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품과 함께 빙글빙글 돌아가는 둥근 통 안의 옷들을 보면서 어쩌다 한 번쯤은 해봤을 생각을 잘 표현한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다. 바로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이다.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연말 대학로(알과핵 소극장/극단 모시는 사람들)에서 제목부터 심상찮은 이 연극을 봤다. 30년 넘게 대를 이어 세탁소를 운영하는 강태국 씨의 세탁소에서 벌어지는 일을 소재로 다뤘다.
‘오아시스 세탁소 습격사건’은 중견 극작가 김정숙 씨가 쓴 희곡으로 2003년 예술의전당에서의 초연을 시작으로 2005년 대학로 공연까지 33만 관객을 동원했다. 동아연극상, 희곡상도 수상했다. 극작가 김정숙 씨는 현재 극단 모시는 사람들의 대표이기도 하다.
연극은 시간이 되어도 불이 켜지지 않는 암전 상황에서 야릇한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잠시 후 불이 켜져서 보니 사람들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그 후 다시보기로 난장판이 된 상황을 되짚어온다.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오아시스 세탁소를 아내와 함께 운영하는 강태국 씨는 세탁소에 남다른 애정이 있다. 단지 옷을 세탁하고 다림질하는 게 아니라 사람의 정이 오가도록 자신이 가교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수십 년 전 맡긴 어머니의 옷이 생각나서 찾아온 초라한 행색의 남자에게 옷을 찾아 그냥 내어주고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가 하면 무명 연기자가 오디션을 볼 때마다 손님이 맡기고 오래 안 찾아가는 옷을 빌려주기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치매로 오늘내일하는 할머니가 임종을 앞두고 ‘세탁’이라는 말을 남기자 세탁소를 습격한 자녀들은 세탁소에 걸린 옷들을 뒤지며 할머니의 유품을 찾느라 정신이 없다. 연극은 욕심을 부리고 서로 밀치던 사람들이 뱅글뱅글 돌아가는 세탁기에서 하얀 옷을 입고 나오는 것으로 끝난다.
옷걸이마다 빼곡하게 옷이 걸린 무대를 보니 한 친구가 생각난다. 초등학교 동창인 그녀는 계절별로 옷 세 벌만 남기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만날 때마다 늘 눈에 익숙한 간결한 옷차림이다. 여럿이 만난 자리에서 누군가 “세 벌은 너무 적은 거 아니야?” 하고 물었더니 “많이 갖고 있으면 나중에 여러모로 힘만 들지” 하면서 미리 정리하는 삶을 연습하고 싶다고 했다. 나를 포함한 몇이 “대단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우리는 여전히 실천을 못하고 있다.
극작가이자 극단 '모시는 사람들'의 김정숙 대표는 살면서 한 번쯤 해봤을 세탁소 혹은 세탁기에 담긴 생각을 무대에 올려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어냈다. 인간관계가 점점 야박해지고 물질만능주의로 물들어가는 현 시대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 연극이었다.
“그럴 리 없어요. 내가 왜 죽어야 하나요? 나 지금까지 착하게 살았어요. 의사가 실수했을 겁니다. 한 번 더 검사해보세요. 아니 이 병원 검사 결과 못 믿겠어요. 다른 병원 갈래요.”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죽음 앞에 가까이 가 있음을 처음 알았을 때 큰 충격을 받는다. 현실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진단 결과를 인정하며 분노 단계에 들어간다.
죽음에 대한 공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죽음 앞에 선 인간의 심리를 충격, 분노, 타협, 우울, 수용의 5단계로 설명했다. 인간은 죽음을 만나면 공통적으로 두려움을 느낀다. 임종시간이 가까이 오면 육체적 고통과 심리적 고통을 동반한다. 이 두려움은 질병으로 인한 신체적 조절 능력과 기능 상실에서 오는 고통, 살면서 해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 가족 또는 지인들과 이별해야 하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공포다.
임종 도우미 ‘호스피스’
호스피스는 이러한 환자의 심리 상태를 정확히 판단하고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임종까지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버킷리스트를 작성해 남은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도록 안내한다면 환자는 위안을 얻고 심리적 고통도 줄일 수 있다.
“정말 감사 합니다. 무의미한 고통과 불안 속에서 맞이할 죽음을 선생님 덕분에 작은 성취감 속에서 평안하게 맞이하게 됐습니다.”
“아닙니다. 의연한 자세로 임종을 맞이하는 선생님 모습이 더 훌륭합니다.”
임종을 앞둔 환자와 호스피스가 나누는 이런 대화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도전해보고 싶은 호스피스 인턴
정년퇴직을 하고 나니 그동안의 경력과 실력이 너무 아까워 프리랜서로 일했다. 무의미한 노후생활로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결심도 작용했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괜찮았지만 같은 일을 반복해서 하니 흥미가 떨어졌다. 그러다 우연히 접하게 된 호스피스 인턴 활동이 내 관심을 끌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언제 맞닥뜨릴지 모르는 죽음을 미리 준비하는 과정은 삶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해준다. 그래서 호스피스 인턴은 시니어가 꼭 해봐야 할 경험이라 생각한다.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가까이 자리한 알과 핵 소극장으로 ‘오아시스세탁소습격사건(극단 모시는 사람들)’ 공연관람을 위해 향했다. 이 작품의 작가인 김정숙 연극 연출가의 초대로 브라보마이라이프 매거진 동년 기자들과 함께 했다. 아담한 무대에는 깨끗하게 포장된 옷들이 가득 걸려 있고 무대 좌우엔 수선과 다림질을 하는 코너로 꾸며졌다. 우측에 설치된 커다랗고 낡은 옛날식 세탁기가 눈에 들어온다.
실내 전등이 꺼진 암흑의 소극장에 침묵이 잠시 흐른다. 침묵을 깨는 남녀 신음을 시작으로 무대 조명이 들어오며 ‘오아시스세탁소습격사건’의 막이 올랐다. 1, 2층 전 좌석을 메운 관람객의 숨소리가 멈춰졌다. 무대에는 여러 가지 피켓을 든 환자들의 항의와 함께 세탁소 주인 강태국(조준형 분)과 여주인 장민숙(문상희 분)의 하소연 섞인 이야기가 개그 못지않은 대사로 펼쳐진다. 극 중 내내 다양한 캐릭터를 가진 배우들의 연기가 관객을 웃음바다에 빠지게 하면서 잔잔한 감동과 현실을 풍자하는 대사로 관중을 몰입하게 했다. 세탁철학을 지닌 주인장은 무명 배우에게 옷을 무료로 빌려주는 정이 넘치는 이웃 아저씨다. 남편에게 서운함도 있으나 남편과 아들을 사랑하는 여주인 민숙, 사고뭉치 배달꾼 소팔 등 늘 세탁소는 왁자지껄하다.
30년째 대를 이어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오아시스세탁소와 주인 강태국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다. 큰 재산을 가진 이웃 안 씨 할머니가 임종에 앞서 마지막으로 남긴 ‘세탁’이란 말을 듣고서 세탁소에 맡겨진 빨래 속에 재산을 숨겨 놓았다고 믿는 안 씨네 가족이 세탁소를 찾아오며 극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안 씨 큰아들은 재산을 찾을 수 없게 되자 발견한 재산의 50%를 보상금으로 내건다. 주인장 강태국을 제외한 극 중 인물 모두는 그 재산을 찾기 위해 어느 날 야심한 밤에 동물로 둔갑하여 세탁소를 습격한다. 세탁소는 아수라장이 된다. 이를 지켜본 강 씨는 더러워진 빨래를 세탁하듯 오염된 인간의 마음을 세탁하기 위해 이들을 세탁기에 넣고 돌린다. 깨끗이 세탁된 이들은 하얀 옷을 입고 등장하고 가 씨가 빨랫줄에 널어 말리며 극은 막을 내린다. 1시간 반이 언제 지나갔는지 싶었다. 넉살 좋은 배우들의 연기에 웃다가 극 내용에 눈물을 찔끔 짜기도 했다. 가슴이 훈훈해지기도 했다. 특히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마지막 부분의 설정이 연극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세탁소에서 빨래를 세탁하듯 물질만능주의로 동물처럼 변한 인간을 커다란 세탁기에 넣고 세탁을 한 후 하얀 옷으로 갈아입힌 사람다운 인간을 빨랫줄에 널어 말리며 현대인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는 모습이 극의 대미를 장식했다.
‘오아시스세탁소습격사건’은 권호성 연출로 12월 30일까지 대학로 소극장 알과 핵에서 공연된다. 2003년에 예술의 전당에서 초연된 이래 수많은 공연이 이루어졌고 동아연극상 희곡상, 연극협회 우수연극상 등을 수상하며 대중들의 사랑을 듬뿍 받은 작품이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리기도 하였다. 일상적 삶의 현실을 바탕으로 상상의 세계를 넘나드는 구성과 풍자로써 우리에게 시종일관 웃음을 주면서 잔잔한 감동 그리고 희망의 따사한 메시지를 남긴다. 지금도 연극 무대가 선명하게 떠오른다. 또 보아도 좋은 연극으로 기억에 남았다.
하늘과 구름, 강물과 바람소리, 햇살, 새들의 합주, 강변 단애, 그리고 숲 사이 오솔길. 있을 게 다 있다. 언제나 거기에 있어온, 본래 그러한 채로 있는, 자연스러운 자연의 저 완전한 충만. 그래서 아름답고, 그렇기에 신성하고, 그럴 수밖에 없도록 진실하다. 사람 안엔 결핍된 수려한 맑음과 밝음으로, 그지없이 온전한 자연다운 푸른 아우라를 뿜으며 순수의 향연을 펼친다.
모두가 청량산의 식솔들이다. 저만치서 우뚝한 청량산의 모성을 젖줄 삼아 태어나거나 성장한 낙동강과 야산들과 나무들이 오케스트라처럼 어우러져 풍경의 절창을 빚어낸다. 청량산이라 하면 생각나지 않는가? 청량산인(淸凉山人)이란 호를 쓰며 줄곧 청량산을 사랑한 사람, 도학(道學)의 부흥을 평생사업으로 삼으며 수많은 저작을 쏟아냈던 공부벌레, 천 원짜리 지폐의 인물 도안에 불려나온 영감님. 바로 퇴계 이황(1501∼1570)이시다.
이 숲길에 ‘퇴계 오솔길’이라는 이름이 붙은 건 퇴계가 거닐었던 길이어서다. 퇴계의 시구(詩句)에서 따 지은 ‘예던길’, 혹은 ‘녀던길’이라는 이름으로도 부른다. 청량산 자락에서 모태를 박차고 나온 퇴계는 평생 청량산을 애지중지했다. 끝내는 청량산 자락에 묻혔다. 그는 소싯적부터 청량산에 들어가 공부를 했다. 기력이 쇠한 노년에도 느릿느릿 산언저리를 산책하기를 좋아했다. 그러하니 지금 내가 걸어가는 이 숲길에 퇴계의 숨결이 감돌 수밖에. 퇴계가 내딛었던 발길에 내 발자국이 포개지고 있을 테니 홍복(洪福)이다.
퇴계 오솔길은 퇴계 종택에서부터 청량산으로 이어지는 길 50여 리 구간에 걸쳐 있다. 도산면 가송리 농암종택 일대의 강변 오솔길이 단연 백미다. 농암 이현보(1467~1555)는 34세 연하의 퇴계와 격의 없는 교유를 했다지. 서로의 거처를 방문해 즉흥시를 주고받고 술잔을 주고받았다. 덧없는 세사와 뜻 깊은 자연을 교감했다. 이 연상연하 커플의 교제는 문사들답게 낭만적이었다. 실천적 도학자들답게 준절했으며, 산천 애호가들답게 관조적이었다.
숲길에 강물소리 들이친다. 맑고 세차고 기찬 물줄기와 고요하게 좌정한 나무들의 숲길이 동행을 하니 절경이다. 숲에서 강으로, 강에서 숲으로 불어제치는 바람의 거친 애무에 산천이 부르르 통째 몸을 떤다.
가을 들꽃들로 오솔길이 밝다. 핀 꽃술이 바람에 너울거리는 억새, 청초해서 애틋한 쑥부쟁이, 살랑살랑 몸 흔들어 향을 뿜는 산국(山菊). 저 멀리 도시는 소음과 매연의 저주에 붙들려 있지만 이 숲길엔 가을꽃 향 그윽하니 이방(異邦)이다. 숲길 어간의 쉴 만한 자리에 이르자 물가에 도드라진 너럭바위가 보인다. 퇴계가 그 이름을 지었다는 경암(景巖)이다. 자연을 통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궁구(窮究)를 일삼았던 퇴계는 이 바윗덩어리를 보고 버릇대로 시 한 수를 지었다. 천년을 변함없이 흐르는 물과 부평초처럼 덧없는 인간사를 빗댄 시를.
길을 돌아 나와 고산정(孤山亭)에 닿자 다시 시야에 가득 차오르는 찬연한 풍광! 가슴이 두근거린다. 강물과 단애(斷崖)와 산이 합작한 풍경의 드라마를 속수무책으로 멍하니 바라만 볼 뿐이다. 아, 이 견디기 어려운 난해한 세상 속에도 개결한 세상이 있었구나! 풍경의 매혹에 고단한 인생을, 별 볼 일 없는 삶의 남루를 돌아보게 된다.
고산정은 퇴계의 제자 금난수(1530~1604)가 세운 정자다. 퇴계는 자주 고산정을 찾아 노닐었다. 주변 일대의 가경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이 누각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시를 두레박으로 길어 올렸을 퇴계의 심취한 모습이 환(幻)처럼 정자에 아롱진다. 이곳에서 수많은 시편을 썼다 하니 말이다.
나는 퇴계를 뵌 적이 없고, 고인(古人) 역시 나를 알 바가 없다. 그러나 유려한 숲을 서성이며 종일 퇴계를 만난 것만 같다. 퇴계를 생각하면 왜 심장이 뛰나. 그는 자신의 기질이 산야(山野)와 닮았다 했다. 독일의 거장 괴테가 울고 갈 만한 학문의 숲을 쌓았다. 그러고서도 겸양으로 일관했다. ‘학문의 길은 구할수록 멀었다’고 토로하지 않았던가. 퇴계의 풍모는 임종 때 더욱 빛을 발했다. 국장(國葬), 그런 거 부질없다. 비석도 세우지 마라! 그는 그리 당부했다. 이승을 떠나는, 이토록 가뿐한 행보를 본 적이 있는가?
탐방 Tip
농암종택 주차장에 주차하고 농암종택, 경암, 학소대, 고산정을 답사한다. 평평한 강변 숲길이 걷기에 좋다. 등산으로 벽력암까지 오르면 강물 굽이치는 통쾌한 산경(山景)이 저 아래에 전개된다. 퇴계 오솔길 인근엔 도산서원, 퇴계종택, 퇴계묘소가 있다.
조혜숙(趙惠淑·65) 원장의 이력은 다소 특별하다. 전공이나 학위만 보면 남보다 더 공부에 매진한 간호사로 이해되는 정도다. 하지만 앞에 학교 이름을 붙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조 원장은 이화여자대학교 간호학과에 입학하면서 간호사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석사과정은 부산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은 고려대학교에서 졸업했다. 전문간호사 과정인 가정간호교육과정이나 상처전문관리과정은 연세대학교에서, 호스피스 전문교육과정은 가톨릭대학교에서 이수했다.
그런데 정작 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1년 남짓 대학 강사로 활동하다 전업주부가 됐다. 그렇게 15년 동안 아내로, 엄마로 지내다가 영국에서 우연히 접한 너싱홈을 보고 내 손으로 꼭 해보겠다는 각오를 한다. 결심이 서고 난 뒤에는 거침이 없었다. 박사과정을 밟은 것도 전문간호사 교육을 받은 것도 모두 아이들이 대학에 간 이후의 일이다.
“계속 노인 인구가 증가하고 있었고, 핵가족화하고 있었으니까요. 여성의 사회 진출도 눈에 띄게 증가했죠. 모든 지표들이 너싱홈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적 보호 시스템의 요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마음을 먹었습니다.”
간호사라고는 하지만 자격취득 이후 가정주부로서의 삶이 대부분이었던, 실무 경험이 전무한 상태에서 쉽게 시설을 설립하고 운영할 수는 없었다. 그 사실은 조 원장 스스로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병원에서 간호사의 경험을 쌓아야겠다 생각했다. 그때부터 가정전문간호사 교육을 받고 40세가 되어서 한림대의료원 가정간호과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화여자대학교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18년 만에 병원 문턱을 넘은 것. 그렇게 7년간의 준비를 거쳐 너싱홈그린힐을 설립했다. 당시엔 20병상의 작은 규모였다.
“처음엔 아무것도 몰랐죠. 무작정 어르신들을 최고로 모시고 싶다는 욕심만 가득했고, 비용 책정도 참고할 만한 사례가 전무했어요. 그렇게 이런저런 시행착오를 겪으며 성장한 것이 지금의 너싱홈그린힐이 됐어요.”
시설을 차려놓고 보니 홍보도 문제였다. 그때부터 큰 병원들을 다니며 간호사 모임을 유치했다. 병원이 있는 수도권에서 멀지도 않고 주변 경관도 좋아 유리했다. 자연스럽게 간호사들이 너싱홈그린힐의 운영 방식을 경험하면서 입소자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시설이 정상화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의료인을 접하는 기회가 늘면서 의사나 간호사 부모님을 모시게 되는 경우도 많아요. 초창기엔 전체 20명 어르신 중 7명이 간호사 부모님이었답니다.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은 만큼 학생들 실습도 적극적으로 유치하고 있습니다.”
조 원장이 너싱홈그린힐에서 모셨던 분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누구였을까? 바로 알츠하이머병을 앓았던 부친이다. 조 원장은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모실 수 있어서 보람이 있었다”면서 “어머니도 우리 딸이 책임져줄 거라 든든하다고 말씀하신다”고 말했다.
지금도 그녀는 매일 빠짐없이 너싱홈그린힐을 지킨다. 쉬는 날이 없다. 200명이 넘는 입소자의 임종도 거의 놓친 적이 없다. 조 원장은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해드리는 것이 내 임무”라며 “고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에서의 시작을 생각하면 임종은 그분에게 축복의 과정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모는 주는 존재, 자식은 받는 존재 김미나 동년기자
‘내 몫은 얼마나 될까’, ‘언제쯤 주실까?’
그러나 짜다는 소리 들으며 부를 축적하신 부모님께 성화를 부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투잡을 뛰고 하얀 밤 지새우며 일했지만, 누구는 연봉 3억이란 말에 손을 떨궜다. 언젠가는 주시겠지 하는 느긋한 마음도 아이들이 자라고 사교육에 등골이 휠 때마다 절심함으로 밀려왔다.
그렇게 기다림에 지쳐가던 사촌 언니의 넋두리에 드디어 종지부가 찍혔다. 부모 도움 없이 성공하는 일이 정말 힘든 세상이라며, 내 자식 뒤처질까 증여를 해주셨다는 것이다. 환한 목소리로 곧 이사를 해야 한다며 전화를 끊는 언니는, 가뿐하게 부모님이 만들어주신 꽃밭으로 들어갔다.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으로 아들 유학도 보냈다. 만만치 않은 등록금 폭탄에도 한숨이 터지지 않았다. 중년 이후에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이 노후자금 끌어다 자녀 유학비 대는 것이라지만 언니 마음은 늘 아들에게로 향했다. 남편과 부딪혀도 위로를 해주는 건 아들이고, 엄마 스테이크를 한입 크기로 잘라서 먹기 좋은 쪽에 놓아주는 사람도 아들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다 가진 아이로 키우고 싶었다. 자녀들은 나만큼 살기 어려울 것이라는 현실에 직면하니 더 안쓰러웠다. 부모 잘 만나는 것도 능력이라는 자조가 씁쓸해도, 받은 것이 있으니 주기가 한결 수월했다. 인생에서 돈이 다는 아니지만 돈만 한 것이 없고 그 맛을 봤으니 어쩌랴.
유학을 마치고 모두들 어렵다는 취업 허들도 가뿐히 넘은 아들이 여자 친구를 데려왔다. 둘이 결혼 말이 오간 모양인데 외동딸인 여자 친구 앞으로 번듯한 아파트가 있다고 했다. 게다가 그 집에서 신혼살림을 하기로 했다니 돌아서 빙그레 웃었다. 그러던 중 문제가 생겼다. 신혼살림을 하려던 그 집이 살고 있는 세입자와 이사 날짜가 맞지 않아 입주가 안 된다는 것이었다. 쌉싸래한 기분을 내색할 수도 없어 아들 가진 쪽에서 적잖은 전세금을 내줬다. 얼마 후 며느리의 임신 소식에 그간의 속상함은 어디론가 내빼고 애정이 솟았다.
연이은 한파가 휘몰아쳐 뼈마디가 시큰거리고 마음까지 곤두박질치던 어느 겨울날이었다. 짧은 추위에도 내의를 챙겨주던 아들이 전화를 했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장장한 대화 중에 엄마의 단락은 없었다. 장모님께서, 매서운 추위에 사위 감기라도 걸릴까 두툼한 패딩 사 입으라 50만 원을 보내셨다는 감동 소감만이 물결쳤다. 엄마도 거기에 공감하라는 메시지를 폭풍 전송하고 있는 남자가 아들이었다. 사돈댁 지원에 제스처를 취해야 할 것 같아 상응하는 임신 축하금을 보냈다. 아들은 오래된 집이라 아기 키우기에 춥고 불편해 이사를 해야 할 것 같다는 말을 흘렸다.
찌르르하면서 멍함이 파고들었다. 아들은 잊고 있나보다. 막대한 유학비와 조건 없는 억대의 전세자금이 흘러 들어간 벅찬 사정을. 그때 감사 표현을 지금 감동의 조각만큼이라도 했던가. 제 돈 가져가는 것처럼 당당했지. 크고 작은 결제를 할 때도 머뭇거림 없었지. 주저 없이 카드를 썼지. 손 벌려 받은 것이니 그렇게 써도 되는 돈이라 생각했겠지. 부모가 영원한 봉이냐고 말하려다 사촌 언니 스스로 말문을 닫았다. 마치 자기가 들어야 할 말처럼 뜨끔해했다. 애써 모은 내 돈 쓸 때는 가슴이 벌렁거리고, 부모님이 고생하며 번 돈 쓸 때는 아무렇지 않았다. 어느 날 뚝 떨어진 돈, 쓰는 재미가 쏠쏠했고 잘 먹고 잘 사니 어깨가 가벼웠다.
울적한 마음 달래보려 남편 앞세워 여행을 기획했다. 그런 사촌 언니에게 아들은 말했다. 3~4년 후에 아이 크면 그때 함께 가자고. “어이쿠, 이게 바로 친구들이 뜯어말렸던 ‘육아 도우미’ 패키지 여행이로구나.” 손주와 가는 여행에 따라나섰다가는, 독박 육아에 여행 경비 떠맡을 돈줄로 내몰려 여행은커녕 스트레스만 뒤집어쓰고 돌아오게 된다 하지 않았던가. 사촌 언니는 소리 소문 없이 빠르게 여행을 떠났다. 답 없는 질문을 변명으로 툭 던지면서.
애초에 부모는 주는 존재, 자식은 받는 존재로 태어난 것일까.
자연으로 돌려주고 싶은 유산 백외섭 동년기자
지난 여름휴가 때 지인으로부터 제주도 초대를 받았다. 정확히 말하면 자산관리사인 내가 이번 그의 여행에 동행해 상속재산 ‘제주 땅’을 찾고 그 활용 방안 자문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다.
휴가를 겸해서 떠난 상속재산 찾기 여행. 이른 아침 거북바위에서 바라보는 제주도의 풍광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그는 자신이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에 그 땅이 있을 것이라 했다. 모친에게 상속등기를 해놓은 땅인데, 성산일출봉에서 가깝다는 ‘제주 땅’을 아직 본 일은 없다 했다. 아직 젊은 그는 재능기부 창업상담 활동을 하면서 나와 만났고 가끔 산행을 같이하면서 교류하는 사이다.
상속은 멀리 그의 외조부로부터 시작됐다. 옛날에는 상속지분이 지금처럼 ‘남녀평등’하지 않았다. 아들과 딸, 호주상속자 차별이 심했다. 제사를 모시는 장자에게는 듬뿍 주고, 출가한 딸의 몫은 거의 없었다.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지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데도 오늘날처럼 상속분쟁으로 패가망신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외조부는 아들 하나와 딸 셋을 두었다. 집과 선산, 문전옥답은 아들 몫이 될 터였다. 외조부는 임종이 가까워지자 세 딸도 생각했다. 농토의 일부를 정리한 뒤 현금을 마련해 딸들에게도 재산을 똑같이 나눠줬다. 이는 상속과 구분하기 어려운 증여였다. 그의 어머니와 이모들은 생각지도 않은 돈을 받고 생활 여건에 따라 긴요하게 사용했다. 어렸을 때 그가 부모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였다.
큰 회사 제주지사에 근무했던 그의 부친은 장인에게서 받은 돈이므로 땅에 묻어두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인지 장래에 집 지을 생각으로 적당한 곳의 임야를 샀다. 개발전망이나 투자가치 같은 건 생각지도 못했던 옛날이야기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서울로 발령이 났고, 그 후로는 제주도에서 살지 않았다. 수십 년 동안 그의 가족은 그 땅을 보지도 않았고 아예 관심조차 없었다. 성산일출봉이 바라보이는 곳인데도 누구 하나 찾는 사람도 없었다.
이번 여행의 목적은 그 땅에 있었다. 우선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는지 분석하는 일이 중요했다. 그는 창작예술 사업가였는데, 카메라를 어깨에 메고 차를 운전하면서 콧노래를 불렀다. 뭔가 창작소재를 찾고 싶은 눈치였다.
얼마 후 내비게이션을 따라가던 그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주소대로 안내를 받은 곳은 해안의 반듯한 도로와는 전혀 다른 비포장도로였다. 한참 더 들어가서야 차가 멈췄다. 우리가 찾는 ‘임야’였다.
하지만 도로보다 조금 낮게 야트막한 늪이 펼쳐져 있었다. 물오리 몇 마리가 수영을 즐길 정도로 물이 있었다. 상당한 넓이의 임야 중 절반이 그랬다. 경사진 땅으로 가려면 늪에 배를 띄워야 할 형편이었다. 이른바 맹지였다.
“허허! 이게 뭐야?”
그의 헛웃음이 주변으로 메아리쳤다.
가까운 곳에 몇 가구가 사는 조그만 마을이 있었다. 마침 ‘토박이 부동산’ 어르신을 만났다. “옛날에는 모두 땅이었는데, 웬일인지 지반이 점점 내려앉아 물이 고였다”고 설명해줬다. 토지로 활용하려면 늪을 메워야 하는데 지반이 약한 제주에서는 장래를 기약하기 어렵다는 내용이었다.
일출봉 앞 백사장에서 우린 맥주를 들고 마주 앉았다. 낮에 봤던 물오리 몇 마리가 눈에 어른거렸다. 인공이 전혀 가미되지 않은 풍경, 물오리가 사는 늪이 좋았다. 그러니 그 ‘제주 땅’을 자연으로 돌려주자!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공평한 나눔에 대한 생각 박종섭 동년기자
공평한 나눔이란 어떤 것일까? 어느 집이든 이런 물음을 한 번쯤 해봤을 것이다. 크든 작든 돈과 연관이 되면 하나의 답을 내기가 어렵다. 그리고 상속은 한 사람이 아니라 여러 명이 걸려 있다. 핏줄을 나눈 형제도 있고 배우자도 있다. 아무리 우애가 좋은 형제라도 부모님이 물려주신 유산 때문에 사이가 벌어지기도 한다. 나는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겪지 않았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시며 6남매를 키우신 우리 부모님은 부지런히 일해 돈이 생길 때마다 근처의 땅을 사들이셨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시골에서는 논마지기깨나 있는 집안이 된 것이다. 어릴 때는 몰랐지만, 부모님이 땅을 살 때마다 명의를 자식들 앞으로 하나둘 해놓으셨다는 걸 알게 됐다. 집 앞 논은 큰아들, 고개 넘어 서 마지기는 작은아들, 그리고 주산골 밭 한 뙈기는 막내아들, 이런 식이었다. 그때는 그게 별거 아닌 것 같았고 큰 관심도 두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그 유산이 자식들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 알게 됐다. 무엇보다 자식들이 서로 마음 상하지 않고 감사해하며 부모님 제사를 지낼 수 있어 좋았다.
나는 아들에게 부모님이 물려주신 땅을 보여주며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이 땅은 팔지 않고 네게 물려줄 거다. 그러니 너도 팔지 말고 훗날 네 아들에게 물려줘라. 저 건너 밭은 네 사촌형 밭이니 사촌끼리도 잘 지내도록 하라.”
내 처가도 형제간 우애가 정말 좋다. 부모님이 아직 생존해 계셔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형제들은 시골에 자주 모여 즐겁게 지냈다. 가을이면 텃밭의 배추를 뽑아 온 가족들이 모여 김치를 담그고 맛있는 보쌈김치도 만들어 두툼한 돼지고기와 막걸리를 곁들이며 축제를 열었다. 남은 텃밭에는 형제들이 나눠 먹자고 건강에 좋다는 ‘아로니아’ 나무를 심었다. 형제들이 모여 거름 주고 김매고, 열매가 까맣게 익으면 함께 수확을 하곤 했다. 어느 가족 못지않게 형제들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작년에 장인어른이 돌아가셨다. 옛날 어른이라 그런지 덩치가 가장 큰 뒷산은 장남에게 벌써 명의이전을 해놓으셨다. 나머지 논밭 그리고 집이 있는 대지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 있다. 분배 과정에서 서운함이 있었고 결국 형제들은 옛날 같지 않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물론 법이 있기는 하지만 형제간 문제는 법적으로 처리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살아 계실 때 어느 정도 정리하시고 가셨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렇지 않은 상황이라면 ‘특별수익’을 챙긴 손윗사람이 먼저 마음을 비우고 아랫사람을 품어야 한다.
공평한 나눔이란 어떤 것일까? 내가 나눠놓고 선택 우선권은 상대에게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럴 경우 남의 떡이 커 보이는 상황은 거의 없다.
얼마 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서명했다. 이는 2018년 2월 4일부터 시행된 것으로 연명 치료에 대해 자신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사전에 의사를 밝혀 놓는 것이다. 곧바로 정부 관련 기관 시스템에 정식으로 등록되었다는 문자 통보를 받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임종 단계에서 연명 의료에 대해 본인이 선택할 수 있는 제도이다. 즉, 심폐 소생술, 혈액 투석, 항암제 투여, 인공호흡기 착용 등을 하지 않겠다는 본인 의사 결정이다. 4가지 모두 또는 4가지 중 선택해서 표시할 수도 있다.
이 제도는 잘 알려진 대로 김 할머니 사건이 시초가 되었다. 76세의 김 할머니가 폐암 발병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검사를 시행하던 중 갑작스럽게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식물인간이 된 것인데 인공호흡기 같은 생명 연장 장치에 의해 연명하였다. 가족은 회복 가능성이 없는 환자이므로 인공호흡기 제거를 요청했으나 병원 측은 이에 응하지 않아 결국 소송으로 간 것이다. 대법원은 회복 불능 사망 단계인 데다 환자가 연명 치료 중단을 추정할 수 있으므로 연명 치료를 중단할 수 있다고 판결하였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종이 한 장으로 되어 있으며 반드시 본인이 자필로 작성해야 하며 마음이 바뀌면 취소도 가능하다. 아직 모든 관련법이 정비되어야 하므로 합법화된 것은 아니지만, 연명 치료를 시행하지 않거나 중단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마련된 것으로 보면 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등록기관이 지정되어 있다. 지역 보건 의료기관 14곳, 의료기관 24곳, 비영리법인 또는 단체 10곳, 국민건강보험공단 전국 178개 지사를 담당하는 공공기관 1곳 등이다. 문제는 아직 이 제도가 잘 알려지지 않아 해당 등록기관에서도 잘 모른다는 것이다.
필자가 이 의향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살 만큼 살았다는 평소의 소신이기도 했지만, 얼마 전 백혈병 투병을 하다가 세상을 떠난 지인을 보고 서두르게 된 것이다. 이 지인은 일 년 전 발병했을 때 체중만 급격히 줄었을 뿐 일상생활하는데 거의 지장이 없었다. 병원 검사를 통해 백혈병임을 알았고 그 후 항암 처치를 받으면서 급격히 건강이 악화했다.
이 지인이 죽기 한 달 전쯤 필자가 찾아갔었다. 얼굴색으로 보아 이미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듯했다. 뭘 먹고 싶은지 사주겠다고 하자 그간 금기시했던 고기를 사달라고 했다. 소주도 마시고 싶다고 하여 사줬다. 식사 후 자리를 옮겨 인근 카페에서 커피도 마셨다. 이렇게 죽을 줄 알았더라면 먹고 싶은 것 실컷 먹고 죽음을 맞이했을 거라는 말을 했다. 항암제 투여로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결국 죽게 되어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주변에 중병으로 쓰러지는 또래의 지인들이 하나둘 생긴다. 죽음은 피할 수 없고 누구나 사전에 대비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도 그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10여 년 전, ‘한국죽음학회’를 설립하고 ‘웰다잉’과 관련해 선구자 역할을 해온 최준식(崔俊植·63) 이화여자대학교 한국학과 교수. 당시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으로’라는 슬로건을 내세웠던 그는 이제 죽음을 맞이하는 정도를 넘어 성장의 계기로 적극 활용하자고 말한다. ‘내 인생은 어떤 의미가 있었나?’, ‘나는 어떤 사람이었나?’ 등의 질문들을 평소에는 외면해도, 죽음을 목전에 둔 임종기에는 대면하게 된다. 그때야말로 비로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기에, 죽음을 ‘인생 마지막 성장의 기회’라 일컫는다.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임종학 강의’(이하 ‘임종학 강의’)가 나왔을 때 자연스럽게 떠오른 책이 있었다. 2014년 최준식 교수가 펴낸 ‘너무 늦기 전에 들어야 할 죽음학 강의’(이하 ‘죽음학 강의’)다. 그는 “두 책은 자매 도서”라며 “함께 읽었을 때 죽음에 대한 공부가 완성된다”고 설명했다.
“‘임종학 강의’는 다시 건강을 회복하기 어려운 말기 질환 상태에 들어갔을 때부터 죽음까지를 이야기합니다. ‘죽음학 강의’는 죽음 그 이후의 이야기, 그러니까 사후세계나 환생 등에 대해 다뤘지요. 일부분 겹치긴 하지만 관장하는 부분이 달라요. 특히 ‘임종학 강의’는 최근 5년 사이에 제 부모와 처의 부모까지 네 분을 모두 여의면서 현실적으로 깨닫게 된 실질적인 문제들까지 담았습니다.”
그가 부모들의 죽음을 경험하며 알게 된 이론과 실제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그는 무엇보다 한국 사회의 장례문화에 대해 아쉬운 마음을 드러냈다.
“이론으로는 대개 이상적인 방법들만 이야기하거든요. 그런데 실제 상황에 부딪히면 사실상 이론은 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해요. 경황도 없지만, 자식들 간에 의견 통합이 문제입니다. 제 경우만 해도 셋째 아들이기 때문에 아무런 관여를 안 했어요. 제가 한국죽음학회 회장이라 한들, 한국 장례절차는 장남 위주로 흘러가니 간섭하기 어렵지요. 연명치료하면 안 된다, 화장해야 한다 등의 이야기는 아무리 가족이라도 설득하기 힘듭니다.”
장례식도 결혼식처럼 직접 디자인하자
‘임종학 강의’에서 다루는 ‘임종 단계’는 대체로 환자가 말기 질환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부터 시작된다. 그러다 환자가 임종을 맞이하고 나면, 그때부터는 유족들이 할 일이 많아진다. 그렇게 장례까지 마쳐야 한 인간의 죽음과 관계된 일이 모두 마무리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소위 행하는 ‘장례식’에 대해 최 교수는 “장례식이 아니다”라고 역설한다.
“우리나라 장례는 ‘문상 절차’만 있지, 정작 ‘장례식’은 없어요. 결혼식처럼 특정한 날과 장소에서 사람들을 초대해 함께 행하는 의례가 없잖아요. 우리는 잘 인식하지 못하지만, 일본이나 미국의 장례식만 떠올려도 곧바로 알 수 있어요. 그들은 어느 한 날을 정해 사람들을 불러 함께 의례를 치르죠. 그러면서 고인을 충분히 추모하고 유족들을 위로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유족에게는 형식적으로 간단히 인사하고 문상객들끼리 잡담하다 오는 게 전부잖아요. 이런 장례 문화는 겉치레만 있을 뿐이지, 내용이 없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요.”
전통사회에서는 마을의 훈장이나 노인 등이 장례 절차를 담당하곤 했다. 그러나 현재의 모습은 어떤가? 상조회사에 의존해 그들이 하는 절차를 지켜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마지막을 이처럼 보내는 것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직접 장례를 치르는 방법에 대해 미리 고민해보길 권한다는 최 교수다.
“예비부부가 자신들의 결혼식을 디자인하듯 장례식도 당사자의 뜻에 따라 절차와 방식을 정해볼 수 있어요. 물론 상조회사의 절차를 따르고 싶다면 그렇게 해도 되죠. 그렇지 않다면 직접 장례 계획을 짜보세요. 먼저 초청할 사람들을 정해요. 이때 나중에 자식들이 초대할 수 있도록 연락처를 함께 적어야죠. 그다음에는 식순을 짜고, 각 순서를 누가 맡을지 정하거나 조가는 어떤 곡을 틀지 써놓으면 좋아요. 그 외에도 각자 원하는 것에 따라 자신의 장례식을 직접 꾸며보는 거죠.”
장례를 직접 디자인하려는 이들에게 최 교수가 제안하는 것이 있다. 바로‘마지막 인사 남기기’다. 임종을 맞이하기 전, 몸과 정신이 성성할 때 직접 마지막 인사를 녹음 또는 녹화해두는 것이다.
“자신이 한평생 어떤 마음으로 살았고, 주위로부터 어떤 은덕을 입었는지, 그동안 신세 진 분들에 대한 감사인사 등을 전하면 됩니다. 결혼식에서 신랑·신부의 영상을 보면 하객들이 주인공과의 인연을 생각하게 되고, 그러면서 축하하는 마음도 더 커지잖아요. 그런 의미로 만들어보자는 거죠. 장례식 당일에 이 마지막 인사를 들려주면 고인을 추모하는 마음도 깊어지고, 유족들도 큰 위안을 받을 수 있어요.”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말아요
죽음을 주제로 인터뷰를 하다 보니, 아무래도 ‘죽는다’는 단어가 자주 나왔다. 이에 최 교수는 ‘죽는다’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보다는 ‘몸을 벗는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 우리가 말하는 죽음은 단지 몸을 벗는 과정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나치게 ‘몸’, 즉 ‘육체’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어요. 화장을 꺼리거나 무덤 터를 살피는 것 등이 그 이유죠. 성묘 가면 무덤 앞에서 자식들이 그러잖아요. ‘아무개야, 여기 할아버지께 인사드려. 아버지 손주 아무개 왔어요.’ 도대체 거기 뭐가 있다는 거죠? 제사 지낼 때도 봐요. 죽은 사람이 어떻게 먹는다고 산 사람 음식을 차리나요. 고인의 넋을 기리려면 향을 피우거나 기도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요? 그렇게 현세 중심적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도 다른 민족보다 더 터부시하는 거예요.”
이러한 현상에 대해 그는 ‘천 개의 바람이 되어’라는 추모곡을 예로 들었다. 일본 곡을 번안해 임형주가 부른 노래인데, 원곡의 첫 소절 “내 무덤 앞에서 울지 마요”라는 가사가, 번안곡에서는 “나의 사진 앞에서 울지 마요”로 바뀌었다.
“아마 죽음, 무덤 이런 것을 기피하는 현상 때문에 가사를 그렇게 바꾼 모양인데 그러면 그 곡이 지니는 의미가 사라져요. 그 뒤에 나오는 가사를 보면 ‘나는 그곳에 없어요. 나는 천 개의 바람이 되었죠. 가을에는 곡식들을 비추는 빛이 되고, 겨울에는 반짝이는 눈이 될게요’ 이런 식이에요. 해석하면 나는 무덤에 잠들어 있지 않고, 내 영혼은 천 개의 바람이 되어 자유롭게 날고 있으니 그곳에서 슬퍼하지 말라는 겁니다. 한마디로 몸만 머물러 있는 무덤은 의미가 없다는 건데, 그게 사진으로 바뀌니 본뜻이 사라진 셈이죠.”
‘몸을 벗었다’는 그의 표현대로, 일생 수많은 고비를 지나며 고달팠던 육신을 훌훌 털고 떠날 수 있다 여기면 죽음이 꼭 괴로운 것은 아닐 터. 최 교수는 죽음을 공부하고, 성찰하며 죽음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을 지녔을 때 이승을 떠나는 순간이 두렵지 않을 것이라 조언했다.
“죽음은 지상에서의 삶을 잘 마치고 가는 것이니 일종의 인생 졸업식이지요. 그동안 살면서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여러 가지 제약으로 작용했던 육체를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이 되는 것이니, 오히려 축하할 일 아닐까요. 죽음을 ‘삶의 적’으로 두지 말고, ‘삶과 함께’하며 잘 준비해두시길 바랍니다.”
국내 의료제도에서 호스피스 분야는 완화의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말기암 등 치료가 어려운 환자를 대상으로 치료를 목적으로 하기보다 삶을 고통 없이 존엄을 지키며 마무리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인적 구성도 의료인인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가 합류해 큰 틀을 이룬다. 병원에 따라 성직자나 완화의료도우미가 함께하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현장의 의료진들은 완화의료에 있어 진짜 핵심은 자원봉사자라고 입을 모은다. 어떤 이유에서일까?
국내의 호스피스 완화의료 분야는 선진국에 비해 척박한 상황이라고 평가받아왔지만 정부의 지속적인 노력으로 개선되고 있는 상황이다. 2015년부터 호스피스 병동 입원과 완화의료도우미에 대한 건강보험을 적용했고, 2016년에는 가정 호스피스 시범사업을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일반병동에서 호스피스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자문형 호스피스 건강보험도 시범적으로 시행됐다. 임종을 앞둔 환자가 다양한 형태로 지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 해도 호스피스의 주축은 환자를 직접 관리하는 입원형 전문기관, 즉 병원의 호스피스 병동이라 할 수 있다. 현재 국내 입원형 호스피스 전문기관은 81곳에 병상은 1315개. 의료 현장에선 턱없이 부족한 편이라고 평가한다. 실제로 소위 빅5로 불리는 병원 중 호스피스 병동을 운영하는 곳은 서울성모병원이 유일하다.
임종 앞둔 환자의 든든한 지지자
그렇다면 이곳에서 자원봉사자는 어떤 역할을 할까?
“호스피스의 꽃이죠.”
인천성모병원 호스피스 병동의 김 데레사 사회복지사는 이렇게 표현한다.
“호스피스는 일반적으로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 자원봉사자, 성직자, 영양사, 약사, 완화의료도우미 등 다양한 직종의 전문가가 ‘다학제 팀’을 구성해 운영합니다. 이 사이에서 자원봉사자분들은 정신적 지주입니다. 의료진은 통증관리나 증상관리에 집중하는 반면, 자원봉사자들은 말벗이나 친구가 돼주면서 마음을 열게 하는 역할을 해요.”
보통 호스피스 자원봉사를 떠올리면 일반적으로 육체적 지원을 먼저 떠올리게 되지만 최근 완화의료도우미 제도를 도입하는 병원이 늘면서 환자의 머리감기기, 목욕 등의 업무는 완화의료도우미가 맡게 됐다. 아직 제도를 의무화하지 않은 상황이어서 일부 호스피스 병동에선 자원봉사자가 이 업무를 지원하기도 한다.
완화의료도우미제도를 시행 중인 인천성모병원의 경우 자원봉사자들은 주로 산책이나 담소, 책 읽어주는 일을 한다. 날을 정해 함께 소풍을 가기도 하고, 은행에서 볼일을 보는 등의 외출이 필요할 때도 돕는다. 그야말로 일상을 함께하는 친구 같은 존재다. 환자의 임종 후에는 유족을 위로하거나 장례식장에 조문을 가기도 한다. 근무는 보통 일주일에 하루 근무가 기본이다. 근무시간도 길지 않다. 3~5시간 정도이며 병원마다 차이가 있다 .
자원봉사자는 의료기관의 운영 방식에 따라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도 한다며 국립암센터 호스피스완화의료실 백난희 사회복지사는 이야기한다.
“주로 호스피스 병동에서 활동하지만, 가정 호스피스를 진행 중인 곳에서 요청이 올 경우에는 해당 가정으로 방문을 하기도 하고, 자문형 호스피스를 요청하는 일반병동으로 나가 환자를 돕기도 합니다.”
사전 교육 받아야 지원 가능
그렇다면 호스피스 자원봉사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있을까. 의료기관에 따라 운영 방식이 상이하지만 기본적으로 기초 교육을 받아야 하는 것은 동일하다. 국립암센터 부속병원과 같이 자체적인 교육을 통해 자원봉사자를 모집하는 경우도 있고, 한국가톨릭호스피스협회 등 외부 호스피스 교육기관의 과정을 이수하면 자원봉사자 자격을 인정하는 의료기관도 있다. 자원봉사 참여를 원한다면 활동 가능한 의료기관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파악하고 신청하는 것이 먼저다.
관계자들은 자원봉사가 목적이 아니더라도 가족 중 병이 위중한 환자가 있거나, 호스피스 분야에 관심이 있어 개인적 소양을 위해 교육을 받는 경우도 흔하다고 이야기한다. 실제로 자원봉사자 이론교육 참여자가 실제 자원봉사로 이어지는 경우는 10% 정도다.
가족과 사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유족은 당장 자원봉사에 참여하기 어렵다. 국립암센터 백난희 사회복지사는 “가족과 사별하는 과정에서 겪은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고마움이나 효도를 못다 한 아쉬움에 지원하는 경우도 있어요. 교육을 받을 수는 있지만 자원봉사는 최소 1년이 지난 후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합니다. 남아 있는 슬픔 때문에 환자의 상황에 지나치게 감정이입할 수도 있고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죠”라고 설명했다.
기본적으로는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나이 제한을 두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인 나이 제한은 65세. 자원봉사를 하려면 기본 체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또 고령의 자원봉사자는 환자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자신의 말이나 의견을 강요하거나 완화의료 과정에서 고집을 부리는 경우도 있어 나이 제한을 둔다. 선발 과정에서 면접을 중요시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선교를 목적으로 지원하는 사람도 있어 특정 종교색이 지나치게 짙은 경우도 배제 대상이다.
현장에선 자원봉사자들의 더 많은 지원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인천성모병원 김 데레사 사회복지사는 “호스피스 병동 대부분은 자원봉사자가 부족한 상황입니다. 서비스가 다양해지면서 자원봉사자들의 역할도 커지고 있어요. 많은 분들이 지원해주셨으면 해요”라고 말했다.
자신의 직업이 산악인인지 가수인지 모르겠다며 웃는 남자. 1990년 ‘난 바람 넌 눈물’의 작사·작곡자이면서 노래까지 불러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되었지만 마치 그 노래의 가사처럼 바람같이 사라져버린 가수, 신현대(62)를 마주했다. 대중의 시선 밖에 있지만 그는 지금도 여전히 가수다. 그리고 산을 너무나도 사랑하는 산악인으로 살고 있다.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 회장으로서 음악의 본질을 되물으며, 자연인이자 자유인으로서 살고 있는 그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봤다.
백미현과 듀엣으로 부른 히트곡 ‘난 바람 넌 눈물’로 대중에게 알려졌고 지금은 산악인이자 산을 노래하며 포크의 부활을 꿈꾸는 가수 신현대. 1956년생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라고 말하자 그는 “요즘 동안이 너무 많아서 별 의미 없다”며 웃었다. 동안 때문에 그렇게 느꼈던 걸까. 아니다. 공연장에서 들은 그의 목소리에는 나이를 뛰어넘는, 시간의 무게를 털고 훨훨 날아가는 힘이 느껴졌다.
산을 사랑한다는 것은 나만의 산이 있는 것
“방송국에 가면 직업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요. 산악인인지 가수인지.(웃음)”
일찍이 알프스 마테호른, 유럽 최고봉 엘부르즈, 그리고 히말라야 초오유를 알파인 스타일로 등반한 그는 요즘도 매년 때가 되면 히말라야를 향해 떠나는 영락없는 산악인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도 여름만 되면 무전여행을 하느라 한 달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그의 핏속에는 유랑인의 감성이 흐르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는 산을 사랑하는 방법이 아닌 기술만을 가르치는 작금의 등산 문화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북한산을 탄 사람들 중에 ‘종주하면 5~6시간 걸리는데 난
3시간에 갔어’라며 자랑하는 이들이 있어요. 그건 산을 다니는 게 아니에요. 북한산 코스는 어마어마합니다. 그 코스들을 다 올라야 하는 건데, 대부분은 그렇지 않아요. 그들은 북한산의 일부분만 본 거지 속살을 본 게 아닙니다. 진정한 산악인은 산이 내 마음속에 들어와야 해요. 나만의 산이 존재하는 거죠.”
산에는 희로애락이 있다. 사계의 모습이 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산에 갈 때면 항상 식물도감을 가져간다고 한다. 산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보다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에서다.
8300m 산 위에서 여는 콘서트 ‘노트콘’
산을 사랑하는 만큼 신현대는 산에 대한 노래를 부른다. 산과 음악을 함께 다룬다. 그가 최근 열중하고 있는 작업은 우리나라의 산 노래를 정리하는 일이다.
“우리나라 산 노래들을 보면 일본 군가에 개사만 해서 붙인 곡들이 많아요. 산 노래를 정리한 사람도 거의 없었죠. ‘설악가’만 봐도 각 대학 산악회, 일반 산악회가 부르는 멜로디가 달라요. 그래서 일본 군가는 다 빼고, 내가 만든 ‘선인봉’ 등 산 노래를 집대성하고 있어요. CD 3장짜리 전집으로 제작 중인데 돈이 의외로 많이 들어가서 모금을 해서 제작하는 방법을 생각 중입니다.”
사람들은 그에게 돈도 안 되는 산 노래를 왜 만드냐고 한단다. 그러나 그는 에베레스트(8848m)를 갈 때도 8300m 높이까지 기타를 갖고 간 사람이다. 산이 높으면 숨이 차서 노래를 못하는데도 그는 고소 체질이라서 고산지대에서도 노래가 가능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산을 타기 위해 몸도 타고난 것일까. 그렇게 산과 노래를 함께 아우르는 그이기에 산 노래는 단순히 돈을 버는 일이 아니라 호흡과도 같은 일일 것이다.
“매년 2월에 노트콘(노래하는 산 트레킹 콘서트)을 하고 있는데 내년 2월에도 에베레스트 트레킹 콘서트를 기획하고 있어요. 작년에도 안나푸르나 갔다 와서 사진전과 콘서트를 했고 수익은 현지 어려운 학생들 장학금으로 사용했어요. 같이 간 사람들이 글을 쓰면 그걸로 가사를 만들어 음반을 제작하기도 하고요.”
‘예쁜 얘기’만 해야 했던 방송이 부담돼
그는 “음악도 등산과 같다”고 강조한다. 꾸준히, 자신이 평생 추구해야 할 업으로 삼아야 진정한 가수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이다. 사실 그는 히트곡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방송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가수였다. 그러나 자신의 말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방송에서는 볼 수 없지만 그의 음악 활동이 멈춘 적은 없기 때문이다.
“방송을 가면 예쁜 얘기만 해야 해서 싫었어요. 왠지 불편하고 거기에 무대공포증까지 있다 보니 방송이 체질에 안 맞더군요. 대신 콘서트는 계속했습니다.”
요즘도 그의 목소리를 들어보면 얼마나 단련된 가수인지를 바로 알 수 있다. 후배이자 현재 제7대 국립국악원장인 왕기석 명창에게 배운 소리로 공연 전 단가와 가곡으로 목을 푸는 그는 과거에는 마당 세실에서 하루에 2회씩 30일 연속 공연을 한 적도 있다. 룰라의 히트곡 ‘비밀은 없어’를 작사·작곡한 박선민, 김광석의 노래로 유명한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의 원작자인 블루스의 대가 김목경과는 공연장에서 인연을 맺어 지금도 함께하는 동료다.
“미디어에 나오지 않아도 꾸준히 음악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스타를 만들려는 지금의 세태가 어린아이들의 꿈을 죄다 연예인으로 만들고 있어요. 왜 그리도 부추기는지 모르겠어요. 연예인이 아니어도 가수가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건 당연한 거잖아요.”
음악에서 받은 것 음악으로 돌려줘야 한다
사단법인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그는 최근 ‘명가의 품격’이라는 이름의 시리즈 공연을 하고 있다.
6월부터 이치현, 김목경, 백영규, 추가열 등 소위 대가로 불리는 싱어송라이터들이 학동 엠팟홀에서 릴레이로 진행하는 이 공연은 대한민국 가요의 역사와 지난 세월의 다양한 면모를 관록의 힘으로 보여주는 자리다.
“예전에도 싱어송라이터협회 같은 모임이 있긴 했어요. 그러나 몇 번 해산되었다가 사단법인으로선 이곳이 처음이죠. 등록 회원은 350명 정도 됩니다.”
그가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를 맡게 된 이유는 ‘산에서 받아먹은 건 산으로 돌려줘야 하고 음악에서 받아먹은 것은 음악으로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서다. 그래서 한국싱어송라이터협회는 엠팟홀과 MOU 형태로 계약을 맺고 싱어송라이터들이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전용 공간을 마련했다. 또한 매해 헌정 콘서트를 진행하는데 올해가 5회째이며 헌정 가수는 조동진으로 결정됐다.
“어린 친구들은 연예인이 돼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에 음악을 하는 경우가 많죠. 우리가 노래하던 시절에는 그저 노래가 좋아서 가수가 된 경우가 많았어요. 누군가는 다 똑같지 무슨 차이가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겠지만 거기에는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어요. 돈을 벌겠다는 생각으로 접근하면 오래 노래 부를 수가 없으니까요. 그러나 좋아서 노래를 시작한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묵묵히 자기 길을 갑니다.”
사람들의 가슴에 종을 울릴 수 있는 노래
사실 ‘난 바람 넌 눈물’은 완성하기까지 5~6년이 필요했다. ‘노래를 잘한다는 것은 기술적인 것보다는 상대방 가슴에 있는 종을 울려주는 일’이라는 신현대의 지론. 그런 그가 사람들 가슴속 종을 울릴 수 있는 노래를 만들기까지 걸린 시간이다.
“노래를 굉장히 잘할 때가 있고 못할 때가 있어요. 속에서 솟아오르지 않을 때는 공연을 해도 할 노래가 없어요. 하기가 싫은 거지.”
그의 말을 들으며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가 있었다. 바로 ‘자연인’이었다. ‘자연인 신현대’는 거침이 없다. 그리고 그 누구보다 산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제주의 둘레길이 유명해지니까 산에 별것 다 만들고… 그런 길들을 보면 정말 견디기 힘들어요. 모기만 늘어났으니…. 얼마 전 광화문에서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를 반대하는 노래인 ‘산양의 노래’를 불렀어요. 거기서 백기완 선생을 만났죠. 오랜만에 봬서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찍었는데, 후배가 그걸 보고선 ‘형, 좌파야?’ 이러는 거예요. 그래서 ‘야 임마, 난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니고 실파다. 파가 어디 있어 임마, 오랜만에 만나서 반가워서 찍은 거지’ 했어요. 누구를 좋아하는 건 그 사람의 자유인 거지요. 있는 그대로가 좋은 거지, 그것 가지고 뭐라고 해선 안 되죠.”
자유로운 삶이 보상해주는 즐거움
“일을 벌일 때는 ‘내가 지명도가 더 높으면 일하는 게 편했을 텐데…’ 할 때가 있어요.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무 때고 술을 먹을 수 있고 누가 알아보는 것도 아니어서 편해요. 그걸 고맙게 생각해요.”
자유인으로 살고 있는 그에게 미래를 묻는 것은 무의미하다. 없으면 안 먹고, 있으면 먹고, 주위 사람들과 함께 지금처럼 살다가 떠날 때 되면 자연스럽게 떠나면 된다는 그의 말에는 무위자연의 인생관이 담겨 있었다.
“후배 아버지 한 분이 기억나는데, 그분이 정말 멋있었어요. 술을 좋아하셨는데, 임종 세 시간 전에 아들에게 위스키 한 잔을 달라고 하셨답니다. 아들이 갖다 주니 그걸 마신 후 돌아가셨대요. 그 술맛이 얼마나 좋았겠어요?”
그 술맛은 낙원의 맛이 아니었을까. 그가 추구하는 낭만과 자유처럼, 신현대의 삶은 제3자의 눈에는 너무도 달콤하게 보였다. 속박에 얽매이지 않고 훨훨 나는 듯한 그 자연스러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