. 특히 곱창을 좋아했는데, 이젠 될 수 있으면 먹지 않기로 했습니다. 삼겹살처럼 기름기 많은 음식도 자제하고 있어요. 집에서는 평소 아내가 워낙 잘 챙겨줬기 때문에 큰 신경은 안 쓰고 있습니다. 이제는 몸에서 이상 신호가 느껴진다면 다시는 간과하지 않을 겁니다. 큰 교훈을 얻었어요.” 홍씨는 김형철 교수에 대한 깊은 감사의 뜻을 몇 번이나 표현했다. 설 연휴를 앞두고 수술을 하느라 김 교수가 연휴를 반납하고 병원으로 출근해 그의 수술 후 몸 상태에 신경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이런 김 교수의 모습에 홍씨의 아버지가 어느 인터넷 커뮤니티에 올린 감사의 글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는 “설날 휴가를 반납하고 정성을 다하여 수술하고 설날에도 출근하여 환자를 보살피는 그의 따듯한 마음은 어디에서 유래하였을까?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자의 덕목에서 나오는 것일 게다”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정작 김 교수는 당연한 일 아니냐며 되레 반문한다. “외과의에게 수술환자 때문에 휴일이 반납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죠. 병원이 위치한 부천 인근은 젊은 부부들이 많이 사는데, 요즘 젊은 사람들 살기 힘들잖아요. 아파서 수술하려 해도 회사 눈치, 윗사람 눈치를 봐야 하니까요. 아픈 것도 눈치 보는 사람들에게 수술이라도 원할 때 해줘야죠. 그래서 여긴 주말 수술이 꽤 많습니다. 병원 설립자께서도 의사는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을 위한 존재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설립자인 고(故) 서석조(徐錫助, 1921~1999) 박사는 “의료인은 삶 중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두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들을 치료하는 가장 낮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실제로 취재가 진행된 날은 주말 오전이었는데, 병원 곳곳은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들로 북적였다. 김 교수는 취재에 응한 이날 수술을 두 건이나 소화해야 했다. 이런 김형철 교수의 성향은 병원 내에서도 뚜렷이 드러나, 여러 가지 미담을 남기기도 했다. 지난 4월 김 교수는 국제진료센터 센터장 자격으로 병원과 협력관계에 있는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시 마시모프 헬스센터를 방문했다. 김 교수는 한 여자아이와 마주치게 되는데, 큰 눈이 귀여웠지만, 병색이 완연했다. 큼밧(kymbat)이라는 이름의 이 아이는 랑거한스세포 조직구증식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 병은 백혈구의 일종인 ‘랑거한스세포’가 급증해 몸의 장기들을 침범하면서 문제를 일으키는 병으로, 특히 유아일수록 더 위험하다. 김 교수는 사연을 듣자마자 치료를 약속했고, 큼밧은 긴급 비자를 받아 아버지 카이랏(Kairat)씨와 함께 한국에 와 치료를 받고 호전될 수 있었다. 또 형편이 어려워 치료를 포기한 몽골인 근로자의 간이식을 집도한 것도 병원 내에서는 잘 알려진 일이다. 김 교수는 “국제진료센터를 맡아 외국인 환자 유치를 하고 있는데 책임감이 큽니다. 과거엔 공업이 국내 산업을 이끌었다면 이제는 의료가 그 역할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요. 하지만 무조건 돈 많은 환자만 만나는 것은 아닙니다. 돈 없는 외국인도 환자니까요. 돈도 중요하지만 치료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설명했다.
- 2016-05-07 1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