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언어학자 마틴(페르난도 알바레즈 레빌)이 시크릴어를 연구하러 정글과 바다가 있는 시골 마을 산이시드로를 찾는다. 하신타 할머니가 곧 돌아가시는 바람에 500년 전 번성했다는 다신교 문화 언어 시크릴어를 아는 이는 이사우로(호세 마누엘 폰셀리스)와 에바리스토(엘리지오 멜렌데즈) 두 할아버지뿐. 젊은 시절 둘도 없는 친구였다는데 지금은 50년 넘게 왕래를 끊은 사이란다. 무엇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두 노인을 이토록 증오하게 만든 것일까. 그리고 마틴의 연구는 이어질 수 있을까.
파도치는 해안가에서 두 청년과 한 여성의 행복하고 아름다운 한때를 보여주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사라져가는 원주민 언어에 대한 안타까움, 신을 통한 구원을 가르치는 가톨릭과 원시 신앙, 노년 세대와 젊은 세대의 우정, 긴 애증의 세월과 짧은 화해의 시간을 그린다. 이 모든 이항 대립은 마틴이 에바리스토의 손녀 주비아(화티마 몰리나)와 하신타 할머니의 딸 플라비아나(노르마 안젤리카)의 조력으로 이사우로와 에바리스토 두 할아버지를 녹음기 앞에 앉히는 어려운 과정을 통해 서서히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비 내리는 정글과 드넓은 해안으로 대표되는 자연, 죽은 영혼과 대화를 나누는 원주민의 영적 세계가 두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신비롭게 그려지고, 영어 방송을 하며 미국으로의 이주를 꿈꾸는 주비아와 그녀가 시크릴어를 배우기를 바라는 마틴의 사랑은 경제적 돌파구와 지적 탐구를 추구한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영화가 전하고 싶었던 것은 정복자 종교인 가톨릭의 신이 요구하는 죄의식 조장으로 평생을 갈등과 고통 속에 살았던 세월에 대한 위로라 할 수 있다. 첫 장면에서 본 두 청년은 마리아라는 여성을 두고 갈등한다. 에바리스토는 이시도르가 유혹한 것이라며 마리아에게 결혼을 통한 구원을 애걸한다.
마리아가 세상 떠난 지 5년. 에바리스토는 손녀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낸다. 그러나 에바리스토로부터 칼로 위협을 당하기까지 했던 이시도르는 평생 미친 사람이라는 손가락질 받으며 홀로 외롭게 산다. 마틴의 연구 과제와 보살핌으로 겨우 웃게 된 이시도르는 그러나 죽음을 앞두고 다시 한 번 에바리스토에게 내침을 당한다. 남은 생은 이시도르와 함께하라는 마리아의 회한에 찬 유언에도 불구하고 에바리스토가 가톨릭의 죄의식에 자신을 묶어두었기 때문이다. 에바리스토가 어디를 가든 지고 다니는 나무 의자는 마치 그의 십자가 같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동성을 내치고 이성을 택했던 에바리스토. 할머니 마리아로부터 할아버지 에바리스토의 비밀을 들었던 주비아는 이제라도 이시도르 할아버지에게 가라고 하지만, 에바리스토는 손녀 품에 안겨 울 뿐이다. 이시도르가 죽어가면서 그토록 보고 싶어 했건만.
죽음에 이르는 마지막 순간까지 숨기고 외면해야 할 감정, 세상의 규칙, 종교가 있다는 게 두렵다. 사랑했던 이를 평생 외롭고 가난하게 살게 한 것보다 더 큰 죄악이 있을까.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는 죽음이 가까운 노년 세대에게 후회가 남지 않도록 진솔한 고백을 하고 눈 감으라 호소하는 듯하다. 마지막 장면, 죽은 원주민들이 산다는 동굴 앞에서 이사도르와 에바리스토가 나누는 시크릴어 대화가 유머러스한 카타르시스를 안기는 이유가 되겠다.
멕시코 감독 에르네스토 콘트레라스의 ‘나는 다른 언어로 꿈을 꾼다’는 압도적인 자연 풍광, 그리고 새들과 대화할 때의 사운드를 보고 들으려면 극장 감상이 필수다. 이 작품은 2018년 멕시코의 아카데미상인 아리엘 어워드에서 작품, 시나리오, 촬영, 사운드, 작곡, 남우 주연(엘리지오 멜렌데즈) 상을 받았다. 2017년 선댄스영화제에서는 감독상과 관객상을 받아 대중성도 겸비한 영화임을 알렸다.
극 중에 나오는 시크릴어는 이 영화를 위해 만들어진 언어란다. 웅얼거리는 듯한 낮은 음조의 언어와 노래가 마음을 울렸는데 정말 뜻밖이다.
요즘 지방에 근무하면서 무궁화호 열차를 주로 이용한다. 무임승차하다가 적발되면 요금의 30배를 벌금으로 물린다고 하는데 매번 승차권 조사를 하지 않고 가끔씩 한다. 입석표를 갖고 타는 사람은 지정 좌석도 없는데 어떻게 무임승차를 가려내는지 궁금하다. 엿장수 마음대로라는 말처럼 승무원 마음대로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면, 승무원을 직무태만으로 나무라기도 어렵다. 어느 승무원이 자신에게 실익도 없는 승차권 조사를 적극 하려고 할까!
열차를 타고 여행을 가본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예전에는 줄을 서서 기차표를 샀다. 열차 도착 10분 전에 개찰구에서 역원에게 검표를 받으면 승차권 한 귀퉁이를 ‘찰칵’ 하면서 찍어 표시를 남겼다. 열차에 올라타도 중간중간 여객 전무의 검표를 받고 행선지 연장도 가능했다. 내릴 때는 역원에게 승차권을 반납해야 했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표를 구매하고 역원의 검표 없이도 승차가 가능하다. 열차에서 내린 후에는 표를 반납하지 않고 출구를 통해 그냥 나가면 된다. 참 편리해졌지만 무임승차의 유혹은 그만큼 커졌다.
열차를 탈 때 운임을 지불하는 착한 사람만 있을까? 승차권 조사를 어느 나라이든 다 하는 걸 보면 그렇지 않다는 반증이다. 역무원이 인터넷으로 판매된 좌석을 확인해 공석이 되어야 할 자리에 승객이 앉아 있으면 검표를 하는 느슨한 관리는 부정승차나 무임승차의 유혹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내가 이런 의심을 하게 된 이유가 있다. 지하철을 이용할 때 개구멍 통과하듯 개찰구 밑으로 나오거나 아예 펄쩍 뛰어 넘는 사람들을 가끔 보기 때문이다.
‘공공선의 무임승차’라는 말이 있다. 공공선을 위한 비용부담은 회피하면서 이용은 계속하려는 현상을 말한다. 공중의 규모가 커서 개인의 행위가 전체 산출에 대단한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경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한다. ‘나 하나쯤 뭐 어때!’ 하는 심리다. 국민 모두가 감시자가 되어 제재를 해야 한다.
“승차권 검사는 언제 하는 거예요?” 어느 날 열차 안에서 지나가는 승무원에게 물어봤더니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며 하는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합니다. 지금 조사를 할까요?” 하고 되물었다. 하고 싶으면 한다는 말에 적이 당황했다. “예 지금 해보세요” 하고 말했더니 승무원이 출입구 쪽으로 가서 “지금부터 승차권 조사를 하겠습니다” 하고는 한 사람 한 사람씩 확인했다. 어떤 결과가 일어날지 곁눈질로 추이를 지켜봤다. 결국 부정승차(운임구간을 벗어나서 계속 기차를 타고 있는 사람) 승객 두 사람이 적발됐다.
무임승차를 적발해 벌금이나 추가요금을 부과하면 철도공사 입장에서는 수익이다. 그러나 적발한 승무원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없다면 귀찮은 일이고 자칫 승객으로부터 원성을 들을 수도 있다. 무임승차가 많아지면 철도공사가 손해를 보고 결국 그 부담은 운임 인상으로 이어져 그 피해를 국민들이 보게 된다. 따지고 보면 국민 모두가 이해 당사자이기 때문에 승차권 조사를 해야 한다. 급여를 받는 승무원이 자신에게 실익이 없는 일이라며 해야 할 조사를 하지 않으면 더 많은 무임승차 승객이 생길 것이다. 도로에 교통신호등이 있지만 적발 카메라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지키려는 마음의 강도는 달라진다. 그게 인간의 본성이다.
벌금이라는 제도를 만들어놓고 양심에만 맡기고 확인을 게을리 하면 자칫 유명무실한 제도로 전락하고 무임승차효과(無賃乘車效果, 개인이 공공재에 대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고 그 편익만 누리려 하는 현상)만 늘어난다. 공중질서를 지키고 감시하는 일은 우리 모두의 일이다.
용돈은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부부간에도 서로 말 못할 용돈 사용처가 있고 학생도 부모에게 설명할 수 없는 돈이 필요할 때가 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붕어빵을 사 먹는 친구가 부러워 부모님께 용돈을 달라고 말씀드렸다. 하지만 반응이 차가웠다. 집에서 해주는 밥 먹고, 책과 학용품도 다 사주고, 학교도 집에서 가까워 걸어 다니면 되는데 무슨 용돈이 필요하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게 아니고요. 친구가 붕어빵 사 먹는 것 보면 나도 사먹고 싶단 말이에요. 만화책도 빌려보고 싶고요. 친구들한테 얻어먹은 것도 갚아야 해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을 대충 알고 있던 터라 그 말은 입안에서만 뱅뱅 돌 뿐 아무 말도 못했다.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용돈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늘 했기에 부모님을 원망할 때도 있었다.
결국 일을 저질렀다. 어느 날 아버지가 소를 팔고 100원짜리 종이돈을 100장씩 묶어놓은 뭉칫돈을 여러 다발 갖고 들어오셨다. 당장 쓸 일이 없어 돈을 장롱 밑에 숨겨둔 걸 내가 알고는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몰래 100원짜라 한 장을 돈다발에서 빼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지만 설마 이 많은 돈다발 속에서 한 장 없어진 것을 알겠느냐는 아주 순진한 생각을 했다.
며칠 후 돈 쓸 곳이 생긴 부모님이 돈다발을 모두 꺼내놓고 세다가 여러 다발 중 한 다발에서 딱 한 장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분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우뚱하시면서 침을 발라가며 돈을 세고 또 셌다. 결국 100원짜리 한 장이 없어졌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는 야단맞을 게 겁나 자수를 할 수도 없었다. 그저 가슴조리며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에게 “돈을 세어보고 똑바로 받아왔어야지요. 당신이 한 장 부족하게 받았네요” 하고 핀잔을 줬다. 그러자 아버지는 ‘분명 잘 세어보고 받았는데…’ 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결론은 돈을 받을 때 한 장 부족한 채 받은 것으로 끝이 났다. 부모님은 이제 와서 돈 준 사람에게 항의하거나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며 체념했다. 아무도 범인이 나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사건은 그렇게 완전범죄가 됐고 두려움에 떨었던 나는 겁이 나서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 세월이 흘렀다. 어느 날 초등학교에 다니던 아이가 1000원짜리 한 장을 슬쩍했다. 아이는 자기가 훔치지 않았다고 말했지만 나는 아이 양손에 군것질거리가 들려 있는 것으로 상황을 파악했다. 그 뒤로도 그런 일이 두세 번 더 있었다. 어린 시절 그런 경험이 있으면서도 내 아이가 용돈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은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오히려 야단만 쳤다. “너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느냐?”, “경찰서에 데리고 가겠다”는 둥 겁박까지 했다. 내심 걱정도 했다. 세상 아이들이 다 그래도 내 자식은 절대 나쁜 짓 하지 않을 것이라 믿었는데, 큰 충격이었다.
아이가 왜 돈을 훔쳤을까 곰곰이 생각해봤다. 저학년이라며 부모가 사주기만 했지 용돈은 한 번도 주지 않은 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다음 날 1000원짜리 한 장을 주면서 “네 맘대로 써봐, 그리고 부족하면 말해. 더 줄 수도 있어”라고 말하자 아이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나쁜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군것질의 유혹에 돈을 훔칠 수밖에 없었던 아이의 마음은 얼마나 불편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에게 오히려 미안했다. 물론 그날 이후 아이의 손버릇은 싹 없어졌다.
아이만 용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절박하게 용돈이 필요한 사람은 돈벌이 없는 노인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용돈이 밥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복지관에서 만난 80대의 한 할아버지는 한 달에 단돈 5만 원이라도 좋으니 돈 벌 수 있는 일거리 좀 소개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자식들에게 용돈을 달라고 말씀하라고 했더니 자식들이 “하는 일도 없는데 왜 용돈이 필요하냐!”고 소리만 지른단다.
경로당에서 뭘 사먹을 때 각자 주머니 끈을 푸는데 가진 용돈이 한 푼도 없다면 슬픔을 넘어 비참할 것 같다. 먹고 입고 잠을 자는 의식주 해결만이 최저생계의 끝이 아니다. 젊었든 늙었든, 건강하든 병들었든 내 맘대로 쓸 수 있는 용돈이 필요하다.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배도 안 고프고 춥지도 않다.
누구나 젊은 날 짝사랑의 기억을 하나쯤은 지니고 있을 것이다. 여학교 시절 바람같이 나타나 어린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던 교생 선생님으로부터 함께 성탄 연극을 준비하던 교회 오빠에 이르기까지. 그러나 대부분 예방주사 자국처럼 기억의 한 구석에 흔적만 남기고 사라져 버린 지 오래다. 세월의 풍화작용으로 낡아버린 기억은 이젠 나뭇잎 끼워진 책갈피처럼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러나 때론 ‘날카로운 키스’처럼 다가와 운명을 바꿔버리는 짝사랑도 있다. ‘사랑과 운명’을 다룬 작품 중 고전으로 불리는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가 그렇다. 체호프의 4대 희곡으로 평가되는 이 작품은 수없이 연극으로 공연되어 왔음에도 셰익스피어가 그렇듯 매번 다른 감동으로 다가오는 연극의 교과서 같은 작품이다. 블록버스터 영화들의 틈새에서 용케 찾아낸 남편 덕분에 영화 '갈매기(마이클 메이어 감독, 2018년 작)로 만나게 되었다.
영화는 어느 여름, 호숫가 별장을 무대로 다섯 인물의 엇갈린 사랑 이야기가 펼쳐진다. 먼저 그들의 사랑 족보를 정리해 보면 별장 관리인의 딸인 마샤(엘리자베스 모스)는 주인집 아들 콘스탄틴(빌리 하울)을 사랑한다. 콘스탄틴은 동네 처녀 니나(시얼샤 로넌)를 사랑한다. 니나도 콘스탄틴을 사랑하지만, 그의 엄마 이리나(아네트 베닝)와 함께 온 연인인 작가 보리스(코리 스톨)에게 끌린다.
사랑의 파열음은 각자의 욕망이 충돌하면서 시작된다. 콘스탄틴은 희곡작가를 꿈꾸지만. 아직 역량이 모자란다. 배우가 되기를 소망하는 니나와 작은 시골에서 함께 연습도 하며 꿈을 키우는 도중 성공한 작가 보리스의 등장으로 질투의 화신으로 변한다. 보리스는 이미 명성을 얻고 있음에도 늘 새로운 작품에 대한 걱정으로 초조하다. 그는 니나를 보는 순간 새 작품의 영감을 얻고 그녀를 유혹한다.
이미 여배우로 성공을 거둔 이리나는 자기보다 젊고 이지적인 매력남 보리스마저 얻어 부족함이 없다. 다만 자신만 아는 이기적 행동으로 주변과 충돌한다. 특히 보리스의 등장으로 날카로워진 아들 콘스탄틴과 대립한다. 이루어지지 못하는 절망적 짝사랑에 지친 마샤는 자신을 사랑해 주는 교사와 충동적으로 결혼하나 짝사랑의 끈을 놓지 못한다. 어느 날 콘스탄틴은 갈매기를 총으로 쏘아 흔들리는 니나에게 던지고, 자신의 머리도 겨냥하나 다행히 상처만 남기고 빗나간다.
체호프는 이 작품과 관련하여 “인간은 항상 두 가지를 열망한다. 가질 수 없는 것과 가지고 싶은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 하늘을 나는 갈매기는 어쩌면 가지고 싶지만 가질 수 없는 꿈을 상징하는지 모른다. 갈매기는 자유로워야 한다. 짝사랑도 꿈의 하늘을 날 때는 아름답지만, 소유하는 순간 죽고 만다. 갈매기를 쏘아 죽인 콘스탄틴은 자신의 갈망을 파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자신의 운명을 쏘아버린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멀리서 볼 때 희극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라고 했다. 어린 시절 짝사랑도 지금은 지나간 아름다운 추억이지만 당시 어린 마음에는 밤을 새는 고통이었으리라. 아, 부조리한 인간의 운명이여!
이혼하게 되면 그동안 부부동반으로 만났던 부인들은 물론 남자들과의 사이도 멀어진다. 지방에 따라, 집안 분위기에 따라 다르지만, 아예 친분을 끊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이해를 못 했다. 원망도 했다. 그런데 이제 나이 들어 친구들 얘기를 들어 보니 이해가 될 만했다. 필자는 위험인물이라는 것이다. 착한 자기네 남편이 혹시 물들까 봐 걱정한다고 했다. 이혼해서 더 재미있게 사는 모습을 보니 더욱더 그렇단다.
치킨집을 운영하던 친구가 있었다. 온종일 부인은 주방에서 닭을 튀기고 남자는 배달 나가기 바빴다.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그 친구를 만나려면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가 일하는 중에 카운터 앞 테이블에 앉아 매상도 올려주고 얘기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친구가 바쁘니 생맥주는 아예 필자가 직접 따라 마셨다. 그래서 근처에서 사람을 만날 일이 있으면 약속 장소를 그 치킨집으로 잡았다. 그중에 여자들도 있었던 모양이다. 그 소문이 다른 친구들에게도 전해지고 부인들은 필자가 여자들을 데리고 왔다는 얘기만 들리는 모양이었다. 대학원 동창생 모임은 부부동반 모임이다. 필자가 이혼 후 혼자 나가자 누구라도 좋으니 데려오라고 했다. 어차피 두 사람분의 회비를 내고 대부분 먹는데 들어가기 때문에 두 사람이 와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다른 공무상 일이 있더라도 사람을 데려갔었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다. 그런데 매번 새로운 사람이 오니 남자들은 좋아하는데 여자들 눈빛이 안 좋았다. 재혼할 여자가 아니리면 데려오지 말라고 했다. 자기 남편들 눈빛이 아내 아닌 다른 여자에게 쏠리는 것이 보기 싫었다는 것이다. 필자가 댄스를 하는 것도 친구 부인들은 못마땅해 했다. 필자의 댄스 파트너들이 날씬하고 춤까지 잘 추니 자기 남편들이 부러워하는 모습이 보기 싫었다. 댄스가 재미있고 운동으로도 좋으니 부부가 함께 배워보라고 권유하면 댄스 배우러 가는 순간 이혼이라며 극구 반대했다. 여자들이 들끓는 세상에 자기 남편이 바람이 날지도 모른다는 염려 때문이었다. 남편은 안 그런데 여자들이 유혹할지도 모른다고 지레 겁을 먹었다. 친구 부인들의 생각은 자기네 남편들은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여자들은 곧 자기 남편과 바람이 날 수 있다고 비약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남자들은 대문을 벗어나면 통제 불능이다. 부인들이 못 보기 때문에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모른다. 통계가 기혼 남녀의 바람피우는 비율을 발표한 적이 있다. 자기 남편은 거기 해당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지금 나이라면 그렇다. 늙은 남자에게는 여자도 안 붙지만, 남자도 그럴 생각도 없다. 이미 리비도가 떨어져서 의욕도 없다. 혼자 사는 사람들을 보는 시각도 곱지 못하다. 특히 여자가 혼자 산다고 하면 더 위험인물로 본다. 극도의 경계심을 보이며 자기 남편들과 말도 못 섞게 한다. 그래서 혼자 사는 여자들은 철저히 싱글이라는 사실을 비밀에 부친다. 현재 우리나라는 세 집 건너 한 집은 혼자 사는 사람들이다. 이혼, 사별, 미혼, 졸혼 등 사유는 갖가지이다. 비혼을 선언한 싱글 남녀도 많다. 필자가 싱글이라고 위험인물로 보는 부인들은 그들의 자녀들도 혼기가 지난 싱글이 많은데 그쪽은 못 보고 있는 듯하다.
타인의 비밀을 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비밀은 밝혀지는 것이 맞는가? 아니면 비밀은 비밀의 영역에 감추어두는 것이 바람직한가? 등장인물들의 비밀을 끊임없이 까발리면서 파괴되어가는 인간성을 소재로 한 영화 . 아마도 막장드라마의 종합선물세트가 아닌가 싶다.
극 중 예진(김지수)의 대사에 나오듯이 어느덧 ‘스마트폰은 현대인의 블랙박스’가 되었다. 영화는 이 위험한 장난감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과거에는 모든 비밀이 인간의 기억 속에만 숨어 있어 본인이 털어놓지 않으면 알 길이 없었지만, 과학기술의 발달과 게을러진 인간의 합작으로 탄생한 ‘확장된 기억’의 수단인 스마트폰으로 인해 전혀 다른 세계가 전개되었다. 그것은 뇌 속에 숨어있던 비밀이 언제나 노출될 수 있고 훔칠 수 있는 물질적 세계로 바뀐 것이다.
40년 지기 초등학교 동창 네 명이 부부 동반으로 석호(조진웅)의 집들이에 초대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겉으로 보기에 부부들은 화기애애하고 오랜 친구들은 서로를 속속들이 안다고 자부한다. 이런 자신감 때문이었을까. 예기치 않게 예진이 제안한 스마트폰 공개하기 게임을 시작하면서 이들은 공포의 소용돌이에 빠져든다. 그들이 모임을 갖는 동안에 오는 전화와 문자를 모두 공유하는 것이 이토록 무서운지 몰랐던 것이다. 영화가 진행되는 100분 동안 모든 각자의 비밀이 드러나는 설정이 과하기는 하나 노련한 배우들이 만들어내는 긴장은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한다. 물론 이 영화는 긴장과 공포로만 일관하지는 않는다. 본래 장르인 블랙코미디답게 곳곳에 폭소를 배치했다. 이 영화에서 벌어지는 막장극의 내용은 아침드라마에서 늘 보았듯 특별하지는 않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영화가 긴 여운을 남기는 것은 마지막 반전 덕분이다. ‘낯설게 하기’라는 문학 기법을 연상케 하면서 인간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아이러니를 선사하기 때문이다. 관객들이 마지막에 전개되는 장면들에 어리둥절하면서도 문득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는 계기를 부여한다. 최근 신문에서 읽은 ‘생각의 속임수’란 책을 낸 권택영 전 경희대 교수의 인터뷰가 생각난다. “베일에 싸인 ‘금지’의 영역이 늘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 욕망이 인간의 본질이며 어쩌면 삶의 원동력일 수 있다.” 어쩌면 건강한 비밀은 간직하는 것이 나을 듯도 하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역시나 시월이 가기 직전 내 의지와 상관없이 이 노래를 들었다. 시월 끝 날에 의미를 두기보다 말일까지 처리해야 할 각종 고지서에 신경쓰다보니 어느덧 11월이 훌쩍 넘어갔다.
요즘 대전과 충남지역에서 마을공동체 붐이 한창이라 대전시 주관으로 공동체를 소개하는 책자 발간 작업에 참여하며 글을 쓰고 있다. 벌써 이것도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 지역에 들를 때마다 일행과 밥을 먹고 나면 자연스레 카페를 가곤 한다. 차 한 잔을 하면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마땅한 데가 카페만한 곳이 없다.
일상에 스며든 카페. 요즘은 마을 원주민이 떠난 오래된 주택을 리모델링해서 인테리어로 꾸민 카페가 눈에 띈다. 정원에 방치된 측백나무, 향나무를 카페 분위기와 어울리게 활용한다. 또 농협창고가 카페로 변한 곳이 있다. 천장이 높아 한결 탁 트인 느낌이다. 칸막이 없이 널찍한 홀에 외국항아리, 중국침대, 수를 놓은 크고 작은 쿠션들이 판매를 겸하기도 한다.
시골 한옥을 개조해 두 부부가 몇 년 동안 공들여 만든 카페에도 간 적이 있다. 때마침 이슬비가 잠잠히 오고 있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눈앞에 펼쳐지는 곳곳마다 내 유년이 소환된 착각이 들었다. 대청마루에 앉아 하루 종일이라도 멍 때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단아하고 정갈함에 감탄하며 화장실에 들렀을 때, 나는 잠시 신발을 벗어야하나 망설였다. 화장실을 나오기 전에 신발바닥 자국을 휴지로 닦았다. 주인이 내 얘기를 듣고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신발신고 들어가는 화장실이라고.
어느 날에는 2층 카페에서 마당 모퉁이에 앙증맞은 테이블을 내려다보았다. 주택에 살던 내 기억에 그곳은 화장실 혹은 창고로 쓰였을 법한 공간이다. 아마도 카페 분위기를 살리고자 소품을 놓았을 게다. 카페 옆으로 오래된 집의 담에는 녹슨 철조망이 자리 잡았다.
시월이 지나 계절은 어느덧 초겨울을 향하고 있다. 따뜻한 커피가 놓인 자리에 스스럼없는 친구와 마주하고 싶은 밤. 한때는 가까운 앞집 옆집과 ‘우리 집에 커피 마시러 와~’라는 말을 하며 살 때도 있었다. 아이가 같은 또래면 엄마들도 자연스럽게 친구가 되었다. 카페가 자꾸 생기는 것은 내 집을 개방하지 않으려는 환경이 탓일까. 빠른 속도로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믹스커피를 나눠 마시며 수다를 떨던 내 또래 이웃은 지금 어디 있을까. 빠른 속도로 정신없이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그래서일까. 카페는 복고를 되살리며 나를 유혹한다.
깊은 가을 시월의 막바지 토요일에 흥겹고 참으로 신명 나는 우리 국악 창극 ‘변강쇠 점찍고 옹녀(국립 창극단)’를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에서 관람했다. 사실 음악이라면 젊을 때부터 팝송, 샹송, 칸초네 등을 즐겨 들어서 국극이나 마당놀이 같은 창극엔 관심이 덜 했다. 그러나 나이 들어감에 따라 국악에 대한 호기심도 생겼고 기회가 있어 감상해 보았던 ‘심청전’이나 ‘흥보가’ 등으로 우리 국극이 이렇게 재미있다는 걸 느끼고는 관심을 두고 찾아보게 되었다.
오늘 본 작품은 외설적으로만 알려진 ‘변강쇠전’을 바탕으로 주인공은 변강쇠가 아닌 그의 여자 ‘옹녀’였다. 그래서 제목도 ‘변강쇠에 점을 찍고 옹녀’가 되었나 보다. 옹녀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대로 남자만 밝히는 여자가 아닌 자의식을 가지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 용감하게 운명에 맞서는 의지의 여인으로 나온다. 포스터만 봐도 예쁜 옹녀가 유혹하듯이 도발적인 모습으로 돌아보고 있어 오늘의 옹녀 연기가 기대되었다. 이제까지 보았던 뮤지컬이나 연극의 오케스트라는 무대 아래에서 객석을 마주하고 연주를 했다. 그런데 이 공연의 연주자들은 무대를 향해 앉았는데 국극의 특성상 지휘자가 없어 연기자들의 동작을 보면서 연주를 해야 하기 때문인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쟁, 피리 긴 나팔 같은 악기가 보였다.
무대가 열리자 하얀 소복을 입은 여자가 나와 애교 넘치는 목소리로 절을 하며 “옹녀 인사드리오”라고 했다. 목소리부터 어찌나 간드러지는 지 웃음이 절로 났다. 창극의 매력은 말투와 억양에 있는 듯하다. 외롭다는 단어도 ‘외로와라’ 고 하니 더욱 정감이 느껴진다. 무대는 다른 뮤지컬이나 연극보다 매우 단조로웠지만, 가림막이 네 조각으로 나뉘어 움직이고 있어 공간이 다양하게 연출되어 입체적으로 보였다.
이전의 공연에선 옹녀도 죽어 장승이 되어 변강쇠와 서로 마주 보며 영원히 함께한다는 내용이었다는데 이번 공연에는 죽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옹녀가 이승과 장승의 세계를 오가며 변강쇠와 사랑을 나누기도 하고 아기도 낳아 기른다는 설정이다. 다들 잘 알고 있듯 옹녀는 미인이기는 하지만 청상살, 상부살이 끼어 만나는 남자마다 죽는 운명을 타고났다. 열다섯에 첫 결혼을 하지만 하룻밤에 남편이 죽고 열여섯, 열일곱 등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일 년에 한 번씩 혼인만 하면 남편이 죽었다. 그뿐 아니라 그녀를 탐하는 동네 남정네도 모조리 상을 당하니 마을에서 쫓겨나게 된다.
쫓겨나는 길에서 만난 변강쇠와 살림을 차리고 궂은일로 돈을 버는데 손끝이 야물어 남보다 많은 돈을 받는다. 변강쇠는 하는 일 없이 노름판에서 옹녀가 번 돈을 다 써버리지만, 옹녀는 자신과 만났는데도 죽지 않으니 감사히 생각하고 감수한다. 그러다 마을을 지키는 장승을 뽑아 장작으로 태워버린 변강쇠는 장승들의 저주를 받아 온갖 병을 얻어 죽는데 옹녀의 변강쇠 살리기 작전으로 장승들과의 한판 전쟁이 볼만하게 펼쳐진다.
재미있는 건 우리 판소리에 녹아있는 해학과 풍자로 듣기 민망한 비속어도 많이 나오는데 거부감 없이 즐겁게 웃으며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두 시간이 넘는 공연에 옹녀 역 이소연 배우의 청량하고 맑은소리가 계속되어서 참으로 감탄스러웠다. 이 창극은 2014년 초연된 이후 성황을 이루며 5년째 무대에 올라가고 있다. 옹녀 이야기는 조금씩의 변화를 주는 연출로 계속될 것 같다. 신명 나는 매력적인 한 판 창극에 마음이 시원해진 하루였다.
이브의 잃어버린 반쪽은 아담이 아닌 보석이었다. 아담은 보석을 나르는 심부름꾼일 뿐이다.
이브는 각설탕처럼 강한 것 같아도 약하기 짝이 없다. 커피에 들어가면 맥없이 녹듯이 보석 앞에서 이브는 녹는다. 이브 마음속의 우선순위는 아담의 생각과는 딴판으로 옷, 구두, 가방. 화장품. 두꺼운 신용카드다. 아담은 이브의 마음 끝 쪽에 존재한다. 이브를 녹인 보석의 실체를 알아보자.
지구상에 존재하는 보석(寶石)의 종류는 약 108가지 정도 된다. 보석의 ‘석’은 돌을 뜻하지만 다 같은 돌은 아니다. 보석과 잡석은 기준이 있다. 보석은 모스(Mohs) 경도 7 이상 이어야 한다. 그리고 같은 종류의 돌을 같은 용기에 넣고 돌리는 작업을 덤블링(tumbling)이라고 하는데 돌릴 때 돌 끼리 부딪친 면이 마모가 되어 광이 나면 보석이고 깨져서 거친 면이 나오면 잡석이다. 보석이 갖추어야 할 조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보석은 아름다워야 한다. 아름답지 않으면 여인들의 눈길을 끌 수 없다. 루비나 사파이어, 에메랄드 등 유색 보석은 선명하고 매혹적인 색상이어야 한다. 다이아몬드 같은 무색은 찬란한 휘광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다워도 누구나 소유 할 수 있어 희소성이 없으면 보석으로 매력이 없다.
보석에는 치료백신 없는 바이러스가 있다?
아직 학계(?)에 보고 된 바는 없지만 사망에는 이르지 않지만 매우 중독성 강한 바이러스로 알려져 있다. 증상은 사람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대표적인 증상은 이렇다. 뇌신경 계통에 침입해 활동을 하여 정상적 사고 능력을 마비시킨다. 잠복기에는 증상이 약하여 모르고 지나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다가 분위기 있는 레스토랑에서 남자친구가 “눈감고 내가 뜨라고 할 때까지 기다려”라고 하면 바이러스가 본격적으로 활동한다. 맥박이 갑자기 수직상승 합니다. 보통 건강한 사람은 맥박수가 70회/1분이다. 그런데 갑자기 분당 90회로 상승한다. 잠시 후 손으로 눈을 가린 여성은 궁금증을 견디지 못하고 손가락 사이로 남친 이 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낸 것을 알면 맥박은 100회로 상승한다. 작은 박스를 열고 “눈 떠봐!” 하면 110회로 상승한다. 박스 속에 들어있는 반지에서 내뿜는 보석의 광채가 여성의 눈동자를 타격하면 맥박은 120회로 상승한다. 그리고 바이러스는 급격히 증식하여 뇌에서 활동하여 정상적 사고기능이 마비된다. 여성은 입술모양의 립스틱 판화를 남친 볼에 쪽, 쪽, 소리를 내며 마구 찍어낸다. 약간의 실어증을 동반하여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제대로 표현 못하고 그저 “어머, 나, 어쩜 좋아?”를 연발한다. 물론 안면 근육의 마비로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어떻습니까? 이 바이러스 무섭지 않나요? 네? 하나도 안 무섭다고요? 반대로 그런 바이러스에 감염되고 싶다고요? 이 바이러스의 학명은 ‘이브바이러스’입니다. 역학조사에 의하면 사랑하는 남녀사이에서만 존재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표하는 물건을 통하여 전염되지만 특히 보석으로 전염되는 바이러스가 제일 강합니다.
“하나님 왜 이브의 마음 속에 아담은 없나요?” 아담의 질문에 하나님은 답하셨다. “아담아! 아둔한 너의 지혜로는 이브를 따라 잡을 수 없다.” 아담은 다시 질문 하였다. “그럼 저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나님의 지혜의 말씀은 “미끼를 써라. 보석이라는 미끼를 쓰면 이브를 앉아서 얻을 수 있다.” 현자 고산 윤선도는 어부사시사 동사(冬詞) 3편 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밋기 곧 다오면 굴근고기 문다한다.(미끼가 좋으면 큰 고기를 낚을 수 있다)”
우포늪. 한여름의 수면으론 온갖 수생식물들 너울거려 초록 융단을 펼쳤을 테지. 이제 초가을이다. 시들거나 저물거나, 머잖아 다가올 조락을 예감한 식물들은 벌써 초록을 거둬들인다. 초록에서 쑥색으로, 약동에서 침잠으로, 그렇게 한결 내향적인 풍색을 드러낸다. 그러고서도 장엄한 건 광활한 늪이기 때문이다. 몽환적이기까지 한 건 어디서고 좀체 볼 수 없는 이채로 아롱져서다.
우포늪은 국내에서 가장 큰 자연 내륙 습지다. 이 습지의 매력은 축구장 210개를 합친 것과 맞먹는다는 담수 규모에만 있지는 않다. 늪가에, 늪 위에, 늪 속에 수많은 생명이 씨억씨억 거센 숨을 쉬며 살아간다는 것, 즉 생태의 보고라는 데에 진정한 갈채를 보낼 수밖에 없다. 자그마치 1000여 종에 달하는 동식물이 분포한다는 게 아닌가. 이 희귀한 가치를 인정받아 1998년,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관한 협약인 람사르협약 보존습지로 등록되었다.
늪가로는 둘레길이 가지런히 펼쳐진다. 도보로 혹은 자전거를 대여받아 타고 우포늪의 전모를 둘러볼 수 있게 해두었다. 늪 들머리에 조성한 우포늪 생태관을 비롯해, 우포늪 생태체험장, 우포생태촌, 산토끼 노래동산, 잠자리 나라 등 체험공간도 다양하다. 늪의 드높은 가치에 걸맞은 보존과 활용에 공을 들인 흔적이 완연하니 다행스럽다.
과거의 우포늪은 참 보잘 게 없었다. 계모에게 구박받는 콩쥐처럼 무시되고 괄시받았다. 늪이란 한마디로 물에 젖어 있는 땅. 해서, 사람들은 우포늪을 쓸모없는 땅으로 여겼다. 툭하면 공장이나 농경지 조성을 위해 매립해버렸고 갖가지 생활 쓰레기를 늪에 묻었다. 1990년에는 늪 인근에 쓰레기 매립장을 건립하려다 중단되기도 했다. 우포늪의 생태와 경관이 살아나기 시작한 건 보호구역 내 사유지 20만 평을 정부가 사들여 보존에 발 벗고 나선 1998년부터였다.
“나를 제발 가만히 내버려둬!” 자연은 그렇게 외칠 테지만 사람의 귀는 어두워 들리지 않는다. 여차하면 파고 묻고, 뭉개고 찢는다. 자연 말살을 일삼는 인간의 인위는 이미 고약한 습이 되었다. 그러나 인간의 겸손하고도 적절한 개입은 썩 긍정적인 효과를 거둔다. 인간에 의해 자연이 입은 상처를 인간이 나서서 보듬는 일은 모처럼 자연으로 돌아가는, 자연과 어울려 살고자 하는 인간 내심의 표출일 수 있다. 인간 자체가 또 하나의 자연임을 자각하는 조짐일 수도 있다. 우포늪의 회생은 어쩌면 인간의 회생이기도 하다.
다양한 관목들이 늘어서 숲을 이룬 오솔길로 늪의 향이 번진다. 비릿하고 축축하고 퀴퀴하나 늪의 원초적 향이니 별미가 아니랄 것도 없다. 늪가엔 억새와 줄풀과 창포와 마름이 지천이다. 싹눈처럼 앙증맞은 개구리밥과 생이가래는 물 위에 동동 떠 낙원을 누린다. 늪 속엔 검정말과 통발, 나사말 같은 식물들이 산다지.
생명들은, 풀들은, 물 위에 있거나 물속에 있거나, 지독히도 빛의 유혹에 약하다. 한사코 태양을 향해 손을 뻗는다. 한줌의 햇살이라도 더 부여잡으려는 갈망으로 생명을 지속한다. 물과 태양과 땅, 늪가와 늪 안의 식물들은 이 셋과 굳건히 연결되었다. 늪이란 그래서 명백한 생명의 전당이다. 외면적으로는 고요히 닫힌 세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생명들의 소용돌이로 들끓는다.
그럼에도 ‘늪’이라는 단어는 웬일로 어둡게 쓰이는가. 침체의 늪이니 망각의 늪이니 불륜의 늪이니, 한 번 빠지면 물귀신에게 붙들린 듯 영영 헤어나지 못할 곤경에 처한 상황을 흔히들 ‘늪’을 갖다 붙여 은유한다. 몸부림칠수록 더욱 가라앉는 나락을 ‘늪’에 비유한다. 이는 얄궂은 곡해에 가깝다. 늪은 생성과 생동과 창의의 도가니가 아니던가. 거기엔 침체도 망각도 불륜도 없다. 늪은 헛되이, 신의 이름을 구슬프게 부르지도 않는다.
도시의 난리통 속에서 ‘늪’에 빠진 그대여, 우포늪으로 오라. 그 생명의 숲을 보라. 진흙탕에서 피어나는 연꽃처럼, 오직 말짱한 낯으로 핼꼼 웃는, 저 식물들의 환희를 보라. 나의 것이 아니었던 질척한 욕망일랑 늪가에 내려놓고, 그대여, 저 재기발랄한 물풀의 생의(生意)를 가슴에 채우라.
탐방 Tip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둘러볼 수 있다. 대개 우포늪생태관 인근 무료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탐방을 시작한다. 탐방 둘레길인 ‘우포늪생명길’의 총연장은 8.7km. 30분에서 3시간 30분까지, 코스에 따라 탐방 소요시간은 다양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