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문명이 넘치는 미국에도 사람의 정서가 도를 넘어 거리를 활보한다. 부자들이 사는 도시 산타모니카 해변에는 여기저기 홈 리스들이 즐비하다. 뿐만 아니라 코리아 타운으로 이어지는 다운타운 윌셔 길가에도 마약과 술병을 거머쥔 거지들이 줄을 잇는다. 문명 선진국의 아이러니였다.
세탁소가 시작되는 6시 30분. 필자는 가게 앞을 청소하기 위해 어김없이 빗자루를 들었다. 밤새 스치고 간 사람들의 흔적을 치우기 위해서다. 문을 열고 나갔을 때 깜짝 놀랐다. 하얀 백발의 할머니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엎드려 있다. 그녀는 기도하듯 앞으로 엎드려있고 거무죽죽한 더러운 담요를 덮어쓰고 있었다. 주변에는 뺑 돌아 하얀 가루들이 범벅이 되어 뿌려져 있다. 필자는 무섭지만 궁금해서 살 금살 금 다가갔다. 그때, 할머니가 갑자기 꿈틀대서 움찔하며 뒷걸음을 쳤다.
다시 큰 숨을 몰아쉬고 가깝게 앞으로 갔다. 일단은 할머니 때문에 청소할 수가 없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였다. 할머니는 담요 속에서 작은 소리로 흥얼거리며 노래를 했다. 무슨 노래인지 듣고 싶어 귀를 쫑긋 세워 기울였다. 영어로 부르는 영어 노래였다. 필자는 도대체 알아들을 수가 없는 원 어민 노래로 수준급이었다. 영어 발음에 목청까지 엄청 좋아 신기했다. 그러나 할머니가 한 번씩 푹석 거리면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다. 더 이상은 곁에 머무르고 싶지 않았다. 마침 남편이 빨리 들어오라고 불러댔다.
할머니는 낮 동안에는 동네 온갖 쓰레기들을 마켓 카트에 가득 모아서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이것저것 무거워진 쓰레기 더미가 마치 귀중한 살림이라도 되는 듯 품고 다니다가, 저녁노을이 서산에 오를 때쯤이면 어김없이 세탁소 앞에 화려한 저녁 살림을 펼쳤다. 어느 날 늦게까지 야간 일을 할 때 알게 된 사실이다. 할머니는 아침이 되면 귀신같이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더 신기한 것은 밤새 뿌려놓은 하얀 가루들의 정체도 함께 사라졌다. 깨끗하게 청소도 되어있다.
유난히 산타모니카 길거리에는 홈 리스(거지)가 많았다. 거대한 미국 땅에도 물질이 넘쳐흘러 풍요로움 속, 빈곤 투성이들이 거리를 헤매며 약에 취해 흐느적댔다. 필자는 그 할머니가 궁금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엎드려 있던 할머니가 온데간데없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때 머리 위로 헬리콥터 한 대가 윙윙대며 원을 그리고 있다. 또 무슨 일이 터진 것이다. 미국은 조그마한 일이라도 났다 하면 경찰과 헬리콥터가 합동 작전으로 총출동을 하며 난리가 아니었다.
그날 이후로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병원으로 실려간 것 같다고 동네 사람들은 말했다. 늘 가게 앞을 노래로 흥얼거리며 지켜주었는데 할머니가 없으니 어딘가 모르게 허전해왔다. 필자는 갑자기 한국에 계시는 친정 엄마 생각이 났다. 필자의 어린 시절, 친정 어머니도 정신 줄을 놓으시고 늘 병원에 계셨다. 아버지를 다른 여자에게 빼앗기고 그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셨다. 어머니는 마음이 여려서 더 아픔이 크셨던 모양이다. 마치 그 할머니가 필자의 어머니와 겹쳐서 연상이 되며 안타까운 마음에 더욱 궁금해졌다.
두어 달쯤이나 지났을까. 다시 할머니가 가게 앞 그 자리로 다시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깨끗하게 청소가 되어있기는 했지만 하얀 가루의 흔적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이웃 가게들을 다니며 그 할머니 소식을 묻기 시작했다. 40년이 된 옆집 이란 마켓에서 그 할머니 얘기를 들을 수가 있었다. 할머니는 옛날에 노래하는 가수였다고 했다. 달러도 수중에 많이 갖고 있는 부자라고도 했다. 어느 날부터 정신을 잃고 집을 나와 싼타모니카 거리에서 20년째라고 했다.
세탁소 앞에서 예쁘게 생긴 할머니가 자리를 잡은 것은 필자가 세탁소 주인이 된 이후부터라고 했다. 그 얘기를 듣는 순간 소름이 끼쳐왔다. 그날 이후부터 아무리 냄새가 나도, 리나 할머니를 미워할 수가 없었고, 10여 년 내내 할머니는 필자의 가게 앞을 지켜주었다. 그리고 어느 날 갑자기 영문을 모르는 채 소리 소문 없이 또 사라져 버렸다. 어느 누구도 할머니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아침 일찍 가게를 나가 문을 열려고 하니 엄청난 일이 벌어져있다. 가게 전면 두꺼운 유리창이 총탄에 맞아 박살이 나 있었다. 필자 부부도 모르는 밤새 벌어진 대형사건이었다. 밤거리에서 마약에 취한 정신 나간 미국인이 총알을 마구 쏘아대며 스트레스를 뿜어댄 것이다. 기가 막힐 일이 터졌지만 큰 피해 없이 잘 마무리가 되었다. 잠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곳이 또 선진국 미국이었다.
그때, 갑자기 리나 할머니 생각이 또 떠올랐다. 밤마다 가게 앞에서 잠자리를 하며 세탁소를 지켜주었던 그 할머니 덕분에, 무사하게 지내온 지난날이 무척이나 감사했다.
땅덩어리가 넓은 미국에서 차는 발이나 다름없다. 차가 없으면 누구나 꼼짝도 할 수가 없다. 이민 가서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운전 면허증을 따는 일이었다. 그리고 차를 구입해야 하는데 그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낯선 땅에 천지가 어리둥절하고, 가난한 이민살림에 비싼 새 차를 산다는 것은 엄청난 사치였다.
필자는 두 번에 걸쳐서야 겨우 캘리포니아 운전면허증을 취득했다. 미국면허증을 따는 일은 만만치가 않았다. 필기 시험은 그렇다 해도, 실기시험의 시내주행은 지금도 등골을 오싹하게 만든다. 운전 라이센스를 어렵사리 얻어내고 드디어 필자 소유의 중고차 한대를 구입했다. 남편이 타던 싸구려 중고차는 온 가족이 타기에 작고 좁기도 했지만 틈만 있으면 골치를 썩였다.
남편과 함께 하루 종일 쏘다니며 미국인 자동차 매매상뿐만 아니라 멕시칸, 한국인 자동차 판매상을 돌아다녔다. 결국은 한국인에게 하얀 색 밴 한대를 구입했다. 낯선 땅에서 소유한 첫 재산이었다. 남편은 신이 나서 몇 번씩이나 차를 닦아 대더니 기념으로 바람을 쐬자며 온 가족을 출동시켰다. 아이들은 세탁소 근처에 있는 ‘인 앤 아웃’ 햄버거를 먹고 싶다고 했다.
그 햄버거는 한국사람들 그리고 대체로 미국인들에게도 상당히 인기가 있었다. 고기를 좋아하지 않는 필자도 이따금씩 먹고 싶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이유는 모든 재료가 냉동 식품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당시 ‘인 앤 아웃’은 백인이 아니면 종업원으로 채용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력은 하늘을 치솟아 몇 십분 씩 줄 서는 것은 보통의 일이었다.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남편은 싼타모니카 언덕을 지나 대단한 미국의 거부들이 살고 있는 어마어마한 동네로 구불구불 구경을 시켜줬다. 그 유명한 해변도로 1번 후리웨이를 타고 멀리까지 약 두어 시간은 돌아 다닌 것 같았다. 어느 작은 해변 골목길로 들어설 때쯤에 차가 덜컹 덜컹하더니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남편은 하얗게 당황해 안절부절 야단이 났다.
덩달아 아이들도 불안해 했다. 차에서 내려서 왔다 갔다 하더니 문제가 생겼다며, 시동이 걸리지 않아 더 이상 갈수가 없다고 했다. 필자도 갑자기 어찌 해야 하는지 몰라 멍청히 서있었다. 어디가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동네에서 졸지에 발없는 미아가 된 것이다. 필자는 어딘가 연락을 해야 했지만 그때는 핸드폰도 없었다.
얼마 후에 세리프(경찰차)가 왔다. 자초지종을 묻더니 라이센스(운전면허증)와 보험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차는 우선 길가의 한편으로 안전하게 옮겨놓아야 한다며 도와주기를 시작했다. 여러 사람이 힘으로 이리 밀고 저리 밀고 하더니 자리를 잡았다. 어느새 캄캄한 밤이 되어 쌀쌀한 바람이 옷 속으로 스며 들었다. 바닷가 옆이라 더 바람이 불어왔다.
옷을 벗어 아이들을 감싸 안고 대책을 연구했다. 차를 그 자리에 일단 그대로 놔두고 내일 다시 와서 처리하기로 했다. 남편은 이리저리 둘러 보더니 다행히도 세탁소가 가까운 곳에 있는 것 같다며 그냥 걸어가자고 했다. 가족들은 터덜터덜, 대략 한 시간 넘게 밤길을 걸어온 것 같았다.
멀리 필자의 세탁소가 보이기 시작할 때는 그야말로 환희였다. 밤11시, 차가 없으니 집으로 갈수가 없다. 그렇다고 교회사람들을 불러 내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었다. 도착 후, 밤늦게 다시 캄캄한 세탁소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분이 묘했다. 일단은 긴장이 풀린 탓인지 아이들은 배가 고프다고 했다. 여기저기 찾아보니 한국라면이 있었다. 세탁소 안에서 냄새를 풍기며 라면을 보글보글 끓여 먹었다. 구수한 라면 맛이 기가 막혔고, 가족들은 기분이 좀 풀린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른 방법이 없으니 세탁소 안에서 하룻밤을 지내야만 했다. 필자는 궁리 끝에 우선 걸레를 만들어, 가족이 잠잘 공간만큼의 바닥을 깨끗하게 닦아냈다. 맨 밑에는 푹신한 담요를 몇 장 깔았고 그 위에 깨끗하게 빨아놓은 손님들 이불 몇 개를 두둑하게 깔아놓았다. 손님에게 미안하기는 했지만 또 깨끗이 다시 빨아주면 된다고 생각했다. 손님들이 찾아가지 않았던 옷들과 수건을 꺼내어 돌돌 말아 베게도 만들었다. 아주 부잣집 몇 천불 짜리 고급 거위 털 이불도 꺼내어 덮기로 했다. 네 식구가 두 다리 쭉 뻗고 자기에는 아주 훌륭한 잠자리가 만들어 졌다.
아이들은 마치 캠핑을 온 것 같다며, 아늑하게 꾸며진 잠자리 위에 벌러 덩 눕더니 두 다리를 번쩍번쩍 들어가며 좋다고 했다. 남편도 웬만한 텐트보다 좋다며 따뜻한 커피한잔을 타 먹자고 했다. 나름대로 낭만이 흘렀다. 온 가족은 중고차와 씨름한 덕분으로 피로가 몰려와 어느새 골아 떨어졌다. 결국 가난이 가져다 준 중고차 경험은 전혀 색다른 캠핑세계를 맛보게 해주었다. 비록 힘겨운 고통의 시간이었지만 그것은 또 생각하기 나름이었고 받아들이는 자의 긍정적 위안이었다.
차디찬 세탁소 콘크리트 바닥에서의 하룻밤은 이민자가족에게 커다란 추억거리를 안겨주었다. 언제 또 필자 가족이 그러한 잠자리를 맛볼 수 있을 것인가라는 생각에 오히려 감사했다. 아이들도 생전처음으로 맞이한 낯선 경험에 불만 없이 잘 잤다고 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모닝커피를 먹기 위해 맥도날드로 향하는 발걸음에는 깔깔대는 웃음이 가득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처럼 지난날의 고된 이민생활은 결국 필자 삶의 커다란 재산이 되었다.
미국은 노인천국이다. 그러나 백인 노인들에게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외로움이 그 한 몫을 차지했다. 미국의 노인들은 대체로 검소하지만 부유하고 고독한 만큼 사랑도 넘쳤다. 미국인들이 인정머리 없고 이기적이라고 누가 그랬는가. 자본주의가 넘치는 미국에 살면서 얻을 것과 배울 것은 끝이 없었다.
하얀 은발머리가 햇빛에 반짝이며 곱게 단장한 백인 할머니 한 분이 지팡이를 짚으며 뒤뚱뒤뚱 세탁소 안으로 들어왔다. 재빨리 소리를 질러 남편을 불렀고 남편은 얼른 뛰어나가 할머니를 두 팔로 부축했다. 필자는 아직 외국인 손님이 어색하기만 해서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머리가 하얀 할머니는 얼굴에 소녀 같은 천진한 미소를 띠며 카운터 앞 의자에 앉았다. 처음 오는 손님이라고 했다. 언뜻 봐도 80은 넘어 보이는 단아한 모습의 예쁜 미국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두 부부의 모습을 번갈아 보시더니 이것저것 물어왔고, 남편은 상냥하고 친절하게 하나하나 답변을 했다.
그 연세에 운전을 직접 하고 세탁물을 하나 가득 차 트렁크에 담아오셨다. 남편은 밖으로 나가 트렁크를 열고 세탁물을 옮기기 시작했다. 비가 쏟아져 천장으로 세어난 빗물이 옷장으로 들어와 옷들이 망가졌다며 대충 50장은 가져온 것 같았다. 달러로 치면 대략 500달러는 될 것 같아 깜짝 놀랐다. 남편은 친절을 있는 대로 하더니 300달러만 받겠다고 했다. 필자는 조금은 못마땅했지만 참아야 했다. 남편은 신이 난 듯 가게를 돌아나가는 할머니 손님을 차에까지 부축하며 정중하게 모셨다. 필자도 그때는 함께 인사를 했고, 할머니는 고맙다며 몇 번이나 두 손을 잡아주었다.
일주일 후, 백인 할머니는 친구 두 명을 데리고 다시 왔다. 필자 부부가 너무 친절하고 상냥해서 모셔왔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소개를 해주겠다며 주름진 환한 얼굴에는 웃음이 가득했다. 그 후로는 무슨 때마다 초콜릿과 손수 구운 비스킷뿐만 아니라 각종의 선물도 있는 대로 가져다주었다. 그 이후로도 5년 정도 단골이 되어 꾸준한 왕래를 했고 주위의 사람들로 매상은 늘어갔다.
어느 날부터 그 할머니가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모습이 뚝 끊겨 필자 부부는 무슨 일인가 걱정을 했다. 얼마 후 보스턴에 사는 아들이 할머니 사망 소식을 전해왔다. 아들은 할머니에게 들었다며 그동안 친절에 대한 감사 인사와 함께 할머니 옷에 대한 거금을 지불하며 모두 찾아갔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그날은 필자 부부도 행복했던 마음에 그림자가 드리우며 몹시 슬픈 날이었다.
일주일쯤 지났을까, 건장하게 생긴 백인 할아버지가 세탁물 한 보따리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소개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치매 끼가 있는지 한쪽 손을 심하게 덜덜 떨었다. 남편은 반갑다며 여윈 두 손을 덥석 잡고 친절하게 인사를 했고, 할아버지는 사우스 코리안이냐고 몇 번을 물었다. 할아버지는 6.25한국 전쟁 참전 용사였다며 필자 부부 만난 것을 무척이나 반가워했다. 자세히 들어보니 할아버지는 파킨슨병으로 혼자 노인 아파트에 사셨고 아들딸은 타 주에서 살고 있다고 했다. 미국 노인들은 거의가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혼자 살고 있어 안타까웠다.
남편은 한국에 아버지 생각이 난다며 몇 배로 친절을 베풀었다. 어느 때는 직접 집에까지 배달을 했다. 할아버지는 올 때마다 고맙다며 고액의 팁을 용돈처럼 건네주었고 매주 월요일 첫 손님으로 기분 좋은 매상도 채워주었다. 와이셔츠 5장과 바지 2벌로 매주 똑같은 옷과 속옷 몇 벌이 전부였지만 금액은 만만치가 않았다. 반복되는 세탁으로 옷들은 너덜너덜해갔지만 할아버지는 편하고 좋아하는 옷이라며 변함이 없었다. 필자에게 할아버지 옷은 곧 익숙해졌고 그 할아버지 냄새가 배어있어 금방 알 수가 있었다. 미국인들은 자기가 맘에 드는 것이면 똑같은 옷이 몇 벌씩이나 되었다. 어쩌면 그들은 사치가 아닌 굉장히 검소하며 합리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단골 노인 손님들이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입에서 입으로 소문이 나는 것 같았다. 노인들은 추수감사절 및 크리스마스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가장 먼저 각종의 선물을 가져왔다. 시시때때로 이것저것을 가져다주면서 마음의 정을 나누었다. 정이 그립고 외로운 이민자에게는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토박이인 그들도 외로움은 가득했지만 정이 넘치고 마음이 따뜻했다. 그들은 부가 넘치는 나라에 살았지만 고독을 몸에 품고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자식들은 있어도 성인이 되면 부모를 떠나야 했고 부모는 나이가 들면 외로움 친구도 품어야 하는것이 그들 전통적 문화의 일부였다.
미국에 노인들은 거의가 자식들과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가 어느 날 병원으로 실려가 조용히 혼자 죽어간다. 땅덩어리가 크기 때문에 어쩌면 당연한 것으로 혼자 또는 부부만이 사는 것에도 자연스레 익숙해져 갔다. 노인들은 정부에서 제공해 주는 아주 저렴한 노인 아파트에서 지내며 정부 보조금인 웰 페어(기본보장 연금)나 쇼셜 연금(사회보장 연금)으로 살고 있다. 메디칼(병원)은 물론이고 후드(음식) 스탬프까지 어쩌면 부자로 생활할 수가 있다. 어떤 이는 차곡차곡 저축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외로움의 단어는 인간이 풀지 못하는 커다란 공통과제로 남아있는 것 같았다.
필자 부부가 조금 친절과 애정을 베푸니 대가는 그 열 배는 돌아왔다. 물론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단히 합리적으로 냉정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결코, 차고 이기적인 사람들과는 거리가 멀었고, 기본적인 질서의 바탕 위에 인간적인 따뜻한 사랑이 마음속 깊이 흐르고 있었다. 사람의 정서는 누구나 비슷했고 겉의 생김새와는 또 다른 것이었다. 진실로 대하니 진실로 통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의 육체적 고생은 참된 삶의 의미를 느끼게 하는 참으로 진솔한 생활이었다.
필자 이민생활 초기에 선배 지인이 말했다. ‘미국은 살수록 매력이 있는 곳’이라고. 물론 전혀 다른 문화가 받아들이기 힘든 것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살면서 새로운 것에 적응한다는 것은 창조의 세계와도 같았고, 황무지의 낯선 땅에서 매력이라는 단어는 생소할 뿐이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남의 나라 미국도 사람 냄새 풀풀 나는 따뜻한 사람들이 사는 곳으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아름다운 백인 노인들, 부디 건강하고 활기차게 오래오래 살아 주기만을 바라고 싶다.
한국에 난리가 났다. 중동호흡기증후군(SARS)라는 괴상한 병명이 온 나라를 흔들고 있었다. 한인들은 우리나라 김치가 그 병에 대응하여 효능이 있다는 소식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필자도 김치에 대한 추억이 그리워 한인마켓으로 달려가 김치 한 병을 사 들고 왔다. 많은 한인들의 식탁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의 마켓에도 김치가 떨어지지 않았다.
코쟁이 미국 나라에도 얼마나 김치가 흔한지, 마켓마다 온갖 종류의 김치가 다양하고 화려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필자는 진열되어있는 김치를 마주하면 하늘나라에 계시는 어머님 생각에 잠시 잠기곤 했다. 어머니께서 베풀어 주신 그 정겨운 손맛은 영원히 기억의 한편을 장식하고 있었다.
필자의 신혼시절, 시부모님은 두 분이 단출 하게 사시면서 맛있게 저녁을 드시고 계셨다. 부엌이 넓어서 춥다고 피워놓은 연탄난로에는 잘생기고 싱싱한 생 꽁치에 소금을 술술 뿌려가며 굽고 계셨고, 밥상 위에는 스테인리스 양재기에 대가리만 뚝 잘라서 담아놓은 시큼한 냄새 풍기는 싱싱한 김치 한 포기. 어머니는 그 김치를 손으로 쭉~쭉 찢어가며 맛있게 드시는 데, 필자는 어찌나 그것이 먹고 싶었던지 눈치만 보며 침을 질질 흘려대고 꾹꾹 참고 있었다.
시집가기 전, 필자의 친정아버지도 김치 애호가이셨다. 앞마당 땅속 깊이 묻어 놓은 김칫독에서 금방 꺼내온 싱싱한 김치 한 포기를 대가리만 뚝 잘라서, 기름이 자르르 흐르고 김이 퐁퐁 나는 하얀 쌀밥에 척 걸쳐서, 입을 크게 벌리시고는 한 숟가락 덥석 드시고 우적우적 씹어대시면 그저 복이 따로 없었다. 드시는 그 모습에서 마치 큰 복이 굴러들어 올 것만 같았고, 얼마나 군침을 돌게 했는지 모른다. 필자도 엄마를 졸라 찬 보리차 물에 하얀 밥을 말아서 한 숟가락 뜨고는 가만히 들고 있으면 엄마는 손으로 김치를 쭉 찢어서 돌돌 말아 숟가락 위에 먹기 좋게 올려주셨다.
얼마나 맛이 있던지 하얀 쌀밥 한 그릇을 어느새 후딱 비워 내고는 냠냠했었다. 더구나 군데군데 섞여 있는 제멋대로 생긴, 대충대충 썰어 넣은 넓적한 무 우 김치 조각들, 밥을 물에 말아놓고 젓가락 한 짝으로 무김치 한가운데를 푹 찔러서 왼손으로 잡고는, 밥 한 숟가락 먹고 무김치 한입 와삭 깨물어 먹고 하면 다른 반찬은 전혀 필요가 없었다.
갓 시집온 필자는 그때 그 생각이 나서 물끄러미 어머니를 쳐다보고 있었다. 애라 모르겠다. “어머니 저도 한쪽만 찢어주실래요?”하고 밥숟가락을 어머니 앞으로 쑥 밀었다. 어머님은 어이가 없으셨는지 눈이 휘둥그래 계셨고 아버님과 필자를 돌아가며 바라보셨다. 아버님 또한 당황을 하셨는지 어머니와 필자를 번갈아 쳐다보셨다. 순간, 필자는 그냥 먹고 싶은 마음에 별도리가 없어 뻔뻔하고 당당하게 한번 더 달라고 숟가락을 쑥 내밀었다.
어머님은 아무 말씀이 없이 김치 한쪽을 쭉 찢어서 숟가락 밥 위에 빙빙 돌려 올려놓아 주었다. 필자는 체면을 불고하고 덥석 입을 크게 벌려 한 덩어리 집어넣고 신나게 씹어 댔다. 어찌나 맛이 있던지 시어머니에게 또 해달라고 했고 어머니께서는 아무 조건 없이 여러 번을 그렇게 해주셨다. 막내며느리인 필자는 양심에 꺼리고 철 딱 성이가 없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면 그때가 어머님과의 가장 눈물 어린 사랑의 추억이 되어 잊을 수가 없다.
어느 일요일에 LA 한인 마켓으로 달려가 커다란 김치 한 병을 사 왔다. 옛날 생각과 그리운 고국의 생각을 하면서 그때와 똑같은 방법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혼자 넓은 식탁에 앉아 김이 나는 하얀 밥을 보리차 물에 말아 놓았다. 어느덧 두 딸의 엄마가 되었고, 훌쩍 나이를 먹어 거칠어진 손으로 아무렇지 않게 두 손가락으로 김치 한포기를 덥석 꺼냈다. 쭉~쭉 찢어가며 김치를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 밥숟가락 위에 빙빙 돌려 올려놓았다. 입속으로 들어간 못생긴 김치가 얼마나 꿀맛인지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때, 이층에 있던 작은 딸아이가 뛰어내려오더니 왜 엄마 혼자 먹느냐며 앙탈을 부렸다. 자기도 한입 달라며 입을 크게 떡 벌리며 침을 흘렸다. 크게 한 숟가락을 만들어 주니 입을 아~ 벌려 먹더니만 또 한입을 더 달라는 것이다. 무지하게 맛나다고 엄지손가락을 척 올린다. 결국은 따로 밥 한 공기를 물에 말아서 혼자서 거뜬하게 해치웠다. 작은 딸은 역시 한국 김치가 최고라며 고개를 끄떡 거렸다. 한국에 난리 치는 ‘사스’ 라는 유행병도 우리나라 김치 때문에 꼼짝 못하고 달아 날 거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필자는 딸의 그 모습에 한동안 시어머님 생각과 한국 생각이 났다.
비록 낯설고 힘든 이민의 삶이고 치즈와 햄이 발에 밟히도록 흔한 나라였지만, 딸아이의 밥숟가락 위에 올려 놓아주는 빙빙 돌린 김치 맛은 다른 어느 맛과도 바꿀 수가 없었다. 바다 건너 뚝 떨어진 먼 나라에 살았지만, 엄마와 함께하며 따뜻한 손맛의 정들은 부모와 자식의 끈끈한 인연을 돈독히 해주는 것이었다. 한해 한 해 엄마를 닮아가며 예쁘게 성숙해가는 자식들의 모습 속에는 지난날의 부모의 모습 그대로가 담겨있었다. 그것들은 곧 천륜의 그림자가 되었고 세월과 자연의 흐름 속에 이치와 섭리를 말해주며 그리움을 그려내고 있었다.
고단한 이민의 삶 속에서도 그날에 ‘사랑의 손맛’은 가슴속 영원히 기억되고 있었다.
미국 세탁소는 오후 7시까지 꼬빡 12시간 영업한다. 전 지역 어느 곳에서나 거의 똑같다. 드디어 이민생활 3년 만에 국제적 해변도시 산타모니카에 작은 클리너(세탁소)를 갖게 되었다. 필자의 가족은 커다란 꿈이라도 잡은 듯 잠을 이루지 못했고, 그것은 첫 번째 아메리칸드림이라고 사람들은 말했다.
100년이 넘은 건물, 세탁소 옆에는 이란 마켓과 침대 파는 곳이었다. 철창으로 된 세탁소 뒷문은 오랜 세월에 녹이 슬어 있었다. 50여 년 전통의 세탁소 철창문을 열고 들어갔다. 웅장한 각종 기계들이 새 주인을 맞으며 우뚝 자리를 잡고 서있었다. 낡고 수명을 다한 것들도 눈에 띄었다. 필자는 미국의 세탁소에는 낯이 설었고, 시커먼 바닥과 높은 천장에는 몇 십 년 묵은 먼지들이 너덜너덜 달려있었다. 마치 납량 영화 속 창고 같아 대대적인 청소를 시작했다.
매일 새벽 5시면 일어나서 먹을 것들을 준비하고 6시쯤 집에서 출발을 한다. 세탁소까지는 약 33마일로 40분 거리에 있었고, 405번 프리 웨이를 타고 산타모니카로 달려가는 새벽 공기는 아침을 산뜻하게 열어주었다. 신나는 팝송을 틀어놓고 남편과 함께 가는 길은 드림(꿈)만 같았다. 미국의 프리웨이는 부지런한 차량들로 이른 새벽부터 삶을 향해 거대한 불바다를 이룬다. 영락없이 6시 40분, 중고차는 덜덜거리며 세탁소에 도착했다. 미국의 몰(상가)들은 뒷문 쪽에 대체로 주차장이 마련되어있었다.
철창문을 열고 가게로 들어가 남편은 제일 먼저 전기 불 스위치를 올리고 가장 중요한 보일러를 켠다. 하루 시작을 알리는 웅~소리와 각종의 기계들이 뒤섞여 묘한 소리가 신고식을 한다. 진한 커피와 함께 초보 이민자 필자에게 남편은 이것저것 가르쳐 주기 시작했다. 아침 7시가 되면 뜨거운 다림질을 해대는 멕시칸 2명이 도착하고 9시면 바느질 아줌마가 출근을 한다. 금발 머리 첫 손님과 남편은 한참 동안 수다를 떨었다. 미국 사람들은 남녀가 수다 떠는 것을 참 좋아했다.
남편은 전날 들어온 각종 세탁물에 손님마다 제각각 다른 색깔로 번호 딱지 붙이는 작업을 지시했다. 왜냐하면 손님들 옷들이 서로 뒤섞이면 찾아내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얼룩 부위에는 빨간색 테이프를 붙여 그 위치를 선명하게 표시해주고, 옷 색깔 별로 분리해서 세탁 장소로 이동을 한다. 남편은 스팀 건(총)으로 우선 얼룩을 빼주고는 커다란 드라이 기계 통속으로 던져 버렸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기계 소음과 수많은 빨래들 속에서 필자는 머리를 갸우뚱거렸다. 도대체 남의 나라에서 때묻은 옷에 딱지를 붙이는 삶이 아무리 생각해도 꿈같지는 않았다. 클리너(세탁소)란 온갖 더러움으로 굴러 온 삶의 얼룩들을 깨끗하게 빨아주는 직업이다. 그야말로 3D 직업 중 하나로 지극 정성으로 노동을 투자해야만 달러로 연결된다. 옷 구석구석에 세심한 노력과 많은 땀을 흘려야 하는 아주 정직한 비즈니스였다. 아무리 곰곰이 따져봐도 결코 아메리칸드림이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사이 남편은 빨리하라고 독촉을 했다. 세세하게 주머니 속까지 먼지 하나 없이 털어내라고 하더니 느리다고 보채는 것이다.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었고, 반나절도 되지 않아 온몸이 쑤셔왔다. 남편은 필자가 오기 전부터 단단히 당부를 했었다. 미국은 노동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며 몇 번을 확인해왔고, 필자는 알았다고 했지만 아무 개념이 없이 가족과 함께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태어나 생전 처음으로 피땀 흘리는 노동의 현실은 만만치가 않았다.
어느 날, 대형 보일러가 터졌다. 세탁소 모든 작업이 중단되었고 남편은 이리저리 뛰더니 거금을 들여 메카닉(기계 고치는 사람)을 불렀다. 그는 이민생활 30년 동안 아직도 떠돌이 생활로 미국 전 지역을 다닌다며, 필자 부부가 세탁소 하는 것을 엄청 부러워했다. 그는 필자에게 행복한 줄 알라며 충고도 했다. 자기는 방방곡곡 힘들게 일해도 수입은 겨우 먹고 살 지경이라며 푸념을 해댔다.
삶의 질을 찾아온 곳, 좀 더 나은 삶을 위해 왔지만 결코 남들이 말하는 아메리칸드림은 실감 나지 않았다. 육체적 노동이 피부로 익숙해지기까지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필자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고 어지럽게 하는 것은 정신적 안정감의 결함이었다. 갑자기 바뀐 환경 속에서는 저녁이면 초주검 되어 쓰러지고, 다음날 아침이면 또 일어나야만 낯선 곳에서는 살아갈 수가 있었다.
먼저 온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처음 와서 1년은 지옥 생활이고 2년쯤 되면 숨을 쉴 수가 있고 3년쯤 돼야 조금씩 미국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했다. 적어도 5년은 지나야 적응이 되면서 한국 생각이 덜 난다고 위로를 했다. 이민 생활에도 공식이 있었던 것이다. 그때까지 자신과 싸워가며 견딘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결국 며칠을 쓰러져 약에 의존했다. 병원은 한국보다 10배는 비싸서 갈 수도 없었다. 급기야 우울증까지 겹쳐오며 정신이상 증세까지 보이기 시작했다.
필자는 어스름밤이 찾아오면 아파트 앞에 쪼그리고 앉아 한국을 향해 울고 있었다. 남들이 말하는 소위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것은 엄청난 과정을 겪어내야만 이룰 수가 있었다. 세탁소를 갖게 된 행복은 꿈을 향한 시작에 불과할 뿐이었다. 필자는 하루하루 녹초가 되어 병자가 되고 있었고, 아메리칸드림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피나는 노력을 그 필수조건으로 요하고 있었다.
그가 사라졌다. 어느 날 갑자기 감쪽같이 자취를 감추었다고 난리가 났다. 사람들은 만나서 비상 대책을 세우자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12명의 피해자가 모여서 그를 감옥에 넣어야 한다며 흥분된 마음을 들썩거렸다. 사람들은 가장 친한 친구였던 필자에게 총대를 메고 앞장을 서라고 난리 법석을 떨었다. 어쩔 수 없어 사인은 했지만 도망치듯 그 자리를 몰래 빠져나오고 말았다.
사회에서 만나게 된 그 친구는 피부 관리실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재미로 한 번씩 만나서 밥이나 먹자고 시작한 모임이었다. 6명으로 시작한 모임이었는데 늘 주변에 아는 사람이 많았던 그녀의 사람들 하나둘 인원이 늘어났다. 작은 모임이 즐거움을 더해가더니 간이 커지기를 시작했다. 급기야 돈놀이가 시작되었고 금액도 시간이 갈수록 불어만 갔다. 3년 동안 그런대로 재미가 붙으며 차곡차곡 목돈도 만들어 갔다. 세월만큼이나 부풀어진 마음도 액수를 더해갔다. 필자도 3000 만 원짜리를 두 몫이나 갖게 되며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언제나 다정다감하며 마음이 따뜻한 친구였다. 필자에게는 유독하게 사랑을 베풀어 주며 가정사를 비롯하여 마음속까지도 의논하는 절친이었다. 그녀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들끓었고 그녀는 어디서나 베풀기를 서슴지 않았다. 성실하며 열심히 살았던 그녀가 도대체 돈맛을 알았던 것이지, 어느 날부터인가 욕심으로 가득 차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것이다. 이 사람 저 사람 소개도 해주면서 특별히, 필자의 생일날이면 새끼손가락에 예쁜 반지도 끼워주면서 우정을 다짐하기도 했다. 그녀는 언제나 사랑스러움과 애교가 흠뻑 넘쳤다.
사람들은 그가 최고라며 언제나 엄지손가락을 보이더니 이제는 교묘한 악녀가 따로 없다며 마냥 헐뜯어 내리기를 서슴지 않았다. 무조건 소송을 해야 하고 실컷 혼을 내 주어야 한다기에 마음이 아파졌다. 피해자인 필자도 어이가 없었고 눈앞이 캄캄했으나 무슨 방법이 없었다. 언제나 바쁘게 일을 하는 친구였기에 필자가 먼저 하루 전날에 꼬박꼬박 갖다 바쳤다. 그리고 필자가 타는 달 바로 전달에 일이 터진 것이다. 한몫도 받지 못했으니 거의 반 이상이 약 4000만 원 정도가 날아간 것이었다. 어찌 막막하지 않았을까. 하늘이 무너져 내리고 땅이 꺼지는 줄만 알았다.
한 일원이었던 또 다른 친구 남편에게서 만나자는 전화가 왔다. 어쩐 일인가 싶어 서둘러 나가보니 더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그 친구는 젊은 나이에 당뇨병을 앓고 있었는데 이 일로 쓰러져 결국 다리를 절단했다고 청천 벽력같은 소식을 토해냈다. 그 친구는 네 몫이나 들었었다며 친구 남편의 눈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무어라 위로의 할 말이 없었고 그 친구는 그 이후로는 영영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만나 주지조차 않았고, 자신의 비참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얼마 후 잘 아는 선배가 연락을 해와 병원으로 달려갔다. 선배의 막내딸이 중환자실에 있다고 했다. 이제 겨우 19살에 백혈병이 걸려 골수이식을 해야만 한다고 필자를 끌어안고 목놓아 울어댔다.
몰아닥친 비운에 슬픔들이 필자를 감당치 못하도록 흔들어댔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운전을 하며 눈물 범벅이 되어 이리저리 드라이브로 마음을 달랬다. 차라리 모든 것 내려놓을 테니 아이들이라도 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그 날아간 큰돈들을 하늘에 묻어 두기로 하면서 마음을 잡아갔다.
가라앉은 마음과 무거운 발걸음으로 다시 선배 병문안을 찾아갔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온갖 고통스러운 모습의 사람들을 보면서 욕심의 마음은 하늘과 땅을 넘나들었다. 그 어떤 아픔이 죽음을 기다리는 초라하고 서글픈 사람보다 더 아프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로부터 1년쯤 되었을까? 불쑥 사라졌던 절친의 목소리가 전화 속에 있었다. 필자는 어디냐고 물었고 그 친구는 만나자며 주소를 가르쳐주었다. 단숨에 달려가 자초지종을 물었다. 8개월을 감옥에서 있다가 왔다며 발가락엔 온통 동상이 들어 단단하고 빨개져 있었다. 어느 찜질 방 피부관리실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죽을죄를 졌다며 평생을 두고 갚겠다며 용서를 빌어왔다. 무어라 할 말이 없었고 그저 세상에 나오자마자 연락을 해 준 것만도, 살아있는 것만도 감사할 뿐이었다. 어찌나 대접을 잘해주는지 몸 둘 바를 몰랐다. 그 후로 3개월, 그는 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어찌어찌 알고 찾아오는 사람들 등쌀에 견딜 수가 없어 도망을 쳤다고 주인이 말했다. 돈을 벌어야 갚을 수가 있건만 사람들은 그녀를 그대로, 돈을 벌도록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 그 후로는 그 친구를 만나지 못한 채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5년쯤 지나 한국으로 잠깐 왔을 때, 한 지인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그녀가 필자를 몹시 만나고 싶어 한다며 연락처를 주었다. 어찌나 반가운지 그날로 만났다. 그녀는 필자를 와락 끌어안으며 그리움을 쏟아부었고, 필자가 좋아하는 일식 집으로 데려가 주며 2차로 노래방까지 그리고 그녀의 집으로까지 하룻밤 동침을 하자고 했다.
68평의 넓고 화려한 그녀의 빌라에 깜짝 놀라 집안을 한 바퀴를 돌았다. 그녀는 아파트 분양사무실에서 일을 했고 그 집은 모델 홈이었던 것을 분양받은 것이라고 했다. 어딘가 믿음이 가지는 않았지만 대단한 수완 꾼임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온밤을 세워가며 지나간 아픔의 기억들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한밤중에 필자가 좋아하는 얼큰한 북엇국도 기막히게 끓여주었다. 그때 그 친구가 만들어준 사랑의 맛은 잊을 수가 없다. 필자는 아침 일찍 그녀의 집을 나오며 집안 한 바퀴를 더 돌았으나 돈 얘기는 차마 꺼내지도 못 했다. 그녀가 필자의 등 뒤로 하얀 봉투 하나를 건네주었다.
여비로 보태라며 작지만 마음이라며 가방에 넣어주었다. 어찌나 떨리고 궁금한지 차마 열어 볼 수가 없었다. 그대로 하얀 봉투 안에 비밀은 비행기 안에서도 심지어 수개월 동안 지속되었다. 이미 날아갔다고, 어차피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하늘에 남겨 놓은 것이었기에 기대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예전 그대로 소중한 우정, 친구를 생각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싶어서 그 후로도 오랫동안 책 갈피 속에 덮어두었다. 다시 소식이 끊어졌지만 그저 잘 살라는 마음만을 전하고 싶다.
책 한 권을 펼쳤다. 미국에서 이민 생활할 때 선물받은 책이었다. '이제야 나는 삶을 얘기할 수 있겠네'라는 제목으로 한 젊은이가 중병이 들어 죽음을 맞이하며 담담하게 써 내려간 내용이었다. 그는 지나온 날에 신명 나게 살아왔지만 병들어 지치고 나약해진 현실의 영혼 앞에 지나온 삶과 남은 삶의 회한, 인생에 대한 후회와 간절함 들을 하나님 앞에 의지하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주변에서 갑자기 처해진 절박한 삶 앞에서, 더구나 힘겨운 이민생활 속에서는 하나님과 교회를 접해야만 함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다. 때로는 정서적 마음의 의지와 외로운 타지 생활의 위안으로 유일한 수단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필자의 가족 또한 미국 이민생활 동안 본의 아니게 신앙생활을 시작해야만 했다. 낯선 이민 초기, 교회에서 베풀어 주는 사랑의 대가만큼이나 무조건 열심히 봉사 생활도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도 늘 이방인에 머물고, 아무 느낌이 없는 나그네, 그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지 못하며 왔다 갔다만 하는 평신도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안타깝게도 그 반복들은 오히려 신앙생활에 대한 신뢰와 믿음을 더욱 멀어지게 하는 것이었다.
가끔은 삶의 무게에 짓눌린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안간힘 쓰면서 신앙에 라도 의지하기를 원해보지만 그 기대감은 번번이 무너지고 마는 것이었다. 어렵게 시작한 교회가 안정될라치면 잡음이 생기기 시작하고 머리수가 많아지면 이권다툼이 생겨나고, 목사님들은 신도들을 편가르고 신도들은 목사님을 심판대에 올려 마구 난도질을 해대고 전쟁터가 돼버린 교회는 결국 불씨의 잿더미가 되어 초라한 폐허가 되어 남은 자들만이 그 자리를 맴돌고 있었다.
어찌 모든 세상사가 아니, 한 지붕 교회 아래 제각각 목소리 높은 신도들이 서로의 입에만 맞을 수가 있을까. 한때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도 요란한 잡음으로 세월을 가르는데, 하물며 미국까지 건너온 개성 강한 사람들이 온몸으로 하나가 될 수가 있겠냐 마는 필자 같은 초보 신도의 눈에는 가히 아름답지 않은 믿는 사람들 삶의 이면이었다.
서로 맞추면서 인내하는 것. 인내하면서 배워가는 것. 인생을 말씀으로 하나하나 깨달아 가는 것. 이러한 것들은 일반 대중들보다는 적어도 신앙인이라는 믿는 사람들에게는 참된 신앙의 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신앙에 대한 근본 목적이 흔들리는 오늘날은 인간의 유독한 심리가 포화상태를 넘어 그 정체성을 잃은 지 오래인 듯한 느낌이 들어 안타깝고 슬픈 생각이 든다.
필자도 때때로 남들처럼 신앙의 길에 깊이 빠져들지 못하고, 인간의 모순들만 눈에 보이는 자신이 힘들고 고독함에 방황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차라리 평범하게 느낌 없는 소속감으로 구속력 없는 초심자가 때론 자유롭고 평화롭기도 했다. 왜냐하면 교회는 수없이 많았고 맘만 먹으면 그때마다 또 옮기면 그만이니까 말이다.
인간은 왜 하나님 앞에서도 아니, 위대한 신의 존재 앞에서도 그 끊임없는 욕심의 달성을 위해서는 한없이 싸워대야만 하는지, 고개 숙여 매달린 예수님이 가슴 아프고 처절하게만 다가온다. 또 교회를 옮겨야 하는, 떠나야 하는 현실 속 평신도의 마음은 마냥 가난하기만 헸다.
살면서 언제나 우리에겐 각자 주어진 삶의 이야기, 그리고 그 종착점은 순서 없이 당장 내일로 다가올 수도 있다. 정이 흘러 넘쳐 우리 교회라는 소유의 아집보다는 차라리 가끔씩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며 정리하고 또 예측할 수 없는 내일을 맞이하며 숙연하게 그리고 엄숙하게 저마다의 삶을 대처하는 자세도 필요할 것만 같다.
어느 날 갑자기 준비 없이 맞이한 죽음이라는 단어 앞에서만 뒤늦게 삶을 애절하게 갈구하고 삶의 절실함을 온몸으로 얘기하기보다는 미리미리 쌓아가며 준비하는 마음이, 즉 신앙의 자세가 오히려 믿지 않는 초심자에게는 삶의 표본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지금까지 신명 나게 쫒아 가며 애써서 잡아온 욕심의 삶들이 결국은 별 볼 일없는 명예나 이권이었음을 냉철한 이성으로 반성하며 두 손 모아 기도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 같다.
숭고한 하나님 앞에 차라리 남은 삶에 미련보다는 지나온 삶에 부끄러움을 무릎 꿇고 통성하며, 진심으로 눈물 흘려 참회하는 소망이 담긴 진솔한 아픔의 삶이 더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사람이 한 평생 살아가는 동안 늘 그런 마음으로 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당면한 죽음 앞에서 숙연한, 늘 그 마음으로 고개 숙여 하나님 곁에서 침묵하며 평화로울 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 할까.
덜덜거리는 중고차를 끌고 남편을 마중 나갔다. 미리 나와 기다리던 남편은 반갑게 가족을 향해 달려왔다. 남편은 그날 저녁을 쏘겠다며 ‘엘폴로코’라는 멕시칸 음식점으로 안내를 했다. 온갖 인종 사람들이 주문을 하기 위해 길게 늘어서 있었고, 처음으로 먹어보는 훈제 치킨요리는 소오스가 약간은 이상했지만 그런대로 동양인 입에는 맞는 것 같았다. 그날 이후로 필자는 일 주일에 한번씩은 멕시칸 음식을 즐겨먹었고, 다이어트 식으로도 아주 좋았다. 온 가족이 기분 좋게 저녁식사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편이 일하는 세탁소는 다우젼옥스라는 동네에 있었고 필자의 집은 시미벨리라는 곳에 있었다. 23번 후리웨이를 타다가 다시 101번 후리웨이를 타고 또다시 118번 후리웨이를 타야만 비로소 씨미벨리라는 시골 동네로 들어 설수가 있다. 말이 시골동네이지 숲이 우거지고 나무들이 무성한 완전한 전원도시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는 미국 레이건 대통령 라이브러리(기념 도서관)가 있는 곳으로 유명한 동네이기도 하다. 집들은 거의 궁전처럼 커다랗고 전형적인 서부 미국의 베드타운 도시였다.
동네 뒤편으로는 뺑뺑 돌아 겹겹이 울창한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져 있고 그 아래 골짜기에 아늑하게 집들이 분포되어있는 분지 형 도시였다. 백인들은 주로 은퇴를 하고 조용히 노후를 보내는 사람들이 많아 도시는 한적했다. 한인들도 약 300명 가량 살고 있어 너나 할 것 없이 가족 같은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그러나 특히 여름이면 뜨겁고 건조해서 더운 동네로 이름나 있는 곳이기도 했다. 한낮에는 그 열기로 집밖에서는 숨을 쉴 수가 없어 나가 돌아 다닐 수가 없었고, 밤에는 너무 건조한 탓에 코가 헐기도 했다. 모든 실내에서는 가습기와 에어컨이 왕왕 돌고 있었다.
퇴근길에 이런 저런 이야기로 남편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앞으로 멀리 보이는 산등성이에는 석양의 노을이 길고 멋지게 깔려 있었다. 너무나 또렷하고 아름다운 붉은 빛으로 필자는 눈을 뗄 수가 없어 가족들에게 손짓을 하며 가리켰다. 남편과 두 딸도 두리 번 거리며 멋진 노을장면을 눈에 담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아무리 쳐다봐도 무어라 표현 할 수 없는 묘한 광경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 멋진 사진 같은 장면은 무언가 지나침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필자의 집 쪽으로 다가 갈수록 매쾌한 냄새가 풍겨오며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열심히 앞을 주시하며 산등성이 고개 길을 돌아 씨미벨리 초입으로 들어서자마자 남편은 소리를 질렀다.
“산불이다. 산불! 저거 불 난 거야!” 자세히 보니 정말 뺑뺑 둘러진 산등성이를 따라 불꽃이 길다랗게 잔잔한 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필자가 본 것은 석양이 아니라 산불이 나면서 시작된 불꽃의 여명이었다. 태어나 처음으로 바라보는 잊지 못할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가족들은 당황과 흥분이 시작되었고, 필자가 사는 동네 쪽이라 우선 빨리 집으로 가는 것이 급선무였다. 동네 입구로 들어서자 회오리 바람이 탄내를 몰고 다니기 시작했다. 차 창문을 꼭 닫고 집 근처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도 아파트 주변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필자가족은 궁금해서 그냥 집에 머물 수가 없었다. 불구경 이나 싸움구경은 누구도 못 말린다고 다같이 구경을 나가기로 합의 끝에 온 가족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집에서 조금 멀리 산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미 동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나와서 이리저리 더 잘 보이는 장소를 찾고 있었다. 맥없이 돌아다니는 차들이 어찌나 많은지 혼란스러웠으나 모두들 긴장한 두 눈은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북쪽 산등성이로 갔을 때는 이미 도착한 차들이 빈틈없이 들어 차있어서 차를 세울 공간이 없었다.
동네 사람들, 백인 흑인 멕시칸들은 각양각색의 카메라를 손에 들고, 그 신비로운 자연의 놀라운 한 장면을 담아두기 위해 하나같이 애를 쓰고 있었다. 자연이 만들어내는 화려한 불꽃들을 찍어대느라 산등성이에 서있는 사람들은 또 하나의 작품이었다. 필자가족도 얼떨결에 빈손으로 나온 것을 후회 했지만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눈으로 구경하기도 바쁜데 그것들을 촬영까지 한다는 여유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불은 조용히 점점 더 길게 뻗쳐 나갔고 그 불 줄기는 굽이굽이 산등성이를 타고 밤하늘에 꽃처럼 피어올라 석양의 노을처럼 환하게 비추어나갔다. 목이 칼칼하게 매연으로 가득한 공기였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한인주민들은 들뜬 마음으로 이 집 저 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멀쩡한 평일 저녁에 한자리에 모여 티타임을 갖게 되었다. 터주대감인 집주인 집사님도 조금은 당황한 듯 흥분된 목소리로 그 동네 역사를 설명해 주었다.
캘리포니아 전 지역은 해마다 여름이면 산불이 연중행사가 되었고, 다만 그때마다 어느 곳에서 일어날지는 모른다고 했다. 씨미벨리에도 10여 년 만에 찾아온 큰불이라고 했다. 캘리포니아는 사막지대로 무척 고온 건조했다. 특히 여름에는 비가 거의 내리지 않아 풀이나 나무들이 바싹 말라 바람만 심하게 스쳐도 그 부딪힘으로 불이 날수도 있다고 했다.
간혹 누군가 담뱃불을 아무 곳에나 버려서 그 불씨들이 끝내는 몇 날 몇 일, 심지어는 몇 달 동안 불꽃의 행진이 이어지기도 한다고 했다. 신기하게도 방화범은 언젠가는 꼭 잡혀왔고, 하늘에 뜬 헬기와 함께 소방관들은 맞불작전으로 뜨거운 열기를 진압해 나갔다. 미국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소방관이 가장 선호하는 직업 중에 하나라고도 했다.
한 달 내내 타오른 거대한 산불이 초보 이민가족에게는 경이롭고 대단한 경험이었다. 어쩌면 천사의 도시라는 대자연의 축복아래로 인간이 겪어야 할 한편의 재앙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늘아래 축복과 재앙의 아이러니, 지구의 균형된 일면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도 캘리포니아는 전 세계 최고의 기후를 자랑하지만 매년 여름이면 산불이라는 골치 아픈 연중행사가 자리매김을 한다. 천사의 도시 산등성이에는 올 여름에도 타오르는 불꽃들이 수를 놓으며 이글거리는 붉은 빛으로 하늘을 향해 치닫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마지막 이민 가방을 챙겼다. 큰딸이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필자를 설득하기 위한 수단이었나 보다. 아이는 엄마가 하루라도 빨리 동생과 아빠 곁인 미국으로 가기를 원했고, 카이스트가 어떻게 들어간 학교인데 필자의 허락도 없이 일을 저질렀다. 드디어 왔다 갔다 이산가족 생활 3년 만에 한국의 모든 생활들을 말끔히 정리했다. 물론 큰딸은 여전히 한국에 돌아와 남은 학기를 마쳐야 했지만 이제는 어엿한 숙녀가 되어 큰 걱정을 할 필요는 없었다.
13시간의 지루한 비행시간이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방학이 끝나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부담이 없어 오히려 마음은 편안했다. 비행기 조그만 창문 아래로 두둥실 떠 있는 구름들이 어디론가 희망의 솜사탕 날개를 펴고 있는 것 같았다. 필자의 부푼 마음도 그 구름을 타고 조금씩 설레 이기 시작했다. 이제 또 새롭게 뿌리를 내리기 위해 내딛는 발걸음은 기대 반 두려움 반으로 막연한 환상이었다. 나름대로 각오는 했지만 그저 무덤덤하게 몸에 와 닿지는 않았다. 작은 아이와 남편은 미리 나와서 흥분된 모습으로 진한 포옹을 해주었다. 불과 6개월 만의 만남이었지만 작은 아이의 얼굴에는 엄마와 다시는 떨어지지 않아도 된다는 환희의 미소가 안정감을 말해주고 있었다.
제일 먼저 식구가 늘었으니 살 집부터 구했다. 같은 동네 씨미벨리에 거금 1250달러 월세인 투 베드 룸을 얻었다. 한국과는 전혀 다른 풍의 카펫이 깔린 아담한 아파트에 미국적 정서가 배어있는 화이어 플레이스(벽난로)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꾸미기를 좋아하는 필자는 시차 적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기저기 분위기 넘치고 아늑한 집으로 꾸며나갔다. 베란다 밖으로는 평화롭고 예쁜 동네가 나무도 제법 울창하게 우거져 있어 마치 영화 속의 전원도시 같았다.
새 식구가 된 큰딸과 필자는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손을 잡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았다. 흥분과 함께 시차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동네 여기저기에서 자동으로 돌아가는 스프링클러가 신선한 삶의 충격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때에 맞춰 조용히 잔디밭 위로 자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물먹은 파란 잔디가 고개를 살포시 들어 생동하는 생명의 꽃향기로 필자를 환영해 주는듯했다.
오후쯤 되어 큰딸과 함께 남편이 있는 곳으로 마중을 나가기로 했다. 언제나 남편은 아이보다 먼저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와 작은 아이를 기다렸었다. 그 이유는 빈집에 아이 혼자 들어오는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필자는 우선 챙겨온 국제 운전면허증으로 제법 용감하게 남편을 픽업하기 위해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활짝 열린 창문으로 캘리포니아의 파란 하늘과 싱그러운 바람이 행복을 마구 실어다 주는 듯했다. 그때는 방문객도 임시 운전면허증으로 운전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때, 기쁜 감동도 지나치면 탈이라고 이게 웬일인가 일이 터졌다. 갑자기 머리 뒤로 삐웅삐웅 대며 뱅글뱅글 돌아가는 경찰차 한 대가 사이렌을 울리며 뒤쫓아 오고 있었다.
아뿔싸! 정신이 몽롱해지고 앞이 캄캄해졌다. 큰일 났구나라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스쳐가며 하얗게 몸이 오그라졌다. 미국은 한번 걸렸다 하면 몇 백 달러는 기본이라고 들은 기억이 있기에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일단은 길가로 차를 정지 시켰다. 키가 커다랗고 번쩍번쩍 장식을 단 우람하고 건장한 백인 경찰 한 명이 옆으로 다가왔다. 당황한 필자가 차에서 내리려고 하는 순간 큰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있으라고 했다. 겁에 질려 꼼짝없이 운전석 차 문을 닫고 그 자리에 앉아 두들기는 유리 창문을 밑으로 내렸다.
경관은 운전면허증을 요구했다. 처음 당하는 일이라 손이 어찌나 벌벌 떨리는지 큰딸이 옆에서 도와주었다. 다음으로 보험증을 보여 달라고 했다. 꼼짝 말라는 것 외에는 한국과 똑같았다. 경관은 어디를 가는 중이냐고 했고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고 물었다. 그리고는 필자가 스톱 사인에 무조건 정차하지 않아 위법을 했다는 것이다. 미국은 특히 동네 길가뿐만 아니라 길바닥에 스톱 사인이 군데군데 있어서 속도를 높이 낼 수 없도록 되어있었다. 긴장한 탓인지 영어가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무어라 답변을 해야했기에.더듬거리는 영어로 답하기 시작했다. 경찰은 “WHAT? WHAT?”하더니 무슨 말인지 영 알아듣지를 못하고 티켓을 끊어야만 한다고 했다.
그때, 갑자기 딸아이가 울기를 시작했다. 갑자기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고는 더 큰소리로 엉엉 울어대는 것이었다. 필자도 깜짝 놀랐다. 아이는 지금 배가 몹시 아프다고 배를 움켜잡았고, 미국에 처음 와서 지리도 잘 모르고 빨리 병원에 가야 한다며 눈물을 펑펑 흘렸다. 경관이 이리저리 머리를 돌려가며 특유의 제스처를 쓰면서 당황하는 눈빛이었다. 그때다 싶어 필자도 합세를 해서 도와 달라고 온몸으로 사정을 했다. 여행객이라 돈도 없다며 불쌍한 척 애원을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경관은 여전히 갸우뚱거리더니 갑자기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아주 부드럽게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오히려 왜 그러느냐면서 그만 진정하라고 다독거렸다. 경관은 단순히 필자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며 애써서 친절을 베풀어 이것저것 설명과 함께 조심할 것을 당부했다. 그리고는 유유히 사라져갔다. 가난한 첫 이민 살림에 몇 백 달러가 순간에 눈앞에서 날아갈 뻔했다.
그뿐이랴 보험료 할증과 더불어 교통위반 교육까지 미국은 장난이 아니었다. 필자와 큰딸은 잠시 큰 숨을 고른 후에 박장 대소를 하며 손뼉을 쳐댔다. 어찌나 큰딸이 연기를 잘했던지 무어라 표현할 길이 없었지만 일단은 대단한 첫 번째 사건이었다. 시동을 걸고 두리번 거려 스톱 사인을 주시하면서 조심조심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열려 있는 차창 문을 타고 맑고 깨끗한 5월의 타국 땅 바람이 머리를 신나게 날려주었다. 무시무시한 미국 경찰관과 대면한 한판 승부였고, 어쩌면 비겁한 수단이었지만 무섭고 떨려왔던 한 건을 요행하게도 잘 해결했다. 그것은 남의 나라, 낯 선 땅에서 처음으로 맞이한 세찬 소나기였다. 기다리고 있는 남편을 만나기 위해 달려가는 10번 프리웨이(고속도로)에는 'LA의 파란 하늘'이 새롭게 시작하는 삶위로 푸른 희망을 쏟아붓고 있었다.
필자의 이민 시기는 1980년대 초반. 이민 가기 전에 이민1세가 살아야 할 삶의 행로가 불보 듯했다. 이미 필자보다 먼저 이민한 언니로부터 기능도 익혀오지 말고 노동력이나 강화하여 오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래서 필자가 한 이민 준비는 연고도 없는 시골에서 밭매기 봉사 두어 달 한 것이었다. 흙과 함께 잔뼈가 굵은 농군의 아내와 함께 이른 아침부터 땅거미 뉘엿뉘엿 긴 그림자 드리우는 저녁까지 보수도 없이 긴 하루를 농사일 했다 보수로 받은 신선한 야채는 친구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런 알짜의 이민정보와 마음의 준비로 미국 땅을 밟았건만 여전히 복병은 있었다.
취미로도 하지 않았던 바느질을 해야 하는 세탁소를 인수했다. 드랍 오프(drop off)다. 세탁은 자체 처리하지 않고 옷수선만 하는 가게인데 주수입원이 옷수선이다. 재봉틀에 실 꿰는 법도 모르는 필자를 전 주인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면서 준 아이디어는 “ 처음에는 쉬운 것만 소화하고 어려운 것은 반반 나누는 외부로 보내세요”다
필자도 걱정하였고 주위의 사람들도 걱정하였던 그 어려운 일이 들어왔다. 한 눈으로 봐도 고급여성 수트인데 소매의 끝을 완전히 디자인 바꾸는 일이다. 주문받는 순간부터 가슴이 벌렁거려 그 일을 밀어내고 싶었다. 가격 높게 불러 손님 쫓아내리라 생각하고 높은 가격을 불렀건만 손님이 쾌히 받아들인다. “고급이고 내가 무척 좋아하는 수트이니까 일이나 잘해줘. 왕창 세일해서 400달러야” 한다. 할 수 없이 납품일을 최대한 멀찌감치 잡았다. 혹 손님이 그 시간 기다리지 못하겠다고 필자에게 맡기지 않을 수도 있다는 계산이었다. 여전히 좋단다.
두 주 약속의 시간동안 필자는 늘 수트만 생각하였다. '할까, 말까, 외부로 보낼까'를 왔다 갔다 했다. 400달러 공탁 걸고 그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실수하면 변상하겠다. 인명이 왔다갔다하는 일도 아닌데 위험부담 줄이려는 소극적인 자세로 살 수는 없다는 생각에서다.
다른 일 다 마쳐놓고 하루를 잡았다. 기도하는 자세로 옷을 손에 잡았다. 떨리는 손을 간신히 진정시키면서 일하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온 몸과 마음을 다한 정성이지만 역시 기술적인 작업이라 메뚜기 뛰어봤자의 결과다.
약속한 날 손님이 왔고 필자는 감히 손님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했다. 보지 않아도 손님의 실망한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할 게 뻔했다. 형량의 선고를 기다리는 죄수처럼 그 짧은 시간은 길고도 길었다. 한참 만에 손님은 “탱큐”라는 마지못해 하는 신음소리를 내더니 5달러의 팁을 놓고 옷을 낚아채 듯 내 가게를 떠났다. 그 손님의 얼굴을 다시 보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상과는 달리 한 달 후에 그 손님은 필자를 찾았고 단골이 되었다
6개월 후 어느 날. “숙, 너 내 옷 망친 거 아니? 그날 나는 너를 쥐어박고 싶었다. 그날 네가 이민 초년생이란 걸 알 수 있었기에……. 내 부모가 처음 이태리에서 미국 왔을 때의 어려움이 생각나 너에게 불평을 할 수가 없었지. 잘 버티라고 힘주려고 팁을 놓고 갔다. 하지만 너 아주 스마트하다. 겨우 여섯 달 짧은 기간에 좋은 심스트레스(seam stress)가 되었네! 이제부터는 내 친구들 데리고 올게.” 이 일방적인 약속은 철저히 지켜졌다. 캐더린이 데리고 온 가족과 친구들은 오랜 동안 단골손님이었다. 작은 몸집의 줄담배인 캐더린은 필자 가슴에 온정이라는 작은 불을 켜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