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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가을 담양 담기
- 쌀쌀해지는 늦가을 날씨는 지도의 남쪽을 훑게 만들었고, 일행의 눈길을 잡은 곳은 담양이었다. 시니어들은 인터넷의 사진이나 댓글들을 믿지 않는다. 직접 보고 냄새 맡는 현장 답사를 중시한다. 그렇게 메타세쿼이아 길에 근접해 최근 숙박 중심지로 각광받고 있는 메타프로방스 구역에 짐을 풀었다. 그리스 산토리니처럼 하얀 건물들이 군집을 이루고, 같은 색깔의 다양한 카페들이 입점을 서두르고 있는 곳이었다. 중국산에 밀려 죽제품들이 없어지긴 했지만, 긴 세월 담양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온 대나무숲을 보러 죽녹원부터 찾았다. 하루에 1m 이상 자라 총 30m까지 크는 큰 키의 왕대부터 분죽, 맹종죽까지 다양한 종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여름에는 주변보다 3~4℃가 낮단다. 이곳에 오니 유난히 더위를 타던 남편을 위해 죽부인을 사오셨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매일 껴안고 주무시던 그것의 이름에 하필이면 ‘부인’이 들어가, 어린 마음에 질투가 나기도 했었다. 현장에서의 공부를 통해 이름만 대나무일 뿐 대나무는 나무가 아닌 풀의 일종이라는 것과 1년 안에 다 큰 후에는 계속 딱딱해지기만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안내판들을 읽으며 죽림욕을 할 수 있다는 산책로를 돌다 보니 금방 한 시간이 지났다. 죽녹원에서 나와 바로 길을 건너면 관방제림이다. 관방제는 과거에 관비(官費)로 연인원 3만여 명을 동원해 만든 제방이다. 둑 위로 약 2km에 걸쳐 거대한 풍치림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를 ‘관방제림’이라고 부른다. 추정 수령 300~400년에 달하는 천연기념물들이 이 구역 안에만 185그루가 있다. 모두 이름표(00호)를 달고 어린 인간들을 압도하고 있다. 왕복 한 시간 정도를 걸으면서 아름드리나무들을 껴안고 세월의 냄새를 맡다 보면 허기가 느껴진다. 그럴 때는 다리 건너 ‘국수거리’로 이동해 멸치국물국수 한 사발로 속을 데우면 된다. 여행지에서의 늦가을 아침 식사는 뜨끈한 것으로 해야 온몸의 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래서 TV조선 프로그램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이 추천한 곳을 찾았다. 연로하신 주인장 부부는 점심까지만 식당을 운영한단다. 그렇지만 밥상을 받자마자 오랜만에 탄성들이 튀어나왔다. 전라도 밥상이라 은근히 기대를 했는데 그것을 훨씬 뛰어넘고도 남는, 다양하고도 맛깔 나는 반찬들 때문이었다. 전날 저녁, 석쇠에 구워 먹음직스럽게 나올 떡갈비를 기대하며 인터넷 검색 1위인 큰 식당에 갔다가, 햄버거 패티 같은 맛에 실망했던 우리는 신음에 가까운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다음 날 아침도 그곳에서 먹었다. 법성포의 친정에서 직접 올린다는 조기를 비롯해 손수 마련한 반찬들의 맛을 다시 보고 싶으니 우리를 위해서라도 오래 사셔야 한다는 부탁을 드리며 식당 문을 나섰다. 마침 식당 앞에서는 오일장(2일, 7일)인 담양전통시장이 열렸다. 하지만 죽제품들은 사라졌고 살아 움직이는 토끼와 닭 그리고 검은 고무줄 같은 예전의 일용품들만이 과거의 모습을 가늘게 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담양의 관광 명소인 메타세쿼이아 길은 50년 전 가로수 조성 시범사업 당시 8.5km의 국도변에 5000그루의 묘목들을 심어 조성했다. 원산지가 중국인 메타세쿼이아는 30m 이상까지 곧게 뻗으며 자라 시원한 기상이 남다르게 보일뿐더러 이국적인 경관까지 자아낸다. 어제 본 왕대까지 연이틀, 목을 빼 올려다볼 정도로 키가 큰 담양의 키다리들을 만나며 걸었다. 매표소부터 걸어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지만 카메라 렌즈를 유혹하는 황홀한 가을 색깔은 시간 개념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진한 가을의 풍취가 일행들의 가슴속 깊이 박혔는지, 상경하는 내내 큰 가로수만 보이면 “저기도 메타, 여기도 메타”라며 소리칠 정도로 메타세쿼이아의 잔상은 강렬했다. 오후에는 담양호를 걸었다. 일명 가마골은 영산강의 발원지인데 이곳에서 흘러나온 물은 담양호에 모인다. 담양호 국민관광지에서 시작하는 둘레길은 두 시간 정도 걸으면 된다. 호수 둘레에 설치된 목재 덱은 크고 작은 물고기들과 물속에 투영되는 마지막 단풍도 가까이 감상할 수 있게 도왔다. 풍경에 빠져 느리게 걷고 있는데 친구 사이로 보이는 늙은 남자 둘이 뒤따라왔다. “네가 이렇게 나를 잡으니 나도 힘들고 너도 불편하잖아. 서로 요렇게 잡아보자고!” 돌아보니 몸이 불편한 두 사람이 상대방의 손을 꼭 잡고 휘청거리며 걷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아려왔지만, 성치 않은 몸에 여기까지 와서 가을 호수를 같이 볼 수 있는 친구가 있는 행운아들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으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소쇄원 방문 일정까지 끝내고 상경하는 길, 백수 중 하나가 못내 아쉬운 속내를 드러내며 유혹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여기까지 왔는데, 언제 여기를 또다시 오겠느냐!”라는 초식을 펼친다. 여기에 홀라당 넘어간 일행은 내장산 백양사로 차를 돌려 연장 여행에 돌입했다. 고즈넉하면서 깊은 가을의 마지막 담양 풍경은 그렇게 시니어들의 가슴에 담겼다.
- 2020-11-30 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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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어라 불현듯, 달맞이꽃!”
-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지난주에 ‘소리 좀 내지 말고 살아라’라는 글을 썼더니 여러 사람이 반응을 보였다. 어떤 사람은 단톡방에 “내가 목소리가 커서 그렇지 실은 말수가 그리 많은 사람이 아님”이라고 주장했다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모양”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런데도 “쭝얼쭝얼 끊임없이 말하는 사람은 따로 있는디”라고 버티다 “목소리가 큰 건 인정하셔야지”라는 핀잔을 받았다. 내게 가장 인상적인 반응은 판소리와 가야금을 하는 여성이 내 블로그에 올린 댓글이다. 첫 번째 댓글은 이랬다. “프랑스 시인 장 콕토의 ‘귀(내 귀는 소라껍질)’라는 시를 읽고 실제로 소라껍질을 귀에 대보았을 때, ‘솨아--(쏴아가 아님)’ 소리를 듣고 ‘아! 정말!’ 하고 감동했던 기억이 납니다. 아득히 먼 곳에서 들리는 바닷소리에 섞여 아련히 바다의 향기까지 나는 듯했습니다.” 장 콕토(1889~1963)의 그 시 ‘Mon oreille’(내 귀)는 “내 귀는 소라껍질/ 바닷소리를 그리워한다”라고 돼 있다. ‘껍질’은 물체의 겉을 싸고 있는 단단하지 않은 물질, ‘껍데기’는 달걀이나 조개 따위의 겉을 싸고 있는 단단한 물질을 말한다. 그러니까 소라껍데기라고 써야 맞는데, 국립국어원은 조개의 경우 예외적으로 ‘조개껍질’과 ‘조개껍데기’를 모두 쓸 수 있다고 하니 진짜 헷갈린다. 소라껍질이라고 쓴 건 운율상 그런 거 같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따지지 말자. 원래 이런 거 쓰려고 한 글이 아니니까. 그 여성의 두 번째 댓글이 감동적이다. “순수한 자연의 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요? 기압의 차이로 생기는 바람이나 조수 간만의 차이로 생기는 파도 소리, 이런 거 말고요. 오직 스스로의 힘만으로 내는 자연의 소리를. 꽃이 피는 순간을 본 적이 있나요? 꽃이 피어나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요? 저는 아주 특별한 경험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여고 시절, 친한 친구 집 대문간에 한 무더기의 달맞이꽃이 있었습니다. 요즘 들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작은 달맞이꽃이 아니고, 키도 크고 꽃대도 꽃송이도 큰 튼실한 달맞이꽃 한 무더기가 있었습니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숨을 한번 고르고 계속 읽는다. “초저녁 7시에서 8시쯤 달이 올라올 무렵 달맞이꽃 옆에 서 있으면, 여기저기서 퍽! 퍽! 퍽! 하는 작은 소리가 나면서 달맞이꽃 꽃송이가 한순간에 벌어졌습니다. 오므려져 있던 달맞이꽃 봉오리가 퍽! 소리를 내면서 순간 꽃송이가 활짝 벌어지는 것입니다. 한 송이가 소리를 내며 피어나면 시샘하듯이 여기저기서 퍽! 퍽! 퍽! 하는 작은 소리가 나면서 꽃송이가 벌어지는데 정말 경이로웠습니다. 그때, ‘아! 그래서 달맞이꽃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달이 떠오를 때 달맞이꽃이 피어나니까요. 다른 꽃들은 소리 없이 서서히 벌어지는데, 제가 아는 한 오직 달맞이꽃만이 순간에 벌어지면서 피어납니다. 그 순간을 위해서 달맞이꽃은 얼마나 많은 준비를 해야 했을까요? 온 힘을 다해 모든 에너지를 모아 한꺼번에 확! 뿜어냈을 테니 말입니다. 요즘 같았으면 동영상을 찍어놓았을 텐데….” 댓글은 끝나지 않았다. “소리를 주제로 쓴 글을 읽으니 아름다웠던 옛 추억의 한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이젠 다시 볼 수도 듣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 피는 소리.’ 전에도 지인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번씩 한 적이 있습니다. 특별한 경험이라서. 며칠 전 그 친구와도 전화로 달맞이꽃 이야기를 했습니다. 친구는 그 소리를 수없이 많이 들었답니다. 혹시 그런 귀한 경험을 한 적이 있나요?” 마지막 문장이 나를 찔렀다. 나는 유감스럽게도 그런 소리를 들어본 경험이 없다. 신문사 선배로부터 이런 이야기는 들었다. 대학교 몇 학년 때인가 캠핑을 가서 저녁을 차리고 있는데, 갑자기 주위가 환해졌다고 한다. 웬일인가 하고 둘러보니 여기저기서 노란 달맞이꽃이 환하게 환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그 황홀한 장면에 친구들은 다들 넋을 잃고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고 한다. ‘불현듯’이라는 말은 그런 때 쓰는 게 아닌가 싶다. ‘불현듯’은 원래 ‘불을 켠 듯’인데, 불을 켜면 갑자기 환해지듯이 어떤 일이나 생각이 느닷없이 일어날 때 쓰는 말 아닌가. 불현듯 주위가 불 현 듯해진 것이다. 시각장애인 가수 이용복이 부른 ‘달맞이꽃’(지웅 작사 김희갑 작곡, 1972)의 가사가 이 꽃의 아름다움과 쓸쓸함을 잘 이야기하고 있다.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달 밝은 밤이 오면 홀로 피어/ 쓸쓸히 쓸쓸히 미소를 띠는/ 그 이름 달맞이꽃/ 아 아 아 아 서산에 달님도 기울어/ 새파란 달빛 아래 고개 숙인/ 네 모습 애처롭구나.” 달맞이꽃은 첫해에는 원줄기 없이 자라다가 겨울을 지내고 다음 해에 줄기를 만들어 곧추 자라 꽃피는 두해살이풀이다. 꽃은 여름에 잎겨드랑이에 한 개씩 밤에 피어 다음 날 아침에 진다. 월견초(月見草)라고도 부르는 달맞이꽃의 꽃말은 기다림, 밤의 요정, 소원이다. 그런데 정원에 화초로 심는 분홍달맞이꽃과 황금달맞이꽃은 낮에 꽃이 피어 낮달맞이꽃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이렇게 달맞이꽃 공부를 하면서 나는 남에게 내놓을 만한 나만의 소리가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아무리 기억을 헤집고 머릿속의 주머니를 뒤져도 달맞이꽃처럼 멋진 건 없었다. 할아버지와 함께 기거했던 사랑방에 어느 날 밤 혼자 앉아서 들었던 뒷산의 솔바람소리, 그것은 깊고 아득하면서도 무서웠다. 부엉이소리까지 얹히면 더 그랬다. 그리고 계룡산 기슭의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들었던 밤 늑대 울음소리, 그 아기 울음 같던 소리가 잊히지 않는다. 충남 서천이 고향인 사람은 중학교 국어시간에 ‘나를 슬프게 하는 소리’라는 제목으로 작문을 할 때, 한밤중 성주산 고개를 허위허위 올라가는 트럭의 숨 가쁜 비명을 글로 써 선생님으로부터 큰 칭찬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달콤하면서 감상적이거나 낭만적인 소리보다 듣기 싫은 소리를 더 잘 기억한다. 개인적으로 슬펐던 소리는 떠올리고 싶지 않다. 지난주 쓴 글에 듣기 싫은 소리로 개소리도 언급했지만, 사실은 ‘개띠 법무부 장관의 개소리’라고 쓰려다가 그냥 개소리라고만 썼다. 앞으로 나도 달맞이꽃이 피는 소리, 구름이 흘러가는 소리, 아이의 이가 새로 나는 소리, 서산에 걸린 해가 모든 이들에게 인사하는 소리, 술이나 벼가 익는 소리, 가을 깊은 밤 솔방울 떨어지는 소리, 이런 걸 들으면 좋겠다고 소년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
- 2020-11-25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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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규암리자온길’의 명소&맛집 소개
- 주변 명소&맛집 궁남지 궁남지(사적 제135호)는 1400여 년 전인 백제 무왕 때 조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 연못이다. 연못 둘레에 버드나무를 심고, 연못 중앙에 신선이 노니는 산을 형상한 섬을 만들어 왕궁의 정원으로 삼았다고 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궁남지는 무왕의 잉태지였다. 여름에는 연꽃이 가득 핀 풍경이 장관이며, 야간산책 명소로도 유명하다. 연못 중앙의 정자와 다리에 조명을 켜놓는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동남리, 24시간 개방, 입장료 무료. 부여서고 책방세간 바로 옆에 있는 수공예품 편집숍이다. 책방처럼 여러 나라의 문화와 예술을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하여 ‘부여서고’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동남아에서 수입한 라탄소품, 가방, 모자, 의류, 머플러, 도마, 문구, 조명 등의 생활 잡화와 천연염색 소품을 판다. 우리나라 작가가 만든 상품도 있다. 다양하고 아기자기한 소품이 많아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충남 부여군 규암면 자온로 84 수월옥 ‘빼어난 달’이란 뜻을 지닌 수월옥은 술과 음식을 팔던 요정이었다. 한 세대를 건너 카페 수월옥으로 다시 태어났다. 폐가와 다름없던 건물이 부여 핫 플레이스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수월옥은 건물이 두 채인데 한 채는 내벽 콘크리트를 드러내 모던한 분위기를 살렸고, 한 채는 한옥 느낌을 살려 좌식으로 꾸몄다. 차 주문법도 독특하다. 선반에 놓인 청자, 백자, 진사, 분청사기 등의 찻잔을 고를 수 있다. 수월옥은 SNS 사진 맛집으로 소문났지만, 사실 차 맛집이었다. 장원막국수 구드래나루터 근처에 있는 오래된 가게다. 허름한 시골집의 작은 방에 앉아 막국수를 먹노라면 할머니 댁에 놀러온 듯하다. 메뉴는 메밀막국수와 편육 두 가지뿐이다. 메밀막국수 면발은 조금 가늘고 쫄깃하다. 시원한 육수는 새콤달콤한 편이다. 돼지 목삼겹살로 만든 편육에 막국수를 감아 먹어보길 권한다. 충남 부여군 부여읍 나루터로62번길 20, 11:00~17:00, 메밀막국수 7000원
- 2020-10-30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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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래사막 지구는 물려주고 싶지 않아
- ‘한 그루 나무를 심으면 천 개의 복이 온다’ ‘푸른 아시아’ 오기출 사무총장이 펴낸 ‘한 그루 나무를 심으면 천 개의 복이 온다’라는 책을 얼마 전 읽었다. 저자는 기후 위기 대응 NGO 활동으로 ‘유엔사막화방지협약’(UNCCD, United Nations Convention to Combat Desertification)에서 수여하는 ‘생명의 토지상’을 받았다. 2017년 5월에 출간됐으니 이미 한참 구간이 된 책이다. 물론 화제의 베스트셀러는 되지 못했다. 이 책은 몽고에서 온도가 급격하게 상승하면서 유목민들이 대대로 살아왔던 초원이 사막으로 변해 황폐화된 후, 이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다. 초원이 사막으로 황폐화되면서, 몽고 유목민들이 초원 대신 대도시 쓰레기장 근처의 난민촌으로 몰려들며 어떻게 환경 난민이 됐는지, 또한 어떻게 ‘푸른 아시아’와 함께 극복하고 있는지, 생태 회복에 관한 NGO 활동을 담담하게 그려냈다. 발간된 지 3년이 지나서야 이 책을 읽었고, 그 후 생각이 많아졌다. 그동안 기후 위기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며 살았구나 하는 질책도 스스로에게 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지구 온난화와 미세먼지, 황사를 짜증스러워하고 불평만 해댔지 이를 극복하기 위해 어떤 실천을 해야 하는지는 적극적으로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세대는 목적지를 향해 돌아가는 사람은 바보취급 당했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든 지름길과 사잇길로 남보다 더 먼저 도착하고 남보다 더 멀리 도달하려고 안달했다. 늘 바쁘고 분주한 삶이었다. 이런 일상 속에서 지구 환경을 염려하고 작은 행동을 실천하는 건 사치의 다른 이름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물 절약을 위한 나만의 생활 철칙, 소소한 방법 두 가지 이제 비로소 눈을 위로 치켜뜨지 않고 내 발밑까지 두루두루 훑어볼 수 있는 나이가 됐다. 이제부터라도 모두가 작은 힘을 보태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기후 위기 극복을 위해 내가 보태는 작은 힘을 꼽아보라고 묻는다면 정말 소소하지만 그래도 답할 것이 두 가지 있다. 한 가지는 ‘이틀에 한번 머리 감기(?)’, 또 하나는 ‘양치질하면서 세면대 물 안틀어놓기’다. 이런 생활 습관을 갖게 된 것도 불과 5년 전부터다. 물과 기름을 가진 자, 미래 사회 지배자 되리 2015년에 영화 ‘분노의 도로’(Mad Max: Fury Road)를 보고 난 후, 며칠을 당혹감에 시달렸다. 영화를 보면서 손과 다리가 덜덜 떨릴 만큼 공포스러웠던 적이 없었다. 사막으로 변한 미래의 지구에서 물과 기름을 독점한 권력자 임모탄은 그 일가와 자신을 지키는 병사들만 견고하게 구축된 절벽 위 동굴에서 지내게 하고 자신의 왕국을 건설해 세상을 지배한다. 가끔 절벽 아래 사막을 떠도는 이들을 모아놓고 하사하듯 물을 절벽 밑으로 방류하면서 마치 조물주가 된 듯 세상을 주무른다. 절벽 위에서 떨어지는 물을 받기 위해 아래 세상은 지옥이 된다. 임모탄의 지배를 거부하는 이들은 물도 없고 기름도 없는 사막을 떠돌다 말라 타들어 죽거나 광폭한 지배자 휘하의 무장병사들에게 사냥감처럼 잡혀와 온갖 인체 실험 대상이 되어 서서히 죽어간다. 황폐한 미래 사회를 그린 너무나 리얼한 영상들에 손과 다리가 떨리고 공포감이 엄습했다. 미래에 내 딸의 아들 혹은 딸(그러니까 내 손자 손녀)이 저런 황폐화된 지구에서 살게 되는 건 아닌지 극도의 불안감이 몰려왔다. 물론 27세가 된 나의 딸은 결혼 생각도 없고 언제 결혼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오버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나는 그저 불안하기만 하다.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는 미국 서부지역, 물 부족 심각 미국 캘리포니아도 가뭄으로 사막화가 진행되는 곳 중 하나다. 사막에 자리 잡고 있는 라스베이거스의 경우 주택 정원을 선인장으로 꾸며놓는 게 일반적인데 요즘엔 거주 구역별로 정해진 시간에 물을 줘야 한다. 집주인 맘대로 정원에 물을 주면 어김없이 벌금 고지서가 날아온다. 인근 주민이 몰래 지켜보다가 신고를 하는 것이다. 사막화가 진행되면서 캘리포니아는 부족한 물을 콜로라도 주로부터 구매해 끌어 쓰고 있다. 과거에 미국 이민자들의 아메리칸 드림이었던, 초록색 잔디가 깔린 정원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스위트 드림은 이제 머릿속에서 지워야 한다. 가뭄이 심해지자 주 정부는 각 주택이 정원의 잔디를 걷어내고 돌과 선인장, 물이 많이 필요 없는 플랜트로 디자인해 새롭게 정원 공사를 하면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이 밖에 물 절약을 위한 다양한 홍보와 마케팅도 실시하고 있다. 이때 나온 슬로건이 바로 ‘Brown is New Green!’이다. 사막화를 막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미국 서부지역의 현실이다. 내가 전혀 관심조차 갖지 않았던 몽고.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고비사막으로 여행이나 가볼까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며 지냈던 모습이 부끄러워지는 책, ‘한 그루 나무를 심으면 천 개의 복이 온다’. 20년 전부터 나무를 심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유목민들이 늘고 있고 새롭게 마을이 형성되고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나무 심는 일을 묵묵히 해오고 있는 이 NGO 단체를 한국인들이 운영하고 있다니 자랑스럽기만 하다. 기후 환경 변화에 관심을 갖게 해줄 한 권의 책, ‘한 그루 나무를 심으면 천 개의 복이 온다’와 한 편의 영화 ‘분노의 도로’. 깊어져 가는 가을날, 미래 세계의 황폐화를 막기 위해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가져보기를 권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출현도 결국 인간의 난개발과 이로 인한 기후 변화, 생태계 변이로 이어지는 연결고리 속에서 발생한 게 아닐까? 코로나19로 전 세계 어디도 안전한 곳이 없다는 것을 실감하는 요즘, 기후 변화라는 거대한 모래폭풍 속으로 우리 모두 들어가고 있음을 자각하게 됐다.
- 2020-10-27 0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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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성만점 열대식물 매력 탐구
- “여기 한국 아니죠?” 한 SNS에 올라온 사진에 달린 댓글이다. 스크롤을 올려보니 사진 속엔 셀 수도 없이 많은 열대식물이 공간을 채우고 있다. 마치 동남아시아 휴양지 같은 분위기다. 하지만 발리도, 다낭도 아닌 이곳은 경기도 광주의 한 빌라. 열대식물 애호가 이대호(42) 씨가 손수 가꾼 하나뿐인 정글이다. ‘가을=단풍’의 공식을 깨고 사계절 내내 열대식물과 함께한다는 이 씨. 쌀쌀한 가을날, 그의 집에 방문해 열대식물의 매력을 탐구해봤다. 답답한 도시생활, ‘몬스테라’가 건넨 작은 위로 경상북도 청도군에서 자라고 난 이대호 씨는 어느 날 각박한 도시생활에 염증이 났다. 빽빽한 인파 속에서 숨 돌릴 틈 없이 출근하고 집에 돌아와 고된 몸을 누이면, 마음 한구석 고향 생각도 나면서 왠지 모를 갑갑한 기분에 울적해지기도 했다. 그 무렵 이 씨는 단순한 계기로 식물 몇 종을 돌보기 시작했다. ‘남들 다 키우니 나도 키워볼까’ 하는 가벼운 마음이었다. 처음 키우기 시작한 식물은 몬스테라였다. 몬스테라는 ‘이상하다’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몬스트럼’(Monstrum)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어원처럼 이파리가 갈기갈기 찢겨 있는 듯한 독특한 모양새가 특징이다. 범상치 않은 외형 때문에 성인 몸집만 한 몬스테라는 ‘몬스터’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드센 생김새와는 달리 다루기 쉽고 편해 식물 집사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식물이다. 이 씨 또한 몬스테라의 개성 있는 매력에 빠진 사람 중 한 명이다. 몬스테라를 돌보며 식물에 재미를 붙인 그는 자연스레 다른 열대식물도 집 안에 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초보 집사였던 이 씨는 본의 아니게 수많은 식물을 희생시키며 시행착오를 겪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몬스테라는 그의 곁을 굳건히 지켰다. 그렇게 1년 8개월이란 시간이 흐르고 자그마했던 몬스테라가 천장에 닿을 만큼 ‘폭풍성장’하는 동안, 이 씨는 250~300여 개의 열대식물로 집을 가득 채웠다. 회색빛 도심 속에서도 자연의 푸름을 느낄 수 있도록 살고 있는 집을 숲처럼 만든 것이다. ‘필로덴드론’으로 만들어낸 정글 2018년 초, 몬스테라를 시작으로 열대식물의 세계에 입문한 이 씨는 본격적으로 자신만의 정원을 가꾸어나갔다. 거실 전체를 식물 공간으로 꾸민 ‘거실 정원’을 만들었으며, 더 많은 식물을 들일 수 있도록 2층 테라스를 확장 공사했다. 때마침 발육이 빠른 열대식물들은 경쟁하듯 몸집을 키워나갔고, 테라스가 가득 채워지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 씨의 ‘테라스 정원’에는 다양한 열대식물이 살고 있지만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건 필로덴드론속 식물이다. 필로덴드론은 알려진 종류만 수천 가지가 넘는 넝쿨 식물로, 화분에서 키우는 직립형과 벽을 타고 올라가는 넝쿨형이 있다. 그중 이 씨의 테라스에 줄지어 있는 것은 필로덴드론 파스타짜넘, 필로덴드론 마메이 실버클라우드, 필로덴드론 베루코섬·멜라노크리섬 교배종 등이다. 잎이 하트 모양으로 둥글고 넓적하다. 얼핏 보면 모두 똑같은 종 같지만, 잎의 색이나 질감 등은 다 다르다. 열대식물 중 필로덴드론을 가장 좋아한다는 이 씨는 마디를 잘라 다른 화분에 옮겨 심는 방식으로 개체수를 늘린다. 넝쿨형 필로덴드론은 벽을 타고 올라갈 수 있도록 지지대를 세워준다. 번식을 시키다 개체수가 너무 많아 감당하기 버겁거나 공간이 부족할 땐 지인에게 나눠주거나 SNS를 통해 분양한다. 흔하지 않아 아름다운 ‘칼라디움 스트로베리스타’ “희귀하고 독특하잖아요.” 열대식물의 진정한 매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돌아온 답이다. 실제로 필로덴드론을 비롯해 대부분의 열대식물은 우리나라에 유통되지 않기 때문에 구하기가 쉽지 않다. 이 씨가 애지중지하는 칼라디움 스트로베리스타도 열대식물을 직수입하는 한 블로거를 통해 겨우 구했다. 칼라디움 스트로베리스타는 이파리 안에 딸기색 반점이 콕콕 박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질감이 두껍고 거친 대부분의 열대식물과는 달리 잎이 얇고 포슬포슬해 마치 한지를 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겨울에 동면을 시켜줬다가 봄이 되면 다시 심어야 해서 손이 꽤 가지만, 그 고고한 자태를 보고 있으면 그리 수고로울 것 같지도 않다. 칼라디움 스트로베리스타와 같은 희귀 열대식물은 들이는 것도 힘들지만, 어렵사리 구해도 정보가 많지 않아 키우면서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이에 열대식물 집사들은 주로 카페나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을 통해 ‘정보 품앗이’를 한다. 직접 키우면서 겪은 경험담과 정보를 공유해 그들만의 데이터를 만들어나가는 것이다. 이 씨 또한 처음 식물을 키울 때 네이버 카페 ‘알뜰한 식물생활’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 올해 3월부터는 인스타그램 채널을 열어 같은 취미를 가진 이들과 소통하고 있다. 식물의 ‘시옷’ 자도 관심 없었던 평범한 회사원 이 씨는 최근 실내 정원 관리사로 직업을 바꿨다. 식물을 키우다 보니 전문적인 업으로 삼고 싶어졌다는 것이 그 이유. “앞으로 제대로 공부하고 지금보다 더 많이 키우면서 분양도 하고, 지인들에게도 종종 나눠주려고 해요. 사계절 내내 푸릇하고 싱그러운 열대식물의 진가를 많은 분이 알면 좋겠어요.”
- 2020-10-08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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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낭만적인 정원과 열정 작업실에 취하다
- 산이 높아 숲은 무성하고 마을은 밝다. 피고 지는 꽃이나 명멸하는 별, 그 덧없는 것들을 벗 삼아 지내기 좋은 곳이다. 마을 입구엔 ‘예술인 마을’이라 쓴 팻말이 있다. 아늑한 자연 환경에 이끌린 몇몇 예술인들이 들어와 사는 마을이다. 터줏대감은 서양화가 유휴열(71)이다. 그는 이곳에서 33년을 붙박이 장롱처럼 눌러 살며 그림을 그렸다. 다작(多作)을 하기로 소문난 화가다. 그가 올봄에 개인미술관을 개관했다. ‘유휴열미술관’이라는 이름으로. 화가라면 다들 치열하게 그림을 그리고자 한다. 그림밖엔 난 몰라! 이렇게 속으로 외치며. 그들은 그림으로 존재의 가치를 돋우고, 그림으로 자유로운 인간이 되길 바라며, 나아가 상상력을 무한 확장한 그림 작업으로 자신만의 심미적 제국을 구축하고 싶어 한다. 그러자면 일단 열심히 그려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취약점이 많은 게 인간의 정신. 뜻대로 밀어붙이기가 쉽지 않다. 이를테면 자만심, 혹은 매너리즘이 방문해 화가를 나태의 늪에 집어던지기 십상이지 않던가. 이 점에서 유휴열은 귀감으로 회자된다. 그는 그리지 않고서는 숨 쉴 수 없다는 양 치열한 창작을 하기를 평생토록 일관했다. 그렇게 해서 수장고가 미어터지도록 쌓인 작품이 자그마치 5000여 점. “미술의 공익성, 공공성을 생각했다" 이 많은 작품을 다 어이하나? 노령에 접어든 유휴열은 숙고했던 것 같다. 머잖아 생을 다하는 시간이 찾아올 텐데, 그림들을 등짐지고 함께 떠날 방법은 없고, 다 불태워 없애는 광란(?)은 적성에 맞지 않고, 그는 다소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고민했을 것이다. 이건 유휴열만의 문제가 아니다. 화가의 사후, 그의 분신에 해당할 작품들이 처할 운명에 관해 많은 화가들이 심각한 모색을 하고 대책을 찾는다. 이상적이기로는 작품을 공공미술관에 기증하는 방법이다. 하지만 받아주지 않을 공산이 크다. 공공미술관이라 하더라도 기증 작품을 수용하기 위한 물적 여건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유휴열은 결국 개인미술관을 만들어 문제를 해결하기로 했다. 개인미술관을 가지고 싶어도 가질 수 없는 화가가 대부분이라는 걸 고려하면 유휴열은 행운아다. 그리고 그 행운은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게 아니고 오직 자신의 힘으로 불러들였다. 어쩌면 꽤 오래된 숙원이었을 미술관을 드디어 출항시킨 그는 이제 사후에도 행운과 동행하기를 염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영혼까지 다했다고 자부해도 좋을 자신의 작품들이 시간을 초월해 후세까지 불멸하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유휴열이 미술관을 만든 목적이 다만 작품의 보전을 위한 데에만 있지는 않다. 그가 보기에 전주권, 혹은 전북권의 미술계 토양은 척박하다. 남원시에 있는 김병종시립미술관 외에는 개인을 기리는 기념미술관이 전무했던 현실을 그 하나의 증거로 꼽는다. 따라서 그는 유휴열미술관이 지역 미술계에 활력을 불어넣기를 바라며 일을 추진했다. 유휴열을 알아보는 눈들은 서울에도 많지만, 전주권 문화예술계에선 단연 친숙하게 알려진 원로 화가다. “신기할 정도로 유휴열을 믿고 따르는 인사가 많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다. 유휴열은 이처럼 그를 알아주는 지역의 애호가들에게 미술관으로 화답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지역에서 이만큼이나 화가 행세할 수 있었던 게 다만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가능했겠는가. 늘 남들의 도움을 받았다. 알고 보면 내가 도움 준 일이 드물었다. 이제야 철들어 미술의 공익성, 공공성이라는 걸 생각하며 미술관을 만들었다.” 모악산 치맛자락에 안긴 미술관 유휴열미술관은 유휴열이 33년간 살아온 거처를 다듬어 만든 공간이다. 원래 있었던 살림채와 작업실, 수장고는 그대로 둔 채 전시공간과 카페공간을 증축해 틀을 구축했다. 초목들이 길차게 자란 널찍한 정원도 섬세한 보완을 해 야외 조각 전시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자력으로 조달한 불충분한 자금 사정에 맞춰 시설을 구비하느라 미처 완성을 보지 못한 대목도 있다. 너무 작은 규모의 전시실이 그렇다. 차후 넓혀나갈 예정이라지만 현재로서는 흠이라면 흠이다. 그러나 전체적인 풍치와 구성은 아름답고 안정적이다. 목가적인 전원에 터를 둔 근본부터가 예사롭지 않다. 전주 사람들이 즐겨 등산을 하며 서기가 아롱진 산이라 예찬하는 모악산의 치맛자락에 안긴 집이지 않은가. 33년간 이곳에 살며 그림을 그려온 유휴열은 33년간 나무를 심고 꽃을 가꾸어 주변의 자연과 동화를 이룬 정원 공간을 빚어냈다. 시인 김용택에 따르면 그는 “너부데데한 미륵을 닮은 사람”이다. 유휴열의 외적인 경관과 내면을 아울러 빗댄 표현이겠으나 일단 근골이 두루 짱짱한 외양부터가 돌미륵을 닮아 투박하다. 정원을 일부러 세심하게 가꾸는 버릇을 가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심심파적으로 수목들을 즐겼으리라. 초목들은 햇빛과 물을 끌어들여 저절로 자랐으리라. 저 태연한 풀과 나무들, 무엇이 아쉬워 사람의 손길을 기다리랴. 신생 미술관이라고 얕잡지 말자. 있을 것 다 있고, 볼 만한 것 다 볼 수 있다. 돌담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는 노루꼬리처럼 짤막하지만 고즈넉해 마음을 풀어놓을 만하다. 키 큰 노송들, 붉은 꽃떨기 매단 배롱나무들 사이를 거닐며 커피가 식는 속도보다 빨리 식어버린 사랑의 달착지근한 허무를 반추하기에 적당한 정원이다. 산책로 끝에선 계류가 솰솰 흐른다. 흐르는 물은 무정하다. 떨어진 꽃잎과 누런 낙엽을 속절없이 흘려보내다니. 전시실에선 ‘유휴열-산·나무·꽃’전(展)이 펼쳐지고 있다. 화가의 심상에 포착된 자연 풍경을 거친 붓질로 그려낸 유화 작품들을 내건 전시회다. 눈을 씻고 들여다봐도 예쁘장하게 그려진 형상이 하나 없다. 자연물의 외형보다 내적 생명감의 표출에 치중한 유휴열의 의도가 여실히 비친다. 유정한 마음과 관조의 눈길이 아니고선 끄집어내기 어려운 추상적 구상이다. 속사포처럼 빠른 터치로 물감을 짓이겨 두텁게 바른 질감에서는 자연의 기운생동을 가급적 강렬하고 질펀한 화풍으로 드러내려 한 작의가 읽힌다. 속 깊은 그림이다. 분방하나 심층적이다. 거칠지만 흥겹다. 유휴열의 미술세계를 잘 아는 이라면 사족 없이도 금시에 알아차릴 것이다. ‘아하, 보지 않고도 알겠다, 유 화백이 흥겨워 시원하게 물감을 갈겼구나!’ 그렇게. 흥이라는 것, 이건 유휴열 그림의 키워드다. 우리 민족의 토착 정서를 흔히 한(恨)으로 보지만 그는 흥에서 원형을 찾는다. 한이 무르익으면 역설적이게도 신명이 뻗고, 신명에 겨우면 흥이 돋아 어깨춤들을 추며 삽시에 놀이판을 짜는 사람들. 이게 유휴열이 보는 민족의 초상이다. 해서 진정으로 토속적인 것, 전통적인 것, 정신으로 유전된 원초적인 것을 형상화하기에 주력해온 그의 미술 작업의 뿌리는 흥이라는 대지를 탐닉하는 것이며, 오방색을 즐겨 사용하지만 기법은 다분히 모던하다. 미술평론가 박영택의 촌평을 볼까. “유휴열의 그림은 현대미술의 어법을 공유하고 있지만 그 저변에는 명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우리 전통미술의 특성과 한국인의 기질 같은 것들이 마구 요동친다. 화면은 그 박동을 격렬하게 들려준다. 그것은 거의 색채와 붓질로 이루어진 춤이고 노래이고 판소리 사설이고 구음과도 같다.” 유휴열미술관에는 현기증이 나는 공간이 하나 있다. 바로 유휴열의 작업실이다. 이 미술관엘 왔다가 그 뜨거운 작업실을 구경하지 않는 건 어처구니없는 일에 속한다. 다산성을 본분으로 여기며 무슨 광포한 충동에 휩싸인 사람처럼 작품 생산에만 매진하는 사람의 예술적 생태계를 한눈에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무진장한 작품들, 열정의 징후들, 또는 노화가의 미묘한 고독까지를 느낄 수 있는 일종의 명소가 아닐 수 없다. < 2편에 계속 >
- 2020-10-07 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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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마음의 양식을 쌓아주는 가을 신간!
- 나라말이 사라진 날 (정재환 저·생각정원) 방송인 출신 역사학자 정재환이 조선어학회의 투쟁사를 살펴본다. 일제 치하 말과 글을 빼앗긴 민족의 상황과 이에 맞서 우리말 사전을 편찬한 조선어학회의 활동을 조명한다. 내 손 안의 작은 미술관 (김인철 저·양문) 19세기 인상주의를 연 화가 25인의 명화를 한 권으로 감상한다. 도슨트의 해설을 듣는 것처럼 그림 소개뿐 아니라 화가의 삶과 교우 관계 등 생생한 일화까지 함께 제공한다. 건강수명 100세 (김혜성 저·파라사이언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인증 우수과학도서로 선정된 '내 안의 우주' 시리즈의 저자 김혜성 박사의 신간. 건강수명이 줄어드는 원인을 파헤치고, 그에 대한 대처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노르망디의 연 (로맹 가리 저·마음산책) '자기 앞의 생'으로 공쿠르상을 받은 작가 로맹 가리의 생애 마지막 장편소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인간에 대한 애정과 희망을 '연'이라는 상징물로 표현한 작품이다. 딱 일 년만 청소하겠습니다 (최성연 저·위즈덤하우스) 50대 고학력자 여성이 ‘고졸’로 이력서를 고쳐 쓰고 1년간 미화원으로 일한 이야기를 담는다. 미화 일을 하며 겪은 에피소드, 비합리적인 청소 노동자의 현실 등을 진솔하게 전한다. 오늘부터 차박캠핑 (홍유진 저·시공사) 차박 입문자를 위한 가이드북. 차박 관련 용어부터 차종, 예산, 장비 등 기초적인 정보와 차박 성지 및 주변 여행지까지 안내한다. 부록으로 ‘차박캠핑족’의 생생한 인터뷰도 실려 있다.
- 2020-10-07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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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분 가꿨더니 마음에도 싹이 텄네
-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삶, 가사노동으로 반복되는 하루. 아이 셋을 키우는 한 주부의 일상이다. 한때 자신만의 시간을 갖지 못해 우울증까지 겪었던 그녀. 기분 전환 겸 수강해본 ‘홈가드닝’ 수업이 인생을 바꿀 줄 누가 알았을까. 맨손으로 흙을 만지는 순간 매력에 푹 빠졌다는 그녀는 1년 만에 50여 개 식물로 집을 가꾸는 ‘플랜테리어 마니아’가 됐다. 이제는 더 나아가 관련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는 주부 정지예(47) 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홈가드닝 수업으로 펼쳐진 초록빛 인생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의 한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서니 집 안 곳곳에서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는 식물들이 반긴다. 성인 키 정도 되는 길쭉한 키다리 식물부터 손바닥 크기의 ‘초미니’ 식물까지 종류도 제각각이다. 이 모든 생명을 돌보는 식물의 어머니(?)는 주부 정지예 씨. 가리키는 식물마다 생소한 이름을 줄줄 읊는 정 씨의 모습에서 프로의 향기가 느껴졌다. 식물을 본격적으로 키우기 시작한 지는 1년 정도 됐단다. 지난해 봄,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된 동네 문화 프로그램에 참여하면서부터다. “아이를 낳고 개인 시간 하나 없이 살다 보니 우울증이 도졌어요. 답답한 마음에 서울에서 용인으로 이사를 왔지만, 그것도 잠시더라고요. 결국 생활은 집 안에서 하는 거니까요. 그러다 ‘홈가드닝’ 클래스를 듣게 됐는데, 그런 기분 아세요? 공이 바닥을 치고 튀어오르는 것처럼 벅찬 느낌이요. 텃밭을 가꾸고 흙을 만지는데 딱 그런 기분이 들더라고요.” 오랜만에 웃음을 되찾은 정 씨는 그날 이후 집 안에 새 식구를 하나둘 들였다. 그 개수가 점점 많아져 집 안에서 차지하는 부피가 커질 무렵, 공간과의 조화를 자연스레 고민하기 시작했다. 식물과 어울리는 화분을 고르고, 그에 걸맞은 아기자기한 소품을 배치했다. 우울한 기운이 감돌던 집 안은 한 폭의 정원처럼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건조하게 말라 있던 정 씨의 마음속에도 푸릇한 새싹이 돋았다. “말 그대로 치유가 됐어요. 겨울에 키우던 식물 잎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뿌리가 살아 있더라고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심었죠. 봄부터 서서히 잎이 피어나기 시작하더니, 여름이 되니까 앙상하던 애가 숲처럼 무성해지는 거예요. 어려운 상황에서도 열심히 살아내는 식물을 보면서 저 역시도 포기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죠.” 식물을 키울수록 새로 알고 싶은 점이 많아진다는 정 씨는 지난해 가을 심도 있는 공부를 위해 경기도에서 주관하는 조경가든대학 교육 과정을 수료했다. 식물과 정원 관리 등에 대한 기본적인 이론과 실습을 배우는 과정으로, 경기도민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수업이다. 현재는 방 한 칸짜리 작업실을 마련해 식물과 관련한 작은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취미로 시작한 활동이 일자리로까지 이어진 셈이다. “적은 비용으로 몇 배의 행복을 얻을 수 있는 게 플랜테리어 같아요. 추운 계절에 싱그러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도 엄청난 장점이고요. 저도 그렇지만 남편도 취미가 별로 없는 사람이었거든요. 식물 키우기 시작한 뒤로 많이 즐거워해요. 좋아해주는 덕분에 분갈이는 남편한테 다 시켜요.(웃음) 같은 취미를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하죠.” 작은 변화만으로 새롭고 산뜻하게 정 씨의 집은 남동향으로 어두운 편은 아니지만, 거실에 베란다가 없고 창밖에 햇빛을 가리는 어닝이 설치되어 있어 식물을 키우기에 최적의 공간은 아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식물이 사계절 내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한다. 분양하기 전 식물이 거주하는 환경에서 잘 자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먼저 확인하기 때문. 관리하는 식물의 수를 50여 개 이상 늘리지 않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단순 장식품이 아닌 살아 있는 생명인 만큼 온전히 책임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기르겠다는 주의다. “무리하는 순간 취미가 아니라 노동이 될 수도 있어요. 본인도 스트레스를 받을 거고, 관리에 점점 소홀해지겠죠. 그러면 식물도 힘들거든요. 행복하기 위해 시작한 거니까 욕심내서 들여오고 싶지는 않아요. 물론 100 개가 넘는 식물도 능숙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분들은 더 많이 키워도 되죠. 사람마다 다 다르니까요. 저는 지금이 딱 좋은 것 같아요.” 식물을 자주 분양하지도 않고, 인테리어에 큰 비용을 들이는 것도 아니지만 정 씨의 공간은 그녀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시시각각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한다. 작은 변화를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다는 그녀의 비결은 ‘있던 것’ 활용하기. 정 씨는 키우던 식물도 하나의 인테리어 소품으로 재탄생시킨다. 분갈이를 하다 떨어진 작은 필레아페페 줄기를 휑한 욕실 세면대 옆에 올려두거나, 삼겹살을 구워먹고 남은 로즈마리를 유리병에 담아 놓는 식이다. 가든 소품도 집 안에 굴러다니던 것을 색다르게 이용하는 편이다. 사용하지 않는 수납장 한 칸은 세로로 세워 작업실의 화분대로, 화분 받침은 핸드 워시 등 욕실 용품과 소형 식물을 놓을 수 있는 인테리어 소품으로 활용한다. 몸집이 커졌지만 분갈이를 해주기 애매한 식물은 화분째 철제 바스켓이나 유리 용기에 옮겨 담는다. 시중에 판매하는 소품을 마구잡이로 배치하는 대신 집에 있는 물건을 활용하면 한층 더 자연스럽고 세련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설명. 이케아나 H&M 홈등 대중적인 브랜드 제품을 구매할 때도 있다. 가격이 부담스럽지 않으면서도 실용성이 높다는 것이 그 이유. 정 씨는 이케아에서 산 싱크대를 거실 화분대로 사용한다. 분갈이용으로 구매했으나 예상보다 높고 넓어서 화분을 올려두기에 더 알맞았다고. 정 씨의 빛나는 응용력은 거실을 한층 더 이색적으로 만들었다. 물이 나오지 않는 싱크대와 식물의 조합, 꽤 멋스럽지 않은가. 그렇다면 그녀만의 독특한 영감은 어디에서 나올까? 정 씨는 아마존 등 해외 직구 사이트에서 구매한 원서를 보며 주로 아이디어를 얻는다. 국내 서적도 좋지만, 조경 역사가 깊은 서양 서적을 참고하면 훨씬 넓은 안목을 기를 수 있다는 것. 영어를 읽지 못해도 책 속에 실린 사진을 보며 응용해보는 것만으로도 도움이 된다. 정 씨는 여러 서적 중에서도 ‘어반 정글’(Urban Jungle), ‘에버그린’(Evergreen)을 추천했다.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했다. 우연한 기회로 ‘인생 취미’를 찾은 정 씨처럼, 브라보 독자들도 작은 계기부터 만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코로나블루’로 갑갑하고 울적한 마음이 조금은 가시지 않을까.
- 2020-10-0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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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장 김환기의 거의 모든 걸 만날 수 있는 미술관
- 지난 2018년, 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은 국내 미술평론가 37인에게 한국근현대미술의 대표 작가를 물었다. 1위는 한국추상미술의 개척자인 김환기(1913~1974)가 차지했다. 2위는 백남준, 3위는 박수근이었다. 대중의 갈채를 받는 화가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미친 듯한 집중력과 놀라운 다산성을 특징으로 지닌다. 김환기, 그는 창작 에너지를 이미 과도하게 소비하고도 허기로 괴로워 여분의 에너지까지 또 소모하기 위해 광분한(?) 화가이지 않았을까. 김환기와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수필가이자 미술평론가인 김용준(1904∼1967)은 이렇게 썼다. “그는 예술에 사는 사람이다. 예술을 먹고 예술을 입고 예술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사람이다.” 김환기의 모든 일상과 모든 생각, 모든 시공간이 예술이었다는 얘기? 서울 종로구 부암동에 있는 환기미술관은, 우리가 눈먼 지지를 보내도 무방할 게 틀림없는 김환기의 작품을 숱하게 관람할 수 있는 공간이다. 그의 유화, 드로잉, 구아슈, 오브제 등 2000여 점의 작품과 유품, 저서, 편지, 다큐멘터리 사진 등속을 소장한 미술관이니까. 명망에 걸맞은 걸작들, 그리고 유품들에 서린 일상의 흔적과 사유를 만날 수 있어 즐겁고 값진 공간이다. 북악산과 인왕산이 겹으로 품을 벌려 사람들을 보듬는 곳. 봄이면 산벚꽃, 개나리, 진달래 등 온갖 어여쁜 꽃순이들이 맨발로 우르르 달려올 듯 반색하는 산동네. 자연 풍치로 낙원을 꾸려 서울에서 드문 이색 지대인 부암동이다. 환기미술관이 이 부암동에 있어 찾아가는 발길이 가뿐하다. 짙푸른 산자락 갈피에 그림엽서처럼 곱상하게 꽂힌 작은 집들과, 저 너머가 문득 궁금해지는 언덕길, 그리고 골목골목에 감도는 의외의 적막감이라니. 이렇게 슬슬 걷기에 좋은 길의 안통, 주택가 고즈넉한 곳에 환기미술관이 있다. 대문을 들어서자 흙 마당이다. 소나기라도 쏟아지면 흙내가 훅 끼치려나. 서울에서 토속적인 시골 마당을 보게 되다니. 요란한 이방에서 구수한 고향 원주민을 만난 듯 반갑다. 김환기의 정신을 담은 미술관의 마당답게 자연스런 서정이 깃들어 정겹다. 부정형(不定形)의 경사진 터에 들어앉은 건물은 석 동이다. 본관과 별관, 그리고 달관이 저마다 상이한 형상을 가지고 공간을 분할한다. 넓지 않은 터전에 건물 셋이 있으니 여백이 부족해 옹색할 만도 하지만 층계로 유도되는 동선의 다변성으로 활달하다. 나무 정원의 푸름이 주는 생동감으로 헌칠하다. 건물들의 외양은 언뜻 보면 상자처럼 단순하다. 그러나 일단 기능성을 극대화한 건실한 풍모이며 섬세한 미학이 입혀져 당당하다. 본관의 구성과 디자인은 특히나 옹골차다.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풍색이다. 환기미술관 설립을 주도한 건 김환기의 아내 고 김향안 여사. 돌아보면 모든 게 사랑이자 백년동맹이었나? “한 사람이 사라졌을 뿐인데 온 우주가 텅 빈 것 같다.” 김향안은 사별의 허탈한 심경을 그렇게 토로했다. 그리고 홀로 남은 생애 중에 해야 할 오직 유일한 일은 남편을 기리는 기념관 건립에 있다는 양 집념과 뚝심을 다해 미술관을 건립, 1992년에 개관했다. 미국에서 살았던 김향안은 소장하고 있던 남편의 모든 작품을 유럽의 이름난 미술관에 줄 계획이었단다. 그러다 생각을 바꿔 한국에다 아예 미술관을 지어 기증하기로 하고 ‘환기재단’을 만들어 일을 추진했다. 이렇다 할 독지가 하나 없는 상황에서 틈틈이 김환기의 작품을 팔아 자금을 조달했다. “사람을 울릴 수 있는 미술이어야 한다” 설계자는 재미 건축가 우규승. 콜롬비아대학 유학생 시절부터 김환기 내외를 부모처럼 섬겼던 인물로 김환기의 일기에도 나온다. 과연 어떤 건축가에게 설계를 맡길 것인가. 김향안은 숙고했으리라. 김환기의 분신에 해당할 미술관이니 무엇보다 김환기의 삶과 예술을 잘 이해하는 사람을 찾았으리라. 기술의 집적이면서 예술까지 발현되는 건축물, 김환기의 작품과 혈연처럼 상통하는 미술관. 김향안이 지향하고 우규승이 추구한 건축은 아마도 그런 것이었을 테다. 이 미술관은 1994년 ‘김수근 건축상’을 받았다. 주변 자연에 순응하고 사람을 압도하지 않는 건축의 품새, 내부 전시공간의 변화감과 탁월한 전시기능 등을 높이 평가받았던 거다. 김환기는 어떤 화가였나. 밥 먹고 잠을 자는 시간 외엔 온통 그림과 맞붙어 산 인물이었다고 한다. 미술 작업으로 삶을 실감하는 감관의 소유자? 주로 작업실에 붙박이 장롱처럼 붙어살았으니 창작의 충일감이 그의 붓을 노래하게 하고 춤추게 했으리라. 열정, 또는 탐욕스러울 지경의 창작 욕구 자체가 그의 재능이었을지도. 인간사의 모든 경향과 마찬가지로 뛰어난 예술가는 남다른 노력으로 고귀한 종(種)의 반열에 오르며, 고귀한 영혼은 매너리즘에 사로잡히지 않아 진취적이다. 지금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혜안과 용기. 이것이 김환기라는 예술이 보유한 특별 자산이지 않을까. 르네상스적 지성인이었던 그는 면밀한 성찰과 민감한 촉으로 자신을 읽고 미술을 해부했다. 그러면서 시대의 지도를 읽어 가야 할 좌표를 스스로 찍었으니 그를 일러 ‘한국 현대추상미술의 선구자’라 한다. 독자적인 추상미술의 완숙한 경지에 도달하기 이전에 그가 섭렵한 구상과 반추상의 여정 역시 탁발한 것이었다. 초기의 구상 작품은 다분히 서정적이고 감각적이어서 빼어났다. 이후 달항아리, 학, 매화 등 한국의 민족 정조를 표상하는 소재들을 통해 한결 현대적인 작풍을 시도했고, 마침내 무수히 많은 점을 찍어 그린, 이른바 전면점화(全面點畵)로 순수추상의 극점에 도착하면서 세계적인 작가의 대열에 들어섰다. 조형적 변신을 관습으로, 신세계적 회화 언어의 개발을 본분으로 삼아 거둔 결과물이었다. 구상에서 추상으로, 객관에서 주관으로, 현상에서 본질로, 해석에서 관조로, 김환기는 그런 관점 이동을 통해 세상을 더 깊고 넓게 보고자 했나보다. 순수추상으로의 질주 경위를 알게 하는 그의 진술이 여기에 있다. “미술은 철학도 미학도 아니다. 하늘, 바다, 산, 바위처럼 있는 거다. 꽃의 개념이 생기기 전, 꽃이라는 이름이 있기 전을 생각해보라. 막연한 추상일 뿐이다.” 환기미술관은 해마다 두 차례 김환기 기획전을 펼친다. 올 하반기 타이틀은 ‘수화시학’(樹話詩學)전이다. ‘수화’는 김환기의 호. 영리한 애호가들이여, 시에도 조예가 깊어 시적 상상력으로도 그림을 그렸을 김환기의 기재(奇才)와 문재(文才)를 그림에서 명민하게 찾아보시라! 미술관의 기획 취지는 그런 것일 게다. 사실 김환기는 상당한 분량의 시와 산문을 남겼다. 시로써 먼지와 소음에 미만한 세상을 관조했고, 시어의 유희와 조탁으로 예술정신을 표출했다. 그는 “미술에는 노래가 담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사람을 울릴 수 있다”는 거였다. 김환기의 글쓰기와 시학은, 자신의 그림에 최루성(催淚性) 감흥 요소를 어떤 방법으로 주입할 것인가에 관한 모색의 과정에서 나온 게 아니었을까. 김환기의 눈은 망원경이나 현미경이 장착된 눈? 그는 세심하게 멀리, 혹은 깊숙이 바라보았다. 비 내리는 날의 전차 내부 풍경을 쓴 다음 글을 보면, 그의 유심한 관찰엔 허비가 없고, 그의 회화정신은 일상에서 무르익은 내공의 산물임을 짐작할 수 있다. “(전차를 탄 승객들이) 짚고 앉은 우산에선, 빗물이 흐르던 정거장까지의 거리 여하에 따라서 가늘게, 굵게, 짧게, 길게, 강하게, 약하게, 리듬 있는 속력을 가지고 물이 흐른다. 선(線)이 가고 오고, 멈추고 흐르고, 곧게 혹은 휘어지고, 서로 뭉치었다 헤어졌다. 인간의 무연(憮然)한 이 합작에서 나는 놀라운 구성미를 알았고, 회화정신으로 돌아가 보기도 한다.” 겉볼안이라고, 겉만 보고도 속을 알 수 있다는 얘기가 있지만 환기미술관 본관의 속은 겉보다 웅숭깊다. 군더더기 없이 명증한 구조로 아름답다. 모든 구성이 김환기를 향한 일종의 헌화인가? 설계자는 위대한 화가의 작품에다 건축의 궁합을 맞추기 위해 진땀깨나 쏟았겠다. 이번 기획전엔 대형 전면점화 10여 점을 비롯해 모두 200여 점을 내걸었다. 김환기 작품의 심원한 숲에선 새가 날고 달이 뜬다. 자연의 숨결이 스멀거리고, 안도할 만한 적막감이 선(禪)처럼 광활한 뉘앙스를 풍긴다. 불멸의 대표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시리즈’를 보라. 강력한 자장을 발산한다. 화가는 점점이 찍은 무수한 점으로 삶과 사랑을, 자연과 순리를, 해탈과 우주를 이야기했나? 어떻게 보든 무방할 테다. 점 하나하나를 세포 입자로, 그리움을 기록한 엽서로, 도통한 나한(羅漢)의 눈알로, 혹은 우리가 끝내 돌아갈 저 밤하늘의 별로, 그저 이렇게 저렇게 보더라도 답일 거다. 분명한 건, 어떤 거대한 질서가 응축된 하나의 소우주로 다가오는 그림이라는 사실이다.
- 2020-09-2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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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만의 낙원을 꿈꾸었다, 그러나…
- 안녕, 시골아, 드디어 내가 너에게 왔노라! 그에겐 그렇게 흐뭇한 인사말을 읊을 겨를이 없었다. 경기도 화성시에서 사업을 하다 귀농한 김열홍(60) 씨. 그의 귀는 얇은 귀였나? 그는 “농지며 집이며 거저 쓸 수 있으니 몸만 오라”는 지인의 달짝지근한 권유를 받고 설레어 달려 내려간 참이었다. 그러나 막상 가서 보니 상황이 영 달랐단다. 믿었던 사람에게 된통 당한 셈이다. 그러나 열홍 씨는 부아를 가라앉히고 얌전히 눌러앉기로 작정했다. 속인 건 지인이지만 홀린 건 나 자신이지 않은가, 내가 나에게 속은 꼴이지 않은가, 남 탓할 것 없다! 그냥 그렇게 여기고 후루룩 상황을 넘어서기로 했던 모양이다. 약간 요상한 귀농 시발이었다. 진즉부터 시골살이에 뜻을 두었기에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왕 내친김에 한바탕 열심히 뛰어보기로 다짐하자 새삼 흥미가 동했던가보다. 한 방 얻어맞고서야 귀농에 본격적인 발동이 걸렸던 거다. 이렇게 뒤늦게 엄청 진지해진 열홍 씨, 일단 도시에 있는 부동산을 싹 처분해 7억 원쯤의 귀농자금을 만들었다. 그건 그가 믿을 만한 가장 유력한 ‘실탄’이었다. 돈을 일컬어 ‘요물’이라고도 하고 ‘웬수’라고도 하지만, 그는 비장하게도 ‘실탄’이라 부른다. 내가 쥔 자금이 떨어지면 성벽을 넘어 거침없이 돌진해오는 세파의 기총소사에 대응할 길이 없다는 인식에서다. 그래 실없이 실탄을 낭비하지 않고 가급적 효율적이고도 참신한 전투에 임하기로 결심한 병정처럼, 열홍 씨는 최대치의 슬기를 발휘해 자금을 잘 운용하기로 하고 귀농열차를 집어탔던 것이다. 그 결과는? 귀농 10여 년이 흘렀으나 아직은 알 수 없다. 그건 그의 목숨이 다하는 날에 따져볼 사안일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는 귀농생활에 인생의 모든 것을 쏟기로 결정했으며, 실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었다고 자부하기 전에 도출되는 대차대조표는 잠정적인 결과물에 해당하거나 무의미한 문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인생이란 뜨거운 프라이팬에서 3도 화상을 입으며, 또는 자주 뒤집어지며 익어가는 빈대떡과 이웃사촌. 용을 쓰더라도 엎치락뒤치락, 삶이란 굴곡과 파란으로 점철되는 꽤나 허무맹랑한 레이스라는 걸 그도 잘 알지 않겠는가. 일희일비하지 않고 갈 때까지 가보리라! 이게 열홍 씨의 생각인 것 같다. 그렇더라도 지금까지의 추세라는 게 있을 텐데, 한마디로 오랫동안 주로 죽을 쑤었다. “귀농에 만족하느냐고 내게 묻지 마라. 그 답을 나도 잘 모르겠기 때문이다.(웃음) 때론 만족스럽다가도 때론 힘겨워 불만스럽다. 이곳에 자리 잡은 게 11년 전인데 5~6년 동안은 수익이 아예 나질 않더라고. 해마다 적자였지. 그럼에도 투자를 계속해왔다. 규모를 키우는 게 난관을 돌파할 길이라 판단하고서였다. 그러면서 ‘실탄’을 꽤나 허비했다. 다행스럽게도 4~5년 전부터는 ‘똔똔’이거나 약간의 흑자가 나고 있다.” 그는 처음 한동안 고추농사를 지었다. 그러나 완전한 실패를 보고 2000평 규모의 사과농장을 조성해 공을 쏟기 시작했다. 10여 마리에 불과했던 한우도 70여 마리로 늘려 사육하고 있다. 실로 모처럼 쏠쏠한 흑자를 본 작년의 경우, 사과로 올린 매출액이 5000만 원 정도. 이 가운데 60%쯤이 순수익이란다. 한우 사육에서도 비로소 자금회전이 시작되고 있다. “뭐 하나 생각대로 되질 않았다” 자칫 적자를 보는 일에 도통하기 십상인 게 농업이다. 그렇다고 꼭 그러라는 법이 있겠나. 매사가 썩 이상하게 돌아갔으나, 그는 굴하지 않고 성난 얼굴로 현실을 돌아보길 거듭했으며, 활로를 찾기 위해 몸과 머리를 아낌없이 써왔던 것 같다. 염소 털처럼 허옇게 쇤 그의 턱수염은 분투의 소산일 게다. 그 결과 서광이 들이쳤나? “이제 웬만히 자리가 잡혔다고 볼 수 있다. 그간 애환이 많았다. 뭐 하나 생각대로 되는 게 없었다. 천당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하는 나날들이었지. 공연히 거액의 자금만 날리기도 했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건 끔찍한 경험이었다. 문제의 핵심은 귀농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내려왔다는 데에 있다.” 준비한 건 오직 자금뿐이었나? “그렇다. 호밋자루 한 번 손에 쥔 경험이 없는 문외한이 겁 없이 농사에 덤벼든 꼴이었다. 뭐든 잘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거든. 이게 오산이었다. 기술 없이 농사에 뛰어들었으니 노력을 해본들 쉽게 풀릴 일이 아니더라. 뒤늦게 농업교육기관을 찾아다니며 기술을 배웠다. 1년 과정의 한우대학도 수료했다.” 귀농은 왜 했지? 목적이 뚜렷했다면 사전 준비도 부실하지 않았을 거 같아 묻는 얘기다. “조용한 시골에 나만의 작은 낙원을 만들고 싶었다. 지금 생각하면 꽤나 낭만적인 꿈이었다. 경치 좋은 곳에 원하는 집을 짓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고, 농사 노동으로 떳떳한 시간을 보내고, 가끔 하루 이틀쯤 자유로운 여행을 즐길 수 있는, 뭐 그런 소박한 기대가 있었으나 아직 낙원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다. 사실 인간사에 낙원이 어디 있겠나. 감상적으로 살 일이 아니더라.” 농사로 큰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고? “돈벌이가 목적이라면 도시를 떠나지 않았겠지. 사업이 괜찮게 돼 가만 있어도 통장에 돈이 늘어나는 상황이었거든. 그런데 인생에는 돈벌이보다 중한 게 있지 않던가? 내 마음이 흘러가는 곳에 살며 내가 원하는 일을 하는 것. 이게 좋은 인생이지 않을까. 난 귀농을 통해 한결 나은 삶이 가능할 거라 믿었다.” 귀농보다 귀촌이 이상적이지 않았을까? 텃밭 농사 정도나 하며 태평한 세월을 즐기는 귀촌 말이다. 당신은 독신이다. 7억 자금이면 놀면서 슬슬 까먹어도 평생을 살 수 있을 게 아닌가. “아하. 특정한 직업 없이 지내는 무위도식은 내 적성에 맞지 않다. 일과 맞부딪쳐 뭔가 보람을 끌어낼 게 없는 생활에 무슨 활기가 있겠나, 무슨 재미가 있겠나.” 비록 고행과 시행착오의 연속이었지만 농업이 지닌 매력과 흥미를 과소평가할 수 없더라는 얘기로 들린다. 그에겐 피땀 흘려 생산한 사과가 팔리지 않아 숭숭 썰어 소 사료로 주는 식의 환장할 만한 혼선이 잦았다. 그러나 농사는 어디까지나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자유 직종이라는 것, 이상과 자질을 마음껏 실험하고 교정할 수 있는 인생교실이라는 것, 게다가 정년이 없어 무기력한 노년을 살지 않을 수 있다는 것 등등, 열홍 씨는 농사가 지닌 긍정적 속성에 전적인 지지를 보낸다. “가령 농산물이 안 팔리더라도 남 탓을 할 게 없다. 모든 게 나의 능력, 기술, 전문성의 여부에 따른 결과물이기 때문이지. 그러고 보면 농사란 가장 자립적인 형태의 직업이다.” 그는 ‘모든 게 나의 문제’라는 걸 자주 자신에게 세뇌하며 사는 사람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자기학습의 효과는 커 그를 좀체 실의에 잠기게 하지 않는다. 농사로 맞닥뜨리는 난관이 이를테면 어떤 외부의 흉계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으로 한숨과 낙담에서 신속하게 벗어날 수 있는 힘과 깡을 끌어내는 것 같다. 저 잘난 농업정책의 협찬이나 선한 이웃의 과도한 헌신을 기대하는 따위도 그의 본성에 맞지 않아 남세스럽게 여길 따름이다. 진격에 취한 캐터필러 그런데 열홍 씨가 직면한 넘어야 할 산은 농사만은 아니라는 점을 얘기해야겠다. 그의 콩팥은 좀 서러운 콩팥이다. 기능을 상실한 탓에 그는 1주일에 사흘은 신장 투석을 한다. 월, 수, 금, 3일간은 거의 종일 병원에 누워 혈액을 걸러낸다. “나이 들면 누구나 한두 가지 질병은 다 가지고 산다. 그저 내 복대로, 내 팔자대로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다. 병원에선 의사에게 맘 편히 투석을 맡기고, 집에선 몸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일에 묻혀 산다.” 동네 이웃들은 당신을 ‘인간승리’의 주인공이라 칭찬한다. “무슨 그런 과한 얘기를.(웃음) 남들은 수백 마리의 소도 기르고, 수만 평 규모의 사과밭을 경영하기도 한다. 난 그 반의반도 못 따라가고 있잖은가. 농사일에도 아직 서툴러 사실 그냥 시간만 때우고 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콩팥에 문제가 생긴 건 언제부터? “40대 초반에 이상이 왔다. 플라스틱을 다루는 공장을 운영한 게 원인이었던 것 같다. 그래 한동안 일을 놓고 쉬었으나 결국은 신장이식을 받게 되었지.” 공기 좋은 시골에 살며 중한 병을 고친 이들도 있다. “귀농하자마자 어쩔 수 없이 과도한 피로와 스트레스가 겹치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이식받은 콩팥을 달고 산 지 12년 만에 완전히 망가지더군. 투석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게 형제 하나가 콩팥을 주겠다고 했으나 사양했다. 나 좋다고 형제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시골에 들어와 병을 고친 사례는 나도 좀 알고 있다. 그러나 내 병은 좋아질 병이 아니거든. 계속 끝까지 투석해야 하고 식이요법도 충실해야 한다.” 그런 건강 상태로 열심히 농사를 한다는 게 어디 쉬운가. ‘강철 인간’이라 불러도 무방하겠군. “난 어릴 때 지금보다 훨씬 지독한 고난을 겪었다. 먹을 게 없어 사나흘씩 굶기를 자주 했고, 심지어 20일간 물만 마시며 견디기도 했지. 아마 그런 경험들이 나를 꽤나 강하게 만들고 독립적인 근성을 길러준 게 아닐까. 난 지금도 알몸으로 어디에 던져져도 밥을 벌어먹을 수 있는 사람이다.(웃음)” 자신을 완벽하게 통치하는 인간 유형? 열홍 씨는 차돌처럼 야무지다. 불편한 몸 상태에 희한하게도 거의 무심하거나 태연하다. 간혹 표정이 딱딱해지기도 하지만, 그건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사람의 버릇일망정 병세에 상심하는 징후로는 보이지 않는다. 피로, 두통, 요통 등 신장투석에 따르는 불편이 자심할 터이지만, “난 그런 거 몰라!” 하는 투로 유유한 게 아닌가. 그는 신장 투석을 시작하며 유능한 일손 하나를 고용했다. 축사며 과수원을 혼자 건사하기엔 역부족이라 동원한 인력이다. 도시에서 내려온 이 일손은 귀농 지망생으로 향후의 귀농을 위한 예행연습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난 셈이다. 열홍 씨로선 신통치 않은 재무구조에 월급이 나가 부담이야 되겠지만 한숨 돌릴 수 있었을 게다. 이렇게 그는 동갑내기 직원과 둘이 5년째 동거하며 일을 한다. 오직 끔벅거리는 눈으로 언어를 발하는 소들의 비위를 맞춰주고, 사과나무들이 간혹 청원하는 민원을 접수해 해결해준다. 그 와중에 그가 남몰래 해온 일이 또 하나 있다. 과수 농가들에게 쓸모가 많을 그 뭔가 새로운 도구들의 개발에 열을 내왔던 것인데 2017년, 마침내 ‘가지 유인(誘引) 철 클립’을 발명해 특허를 받았다. “과수 농사에서 가지 유인 작업은 가장 중요한 과정의 하나다. 가지들을 적절히 늘어뜨리거나 구부려줘야 생산성이 높아지기 때문이지. 그동안 흔히들 콘크리트로 만든 추(錐)나 플라스틱 물병을 가지에 주렁주렁 매달아 유인을 해줬다. 내가 만든 ‘철 클립’은 획기적으로 간소하고 효율적이다. 현재 농가들의 반응이 매우 좋다.” 창의(創意)의 산물이구나. “도시에서의 오랜 전공이 기계설비였다. 농사를 짓더라도 전공을 살려 만든 장비나 기구를 도입하자는 생각이었지. 내겐 다종다양한 아이디어가 있으며 나름 연구를 해왔다. ‘가지 유인 철 클립’은 개발이 실현된 한 가지일 뿐이다.” ‘철 클립’ 매출액은 어느 정도? “출시 이후 약 3000만 원의 소득을 올렸다. 이제 막 알려지고 있는 과정이라 차후의 매출 상승을 예감한다. 소비자들과 만나기까지 쉽지는 않았다. 특허를 내고 홍보를 하는 등 그간 1억 정도를 투자했지만 충분히 회수가 가능할 거라 본다.” 당신의 귀농 역시 결국은 안정적인 행복을 누리기 위한 방편이겠지? “소들의 순한 눈망울, 새벽이슬을 매단 사과나무, 눈부신 아침 햇살, 이런 것들이 주는 짜릿한 전율이 행복의 감정일까. 한 사람의 월급을 주고, 나 먹고살 형편은 되고, 이 역시 행복이겠지. 그러나 행복은 순간에 왔다가 순간에 사라진다는 걸 안다. 과욕 없이 시간을 소중하게 쓰고 싶다. 몸 아픈 사람들에겐 시간이 한결 귀하다. 시간을 선용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난 그쯤의 인간이길 바란다.” 비록 시련이 많지만, 지금 살아가는 방식,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열홍 씨는 별 유감이 없다. 아까운 시간을 선용해 현재보다 더 나아가고자 하는 갈증. 이건 뜨거운 목마름이다. 그렇기에 건강상의 한계나 노동의 과중함마저 그는 곧잘 무시하는 것 같다. 진격에 취한 캐터필러처럼. 김열홍 씨가 주는 Tip •귀농하기 전에 철저한 준비를 하자. 기술 습득 없이 농업에 나섰다간 십중팔구 실패하기 때문이다. 시골 농가에 일꾼으로 1~2년쯤 취직해 살며 농사를 익힌 뒤 귀농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똑똑한 인재다. •집부터 먼저 잘 지을 거 없다. 자금을 아껴 써야 살아남는다. 근사한 집을 지었더라도 나중에 팔 일이 생겼을 경우엔 낭패를 볼 수 있다. 좀체 팔리지 않는 게 전원주택이니까. •깊은 산골의 집성촌으로 귀농하면 텃세에 시달릴 수 있다. •귀농을 하면 일단 베풀며 어수룩하게 처신하라. 술자리, 회의자리 등에 적극 동참해 사교를 하라. 잘만 사귀면 원주민들이 결국엔 귀농인의 조력자가 된다.
- 2020-09-11 08: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