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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기의 족보에 오른 실험적 사랑
-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새해 아침, 한 중견 시인의 시집 제목에 마음이 출렁였다. “무슨 끝이 있나요”라는 물음이 메아리치듯 들려왔다. 일찍이 프랑스의 철학자 롤랑 바르트는 인간의 성찰 없는 사랑을 비판하며 “오늘날의 사랑 담론은 지극히 외로운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 ‘이해관계’만 작동하는, 흔해빠진 결판의 스토리만 분분한 탓이다. 세기의 족보에 기록된 저 유명한 사르트르와 보부아르의 사랑은 어땠을까. 자기 존재에 대한 결사항전의 나날이 아니었다면 진즉 서로의 손을 놔버렸을 것이다. 51년간 유지된 계약결혼 시몬 드 보부아르와 장 폴 사르트르. 20세기의 프랑스 최고 지성 커플로 불리는 이름이다. 규정된 인간이 아닌 행동하는 주체로서 살려고 노력했던 두 사람은 정식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평생 연인이자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와의 관계가 내 인생에서 가장 성공적인 성과였다”고 말했고, 사르트르는 보부아르에 대해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사람”, “나의 검열관” 등으로 표현했다. 사르트르와 보부아르가 만난 건 1929년. 당시 그의 나이는 24세, 그녀는 그보다 세 살 어렸다. 보부아르는 배움에 대한 호기심이 남다른 모범생이었다. 한마디로 미모와 지성을 겸비한 여인이었다. 반면 사르트르는 160cm도 안 되는 작달막한 키에 한쪽 눈은 시력을 거의 잃은 사시(斜視)였다. 첫인상은 쉽게 호감이 안 가는 외모였지만 그는 해박한 지식과 유머로 주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요즘 말로 뇌섹남이었다. 어느 날, 밤새 논쟁을 하게 된 두 사람은 서로가 완벽한 대화 상대자임을 알게 됐다. 지적 반려자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자신들의 운명을 동시에 꿰뚫어본 것이다. 실제로 보부아르는 아무도 말 걸어오지 않는 상태를 죽음으로 봤다. 사르트르가 죽자 “더 이상 그와 대화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매우 슬퍼했다. 이들이 2년간의 계약결혼을 시작해 세간의 이목을 끌었던 건 까다로운 철학교수 자격시험에서 각각 수석(사르트르)과 차석(보부아르)으로 합격하고 나서였다. 그 후 둘 사이의 계약은 51년간 파기되지 않았다. “인생은 B와 D 사이의 C다” “2년 동안은 함께 살면서 둘 중 누구도 자유를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되고, 그 후에는 각자의 길을 가며 자유를 누리되 헤어지지는 말 것. 상대가 찾을 때는 반드시 응해줄 것, 강압과 관습에 방해받지 않는 관계가 될 것, 숨기는 일이 없어야 하며 거짓말도 하지 말 것, 각자 경제적으로 독립할 것.” 전통적인 결혼제도에 대해 부정적 입장이었던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이 제안을 즉각 받아들였다. 여성의 창조적 본성을 억누르지도 않고 가사노동자로 전락하게 만들지도 않을 이상적 삶의 모델이라고 생각했고, 그를 사랑했기에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훗날 사람들은 두 사람의 특별했던 결혼생활을 관습과 제약에 매이지 않고, 자유와 평등의 조화를 추구한 실험적 사랑이었다고 평가했다.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다.” 사르트르가 남긴 이 명언에는, 인간은 태어나서 죽는 날까지 수많은 선택 앞에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르트르와 그의 연인 보부아르도 자신들의 존재 방식을 자유롭게 선택하고 실천하며 살았다. 물론 두 삶에 제3의 인물이 끼어들면서 종종 질투와 분노를 일으키고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끝까지 사랑의 총량을 채워나가며 서로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견지했다. 1970년대 초, 사르트르는 시력을 점점 잃어갔고 더 이상 그가 쓴 글을 아무도 해독할 수 없는 지경이 됐다. 그런데도 1980년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펜을 놓지 않았다. 보부아르는 사르트르가 떠난 후 그의 고통스러운 말년을 기록한 ‘이별의 의식’을 출간했다. 그리고 6년 뒤 그녀도 눈을 감았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전부가 되려고 하지 않았기에 죽을 때까지 함께할 수 있었다. 그녀는 사르트르와의 관계에서 더 고독했어야 했다고 고백했다. 호사가들은 이들의 삶에 흠집을 내기 위해 두 사람에게 닥쳤던 위기와 다양한 인물들과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관계를 파헤쳤다. 그러나 사랑의 통념들에 저항하기 위해, 서로에게 완벽한 자유를 허용하기 위해, 완전한 존재로 나아가기 위해 이들이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해야 했는지도 알게 됐다. 사르트르와 잠시 헤어져 있던 그녀는 파리 몽파르나스 묘지에 누워 있는 사르트르 곁으로 돌아갔다. “사랑하는 남자와 나란히 앉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삶이에요!”라고 말했던 보부아르는 늘 ‘여인들’이 끊이질 않아 온전히 독차지할 수 없었던 남자와 영원히 함께 있게 된 것이다.
- 2020-01-2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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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내섬에서 듣는 태고의 겨울바람 소리
- 그 섬에 서면 느리게 출렁이는 시간을 본다. 느릿한 바람 속에서 태고와 현재가 넘실거리는 것을 느낄 것이다. 아침이면 물안개가 피어오르고 가을이면 풍성한 갈대와 억새꽃이 군락을 이루어 눈부신 곳 , 생명이 살아 숨 쉬는 무인도 비내섬에서 알싸한 겨울을 맛보는 건 자신에게 때 묻지 않은 겨울을 선물하는 시간이다. 억새꽃 피어나던 섬으로 떠나는 겨울여행 충주에서 앙성면의 비내섬까지는 자동차로 약 30분 정도 달리면 나타나기 시작한다. 차창 밖으로 남한강 줄기와 함께 어우러진 섬이 보이고 벌써부터 가슴이 탁 트인다. 입구의 섬을 향한 다리를 건너서면 바로 자연적으로 형성된 사구 형식의 99만 2천㎡(약 30만 평)의 광활한 무인도가 펼쳐진다. 울퉁불퉁한 길에는 요즘 어디든 놓인 그 흔한 인위적인 데크길이나 여행자를 위한 친절한 안내문도 없다. 초입의 길 옆에 비내쉼터 하나 있을 뿐이다. 오지(奧地)와도 같은 비내섬의 자갈밭과 흙길을 따라 억새의 숲에 파묻힐 일만 남았다. 인적이 드물다. 한적함이 어울리는 섬이다. 언제까지나 덜 알려져서 늘 이랬으면 싶다. 숨겨놓고 나만 알고 싶은 곳, 그 섬에 들면 금방 자연 속으로 푹 잠기는 자신을 본다. 억새 사이로 난 부드러운 흙길에 사람의 발자국과 자동차 바퀴 흔적이 있다. 드넓은 갈대숲에 자동차를 세워놓고 취하는 조용한 휴식도 좋은 방법일 수 있겠다. 갈대와 억새꽃이 만발한 가을에 비해 겨울 들판에 서면 자연스럽게 차분함을 장착시켜 준다. 그 사이로 군데군데 서 있는 버드나무 뒤로 섬을 휘감아 도는 남한강 줄기가 흐른다. 산이나 들에서 주로 자라는 억새와 습지나 물가에서 자라는 갈대가 이곳에서는 사이좋게 공생을 한다. 사람들의 손 타지 않은 이런 풍경 덕분에 드라마 사극이나 사색적인 배경의 촬영지로 자주 등장하기도 한다. 최근엔 이곳 비내섬과 이 지역의 탄금호 무지개길에서 촬영된 배우 현빈과 손예진 주연의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 방송되고 있는 중이다. 비내는 갈대와 나무가 무성해서 비어(베어) 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또는 큰 장마가 지는 바람에 내(川)가 변했다 해서 비내라고 불린다는 말도 있다. 갈대숲을 지나던 마을 어르신이 “예서 뭐 볼게 있어서 이렇게 왔남? 하면서 가던 길을 익숙하게 지나가신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갈대와 억새가 무리를 이루어 일렁인다. 그 너머로 강변을 끼고 나지막한 산과 들이 배경을 이룬다. 그리고 멀리 몇 채의 시골집과 다 따낸 휑한 사과밭이 겨울 속에 오롯하다. 모든 것을 비운 사람의 멋을 떠올리며 꽃도 잎도 열매도 떨군 겨울 풍경을 본다. 우리 기억 속의 유년기의 마을 풍경처럼 아련하다. 이 모든 것이 제각각 따로 분리되어 보이지 않고 시간이 멈춘 듯 순하고 평화로운 정취로 눈에 들어온다. 발길 닿는 대로 옮기다 이토록 때 묻지 않은 이 섬에는 생태자원이 풍부하다. 람사르 습지 보호지역으로 관리할 가치가 충분하다는 지자체의 입장이다. 생물의 다양성과 멸종위기 야생 동·식물 서식·도래 지역, 지형·지질학적 가치를 위해 환경부에 비내늪의 습지보호지역 지정을 건의 검토 중이라고 한다. 하지만 군사 훈련과 캠핑 차량 통행 등에 따른 훼손이 아직 남아있는 문제로 알려져 있다. 발길 닿는 대로 이리저리 헤매듯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끝없이 호젓하다. 바스락거리며 흔들리는 억새 수풀 사이에서 길을 잃고 싶다는 생각조차 든다. 천천히 걷다 보면 간간이 들려오는 새 울음소리나 곤충들의 조용한 움직임이 숲의 정적을 깬다. 이곳이 계절마다 찾아오는 철새도래지이기도 하다. 비내섬 갈대밭의 자연은 우주만물이 공생하는 곳이었다. 이 지역에서 나고 자란 신경림 시인은 ‘갈대’를 이렇게 노래했다.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한겨울이다. 실내에서만 옹송거리다 보면 몸과 마음이 경직되기 쉽다. 하루 코스로 훌쩍 떠나볼 수 있는 곳 충주 비내섬을 향해 달려보자. 그 섬의 억새 수풀 속에 서서 아스라한 태고의 겨울바람 소리를 들어보라. 뒤엉킨 머릿속이 은은하게 평정된다. 그리고 차분한 겨울 추억의 결을 하나 더 보태는 날이다. -비내섬 : 충북 충주시 앙성면 조천리 412 △가볼 만한 곳 충주 ‘중앙탑’ 비내섬에서 자동차로 20분쯤 거리에 중원 탑평리 칠층 석탑(일명 중앙탑)이 있다. 넓은 잔디밭에 사적공원(史跡公園)이 멋지게 조성되어 산책을 하거나 휴식공간으로 더없이 좋다.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국보 6호 중앙탑이 시원하게 우뚝 선 공원엔 예술적 조각 작품들을 비롯해서 야외음악당, 음악분수대, 향토민속자료관 등 볼거리가 많다. 호수 쪽으로 걷기 좋은 코스 탄금호 무지개다리가 있고, 호수 저 편에 [대한민국 중심고을 충주(CHUNG JU KOREA)]이란 글자가 보인다. 이곳이 바로 이 나라의 중간 지점이다. 탑 주변을 벗어나면 그 옆으로 한옥이 보인다. 의상 대여소 '입고 놀까'는 중앙탑공원에서 인싸 되기 놀이마당이다. 이미 sns상에서 핫플레이스로 이슈가 되고 있다. 거길 나오기 전에 술박물관도 들러볼 만하다. 그리고 가까운 거리에 세계무술공원이 있다. *중앙탑: 충청북도 충주시 중앙탑면 탑평리 11 남한강 물길의 중심 목계나루, 그리고 종댕이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지만 그 옛날 남한강 수운을 따라 물류교역의 중심지가 되었던 충주가 전국 동서남북 교통의 요지가 되는 역할을 했던 엄정면 쪽의 목계나루터. 오늘날 그 가치를 살리고자 복합 문화공간이 형성되었고 목계나루의 옛 추억을 되살려 볼 수 있다. *목계나루: 충청북도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 산35-8 그리고 산책 코스로 좋은 충주호 종댕이길은 1~3코스로 30분에서 4시간까지의 코스의 트레킹이 가능한 행복한 둘레길이다. 2코스의 조망대에서는 해맞이를 할 수 있고 출렁다리도 있다. *충주공용버스터미널 농업기술센터 정류장에서 514번(용관,시외버스터미널), 515번(터미널,국민은행) 버스 타고 마즈막재 삼거리 주차장 하차. 그 외에도 시내 중심의 충주 호암저수지, 관아공원은 물론이고, 잘 알려진 탄금대와 이화령을 지나 멋스러운 한지박물관과 주변의 문경까지 냅다 달려 볼 수 있다. 하루나 이틀쯤 선비의 풍류가 흐르는 곳 충주에서 겨울여행을 즐긴다면 정감 어린 힐링의 시간이 될 것이다. 충주의 맛 뭐니 뭐니 해도 사과를 빼놓고는 충주의 맛을 이야기할 수 없다. 충주의 사과 작가로 유명한 강병미 화가는 말한다. 대학교 때부터 사과를 그리다 보니 운명처럼 사과의 고장 충주에 와서 살게 되었고 이곳에서 사과 그림 작업은 당연한 일상이라고. 충주시 농업기술센터와 농업회사법인 페트라가 공동 개발한 사과빵이다.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주문하면 오븐에서 직접 구워 식혀서 포장해 준다. 호두과자에는 호두가 들어있듯 사과 빵에는 당연히 충주 사과가 들어간다. 부드러운 빵 속에 상큼한 사과 필링이 입안 가득 퍼지는 맛, 따뜻할 때 더 맛있다. *애플스토리 : 충북 충주시 지현동 963 (충주휴게소, 수안보 휴게소, 주암휴게소, 수안보 상록호텔에서도 구입할 수 있다) 가을에 수확한 사과는 사시사철 먹을 수 있도록 저장도 하지만, 충주에서는 다양한 제품으로도 나온다. 사과 한과, 사과 손약과, 사과 강정 외에도 사과 국수와 주스나 와인 등이 있다. 충주 버스터미널 안에 충청북도 우수 판매전시장이 있어서 귀갓길에 구입할 수 있다. 맛있는 한 끼 올갱이(다슬기)요리는 주로 충주와 괴산에서 먹을 수 있는 맛이다. 푸르스름한 올갱이국이 일품이다. 그리고 충주 부근으로 드라이브 삼아 나가면 그 산에서 나는 산채비빔밥집이 많다. 직접 발효한 효소를 넣은 양념장과 청포묵을 넣은 비빔밥의 맛. 만일 여유있게 하루나 이틀쯤 머문다면 숙소는 비내길에서 20분 이내의 가까운 거리에 앙성 탄산온천지역이 있다. 수안보 온천도 멀지 않아서 온천욕을 하며 편안한 하룻밤을 보낼 수 있다. 겨울여행의 알찬 마무리다.
- 2020-01-06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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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영향력을 끼치며 살고 싶습니다”
- 이근희 대표는 체계적으로 회원들을 돌아보고 독려하면서, 가시적인 성과를 내게 해주는 리더로 느껴졌다. “우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다 운명인 거죠. 세듀50플러스에 모인 우리 모두가 잘되어야죠. 그렇기 때문에 책임감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힘을 좀 주고 싶었어요.” 50플러스남부캠퍼스 커뮤니티지원단에 선정되면서 그나마 기운을 회복할 수 있었다고 했다. ‘단체설립프로젝트’에 떨어졌을 때 뿔뿔이 흩어질 수도 있었다. 그녀가 살면서 알게 된 진리는 주는 게 얻는 것이었다. “저는 늘 남한테 인심 쓰듯 도와줬다고 생각했는데, 항상 뒤돌아보면 제가 받은 게 더 많은 거예요. 아주 많이 힘들던 시절 저를 돌봐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에 제가 있는 거죠.” 번역학 박사로서 한국에서 교수생활을 하던 이근희 대표는 마흔아홉에 미국 유학길을 택했다. 한국에서는 지는 나이라고 생각해 새로운 삶을 개척하고 싶었단다. “큰아이는 뉴욕에 있었고 작은아이와 같이 갔어요. 아이와 저를 위한 길을 트고 싶었어요. 그런데 교수가 다시 학생이 되어야 한다는 게 심정적으로 너무 힘든 거예요.” 불안한 상황에 마음이 힘들었는지 건강검진에서 암이 두 개나 발견됐다. 자궁내막암과 갑상선암이었다. “비행기 표도 다 끊어놨는데 어쩌겠어요. 당장 급했던 자궁내막암 수술을 받고 3주 만에 미국으로 갔다가 겨울방학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갑상선암 수술을 받았죠.” 다행스럽게도 항암치료는 안 받아도 되는 상황이었다. “웃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안 아픈 건 아니에요. 아는 사람도 없고 말도 잘 안 통하는 미국에서의 8년을 저는 광야생활이라고 표현하죠. 제 전공도 아닌 회계세무사 시험을 7전 8기로 통과했어요. 아픈 사람에게 미소와 따뜻한 말 한마디 해주면 그 사람이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을 미국 있을 때 깊이 느꼈어요.” 가령 아이와 함께 수영대회에 나갔을 때 기립박수를 쳐준다든가, 외딴 곳에서 만난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주고 마음을 전한다면 그 사람은 자신감과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단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 세심한 관심이 없었다면 지나쳤을 뇌종양을 또 발견해 1년간의 투병생활을 했다. “정말 사는 게 굴곡의 연속이지만 저는 여기 있습니다. 어제보다 나은 선물을 주는 사람이 되자. 제 모토예요. 세듀50플러스 사람들을 운명처럼 만났으니 지금까지 느끼고 살아왔던 것을 알리고 확산하고 싶습니다.”
- 2019-12-26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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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수는 꿈에도 없었는데, 운명이란 게 있는 듯해요”
- 1955년생, 베이비붐 세대로서 1978년에 데뷔해 올해로 예순다섯 살. 그러나 이치현의 모습에서 그 세월을 느끼는 건 불가능하다. 1980년대를 휘어잡던 순간의 ‘이치현과 벗님들’ 리더 이치현이 세월을 뛰어넘어 그대로 내 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여전한 젊음과 변치 않은 감미로운 목소리, 그리고 음악적으로는 더 성숙하고 테크니컬해진 그의 라이브를 보면 시간을 거꾸로 먹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다. 심지어 신곡을 준비하면서 내년부터는 ‘전투를 치르듯’ 전국 라이브 투어를 시작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그를 만나 그의 음악과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얘기를 나눠봤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밴드로 올해로 벌써 41년째 롱런 중인 이치현과 벗님들은 흔히 ‘한국의 비지스’라 불린다. ‘당신만이’, ‘사랑의 슬픔’, ‘다 가기 전에’, ‘집시여인’ 등의 히트곡들은 이국적이면서도 세련된 밴드 사운드의 진가를 보여주는 곡들이며 여전히 애청되고 애창되는, 시대를 초월한 명곡들이다. 이치현과 벗님들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치현에게는 여전한 젊음과 특유의 우수가 있었다. 그 말을 듣자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수에 젖었다기보다 ‘이 일이 내가 맞는 건가,(웃음) 어쩌다 이렇게 됐지?’ 하며 생각이 많아서 그런 표정이 나오는 거죠.” 반쯤은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그는 사실 가수가 될 꿈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만든 명곡들과 그의 감미로운 음색을 생각하면 의외의 얘기였다. 어쩌다 가수가 된 기타리스트 “내가 음악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산타나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연주자가 활동하기가 어렵잖아요? 더구나 유명하지도 않았으니 누구에게 곡을 줄 수도 없었고. 그럼 어쩔 수 없이 내가 불러야지.(웃음)” 산타나는 1960년대부터 활동한 라틴 록 기타리스트의 전설이다. 사실 잘 살펴보면 이치현이 그에게 영향을 받은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탁월한 기타리스트로서 여전한 실력을 유지하고 있는 점, 대표 히트곡 ‘집시여인’, 그리고 그의 최근 라이브에서 들려주는 노래들이 라틴 스타일로 더욱 세련되게 편곡됐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라틴 록과 밴드 사운드에 기반을 뒀지만 그가 한 가지 장르만 했던 것은 아니다. 팝 발라드에서부터 신스 팝, 로큰롤까지 다양한 음악적 접근을 해왔다. 그룹사운드를 하면 한 장르를 계속 파야 하지만, 그보다는 음악적 변화를 시대에 따라 맞춰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음악 그만둘까’ 싶었던 순간들 그렇게 대중가요 가수이지만 밴드 사운드에 기반하고 있는 그가 끊임없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밴드를 뚝심 있게 이끌어간다는 것은 외국처럼 장수하는 밴드가 없다는 점을 봐서도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위기는 자기 자신과의 갈등에서 와요. 경제적인 위기는 능숙해요. 워낙 바닥을 치며 올라갔고 무명생활도 오래해서.(웃음) 가장 힘든 게 ‘내 스타일의 음악을 계속해야 하나? 그만둘까?’ 하면서 내 음악에 한계를 느낄 때죠.” 그가 자신의 음악에 한계를 느끼는 것은 시대적인 문제와도 결부된다. 라이브 밴드를 추구하는 음악인들이 설 자리가 많이 사라졌고 가요계의 주류도 밴드 사운드를 유지하기에는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변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얼마 전 7080세대에게 논란이 됐던 KBS의 ‘콘서트 7080’ 폐지 건이 그렇다. 그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콘서트 7080’이 폐지된 데는 물론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죠. 7080시절 음악했던 사람들을 막상 찾아보면 지금 음악을 안 하는 사람들이 더 많거든. 새 앨범을 내지 않고 ‘추억팔기’만을 하는 가수들이 출연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시청률이 떨어지게 됐고요. 음악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어야 하고 뮤지션은 신곡 활동도 꾸준히 병행해야 하잖아요.” 지나친 쏠림 현상 안타까워 요즘 사회나 기업체들을 보면 7080세대가 주류가 됐다. 이치현과 같은 시대의 가수들이 각광받는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최근 ‘미스트롯’의 성공으로 트로트가 7080세대의 음악적 대세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 물결이 너무 거세다 보니 쏠림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라이브 밴드가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현실에 그는 더욱 힘들어하고 있었다.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인 차원, 음악적 현실에 대한 고통이었다. “시대의 변화이겠지만, 요즘 가수들은 거의 탤런트가 돼야 해요. 사람들에게 어필해야 하고. 난 그러고 싶진 않거든요. 내 음악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꾸준히 하고 싶은 거니까요. 그래서 억지로 비즈니스를 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러다 보니 이 모양이지.(웃음)” 변화된 음악 현실에 방황도 깊어졌다. 그는 작년부터 올해까지 2년간 계속 방황했다. “작년 가을과 겨울 사이 미국을 네 번 왔다 갔다 했어요. 한국에 있기 싫어서 미국에서 공연하려고요. 환경이 안 변하면 내가 못 살겠기에. 곡은 안 써지니 밤마다 괴롭고…. 내가 해야 할 음악의 장르를 못 잡는 거예요. 안 그랬거든요.” 소극장 투어로 팬 저변을 넓히다 그래도 그는 마침내 결론을 냈다. ‘좋은 경치를 봤다고 좋은 곡이 나오는 건 아니다’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내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는 중이다. 우선 2016년에 내놓은 정규 앨범 14집 이후 오랜만에 싱글 앨범을 제대로 준비해 선보일 계획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도전에 나섰다. 바로 소극장 공연 투어다. “한 해가 끝날 때 되면 ‘올해 잘 보냈나?’ 싶죠. 나이가 드니 비보도 많이 듣게 되고, 시간도 확 가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버킷리스트는 아니더라도 머릿속에 있는 걸 실행하자고 결심했어요. 그게 내년 3월부터 시작할 전국 소극장 공연이죠. 깨질 때도 있고 힘든 상황도 있겠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부딪쳐볼 거예요.” 그는 이미 1984년부터 5~6년간 무려 1000회가 넘는 소극장 공연을 가진 바 있다. 즉, 소극장 무대의 맛과 즐거움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사실 그래서 작년에는 그런 소극장 무대를 다시 한 번 부활시킨 적도 있다. “관객들이 예전에는 학생들이었는데 이젠 다들 어른이 되어 주차장이 없어서 힘들어했는데(웃음) 공연은 꽉 차서 끝났어요. 그분들이 말하길 불편해도 시간이 지나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소극장에서 얼굴 표정을 다 읽고 땀 흘리고 그러는 걸 보면서 함께 공연하는 거니까요.” 음악은 밥 먹고 숨 쉬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본 그의 성정에 대해 생각해보면 짐작 가능하겠지만, 그는 앞으로 나와서 ‘나대는’ 성격이 전혀 아니다. 자신의 성향과 다르게 행동하는 걸 너무 싫어하는 쪽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성향이 남아 있기에, 그의 젊은 시절은 지금보다 더했을 수밖에 없다. “가수는 꿈에도 없었는데, 운명이란 게 있는 듯해요. 제게 음악은 밥 먹고 숨 쉬는 것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어요. 원래 남 앞에 못 서는 성격인데도 한 거니까요. 그래서 1984년에 4집 앨범 녹음하며 방송을 접고 대학로에 들어갔죠.” 그의 소극장 공연은 대박이 났다. 그리고 가수로서의 즐거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가 인간적으로 변화하게 된 계기였다. “물론 여대생들 앞에서 1000회를 공연한다는 게,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런데 그때 성격이 변했어요. 대화하는 법을 억지로 힘들게 익힌 거예요. 지금도 저는 제가 봐도 어색해요. 그래서 방송 녹화한 게 있으면 가족들하고 안 보죠. 나 혼자만 보면서 반성할 게 뭐 있나, 왜 저랬을까 합니다. 그게 본 성격인 거 같아요.” 무대와 객석은 구분되는 게 품격 그는 프로답게 자신이 대중음악인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터뷰 내내 계속해서 ‘음악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말한 것과도 관련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느리긴 해도 끊임없이 자신을 대중과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 노정이 어쩌면 이치현이 지속적으로 발전한 근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저는 좀 까다로워서 무대 같지 않으면 안 올라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작년부터 후배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라이브 카페 같은 데서 공연하기도 했죠. 당연히 환경이 열악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좋아하고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 잘되는 걸 보니 거기서 매력이 느껴지더라고요. 대중과 마주하되 자신의 격만 안 떨어뜨리면 되겠다 생각한 거죠. 물론 무대와 객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게 품격이니까요.” 칠순이 다가오는 나이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고민하며 밤잠을 설치는 그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역시 팬들이다. 그의 팬클럽은 회원 수 1500여 명이 가입한 ‘늘벗회’다. 1980년대부터 꾸준히 그를 지지해준, 역사가 깊은 탄탄한 팬들로 그의 공연에 항상 힘이 되어주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즐거움이자 위안 아닐까. 다시 태어나면 건축가가 될 것 음악이 운명이라는 말처럼, 그의 딸 둘도 음악과 관련 있는 일을 하고 있다. 딸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행복한지 목소리가 바뀌었다. “첫째 딸은 플루트를 해요.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와서 올해 동창하고 결혼했죠. 결혼 안 시키려 했어요. 들어간 돈이 얼만데.(웃음) 사실 재밌게 살고 있어요. 둘째도 원래는 음악하려고 했는데 너무 힘들어해서 음악심리학으로 바꿨어요. 작은애는 지 편한 대로 자유롭게 살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과 가족들 모두가 음악과 관련이 있지만, 정작 다시 태어나면 음악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음악은 본인과의 싸움이 너무 심해요. 다시 태어나면 건축가가 되고 싶어요.” 건축가라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그는 중학교에서 미술 관련 상을 휩쓴 기대주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예고에 진학하지 못해 미술인으로서의 꿈은 접혔다. 하지만 아직 미련이 남아서 지금도 외국에 나가면 건물의 건축 재료를 살펴보고 두들겨본다고 한다. “음악은 사람을 너무 좁게 만들어요. 물론 음악의 세계는 굉장히 넓죠. 그러나 음악인으로서의 삶은 좁아요. 음악 대신 빌딩 하나 지어보고 싶고 그렇죠.(웃음)” 아름다운 황혼의 시간을 기다린다 이치현의 가족들 중 음악과 관련이 없는 사람은 그의 아내다. 교육학과를 나온 아내는 도서관에서 살며 자녀들 교육에 평생 매달렸다. 요즘 그는 부쩍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아내에게 못해준 게 너무 많아요. 젊었을 때는 같이 못 놀아줬고 ‘여보, 여보’ 하며 살갑게 다가가는 성격도 못 되고…. 우리나라 부부들이 나이를 먹으면 각자 놀잖아요? 그런데 유럽에 가보면 서로 목도리를 해주며 손잡고 다니면서 카페에 앉아 다정하게 대화하는 흰머리의 노부부가 많아요. 그래서 저도 칠십부터는 같이 손잡고 다니면서 외롭지 않게 해줘야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음악은 같은 감성을 함께 느끼는 것이라는 확고한 철학을 가진 그는 감성과 추억으로 버무리고 채워질 소극장 라이브를 준비하면서 벌써부터 신이 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거듭 아내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아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그리는 듯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우선 그가 도달해야 할 음악적 성공의 지지자로 응원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할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가 아내와 함께 만들게 될 아름다운 황혼을 기대한다. 그 희망이 오늘 이치현을 또 설레게 할 것이다.
- 2019-12-19 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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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캔버스 앞에 앉으면 행복하고 설렙니다”
- 벽에 그림 하나 걸어두고 싶었던 시절이 있었다. 추상화를 가르쳐준 스승은 더는 알려줄 게 없으니 스스로 헤매며 길을 찾아보라 했다. 그 후 20여 년의 세월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가끔 붓질이 그리웠지만 자신이 없었다. 더러는 행복해서, 더러는 안간힘을 쓰며 사느라 그림과 점점 멀어졌다. 그러나 운명을 벗어날 수 없었던 걸까. 오영희(吳英姬·67) 씨는 붓과의 오랜 별거를 끝내고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았다. 평온했던 시절도, 고통으로 발버둥쳤던 마음도, 거센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도 모두 ‘내 삶의 무늬’임을 지극하게 받아들이며. 오영희 작가는 자주 까르르 웃었다. 웃음소리가 쨍한 가을햇살처럼 환했다. “고우시다”고 하자 나이 들어 누가 그런 말 해주면 얼굴이 아니라 마음이 예쁘다는 소리로 들어야 한다며 슬쩍 귀띔을 한다. 성실하게 방황을 끝낸 자의 말씀이 저러할까. 군더더기가 없다. 한낮의 햇볕은 거실로 한바탕 쏟아졌고, 캔버스 아래 플라스틱 바가지와 붓과 물감들은 내내 그리워하던 무엇처럼 품에 안겨왔다. 그녀는 커피를 내려 거실 테이블에 올려놓은 뒤 작은방 문을 열었다. 방 안 가득 쌓여 있는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다. “제가 다작(多作)하는 편인데, 꽤 많죠? 붓을 들면 밤을 꼬박 새우는 날도 종종 있답니다. 40대 초반에 친구와 함께 추상화를 배웠어요. 그때 선생님이 스스로 헤매면서 방향을 찾으라 하셨는데 그 뒤로 작업이 잘 안 되더라고요. 재능이 없나보다 했죠. 그 시간을 잘 이겨내고 유명 화가가 된 친구가 작년에 서양화가 조국현 선생님을 소개해주셨어요. 덕분에 제 세계를 빨리 찾은 것 같아요.” 20여 년 만에 다시 든 붓 젊은 시절, 그녀는 무작정 그림이 좋았다. 화가는 늘 동경의 대상이었다. 집 벽에 그림 한 점 사서 걸어놓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럴 때마다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배우고 갤러리 전시회를 다니며 갈증을 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한민국미술대전 대상작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추상화였다. “친구랑 거의 조르다시피 해서 그분께 비구상을 배우기 시작했어요. 그런데 하루는 10분 안에 100호를 다 채워보라는 거예요. 당황스러웠죠. 그때까지만 해도 고지식하게 그림은 붓으로만 그려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제 고정관념이 완전히 깨져버린 날이었죠. 그리고 마치 붓에서 풀려난 기분이었다고나 할까요. 그때부터 수세미, 막대기, 삼각자, 약병 등 온갖 것을 도구로 활용했어요. 요즘은 손주들 장난감을 많이 활용하고 있답니다.” 그러고 보니 거실에는 물감이 묻은 물건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심지어 싸리비와 커피 알갱이까지 도구로 활용한다니, 문득 “새로운 도구는 작가의 창의력을 확장한다”는 누군가의 말이 떠올랐다. 그녀의 작품은 점, 선, 면이 반복되면서 마치 끊임없는 대화를 하듯 리듬감 있게 화면을 어우른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 재료와 도구의 경계를 허물어 색의 질감을 높이면서 풍부한 스토리를 만들어내 관객들의 관심을 많이 받고 있다. 리듬감과 스피드와 경쾌함은 그녀의 작품을 읽어내는 하나의 키워드다. 지난여름에는 제9회 대한민국청춘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조국현 화가의 권유로 출품했는데, 큰 상을 받은 것이다. “조 선생님 화실에는 일주일에 한 번 갑니다. 미술계 돌아가는 얘기도 듣고 제 그림도 보여드리면서 조언을 얻고 오죠. 선생님이 다른 사람한테 제 칭찬을 하셨대요. 혼자 막 터지듯 그리는 그림이라면서 아주 감각적이라고요. 이런 감각은 타고나는 거지, 노력하거나 연구해서 되는 게 아니라면서요. 저야 잘 봐주시니 감사하죠. 용기도 나고요.” 그녀는 최근 초대전도 하고 홍콩과 일본 등지에서 열리는 교류전에도 참여하면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한동안 몰아치는 폭풍 속에 서 있었다. 큰 고통 뒤에 받은 선물 2008년, 그녀는 남편에게 사고가 생겨 한동안 힘든 시간을 보냈다. 병원 실수로 일어난 일이라 그 충격은 더 컸다. 그래도 남편 얼굴 마주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게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처음에는 죽을 만큼 힘들었다. 맷돌같이 무거운 시간들이 흘러갔다. 나을 병이 아니라는 의사의 말도 귀에 전혀 들어오지 않았다. 정성을 쏟는 만큼 남편 몸이 좋아지리라 생각했다. 결국 그 마음이 더 이상 갈 데가 없을 때 포기가 됐다. “아무것도 원하는 게 없는 상태가 자유라는 걸 그때 알았어요. 내려놓고 나니 새털같이 가벼워지더군요. 불행한 것보다 행복한 게 더 많았는데 그때는 왜 그걸 몰랐을까요. 고통을 감수한 뒤에 깨닫게 된 거죠. 예전에는 다 가진 여자라서 감사한 줄도 모르고 살았어요. 요즘은 이리 봐도 감사하고 저리 봐도 감사한 일 천지예요.” 고통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한다. 선물도 하나씩 들고 온다. 그녀는 억울해하는 대신 ‘내게 맡겨진 숙제이니 기꺼이 하자’라고 생각했다. 그러자 혼돈의 시간이 사라지고 더 깊은 사랑이 찾아왔다. “병원으로 남편 만나러 가는 날에는, 혹여 제 손에 무거운 게 들릴까봐 ‘오실 때 아무것도 사오지 마세요’ 합니다. 어느 날은 ‘당신이 보내주신 영양제가 도착했어요. 고마워요. 허리 통증은 좀 어때요?’ 하고 안부를 물어요. 손주들이 예쁜 짓을 할 때도 ‘우리 외손주 네 마리가 당신 닮아서 머리가 기가 막히게 뛰어난가봐요’ 합니다. 저는 지금까지 남편한테 과분한 사랑을 받고 살았어요. 이제는 제가 그 사람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로 만들어주고 싶어요.” 두 사람은 고려대학교 선후배 관계. 학교에 다닐 때는 모르고 지냈는데 졸업 후 인연이 돼 결혼까지 이어졌다. 남편 이발도 해주고 손발톱 깎아주며 소소한 얘기를 나눌 때면 ‘우리가 참 특별한 사랑을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단다. 소풍 와서 놀듯 산다 다시 붓을 들었을 때 어떤 그림이 나올지 궁금했다는 그녀는 색채가 맑고 밝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힘든 시간을 그림으로 잘 승화했다고 말하는 지인들도 있다. “예술은 고통이니 뭐니 하는 생각은 해본 적 없어요. 그런 게 있다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겠죠. 저는 작업할 때 계획을 세우거나 그러지 않아요. 그때그때의 감정에 집중합니다. 추상화에도 질서는 있어요. 혼돈 속의 질서, 우리네 삶과 참 많이 닮았죠.” 사진 촬영을 할 때 햇빛이 만들어낸 무늬가 스크린에 비치자 그녀는 홀린 듯 스마트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었다. 마치 큰 보석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귀한 것들 앞에서 예민해지는 그녀의 더듬이는 아직 젊어 보였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그녀에게는 어떤 의미일까. “잘 익어가야 하는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더러 실수를 해도 부족한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다른 사람의 허물도 너그럽게 볼 수 있어요. 나이 들어서도 여전히 질투하고 샘이나 내면서 사는 사람, 비교하면서 사는 사람을 보면 정말 안타까워요. 이제부터는 향기롭게 익어가야 해요.” 그러고 보니 벌써 칠십을 코앞에 두고 있는 그녀다. 건강하게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 정신이 번쩍 든단다. 그렇지만 절대 무겁지 않게, 소풍 와서 놀다 가는 기분으로 살려 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죽을 날이 앞으로도 많이 남았다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누구든 이 무대를 떠날 날이 오지 않겠어요? 앞으로 제 맘대로 몸 움직이며 살 수 있는 시간이 10년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동안 고마웠던 사람들 많이 만나서 웃고 지내려고요. 나이 들면 ‘감사, 봉사, 밥사’가 최고라는데, 저는 ‘밥사’ 정도는 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웃음)”
- 2019-12-0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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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나? 산에서 배우는 게 잘 사는 길임을
- 산에 미쳐도 단단히 미쳐 살았다. 그러니 일이 터질 수밖에. 주목할 만한 기록이 나왔고 사람들은 갈채를 보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이라, 미치지 않고서 도달할 길이 없다. 선무당처럼 대충 미쳐서는 히말라야 고봉을 오를 수 없다. 지구상의 극한적 험지인 세 극지(히말라야, 남극, 북극)를 찾아 누빈 탐험가 허영호(65). 그의 격렬한 모험이 거둔 성과가 경이롭지만, 스스로 선택한 일을 향한 온전한 몰입으로 삶을 만족스럽게 끌어온 성취는 더욱 놀랍다. ‘온전한 몰입’이 있는 인생이라는 게 어디 시중에 흔하던가. 일찍이 소년기 때 동네 산꼭대기에 오르는 쾌감을 맛본 게 등산에 빠진 계기였다지. 군대를 다녀온 뒤엔 인생을 몽땅 산에 걸기 시작했단다. 서막은 그저 그렇게 자연스러웠으나, 이후 산악 역사에 두고두고 마르지 않을 이름을 등기했으니 허영호의 행장은 사실상 비범한 것이었다. 허영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83년, 히말라야 마나슬루를 산소통 없이 단독 등정하면서였다. 마나슬루는 1972년, 돌연한 산사태를 일으켜 한국 산악인 16명의 생때같은 목숨을 앗아간 악명 높은 고봉이다. 1987년 12월, 허영호는 다시 기세를 돋웠다. 세계 등반사상 세 번째로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에 성공했던 것. 이것으로 마침내 세계적 산악인의 반열에 올랐다. 이후 1994년엔 남극점을, 1995년엔 북극점에 도달했다. 진기한 드라마를 연속 상영한 셈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은 허영호를 ‘7대륙 최고봉과 남극점, 북극점 도보 탐험에 성공한 인류 최초의 탐험가’로 기록하고 있다. 이쯤이면 역사적 인물이다. 역사에 남는다는 것. 허영호는 그게 매우 기쁘다. “나는 실로 꾸준히 세계적인 것에 도전해왔다. 매번 엄청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모험에 나섰다. 가치 있는 도전이라는 것, 역사를 가치 있게 만든다는 사실에 고무되었다. 세계적인 역사를 만들지 못하는 가치 없는 도전이란 말짱 꽝이지 않은가.” 역사에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강렬한 집념. 그게 모험에 나서게 했다는 얘기인가? “극지에 도전하는 모험은 무섭고 고통스러운 과정의 연속이다. 목숨을 걸고 하는 행위다. 그러나 역사에 이름이 남는다는 건 고귀한 일이지 않은가.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 등반을 죽기 전에 완료하겠다는 게 나의 지향이었으며, 그게 모험에 나서게 하는 힘이었지.” 세상의 위업들은 맹렬한 명예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당신에게서도 강한 명예욕이 느껴진다. “명예, 명망에 대한 기대는 자연스럽게 찾아오더군. 그러나 명예라는 건 결과적으로 오는 것이지 원한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난 최선을 다했을 뿐이다. 백지상태인 미답의 땅을 섭렵한다는 성취감, 극지의 신기한 자연 풍경에 대한 감동, 이런 요소 역시 나를 모험에 빠지게 했다.” 히말라야에 갔다가 주검으로 돌아오는 산악인들도 있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흔히 탄식한다. 공연히 위험한 등산을 자청, 하나뿐인 아까운 목숨을 허무하게 버리는 게 안타까워서. “프로 산악인들의 등반은 일반인들의 보편적인 등산과 다르다. 특유의 어떤 정신세계를 가지고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게 아니겠는가.” 아예 죽음을 각오하고 출발하나?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약해진다. 평범한 일상에서도 재앙이 벌어지는 게 인생이지만 여하튼 어디서건 살아남는 게 중요하지. 난 산이 좋아 산에서 죽을래! 이런 생각은 그야말로 바보에게나 어울린다. 나는 항상 죽는 일 따위는 내게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등반에 나섰다.” 죽을 뻔했던 무산소 등정 에베레스트는 이 산의 측량 전문가였던 영국인 조지 에베레스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원래는 ‘초모랑마’라는 티베트 이름으로 불린 산이었다. ‘세계의 어머니 신(神)’이라는 뜻으로 티베트인들은 예로부터 이 산을 숭배해왔다. 산악인들도 정신의 산, 신비의 영산으로 숭상하며 거룩한 사유를 펼치곤 한다. 생사 여부마저 산령(山靈)의 뜻에 달렸다는 식의 감상을 털어놓기도 한다. 허영호에게 이는 어림없는 생각이다. 내 목숨은 오직 내가 간수할 수 있을 뿐 그 무엇도 간섭할 수 없는 거라는 실사구시에 충실할 따름이다. 완벽한 사전 준비,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는 정신력, 팀을 통제하는 엄격한 규율. 그것들만이 사고를 피할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라 믿는다. 특히 원정 대원들의 관리에 추상같다. 인상에 쓰여 있듯이 평상시엔 온유하지만 등반할 때는 돌변한단다. 엄격하고 날카로운 독수리로 변하는 모양이다. 눈빛부터 사납게 바뀐다는 게 아닌가. 예측할 수 없는 대자연이 성깔을 부리면 한순간에 사고가 나기 때문이다. 해서, 군기반장처럼 엄한 규율로 대원들을 다그친다. 덕분에 단 한 사람의 대원도 다치지 않았으며, 이는 다른 원정대에선 찾아보기 드문 성과라고 한다. 그러나 위기 상황은 빈발했다. 벼랑에서 추락했고, 크레바스(빙하의 갈라진 틈)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했다. 눈사태에 휩쓸려 파묻혔다가 셰르파에 의해 구조되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죽음과 직면하기를 거듭했다. “1993년 4월, 무산소 등정으로 에베레스트를 횡단하며 비박할 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다. 산소 등반과 무산소 등반의 차이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크다는 걸 절감했다고. 가슴이 터져나갈 듯 고통스러웠는데 심장이 당장 멈출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었지. 하늘을 쳐다보며 절규를 했다고. 천신만고 끝에 38시간 만에 캠프에 도착, 비로소 물을 마실 수 있었지. 오열을 하면서.” 지독한 사경을 겪고도 또다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배짱이라니.(웃음) “나 이젠 다시는 산에 안 가! 그런 외침이 속에서 터지긴 한다. 아주 잠깐, 현장에서만.(웃음)” 기어이 정상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고난을 기꺼이 감수하며 자연에 도전하는 게 서구적 알피니즘의 전통이지만, 우리 선인들은 산을 그저 욕심 없이 편하게 노닐었다. 이게 더 수준 높은 산행 방식 아니었을까? “과학의 발달로 일찌감치 산과 바다로 당차게 진출한 서양과 달리 우리는 다분히 정적인 시선으로 자연을 바라봤다. 어릴 적에 부모님들은 흔히 자식에게 타일렀다. 산에 가지 말라고, 물가에 가지 말라고.” 우리 민족은 누가 말린다고 산수 간에 머물기를 포기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어쩌면 DNA에 이미 산야의 기질이 상속된 게 아닐까. 자연을 바라보는 관점이 서양과 사뭇 다른 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도 일찍부터 등산이라 일컬을 만한 장르가 존재했다. 혹자는 승려들의 입산을 등산의 효시로 보며, 혹자는 신라 화랑도의 유산(遊山)을 원조로 간주한다. 조선시대 중엽의 민화 중엔 밧줄을 타고 암벽을 오르는 모습이 있기도 한다. 이 희귀한 사례를 통해 도전적 차원의 등산마저 행해졌음을 유추할 수 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산을 몹시 애호해 산행을 즐겼다. 일테면 남명 조식 선생은 지리산을 16회나 오르내렸다. 사대부들은 등산이라는 개념보다 관산(觀山), 요산(樂山), 유산(遊山)이라는 코드로 산을 누렸던 것 같다. 오늘날 한국의 등산객들이 산을 즐기는 방식도 이와 꽤 유사한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지. 한국의 산은 스케일은 작지만 아기자기하고 정답다. 위험요소가 드물어 누구나 쉽게 오를 수 있다는 점도 매력이다. 얼마나 다행스러운가. 수많은 사람이 일상에서 쌓인 불만과 스트레스를 산에서 해소하고 있어 사회가 그나마 덜 시끄럽다고 봐야 하겠지.” 히말라야의 광막한 설산을 묵묵히 오르는 산악인들의 모습은 고행하는 수도승을 연상시킨다. “고행을 통해 목표를 성취하고자 한다는 점에선 수도승과 다를 게 없겠지. 그러나 산악인은 자연에 도전한다는 점에서 수도승과 다르다. 도전이란 정복을 겨냥하는 게 아니다. 인간이 어떻게 자연을 정복하나? 잠깐 정상을 딛고 내려올 뿐인데.” 에베레스트 고지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어떻던가? “아름답고 경이롭다. 그러나 너무 춥고 숨이 가빠 사실상 풍경을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텐트 밖으로 머리를 살짝 내밀고 밤하늘에 쏟아지는 별들에 놀라기도 하지만, 그게 잠시잠깐의 감상일 뿐이거든.” 등반 중에는 무슨 생각을 하나?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극한 상황에서도 산과 대화를 했던 것 같다. 거짓말하지 않는 자연에서 겸손을 배우고, 인내심을 기르고, 분노를 자제하는 능력을 얻었다. 이건 극지 등반에서의 일만은 아니다. 어디서건 자연을 가까이 하지 않으면 심성이 더 각박해질 수밖에 없다. 속세의 거친 인간관계에 상처를 받아 자살까지 하는 경우가 있지만, 산을 좋아하게 되면 달라지지. 어떻게든 사람을 자연으로 끌어내는 게 옳다는 거. 특히나 자녀들이 어릴 때부터 산을 경험하도록 만들어줘야 한다.” 탐험과 운명적 사랑에 빠진 종(種) 허영호는 지난 2010년, 대학생이었던 아들 재석과 함께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 또 한 번 매스컴의 관심을 샀다. 좌우간 산에서 배우는 게 인생을 잘 사는 비결이라는 생각. 등반에 인간과 인생의 모든 게 담겨 있다는 확신. 그는 그걸 널리 홍보하고 싶어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왜 아니랴. 인생에도 크레바스가 있고, 추락이 있으며, 눈사태가 있게 마련이지 않던가. 이 모든 요상한 난리블루스를 헤쳐 나갈 수 있는 힘과 안목을 산에서 얻을 수 있다는 얘기는 언제 들어도 신선한 뉴스가 아니고 뭐란 말인가. 허영호도 어느덧 늘그막에 접어들었다. 난다 긴다 하는 모험 고수이지만 이젠 체력을 고려해 자제하며 산다. 그러나 탐험을 멈출 방법이 없다. 좀 부풀려 말하자면, 그는 탐험과 운명적 사랑에 빠진 종(種)이니 말이다. 요즘은 경비행기에 빠져 산다지. 경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해 또다시 역사적 기록을 남기겠다는 웅장한 포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이미 오랫동안 경비행기를 타고 독도를 비롯해 국내 곳곳을 비행 훈련하며 세계로 비상할 날을 대비해왔다. 문제는 자금이란다. 스폰서를 잡아야 하는데 여의치 않다는 것. 남의 신세를 지지 않고 자력으로 탐험하는 방식은 실로 불가능한가? 매우 내성적인 성격으로 보이는 당신은 어디 가서 쉽사리 손을 내밀지도 못할 것 같다. “원정대를 꾸려 착수하는 극지 탐험에 어마어마한 자금이 들어가는 것을 무슨 수로 개인이 감당하겠나? 원정대 지원이 일방적 수혜도 아니다. 주로 등산 장비업체가 스폰서로 붙는데, 그들은 나의 원정 활동상을 비즈니스 마케팅에 활용하거든.” 직업이 탐험가인 당신에게 누가 월급을 주지? 가족을 어떻게 건사하나? “가족은 나에게 탐험보다 소중하다. 가족 생계를 등한시하는 산악인은 산악인의 자격조차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난 꽤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강연 초대를 자주 받았으며, 그게 무난한 생활 대책이 돼주었다. 사람들이 내게 가장 흔히 하는 질문이 뭔지 아나? 등반으로 돈이 생기느냐, 반사이익이 있느냐, 라는 것이다. 그러나 등반 자체는 무상(無償)의 행위일 뿐이다. 대신 강연료가 들어와 살 수 있었지.” 우리 사회가 나름 똑똑해지는 모양이다. 허영호를 강연장으로 끌어들여 경청을 하는 걸 보면. “글쎄다. 난 나를 비롯해 프로 산악인들을 더 활용해달라고 말하고 싶다. 가령 유능한 산악인들을 모아 특공구조대 같은 걸 만들면 자연재난이나 산악조난 구조에 크게 쓰일 수 있지 않겠는가. 119소방대만 고생시킬 게 아니라는 얘기다. 언젠가 국무총리 공관에서의 오찬에서 그런 취지의 제안을 했으나 소용없더라고.” 어디서나 일관하는 인생관이 있겠지? “노력하며 살자! 그거. 탐험하며 살다 보니 ‘자기 노력’이 인생 성공의 99%를 차지한다는 걸 깨닫겠더라. 행복이라는 것도 노력의 산물이지 않겠는가.” 평생 노력만 하면 무슨 재미? 잘 노는 데에서도 행복의 샘물이 퐁퐁 솟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긴긴 세월 극지와 맞붙었던 사람에겐 실없는 망상에 불과할지도 모르지만.
- 2019-11-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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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마스와 연말로 들뜨는 12월 추천 문화 행사
- ◇ 가야본성 칼과 현 일정 12월 3일~3월 1일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1991년 열린 ‘신비의 고대 왕국 가야’ 전시 이후, 보다 많은 자료와 연구를 통해 복원된 가야의 얼굴을 만날 기회다. ‘말 탄 사람모양 토기’(국보 275호)를 비롯한 국내외 주요문화재 1000여 점을 선보인다. ◇ 제13회 평창송어축제 일정 12월 21일~2월 2일 장소 강원도 평창군 오대천 둔치 송어 얼음낚시를 비롯해 송어 맨손잡이, 텐트낚시, 눈썰매, 얼음자전거 등을 즐길 수 있는 겨울 대표 축제다. 오대천에서 직접 잡은 송어를 맛보고, 다양한 겨울 놀이도 체험하며 즐거운 추억을 쌓아보자. ◇ 캣츠 개봉 12월 24일 출연 제니퍼 허드슨, 테일러 스위프트 등 뮤지컬 ‘캣츠’가 스크린에 펼쳐진다. ‘레미제라블’의 감독 톰 후퍼를 중심으로 브로드웨이 최고의 뮤지컬 제작진과 명배우들이 총출동해 원작 무대 못지않은 감동과 전율을 선사할 예정이다. ◇ 금난새의 크리스마스 선물 일정 12월 25일 장소 롯데 콘서트홀 한국을 대표하는 마에스트로 금난새의 지휘 아래 차세대 바이올리니스트 대니 구와 뉴월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하모니를 이룬다. 국내에서 만나기 힘든 비제 교향곡 C장조 1, 2악장부터 베토벤 운명 교향곡까지 감상할 수 있다. ◇ 리처드 용재 오닐 크리스마스 콘서트 ‘선물’ 일정 12월 25일 장소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비올리스트 리처드 용재 오닐이 오랜 시간 그를 찾아준 관객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물처럼 뜻깊은 무대를 마련했다. 이번 공연은 용재 오닐이 지닌 악기의 한계를 뛰어넘는 다채로운 레퍼토리로 구성해 특별함을 더했다. ◇ 호미곶 한민족 해맞이 축전 일정 12월 31일~1월 1일 장소 경북 포항시 해맞이광장 일원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호미곶에서 매년 12월 31일부터 새해 아침까지 열리는 축제다. 해넘이와 해맞이는 물론 버스킹 페스티벌, 마당놀이, 불꽃잔치, 먹거리 및 체험 행사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 2019-11-2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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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수를 담은 마음으로 얻지 못할 사랑이 있으랴
- 가을 억새꽃 군락과 습지의 이색적 경관을 즐기기 좋은 호반 둘레길이다. 대전시 동구 추동에 위치한 대청호자연생태관에 주차, 대청호자연수변습지와 억새꽃 군락이 있는 추동습지를 탐방한다. 호수 수위가 높을 때엔 둘레길 일부가 물에 잠긴다. 도보만이 아니라 차로 대충 둘러보기에도 적당한 곳이 대청호 오백리길이다. 해 기울어 노을빛 어릴 때, 호수는 비로소 생기를 띤다. 불그레한 잔광을 받은 수면에, 직격탄처럼 쏟아지는 한낮 햇살 아래에선 보이지 않던 색감과 물무늬가 아롱진다. 현(絃)의 진동처럼 섬세하게. 수묵화처럼 농담(濃淡)마저 입은 채. 호수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는 사람들이, 호수의 내향성에 감흥을 느끼는 사람들이 나타나는 것도 대개 이 시각쯤이다. 거기에 더 순수하고 더 고혹적인 풍경이 있다고 믿어서다. 물은 인간의 재주에 놀랄 것이다. 필요와 이용을 위해서라면 밀반죽 주무르듯 물길을 맘껏 가공하기를 서슴지 않으니. 대청호는 금강을 댐으로 막아 조성한 인공호수다. 물의 감옥이라 할 수밖에. 그러나 신생 호수는 불화하는 법 없이 순리를 좇았다. 인위의 사슬을 풀고 호수의 호수다운 본연을 생성했다. 타율에서 벗어나 어느덧 자율로 풍경과 생태를 펼쳐놓는 저 장엄한 물의 도가니. 이 호수 앞에서 사람의 삶은 옹색하다. 옷 하나 입는 일조차 남의 눈과 유행을 고려하는, 우리는 타율의 노예이지 않던가. ‘호반낭만길’은 25개 구간으로 이루어진 ‘대청호 오백리길’ 4구간으로 호수와 습지와 억새밭, 숲과 오솔길을 함께 즐길 수 있는 둘레길이다. 추동습지의 가을 억새꽃이 특히나 유명하다. 물가에 자라기에 물억새라고 한다. 꽃향 한 오라기 뿜을 줄 모르고, 그 무슨 곱디고운 형용을 지니지 않았으면서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어모은다. 군락의 장관, 그 은빛 억새꽃 물결에 사람들은 찬탄하는 것이다. 저만치 저 홀로 사는 억새를 본 적이 있는가. 서로 뺨을 비비고 서로 껴안아 촌락을 이루는 게 억새의 생리다. 무릇 모든 공생은 미덥다. 소나무꽃, 벼꽃, 오이꽃, 그리고 억새꽃의 공통점을 아시는가. 모두 ‘안갖춘꽃’으로 분류되는 꽃들이다. 대부분의 꽃은 암술, 수술, 꽃잎, 꽃받침, 이렇게 네 가지 요소를 구비한 ‘갖춘꽃’이다. 억새꽃은 꽃잎을 갖추지 않아 ‘안갖춘꽃’이다. 그렇다면 억새꽃의 섬약한 아름다움을 결핍의 미학이라 읽어도 무방하겠지. 꽃잎을 두르지 않고 피어난, 제정신 아닌 저 억새꽃들의 아우성을 일탈의 합창이라 봐도 좋겠지. 허공에선 자주 바람이 몰려와 가녀린 억새를 흔들어대지만, 끄떡없다, 억새꽃은 겨울을 지나서까지 시들망정 꺾이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몇 가닥 남은 백발로 퍼석퍼석 말라가면서 세상을 천천히 지나간다. 호숫가 오솔길에도 놀빛이 들이친다. 야트막한 야산을 에돌아 펼쳐지는 숲길이다. 나무를 만나면 구면처럼 늘 반갑다. 다정한 눈짓을 해오는 나무들의 품에 안겨 천천히 걸어드는 적막한 산길. 산길 밖으로는 연달아 호수가 보이고, 물 위에 뜬 수생식물과 물속에 반쯤 잠긴 버드나무들, 그리고 터무니없이 환상적인 작은 섬 두세 개가 보인다. 때 묻지 않은 순수와 단조롭지 않은 겹겹의 풍색으로 미묘하다. 여기에선 그 무엇도 모독할 수 없다. 그렇기에, 당신의 아름다운 연인을 이곳으로 초대하는 게 좋겠다. 방금 치른 부부싸움의 화해를 바라는 당신이라면, 짝과 함께 이곳의 순정한 풍경에 취함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 그대 노 저어 오오.” 가곡 ‘내마음’은 호수를 닮은 마음이면 얻지 못할 사랑이 없다고 노래하는 것 같다. 사랑이 괴로워지는 건 애욕에 휘둘린 마음 사이즈가 간장종지로 쪼그라들 때다. 호수는 크넓은 그릇이다. 수평으로 평등한 호수의 얼굴은 관용의 표정으로 빛난다. 물 깊어 좀체 방정맞게 요동칠 줄 모르는 수면은 엉뚱한 파란을 야기하지 않는다. 사랑이건 인생이건 노를 저어 도달하기 힘겨운 운항이지만, 호수처럼 안전한 행로라면 선혈을 흘릴 일이 없으리라. 다시 억새를 만난 건 호숫가에 숱한 게 억새여서다. 호수로 달려가는 세찬 바람을 따라 억새꽃들도 덩달아 일제히 고개를 튼다. 이 순간 억새는 따귀를 올려붙이는 힘을 느낄지도 모른다. 나를 부수고 깨뜨리려는 것들과 조우하지 않아도 되는 운명이란 세상에 없다. 서럽게 떨지 않고 존재하는 생명도 없다. 온몸으로 슬픔을 녹이는 춤은, 그래서 대안이다. 바람 많은 가을날, 호숫가 억새들의 출렁거림. 그마저 나의 망막엔 춤으로 각인된다.
- 2019-11-25 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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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잃어버린 시간으로의 여행
- 로마 시내에 있는 ‘포로 로마노’는 로마 제국의 번영을 상징하는 건축물이다. 돌과 기둥 몇 개만 남아있는 이곳이 로마 제국의 숨결을 느낄 수 있는 대표적 유적지가 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바로 시간을 넘나드는 우리들의 상상력 때문이다. 이곳에 입장하면 사람들은 제일 먼저 드라마나 영화에서 한 번 이상은 보았던 장면을 상상한다. ‘전쟁에서 승리한 후 포로 로마노 가운데 큰길을 행진하는 로마의 개선장군 행렬.’ 그때부터 사람들의 마음에서는 길 양쪽에서 뒹굴고 있던 돌들이 고대 로마의 공회당, 바실리카, 무녀의 집, 각종 신전으로 만들어진다. 지붕 골격과 기둥만 남은 폐허는 대리석으로 만든 아름다운 개선문으로 탈바꿈한다. 마음속에서 자유롭게 그려진 상상은 논증을 기준 삼아 과학적으로 복원한 모습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있던 것이 없어서 누릴 수 있는 감동이다. 고대 유적지를 만나는 일은 잃어버린 시간의 마력을 깨닫게 하는 시간이다. 백제는 국력이 회복되자 고구려의 위협으로부터 방어하기에는 좋으나 협소한 지역 때문에 부족한 면이 있던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수도를 옮긴다(538년). 그 후 123년 동안 사비(부여)에서 후기 백제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다. 늦가을에 떠난 백제 역사 유적지로의 여행은 ‘포로 로마노’에서의 경험처럼 과거를 ‘체험한’ 알찬 시간이었다. 부여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사비(부여)의 새 왕궁은 부소산 기슭에 세워졌다. 그래서 현재의 관북리 유적을 왕궁으로 보고 있다. 관북리 유적의 대표 유적은 왕과 신하들이 회의하던 중심 궁전인 ‘정전’으로 추측되는 대형 건물지다. 그 외에도 목곽 수조 2곳과 연못, 지하저장시설 등의 흔적들이 있다. 왕궁의 뒤편은 왕궁의 후원이자 비상시 방어성으로 사용된 부소산성이다. 천천히 왕궁터와 부소산성을 걸으면 백제의 기품과 기상을 만날 수 있다. 왕궁터에서 산성으로 가는 길 중간에 ‘사비도성 가상체험관’이 있다. 이곳에도 잠시 들러 관람과 가상 체험을 하면 백제 문화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산성 내부에는 낙화암과 고란사 등 백제의 전설과 흔적들이 곳곳에 있다. 부소산성에서 가장 유명한 3천 궁녀의 전설지인 낙화암으로 갔다. 낙화암은 금강의 부여 지역 구간 이름인 백마강가에 있는 높이 40m의 바위 절벽이다. 직접 가서 보니 3천 명이 떨어져 죽을 정도가 되는 지형은 아니었다. 절벽 위에 있는 백화정에 앉아 유유히 흐르는 백마강을 보았다. 3천 궁녀의 이야기는 기록에 없는 과장된 이야기로 전해지는 전설이다. 하지만 확인 안 된 그런 이야기에 대한 의구심보다는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아름다운 이야기들도 몇천 년 후까지 전해지는 전설로 남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백제의 품격 정림사지 부여에는 백제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명소로 정림사지 박물관이 있다. 중국에서 들어와 일본에 영향을 준 백제 고유의 불교 문화와 정림사지에서 출토된 유물을 중심으로 전시하는 박물관이다. 박물관 옆에 있는 정림사지는 사비(부여)의 중심부에 있는 사찰 터로 백제 사찰의 특징인 1탑 1금당(절의 본당) 양식으로 지어졌다. 또한, 백제의 독창적 기술인 와적기단을 적용하였다.(※ 와적기단: 건물터를 반듯하게 다듬은 다음에 터보다 한 층 높게 쌓은 단) 사찰 터에 있는 정림사지 5층 석탑은 국보 제9호로 백제 고유의 양식을 갖추었다. 석탑은 목탑의 구조적 특징을 보여주는 탑으로 높이 8.3m에 완벽한 균형미와 비례미를 갖추고 있다. 안타까웠던 것은 석탑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 기념 내용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정림사가 백제 왕조의 운명과 직결된 중요하고 상징적인 공간으로 존재했음을 말한다. 부여시대의 백제가 강대국은 아니었지만, 탑에 새겨진 글씨를 보는 마음은 씁쓸했다. 여행이 아름답고 좋은 것만 보는 것은 아니다. 아름답고 빛나는 것들도 포화상태가 되면 감도가 떨어지고 피곤해진다. 그래서 가끔은 부끄러운 과거도 보고, 이름 모르는 작은 마을도 다니고, 도시의 뒷골목도 다녀 보아야 한다. 오후의 햇살이 뉘엿뉘엿 넘어가는 가을날에 빈 공간이 많은 정림사지의 가운데에 섰다. 이 넓은 터에 모든 것이 있었던 한 때를 반추해 보았다. 지금은 없는 것들이 한때는 빛났었다는 것을, 지금 빛나는 것들도 언젠가는 소멸하리라는 것을. 가을의 끝 무렵에서 만난 부여의 오랜 역사 유적지들은 나에게 성찰의 공간이 되었다. ▪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3, 77. ▪ 정림사지 박물관: 부여군 부여읍 정림로 83.
- 2019-11-21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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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생의 쓴맛 안엔 보약도 들어 있다
- 애석한 사실 하나 귀띔하고 그의 귀농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귀농 7년 차. 농사도 살림도 어언 자리 잡힐 만한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문기운(60) 씨는 아직 가시밭길을 걷고 있다. 자나 깨나 진땀을 흘리는 것 같다. 화살을 쏘았으나 여태 과녁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속사정을 모르는 남들은 일쑤 ‘귀농우수사례’로 치지만, 사실은 실패 사례에 가깝다는 게 아닌가.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이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세월이 줄레줄레 길어진다면? 안간힘을 다했으나 자꾸 스텝이 꼬인다면? 기세가 꺾일 수 있다. 심장을 쿵쾅거리게 했던 초심의 열정이 얼어붙을 수 있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고난을 차라리 디딤돌 삼아 맥락을 잡아간다. 심술궂은 운명아, 넌 그래라, 난 내 길 간다! 그런 태세로. 고난과 정면으로 독대해 희망의 불씨를 지속하는 일. 인생의 요점을, 그는 그리 생각하는 것 같다. 시골에서 누리는 ‘인생 2막’. 도시생활의 중압과 불쾌로부터 벗어나 경치 좋은 산골에서 한가하게 노니는 일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오전엔 운동 삼아 약간의 노동을 하고, 오후엔 책을 읽는다. 밤이면 두릿두릿 돋아나는 별들과 교신하며 영속하는 가치를 생각한다. 이런 삶, 그 무엇보다 이상적이지 않을까. 그러나 문기운 씨는 그런 식의 삶에 들뜬 적이 없다. 그는 사업에서 명퇴를 했다. 그러나 사업적 욕망까지 명퇴하진 않았다. 그는 산촌을, 농촌을 매력적인 사업장으로 판단했다. 농업 경영인으로 도약해 생의 후반을 흥미진진하게 돋우겠다는 야심. 그게 귀농을 선동했다. “흔히 은퇴 이후엔 격렬한 삶과 멀어집니다. 편안하고 여유로운 휴식을 추구하는 것이죠. 저는 생각이 달랐어요. 은퇴를 계기로 또 하나의 격렬한 삶 속으로 뛰어드는 게 인생을 낭비하지 않는 길이라 봤지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직업을 잡아 나를 새롭게 확장하고 싶다는 욕구가 강했어요. 그 방편으로 귀농을 택한 건, 농사가 지닌 사업적 가망성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입니다.” 직격탄 맞은 조경수 사업 그는 KT 출신이다. 줄곧 KT에 근속하다 자회사를 창업, 6년간 대표이사로 일한 뒤 퇴직했다. 마음은 일찌감치 산골로 먼저 이주해 그를 열렬히 호명했던 모양이다. 퇴직을 한 바로 그날, 잽싸게 짐을 싸 귀농을 했다는 게 아닌가. 이전에 미리 사두었던 이곳 홍천의 산골짝 터전으로 부리나케 달려왔던 것. 매봉산 자락 해발 780m 고지에 있는 터전의 규모는 조경수 농장 2만 평을 포함, 총 4만 평. 광활한 터이니 광폭의 행보를 예감하며 기꺼웠을 게다. 새 삶의 기획자인 자기 자신에게 진정 새로운 삶을 선사할 기회가 도래했다는 확신으로 설레었을 테고. “사실 귀농은 오래된 계획이었어요. 도시보다 시골이 좋았고, 농사가 제 적성에 부합한다고 봤으니까. 일테면, 제가 흙냄새 좋아하고, 몸 쓰기를 좋아해요. 게다가 땅이 지닌 생산성에 호감을 느껴 나름대로 농업 연구도 해왔죠. 그러하니 지당한 귀농이었다는 거.” “부인께선 찬동했고?” “찬동까지는 아니었지만 반대하지도 않았어요. 부부이니까 당연히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도시생활에 지친 남편을 조용히 응원하는 마음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녹록지 않은 시골생활에 닻을 내리기까진 시간이 걸렸어요. 이모저모 버거운 경험을 하며 아내가 한동안 마음고생 좀 했습니다.” “농사의 사업적 가망성에 착안한 건 어떤 근거에 의해서였죠?” “조경수 농업이 매우 유망하다 봤던 겁니다. 제가 농장을 사들인 10여 년 전엔 나무시장이 생동했어요. 남북경협이 기폭제였죠. 산림 황폐화가 심각한 북한으로 막대한 물량의 나무들이 보내졌으니까. 당시 국내 과실수 묘목의 40%가 북한으로 넘어갈 정도였지요. 그 매우 긍정적인 상황에 착안하고 나무 농장을 사들였던 겁니다.” “천안함 사건의 여파로 2010년, 남북경협이 중단됐어요. 상황이 돌변했겠군요. 호재가 사라지고 악재가 덮쳤으니.” “예상하지 못한 일이 순간에 벌어진 거죠. 직격탄을 맞았다 할까, 국내 조경사업 자체가 냉각되면서 사양길로 접어들더라고요. 게다가 이 사업이 원래 건축 경기하고도 맞물려 있는데 건축 바람마저 가라앉아 불황을 면치 못하고 있어요.” 시퍼런 꿈과 야심이 실린 그의 ‘무네미농장’엔 주목과 소나무를 주종으로 한 조경수들 1만5000그루가 자라고 있다. 농장 사위엔 초목들이 비밀 회합을 하는 숲의 연쇄. 가을이 붓을 들어 서서히 주황을 칠할 테지. 그러나 10월 초의 숲은 여전히 초록을 토하는 재미에 심취해 있다. 저 기고만장한 풍경의 기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삶이 환하게 밝아질 것만 같은 낙토(樂土)라 말 못할 게 없는 가경이다. 그러나 문기운 씨는 풍경에 별 관심 없다. 오나가나 경치를 즐겨 일상에 흥을 부여하는 취향의 소유자가 아니거니와, 한가하게 자연에 눈 돌릴 때가 아니라 보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사업상의 활로를 찾아야만 하는 현실이지 아니한가. “자연도 일상이 되면 무료해집니다. 제가 좋아하는 건 자연보다는 노동이지요. 기질이나 체질이 그래요. 물론 노동 자체가 목적일 리는 없죠. 수단일 뿐이니까. 사실 귀농 준비부터 소홀했던 것 같아요. 따라서 뜻대로 사업이 진척되지 않았지만 이게 다 성과가 발생하기 직전의 과정이거니, 그런 생각으로 최선을 다합니다.” 새로 태어난 ‘무네미농장’ 그는 어쩌다 귀농한 사람이 아니다. 과거를 답습하지 않는 새로운 삶을 농사로 구현하겠다는 또렷한 목적을 가지고 이 후미진 산속에 들어왔다. 모든 기량과 경험과 뚝심을 쏟아 농업 경영인으로 부상하겠다는 신념을 스스로 훼손하지 않기 위해 젖 먹던 힘까지 다 쏟아 붓고 있다. 조경수로 쓴맛을 봤지만 쓴맛 안엔 보약이 들어 있는 법. 그는 혼선의 경험을 토대로 새로운 콘셉트를 고안했다. 다목적 관광농원으로 사업을 확장해나간 것. 현재 그의 농원에선 다양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갖가지 나물을 재배해 가공 판매를 하며, 수영장이 있는 2층짜리 게스트하우스를 지어 휴양객들을 불러들인다. 농사 체험, 별보기 체험, 계곡 트레킹, 잔디밭 웨딩, 동아리 워크숍 등등 각종 프로그램과 시설물들을 구비해뒀다.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난항을 겪고 있다는 것! 그간의 총 투자비용이 30억 원 이상이란다. “투자금은 자체 조달했어요. 가지고 있던 부동산과 동산을 정리해 확보한 자산이었죠. 만약에 자산이 부족했다면, 부채를 얻어 썼다면, 이미 망가졌겠죠.” “귀농지의 특산 작물을 재배하는 게 귀농 성공의 한 가지 비결이라고들 합니다. 이 지역은 고랭지 배추의 주산지로 고소득을 올리는 농가가 많다고 알려졌고요. 배추 농사엔 관심 없었을까?” “고랭지 채소 농사로 고소득이 가능한 건 분명합니다. 이 마을 배추 농가들이 보통 연평균 1억 원쯤의 매출에 순소득 5000만 원 정도를 기록하더군요. 홍천군 전체 농가 평균 매출 500만 원에 비하면 압도적인 금액이죠. 저는 조경수 외엔 아예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설령 배추 농사에 뛰어들었다 해도 실패했을 수 있죠.” “왜죠? 불굴의 투지. 당신에게선 그런 게 엿보이는데.” “직장생활만 했던 사람이잖아요. 내 안엔 뛰어난 적응력이 있다, 그런 착각 속에 귀농을 했어요. 알고 보면 등신이라는 거.(웃음) 고랭지 채소 농부들, 이분들 참 대단합니다. 고도의 집중력, 냉철한 상인정신, 생활상의 모든 움직임이 이윤과 관련돼 돌아가더라고요.” 그도 한동안 농사에 주력했다. 조경수 사업의 부진을 보완하기 위해 엄나무, 마가목, 오미자 등 가장 일손이 적게 드는 작물들을 재배했다. 그러나 이 역시 헛수고. 소득이 되질 않더라는 거다. 무엇보다 유통 루트를 발굴하기가 어려웠다지. 그렇게 농사에서 다시 빙벽을 만났던 그는 이후 관광농원 조성에 전력투구, 근래에 근사한 복합 농원 구축을 완료했다. 그러나 수익구조는 여전히 불안하다. 해서, 지금도 몇몇 나물류를 재배해 가공 판매한다. 이런 그가 농업을 바라보는 눈은 지극히 신중하다. 농사란 냉혈의 세계라는 인식에서겠지. “귀농하려는 분에게, 부디 충분한 준비를 통해 농사 물정과 실력을 비축한 뒤 본격 농사에 뛰어들라고 조언하고 싶어요. 거주 지역 특산물을 작목으로 선택하는 건 그나마 현명한 선택이라 말하고 싶고요. 유통망 개척의 수고를 덜 수 있고, 재배 기법을 공유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가장 좋은 건 농사를 아예 짓지 않는 겁니다. 어려운 점이 한둘이 아니니까. 특히 자연주의 농법은 100% 망합니다. 그 위험한 모험을 하겠다는 사람을 보면 저는 뜯어말려야겠죠.” “이 농원은 아름다운 자연에 둘러싸인 데다 멋진 시설물들이 즐비해 호감을 자아내요. 그러나 시련은 여전한 거예요? 문제가 어디에 있죠?” “홍보도 아직 미흡하지만, 상당히 외진 산기슭이라 가볍게 접근하기 어렵다고들 느끼는 것 같아요. 강원도 오지 특유의 구불구불한 언덕길이 길게 이어지니까. 그러나 낙관합니다. 특유의 농업 비즈니스 모델로 부상할 거라는 믿음을 갖고 있어요.” 그래도 시퍼런 꿈 안고 달려가겠다 출구를 찾지 못해 헤매는 갈망과 갈증. 사람은 다들 그런 걸 속에 두고 산다. 하지만 선한 믿음이 있는 한, 게임은 차라리 스릴 있게 계속된다. “사업 성취를 위해 몰두하다 보면 마음의 여유를 놓치기 쉽죠. 스트레스 해소는 어떻게 하죠?” “오락 삼아 기타를 치지만 사실 정서적 만족감을 가질 수 없다는 게 불만이에요. 자연 속에 살지만 자연과 가까워지진 않더라고요. 바람이 나무숲을 흔들 때나 계절이 바뀔 때 잠시 잠깐 자연의 존재를 느끼는 정도에 불과해요.” “귀농했으나 도시를 향한 심한 향수에 젖어 사는 이들도 있더군요. 도시의 휘황한 야경이나 파도 같은 인파 속에 있을 때 오히려 안정감을 가질 수 있는 게 사람이라는 사회적 동물이죠.” “도시의 흥청거림, 텁텁한 공기, 생맥주집에서의 대화, 익명성이 주는 편안함, 이런 것들이 그리워질 때가 있습니다. 도대체 사람이 살 만한 곳은 도시일까, 자연일까? 이는 단정 짓기 어려운 문제예요.” 적막한 자연에 때로 외로운 심사를 느끼는 모양이다. 오랜 로망이었던 귀농을 위해 가차없는 질주로 산골에 들어왔지만, 만사가 술술 풀리기는커녕 착오와 장애로 점철된 시간들. 쓸쓸한 감회를 피할 수 있으랴. 인간관계의 헐거움과 얕음에서도 그는 시골생활의 애환을 느낀다. “깊은 산골에 살다 보니 도시와 접촉하기 어렵고 읍 소재지조차 멀어 불편이 많더라고요. 무엇보다 교류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게 폐단이죠. 그저 마을 농부들과 농사 얘기를 나누는 정도니까. 의미 있는 소통에 관한 허기, 고립감, 공허감, 이런 게 달라붙는 겁니다.” “다정한 벗 하나, 따뜻한 커피와 음악, 잘 익은 술 한 잔, 이런 게 곁에 있다면 안도할 만한 생활이겠죠. 특별한 이유 없는 행복감이 그런 것에서도 나오니까. 이건 너무 소박한가?” “동호인들과 음악회도 열고, 저 나름대로 친선을 즐기는 면이 있긴 해요. 그러나 사실 여유시간이라는 게 없어요. 일이 워낙 많기도 하지만, 체질상 일을 안 하면 우울해지고 몸도 아프더라고요. 일종의 강박증도 있어요. 보람 있게 세상을 살아야 한다, 조금치의 시간 낭비도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야 한다, 그런 거. 그렇게 살지 않으면 사업을 성공시킬 수 없다는 생각 하나에 집중하며 사는 겁니다. 너무 속물적인가요?(웃음)” 속물 플러스 미물. 인간 안에 그런 성분을 집어넣어 디자인한 조물주의 계략에 누가 삿대질할 수 있으랴.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사. 그러나 기어이 뜻을 이루려 발버둥치는 게 또한 인생사. 예외 없이 누구나 그렇듯, 그도 트랙 위에 선 경주마다. 앞으로 내달릴 수밖에 없는. ◇ 문기운 씨가 주는 귀농 Tip ◇ •경관만을 추구해 터를 구하지 마라. 나만의 왕국을 세울 듯이 외진 골짜기로 들어가 살다보면 외롭고 불편해진다. 그런 터는 농사에도 금물이다. 생산성이 낮은 비탈이기 십상이어서다. 약간 비싸더라도 반듯한 농지를 매입하자. •강원도 고원지구로 귀농할 경우엔 고랭지 채소 농사가 유망하다. 제반 조건에 최적화된 작물이라 다른 농사보다 경제성이 높다. 그러나 투기성 다분한 재배 풍토를 유념해야 한다. •허영과 허세에 찬 농사를 짓다가 파산하는 사례가 많다. 자신의 능력을 냉정하게 점검, 과욕 없는 규모를 설정하라. 천재지변이나 기상이변으로 흉작을 볼 수 있는 게 농사라는 인식도 철저해야 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 2019-11-15 08: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