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퇴근길에 아버지랑 술 한잔 하고 싶다고 전화를 해왔습니다. 시간과 장소는 필자더러 정하라고 합니다. 둘이 만나기 편한 장소와 시간을 정했습니다. 잠깐 생각해보니 며느리와 손자 손녀를 불러 내가 저녁을 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아들네 집 가까운 전철역 쪽으로 갈 테니 식구들 모두 부르고 저녁 값은 필자가 내겠다고 역제안을 했습니다.
아들네는 여섯 살짜리 손녀와 네 살 손자, 두 살 손녀 등 모두 5명입니다. 전철역에 도착하니 아들이 필자를 마중 나와 기다립니다. 좀 있다가 며느리가 아이들 셋을 차에 태워 예약된 음식점 앞으로 옵니다. “할아버지~” 하고 먼저 큰손녀가 뛰어와 안깁니다. 뒤이어 네 살짜리 손자가 뛰어옵니다. 막내둥이 손녀는 뭔지도 모르고 제 엄마 품에 안겨 손뼉을 치며 “아빠, 아빠” 합니다. 한 번씩 안아주고 식당 안으로 들어갑니다.
메뉴는 며느리에게 일임합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이 메뉴 선택도 잘하고 식당에 요구할 것도 당당히 말합니다. 역시 내 예측대로 아이들 의자를 달라 하고 아기 숟가락도 주문합니다. 필자 같으면 대충 아이들도 옆자리에 앉히고 어른 숟가락으로 먹도록 했을 것입니다.
어린아이들이라 밥 먹는 것은 뒷전이고 식당에 설치된 놀이터로 뛰어갑니다. 큰손녀가 뛰어가니 네 살 손자도 달려갑니다. 얼마 안 있어 손자의 울음소리가 납니다. 아이 아빠가 금방 자식의 울음소리를 알아듣고 뛰어갑니다. 손자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누가 자기를 밀어서 넘어졌다고 합니다. 달래면서 눈물을 닦아준 뒤 밥을 먹으라고 하니 몇 숟가락 먹다가 또 놀이터로 달려갑니다.
며느리는 연신 고기를 구워 필자 접시에 올려줍니다. 아이들 셋에게 밥 먹이랴 고기 굽느라 참 바쁩니다, 옆에서 아들도 고기 굽는 것을 거들면서 쌈으로 고기를 싸서 아내에게 줍니다. 우리 세대에는 부모님 앞에서 아내에게 고기쌈을 싸서 준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습니다. 시대가 많이 변했다고 느끼면서 그런 아들이 참 멋있어 보입니다.
손녀와 손자는 지긋이 한자리에 앉아서 밥을 먹지 않습니다. 할아버지에게 유치원에서 일어났던 이야기를 재잘거립니다. 다 알아듣지 못해서 통역 겸 며느리가 대화에 끼어들어야 합니다. 그러다 또 뛰어 돌아다니고 이것저것 달라 하고 주면 안 먹는다고 하고 변덕이 죽 끓듯 합니다. 아이들의 그런 모습도 필자 눈에는 참 귀엽습니다. 마지막에 누룽지죽을 시켰는데 두 살짜리 손녀가 넙죽넙죽 잘도 받아먹습니다. 손녀의 입맛에 맞나봅니다. 한 번 더 먹이겠다고 남은 것은 싸달라고 말하는 며느리가 대견합니다.
며느리는 현재 아이들 양육을 위해 육아휴직을 냈습니다. 첫째는 유치원에, 둘째는 유아원에도 보내고 발레 학원도 보냅니다. 병원에도 자주 가야 합니다. 혹처럼 붙어 있는 두 살짜리는 업고 동동걸음을 하기도 하고 승용차로 운전도 해야 합니다. 물론 아들이 적극 돕지만 아이의 양육은 대부분 엄마의 손이 필요합니다. 며느리가 참 고맙게 느껴졌습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도 아내의 손을 잡고 고맙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 의미를 알 것 같습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며느리가 카톡으로 항상 감사한 마음이라고 글을 보내옵니다. 필자도 고맙다고 답글을 달았습니다.
손녀가 태어난 지 6개월이 지났다. 남들은 손녀 보고 싶어 자주 가는 줄 안다. 그러나 동네도 좀 멀고 자주 가는 것이 아기에게 좋을 것 같지 않아 자제하다 보니 등한시 하게 된 것이다. 태어났을 때 병원에서 보고 그 다음 산후조리원에서 집으로 돌아 왔을 때 가본 것이 전부였다. 솔직한 마음으로는 아기는 대개 비슷하고 아직 소통이 안 되니 그냥 보기만 할 뿐이라 별다른 생각은 안 들었다. 남들은 손주가 태어나면 귀엽다며 손주 자랑에 열을 올리는데 나는 아기에 대한 정이 없는 편이다. 아들딸이 고만할 때 나는 중동에 나가 있는 바람에 아기에 대한 정을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
아들이 사는 사당동 근처에 갈 일이 있었다. 산행을 하고 뒤풀이로 저녁도 먹었고 술도 거나해서 바로 집으로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너무 무심한 할아버지 소리를 들을까봐 아들에게 연락을 했다. 마침 집에 있다고 했다.
동네가 주택가라서 그런지 가게가 안 보였다. 제 철 과일이나 사려고 했었다. 편의점은 있는데 마땅히 사들고 갈 것도 없어 또 만만한 화장지 한 뭉치를 사 들고 갔다. 그리고 아들과 마실 막걸리 두 병을 사 들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손녀가 앉아 있었다. 늘 보던 바퀴보행기가 아니고 바퀴 없는 보행기 같이 생겼다. 정면으로 나를 보고 있는데 카메라를 들이 대니 금방 울상이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소통한 순간이다. 내내 누워 있다가 오늘부터 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검은 색 재킷을 입었으니 무섭게 느껴졌을 것이다. 여자들은 자주 드나들었으나 남자는 내가 처음 이라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나는 개를 좋아하는데 어느 별장에 갔을 때 그 집 개가 나를 문 적이 있다. 개가 임신 중이라 예민해서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 그보다는 내가 어두운 색 옷을 입고 정문이 아닌 계곡에서 나타났기 때문에 경계심으로 그랬다고 추측해본다. 경험상 개들은 복장을 보고 사람을 차별한다. 우편배달부나 청소하는 사람에게는 짖지만 하얀 드레스셔츠에 정장을 한 사람에게는 짖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손녀가 느낀 할아버지의 이미지는 어두운 색 옷을 입고 나이 들어 무섭게 생긴 남자였던 것이다. 거기에 막걸리를 마셔 술 냄새가 풍풍 나니 그걸 할아버지 냄새로 기억할 것이다. 장차 이미지를 바꿀 수 있는 기회는 많겠지만, 일단은 그런 모습으로 상면한 셈이다.
요즘 다행히 전처가 일주일 간격으로 드나든단다. 퇴직 하고 나서 할 일도 없던 차에 귀여운 손주 보러 오기도 하고 육아 경험도 들려준단다. 두 자녀 키울 때 맞벌이를 하느라고 고생을 많이 했다. 처음엔 동네 할머니들에게 맡겼으나 할머니들은 책임감이 크지 않아 늘 노심초사했다. 출근할 시간은 되었는데 할머니가 사정이 있어 못 온다고 하면 발만 동동 굴렀던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나마 어느 해 겨울인가 유난히 추워서 고령의 할머니들이 돌아가셨다. 새로 사람을 구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회사 일에 바빠 어떻게 해결했는지 조차 모른다. 그때의 애로를 생각하고 며느리가 출산휴가를 마치고 곧 출근하게 되면 손주를 돌봐준단다. 다행이다.
무엇보다 아기가 좋아할 복장부터 표정, 말씨를 어느정도 다듬어야겠다. 할아버지가 되려면 일정한 훈련을 통해 자격을 갖춰야 하지 싶다.
체계적인 의료 서비스, 문화센터, 스포츠센터에 어린이집, 뇌 건강센터까지. 경기도 용인에서 만난 삼성노블카운티는 스포츠와 문화 서비스와 함께 지역 주민과의 공존, 가족적 연대까지 추구하고 있는 하나의 마을공동체였다. 또한 자연과 도시의 장점을 혼합하여 이상적인 융합형 시니어타운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래의 시니어타운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모종의 해법으로 제시될 수 있는 곳이었다. 고준호(高準浩·59) 삼성노블카운티 원장이 직접 말하는 노블카운티의 특별한 강점을 확인해 봤다.
고준호 원장은 출근하면 항상 확인하는 일이 있다. 호숫가에 산책 나온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어머님, 잘 주무셨나요?”, “아버님,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아드님은 잘 다녀가셨나요?” , “불편한 곳은 없으신지요?”, “오늘은 패셔니스타 같아요” 살갑게 건네곤 한다. 매일 회원들을 살피고 이것저것 살뜰히 챙겨 주는 것이 몸에 배었다. 가끔씩 나누는 일상의 안부는 회원들에게 힐링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가족들보다 더 가까운 친구가 됐다. 회원들은 남 보다 못한 자식들보다 고 원장이 때로는 든든한 안식처다. 누군가에게, 무언가에 애정을 쏟는다는 일은 참 즐거운 일이다.
회원들이 더 활기차고 행복한 제2의 인생을 누릴 수 있도록 일조하고 있는 고 원장은 세상 살아가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가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시니어타운은 부자들만 간다’는 말은 좀 과장된 거죠. 부유한 어른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지만, 열심히 벌어 안정적인 연금을 받을 수 있는 정도면 부부가 아파트에서 생활하는 것보다 저렴하게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거든요. 다양한 동호회가 잘 조직돼 있어 회원들의 삶에 활력을 불어넣어요. 그래서 이 안에서는 교우관계가 왕성해요. 여기서는 어머님들의 활동이 활발하고요. 합창단, 당구, 사진, 탁구도 새로 배우시고, 회원들끼리 인생의 선후배로서의 교우관계로 행복한 시간을 채워 나가고 계십니다. 노블카운티 정원에서 서로 부축해 가며 다정하게 걸어가는 회원부부를 볼 때면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더 편하게 해드려야지 싶어집니다.”
열심히 일하고 은퇴한 분이라면 큰 걱정 없이 비교적 품위 있게 노후를 보낼 수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건강하며 취미와 사교활동으로 행복을 누리면서 노후를 편안하게 즐길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간의 존엄이 아닐는지.
이러한 삼성노블카운티는 2001년 5월 삼성생명 공익재단이 설립, 운영하고 있는 시니어타운이다. 건강하고 활력 넘치는 시니어가 독립적으로 생활하는 일반세대(타워A, B동)와 일상생활에 도움이 필요한 시니어를 위한 프리미엄 세대로 구분되는 노블카운티에는 총 553세대가 입주해 있다. 지상 20층, 지하 3층 규모의 건물 2동으로 이루어져 있고, 각 실의 면적은 30평형대, 40평형대, 50평형대, 70평형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어 있다. 또한 타운 내 시설들은 지역 주민들에게도 개방되어 함께 이용하는 장소로 운영되는 등 도심형 시니어타운의 이점도 있는, 세대 간 소통으로 대표적인 시니어타운이다.
도심과 자연의 만남, 세계적으로 이런 시설은 드물다
“15년이 넘은 곳이라 여기는 외국 분들이 자주 방문합니다. 우선 외국 분들은 조경을 보며 아름답다며 놀랍니다. 그리고 지역민과 함께 쓸 수 있는 센터들이 같이 운영된다는 것에도 놀라죠. 일본도 도심형 시니어타운이 있는데 아주 도심에 있지 않으면서 자연 환경을 갖추고 지역 주민과 어울리는 곳은 거의 없어요. 노블카운티는 도심과 자연의 장점을 갖춘 시설이죠. 설립할 때부터 이런 취지로 개발한 시설은 드물어요.”
삼성노블카운티의 원장으로 취임한 지 1년 6개월이 되는 고준호 원장은 국내 최고 수준의 시니어타운 중 하나로 손꼽히는 노블카운티에 대해 세계적으로 봐도 이런 시설은 드물다고 소개했다. 그렇다고 노블카운티를 국제적으로 키우겠다든지 하는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노블카운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조금 더 편하고 더 만족하며 살 수 있게끔 해야겠다는 생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밝혔다.
“와서 보니 실버타운의 경영자는 반은 호텔 지배인이고 반은 아파트 관리소장이더군요. 호텔 지배인은 뭐랄까, 고급스런 고객을 모시고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역할이죠. 아파트 관리소장은 서민들이 사는 문제, 예를 들어 수도 흙탕물이 나온다, 왜 쓰레기 제때 안 치우냐, 관리비 왜 비싸냐 등등 소소한 불편 사항을 해소해 주는 역할입니다. 저는 그 롤들에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고 원장은 회원들을 편안하게 모시는 게 목표라고 말하는 것처럼 특유의 소박한 분위기가 있어 보였다. 회원들 생활의 작은 것부터 다듬어 주자는 생각은 겸손함도 있지만 보다 회원들의 주거만족도를 높여 주자는 현실적인 차원도 있었다.
“우리나라 실버산업의 문제점들이 흔히 지적되는데 그런 것에 관심 갖는 것보다 왔다 갔다 하다가 마주치는 한 분 한 분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거죠. 대부분의 회원님들이 ‘여기가 천국이야’라고 말씀하시는 게 여기에서 최상의 서비스를 받는다가 아니라 그런 시스템에 만족하시는 것이라고 봅니다.”
나이 들면 모여서 살아야 한다
고 원장은 자신이 와서 새롭게 한 건 하나도 없고, 이미 구축된 시스템이 훌륭하게 움직이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이병철 회장님은 노블카운티를 어떻게 지으라고 말씀은 안 하셨고 복지의 사각지대인 의료, 육아, 여성, 노인 문제에 뭔가 기여할 수 있는 걸 하라고 공익재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도적으로 만들어진 게 삼성의료재단이고 두 번째는 어린이집이었으며 다음이 노블카운티였죠. 노블카운티를 지을 때는 이건희 회장님이 선대 회장님의 마인드를 갖고 노인 복지 사업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노블카운티를 지으면서 이건희 회장님이 지시한 게 하루 종일 어린이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고 원장은 노블카운티에 오기 전에는 시니어 주거시설에 대해 호감이 없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개인적으로 여러 사람이 모이는 시설에 대해서 거부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블카운티와 함께 시니어타운을 접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한다.
“나이 들면 모여서 살아야겠구나 싶어요. 안전에 관한 문제가 가장 큽니다. 의료적인 안전도 있고 생활 안전, 보안 등의 문제도 있어요. 시니어들 집은 방범에 다소 허술하기 때문에 범죄 등에 취약하고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해도 집에서 버스 정류장까지, 전철역까지 가는 게 다 건강 면에서 리스크가 돼요. 한마디로 안전 리스크에 항상 노출돼 있는 게 시니어입니다. 특히 낙상이 문제죠. 넘어져서 다치면 그로부터 노환이 시작돼요. 삶의 질이 떨어지고 의료비 지출 커지고 운동을 못 하니 건강도 나빠지고…. 특히 80세가 넘어가면 그런 리스크가 항상 있게 됩니다. 아파트에 살아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이 있나요? 그런데 여긴 식사할 때 다 같이 모여요. 산책할 때도 모이고. 그리고 직원들이 항상 보고 있고. 그래서 혼자 살 때 발생하는 리스크가 없어요. 단체 생활의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모여 사는 게 유리할 수 있는 겁니다.”
노후인구 급증, 이들의 주거를 충족시킬 방안 조성해야
노블카운티의 입주회원들 나이 평균은 83.5세. 부부는 35%정도고 65%가 싱글이다. 남녀 비율은 7:3으로 7이 여자다.
“당뇨병을 가진 분들이 많아요. 이분들 식단은 별도로 차려 드립니다. 그 외에는 집 밥처럼 만들고 있어요. 건강식만 챙기는 게 아니라. 제일 인기 있는 메뉴는 냉면이죠. 그 외에도 다양한 메뉴를 제공해 드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외부에서가 아니라 영양사, 주방장 등을 직접 고용하여 자체적으로 만드는 음식들입니다.”
노블카운티에서 일하는 스태프는 총 450여 명에 달한다. 이 많은 숫자는 노블카운티에 다른 시니어타운과는 다르게 지역에서 공동으로 사용하는 스포츠센터 등의 시설들이 있기 때문이다. 시설 관리 감독 및 프로그램 제공과 강사 등을 위한 다양한 인력들이 노블카운티에서 일하고 있다.
“시니어타운을 경험해 보니 어른들에게 권할 만한 시설이 전국에 얼마 되지 않다는 걸 깨달았어요. 전국에 수없이 많은 요양시설들이 있는데, 시니어타운 같은 양로시설도 많이 만들어야 하지만 요양시설은 정부에서 정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고 생각해요. 민간부문도 계속 활성화되어서 시니어들이 믿고 갈 수 있는 곳이 많아져야 한다고 봅니다. 노블카운티는 비싸니까(웃음). 그런데 그 숫자가 너무 적어요. 양로시설은 신뢰도가 확실한 곳이 20곳도 채 안 될 거예요. 양로시설은 요양시설과 달리 초기 투자가 필요한데 정부를 탓할 건 아니지만 대기업들이 투자를 하게끔 환경이 만들어져야 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기업들은 안 그러면 안 해요. 특히 요즘 기업주들은 젊어져서 이런 데 신경을 잘 안 쓰거든요.”
고 원장은 사회공헌도 좋지만 그보다는 기업적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명분은 창대하되 운영은 기업답게 하게끔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걸 사회공헌이라고 하면 할 기업들이 없어요. 그렇게 접근하면 안 되고 기업 활동으로 하게 해 주면서 경영 이념을 공익사업으로 하면서 운영하게 해 줘야지 공익사업이라고 하면 누가 합니까. 정부에서도 지원해 주고, 운영이 정상화되면 그 다음부터는 민간 사업자들도 좋은 뜻을 가진 사람들은 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고 해야죠. 공익사업으로만 생각하면 안 되는 게 개인들도, 기업들도 이윤을 찾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움직이거든요. 과거 기업 1세대들은 국가에 기여해야 한다는 마인드가 있었는데 지금은 아닌 거 같아서 더 그렇습니다.”
공부와 함께 인생 2막 설계해요
고 원장은 삼성생명에서 전무로 은퇴한 후, 삼성생명에서 운영하는 재단으로 다시 와서 일하고 있는 셈이다. 일종의 재취업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제2의 취업에 성공한 셈이죠. 솔직히 인생 2막이라고는 생각은 안 하고 1막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시작한 직업이 과거에 비해 다른 점이 있을까?
“일은 현업에 있을 때보다 적죠. 다른 부서랑 협업하고 경쟁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으니까요. 그런 면에선 업무강도는 높지 않은데 끊임없이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입주자들의 불편이 늘어나고 시설은 노후화됩니다. 그런 면에선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습니다.”
인생 2막을 보다 청년다운 마음으로 준비하고 싶다고 말하는 고 원장은 나이 듦에 대하여 ‘좋다’라고 표현했다.
“청춘예찬이란 말도 있지만 20대, 30대 시절의 청춘이 아름다운 건 아닌 거 같아요. 투쟁적이고 경쟁적이라서 힘든 시기죠. 이루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과 피해의식도 많고. 다시 돌아가면 절대 그때로 가고 싶진 않다는 말이 맞는다니까. 피곤한 시대였으니까요.”
나이 듦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고 원장의 생각에는 시니어타운의 관리자를 호텔 지배인이자 아파트 관리소장이라고 칭한 그 특유의 담대함이 있었다.
“나이 들면 성공에 대한 부담, 자녀교육에 대한 부담, 가장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런데 나이 먹으면 의욕이 없어지는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세상을 다 알고 달관할 줄 알았는데, 끊임없이 공부해야 해요. 그런 면에서 좋아요. 말하자면 나이 들었다는 건 진짜로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진 거예요. 학교 다닐 때는 쓸데없이 뭘 배운 건지 모르겠어요(웃음). 대부분의 지식은 사회에 나와서 배우게 되잖아요. 정작 학생일 때는 정말 필요한 공부를 못 했던 거죠. 나이 든다는 게 그래서 좋은 거 같아요. 앞으로 나이 듦으로써 겪는 또 다른 낯선 경험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어요.”
소중한 삶을 위한 새로운 시도가 더 큰 즐거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기에 고 원장의 그 기다림은 더욱 뜻 깊은 것이리라.
>>삼성노블카운티
삼성노블카운티는 약 22만4000㎡(6만8000여평) 부지 위에 독립생활이 가능한 타워 동(2개동 553세대, 30~72평)과 치매·중풍 등의 노인성 만성질환이 있는 경우 24시간 간호와 간병을 체계적으로 제공하는 요양센터인 너싱홈(178 베드, 1, 2, 4인실)을 운영하고 있다. 입주에 필요한 비용은 입주 거실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타워 동 36평(전용 18평)에 입주하는 경우 보증금은 3.5억~4.8억원, 월 생활비는 독신 210만원, 부부 340만원 정도이다. 보증금은 퇴소 시 전액 반환되며, 생활비는 회원 전용 식당에서 맛과 영양, 건강을 고려한 식사, 청소 및 침구류 세탁, 부대시설 이용, 세대 관리비 등이 포함된 금액이다.
영화감독 꿈꾸던 소녀 음악PD가 되다
인터뷰 이태문 일본 통신원 gounsege@gmail.com
작은 체구에 단단한 관록을 풍기면서 함박웃음으로 맞이해 준 ㈜콘코르디아(CONCORDIA)의 대표 겸 음악 프로듀서 곤도 유키코(近藤由紀子, 67)는 이시카와현(石川縣) 나나오시(七尾市) 출신.
육군비행학교를 나와 육군항공대 조종사로 태평양 전쟁 때 동남아시아와 인도양에서 전투를 치르고, 오키나와에서 특공대로 소집돼 죽음의 출격을 앞둔 상황에서 1945년 8월 15일 패전을 맞이한 부친, 그리고 평범한 주부였던 모친 사이에서 유키코는 1949년 1월에 태어났다. 바로 이른바 일본의 전후 베이비붐 세대를 뜻하는 단카이(團塊) 세대인 셈이다.
“철들 무렵 늘 영화관에 있었다. 당시 나나오시에는 오락물 혹은 엔터테인먼트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다. 엄마 세대는 전쟁의 아픈 기억과 상처받은 마음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영화였는데, 엄마를 따라 서양 영화를 비롯해 일본 영화 등 모든 장르의 작품을 봤다. 그러다가 혼자서 ‘할머니를 찾으러 왔다’며 영화관에 들어가 작품에 푹 빠져 하루하루를 보냈다. 아울러 영화와 관련된 음악도 열심히 들으면서 막연하게나마 ‘영화감독’이라는 꿈을 키웠다.”
청운의 뜻을 품고 와세다 대학으로
영화감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더 큰 물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되고자 유키코는 도쿄(東京)의 와세다(早稻田) 대학 제1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 막 올라온 소녀의 눈에는 모든 게 신기하고 낯설기만 했다. 이웃사촌처럼 터놓고 지냈던 나나오시의 생활과는 완전히 다른 별세계(別世界)에 크고 작은 문화충격도 받았지만 영화 때문에 싹튼 꿈을 위해 뭐든지 적극적으로 달려들어 하나라도 더 배우려고 노력했다.
“아는 친지도 없고 인맥도 없는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로 처음부터 하나씩 쌓아 나가야 했다. 신기하게도 주위 분들이 많이 도와 주셨다. 시골에서 올라온 순진한 소녀가 열심히 뭔가를 잡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예쁘게 봐 준 것 같다.”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TV방송국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됐는데, 학생 신분으로 일본 엔카(演歌)계의 최고봉인 가수 미소라 히바리(美空ひばり), 거물급 여배우 나카무라 타마오(中村玉緖) 등의 도우미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직접 옆에서 지켜보면서 영화계에 대한 동경심도 더욱 강해졌지만 한편으로는 남성 중심의 폐쇄적인 영화계 풍토에서는 여성의 입지가 정말 좁다는 현실도 깨닫게 됐다고 한다.
대학 나와 첫 직장은 ‘이와나미 홀’
유키코는 대학 졸업 후 프랑스에서 영화를 배운 다카노 에츠코(高野悅子, 1929년생. 영화운동가, 영화 프로듀서, 방송작가 및 연출가 등)가 운영하는 ‘이와나미(岩波) 홀’에 입사한다. 당시 이와나미 홀은 232석의 작은 극장이었지만,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을 비롯해 유명 사진가 등 당대를 대표하는 문화 예술인들이 드나드는 사랑방 역할도 했다.
“다카노는 ‘마음’과 ‘신념’으로 일했다. 진짜는 언젠가 반드시 세상의 빛을 받으며, 평가받을 것이라는 진지한 자세를 그때 배웠고, 이것이 나의 출발점이 됐다.”
이와나미 홀에서 2년간 근무 후 그녀는 일을 포기한다. 결혼으로 두 아이가 생겼으며, 무엇을 하든 하나에만 집중해 모든 힘을 기울이는 그녀는 망설임 없이 육아를 선택해 엄마의 길을 걷는다.
음악계에 신선한 바람을
두 아이의 엄마로서 아낌없는 사랑으로 육아를 마친 유키코는 49세 때 아티스트 프로듀서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물론 전업주부로서 살림을 꾸리는 틈틈이 시나리오 작가를 공부하고, 드라마 기획서도 쓰는 등 조금씩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녀는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가코 다카시(加古隆, 1947년생)가 음악을 담당했던 NHK 특별 다큐멘터리 에 감동하여 2000년 스페셜 콘서트를 기획해 도쿄, 오사카(大阪), 가나자와(金澤), 후쿠시마(福島) 등을 돌며 전석 매진의 흥행을 거두었다. 2003년에는 히비야(日比谷) 공원 야외음악당에서 개최한 에도(江戸) 400주년 기념 오프닝 이벤트 등도 꾸미는 등 늦깎이 프로듀서의 열정과 실력이 조금씩 평가받기 시작했다.
“20세기 전쟁 때문에 돌아가신 분들의 레퀴엠으로 콘서트를 열어 21세까지 이어지지 못한 그들의 넋을 제대로 위로하는 진혼곡(鎭魂曲)을 들려주고서 21세기 평화와 생명의 시대로 힘차게 나아가자는 뜻을 담으려고 했다. 기획서를 쓰고 2년 동안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뜻을 함께하는 분들을 모았고 스폰서를 찾으려고 동분서주했다. 그 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힘들지만, 객석을 가득 메운 관객들의 눈물과 박수로 다시 한번 음악의 힘을 느꼈으며, 큰 보람과 함께 정말 값진 보물을 얻은 기분이었다.”
한국과 인연도 깊어
2015년 1월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아 양국의 젊은 성악가 2명이 함께 기념 공연을 펼친 바 있다. ‘한국판 폴 포츠’로 불리는 팝페라 가수 휘진(권휘진)과 일본인 테너 가수 고하시 고헤이(古橋鄕平)가 도쿄 지요다구(千代田区)의 기요이(紀尾井) 홀에서 ‘같이 울리는 순간’이라는 주제로 듀엣으로 화합과 희망의 선율을 선보이는 감동적인 무대를 꾸몄다.
물론 곤도 유키코가 기획한 공연이었다. 그녀는 가수 휘진에 앞서 2004년 9월부터 R&B 남성듀오 ‘소리(SoRi)’, 그리고 2007년 솔로로 전향한 가수 케니(홍기현) 등을 일본에 데뷔시키는 등 꾸준히 실력 있는 한국 아티스트를 찾아내 적극 소개해 왔다.
휘진이 동일본 대지진으로 상처 입은 사람들에게 음악의 힘으로 미래를 믿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피해 지역을 수차례 찾아가 자선 콘서트를 펼쳤듯이 케니도 2007년 9월 미얀마 민주화 시위를 취재하다 총에 맞아 사망한 사진기자 나가이 겐지(長井健司)에게 바치는 곡 ‘눈물-세계 어디선가 이 순간’을 발표해 수익금의 일부를 캄보디아 빈민을 돕고 있는 민간단체 등에 기부했다. 부제 ‘흐르는 눈물을 미래의 아이들 빛으로 바꾸기 위해’가 붙은 이 노래는 곤도 유키코가 직접 노랫말을 썼다.
“전쟁을 모르는 세대가 대부분을 차지하는 요즘 세계의 움직임이 정치적으로 위험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일본은 수많은 젊은이의 희생 위에 패전을 맞이했고, 그 뒤를 이어 태어난 우리 단카이 세대는 평화 속에 살아올 수 있었던 걸 감사하면서 계속 평화를 지켜가야 하는 사명이 있다. 두 번 다시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려 미래로 이어가는 징검다리 역할이 바로 내가 할 일이고, 한일관계도 마찬가지로 문화 교류를 통해 서로 뜻을 나누고 마음을 함께하는 자리가 계속 이어져야 한다.”
원점에서 소통을 다시 생각
2003년 54세의 나이로 자신의 뜻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 음악·예술 기획사 콘코르디아(CONCORDIA)를 설립한 곤도 유키코는 평화와 소통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했다.
“음악·예술 문화는 평화의 사절이며, 사람들 마음을 비추는 밝은 빛이라고 믿는다. 앞으로도 살아 꿈틀거리는 생명을 응시하면서 마음에 와 닿는 감동을 고스란히 전달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음악과 예술을 통해 국경, 민족, 언어의 벽을 뛰어넘어 상호 소통과 연대감으로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길 바랄 뿐이다.”
2015년 5월 회사 창업 12주년을 맞이해 프로듀서 이름으로 결혼 전 이름인 후지하시 유키코(藤橋由紀子)를 내걸고 원점에서 다시 활동을 재개할 것을 선언한 그녀는 “신으로부터 목숨을 받아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사는 건 인간의 도리이다. 또한 일하면서 만나는 수많은 인연을 통해 교류를 넓혀가면서 그 만남을 소중히 여길 것이다. 국경을 넘어 서로 돕고 힘을 합치는 것, 바로 이것이 소통이고 문화의 시작이다”며 시종 웃음을 잃지 않았다.
우리 시니어들이 결혼 하던 시절인 1970년대 말에는 남자 27세, 여자 25세 정도에 결혼하는 사람이 많았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란 가족계획 시대였으므로 보통 여자 30세 이전에 자녀 둘을 가진 가정이 많았다. 그러므로 여자가 30세를 넘으면 ‘노처녀’라며 시선이 곱지 않았다.
요즘은 풍속도가 많이 달라졌다. 여자 30세까지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이 많다. 30세 정도는 노처녀라고 부르지도 않는다. 심지어 결혼도 40% 정도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한다.
내가 갓 결혼했을 때는 가족계획이 따로 없었다. 결혼했으니 아이가 생기면 낳고 둘째까지는 그렇게 유지했다. 그 당시만 해도 맞벌이는 흔치 않았으나 맞벌이를 하게 되면 사람을 두고 애를 보게 했다. 처음에는 애 봐주는 할머니 봉급이나 직장에서 받는 봉급이나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서 직장은 승진이 있으니 그 격차가 벌어지면서 애 봐주는 할머니 봉급을 감당할 수 있었다. 문제는 애 봐주는 할머니를 더 이상 구하기 힘들어졌다는 것이다. 요즘은 아이들 맡길 시설이 많이 생겨 사정은 나아졌다.
요즘 30대 여성들은 20대에 결혼한 사람과 30대에 결혼 사람의 예에서 큰 차이가 있다고 들었다. 20대에 결혼한 사람은 20대에 아이가 생기면 곧바로 퇴직하고 집에 눌러 앉아 경단녀가 된다. 직장 봉급이 아직 초급 사원 때이기 때문에 많지 않아서 포기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예 결혼을 포기하거나 연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30대에 아이를 갖게 되면 이미 직장에서 과장 급 정도의 관리자가 되어 있을 때라는 것이다. 직급도 높아져 그동안 쌓아 온 경력을 쉽게 포기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생겨도 육아 휴직을 일찍 끝내고 회사로 복귀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 하나도 버겁다. 둘째는 아예 꿈도 못 꾼다는 것이다. 그래서 남녀가 결합하여 둘을 낳아야 인구가 유지되는데 하나만 낳으니 인구가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양육비용도 만만치 않다. 우리 때처럼 학교만 다니던 시절이 아니라 각종 과외 수업을 필수적으로 받아야 하는 시대이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니 안 할 수도 없다. 감당이 안 된다는 것이다.
30대 중반에 첫 아이를 낳으면 그 아니가 제 밥벌이를 하려면 25년 이상이 필요하다. 퇴직연령이 점점 빨라지는 세태를 보면 아이에게 한창 돈이 들어갈 나이에 직장을 그만둬야 하는 것이다.
인구 감소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많이 낳으라는 구호뿐이다. 여건이 많이 나을 형편이 아닌데 말로만 많이 낳으라는 것은 설득력도 없고 실효성도 떨어지는 것이다.
20대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사회 모든 여건이 바뀌어야 한다. 머리가 더 커지면 배우자를 고르는 눈높이도 높아져 점점 더 결혼이 어려워진다. 굳이 대학교를 나와야 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지금의 교육제도도 고등학교나 전문대학 만 졸업하면 취업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대학교를 나와도 취업이 안 되니 대학원에 가다 보니 결혼이 점점 늦어지는 것이다. 청년 취업은 그래서 중요하다.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연기자의 길을 함께 걷는 나와 집사람은 상반되는 점이 많아요. 감성적인 나는 화가 나면 속에서 무언가가 위로 끓어오르지만 이성적인 집사람은 그럴수록 감정을 아래로 가라앉혀요.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상반된 부분을 닮아가는 것도 꽤 재미가 있습니다. 제가 아내의 연기하는 모습에 반해 결혼했지요. 46년 동안 부부로, 동료 연기자로 한길을 함께 걸어왔는데 참 행복합니다.” 중견 연기자 최불암(76)은 1970년 김민자(74)와 결혼해 46년 동안 부부로, 배우의 길을 함께 걷는 동료로 살아온 생활이 많이 행복하다고 했다.
“한참 활동을 할 때는 서로의 연기와 작품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했지요. 저는 남편의 연기에 대해 엄격하고 냉정하게 평가하는 스타일이에요. 요즘에는 남편이 활동을 잘할 수 있도록 건강에 많이 신경을 쓰게 되네요. 연기자라는 한길을 걸었기에 연기자로 일하면서도, 부부생활에서도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었고 큰 어려움 없이 잘 살았어요.” 김민자 역시 같은 직업을 가진 남편 최불암에 대해 후한 점수를 줬다.
근래 들어 최불암·김민자 부부처럼 연예인끼리 결혼하는 커플들이 늘고 있다. 교사, 의사, 변호사 등 같은 직업을 갖거나 식당, 농사 등 같은 일을 하는 부부들이 적지 않다. 같은 일을 할 때 상대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소통도 잘돼 직장생활뿐만 아니라 부부생활에서도 활력이 생긴다는 부부가 있다. 반면 서로를 너무 잘 알아 배우자에 대한 긴장감과 설렘이 사라지는 데다 일하는 능력과 수입의 편차 등으로 부부 관계가 소원해지는 경우도 있다.
연예인은 일거수일투족이 대중의 관심을 받고 대중매체의 조명이 잇따르기 때문에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며 살아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매스미디어에 의해 구축된 이미지와 실제의 간극도 존재할 수밖에 없다. 또한, 드라마나 영화, 음악 등 작품마다 반응과 평가가 다르고 수입과 직결되는 인기는 매우 가변적이다. 일하는 활동량도 인기에 따라 수시로 변한다.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나는 곳’이 연예계이기에 소문과 스캔들이 상존한다. 배우나 가수라는 직업은 일반 직장과 전혀 달라 근무 형태가 매우 불규칙적이다. 이러한 특성을 가졌기에 배우, 가수, 예능인 등 연예인끼리 결혼한 부부들은 일반인이 알지 못하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최불암·김민자 부부는 연기자라는 길을 함께 걸어 서로를 더 잘 이해해 생활면에서 많이 행복하고 배우로서 더 발전할 수 있었다고 입을 모은다. 최불암·김민자 부부처럼 가수, 배우, 예능인 등 연예인의 길을 함께 걷는 부부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연예인 부부의 삶은 천양지차다. 연예인 부부마다 연예 활동과 가정생활에 큰 차이를 보인다. 1964년 ‘세기의 결혼식’이라 명명되며 수많은 대중매체와 대중의 관심 속에 결혼한 영화 스타 신성일(79)·엄앵란(80)부부는 결혼 이후 활동에서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 신성일은 계속해서 영화 활동을 왕성하게 했지만, 엄앵란은 배우 활동을 중단하고 가사와 사업에 전념했다. 부부생활 역시 남편 신성일의 외도로 인해 1977년 별거 상태에 들어가 현재에도 신성일은 경북 영천에, 엄앵란은 서울에서 서로의 삶을 간섭하지 않으며 자유롭게 살아간다.
엄앵란은 방송 등을 통해 “시댁에서 연예 활동을 반대했고 또한 가정을 책임져야 해서 결혼 이후 배우 활동을 접고 육아와 사업에 전념했다. 남편의 외도 등으로 매우 힘들었지만 내가 선택했으니까 내가 책임을 지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해 견디며 살았다. 남들은 신성일 씨가 워낙 매너가 좋고 잘해줘 ‘당신 좋겠다’고 하면 속으로 ‘웃기고 있네’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다. 신성일씨는 남편으로서는 좋은 점수를 줄 수 없지만, 연기자로서는 최고다. 같은 배우 입에서 봐도 그렇다”고 말했다. 신성일은 저서 등에서 “아내 엄앵란은 아이들에게 최고의 엄마이고 아내로서도 최고다. 여러 가지 일로 내가 많이 힘들게 했다. 배우 신성일이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내 덕분이다. 팬들을 실망하게 하는 이혼은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고 밝혔다.
1994년 방송된 드라마 남·녀 주연으로 나선 것이 인연이 돼 연인으로 발전해 1995년 결혼한 차인표(49)·신애라(47) 부부는 신성일·엄앵란 부부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차인표·신애라, 두 사람은 연예 활동은 물론 두 아이의 입양, 자선 활동, 종교생활에 이르기까지 함께하며 진정한 동반자의 삶을 살고 있다.
차인표·신애라 부부는 작품 선택에서부터 아이들의 육아 방향에 이르기까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대화를 하며 결정한다. 신애라는 아이를 출산하고 두 아이를 입양하면서 육아, 가사, 그리고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스스로 작품 출연과 방송 활동을 줄였다. 반면 차인표는 결혼 이후에도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활발한 활동을 했다.
신애라는 “아이들과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싶어 연예 활동을 제가 스스로 줄인 겁니다. 물론 좋은 작품이 섭외가 오면 출연했지요. 전 저보다 남편이 연기자로서 더 잘되는 것이 좋아요”라며 결혼 후 차인표 인기는 치솟고 자신의 인기가 낮아진 것에 대해 오히려 더 좋다고 했다.
신애라는 “결혼 여부를 떠나 차인표씨만큼 저와 잘 맞는 사람이 없습니다. 서로가 받아 줄 수 있는 단점과 서로가 기뻐할 만한 장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고 남편 차인표에 대해 말했다. 차인표는 “당신은 옷장이었다. 문만 열면 필요한 옷이 있었다. 추울 땐 두꺼운 외투, 털장갑을 건네줬다. 무더운 날엔 시원하게 다니라고 모시옷을 내줬다. 나의 진실한 옷장이었다. 울면 울어주고, 기쁜 날 더 크게 웃어 주고 좋은 날 산책해 준 당신, 당신은 내가 있는 이유다”라고 신애라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드러냈다.
최수종(54)·하희라(47) 부부 역시 차인표·신애라 부부의 행보와 비슷하다. 최수종이 드라마 작품에 들어가면 하희라가 다른 것 신경 쓰지 않고 연기에 전념할 수 있도록 가정생활뿐만 아니라 남편의 대본 리딩도 옆에서 도와준다. 최수종 역시 하희라가 드라마에 출연하면 촬영장을 찾아 식사나 커피 등을 챙기는 일까지 서슴지 않는다.
특히 최수종 하희라, 두 사람 모두 연기대상을 거머쥘 정도로 연기파 배우라는 공통점이 있는데 연기 스타일이나 캐릭터 분석법이 다르지만, 서로의 연기에 대해 무한 지지와 격려를 해 발전을 꾀한다. 최수종은 “작품 선택이나 연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지만, 아내의 의견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편이다. 연기에 대해서는 무조건 격려를 해주는 편이다”고 했다.
예능인 부부 이봉원(53)·박미선(49)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연예인 부부와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박미선과 이봉원은 1989년 ‘철없는 아내’라는 개그코너에 함께 출연한 것이 인연이 돼 연인으로 발전했고 1993년 결혼했다. 결혼 이전 박미선은 스탠딩 개그의 일인자로 활약하며 인기 높은 개그우먼으로, 이봉원은 슬랩스틱 코미디와 성대모사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인 개그스타로 군림했다. 결혼 후 아내 박미선은 개그 프로그램뿐만 아니라 시트콤과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 MC로 활동영역을 넓히며 최고의 예능 스타로 부상했지만, 이봉원은 연예 활동보다는 일본 유학을 다녀온 뒤 프로덕션, 요식업 등 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하지만 이봉원의 사업은 실패를 거듭했다. 박미선은 연예 활동을 하면서도 육아뿐만 아니라 이봉원 사업 뒷바라지, 망한 뒤 수습까지 다 했다.
이봉원은 결혼 후 자신보다 아내 박미선의 활동이 늘어나고 더 인기가 많아진 것에 대해 “전 아내의 인기가 높은 것에 박수를 보내요. 나 자신이 위축되거나 그러한 것은 없어요. 원래 개그맨을 키우고 코미디 프로그램을 연출, 제작하는 일을 하고 싶었는데 결혼 후 아내의 도움으로 할 수 있었지요. 사업이 잘 안 돼 아내에게 미안할 뿐이지요”라고 말했다.
물론 연예 활동과 가정생활이 순탄하지 못한 연예인 부부도 많다. 대중의 시선을 의식해 행복한 것처럼 보이는 쇼윈도 연예인 부부에게는 연예 활동 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의 활동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가정생활에도 어려움을 초래한다. 쇼윈도 연예인 부부는 결국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의 감정이 사라져 파경을 맞게 된다.
“나는 당신을 작년보다 올해 더 사랑합니다.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하구요, 오늘보다 내일 더 많이 사랑할 겁니다. 당신은 어느새 존경하는 내 어머니의 모습을 닮아 있네요. 당신 옆에 오래 있을게요. 당신은 오래만 살아주세요.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할 수 있도록…” 차인표가 2001년 5월 24일 한국일보 지면을 통해 소개한 아내 신애라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다. 이런 사랑과 배우자의 연예 활동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다면 연예인 부부들의 행복한 동행은 지속될 것이다.
지피지기, 즉 적을 알면 백전백승. 하지만 손주는 적이 아니다. 쌍둥이에게도 세대 차가 있다는 유머처럼 아무리 인생의 대선배이지만 손주를 접하는 방법에 자식인 부모와 차이가 있고, 또 그 아이인 손주와도 세대와 문화의 차이가 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이런 모든 걸 뛰어넘어 손주랑 멋있게 그리고 알차게 지내는 방법은 무엇일까?
이태문 동경통신원 gounsege@gmail.com
1.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착각
손주가 잘 안 따른다며 고민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많다. 당연히 귀여운 손주를 보고 싶어서 어루고 달래지만 손주가 좀처럼 익숙해하지 않고 길들지 않는다면 무조건 사랑을 쏟아부을 게 아니라 왜 그런지 환경, 조건, 그리고 자신에게 문제는 없는지 등 먼저 그 원인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2. 며느리의 고민
할머니가 세 살짜리 손주를 때리는 걸 보고 정말 기가 찼다. 때린다고 해결될 것도 아니고 더 꺼리고 싫어질 텐데…
손녀에게 ‘손’하며 내미는 손을 잡고 웃는 할아버지 얼굴을 봤는데, 강아지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다루다니…
이런 속사정의 며느리가 있는 게 현실이다. 매를 들더라도 그것은 부모의 몫이고, 자칫하다가는 학대로 비칠 수도 있으니 절대로 삼가야 한다. 또한 손주는 절대로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애완동물도, 장난감도 아닌 엄연한 인격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3. 둘만의 원칙을 정하기
놀이를 통해 배우는 건 운동 및 인지, 판단 능력만이 아니라 협력과 문제 해결 과정의 사회성이다. 용돈을 주면서 돈의 가치와 쓰임새, 그리고 활용에 대해 함께 가르쳐 준다면 더 큰 효과가 있듯이 자칫 고집불통, 독불장군으로 자라지 않도록 적절한 원칙을 만드는 게 중요할 것이다.
놀이터에서 놀 경우에도 시간을 정하고, 간식을 주더라도 양을 정하는 식으로 무한 애정과 무한 만족은 구분해야 하겠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지나친 건 부족한 것만 못하다는 말처럼 뭐든지 정도껏 원칙 아래에서 행해져야 그 효과도 클 것이다.
4. 좋은 놀이법 공유하기
눈높이 교육이라는 말이 있듯이 손주의 시선에 맞춘 돌보기는 결국 손주가 받아들이기 쉽다는 걸 뜻한다. 앞서 소개했듯이 할아버지 할머니가 어렸을 때 즐겼던 놀이를 함께 하는 것도 좋을 것이고, 요즘 유행하는 놀이법도 배워서 서툴지만 함께 즐겼을 때 그 기쁨은 더 클 것이다
또한 같은 또래의 아이들에게 적극 물어보고, 같은 세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은 어떤지 그 사정도 들어본다면 정보의 폭도 넓어지고 시행착오도 줄일 수 있다. 게임중독에 빠진 청소년, 밖에서 뛰어놀지 않고 방에 처박혀 공부만 하다 체력이 약해진 요즘 어린이 등 사회적으로도 문제가 되고 있는 이런 것들도 결국 평소의 습관, 그리고 첫 단추를 어떻게 꿰느냐가 관건인데, 부모와 놀이법에 대해 상의하고 공유한다면 자신에게도 신선한 자극과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5. 새 육아법을 받아들이자
할아버지 할머니와 부모 세대간 흔히 문제가 되고 갈등의 씨앗이 되기 쉬운 게 바로 ‘육아에 대한 생각’, 즉 육아법의 차이다. 예를 들면, 툭하면 안기려는 버릇이 생기니 좋지 않다, 오냐오냐하면 버릇이 나빠진다 등등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간섭하게 되면 손주 때문에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가 소원해지고 나빠질 수 있다.
새로운 육아법은 받아들이되 선배로서 조언하는 것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다. 적절한 선에서 참고할 만한 경험과 지혜, 그리고 도움이 될 수 있는 조언을 아낌없이 전하고 함께 나눈다면 세대의 벽도 쉽게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손주와의 커뮤니케이션은 결코 어려운 게 아니다. 가장 자연스러운 평소의 모습 그대로 손주와의 관계를 차곡차곡 쌓고, 함께 나누며 지내는 시간은 알찬 삶의 활력으로 되돌아올 것이다.
6. 기억은 규칙 속에서 추억으로
일회성은 피하자. 뷔페 같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음식은 오히려 질리기 쉽고 식상하기 마련이다. 원하는 대로 뭐든지 들어주는 게 결국 손주를 유아독존(唯我獨尊)의 괴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걸 명심하고, 일회성보다는 반복, 그리고 규칙적으로 행하자.
집 냉장고에 있는 음식 재료로 요리를 함께 만들어 보는 걸 일주일에 한 번씩 해 보든가, 동네 산책을 매번 다른 길로 다녀 보는 것도 좋겠다. 아니면, 편의점과 슈퍼마켓에서 음식을 살 때 재료가 뭔지 성분과 열량 표시에는 뭐가 씌어 있는지 읽으며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면 금상첨화이겠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와 횟수를 거듭할수록 커뮤니케이션도 깊어지고, 반복되는 경험 속에서 소중한 추억으로 자리 잡아 나이가 들어도 잊지 못하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존재를 떠올리며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
7. 손주보다 자식에게 사랑을
손주가 귀여운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손주를 가장 사랑하는 존재는 자신이 아니라 부모임을 잊지 말고, 먼저 손주를 흐뭇하게 쳐다보기 이전에 자식에게 사랑을 쏟고 있는지, 혹은 손주 앞에서 자식을 혼내지는 않는지 뒤돌아볼 일이다.
매일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식사와 대화, 놀이에서 우선 순위를 정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리사랑이라는 말처럼 자식에 대한 사랑이 결국은 손주에게 이어지고 더 커진다는 점을 명심하자.
자식과의 신뢰 관계, 그 태도를 보고 손주가 크며, 또한 손주를 가장 아끼고 사랑할 자격이 있는 건 바로 자식임을 인정한다면 손주를 대하는 방법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로서 존경 받고 오래 살기를 바란다는 손주의 듬직한 말 한마디를 듣기 위해서라도 듬뿍 사랑을 쏟는 게 어쩌면 자식과 손주에게는 지나친 관심이고 간섭일 수도 있다.
8. 할아버지 할머니의 역할을 알자
앞서 말했듯이 귀여운 손주의 재롱과 투정, 그리고 어리광에 그저 오냐오냐 응해주거나 혹은 넘치고 남을 만큼 모든 걸 주는 건 과잉보호일 수 있다. 부모가 보더라도 좀 심하지 않나 싶을 정도로 분에 넘친 사랑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고, 도를 넘어선 간섭이 된다.
일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역할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지금까지 인생을 살아 오면서 많은 경험을 쌓아온 대선배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는 든든한 매력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연 날리기, 비눗방울 만들기 등 놀이 방법을 가르치면서 커뮤니케이션을 꾀하는 방법도 있다. 물론 놀이를 통해 인사법과 식사 예절 등을 가르쳐도 좋을 것이다.
특별히 손주를 가르친다고 의식하지 말고 평소 말투 그대로 이야기하며 함께한다면, 손주는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자연스럽게 배워 나갈 것이다.
인생 100세 장수시대가 됐다. 어언 70년을 거의 살았고 앞으로 살아야 할 날도 30년은 족히 남았다. 즐거웠던 추억은 인생의 등불로 삼았고 아팠던 기억은 좋은 가르침으로 남았다.
◇학생회장 후보로 인생의 희열
새 학기가 시작하는 봄을 맞아 필자 아파트와 가까운 초·중·고등학교에서는 학생회장선거가 진행되었다. 아침마다 교문에서 붉게, 푸르게, 노랗게 만든 피켓을 들고 성인보다 더 열심히 선거 운동하는 모습이 아름답게 보였다.
이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총등학생 시절 총학생회장 선거가 생각났다. 학생 수가 적고 선생님과 교실이 부족해 몇 개 학년이 한 교실에서 합동수업을 가끔 했던 지금은 아예 없어져 버린 시골의 조그만 초등학교 이야기다.
학생들은 학급장은 물론이요 총학생회장도 선거로 뽑는다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물론 선거를 해 본 일도 없었고 선생님이 임명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4학년이 되자 담임선생님이 급장선거를 시행했다. 산간벽지에서는 놀라운 변화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4.19혁명이 났던 해였다. 그런데 더 신기했던 건 필자가 급장에 뽑힌 것이다.
얼마 후 총학생회장선거가 실시되었다. 그간 6학년 중에서 임명하던 학생회장도 전교생이 직선하도록 바뀌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하기 힘들지만 4·5·6학년에서 한 명씩 후보를 내도록 했다. 필자는 4학년 대표로 학생회장 후보자가 됐다. 합동연설을 하고, 각 교실을 돌면서 선거운동했던 기억이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그리고 선거운동이 끝난 후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서 큰 칠판에 바를 정자를 그려가면서 진지하게 개표가 진행했다. 모두가 한 표 나올 때마다 목이 터지도록 함성을 질렀다. 6학년 선배가 당선됐다. 만약 그 선배가 낙선하였으면 어떡했을까? 지금 생각해도 다행한 일이었다.
문제는 다음에서 발생하였다. 5학년 형을 누르고 2등이 된 것이었다. 2등이 확정되는 순간 가슴에서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무언가 뜨거운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 같았다.
양말도 없이 맨발로 고무신을 신고 집으로 돌아오는 자갈길이 비단길처럼 포근하게 느껴졌다. 전교생이 모여 투표지 한 장마다 이름을 연호하던 개표장의 함성이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듯했다.
다음 날 학교가 내 집처럼 아늑하게 느껴졌다. 선생님들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칭찬해주셨다. 거의 처음 느껴보는 환대에 가슴이 벅찼다.
멀리만 느껴졌던 교무실을 즐겁게 찾는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교무실 한쪽에 있는 ‘미니 도서실’을 열심히 찾는 학동이 됐다. 비록 수십 권에 불과하나 교과서가 아닌 ‘책’을 부지런히 읽기 시작했다.
그때 만난 ‘장발장’·‘삼총사’·‘모세의 기적’ 등은 훗날 탐독했던 다른 책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고 인생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수줍음을 많이 탔던 ‘시골소년’은 읍으로, 대도시로, 그리고 서울로 진학해 학교생활을 재미있게 하면서 힘차게 성장했다. 그 밑거름은 첫 ‘희열’이었다.
◇인생을 바꿀 뻔했던 증기기관차
필자는 50년 전 고교 입시를 치렀다. 당시 중학교부터 전 과목에 대한 시험을 시행하던 시절이었다. 인생이 확 바뀔 수도 있었던 중요한 순간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다행히 대도시 소재 고등학교에 어렵게 합격했다. 시골 동네에서 몇 년에 하나 날까 말까 하는 영광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되지 않았다. 입학등록금 준비도 문제였으나 한 번도 가보지 않는 대도시로 등록하러 가는 것이 더 어려운 일이었다. 등록 마감은 다음 날 정오까지 주어졌고 추가등록은 인정되지 않았다.
필자는 결행이 잦은 버스를 기다릴 수 없어서 기차를 선택했다. 우리 마을 종점에서 아침 6시에 출발하는 버스는 정상적으로 운행해야 5시간 걸려서 광주에 도착하던 때였다. 그리고 비포장 자갈 도로에는 비가 내리거나 눈이 오면 버스가 다닐 수 없었다. 당시는 특히 겨울철이어서 더 그래 보였다.
전날 오후 3시간 넘게 걸어 나와서 읍내 기차역 앞 여관에서 자고 마감시각에 늦지 않으려고 새벽 5시 첫차를 탔다. 8시 광주에 도착하는 통학차였다. 문제는 엉뚱하게도 ‘기차’에서 터졌다.
칙칙폭폭 석탄 연기를 내뿜으며 힘차게 달리던 증기기관차가 화순에서 광주로 가는 너릿재 중간 오르막길에서 숨이 막히는 듯 멈춰 서고 말았다. 시커먼 열차는 제동이 잘 안 되는지 삑삑 요란한 소리와 함께 속절없이 뒤로 내달렸다. ‘정오 마감시각’ 맞추기가 걱정되기 시작했다.
화순역까지 밀려 내려온 기차는 한 시간 넘게 물과 석탄을 보충해 증기를 생산한 후 고개를 힘겹게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 숨이 차고 말았다. 후진과 에너지 보충이 반복됐다. 마감 시각을 놓칠 수도 있다는 공포감이 들었다. 당시에는 다른 수단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이나 숨이 막혔던 열차는 운행 예정 시각을 3시간 더 넘기고서야 겨우 목적지에 도착했다. 냅다 은행으로 뛰었다. 운명을 가를 뻔했던 순간이었다.
“운 좋은 학생이구나!” 잠시 후 접수창구를 닫으면서 격려해주었던 은행원 누나의 그 한 마디가 지금도 귀에 쟁쟁하다.
그때부터 ‘시간의 중요성’을 제일로 삼았다. 다른 것은 채우거나 보완할 기회가 주어지지만 한 번 지나간 시간은 결코 되돌릴 수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에 진출하여서도 약속시각에 늦지 않도록 노력했다. 모든 업무는 기한 전에 마감하고 여유를 가지는 것을 생활신조로 삼았다.
사회 은퇴 후 자원봉사와 교육 수강, 강의, 친구 모임에 세계 최고 수준의 대중교통을 이용하면서 그 편리함도 알았다. 나이 들어서 운전하는 부담도 덜어야겠다는 생각에 승용차 사용을 자제하고 있다.
가까운 곳에 사는 아들 가족과 ‘승용차 나눠 사용하기’도 하고 있다. 키는 하나씩 나누어 가지고 주차 스티커는 양쪽에서 발부받아 이용에 불편이 없도록 했다. 평일에는 아들 가족이 출ㆍ퇴근에 전용하고 특별한 일이 있는 경우에만 내가 사용한다.
◇첫 입학식 60년 전과 후
[새 학기를 맞아 환갑 띠동갑 쌍둥이 손주와 외손자의 입학식이 열렸다. 60년 전 초등학교 입학식이 연상됐다.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친구 잘 사귀면서 건강하게 자라기’를 바랐다.
오전에 쌍둥이 손녀와 손자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열렸다. 바로 집과 가까운 학교이지만 눈을 두리번거리면서 잔뜩 호기심을 드러냈다. 예나 지금이나 새로움에 대한 관심은 같은가 보다.
어머님의 손을 잡고 한참 걸어가서 참가했던 초등학교 입학식이 생각났다. 입학 전 몇 년 동안 할아버지가 만든 필사본으로 천자문을 공부하고 시조를 읊었다. 아버지에게 한글을, 어머니에게 산수를 익혔다. 그러나 ‘신학문’을 배우러 처음 가는 학교가 매우 궁금하여 밤잠을 설쳤다.
입학식이 진행되었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도 조용해졌다. 옛 입학식 때 교장의 ‘훈화’가 떠올랐다. 당시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뭔가 보통 사람과 다른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하였다. 라디오 소리도 들어본 일이 없던 그 시절, 풍금 반주 애국가를 처음 듣고 가슴이 뭉클했던 것도 기억났다.
책을 처음 받았고 어머니는 공책과 연필을 사줬다. 글씨와 그림이 함께 인쇄된 새 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잉크에 흠뻑 밴 책의 냄새가 정말 좋았다. 그때부터 책을 좋아하는 학생이 되었다. 어린 시절에 읽었던 책이 기억에 오래 남고 인생에 영향을 가장 많이 주었다. 요즘 아이들은 이미 좋은 책을 읽었기에 학교에서 받은 책에 대한 호기심은 크지 않을 터이다. 입학 전 예쁜 책가방과 필기구도 선물로 이미 챙겼는데 이것도 대단히 감동적이었다.
학교 재학 시절 제일 좋아했던 것은 장난감으로 재미있는 놀이하기였다. 그러나 손주들은 뛰어노는 것보다 체육관, 학원을 찾아 나설 것이다.
한국전쟁 후 지금의 최빈국보다 더 어려웠던 시절, 처음 본 공책과 연필도 신기하게 느껴졌다. 잘 깎이지 않는 연필을 날을 갈아가면서 조심조심 깎아주었던 아버님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공책은 한 번 쓰기도 어려울 정도로 잘 찢어졌다. 딱딱한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 공책이 파이지 않도록 글씨를 살살 그려야 하였다. 연필심 흑연으로 입술은 시커멓게 물이 들곤 하였다.
오후에는 외손자가 유치원에 입학하였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내년 초등학교 입학을 대비하는 중이다. 손재주가 좋은 이 녀석은 종이접기 작품을 필자 손에 쥐여주면서 ‘입학선물’이라며 재롱을 부렸다.
담임선생의 당부와 학교생활 안내가 있었다. 새겨듣는 아이들의 눈망울이 초롱초롱하였다. 교실과 선생이 부족하여 합반수업을 하였던 옛날이 생각났다. 아무튼 좋은 환경에서 무럭무럭 자라기를 바랐다.
아들 가족은 아주 가깝게 살고 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들 가족을 대신하여 쌍둥이의 손을 잡고 유치원의 등교를 도왔다. 올 첫 학년은 육아 휴직한 며느리가 직접 보살피고 있다.
퇴근이 늦은 딸 가족을 위하여 외손자의 어린이집 하교도 가끔 도왔다. 앞으로도 즐거운 마음으로 손주들의 등하교를 보살필 예정이다.
아이들의 입학식이 매우 아름답게 느껴졌다. 기념사진에 예쁜 모습을 담고 교문을 나섰다. 먼 훗날 아이들의 추억에 할아버지는 어떤 모습으로 남을지 상상의 나래를 폈다.
필자는 지난달 6월 23일부터 24일까지 1박 2일 간의 ‘인생나눔교실’ 멘토봉사단 강원권 1차 교육 워크숖을 다녀왔다. 2개월 전 지인의 소개로 사업을 알게 되었고 지원신청서를 접수한 후, 1차 서류 심의와 2차 면접 심의를 거쳐 멘토봉사단 후보로 선발되어 이번 워크숖에 참석하게된 것이다.
인생나눔교실에 대하여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하여 간단히 소개해 드린다면, 문화체육관광부가 사업 지원 및 운영 총괄을,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멘토 선발과 교육을 담당하며 사업의 전반적인 세부계획을 수립합니다. 전국의 5개 권역(수도권, 강원권, 충청권, 영남권, 호남·제주권)에 있는 지역주관처는 멘토 관리와 활동을 지원하고 멘티 기관에 매칭 해주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튜터는 멘토를 가장 가까이서 지원하는 기획자로 멘토링 프로그램 설계 시 멘토의 경험과 지혜가 멘토링에 잘 스며들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합니다.
5개 권역별로 튜터 5인, 멘토 50인 내외를 선발하여 멘티기관(중학교, 지역아동센터, 보호관찰소, 군부대, 북한이탈청소년대상기관 등 총 250개 그룹)과 연계하여 멘토링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 사업을 추진하게 된 동기는 급속히 진행되는 핵가족화와 전통 커뮤니티의 붕괴는 각종 사회문제로 이어져 어려움을 겪는 초보자 세대들이 많아지고 있다. 전통사회에서는 결혼, 육아, 취업, 입대 등의 문제가 그리 큰 어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았으나, 현대에는 초보자들에게 커다란 어려움과 문제로 인식되고 있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이러한 다양한 문제는 국가 발전의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나눔·소통·배려의 인문정신가치가 구현될 수 있는 사업을 필요로 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4년 시범사업을 시작으로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진행된 인생나눔교실은 이와 같은 우리사회의 다양한 문제를 경험하고 극복한 숙련(은퇴)세대와 초보자(새내기)세대 간에 나눔과 배려·소통·공감의 인문정신가치가 체계화 되도록 하는데 주요한 목적이 있다.
그러다 보니 교육내용은 인생나눔교실에 참여하는 핵심주체인 멘토는 숙련세대, 은퇴세대, 노년세대 등으로 지칭되지만, 고령사회로 전개되는 현대사회 흐름 속에서 멘토로 새롭게 인생2막을 열어갈 수 있도록 하고, 사회적 변화에 긍정적인 인식을 확장하고, 다양한 환경과 세대 층으로 구성된 멘티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도록 멘토에 대한 개념적 이해와 소양과 마음가짐을 갖도록 구성되어 있었다.
물질적 성장이 정신적 풍요로 이어지지 못하고 점점 더 마음이 빈곤해지는 현재의 안타까운 현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전 세대가 함께 고민하는 과정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은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는 사회변화 속에서 전 세대 모두에게 중요한 물음이 되고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노년(숙련)세대는 삶을 통해 켜켜이 쌓아온 다양한 경험과 지혜를 여러 세대와 소통하고 교감하면서, 인생 선배이자 삶의 길잡이로서의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선배세대의 삶속에 녹아 있는 인문적, 정신적 가치를 다른 새내기 세대와 나누고 교류하며 함께 행복해지는 사회를 꿈꾸는 것이다. 인생 나눔은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이번 교육을 다녀오며 특히 지금까지의 삶을 좀 더 체계적으로 정리해야겠다는 생각이 간절해졌고, 미천한 필자의 경험과 지혜일지라도 봉사하려는 마음과 열정을 되새기는 좋은 기회였다.
인생선배인 시니어 세대가 삶을 통해 쌓아온 지적, 정신적 자산과 몸소 겪으며 체득한 지혜와 연륜은 훌륭한 가치가 있다. 이를 다른 세대들에게 나누고자 할 때 가뭄에 단비처럼 촉촉이 마음을 적시고 세대를 넘어선 공감을 이끌어 내는 힘을 발휘할 것이라 믿는다.
우리 말에 부모 팔아 친구 산다고도 한다. 친구보면 그 사람의 인품을 알 수 있다는 말도 있다. 또 학력은 친구의 다른 이름일 것이다.
더구나 요즘은 자라는 아이들이 사람보다 기계를 더 가까이 한다. 젊은 엄마들이 아이들이 사람을 싫어하거나 기피하는 현상이 올까봐 신생아 때부터 빠르면 임신 중에도 태아의 친구를 만들어 주는 태교를 하거나 플랜을 만드는 것을 불 수 있다. 주말에 또래의 아이가 있는 엄마들이 모여 아이를 위한 노래를 함께 듣는다. 아이가 이해 할런지 아닌지 모르나 좋은 이야기를 듣고 책을 읽는다.
확실히 시대변화에 발빠르게 대응하는 육아다.
부모의 영향을 떠나 스스로가 만드는 세상인 첫 친구는 언제 만들어질까?
인격이 부모로부터 분열되어 하나의 개체로 성장하려는 사춘기가 아닌가 한다. 중2 정도에서부터 고 1동안에 친구와 순애보적인 관계를 가지려는 심리현상이 나타나고 친구만들기에 부모라도 파는 성의가 있다.
친한 친구가 있었다 하루 종일 학교생활에서도 기회만 되면 소곤소곤 둘 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비밀스런 이야기가 아님에도 누가 들을 까봐 조심하는 모양으로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과 후 귀가 할 때면 서로 먼저 바래다 준다며 그 친구의 집과 우리집을 오가다가 해가 지고 거뭇거뭇 땅거미가 피어날 때라야 두 집 의 가운데 지점에서 헤여지곤했다.
필자가 고 3이었을 때다 반의 다른 아이, 친구와 이웃에 사는 아이로부터 친구가 남자친구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필자에게는 우리 둘만의 세계 외에 그 친구가 다른 세상을 가졌다는 것으로도 정신 못 차릴 만한 충격이었다. 더구나 필자에게 비밀로 했다? 이건 필자를 지옥구덩이에 빠트리는 배신이다.
하루 밤을 그 사건을 씹고 또 씹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밤새워 생각하여도 생각은 그냥 체바퀴를 돌 뿐 어떤 결말이 나거나 필자 행동이 결정되지를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하나씩 더 그 친구에 대한 분노의 이름들만 쌓여갔다. 그 새벽에는 그 애가 내가 친구의 남자친구를 사귄다는 것을 이해 할 수 없는 정서부족으로 판단한 것도 분했다. 이성친구를 갖는 행동에 대하여 몰이해 할 만큼 용기없는 사람으로 판단한 것도 용서할 수 없다 기나 긴 대화로 서로의 속사람을 뒤집어 보이면서 나의 풍부한 이해심, 독서로 얻은 더 넓은 인간의 이해와 이성간의 낭만, 멋진 인생을 추구하려는 용기도 있다. 누구보다 특별한 관계를 응원할 사람이니 필자에게만 남자친구관계를 이야기 하고 의논도 하고 낭만의 순간들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 도리일 것만 같았다.
마침 겨울이었다 일요일 아침 일찍 친구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않고 함께 포항행 열차를 탔다. 포항의 해변에는 겨울의 썰렁함과 사람이 없어 파도가 외롬을 호소하는 듯 우렁찼다. 모래밭에는 아직도 여름 피서객들이 버려둔 쓰레기가 뒹굴었다. 쓰레기는 파도와 바람이 실어다 부린 것인지도 모른다. 바다의 푸르름, 바다냄새 넓은 가슴, 파도소리들이 이미 두 사람의 영혼에 들어왔다 친구의 남자친구는 너무도 쉽게 필자의 열열한 환영과 응원을 받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