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숙(63) 씨는 전남 여수의 쌍봉종합사회복지관에서 10년째 장애인 활동지원사로 일하고 있다. 그는 “우리는 일상을 사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지만, 장애인은 모든 게 불편하다. 작은 도움이지만 장애인과 나누고 싶었다”면서 일을 시작하게 된 배경을 말했다.
김혜숙 씨는 봉사활동에 워낙 관심이 많았다고 밝혔다. 과거 과외 교사였던 그는 학생들과 함께 장애인 시설 등에 봉사활동을 가고는 했다고. 김혜숙 씨는 “돌이켜 보면 그때의 경험이 신체적, 정신적으로 영향을 준 것 같다”고 말했다.
벌써 10년. 그가 일하면서 느낀 직업의 장단점은 무엇일까. 장점에 대해 “장애인에 대한 시각이 변한 게 느껴지고, 작은 도움이지만 그들의 삶의 질을 높여준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반면 단점으로는 소통이 안 될 때를 꼽았다. 장애인 활동지원사는 대소변 받기는 물론 청개구리처럼 행동하는 장애인의 고집을 꺾어야만 한다.
“사람과 사람이 함께 하는 일이라 소통이 중요하더라고요. 신체는 중증이라도 소통은 잘 되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소통에서는 지적장애인 분들이 더 힘들더라고요. 막무가내에 고집이 센 분들이 많죠. 특히 예상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하면 활동지원사는 많이 당황하게 됩니다.”
또 다른 단점으로 김혜숙 씨 역시 급여 문제를 얘기했다. 시급이 신입이건 10년 이상 일한 사람이건 똑같다 보니 대부분의 장애인 활동지원사가 불만을 품은 부분이다. 김혜숙 씨는 “연차에 상관없이 일한 만큼 돈을 버는 것이다. 시급의 차등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복지관에서는 자체적으로 주휴수당, 연차수당을 챙겨준다고는 한다.
김혜숙 씨는 휴게시간 문제도 지적했다. 현장에서 일해 본 사람만이 아는 고충. 근로기준법에 따라 활동지원사는 4시간을 일하면 30분, 8시간을 일하면 1시간의 휴게시간을 가져야 한다. 휴게시간이 되면 근무시간 기록용 단말기에 카드를 접촉해 근무시간을 종료해야 한다.
김혜숙 씨는 “장애인을 돌볼 때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고, 쉴 수가 없다”면서 휴게시간 시스템의 개선 필요성을 토로했다. 법적으로 정해졌기 때문에 휴게시간을 갖지만, 휴식도 어려운데다 수입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 실제로 이 휴게시간 문제는 업계에서도 지속적으로 개선 필요성이 거론되고 있다고.
장애인 활동지원사는 1:1 매칭 시스템으로 운영되며, 한 번 장애인을 맡으면 오래 간다고 한다. 김혜숙 씨는 현재 맡은 2명의 장애인도 몇 년째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장애인이 아니라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을 못한다”라고 말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장애인은 누구일까. 김혜숙 씨는 초기에 만난 장애인 학생을 얘기했다. 시각과 청각 장애가 있는데 뇌성마비 증상도 가진 중증장애인이었다.
김혜숙 씨는 “그때는 나도 초보였기 때문에 정말 난감하고 어떻게 하지 싶었다. 아이의 등하교가 나의 의무였기 때문에 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적응됐고, 아이가 학교에 갔다 오면 말은 안 해도 얼굴이 환한 게 느껴졌다. 집에만 있으면 폐쇄적이 되는데 친구들을 만나고 규칙적인 삶을 사니깐 아이가 밝아졌고 나도 행복했다”고 소감을 전했다.
김혜숙 씨가 돈을 바라고 일했다면 지금까지 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신 그는 더 소중한 가치와 행복을 얻었다. 김혜숙 씨는 동년배들도 자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길 바란다. “중장년이 직업을 잃으면 막막함을 느끼지만, 조직에 속해 사회적 활동을 하면 자부심을 느낄 수 있다”면서 장애인 활동지원사를 추천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일할 수 있고, 나를 기다려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어서 행복해요. 경제적 보상도 따르면서 일의 보람도 느끼잖아요. 꼭 규칙적으로 일하지 않고, 힘들면 적게 일해도 되죠. 그래서 중장년에게 장애인 활동지원사를 추천해주고 싶어요. 누구든지 너무 걱정하지 말고 도전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어느 새 12월, 당신의 생일과 기일이 함께 있는 달이 돌아왔군요. 가는 해와 오는 해가 조우하는 달 12월. 당신은 그렇게 12월 중에 세상을 오고 갔네요. 당신 기억해요? 우리가 처음 만난 때도 12월이었다는 걸. 물론 기억하실 테지요. 만난 지 꼭 1년 되던 해, 그날에 결혼했으니까요. 우린 평범하게 만났지만 애틋한 사랑의 씨줄과 날줄을 엮기 위해 로맨틱한 무언가를 연출하고 만들어내곤 했지요. 처음 만난 날짜에 맞춰 결혼하기로 한 것도 그중 하나였고요. 그러고는 처음 만난 날에 헤어진 것도…. 하지만 그건 로맨틱한 결정이 아니었기에 1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이 아리고 쓰리네요.
남편의 폭력, 어이없는 감금 불러
“내 동생한테 감히 손찌검을 해요? 당장 헤어지세요. 폭력은 절대 용납할 수 없어요. 앞으로 다시는 만날 생각 말라고요.”
“처형, 집사람에게 손을 댄 건 정말 잘못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세요. 제가 지금 처형댁 문 앞에 있습니다.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제가 무릎 꿇고 빌려고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용서를 구한 후 다시 잘살아보겠습니다.”
나는 그날 당신이 집에까지 찾아온 것도 몰랐어요. 언니가 말해주지 않았으니까요. 방에서 훌쩍이느라 문 앞에서 일어나는 소동을 몰랐던 거죠. 하긴 문자로 주고받았으니 큰 소리는 고사하고 작은 소리도 들렸을 리가 없지요. 난 지금도 그 점이 의아해요. 언니처럼 성질 급하고 마음에 거슬리는 일이라면 냅다 소리부터 지르는 사람이 문 앞에 당사자를 두고 어떻게 그렇게 차분히 문자 소통을 할 수 있었는지. 하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은 그 후로도 계속됐지만.
당신한테 한 대 맞고는 속이 상해서 언니 집으로 달려갔지만, 이후 사실상 나는 언니네에 감금당한 꼴이 되었지요. 언니가 집으로 돌려보내 주질 않았으니까요. 난 그때까지만 해도 언니가 나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철없는 나보다 더 나를 염려해서 그런다고만 생각했어요. 왜 안 그랬겠어요? 당신도 알잖아요, 우리 자매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부모님을 교통사고로 한날한시에 여의고 중 3, 중 1이던 언니와 나는 친척집을 전전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에서 둘이 생활하게 되었지요.
친척들의 도움도 언니가 고등학교를 마칠 때까지였으니, 졸업 후 바로 취업이 되지 않아 전세금을 빼서 보증금을 얼마간 넣고 월세를 살면서 그 돈을 야금야금 생활비로 썼지요. 둘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버텨나갔지만,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던 언니는 아르바이트에 대한 열의를 잃고 그렇다고 마음 다잡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닌, 말하자면 방황을 하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보니 생활에 대한 부담은 내가 다 져야 할 형편이었지요. 하지만 운 좋게도 그런 와중에 나는 대학에 가게 됐고, 졸업하고 취업하던 무렵 당신을 만났던 거예요.
내가 만남 100일 기념 이벤트다 뭐다 하면서 애들마냥 유치하게 굴었던 것도 충분히 받지 못한 부모님 사랑에 대한 굶주림 탓이었다고 봐요. 그걸 당신한테 받으려 했으니 당신도 피곤했을 것 같네요. 하지만 당신은 날 기쁘게 해주려고, 내 기대에 맞춰주려고 나름 최선을 다했어요. 인정합니다.
다만 그날 결혼 후 처음으로 부부 싸움이 격렬했던 날, 당신이 나를 때린 것이 내게는 충격이었어요. 어떻게 날 때릴 수 있는지…. 무엇 때문에 싸웠죠, 우리? 지금은 생각도 나지 않는 걸 보면 사소한 일이었겠지요. 그렇지만 우리는 그 길로 헤어지게 되었지요.
언니의 시기 동생 부부 갈라놔
“언니, 나 이만 집에 돌아갈래. 그 사람이 걱정돼. 보고 싶기도 하고.”
“뭐라고? 너 지금 제정신이야? 한 번 때린 사람은 또 때리게 되어 있어. 계속 맞고 살래? 네가 뭐가 모자라서?”
“그 사람이 사과했어. 여기 있는 동안 문자도 오고, 전화도 오고.”
“뭐라고? 이리 내놔 봐.”
그래요, 언니는 분명 과잉, 과민반응을 했던 거예요. 처음에는 나를 걱정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점차 그게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어요. 무엇보다 부부 문제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 아닌가요? 아무리 동생이고, 다른 집과는 다른 각별한 자매라 해도.
언니는 결국 대학에 가지 못했어요. 학비 부담 때문이라고 본인은 포기의 이유를 댔지만 그건 핑계고 실은 성적이 안 됐던 탓이었죠. 대학생의 꿈도 멀어지고 다시 취업하기에도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졌던 언니는 그때부터 우울증을 앓았던 것 같아요. 그럴 만도 하지요. 부모님을 하루아침에 잃고 동생과 단둘이 남아, 당시엔 자신이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는 중압감이 얼마나 컸겠어요. 대학에라도 합격했다면 그나마 우울증은 피해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부턴 내가 언니의 보호자로 실질적 가장이 되었지요. 언니는 우울증 치료를 위해 병원을 가는 둥 마는 둥 하더니 그조차 곧 그만두더라고요. 치료비 부담보다 정신과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언니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하냐고요? 언니가 내게 주는 영향은 보통 이상이었기 때문이에요. 정상이 아니었죠. 언니는 내게 시기심을 느끼고 있었던 거예요. 물론 무의식적으로요. 비록 전문대지만 대학도 나왔고, 취업도 바로 되었고, 곧 결혼도 할 나에 비해 본인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고 여긴 것 같아요. 더구나 당신과 난 간호사로 같은 병원에서 만났고, 함께 장래의 꿈을 키워가는 걸 부러워했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언니가 나의 불행을 바랐다는 뜻은 아니에요.
남편의 교통사고, 생일이 기일 되다
“처형이 당신 걱정을 하는 건 당연히 이해하지만 당신이 미성년자도 아니고 너무 간섭이 심한 거 아니야? 도가 지나치잖아. 사과를 하려면 당신을 만날 기회를 줘야 하는데. 그리고 나는 당신에게 사과를 했고 당신도 이미 나를 용서한 마당에 처형이 왜 쌍지팡이를 짚고 나서냐고?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당신이 전화로 했던 말 기억나죠? 결국 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한 당신은 이 보 전진을 위한 일 보 후퇴의 심정으로, 일단 언니의 화가 누그러질 때까지 시간을 벌겠다는 마음으로 2년 기한의 외국 병원 근무를 택했지요. 그리고 3개월 만에 현지에서 교통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마침 당신 생일에. 그래서 생일이 기일이 되고 만, 세상에서 가장 슬픈 운명의 남자. 그게 벌써 10년 전 일이군요.
청천벽력이란 그럴 때 쓰는 말이더군요. 나도 그땐 언니하고 사이가 나빠져서 서로 얼굴도 안 보고 지낼 때였지요. 고집을 피울 걸 피워야지, 당신이 그렇게 떠나니 괜한 자격지심과 열등감에 막무가내인 언니가 꼴도 보기 싫더라고요.
물론 우리는 그때 얼마든지 다시 만났어도 되는 거였어요. 언니가 우리를 미행할 것도 아니고, 내 다리를 묶어 한쪽 끈을 붙잡고 있을 것도 아니고. 하지만 그때 언니의 우울증이 심해져서 혼자 둘 수 없어 당분간 같이 지내게 되었고, 그 점이 당신을 답답하고 화나게 했던 것 같아요. 나까지 당신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여겼던 거죠. 그 무렵 우리 사이가 서먹해진 것도 사실이었고요.
이래저래 심란하던 차에 바람도 쐴 겸 보수도 더 나은 곳에서 한 2년 일하고 오겠다고 했을 때, 내가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한 것도 어차피 나는 언니 옆에 있어야 해서 였어요. 당신의 손찌검이 빌미가 되어 별거를 원한다는 오해를 당신에게 주고 싶지 않아 당신의 결정을 존중했던 거지요. 그것이 당신과의 영원한 이별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고요. 당신이 그렇게 세상을 뜨자 언니는 뒤늦게 자신 탓이라며 자살을 시도했고, 반복되는 자살 시도로 지금도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는 중이랍니다.
남편 떠난 빈자리 채우는 유복녀
당신 그렇게 가고 나는 어떻게 살았냐고요? 나 당신한테 고백할 게 있어요. 당신이 외국으로 떠났을 때 나는 임신한 상태였어요.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말하려고 했지요. 근데 당신이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거지요. 그전에 왜 말하지 않았냐고요? 언니 때문이었어요. 가뜩이나 내게 열등감을 느끼는 사람이 질투와 시기심에 더 상태가 나빠질까봐 조심스러웠어요. 당신한테만 살짝 말하면 되지 그게 무슨 말이냐고요? 당신은 몰랐지만 언니는 그때 나와 당신의 통화 내용, 주고받은 문자를 다 체크하고 있었어요.
언니는 그때 당신이 나와 아주 헤어져서 떠났다고 믿고 있었거든요. 내가 그렇게 말했으니까요. 그런데 어떻게 임신 사실을 바로 말할 수 있었겠어요. 물론 방법을 찾고 있었지요. 언니 몰래 알릴 수 있는 길을. 편지를 쓸 수도 있었고요. 하지만 당신이 너무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이도저도 소용이 없었던 거지요.
이름은 혜원이에요. 당신과 나를 반반 닮았어요. 당신 떠난 빈자리를 채우고 있는 똑똑하고 예쁜 딸이에요. 혜원이는 이담에 커서 아빠, 엄마처럼 간호사가 되고 싶대요. 아, 그리고 나는 공부를 더해 정식 간호사가 되었어요.
이제 또 한 해가 저무네요. 당신을 처음 만나고, 당신과 결혼하고, 또 당신을 떠나보낸 12월이 이렇게 막을 내리려나 봅니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어릴 적 주입식 교육의 힘은 아주 세다. 우리 모두가 흔히들 아는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말고도 그 시절엔 각 지역의 특색이나 지역명은 모두 머릿속에 집어넣지 않았나 싶다. 그중에 영주도 있었다. 영주라 하면 무조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부석사 무량수전이 따라붙었다. 강산이 무수히 바뀌고 세상은 달라졌어도 부석사 무량수전의 고장, 경북 영주다.
또는 영주 사과일까. 선비의 고장답게 사찰이나 서원은 당연하다. 추억의 풍경이 곳곳에 남겨져 있어 도심과 골목길에서 가슴 뭉클한 그리움도 솟는다. 그리고 무섬마을을 지키며 그 땅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둘러보면 어디서든 수백 년 혹은 수십 년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영주 여행은 옛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고 말해도 괜찮을 듯하다.
물 위에 뜬 섬, 무섬마을의 외나무다리
영주의 내성천 맑은 물이 흐르고 있는 너른 모래톱, 그 위로 S라인의 곡선이 길게 이어진 무섬마을 외나무다리의 풍경이 무심하다. 물 위에 떠 있는 섬과 같다고 해서 무섬마을이다. 물 수(水), 섬 도(島). 수도리의 물섬이 무섬이 되었고,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외나무다리가 이 마을의 역사를 말해준다. 외나무다리 저편으로 수도교라는 콘크리트 다리가 놓이기 전까지는 300년 넘도록 무섬마을과 바깥세상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가 바로 이 다리였다.
홍수라도 나면 다리는 강물에 잠겼고 휩쓸려 내려가, 그럴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나서서 다리를 다시 놓곤 했다.
폭 20~30cm, 높이 60cm, 총길이 150m. 폭이 좁아 걸을 때면 아슬아슬해서 장대에 의지하기도 했다. 한 사람만 걸을 수 있는 폭이어서 예전에는 건너편에서 오는 사람이 보이면 지레 모래톱에 앉아 기다렸다고 한다. 지금은 외나무다리 중간의 몇 군데에 마주 오는 이를 피할 수 있는 ‘비껴다리’가 놓여 있다. 걷다가 어질하거나 자칫 기우뚱하다가는 물에 빠질 듯한 두려움도 생긴다. 다리 위를 걷는 발끝만 보며 걷다가 강의 물결에 취하면 낭패다. 그래서 강 건너를 잇는 이 다리는 그 옛날엔 시집올 때 가마 한 번 타고, 죽어서야 상여 타고 한 번 지나간다는 애환이 서려 있다.
삼면이 강으로 둘러싸인 물돌이 마을, 무섬의 느린 시간 속에 잠겨 모래톱에 주저앉아 저편을 바라보면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랫빛…’ 이 노래가 절로 입안에 맴돈다. 유려한 곡선의 아름다운 외나무다리는 이제 영화나 드라마, TV 예능과 CF 등의 촬영지로 알려지고 있다.
잠시 숨을 고르며, 무섬마을
“십 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에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뫼아리”. 시인 조지훈은 서울로 유학을 떠나면서 무섬에 남겨둔 아내와의 이별을 ‘별리’(別離)라는 시에 담았다. 조지훈 시인의 처가로 알려진 김뢰진 가옥은 마을 첫머리쯤에 있었다.
무섬의 집들은 새롭게 조성된 한옥마을과는 달리 늘 그 자리에 있던 풍경이다. 한때 100여 가구가 살았는데 지금은 50여 가구만 사는 작은 마을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무섬마을은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다. 우리나라에서 일곱 번째라고 한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도 선정되었다. 만죽재(晩竹齋), 해우당(海愚堂)을 비롯해 지정문화재가 10곳이고, 100년 넘는 고택도 그대로 남아 있다. 울 밑에 선 봉숭아도, 풀숲 가득한 곳에 피어난 들꽃들도 물씬한 그리움을 소환한다. 수백 년 켜켜이 쌓인 깊은 역사가 그대로 전해지는 옛집들이 고스란히 무섬마을이었다.
마을이 어찌 이리도 조용할까. 발소리조차 민망하다. 걷다가 호박이 매달린 담장을 향해 셔터를 누르니, 마당에서 일하시던 어르신이 “그게 뭐 볼 게 있기나 한가. 쓸데 있으면 그 호박 따가”란다. 그래도 되는지 싶어서 괜찮다고 하니 직접 두 개나 따주셔서 황송한 마음에 보물처럼 잘 모시고 왔다.
영주라 하면 부석사
유홍준 교수는 자연과 건축이 제자리를 지키며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문화유산 부석사는 그 어떤 표현으로도 나타내지 못한다고,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이라고 했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조선 땅 최고의 명상로’라 칭송한 부석사 당간지주 인근 은행나무 산책로는 여전하고, 그 길 위에서 홀로 명상에 잠겨볼 만하다.
천년고찰 부석사의 하이라이트 무량수전.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건물 중 하나다.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그 앞으로 펼쳐진 백두대간 능선의 풍광에 넋을 잃어보는 것도 부석사에서는 가능한 일이다. 온통 경사진 경내를 돌기엔 다리가 뻐근하고 숨찰 때도 있다. 하지만 영주까지 와서 어찌 유구한 세월의 흐름을 보여주는 목조건물 부석사에 들지 않을 수가 있을까.
마음 내려놓고, 소수서원과 선비촌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공인된 사립 고등교육기관으로 인정받았던 곳이다. 조선 중종 때 주세붕이 세운 서원의 효시이자 최초의 사액서원이다. 당시 향교나 서원은 지금의 중고등학교에 해당되는 교육기관이다. 향교는 국립인 반면 서원은 사립학교라 할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한 소수서원의 역사와 향기가 물씬하다. 서원 안으로 들어서면 때맞추어 선비 복장으로 글을 읽는 이들의 소리도 들을 수 있고, 하얀 고무신이 가지런한 그 뜰에 앉아 가만히 옛 선비들의 기운을 전해 받을 수도 있다. 선비교를 따라 너른 뜰을 지나면 선비촌으로 접어든다. 옛 선비정신과 전통문화를 이해하고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고래등 같은 양반님네 고택의 안마당과 대청마루, 담 너머로 철 따라 피어나는 꽃들과 배롱나무, 그리고 강학 시설과 저잣거리도 조성되어 있어 옛 선비마을의 풍취가 가득하다.
오래된 골목길을 걷다, 근대역사문화거리
현대 일상에서 찬찬히 되돌아보기 좋은 곳으로 영주 근대역사문화거리가 있다. 영주 원도심에 가면 근대 생활 모습과 건축물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근대 산업 시기의 양곡가공업을 짐작해볼 만한 풍국정미소, 문을 밀고 들어가니 여전히 동네 주민의 머리를 깎고 계시던 80년 전통의 영광이발소, 몇 걸음 건너편에 고딕 건축양식의 영주 제일교회가 붙어 있고, 근대 시기의 주거 생활을 엿볼 수 있는 영주동 근대 한옥은 주변으로 풀밭이 무성하다.
또한 관사마을은 역사문화의 공간으로 변화해가는 모습이다. 일제강점기에 영주-안동 간 중앙선 철도가 개통되고 철도 역무원들의 관사가 지어지면서 형성된 마을이 바로 이곳이다. 그래서 불리게 된 관사골은 반세기 훌쩍 넘는 세월 동안 칠이 벗겨지고 낡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일식 목조 관사 주택의 전형인 5호와 7호 관사를 볼 수 있었다. 열린 문으로 들어가니 집주인이 수리를 하는 중이다. 예전에는 집 안에 욕실과 화장실이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신기해하던 집이었지만, 근대 건축이라고 지정만 되면 뭐하냐 넋두리 한다. 낡고 헐어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수리를 할 수밖에 없다는데 곤란한 점이 많은 모양이다. 도시생활사적 가치가 크다지만 변화에 따른 관사골 주민들의 환경과 지속 가능한 삶의 여건도 염두에 둘 일인 듯하다. 그럼에도 낡은 지붕과 담벼락, 포도가 주렁주렁 달리던 안마당의 텃밭에서 정 깊은 추억이 솟는다. 관사골 저편 언덕 위로 부용공원이 내려다보고 있다. 흑백 필름 같은 풍경 속에서도 현재와 이어지는 스토리텔링은 계속된다.
육군에서 30년간 복무한 뒤 중령으로 전역한 김준한(63)이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신 귀농한 데엔 그럴 만한 절박한 이유가 있었다. ‘우선 건강을 회복하자!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없다!’는 신념이 그의 푯대였던 것. 인간만큼 다양한 재능을 지닌 생명체가 드물다. 그러나 육신의 구슬픈 비명 앞에선? 비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자구책을 모색하기 마련이다. 김준한은 귀농을 치유 방편으로 삼았다. 농사에 쏟는 정당한 근로와 산골의 자연환경에 잠재한 갖가지 치료제로 건강을 회복할 수 있다 보았다. 그가 내심 비상 사이렌을 켜고 찾아든 귀농지는 경북 예천군 감천면의 산골. 올해로 귀농 12년 차다.
김준한의 거처는 거듭 휘어지는 농로의 끝, 살짝 외진 산기슭에 있다. 머리카락 보일라 장독 뒤에 숨듯이, 야트막한 야산의 품에 폭신하게 안긴 터전이다. 다소 은밀하면서 매우 아늑하다. 이른바 명당이란다. 그는 지관을 대동하고 예천 일대를 돌아다니다가 이곳을 찾아냈다. 처음엔 경기도 양평 지역에서 터를 물색했다. 그러나 딱히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다지. 그래 고향인 예천에서 정착지를 찾았으며, 용케도 이곳을 발견하고 환호작약했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좋은 터와 인연이 되다니. 세상을 다 얻은 기분이었다.” 그는 사람의 기운을 돋우는 땅이 따로 있다고 믿는 것 같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이곳에 살면서 건강을 완연하게 되살렸다. 다시 말해 그에게 풍수는 아리송한 신비주의가 아니다.
여하튼 대뜸 편안한 기분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이다. 푸른 소나무 즐비한 야산이 두 팔을 벌려 집과 마당을 포옹하고 있으니 산이 보호자 역할을 하는 형국이다. 자연과 교류하며 은연중에 받을 수 있는 ‘인생 레슨’도 많을 환경이다. 이렇게 썩 이상적인 곳에서 김준한은 고독한 ‘나 홀로 귀농’의 막을 올렸다. 컨테이너 박스에서 숙식하며 고추, 감자, 옥수수, 고구마, 메밀 등을 심는 것으로 농사를 시작했다. 이후 자두 농사로 전환했다. 사전 준비는 충실했다. 전역 3년 전부터 귀농이라는 거사를 위해 차근차근 대비했다. 중도에 퇴장하는 불상사만큼은 경험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귀농을 하면 내 손으로 집을 짓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주관하는 전통공예건축학교에 등록했다. 2년간 대목장 신응수 선생의 강의와 실습에 참여해 집짓기의 기본을 배웠다. 전역 직전에 ‘제대 군인을 위한 귀농 교육’도 받았다. 이곳에 내려와서는 예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많은 걸 배웠다. 그 외에도 다종다양한 농업 교육을 받았다. 귀농 교육은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초심자가 믿을 만한 매우 유력한 기회라 본다. 수년간 열성껏 교육을 받자 마인드 자체가 달라지더라.”
자신감이 붙던가?
“자신감은 물론 성격마저 바뀌는 걸 경험했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쪽으로 변하는 나 자신을 바라보며 안도했다.”
흔히들 재배 작목 선정에 귀농 성패의 관건이 달려 있다고 본다. 자두를 주 작목으로 정한 이유가 있겠지?
“처음엔 채소류를 소소하게 길렀으나 포기하고 자두 농사 하나에 집중했다. 집 앞의 밭 450평을 자두 과수원으로 꾸린 게 출발점이었다. 애초 블루베리 농사를 구상했었다. 그런데 예천군 농업기술센터에서 만류했다. 가격변동이 심해 안전하지 않은 작목이라는 얘기였지. 그러면서 권장한 게 자두였다. 이건 예천의 특산물 가운데 하나라서 유리한 요소가 많다는 설명에 이끌려 자두 농사에 뛰어들었다.”
귀농 이후 10여 년째 자두 농사만 하고 있다. 좋은 선택이었나? 아무리 작목 선정을 잘하더라도 이상하게 돌아갈 수 있는 게 농사인데.
“주변을 보면 귀농에 실패하고 역귀농을 하는 이들이 드물지 않다. 그 원인 중에 가장 큰 건 영농 실패이며, 이는 주로 작목 선택의 오류에서 기인한다. 그런 점에서 난 매우 좋은 선택을 한 셈이다. 자두의 전망이 좋아 농장을 2300여 평으로 확대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혼자 능히 운영할 만한 이상적인 규모라 생각한다.”
소득은 어느 정도 올리나?
“연매출 평균이 3500만 원 내지 4000만 원이다. 이 중 순소득은 70% 정도다. 물론 날씨에 따른 기복은 있다. 어느 해엔 너무 이르게 내린 서리 피해로 매출 제로를 경험하기도 했다. 자두나무 하나에 온전히 남아난 자두가 겨우 두어 개에 불과했다. 난 흙의 진리를, 땀 흘린 만큼 대가가 돌아올 거라는 진실을 믿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하늘이 하는 일을 어떻게 방어할 수 있겠나? 그럼에도 자두 농사는 여느 작물에 비해 장점이 많아, 심지어 고행에 가깝다는 귀농 생활을 무난하게 이끌어왔다.”
스트레스 사라지자 건강도 좋아져
김준한의 귀농 이력은 어언 12년 차. 10년이 지나고서도 수렁에 빠진 듯 허우적거리는 귀농인들이 숱하지만 그의 자두 농사는 일찌감치 궤도에 올라섰다. 온갖 교육을 섭렵하면서 얻은 식견, 날이면 날마다 농장으로 달려가는 근면성, 그리고 자두나무의 비위를 맞출 줄 아는 머리와 감성으로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고 있는 셈이다. 대단한 매출은 아니지만 혼자 생활하기엔 섭섭할 게 없는 수입이라, 이쯤이면 자리가 잡힌 거라고 그는 자족한다. 무엇보다 귀농 목적을 이미 완수했다는 점이 그는 기쁘다. 농업 수익보다 건강 회복을 목표로 한 귀농이었는데 서서히 건강이 좋아지더라는 게 아닌가.
마음은 물론 몸이 아플 때 삶이 비로소 소중하게 다가온다. 따라서 아픔이, 고통이 지름길로 데려다준다는 소식이 고래(古來)로부터 지금까지 줄기차게 쏟아진다. 불굴의 의지로 병든 몸을 추슬러 농사는 물론 건강까지 부양한 김준한의 행장은 고통을 차라리 견인차로 삼아 빛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삶의 묘미를 웅변한다. 그는 중증 당뇨병으로 고초를 겪었으나, 어라, 농사에 병약한 육신을 투입하자 바뀌었다.
“오죽 암담했으면 아내의 격렬한 반대를 외면하고 달아나듯이 홀로 귀농을 했겠는가. 당수치가 600까지 올라가면서 시력이 나빠져 실명까지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써야 했다. 그런데 서서히 당수치가 정상으로 돌아오면서 안경을 벗었다. 당뇨병은 물론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았던 건강 상태가 현저하게 좋아졌다.”
귀농의 무엇이 치유 효과를 가져왔다고 보나?
“내 병은 군대 생활에서 피할 수 없는 스트레스 누적에서 온 것이었다. 지시가 주어지면 임무 기간 안에 종료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매우 컸다. 이건 고질적인 것이었으나, 정서적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조용한 산골로 귀농하면서 스트레스로부터 해방됐다. 깨끗이 벗어났다. 과도한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소규모 농사라서 즐거운 기분으로 일했던 점도 몸을 정비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좋은 공기와 물, 산야에 흔한 약초와 나물들을 섭취한 것도 득이 된 것 같다.”
일취월장일까? 이젠 예천 관내에서 알아주는 농가로 부상했다지?
“자두 농사에 관한 한 달인 소리를 들을 때가 됐다고 얘기하는 이들도 있다. 전국 각지에서 견학을 오는 농부들도 많다. 자두 품질과 생산성을 높일 수 있는 재배 시설인 ‘Y자 다주지 방식’을 공부하러 오는 이들이다.”
더도 덜도 말고 지금처럼만
‘Y자 다주지 방식’은 Y자 파이프 프레임에 자두 가지들을 가지런히 펼쳐 재배하는 기술로, 자두 생산량이 최대 5배에 달하는 등 이점이 많다. 그는 이미 안전한 수준에 올라선 탄력으로 머잖아 매출이 더욱 늘 거라 예측한다. 귀농 이후 드센 파도를 겪는 일 없이 행진해왔으며, 향후 탕탕 질주할 가능성이 열렸다고 상황을 읽는 것이다. 그러나 과욕을 경계한다. 돈 버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서다. 스스로 분수를 가늠해 매사 소박하고 조화로운 삶을 꾸려가고 싶은 것이다. 그게 귀농의 목적 중 한 가지이기도 했다. 그리 살자고 집도 자그맣게 지었다. 흙과 나무로 지은 15평짜리 한옥이다.
“자금 사정도 고려했지만 소탈하게 사는 게 좋다는 생각으로 간소하게 지었다. 내가 도연명을 좋아한다. 그의 ‘귀거래사’를 보면 소박한 생활 정경이 나오더라. 작은 초가를 짓고, 작은 텃밭을 만들고, 뜰엔 복숭아와 자두나무를 심어 자족하는 옛사람의 모습에서 감흥을 느꼈다. 감히 위인을 흉내 낼 수야 없지만, 나 역시 소소한 것에서 만족을 누리는 삶을 맛보고 싶었다.”
손수 집을 지었다지? 한옥 건축엔 까다로운 공정이 많은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게다가 건강도 좋지 않았는데.
“미장이나 조적 등 난해한 부분은 기술자를 불러 썼다. 하지만 설계 초안을 비롯해 많은 부분을 직접 처리했다. 원목 껍질을 벗기고 대패질을 해 서까래 164개를 손수 만드는 식으로. 쉬운 일은 아니었다. 업자에게 맡기면 두 달 안짝에 완공하겠지만 난 2년 반 만에 완료했다. 실로 고달팠다. 그런데 집을 완성하자 놀랄 만한 일이 벌어졌다.”
어떤 일이?
“아내가 비로소 나의 귀농에 동의를 표했다. 애초 귀농의 ‘귀’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던 사람인데 집 지은 걸 보고 생각이 바뀐 것이지. 내가 귀농한 후 이곳에 아예 오질 않았던 아내였으나, ‘이젠 주말마다 내려오겠다!’고 하더라고.(웃음) 비로소 어둡고 추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었다.”
그의 아내는 안양시에서 중학교 교장으로 재직한다. 남편의 도발적인 귀농에 오만정이 떨어졌었나? 빗장을 건 마음을 풀어놓기까지 긴 세월이 걸린 셈이다.
애당초 한결 매력적인 설득과 회유로 부인과 동행하는 귀농을 할 수는 없었을까? 인생의 가을에 부부가 유유상종하며 흘러가는 모습처럼 진실한 드라마가 드문데.
“아내에게 고마움을 느낄 따름이다. 병을 안은 채 농사와 집짓기를 함께 했던 초기 2, 3년은 한마디로 지옥이었다. 내가 자청한 지옥이다. 그런데 아내가 건져준 게 아닌가. 머잖아 아내는 퇴직한다. 이후엔 이곳에 내려와 함께 살게 될 것이다.”
살 날보다 산 날이 더 많아진 나이다. 귀농 12년 세월을 낭비라 느낀 적은 없었나?
“시간을 아껴 쓰며 살았다. 덕분에 건강을 되살렸고, 아내의 인정을 받았다. 여기서 무엇을 더 바라겠나? 이 정도에 만족한다. 더도 덜도 필요 없다는 거.”
더도 덜도 말고 딱 지금처럼만! 인생을 통째 긍정하는 짧은 언설이 바윗장처럼 묵직하다.
김준한이 주는 귀농 Tip
•귀농으로 낭만적인 전원생활이 가능할 거라는 환상을 버리자. 이상향의 크기를 줄이라는 얘기다.
•기술집약적이고 소득 수준이 높은 작물을 찾아내자. 그러자면 갖가지 귀농 교육을 충실히 받아 물정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귀농 교육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초기 자본 투자에 무리하지 말자. 길게 보고 서서히 나아가는 자세가 필요하다.
•매스컴이 떠드는 귀농 성공 사례를 그대로 믿지 마라.
•혼자 하는 과수 농사의 경우 2000평 규모가 적당하다.
•농업 장비들은 가급적 임대해 사용하자. 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서다.
•잦은 음주는 금물이다. 무질서와 방황의 첩경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독일 파독 간호사 출신 영수 트램보우스키(83) 씨는 매주 월요일이면 초등학생 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딸네 집으로 향한다. 트램보우스키 씨가 사는 함부르크에서 딸이 사는 뉘른베르크까지 기차와 버스를 타고 무려 100km를 이동해야 하지만, 여든을 넘긴 나이에도 힘든 줄 모른다는 그녀다.
“딸이 학교 선생님이라 다른 워킹맘에 비해 퇴근이 이른 편입니다. 보통 2시 전후로 끝나죠. 그런데 손주들이 점심시간 전후로 하교하니까 그 사이에 봐줄 사람이 없는 거예요. 또 가끔 딸이 학회에 참여하거나 취미활동으로 오케스트라 모임에 가야 할 때 역시 제게 도움을 요청하죠. 딸네 집에 안 갈 때는 아들네 손주들을 돌보러 가기도 합니다.”
트램보우스키 씨는 딸 슬하 자녀 둘과 아들 슬하 자녀 넷, 총 여섯 명의 손주를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주기적으로 돌보고 있다. 가장 큰 손녀인 파울라가 올해 23세이니, 예순 이후부터 20여 년간 황혼육아에 참여해온 셈이다. 여섯 손주를 본다 생각하니 노후의 여유가 있을까 싶지만, 그녀는 자신의 삶 또한 독립적으로 일궈내고 있었다.
“주말마다 교회에 가야 하고, 여성회 모임도 있고, 매일 운동도 가야 해요. 손주 보는 것도 좋지만, 제 즐거운 노후까지 포기하며 매진하지는 않습니다. 자녀들도 항상 사전에 시간을 두고 스케줄을 알려주는 편이고요. 아주 가끔 긴급하게 돌봄이 필요할 때도 제가 할애 가능한 선에서만 도우려 하고 있어요.”
20년 동안 손주들을 돌보면서 황혼육아를 대가로 자녀들에게 받은 보수는 전혀 없다. 오히려 금전적 지원은 그녀가 더 하는 편이다.
“남편이 은행원으로 은퇴했고, 저도 간호사로 오래 일한 덕분에 연금과 노후 자금이 넉넉한 편이에요. 애들한테 나가는 돈은 말도 못 해요. 매달 여섯 손주 보험료도 내고 있고, 갈 때마다 큰 손주들은 용돈도 주니까요. 작은 애들 저금통에도 꼭 얼마씩 넣어주고 옵니다. 자식들이 따로 금전적으로 신경 써주지는 않지만, 전혀 서운하지 않아요. 가끔 손주들이 제게 편지나 선물을 주는데 그게 넘치는 보상이 되죠.”
트램보우스키 씨는 손주들을 일컬어 노후의 선물 같다고 말한다. 때문에 아이들에게 쓰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다고. 오히려 최근에는 손주들이 장성하며 그녀가 도움을 받을 때가 더 많다고 말한다.
“남편이 치매로 세상을 떠났는데, 손주들마저 돌보지 않았다면 노후가 많이 적적했을 거예요. 요즘은 심심하다고 하면 손주들이 와서 놀아주기도 해요. 친구처럼 문자도 주고받고, 제가 모르는 게 있으면 선생님처럼 가르쳐주기도 하고요. 그렇게 보면 앞으로는 제가 손주들의 돌봄을 받아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덕분에 혼자라도 외롭지 않고 든든합니다. 노후에 이보다 더 가치 있는 자산이 있을까요?”
(현지 취재=독일 함부르크)
| 언론진흥재단 지원 특별기획 4부작 | 요람에 흔들리는 노후
본지는 언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저출산 고령화 시대 황혼육아 문제 해법 제시를 위한 특별 기획 '요람에 흔들리는 노후'를 4개월에 걸쳐 연재로 발행합니다. 제1부 '서베이로 본 황혼육아 현주소', 제2부 'K-황혼육아 정책 어디까지 왔나?', 제3부 '독일ㆍ영국 황혼육아 선진 사례', 제4부 '금빛 황혼육아로 가는 길' 순서로 선보일 예정입니다. 해당 기사는 오프라인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온라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 홈페이지를 통해 만날 수 있습니다.
※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흔히 인생에는 정답이 없다고 한다. 인생이 그렇듯이 사랑에도 정답이 없다. 인생이 각양각색이듯이 사랑도 천차만별이다. 인생이 어렵듯이 사랑도 참 어렵다. 그럼에도 달콤 쌉싸름한 그 유혹을 포기할 수 없으니… 한 번도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사랑하고,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것처럼 헤어질 수 있다면 당신은 사랑에 준비된 사람이다. ‘브라보 마이 러브’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될 당신의 중년 사랑을 보듬는다.
“전화 주실 줄 알고 기다리다 다시 해요.”
“응… 손님 만나는 중이어서….”
“그랬어요? 그럼 그렇다고 문자라도 주시지… 나는 함께 점심하려고 전화했던 건데.”
“손님과 점심 약속을 했던 터라… 미리 말하지 그랬어?”
“미리 말한다고 약속 잡아주실 것도 아니면서.”
“뭐 어쨌든. 그나저나 잘 지내고?”
“네, 저는 잘 지내요. 조만간 점심 사드리고 싶네요.”
“점심은 무슨. 됐고.”
“그럴 줄 알았어요.”
앞자리에 앉아 있던 예의 그 ‘손님’이 화장실을 가는 척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는 바람에 통화가 오히려 길어졌다. 점심 식사 중에 그 여자의 전화가 왔지만 일부러 받지 않았다. 그 손님과의 자리가 대단히 중요해서가 아니었다. 핑계 삼아 그 여자의 전화를 따돌리고 싶었을 뿐. 손님이라야 등산을 함께 다니는 동네 지인으로 별 용건 없이 그냥 점심이나 함께하자는 게 다였으니까.
“그렇게 잘 알면서 왜 전화했어?”
“보고 싶으니까 했죠. 얼굴 본 지도 오래됐고.”
“우리가 얼굴 보고 싶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만날 사인가? 아무튼 난 지금 바빠. 그만 끊자고.”
얼굴 보고 싶다며 자유로이 만날 수 없는 사이, 만나면 부담스러운 사이, 껄끄러운 사이. 그렇다, 그녀와 나는 옛 연인 사이다. 눈 씻고 찾으려 들면야 한 자락 추억이야 없지는 않겠지만 그딴 건 찾고 싶지도 않고, 생각할수록 씁쓰레함만 남은 관계. 그런데 그녀는 그렇지 않다는 건가. 잊을 만하면 연락이 오는 걸 보면 아직도 내게 미련이 있다는 거겠지만, 나는 한마디로 노 생큐!다. 안 그러면 또 뭘 어쩔 건데? 지금 와서 내가 뭘 해줄 수 있다고. 헤어진 지 벌써 3년인데.
사업 실패와 연이은 가정 붕괴
그녀는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한 100억 정도 가진 재산가다. 굳이 돈을 강조하는 이유는 돈밖에 가진 것이 없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나이는 나보다 몇 살 적다. 몸매도 좋고 얼굴도 예쁘다. 그런 조건 좋은 여자가 내게 안달이 나 있는 것이다. 그럼 나는? 얼마나 조건이 좋은 남자길래 그런 잘난 여자가 죽자고 매달리는 거냐고? 나는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그렇다고 백수건달이나 제비족은 아닌, 어쨌거나 그녀에게 만만하게 보인 50대 중반 독신남이다. 그렇다면 내가 그녀의 세 번째 남편감이냐고? 천만에 말씀! 누구 맘대로!
10년 전 나는 사업에 실패했다. 40대 중반이었다. 그 여파로 아내가 당시 초등학교 6학년, 중학교 2학년이던 남매를 데리고 미국으로 가버리자 가족들로부터 보기 좋게 버림을 받았다. 물론 내 잘못이 컸다. 외국 유명 브랜드 의류 수입상을 했던 나는 불황을 맞아 기울어가는 사업체를 정리할 기회가 몇 번 있었으나 어떻게든 살려보리라 무모한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나를 설득하며 마음 졸이다 못해 인내심이 바닥 난 아내는 반은 홧김에, 반은 살 길을 찾아 미국 친정으로 날아갔다. 그렇게 하루아침에 가정과 사업체가 박살났고, 10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내는 물론 생이별한 자식들의 소식도 듣지 못하고 있다.
실낱같은 희망도 보이지 않는, 자살할 궁리만 모색하던 처참한 나날이었다. 어떻게 하면 고통 없이 고통 많은 세상을 떠날 수 있을까, 머릿속은 온통 자살 생각으로 가득 찼다. 1년 후 이혼 서류를 보내온 아내의 요구에 이렇다 할 대꾸나 변명 한마디 없이 응했던 것도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자포자기 탓이었다.
그럼에도 늘그막에 외손주 둘을 경제적으로 뒷바라지해주시는 장인 장모님께 진심으로 감사했다. 처가의 형편이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음에도. 어쨌거나 두 아이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게 되었으니 장담할 일은 아니지만 한국에서보다 장래가 밝아진 게 아닌가. 그 와중에 아내는 나에 대한 원망과 일말의 복수심으로 나와 아이들의 관계를 차단한 것이리라. 나는 나대로 아이들이 성인이 되면 그때는 서로를 이해하고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일단 긍정적인 방향으로 내 삶을 이어가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이렇다 할 일거리도 없고 재기의 노력도 하지 않은 채, 간간이 들어오는 경영 계통 강연 수입으로 그때그때 생활비를 벌며 심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등산과 마음 공부에 전념하고 있다.
망한 나에게 다가온 거부의 여인
아, 그녀는 사업상 나의 고객이었다. 내가 쫄딱 망한 것을 알고 호감을 표해온 것이었다. 쫄딱 망한 중년의 남자에게 다가온 거부의 여인. 게다가 한 미모하는 이혼녀. 로또 대박과 맞먹는 행운이 아니냐고? 게다가 아내까지 미국으로 내뺀 상황이었으니. 글쎄, 계속 들어보시라.
나도 처음엔 그녀라는 동아줄을 붙잡고 재기를 꿈꿨다. 그녀를, 아니 그녀의 돈을 통해 회생할 가능성을 탐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녀도 불쌍한 여자다. 그녀의 인간관계, 특히 남자관계는 늘 돈이 중심이었다. 첫 결혼도 두 집안이 서로 돈을 보고 딸과 아들을 교환했던 것이니 애정 없는 혼인 생활이 평탄할 리 없었고, 결국 남편의 외도로 3년 만에 파탄이 났다.
그녀의 두 번째 결혼은 그녀 측에서 오히려 더 많은 돈을 탐냄으로써 이뤄졌다. 20년 연상의 재벌급 홀아비, 그녀로서는 재력적 지위가 급상승하는 순간이었다. 그녀의 기쁨도 하늘을 찔렀다. 재물에 마음이 꽂힌 사람들은 더 많은 재물을, 권력을 탐하는 부류들은 더 높은 자리를, 인기몰이에 집착하는 자들은 하늘 높은 줄 모르는 무한 인기를 갈구하는 법이니. 사람은 저마다 우상을 모시고 살며, 우상 숭배란 맹목적인 것이지 않은가. 그러니 이미 돈이 그렇게 많으면서도 돈에 집착하고 돈에 갈증이 든 그녀를 탓할 수만은 없는 게 아닌가.
그녀 부부 사이에는 자식이 없어 에너지를 쏟을 곳이라곤 오직 돈에 관계된 것이었기에, 앞뒤 재지 않고 무분별하게 사업을 벌인 것이 화근이 되어 많은 돈을 잃고 그만 이혼을 당하고 말았다. 두 번째 이혼이었다. 그러고는 나를 만난 것이다. 비록 이혼을 했어도 받은 위자료와 본인 재산 등으로 내게 대줄 수 있는 사업자금은 충분했다.
자, 이런 상황이다. 처음에야 나도 횡재한 기분이었다. 속물이라 욕해도 상관없다. 사실이니까. 거처가 마땅찮았던 나는 바로 강남에 있는 그녀의 80평대 아파트로 들어갔고, 그렇게 우리의 동거가 시작됐다. 1년이 지났을 무렵, 한마디로 나는 그녀에게서 환멸을 느꼈다. 그녀는 오직 돈, 돈, 돈만 알 뿐이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돈 타령에, 아마 꿈조차 돈에 대한 것을 꿨으리라.
그녀에게서는 어떤 내면의 향기도, 내적 감수성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함께 사는 동안 책은 고사하고 글 한 줄 읽는 모습을 보지 못했고, 사색에 잠긴다거나 주변이나 일상에서 감동을 느끼는 일도 없었다. 심지어 자연에 대해서도 교감할 줄 모르는 여자였다. 아마도 푸른 여름은 만 원권 지폐로, 노란 가을은 오만 원권 지폐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1년 만에 그녀의 아파트를 나왔다. 들어갈 때도 맨몸, 나올 때도 맨몸. 여전히 집도 절도 없었던 나는 TV 프로그램 속 자연인처럼 어느 산자락 빈집에서 한 달가량 몸을 의지해 있었다. 그 후 낯선 소도시로 흘러들어 친구와 지인들의 도움으로 작은 강연, 독서 모임 등을 이끌면서 내 입을 먹이며 살고 있다.
나와 그녀의 관계에는 환멸만 남고
혹자는 배부른 투정이라고 할지 모르겠다. 내면이니 감수성이니 그딴 게 밥 먹여주냐고. 봉을 잡았으니 빌붙어서 몸이라도 편할 수 있지 않았냐고. 그렇게 생각한다면 일단 한번 살아보시라. 입만 열면 돈타령에 무식이 하늘을 찌르는 여자, 나는 열을 준대도 덧정 없다.
만약 그 여자가 그나마 머리에 든 것이 있는 나를 흠모하여 자신에게는 없는 지성이나 교양을 취해보리라는 갸륵함이 눈곱만큼이라도 있었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환멸을 느끼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애초에 그런 코드가 없었다. 그렇다면 내게서 무엇을 보고, 내가 가진 어떤 점이 그녀를 끌어당겼을까.
돌이켜보면 그녀는 나를 자기 재산 증식시켜주고 관리해주는 머슴 정도로 취급했던 것 같다. 어떻게 하면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는지, 어디 가서 재산을 불릴지, 하나보다는 둘이 힘이 되니 속된 말로 만만한 나를 ‘꼬붕’으로 삼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내게 애초 애정 따위는 없었던 것이다. 하긴 그녀에게 애정 같은 감정과 정서가 있기나 할까. 내가 아는 한 찾아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인간에 대한 신뢰나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못했으니. 설혹 내게 사업자금을 대주었다 해도 내가 원하는 일을 자유로이 할 수도 없었을 것이며, 그녀의 이해관계와 연결되는 것에 한해서 허용하는 게 고작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 그녀가 지금도 내 앞에서 알짱거리고 있으니 불쾌할 수밖에.
내가 만날 수 있는 여자는 지성, 외모, 상식과 자존감을 갖춘 사람이기가 어려울까? 솔직히 그럴 것 같다. 그런 여자들은 남자 또한 엇비슷한 수준에서 만나고 싶어 할 텐데,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능력 면에서 현저히 기울어져 있으니 두루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없을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한쪽으로 치우친 여자들만 꼬인다고 할지. 겨우 한 여자 만난 것을 두고 성급한 일반화를 하냐고? 내가 설마 한 여자만 두고 그러겠나. 그 사이에 두 여자가 더 내게 호감을 표해왔는데 역시 비슷한 여자들이었다. 돈밖에 없고 천박한. 돈 많고 무식한 여자, 돈밖에 모르는 여자들이 꼬이는 것이 내 운명이고 팔자일까.
※✽브라보 마이 러브는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내용입니다.
매력과 환멸이 공존하는 도시에 마냥 정을 느끼며 살기는 어렵다. 오나가나 생기를 머금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밥벌이의 피로를 면제받을 수 없으니 묵묵히 견디며 산다. 서울과 수도권에서 살며 경제활동을 했던 김완중(58, ‘내일을 여는 책’ 대표) 역시 그랬던가 보다. 언젠가는 도시를 뜰 생각을 했던 것. 그러다 쉰 살을 코앞에 두었던 2013년, 마침내 도시를 벗어났다. 인파와 소음이, 꿍꿍이와 풍문이 넘실거리는 서울과 결별하고 시골로 달려갔다. 유난히 싱싱한 산수를 막대하게 보유해 차라리 이방(異邦)인 전북 장수군의 외진 산골로 귀농했다.
김완중이 처음 손을 댄 작물은 오미자였다. 농사 물정을 잘 모르는 귀농인에게 그나마 용이한 작물은 지역 특산물이다. 오미자는 사과·한우와 함께 장수군의 특산물에 꼽힌다. 김완중은 도시에 살며 이른바 ‘도시농부’를 경험한 적이 있다. 텃밭 수준의 농사를 재미 삼아 체험하며 농업과 흙을 살짝 맛보았다. 이건 귀농의 싹눈이 튼 계기였다. 그러나 농사 경험이라고 내세우기엔 소소한 것에 불과했다. 즉 오미자 재배를 통해 농사와 본격적으로 맞닥뜨린 그에게 닥쳐온 애환의 수효가 한둘이 아니었을 거라는 얘기다. 매사 신입사원처럼 서툴러 진땀을 뺐을 게 아닌가. 하지만 요상하게도 거둔 성과가 만만치 않았다.
“농업 자체가 워낙 힘들다. 농가들이 흔히 애를 먹는 게 판로다. 좋은 농산물을 생산해놓고도 유통 문제의 벽에 부닥쳐 기존 농가들조차 농사를 접는 경우가 있더라. 그러나 난 오미자 판매를 잘했다. 도시 쪽에 네트워크가 있어서였지. 내가 생산한 물량이 바닥나 다른 농가의 오미자를 사다 팔기도 했다.”
귀농을 할 적에 그는 그냥 쓱 내려왔다. 마치 등을 미는 바람에 떠밀린 듯이. 그 무슨 그럴싸한 구상을 미리 해두지 않았던 것. 농사를 머릿속에 넣고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리며 숙고하는 식의 방식은 아마도 성향에 맞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골에서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만히 두고 보는 게 흥미를 배가하는 길이라 보았다.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무가치한 일에 얽매이지 않고 좀은 자유롭게, 좀은 태평하게, 좀은 재미있게 살면 된다는 생각으로. 그런데 군에서 임대해준 밭에 기른 오미자 판매가 뜻밖에도 잘된 게 아닌가. 본격적인 농부의 대열에 올라설 수 있는 자격증을 자신에게 수여해도 무방할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초보 귀농인으로서는 자못 웅장한 성과를 거둔 셈? 그러나 속사정은 영 달랐다. 오미자 농사를 지어 잘 팔았으나 막상 수입은 실로 보잘 게 없었으니까. 그도 그럴 것이 재배 면적이 겨우 800평에 불과했던 거다. 대규모 오미자 농가들도 수익 구조에 끙끙대는 판에 소농으로 무슨 재미를 볼 수 있으랴. 그의 농사는 소박한 미덕에 충만했으나 호구 대책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햐! 이러다 굶어 죽겠더라!(웃음) 농사에 들어가는 시간이 너무 많다는 점도 싫었다. 결국 오미자 농사를 접었다. 다 뽑아내고 손이 덜 가는 두릅과 엄나무를 심었다. 이 역시 농사다운 농사라 할 게 없다. 결국 5년 만에 농사를 포기한 셈이다. 농사로 먹고살려면 최소한 5000평 이상은 지어야 가능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는데 내 실력으로는 가당치 않았다.”
나의 철학을 책에 담아내는 매력
시골 생활에 관한 사전 구상보다 시골에서 과연 어떤 흥미로운 일이 벌어질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던 김완중에게 비로소 흥미로운 상황이 발생했다. 무엇으로 어떻게 먹고살 것인가? 이건 절박한 숙제라는 점에서, 상상력과 모색을 다한 궁리로 길을 찾아내야 한다는 점에서 일견 흥미로운 과목이라 할 수 있을 텐데, 그는 답을 찾았다. 1인 출판사를 차리기로 한 것. 전에 도시에서 신문사 편집기자와 출판사 직원으로 근무했던 경험을 살려 어디에도 없는 산중 독립출판사를 열기로 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내가 할 줄 아는 건 출판 일뿐이더라. 인생 후반을 시골에서 보내려고 내려온 만큼 지속 가능한 일을 찾아야 했는데 그게 출판이었다. 쉽지 않겠지만 하나하나 맞춰가며 길게 보고 달려가자는 생각이었다. 그래 집 한쪽에 작은 흙집 사무실을 지어 책을 만들기 시작했다.”
적막한 산속에 차린 1인 출판사라니. 거북이를 끌고 산책하는 장면을 보는 것처럼 생소해 오히려 흥미롭다.
“사업성만 따질 경우 시골에서 출판사를 하는 건 바보짓이나 다름없다. 좋게 말하면 용감한 짓이지만, 상식적으로 보면 무모하고 미친 짓이다. 그러나 가치 있는 삶의 한 방편이 출판이라는 점에 착안했다. 사업성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도시적 습성에서 벗어나 나만의 철학을 담은 좋은 책을 만든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출판업은 사양사업이지 않나?
“인터넷 세상이 되면서 책을 절대적으로 읽지 않는 풍조가 만연했다. 이를테면 유튜브 왕국에서 누가 활자 매체를 보겠나. 하지만 책의 콘텐츠가 좋을 경우엔 활로를 찾을 수 있을 거라 봤다. 시장 흐름을 따라가지 않고 내 색깔을 내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 자립하고자 했다.”
기획, 편집, 교정, 인쇄, 유통 등 모든 걸 혼자 처리하는 게 가능한가?
“초심자라면 어려운 대목이겠지. 내겐 일련의 경력이 있어 헤쳐나갈 수 있었다. 도시에 살 때 회계사무실에서 근무했던 아내가 서류 정리 등의 일을 맡아줘 큰 도움이 되기도 했다. 부부가 함께 원하는 곳에 살며, 함께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만족스럽다.”
출판업자들의 머리를 지배하는 생각은 한 가지로 보인다. 어떻게 해서든 팔릴 수 있는 책을 내야 한다는 강박증에서 해방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만큼 경쟁이 치열하다는 반증이겠고.
“인간이 사는 곳 어디든, 어떤 일이든 피곤하지 않은 게 있던가. 그게 운명이다. 맞부딪혀 이겨내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출판은 하나의 언론이다. 나를 표현하고, 내 철학을 표방하는 매우 매력적인 장르다. 그러니 괴로울 리가 없다. 자주 보람을 느낀다.”
어떤 분야의 책들을 출판했지?
“인문사회 분야 책에 집중했으며, 아이들을 대상으로 삼은 동화책도 다수 출판했다. 혐오와 사회적 편견, 생명의 경외심에 관한 문제를 다룬 첫 동화책 ‘보신탕집 물결이의 비밀’에 지향점이 드러나 있다. 2019년에 낸 ‘가짜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역시 동화책이다. 아동들에게 가짜뉴스라는 게 과연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그게 인간과 사회에 어떤 악영향을 주는지 보여주었다.”
어린이들에게 무거운 사회문제를 들려주는 이유가 있겠지?
“그들은 내일의 주인공이며, 미래의 유권자이지 않은가. 그러나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정치, 환경, 인권, 노동, 평화 문제 등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출판을 통해 아이들이 생각을 키울 기회를 제공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리, 참 잘사는 것 같지?”
요즘 출판계 현실을 보면 흉년도 이런 흉년이 없다. 쓰러지고 자빠지는 출판사들이 흔하다. 그나마 승산이 있는 게 동화책 출간이다. 선하고 아름답고 몽환적인 주제를 담은 동화책 시장은 그나마 숨을 쉰다. 그런데 속세와 동떨어진 산골에 출판사를 차린 김완중은 무겁고 딱딱하고 골치 아픈 사회문제를 동화책으로도 출판한다. 이게 장사가 될까? 그는 일종의 언론 행위로 책을 만들어 세상사에 가담한다. 횃대에 올라앉은 새벽 수탉처럼 한번 호기롭게 목청을 돋워 세상의 둔감과 일탈을 일깨우고 싶은 것이다. 이런 의도에 무슨 결함이 있을까마는 책이 팔리긴 할까? 팔린다. 얼핏 물심양면의 불황이 자심할 것 같지만 나름 탄력을 가지고 굴러간다. 출판계에 만연한 부진을 고려하면 결코 적은 부수가 아닌 2만 부쯤 팔린 책이 드물지 않았다고 하니 이미 서광이 들이친 형국이다. 어쩌면 나는 오늘 출판계 변방에 잠재한 천하장사를 만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든다.
“뭔가 대단한 성과를 거둔 건 아니다. 하지만 자리는 잡혔다. 매년 10권 이상의 책을 꾸준히 출판하면서 작지만 소중한 결과를 거두었고 자신감도 얻었다.”
자극과 경쟁의 농도가 옅은 시골 환경에서 출판의 촉을 유지하기 어려운 면은 없던가?
“모든 걸 혼자 움직이며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자칫 고립될 수 있는 여건이긴 하다. 소통할 수 있는 출판업자가 주변에 없다는 점이 가장 아쉽다. 그러나 장점이 많다. 무엇보다 시간의 여유가 있어 한나절을 멍때리며 지낼 수도 있는데, 이건 도시에선 누릴 수 없는 특혜가 아닐까 싶다. 마음에 여유를 부여하면 생각에도 한결 깊이가 생기는 것 같다. 따라서 서울에선 나올 수 없을 기획 아이디어가 떠오르곤 한다. 서울을 벗어난 건 여러모로 내게 좋은 선택이었다.”
제한된 환경과 자원으로 원하는 퍼포먼스를 이끌어낸다는 게 어디 쉬운가. 김완중은 기획력으로 승부한다. 부인의 말에 따르면 그는 ‘기획력의 천재’다.
지역주민들과 교류는 잦은가? 주민과 유대관계를 맺지 않을 경우 고독을 벗 삼아야 하는 게 시골 생활인데.
“농촌 사회에도 정치가 있고 조직이 있으며 이슈가 있다. 부당한 상황과 맞서 싸워야 할 일이 있을 때면 난 적극 나서는 편이다. 지역 사회단체와 문제의식을 공유하면서 공동 대응한다. 어디에 살든 작은 외침일망정 외칠 땐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산골에 산다고 그마저 외면한다면 슬프지. 물론 나만의 자유를 침해당할 정도의 처신은 자제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텃세로 궁지에 몰리는 경우가 드물지 않다.
“외교력을 발휘하는 게 좋겠다. 나를 포장할 것 없다. 시골 생활은 시골 사람들이 박사라는 걸 인정하고 함께 묻어가면 된다.”
경제 문제에 걱정은 없나?
“한때 불안했다. 가진 것 없이 내려와 빚만 잔뜩 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불안감에서 신속하게 벗어났다. 왜냐고? 자비로운 아내가 돈 문제에 관한 한 일언반구 불평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웃음) 여전히 근근이 살아가는 형편이지만, 부부 공히 굉장히 높은 만족도를 가지고 소복소복 살아간다. ‘우리, 참 잘사는 것 같지?’ 아내와 자주 하는 얘기가 그렇다.”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그의 거처는 몹시 아름답다. 순수한 산릉과 녹색 언덕들이 장대한 성채를 이루고 집의 원경을 이루고 있어서다. 여기에 부부애까지 후끈하니 겹으로 절경이다.
김완중이 주는 귀농 Tip
•귀농 후보지에서 미리 반년 내지 1년은 살아보고 최종 결정을 하자. 지역의 속사정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장수군에서는 ‘1년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중년 이후의 귀농엔 여유자금 확보가 필수다. 최소 3년 정도는 수입이 없어도 생활할 수 있는 기본 자금을 준비하라.
•집 장만이나 수리에 큰돈을 쓰지 마라. 만약 팔아야 할 경우 쉽지 않은 게 농촌 주택이다.
•남들의 귀농 성공 사례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자. 전혀 만만치 않은 게 농사다.
•무리한 초기 투자는 금물이다.
•도시에서 쌓은 능력과 경륜을 활용해 농외소득을 개발하라.
•원주민의 간섭을 텃세로만 보지 말자. 귀농인에 대한 진정한 관심 또는 걱정으로 하는 간섭일 수 있으니까.
큰맘 먹고 시작한 한달살기. 정해진 시간에 정신없이 유명한 장소를 훑는 관광이 아닌, 느리고 여유로운 휴식을 기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늘 부지런히 살아온 이들은 이렇다 할 성과 없이 하루를 빈둥빈둥 보내는 게 영 익숙하지 않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제주 생활이 즐겁고 만족스러울까? 급할 건 없다. 우리에게는 30일이라는 시간이 있으니까!
한달살기는 단순한 여행과는 차이가 있다. 보통 한달살기를 앞둔 사람들은 마음을 비우고 천천히, 한 달 동안 여행지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일상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동네 산책을 하다 말을 트게 된 아주머니에게 사는 이야기를 듣거나, 비를 피하려 우연히 들어간 작은 카페에서 메뉴에 없는 음료를 대접받는 등의 상황 말이다.
그러나 막상 제주 땅에 발을 딛고 나면 얘기가 달라진다. 육지에서는 먹을 수 없는 음식, 할 수 없는 일을 깨알같이 모두 즐기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다 보면 가이드북이나 인터넷을 참고해 각종 정보를 샅샅이 뒤지게 되고, 고민과 갈등의 연속에 하루하루가 숙제처럼 느껴지기 십상이다. 이상과는 다른 제주살이에 문득 조바심이 날 수도 있다. 한달살기가 아니라 그저 한 달간의 패키지 여행이 되는 셈이다. 한달살기에 대한 보상 심리를 바라기보다, ‘여행 테마’를 설정하고 제주를 누려보는 건 어떨까.
마음의 자유 선물하는 ‘책방 투어’
전자기기와 영상매체가 발달한 후로는 한 달에 책 한 권 읽기도 버거운 사람들이 늘었다. 독서율이 점점 감소하고 있다는 의미다. 한달살기를 명목으로 멀리했던 책을 다시 가까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제주에는 소규모 독립 서점, 독특한 색깔을 가진 서점이 많다. 제주만의 지역 감성과 책방지기의 취향이 버무려져 남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책방 특유의 기분 좋은 종이 냄새와 책장 넘기는 소리가 주는 아늑함은 덤이다.
바라나시 책골목_구불구불한 해안선을 따라 형성된 횟집 거리 사이, 빈티지한 간판이 눈에 띈다. 내부로 들어서면 이국적인 향이 후각을 자극하고, 인도 서적과 세계문학 및 인문학 책이 즐비하다. 이곳은 제주 속 인도, ‘바라나시 책골목’이다. 바라나시는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에 있는 도시다. 갠지스강 중류에 있는 바라나강과 아시강을 합쳐 붙인 지명으로, ‘신성한 물을 차지한다’는 뜻이 있다. 생애 한 번은 가봐야 할 도시로 꼽히며, 일부 여행객은 인도 여행의 필수 코스로 소개하기도 한다. 제주 바라나시 책골목은 한국에서 인도의 정취를 느끼기 충분한 장소다. 책방과 카페를 함께 운영하고 있어 인도식 밀크티인 ‘차이’나 요구르트 ‘라씨’도 맛볼 수 있다.
만춘서점_야자수를 배경으로 한 아담한 흰 건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삼각형 구조의 내부로 매력을 더했다. 따뜻한 감성이 묻어나는 책들과 LP, 제주의 감성이 흐르는 소품이 가득하다. ‘만춘서점’ 책방지기는 출판·디자인 업계에서 일하다 서울에서 제주로 이주했다. 그래서인지 육지 사람이 그리는 제주의 장면을 더욱 잘 옮겨놓은 듯하다.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 1인용 테이블에서 책을 읽고, 마당에 놓인 의자에 앉아 쉬어 가기도 좋다.
소심한 책방_오름 다섯 개가 감싸고 있어 유독 고요한 제주의 동쪽 끝 마을, 종달리다. 좁은 골목 안쪽, 돌담 너머에 ‘소심한 책방’이 있다. 이곳은 각각 제주와 서울에 사는 두 사람이 책을 좋아하는 마음을 모아 만든 공간이다. 소설, 에세이, 여행 등 단행본부터 독립 출판물, 제주 특산품, 문구까지 다채롭게 구비했다. 낮에는 햇살이 가득 들어와 책방에 온도를 더해주고, 밤에는 노란 불빛이 다정하게 채워진다. 때로 소소한 전시나 공연이 열리기도 한다. 주변에 들를 곳이 많은 관광 지역이 아닌데도 굳이 찾아가게 되는 이유는 하나만 꼽기 어렵다.
책약방_‘책약방’은 초록 잎과 나무, 낮고 작은 집 사이에 위치한 아주 작은 그림책 전문 서점이다. 주말을 제외하고는 무인으로 운영된다. 사람 대신 책이 지키고, 마을이 지킨다는 독특한 콘셉트를 갖고 있다. 현관 옆에 걸린 작은 의자 위에는 운영자가 추천하는 ‘오늘의 그림책’이 놓여 있다. 비치된 그림 일기장과 100자짜리 작은 원고지에는 이곳을 찾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빼곡히 적혀 있다. 릴레이처럼 이어진 글들을 읽다 보면, 책약방의 진짜 ‘약’이 무엇인지 짐작하게 된다.
걸어서 제주 한 바퀴
올레길은 제주도의 마을길, 해안도로, 숲속 오솔길 등 걷기 좋은 길들을 선정해 개발한 코스다. 2007년 9월 8일 제1코스(시흥초등학교~광치기해변, 총 15km)가 개발된 이래, 2012년 11월 제주해녀박물관~종달바당을 잇는 21코스가 개장하면서 올레길 코스는 제주도를 한 바퀴 빙 두르게 됐다. 현재는 제주도 내에 총 23개 코스가 있으며 우도, 가파도, 최근 확장된 추자도 코스를 포함하면 총 27개다. 각 코스는 길이가 대체로 15km이내이며, 평균 소요 시간은 5~6시간 정도다.
제주도 올레길을 한 코스씩 돌다 보면 도내의 모든 코스를 돌아보고 싶은 욕심이 생긴다. 그러나 대중교통이 제대로 마련되지 않은 코스도 있어 차를 갖고 있지 않다면 동선과 숙소 계획을 맞춰 짜야 한다. 식사도 매번 사 먹을 수 없으니 간단하게 준비한다. 또한 올레길은 리본을 매달아 길을 안내하지만 인적이 드문 곳으로 혼자 간다면 주의가 필요하다. 통상 날이 저무는 시간인 오후 6시 이후로는 드문드문 표시한 리본을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길을 잃기 쉽다.
이런 사소한 단점을 보강한 ‘알파캠프’는 트레킹과 관련해 가이드, 교통, 식사, 숙소, 세탁 서비스 등을 모두 제공한다. 더불어 관광객이 한 달 동안 제주의 모든 올레길과 새로 생긴 하영올레길까지 안전하게 완주할 수 있도록 돕는다. 자신의 컨디션과 상황에 따라 토끼반과 거북이반 중 하나를 골라 트레킹을 즐길 수 있다. 체험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보통 중장년층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68세 이선이 씨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려 했다. 그러나 코로나19의 확산으로 하늘길이 막히면서 계획이 틀어졌다. 그 대신 올레길을 걸어볼 생각으로 알파캠프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올레길 코스에 대한 정보도 부족했고, 숙소 예약도 번거로워 고민하던 차였다. 이 씨는 “차로 여행할 때는 그냥 지나치던 것들을 가까이 보며 자연의 소중함을 느꼈다. 그리고 길을 걷다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도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서 “제주는 그저 우리나라의 섬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점점 정겨운 기분이 든다”고 소감을 밝혔다.
알파캠프에는 제주 올레길 코스를 완주하는 ‘제주올레캠프’ 프로그램 외에도 오름이나 한라산, 4대 휴양림, 숲길 등을 다양하게 걷는 ‘제주여행캠프’, 다이어트 식단을 제공하는 ‘다이어트 캠프’, 오름 전문 캠프인 ‘제주계절캠프’ 등이 있다.
의미 있게, 친환경 한달살기
‘제주도’ 하면 많은 이들이 청정 자연을 떠올린다. 그러나 막상 해변에는 폐그물, 밧줄, 스티로폼, 플라스틱, 페트병, 장대 등 폐어구와 나무토막이 가득하다. 게다가 언제 번식했는지 모를 파래가 수면에 떠 있거나 바위나 모래사장에 널려 있어 볼썽사납다.
제주도는 수용력을 넘어서는 관광객의 유입으로 환경이 위협받고 있다. 실제로 도는 1인당 폐기물 발생량을 전국 평균의 2배 이상, 관광객이 버리는 생활폐기물은 전체 발생량 가운데 40% 이상을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했다.
일부 관광객은 제주를 지키기 위해 ‘쓰레기 없는 제주’를 여행 혹은 한달살기 테마로 설정한다. 제주에 있는 동안 최대한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하고, 플로깅을 하는 식이다. 플로깅은 간단한 산책이나 조깅을 하며 쓰레기를 줍는 운동으로,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 혼자서 가고 싶은 장소를 지정해 환경 정화를 하거나, 제주 내 여러 봉사단체에서 진행하는 캠페인과 이벤트에 참여하는 방법이 있다.
나에게 맞는 여행 테마는?
후회 없을 제주도 한달살기를 위해서는 장소 위주로 계획을 짜기보다 나만의 큰 주제나 목표를 정하는 게 좋다. 우선 ‘왜 제주도에 가려고 하는지’를 고민해보자.
1 건강하게 한달살기 ‘하루 한 군데 오름 오르기’, ‘서핑·승마·스쿠버다이빙 등 레포츠 한 종목 배우기’, ‘한 달간 인스턴트식품 끊기’ 등으로 몸을 상쾌하게 만들 수 있다.
2 휴식하며 한달살기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쳐 있다면 ‘매일 한 시간씩 바닷가에서 멍때리기’, ‘동네 반경 5km 안에서 생활해보기’, ‘7시간 이상 수면하기’ 등의 방법을 통해 휴식을 취하는 것도 좋다.
3 습관 개선 한달살기 한 달 동안 ‘전자기기 없이 살기’, ‘부정적인 말 하지 않기’, ‘최소한의 물건으로 살기’ 등을 시도해 나를 괴롭히는 습관을 개선해보는 건 어떨까.
1 바라나시 책골목 2 만춘서점 3 소심한 책방 4 책약방
이야기를 좋아해 그 속에 푹 묻혀 살았다. 동네 사랑방, 길쌈하는 여인들 틈바구니 비집으며 이야기 구슬들을 집어 담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다듬고 정리해 하나씩 쓸모 있게 만들기 시작했다. 구슬은 서 말이라도 꿰어야 장신구가 되듯이, 최상식(77) PD의 손에서 잘 꿰어진 고향의 전설들은 한국의 여름을 대표하는 드라마, ‘전설의 고향’이 되었다.
최상식 PD는 1971년 서울중앙방송(현 KBS)에 PD로 입사했다. 1976년부터 1994년까지는 TV드라마 PD로서 ‘전설의 고향’(1977~1989), ‘보통사람들’(1982~1984), ‘춘향전’(1994) 등을 연출했다. 이후 KBS 드라마 제작주간으로 ‘젊은이의 양지’(1995), ‘첫사랑’(1996~1997), ‘태조왕건’(2000~2002), ‘겨울연가’(2002) 등을 기획 및 제작했다. 2002년 퇴사한 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원장, 미디어공연영상대학 학장, 한류아카데미 원장 등을 역임했다. 지금은 유튜브 채널 ‘최상식 PD와 송도영 성우의 전설의 고향’을 운영하며 전설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고 있다.
‘촌스러운’ 캐릭터의 창시자
최상식 PD의 이름 밑으로는 제목만 봐도 OST가 귀에 들릴 정도로 유명한 작품들이 빼곡하다. 그는 시청률 공식 집계 이래 대한민국 모든 프로그램을 통틀어 역대 최고 시청률인 65.8%를 기록한 KBS 2TV 주말 연속극 ‘첫사랑’의 책임 프로듀서다. 491회로 최장수 일일 연속극 기록을 보유한 ‘보통사람들’의 책임 프로듀서이며, 김희선, 배종옥, 배용준 등 내로라하는 배우들을 발굴해냈다. 그러나 그를 만난 사람들은 ‘전설의 고향’부터 떠올린다.
“1976년부터 드라마 PD로 일했어요. 1977년 10월에 시작한 ‘전설의 고향’은 PD로서 영글기 전에 만들었던 프로그램이죠. 저 스스로는 부끄럽게 느껴지는 부분도 없잖아 있어요. 그래서 저는 대표작으로 ‘전설의 고향’보다는 ‘보통사람들’을 꼽곤 하는데, 워낙 이미지가 강해서인지 최 아무개 하면 ‘전설의 고향’부터 떠오르는 모양이에요.”
지금도 ‘납량 특집 드라마’의 대명사로 여겨지지만, 당시 파급력은 더욱 대단했다. TV 있는 집이라면 안 본 집이 없다고 할 정도로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전설의 고향’이 전파를 탄 다음 날이면 온통 전설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12년 동안 프로그램을 제작한 불세출의 연출가임에도, 한국인이라면 남녀노소 좋아할 만한 ‘전설’이란 소재 덕분에 인기 있었던 것이라며 겸손을 보인다.
마산 시골에서 나고 자란 그는 어릴 적부터 이야기를 참 좋아했다. ‘전설의 고향’ 역시 그가 유년 시절 접한 수많은 이야기들로부터 탄생했다. PD가 된 그는 연출자로서 어떤 점을 내세워야 성공할지 고심했고, 그동안 모아둔 이야기를 풀어놓는 이야기꾼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반대의 목소리가 컸다. KBS에서 TV 드라마 방영을 시작한 지 10년이 막 지나던 즈음이었다. CG는커녕 촬영한 영상에 효과음을 넣는 편집 작업조차 다른 세상 이야기이던 시절, ‘전설 속 요괴와 귀신을 어떻게 구현하려고 하느냐’는 지극히 현실적인 우려였다.
하지만 그는 제작을 밀어붙였다. 쑥을 태워 스튜디오에 연기를 자욱하게 내고, 시골 초가집을 표현하기 위해 스튜디오 바닥에 지푸라기를 잔뜩 가져다 깔았다. 물뿌리개로 카메라 렌즈 앞에서 물을 뿌려 비 오는 날씨를 연출했고, 전설에 자주 등장하는 뱀이나 구렁이를 직접 섭외(?)해 스튜디오에 풀기도 했다. 게다가 리얼함을 추구하는 연출자였던 그는 출연 배우에게 어떤 장치가 설치돼 있는지 미리 안내하지 않고 촬영에 임했다. 덕분에 촬영 중 실제로 울음을 터뜨리는 배우도 있었다. 그야말로 난장판인 촬영 현장에서 생고생을 해야 하니, 배우고 제작진이고 ‘전설의 고향’ 참여를 원치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다행히 고생한 보람은 충분히 있었다. 프로그램을 크게 흥행시킨 것 말고도 구미호나 저승사자를 한국 납량물의 대표 캐릭터로 정립한 까닭이다. 하얀 소복과 하얗게 센 머리, 희고 큰 꼬리 아홉 개를 가진 구미호, 검은 갓과 검은 도포, 하얀 얼굴에 까만 입술의 저승사자. 이제는 당연하다 못해 자칫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최상식 PD가 고민 끝에 구현해낸 엄연한 창작물이다.
“저는 어릴 적에 여우 이야기를 많이 접했어요. 농한기인 겨울에는 사람들이 큰방에 모여서 새끼를 꼬면서 옛날이야기를 하곤 했거든요. 그때만 해도 한국에 여우가 굉장히 많았고, 주로 농사를 짓다 보니 소만큼 중요한 가축이 없었기 때문에 여우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았죠. 하지만 1979년 처음 에피소드를 제작할 때만 해도 구미호는 ‘남자 간 빼먹는 여우 같은 여자’ 같은 욕으로나 쓰였어요. 관련한 설화를 아는 사람도 얼마 없었죠. 그래서인지 반응이 좋을 줄 전혀 몰랐습니다. 저를 포함한 제작진들이 모두 어안이 벙벙했어요.”
1대 구미호를 연기한 배우 한혜숙은 길에 나서면 아이들이 ‘구미호 나타났다’며 돌을 던졌다. 방송 잘 보고 있다는 전화가 고등학교 은사로부터 걸려오기도 했다. ‘전설의 고향’ 출연 섭외와 프로그램의 인기는 반비례했지만, 구미호만큼은 예외였다. 구미호로 출연한 배우들은 모두 이름 날리는 데 성공하면서 방송가에는 ‘여우 귀신이 도와줘 스타가 된다’는 소문까지 생겼다.
미래 콘텐츠 찾아 헤매는 이야기꾼
그의 취재 과정은 학자의 연구를 방불케 한다. 서재와 작업실, 거실을 가득 채운 책들과 고서, 그림 등 고문헌을 뒤지고, 취재하다 만난 동네 주민들에게서 새로운 이야기를 듣 기도 한다. 전설을 발견하면 현장에 직접 가서 증거물이 실제로 있는지, 전설에 등장하는 지역과 그 근방을 샅샅이 뒤진다. 이제는 동네의 오랜 전설을 아는 어르신들이 많이 돌아가신 탓에 지역 주민이라도 전설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지네 여인 전설이 있는 서울 남산 부엉바위 약수터도 찾기 힘들었어요. 조사해보면 해방 전까지 한양, 경기 일대 최고의 약수터로 꼽혀서 사람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고 해요. 그런데 남산을 아무리 오르내려도 전설에 등장하는 부엉바위 약수터는 없는 거예요. 2주일이 넘도록 찾다가 계단 난간을 넘고 가시덤불 밑으로 들어가니 거기에 약수터가 있었어요. 하도 무당들이 찾아오니까 도시 정비를 하면서 그곳을 폐쇄해버렸던 거예요. 그러니 경비원도 주변 주민들도 전혀 몰랐던 거죠.”
그를 움직이는 건 사명감이다. 어느덧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전국을 헤매며 현장의 영상을 담는 고생스러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1박 2일에 유튜브 방송 8~9회 분량을 취재하는 답사 일정이 점차 힘에 부친다. 그러나 그는 전설이 갖는 콘텐츠의 중요성을 알기에 그만둘 수 없다. 한 가지 소재로 웹툰, TV 드라마, 뮤지컬, 영화까지 만드는 요즘이다. 전설이 빠지면 섭섭하다.
“전설은 이야기의 보물창고예요. 한국 사람들의 상상에서 나온, 다른 나라 사람들은 도저히 떠올릴 수 없는 구조의 이야기들이죠. 게다가 전설을 뜯어보면 당시 서민들이 무엇에 분노하거나 서러워했는지, 무엇을 꿈꿨는지 알 수 있어요. 인간의 삶과 죽음, 한(恨)이나 정(情)이 한데 들어 있으니, 이보다 더 완벽한 소스가 또 있을까요.”
그는 올해 초 국제영화제에 감독으로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안으면서 이를 증명해냈다.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측으로부터 공식 초청을 받은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 11부 ‘짐승’ 편의 정재은 영화감독이 ‘전설의 고향-이어도’(1979)를 동반 초청작으로 직접 추천했기 때문이다. 후배들은 ‘과거 선배들의 업적이 재조명된다는 점이 의미 있다’, ‘함께 소개할 수 있어 영광이다’라며 기뻐했지만, 정작 당사자는 소식을 접하곤 부끄러운 마음이 앞섰다.
“처음 후배들한테 연락을 받고서는 ‘그걸 창피해서 어떻게 내느냐’면서 손사래를 쳤어요. 장비도 마땅치 않았고 편집은 거의 불가능한데다 막 컬러 영상이 도입되던 시절에 만든 영상이니 요즘 나온 작품들에 비하면 얼마나 어설프겠어요. 하지만 영화제 측에서 유튜브에 올라온 리마스터링 영상을 확인했고, 충분히 좋다며 재차 요청해서 결국 출품하게 됐죠. 그때 제주도에 태풍이 와서 비바람 부는 밖에서 힘들게 촬영했던 기억이 아직도 납니다.”
유튜브로 옮겨붙은 열정
열흘에 한 번, 10분 내외의 분량. 얼마든지 재탄생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지난해 유튜브 채널 운영을 시작했다. ‘10대가 보지 않으면 유튜브로 성공할 수 없다’, ‘이미 야사나 민담을 다루는 유튜브 채널이 너무 많아 상대가 안 될 것이다’ 등 대부분이 만류했지만 그는 이번에도 제작을 밀어붙였다. 배우를 쓰는 대신 연필을 들었다. 직접 그린 삽화와 촬영해온 현장 영상, 애니메이션 ‘은하철도 999’의 메텔 역 등을 맡았던 유명 성우이자 아내 송도영의 더빙 음성을 합하면 ‘가내수공업’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퀄리티의 영상이 탄생한다.
유튜브 채널 운영은 순탄한 편이다. 구독자도 7만 명을 훌쩍 넘겼고, 영상의 조회수 추이도 좋다. 올린 지 한 달 만에 조회수 110만 회를 넘긴 영상도 있다. 야심차게 기획한 어버이날 특집 ‘고비사막을 넘은 효자’ 영상 조회수가 정작 낮다는 점이 아쉽지만 아무렴 괜찮다. 가장 큰 걸림돌은 밑그림 작업이다.
지난해 4월부터 여태 그린 그림만 1000장이 넘는다. 이쯤 하면 실력이 늘 법도 하건만, 현장에서 연출할 때도 배우의 표정에 가장 신경을 많이 썼던 그는 직접 그린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이 마뜩찮아 애를 먹고 있다. ‘내가 남의 속에 들어앉는 게 아니고서야’ 맡길 수도 없는 일이라, 그는 오늘도 눈초리며 입 매무새를 그렸다 지우길 반복한다.
유튜브에는 과거 ‘전설의 고향’에서 다뤘던 전설과 새로운 전설에 대한 영상이 골고루 올라간다. 전설만 12년 넘도록 소개했지만 아직도 다루고 싶은 내용이 차고 넘친다. 일본에서 살았던, 살아야 했던 한국인들의 전설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지리적·역사적으로 우리와 연관이 깊은 나라예요. 이미 잘 알려진 귀무덤이나 코무덤 말고도 가야, 백제 때부터 임진왜란, 일제강점기까지 합치면 다룰 수 있는 내용이 엄청날 거예요. 국내에서 다룰 전설도 많고 시간과 체력 때문에 엄두를 못 내고 있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다뤄보려 합니다. 실제로 일본에 갔을 때 작은 돌다리 간판석에 백제 관직과 이름이 새겨져 있거나, 얼굴 반절이 탄 채로 절 구석에 처박혀 있는 우리나라 불상을 많이 봤어요. 그런 유물, 지명에 담긴 정서와 이야기를 전달하고 싶습니다.”
은퇴 후 학생들 앞에 설 때도 좋았지만 무언가 부족했나 보다. 촬영 현장을 진두지휘하는 꿈을 종종 꿨다. 무언가 잘못돼서 촬영 전체가 어그러지는 꿈은 귀신 꿈보다 끔찍했다. 20년 가까이 그를 쫓아다니던 꿈은 지난해 유튜브 시작과 함께 멎었다. 천직이라는 표현이 절로 나온다. 그가 소망하듯, 이야기꾼이 꿰어낸 보배는 길이길이 K-콘텐츠의 든든한 원형이 되어줄 것이다.
●Exhibition
◇권진규 탄생 100주년 기념 - 노실의 천사
일정 5월 22일까지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조각가 권진규(1922~1973)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대규모 전시 ‘노실의 천사’(Angel of Atelier)가 이번 달까지 열린다. 전시 제목 ‘노실의 천사’는 권진규가 쓴 글에서 따온 것으로, 노실은 거미가 있는 방, 천사는 그가 만들어낸 작품들을 뜻한다.
권진규는 이중섭, 박수근과 함께 ‘한국 근대미술의 3대 거장’으로 꼽힌다. 그는 구상과 추상, 고대와 현대, 동양과 서양, 여성과 남성, 현세와 내세의 경계를 편견 없이 넘나들었으며 세속을 떠나 이상을 추구했다.
권진규는 생전에 제대로 인정받지 못해 ‘비운의 천재 조각가’로도 불렸다.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세상의 무관심과 생활고 등으로 고통받던 그는 1973년 5월 작업실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이번 전시에는 지난해 유족이 기증한 작품(총 141점)과 이건희 컬렉션, 국립현대미술관, 고려대학교박물관, 리움 등 기관과 개인 소장자로부터 대여받은 작품이 포함됐다. 방탄소년단의 리더 RM이 개인 소장하던 작품 ‘말’도 있다. 총 240여 점으로 권진규 개인전으로는 역대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전시는 자작시를 바탕으로 불교에 한평생 귀의해왔다는 점에 착안해 시기별로 입산(1947~1958), 수행(1959~1968), 피안(1969~1973)으로 구분해 진행한다.
◇화각 : 오색의 향연展
일정 5월 22일까지 장소 용산공예관
‘화각 : 오색의 향연’은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109호 화각장 이재만 특별초청전이다. 화각은 황소의 뿔을 이용한 우리나라 고유 각질 공예다. 황소 뿔 하나를 가공하면 10~20cm 정도의 작은 각지(角紙) 단 한 장이 만들어진다. 재료의 수급·가공 과정이 까다로워 예로부터 화각 공예품은 특수 귀족층이나 왕실에서만 사용했다. 1996년 최연소 국가중요무형문화재가 된 이재만 작가는 화각 공예로는 유일하게 지정된 장인이다. 유물을 재현한 화각 봉채함, 바둑판을 비롯해 이재만 화각장이 새롭게 창작한 12지신 필통, 불감, 보석함, 은장도, 가야금, 삼층장 등 화각 공예품 20여 점이 전시된다.
●Book
◇산산조각(정호승 우화소설)(정호승·시공사)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로 유명한 정호승 시인이 올해로 등단 50주년을 맞아 우화소설집 ‘산산조각’을 펴냈다. 시의 압축된 묘사 이면에 숨겨진 서사를 동화적 상상력으로 재탄생시키고 우화소설이라는 그릇에 담아 보다 친근한 이야기로 인간의 삶이 지닌 깊은 의미를 전달한다. ‘산산조각’에 등장하는 화자와 주인공은 동식물과 사물이다. 망자(亡者)가 입는 수의, 못생긴 불상, 걸레, 숫돌, 오래된 절간 화장실의 받침돌 같은 하찮고 보잘것없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엄연히 이 세상에 실재하고, 심지어 우리의 일상 깊숙이 들어와 있다.
‘참나무 이야기’의 참나무는 대웅전의 대들보나 목불(木佛)이 되겠다는 꿈을 키운다. ‘선암사 해우소’의 바윗돌은 싱그러운 차밭에서 안락하게 지낸다. 하지만 참나무와 바윗돌은 전혀 뜻하지 않은 처지에 놓인다. 참나무는 장작이 되고 바윗돌은 해우소의 기둥을 받치며 똥물을 맞고 사는 신세가 된다. 꿈꾸던 미래와 안락함을 빼앗긴 두 존재는 낙담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들은 묵묵히 견디는 가운데 삶의 더 높은 경지에 다다른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듯 ‘나’ 역시 분명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이 세상에 왔으며 존재하기에 살아가야 할 이유 또한 명백하다는 작가의 메시지가 전해진다. 정호승 시인은 “인간의 삶에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 가치인가, 그 가치를 통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우화의 방법으로 성찰했다”고 말했다.
◇작별인사(김영하·복복서가)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 이후 9년 만의 장편소설이다. 머지않은 미래를 배경으로, 어느 날 갑자기 수용소로 끌려간 소년의 이야기를 그린다. ‘삶이란 계속될 가치가 있는 것인가’, ‘태어났다면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어야 할 것인가’ 등을 묻는다.
◇다시 말해 줄래요?(황승택·민음사)
‘저는, 암병동 특파원입니다’의 채널A 황승택 기자가 쓴 두 번째 투병 에세이다. 저자는 인생 42년 만에 급작스럽게 찾아온 급성중이염으로 200여 일 동안 청력을 손실한다. 그 경험을 통해 알게 된 비장애인 중심 사회의 면면들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혐오의 과학(매슈 윌리엄스·반니)
범죄학자인 저자가 혐오하는 마음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탐구한 책으로, 신경과학·심리학·사회학·통계학적 접근이 눈에 띈다. ‘혐오를 어떻게 멈추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해결책을 찾고 혐오범죄 예방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탐구한다.
●Stage
◇넥스트 투 노멀
일정 5월 17일 ~ 7월 31일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출 로라 피에트로핀토
출연 박칼린, 최정원, 남경주, 이건명, 양희준, 노윤, 이석준, 이아진, 이서영, 이정화 등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이 7년 만에 돌아온다. ‘넥스트 투 노멀’은 겉으로는 평범해 보이지만 내면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굿맨 패밀리 가족 구성원의 아픔과 화해, 사랑을 담은 작품이다.
과거의 상처로 인해 16년째 양극성 장애를 앓고 있는 엄마 다이애나, 그런 엄마에게 소외감을 느끼는 딸 나탈리, 다이애나를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흔들리는 가정을 지켜내려 노력하는 아빠 댄, 다이애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아들 게이브까지 여러 상황으로 저마다 한계에 다다르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위태로웠던 가족은 서로의 상처를 진심으로 바라보고 작게 피어나기 시작한 희망을 붙잡으려 한다. 이번 프로덕션에는 연기력과 가창력을 갖춘 실력파 배우들이 대거 뭉쳤다. 국내 프로덕션 초연부터 두 번째, 세 번째 재연까지 참여한 배우 박칼린이 다이애나 역으로 다시 돌아온다. 한국 뮤지컬계의 레전드라 불리는 배우 최정원도 다이애나로 새롭게 합류한다.
◇모래시계
일정 5월 26일 ~ 8월 14일
장소 대성 디큐브아트센터
연출 김동연
출연 민우혁, 온주완, 조형균, 최재웅, 송원근, 남우현, 박혜나, 유리아, 나하나 등
뮤지컬 ‘모래시계’가 2017년 초연 이후 5년 만에 돌아왔다. 동명의 SBS 드라마가 원작이며,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대서사시 속에서 방황하는 우리네 청춘의 이야기를 담대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격동의 시대 속 엇갈린 선택과 운명에 처한 ‘태수’ 역에는 민우혁, 온주완, 조형균이 캐스팅됐다. 태수의 절친한 친구이자 세상의 정의가 되고 싶었던 ‘우석’ 역은 최재웅, 송원근, 남우현이 연기한다. 시대의 소용돌이 속에 좌절했던 ‘혜린’ 역에는 박혜나, 유리아, 나하나가 함께한다.
◇돌아온다
일정 5월 7일 ~ 6월 5일
장소 예술의전당 CJ 토월극장
연출 정범철
출연 강성진, 박정철, 김수로, 정상훈, 이아현, 홍은희, 김곽경희 등
연극은 ‘돌아온다’라는 이름의 식당을 배경으로 한다. 허름하고 작은 식당에서 욕쟁이 할머니, 군대 간 아들을 기다리는 초등학교 여교사, 집 나간 아내를 기다리는 청년, 작은 절의 주지 스님 등의 사연이 펼쳐진다. ‘돌아온다’ 제작진은 “누구나 가슴속에 ‘그리운 사람 혹은 무언가’를 하나쯤 가지고 있다”면서 “우리 주변에 있을 평범한 사람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통해 온 가족과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감동과 웃음을 선사할 것”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