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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이민 이야기] (4) 한인 십대 아이들의 탈선
- 이민을 왜 꿈꿀까? 대부분 이민하는 이유는 단연 자식 때문이라고 부모들은 말한다. 도대체 자식이 뭐길래 자식교육을 위해서라면 내 나라도 등 지는 것일까. 필자는 미국에서 사는 동안 너무나 많은 한인들이 초심의 목적을 잃고 체념하면서 한숨으로 살고,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어린 아이들을 만날 수가 있었다. 한인타운에 사는 후배가 전화를 했다. 그녀는 울먹거리며 시간 좀 내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다. 짬을 내기가 힘들었지만 좀처럼 편치가 않아 시간을 냈다. 달려가는 차창 밖으로 캘리포니아의 쾌청한 하늘이 묵직한 마음을 위로해 주었다. 타운 내 카페로 갔을 때 그녀의 눈가는 퉁퉁 부어 있었고 얼굴은 많이 수척해 있었다. 지금 막 수용소에서 나오는 길이라고 했다. 당황한 마음에 다그쳐서 묻기 시작했고 그녀는 가녀린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고는 서러움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미국문화는 절대로 상대방의 나이를 묻거나 신상이야기는 금기사항이었다. 필자는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그녀는 5년 전에 딸과 함께 전남편에게 내몰려 한국을 등지게 됐다고 했다. 미국에 와서는 5년 동안 주방 일부터 페인트칠하는 일까지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전남편에게 버림받고 미국 까지와서 졸지에 불법 체류자가 되었고 한인식당에서 웨이츄레스 일을 하다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고 했다. 새 남편은 시민권 자로써 3년 전 이혼을 하고 딸 하나와 살고 있었다. 결국 이쪽 저 쪽, 네 식구가 그녀의 한집에서 같이 동거를 시작했다. 살다 보니 새 남편의 12살짜리 아이가 얼마나 천방지축인지 지 멋대로 버릇도 없다며 침을 튀겨가며 하소연을 해왔다. 두 가정이 합치면서 좁은 아파트 하나에 사춘기에 접어든 전혀 남남의 고만고만한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서로 다른 부모와 두 딸들은 부딪치기 시작했고 새 남편은 자기 딸 편만 들었다고 했다. 불편한 가정의 불화는 계속되었고 급기야 부모의 입장에서 참다 못해 작은 몸싸움이 있었다고 했다. 새 남편의 아이는 손목에 조그만 상처가 남았고 그녀는 알지도 못했다고 했다. 어느 날, 집 앞에 폴리스가 와서 무조건 수갑을 채우고 그 길로 수용소로 끌려 갔다는 것이다. 아동학대 격리 수용을 당한 것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냐며 한 달이나 있다 왔다고 눈물 범벅이 되어 서러움을 토해냈다. 미국은 아동학대가 굉장히 무서운 법이었고 의무적으로 신고를 해야만 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그 아이 손목을 유심히 보고는 왜 그러냐고 물었단다. 아이는 그 길로 카운셀러(상담자)에게로 보내졌고, 그 아이는 대책 없이 느끼는 그대로 답을 한 모양이었다. 아이가 지금 어디 있냐고 물었다. 아이는 그 길로 가출을 해 버렸고 새 남편은 술로 산다며 어쩌면 좋겠냐는 것이었다. 또 벌어진 엄청난 상황에 무어라 말문이 막혔다. 미국에서는 아이 때문에 내 나라를 등지고 오는 사람들에게 너무나 가혹한 일들이 비일비재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단 아이를 찾고 그리고 아파트를 방3개짜리로 옮기라고 했다. 그녀는 지겹다며 남편과 빨리 헤어지고 싶다고 했다. 그러나 그러다 보면 3번 4번 복잡한 삶의 연속이 뻔하지 않느냐며 설득을 시켰다. 한인타운에는 살다 헤어지고 또 살다 싫으면 갈라서고 도대체 그것도 선진국 문화랍시고 아무렇지 않게 아이들을 무시한 채 부모들의 태만한 행동들이 곳곳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며칠 후 연락이 왔다. 아이가 나눔 선교회에 있다는 것이다. 그 곳은 갈 곳없이 버려진 아이들의 집합 소였다. 자기는 만날 수가 없으니 제발 만나달라는 것이었다. 필자는 내 아이들에게도 쏟아보지 못한 정성으로 선물을 준비했고, 사랑의 글이 담긴 예쁜 카드도 마련했다. 나눔 선교회는 말 그대로 나눔을 함으로써 선교를 하는 곳이었다. 그곳을 향하면서 깜짝 놀랐다. 어느 목사님의 봉사정신으로 시작된 곳이었는데, 건물은 허름하고 이층 비상계단 난간으로 머리 빡빡깍은 등치 좋은 아이들이 듬성듬성 서있는 모습이 섬찟해서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작게 나마 성의금을 전달하기 위해 목사님을 만났다. 목사님은 주변에 널려진 마약으로 청소년기를 방황하는 한인 아이들이 대다수라고 설명을 하더니 그 아이를 만나게 해주었다. 조그맣고 예쁘게 생긴 아이가 얼굴은 엄청 밝았지만 진하게 화장을 해 성숙해보였다. 건들건들 껌을 씹고 필자를 바라보며 다리를 흔들었다. 담배 냄새가 코를 확 찔러왔다. 어린 나이에 망가져 버린 작은아이를 보며 화보다는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필자는 누구라고 밝히지는 않은 채 아이와 대화를 나누었다. 아이는 그녀를 아줌마라고 불렀고 너무 간섭을 하는 것이 싫다고 했다. 친 엄마도 가끔씩 만나왔고, 같이 사는 이상한 언니가 싫다고 했다. 아이는 모든 것 들이 불만투성이였지만 나눔선교회는 또래 친구도 많고 관심을 갖고 잘해주니까 좋다고 했다. 필자는 돌아오면서 몇 번이고 그 아이를 뒤돌아보았다. 부모라는 이름이 무겁게 다가와 마음을 칙칙하게 했다. 어린 나이에 아무 생각 없이 부모 따라 온 아이들, 그리고 미국에서 태어난 한인2세, 십대 아이들이 사춘기 혼란 속에 정체성을 잃은 채, 외로움에 허덕이고 불안감에 못 이겨 너무나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만 같았다. 부모들은 말로는 아이들 때문에라고 하면서도 당장 먹고 살기 힘드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어쩔 수없이 그대로 아이들을 방치하고, 무분별한 미성년자는 활짝 열려있는 색다른 문화 속에 그 유혹에 못 이겨 그대로 망가져 갈 수밖에 없다. 부모는 과연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갖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채워줘야 하는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다행히도 나눔 선교회로 들어온 많은 아이들이 가정으로 돌아가 정상적인 생활을 한다고 하니 감사할 따름이었다. 그 아이도 오래지 않아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방3개 짜리로 이사를 했다고 했다. 얼마 후 그 아이는 고모 집으로 거처를 옮겼고, 그녀의 아이는 못살겠다며 한국으로 나와 아빠와 함께 산다고 했다. 결국 미성년자의 모든 것들은 부모의 책임이었다. 초심을 잃은 부모들이 남의 나라 낯선 땅에서 어린아이들을 험난한 곳으로 몰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해 왔다. 로즈와이
- 2016-06-2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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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채식주의자들이 늘어난다
- 나이가 들면서 주변에 채식주의자들이 늘어난다. 절친인 J도 혈관에 스탠트 시술을 받은 이후로는 먹는 데 제약을 받는다. 만나면 항상 술을 마시게 되는데 그 때문에 메뉴 고르기가 어렵다. 필자가 좋아하는 술안주는 족발, 보쌈, 삼겹살 등 동물성이기 때문이다. 저녁 식사를 겸하기 때문에 술안주는 푸짐해야 한다. 쇠고기, 돼지고기는 물론 닭고기, 생선까지 못 먹는다니 답답한 노릇이다. 막걸리 안주로 적격인 전 종류도 기름으로 요리하기 때문에 안 좋다는 것이다. 결국 두부김치를 시켜 그는 두부만 먹고 필자는 두부와 함께 가운데 놓인 김치 볶음을 먹는 절충안을 찾기는 했다. 날씬함을 자랑하는 동료 여자 댄스스포츠 선수가 있다. 성격도 쾌활하고 돈도 잘 써서 인기가 좋은데 유독 식사 때만 되면 예민하다. 철저한 채식주의자이기 때문이다. 고기 종류는 일체 안 먹고 채식만 고집한다. 심지어 멸치 국수나 순두부찌개 같은 음식도 육수가 들어갔다며 까탈스럽게 군다. 그 때문에 지방에 내려 갈 때마다 그가 낙점하는 메뉴가 나타날 때까지 낯선 동네를 헤매야 한다. 필자도 사실은 생선은 가려 먹는 편이다. 바다가 없는 내륙 지방에서 태어나 생선 종류는 지금도 안 좋아한다. 생선 비린내에 친숙하지 못하다. 횟집에서 싱싱하다는 징표로 생선회접시에 온몸을 다 잘린 채 머리가 함께 나와서 눈만 껌벅거리는 접시를 내놓는데 잔인해서 정말 싫다. 수족관에 멀쩡히 잘 노는 생선을 찍어 요리해달라는 식습관도 그래서 싫다. 보신탕이라며 먹는 개고기도 필자가 개를 길러봐서 일부러 찾아가서 먹지는 않는다. 계란이라도 얻어먹어 볼까 해서 몇 달간 길렀던 병아리가 컸을 때 수탉이라고 하여 더 기를 이유가 없었다. 일하는 아줌마가 그 닭을 그 날로 잡아 식탁에 올렸는데 기르던 정이 있어서인지 차마 입을 댈 수 없었다. 나이 들면 나물 종류를 찾게 된다고 한다. 어릴 때 할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할머니의 주름살 가득한 시커먼 손으로 마구 주물러 나물을 만드는 것을 보고 구역질이 났었다. 그때부터 나물 종류는 안 좋아 한다. 가장 좋아하던 반찬이 여름철 가재, 가을철 메뚜기볶음이었다. 개울에 사는 올갱이도 고기 종류라고 열심히 잡아 먹었다. 고추장 바른 가죽나무 튀김도 좋아했다. 산나물처럼 조물락거리며 무치는 것이 아니라 기름으로 튀긴 것이라 좋아했다. 가끔 시골에 가더라도 나물 반찬을 안 먹기 위해 라면을 사들고 간다. 물론 모처럼 온 손님이므로 필자가 사들고 간 라면을 그대로 끓여 주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필자는 채식주의자는 아니다. 어릴 때 다 같이 못 살았으므로 밥상 반찬이 대부분 풀밭이었다. 어쩌다 고기가 나오더라도 식구가 많으니 국물 듬뿍한 찌개 형태로 나왔다. 그래서 밥상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고 얼굴 두꺼운 형제가 먼저 고기 건더기를 건져 갔다. 서열이 한참 밑인 필자는 국물로 위안 삼았다. 유일하게 좋아하는 나물이 냉이 무침이다. 향긋한 냄새가 일품이다. 그러나 뿌리의 흙을 털어내는게 어려운 모양이다. 흙이 씹히면 그때부터 더 못 먹는다. 그나마 초봄의 냉이 무침에 한한다.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냉이는 향기가 없다. ‘이밥에 쇠고기 국’이라고 부자네 식단 메뉴였다. 나중에 돈 벌면 고기라도 실컷 먹겠다는 꿈은 누구나 가졌을 것이다. 다 같이 배고팠을 무렵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친구네 집에 가면 친구어머님은 끼니때마다 고기 반찬이 그득하다. 거기에 또 고기를 굽는다. 한국이 아직도 고기는 비싸서 사먹기 어려운 나라로 기억하신다. 고기를 너무 많이 먹어서 요즘 채식주의자로 바뀌었다며 사양했다. 오랜만에 댄스 동호인들끼리 춤을 추고 나서 뒤풀이를 했다. 근처에 있는 빈대떡집이다. 최근 병원에서 건강 검진을 받은 한 사람이 앞으로는 술도 끊고 채식을 하되 기름에 튀긴 것은 안 된다며 채식주의자 대열에 섰다. 결국 만만한 두부 김치를 주문해서 그 친구는 두부만 먹고 가운데 김치와 볶은 돼지고기는 혼자 먹으니 남아 돌아갔다.
- 2016-06-24 1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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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실개천의 삶
- 필자는 1944년 2월 16일 태어났다. 당시는 각박한 삶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여명이 바로 문밖인 시기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로 일제가 최악의 모습을 보였던 시기라 민간의 식량이 부족할 대로 부족했기 때문에 산모가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다. 애를 낳았는데 자라지 못하여 큰 쥐만 하더라”는 말을 곧잘 했다. 좋은 점이라면 출산이 무척 쉬웠다는 것이다. 돌 지나고 6개월이 되어 나라를 되찾았는데 우후죽순의 지도자들과 새로운 정치ㆍ사회 조류가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급변하는 시대에 걸맞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의 시대였다. 우선 산다는 것으로도 허덕이는 서민의 삶은 더 어렵고 고달팠다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있다. 특히 대구의 10.1사건 때는 좌파의 폭력을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피신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처를 옮겨야 했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전 해에 병사하고 말았다. 취학 전 여자 아이부터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 두 딸 아이에 필자까지 네 명의 자녀들이 일터 없는 어머니에게 맡겨진 부양가족이었다. 대구 중심가에서도 더러더러 초가지붕이 보이는 시절 기와집이 필자 집이라 가난에 대한 물질적인 아픔은 없다. 필자의 가난은 끼니를 거르는 가난은 아니었고 문화 욕구에 대한 가난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낀다, 절약한다, 쓰지 않는다는 방어소비에 집착했다. 세금, 교육비, 식비 외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지팡이는 자녀를 지켜내야 하는 모성본능과 체면과 자존심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돈 안 드는 놀이로 우리와 시간을 보냈다. 작은 돌 주워 하는 공기놀이, 반들거리는 흙마당에 가느다란 선을 귿고 하는 땅뺏기, 선교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탄력성 있는 공으로 삼박자 노래 부르며 다양한 모양으로 공차기 등이었다. 다만 책에는 아끼지 않아 집에 책이 풍부했다. 그래서 필자는 동화책은 물론 소설책도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소공자’, ‘소공녀 같은 외국의 책들도 그 무렵에 읽은 것 같다. 책 내용 가운데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는 게 태반이지만 독서는 지루한 시간을 즐거운 시간으로 바꿔주는 마법 상자이었다. 언니는 ‘태양계’란 이름의 동네 구멍가게 겸 책대여점에서 부지런히 신간잡지를 빌려왔다. 필자는 이것도 열심히 탐독했다. 10대를 위한 잡지 ‘학원’은 한 회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연재된 조은파의 ‘얄개전’은 익살스런 행동이 얼마나 기발했던지 지금도 흥분이 느껴진다. 익살의 세상이 휴전 직후의 가난과 닫힌 사회에 답답해 하는 청소년에게 스트레스 분출구 역할을 했다. 이상스러운건 대구 시절 어떻게 넉넉한 책이 주어졌던가 하는 것이다. 한참 성장기의 아동이었을 때 세 끼니의 밥만으로 채울 수 없는 이채로운 먹거리에 대한 허기가 가끔 기억나지만 놀이와 독서에 대한 허기는 없었다는 기억이다. 특히 필자 집은 새 책 살 형편이 아니었는데 무슨 돈으로 책을 샀는지 궁금하다. 고등학교 시절은 격변의 시기다. 3.15부정선거를 고등학교 1학교, 4.19혁명을 고등학교 2학년, 5.16군사쿠데타를 고등학교 3학년에 맞은 것이다. 특 ,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일사천리로 대학입시제도를 무 토막내듯 확 바꾸어버렸다. 국가고시 점수를 개별 대학 입시에 100% 반영하고 각 대학은 오로지 체력장과 면접만 시행했다. 그런데 필자는 제도 변경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체력장의 한 과목에서 완전히 빵점을 먹은 것이다. 할 수 없이 대구 한 대학의 약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서울로 진학하고 싶어하는 열망은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다음 해에 서울 연세대학으로 튀었다. 약학과 팔촌쯤 되는 화학과였다. 필자는 18년 동안 내륙의 소도시 대구서 살았다. 어디 여행간 적도 없었다. 그러니 대처에 대한 선망이 강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원래 가족과 함께 대구의 교회를 다녔는데 서울로 옮기면서 교회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교회를 옮기자 가슴에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필자는 YMCA에서 하는 ‘대학생을 위한 기독교 사상 강좌’를 들었고 일요일에는 연세대학 교회를 출석했다. 당시 필자는 서울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가슴 벌렁거렸다. 기독교가 기성복이 아닌 시대별 노력과 아픔 및 정서를 담아 걸어왔다는 것, 큰 테두리에서 문화와 사회 및 역사를 배경에서 성장했다는 것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이 이해는 인간, 고고학에 대한 호기심을 안겾줬다. 또 종교와 인간관계,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인류 복합체로서의 인간, 생각하는 존재로의 인간 등 참으로 많은 분야의 인문학적인 호기심도 갖게 했다. 전공이 화학인데 인문학에 홀딱 반하였으니 이 노릇을 어쩌란 말이냐. 그렇다고 또 전공을 바꿀 수도 없다. 이미 약학과에서 화학과로 한 번 바꿔서다. 덕분에 대학의 전공 성적표는 엉망이다. 이 성적표 때문에 졸업 후 20년 동안 대학을 말하지 않는 결백증이 있었다. 71년 4월 5일 식목일 공휴일에 결혼했다. 그리고 80년엔 아프리카 수단에서 1년 간 살게 된다. 고온 건조한 나라 수단은 정부의 정체가 공산국가인지 자본주의 국가인지를 구별할 필요가 없는 산업의 불모지대다. 수단은 남북한 공관이 공존하는 나라다. 포장되지 않은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소나 양같은 동물들이 차에 치여 죽은 모습을 쉽게 보는데 단 시간에 건조되어 부패하지 않고 박제가 된 모양을 본다. 중동에서 제왕이라도 죽으면 그날로 매장하는 문화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그 척박한 땅, 공기 중에도 물기라고는 없는 갈증의 땅 바위틈에서 자라나는 초록의 생명체를 볼 수 있는데 생명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였다, 생명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해다. 사람은 태양열에 지치고, 영국의 지배 200년 동안 문명인의 안면무치 이기심에 착취당하면서 비옥한 땅이 물을 만나지 못하여 석녀처럼 생산이 불가능한 지독한 가난으로 기력이 없다 아이들의 손으로 밀쳐도 무너질 것 같다. 개를 싫어하는 무슬림의 나라에서 들개들은 늘씬하게 잘난 모양이고 기름기까지 돈다. 떼 지어 다니는데 들개 떼가 수단인보다 더 위풍당당해 보인다. 우습게도 한 대접의 물로 목욕하는 물이 귀한 나라, 상수도도 전기도 없는 그 곳에서 필자는 공짜로 미터기 없는 전기 물 풍족히 쓸 수 있었다. 핫(hut)이라는 원두막만한 집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의 땅에서 필자의 사택은 큰 저택쯤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필자 아이들은 수단에서 살았던 집이 가장 훌륭한 집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태리 가구를 갖추고, 에어컨이 방마다 있으며, 냉장고에 냉동기까지 구비한 그 사택은 원주민의 생활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거환경이었다. 필자가 근무한 곳은 나일의 지류인 백나일의 물을 인공수로로 끌어들여 사탕수수 농사를 짓고 설탕까지 생산하는 그 나라 기간산업체였다. 인공 수로에서 쉽게 낚시한 물고기로 회도 뜨고 매운탕도 만들어 먹었다. 한국인들이 낚시하는 것을 보고 수단인들도 낚시하기 시작하였는데 수단인들의 극성스런 낚시가 시작되고 두어 달 지나니 수로에는 거의 고기가 낚여지지를 않았다. 무계획 노획이 자연을 해칠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이어 미국에서 이민생활이 시작됐다. 우선 유학이 아니고 이민으로 미국 땅을 밟는다는 것부터 필자 속은 무척 상했다. 그리고 미국은 필자 꿈 실현의 땅이 아닌 생존의 땅으로 전락했다. 선배들이 버리라는 학력, 경력, 배경이 낯섦에서 버틸 수 있게 하는 유효한 수단인 것도 알게 됐다. 필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노동의 미숙함이다.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 바느질이 필수인 세탁소를 인수했을 때도 필자는 재봉틀에 실 꿰는 법도 모르는 상태였다 인계한 전 주인이 어쩌려고 무조건 가게를 사느냐고 더 걱정을 하였다. 기술을 쉽게 익히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가스실로 데려갔다는 유대인 집단수용소 체험기가 필자를 독려했다. 하지 못하면 죽으리로다란 명제 앞에 누군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두 아이들의 똘망거리는 눈망울도 필자의 용기에 보탬이 되었다. 덕분에 필자는 주민의 95%가 백인인 부촌에 세탁소를 소유하게 되었다. 다는 아니지만 미국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도 많았다. 특히 한 남자 단골손님은 하루 12시간 주 6일을 일하는 필자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우호적이었다. 필자 글씨체와 암산 실력이 학력을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손님에게서 “네 나라에서는 화이트칼라 잡을 가졌을 거야”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남편과 큰 소리로 다툼하는 현장을 본 이 손님은 남편에게 “ 내 아내는 일하지 않으면서 가사 도우미를 두는데 하드워킹 아내에게 무얼 불평하느냐” 하는 내정간섭에 가까운 일격을 날리기도 했다. 백인이건, 흑인이건, 교육 수준이 높든 아니든 미국 남자는 여자와의 다툼은 꺼렸다. 일종의 배려였다. 이런 작은 차이가 신사문화를 이루는 근본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오랜 동안 일만 하자 피로가 누적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아침 일어날 때의 피로는 첫 손님이 내미는 달러에 확 가셨다. 난산의 아이도 돈을 보이면 달려 나온다는 유머가 생각났다. 1994년 남편이 준비도 이별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시폰처럼 흰 눈이 투명한 3월의 어느 일요일, 늦은 기상을 하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 목이 깔깔하다고 물 가지러 간 사이 심장마비의 공격을 받고 평화의 나라로 갔다. 필자는 남들의 두 배에 이르는 노동에 시달렸으니 10년 미리 은퇴하여 문화적인 욕구를 채우리란 약속을 자신과 가족과 하였다. 그러나 남편 떠나고 4 년 후에야 가게를 팔았다. 남편 보내고 금방 가게 처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놈의 돈 때문이다. 가게 처분하고 파트타임 일했다. 여유 시간에 시립대학에서 강의도 들었다. 이런 학구적인 활동이 경직된 내면을 많이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머리가 멈추고 손발만이 분주하였던 시간이 머리와 손발이 함께하는 시간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필자가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바로 그 시기에 영원히 걸 프렌드를 못 만날 것 같던 두 아들이 차례로 결혼했다. 드디어 형식도 내용도 필자 혼자가 된 것이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대로 은퇴 후 제주도로 갔다. 역이민이라고 말하는데 필자는 그냥 이사한 기분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마이너리티인 필자에게 어디고 완전한 행복의 파라다이스는 없다. 두 땅 서양과 동양의 지구촌 마을이 필자의 삶터다. 더 넓어 좋고, 더 다양하여 좋고, 더 배워야 하여 좋다.
- 2016-06-24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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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니 자서전] 모성애 꽃은 그렇게 피어났다
- 첫번째 오남매가족사진, 1번 임산부필자 3번 40대의필자 4번 빛바랜 가족사진들 6번 두딸과 필자모습 카네이션 꽃들이 만발하는 5월이 되면 유년 시절의 필자는 그리움 반 미움 반으로 시들어진 꽃다발을 가슴에 품고 엄마를 그리다 잠이 들곤 했다. 어린 마음속에서 흘린 눈물은 차곡차곡 쌓여 강하고 모진 모성애를 잉태하기 시작했다. 눈물 속의 회상 어린 시절 필자 5남매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어머니를 면회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해야 했다. 필자가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 일종의 주말 이벤트였다. 그날도 우리는 큰오빠의 지시 아래 엄마에게 필요한 것과 음식을 정성껏 준비하고 묵묵히 오빠를 따라나섰다. 그리고 버스에 타 자리에 앉자마자 이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떨군 뒤 멍하니 바깥만 응시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에 얼굴을 들 수가 없어서였다. 버스가 서울 중랑구 면목동을 지나 중곡동 가까이에 닫자 필자의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마치 멀고 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변해 있을 어머니를 만나려면 미리 단단한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철창문이 열리고 퉁퉁 부어오른 모습으로 뒤뚱뒤뚱하며 걸어 나오는 어머니. 어머니 얼굴은 오랫동안 빛을 못 봐 하얗게 변해 버렸다. 또 오랜 병원 생활로 비정상적으로 부어 마치 ‘큰 바위 얼굴’ 같았다. 그리고 약에 취해버려 연신 흐느적댔다. 자식들은 그 만남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눈을 피하며 안절부절 어머니를 맞이했다.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구타까지 당했던 어머니. 그 옛날 귀한 집 외동딸로 태어나 심성 바르고 순수하며 착하던 어머니가 한평생을 정신 줄을 놓으시고 병원 생활로 약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어머니 그만 해요. 도대체 왜 그래? 그까짓 아버지 뭐하러 생각해! 우리가 있잖아.” 필자가 보탤 수 있는 말은 이뿐이었다. 이따금 아버지가 자식에 대한 책임감만으로 마지못해 병문안 왔다 가는 날에는 어머니의 병세는 더 나빠지고 어머니의 정서뿐 아니라 자식들 기분도 엉망이 되곤 했었다. 필자는 그런 아버지를 늘 원망했다. 돈 잘 벌어 양쪽 집 9남매 대학 보내 주는 것보다는 차라리 따뜻한 가정 속 아버지를 더 몸서리치도록 그리워했다. 그래서 5남매는 서로 만나면 침묵한다. 그게 더 아프지 않을 유일한 방법이니까 도망치듯 떠나온 어머니의 품 대학을 마치고 도망치듯 같은 캠퍼스 선배와 결혼했다. 그토록 그립던 사랑을 갈구하며 현실을 도피했는지도 모른다. 아니 전쟁 터 같은 생활들이 너무나 싫었다. 그러나 결혼생활 또한 살아온 각자의 삶이 다르듯 많이 부딪쳤다. 대학 졸업 후 시작한 교사직과 함께 나름대로 결혼생활에도 충실했으나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자신이 없었다. 결혼 2년 후 큰아이를 임신하며 또 고통이 다가왔다. 건축 장교로 제대한 남편이 중동으로 파견 나간 후 필자가 임신 중독증으로 교단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혼자 남은 임산부 새댁은 유난히도 겁이 많았고 신혼생활의 달콤함을 접고 시댁으로 들어가 배부름을 혼자 감당해야 했다. 부자인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는 늘 여행을 일삼아 집을 비우셨고, 아침에 왔다 오후 5시면 돌아가는 도우미 아주머니가 유일한 친구였다. 어쩌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퇴원할 때면 시부모의 허락을 받아 친정으로 달려갔다. 그토록 그리던 어머니를 마음으로 느끼며 손을 꼭 잡고 함께 잠드는 밤이면 비록 병든 어머니였으나 그 품이 왜 그리 따뜻했을까. 시댁에서 밤마다 방에 드리운 길다란 옷걸이 그림자가 무서워 잠 설쳤던 한 달 동안의 밀린 잠을 푹 잔듯했다. 중동에서 돌아온 남편은 건설 회사를 차렸고 4년 후 작은아이를 가졌다. 남편은 큰아이 때 못 해준 것을 만회하기 위해 이 아이를 여왕마마처럼 모시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더니 반대로 필자도, 두 아이도 용서할 수 없는 큰 사고를 쳤다. 남편은 무릎 꿇고 벌벌 떨면서 사죄했지만 용서되지 않았다. 결국 죽을 힘 다해 쌓아 올렸던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필자는 모든 것들은 다 포기 할 수 있었으나 아이들만큼은 손을 놓을 수가 없었다. 커다란 혼란과 방황이 시작되었고 그때부터 자신과의 싸움은 실로 ‘의지의 한국인’ 수준이었다. 그 방황을 감수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다시 대학을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대학 때와는 전혀 다른 전공을 선택해 20세 차이 나는 아이들과 캠퍼스를 누볐다. 배움은 채워지지 않는 상처투성이 사랑의 빈 공간을 그나마 채워주었다. 늦은 나이에 다시 생소한 학문을 하며 젊은이들과 함께한 캠퍼스 생활은 신선한 삶의 충격이었다. 그 충격을 오래 누리고 싶어 대학원까지 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시간강사, 전임강사가 되어 전국을 누렸다. 자신이 얼마나 멋지고 훌륭한지,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지 확인하면서 모습이 무척이나 대견스러웠다. 백 번 말보다는 보여주는 교육이라고 했던가. 다행히도 두 아이들은 필자를 자랑스러워△하며 열심히 그 뒤를 따라와 주었다. 큰아이는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필자를 추천하여 아이가 다니는 과학고등학교에서 장한어머니상도 받게 해주었다. 이보다 어떤 값진 보석이 또 있을까? 1997년 온 나라에 IMF라는 경제 위기가 몰아 닥쳤다. 하루아침에 남편 회사는 문을 내리고 가족은 빈털터리가 되었다. 고심 끝에 이민의 길을 선택했다. 한 가정의 기둥이 되어 위기를 기회로 삼아 어떻게든 어 다시 지붕을 쌓아가야 한다는 신념으로 가득했다. 남편을 설득해 먼저 보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한 작은딸을 그 이듬해에 보냈다. 그리고 큰딸을 한국에 둔 채 필자는 2001년 LA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만으로 허물어져가는 가정의 든든한 기둥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어렵게 오랜 시간 투자해 얻은 교수의 길, 필자의 것들을 다 포기해야만 했다. 무궁화 꽃 속으로 흐르는 눈물 한국과학기술대학교(KAIST)에서 국비 장학생으로 과외하며 생활하던 큰아이는 방학만 되면 가족이 보고 싶고, 엄마 품이 그립다며 열일 제치고 미국으로 날라왔다. 비록 낯설고 물 설은 이국 땅, 남의 나라였지만 그리웠던 가족의 재회는 얼마나 아름답고 귀한 삶의 원동력이었는지 모른다. 힘겨웠던 바닥생활 2년 후, 해변의 도시 싼타모니카에 세탁소를 시작했다. 필자는 바느질을 하고 남편은 빨래하며 자리잡기 시작했고 백인동네에 멋진 이층 집도 장만했다. 주말이면 1박 2일 파티도 열며 나름대로 훌륭한 이민생활을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필자 가족을 무척 부러워했다. 그러나 작은 아이가 우등생으로 ‘캘리포니아주립대 LA캠퍼스(UCLA)’를 졸업하고 언니가 있는 한국으로 나와 버렸다. 왔다갔다 하던 큰아이는 어느덧 멋진 의사가 되었고 작은 아이도 남의 나라에서는 더 이상 꿈을 펼 수가 없다며 훌쩍 떠나와 버렸다. 아이들이 떠나고 난 빈 자리를 그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2층 아이의 방에는 덩그러니 아이의 그림자만 남아 있었고, 텅 비어버린 커다란 집은 더 이상의 따뜻한 가정이 아니었다. 심지어는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세탁소 2층에 머무르며 일만하며 살았다. 세탁소 재봉틀 앞에 큰 거울을 붙여놓고 필자 얼굴과 마주보며 외로움을 달래곤 했다. 필자는 또다시 미국 한 의대에 입학했고, 그 길만이 유일한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세탁소 일이 끝나는 저녁 6시에 가서 밤 11시면 돌아왔다. 장장 8년에 걸쳐 졸업했다. 그리고 작은아이도 1년 후 의대에 합격했다. 어느덧 나이 60세를 향하면서 이민생활도 고갯길에 접어들어 수시로 불안감이 몰려왔다. 남편이 있어도 파고드는 고독함은 중병이 되어 대학병원 응급실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삶과 죽음이 하루에도 수십 번을 머리 속에서 교차했다. 어느 날인가 남의 나라에서 아이들과 떨어져 소리 없이 죽어가는 꿈을 꾸었다. TV 속에 한국 뉴스가 끝나고 애국가만 흘러도 눈물이 주룩주룩 얼굴을 타고 내렸다. 삶의 질을 찾아 떠나온 18년 세월에 늙고 병만 들어 마음은 마냥 연약해져만 갔다. 아이들이 있는 고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점점 더 몸을 황폐하게 만들어갔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프다고 했던가? 미국은 사람 사는 곳이 아니라 일만 하는 노예의 삶이니 받아들이라며 세탁소에서 일만하던 남편도 필자 뒷바라지에 다리를 못쓰게 되었다. 병들은 부부는 낯설은 이국 땅에 내려앉은 눈커플만 껌뻑 거리며 나란히 누워버렸다.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었다. 산다는 것에 깊은 회의를 느끼며, 아무리 좋은 선진국, 부와 사치스러운 명예, 그따위 것들이 있어도 아무것도 아님을 철저히 느끼던 날에 다시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남편을 설득하고 뿌리를 내렸던 세월을 미련 없이 정리했다. 고생하며 정들어온 곳, 아픈 추억들이 고스란히 담긴 땅을 뒤로한 채 고국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비행기 차창 너머로 피땀 흘려 견뎌온 시간들이 추억과 함께 너풀대며 날아다녔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행복한 꿈으로 온몸이 날아 갈 것만 같았다. 행복은 별 것 아니었다. 하늘에 떠 있는 작은 공간, 부푼 가슴이 천국이었다. 오랜 시간 공들여 모든 것들을 얻었으나 또 다 버리고 선택한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 다시 만나 만들어가는 소중한 가정의 행복을 무엇에 비유한단 말인가. 아이들을 향한 모성애 꽃이 만발하는 날, 한국 행 비행기 날개 가슴에는 무궁화 꽃이 활짝 피어났다.
- 2016-06-22 1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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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이민 이야기] (3)작은 아이의 반항
- 미국은 평상시에는 17시간, 썸머 타임에는 18시간 한국보다 시차가 늦었다. 한국에는 큰딸만 남아 있어 필자는 자연히 큰 아이에게만 신경을 썼다. 작은 아이에게는 시간을 따져가며 수시로 할 수 있는 일이 고작 국제 전화뿐이었다. 어느 날부터 착하기만 하던 작은 아이에게 이상 징후가 보이기 시작했다. 미국은 9월에 학기가 시작된다. 작은 아이는 중학교 1학기를 마치고 이민 갔다. 정상적이라면 7학년에 다시 들어가야 했지만 8학년으로 들어갔다. 교회 목사님의 도움으로 공립학교에도 무사히 들어가 다행이었다. 그런데 필자는 입학한 그 날도 전화를 걸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견딜 만한지, 영어는 알아듣겠는지, 한국 아이는 몇 명이나 되는지 궁금한 것이 한둘이아니었다. 필자는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한국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사춘기를 맞이할 14세 작은딸이 엄마와 멀리 떨어져 있어 마음이 여간 짠하지 않았다. 다행히도 학교 앞에 집이 있었고 학교는 아침 8시 반에 시작해서 오후 3시면 끝난다고 했다. 미국은 아이들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일이 부모에게는 아주 큰 일이었다. 한국 아이는 남녀 합해서 5명 정도이고 영어로 진행되는 수업은 그냥 멍청히 참고 앉아서 끝날 시간만을 기다린다고 했다. 작은아이는 “무슨 말인지 들리지 않아 종일 지겹지만 방법이 없다”고 말을 흐리더니 울먹거렸다. 이내 남편에게 전화했다. 아이가 이상하다고 했더니 남편도 어느 정도 수긍했다. 며칠 전부터 친구 집에서 자주 자고 오고 말도 잘 안 한다고 했다. 그 집 엄마가 엄청 잘해준다며 또 가도 되냐고 했단다. 방학이 오기가 무섭게 비행기 예약을 서둘렀다. 작은아이를 직접 보고 얘기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빨리 만나고 싶은 조급한 마음에 좁아터진 비행기가 어찌나 답답한지 숨통이 막혀왔다. 오랜 시간 비행 끝에 몸은 피곤했지만 그렇게 그립던 아이를 만나는 순간 깜짝 놀랐다. 머리는 노랗게 물들여 풀어헤치고 엄마를 반가워는 했으나 어딘가 어색했다. 바라보는 묘한 눈빛이 엄마를 노려보는 것만 같았다. 불과 얼마 만에 이상하게 변해 버린 사춘기 아이의 모습이었다.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함이랄까. 자기 멋대로 촌스럽게 멋을 부린 어설픈 미국 중학생이었다. 필자는 집으로 향하는 내내 뒷자리에 앉은 아이를 힐끔힐끔 쳐다보며 잔뜩 긴장했다. 자초지종을 듣고 아이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다른 문화 속에서 하나하나 성숙해가는 여성의 모습들을 이해는 했지만 감정이 이성을 앞지르기 시작했다. 작은아이도 엄마에게 짜증 부리며 대들었다. 어찌 화가 나는지 조용히 앉아 반성하라고 했더니, 눈을 부릅뜨고는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대꾸를 해왔다. 필자는 솟구치는 화가 조절되지 않았고 습관처럼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었다. 그때, 작은 아이 가는 손목이 필자 손을 불끈 잡더니 자기 몸에 손대지 말라고 소리쳤다. 만약에 조금이라도 건드리면 폴리스(경찰)를 부르겠다고 했다. 순간 기가 막혀 그 자리에 펄썩 주저앉았다. 너무나 어이가 없었지만 그대로 주저 앉을 밖에 없어 힘을 모아 더 세게 몰아나갔다. “그래 전화해라! 지금 연락해! 엄마 잡아가라고 해!”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가져다주었다. “대신, 전화하는 그 순간부터 너와 엄마는 남남이 되는 거야. 알았지!”라며 더 세게 몰아붙였다. 마음대로 하라고 목청 높이며 더 소리를 크게 질렀다. 아이도 겁에 질렸는지, 엄마의 기에 눌렸는지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그때다 싶어 아이에게 무릎 꿇고 앉으라고 명령했다. 아이가 마지못해 다리를 반쯤 굽히더니 막 울어대기 시작했다. 뭔가 서러움에 가득 찬 어깨 짓이었다. 바라보던 엄마가 안타까움에 와락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는 어미의 가슴에 안겨 더 큰 목소리로 펑펑 울어댔다. 친구네 집은 엄마가 항상 집에 있고 먹을 것도 많은데 자기는 너무 외롭고 쓸쓸하고 힘들다고 했다. 아버지는 자기 마음을 다 몰라준다고 하면서 가슴을 후벼 파는 눈물로 엄마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앞이 캄캄하고 어지러움이 몰려왔다. 이 아이를 또 어떻게 해줘야 할지 몰랐다. 아빠가 늘 곁에 있으니 그저 하루 세끼 밥 잘 챙겨주고 영어공부하는 것만 돌봐주면 되려니 생각했었다. 그때부터 머릿속에 고민과 갈등이 시작되었다. 큰아이가 한숨을 푹 쉬면서 “엄마! 더는 나한테는 신경 그만 쓰고 미국으로 들어와요. 나는 이제 됐으니까”라고 말하면서 엄마를 위로했다.
- 2016-06-17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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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 이민 이야기 (2) 청소 가는 사람들
- 나름대로 큰 사업을 했던 남편은 다행히도 낯선 이민생활에 잘 적응을 해 나갔다. 그러나 빈손으로 무작정 시도한 모험이었기에 헤쳐나가야 할 과정은 험난하고 어두운 터널의 연속이었다. 한 달에 통틀어 1350달러 수입으로는 집세 900달러 내고 나면 생활하기가 빠듯하다며 잡(일거리)하나를 더 해야겠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흐트러져 남은 일들 수습하기도 바쁜 덕에 어찌 방법이 없었다. 그 잘난 주급 300달러를 받으면서 그나마 교회 사람들하고 조그마한 계를 들었다고 했다. 어찌어찌 힘들게 마련해 거금 3000달러를 보내줬다. 밤에 가서 미국 사무실 청소하는 일로 1500달러를 받은 것이다. 집에서 가까운 공립학교를 들어간 작은 딸은 오후 3시면 돌아온다고 했다. 뭐라 할 말이 없었고 그저 작은 아이 걱정에 무조건 애한테만 신경 쓰라고 당부했다. 방학이 돌아오자 필자와 큰딸의 합류로 가족은 또 빛나는 하나가 되었다. 필자는 낮에는 세탁소에 일하러 간 남편을 기다리고 어스름 오후가 되면 작은딸의 귀가를 기다리느라 미국 정서가 가득 담긴 예쁜 동네를 한 바퀴 돌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행복한 가정주부가 되었다. 온 가족은 돌아오기가 무섭게 미리 차려놓은 따뜻한 엄마표 저녁 식사를 배불리 먹었다. 그러나 쉬어야 할 저녁 6시가 되면 가족 모두는 함께 청소를 가야 했다. 덜컹거리는 중고차가 가족을 안내했다. 거리는 총천연색 영어 간판으로 번쩍거렸다. 우리는 행복, 낭만 가득 실린 호기심들이 두리번댔다. 도착하자마자 큰딸은 각자의 업무를 지시했다. 남편은 굉음을 내는 커다란 청소기를 끌고 카펫을 이리 저리로 따라다니며 카펫 청소를 했다. 작은 아이는 가는 손목을 흔들어대며 야릇한 손놀림으로 먼지떨이 및 책상 정리를 했다. 엄마는 부엌 청소와 화장실 청소를 했다. 그리고 카이스트 장학생 큰아이는 신발을 휙 벗어 던지고 맨발의 용사가 되어 바지 양쪽 호주머니에 커다란 까만 봉지를 끼우고 다니며 사무실 곳곳에 가득 찬 휴지통을 비우는 작업을 했다. 청소하는 사람들은 흥얼거리며 각자 맡은 임무에 최선을 다했다.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지만 불평보다는 콧노래를 불러대는 아이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눈물이 핑 돌았다. 물티슈로 화장실 바닥을 닦았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눈물에, 고개를 들며 닦고 또 닦고 하는 사이 아이들이 몰려왔다. 화장실 청소가 힘들다며 빨리 끝내고 와서 엄마를 도왔다. 얼마나 대견하고 든든한지 할 말이 없었지만 미안한 마음에 서둘러 함께 끝냈다. 아이들은 빨리 끝내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에 초스피드로 해댔다. 잘못하면 이 일도 잘리고 들어간 돈도 날아간다고 했다. 작은딸이 능숙한 솜씨가 번쩍번쩍 광을 냈다. 생전 처음 하는 청소를 깔끔하게 무사히 끝냈다. 남편과 작은 아이는 한 바퀴를 돌며 점검했다. 평상시에는 두 사람이 4시간에 걸쳐 하던 일이 2시간으로 줄어 기분이 좋다고 했다. 일찍 끝난 덕분에 아이들은 오랜만에 맥도날드 햄버거를 먹자고 했다. 홀가분하고 신이 난 중고차는 쌩쌩 달려갔다. 깨끗하고 시원한 에어컨 속에 금발 머리 사람들과 함께 밤참을 하는 시간이었다. 꿀맛이 따로 없었다. 생각지도 못한 고생 끝에 먹는 맛이라 그랬을까. 온 가족은 입을 크게 벌려가며 입안으로 햄버거 넣었다. 입안에 넣는 햄버거 크기만큼이나 행복한 미소가 흘러 나왔다. 방학이 끝날 무렵이면 다시 한국행 채비를 차려야 했다. 돌아가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으면 먹구름이 끼기 시작했다. 큰아이는 말은 안 했으나 어린 동생을 두고 가는 마음에 얼굴에 웃음이 사라졌다. 어려움도 함께하며 즐거웠던 가족이 또 헤어져야 했다. 힘없는 엄마의 마음도 발길이 무거웠다. 낯선 땅에 남겨진 가족에게 저녁 4시간이 가슴에 아려왔다. 큰 아이는 아무 말 없이 뒤돌아보지 않고 공항 출구로 향해 헤어지곤 했다. 엄마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훗날을 기약하기에 우리 가족은 끈질긴 인내와 함께 무언의 인사로 서로를 포옹하고 있었다.
- 2016-06-16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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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이민이야기 (1)이산가족의 만남
- 1998년 8월 남편은 왕복 비행기 표 1장과 이민 가방에 달랑 옷가지 몇 벌을 담아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했다. 6개월에 걸쳐 필자가 설득시키고 단행한 1차 이민이었다. 온 나라에 경제 위기와 그 도미노 현상으로 가정이 휘청거려 별다른 대책이 없어 무조건 단행한 모험이었다. 온 살림에 빨간 딱지가 붙고 집은 경매로 날아갔다. 게다가 여기저기 쏟아지는 빨간 독촉장들, 찾아오는 사람들과의 정신적 싸움에서 오는 고달픔은 차라리 휴식이 필요했다. 가장이라는 책임감으로 낯선 곳이지만 먼저 가서 여기저기 살펴보기 위한 작전이었다. 큰딸은 미국 고등학교 기숙사로 보내고 초등학교 작은딸만 데리고 가느라 졸지에 이산가족이 되었지만 무너져가는 가정을 직접 나서서 수습하기 시작했다. 남편이 떠나고 1년 후, 남편의 미국 생활은 그럭저럭 안정을 취해가는 것 같았다. 코리아타운에서 세탁소 일자리를 찾았고 얼마 안 되는 주급(주말마다 정산해줌)이었지만 혼자 생활하기에는 큰 무리가 없었다. 수시로 국제전화로 연락하며 아이들 걱정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지만 남편이 떠나고 난 그 자리는 무엇으로도 채울 수가 없었다. 살림을 하나하나 정리하고 태연하게 입술을 깨물며 다 살게 마련이라는 마음으로 모든 일을 해결해나갔다. 막내로 태어났으나 큰아들 같은 남편은 힘든 것 다 견딜 수 있는 데 너무 외롭다고 전해 왔다. 서둘러서 작은아이 미국 비자를 만들어 이듬해 8월 이민 가방을 챙겼다. 작은 아이마저 보낸 그해 9월의 계절은 그림자들로 가득한 기나긴 방황의 몸서리치는 고독한 시간이었다. 방학이 시작되자 극적인 상봉을 위해 기숙사에 있는 큰딸과 서둘러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아빠와 작은딸, 큰딸과 엄마, 눈물의 오작교 시간이었다. 남편은 캘리포니아의 태양에 까맣게 탄 노동자 얼굴로 덜덜대는 중고차를 끌고 나와 포옹하며 가족을 맞이했다. 온 가족은 만나자마자 코리아타운 한복판에 있는 북창동순두부 집으로 달려갔다. 값싸고 한국 정서가 담겨 있어 누구나 좋아하는 소박한 음식이었다. LA에서는 한 번씩 거쳐 가는 꽤나 이름난 곳이었다. 얼마나 맛나게 먹어대는지 온몸에 땀이 줄줄 흐를 정도였다. 남편은 부자 동네 아고라힐의 커다란 성 같은 집(방 5개짜리)에서 작은 방 하나를 한 달에 550달러에 렌트해서 살고 있었다. 하지만 작은 아이를 맞이하며 씨미벨리라는 시골 동네로 옮겨야 했다. 중학교 입학 때문이었다. 이왕이면 한국 아이들이 없는 곳, 코리아타운에서 먼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왜냐하면 한국 아이들이 많은 코리아타운은 영어가 늘지 않기 때문이었다. 씨미벨리 집은 남편이 나가던 교회의 도움으로 한국 목사님 집의 방 두 개를 900달러에 얻어 마련했다. 남편은 불교 가정 출신이나 어쩔 수 없이 교회에 나갔다. 교회만이 유일한 한국 사람들과 교류의 장소라며 주보 만드는 일을 도와주고 있었다. 미국은 딸과 한방을 쓰는 것은 불법이어서 방 두 개짜리를 장만했다. 부엌은 없었으나 마당이 딸린 자그마한 예쁜 주택이었다. 가족은 큰방 옆에 붙어 있는 그라지(차량을 넣어두는 창고)에 조그마한 부엌을 만들었다. 온 가족이 함께하니 짧은 시간 안에 대충 그럴듯하게 아기자기한 부엌이 탄생했다. 누구나 처음 이민 오면 그렇듯이 이 사람 저 사람 살림을 가져다주었다. 짝 잃은 총천연색 그릇들이 부엌 풍경을 장관으로 만들어 주었다. 가족은 이사를 마친 후 코리아타운으로 달려가 삼겹살과 상추 등 각종 채소를 사와 파티를 벌였다. 미국 백인 동네에서 모처럼 만에 조우한 한국 이산가족은 한국 사람 사는 냄새와 삼겹살 내음이 넘실거리는 행복에 취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 2016-06-14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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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파고 시대, 제조업의 변화 방향은 무엇인가?
- 국가 경제에서 일자리를 많이 제공하는 분야가 제조업이다. 그런데 최근 조선업의 구조조정 등 제조업에서 이상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이에 인천 새얼문화재단(이사장 지용택)은 지난 8일 인천 연수구 송도동 쉐라톤인천호텔에서 아침포럼으로 '기로에 선 한국의 제조업'이란 주제로 산업연구원 주현 부원장의 강연회를 열었다. 주 부원장은 “한국이 2015년 GDP 규모 세계 11위, 수출 규모 세계 6위, 경상수지 1,075억 달러(약 126조760억 원) 흑자(2016년 980억 달러)고 세계은행(WB) 기업환경평가 세계 4위, 블룸버그 혁신지수 세계 1위, 무디스와 S&P 국가신용등급 각각 Aa2 등급, AA- 등급으로 중국 및 일본보다 높은 점 등은 긍정적”이라고 하였다. 그는 “한국의 제조업 비중은 30.3%로서 중국 28.3%, 독일 22.6%, 일본 19.0%, 미국 12.1%, 영국 10.6%보다 높으나, 3년 연속 이자보상비율이 100% 미만 한계기업 비중이 매년 증가(2002년 4.5%, 2007년 6.9%, 2012년 8.0%, 2014년 11.6%)하고 조선,철강,전기 전자업종의 수익성이 크게 하락하고 있어 구조조정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주 원장은 ““한국 경제를 둘러싼 환경 요인을 보면, 제4차 산업혁명이라 할 수 있는 인공지능, 로봇기술, 3D 프린팅, 사물인터넷 등 다양한 기술이 융합된 스마트 신기술로 노동력 대체와 일자리 양극화 등 고용환경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한다”라고 말했다. 이어 그는 “전 세계 GDP에서 아시아는 34.0%(동아시아 비중 22.2%)이고, 전 세계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8.2%(동아시아 비중 21.3%)로서 세계 경제 중심이 아시아로 이동 중이고, 특히 중국경제의 비중이 급등세를 보인다”이라고 했다, 특히 그는 ““2030년까지 세계 에너지 수요는 50%, 수자원 수요는 40%, 식량 수요는 35%(US NIC 2012)가 증가할 것으로 전망이나 경제개발의 후유증으로 나타나는 기후변화에 직면하고 있는데 한국은 여기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은 저출산 고령화 현상이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어 생산가능인구가 2016년을 정점으로 감소한다. 이에 따라 2016년 잠재성장률 생산요소별 기여도(한국경제연구원)는 2016~20년 2.7%(총 요소생산성 1.3, 자본 1.5, 노동 –0.1), 2021~25년 2.3%(총 요소생산성 1.3, 자본 1.3, 노동 –0.3), 2026~30년 2.0%(총 요소생산성 1.3, 자본 1.2, 노동 –0.4)로 전망된다“고 했다. 주 원장은 “그동안 한국은 투입주도형 경제성장 구조로서 1980년대의 경우 풍부한 저임 노동력, 90년대는 설비투자 확대, 2000년대 이후는 연구ㆍ개발(R&D) 투자 확대로 경제가 성장했고, R&D 투자 규모가 2014년 기준 63조7,341억 원으로 세계 4위, GDP 대비 R&D투자 총액은 4.29%로 세계 1위로서 표면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며 “그러나 정치와 정부의 신뢰성(정치인 94위, 정부규제 97위, 정책 투명성 123위 등), 기업경영의 전근대성(기업윤리 95위, 이사회 유효성 120위, 소수 주주 이익보호 95위 등), 노동시장 비효율성(노사협력 132위, 고용 및 해고 관행 115위, 정리해고비용 117위, 조세의 근로유인 효과 99위, 남녀근로자 비율 91위), 금융시장의 미성숙(금융서비스 유용성 99위, 대출 편이성 119위, 금융 건전성 113위) 등 구조적 비효율성이 너무 크다”고 지적했다. 또한 그는 “다변화, 다양화 추세에도 최상 기업집단에 대한 의존성이 크고, 중국기업의 대거 진입 등으로 대기업의 투자수익률이 하락함에 따라 대규모 자본투입을 통한 대량생산에 의한 성장은 한계에 이르렀고, 중소기업⇀중견기업⇀대기업으로 성장이 적체되는 등 기업가 정신의 퇴조현상이 뚜렷하며, 시장에서 상시적 구조 조정 부재와 공공금융기관의 과도한 개입 등으로 인해 역동성도 저하되고 있다" 했다. 그는 끝으로 한국은 지속가능한 성장전략으로 “△노동은 생산가능인구 하락 저지(출산율 제고), 여성 및 고령자 경제활동참가율 제고, 이민정책 등 외국노동자 문제 제고 △자본은 지식재산 생산물 투자확대 △총요소 생산성은 노동생산성 향상, 인적자본 투자 확대, R&D 투자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뉴노멀 시대의 산업정책으로는 “내수와 수출의 균형발전, 첨단기술 선도형 전략으로 전환, 기술혁신 친화적 규제시스템 구축, 기후문제 능동적 대처, 제조업의 소프트화, 글로벌 고부가가치 전략 추진, 여성 및 고령자 친화적 산업환경 구축, 경제민주화와 역동성 강화, 사회 전반의 투명성 제고, 기업경영의 선진화, 사회적 대화 촉진, 시장 친화적 산업정책, 새로운 정책 거버넌스 구조 모색 등으로 산업정책 방향 전환””을 주문했다.
- 2016-06-14 1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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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지금은] 전설의 ‘70가수’들 ‘2016’에 응답하다
- 당신은 무슨 일로 그리합니까/ 홀로이 개여울에 주저앉아서/ 파릇한 풀 포기가 돋아나오고…’ 길거리 음반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다. 중장년이라면 금세 알지만 10~30대 젊은 층은 거의 모르는 노래다. 1970년대 활동했던 정미조(67)가 부른 ‘개여울’이다. 그 정미조가 37년 만에 대중 곁으로 돌아왔다. 정미조뿐만 아니다. 정미조처럼 1970년대 전성기를 구가하다 활동을 중단했던 가수들이 최근 대중음악계에 속속 복귀하고 있다. 지난 3월 14일 서울 그랜드힐튼 호텔 로비에서 꽃다발을 든 50~70대 수십 명이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함성을 지르고 눈물을 흘렸다. 35년 만에 가요계에 복귀하는 포크 1세대 가수 박인희(71)였다. “살아가면서 이런 날이 오리라고는 상상 못 했다. 잠깐 노래했었고 좋아하던 방송을 하다가 떠났는데 이렇게 많은 분이 기다려 주시고 만나 볼 기회를 주시다니 너무 감격스럽다. 내 음악을 잊지 못하는 팬들을 보고 앨범 하나 만들자는 꿈을 품게 됐다.” 1981년 미국에 이민 가면서 대중음악계를 떠났다가 35년 만에 대중 앞에 다시 나선 박인희는 한창 활동했을 때의 모습은 찾을 수 없지만, 특유의 단아함은 잃지 않았다. 1970년대 혼성듀엣 ‘뚜아에무아’ 출신인 박인희는 1972년 솔로로 나선 뒤 모닥불’, ‘끝이 없는 길’, ‘그리운 사람끼리’, ‘세월이 가면’, ‘봄이 오는 길’ ‘방랑자’ 등 서정성이 강한 멜로디와 가사의 포크 음악을 직접 만들어 큰 사랑을 받은 1970년대 보기 드문 싱어송라이터였다. 또한, 박인희는 맑고 청아한 음성으로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 등 시를 낭송한 음반으로도 수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았다. 박인희의 트레이드마크인 통기타와 긴 생머리, 그리고 나팔바지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박인희는 4월 30일 서울 콘서트를 시작으로 일산, 수원 등 전국 투어에 나섰다. 박인희는 “가을께 새 앨범도 낼 계획이다. 최근 만든 곡이 60곡쯤 된다. 내게 맞는 곡은 내가 부르고 만든 곡에 맞는 가수가 있으면 줄 것이다. 가수 박인희보다 싱어송라이터로서 넓은 의미의 음악 속에 살고 싶다”는 계획을 밝혔다. 박인희…정미조…중장년팬들 가슴 설레 “가수로 복귀해 너무나 기분 좋습니다. 이젠 제 삶을 노래로 들려줄 때인 것 같아요. 저를 기억해주시는 분들뿐만 아니라 저를 새롭게 아는 분들에게도 가수 정미조가 어떤 가수인가를 보여주고 싶어요.” 인기 최정상이던 1979년 전격 은퇴를 한 뒤 37년 만에 대중 앞에 다시 선 정미조다. 차분하고 매력적인 보이스로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불꽃’ 등으로 1970년대 스타 가수로 명성을 날렸던 정미조가 지난 2월 전격 복귀해 수많은 대중의 시선을 끌었다. 정미조는 1979년 은퇴에서 2016년 복귀까지 기간을 제목으로 한 앨범 ‘37년’을 발표하며 가수로서 대중을 다시 만났다. ‘귀로’ ‘인생은 아름다워’ ‘7번 국도’ 등 재즈, 발라드, 탱고, 보사노바까지 다양한 장르의 세련된 신곡과 중장년층 뇌리에 여전히 남아 있는 ‘개여울’ ‘휘파람을 부세요’ 등 자신의 히트곡을 함께 담은 새 앨범은 정미조를 기억하는 중장년 팬들의 마음을 단번에 사로잡았다. 인기 절정의 1979년 가요계를 전격적으로 은퇴하고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던 정미조는 이후 교수 생활에 전념했다. 그리고 가요계를 떠난 지 35년이 흐른 2014년 만난 최백호가 앨범 발표를 권유하며 음반 제작자를 소개해 준 게 컴백의 계기가 됐다. 정미조는 수원대 조형학부 서양화과 교수로 정년퇴임(2015년)을 앞둬 여유가 있는 상황에서 노래에 대한 그리움이 터져 복귀 용기를 냈다고 했다. 음반 발매와 함께 가요계로 돌아온 정미조는 지난 4월 10일 콘서트를 갖는 등 가수 활동을 본격적으로 재개했다. 이에 앞서 33년간의 공백을 깨며 2014년 6월 새 앨범 ‘It’s Not Too Late’를 들고 복귀한 섹시 디바의 원조 김추자(65)는 무대를 통해 대중을 지속해서 만나고 있다. 1969년 신중현에 의해 발탁돼 가요계에 데뷔한 김추자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도발적 퍼포먼스, 파워풀한 가창력으로 ‘거짓말이야’, ‘꽃잎’, ‘님은 먼 곳에’, ‘늦기 전에’, ‘월남에서 돌아온 김 상사’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내며 1970년대 한국 최고의 여가수로 우뚝 섰다. 1970년대 ‘담배는 청자, 노래는 추자’라는 유행어에서 알 수 있듯 김추자의 인기는 엄청났다. 김추자의 복귀 이후 활동은 그녀를 기억하는 중장년 팬과 그의 노래를 거미, 조관우 등 수많은 후배 가수의 리메이크로 접한 신세대들에게 다른 의미로 다가가며 새로운 관심을 끌고 있다. ‘70가수’ 음악, 한국 대중음악 스펙트럼 확장 197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두 명의 남자 가수도 최근 복귀해 중장년 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 목회 활동을 하다 2014년 신곡 ‘걱정을 말아요’ 등이 담긴 데뷔 55주년 기념 앨범을 발표하며 가요계에 복귀한 윤항기(73) 역시 4월 30일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나의 노래, 나의 인생’이라는 타이틀로 단독 콘서트를 개최하며 활동을 재개했다. 윤항기는 1959년 대한민국 최초의 록밴드라 할 수 있는 키 보이스(Key Boys)의 멤버로 데뷔, 가수 생활 57년째를 맞았다. 1974년 솔로로 활동을 시작한 이후 ‘별이 빛나는 밤에’ ‘장밋빛 스카프’ ‘이거야 정말’ ‘나는 행복합니다’ 등 숱한 히트곡을 내며 스타 가수로 맹활약했다. 윤항기는 “나는 57년 동안 음악을 떠나 생활한 적이 없다. 그룹과 솔로는 물론 성직자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계속 음악을 했다. 나같이 나이 많은 70대 가수들이 설 방송과 무대가 없어 안타까웠다. 나 같은 원로 가수들도 계속 활동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선진국에서는 70대 이상의 훌륭한 가수들이 왕성한 활동을 하고 존경도 받고 있다”며 여전한 현역 가수임을 강조했다. 윤항기는 가을부터 전국투어에 나설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신드롬을 일으키며 높은 반응 속에 1월 16일 막을 내린 tvN 드라마 에서 라미란이 불러 유명해진 ‘황홀한 고백’의 원곡 가수 윤수일(61)도 1970년대 가수 컴백 대열에 합류한 스타 가수 중 한 사람이다. 1977년 ‘사랑만은 않겠어요’로 데뷔해 ‘아파트’ ‘황홀한 고백’ 등으로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아온 윤수일은 4월 24일 그랜드힐튼 호텔에서 열린 ‘윤수일 밴드 40주년 콘서트’를 계기로 무대 공연과 방송활동을 재개했다. 윤수일은 “세월이 화살 같다는 말을 실감한다. 여전히 나는 가수다. 내 노래를 기본적으로 활동하면서 후배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겠다”고 말했다. 35년 만에 복귀한 박인희를 비롯해 정미조, 김추자, 윤항기, 윤수일 등 1970년대 가수들이 다시 대중 앞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것은 최근 들어 신중년의 문화소비가 증가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중·장년층이 젊은 날을 함께했던 1970년대 가수들의 음반 구매와 공연 관람을 많이 하면서 신중년 가수들이 속속 대중음악계로 돌아오는 것이다. 또한, 같은 드라마나 KBS 같은 음악 예능프로그램에서 1970년대 음악을 소개하거나 리메이크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대중문화 전반에 1970~1980년대 복고바람이 거세지면서 1970년대 가수에 관한 관심이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젊은 층에서도 높아진 것도 1970년대 가수 복귀 붐의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부에선 197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가수들의 복귀가 새로운 트렌드와 진화, 완성도 높은 음악, 탄탄한 가창력의 담보 없이 복고 바람에 기대어 단순한 추억팔이에 그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비판도 제기한다. 하지만 1970년대 가수들의 복귀 바람은 대중음악계와 대중에 긍정적인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의 노래와 함께했던 중장년층에게 젊은 날의 추억을 선사할 수 있고 신세대에게는 1970년대 음악의 문양과 특성을 접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또한, 요즘 신세대 가수들에게서 들을 수 없는 연륜과 정서가 담긴 60~70대 가수들의 음악으로 한국 대중음악의 스펙트럼이 확장되는 것도 긍정적인 부분이다.
- 2016-05-16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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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을 맞으며] 찾아온 6월의 눈부신 행복
- 지난 5월, 집집마다 활짝 피어 올랐던 카네이션 꽃들이 아쉬운 눈빛으로 저만큼 자취를 감추고 그 남은 향내마저 시들어 뒹굴 때쯤이면 부서진 꽃잎들은 흐린 미소로 전해온다. 또다시 6월의 꽃들은 정녕 눈부심이라고 나지막하게 내 귓가에 희망을 담고 속삭여온다. 장하다. 내 딸들아! 그리고 앞으로도 화이팅! 내게는 두 딸이 있다. 그리고 그 딸들은 6월이 되면 한아름의 장미꽃으로 내게 남은 열정을 태워주는 불씨가 된다. 그들이 가져다 주는 행복선물에 나는 고여 드는 눈물로 하늘 우러러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느 부모나 자식에게 최선을 다하고 그 자식이 잘 되기를 소원하지만 이 서서히 타오르는 계절, 그것들은 분명 그 아름다운 어떤 보석보다 빛나고 귀한 인생의 값진 선물이리라. 우리 가족은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격은 시련의 시간들이 많았다. 나라의 경제위기와 함께 닥쳐온 가정의 몰락, 그 여파의 빈털터리로 도피해야만 했던 이민생활, 어린 나이에 겪어야 했던 이산가족의 아픔, 낯설기 만한 이국 땅에서 살아남기 위한 수단으로 겪어야 만 했던 수많은 고통들, 그 상처들은 피나는 눈물로 파고들어와 뼈 속으로 스미는 칼날이었다. 험난한 절벽아래 낭떠러지 위기의 고통을, 우리는 어쩌다 상봉하는 가족이었지만 그리움의 빛깔로 채워진 가족이라는 힘으로 빛나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온몸으로 발버둥을 쳤던가. 다행히도 아이들은 긍정의 힘으로 열심히 잘 버티어 주었고 그 초라하고 가난했던 상처들은 이제 얼룩진 추억으로 남아 삶의 한 페이지를 장식해 주었다. 그리고 이제 그 힘겨웠던 돌덩이 들은 멋진 유학생활로 탈바꿈하여 어엿하고 당당한 여의사들이 되어 사회에 공헌을 하고 있다. 이 어찌 더한 빛나는 기쁨이 있으리오. 우리의 삶이 때론 아무리 견디기 힘들다 해도 지독한 고통과 함께 견디어 냈기에 지나고 보면 그래도 견뎌 낼 만했었다고 그리고 참아낸 만큼 또 하나의 찬란한 눈부신 행복으로 우리 곁에 머물러 주기에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 말이다. 살면서 찾아오는 순간의 기쁨을 또 누릴 수 있기에 그 어떠한 고통도 더 견뎌 나갈 수 있을 것이리라. 또한 그 기쁨 눈물은 기도로써 간절히 갈구했던 부모의 마음이었기에 더 값지게 솟아 날것이다. 나를 모르는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말한다. 물 안주고 너무도 잘 자라주었다고 말이다. 어느 어떤 나무가 물 안 먹고 자랄 수 있단 말 인가. 나는 그저 회심의 미소로 답할 뿐이다. 언젠가 시간과 침묵이 말해줄 것을 기대할 뿐이다. 부모와 자식 그 관계가 뭔지는 아직 잘 모르지만 언제나 부모는 자식 잘 되기만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고 자식은 이 다음 언젠가 또 부모가 되었을 때 아마도 그 때쯤이면 부모마음 어미마음을 이해하게 될 테니까 말이다. 내 생일이 담긴 6월이 찾아오면 두 딸들은 호텔 부폐로 프랑스 레스토랑으로, 가난해진 어미를 끌고 다니며 명품으로 포장시키고 그 화려한 선물 아름다운 유혹으로 나를 초대 한다. 이제는 나이 들고 시들어진 어미에게 카네이션 보다 따뜻한 마음으로 잔잔한 가슴에 불씨를 댕겨준다. 누군가 말했듯이 행복은 누구에게나 자기 안에 웅크리고 앉아 언제고 주인님이 꺼내어 줄 때만을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고 했다. 나는 또 나의 그날이 오면 내 안에 잠자고 있던 행복들을 끄집어 내어 아주 찬란하게 환한 빛으로 말하고 싶다. 다시 찾아온 6월의 눈부신 행복이라고. 그리고 그 강하게 퍼부어대던 낯 설은 소나기의 위기 속에서 훌륭한 꽃으로 피어나준 내 아이들에게 고마움의 박수갈채를 보낸다.
- 2016-05-10 10: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