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사이 부쩍 가까워진 나라가 있다면 곧장 베트남을 떠올리게 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주역이자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 팀을 아시아 최고 팀으로 환골탈퇴시킨 박항서 감독의 활약이 크게 작용했다. 하지만 박 감독의 베트남 입성 훨씬 이전부터 ‘브랜드 코리아’를 알리며 실질적인 협력과 양국 간 우호 증진에 힘써온 이들이 있었다. 바로 한국 정부 파견 봉사단 월드프렌즈코리아에서 운영하는 ‘월드프렌즈 NIPA자문단’이다. 무역투자 부문 NIPA자문단원으로서 지난 3년간 베트남에서 동분서주했던 정동식 씨를 만났다. 그는 NIPA자문단원 활동을 통해 국위선양의 기회는 물론 나이 들어서도 일하는 즐거움을 새삼 느꼈다고 했다.
작년 말 베트남에서의 NIPA자문단원 활동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정동식 씨는 현재 굴삭기 부품을 제조하는 ㈜티엠시에서 자문위원으로 일하고 있다.
“NIPA자문단원으로 베트남에 있을 때 이 회사 대표가 저를 찾아왔습니다. 여러 가지 설명을 해줬던 것이 인상에 남았는지 제가 귀국한 것을 알고는 베트남 수출 관련 자문위원 자리를 제안하더군요. 올해 2월부터 비상근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되돌아보면 베트남에서 저는 정말 일만 하다가 왔습니다.(웃음) 취미도 일하는 것이라서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2014년 11월, 상장사였던 우진플라임의 상임감사 겸 중국 법인 대표로 일하던 정동식 씨는 사임을 표하고 잠시 쉬고 있을 때 친구를 통해 NIPA자문단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됐다.
“2015년 7월경 마침 코트라에 다니던 친구가 베트남 다낭에 코이카자문단원으로 나간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친구가 저에게 ‘너도 무역회사에서 오래 일했으니 지원할 분야가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코이카는 당시 모집이 끝났고 NIPA자문단도 있다면서 알려주더군요.”
그는 젊은 시절 삼성중공업과 동부산업을 거쳐 수출 제조업을 하는 중견기업 임원과 대표직을 30여 년 맡아왔다. 무역에 대한 전문지식과 실무경험, 폴란드와 중국 등지의 주재 경력이 있었기에 외국 파견 업무에 대한 자신감도 있었다.
“정년퇴직하고 나서 다른 회사의 고문으로 가는 건 솔직히 싫었습니다. 기업체에서 현역으로 좀 더 일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닌 것 같고 현역처럼 더 일할 곳이 없을까 생각했는데 마침 베트남에 NIPA자문단원을 파견하더군요. 국가 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베트남이라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베트남에서 NIPA자문단원으로 활동하면서 은퇴 후의 인생을 펼쳐보자는 기대감과 합격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일단 100% 영어로 진행되는 인터뷰에 만전을 기했다. 해외 주재 경험이 있어도 인터뷰는 또 달랐기에 일주일 동안 도서관에서 베트남에 관한 자료를 찾고 영어가 입에 익을 때까지 읽고 말하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합격해서 들어간 곳은 베트남의 수도 호치민에 있는 베트남중소기업지원센터(SMEDEC2)였다.
“3년 동안 제가 했던 것 중에 가장 잘한 일은 베트남중소기업지원센터를 호치민에 오는 한국 기업과 공공기관들이 1순위로 찾는 몇 안 되는 베트남의 정부기관 중 하나로 만든 것이에요. 한국과 베트남 기업체를 만나게 해주는 역할이었죠. NIPA자문단원은 대한민국 정부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공직 신분에 준합니다. 봉사하는 마음으로 기업체 매칭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과 함께 다양한 프로젝트도 추진했다. 다 이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꿈과 희망을 심어주고 한걸음 더 성장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한다.
“현지에서 ‘꿈의 프로젝트’라고 명명했던 500만 달러 투자 건이었는데 코이카 쪽에서 무상원조 해주기를 기대했습니다. 인터넷 쇼핑몰 사업과 함께 대형 서버룸을 호치민에 유치하려고 했어요. 당시 우리 정부는 인프라 구축을 돕는 사업에서 IT로 지원 분야를 옮긴 상태였어요. 서버룸도 IT 분야 중에서도 인프라 구축 차원이다 보니 지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4개월 만에 접었어요. 말 그대로 꿈의 프로젝트였죠.(웃음) 베트남이 또 농산물을 많이 수출하는 농업 국가잖아요. 1년 차 때 용과 수출을 추진했습니다. 그때는 잘 안됐는데 지금은 한국에 수입되더군요. 베트남산 블랙타이거 쉬림프, 주꾸미 등을 가공 포장해서 한국에 수출했습니다. 추진했던 일도 많고 상황이 안되어서 접었던 일도 많고요, 3년의 시간이 부족할 정도로 베트남 곳곳을 찾아다니면서 NIPA자문단원으로서 역할을 다했습니다.”
덥고, 습했지만 파견 1년 동안은 에어컨이 없는 마을버스를 타고 다니면서 현지 적응을 했다. 그나마 우기에는 낮시간 때 스콜(열대지방에서 오후 한때 내리는 국지성 호우)이 내려 더위를 식혀줬기 때문에 나름 견딜 수 있었다고 했다.
“그래도 2년 차부터 에어컨 달린 마을버스로 바뀌었어요. 베트남이 성장 길목에 있다는 걸 새삼 느꼈죠. 베트남에 가기 전에 저 자신과 한 약속이 있습니다. ‘눈높이를 낮추자, 무시하지 말자, 일 더 해주자’ 이 세 가지였습니다. 3년 동안 나름대로 약속을 잘 지키고 임무를 마쳤다고 생각합니다.”
작은 것도 놓치지 않고 찾아서 알리고 하나라도 더 사업을 성사시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마음으로 베트남 내 도시란 도시는 다 다녔다. 작년 말 베트남에서 자문활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또다시 해외파견 봉사 프로그램에 지원하고 싶었으나, 자문단 최대 파견기간 3년을 채워 재지원이 불가하게 되어 아쉬움이 크다고 한다.
“베트남에 있는 동안 많은 곳을 다녔고 현지인들과 만나 교류도 했습니다. 전문지식이 쌓이다 보니 베트남 전문가로 통하게 됐고요. 현재 자문위원으로 있는 회사가 베트남 쪽과 교역을 하고 싶어 해서 지난 3월 MOU 체결에 힘을 보탰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이 지금은 솔직히 가깝다고 느끼지만 공산주의 국가로 긴 세월을 보냈기에 폐쇄적인 면이 있어요. 중간 역할 아무나 하지 못합니다.”
끝으로 자문단원으로서 최고의 덕목과 지원하고자 하는 미래 NIPA자문단원에게 조언할 내용이 있는지 질문했다.
“개발도상국은 말 그대로 개발하고 도약해서 잘살려고 노력하는 나라입니다. NIPA자문단원에게 듣고, 얻고 싶어 하는 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따라서 그들이 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결과가 좋든 안 좋든 최선을 다해 알아봐주고 함께 노력해줘야 합니다. 자상한 선생님이어야 하고 업무 추진체여야 하고 최대한 마무리가 있는 일처리 능력 또한 전수해줘야죠.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신만의 노하우를 정리해보고 난 뒤 월드프렌즈 NIPA자문단에 지원하세요. 한국에서는 은퇴 후의 인생이지만, 개발도상국에서 NIPA자문단은 새로운 국가를 탄생시키는 원동력입니다.”
정동식 자문단원
활동 국가 베트남
활동 기관 활동기관 베트남중소기업지원센터(SMEDEC2)
자문 분야 무역투자 부문
자문 내용 한국과 베트남 간 교역 및 공적 원조 자문
파견 기간 2015년 12월 8일~ 2018년 12월 7일(3년)
검단농협 오왕지점에 머물러 있으면 은행을 찾는 손님들 외에 기분 좋은 웃음을 머금은 채 2층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다. 그들의 발길을 따라가면 빼어날 수(秀)에 많을 다(多), 집 원(院) 자가 새겨진 한자 팻말이 눈에 띈다. 여긴 대체 뭐하는 곳이지? 궁금증을 안은 채 철문을 여니 햇살에 부서지듯 와르르 환한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어서 오세요, 수다원입니다.” 정체불명의 공간을 책임지는 나영자(66) 수다원 원장의 목소리가 낯선 이를 반긴다.
“이름을 짓는 데 신중했어요. 이 동네가 자연부락이 재개발되며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곳이라 원래 거주하던 사람들과 새로 유입된 사람들 사이 괴리감이 있거든요. 원래 거주하던 분들을 ‘토백이’, 새로 유입된 분들을 ‘아파트 사람들’이라 구분지어 부를 정도로 거리감이 확연했는데, 전 그게 참 안타깝더라고요. 다 한동네 사람들인데 서로 즐겁게 지낼 수 없을까 고민하던 차에 수다원이란 공간을 마련하게 된 거죠. 함께 모여 수다떨면서 융합하고, 정보도 교환하고, 감정을 나누면서 살아가는 공간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 이런 이름을 지었어요.”
나영자 원장이 수다원을 만들게 된 계기는 담백하고도 의미가 깊다. 이웃에 살면서도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알려고 하지 않는 각박한 현대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네’의 가치를 실현하고 싶었던 것. 그렇기에 수다원의 활동은 거창하진 않아도 따스하고 잔정이 깊다. 바쁘게 살다 보면 잊고 지나치기 일쑤인 생일을 챙겨주고, 봄가을이면 그 옛날처럼 설렘을 안은 채 근교로 소풍을 떠나고, 때로는 곱디고운 꽃도 그려보고 사군자도 친다. 영화감상이나 네일아트, 도자기와 승마체험 등 한 달에 한 번씩 열리는 특강은 문화시설이 부족한 이 동네에서 큰 호응을 받는 프로그램. 새해를 맞으면 동네별로 재료를 준비해 큰 양푼 두어 개에 넣고 쓱쓱 비빈 비빔밥을 먹는 특별한 시무식을 열고, 연말이면 재능기부한 봉사자들에게 작은 선물을 증정하는 송년회를 열기도 한다.
단절된 동네의 융화를 위한 사랑방
한마디로 동네 사람들이 함께 모여 행복하게 융화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떤 활동이든 제약이 없다. 재미난 건 나 원장이 ‘토백이’와 ‘아파트 사람들’ 중간에 위치한다는 것. 1980년대에 수다원 인근에 위치한 단봉초등학교에 재직한 적은 있지만 이 동네 아파트로 이사 온 것은 퇴직 직전이다. ‘토백이’ 중에는 재직 당시의 학부모들이 남아 있어 친근하고, 나 원장은 ‘아파트 사람들’에 속하기도 하니 중간자적 입장에서 이런 공간의 필요성을 가장 먼저 캐치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가장 큰 목표는 남녀노소 다 같이 어울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거예요. 가을부터는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꽃꽂이 강의를 열고, 젊은 엄마들의 기존 독서모임이 있는데 동화구연도 더할 생각이에요. 퇴직하신 어른들을 초빙해 초등학생들에게 천자문과 바둑, 장기 등을 가르칠 계획도 있고요. 중요한 건 실용성을 뛰어넘는 감정의 확산에 있어요. 시골 할머니들이 꽃꽂이 배운다고 플로리스트가 될 건 아니잖아요? 다만 꽃꽂이를 하고 그걸 집에서도 응용함으로써 평생 안 해본 경험을 하고, 그 경험과 감정을 가정에서도 공유한다는 게 중요한 거죠. 마찬가지로 아이들에게 천자문을 가르쳐 한자 몇 자 알게 하고, 바둑과 장기의 스킬을 늘려주는 게 아니라 그걸 매개체 삼아 인성 지도를 받게 해 사람 됨됨이가 되도록 하는 게 목적이에요.”
여성 회원이 많다 보니 남성들은 궁금해서 슬쩍 들렀다가도 쑥스러움에 발길을 돌리곤 한다. 수다원은 남성 회원 역시 두 팔 벌려 환영한다고.
수다원에 흔쾌히 공간을 빌려준 농협의 운영시간에 맞추다 보니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밖에 문을 열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지만 초등학생들은 물론 더 많은 사람이 이곳을 이용할 수 있도록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나영자 원장의 계획이다.
도서관도, 문화센터도 없는 문화 불모지에서 누구에게나 열린 공간으로 다가가는 수다원은 2017년 5월 10일 개원 직후부터 빠르게 성장해왔다. 개원 당월에 봄소풍을 다녀온 이래 꾸준히 배우고 경험하는 프로그램이 많아졌고 최근에는 비영리단체로 등록까지 마쳤다. 그간 무료로 재능기부한 봉사자들이 단체 등록을 계기로 1365 자원봉사포털의 혜택을 받을 수 있게 되어 기쁘다는 나 원장의 표정에서 뿌듯함이 여실히 묻어난다.
함께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삶
공간을 만들고, 그 공간 안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프로그램을 꾸준히 기획하는 능력은 사실 쉽지 않다. 수다원을 이끄는 나영자 원장의 리더십은 그녀가 평생 쌓아온 시간에서 기인한다.
나 원장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2015년 교감으로 퇴직할 때까지 오랜 시간 봉사활동을 하며 보냈다. 남편과는 주말마다 양로원에 가고, 세 자녀 또한 고아원으로 봉사를 보낸다. 모범공무원 선정, 신일스승상 선정, 녹조근정훈장 수여 같은 명예로운 수상은 봉사의 삶을 살면서 따라온 부상들. 퇴직하고 난 뒤에도 자신의 역량을 활용해 남을 돕는 삶을 살아왔다.
“정년 10년 전부터 퇴직 이후의 삶을 준비했던 것 같아요. 제가 아동미술을 전공한 데다 미술교사 동아리 활동도 했고 개인 작업을 거쳐 전시회도 몇 차례 하며 국전에도 입선한 경험이 있어서 그림을 가르치며 봉사하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러다 이 동네 특유의 분위기에 안타까움을 느껴서 이런 공간을 만들게 된 거고요. 여기서도 다양한 미술활동 프로그램을 펼치고 있으니 더 외연이 넓어진 셈이네요.”
사람과 사람을 잇는 공간을 만드는 과정은 자연스럽게 행복 추구로 귀결된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수다원은 치유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수다원 회원 중에는 수십일 동안 집 안에 칩거해 있을 만큼 감정적으로 고립됐던 사람도 있고, 아픈 손자 때문에 홀로 마음앓이를 했던 사람도 있다. 전문가의 치료로도 꽤 긴 시간을 필요로 할 만큼 우울 증상이 깊었는데 수다원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
“사실 제가 상담사와 미술심리치료사 자격증도 있어요. 그런데 그분들에게 필요했던 사람은 자격증을 지닌 전문가보다는 눈을 맞추고 꾸준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였다고 봐요. 요즘은 오전 9시 땡 하면 수다원 문을 열고 오실 만큼 열성적인 회원이 되셨죠. 그런데 그거 아세요? 사람들과의 교류 때문에 행복해지는 건 저도 마찬가지예요. 퇴직하고 나서도 아침에 눈 뜨면 바로 이곳으로 오거든요. 사람들과 함께하니 외로울 일도 없고 하루하루가 행복해요.”
사비를 털어 수다원을 개원할 당시 ‘과연 사람들이 모일까?’ 했던 기우는 점점 사라졌다. 사람들이 행복해질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필요한 지원금을 확보하려 동분서주할 때도 초반에는 수다원의 존재를 몰라 애를 먹었지만 이제는 인근에서 모두 아는 단단한 존재가 되었다. 수다원이 위치한 인천 오류왕길동은 물론 검암지구, 멀리 김포에서도 수다원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진작 이런 곳을 알았으면 여기로 이사 올걸” 하며 아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데, 그만큼 사람들 간 교류가 이뤄지는 공간이 적다는 방증이리라.
“이 공간의 장점 중 하나는 동네 사람들끼리 정보 교환이 활발하게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경험하고 배우는 것도 좋지만 한동네 사람들이 애들 데리고 가볼 만한 곳은 어디인지, 어느 곳에서 질 좋고 저렴한 물건을 살 수 있는지 실용적인 정보교환이 이뤄지니 건설적이죠. 이런 공간이 없었다고 생각해보세요. 마을회관에서 고스톱 치며 시간을 보내거나 몇몇이 몰려다니며 쇼핑이나 가십에 열중하게 되지 않겠어요?”
은퇴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고하는 말
나영자 원장의 말에 따르면, 교직생활을 마치고 은퇴자의 삶을 사는 이들도 다른 은퇴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유형으로 나뉜다. 여러 명이 모여 등산이나 나들이 갔다가 술 한잔 걸치고 집에 들어가는, 흔히 남성들에게서 보이는 삶. 손자손녀들을 맡아 돌보거나 자식들 살림을 도와주는 삶. 이것저것 배우러 다니는 삶 등등. 그녀는 친정엄마가 아이를 맡아준 적도 있고, 자신이 직접 육아를 해보기도 했지만 길러보니 자식은 부모가 키울 때 더 보람차고 행복했다며, 자식들을 위해서라도 손자손녀를 돌보는 은퇴 후의 삶은 마다했다. 퇴직 후 남을 돕고 사는 삶을 살기로 했지만 수다원을 만들기 이전에도 서구역사문화연구회를 꾸려 회장을 맡는 등 봉사에 임하는 모습이 수동적이지 않다. 아니, 마치 개척자의 용기를 보는 것 같다.
“은퇴 후의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건 ‘내 것을 먼저 내어준다’는 마음가짐이에요. 봉사를 한다 해도, 퇴직 후 나만을 위해 준비된 자리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아요. 돈이든, 시간이든, 열정이든 내 것을 먼저 내어놓는 것에 익숙해져야 해요. 저도 수다원을 만들었지만 수익이 난다거나 경제적인 이득을 보는 건 없어요. 감자철이면 감자를 한두 박스씩 사다가 쪄서 나누는 등 오히려 퍼다 나르는 게 많지요.(웃음)”
4년 전 퇴직해 성실히 은퇴자의 삶을 살아가는 만큼 나영자 원장의 조언은 디테일하다. 과거의 영화를 잊어야 하는 건 물론 앞으로 소속되어 살아갈 커뮤니티에 맞춰 말투와 행동거지, 옷차림도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가장 최악은 ‘내가 왕년에 이랬는데’ 하는 생각입니다.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이었다고 은퇴하고 나서도 교장선생님 대접받길 바라면 곤란하죠. 특히 전문직에 종사했던 분들이 은퇴 후 이사하거나 귀농귀촌한 동네에서 은연중 우월의식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요. 거기다 초점을 맞춰, 편하게 말해도 될 이야기를 영어까지 섞어 말하면 고만고만한 동네에서 튀어 보일 수밖에 없죠. 손주들도 할머니가 자기들 수준에 맞춰 놀아줘야 좋아합니다. 은퇴 후에는 왕년의 허물을 벗어버리고 함께 살아갈 동지를 만들어야 해요. 누가 만들어주지 않는답니다.”
100세 시대인 만큼 예순여섯 살 나영자 원장은 아직 살아갈 날이 한참 남았다. 그녀가 꿈꾸는 성공한 삶, 더 많은 사람과 지혜와 사랑을 나누는 삶을 위해 내일도 나 원장은 더 많은 사람과 신명나게 수다를 떨고 웃을 예정이다. 나눌수록 행복하다는 믿음을 안고서.
1996년부터 현재까지 성동복지관 주방에서 노인과 장애인을 대상으로 봉사활동을 해온 김혜숙(66) 씨. 음식 솜씨 좋고 마음씨 따뜻한 그녀는 최근 ‘사찰음식 전문가’로 제2인생을 살고 있다. 평범한 주부였던 김 씨가 사찰음식에 눈을 뜬 것은 남편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됐다.
“2004년에 남편이 급성심근경색 진단을 받았어요. 남편의 건강을 위해 음식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했죠. 그러다 봉사를 다니던 성당의 수녀님이 자격증을 따보라고 제안하셨어요. 음식에는 자신감이 있던 터라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죠.”
도서관과 학원을 오가며 1년을 꼬박 매달린 결과, 그녀는 2009년 한 해 동안 한식·양식·일식·중식 조리기능사 자격증을 차례로 모두 섭렵할 수 있었다. 젊은이들도 한 번에 따기 어렵다는 조리기능사 자격증을 막힘없이 따낸 것 역시 남편의 격려가 한몫했단다.
“시간과 돈을 꽤 투자했어요. 만약 남편의 도움이 없었다면 어려웠겠죠. 응원에 힘입어 처음 본 한식조리기능사 시험을 한 번에 합격했고, 그 기운으로 다른 분야도 자신 있게 도전할 수 있었어요.”
조리기능사 자격증 취득 후인 2012년, 그녀는 우연히 TV를 통해 ‘사찰음식’을 알게 됐다. 스님들이 수행하며 제철 식재료로 자극 없이 만드는 요리이니 분명 건강에도 도움이 되리라 여겼다. 그렇게 1년 정도를 대안 스님에게 사찰음식 초·중·고급 과정을 수료했고, 2015년에는 사찰음식 전문 조리사 자격증도 취득했다. 요즘 그녀의 즐거움은 사찰요리 레시피를 고안하는 것. 최근에는 직접 꾸린 사찰음식으로 절에 공양을 올리기도 하고, 외국인 단체 관광객에게 선보여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취업을 목표로 자격증을 준비한 것은 아니라는 그녀,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일까?
“음식 관련 봉사활동은 계속할 겁니다. 같은 일인데도 자격증을 딴 뒤로는 더 전문적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죠. 또 계속 사찰음식 메뉴 개발을 하면서 작은 가게를 열어보려고 해요. 남편을 살리기 위해 터득한 재능을 맛있고 건강한 음식을 통해 나누고 싶습니다.”
여고 동창생, 특히나 여고 졸업반 친구들은 아련하고 각별하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갈피갈피를 같이하는 게 고교 친구가 아닐까. 방과 후 수다를 조잘조잘 나누던 여고 동창생들이 이제는 며느리, 사위 볼 이야기까지 나누게 되었다. ‘거울 앞에 선 누이’가 된 적잖은 나이이지만, 함께 모이면 여전히 단발머리, 교복 입었던 그 시절로 달음질친다. 추억은 돌아보는 것이지만 만들기도 해야 한다는 소신 하에 계를 부어 여행을 계속 떠나며 추억을 만들어온 지 어언 12년째다. 서로를 안 지 40년 남짓. 강산은 네 번이나 변했지만 우정은 한결같다.
도화진, 오은경, 이소윤, 김성회. 우리 4명의 가장 큰 공통점은 모두 헛똑똑이, 허당이라는 점. 방향 감각이 엄청 떨어지는 길치란 점도 그렇다. 해외는 물론이고 국내에서도 같은 길을 몇 번씩 돌아갔다 원점으로 돌아올 때, 지하도 출구를 몇 번씩 들어갔다 나왔다를 반복할 때 서로를 보며 깔깔거린다. “어쩌면 우린 이런 것까지 똑같니? 요즘 세상에 이렇게 만나기도 힘들다. 이렇게 덜떨어진 우리 같은 사람들끼리 만나는 것은 우연이니? 필연이니?” 하면서.
우리 여고 동창들은 대학교 다닐 때 함께 국내 여행을 다니다가 해외로 여행 영역을 넓혔다.
지금도 그때 그 시절 사진을 보면 웃음이 나온다. 서로의 옷을 바꿔 입고 나름 예쁜 척하며 바닷가에서 찍은 모습들이란… 촌스럽지만 풋풋하다. 이후 한 친구는 유학을 갔고, 한 친구는 노동운동을 하면서 모두 모이지 못하는 소강기간도 있었다. 그러다가 마흔 넘어 비로소 네 명의 아귀가 채워질 수 있었다. 2010년 처음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갔고, 2013년엔 스페인으로 패키지여행을, 그다음 2016년엔 조금 더 용기를 내서 크로아티아로 에어텔을 예약, 여행을 다녀왔다. 그리고 올해 5월 11~20일 네덜란드-벨기에로 여행을 다녀왔다. 해외여행으론 네 번째다. 좌충우돌 알콩달콩 네덜란드-벨기에 자유여행 이야기를 공개한다. 3회로 나누어 연재할 예정이며 그 첫번째를 싣는다.
암스테르담 교외 전원마을 히트호른 직행
우리는 해외여행을 갈 때 되도록 밤비행기를 이용한다. 호텔비 1박을 아끼는 이점, 그리고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활동, 시차적응이 쉽다는 양수겸장의 장점이 있기 때문이다. 저녁은 간단히 먹고 기내식으로 푸짐하게 배를 채운 뒤 와인 한 잔까지 걸치고 푹 잤다. 좁은 이코노미석 새우잠에 익숙하지 않은 친구는 뒤척뒤척 잠을 못 이뤘다. 11시간의 비행 후 새벽 5시(현지 시간)에 네덜란드 스히폴공항에 도착했다. 높다란 천장, 히딩크처럼 큼직큼직 건장하게 생긴 외국인들…. 네덜란드에 왔음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공항 화장실에서 간단히 세수를 하고 화장을 했다. 우리나라의 이마트쯤에 해당하는 알버트하인 마트에서 수프와 빵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곧바로 네덜란드의 동화마을 히트호른을 향했다. 히트호른은 염소의 뿔이란 뜻이다.
도착하니 오전 9시 30분가량. 거의 일착이다. 우리가 마을 전체를 완전 전세 낸 것처럼 고적해서 더욱 좋았다. ‘네덜란드의 베니스’란 별칭에 어울리는 강가에 예쁜 집들, 그리고 그 옆에 작은 배들이 그림처럼 정박해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우리는 동시에 탄성을 터뜨렸다. 눈앞에 펼쳐진 쨍한 하늘과 전원, 강 옆의 억새지붕을 한 집들이 오순도순 동화처럼 아름답게 늘어서 있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창문에 스탠드이든, 인형이든 쌍으로 놓는 게 인테리어의 기본 법칙이다. 그래야 균형이 맞는다고 생각한단다. 반 고흐의 작품 ‘아를의 반 고흐의 방’을 보면 침대 오른쪽 벽에 그림액자 2개가 나란히 걸려 있는데 네덜란드의 독특한 풍속이 미친 영향이다. 집 앞의 강에는 집집마다 작은 배를 정박해놓았다. 무엇보다 좋은 것은 청량한 공기…. 모두들 피곤함도 잊고 탄성을 연발하며 “이런 예쁜 집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했다가 급격히 말을 거뒀다. 햇빛이 아쉬운 네덜란드의 환경상, 이곳의 가옥구조는 한 벽이 다 창문이라 할 정도로 창문이 많다.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니 창문이 얼룩진 곳 하나 없이 반짝반짝한 게 아닌가. 또 집 안도 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다. 이런 집에서 살려면 늘 청결하고 인테리어도 안목이 있어야 할 텐데 자신이 없었다. 어쨌든 파란 하늘, 초록 풀밭, 흐르는 강, 그림 같은 집 등…. 네덜란드는 포토제닉 국가 그 자체다. 실제 풍경도 아름답지만 사진으로 보는 경치가 더 아름답다.
프리워킹투어+마차 관광과 숙박
암스테르담 시내는 프리워킹투어를 이용했다. 미리 한국에서 신청해놓아 만남의 장소인 담 광장을 향했다. 우리 팀을 인솔할 사람은 아랍인 용모를 한 중년 남자. 네덜란드로 이민 온 지 오래된 미국 캘리포니아 출신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네덜란드 역사관광 가이드를 외국인이 맡은 것이 신기했다. 가령 경복궁 안내를 푸른 눈의 외국인이 안내하며 한국 역사를 설명한다면? 암스테르담이 이민자의 도시라서 가능한지도 모른다. 암스테르담 궁전, 벼룩시장 등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를 돌다가 자신이 아는 카페로 관광객을 인도, 아니 유도했다. 그리고 무료 관광이며 자신은 별도로 공공기관에서 돈을 받는 것도 아니라고 구구한 설명을 하며 팁을 유도해서 피곤했다. 더구나 행인들과 차가 다니는 길거리에서 영어 설명을 들으려니 청해는 고사하고 청취도 힘들었다. 중간에 들른 카페에서 커피와 케이크를 먹으며 간단히 요기를 한 후 “다음 일정이 바빠 어쩔 수 없이 중도에 빠지겠다”고 양해를 구하고 우리끼리 시내를 돌기로 했다.
우선 길을 다니며 조심해야 할 것은 자전거들. 자전거들이 씽씽 달려 부딪힐까봐 늘 경계해야 했다. 마침 우리나라 유학생이 스마트폰으로 길을 찾던 중에 자전거와 부딪혀 크게 부상당했다는 소식을 들어 더 긴장하고 조심했다. 종일 걸으니 다리가 아팠다. 길치라서 헤매는 거리까지 합하면 통상 표시된 거리의 1.5~2배. 만보계로 체크해보니 하루 평균 2만 보는 걸었다. 마차를 타고 암스테르담 시내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마차가 따각따각 소리를 내며 포장된 도로를 도는데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손을 흔들거나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손 흔드는 법을 연습해둘걸. 솔직히 말하면 조금은 민망했다. 재미있는 것은 트램이나 자동차, 마차 모두 같은 도로를 이용한다는 것. 앞에는 마차가 달리고, 그 뒤에서 자동차가 천천히 따라오고…. 그런데도 클랙슨 한 번 울리지 않고 기다리는 게 신기했다.
암스테르담 시내에서 주의할 것 중 하나는 커피숍과 카페의 구별이다. 카페는 우리나라에서처럼 커피를 마시는 곳이다. 그런데 커피숍 간판이 붙은 곳은 대마초를 피우는 장소란다. 어쩌다 간판만 보고 들어가면 큰코다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네덜란드의 커피숍(coffee shop)은 관용정책(gedoogbeleid)의 아편법에 따라 일정 금액의 판매 소지가 허용된 소프트 드러그(soft drug, 중독성 없는 마약)의 대마초를 포함한 제품을 판매하는 소매점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마초를 공식 허용하는 정책이 오히려 사람들로 하여금 호기심을 덜 갖게 하는 효과를 낳았다고 한다. 하지만 현지에서 만난 네덜란드 교민은 “암스테르담에서 이런 곳을 출입하는 사람은 주로 외국인이지, 네덜란드인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네덜란드인은 보수에 가깝다”는 말을 들려줬다. 자유로운 사람이 오든, 오면 자유로워지든, 암스테르담은 자유인을 위한 도시다.
이곳은 물가가 비싸서 호텔은 역세권 아파트형 호텔로 정했다. 슈퍼마켓에서 장을 봐 아침, 저녁을 해결했다. 한결 비용이 절약됐다. 빵에 주스, 요구르트, 견과류, 과일을 곁들여 먹으니 특급 호텔 조식 못지않았다.
건축도시 로테르담과 마르크트할, 유로마스트
암스테르담을 떠나 다음 목적지인 로테르담으로 향했다. 산더미만 한 캐리어백을 낑낑대고 끌며 겨우 로테르담행 기차에 올랐다. 캐리어가 커서 객석으로 끌고 들어가기도 힘들고, 기차 선반에 올리자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차 연결 부분에 짐칸이 있었지만 멀리 두자니 도난이 걱정됐다. 어쩔 수 없이 짐을 지키느라 짐칸 옆에서 한 명씩 돌아가며 경비(?)를 볼 수밖에 없었다. 짐을 끌며 역에 겨우 도착했는데 호텔 찾아가기가 난망이었다. 구글맵으론 도보 5분 거리라는데 아무리 뱅뱅 돌아도 나오지 않았다. 짐은 무겁고, 길은 못 찾겠고….
이때 비로소 우리 여행은 심각한 갈등 속에 빠지기 시작됐다. 택시를 타자는 입장, 아니면 좀 더 찾아보자는 입장의 대립이었다. 역에서 최대한 가까운 호텔을 찾아 예약하느라 애를 쓴 친구는 못내 아쉬운 표정이었다. 택시기사는 호텔 이름을 듣더니 “아니 코앞인데 이곳을 택시로?” 하는 표정이었지만 우리는 너무 지쳐 있었다.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그냥 가주세요” 했다. 그리고 호텔 고고(Go Go!!).
로테르담은 네덜란드 제2의 도시. 쭉쭉 올라간 고층건물들이 눈에 들어온다. 고풍스런 암스테르담과 확 달라진 분위기. 오히려 우리 눈에는 낯설지 않아 서울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공습으로 중심부는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전후의 부흥에 따라 현대도시로 재생됐다. 이곳의 명물인 큐브 하우스를 보고 마르크트할로 향했다. 큐브 하우스는 건축가 피트 블롬(1934~1999년)이 로테르담의 블락 역에서 광장을 가로지르는 보행자용 다리 위에 주택을 세운 것. 54° 기울어졌고, 바닥부터 위를 향해 육각기둥이 세워져 있다. 노란색의 추상적인 숲 형태의 집이다. 어떤 각도에서 사진을 찍어도 잘 나오고 독특해 발상의 전환에 대해 경탄했지만 살고 싶지 않다는 데는 우리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다. 내부로 들어가 보니 가파른 계단이 굽이굽이 달팽이 모양으로 설치돼 있어 오르기가 쉽지는 않아 보였다. 경험 삼아 1박 예약도 고려했었는데 캐리어 들고 이 계단 오르락내리락했을 것 생각하니 보기만 해도 진땀이 주르르 흘렀다. 암스테르담에서 묵은 아파트형 호텔도 가파른 계단이었지만 옥외 엘리베이터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이곳은 그마저도 없으니… 우리 여기서 묵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이곳 유스호스텔은 늘 예약이 꽉 차 있다니 그런 걱정은 기우인 셈이다. 역시 아름다운 것은 불편한 걸까?
로테르담 일정은 주로 도보관광으로 여유롭게 잡았다. 도서관을 구경하고 에라스무스 다리 등을 걸으며 유유하게 보냈다. 마르크트할에서 시장 음식을 조금씩 사서 주전부리로 먹는 것도 쏠쏠한 재미였다. 간단하게 식사를 한 후 그다음은 네덜란드의 남산타워라 불리는 유로 마스트에서 정찬을 즐겨보기로 했다. 유로마스트는 로테르담을 한눈에 360° 전망할 수 있는, 높이 185m의 회전 전망대로 레스토랑도 운영하고 있다. 우리는 오후 7시 30분으로 디너 예약을 했다. 아줌마의 알뜰 본성을 속일 수 없어, 식사비 지출을 너무 하는 건 아닌지, 차라리 그 돈으로 마켓할에서 맛있는 음식 사먹는 게 낫지 않느냐며 난상토론을 벌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최고의 식사’였다. 네덜란드는 오후 9시는 돼야 해가 진다. 7시 30분에 예약한 덕에 해가 지기 전 경치와 일몰 풍경, 그리고 해가 진 후의 야경까지 두루 즐길 수 있었다. 안 오면 정말 후회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을 곁들여 먹었는데도 4명 식사 총액이 170유로(한화 23만 원)밖에 안 나왔다. 우리나라의 호텔 식사비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가격이 좋은 편이었다. 단, 서비스 속도가 느려 애피타이저에서 디저트까지 나오는 데 무려 3시간여가 걸렸다.
불덩이 같은 해가 지는 것을 보며 모네의 그림 ‘해넘이’ 풍경을 연상한 것도 잠시, 다시 도시의 야경으로 경치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360° 원형으로 바라보는 전경의 아름다움, 그곳에 온 선남선녀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앞 테이블의 노부부도 보였다. 식사를 마치고 서로를 부축해주며 일어나 옷깃을 매만져주는 모습을 보며 순간 뭉클해졌다. 다른 친구들도 같은 마음을 느꼈는지 “우리, 한국에 있는 식구들에게 문자 한번 보낼까?” 한다. 그래, 여행의 가장 좋은 점은 떠남 그 자체보다 현재를 되돌아보고 감사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의 여행도 그렇게 무르익어 갔다.
입 냄새가 평생의 난제인 구취 환자. 그들이 외롭게 홀로 숨어서 인터넷 세상을 이리저리 헤매고 다니다가 만나게 되는 곳이 있는데 바로 ‘구취정보센터’라는 곳이다. 2000년에 사이트가 개설된 이래 지금까지 입 냄새로 고생한 이들이 참 많이도 거쳐갔다. 얼마나 심각하기에 ‘구취환우회’라 이름 붙여 웹사이트를 열었는지 운영자인 김두식(56) 씨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입 냄새 때문에 겪는 고통과 괴로움!!”
“입 냄새와의 사투!!”
사이트 소개의 첫 문장이 의미심장하다. 지금은 읽기전용으로 되어 있어 사람들의 왕래가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2000년부터 2012년까지의 언론보도와 학회보고서, 구취사례, 경험담과 조언, 치료개선 등 17개의 카테고리 모두 열람이 가능하다. ‘구취정보센터’의 웹사이트라 마치 오래된 도서관이 연상된다. ‘함께 나누는 이야기 마당’ 카테고리를 열면 그간 구취로 고통 받았던 사람들의 사례를 읽을 수 있다. 입 냄새 때문에 잘생긴 외모에 스펙이 있어도 이성을 못 만나는 사람부터 그저 직장을 가지고 있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안타까운 사연이 쌓여 있다. 현재 구취와 관련한 정보 교류는 네이버 인터넷 카페를 이용한다. 옛 사이트를 열어둔 이유는 구취 관련 자료가 많고 여전히 검색해서 들어오는 이용자가 있어서다. ‘구취정보센터’ 홈페이지는 애초에 기본에 충실하자는 생각으로 만들었다. 시간이 지나도 옛 모습 그대로 열어둘 계획이라고 그는 말한다.
“세계 곳곳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이 사이트를 찾아 들어옵니다. 심지어 먼 나라에서 저를 만나러 오죠. 제가 하는 일이요?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작은 의견이라도 나눠줍니다.”
사이트 내에 게재된 모든 정보는 운영자인 김두식 씨가 일일이 찾고 번역해 올린 자료들이다.
의학 관련 자료이다 보니 의학사전을 찾아가며 될 수 있는한 꼼꼼하게 작성했다. 김두식 씨는 구취로 고민이 많은 사람을 위해서 책임지고 자료를 선정하고 정리해왔다. 아주 잘된 번역이라고 자부하지는 않지만 수많은 사람이 보기 때문에 신중을 기했다. 전문적인 의학용어이기에 정확도도 신경 썼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외국인도 이 사이트에 방문하기 때문에 책임감이 크다고. 최대한 부끄럽지 않고 도움이 되는 자료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구취정보센터에는 국제입냄새연구학회(international Soceity for Breath Odor Research), 미국국립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과 미국국립의학도서관(National Library of Medicine) 자료들이 많이 번역돼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 구취 클리닉의 해롤드 카츠 박사의 ‘구취 바이블’과 ‘구취 칼럼’도 찾아 읽을 수 있다.
구취의 원인은 도대체 뭘까?
입 냄새의 주요 원인이 뭔가요?
입 냄새와 나쁜 입맛의 원인은 황화합물을 발생시키는 혐기성 박테리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박테리아는 서식 환경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는데 냄새와 고약한 맛을 느끼게 하는 휘발성 황화합물로 썩은 달걀 냄새가 난다. 이와 같은 박테리아는 단순히 혀의 표면을 긁어내는 것만으로는 없앨 수 없다. 이들 박테리아가 혐기성이라서 혀의 표면 아래 서식하기 때문이다.
혐기성 박테리아는 어디에 사나요?
혀 아래, 목구멍, 그리고 때때로 편도선에 서식한다. 혀의 표면에서는 살지 못한다. 왜냐하면 산소에 의해 박테리아가 죽기 때문이다. 따라서 혀를 긁어낼 경우 황화합물 일부만 제거된다. 이럴 경우 혀 아래 깊은 곳에 서식하는 박테리아에 의해 재생산된다.
악취를 발생시키는 편도결석이란?
편도선의 작은 구멍에 하얗고 노란색의 작은 덩어리가 끼어 있는 것을 발견하거나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상황을 경험하기도 하는데 바로 편도결석이다. 목 주위에서 생성된 황화합물과 목으로 흘러내리는 콧물이 결합해 만들어지고, 아주 심한 냄새를 유발한다.
모든 사람은 아침에 입 냄새가 난다?
자는 동안 사람의 뇌는 음식을 먹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침샘도 휴식에 들어간다. 이때 입안이 마르면서 황화합물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고약한 입 냄새를 맡게 되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일부 사람들의 경우는 아침에만 입 냄새가 나는 게 아니라 하루 종일 지속되기도 한다.
잇몸에서 피가 나면 입 냄새가 더 고약할까?
단순히 치실을 사용하거나 칫솔질할 때 나는 피라도 입 냄새를 발생시키는 박테리아에게 매우 훌륭한 먹이를 공급하는 셈이 된다. 혈세포는 완벽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이것은 즉시 휘발성 황화합물로 변환된다.
스트레스가 입 냄새와 관계가 있나요?
스트레스를 받게 되면 부교감신경 계통의 통제를 받는다. 스트레스의 첫 번째 반응은 구강건조로 나타난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입안이 건조해질수록 입 냄새는 더 심해진다.
*구취정보센터(mouthodor.co.kr)에 번역된 캘리포니아 구취 클리닉의 해롤드 카츠 박사(Dr. Harold Katz)의 저서 ‘구취 바이블(Bad Breath Bible)’의 일부 내용을 Q&A 형식으로 발췌 인용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 그는 매일 듣던 라디오도 꺼버린 채 적막만이 가득한 시간을 달렸다. 유일하게 작은 소음을 내는 것은 잡동사니가 담긴 상자뿐이었다. 불과 몇 시간 전 “그간 고생 많으셨습니다. 이제 쉬세요”라는 말과 함께 갑작스레 받게 된 퇴직 권고의 결과물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지?’, ‘더 잘 보여야 했나?’, ‘누구 탓이지?’ 온갖 질문을 해댔지만 속시원한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또 다른 질문이 떠올랐다.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경기도 화성의 한 아파트에서 만난 강석진(姜錫珍·63) 씨 이야기다.
“안 타본 해군함정이 거의 없어요.” 전직을 이야기하다 군함 이야기가 나오니 그의 얼굴이 환해진다. 우리나라 해군의 주력 구축함인 충무공이순신함부터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독도함, 안타깝게 뭍으로 올라오게 된 천안함까지 우리 해군의 함정 중 상당수는 그의 손을 거쳤다.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는 원래 방위산업체인 LIG넥스원에서 주로 해군함정의 레이더 관련 장비 개발을 담당했었다. 1980년 금성정밀공업(LIG넥스원의 전신)에 입사해서 2014년 정년퇴임했다. 이후 관계사로 이직했다가 2017년 말 퇴직권고를 받으면서 방산 장비와 작별을 고했다.
“적이 우리 함정을 추적하거나 공격하지 못하게 막는 전자전 장비를 만드는 일을 했어요. 장비 개발뿐만 아니라 제대로 작동하는지 시험하고 점검해야 했기 때문에 해군과의 협업이 필수였죠. 덕분에 많은 시간을 바다에서 보냈어요. 이제는 멀리서 안테나 모양만 봐도 어떤 배인지 맞힐 수 있는 정도가 됐죠. 한번은 첫 번째로 실전 배치된 장비 운용을 돕기 위해 함정에 올랐다가 ‘실전 상황’이 벌어져 혼비백산한 적도 있어요. 다행히 별일 아니었지만 완전무장한 군인 사이에서 사복 차림으로 난감했습니다.”
“일하는 것만으로 애국심이 생겼다”
방위산업체에서의 직장생활은 어땠을까? 그는 “지휘고하를 막론하고 일하다 보면 애국심이 절로 생긴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가족에게도 무슨 일을 하는지 말도 못했어요. 보안을 엄격하게 지켜야 했으니까요. 그렇게 살다 보니까 불편함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제약이 많고, 특별한 혜택은 없어도 국력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긍지를 갖고 평생을 살았어요. 개발을 위해 몇 주간 밤을 새기도 하고, 외국인 박사들과 머리를 맞대기도 했죠. 덕분에 우리 국방 기술은 이제 세계 수준에 올랐어요. 회사생활 마지막에 정년을 연장하면서까지 개발했던 육군의 디지털 통신망 관련 기술은 미군에도 없는 수준입니다. 우리 전투력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정년은 정해져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개발에 매달리던 삶이었다. 프로젝트 완성을 위해 이례적으로 정년이 연장되기까지 했다. 때문에 남들처럼 느긋하게 정년 준비를 할 틈이 없었다. 이런 상황은 이후 협력사에서의 갑작스런 퇴직 권고와 함께 그에게 독이 됐다.
“어느 날 도서관에서 관련 정보를 검색하다가 노사발전재단 경기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를 알게 됐고, 관련 교육을 받으면서 전기기술에 도전해봐야겠다고 결심했어요.”
보통의 퇴직자에게는 전기기능사 자격 취득을 권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평생을 전자회로와 씨름했던 그였기에 더 욕심을 내보기로 했다. 수원직업전문학교에서 전기기능사 수업을 듣고 나서 교실에 남아 상위 자격인 전기산업기사와 전기기사 준비를 독학으로 했다. 전기산업기사 이상의 자격을 취득하면 전기안전관리자로 공동주택, 즉 아파트 관리실에 취업할 길이 열리기 때문. 담당 강사도 강의실을 비워주고 책까지 빌려주며 그를 응원했다.
그리고 6개월 만에 전기산업기사 자격을 취득했다. 전기기사는 필기는 붙었지만 실기에서 떨어졌다. 그는 “전기기사 실기는 문제 파악도 제대로 안 되더라”고 말했지만, 환갑을 넘긴 나이에 젊은이들도 어려워하는 전기산업기사 자격을 취득한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었다. 산업인력관리공단 자료에 따르면, 2017년 전기산업기사 응시자 2만9428명 중 실기까지 합격한 인원은 14.7%인 4334명에 불과했다.
일반 회사와 다른 아파트 관리 문화
자격증이 그의 취업에 전가의 보도 역할을 했을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아파트 관리 업계의 독특한 문화에 대해 설명했다.
“아파트 관리 분야는 일반 직장과는 다른 진입장벽이 있어요. 경력자를 우선 채용하는 문화가 있습니다. 때문에 신입은 일자리를 얻기가 쉽지 않아요. 저는 처음에 운이 좋았어요. 경력자만 뽑는다는데 무작정 이력서를 넣었고, 면접 때 저를 잘 봐주신 소장님 때문에 직장을 얻을 수 있었거든요. 그러나 첫 아파트에서는 격일로 24시간 근무하는 것이 적응이 안 돼서 퇴사했고, 두 번째 아파트를 거쳐 지금 직장은 세 번째 아파트입니다. 이제는 이 일이 적응이 돼서 격일 근무도 문제없어요.”
일반인들은 잘 모르겠지만 아파트 관리는 크게 3개 직군으로 나뉜다. 관리, 경비, 청소가 그것. 아무래도 자격증을 필요로 하는 관리 직군이 대우도 가장 좋다. 관리 분야는 소방, 전기, 난방 3개 분야를 중심으로 모집한다. 아파트 관리사무소 안에는 세대 규모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소장, 과장, 대리, 반장 등의 직급이 존재하고, 관리 분야 외에 회계 등 행정직 근무자도 있다.
업무 체계는 일반 회사와 비슷하지만 정체된 조직이다 보니 승진 기회가 많지 않다. 때문에 경력을 쌓아 이직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아파트 관리 업계의 승진 문화가 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력서에 잦은 이직 기록이 있는 경우 부정적으로 보는 일반 업계와 달리 아파트 관리 분야에서는 경력으로 인정해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고.
아파트마다 주민 요구 경향 달라
아파트라는 직장의 소비자는 주민이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주민 갑질 논란’의 대상은 주로 경비직이지만 관리직 역시 자유롭진 않다. 전구를 갈아달라는 요구부터 설비 수리까지 다양한 요구사항이 발생한다.
“몇 군데의 아파트를 경험해보니까 주민이 젊고 평수가 작을수록 요구사항이 많고, 높은 서비스 수준을 요구해요. 또 인터넷 카페를 통해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경우가 많아서 더 신경이 쓰입니다. 나이가 많거나 고급 아파트 주민은 아파트 관리 인력보다 상대적으로 기술 수준이 높은 전문가를 선호해요. 집을 아끼려는 경향이 강하거든요. 그래도 저희가 처리한 업무에 대해 감사인사도 건네고 잘 대해주셔서 지금 근무하는 아파트에서는 보람을 느끼며 일하고 있어요. 처음엔 친구들에게 아파트에서 일한다고 말하기 쑥스러웠지만 지금은 편하게 이야기해요. 되레 놀고 있는 친구들이 어떻게 하면 일할 수 있냐고 물을 정도예요.”
그는 또 하나의 목표가 생겼다. 자격증을 따고 새로운 업계를 접하면서 눈이 트인 것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또 다른 길이 보였다. 경력을 쌓고 소방설비기사 자격증을 추가로 취득해 시설관리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것이다. 물론 이제 업계에 막 발을 들여놓은 ‘초짜’인 그에게 쉬운 목표는 아니다.
“제 나이쯤 되면 목표가 있다는 것 이 중요해요. 그래야 공부도 하고, 체력 보충을 위해 운동도 하고, 달성을 위한 다양한 일도 하게 되니까요. 제 목표가 언제 이뤄질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끝까지 도전을 멈추지 않을 겁니다.”
경력이 끊긴 중장년 여성의 재취업은 남성보다 훨씬 어렵다. 아니 어쩌면 ‘어렵다’는 표현보다 ‘서럽다’는 단어가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대구에서 만난 서기덕(徐基㥁·51) 씨도 그랬다. 수백 장의 이력서 제출과 수십 번의 면접 그리고 계속된 실망스러운 결과. 그래도 서 씨는 포기하지 않았다. 어떤 기회도 놓치지 않고 최고의 결과를 만들어내겠다는 결심을 했고, 이런 마음가짐은 주변까지 조금씩 변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재취업을 위해 낸 입사지원서는 100장이 넘을 거예요. 겨우겨우 면접까지 간 것은 세어보니 17번이더라고요. 몇 번 떨어져 보면 면접 대기실에 앉아만 있어도 대강 감이 와요. 특히 나란히 앉아 있는 젊은 친구들을 보면 이번엔 어렵겠다는 예상이 들기도 하죠. 그렇다고 억울하다는 생각은 안 해요. 오히려 젊은이들 일자리를 뺏는 건 아닌가 하는 마음도 있으니까요. 취업을 위해 동분서주하는 우리 아이들 생각이 나더라고요.”
시어머니 뇌종양 수발 위해 퇴사
서 씨는 원래 대구의 한 지역 케이블방송사에서 12년 넘게 일한 커리어 우먼이었다. 방송 프로그램 제작을 지원하고, 지역 주민과의 꾸준한 교류를 유지하는 것이 그녀의 역할이었다. 자유학기제 수업을 위해 기자, PD, 캐스터 등의 직업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했고 방송국 부설 문화센터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강사 관리도 했다.
그러다 사랑하는 직장을 떠나야 했다. 2015년 시어머니의 뇌종양 판정 때문이었다. 일찍 남편을 여의고 평생 자식만 바라보며 살아온 시어머니를 모르는 척할 수 없었다. 병수발 기간이 한 달이 될지 수년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곁에서 모시는 것이 도리라 생각했다.
“돌아가시기 전날 씻겨드리는데 ‘고맙니요’ 하시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마지막 감사인사였던 것 같아요. 어른을 제대로 모시고 싶어도 가정 형편상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데, 그렇게 보내드릴 수 있었던 것 자체가 감사한 일 같아요.”
하지만 다시 취업전선에 나섰을 때의 현실은 냉혹했다. 다행히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어 국민연금공단의 복지플래너로 일할 수 있었지만, 기간제 일자리라 업무기한이 금방 다가왔다. 그러고 나서 다시 수십 장의 이력서, 자기소개서와의 싸움을 해야 했다.
“사실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사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죠. 대부분의 일자리가 10년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기존 구성원들과 일해야 하는 곳들뿐이었으니까요.”
서 씨가 힘을 낼 수 있었던 데에는 노사발전재단의 응원이 있었다. 지난 6월 노사발전재단의 대구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진행한 재도약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 “현실을 직시하고,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재도약 프로그램 참여 전까지 계속 면접에서 미끄러져 기운이 빠진 상태였으니까요. 프로그램을 통해 나의 현재 위치가 어디인지, 내가 지원할 수 있는 분야가 얼마나 협소한지 깨닫게 됐어요. 또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제대로 쓸 수 있도록 상담을 받은 것도 도움이 됐죠.”
서 씨가 구직 활동을 통해 얻은 새 직장에 출근한 것은 지난 7월 2일 이다. 그야말로 17전 18기였다. 새로운 일터는 대구 동구에 위치한 아양아트센터. 이전 직장에서 획득해놓은 평생교육사 자격이 도움이 됐다. 그녀는 센터 시설 중 하나인 문화센터 안내데스크에서 지역 주민을 대상으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접수하는 일을 하고 있다.
“내 전문 분야에서의 새 출발 기뻐”
아양아트센터는 대구에서 손꼽히는 대표적 문화시설 중 하나다. 대구 동구청이 출연해 설립된 곳으로 문화센터와 스포츠센터, 도서관, 전시장, 공연장 등을 갖춘 복합문화 시설이다. 스포츠센터 이용 인원은 월 3000명에 달하고, 문화센터 수강생도 1500명이 넘는다. 한 학기에 진행되는 강좌는 180개, 강사만 70명 정도 된다.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이전 직장에서 문화센터 운영 팀장으로 일하다 안내데스크 근무를 시작한 것은 일종의 ‘백의종군’이라 볼 수도 있다. 혹시 체면이나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냐 물었더니 “전혀 그렇지 않고, 오히려 좋다”고 단언한다.
“당연히 좋죠. 그동안 하지 않았던 낯선 일이 아니고 오래 해왔기 때문에 적응도 빨리 할 수 있었고, 그만큼 회사에 보탬이 될 수 있으니까요. 모르는 것이 많아 계속 물어가며 일을 배워야 한다면 부끄럽고 힘들었겠지요. 예전에 알고 지낸 강사님과의 재회도 즐거워요. 요즘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이잖아요. 재도약 프로그램을 통해 느낀 것 중 하나가 나를 내려놓고 작은 것에 기뻐하는 겸손한 마음가짐이 중요하다는 것이었어요. 맡은 역할을 성실하게 수행했을 때의 성취감은 보람이 됩니다.”
어디로 귀촌할까, 오랜 궁리 없이 지리산을 대번에 꾹 점찍었다. 지리산이 좋아 지리산 자락에 자리를 잡았단다. 젊은 시절에 수시로 오르내렸던 산이다. 귀촌 행보는 수학처럼 치밀하고 탑을 쌓듯 공들여 더뎠으나, 마음은 설레어 일찌감치 지리산으로 흘러갔던가보다. 지금, 정부흥(67) 씨의 산중 살림은 순조로워 잡티나 잡념이 없다. 인생의 절정에 도달했다는 게 아닌가.
처음엔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흔히 들었다지. 정부흥 씨는 임야 1만8000평을 사들여 일을 개시했다. 이 거창한 행세에 쓴소리들이 난무했던 모양이다. 외지고 으슥하고 가파른 산 덩어리여서다. 긴 고행이 빤히 보여서다. 그러나 기꺼이 자청한 고행은 고행이 아니라 순행(順行)이다. 절박한 눈으로 뒤를 돌아본 정 씨는 도시에서의 지난 생이 오히려 고행에 가까웠음을 알아차렸던 것 같다. 어라? 나를 목줄 채워 끌고 다닌 도시를 벗어나겠다는 데 왜들 난리람! 아마도 그쯤의 생각과 각오가 머릿속을 굴렀을 게다.
정 씨는 전남대학교 자원공학과를 나온 공학 박사다.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있는 한국지질자원연구원에서 책임연구원으로 일하다 2012년에 퇴직했다. 임야는 은퇴 이전에 이미 사뒀다. 수시로 터를 드나들며 정을 붙였다. 귀촌 마스터플랜을 근사하게 준비하고서 임야에 길을 닦고, 기반공사를 하고, 임시 거처를 지었다. 퇴직 후에는 완전한 이주를 하고 본집을 거하게 지었다. 크고 너른, 반듯하고 웅장한 그의 거처는 이제 숲속 대궐에 가깝다. 부부 단둘이 살기엔 너무 방대한 규모로 보이지만 정 씨의 꿈과 이상이 실린 공간이다. 그의 수완과 통과 너름새가 비치는 구색이다.
터에 들어선 품목들이 크고 많으니 해온 일, 헤쳐나온 시련이 산더미였을 것이다. 신역도 신산(辛酸)도 자심했을 테지. 그러나 그는 일에 신명을 냈더란다. 오지게 터진 일복에 심취할 절호의 찬스를 만났다는 투로. 그렇다면 그는 근력 짱짱한 장한(壯漢)? 실은 정반대다. 지병을 달고 살아왔으니 말이다. 50대 후반쯤 당뇨병 여파로 들이친 풍을 맞아 반신마비에 빠졌고, 강철 같은 의지로 마비에서 탈출했으나 여전한 당뇨는 신중히 관리하며 지내왔다. 지리산으로 가자, 그게 살길이다! 그는 그렇게 부르짖으며 산중으로 귀촌했다. 몸이 망가졌으니 흐느껴 나온 생각들이 많았을 게다. 마음의 비장한 물결에 젖어 한탄을 거두고 속으로 다진 것도 많았을 테지. 그럴 즈음 지리산이 그를 호명했고, 그는 득달같이 응했던 모양이다. 이 불운하고도 야무진 사람의 눈은 단춧구멍처럼 간신히 째졌을 뿐이지만, 얼굴엔 자주 홍소(哄笑)가 출렁거린다.
“직장생활이라는 게 스트레스 많은 정신노동의 연속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두주불사가 잦았어요. 결국 몸을 망쳐 당뇨와 뇌졸중이 겹치는 지경까지 갔던 겁니다. 인생을 통틀어 가장 극심한 시련이었죠. 5년여에 걸친 재활치료로 다행히 반신불수에서 벗어날 수 있었지만, 이대로 계속 도시에서 살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어요. 귀촌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어요.”
“귀촌이, 산골생활이 건강을 호전시킨 셈인가요? 귀촌을 통해 중병을 고쳤다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두 가지 요인에 힘입어 건강을 도모할 수 있었어요. 하나는 아내의 헌신적인 조력입니다. 까다로운 식이요법을 아내 덕분에 철저하게 행해왔으니까. 생명의 은인이랄까, 그런 아내에게 제가 꼼짝을 못합니다.(웃음) 또 하나의 요인은 귀촌을 해서 만난 좋은 자연환경이에요. 숲길을 날마다 걸었어요. 배수진을 치고, 즉 목숨을 걸고, 운동 아니면 죽음이다, 라는 각오로 줄기차게 걸었죠. 요즘도 마찬가지예요. 아직 당뇨병이 있지만 내 몸 안에 들어온 평생 친구라 생각하며 관리하는 중이에요.”
“이 너른 터전과 다수의 건조물, 숲과 텃밭, 이런 것들을 어떻게 능히 짓고 가꾸고 관리해왔죠? 온전치 않은 건강으로 말이죠.”
“젊음과 자금력, 이 둘의 추진력이었어요.”
“인생의 하오에 젊음이라니요?”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이 산골에 들어온 초기엔 엄청 젊었던 것 같아요. 하늘을 잡고 도리뱅뱅이질을 쳤죠. 무모하긴 했어요. 그거 아세요? 저희 같은 연구원들의 특질이 뭐냐면, 항상 도전한다는 거.”
끊이지 않았던 사건 사고
그가 도전한 종목은 여럿이다. 귀촌의 성공 모델을 본때 있게 실현하겠다는 것, 몸을 아끼기보다 닳도록 써 건강을 살리겠다는 것, 자연과 호형호제하며 마음의 평화를 누리겠다는 것, 오누이처럼 부부가 다정하게 잘 늙어 여생을 동행하겠다는 것. 가련하고 허무한 게 인생사이지만 선한 지향이 뚜렷한 사람의 발길엔 정채(精彩)가 서린다. 안간힘을 다하면 갈 것은 가고 올 것은 온다. 그는 열렬한 활보로 귀촌의 나날들에 생기를 부여했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칠 수 없다. 정 씨는 거의 미친 듯이 일에 몰두해왔다. 울울한 숲을 파헤치는 토목공사를 주도했다. 귀촌을 위해 미리 배워둔 목공기술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목공실을 만들어 수많은 목재를 손수 자르고 깎고 다듬었다. 3차원 건축설계 소프트웨어를 활용, 60평과 40평짜리 두 채의 집 설계도 직접 해치웠다. 건축 공사도 업자에게 도급을 주지 않고 직영했다. 이 많은 일들을 해내는 중에 사고도 많았다지. 요상하게 줄줄이 이어진 사건기록을 들어보시라.
“귀촌 초기, 사건 사고들이 끊이질 않았어요. 한번은 석축을 쌓다가 바윗돌에 깔렸는데, 발목뼈가 여러 조각으로 부서집디다. 덕분에 반년 동안 깁스를 했고, 1년 반 정도 재활치료를 받았죠. 포클레인 작업 중 전복사고를 당해 부상을 입기도 했어요. 예초기로 풀을 베다 벌집을 건드려 벌떼의 집중 공격을 당하기도 했고. 그때마다 응급실에 실려가 누울 수밖에 없었고요. 하하핫! 아내에게도 역시 사고가 많았어요. 집사람이 소형 덤프트럭을 몰아요. 어느 날 언덕에서 트럭이 뒤집혀 굴렀어요. 해충과 독충에게 시달리는 건 소소한 일상이었죠. 아내는 독사에게도 물렸어요. 응급실에 달려가 해독주사를 맞고 위험을 면했죠.”
“아이쿠, 괜히 산골에 왔어, 돌아가야겠어, 그런 회의는 없었나요?”
“모든 사고들이 알고 보면 다 인재(人災)였어요. 숙달 과정으로, 필수적인 시행착오로 여겼어요. 요령과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기회였기에 나쁜 것만도 아니었어요. 회의나 후회는 조금치도 없었고요. 산골살이는 오래 묵은 꿈이었으니까.”
“대부분의 아내들은 귀촌에 흥미를 못 느껴요. 고생길이 훤히 보여서죠. 잘난 당신이나 혼자 내려가소서! 그런 소리 나오기 십상이죠.”
“산골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외로움을 즐길 수 있는 정서가 기본적으로 필요하겠죠. 조용한 자연 속에서 과연 즐겁게 살아갈 소양이 있는가를 따져보는 게 중요하다는 거. 저나 아내는 그런 면에서 시골과 적성이 맞았어요. 그러나 아내가 귀촌을 선뜻 동의하진 않았어요. 지역 선정에 반영할 네 가지 조건을 겁디다.”
“어떤?”
“대학병원 수준의 병원이 15분 안짝 거리에 있는 곳, 평소 늘 해왔던 요가를 계속할 수 있는 요가원이 있는 곳, 수필가로서 독서를 좋아하는 아내가 쉽게 찾아갈 도서관이 있는 곳, 항상 온천욕을 할 수 있는 곳. 이렇게 네 가지였어요. 이곳 구례군은 갖가지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습니다. 아내의 요구조건을 충분히 충족할 수 있는 지역이죠.
저절로 생긴 수입
마당에 서서 바라보는 경관이 후련하고 수려하다. 노고단을 중심으로 어깨를 겯고 일렁이는 능선 마루로 파란 하늘 자락이 겹쳐진다. 빼어난 뷰! 동향으로 앉은 집이니 새벽이면 침실 창으로 햇살이 두근대며 들이칠 게다. 집 뒤 숲엔 편백나무 수림이 조성돼 있고, 숲 사이로는 구불구불 휘어지는 산책로와 정자를 꾸며뒀다. 뭐 하나 빈틈도 결함도 없어 보이는 입지이자 장원(莊園)이자 저택이다. 이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정 씨는 서울에 있었던 아파트 두 채를 처분했다.
이제는 수고롭게 돈 버는 일은 작별이야. 부부는 그렇게 합의하고 내려왔다. 그러나 돈이 저절로 들어오는 일이 생겼다. 뜻밖의 수익이란다.
“저희 임야 안에 고로쇠나무들이 다수 있어요. 봄철이면 수액을 받는데, 이걸 사겠다는 사람이 많아 약간의 노동이 필요한 채취 작업을 해 연간 1000만 원쯤 수익을 올립니다. 비워두었던 아래채 2층집에서도 수입이 발생할 걸 미처 몰랐어요. 1층은 월세를 주고, 2층은 민박 손님을 받았더니 해마다 1000만 원 정도의 돈이 들어오더라고요. 가끔 귀촌인 상대의 목공 강의를 통해서도 약간의 강사료가 들어옵니다. 이렇게 모아지는 자금은 해외여행 경비로 씁니다.”
이래저래 이젠 순풍에 미끄러지는 돛배처럼 순항이다. 지루하진 않을까? 그렇잖아도 함께 오래 살아온 부부가 새삼 24시간을 늘 같이 지내야만 한다는 건 끔찍한 일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귀차니즘’이 풍선처럼 부푸는 건 아닐까?
“제가 집사람에게 독불장군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아요. 간간이 마찰이 없을 리 없죠. 대판 다투고 난 뒤 아내가 잠시 가출을 하기도 했어요.(웃음)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름의 독립적인 생활방식을 찾게 됐어요. 오전엔 같이 텃밭이나 마당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함께 산책을 하지만 저녁식사 후엔 각자의 공간으로 들어가 각자의 일을 합니다. 아내는 1층에서, 저는 2층에서.”
“귀촌인들은 흔히 조언해요. 가급적 집을 작게 지어라! 작은 집이라야 유지 관리가 쉽다는 얘기죠. 선생께서 집을 크게 지은 이유는 뭐죠?”
“내 손으로 한 번은 집다운 집을 제대로 짓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어요. 자손들이 찾아오면 맘껏 쉴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고도 싶었고. 하지만 바람직한 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뒤늦게 들곤 해요. 우리 둘 가운데 하나만 남을 날이 머잖아 찾아올 텐데, 그땐 혼자서 이 너른 집과 터를 어떻게 간수할꼬, 그런 염려도 생기고.”
“산골살이의 즐거움은 어디에 있죠?”
“계절마다 달마다 날마다 다변하는 자연을 느끼며 배우며 사는 즐거움이 으뜸입니다. 몸이 녹아나는 혹독한 노동의 날들도 즐거웠어요. 건강을 유지할 에너지를 얻었으니까. 뭔가 떳떳하다는, 죄짓지 않고 산다는 기분 역시 노동을 통해 실감했어요. 노동에 휴식을 가미한 생활방식을 취하면서는 만족감이 더 커지기 시작했어요. 드디어 인생의 정점에 올라섰다는 행복감이 커요. 그러나 모자란 사람일 뿐이죠. 자연은 저토록 온전한데 나는 틀려먹었구나! 그런 생각을 자주 합니다. 불가(佛家)에서 가르치는 ‘공(空)’을 마음속으로 늘 되뇌이고…. 한 마리 배추벌레와 내가 다르지 않다는 걸 또한 기억하려 하고….”
세상의 탐욕과 광기가 침범 못할 이 고요한 산중. 몸 낮춰 마음을 평온으로 채운다면 고요마저 열락(悅樂)이겠지.
정부흥 씨가 주는 귀촌 Tip
•사전에 시골생활을 체험하자. 한두 달로는 부족하다. 최소한 1년 정도는 월세 집이라도 얻어 살며 물정을 파악하는 게 좋다.
•집을 지을 경우 사전에 집짓기 교육을 받아두는 게 좋다. 건축은 업자에게 맡기지 말고 직영을 하자. 건축비를 크게 절감할 수 있다. 대신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귀촌생활에 텃밭은 필수다. 그래야 적당한 노동의 즐거움을 누리고, 깨끗한 먹거리를 얻을 수 있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노후를 내가 태어날 곳 혹은 평생 살았던 고향에서 봉사하며 보내는 것은 아마 많은 이가 꿈꾸는 여생의 모습일 것이다. 그 장소가 경탄할 만한 아름다운 곳이라면 금상첨화이리라. 여기 전국의 시니어가 부러워할 만한 직업을 갖고 고향을 위해 애쓰는 이들이 있다. 다소 낯선 명칭인 ‘오름매니저’라고 불리는 사람들이다.
오름은 형성 방식에 따라 세분화해 구분하기도 하지만 간단히 정의하면 제주도 한라산을 중심으로 산록에서 해안까지 널리 분포되어 있는 작은 화산체를 의미한다. 모양에 따라 넒은 평지 같기도 하고, 작은 언덕이나 산 같기도 하지만, 제주도민들은 이것들을 오름이라 부른다. 화산체라고 이야기하면 무언가 특별하고 진귀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제주에는 크고 작은 오름이 368개나 존재한다. 제주도민들이 오름을 생활 터전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이유다.
제주에 오름만 368개
문제는 이런 오름이 제주 도처에 존재하고 관광자원으로서 많은 역할을 하고 있지만, 관리할 수 있는 인력이 마땅치 않아 대부분 방치되고 있다는 것.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선 것이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다.
JDC 측은 지난해 말 노사발전재단 제주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와 함께 신중년의 사회 경험과 재능을 일자리로 잇는 ‘이음 일자리 사업’을 위한 새로운 직종을 찾고 있었다. 도내의 중장년이 제주도 발전에 기여하면서 수익을 올릴 수 있는 일자리 창출에 나섰던 것. JDC 관계자는 “그러다 오름을 보호하기 위해 인력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어 검토하게 됐다”고 설명한다. 이음 일자리 사업을 통해 탄생한 직종은 오름매니저를 비롯해 관광지를 중심으로 콘서트를 펼치는 버스킹 공연단, 주요 도서관에서 활동하는 사서, 푸드메신저, 일자리 지원단 등의 직종도 선발됐다. 이 과정을 통해 2월에 발대식이 이루어졌고 오름매니저 160명을 포함해 총 250명의 중장년이 새 일터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JDC 임석환 주임은 “제주 전역에 퍼져 있는 오름 중 관광객의 방문이 잦은 곳을 중심으로 관리 방안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고안된 직종이 바로 오름매니저”라고 설명하면서 “관광자원을 개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니라 제주도가 갖고 있는 천혜의 자원인 오름을 아끼고 보존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말했다.
또 숲해설사나 문화관광해설사처럼 오름의 역사적 배경이나 오름의 자연적 특징을 설명해줄 인력이 요원했다. 오름을 찾는 관광객은 해마다 증가하는데, 여행의 재미를 더해줄 스토리 텔링도 부족했다. 이로 인해 오름매니저에게 주어진 역할은 크게 두 가지로 압축됐다. 오름의 자연환경을 보존하고 역사적, 자연적 배경을 설명하는 역할이 그것이다.
환경보호와 해설이 주임무
오름매니저가 되기 위해선 두 가지 조건만 충족하면 된다. 만 50세에서 70세의 나이에, 제주도에 거주 중인 주민이면 된다. 지원자들은 50대 후반에서 60대 초반이 가장 많으며 선발된 인원 중 최고령자는 만 70세를 꽉 채운 주민이란다. 이렇게 올 초 선발된 1기 오름매니저들은 2주간의 교육을 받았다. 교육은 오름 내 쓰레기 수거 등 환경관리를 위한 실무적인 것부터, 진드기 감염이나 안전사고 예방을 위한 교육, 오름의 역사적 배경 소개까지 다양하게 이뤄졌다.
한 오름매니저는 “아무래도 고령의 참가자가 많다 보니 오름 관리 과정에서 사고로 인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방지하는 교육이 많았다”고 말하면서 “평생 제주에 살면서도 몰랐던 오름에 대한 정보를 접할 수 있었던 좋은 시간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들 오름매니저는 3월부터 8월까지 총 6개월간 18개 오름을 관리했다. 새별오름이나 거문오름, 송악산 등 관광객이 많이 찾는 유명 오름을 중심으로 오름매니저들이 현장을 누볐다. 단순히 현장관리만 한 것이 아니라 관광객 대상 캠페인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올여름 폭염이 한반도를 강타하면서 오름매니저들도 비상이 걸렸다. 더위가 이어져도 관광객들은 찾아오지만 중장년의 건강에 폭염은 치명적이기 때문이었다. 오름매니저가 2인 1조로 근무하는 이유에는 이러한 고려도 있다.
오름매니저의 근무 방식은 2인 1조로 배정된 오름에서 정해진 시간 동안 근무하는 형태다. 오름매니저를 위한 유니폼과 명함도 지급되고, 겨울을 대비한 추가 유니폼도 준비 중이다. 근무시간은 매주 12시간에서 14시간 정도다. 시급으로 따지면 시간당 약 9500원을 받는다. 월급으로 계산하면 매달 약 45만 원이다. 업무강도 등을 고려하면 적은 돈은 아니라고 오름매니저들은 말한다.
1차사업 진행에 대한 정확한 결과 보고서는 아직 작성 중이지만, 오름매니저에 대한 기관과 참여자의 평가는 전체적으로 긍정적이다. 오름매니저들이 파견된 오름의 경우 자연환경이 눈에 띄게 개선됐다는 의견이 많다.
참여자 96%가 활동에 만족
JDC는 1차사업 종료 후 6개월간 참여했던 오름매니저를 대상으로 만족도를 조사했다. 전체 인원 중 96%는 “활동에 만족한다”고 답했으며, 99.6%가 “2차사업에 참여하고 싶다”는 희망의 뜻을 밝혔다.
JDC는 9월부터 시작되는 2차사업을 위해 추가 오름매니저 선발을 진행했다. 9월 12일 마감된 추가 오름매니저 선발에는 29명을 뽑는데 127명이 지원했다. 무려 4.4대 1의 경쟁률. 1차 때는 오름매니저라는 직종이 생소해 경쟁이 심하지 않았지만, 사업 진행을 통해 중장년에게 좋은 일자리라는 입소문이 나면서 인원이 몰렸다. “매일 산에 오르니 건강에도 좋다”는 소문까지 났다.
추가 인원이 합류한 2차사업에는 총 189명의 오름매니저가 활동하게 되며, 관리 오름도 2개소가 늘어 총 20개 오름에서 활약할 예정이다. 인원 확대와 함께 제공 서비스 확충도 고려 중이다. 현재는 관광객이 오름매니저 해설을 듣고 싶어도 사전예약이 불가능한 상태여서, 이 부분의 개선도 준비 중이라고 JDC 관계자는 귀띔한다.
오름매니저 활동에 참가자들이 만족하는 데에는 일자리, 보람과 함께 제주도민의 정서 속에서 오름이 차지하는 의미도 간과할 수 없다. 제주 토박이라 자처했던 한 오름매니저는 “제주도 사람에게 오름은 단순한 관광지가 아니라 삶 속에서 늘 함께했던 터전”이라고 소개하면서 “인생에서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포함한 일상을 오름 위에서 해왔기 때문에 오름을 지키고 보살핀다는 것은 단순한 일자리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물론 오름매니저의 활동이 100%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일부 참여자들은 관광지에서 오름매니저들의 대기 공간이 없어 어려움이 있고, 오름매니저들이 서로 의견을 교환하고 문제점을 논의할 수 있는 커뮤니티 형성이 필요하다는 의견을 내기도 했다.
오름매니저의 활동은 제도적으로도 상징성을 갖는다. 중장년 일자리를 마련하는 데 있어 지자체의 자연환경을 살리면서, 관광자원을 활성화하는 모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참가자들은 “단순한 청소나 관리 역할이었다면 보람이 없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적절한 교육을 통해 지역 정보까지 제공할 수 있는 역할까지 부여함으로써 참가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고, 오름매니저에게 보람과 일자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게 한 셈이다. 국내 전체 인구의 14%에 육박하는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 후 취업 시장으로 쏟아져 나오면서 일자리 마련을 위한 정부와 지자체가 골머리를 썩고 있는 지금, 오름매니저가 제시하는 긍정적인 효과는 참고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
“안 된단 말이야. 데구루루… 너무 아팠어요.” “어디 보자. 우리 채소들이 얼마나 잘 자랐나. 허허, 녀석들 예쁘구나!”
목을 쭉 빼고, 깍지 낀 손가락 위에 턱을 괴고, 고개를 갸우뚱. 점점 빠져든다. 입가에 웃음이 배는 건 어쩔 수 없다. 입담에 알록달록 교구와 손 유희가 어우러지니 잠시 잊고 있었던 동심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세대와 세대를 잇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프로그램. 지금은 시니어의 자부심뿐만 아니라 어린이 교육에 한 걸음 다가가는 역할도 제대로 하고 있는 중이다.
할머니 무릎에 앉아 동화를 들어요
5년째 이어오고 있는 구로구 평생학습관 프로그램 ‘어르신 동화구연 교실’은 해를 거듭할수록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관내는 물론 다른 지역 시니어의 문의가 쇄도해 까다롭지 않다지만 작은 오디션(?) 과정을 거치는 일도 있다. 올 초 모집 당시 예상 수강 인원을 훨씬 웃도는 인원이 원서접수를 했다고 구로구청 교육지원과 평생학습팀 김은아 주무관은 말했다.
“지난해보다 10명을 늘렸는데도 모든 지원자를 수용하지 못했습니다. 지원자 목록을 만들어서 취소자가 나오면 신규 신청을 받았어요. 이때 전화상담이 중요해요. 동화구연을 해보셨는지, 자원봉사에 열의가 있으신지, 동화구연활동을 할 시간은 있는지 물어봅니다. 오셔서 신청하시는 분들은 책도 읽어보게 하고요.”
구로구 어르신 동화구연이 인기 있는 이유는 체계적으로 안정됐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현장에 나가기 때문이다.
“현재 35명의 시니어가 동화구연 프로그램에 참여하시는데 2인 1조로 17개 기관에 가서 활동하고 있어요. 이야기는 각자가 각색해서 구연하십니다.”
한 달 격주로 평생학습관에 와서 동화구연 학습을 받은 후, 격주로 구로구의 도서관과 복지관, 어린이집 등에 방문해서 어린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올해는 동화구연을 배우는 시니어의 요구에 따라 교육과 활동시간을 늘렸다.
“상·하반기 각각 6번씩 12번 강좌를 했습니다. 매번 강좌가 끝날 때마다 간담회를 했는데 좀 더 시간을 늘렸으면 하셔서 2회 늘렸습니다. 다들 너무 잘하시고 열성도 대단하십니다.”
동화구연, 세대 간 소통의 고리가 되다
동화구연은 알다시피 동화를 사람들 앞에서 재미있게 읽어주는 행위다. 이때 그냥 읽어주면 재미없다. 동화 내용에 어울리는 다양한 손가락 인형에 부직포 등을 이용한 교구 등을 사용한다. 그거만 있으면 다 된 걸까? 아니다. 목소리 연기 또한 필요하다. 일인극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동화구연을 하기 위해서는 갖출 것이 많고 알아야 할 것도 많다. 그렇기 때문에 교구를 제작하고 새로운 방법을 배우고 실력을 쌓는 일이 중요하다. 특히 동화구연 관련 자격증이 많이 생겨나고 시니어 대상 동화구연대회도 종종 열리는 것은 동화구연이 은퇴 후 시니어 세대의 재능기부 활동으로 관심받고 있기 때문이다.
“60세 이상을 대상으로 한 평생교육 프로그램으로 시작됐습니다. 시니어가 구민으로서 동화구연을 통해 자기계발도 하고 자원봉사도 하면 적지만 활동비도 드립니다. 일자리라고 하기는 그렇지만 어린이 입장에서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소통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동화구연활동은 시니어의 사회 참여뿐만 아니라 세대 간 소통에도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5년 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동화구연 전문가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 손에서 나온 교구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교구 창작과 함께 동화 창작도 한다. 취재를 갔던 날은 하반기 수업 첫날. 손수 만든 전문가급 교재를 들고 나와 이야기하는 시니어의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시니어 대부분이 동화구연 자격증은 기본이고 대회에 나가 많은 상을 탔다.
“무엇이든지 사업 초기에는 잘되기를 바라면서도 걱정이 되잖아요. 해를 거듭할수록 이 사업이 좋은 프로그램이라는 걸 점점 더 깨닫고 있습니다. 바라는 것이 있다면 다른 구에도 어르신 동화구연 프로그램이 생겼으면 하는 것이죠. 구내 프로그램이다 보니 구민먼저 경력자 우선이거든요.”
김 주무관은 앞으로 워크숍과 동화구연 기초반 신설에 대해 깊이 고민할 것이라고 말했다.
“늘어나는 관심에 보답하고 더 많은 곳에 찾아가 자신의 장기를 펼치며 소통하는 시니어가 구연동화 프로그램을 통해 많이 생겨나기를 기대합니다.”
mini interview
동화구연 선생님입니다
5년 전 이 강좌가 개설됐을 때 바로 시작했어요. 느티나무 은빛극단에서 연극을 하고 있는데 단원들과 함께 와서 동화구연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회장직을 맡고 있고요. 이곳에 와서 교구 제작이랑 동화구연 방법 등을 배워서 구로구 내 복지관이나 도서관에 가서 아이들에게 동화를 들려주고 있어요. 동화구연 자격증도 두 개 땄고요. 나이 먹고 집 안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손주들한테 하는 거처럼 하니까 아이들도 많이 따릅니다. 동화구연이 끝나면 “가지 마세요” 하고 매달리기도 해요. “언제 또 오냐”며 묻고 또 물어요. 교구 제작하고 연습하고 그러면 가끔 내 나이를 잊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그냥 할머니라고 못 부르게 합니다. 동화구연 선생님으로 저를 소개합니다.
손주들 교육에도 제가 한몫합니다
저도 동화구연한 지 5년 됐습니다. 딸아이 가족과 함께 사는데 손주가 열 살, 아홉 살, 다섯 살 셋입니다. 아이들 어렸을 때부터 책을 읽어줬는데 마침 동화구연을 배울 수 있는 곳이 생겨서 저도 들어왔습니다. 아이들과 교감하는 거도 좋고 삶의 활력소도 됩니다. 오늘처럼 교육이 있는 날 집에 돌아가면 손자들이 소파에 쫙 앉습니다. 책 읽어 달라는 거죠. 우리 큰손자가 성격이 조금 소극적이에요. 그런데 작년 학예발표회 때 자기가 손을 들고 구연동화를 한다고 했대요. 올해는 학교에서 인형극을 하는데 읽기 오디션을 봤답니다. 당당히 5명에 뽑혔대요. 요즘도 아침에 30분에서 40분씩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데 그 효과가 있었던 거겠죠? 책은 아이들 수준보다 좀 높여서 선택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아이들이 그 책을 읽고 있더라고요. 제가 손주한데 얻은 별명이 ‘이야기 박사’입니다. 동화구연이 저에게도 좋지만 아이들에게 굉장히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