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가수이자 방송인 서유석이 발표한 노래,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입니다. ‘나이 듦’을 솔직담백하게, 때로는 풍자와 해학으로 묘사한 노래 중간에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아버지가 되고 할아버지가 되는 아름다운 시절이 정말 소중했던 시간이라고 되새깁니다. “인생이 끝나는 것은 포기할 때 끝장”이라던 세상 떠나신 아버님 말씀이 새롭게 들린다는 그의 고백은 노래가 끝나도 긴 여운을 남깁니다. 여섯 번째 마음 미장공 이야기는 ‘검버섯 핀 바나나’로 시작합니다.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삼십 년을 일하다가 직장에서
튕겨 나와 길거리로 내몰렸다
사람들은 나를 보고 백수라 부르지
월요일에 등산 가고 화요일에 기원 가고
수요일에 당구장에서
주말엔 결혼식장 밤에는 상가집
(중략)
누가 내게 지팡이를 손에 쥐게 해서
늙은이 노릇하게 했는가?
세상은 삼십 년간 나를 속였다
마누라가 말리고 자식들이 놀려대도
나는 할 거야
컴퓨터를 배우고 인터넷을 할 거야
서양말도 배우고 중국말도 배우고
아랍말도 배워서
이 넓은 세상 구경 떠나나 볼 거야
(후략)
검버섯 핀 바나나
지난 어버이날 부모님 뵈러 갔을 때입니다.
“어느 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는데 바나나 껍질이 거뭇거뭇하게 된 걸 통째로 버렸지 뭐니? 그 귀한 걸….”
그게 너무 아까워 어머니는 경로당에 가져가서 어르신들과 같이 드셨다는 겁니다. 바나나. 지금은 사시사철 가장 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흔하디흔한 과일로 전락했지만 어린 시절 얼마나 귀한 과일이었나요. 한 다발은커녕 낱개 하나도 먹기 어려워 부잣집 아이들 먹는 것 바라보며 군침만 흘렸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지금에야 귀하든 아니든 어머니 입장에서는 먹는 걸 버린다는 것이 너무 안타까웠던 거죠. 한편으론 이제 늙고 병들어 쓸모없어졌다고 버림받는 자신을 보는 양 서러웠을지도 모릅니다. 그 얘길 들으면서 제가 몇 해 전 쓴 시가 떠올랐습니다.
검버섯 핀 바나나
샛노란 바나나 한 다발
하얗고 단단한 속살
며칠 지나 남겨진 세 송이
그새 늙어 검버섯 점점이
어떻게 이별할까 궁리 끝에
우유 붓고 보들보들 살점 썰어
드륵드륵 클클클클
바나나 셰이크로 안녕히
숨 거두기 전 가장 달콤했던 이여
바나나는 익을수록,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에 더 가까울수록 진가를 발휘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순간, 비록 겉모습은 시커멓고 말라비틀어졌지만 더 아름답고 더 찬란하고 더 달콤하기 때문입니다. 설익었을 때는 설탕이나 시럽, 꿀처럼 단맛을 첨가해야 바나나 음료가 제값을 겨우 합니다. 무르익지 않으면 떫고 신맛이 납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성숙하지 않은 시절엔 뭘 넣어도 부족한 맛이 납니다. 깊이 농익었을 나이엔 이것저것 넣지 않아도 그 자체로 그윽하고 충분하고 깊습니다.
노인은 살아 있는 박물관
노인, 어르신 한 사람이 죽는 것은 살아 있는 박물관 하나가 불타 없어지는 것과 같다는 아프리카 격언이 있습니다. 그만큼 어르신들이 드리워주는 그늘, 아낌없이 나누는 지혜와 경험, 그 울타리는 박물관 하나를 꽉 채울 만큼 큽니다. 우리 속담에도 ‘일 못 하는 늙은이, 쥐 못 잡는 고양이도 있으면 낫다’, ‘늙은 고양이랑 늙은이는 없으면 옆집에서 꾸어 와서라도 모시는 게 좋다’란 말이 있습니다. 비록 젊을 때처럼 팔팔하게 역할은 못 하더라도 언제든 의지하고 의논할 수 있는 든든한 버팀목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겉으로는 쓸모없을 듯 보여도 나름대로 쓸 데가 있기 마련입니다. 바나나만 하더라도 음식물 쓰레기통에 버리기 전, 쓸모없다고 느껴질 때가 가장 찬란하게 빛나고 가장 달콤하다는 게 우리 삶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싶습니다. 부모님을 뵈러 가서 잠깐 들었던 이야기가 시 한 편으로 연결되었네요. 그분들이 저희에게 음으로 양으로 큰 기운과 가르침을 주신다는 것을 항상 잊지 않고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찬밥을 대하는 자세
봄이 완연해지더니 계절은 이제 초여름으로 향해 갑니다. 이럴 때 유독 신경 써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밥과 반찬입니다. 쉬이 상하고 금방 맛이 갑니다. 기껏 지은 밥이며 된장찌개, 고등어조림이 상할라치면 만든 사람 속도 무척 상합니다. 재료가 아까운 건 물론이고 장 보고 다듬고 만든 정성에 마음이 참 쓰리고 아픕니다. 저는 이렇게 먹다 남은 찬밥을 모았다가 누룽지를 만듭니다. 버리지 않고 고쳐 쓰는 부모님, 할머니 마음을 닮고 싶어서입니다.
찬밥이 누룽지가 되는 과정은 절묘합니다. 적당히 태워 생긴 탄소 입자는 날카롭지 않아서 세포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몸속 독소를 흡착, 분해해 씻어낸다고 합니다. 누룽지는 자신을 태워 훌륭한 영양제이자 해독제로 변신합니다. 전날 과음으로 힘들 때나 소화가 안 될 때 누룽지 끓여 먹으라는 어른들 말씀이 매우 일리 있었네요. 다만 성질을 누그리지 않으면 누룽지 만드는 일이 화를 돋우는 참사가 되기도 하니 조심하셔야 합니다.
조금만 더 참으면
이리저리 돌아다니던
냉장고 안 찬밥을 모아
누룽지를 만듭니다.
급한 마음에
미처 다 눋지 못한 밥알들
주걱으로 긁을라치면
손목도 시리고
모양도 죄다 흐트러집니다.
진득이 기다리면 될걸
조금만 더 참으면 될걸
날 선 마음 누그리고
모난 마음 둥글리고
먼 산 한 번 바라보고
강아지 눈 맞춰
잘 잤니 인사하고
솥뚜껑 열어
누우렇게 고운 빛깔
얼굴 반쪽 내민
누룽지 만났습니다.
(‘혼자 술 마시는 여자’ 178~179쪽)
묵은지 유감(遺憾)
‘먹방’, ‘쿡(Cook)방’이 개인방송 채널까지 대세로 자리 잡은 지 벌써 여러 해입니다. 더욱이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어느 때보다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이 폭증하면서 의식주(衣食住)가 아닌 ‘식의주’(食衣住) 시대가 왔나 봅니다. 다종다양한 요리 방송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식재료가 바로 ‘묵은지’입니다. 오랫동안 숙성되어 푹 익은 김장김치를 일컫는 묵은지. 요리에 재능이나 관심이 없거나 요리할 시간이 없는 사람에게는 음식물 쓰레기로 버려질 운명이기 십상입니다. 발효음식 특유의 역한 군내와 물컹한 식감까지, 김치냉장고 속 골칫거리에 불과하니까요.
할머니와 묵은지
하얀 곰팡이가 다닥다닥 피어올라 도저히 못 먹을 것 같은 묵은지 한 포기라도 버리지 않고 흐르는 물에 몇 번이고 빨아서 김치만두로, 비지찌개로 새롭게 만들어주시던 우리 할머니. 거북이 등가죽처럼 거친 손으로 맛난 음식을 뚝딱 해주시던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립습니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는 묵은지라도 그 감별 기준은 버릴 것인가 쓸 것인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먹을 것인가, 아니면 속을 털어내고 깨끗이 빨아서 먹을 것인가 이 두 가지였습니다. 취사선택이 아니라 버리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잘 쓸 것인가입니다.
누룽지와 묵은지 닮은 마음
좋은 것, 쉽고 편한 것, 화려한 것만 취하고 그렇지 않은 것들은 함부로 대하거나 버렸던 것은 아닐까. ‘살림살이’한다는 주부가 정작 살리는 일이 아닌 버리는 일, 죽이는 일을 거리낌 없이 해왔던 것은 아닐까. 낡았다고, 싫증 났다고 홀대했던 것은 아닐까 되묻습니다. ‘나이 듦’, ‘늙음’을 대하는 태도도 마찬가지였던 것은 아닌지 자꾸 부끄러워집니다. 그래서 또 배웁니다. 검버섯 핀 바나나, 자신을 태워 누룽지로 승화한 찬밥, 곰삭은 묵은지처럼 익을수록 깊고 달콤하고 구수한 삶을 살겠노라 다짐합니다.
“여자가 어떻게 군대를 갑니까?”
노기에 찬 여학생의 질문에 창구 직원의 입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그에게는 그저 운수 나쁜 날이었으리라. 회사의 신입사원 입사원서를 접수하는 날. 당연히 남자들만 지원받고 있는데, 다짜고짜 여자가 찾아오다니. 결국 이날의 항의는 무위로 끝났지만, 그녀는 그 불공정의 억울함을 잊지 않았다. 그것은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한 평생의 연료가 된다.
이복실 세계여성이사협회 회장은 당시 기업들이 남자 지원자만 받기 위해 내건 조건은 ‘군필’이었다고 설명했다.
“1988년 남녀고용평등법이 시행될 때까지 악습은 계속됐죠. 여성들이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특채’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어요. 그나마 결혼하면 퇴직하겠다는 조건이 붙은 서약서를 써야 가능한 일이었죠. 그런 시대였어요.”
무작정 선택한 공무원의 길
때문에 대학을 졸업한 여학생들은 선택할 수 있는 진로가 다양하지 않았다. 금융권이나 교직 정도가 선호되는 직업이었고, 아예 취업을 포기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80학번이었던 이 회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공무원의 길에 도전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마땅히 다른 방법이 없었다.
“꼭 경제적 능력을 갖고 싶었어요. 우리 어머니들의 삶이 남성에게 종속적이었던 것은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직업은 반드시 있어야 했어요. 하지만 사회 분위기는 여성이 다양한 직업을 선택하기 어려웠죠. 제 전공이 도시행정학이다 보니 선배들이나 동기들이 모두 행정고시 공부를 하는 분위기였어요. 동기가 함께 공부하자고 권해서 자연스레 저도 시작하게 됐죠. 1학년 때 행시에 합격한 3학년 선배를 우러러본 적이 있는데, 자연스레 롤모델로 삼은 것 같아요.”
그녀는 당시 공무원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다고 털어놓으며 웃었다. 선배에게 물어보니 ‘기안’을 잘하면 된다는 대답이 돌아와 “그 기안이란 게 뭐냐”고 되물었던 기억도 있다고.
공무원이라는 직업은 미지의 세계였지만, 느긋한 마음으로 덤벼든 것은 아니다. 선택의 수가 많지 않은 상황에서 이 시험에 떨어지면 그토록 원했던 ‘경제적 자유’를 얻지 못한다는 상황 인식은 그녀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남학생들은 자신감이 넘쳤죠. 따르고 배울 롤모델도 많았고, 떨어지더라도 취직할 곳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우리는 절박했어요. 그래서 붙고 나서도 ‘공무원이 되었다’는 성취감보다는 ‘직업을 가졌구나’란 기쁨이 더 컸을 정도니까요.”
기업에 찾아가 부당함을 항의했던 그 여학생은 당당하게 행정고시에 합격한다. 여성으로는 네 번째다. 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선구자라는 뜻은 반대로 해석하면 남성들만의 세계에서 경쟁하고 살아남아야 했다는 뜻이 되기도 한다.
“처음 출발은 문교부(지금의 교육부)였어요. 그곳에서 10년을 일했죠. 당시엔 부처들 중에서도 굉장히 관료적인 분위기가 강한 곳이었어요. 여성 사무관이 비집고 들어가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어요. 그래서 나의 능력을 알아주는 부처로 가자고 과감한 선택을 했죠. 그래도 다행인 점은 공무원 조직은 기본적으로 능력을 중심으로 평가가 이뤄지는 곳이에요.”
그녀가 선택한 곳은 정무장관 제2실. 제6공화국 출범과 함께 새로 설치된 기관으로 사회 문화에 관한 업무들, 그중에서도 여성과 아동, 청소년, 노인 문제 등과 관련한 정책 건의, 연구 개발 등을 담당하는 곳이었다. 이 선택은 이후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여성 정책이라는 큰 사회적 책무와 마주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 정무장관실은 10년 후인 1998년 대한민국 여성특별위원회로 개편되었고, 3년 후인 2001년 여성부로 개편된다. 지금의 여성가족부 전신이다.
“제가 느꼈던 여성에 대한 차별을 개선해야겠다는 의욕이 컸죠. 당시만 해도 정시 퇴근은 지켜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고, 재택근무 같은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어요. 육아휴직이란 단어조차 없었죠. 산후휴가제도가 있었지만 60일에 불과했어요. 보육 시설이나 어린이집은 꿈도 못 꾸고요. 그러다 보니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의 도움을 받아야 했어요. 다른 사람의 조력 없이는 직장을 다니지 못하는 거죠. 엄마와 직업인이라는 두 가지 역할을 병행하는 것이 개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니 직장이나 사회 혹은 국가가 도와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러한 생각은 유연근무제나 직장 보육시설 지원 등 일·가정 양립 지원제도 개선 등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특히 어린이집의 양적·질적 확대에 대한 정책은 공직 생활의 뿌듯한 성과 중 하나다.
“현직에 있을 때 보육정책국장을 2년 6개월 역임했어요. 여성들이 안심하고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아이들을 맘 편히 맡길 수 있는 곳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죠. 엄마 입장에선 아이들이 하루 종일 어떻게 지내는지 전혀 모르잖아요. 또 프로그램이 어린이집마다 제각각이면 그것도 엄마 입장에선 신경 쓰이죠. 그래서 표준보육과정을 만들어 어느 어린이집을 가도 아이들이 같은 보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어요. 또 어린이집의 통합 관리가 가능한 보육행정 전산망도 구축하고요. 보육교사를 위한 교육 프로그램도 확충했죠. 제 스스로가 워킹맘으로 살면서 아쉬웠던 부분들을 개선하고 정책화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무척이나 보람 있었어요.”
여성은 눈에 띄어야 살아
이 회장은 2013년 3월 여성가족부 차관에 오른다. 임명직인 장관을 제외하고, 공무원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커리어에 발을 딛은 것이다. 이후 조윤선 장관이 정무수석으로 옮겨가면서 한 달간 장관직무대행까지 했다.
“차관으로 발탁되리라고는 전혀 생각도 못 했죠. 당시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탄생하면서 여성 관련 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뀔 것이라는 기대감은 있었어요. 하지만 차관급 후보에 오를 만한 여성 고위 공무원이 많지 않았던 시기이고, 선발을 하려고 해도 사람이 없다는 말이 이상하지 않았던 시절이니까요. 다행히 각 부처에서 일 잘하는 유능한 여성을 발탁하자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차관에 오를 수 있었죠.”
남성 중심의 사회, 그것도 폐쇄적인 조직이라고 평가받는 정부 조직 안에서 그녀는 늘 개척자여야 했다. 따르고 배울 만한 롤모델도 없었고, 무엇이 옳고 그른지 스스로 판단해야 했다. 하지만 그녀는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늘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살았던 것 같아요. 승진할 수 있을까, 저런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하고 말이죠. 사무관일 때는 서기관이 될 수 있을까, 그러고 나면 과장이 될 수 있을까, 이런 식이었죠. 당시엔 여성이 극소수였고, 우리에겐 기회가 안 주어지는 것이 당연했으니까요. 차관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죠. 그만큼 힘들었던 세월이지만, 열심히 하면 날 알아봐 주는 상사들 덕분에 성장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이 회장이 여전히 사회 곳곳에서 부당함이나 편견과 맞서 싸우고 있을 후배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태도다. 남들과 같은 방식이나 같은 정도의 노력으로 접근하려고 한다면 성공하기 어렵다고 이야기했다.
“소수자가 인정받으려면 일반 다수자의 2배, 3배의 일을 해야 합니다. 똑같이 일하면 절대 인정 못 받아요.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도 중요해요. 소수자의 운명 같은 것이죠. 다른 접근 방식으로 일하고, 벌여놓은 일을 반드시 책임지는 식으로 일했어요. 회의 석상에서도 적극적으로 발언했고요. 소수자는 남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 절대 보이지 않아요. 물론 그런 태도와 함께 성과도 인정받아야 하고요. 소수자의 숙명에 맞서 살았죠.”
바뀐 신분도 열정 막지 못해
공직 생활을 마무리한 후 이 회장은 하루도 쉬지 않았다. 남들처럼 느긋하게 여행을 하거나 취미생활에 몰입할 법도 한데, 한가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무원 생활할 때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데 매료된 상태라고 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글쓰기에도 집중해서 다양한 매체에 글을 연재하거나, 그간의 경험을 정리한 저서 ‘나는 죽을 때까지 성장하고 싶다’, ‘여자의 자리 엄마의 자리’ 등을 집필했다. 또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부인 정희자 전 서울힐튼호텔 회장의 자서전에도 참여했다. 친분이 있던 사이는 아니었지만 글솜씨를 인정받아 대필작가가 아닌 공저자로 이름을 올렸다.
“퇴직을 앞둔 후배들에게 끝났다고 생각하지 말라고 말해요. 퇴직 후 그 다음 날부터 일하라고 말하죠. 커리어를 중단하지 말고 이전과 똑같이 일하라고 당부합니다. 몇 달 쉬겠다고 생각하면 그것에 익숙해지거든요. 퇴직 후의 인생을 만드는 것은 현직 시절의 삶인 것 같아요. 저의 경우에는 여성 정책에 대한 경험이나 양성평등에 대한 노력 등 당시의 가치관과 철학이 지금의 삶까지 영향을 주고 있어요. 세계여성이사협회도 마찬가지죠.”
세계여성이사협회는 전 세계 60개국 80여 지부에서 8500여 개 기업의 이사로 활동하는 3700여 명의 여성 이사로 구성된 비영리 단체이며, 한국 지부는 2016년 9월에 창립됐다. 창립 당시에는 회원이 40여 명에 불과했다. 동의하는 여성이 적어서가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 이 모임의 가입 조건인 상장기업이나 공기업의 등기이사 등과 같은 요건을 충족하는 여성의 수가 적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업의 이사회에 여성이 참여하는 국내 비율이 3%가 안 됐어요. 일본도 9% 정도 되고 유럽 국가들은 30~40%나 되는데 우리는 매우 낮았죠. 그래서 우리도 법 개정을 추진했어요. 다양한 법 중에서도 자본시장법을 개정해서 여성의 비율 의무화를 시도했죠.”
그래서 은퇴 후 다시 국회를 찾았다. 사실 이 회장에게 국회는 그리 좋은 기억이 있는 곳은 아니다. 국회는 여성 공무원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과장 때는 국정감사 자리에서 다리를 꼬았다는 이유로, 나중에는 옷차림이 화려하다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수시로 호출당하기도 예사였다. 다행히 그 경험은 법 개정의 돌파구가 됐다. 최운열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설득해 상장사 여성 이사 할당제 도입에 관한 법안을 발의할 수 있었다.
“세계 기업들 사이에선 ESG 경영, 즉 지속가능한 경영을 위해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를 핵심 요소로 꼽아야 한다는 흐름이 있어요. 여성 이사 할당제는 이 지배구조의 다양성과 연관이 있죠. 글로벌 기업들은 지배구조를 개선하지 않는 기업에는 투자조차 안 해요. 우리 기업들도 변해야 하는 시점이고, 저희의 노력이 우리 기업들의 체질 개선에 긍정적 영향을 미칠 것이라 생각해요.”
세계여성이사협회의 주도로 개정된 자본시장법은 올 8월 시행을 앞두고 있다. 자산총액 2조 원이 넘는 기업은 특정 성별로만 이사회를 구성할 수 없게 된다. 즉 최소한 1명 이상의 여성을 임원으로 두어야 한다는 뜻이다.
“개인적으로는 NGO라는 민간인 자격으로 선봉장에 서서 공무원 못지않게 사회를 바꾸는 일에 참여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껴요. 물론 이제 시작이죠. 상장기업 외에 공공기관의 이사회에도 여성이 참여할 수 있도록 확대되면 공공기관 역시 여성 임원을 찾게 되고, 그러다 보면 자연스레 여성에 대한 제한이 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시너지가 생길 거예요.”
●Exhibition
◇민속이란 삶이다
일정 7월 5일까지 장소 국립민속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은 민속의 가치와 의미를 폭넓게 살펴보는 특별전 ‘민속이란 삶이다’를 7월 5일까지 연다. 전시는 민속과 관련된 유물과 아카이브 자료 600여 점을 통해 민속이 근현대에 어떻게 학문으로 자리 잡고 영역을 확장해나갔는지 돌아본다.
전시에서는 우리나라 최초 아키비스트(기록물 관리 전문가)이자 민속학자 송석하(1904~1948)가 정리한 일제강점기 민속 현지조사 원본 사진카드 486장이 공개됐다. 약 90년 전 북청사자놀음과 봉산탈춤 등을 조사하고 카드별로 명칭과 지역, 날짜를 기록했다. 전시실에 설치된 키오스크를 통해 관람할 수 있다. 추억의 물건들도 민속의 이름으로 등장해 눈길을 끈다.
1970~80년대 혹은 1980~90년대 삶의 모습이 ‘뉴트로’라는 이름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이를 입증하듯 그 시기의 민속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됐다. 필름카메라, 휴대용 카세트테이프 플레이어 ‘워크맨’, 286 컴퓨터, 3.5인치 디스켓 등이다. 온라인을 통해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민속 물품도 전시되어 있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을 통해 한국을 모자의 나라로 각인시킨 갓, 미국 아마존에서 대박 신화를 쓴 영주 호미,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등장해 전 세계적으로 화제를 모은 달고나 등을 만날 수 있다.
◇조미수교와 태극기
일정 7월 7일까지 장소 대한민국역사박물관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은 ‘조미수교와 태극기’ 특별전을 통해 1882년 작성된 최초의 태극기 도안을 공개했다. 최초의 태극기 도안은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2017년 미국 의회도서관 슈펠트 문서에서 찾은 것으로, ‘슈펠트 태극기’로 불린다. 원본은 도서관에 있고, 이 교수가 촬영한 사진 자료가 전시되고 있다. 전시에서는 1882년과 1899년에 미국 해군부가 발간한 책 ‘해양국가의 깃발’과 그 안에 실린 태극기 도안도 공개됐다. 특히 1882년 최초의 태극기 도안과 그해 나온 ‘해양국가의 깃발’ 속 태극기가 매우 흡사해 화제를 모았다.
●Book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이어령·열림원)
지난 2월 별세한 고(故) 이어령 초대 문화부 장관의 가장 사적인 고백이 담긴 산문집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가 새롭게 출간됐다. 2010년 초판 출간 이후 12년 만이다. 개정판에는 개신교 신앙 고백에 관한 인터뷰를 담은 ‘나는 피조물이었다’가 빠졌다. 1~4부 모두 이어령의 산문으로만 채워졌다. ‘나는 피조물이었다’는 ‘이어령 대화록’ 시리즈에 담겨 출간될 예정이다.
책에는 이어령 문학의 ‘우물물’이 되어준 어머니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과 ‘메멘토 모리’의 배경이 되는 여섯 살 소년 이어령의 고향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1부 ‘어머니를 위한 여섯 가지 은유’에서 이어령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책’, ‘나들이’, ‘뒤주’, ‘금계랍’, ‘귤’, ‘바다’라는 여섯 가지 키워드로 풀어낸다. 2부 ‘이마를 짚는 손’, 3부 ‘겨울에 잃어버린 것들’에서는 이어령의 사색적이고 섬세한 필치를 느낄 수 있다. 특히 4부 ‘나의 문학적 자서전’에서는 이어령의 문학이 어떠한 과정으로 완성돼왔는지 엿볼 수 있다. 이어령은 어머니부터 외갓집, 고향, 그리고 문학론에 이르기까지 “이제는 감각조차 남아 있지 않은” “묵은 글들” 속 또렷하게 남아 있는 향수를 전한다. 특히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진심이 절절하게 느껴지며 공감을 이끈다.
◇생존자들(캐서린 길디너·라이프앤페이지)
임상심리학자인 저자가 25년간 심리치료를 하며 만난 내담자들 가운데 특별한 네 사람을 소개한다. 어린 시절의 비극적인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과 저자는 대화를 나누며 함께 성장하고 치유받는데, 그 과정이 감동을 준다.
◇민낯들(오찬호·북트리거)
우리가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열두 가지 사건을 담은 책이다. 故 변희수 하사, 故 설리(본명 최진리) 등의 문제적 죽음을 응시하고, 코로나19 팬데믹과 n번방 사건, 세월호 참사, 낙태죄 폐지 등을 되짚으며 한국 사회의 민낯을 폭로한다.
◇독일은 왜 잘하는가(존 캠프너·열린책들)
자존심 센 영국인이 독일을 극찬하는 책이다. 저자는 뼈아픈 과거에서 배운 교훈, 품위 있는 민주주의와 공동체 의식, 문화를 존중하고 시민의 안전한 생활을 책임지려는 리더십 등 전후 75년간 현대 독일의 놀라운 변화를 분석한다.
●Stage
◇웃는 남자
일정 6월 10일 ~ 8월 22일
장소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연출 프랭크 와일드혼
출연 박효신, 박은태, 박강현, 민영기, 양준모, 신영숙, 김소향, 이수빈, 김승대, 최성원 등
뮤지컬 ‘웃는 남자’는 EMK뮤지컬컴퍼니가 제작한 두 번째 창작 뮤지컬로 세계적인 대문호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2018년 월드프리미어와 2020년 재연에 이르기까지, 한국 뮤지컬의 새로운 지평을 연 수작으로 호평받았다.
‘웃는 남자’는 신분 차별이 극심했던 17세기 영국을 배경으로 한다. 끔찍한 괴물의 얼굴을 하고 있지만 순수한 인물인 그윈플렌의 여정을 통해 사회 정의와 인간성이 무너진 세태를 비판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평등의 가치에 대해 깊이 있게 조명한다.
지울 수 없는 웃는 얼굴을 가진 채 유랑극단에서 광대 노릇을 하는 관능적인 젊은 청년 그윈플렌 역에는 배우 박효신, 박은태, 박강현이 출연한다. 박효신은 2018년 이후 4년 만의 귀환이다. 박은태는 뉴 캐스트로 이름을 올렸고, 박강현은 2018년 초연, 2020년 재연에 이어 세 번째 시즌까지 함께하게 됐다. 또한 우르수스 역에는 민영기와 양준모, 조시아나 역에는 신영숙과 김소향이 각각 캐스팅돼 기대감을 더한다.
◇번지점프를 하다
일정 6월 22일 ~ 8월 21일
장소 홍익대 대학로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심설인
출연 이창용, 조성윤, 레오, 최연우, 이정화, 고은영, 정재환, 렌 등
‘번지점프를 하다’는 이병헌·이은주 주연의 동명 영화를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2012년 초연돼 2018년까지 세 시즌을 거쳤다. 아름다운 스토리와 서정적인 음악으로 관객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극은 국어 교사 서인우를 중심으로 과거와 현재의 시점을 오간다. 국문과 대학생 인우는 당돌한 미대생 태희와 운명적인 사랑을 하지만 안타까운 이별을 맞이한다. 오랜 세월 마음속에 태희를 간직하고 살던 인우 앞에 그녀와 같은 버릇, 같은 행동을 하는 남학생 현빈이 나타나면서 인우는 혼란에 빠진다.
◇마타하리
일정 5월 28일 ~ 8월 15일
장소 샤롯데씨어터
연출 권은아
출연 옥주현, 솔라, 김성식, 이홍기, 이창섭, 윤소호, 최민철, 김바울 등
뮤지컬 ‘마타하리’가 5년 만에 돌아온다. ‘마타하리’는 제1차 세계대전 중 이중 스파이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체포돼 총살당한 아름다운 무희 마타하리(본명 마그레타 G. 젤러)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뮤지컬이다. 2016년 초연과 2017년 재연에 참여한 옥주현이 마타하리 역으로 다시 관객과 만난다. 이와 함께 마마무 솔라가 뮤지컬 무대에 새로운 도전장을 던질 예정이다. 또한 마타하리의 유일한 사랑인 아르망 역은 김성식, 이홍기, 이창섭, 윤소호가 연기한다.
※ 본 기사에 소개된 공연을 관람하신 독자분의 생생한 후기를 기다립니다. 채택된 분께는 소정의 상품과 브라보 마이 라이프 잡지를 보내드립니다. shjlife@etoday.co.kr
언덕을 오르면 무슨 일이 기다릴까. 종로구의 그 골목으로 접어들면 거대한 고목이 중심을 잡고 있다. 권율 도원수 집터의 은행나무다. 여름이면 주변을 시원하게 할 만큼 초록이 울창하고 가을이면 온 동네에 노란 은행잎이 흩날린다는 이야기다. 오래전 살던 집을 찾기 위한 단서로 붉은 벽돌집과 바로 이 큰 나무가 있는 은행나무골 1번지라는 것이었다고 한다. 딜쿠샤의 역사를 언덕 위의 은행나무는 지금껏 지키고 있었다.
거의 100년 전 개인의 공간이 당시와 거의 흡사하게 복원되었다. 딜쿠샤는 그 시절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에 있던 저택으로 3.1 운동을 전 세계에 알린 AP통신 특파원 고 앨버트W.테일러(Albert Wilder Taylor)와 메리L.테일러(Mary Linley Taylor)부부가 살던 집이다.
두 외국인 부부의 취향이 가득 담긴 공간이 우리의 오묘한 역사의 흔적과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이야기가 깃든 딜쿠샤는 그 시절의 디테일한 분위기와 일상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탈바꿈되어 공개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탄광 개발을 위해 아버지와 한국을 찾은 미국인 앨버트 테일러, 출장차 일본에 갔다가 운명의 여인 메리를 만난다. 영국 출신 배우 메리와 1917년 인도에서 결혼을 하고 한국에서 신혼 생활을 하게 된다. 어느 날 한양도성을 산책하다가 은행나무골로 불리던 행촌동(杏村洞)의 은행나무에 반한 메리가 이곳에 집을 짓고 싶어 한 것이 딜쿠샤의 시작이었다.
1923년에 정초석을 세우고 1년 만에 완성된 딜쿠샤(Dilkusha). 이국적인 이름 딜쿠샤는 페르시아어로 '기쁜 마음, 희망, 이상향'을 뜻한다. 부부는 인도에서 딜쿠샤라는 궁전을 보고 그들의 스위트홈이 완성되면 딜쿠샤라 할 생각이었다. 드디어 한국에서 정착해 살면서 창 밖으로 은행나무가 보이는 딜쿠샤에 살게 된 부부는 고통스럽고 혼란했던 시기의 한국을 마주하게 된 것이다.
기업인이자 연합통신 특파원으로 고종의 장례식 취재를 의뢰받았던 테일러는 기사 내용에 3.1 운동을 추가하게 된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던 해에 마침 아들 브루스가 태어난다. 메리는 출산 직후 세브란스 병원 창문을 통해서 고종의 장례 행렬을 보았다고 했다. 이때 병원에 왔던 테일러는 갓 태어난 아들 브루스의 침대 밑에 숨겨진 종이 뭉치를 발견하게 되는데 이것이 기미독립선언문이었다. 이것을 동생 윌리엄의 구두 뒤축에 숨겨서 도쿄에 가서 타전했고 마침내 뉴욕타임스에 3.1 운동 기사가 실리게 된 것이다. 이 뿐 아니라 테일러에 의해서 제암리 학살사건을 비롯해서 3.1일 운동을 제압하기 위한 일제의 각종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렸다.
금광사업과 특파원으로 갖가지 일을 겪으면서 테일러 부부는 점차 조선에 깊은 애정을 갖게 된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으로 위기가 찾아왔고 테일러는 구금되고 메리도 가택연금 상태가 되어 결국은 외국인 추방령에 따라 이 땅을 떠나게 된다. 지구 한 바퀴를 돌아 캘리포니아에 상륙한 테일러는 줄곧 한국행을 꿈꾸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1948년에 세상을 떠났다. 메리는 한국을 사랑한 남편의 뜻에 따라 테일러의 유해를 가지고 그해 한국을 찾아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딜쿠샤에도 들렀다. 앨버트 테일러는 현재 양화진 선교사 묘역에 아버지와 함께 잠들어 있다.
이토록 다사다난했던 역사 속의 사실을 이들이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방인이었지만 한국을 사랑했고 위험 속에서도 한국을 위한 일을 서슴지 않았던 앨버트 테일러, 마지막 안식처로 한국에서 잠들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게 테일러와 메리 부부의 딜쿠샤가 잊혀 가던 중 아들 브루스가 유년시절을 보낸 곳을 찾고 싶다고 한 것이다. 그동안 소유권이 몇 번이나 바뀌고 국가 소유가 되었지만 귀신이 나오는 집이라 불릴 만큼 방치되었던 집, 한국 전쟁 후 집 없는 많은 사람들이 버려진 딜쿠샤의 공간을 쪼개서 살았다고 한다. 2006년 66년 만에 딜쿠샤를 찾은 부르스는 이것을 보고 그동안 어려운 이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 되어 주어 감사해했다고 전한다.
이후 서울시는 딜쿠샤의 복원 및 재현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특히 메리는 다재다능해서 글과 그림이 뛰어나 남겨진 많은 그림과 기록이 전시되었고 그녀의 기록이 복원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또한,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테일러 씨의 손녀 제니퍼 린리 테일러는 딜쿠샤 관련 자료 1026건을 기증했다. 2018년부터 시작한 복원 작업 끝에 역사전시관으로 재탄생되어 2021 3월에 개관에 이르렀다. (2017년 등록문화재 제687호로 등록)
1층과 2층의 전시장은 그들이 살던 1920년대의 모습 그대로 복원했다. 파티나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던 1층은 거실 내부를 상세히 재현했다. 부부의 결혼과 입국, 한국생활을 보여준다. 메리의 그림이나 호박 목걸이 이야기도 전시되었다. 테일러가 메리에게 청혼할 때 준 호박 목걸이는 미국으로 추방되어 살면서 한국에서 살던 기억을 바탕으로 쓴 책의 제목이 '호박 목걸이'다. 그리고 금광 사진이나 금강산 여행을 그림과 기록으로 남긴 것들, 벽난로…. 모두 그들의 숨결이 깃든 추억들이다.
2층에는 테일러 부부가 여가를 보내는 공간이다. 영상으로 딜쿠샤의 복원 과정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전시물 중에는 메리가 한국의 주변 사람들을 그린 초상화가 인상적이었고 테일러의 언론활동 모습도 남겨져 있다. 한국의 병풍이나 고려청자, 램프나 테이블 등 동서양이 조화를 이룬 집안이 전체적으로 아름답다.
수많은 시간들을 견뎌낸 널찍한 거실의 창문으로 햇살이 환하게 들어온다. 당시에는 언덕 꼭대기 집이어서 멀리 지나가는 기차가 보이고 남산과 한강이 시원하게 들어오는 전망 좋은 집이었다는데 지금은 아파트와 건물들로 가로막혀있다. 다만 옆의 창문을 통해서 은행나무의 풍경은 고스란히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딜쿠샤는 종로구 사직터널 오른쪽 축댓길로 오르면 언덕 위의 2층 붉은 벽돌집이다. 이제는 복원되어 겉모습이 살짝 새것 느낌이 들긴 하지만 1923년부터 추방되던 1942년까지 테일러와 메리 부부 가족이 살던 100년 전의 테일러가(家)이다.
◇ 가는 길: 서울의 서대문역이나 독립문역에서 나와, 김구(金九) 선생의 사저였던 경교장(京橋莊)을 거쳐 돈의 박물관을 지나면 서울 한양도성 순성길이 나타난다. 행촌 성곽마을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변을 오가는 이들의 여유로운 산책길이다. 월암근린공원에서 곧바로 나타나는 홍파동 언덕배기의 홍난파 가옥을 지나면 저 앞으로 400년이 넘는 수령의 우람한 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그 은행나무에 마음을 빼앗겨 집터를 선택한 메리의 시선으로 나무를 바라보기도 하며 발걸음을 하다 보면 “DILKUSHA 1923” 명판이 새겨진 붉은 벽돌집 딜쿠샤가 맞아준다.
◇ 딜쿠샤 방문은 사전예약제로 진행한다.
- 예약 방법 : 서울시 공공서비스 예약 검색 → 딜쿠샤
https://yeyak.seoul.go.kr/web/reservation/selectReservView.do?rsv_svc_id=S210226112026774583
- 문의 : 딜쿠샤 전시관(070-4126-8853)
●Exhibition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 노실의 천사
일정 5월 22일까지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규모 전시 ‘노실의 천사’(Angel of Atelier)가 이번 달까지 열린다. 전시 제목 ‘노실의 천사’는 권진규가 쓴 글에서 따온 것으로, 노실은 거미가 있는 방, 천사는 그가 만들어낸 작품들을 뜻한다.
권진규는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미술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그는 구상과 추상,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현세와 내세의 경계를 편견 없이 넘나들었으며 세속을 떠나 이상을 추구했다.
권진규는 생전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비운의 천재 조각가’로도 불렸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과 생활고 등으로 고통받던 그는 1973년 5월 작업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해 유족이 기증한 작품(총 141점)과 이건희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고려대학교박물관, 리움 등 기관과 개인 소장자로부터 대여받은 작품이 포함됐다.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개인 소장하던 작품 ‘말’도 있다. 총 240여 점으로 권진규 개인전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전시는 자작시를 바탕으로 불교에 한평생 귀의해왔다는 점에 착안해 시기별로 입산(1947~1958), 수행(1959~1968), 피안(1969~1973)으로 구분해 진행한다.
◇화각 : 오색의 향연展
일정 5월 22일까지 장소 용산공예관
‘화각 : 오색의 향연’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09호 화각장 이재만 특별초청전이다. 화각은 황소의 뿔을 이용한 우리나라 고유 각질 공예다. 황소 뿔 하나를 가공하면 10~20cm 정도의 작은 각지(角紙) 단 한 장이 만들어진다. 재료의 수급·가공 과정이 까다로워 예로부터 화각 공예품은 특수 귀족층이나 왕실에서만 사용했다. 1996년 최연소 국가중요무형문화재가 된 이재만 작가는 화각 공예로는 유일하게 지정된 장인이다. 유물을 재현한 화각 봉채함, 바둑판을 비롯해 이재만 화각장이 새롭게 창작한 12지신 필통, 불감, 보석함, 은장도, 가야금, 삼층장 등 화각 공예품 20여 점이 전시된다.
●Book
◇산산조각(정호승 우화소설)(정호승·시공사)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유명한 정호승 시인이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아 우화소설집 ‘산산조각’을 펴냈다. 시의 압축된 묘사 이면에 숨겨진 서사를 동화적 상상력으로 재탄생시키고 우화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아 보다 친근한 이야기로 인간의 삶이 지닌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산산조각’에 등장하는 화자와 주인공은 동식물과 사물이다. 망자(亡者)가 입는 수의, 못생긴 불상, 걸레, 숫돌, 오래된 절간 화장실의 받침돌 같은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엄연히 이 세상에 실재하고, 심지어 우리의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
‘참나무 이야기’의 참나무는 대웅전의 대들보나 목불(木佛)이 되겠다는 꿈을 키운다. ‘선암사 해우소’의 바윗돌은 싱그러운 차밭에서 안락하게 지낸다. 하지만 참나무와 바윗돌은 전혀 뜻하지 않은 처지에 놓인다. 참나무는 장작이 되고 바윗돌은 해우소의 기둥을 받치며 똥물을 맞고 사는 신세가 된다. 꿈꾸던 미래와 안락함을 빼앗긴 두 존재는 낙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묵묵히 견디는 가운데 삶의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른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듯 ‘나’ 역시 분명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이 세상에 왔으며 존재하기에 살아가야 할 이유 또한 명백하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전해진다. 정호승 시인은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가, 그 가치를 통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우화의 방법으로 성찰했다”고 말했다.
◇작별인사(김영하·복복서가)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9년 만의 장편소설이다. 머지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어느 날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간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다. ‘삶이란 계속될 가치가 있는 것인가’,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등을 묻는다.
◇다시 말해 줄래요?(황승택·민음사)
‘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의 채널A 황승택 기자가 쓴 두 번째 투병 에세이다. 저자는 인생 42년 만에 급작스럽게 찾아온 급성중이염으로 200여 일 동안 청력을 손실한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비장애인 중심 사회의 면면들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혐오의 과학(매슈 윌리엄스·반니)
범죄학자인 저자가 혐오하는 마음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탐구한 책으로, 신경과학·심리학·사회학·통계학적 접근이 눈에 띈다. ‘혐오를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책을 찾고 혐오범죄 예방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탐구한다.
●Stage
◇넥스트 투 노멀
일정 5월 17일 ~ 7월 31일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출 로라 피에트로핀토
출연 박칼린, 최정원, 남경주, 이건명, 양희준, 노윤, 이석준, 이아진, 이서영, 이정화 등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이 7년 만에 돌아온다. ‘넥스트 투 노멀’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내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굿맨 패밀리 가족 구성원의 아픔과 화해, 사랑을 담은 작품이다.
과거의 상처로 인해 16년째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엄마 다이애나, 그런 엄마에게 소외감을 느끼는 딸 나탈리, 다이애나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흔들리는 가정을 지켜내려 노력하는 아빠 댄, 다이애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아들 게이브까지 여러 상황으로 저마다 한계에 다다르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위태로웠던 가족은 서로의 상처를 진심으로 바라보고 작게 피어나기 시작한 희망을 붙잡으려 한다. 이번 프로덕션에는 연기력과 가창력을 갖춘 실력파 배우들이 대거 뭉쳤다. 국내 프로덕션 초연부터 두 번째, 세 번째 재연까지 참여한 배우 박칼린이 다이애나 역으로 다시 돌아온다. 한국 뮤지컬계의 레전드라 불리는 배우 최정원도 다이애나로 새롭게 합류한다.
◇모래시계
일정 5월 26일 ~ 8월 14일
장소 대성 디큐브아트센터
연출 김동연
출연 민우혁, 온주완, 조형균, 최재웅, 송원근, 남우현, 박혜나, 유리아, 나하나 등
뮤지컬 ‘모래시계’가 2017년 초연 이후 5년 만에 돌아왔다. 동명의 SBS 드라마가 원작이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서사시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네 청춘의 이야기를 담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격동의 시대 속 엇갈린 선택과 운명에 처한 ‘태수’ 역에는 민우혁, 온주완, 조형균이 캐스팅됐다. 태수의 절친한 친구이자 세상의 정의가 되고 싶었던 ‘우석’ 역은 최재웅, 송원근, 남우현이 연기한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좌절했던 ‘혜린’ 역에는 박혜나, 유리아, 나하나가 함께한다.
◇돌아온다
일정 5월 7일 ~ 6월 5일
장소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연출 정범철
출연 강성진, 박정철, 김수로, 정상훈, 이아현, 홍은희, 김곽경희 등
연극은 ‘돌아온다’라는 이름의 식당을 배경으로 한다. 허름하고 작은 식당에서 욕쟁이 할머니, 군대 간 아들을 기다리는 초등학교 여교사, 집 나간 아내를 기다리는 청년, 작은 절의 주지 스님 등의 사연이 펼쳐진다. ‘돌아온다’ 제작진은 “누구나 가슴속에 ‘그리운 사람 혹은 무언가’를 하나쯤 가지고 있다”면서 “우리 주변에 있을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온 가족과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감동과 웃음을 선사할 것”이라고 전했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하면 으레 관심은 새 정부의 기조나 내각의 구성 등에 쏠리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에 대중의 관심은 ‘풍수’에 쏠렸다. 윤석열 당선인이 청와대를 국민에게 돌려주겠다 선언하면서, 집무실을 용산의 국방부 자리로 옮겼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지관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온 ‘흉터 논란’이 윤심을 움직인 것 아니냐는 추측이 난무했다. 50년 넘게 동양철학에 몸담은 연구가는 좋은 선택일 수 있다고 말한다.
“크게 경을 칠 것이야.” 1969년 천안의 한 주택가. 한 청년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방 안에서 상석을 차지하고 있는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젊은 청년이었다. 마주 앉은 초로의 노인은 고개를 연신 숙일 뿐 말 한마디 제대로 섞지도 못하고 있었다. 청년의 입에서는 마치 직접 보고 온 것처럼 미래에 대한 이야기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 청년은 이제 74세가 되어 “당시엔 겁이 없었다”고 표현했다. 50년 넘도록 역학 발전에 힘쓰고 있는 청송학 노승우 선생의 이야기다.
“그땐 마치 쾌도난마 같았습니다. 확신에 차서 함부로 말을 쏟아냈죠. 조금 아는 것 가지고 겁 없이 덤볐던 시절이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명당서 밤이슬 맞다 간첩 오해도
그가 동양철학에 몸담게 된 것은 가족의 영향이 컸다. 외조부였던 ‘간산’ 선생은 평생을 연구하며 천일기도를 두 번이나 성공한 도인같은 사람이었다. 그는 어느 날 “임진강 이남으로 가야 살 수 있다”며 평양북도 영변군에 살던 가족을 영월을 거쳐 계룡산으로까지 이끌었다. 그의 외숙부 역시 역학에 몸담았다. 외숙부인 ‘동호’ 선생은 그의 실질적인 스승이 되어 평생을 이끌었다. 명리학과 성명학을 공부하며 ‘이기’를 익혔고, 풍수학과 관상학을 통해 ‘형기’를 깨우쳤다.
젊은 치기에 철학원을 차렸다가 그만두었지만, 군 문제를 해결한 이후에도 한동안 다시 개원하지는 않았다. 과연 그가 공부한 것들이 실제로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미래의 운명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운명이 실제로 작동했는지 검증해야 했다.
“2년 넘도록 전국의 땅만 보러 다녔어요. 전국의 지역문화원을 다니면서 배출된 역사적 인물을 확인하고, 실제로 태어난 생가를 찾아 터를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죠. 지역민들에게 후손들은 잘 지내는지 물어보기도 했고요. 또 좋은 명당을 만나면 실제로 그곳에 누워 밤을 지새면서 좋은 기가 있는지 느껴보려고 했죠. 덕분에 새벽이슬 맞으며 산을 내려오다 간첩으로 오해받기도 했어요.(웃음)”
직접 확인하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그의 성격은 많은 스승들에게 그를 이끌었다. 국한문으로 된 우리나라 최초의 역학서 ‘팔자대전’의 저자 김우재 선생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김우재 선생은 국내에서 구전되던 역학 이론을 집대성해 책으로 엮었지만, 출판사들이 받아주지 않자 자비로 ‘팔자대전’을 출간했다.
“책을 보고 반해서 무작정 찾아갔죠. 용산 버스터미널에서 내려 찾아갔는데, 계단 앞에서 신발을 벗어야 하나 신어야 하나 고민할 정도로 세상 물정 제대로 몰랐던 시절이죠.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제대로 여쭙지도 못했지만, 청빈한 학자의 모습이었던 선생의 첫인상은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 이후 청송학은 두 명의 스승을 더 만난다. 일붕 서경보 스님과 청오 지창룡 선생이다. 특히 청오와는 한국역술인협회의 회장과 부회장 사이로 8년간 호흡을 맞췄다. 청오는 조선 시대부터 8대에 걸쳐 관상감을 배출했던 가문 출신으로, 현재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자리나,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묘를 잡은 것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인천의 조용한 주택가 가운데 자리 잡은 것은 1976년의 일이다. 이후 이곳을 떠나본 적이 없다. 청송학은 “서울과 거리를 두고 술사가 아닌 학사로 산 것은 평생 잘한 선택 중 하나”라고 이야기한다.
“이 일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재벌이나 정치권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죠. 특히 요즘 같은 선거철에는 더더욱 많은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역학을 하는 사람은 보통 학문적인 연구에 집중하는 학사와 많은 이들의 환심을 사는 술사로 나뉘는데, 술사로 살았다면 돈 몇 푼에 소주잔이나 기울이다 지금의 성과는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큰돈은 만지지 못했지만, 그동안을 돌이켜보면 보람 있는 일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특히 자랑스러워하는 일 중 하나는 역학을 ‘음지’에서 ‘양지’로, 그러니까 제도권 안으로 합류할 수 있도록 기여한 일이다. 역학을 공식 교육기관에서 가르친 건 2006년 서울교대 평생교육원의 관상학 강좌가 최초였다. 청송학이 전임강사를 맡았다. 이어 서라벌대학교 풍수지리학과, 동방문화대학원대학교 풍수지리학 최고위과정, 용인대학교 풍수지리 고위과정 등을 통해 강단에 섰다.
“특히 서라벌대학교의 경우 정식 학부과정이 생겨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들부터 78세 넘은 할아버지까지 함께 가르치기도 했죠. 없던 교육과정이 처음 생긴 것이니까 어떻게 강의를 할 것인지, 교재는 무엇을 쓸 것인지 고민이 많았어요.”
다양한 그의 교육 이력 중에 흥미로운 부분은 고려대학교 의과대학과 관련한 것이다. 의료법학연구소에서 의사와 병원행정 담당자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근무자 등을 대상으로 두개골의 형상으로 인간의 성격과 심리적 특성 및 운명 등을 추정하는 골상학을 강의했다.
역학이라는 분야의 특성상 공개하지 못하는 교육도 많았다. 재벌그룹 계열사 인사담당자 수십 명을 앉혀놓고 관상학을 교육하기도 했다. 우수한 사원을 뽑겠다는 회사 측의 요청 때문이었다.
방송 출연도 고사하지 않는 편인데, 이 부분도 제도권 안에서 역학이 인정받기를 바라는 또 다른 노력 중 하나다. 역학이 무속과 구분되어 사회적 인식이 개선되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또 한국동양운명철학인협회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민간자격 시험 개발 등 인재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대통령 관저 이전 올해가 적기
“공간이 사고를 지배한다고 했죠.” 풍수가 우리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묻자 청송학은 서양 정치인의 어록을 언급했다. 영국 수상을 지낸 윈스턴 처칠이다.
“집은 사람이 짓는 것이지만, 사람은 집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공간이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동서양이 같은 철학을 공유한 셈이죠. 실제로 풍수학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중요한 정치적 결정이 나라의 국운을 결정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남산터널이 개통된 것도 중요한 사건이죠. 서울의 안산인 남산에 터널이 개통되면서 속살이 드러나자, 지창룡 선생님은 ‘나라의 인재들이 해외로 뻗어나가 활약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셨죠. 결국 그렇게 되었고요.”
풍수적으로 뚜렷한 공과가 있는 정치인으로 그는 이명박 전 대통령을 꼽았다. 복원사업을 통해 복개된 청계천에 다시 물이 흐르기 시작했을 때 그는 안심했다고 한다.
“베이징을 흐르는 장강이나 워싱턴DC를 가로지르는 포토맥강 등 융성한 대도시에는 반드시 강이 있고 ‘서출동래’(西出東來)의 원칙을 가져요. 청계천 역시 수량이 부족해 아쉽지만 물이 다시 흐르게 한 덕분에 대한민국이 선진국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드넓은 한강 때문에 물이 풍부하다 생각하기 쉽지만, 풍수적으로 보면 사대문 안쪽은 물이 부족해 서울의 단점으로 작용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경복궁에 경회루를 조성한 것도 물이 부족함을 보완하기 위한 비보(裨補)로 봐야 한다고.
청계천 복원사업이 공이었다면 과도 있다. 바로 아라뱃길 사업이다. 그는 “아라뱃길이 나면서 결과적으로 한강물이 다른 곳으로 새어나가게 된 셈이 됐다”며 “물자가 도망가고, 서울의 인구가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그렇다면 청와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청와대는 정말 나쁜 자리일까. 청송학은 “풍수학자 입장에서 경복궁이나 청와대의 위치는 납득이 가지 않는 자리는 아니다”고 이야기했다.
“풍수학의 관점에서 아쉬운 부분이 있기는 하죠. 청룡의 역할을 하는 낙산이 백호에 비해 짧은 형세예요. 흥인문이라고 불렸던 동대문이 세조 1년(1455년)에 흥인지문으로 바뀐 기록이 나와요. 주변 지대가 다른 곳에 비해 낮아 땅의 기운을 돋우기 위한 지명 비보를 한 것이죠. 풍수학에서 부족한 자연적 요소를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것을 비보(裨補)라고 하죠.”
청와대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청와대의 단점으로 대통령 숙소인 관저의 위치가 골짜기에 가까워 경사가 심하고, 물이 부족한 점을 꼽았다. 재물로 사람이 치사해지기 쉬운 공간이라는 해석이다. 또 북악산의 몇몇 바위들이 종기처럼 흉하게 자리 잡은 것도 단점이라고 했다. 그는 “이 부분 역시 나무를 조성하고, 청계천의 수량을 늘리는 등 비보를 하면 좋아질 것”이라고 평가했다.
윤석열 당선인이 고집한 국방부 청사 자리는 어떨까? 청송학은 “서울에서 가장 좋은 자리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
“국방부 자리는 남산에서 둔지산으로 내려와 혈이 모이는 자리고, 완전한 남향인 점이 좋죠. 또 남쪽으로는 물이 모이는 자리여서 물자가 쌓이는 곳입니다. 훌륭한 터가 좋은 주인을 만나면 나라의 국운이 융성해질 수 있는 이상적인 자리 중 하나죠.”
그는 자리만큼이나 시기도 중요한데 임인년인 올해가 새로운 터에 자리 잡는 적기라고 설명했다.
“십이지로 해석하면 자(子)시에 하늘이 열리고, 축(丑)시에 땅이 열리고, 인(寅)시에 사람이 열리죠. 임인년인 올해가 새로운 12년 인년의 시작인 만큼, 청와대를 이전해야 한다면 좋은 시기임에는 분명합니다.”
제2의 인생을 살고 싶은 시니어들을 위해 유망 직업을 소개한다. 이번에 소개할 아파트 관리소장은 우리가 상주하는 아파트, 상가 등 전체 건물의 관리인을 말한다. 중장년층 채용을 선호하는 직업으로, 보수가 높아서 각광받고 있다. 아파트 관리소장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취업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택관리사가 되어야 한다. 주택관리사는 대통령이 정하는 주택관리 실무 경력, 그밖에 주택 관련 경력을 갖춘 자로서 시·도지사로부터 주택관리사보 자격증을 발급받은 자를 말한다.
주택관리사는 공동주택 및 아파트 관리소장, 아파트 관리실 행정관리자, 대형건물 관리자, 공공건물 관리책임자 등으로 활동할 수 있다. 300세대 이상 아파트, 150세대 이상으로 승강기가 설치된 아파트에서는 주택관리사 채용이 필수기 때문에 주택관리사의 수요는 점점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그중에서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취업하면 사무, 회계, 대외업무 관리 등의 행정 관리부터 시설, 안전, 환경 등의 기술 관리까지 담당하게 된다. 또 입주민 간의 민원 및 분쟁을 조정하고 사무, 주차 관리, 청소 등 다양한 직종의 직원들을 지휘 감독한다. 여기에 노인정, 놀이터, 주차장 등 공동시설까지 안전사고가 발생하지 않고 주민들이 안심하고 머무를 수 있도록 관리하는 일을 맡는다.
아파트 관리소장으로 가장 선호하는 연령대는 평균 53세로 나타났다. 사회적 경험을 두루 갖춘 중장년층을 선호하는 것. 더욱이 아파트관리소장은 정년이 없어 70대에도 근무할 수 있다.
아파트 관리소장의 가장 큰 장점은 안정적인 수입이다. 집합건물 관리기업 ‘우리관리’에서 소속 관리소장 1200여 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지난해 관리소장의 월평균 급여는 380만 원, 평균 연봉은 4555만 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주택관리사보 자격증 취득 방법
주택관리사 자격증의 정식 명칭은 주택관리사보(Housing Manager)다. 국토교통부에서 주관하고,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시행하는 국가전문자격증이다. 자격 시험과 관련된 정보는 한국산업인력공단의 웹사이트 큐넷(q-net.or.kr)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주택관리사보 자격증을 취득하려면 1차, 2차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올해 1차 시험은 7월 9일(토), 2차 시험은 9월 24일(토)로 예정되어 있다.
1차 시험은 민법, 회계원리, 공동주택 시설개론 총 세 과목이다. 민법은 총칙, 물권, 채권 중 총칙, 계약 총칙, 매매, 임대차, 도급, 위임, 부당이득, 불법행위 등에 대해 다룬다. 공동주택 시설개론은 목구조, 특수구조를 제외한 일반 건축구조와 철골구조, 공기조화, 냉동설비, 홈네트워크를 포함한 건축설비 개론 및 장기 수선계획 수립 등을 위한 건축 적산이 포함된다.
1차 시험은 객관식 5지 선다형이고 과목당 50분의 시간이 주어진다. 1차 시험은 절대평가로 매 과목 100점 만점을 기준으로 한다. 각 과목 40점 이상, 평균 60점 이상 득점 시 합격이다.
2차 시험은 주택관리관계 법규, 공동주택관리 실무 두 과목을 본다. 공동주택관리 실무는 시설 관리, 환경 관리, 공동주택 회계 관리, 입주자 관리, 공동주거 관리, 이론·대외업무, 사무·인사 관리, 안전·방재 관리 및 리모델링 등에 대한 실무적인 내용을 다룬다.
2차 시험은 과목당 50분으로 1차와 동일하지만 주관식 문제가 있다. 더욱이 2020년부터 2차 시험은 상대평가로 바뀌어 고득점을 받아야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시험이 1차, 2차로 나뉘어 있어 시험 준비부터 취업까지 빠른 경우 1년 만에 가능하다. 그러나 연령이 높고 시험 합격에 자신 없는 수험생이라면 1차는 올해, 2차는 내년에 합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짜고 천천히 준비하는 것도 좋다.
자격증 취득 후 아파트 관리소장 되는 법
주택관리사보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해서 바로 주택관리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자격증을 취득하면 500세대 미만 아파트에서 근무 가능하다. 여기서 3년의 경력을 채워야 정식 주택관리사 자격이 주어진다. 정식 주택관리사가 되면 대규모 아파트 단지 관리소장으로 취업할 수 있다.
자격증 취득 후 취업하는 방법은 공채와 사채 두 가지가 있다. 공채는 위탁 관리업체에서 공개 채용으로 뽑는 것이고, 사채는 인맥 등으로 빈자리가 났을 때 들어가는 방법이다. 보통 공채로 많이 취업한다. 공채는 대부분 10~12월에 진행된다. 때문에 주택관리사로 첫발을 딛는 사람이라면 2차 시험 합격 여부를 예상해 취업 준비를 바로 하는 것이 좋다.
이처럼 아파트 관리소장이 되기까지 과정이 쉽지 않다. 더욱이 아파트 관리소장이 맡는 업무가 워낙 방대하다 보니 요구되는 능력도 다양하다. 먼저 경리 업무가 가능한 관리자를 선호한다. 업무 자체가 경리겸직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리실무, 전산회계 같은 회계 관련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다면 도움이 된다.
더불어 전기·소방·위험물·보일러 기사 또는 기능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사람을 선호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에는 친환경 주거 공간에 대한 관심이 높아 조경과 관련된 자격증을 갖고 있으면 플러스 요인이 된다
◇“안정적인 월급, 정년 없어 좋아”
황보반 아파트 관리소장
황보반(63) 관리소장은 원래 응급의료기기 납품을 하는 사업가였다. 사업이 어려위지면서 2011년 일을 접게 됐고, 아내의 추천으로 아파트 관리소장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아내는 10여 년 전부터 이 일을 하고 있었다고.
황보 소장은 “내가 돈을 제대로 못 버니까 아내가 강력하게 아파트 관리소장을 하라고 했다. 그동안 아내를 고생시켰으니 운명이라 생각하고 이 일을 하기로 했다”고 계기를 설명했다.
그해부터 그는 아파트 전기기사로 일했다. 동시에 주택관리사보 자격증 준비를 했다. 2년 동안 학원을 다니면서 공부했고, 2014년 자격증 취득에 성공했다. 전기기사 경력에 자격증까지 취득한 뒤 정식으로 아파트 관리소장이 된 것은 2016년 1월 1일이다.
황보 소장은 자격증 취득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것에 대해 “기술자 입장에서 1차 시험 과목인 회계가 어려웠다”고 털어놓았다. 실제로도 아파트 관리소장은 경리나 회계와 관련된 업무가 많다 보니 그는 남성보다는 여성이 하기에 더 좋은 직업 같다고 짚었다. 덧붙여 황보 소장은 아파트 관리소장의 장점으로 안정적인 월급과 정년이 없는 점을 꼽았다.
“사실 우리 나이대에 일정하게 안정적인 월급을 받는다는 게 어렵잖아요. 300만~400만 원의 월급을 받고, 오래 일할 수 있다는 것이 아파트 관리소장의 장점이죠. 저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하고 싶은데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반대로 단점도 많다고 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직업이다 보니 스트레스가 상당하다고. 관리소에서는 공용 부분만 관리하는데, 입주민들이 전유 부분도 관리해달라고 요구하는 일이 다반사다.
“한 예로 아파트 유리창은 전부 전유 부분입니다. 난간대만 공용이에요. 그런데 그 유리창 청소를 관리비로 하재요. 그건 불가능한 거예요. 또 그거를 공동구매 개념으로 하자고 해서 일을 진행해주면 꼭 악성 민원이 발생해요. 청소가 잘못됐다든지 같은. 직원들이 전유 부분이라서 안 해줘도 되는 것을 도와줄 때도 있어요. 그러면 고맙다고 말 한마디라도 해주면 좋을 텐데, 당연히 여기는 경우도 많아요.”
물론 힘들기만 한 것은 아니다. 계획한 대로 일이 잘 진행될 때는 아파트 관리소장으로서 보람도 느낀다. 황보 소장은 “우리 일은 총괄적인 관리를 하는 거다. 기술, 행정, 조경까지 모든 것을 한다”면서 “3년에 한 번씩 법적인 절차에 따라 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어제는 전기 검사를 했는데 무사히 잘 마쳤다. 그럴 때 안도감과 또 하나의 일을 해냈다는 뿌듯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입주민들에게 “서로 상식과 순리가 통했으면 좋겠다. 아파트가 새것이라도 결국에는 점점 낡아지지 않나. 관리와 보수를 잘해서 오래 유지하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Exhibition
◇박래현, 사색세계
일정 4월 23일까지 장소 아트조선스페이스
“수많은 장벽에 부닥치고 가혹한 시련 앞에 몸부림치며 이를 넘길 수 있는 인간에게만 주어지는 생존의 권리… 봄이라는 뽀얀 계절은 때때로 나를 이런 부질없는 사색세계에 몰아버린다.”
한국 근대 화단의 대표 여성 미술가 우향 박래현(1920~1976). 1959년 조선일보 주최 ‘현대작가초대미술전’에 출품하며 에세이 ‘봄이면 생각나는 일, 삶과 마주 섰던 계절’을 함께 기고했다. 에세이의 한 구절인 ‘사색세계’가 이번 전시의 타이틀이 됐다. 에세이에서 그녀는 지난 몇 년간의 봄을 상기하며 식민국가의 운명 속에서 마음의 어두운 흔적과 불안한 감정을 더듬어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국의 봄은 아름다웠다고 술회했다.
‘박래현, 사색세계’ 전시는 ‘생동하다’, ‘피어나다’라는 주제로 1, 2부를 나누어 그녀의 작품세계를 돌아본다. 2020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대대적인 회고전 이후 선보이는 첫 전시로, 초기 대작부터 대표적인 추상 연작, 그리고 미공개 작품까지 80여 점의 작품을 볼 수 있다. 박래현은 운보 김기창 화백의 아내로, 남편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화가다. 이번 전시에서는 운보의 아내, 누군가의 어머니, 그리고 여류라는 굴레를 넘어 한국화의 현대화를 개척한 박래현을 만나볼 수 있다.
◇사빈 모리츠 : RAGING MOON
일정 4월 24일까지 장소 갤러리 현대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독일 여성 화가 사빈 모리츠(53)의 아시아 첫 개인전이다. 사빈 모리츠는 개인과 집단의 기억, 그 기억으로부터 형성된 추상의 풍경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펼치는 작가다. 독일 추상미술의 거장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부인으로도 유명하다. 이번 전시는 그녀가 2015년부터 2022년까지 제작한 회화, 에칭 연작 등 50여 점을 소개한다. 동독에서 보낸 유년기의 경험과 전쟁의 참상을 표현한 구상 작업을 하던 작가는 2015년부터 추상 회화로 ‘정신적 풍경’을 다뤘다. 과감한 붓질과 풍성한 색채로 완성된 매혹적인 추상의 이미지로 평단의 찬사를 받고 있다.
●Book
◇백만장자와 승려(비보르 쿠마르 싱·다산초당)
사찰을 나온 지 3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존경받는 승려와 고급 호텔을 운영하며 부를 축적해온 백만장자가 있다. 백만장자는 물질의 정점에, 승려는 정신의 정점에 있는 사람이다. 극과 극인 두 사람이 호텔에서 21일간 함께 머물며 행복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당신은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된 두 사람의 이야기는 “간소한 삶은 성공으로 가는 첫 단계다”, “명상으로 머릿속을 정리하라”,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이 있다” 등 물질세계와 정신세계를 넘나든다. 백만장자와 승려가 서로 배우며 깨닫는 인생의 본질을 통해 독자는 ‘지금 행복한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저자 비보르 쿠마르 싱은 히말라야산맥에 위치한 산골 마을에서 나고 자랐다. 인도의 전통 명문인 셔우드대학과 스리람상경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영국의 런던정치경제대학에서 재무회계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금융 최전선에서 일하는 그는 물질적 풍요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지만, 동시에 아름다운 자연과 여유 있는 삶이 주는 정신적 행복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물질과 정신의 균형을 맞추며,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온전한 행복을 누리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책을 썼다.
책은 인도에서 출간 후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12개국에 판권이 팔릴 정도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부자가 아니라서, 마음이 공허해서 행복을 찾아 헤매는 이들에게 특히 추천하는 책이다.
◇울다가 웃었다(김영철·김영사)
대한민국 대표 라디오 DJ이자 코미디언, 김영철의 웃픈 휴먼 에세이다. 그는 “나의 명랑은 수없이 노력하고 연습한 결과”라고 고백하며 가족, 일상, 방송담을 풀어놓았다. 그러면서 자신이 깨달은 ‘웃음과 울음이 균형을 이룰 때 삶은 풍요로워진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페스트의 밤(오르한 파묵·민음사)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 오르한 파묵이 5년간 매진해 써낸 신작. 코로나 이후 최초의 팬데믹 소설로 역사소설에 미스터리를 결합했다. 소설은 1901년 오스만제국의 민게르라는 가상의 섬을 배경으로 하며, 페스트로 인한 종교적·정치적 분열을 그린다.
◇쓸모 있는 음악책(마르쿠스 헨리크·웨일북)
저자는 독일에서 독창적인 음악 테라피를 통해 대중의 고민을 해결하고 인간의 잠재력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해왔다. 그는 음악을 제대로 들으면 더 나은 일상을 꾸릴 수 있으며, 더 나아가 뇌 기능 활성, 창의력과 영감 자극 등에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Stage
◇데스노트
일정 4월 1일 ~ 6월 26일
장소 충무아트센터 대극장
연출 김동연
출연 홍광호, 김준수, 고은성, 김성철, 김선영, 장은아, 강홍석, 서경수, 케이, 장민제 등
‘데스노트’는 2022년 최고 기대작으로 손꼽히는 뮤지컬로, 동명의 일본 만화가 원작이다. 법과 정의에 대해 고민하던 천재 고등학생 ‘야가미 라이토’가 이름을 쓰면 죽는 ‘데스노트’를 우연히 주우면서, 전 세계의 미제 사건을 해결해온 베일에 싸인 명탐정 ‘엘’(L)과 맞서게 된다. 각자의 정의를 위한 라이토와 엘의 양보할 수 없는 싸움이 긴장감 넘치게 펼쳐진다.
두 주인공의 흥미진진한 갈등과 대결에 프랭크 와일드혼의 트렌디하고 팝스러운 넘버가 시너지를 더해 극적 긴장감과 몰입도를 높인다. 특히 이번 시즌은 논레플리카(Non-Replica) 버전으로 작품의 고유한 매력과 더불어 더욱 긴장감 넘치는 연출, 디테일한 아이디어가 넘치는 무대로 완성도를 높일 예정이다. 여기에 홍광호, 김준수, 고은성, 김성철, 김선영, 장은아, 강홍석, 서경수, 케이, 장민제 등 역대급 라인업을 자랑해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다.
◇아몬드
일정 4월 2일 ~ 5월 1일
장소 코엑스아티움
연출 김태형
출연 문태유, 홍승안, 이해준, 조환지, 임찬민, 송영미, 김선경, 오진영, 유보영, 김태한 등
뮤지컬 ‘아몬드’는 2017년 출간 이후 해외 20개국 출간, 국내 판매 90만 부를 돌파하며 지금까지 꾸준히 베스트셀러에 오르고 있는 동명의 소설(손원평 저)을 원작으로 한다. 지난 2월 뮤지컬 개막 소식이 알려진 후 2022년 상반기 최고 기대작으로 손꼽혔다.
‘아몬드’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감정조절 역할을 담당하는 뇌 부위)에 문제가 생겨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질병인 알렉시티미아를 앓고 있는 주인공이 주변인들과 갈등을 겪고 화해하면서 성장하는 모습을 그린다.
◇광주
일정 4월 15일 ~ 5월 1일
장소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연출 고선웅
출연 이지훈, 조휘, 정동화, 신성민, 문진아, 김나영, 효은, 최지혜 등
‘광주’는 1980년 5월 광주에서 벌어진 5·18민주화운동을 소재로 한 창작 뮤지컬이다. 광주를 평화의 땅으로 일궈낸 열사들의 실제 이야기를 모티브로 한 감동적인 서사와 ‘님을 위한 행진곡’, ‘투쟁가’ 등 웅장한 멜로디는 그날의 열기를 고스란히 전한다.
‘광주’는 2020년 초연됐으며, 2년간 공연 횟수만 총 74회, 관람객 수는 2만 명이 넘는다. 미국 뉴욕 진출도 예정되어 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K-뮤지컬이자 아시아의 ‘레미제라블’로 극찬받고 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퇴근해 돌아와 보니 아내가 짐을 싸서 집을 나갔다. 장식장과 콘솔 등 소품 자리가 빈 휑뎅그렁한 거실 한가운데에 찌무룩이 섰다가 주방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들이켰다. 찬 기운이 정수리를 타고 올라가는가 싶더니 가슴께로 싸하게 번졌다. 나도 모르게 숨을 크게 뱉었다가 크게 들이마셨다. 정신을 가다듬어야 한다. 하긴 출근길에 아내의 딸이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것을 보았으니 오늘 짐을 빼겠구나 짐작은 했다. 그리 놀랄 일이나 새삼스러운 충격은 아니란 뜻이다.
이렇게 해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재혼한 지 1년 반 만에. 말이 1년 반이지 한 공간에서 지낸 것은 6개월도 채 되지 않는다. 다툴 때마다 아내는 버릇처럼 집을 나갔으니까. 친정도 없는 사람이 변변히 갈 데가 있을 리 없건만 마치 가출 자체로 위로를 삼는 것처럼 수틀리면 훌쩍 집을 나갔고, 그렇게 한번 나갔다 하면 몇 달씩 들어오질 않았다. 그럴 때마다 거의 내 쪽에서 화해를 청했고, 아내가 마음을 풀고 돌아오면 이번에는 내가 불안해졌다. 다시 나가지 않을까 하고. 하지만 이제 다시 돌아올 일은 없으리라. 불안할 일도 없으리라. 서로가 재혼이라 혼수를 따로 장만한 것도 없고 아내가 아끼던 자잘한 것들만 가지고 내 아파트에서 합쳤던 터라, 이번 가출은 전과 달리 물건을 모두 실어서 나간 걸 보면 이로써 우리의 인연도 끝난 것일 터. 그렇게 자꾸 나갈 거면 아주 나가버리라고 했던 건 나니까.
다시 혼자가 되어
이렇게 둘이서 서둘러 결정할 게 아니라 그 흔한 부부 상담이라도 받아봤어야 했던 거 아닐까. 갈등의 뿌리는 건드려보지도 못하고 서로 자존심만 세우다 아내도 나도 얼결에 이런 선택을 하게 된 건 아닐까. 나는 아내를 사랑했을까. 아내는 나를 사랑했을까. 함께 연주를 하기도 전에 조율 중인 악기를 내팽개쳐버린 것처럼 이런저런 생각이 마구 뒤엉키며 혼란스레 오갔다.
아내와 나는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으니 법적으로는 부부가 아니다. 그저 잠깐 동거한 관계일 뿐. 그렇게 생각하면 홀가분하다가도 성대히 치른 결혼식이 마음에 걸린다. 그랬다. 우리는 결혼식을 꽤나 성대히 치렀다. 남들 눈에 그럴 듯해 보이고 싶었던 허영심, 과시욕에서만큼은 아내와 내가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허탈감과 자괴감이 든다. 재혼의 형식만 그럴 듯했지 부부의 내실은 너무나 허약했고, 그나마 이제는 관계를 쌓아갈 토대가 사라졌다. 그렇다고 내가 재산을 지키자고 아내와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아내도 그건 인정할 것이다. 내 재산 못지않게 아내도 자기 몫이 알찬 사람이니까. 그러니 혼인신고를 미룬 이유는 서로 속 깊이 사랑하지 않아서라 할밖에. 말이 부부지 결속의 끈은 느슨했던 것이다.
동병상련의 사랑
나는 20년 전에 상처(喪妻)를 했다. 대학 선배의 소개로 만난 두 살 아래 전처와의 10년 결혼 생활은 만족스럽고 행복했다. 서른 살에 결혼하여 이듬해와 또 그 이듬해에 연년생 남매를 낳았다. 아이들은 건강하고 영리했다. 안정된 나의 직장과 가정을 소중히 보살피는 아내, 무엇을 더 바란다면 죄를 짓는 느낌이 들 만큼 평범하지만 안온한 생활이었다. 아내가 간암 판정을 받을 때까지는. 그랬던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는 죄라도 지었던 것일까. 서른여덟 살 젊디젊은 아내는 그렇게 우리 세 식구를 남겨두고 1년 투병 끝에 훌쩍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사랑하고 아끼던 아이들을 남겨두고. 아홉 살, 여덟 살 남매는 엄마를 잃었고 나는 나이 마흔에 아내를 잃고 홀아비가 되었다. 이후 직장과 가정을 병행하여 돌봐야 했던 지난 20년, 고달프고 서글프고 버거워 견딜 수 없을 때면 아내의 묘를 찾아가 “나는 이렇게 힘든데 당신은 어쩌면 이렇게 태연히 누워 있을 수 있냐”고 원망과 푸념을 쏟아내곤 했다.
아내가 떠난 후 남은 우리 세 식구는 함께 외식을 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아내가 없는, 엄마의 자리가 빈 가족 외식은 그 존재의 부재를 더욱 각인시키며 누가 뭐라는 것도 아니건만 식당에 앉아 있는 내내 위축감을 느끼게 했다. 부부와 자녀들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을 볼 때는 더욱 그랬다. 저 평범한 일상이 우리에게는 더 이상 주어질 수 없다는 쓰라림과 함께.
아내를 따라 나도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내 책임을 다한 후 이담에 저세상에서 아내를 만나 단단히 생색을 내자며 오기 아닌 오기로 버텨온 것이 어느덧 20년. 30세가 가까운 남매는 아직 미혼이긴 해도 둘 다 직장이 있으니 내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할 즈음, 지금 막 헤어진 두 번째 아내를 만났다. 그간 주변에서 재혼 권유나 소개가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을 생각해서 마다해왔던 것을 이제는 마음을 좀 열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을 때였다.
막 헤어진 지금의 아내도 나와 비슷한 시기인 38세 때, 세 살 많은 남편을 교통사고로 잃고 딸 하나를 데리고 혼자 살아왔다. 설 명절을 지방 시댁에서 보내고 귀경하던 눈길 고속도로에서 타고 오던 차가 미끄러지면서 중앙 분리대를 박으며 순식간에 일어난 사고였다. 피로를 덜고자 부부가 교대 운전을 하고 있었고, 사고 당시 운전대는 아내가 잡고 있었다. 옆자리의 남편은 중상을 입은 후 병원에서 사망했고, 뒷자리에 앉아 있던 다섯 살 딸과 자신은 큰 부상을 입지 않았다.
허울뿐인 결혼
딸을 키우며 20년 가까이 혼자 살아온 아내. 야무지게 자신을 지키며 강한 생활력과 다져진 실력, 철저한 자기 관리로 직장의 잔뼈가 제법 굵어져 나를 만날 무렵에는 꽤 높은 위치에 올라 있었다. 나는 지금 대표 자리에 있는 회사에서 당시는 중역이었기에, 어느 경제인 조찬 모임에서 회사를 대표하여 참석한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열 개 남짓 마련된 원탁 가운데 마침 한 테이블에 앉게 되어 서로 명함을 주고받으며 인사를 나눈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우리는 사별의 아픔을 겪은 공통점으로 인해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같은 모임에서 다시 한번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자 우연을 인연으로, 인연을 필연으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갈망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음을 열었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봤다고 할까. 느낌이란 게 있다고 할까. 우리는 연민과 연정으로 그렇게 한 마음, 한 몸이 되었다.
우리의 성대한 결혼식은 조찬 모임 참석자들을 의식한 점도 작용했다. 경제인 단체 회원 중에 커플이 탄생한 것도 이례적이거니와 그들의 사회적 신분을 고려할 때 아예 가족끼리 조촐히 치르면 모를까, 식을 올린다면 하객들의 신분에 걸맞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지금은 모두 부질없는 짓일 뿐 아니라 크게 벌인 만큼 창피한 일이 되어버렸지만. 실상 말이 가족끼리지 그녀에게는 부모님도, 가까운 친척도 안 계셨고, 나도 다른 형제 없이 홀로 자라 연로하신 어머니 한 분뿐이니 조촐하다 못해 초라한 모양새가 될 게 뻔했다. 결국 사회에서 연결된 지인들을 모시다 보니 나와 그녀의 직장 관계자까지 초대하여 그만 식이 커져버린 것이다.
기가 막히게도 아내는 대학 3학년 때 양친을 한날한시에 교통사고로 잃었다. 그때도 어느 해 설에 부모님과 함께 지방의 조부모님을 뵙고 올라오던 때였다고 한다. 뒷좌석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졸고 있었던 그녀는 사고 후 혼자 살아남았다. 운명이란 게 있다면 그녀에게는 같은 운명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학생 때는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고, 결혼 후에는 역시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었으니. 또한 부모를 잃은 자신의 운명을 딸에게 그대로 넘겨줬다.
굶주린 애정
아내와 그녀의 딸은 처음에는 나와 한집에 살았다. 아내를 위한 나의 배려였다. 또한 두 사람이 불편하지 않도록 나의 두 아이는 따로 거처를 마련해서 내보냈다. 한평생 의지하고 살아온 아내와 아직 미혼인 아내의 딸을 떼어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을까. 모녀는 한 몸처럼 결합되어 도무지 내가 끼어들 여지를 주지 않았다. 다툼의 원인이 아내의 딸 때문일 때도 종종 있었다. 가령 무질서한 생활 습관이나 늦은 귀가 시간에 대해 몇 번 주의를 줬더니 그게 서운했던지 내게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제 엄마랑만 속닥거린 후 독립을 해버렸다. 그때 나는 내심 잘됐다는 생각도 들었고, 제 발로 나가준 것이 고맙기도 했다. 내 아이들을 생각할 때 공평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아내와 나 본격적인 둘만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집을 나가는 아내의 버릇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딸의 아지트가 있었으니까. 채 정이 들지 않은 나와 사는 것보다 딸과 지내는 것이 더 익숙하고 편했던 거겠지. 관계가 본격적으로 엇나가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부부로 정이 들기도 전에 균열이 깊어가고 있었다. 그러고는 오늘의 결별을 맞은 것이다.
나도 아내도 첫 결혼에서 배우자를 일찍 여의고 혼자 모든 것을 감당해야 했다. 외롭고 팍팍한 길을 걸으며 사랑에 굶주려 있었다. 상대의 빈 가슴을 채워주기보다 나의 허기가 먼저였다. 그만큼 새로 만난 사람에 대한 기대가 컸던 것이다. 남자로서 내가 좀 더 아량이 넓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보지만 그 또한 생각일 뿐, 그게 말처럼 쉽다면 지금의 이 상황을 마주하지는 않았을 터. 누구를 탓하랴. 탓할 것은 내 팔자요, 그녀의 팔자일 뿐. 여하튼 지금은 쉬고 싶을 뿐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1 입관을 앞두고 가족들이 고인과 마지막 만나는 시간이다. 저마다 슬픔을 추스르며 고인에게 작별인사를 올린다. 어느 정도 인사가 끝난 것 같아 남은 절차들을 진행하려고 하는데 작은며느리가 잠깐 기다려달라고 한다.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고인의 귀로 가져다 댄 후 녹음된 음성을 틀어준다.
휴대전화에서는 코로나19로 입국하지 못한, 브라질에 거주하는 딸의 음성이 흘러나왔다. “엄마, 못 가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마지막 가는 길마저 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고마워 엄마. 너무도 사랑하는 우리 엄마. 이제 편히 쉬어.” 딸은 흐느끼느라 말을 맺지 못했다. 사랑하는 엄마의 마지막 길을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과 슬픔이 절절히 느껴졌다.
#2 아들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져 임종을 지키러 입국하려 했으나 코로나19로 인해 들어올 수 없었다. 직계가족의 상이 발생할 경우 입국 시 코로나19 음성 판정이 나면 자가격리를 면제받을 수 있지만 운명하지 않은 시점에서 들어올 경우에는 15일 동안 자가격리를 해야 한다.
#3 일정이 맞지 않으면 장례식에 참가 못 할 수도 있다. 그래서 아들은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대신 장례식이라도 참석하기 위해 임종 후 입국하기로 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입국한 상주를 받아주는 장례식장은 흔치 않았다. 우리 한겨레두레협동조합에서 발 벗고 나서 겨우 장례식장을 섭외할 수 있었는데, 그마저도 고인 사망 후 상주가 입국해 자가격리 면제를 받은 후 4일 만에야 겨우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릴 수 있었다.
유족들은 코로나19 때문에 빈소를 차리지 않는 무빈소로 장례를 치르겠다고 했다.
“상주님~ 빈소를 차리지 않으면 아쉽지 않으시겠어요?” 조심스럽게 여쭤봤다.
“할 수 없지요. 빈소를 차리면 저희들이 조문을 받지 않겠다고 해도 직장 동료나 지인들이 참석해야 할지 말지 고민할 텐데…. 애초에 빈소를 차리지 않는 것이 주변 사람들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해요.”
결국 빈소를 차리지 않았다. 참관식에서는 목사님과 여러 성도님들이 함께 발인예배를 진행하며 어머니의 천국 가시는 길을 배웅했다.
코로나19가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을 바꾸고 있다. 결혼식이나 장례식도 예외가 아니다. 이 사태가 얼마나 오래 갈지는 모르겠지만 종식된 이후에도 전과 같은 장례식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장례식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애도’에 있다. 장례식을 치르는 과정을 통해 가족들은 죽음을 받아들이고 슬픔을 위로받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코로나19 이전 장례식에서는 이런 애도의 과정이 실종되었다. 운명한 직후부터 유족이 해야 할 일이 너무 많고, 빈소가 차려지면 조문받기 바쁘다. 발인하는 날은 장례식장에 비용을 정산하고, 화장장을 예약하고, 장지 계약하는 등 3일 동안 장례는 정신없이 돌아간다. 그나마 온전히 고인을 추도할 수 있는 시간은 염습을 참관하는 한 시간 남짓이 전부였다.
역설적이게도 코로나19 시대의 장례는 규모가 축소되었을지언정 그로 인해 애도할 수 있는 시간이 훨씬 늘어났다. 부고를 하고 정신없이 조문을 받던 시간이 오롯이 가족들끼리 고인을 기억하고 추모할 수 있는 시간이 된 것이다.
나는 깊이 있는 애도와 가족 간의 애틋한 추모를 위해서는 가족 추모식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추모식이라고 해서 거창할 것도 없고 형식을 따질 필요도 없다. 고인과의 추억을 이야기하거나, 고인의 사진을 함께 보고, 메모리얼 포스트(고인에게 쓰는 마지막 편지)를 작성해 나누면 된다.
내가 근무하는 협동조합은 코로나19 이전부터 추모와 애도가 중심이 되는 장례식을 준비해왔고 ‘채비’라는 브랜드를 론칭했다. ‘채비’는 추모식이 중심이 되는 혁신형 장례식이다. 우리 조합은 가족들이 추모식을 잘 진행할 수 있도록 기획, 연출, 진행을 돕는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의례가 사라졌다고들 한다. 하지만 ‘채비장례’를 통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죽음과 의례의 본질을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모든 것은 양면이 있다. 죽음 또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