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산에 밀려 죽제품들이 없어지긴 했지만, 긴 세월 담양의 상징으로 자리 잡아온 대나무숲을 보러 죽녹원부터 찾았다. 하루에 1m 이상 자라 총 30m까지 크는 큰 키의 왕대부터 분죽, 맹종죽까지 다양한 종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래서 여름에는 주변보다 3~4℃가 낮단다. 이곳에 오니 유난히 더위를 타던 남편을 위해 죽부인을 사오셨던 어머니가 생각났다. 아버지가 매일 껴안고 주무시던 그것의 이름에 하필이면 ‘부인’이 들어가, 어린 마음에 질투가 나기도 했었다.
현장에서의 공부를 통해 이름만 대나무일 뿐 대나무는 나무가 아닌 풀의 일종이라는 것과 1년 안에 다 큰 후에는 계속 딱딱해지기만 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안내판들을 읽으며 죽림욕을 할 수 있다는 산책로를 돌다 보니 금방 한 시간이 지났다.
죽녹원에서 나와 바로 길을 건너면 관방제림이다. 관방제는 과거에 관비(官費)로 연인원 3만여 명을 동원해 만든 제방이다. 둑 위로 약 2km에 걸쳐 거대한 풍치림들이 늘어서 있는데 이를 ‘관방제림’이라고 부른다. 추정 수령 300~400년에 달하는 천연기념물들이 이 구역 안에만 185그루가 있다. 모두 이름표(00호)를 달고 어린 인간들을 압도하고 있다. 왕복 한 시간 정도를 걸으면서 아름드리나무들을 껴안고 세월의 냄새를 맡다 보면 허기가 느껴진다. 그럴 때는 다리 건너 ‘국수거리’로 이동해 멸치국물국수 한 사발로 속을 데우면 된다.
여행지에서의 늦가을 아침 식사는 뜨끈한 것으로 해야 온몸의 기가 돌기 시작한다. 그래서 TV조선 프로그램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이 추천한 곳을 찾았다. 연로하신 주인장 부부는 점심까지만 식당을 운영한단다. 그렇지만 밥상을 받자마자 오랜만에 탄성들이 튀어나왔다. 전라도 밥상이라 은근히 기대를 했는데 그것을 훨씬 뛰어넘고도 남는, 다양하고도 맛깔 나는 반찬들 때문이었다. 전날 저녁, 석쇠에 구워 먹음직스럽게 나올 떡갈비를 기대하며 인터넷 검색 1위인 큰 식당에 갔다가, 햄버거 패티 같은 맛에 실망했던 우리는 신음에 가까운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다음 날 아침도 그곳에서 먹었다. 법성포의 친정에서 직접 올린다는 조기를 비롯해 손수 마련한 반찬들의 맛을 다시 보고 싶으니 우리를 위해서라도 오래 사셔야 한다는 부탁을 드리며 식당 문을 나섰다. 마침 식당 앞에서는 오일장(2일, 7일)인 담양전통시장이 열렸다. 하지만 죽제품들은 사라졌고 살아 움직이는 토끼와 닭 그리고 검은 고무줄 같은 예전의 일용품들만이 과거의 모습을 가늘게 전하고 있을 뿐이었다.
담양의 관광 명소인 메타세쿼이아 길은 50년 전 가로수 조성 시범사업 당시 8.5km의 국도변에 5000그루의 묘목들을 심어 조성했다. 원산지가 중국인 메타세쿼이아는 30m 이상까지 곧게 뻗으며 자라 시원한 기상이 남다르게 보일뿐더러 이국적인 경관까지 자아낸다. 어제 본 왕대까지 연이틀, 목을 빼 올려다볼 정도로 키가 큰 담양의 키다리들을 만나며 걸었다. 매표소부터 걸어 왕복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지만 카메라 렌즈를 유혹하는 황홀한 가을 색깔은 시간 개념을 상실하게 만들었다. 진한 가을의 풍취가 일행들의 가슴속 깊이 박혔는지, 상경하는 내내 큰 가로수만 보이면 “저기도 메타, 여기도 메타”라며 소리칠 정도로 메타세쿼이아의 잔상은 강렬했다.
오후에는 담양호를 걸었다. 일명 가마골은 영산강의 발원지인데 이곳에서 흘러나온 물은 담양호에 모인다. 담양호 국민관광지에서 시작하는 둘레길은 두 시간 정도 걸으면 된다. 호수 둘레에 설치된 목재 덱은 크고 작은 물고기들과 물속에 투영되는 마지막 단풍도 가까이 감상할 수 있게 도왔다.
풍경에 빠져 느리게 걷고 있는데 친구 사이로 보이는 늙은 남자 둘이 뒤따라왔다. “네가 이렇게 나를 잡으니 나도 힘들고 너도 불편하잖아. 서로 요렇게 잡아보자고!” 돌아보니 몸이 불편한 두 사람이 상대방의 손을 꼭 잡고 휘청거리며 걷고 있었다. 순간 가슴이 아려왔지만, 성치 않은 몸에 여기까지 와서 가을 호수를 같이 볼 수 있는 친구가 있는 행운아들이라고 마음을 고쳐먹으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소쇄원 방문 일정까지 끝내고 상경하는 길, 백수 중 하나가 못내 아쉬운 속내를 드러내며 유혹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여기까지 왔는데, 언제 여기를 또다시 오겠느냐!”라는 초식을 펼친다. 여기에 홀라당 넘어간 일행은 내장산 백양사로 차를 돌려 연장 여행에 돌입했다. 고즈넉하면서 깊은 가을의 마지막 담양 풍경은 그렇게 시니어들의 가슴에 담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