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속도가 부쩍 빠르다. 도무지 따라잡기 어려울 만치 세상이 뒤바뀌고 있다. 때론 예고도 없이 찾아오는 변화에 비틀거리기도 한다. 충북 괴산의 칠성마을 입구 수령 200년쯤 되어 보이는 느티나무는 이런 시간 속에서도 묵묵히 지켜온 세월만큼 든든하다. 그리고 느티나무와 함께 수호신처럼 그 자리를 지켜온 시골마을의 어르신이 있다.
청인약방(淸仁藥房)
신종철 어르신이 62년 동안 지켜온 약방이다. 푸른색 양철지붕 집 앞으로 다가가면서 마치 오래된 드라마의 한 장면과도 같은 풍경에 빠져든다. 추억의 흑백영화처럼 세월의 더께로 가득한 주변엔 청동기시대의 고인돌 유적이 예스러움을 더해준다.
약방 문 손잡이 옆에 종이가 붙어 있다. “점심시간, 1시까지 옵니다.” 정확히 1시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셨다. 자전거에서 내리면서 "추운데 어서 들어와요. 아이고, 즘심 먹고 오느라 사람을 기다리게 했네" 하고 문을 열며 불쑥 찾아온 사람을 반갑게 맞아주신다.
"내가 여기서 약방을 62년 했는데 이 약방과 주변 땅을 군(郡)에 기부했어. 내 몸도 해부 실습용으로 충북대 의대에 기증했고. 그래서 지금은 약도 별로 없어. 가끔 동네 사람들이 급히 소화제나 두통약을 사러 오면 주고. 이젠 이렇게 청인약방이 궁금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살아온 얘기나 하고 이 마을이나 지역에 대해 말해주는 게 내가 하는 일이지. 저짝에 땅이 조금 있는데 숲 공원을 만들고 있어. 그것도 기증할 거여. 누구라도 쉬어가면 좋잖어."
다 털어내고도 흐뭇해 보이는 인생이다. 노후에 그러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그렇지만 삶의 터전이었던 청인약방은 물론이고 우리네 삶의 변천사가 담긴 시간의 가치를 보존하고 싶었단다. 평생을 이곳에서 무탈하게 살아왔고, 약방은 곧 칠성면의 기록이자 격동의 근대사 일부이니 은퇴 후 모든 이들과 함께하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1932년 괴산의 칠성마을에서 태어났으니 올해 88세, 곧 구순이다. 청인약방은 62년 전인 1958년에 이 자리에서 문을 열었다. 어릴 적부터 머리가 좋아 중학교 시험을 봤을 때 군 전체에서 2등을 할 정도로 똘똘했지만 밥 먹고 살기도 어려운 시절에 등록금 5000원이 있을 리 없었다. 마침 잘사는 친척이 빌려줬는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바람에 장례비용이 되어버렸다.
“결국 중학교를 못 갔지, 그대로 있을 수 없었어. 서울에 고향 사람이 하는 치과가 있었는데 거기 가서 일을 배워 치기공사가 되었지. 이[齒]도 만들고 치료도 하고 온갖 일을 다 하면서 공부를 해서 숭문중학교에 갔어. 그런데 학교를 한참 다니는데 6․25전쟁이 터져 다시 사흘 밤낮을 걸어 고향인 괴산으로 내려왔어. 그때 서울에서 치과를 하던 이가 청주로 내려와 본동 치과를 열고는 나더러 또 일을 해 달라는 거야. 그래서 열심히 일해 의대에 꼭 가보자 했는데 그 치과 의사 부인이 계를 깨트리고 떠나는 바람에 내 돈을 다 잃었지. 그 뒤 다시 인천에 있는 치과에서 일하게 되었어. 신포동 32번지였는데 사람들이 늘 북적여 그만큼 일도 많이 배웠지. 그런데 동생이 군대를 가는 바람에 부모님 모실 사람이 없어 다시 고향으로 내려와야 했어. 일해서 먹고살려면 내가 배운 걸 활용해야 하는데 시골마을에 병원이 있을 리 없잖어. 그때 문득 청주의 병원에 있을 때 충북 약종상협회장이 약 허가증 만들어준다고 했는데 의대 가려고 마다했던 게 생각나서 찾아갔지. 그분에게 허가증을 받아 1958년 이 자리에 약점(藥店)을 연 거야.”
청인약점, 청인약포, 청인약방
약방 이름 앞에 넣은 청인(淸仁)이라는 글자에는, 약방을 차리기까지 청주와 인천에서 배우고 익히도록 도움을 준 분들의 은혜를 생각하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허름한 듯 소박하지만 이곳에서 가정을 꾸리고 평생을 나누고 베풀며 살았다. 의사도 약도 귀하던 시절, 청인약방 주인의 사명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밤낮없이 약을 내어준 어르신은 더러는 십 리 길도 마다하지 않고 환자를 찾아가 아픔을 치료해준 이 고장 모든 사람들의 주치의였다. 그뿐 아니라 지역의 큰어른으로서 마을에 크고 작은 일이 생기면 주민들을 위해 나섰고, 글을 모르는 이가 상을 당했을 때는 수백 장의 부고장도 대신 써줬다. 가난한 이들 보증을 섰다가 떠안은 빚도 수억이었지만 열심히 갚았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결혼식 주례도 섰다. 그렇게 조건 없이 베푼 삶 덕에 자손들도 남부러울 것 없이 잘 살고 있다.
청인약방은 수령이 200년은 넘어 보이는 집 앞의 느티나무와 함께 이 마을의 터줏대감이다. 나무 그늘 아래 평상은 일 년 내내 마을 사람들의 쉼터가 된다. 이웃 주민은 웃으며 말한다.
"이곳은 동네 사랑방이었죠. 어릴 적 내 덧니 빼주시느라 고생하셨는데 기억하시려나 모르겠네요, 하하. 이 마을 사람들 모두가 의지하는 어른이십니다."
반질거리는 좁은 마루 둘레에 전시된 약들은 약업의 변천사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당시의 톱스타 ‘남정임’이 모델이었던 제약광고 포스터가 입구에 붙어 있다. '아름다워지는 약'. 이처럼 꾸밈없이 순수한 카피라니. 정갈하게 정리된 선반의 모든 약들은 시간을 정지시킨 듯했다.
방문을 여니 방 안이 마치 흑백필름 속 박물관 같다. 낡음이 곧 푸근함으로 다가온다. 사는 집이 가까이에 따로 있어 "불을 안 땠더니 춥다"면서 작은 난로를 켜 손을 쬐라며 밀어준다. 한쪽 벽에 '申宗澈'이라는 이름이 박힌 약사 가운이 걸려 있다. 그리고 오래된 책과 약국 초기부터 써온 일기와 외상장부, 누런 갱지에 꼭꼭 눌러쓴 생생한 기록들. 돋보기안경과 흑백 사진 몇 장, 농한기에 동네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했을 화투도 방 귀퉁이에 놓여 있다. 60년이 넘은 트랜지스터라디오는 아직도 방송 내용이 또렷하게 들린다.
‘늙은이가 되면’이라는 제목이 붙은, 맞은편 벽에 붙어 있는 글에 시선이 머문다.
늙은이가 되면 설치지 말고/ 미운 소리 우는 소리 헐뜯는 소리/ 그리고 군소릴랑 하지도 말고 조심조심 일러주고/ 알고도 모르는 척 어수룩하소/ 그렇게 사는 것이 평안하다오// 이기려 하지 마소 져주시구려/ 한 걸음 물러서서 양보하는 것/ 지혜롭게 살아가는 비결이라오.
일어나서 나오려는데 마침 할머니께서 유모차에 의지해 약방을 향해 천천히 걸어오신다. 약방 문 앞에 두 분의 자전거와 유모차가 가지런히 놓인다. 어르신은 얼른 할머니 손을 다정히 잡으며 "우리 안사람이야, 우리 같이 찍을까?" 하며 카메라 앞에 서서 웃으신다. 아름다운 부부, 아름다운 인생, 더없이 잘 살아오신 삶을 바라본다.
"다음에 오면 밥 사줄게. 때맞추어 와" 하며 손을 흔드신다. 비타민 음료 건네받으며 송구했는데 다음엔 군것질 보따리 잔뜩 들고 가서 끊이지 않던 이야기보따리 다시 풀어 달라고 할 참이다.
낯선 여행지에서 마치 숨어 있듯 조용히 자리 잡은 동네 책방을 발견하면 설렌다. 서점은 어디에나 있지만 동네 책방은 그렇지 않다. 어디에나 없어서 특별하다. 언제부터인가 여행 중에 들러볼 코스로 동네 책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자동차로 한 시간여 거리의 당진으로 떠났다. 그곳에서 낡은 이층집이 포근하게 안고 있는 책방 ‘오래된 미래’를 만났다.
당진의 면천읍성은 ‘성안마을’로 불린다. 마을 입구로 들어가면 저 길목들 안에 뭐가 있을까 궁금해진다. 산책이 시작되면서 드는 생각은 ‘이 마을엔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가 있는 게 분명해’였다.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옛 마을을 그리워하며 찾아온 듯하다. 이용원이라는 간판을 단 이발소, 상호의 글자가 반쯤 떨어져나간 중국집, 전파상, 세탁소 등이 평화롭게 자리 잡고 있다. 인적 드문 조용한 그 길을 따라 옛 면천초등학교의 천 년 넘은 은행나무 앞으로 걸어가다 보면 낡은 이층집이 눈에 들어온다.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다.
동네 책방의 꿈을 열다
문을 열고 들어가 두리번거리며 책장을 넘겨보기도 하고 한참을 서서 책을 읽어도 주인은 하던 일을 계속하고 있다. 아, 도중에 “어서 오세요”라고 눈인사를 했던가. 하던 일이 끝나가는 것 같아 다가가 말을 걸었더니 선한 웃음으로 맞는다. 책방 주인 지은숙 대표다.
그녀가 이 집을 처음 본 것은 아주 오래전이었다고 한다. 당진에 살면서 면천읍으로 가끔씩 놀러갔는데 그때마다 운명처럼 자꾸만 이 집이 눈에 들어오곤 했다.
“10여 년 전에 이 건물을 처음 봤어요. 면천에 놀러 가면 우연히 지나가다가도 늘 이 집이 제 눈에 확 띄었어요. 독특한 외양이었죠. ‘저 집에 책방을 차리면 참 좋겠다’ 했지만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찜하고 있었죠.”
‘자전거포’였던 이 집은 한동안 주인을 찾지 못한 채 수년간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었다. 지 대표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예쁘다 예쁘다” 하며 눈길을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관심만 갖고 있다가 어느 날 시기적으로 맞아서 사들이게 되었다. 지은 지 60년이 넘은 낡은 집이었다. 손볼 데가 하도 많아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골조는 그대로 살린 채 몇 달 동안 남편이 고치고 다듬었다. 그리고 드디어 동네 책방 ‘오래된 미래’를 만들어냈다.
책방 이름 ‘오래된 미래’는 환경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가 쓴 책 제목에서 따왔다. 인도 북부에 위치한 라다크 사람들이 그 지역의 땅과 유대관계를 맺고 서로 협력 공생을 모색하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지 대표는 책방을 열면서 면천이라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공유의 가치를 염두에 둔 듯하다. 참 많이 고민했던 책방 이름이 정해지고 나니 의도에 맞게 착착 일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지인들의 시선은 달랐다. 책방이 있는 면천읍성이 유적지라 개발도 제한되고 어르신들만 사는 곳인데 왜 하필 그런 동네에 책방을 내느냐고 의아해하는 사람이 많았다며 그녀는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시니어들이 뭔가를 시작하면 제2의 인생 ‘무엇’이라고들 하잖아요. 저 역시도 처음엔 책방을 차린다는 말을 섣불리 꺼내지 못했어요. 다들 걱정을 했으니까요. ‘돈 버는 일’을 해야지 다 늦은 나이에 무슨 ‘하고 싶은 일’을 하냐면서요. 더구나 여기서 책이 팔리겠냐고 했죠.”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한 번쯤 책방 주인을 꿈꾸기도 한다. 지 대표도 책을 무척이나 좋아한 국문학도 출신. 한때 아이들을 가르치며 생활할 때 책방 주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 5~6년 동안 작은 책방 투어도 많이 다녔다. 아침에 일어나면 책방을 검색하고 새로운 책방이 어디에 있나 들여다보는 일이 다반사였다.
“간절히 원하면 마음을 담아보세요”
“꼭 해보고 싶으면 해봐야 알지 ‘이럴 거야, 저럴 거야’ 미루어 짐작만 하면 결과를 알 수 없잖아요. 뭐든 마음이 간절하면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 간절함이 용기를 갖게 하더라고요.”
예쁜 카페나 책방 여는 걸 꿈꾸면서 잘할 수 있을까 겁부터 났지만 그래도 꿈만 꾸지 말고 저질러봐야 진짜 그 과정을 아는 것이라고 지 대표는 경험자로서 말한다.
“‘내가 책방을 열면 손해 보는 게 뭐지?’ 하고 스스로에게 물었죠. 크게 타격이 되지 않는다면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큰 수익을 생각하지 않았기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고요. 그렇지만 타격이 크다면 바로 멈춰야죠. 시니어 세대들이 버티거나 고집부리는 건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상황에 따라선 포기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책방에 대한 열망이 너무 컸기에 결정을 못 내리고 망설이던 어느 날 꿈을 포기하게 될까봐 엉엉 울어버린 적도 있어요. 현실 속으로 들어가면 이런저런 상처도 받겠지만 내 마음을 담아 한다면 극복이 되지 않을까요?”
진솔하고 내밀한 이야기가 그녀의 과정을 짐작케 해줬다.
사람들은 묻는다. “책방 해서 돈 많이 벌어요?”라고. 지은숙 대표는 사실 수익을 찬찬히 따져보면 돈보다 더 많은 가치를 얻는다고 말한다. 정말 책만 사러 오는 사람이 뭐 그리 많겠냐고 반문하며 ‘사람들’을 알아가는 것이 더 큰 기쁨이라고 했다.
‘동네’라는 지역사회에서 만나 함께 수업을 하고 뭔가를 같이 꾸려가는 것, 그런 게 너무 새롭고 에너지가 생기고 힘이 난단다. 예쁜 소품이나 달력을 하나 만들어 와서 책방 공간에 놓아주는 소소한 마음들이 그녀에게 행복감을 가져다준다면서 진달래꽃이 그려진 지도를 가리킨다. 이야기가 있는 면천 마을에 오신 분들이 읍성이나 책방만 쓰윽 보고 가는 것이 안타까워 좋은 사람들과 마을지도를 만들어 면의 지원을 받아 배포했는데 그 결과물이 뿌듯하단다. ‘오래된 미래’는 어느덧 책만 파는 동네 책방이 아니라 지역문화의 가치까지 전파하고 있는 것이다. 지 대표는 그 어엿한 입장을 무척 기꺼워한다.
“우리 동네를 사랑해요”
지은숙 대표는 ‘오래된 미래’가 일반 책방의 역할만 하는 게 아니라 문화의 장으로도 활용되고 있어 다행스럽고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시내 도서관 프로그램을 이곳에서 만들어 배달 강좌도 한다. 재능을 가진 분들이 주거지에서 가까운 책방을 통해 동네 주민들에게 강의를 하고, 작가와 함께 북 토크도 열고, 바느질·면천 역사 수업·독서모임·영화보기 등도 진행했다. 특히 책 만들기 수업을 통해 각자 책을 만들고 나름의 출판 기념도 하기에 이르렀다. 단지 책방으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소통의 공간이 된 것이다.
‘오래된 미래’는 시골 마을의 책방이지만 책이 제법 많다. 책방지기의 책 욕심 때문이다. 처음에 책방을 연다고 하니까 다들 북 카페도 함께 내라는 조언을 많이 했다. 그러나 지 대표는 책을 우선순위에 둬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곳이 도서관은 아니므로 책을 읽으며 차 한 잔 정도는 마실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것도 괜찮다 싶어 최소한의 음료를 준비했다.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오래된 미래’의 모든 책은 제가 선택했습니다. 사람 마음이 비슷해서인지 반품하는 책들이 거의 없어요. 잘 모르는 책은 딱 한 권만 주문하지만 제가 좋아하는 책은 쌓아놓고 팝니다. 저는 일상적인 책들을 좋아해요. 특히 3~5권 정도 낸 작은 출판사의 책을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되었는데 내용들이 너무 좋아요. 때로는 손님들이 이 책 괜찮다며 알려주기도 해요. 제가 다 알 수는 없으니 그런 말씀 해주시면 고맙죠.”
둘러보니 어쩐지 주인을 많이 닮은 것 같은 책방이다. 책방지기로서 애착이 가는 코너도 있을 듯싶었다.
“어른들의 이야기책이 있는 코너입니다. 어머니 아버지 얘기가 들어 있는 책은 다 구해서 갖다놓고 싶어요. 그림책 코너도 있는데 엄마들이 아이들이랑 오면 아이 책만 고르는 게 늘 마음에 걸려요. 엄마들에게 위로가 될 수 있는 책을 편안히 골라 읽으면 좋겠어요.”
이층으로 올라가 보니 “이 편안한 공간을 그대에게 허하노라” 하는 것 같아 고마운 느낌이 확 든다. 한쪽 옆으로는 책으로 벽면을 가득 채운 방이 열려 있다. 배 깔고 엎드려 책을 읽고 싶게 만드는 방이다. 천장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공간에는 둥근 탁자와 긴 테이블이 놓여 있다. 차 한 잔 하면서 담소를 나누거나 조용히 앉아 책 읽기 딱 좋아 보인다. 햇살 잘 드는 창 너머로 보이는 옛 면천초등학교와 면천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豊樂樓)가 고즈넉했다.
옆으로 이어진 옥상으로 나가면 면천 마을을 전망할 수 있다. 내려다보니 마을 사람들이 사는 다소곳한 가정집들이 보인다. 깨끗하게 빤 빨래가 빨랫줄에 나란히 걸려 가을볕에 뽀송뽀송 마르고 있었다. 마당 끝에는 북 스테이로 활용하는 방도 하나 있는데, 이 방을 이용하려면 자격이 있어야 한다. 면천에 머물면서 마을을 즐기고 책방을 이용해 쉼을 얻고자 하는 여자여야 한다. 식사 제공은 없는 단출한 조건이다. 그렇지만 아침이면 자기도 모르게 누룽지를 끓여다준다면서 지 대표는 또 하하하 웃는다.
동네 책방이 주는 또 다른 가치 ‘나눔’
그러고 보니 ‘오래된 미래’에는 오래된 책을 따로 구비해놓은 공간도 있다. 책방을 하다 보니 옛날 책들도 정겹고 애틋해 한쪽에 코너를 만들었단다.
“책의 가치는 읽는 사람이 정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누렇게 변한 책들도 데리고 살기로 했어요.”
이뿐만이 아니다. 책방 입구 벽면에는 세 칸의 ‘나눔 책장’이 있다. 여기에 놓인 책들은 팔지 않는다. 누구라도 마음껏 가져다 읽으면 된다. 간혹 자신이 다 읽은 책을 기증하고 싶거나 누군가에게 읽히고 싶어 가져오면 경우에 따라 헌책 값을 계산해주기도 한다. 책방이라는 공간을 초월해 나눔의 의미를 공유하는 좋은 아이디어다.
요즘 동네 책방이 많이 생기기도 하고 또 사라지기도 한다. 무슨 이유일까 궁금했다.
“책방을 시작하는 이들의 계층 분포도가 의외로 넓어요. 젊은이들도 있고 퇴사한 중년이나 시니어들도 있지요. 그런데 젊은 분들은 대부분 임대를 얻어서 하다 보니 현실적인 어려움에 처하게 돼요. 시니어들은 저처럼 수년씩 고민해서 결정하거나, 또 사는 집에 딸린 공간을 이용하는 분이 많아요. 아무래도 젊은이들보다 임대료 부담에서 좀 더 자유롭죠. 그래서 오래가는 게 아닐까 싶네요.”
면천이라는 오래된 마을이 주는 고즈넉함, 그 분위기 속에 ‘오래된 미래’는 아주 잘 어우러져 있다. 지낼수록 점점 더 애착이 간다는 책방지기의 말에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동네 책방이 주는 가치가 충만한 시골 마을의 가만가만한 가을 한나절이 따스했다. 문은 연 지 아직 2년 남짓밖에 안 되어 서툴렀던 부분도 있었다. 그걸 조금씩 보완하면서 지금처럼 성장하고 싶은 게 그녀의 바람이란다. 지 대표는 밝게 웃으며 덧붙여 말했다.
“그렇지만 책방을 하고 싶었던 오랜 꿈이 이루어져 지금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
습도가 제법 높았던 날이었다. 다녀온 지 시간이 좀 지났어도 머체왓 숲길은 아직도 가슴 깊이 스며들어 있다. 지금도 그 숲이 그대로 느껴지는 건 단지 안개비 뿌리던 날의 감성이 보태져서는 아니다.
햇살 쏟아지는 한낮이거나 숲이 일렁이며 바람소리 윙윙거리는 날이었다 해도 신비롭던 풍광의 그 숲은 여전히 내게 오래도록 남아 있을 것이다.
숲은 저만치서 차분히 기다리고 있었다. 수수한 풍치에 끌리듯 다가갔다. 거길 걷는 이들의 오롯한 순례는 머체왓이기에 가능했다. 빼곡했던 숲의 적막함 속으로 걸어 들어간 발걸음 소리마저 자연 속에서 일부가 되었다. 머체왓 숲은 그런 곳이었다. 오감이 열리던 그날의 시크릿한 숲의 언어를 기억한다.
머체왓 숲은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에 있다. 머체왓이란 낱말은 제주도민에게도 익숙지 않다. '머체'는 '돌이 엉기성기 쌓이고 잡목이 우거진 곳', '왓'은 '밭'을 의미하는 제주 방언이다. 이를테면 돌과 나무가 우거진 척박한 숲길이라는 뜻이다. 오르내림 경사의 난이도도 거의 없는 쉬운 길인데도 말 그대로 군데군데 이끼 낀 돌무더기가 있고 쭉 평탄하지는 않다. 제주엔 무수한 오름과 둘레길이 있지만 이처럼 손이 덜 탄 머체왓 숲길은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아 한가롭게 걸을 수 있다.
입구 안내판의 머체왓 숲 프로그램과 숲길 안내도를 들여다본다. 희망자는 체험 프로그램이나 숲길 탐방코스별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다. 숲길은 두 개의 코스가 있다.
1코스는 머체왓 숲길(느쟁이왓 다리- 방애 혹- 제밤낭 기원 쉼터- 조록낭길- 전망대- 옛집터- 서중천 전망대(다리)- 숲터널- 올리튼물- 연제비도를 돌아 6.7㎞, 약 2시간 30분),
2코스는 머체왓 소롱콧길(방사탑 쉼터- 움막 쉼터- 편백낭 쉼터- 소롱콧 옛길- 중잣성- 편백낭 치유의 숲- 오글레기도- 서중천 습지- 숲터널- 전망대(다리)부터는 1코스와 중복되는 6.3㎞, 약 2시간 20분).
그 외 남쪽으로 3㎞의 서중천 탐방로가 있다. 진입하다 보면 저류지 공사를 하는 곳이 있어 코스를 조정할 수도 있다. 그런데 머체왓 숲길은 지난번 태풍 복구 작업으로 탐방로 출입을 금지한다는 안내문을 걸어놓았다.
머체왓 소롱콧 숲길에 들기 전, 눈앞에 새하얀 메밀밭이 펼쳐졌다. 마치 이효석 소설 ‘메밀꽃 필 무렵’에 나오는 문장처럼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한 그 광경이었다.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은 아니었지만 초입의 드넓은 목장지대 초원을 뒤덮고 자잘하게 피어난 메밀꽃이 비에 젖어 촉촉했다. 고립무원처럼 적막하던 숲에 젊은 남녀 한 팀이 들어서니 비로소 자연과 사람의 어우러짐이 조화롭다.
소롱콧길은 일대의 지형지세가 작은 용(龍)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인데 ‘코’의 의미는 ‘코지’, ‘곶’의 의미로 해석된다고 한다. 서중천 주변으로 흐르는 작은 하천 둘레로 삼나무와 편백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어서 피톤치드의 숲 내음이 늘 고여 있는 듯하다. 빼곡한 숲 틈으로 가끔씩 하늘이 열리고 조금씩 걸어 들어갈수록 청정 숲은 마치 제주의 속살로 파고드는 듯 신비로웠다.
그 길을 걷다 보면 초원을 지나 온통 숲인데도 돌담이 가끔 보였다. 밭을 둘러친 돌담을 밭담, 무덤 둘레의 돌담을 산담이라 하는데 경계를 짓기 위함이라고 한다. 집과 집을 구획하는 울담, 전통 초가의 외벽에 쌓은 축담 등 역할에 따라 다양한 이름을 지닌 돌담들은 경계의 의미를 넘어 있는 그대로를 삶 속에 끌어들인 제주 사람들의 혼이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밭 한가운데 돌담이 둘러친 묘지가 독특했다. 자손들이 밭을 매다가 "할무니이~" 하고 불러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잠깐 쉬면서 할머니에게 가슴속에 담아둔 고자질도 하며 두런두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에 돌무덤이 어쩐지 정겨워 보였다.
조금씩 비바람이 불기도 했지만 숲길은 고요했다. 이끼와 고사리가 자라는 길을 걷다가 오래된 고목 아래 펼쳐진 젖은 평상에 앉아봤다. 이따금씩 이렇게 쉼터가 나타나고 숲놀이를 할 수 있도록 배려된 공간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나무에서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고 길 옆 아래에선 저속으로 흐르는 서중천의 물소리가 들려왔다. 숲의 운치와 편백나무 향의 상쾌함으로 머리가 맑아지는 게 느껴진다.
가만히 앉아 바라보는 숲과 초원만으로도 마음이 정화된다. 어디서든 바다를 볼 수 있는 제주에서 이렇게 작은 냇물을 끼고 걷는 소소한 맛이라니, 그저 좋다. tvN 예능 프로그램 '바퀴 달린 집'에 머체왓 숲이 나왔을 때 배우 공효진이 "여기 가만히 있으니까 정신이 사납지 않고 너무 좋다"라고 말했다니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미지의 원시림을 방불케 하는 신비로운 숲, 인적 없이 적막해도 생동감이 넘친다. 곳곳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력도 느껴진다. 온몸으로 전해지는 건강한 기운이다. 마음껏 숨을 쉬어도 안전한 곳. 자연이 주는 자비로움에 둘러싸여 복 받은 느낌이다. 요즘 너무 흔해져버린 힐링이란 말을 이곳에서는 쓰고 싶지 않다. 머체왓이나 소롱콧처럼 제주만의 토속적인 말이 따로 없을까. 초원, 꽃, 나무, 하늘, 구름, 빗방울, 돌, 물, 바람까지 제주 근원의 모든 것을 느낄 수 있는 숲이다.
이토록 순수한 머쳇골에도 제주의 역사가 서려 있음을 상기할 일이다. 진입로에 들어서자 시비가 눈에 띈다. 비석에 '시비를 세우는 뜻'이라는 글이 있다. "한남리 머쳇골은 제주 역사 속에 '잃어버린 마을이다'. 초등학교 시절까지 머쳇골에 살았다는 문태수(78세) 씨는 ‘4.3 이전까지는 조상 대대로 대여섯 가구가 목축업을 하며 살아왔다’라고 회고했다. 오승철 시조시인은 머쳇골 집터의 무늬, 4.3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터무니 있다'라는 시로 2014년 오늘의 시조문학상을 수상했다. 이에 한남리 주민들과 서귀포문인협회에서는 '잃어버린 마을'의 기억을 복원하고 제주 역사의 한 페이지로 복원하기 위해 이 비를 세운다. 이것은 뜻있는 다양한 작가들의 재능기부로 제작되었다“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오승철 시조시인의 시 '터무니 있다'도 새겨져 있다.
홀연히/ 일생일획/ 긋고 간 별똥별처럼/ 한라산 머체골에/ 그런 올레 있었네/ 예순 해 비바람에도 삭지 않은 터무니 있네// 그해 겨울 하늘은/ 눈발이 아니었네/ 숨바꼭질하는 사이/ 비잉 빙 잠자리비행기/ 중산간 마을 삐라처럼 피는 찔레// 이제라도 자수하면 이승으로 다시 올까/ 할아버지 할머니 꽁꽁 숨은 무덤 몇 채/ 화덕에 또 둘러앉아/ 봄 꿩으로 우는 저녁
아름다운 제주가 아픔의 땅이기도 한 것을 숲길을 잠깐만 걸어도 알 수 있다. 원시의 자연을 내어주며 쉬다 가라고 숲은 말하지만 그 안에는 뼈아픈 통증도 새겨져 있다. 발걸음을 늦추고 놀멍, 쉬멍, 걸으멍 정글 탐험하듯 미로와 같은 길을 걸으며 그들을 기억한다. 머체왓의 생생한 자연 속에 풍덩 빠져서 치유의 시간을 만나며 삶의 에너지를 얻고 가벼워지는 곳, 기어이 다시 올 수 있도록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의 한 구절처럼 또 다른 길을 남겨두었다.
*머체왓 숲길 방문객지원센터: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 755
주변에 가볼 만한 곳과 맛집
△머체왓 식당
머체왓 식당은 머체왓 숲길 지원센터와 같은 건물에 있다. 주변엔 식당이 없고 오직 여기뿐이다. 그렇다고 밥상이 허술하지 않다. 오리백숙이나 옥돔구이 정식처럼 한상 차림도 있지만 단품 메뉴도 있다. 반찬이 깔끔하고 정갈하다. 맛도 괜찮다. 줄 서서 먹는 맛집보다 이렇게 그 자리에서 길 가던 사람에게 먹을 만한 밥 한 끼 내어주는 집이 정겹다. 머체왓 식당이 그런 곳이다(머체왓 숲에 들면 음주가무, 흡연, 음식물 반입, 취사 행위가 금지된다). -서귀포시 남원읍 서성로 755
△보룡제과
성산읍으로 나오면 시내에 유명한 빵집이 마주 보고 있다. 그중 보룡제과는 규모는 크지 않지만 오랜 역사를 보여주듯 클래식한 빵집의 분위기가 친근하다. 시그니처 마늘바게트를 비롯해 가격도 합리적이고 서비스도 후하다.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2747-28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글라스 하우스’
머체왓에서 성산으로 나왔다면 섭지코지에 한번 들러보는 건 어떨지. 성산일출봉 옆 섭지코지는 제주엘 가면 누구나 가보는 곳 중 하나다. 게다가 영화나 드라마 촬영 단골 장소이기도 하다. 그곳에 멋진 건축물이 제주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바로 글라스 하우스다. 안도 다다오가 설계한 건축물이 제주에 제법 많은데 그중 글라스 하우스는 제주의 자연과 풍광을 한꺼번에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제주의 햇살과 바다와 바람을 은유적으로 시각화했다는 건물 앞에서 인생 샷을 찍거나 실내의 전망 좋은 카페에 들러봐도 좋다.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 46
△그리운 바다 성산포, 이생진 시비(詩碑) 거리
성산포를 사랑한 이생진 시인의 시비공원이 성산포 해안에 조성되어 있다. 성산 일출봉이 건너편으로 보이고 제주의 바닷바람과 햇살이 시비 위로 뿌려지는 곳. 오가는 이 별로 없는 그 바닷가에 지나듯 들러 시인의 시를 천천히 읽어본다면 여행의 기억이 더 풍성해진다. -서귀포시 성산읍 성산리 305-1
강원도라 하면 누구라도 산과 바다가 고루 펼쳐진 대자연이라는 걸 자연스럽게 떠올린다. 그래서 사람들은 동해로 떠나고 바다를 둘러싼 수려한 강원도의 산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 자연 속에 문화 예술의 멋이 자리 잡고 있다. 폐교에 펼쳐진 예술의 풍성함과 메밀꽃 이야기의 정취 속에서 조용하게 보낼 수 있는 공간이 기다린다.
언제부터인가 시골 학교의 폐교가 늘면서 비어 있는 공간 이용의 다양한 모습을 감상하게 되었다.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출되면서 아이들도 부모와 함께 떠나버려 폐교가 되고 있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이 잇따르며 생긴 공간이다. 이제는 아이들이 떠난 학교가 미술관이나 창작실, 도서관 캠핑장, 또는 카페와 같은 휴식 공간으로 탈바꿈하여 지역 주민은 물론이고 세상 사람들과의 소통을 이끌어내고 있다.
강원도 평창의 무이예술관은 시골마을의 자그마한 무이초등학교였다. 폐교된 이후 서양화가 정연서, 이천섭, 조각가 오상욱, 도예가 권순범 등의 예술인들이 뜻을 모아 예술관으로 변신시켰다. 폐교를 이용한 공간을 여러 군데 가본 적이 있는데 무이예술관은 실내와 실외로 나누어 예술작품이 넘쳐나는 게 특별하다.
교실마다 장르별 작품들이 꽉꽉 채워져 있다. 가끔은 조각 작품을 앞에 두고 버스킹도 한다. 무이예술관, 이곳이라면 꽉 채운 가을날 하루를 보낼 만하다. 이곳을 서성이다 보면 어느덧 어릴 적 추억이 소환되고 감성은 더없이 말랑해져서 비로소 숨통이 트여 있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무이예술관은 입구부터 눈길을 사로잡는 거대한 조형물이 시골 학교를 그저 조촐하게 꾸민 예술관이 아니라는 걸 대번에 전한다. 복도에 발을 들이면 창가의 새하얀 커튼이 바람에 살랑이고 흰색 천의 직조 틈 사이로 복도 가득 빛이 쏟아진다. 창가에 줄지어 전시된 조각 작품들은 가을볕에 멋스럽게 빛난다.
둘러보니 원래도 작은학교였던 것 같다. 몇 개의 교실이 있는 건물 한 동이 전부인데 교실(전시실)마다 회화, 조각 작품, 도예 작품들이 가득하다. 빽빽하게 전시된 서예 작품도 고요히 묵향을 풍긴다. 또 한쪽 전시실에는 역시 봉평의 예술 공간답게 새하얀 메밀꽃 그림으로만 가득 채워져 있다. 복도에서는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삽화와 함께 스토리텔링을 감상할 수 있어 문학적 분위기에도 잠겨보게 된다.
볼거리는 끝이 없다. 스튜디오 겸 작업실이 열려 있어 예술가의 공간을 훔쳐보는 맛도 쏠쏠하다. 체험 공간과 아트 숍이 함께 꾸며져 있어 참여 활동도 가능하다. 복도 창가나 틈새 공간도 그냥 놔두지 않고 예술가들의 손길이 닿아 있다. 계단참의 소품들을 구경하면서 위층에 오르면 모임이나 파티를 열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문 열고 옥상으로 나가면 무이예술관의 바깥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다. 가슴이 탁 트이는 공간이다.
예전엔 운동장이었을 조각공원은 자연이 주는 넉넉함이 있어 천천히 둘러볼 수 있는 여유를 준다. 잔디 마당은 발걸음마다 부드럽다. 아이들은 조각품들 사이에서 뛰어놀고 엄마 아빠는 예술작품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 모습이 그림처럼 아름답다. 가을이 깊어가는 운동장엔 노랗게 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날리고 발아래는 낙엽이 바스락거린다. 이곳을 오가는 누구라도 갬성 충만이다.
커피 향 따라 가본 전시관 끄트머리의 갤러리 카페. 사방으로 널찍한 덱에 앉아 운치 있게 차 한 잔 할 수 있는 공간이다. 카페 안은 운동장을 향해 문을 활짝 열어놓아 테이블에 앉아 편안히 풍경을 감상하며 휴식시간을 누릴 수 있다. 예술적 상상력과 소통이 공존하는 무이예술관에 가면 가슴 가득 예술의 기운을 얻어 나오게 된다.
살다가 잠시 멈추고 천지의 가을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깊게 숨을 쉬어볼 만한 곳. 폐교에 담긴 예술 작품과 따스한 휴식 공간에서 충분한 감성 충전을 했던 참으로 괜찮았던 가을날 하루, 자연스럽게 힐링이 되었던 시간이다.
▲주변에 가볼 만한 곳
-이효석 문학의 숲
누구나 한 번쯤은 들어보았을 이효석의 소설 ‘메밀꽃 필 무렵’. 이 소설의 배경지인 봉평엔 메밀밭뿐 아니라 소설 속 내용을 모형으로 재현해놓은 ‘이효석 문학의 숲’이 있다. 발걸음에 따라 30분에서 1시간 정도 걸리는 산책로가 마련돼 있다. 덱 주변에는 자작나무가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산책길을 따라 소설 속 장터와 등장인물들이 막걸리를 마시던 충주집과 물레방아 등 소설 속 내용이 길목마다 새겨져 있어 하나씩 읽다 보면 어느새 전편을 다 읽게 된다. 가을이 깊어지는 계절에 이효석 문학의 숲에서 단편문학 한 편 읽으며 산책하는 시간, 좋지 아니한가.
최근 코로나19의 장기화로 인해 전 세계가 심각한 경제 위기를 맞고 있다. 코로나19가 장기간 이어지리라는 진단이 의료계에서 거듭 나오고 있는 지금, 경제 발전과 일자리 창출을 이루려면 기존과는 다른 차원으로의 도약이 필요한 상황. 정부에서는 이를 위한 ‘한국형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디지털 뉴딜과 그린 뉴딜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들이 성공적으로 지역에 안착해 주민들이 좋은 일자리를 체감하는 게 정부의 목표이자 지역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는 양천구를 책임지고 있는 김수영 양천구청장 또한 마찬가지다. 그녀에게 직접 일자리와 양천구 개발의 미래상을 들어봤다.
김수영 양천구청장은 지난해 7월 대통령 직속 일자리 위원회에서 지방정부를 대표하는 지역위원으로 위촉된 이후,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목소리를 대표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이는 각 지방정부에서 시행되고 있는 우수한 일자리 정책이 전국적으로 확산될 수 있도록 중앙-지방정부 간, 지방-지방정부 간 협업을 강화하는 소통의 창구 역할이다. 양천구는 2019년 119개 사업에 7231개 일자리 창출 목표를 수립해 119개 사업, 6800개의 일자리를 창출하는 성과를 이뤘다.
“일자리는 더 이상 단순한 생계유지 수단이 아닌, 삶의 질을 보장할 수 있는 핵심적인 복지 영역입니다. ‘일자리가 곧 복지’인 거죠. 질 좋은 일자리 창출에 힘써 다양한 계층이 체감하는 내실 있는 정책을 추진하는 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일과 삶의 균형을 실현할 수 있는 좋은 일자리는 모두의 바람이자 희망입니다.”
중장년층 일자리 확보를 위한 다양한 노력
김 구청장은 50대 이후의 중장년층을 위한 양천구만의 일자리 지원 사업들을 준비하고 있다. 먼저 양천구의 어르신복지과 ‘인생 이모작 팀’이 중장년층을 위한 여러 솔루션들을 기획 중이다. 그리고 50대 독거남들이 사회에 다시 진출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는 ‘나비남 프로젝트’, 80세 이상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의사, 간호사, 영양사 등 전담 팀이 직접 방문해 건강관리를 해주는 ‘백세건강 돌봄 사업’ 등 세대별 맞춤형 복지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이외 양천시니어클럽을 운영하고 있으며 중장년층이 제2의 인생을 준비할 수 있게끔 다양한 정보 제공 및 취·창업 지원을 위한 양천50플러스센터를 2021년 7월 개관할 예정이다. 또한 ICT 기술을 독거노인 및 취약 계층에 도입해 디지털 취약 계층과의 정보 격차를 줄이고 고독사를 예방하는 신중년 일자리 사업도 추진 중에 있다. 예를 들어 ‘ICT 기반 돌봄 서비스’는 신중년 ICT 케어 매니저들이 AI 스피커를 활용해 독거 어르신의 고독사 예방 및 신속한 위기 대응 등의 돌봄 서비스를 수행하는 일이다. 더불어 조리사 자격을 갖춘 신중년들이 어린이집의 대체조리사로 활동해 급식 공백을 최소화하는 서비스인 ‘대체조리사 지원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
자치단체로는 전국 최초 ‘목재교육전문가’ 양성기관 지정
양천구가 자치단체로는 전국 최초로 목재교육전문가 양성기관으로 지정됐다는 점이 이색적이다. 양천구가 선정된 배경에는 먼저 ‘연의목공방’이 서울시 자치구 목공방 중 규모가 제일 크며, 목재 관련 박사학위가 있는 외부 강사를 인력풀로 구성하고 있다는 점이 있다. 그리고 지자체에서 목공지도사를 직원으로 채용해 직접 운영하는 것도 높이 평가받았다.
“양천구는 주거 지역이 전체 면적의 약 72%를 차지하는 대표적인 베드타운으로 흔히 목동을 얘기하면 대입 전문학원이나 목동 아파트 등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런 입시학원 중심의 목동에서 평생학습 중심의 양천구를 만들기 위해 오목공원 내 창고로 방치돼 있던 공간을 목공예 체험장으로 조성한 것이 연의목공방의 시작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2020년 7월 산림청에서 전국적으로 공모한 ‘목재교육 전문가 양성기관’에 지원하였으며, 지정을 받았습니다. 전국 총 44개 기관에서 신청했는데 6개 기관만 선정되었습니다. 그중 하나가 양천구죠. 앞으로 목재교육 분야 전문 인력을 양성하고, 국가자격증반도 운영할 계획입니다. 개강은 곧 할 예정입니다.”
12월부터 개강할 목재교육전문가는 산림청에서 목재교육전문가 양성기관으로 지정한 기관만이 배출할 수 있다. 6개월 과정으로 운영할 예정이며 이를 통해 목재교육 분야의 전문지식·기술습득 및 국가자격증을 취득하면 목재문화체험장, 강사 활동, 학교 방과후 교사 및 마을 학교 강사, 소창업 등이 가능해진다. 양천구에 목공방 마을 1호가 머지않아 탄생될 것으로 기대된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마음 치유는 공원에서
일자리를 못 구하는 일도 사람의 마음을 척박하게 만들지만, 이제 우리에게는 그 이전에 가혹한 생존의 문제가 하나 생겼다. 바로 코로나19다. 김 구청장은 자칫 몸과 마음이 삭막해질 수 있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무엇보다 ‘삶의 질’이 중요해질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리고 그런 기준에 따라 많은 사람이 한 공간에서 여가를 보내는 대신, 쾌적하고 안전하게 ‘쉼’을 누릴 수 있는 공원을 추천했다. 양천구는 이러한 방향성에 맞춘 다수의 공원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양천구 면적은 17.4k㎡로 이 중 주거 지역이 71.8%인 12.5㎢입니다. 녹지는 23%인 4㎢로 그 비율이 매우 높은 편이며 전역에 크고 작은 공원 104개소가 조성되어 있어 힐링하기에 좋은 환경이죠. 특히 연의목공방에서 700m 떨어진 곳에 양천도시농업공원을 작년 4월에 개장했는데, 7000평 규모에 농업체험학습장, 친환경텃밭, 야생초화원, 생태연못 등이 마련돼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삭막한 도시 환경을 개선함은 물론 마을공동체 사업과도 연계해 건강, 교육, 공동체 개선 등 주민의 삶의 질 향상을 이끌고 있는 중입니다.”
양천도시농업공원에서 수확한 채소는 각 동의 취약 계층과 어르신 사랑방에 기부하거나 양천푸드마켓을 통해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달된다. 작년 한 해 동안 기부된 채소들은 300kg이 넘는다. 공원을 가꾸는 재미가 정서적 위안과 함께 공동체 정신을 높이는 방안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김 구청장은 이러한 호응에 힘입어 2022년까지 연의목공방 맞은편에 제2의 도시농업공원을 하나 더 개장해 운영할 계획을 갖고 있다.
균형 발전을 위한 대규모 사업들
“양천구는 강남권과 비강남권을 말하는 서울시의 축소판처럼 목동과 비목동 간의 지역 격차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구청장으로 취임하면서부터 균형 발전에 대한 밑그림을 구상했고 민선 7기를 열면서 구체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김 구청장이 균형 발전을 위해 구상한 ‘H-Plan’은, 양천구의 큰 개발 계획을 통해 동쪽(목동)과 서쪽(비목동)이 균형 발전을 이루고 상생할 수 있도록 마련한 정책 사업이다. 미래 양천의 30년 발전을 위해 주민들과 약속한 내용이기도 하다. 우선 동쪽에는 중소기업 혁신 성장 밸리를 조성하고 서쪽에는 서부트럭터미널을 개발해 도시 첨단 물류단지를 추진할 계획이다. 남쪽은 신정차량기지를 이전 및 개발해 문화 상업 복합 시설을 유치하며 북쪽으로는 국회대로와 차도를 지하화해 지상에 공원을 조성하기로 했다.
“신정3동의 서부트럭터미널 개발은 운영사인 서부T&D에서 구체적인 계획을 제출해 그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경전철 목동선도 서울시와 정부에서 재정사업으로 추진하기로 발표한 이후, 국토교통부 국가교통위원회의 심의결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국토교통부의 승인이 끝나면 기획재정부의 예비타당성 조사를 거쳐 다음 절차가 진행될 것입니다. 워낙 큰 사업들이라 임기 내에 모든 것을 마무리할 수는 없겠지만 미래의 먹거리 사업이라 생각하고 차근차근 추진해나가려고 합니다.”
자발적인 착한 소비 운동에 감동
김 구청장은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이후 양천구민들에게 감동을 받은 경험이 있다. 구청에서는 코로나19로 지역경제가 어려워지자 힘들어하는 소상공인을 응원하기 위해 ‘착한 소비’ 캠페인을 시작했다. 동네 단골집에 미리 ‘착한 선결제’를 한다거나 포장 주문을 하거나, 1+1 구매를 해서 주변 이웃과 나누자는 ‘착한 소비자’ 운동이 그 내용이다.
“현장에 나가 보면 손님이 너무 없어 힘들다는 사장님이 많은데 ‘주민들이 이렇게 착한 소비 운동을 해주시니 그래도 버틸 힘이 난다’고들 하셨습니다. 그중 한 식당 사장님은 주민들이 방문 포장도 하고 선결제도 해주고 응원해주는 것이 너무 고마워서, 자신도 단골 미용실에서 선결제를 하는 착한 소비자 운동에 동참했다는 이야기를 해주시더군요.”
정부에서 재난지원금, 새희망자금, 소상공인 신용보증 융자 지원 등 여러 가지 정책들을 통해 소상공인들을 지원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일시적인 지원보다 단골손님들의 응원과 소비가 더 큰 도움이 되기도 한다.
“사실 ‘착한 소비’ 캠페인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없으면 불가능했을 사업입니다. ‘나도 힘들지만 우리 이웃을 위해 함께 이겨내자, 힘내자’ 하면서 서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동참해주시는 주민들을 보면참 감사한 마음도 들고, 사회를 움직이고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은 주민들에게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시니어 구민을 위한 행정
최근 김 구청장이 관심을 갖고 있는 또 다른 분야는 시니어 구민을 위한 디지털 격차 해소다.
“얼마 전 모 신문에서 국민 10명 중 8명이 유튜브를 이용하고, 한 달 평균 30시간이나 시청한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잘못된 뉴스가 가장 많은 채널을 묻는 질문에 50대와 60대의 절반 이상이 유튜브를 지목할 만큼 가짜 뉴스에 노출되어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그래서 무분별하게 쏟아지는 가짜 뉴스와 거짓 정보에서 진짜를 가려낼 수 있도록, 중장년 어르신들의 디지털 역량을 강화해줄 ‘디지털 문해 교육’을 실시하고 있습니다.”
김 구청장은 로봇과 시니어를 연결하는 일도 하고 있다. 관내 어르신들의 디지털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교육용 로봇 사업을 도입한 것이다.
“어르신 복지관 3개소에 얼굴과 음성 인식이 가능한 카카오톡 교육 로봇인 ‘리쿠’를 40대 보급했습니다. 그리고 최근 손님들이 비대면 주문을 선호하고, 사업주의 인건비 부담도 적어 매장마다 늘어나고 있는 무인단말기 ‘키오스크’ 사용을 어려워하시는 어르신들을 위해 패스트푸드점 주문, 기차표 발매, 영화관 티켓 발매, 무인발급기 이용 방법 등을 알려주는 교육용 키오스크를 복지관에 설치하고 관련 강좌를 개설할 예정입니다.”
김 구청장은 또한 ‘스마트폰 사용 기초 과정’을 시작으로 유튜버로 활동할 수 있는 ‘1인 크리에이터 교육’, ‘시니어를 위한 빅데이터 교육’ 등을 실시해 다가오는 스마트 미래 시대에 신중년들이 당당하게 적응할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라고 했다.
현재진행형의 인생 2막
“보통 정년이라고 해서 퇴직하는 나이가 정해져 있는 직업에서는 은퇴 후를 ‘인생 2막’이라고 표현하지만 저는 계속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더 일해야 할 때라고 말하는 김 구청장은 양천의 미래 30년을 위한 굵직한 사업을 많이 추진하고 있다. 그런 사업들을 꼼꼼히 챙기면서 양천구민들을 위해 어떻게 잘 마무리할지가 가장 큰 고민이라고 밝혔다. 50대 중반의 신중년인 김 구청장이 생각하는 시니어로서의 삶은 뭘까. 그녀는 나무와 같다는 말로 비유했다.
“울창한 산길을 걷다 보면 주위에 나무가 참 많은데, 이 나무들의 나이를 겉만 보고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나무는 우리처럼 나이를, 이마나 눈가에 주름으로 새기는 것이 아니라 나무 속에 나이테로 새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봄이 되면 모든 나무가 푸른 잎을 꺼내는 것은 똑같죠.”
김 구청장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성해지는 나무처럼 나이 들수록 더욱 울창하고 푸르른 나무가 되어, 누군가 와서 쉴 수 있는 그늘을 만들어주는 그런 포용력과 배려심을 키우는 게 멋지게 나이 드는 것이라고 말한다. 큰 나무처럼 양천의 미래를 책임지며 자신의 나이테를 깊이 새기고자 하는 그녀의 소망이 어떤 봄을 맞이하게 될지 기대가 된다.
인테리어 효과는 물론 힐링까지 선사하는 플랜테리어가 요즘 주목받고 있다. 누구든 차근차근 도전해본다면 자연이 깃든 아늑한 공간을 꾸밀 수 있다. 김해란 힐링 플랜테리어 전문가를 통해 플랜테리어를 시작하려는 이들을 위한 정보를 담아봤다.
도움말 김해란 힐링 플랜테리어 전문가 자료 제공 및 발췌 ‘식물처럼, 살다’(김해란 저, 파피에)
[STEP 1] 플랜테리어 입문, 이것은 알고 시작하자
Q1 | 식물 키워본 적 없는 초보자라면?
초록의 싱그러움을 간직한 작은 식물 하나부터 키워보면 좋다. 산호수, 아이비 등은 냉·난방으로 환기가 어려운 밀폐 공간에서도 병충해 없이 잘 자라며, 공기정화는 물론 미적 기능까지 뛰어나 플랜테리어 초보자에게 제격이다. 특히 테이블야자나 스파티필룸은 그늘에서도 잘 자라고, 흙 없이 물만으로 키우는 수경재배도 가능하다. 공기정화 실내식물 기르기는 힐링 플랜테리어의 첫걸음이다.
Q2 | 무엇부터 사야 하고, 비용은 얼마나 들까?
초보자용 식물 중 한 가지를 골라 구입한다. 집 근처 화원도 좋고, 화훼단지나 온라인 쇼핑몰을 둘러봐도 괜찮다. 작은 식물 화분의 경우 5000원~1만 원 정도면 충분히 살 수 있다. 여기에 분무기만 더하면 기본적인 준비는 마친 셈이다. 만약 씨앗으로 식물을 키우려면 모종삽과 화분 이동 받침대도 필요하다. 차차 가지치기가 필요해지면 원예용 가위를, 텃밭 정도 규모가 되면 압축 분무기를 더한다. 흙은 아무 데서나 퍼오면 벌레 알이나 유충이 있을 수 있으니, 꼭 분갈이용 흙이나 원예용 상토를 구입한다. 플랜테리어라고 해서 너무 부담을 가질 필요는 없다. 적은 비용과 준비물로 소박하게 시작해 차츰 식물 가족을 늘려가면 된다.
Q3 | 어떤 화분을 골라야 할까?
플라스틱, 세라믹, 시멘트 등 다양한 소재의 화분이 있지만, 식물에겐 토분이 가장 좋다. 화분 자체가 숨을 쉬기 때문인데, 토분의 습도를 보고 물 줘야 할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초보자라면 여러 화분에 욕심내지 말고 우선 페트병이나 유리병, 깨진 컵 등을 활용해보자. 플랜테리어 효과를 주고 싶을 땐 한 가지 톤으로 화분을 통일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가령 모양은 같고 크기가 다른 흰색 화분을 놓아두면 단정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Q4 | 어디에 놓아야 어울리고, 잘 자랄까?
플랜테리어는 집 안의 식물 인테리어다. 식물마다 특성이 있어 더 잘 어울리는 장소가 있다.
[STEP 2] 플랜테리어 실전, 식물이 보내는 SOS 솔루션
Q5 | 플랜테리어 초보자가 가장 많이 하는 실수는 무엇일까?
초보자의 경우 플랜테리어의 미적인 기능을 먼저 생각하는 이가 많다. 애초에 밖에서 더 잘 자라는 식물이지만 생육 조건이 맞아 실내에서도 키울 수 있어 플랜테리어 작품으로 이용되는 것이다. 미적 기능에만 집중하다 보면 재배 관리가 소홀해지거나, 자칫 플랜테리어도 실패할 수 있다. 아름다운 식물을 곁에 오래 두고 감상하려면 물 주기와 햇빛, 통풍 등 생육 환경을 고려한 가꾸기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
Q6 | 가을, 겨울과 같은 추운 계절에 특별히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면?
온도 저하로 인한 냉해에 신경 써야 한다. 혹여 저온에 방치돼 식물 줄기 아랫부분이 얼었다면 안타깝지만 회복이 불가능하다. 억지로 따뜻하게 녹인다 해도 이미 식물의 조직까지 손상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살아나긴 어렵다. 실내 식물은 대부분 열대성 식물들이다. 생육 적정온도는 25℃, 적정 습도는 40~50%이니, 가을, 겨울에도 가급적 환경을 맞춰준다.
Q7 | 반려식물과 반려동물, 함께해도 괜찮을까?
해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약간의 독성을 가진 식물들이 있다. 가령 추억의 만화 ‘개구리 왕눈이’에서 왕눈이가 우산처럼 썼던 ‘알로카시아’는 아침에 보면 잎에 물방울이 맺혀 있는데, 이 물방울에 독성이 있어 애완동물을 키우는 집에서는 피해야 한다. 스파티필룸이나 앙수리움 등 대부분 천남성과 식물이 그러하다.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어린 손주가 함께 지낼 때도 마찬가지다. 이런 환경에서는 손에 잘 닿지 않는 행잉 플랜테리어나 벽장식 플랜테리어를 고려하는 것이 좋다.
[STEP 3] 플랜테리어 심화편, ‘녹색손’들을 위한 이야기
Q8 | 플랜테리어 고수가 도전해볼 식물은?
허브식물인 ‘율마’에 도전해보자. 보기만 해도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연초록의 피톤치드 향 가득한 측백나뭇과 침엽식물이다. 곧게 뻗은 선이 아름답지만 ‘까다로운 연인’이라 불릴 만큼 통풍과 습기에 아주 민감하다. 관심을 조금이라도 덜 주면 토라지는 연인처럼, 물 주기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하면 시들시들해지거나 죽어버린다. 뿌리가 습기에 아주 민감해 한 번이라도 마르면 회생하기가 매우 어렵다. 초보자들은 감히 도전하기 힘들지만 ‘녹색손’을 가졌다 자부하는 고수라면 꼭 한 번 도전해볼 만한 식물이다.
Q9 | 넘쳐나는 식물, 이사까지 생각한다면?
플랜테리어에 심취하다 보면 어느새 집 안이 식물로 가득해진다. 온라인 등을 통해 분양을 해도 되자만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주면 경험도 같이 나눌 수 있고 보람도 있다. 식물을 나누는 일은 건강한 환경을 선물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갖고 있는 식물 그대로 플랜테리어 영역을 확장하고픈 이들은 이사도 생각해봤을 터. 아파트를 고려한다면 가급적 1층이나 저층을 추천한다. 햇볕 못지않게 땅에서 가까운 것도 중요한 조건이다. 또 플랜테리어 공간은 집 안을 넘어 건물의 외벽과 옥상까지도 포함하므로,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작은 마당이 있는 주택이면 더욱 좋다.
Q10 | 플랜테리어 전문가가 되려면?
식물원이나 화원을 자주 찾아 많이 들여다봐야 한다. 예쁜 꽃이 피는 작은 화분 하나씩이라도 늘려가면서 공부를 하면 좋다. 좀 더 지식을 쌓고 싶다면 관련 학교를 찾아보면 된다. 단, 벌레를 너무 무서워하거나 심하게 싫어한다면 플랜테리어 전문가가 되기 힘들다. 식물에 끼기 쉬운 응애나 진드기, 지렁이 등을 처리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식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하며 꾸준히 관심을 갖고 시간을 투자하는 것도 중요하다.
은은한 파스텔톤 색채에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화풍, 일상적이고 정다운 소재. 고등학교 교사 출신 이찬재(78) 씨가 그린 그림이다. 아내인 안경자(78) 씨는 그림에 얽힌 이야기를 손주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써 내려간다. 두 사람의 글과 그림은 함께 운영하는 인스타그램(@drawings_for_my_grandchildren) 계정에 공개된다. 계정의 의미처럼 브라질에서 함께 살던 손주가 한국으로 떠나면서 보고픈 마음을 달래기 위해 시작한 일이다.
작은 취미생활이 일상을 송두리째 뒤바꾼 건 3년만이다. 부부만의 감성이 돋보이는 인스타그램은 영국 BBC와 가디언지, 미국 NBC 등에 소개되며 입소문을 탔고, 어느덧 40만 명의 팔로워를 보유한 인기 계정으로 거듭났다. 지난해 5월에는 ‘인터넷의 오스카상’이라 불리는 웨비 어워드에서 상까지 탔다. 두 사람에게 SNS는 어떤 의미일까? SNS를 시작하고 삶이 풍요로워졌다는 이찬재·안경자 부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인스타그램을 시작하신 계기는 무엇인가요?
안경자(이하 안) 브라질에 있을 때 딸네랑 이웃에 살면서 손주와 줄곧 가까이 지냈어요. 남편이 5년 동안 매일 학교를 데려다줬죠. 그러다 딸네가 갑자기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어요. 늘 같이 생활하던 손주가 떠났으니 일상의 한 부분이 잘려 나간 거잖아요. 그러니까 뉴욕에 사는 아들이 아버지가 건강을 잃지는 않을지, 멍하니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진 않을지 걱정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취미로 그림을 권한 거예요.
이찬재(이하 이) 원래는 그림과 연관된 삶을 살지 않았어요. 이민 가기 전까진 아내와 저 모두 고등학교 교사였죠. 그런데 아들이 6살 때 제가 준 그림엽서를 기억하면서 아빠가 그림을 잘 그리니까 취미로 한 번 그려보라 하더라고요. 그 당시 가르치는 학생들 데리고 대성리에 갔다가 주변 건물이나 풍경 같은 걸 그려서 준 적이 있거든요. 그러면서 인스타그램이라는 걸 알려주는 거예요. 그곳에 그림을 올려보라면서요.
Q. 주로 어떤 그림을 그리시나요?
이 처음에는 아무거나 그렸어요. 아들에게 뭘 그려야 하냐 물었더니, 어떤 것도 상관없다고, 뭐든지 그리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무작정 스케치북을 가지고 나가 공원에 있는 조각이라든지, 공연하는 광대, 경찰관이 타고 가는 말 이런 것들을 그렸어요. 그러다 둘째 손자가 태어났죠. 몇 달 뒤 손자를 보러 뉴욕에 갔어요. 거기서 아기를 품에 안고 아들과 대화를 하다 보니 손자들에게 줄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죠. 그때 지금의 계정 이름이 탄생한 거예요.
그때부터 손주들이 좋아할 만한 유익한 소재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애들은 자라면서 좋아하는 게 달라지잖아요. 공룡을 좋아하면 공룡을, 파워레인저를 좋아하면 파워레인저를 그리는 식이죠. 때로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옛날이야기를 해주듯 저희 젊은 시절을 회상하며 그리기도 하고, 한글날, 3.1절과 같은 중요한 날엔 어떤 날인지 그림으로 알려주기도 해요. 요즘은 모든 사람이 중요하게 여겨야 하는 환경에 대한 얘기도 많이 하죠.
Q. 3개 국어로 글을 써야겠단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건가요?
안 저는 전문직은 아니어도 글과 늘 관계 깊은 생활을 했어요. 고등학교 시절부터 문예반에서 활동했죠. 이민 가서는 한인회보도 만들고, 이민 생활을 하며 느낀 감정을 수필 형식으로 써서 간간히 발표도 했어요. 또 국제학교 한국 문학 교사였으니까 소설이나 수필, 시 등을 자주 접했죠.
그러다 남편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기왕이면 그림에 대한 설명을 붙여주면 좋잖아요. 그림이 탄생한 사연을 쓰면 좋겠다 싶었죠. 또 저희가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는 대부분의 팔로워가 미국인이나 유럽인들이었거든요. 그래서 전 세계 모든 팔로워가 그림에 대해 이해할 수 있게 제가 쓴 글을 아들이 영어로, 브라질에서 대학을 나온 딸이 포르투갈어로 번역하게 역할을 나눴어요.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이들이 그림을 보고 보다 더 잘 이해하고 감동을 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죠.
Q. 지금은 SNS를 활발하게 이용하고 계시지만 처음에는 꽤 생소하셨을 것 같은데요. 어려운 점은 없었나요?
이 그땐 인스타그램이 뭔지도 몰랐어요. 무엇보다 휴대폰으로 뭘 한다는 게 익숙하지도 않고 싫었죠. 나이 든 사람들은 누가 알려줘도 한 시간이 지나거나 하루가 지나면 잊어버리고 버벅대거든요. 그런 거에 대한 두려움이 좀 있었어요. 그런데 하도 아들이 간곡하게 권하고, 옆에 앉혀놓고 반복하면서 가르치니까 그 정성에 감복을 했죠.(웃음)
안 처음엔 실수도 많이 했어요. 해본 적이 없으니 사진이 어둡게 나오거나 이상하게 찍혀서 제대로 된 게시물을 못 올렸죠. 그런데 아들이 탓하지를 않더라고요. 오히려 꾸준히 해보라고 했지, 이건 왜 이렇게 시커멓냐 타박하질 않았어요. 그러니까 좀 쉬워지더라고요. 나이 든 사람들은 문명의 이기를 잘 못 받아들이는데,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을 젊은 세대들이 두렵지 않다고 가르쳐줘야 하는 것 같아요.
Q. 최근에는 젊은 세대들 사이 인기인 ‘틱톡’도 활용 하신다고 들었어요. 인스타그램과 다른 점이 있던가요?
안 인스타그램은 아들이 알려줬는데, 틱톡은 우리 딸이랑 손주가 권했어요. 팬데믹 시대에 답답한 생활이 이어지다 보니 활력을 주고 싶었나봐요. 인스타그램은 사진 위주다 보니 서정적이고 감성적인 분위기라면 틱톡은 동영상 플랫폼이라 보다 활동적이고 위트 넘치고 재치 있는 분위기거든요. 젊은이들의 마당이랄까? 손자들하고 춤추는 영상도 올릴 수 있죠. 틱톡도 손자들과 소통하는 여러 방법 중 하나에요.
Q. SNS를 시작하신 뒤 삶에 어떤 변화가 생겼나요?
이 원래 성격이 무심한 편이에요. 그래서 매사에 큰 관심이 없었는데, 일상 속 남겨두고 싶은 부분을 사진 찍고, 그림으로 그리고, 사람들과 공유하다 보니 정서적으로 많이 풍요로워졌어요. 저희가 공원 근처에 사는데 어린이집에서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 자주 소풍을 와요. 그런 아이들을 보며 그림을 그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죠.
안 시각이 넓어지고 깊어졌어요. 그동안은 세월 가는 줄 모르고 살았는데 인스타그램을 한 뒤부터는 글을 쓰기 위해 싹이 나고, 꽃이 피고, 낙엽이 지고, 눈 내리는 모습을 깊이 관찰하고 보게 되니까 자연스레 자연과 사람에 대한 관심이 많이 생겼어요. 다큐멘터리 같은 것도 열심히 보게 됐고요. SNS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하릴없이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만 봤겠죠. 고마운 존재예요.
Q. 마지막으로 이루고 싶은 또 다른 꿈이 있다면요?
안 그냥 좋은 글을 쓰는 게 꿈이랄까요. 저는 지금 동화를 쓰고 있는데, 동화처럼 손주 또래가 읽을 만한 글을 앞으로도 계속 써나가고 싶어요.
이 젊었을 때 가수가 되려고 한 적이 있어요. 지금은 귀가 잘 안 들리다 보니 음을 잘 못 잡지만요. 손주들을 위해 글이나 그림 말고 노래를 녹음해서 남겨주고 싶다는 생각도 들어요. 잘 부르진 못해도 듣기에 괜찮은 곡을 녹음해 들려주는 거죠. 그 외에는 특별한 꿈 없이 지금 하고 있는 이 작업을 오랫동안 즐겁게 해나가고 싶어요.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이재명 경기도지사는 왜 그렇게 늘 싸우면서 살까?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는데, 정말 그렇게 크려고 그러는 걸까? 이 사람 저 사람과 치고받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1952년에 발표된 노래 ‘통일행진곡’(김광섭 작사, 나운영 작곡)이 떠올랐다. “압박과 설움에서 해방된 민족/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공산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공산 오랑캐의 침략을 받아/자유의 인민들 피를 흘린다/동포여 일어나라 나라를 위해/손잡고 백두산에 태극기 날리자.”
1950년대에 초등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잘 아는 노래다. 교과서에 실렸던 이 노래는 여학생들의 고무줄놀이에도 꼭 등장했다. 가사 중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가 내게는 이 지사의 모습과 연결된다. 나는 바둑을 둘 때 “에에라 끊자! 싸우고 싸워서 세운 이 나라 아녀?”라는 식으로 그 가사를 잘 써먹었다. 남을 훈수할 때도 그렇고, 좌우간 뭔가 중요한 결단이 필요할 때 쓰는 유행어이기도 했다.
이 지사의 싸움 중에서 특히 내 주의를 끈 것은 그릇 논쟁이다. 주진형 열린민주당 최고위원이 한국조세재정연구원을 강하게 비판한 이 지사에게 “그릇이 작다”고 직격하자, 이 지사는 “소수 기득권자가 다수 약자의 몫을 빼앗는 큰 그릇 사발이 되기보다는 다수 국민이 기본적 삶의 조건을 보장받으며 함께 살아가는 작은 그릇 종지의 길을 택하겠다”고 반박한 것이다.
요즘 정치인들은 주로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싸우는데, 언어가 천박하고 금도(襟度)와 아량은커녕 상대를 인정하는 여유도, 승복하는 일도 없어 시정잡배들의 이전투구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논리는 뒷전이고 말꼬리 잡기 싸움 일색이다. 그에 비하면 그릇 논쟁은 그래도 좀 영양가가 있지 않을까 싶다.
사람을 그릇으로 비유하는 것은 오래된 발상법이다. 그릇이 큰가 작은가는 사람을 판단하고 임용하는 주된 기준이었다. 그릇의 크기는 그 사람이 군자냐 소인이냐로 직결된다. 이 지사와 국민의힘 의원들과의 설전에서도 분노조절장애니 소인배니 하는 말이 오갔다. 요즘 어떤 기자들은 대인배라는 말도 안 되는 표현까지 마구 쓰고 있지만, 남을 소인배라고 칭하는 것은 서양식으로 하면 결투 신청감이다.
그릇은 원래 비어 있어야 제 구실을 하는 법. 클수록 담을 수 있는 게 많아진다. 하지만 용도에 따라서는 큰 것만이 좋은 건 아니다. 옥불탁불성기(玉不琢不成器), 옥도 다듬지 않으면 그릇이 될 수 없다거나 대기만성(大器晩成)이라고 하는데, “군자는 그릇이 아니다”[君子不器]라는 공자의 말도 잊으면 안 된다. 군자는 형태가 고정된 그릇과 같지 않아서 모든 분야에 두루 적응할 수 있다는 뜻이니 그릇의 크기를 뛰어넘는 개념이다.
그릇을 뜻하는 ‘器’에는 존중하다, 중시하다라는 의미가 들어 있다. 기경(器敬, 재능 있는 이를 존경함), 기대(器待, 신임하여 예우함), 기망(器望, 기량과 명망) 기애(器愛, 중하게 여기고 사랑함), 기사(器使) 또는 기임(器任), 상대의 재능을 헤아려 걸맞게 부리거나 중요한 자리에 임명하여 씀, 이런 말에 그릇 기 자가 등장한다. 인재를 가려 뽑는 기인(器人), 일체중생이 거주하는 세계 기세간(器世間)에도 그릇이 나오니 놀랍다.
기국(器局, 사람의 도량과 재간), 기도(器度, 식견과 도량), 기량(器量, 덕량과 재능), 기략(器略, 기능과 계략), 기망(器望, 기량과 명망)… 그릇 기 자의 쓰임새는 많기도 하다. 그래서 천자문의 ‘신사가복 기욕난량’(信使可覆 器欲難量)은 “약속은 몇 번이고 되풀이 실천할 수 있게 하고, 도량은 헤아리기 어려운 경지를 추구하라”고 해석되나보다.
예부터 인물을 평가할 때는 이런 여러 개념을 잣대로 적용했던 것 같다. 최치원의 기록에는 당 태종이 김춘추를 국기(國器, 나라를 다스릴 만한 능력을 갖춘 사람)라며 찬탄했다는 말이 나온다. 반남 박씨와 기계 유씨의 오랜 반목을 해소한 것은 연암 박지원의 손자인 환재 박규수인데, 환재는 향시(鄕試, 지방 과거시험)에 장원한 15세 소년 유길준을 집으로 초대해 화해할 때 그가 국기임을 알아보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의 14대 왕 선조는 부마 후보로 올라온 소년을 눈여겨보고는 “이 아이는 참으로 국기가 될 만하다”고 평하고, 후일 재상이 되게 하는 게 좋겠다며 일부러 사위로 뽑지 않기도 했다.
이재명 지사가 과연 국기인지 향기(鄕器)에 그칠지 아니면 그것도 아니라 실은 가기(家器)에 불과한 그릇인지는 알 수 없다. 독일 속담에는 “접시의 가장자리 너머를 보라”(Über den Tellerrand schauen)는 말이 있다. 그릇 안의 음식만 보지 말고 그릇 너머를 살피라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사물의 현상만 볼 게 아니라 본질적 이면을 폭넓게 통찰하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그릇 싸움’이 ‘도토리 키 재기’(어떤 사람은 ‘벼룩 장판 뛰기’라고 하던데)에 그치면 의미가 없다. 그릇을 겨루면서 서로 커가는 다툼이라야 보람이 있을 것이다. 그릇은 물건이나 음식을 담는 기구라는 명사만이 아니라 어떤 일이 잘못되는 것을 말하는 부사도 된다. 그릇은 만들 때 잘못되거나 사용할 때 깨지기 쉽고, 사람이라는 그릇도 그릇되기 쉽다는 함의가 있는 게 아닐까 내 맘대로 생각해본다. 그래서 더욱더 사람은 좋은 그릇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릇 싸움’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한다. 1)코로나 발열 여부를 측정하는 기계처럼 사람이 그 앞에 서면 바로 “당신은 군자(또는 소인)입니다”, “당신은 그릇이 큽니다(또는 작습니다)” 하고 알려주는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 2)그래서 그릇이 작은 사람이 그릇이 큰 사람과 싸우면 작은 인형이 큰 인형 속에 쏙 들어가는 마트료시카 러시아 인형처럼, 물 위의 큰 파문이 작은 파문을 휩싸는 것처럼 큰 사람 속에 파묻혀 군말 없이 입 꾹 닫고 살게 하는 장치가 있으면 좋겠다. 누가 이런 걸 좀 발명해보라. 세계적으로,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발명품이 되리라.
몇 년 전부터 나만의 북큐레이션으로 무장하고 독자와 호흡하는 소소한 이벤트로 세상에서 사라져가고 있던 동네 책방을 되살려내고 있는 책방지기들이 등장했다. 이곳 동네 책방 한쪽에 앉아 차 한 잔 마시며 조용히 책 페이지를 넘기는 순간, 가슴속 묻어뒀던 작은 행복 하나가 ‘똑똑’ 심장을 두드리며 응답한다.
“남에게 보이는 것보다 내가 행복한 삶’이 좋다. 오늘 당장 떠날 것, 가까운 동네 책방으로!!”
전국동네책방네트워크에 가입된 독립서점들을 살피다 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 이름이 있다. 마치 “저를 찾아와주세요… 저요, 저요” 하고 손을 드는 것처럼 시선을 붙잡아 맨 곳. 바로 ‘날일달월’이다.
일단 인터넷에서 ‘날일달월’ 웹사이트와 블로그, 인스타그램 등을 찾아봤다. 색다르다. 비건식당? 아니, 책방에서 채식주의자들을 위한 음식을 판다고? 컴퓨터 모니터 화면 속에는 컬러풀한 채소들로 가지런히 상차림한 사진이 올라와 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이번 호에 소개할 동네 책방으로 선택했다.
‘날일달월’은 2호선 강변역 근처에 위치해 있다. 강변역에는 동서울터미널이 있어 늘 사람이 북적이고 어수선한 곳이다. 이런 번잡스런 곳에 독립서점이라니? 의아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동네 책방이 산골에도 생기고 우리 동네 구석탱이에도 있는데 터미널이 무슨 상관일까 싶었다.
건물 3층에 위치한 ‘날일달월’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열심히 채소를 씻던 분이 반겨준다. 먼저 점심 메뉴로 미역콩국수진지를 주문하고 창가에 앉았다. 한국의 마사 스튜어트라 불리는 이효재 씨와 언뜻 인상이 비슷하다. 머리에 두건을 두르고 광목 앞치마를 둘렀다. 한눈에 봐도 대표인 듯 보였다.
창가를 제외한 벽면에는 책들이 가득 꽂혀 있다. 찬찬히 살펴보니 출판사별로 칸이 나뉘어 있다. 서가를 살펴보다 음식 준비에 바쁜 주방으로 다가가 물었다. “혹시 이곳 대표님이신가요?” 그러자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 제가 이메일로 인터뷰 요청을 드렸는데 답장을 기다리지 못하고 궁금해서 와봤습니다.” 이렇게 해서 여희숙 대표와 날일달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생채식 식당과 작은 책방의 조합
‘날일달월’은 2018년에 문을 열었다. 비영리법인인 한국도서관친구들 대표를 맡고 있는 여희숙 씨가 개인적으로 운영하는 생채식 식당이자 작은 책방이다. 여 대표는 교사 생활과 독서시민운동 등을 하며 평생 책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왔다. 그러면서도 오래전부터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독서모임을 하고 저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다는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2017년경 자녀들이 모두 성장해 독립을 하고 은퇴한 남편과 덩그러니 넓은 아파트에 살면서 큰 공간이 별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그즈음 건강이 안 좋아진 남편 덕(?)에 먹거리도 완전히 바꾸게 됐다. 이래저래 그동안 살아왔던 삶의 패턴을 바꿔야 할 때 거추장스럽기만 한 대형 아파트를 호기롭게(?) 팔고 두 부부가 살기 적당한 크기의 아파트로 옮겼다. 그리고 집 앞의 빌딩 3층을 임차해 책방 공사를 시작했다.
나만의 공간인 동네 책방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나니 전국 각지의 ‘도서관친구들’ 회원 성원이 하늘을 뚫을 듯했다. 이왕이면 전국 곳곳에 그물망처럼 뻗어 있는 네트워크를 활용해, 친환경 농산물이나 전통적인 방법으로 만드는 식재료를 소개하면 어떻겠냐는 의견도 많았다. 사실 전국에서 도서관 서포터즈를 하는 이들의 경우 귀농을 해 친환경 농사를 짓고 있거나 여러 가지 먹거리 관련 일을 하는 이가 많았기 때문에 이런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공유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여희숙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책’과 ‘가장 필요한 생채식 먹거리’가 조합된 ‘날일달월’이 탄생했다. 책방에 식당?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 날일달월에 들어서면 오묘한 조합을 느낄 수 있다. 그러면서도 흔히 식당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확’ 풍기는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아 놀라게 된다. 여 대표는 생채식 먹거리를 제공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생채식이라 지지고 볶을 일이 없어요. 음식 냄새가 나지 않아서 책을 읽거나 고를 때 거슬리는 게 전혀 없습니다. 채식동호회나 환우회 카페 등을 통해 알고 방문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오히려 이분들은 ‘채식 전문식당인 줄 알고 왔는데 책방이네?’ 하며 놀라고 가요.”
낭독모임, 희곡 대본 읽기 등 프로그램 다양
여희숙 대표는 오랫동안 독서모임을 꾸리고 진행해왔던 터라 작은 책방을 열고 나서도 꾸준히 모임을 이끌고 있다. 현재 4팀의 독서모임을 이곳에서 하고 있는데 성격도 다채롭다. 주로 시니어들이 함께하는 월요일의 독서모임은 낭독모임이다. 얼마 전 1년간 이어진 ‘열하일기’ 낭독이 끝나고 현재는 ‘돈키호테’를 낭독 중이다.
코로나19 영향으로 새롭게 등장한 모임도 있다. ‘연극배우와 함께 희곡 대본 읽기’다. 연극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힘들어진 연기자들을 조금이나마 지원하고 싶어 ‘좋은 희곡 읽기 모임’ 대표인 장용철 연기자와 함께 진행하고 있다. 지난 6월에는 ‘니 부모 얼굴이 보고 싶다’ 희곡 대본을 함께 읽으며 연기의 맛을 조금 맛봤다. 이후 6주 코스로 ‘햄릿’을 낭독했고 현재는 ‘오이디푸스’를 함께 읽고 있다.
초등학교 교사들과 함께하는 독서모임도 2팀이나 있다. 22년간 초등학교 교사생활을 한 여희숙 대표는 어린 시절의 독서 지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교사들과의 모임은 아무리 피곤하고 힘이 들어도 이끌어나가고 있다. “어느 날은 오전 오후 꽉 찬 독서모임을 하면서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모를 때가 많지만 마음만은 너무 행복하다”며 환하게 웃는다.
이밖에 ‘그림책 따라 그리기 100일 프로젝트’도 있다. 그림책 한 권을 정해 그림을 그대로 따라 그리는 모임이다. 최근에는 안승준, 홍나리 작가의 ‘어느 날 우리는’을 따라 그렸다. 이 책에는 고양이와 사자, 돌고래 등의 동물들이 등장하며 그림책 속 QR코드를 스캔하면 노래와 함께 애니메이션 뮤직 비디오까지 감상할 수 있다. 젊은 친구들의 호응이 특히 높다.
또 백승우 감독이 진행하는 금요시네마는 2018년 8월부터 꾸준하게 진행해왔다. 한 달에 한 번 매월 둘째 주 금요일 백 감독이 큐레이션한 작품을 함께 보며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다. 날일달월의 빼놓을 수 없는 대표 프로그램이다.
한편 8월부터 11월까지 마지막 주 금요일에는 ‘금요일, 달이 뜨면 심야책방으로!’ 이벤트가 열린다.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 사단법인 한국서점조합연합회가 함께하는 ‘심야책방 2020’은 서울 지역에서 ‘날일달월’을 포함, 15곳의 동네 책방이 참여한다.
‘날마다 달마다 좋은 책과 음식을 먹으면 밝아진다’는 의미를 담아 이름을 지었다는 ‘날일달월’. 이곳에서 금요일 둥근 달이 뜨면 가족과 함께 친구와 함께, 조용히 책 한번 읽어보면 어떨까? 심야먹방 아닌 심야책방을 꿈꾸며.
Mini Interview ‘날일달월’ 여희숙 대표
여희숙 대표는 출판계와 교육계에서 유명한 인물이다. 진주교대를 졸업하고 마산과 하동, 광양, 포항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22년을 근무했다. 교사 시절 교실마다 작은 학급 도서관을 만들어 ‘아이들과 함께 책 읽는 선생님’으로 소문이 날 만큼 아이들에게 책 읽기의 생활화를 몸에 익히게 했다.
교사 일을 천직으로 알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왔던 여 대표에게 시련이(?) 닥친 것은 포스코를 다니던 남편이 서울로 발령이 나면서였다. 천직을 포기할 수 없어 주말 부부로 살기를 3년. 결국엔 사직서를 쓰고 남편과 합류하면서 서울 광진구에 정착했다. 낯선 서울 생활은 오로지 동네 도서관에서 책 읽는 즐거움으로 버텨냈다.
독서시민운동에 나서게 된 계기 역시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하는 여희숙 씨를 사서가 눈여겨보고 도움을 요청하면서였다고. 이후 2004년부터 본격적으로 ‘도서관친구들’ 활동을 시작해 현재 전국 회원 1만2000명에 달하는 비영리법인 대표를 맡고 있다. ‘도서관친구들’은 보령, 정읍, 남원, 광주, 진주, 울산, 창녕 우포, 부산, 제주, 부천 등 전국 16개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2004년부터 활동했으니 16년의 세월이다. 이렇듯 오랜 시간 독서시민운동가로 활동한 여 대표는 KBS, EBS, 교통방송 등을 통해 아이들의 독서와 토론 지도를 위한 학부모 강좌를 진행하거나 패널로 출연, 독서 토론의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펴낸 책으로는 2001년 ‘1년을 쓰고 50년을 간직할 독서노트’를 시작으로 ‘책 읽는 교실’, ‘토론하는 교실’, ‘도서관 친구들 이야기’, ‘아이는 도서관에서 자란다’ 등이 있다.
‘날일달월’ 서울 광진구 구의강변로 57 서림빌딩 3층
동기들과 춘천여행을 했다. 코로나19가 신경 쓰였지만 모든 활동을 멈출 수는 없다. 50+ 세대 열두 명이 4대의 차에 나눠 타고 춘천으로 향했다. 목적지까지 차로 이동하니 조심하면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가을처럼 푸르렀다. 춘천에 들어서기 바쁘게 그 유명한 닭갈비를 먹었다. 춘천에서 제일 맛있는 집이라는데 입맛이 다르니 각자 판단할 일이다.
우리가 간 곳은 2001년도 범죄 없는 마을로 선정된 곳이다. 마치 증명이라도 하듯 입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관광지도 아닌 이곳을 찾은 이유는 동기 중 한 사람의 지인이 폐교를 임대해 사용하고 있는데 장소가 넓어 모임하기 좋다는 점이 컸다.
서울이 고향인 나는 이렇게 작은학교도 있구나? 할 만큼 교실이 몇 칸 안 되는 건물이었다. 신기했다. 주인의 인심을 말하듯 활짝 열린 문으로 들어서자 지금은 보기 힘든 옛 물건과 미술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주로 서양화였다. 인수한 지 얼마 안 되어 구상한 인테리어를 조금씩 해나가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미완성이라 상상할 수 있는 여지가 있어 더 좋았다. 잔디가 있고 풀과 꽃이 함께 자라는, 예전엔 운동장이었을 너른 공간이 좋았고 차에서 내렸을 때 여기저기 피어 있던 계란꽃으로 불리는 개망초도 많아 좋았다. 낮은 폐교 앞뒤로 보이는 넓은 하늘도 좋았다. 폐교를 사방이 둘러싼 형태라 마치 따스한 엄마의 자궁처럼 느껴졌다. 뜻 모를 그리움도 스멀스멀 피어났다.
불과 몇 시간 전 괜히 나섰나 했던 마음이 떠올라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사실 하루 전만 해도 예정에 없던 일정이었다. 자리가 남아 얹혀간 것이나 다름없다. 때마침 아이와 콩닥대고 마음도 복잡한 상태였다. 집에 있으면 더 나빠질 게 틀림없었다. 피하고 싶었다. 아이도 나도 휴식이 필요하다고, 스스로 잘한 선택이라고 토닥이며 나선 길이었다. 결과적으로 아주 잘한 일이었다. 한때는 마을 아이들의 작은 숨소리가 들렸을 교실을 둘러보는 동안 마음이 안정되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짐을 풀고 한동안 주변을 둘러봤다. 저녁에는 바비큐 파티를 했다. 영업을 하는 곳이 아니어서 오는 길에 장을 봤던 터라 음식이 푸짐했다. 고기는 양껏 먹어도 줄어들지 않았다. 나중에는 집주인이 기르는 두 마리의 풍산개도 거들어야 했다. 직접 담근 된장을 풀어 끓인 된장국은 두부와 호박과 파만 듬뿍 넣었을 뿐인데 세상 어느 요리보다 꿀맛이었다.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밥을 먹어선지 행복이 온몸에 스며들었다.
장구를 챙겨온 동기들이 있어 돌아가며 장구의 기본을 익혔다. 잠시 몰두했는데도 등줄기로 땀이 흘렀다. 장구를 치면 절로 체중이 줄 것 같다. 한번 해볼까? 자꾸 마음이 동했다. 역시 여행은 마음의 여유를 준다. 춘천에 있다는 사실이 집에서의 북적임을 잠시 잊게 해줬다.
해가 지기 시작했다. 별이 보인다는 말에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르르 운동장으로 나갔다. 커다랗게 빛나는 샛별 하나가 눈앞으로 다가왔다. 우리 집 베란다에서 밝게 보이던 샛별 하나가 “너였구나? 나야 나” 하며 아는 체하는 것 같았다. 불빛에서 좀 더 벗어나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더 많은 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밤하늘 가득 보석이 박혔다. 누군가 한 줌 집어 뿌린 것 같았다. 서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북두칠성이 고개를 들 때마다 보였다. 그저 별을 본 것뿐인데 가슴 밑바닥에서 울컥하며 찌릿함이 올라왔다. “별은 늘 그 자리에 있다”는 어느 영화 대사가 떠올랐다.
센스 있는 동기가 준비한 폭죽으로 운동장은 금세 파티장으로 변했다. 폭죽을 하나씩 손에 든 어른들이 까만 운동장을 콩콩 뛰어다녔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거슬러 다시 아이가 된 것 같았다. 저마다의 행복이 몸을 뚫고 까만 세상에 퍼져나갔다.
불쑥 떠난 여행인데 오래 계획한 여행보다 좋았다. 마음에 말을 걸 듯 ‘둥둥’거리던 장구소리도 잊히지 않았다. 춘천에서 돌아오는 내내 장구를 배우게 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에 도착했을 때 마침내 장구를 시작할 것을 알았다. 다시 춘천을 찾을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