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 삼성동 오후 2시. 약속시간을 부득이하게 미뤄야겠다고 알려왔다. 겨우 10분 늦는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색을 표하는 이만의 전 장관은 근처 회의에 참석했다가 점심도 못 먹고 걸어오느라 늦은 것이었다. 그는 공공연하게 ‘BMW(Bus&Bicycle, Metro, Walk) 예찬론자’라고 말한다. 장관 재임 시절에도 전용차량 ‘에쿠스’를 반납하고 ‘아반떼 하이브리드’를 타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물질적 가치보다 사람을 아끼고 환경을 사랑해야 한다는 그다. 높은 직함을 갖고 있다고 해도 더욱 더 겸손해야 한다는 그다. 그런 그를 만든 어머니 이야기가 몹시도 궁금해졌다.
글 박근빈 기자 ray@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6살 꼬마 이만의의 집에 인민군들이 몰려왔다. “이승만을 내놔라.” 이승만이 그려진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한다. 돈이 없었기 때문에 기르던 소를 가지고 가버렸다. 앞산과 뒷산에서는 총소리가 들려왔다. 지독히도 무서웠던 기억, 어머니의 품속에서 6·25전쟁을 견뎠다. 어머니는 굳세게 하루하루를 이겨냈다. 그렇게 전쟁은 끝났지만 삶은 녹록지 않았다. 보릿고개가 찾아왔다. 그는 어린 시절 기억에 각인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전남 담양 산골마을에서 살았는데, 다들 먹고사는 게 힘든 시절이었죠. 너무 먹을 게 없으니까 어머니는 들풀을 베어다 국을 끓였고 밀개떡을 해서 먹였죠. 그렇게 못 먹고 살다 보니까 위장도 약해졌죠. 어느 날 체했는데, 당시만 해도 근처에 병원이 없어 체를 내리는 곳에 가야 했어요. 어머니는 고무신이 벗겨지는데도 산을 뛰어넘어 가며 그곳에 도착했죠. 당시만 해도 별거 아닌 일로 죽어나가는 아이들이 많았어요. 어머니는 저를 살리려고 치열하게 사셨던 거죠.”
팔자 센 어머니의 인생
“실은 제가 넷째인데 장남이 됐어요. 어머니는 저 위로 세 아들을 어린 나이에 하늘로 보냈죠. 어머니는 팔자 센 여자의 인상을 줄까 봐 신경을 무척 쓰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넷째 녀석까지 잃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셨다는 걸 어릴 때부터 알게 됐죠.”
어머니는 평생 많은 것을 잃고 살았다. 뱀띠 어머니는 범띠 아버지를 만나 무엇이건 재빠르게 완벽히 해내야 하는 긴장감으로 마음의 여유를 누리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아무리 좋은 일이 생겨도 살포시 웃으시고는 금방 무뚝뚝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런 어머니의 모습에서 무엇보다 강한 모성애를 느끼곤 했다.
담배를 많이 피우는 아버지가 싫어서 항상 어머니와 함께 안방에서 잠자는 아들을 살피느라 수면조차 부족했던 어머니는 이른 새벽녘, 동네 우물에서 그날의 ‘첫 물’을 길러오셨다. 부엌에 마련된 정화수 종지에 그 물을 채워 천지신명께 기도를 올렸다. 달 밝은 밤에는 앞마당 한가운데에 물동이를 놓고 절을 하며 가족의 평안을 기원했다. 초등학생 이만의의 눈에 어머니의 기도는 사랑, 그 자체였다.
중·고등학교는 광주에 있는 가난한 이모님 댁에서 머물며 다녔다. 한 달에 두 번쯤 집에 가면 어머니는 무거운 곡식자루를 머리에 이고 시오리길을 걸어 큰 길이 나오면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 태워주셨다.
“그때부터 ‘어머니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죠. 열심히 이 악물고 공부하며 최대한 검약하게 지내는 것뿐이라고 생각했어요. 차마 참고서 사게 돈 달라는 말을 못해 교과서로 고 2까지 견뎠던 것은 홀로서기에 방부제 같은 효과를 냈죠.”
어머니의 고생이 가중된 것은 아버지께서 50대 후반에 도랑을 건너다 대퇴골 골절상을 입었는데, 그때 온전히 회복되지 않아 목발을 짚으신 이후였다. 거의 모든 일들을 홀로 해치우셔야 했다. 그야말로 과로에 지쳤을 텐데도 자식들 앞에서는 힘들다고 내색 한 번 안 하셨다.
“표현은 하지 않으셨지만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그래서였을까. 60대에 접어들면서 담배와 커피를 즐기셨어요. 전 아버지의 끽연에 반감을 가졌던 아들이었지만, 어머니의 담배에는 의미가 자연스럽게 부여되더라고요. 쓰레기 소각장에서 전기를 뽑아내고 분출하는 배기가스라고나 할까. 그렇게 힘에 부친 삶을 담배 연기에 실어 내보내셨던 거라고 느껴졌어요.”
심은 만큼만 거두고 불쌍한 사람 편에 서라
어느 날 청년 이만의는 시골 친구들이 화투 치는 데 구경 갔다가 집으로 불려가서 혼이 났다. 그때 어머니는 “농민들처럼 씨를 뿌리고 수확하는 게 훌륭한 사람이다. 심은 만큼만 거두어라”라고 강조하셨다. 노력 없이 좋은 결실을 원하는 것은 허황된 생각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두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지금의 이만의를 만든 중요한 지침이 됐다.
“돈 앞에서 굴복하지 않는 자세를 길렀던 것 같습니다. 내 힘으로 심어서 그만큼만 거두는 것이 올바른 행동이죠. 명예나 지위를 통해 좋은 것을 원하거나 탐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던 건 어머니의 꾸지람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내부무 공무원으로 발령받았을 때도 평생 공직자로 가져야 할 자세를 강조했었다. “펜대를 굴려먹고 살아도, 항상 불쌍한 사람들의 편에 서라.” 당시 시골에서는 공무원들이 시골 사람들을 상대로 지도 단속을 했는데, 같은 내용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처리하곤 했다. 친절하고 따듯한 사람, 오만하고 강압적인 사람 등 구분이 명확했다. 어머니는 이만의가 앞만 보고 출세 가도를 달리는 공직자보다는 따듯한 사람으로 살아 나가길 누구보다 간절히 원했다.
“내 어머니는 평생 시골에서 사셨고 배움도 짧은 여인이셨죠. 하지만 몸소 가르쳐 주신 중요한 덕목은 잊힐 수가 없고 평생 가는 겁니다. 저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자라났고, 어머니의 투박한 한마디에 교훈을 얻고 마음을 다잡고 살아가게 된 거죠.”
시장(市長) 어머니의 소박한 장례식장
어느덧 이만의의 직함은 시장으로 바뀐다. 전라남도 여천시 시장, 목포시 시장을 지내고 제주도 부시장, 광주시 부시장을 거쳤다. 그리고 국방대학교에 들어가 국장급 공무원 연수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때 어머니가 79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시장 출신 공무원의 모친상이었다.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았고, 조용히 장례를 치렀다. 화환은 1개밖에 안 들어왔다.
“잘했다고 생각하셨을 겁니다. 그것이 어머니의 뜻이었고, 그래서 소박하지만 정성껏 모셨죠. 조문객을 많이 받아서 체면을 살리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허세를 경계하라는 어머니의 말씀대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머니의 소박함은 삶의 궤적과 동일했다. 아들이 잘돼서 잘난 척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환갑이나 칠순잔치도 마다했던 사람이다.
“제가 장관이 된 모습을 어머니가 못 보시고 돌아가신 것에 대해서 한편으로 아쉬운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물론 장관이 됐어도 ‘애썼다’라는 말과 엷은 미소로 화답하셨겠지만 그래도 말입니다. 고생하신 만큼 오래 사셨으면 좋았을 것을. 한평생 가난에 찌들면서도 모정의 도를 실천하신 어머니의 생각과 말씀은 여전히 제게 존재하고 있으니, 어머니는 오늘도 제 곁에 여전히 살아계신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어머니
이만의 전 환경부 장관, 현 로하스코리아포럼 이사장은 오늘날 어머니가 사라지고 있다고 안타까운 마음을 내비쳤다.
개인이든, 국가든 행복해지려면 어머니라는 존재가 전제돼야 하는데 이혼율 증가 등으로 인해 그 가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얼마 전 예비군 총기사고 문제가 생긴 것도 결손 가정에서 발생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 걱정은 더 많아졌다.
“어머니라는 존재의 위대함이 사라지게 되면, 가정의 문제로 시작해 여러 사회적 문제로 번지게 되죠. 결국은 국가적 문제로 자리 잡게 되는 상황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이 건강한 사회에 나와서 행복한 꿈을 그리며 ‘오늘’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머니라는 이름이 무엇보다 강조돼야 한다는 겁니다. 지금 우리에게 가장 절실히 필요한 것은 어머니의 소중함을 되찾는 것 아닐까요?”
‘내 엄마의 이름은 김정숙. 고향은 평북 선천군 선천면 일신동. 이십대 중반에 남편 신하철을 만나 신식 결혼식을 올렸다. 슬하에 아들 하나, 딸 셋을 두었다. 가족과 떨어져 혼자 이남에서 살아왔어도 늘 꿋꿋했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38년 야당투쟁을 했고 민주화의 대부로 국회의원직을 지냈던 남편이 서울대총학생회장을 숨겼다가 잡혀 고문 받고 시달릴 때도 경찰들에게 고함을 팍팍 지를 정도로 용감했다. 연약했지만 단단했다.’ 어머니가 숨을 거두셨을 때, 시인 신현림 (申鉉林·54)과 자매는 약소하나마 장례식장에 어머니의 일대기를 걸었다. 수많은 영웅의 인생이 전기로 남듯, 자신에게 영웅과 다름없던 어머니의 인생을 글로 써내고 싶었다. 그녀에게 어머니는 어떤 영웅보다 위대했고, 존경스러운 존재였다.
엄마와의 추억이 깃든 남문시장
딸아이와 함께 시장을 갈 때면, 어린 사 남매를 데리고 장을 보러 다니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시골 약사로 생계를 유지했던 어머니는 때때로 아이들의 손을 맞잡고 인근 대도시 수원으로 약제를 떼러 가셨다. 그 시절 신현림 작가의 고향인 의왕에는 큰 시장도 없었고 마땅히 서점도 옷가게도 없었기 때문에, 어머니와 장을 보러 가는 날은 소풍과도 같았다.
“엄마랑 수원 남문시장을 누볐던 기억이 참 사랑스럽게 남아 있어요. 같이 가면 옷이나 학용품을 꼭 하나씩은 사주셨는데 그게 무척 신났고, 길가에 앉아 엄마와 함께 먹던 순대, 떡볶이, 번데기도 참 맛있었어요. 가끔씩 좋은 영화를 보면서 군고구마와 오징어를 부스럭거리며 먹던 기억도 애틋해요. 단골로 자장면을 먹으러 갔던 ‘강서면옥’도 떠오르네요. 지금 다시 엄마와 손을 잡고 강서면옥에 들러 자장면 곱빼기를 먹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녀는 엄마에게 시장이란 ‘내 가족에게 가장 좋은 걸 입히고 먹이고 싶은 욕망, 바로 사랑이 투영된 신성한 공간’이라고 말한다.
딸아, 외로울 때면 시를 읽으렴
그렇게 시장에 가는 날엔 어머니와 서점에 들르곤 했다. 여고생 시절, 어머니가 사준 ‘세계시인선집’은 그녀에게 뚜렷한 기억으로 남았다. 소설처럼 긴 글은 부담스러웠던 입시생 초기, 짧은 시만큼은 마음 편히 읽을 수 있었고 따스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이런 인터뷰를 할 때나 책장에 쌓인 시집들을 보면 엄마랑 서점에 갔던 기억이 떠올라요. 우리 동네엔 서점이 없어서 수원을 가면 꼭 그 동네 서점을 들렀어요. ‘세계시인선집’같은 시 모음집을 사주셨는데 그때 읽은 시들이 저를 시인으로 이끈 거 같아요. 엄마를 사랑하면서도 대들고 마음 아프게 한 적이 많은데, 그런 괴롭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준 게 바로 시였죠. 그렇게 책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고, 지혜롭게 성장할 수 있었어요. 엄마는 분명 책 읽기의 소중함을 알고 제가 책을 가까이하길 바라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의 바람대로 그녀는 시를 통해 자신을 다스릴 수 있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을 밝힐 수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사랑을 담아 그녀는 4년 전 이라는 시집을 엮어내 장기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고 있다. 어머니는 책 읽기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강조하셨고, 교육열 또한 높으셨다.
“엄마는 의대를 2년간 다니기도 하셨지만, 앞을 내다볼 줄 알고 의식이 깨어있는 신여성이셨어요. 사실 저는 대학 진학을 안 하려 했는데, 그때 엄마가 이런 말씀을 하셨죠. ‘네가 대학을 안 가면 형제간에 학벌 차이로 의가 상하고, 차이 나는 사람이 외로워지게 된다. 그러니 대학을 가거라.’ 그때 어머니께서 그런 말씀을 안 하셨다면, 어쩌면 정말 그런 외로움에 휩싸였을지도 몰라요. 정말 지혜로우신 분이셨어요.”
중년의 엄마 그리고 중년의 딸
어머니가 떠난 뒤, 영영 만날 수 없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과 아픔을 시로 썼다. 그 마음은 그녀의 시 ‘엄마의 유언, 너도 사랑을 누려라’에서 짙게 우러난다. 엄마로서 작가로서 자신의 길을 나아가던 그녀는 중년 이후 어머니와 점점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됐다.
“예전에는 엄마와 안 닮아서 힘든 적도 있었는데, 요즘에는 엄마를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내가 나이가 들수록 중년의 엄마 모습과 점점 닮아가는 것 같아요.”
닮아가는 것은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엄마의 생활, 엄마의 삶을 이해할수록 그 마음까지 점점 닮아가고 있었다.
“엄마가 돼봐야 엄마를 알게 된다죠. 내가 자식을 키우니까 엄마 생각이 매일 나요. 딸이 속 썩일 때면 ‘우리 엄마는 나 때문에 얼마나 혈압이 올랐을까? 엄마도 힘들고 가슴 아팠을 텐데’하고 엄마의 마음을 헤아리게 돼요. 딸이 행복을 주고 웃음을 줄 때면 ‘나도 우리 엄마에게 그런 딸이었을까’하는 생각도 하고요.”
닮아버린 취미, 닮아버린 마음
“또 한 가지 닮은 점이 우리 모녀가 영화를 참 좋아한다는 거예요. 전에 TV에서 이 할 때면 큰소리로 엄마를 부르곤 했는데, 한번은 가 하고 있었어요. 여느 때처럼 엄마를 불렀는데 엄마가 ‘비비안리랑 로버트 테일러가 나오는 영화구나’라고 말씀하셨죠. 새삼 엄마 입에서 영화배우 이름이 줄줄 나오는 것이 신기했어요. 생각해보면 옛날 우리 집 다락방에는 엄마가 모아둔 영화 팸플릿들이 가득했어요. 가끔 수원 중앙극장에 가서 엄마와 영화를 보기도 했는데 그게 엄마에겐 해방구였고, 창이었죠. ”
하지만 그런 일상도 아주 옛날 일이고, 집안이 기울어 어머니가 가장이 되신 뒤로는 좋아하던 취미도 다 잊고 사셔야 했다. 그렇게 영화를 볼 시간도 없이 나이 드신 어머니의 모습도 지금 그녀의 삶에 묻어나고 있었다.
“엄마와 영화 이야기도 자주 나눴는데 그럴 때면 엄마의 눈은 더욱 또렷하게 빛났어요. 그렇게 엄마 덕분에 나도 영화광이 되었죠. 사춘기 때는 영화배우 사진으로 방에 도배할 정도였는데, 요즘은 저도 영화 볼 시간 내기가 참 어려워요. 혼자 딸을 키우며 비디오로 보는 영화로 마음을 달래던 때를 생각해보면, 그 옛날 엄마도 우리를 키우며 나와 같은 마음이었겠구나 싶어요.”
엄마의 몸은 한때 나의 몸이었다
“엄마가 쓰러지시기 전 딸아이와 함께 동네 목욕탕에 갔던 적이 있어요. 탕을 가득 메운 수증기 속에서 엄마의 야윈 몸을 보니 너무 안쓰럽고 슬펐어요. 예쁜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유난히 힘이 좋았던 엄마가 혈압 때문에 몸을 움직이고 숨쉬기도 곤란해 하시던 모습에 가슴이 아팠죠. 그렇게 ‘작별의 시간이 멀지 않았구나’하는 슬픔과 두려움 속에서 함께한 목욕탕에서의 그날도 이제는 아껴먹던 빵처럼 소중한 추억이 됐어요.”
그때서야 그녀는 ‘엄마의 몸은 한때 나의 몸이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열 달 동안 어머니 뱃속에서 한 몸처럼 지내왔다는 것을. 그리곤 엄마의 몸에서 태어난 행운에 더 없이 감사할 수 있었다.
“고향에 엄마 가게 있던 자리가 없어졌어요. 엄마와의 보물 같은 추억이 가득했던 공간이었는데, 그게 없어지니 가슴 먹먹하더라고요. 엄마의 가게처럼 늘 그 자리에 있을 것만 같았던 소중한 것들이 사라질 때도, 늘 당연하게만 생각했던 엄마의 존재도, 우리의 유한한 삶 속에서 함께할 시간이 길지 않다는 것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았다면 좋았을 텐데... 지금이라도 엄마를 뵐 수만 있다면 엄마의 몸을 따뜻하게 어루만지며 그 외로움과 슬픔을 하나하나 헤아려드리고 싶어요.”
유재철 씨를 설명할 때는 꼭 붙는 명칭이 있다. 바로 ‘대통령 염장이.’ 최규하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염하고 장례 전반을 진행한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장례와 같은 국가적 행사뿐만 아니라 서경보 스님, 정몽헌 회장, 정대 스님, 법장 스님, 법정 스님, 여운계씨와 같은 큰스님들과 유명인사들의 장례도 도맡아서 진행했던 유재철 연화회 대표지만, 시작은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염장이였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어떻게 해서 그는 염습이라는 쉽지 않은 분야를 자신의 업으로 받아들이고 장인의 소명의식으로 최고 전문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을까?
“염습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드리는 일이다. 염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잡념이 없어지고 몰입하게 된다.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어 생각한 대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지를 느끼는 고귀한 업으로 일한다.”
염습이라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아직 많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업의 험상궂은 이미지와는 달리, 유재철 연화회 대표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은 맑고 순하다는 인상이었다. 그의 말속에서 자신이 맡은 일의 가치를 믿고 그 일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 느껴졌다.
유 대표가 염장이가 된 것은 우연의 힘, 혹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힘처럼 보인다. 경기도 광주에 고향이 있는 유 대표는 일찍이 집안 내에서 시행되던 장례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까다롭고 복잡한 상례 또한 낯설지 않았다. 돌아가신 가족들을 위한 염을 진행하곤 했다. 즉 장례 문화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으며 염에 대해 일찌감치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방황 끝에 발견한 ‘대통령 염장이’의 시작
그러나 경험적으로는 익숙했어도 장례를 업으로 삼고자 하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녔다. 27살부터 사업을 시작한 그는 아파트 섀시 설치, 방화문 제작, 의류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그런데 그 어느 사업도 잘 풀리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라도 광주에서 능인회라는 장의업을 하고 있던 친구들을 알게 됐습니다. 두 친구들은 불교 청년 운동에 소속된 젊은 사람들이었고 정직한 장의업을 통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 일을 도우면서 저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그들의 성공을 보고 장의업을 배우겠다는 사람은 제법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 대표처럼 직접 염을 하는 것에 적극적이고 능숙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 유 대표는 이내 친구들의 인정을 받았다. 유 대표가 염을 업으로 하게 된 것은 방황 끝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염을 배우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게 되자 유 대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염을 잘한다는 사람을 만나 배움을 구한 것도 그 증거다. 각 지방마다 각기 다른 지식들이 전수되고 있었고 유 대표는 그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맞추며 정돈된 염습 체계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른 살 중반에 광주 친구들에게 석달 배워 서울에 장의사를 시작했죠. 3년을 틈나는 대로 전국을 다니며 염하는 걸 배웠어요. 막상 가서 염하는 걸 보면 참고할 수 있는 분도 있었지만 배울 게 없는 분도 있는 등 상황이 여러 가지였어요.”
당시 장의업이나 상조회사들은 서울 밖 지방에서 발달되어 있었으나 시장으로서는 역시 서울이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상조회사들은 지방에 머무르려 하고 있었고 영업 조직만 서울에 올려 놓은 형국이었다.
‘동네 장의사’보다는 뭔가 특색 있는 장의사가 되고 싶어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와 제일은행 본점 사이에서 처음 장의사를 시작한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침 그때 큰스님들이 많이 돌아가셨고 큰스님 장례를 한 번 치르면 손님이 수천 명씩 왔다. 이런 대규모 5~7일장을 10년 넘게 하면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동국대 대학원 장례문화학과를 다니기 시작한 것도 스님들과의 인연 덕분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도전이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의 장례
염장이로서 자신을 쌓아가던 유 대표에게 마침내 삶의 전환점이 왔다. 2005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의 장례문화학과를 다니며 석사 학위 논문을 쓰던 유 대표는 단체장에 관한 논문 작성에 착수했다. 대통령 관련 자료는 행정자치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모두 기밀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김구 선생 자료와 비밀 해제된 육영수 여사의 장례 자료를 입수하여 논문을 준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06년 10월 22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를 듣고 곧바로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을 찾아갔다. 뭔가 자신이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석사 논문 때 인연을 맺은 직원을 만나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마침 잘 왔다’며 최 대통령 장례는 물론 2년 전 돌아가신 영부인 홍기 여사의 이장을 도와 달라고 했다. 최 대통령과 현충원에 합장하기 위해서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직이었을 때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육영수 여사는 큰 문제 없이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죠. 그러나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인 홍기 여사는 최 전 대통령보다 2년 먼저 돌아가셔서, 미리 장례를 치르다 보니 현충원이 아니라 원주에 있는 선산에 안장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최규하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면서 홍기 여사를 이장하여 현충원에 함께 합장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국장은 행자부에서 담당하는 일이었지만 매뉴얼은 없고 파편적인 자료들만 모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5일장을 진행하면서 날밤을 새면서 공부를 하고 그걸 쉼 없이 적용하며 악전고투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일들 투성이였지만 유 대표는 결국은 해냈다.
“당시 최 전 대통령의 종친회도 장례 과정에 참석했었는데, 종친회에서 제안한 명정, 그러니까 관직과 이름을 쓰는 명정 문구를 봤더니 일반 양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아닙니까? 좀 더 격이 높아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명정 문구로 교체할 수 있었죠.”
세 명의 대통령을 모시고, 장례의 최고 전문가가 되다
최 전 대통령의 장례는 유 대표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복사나 촬영을 불허하는 박정희, 윤보선 전 대통령 등의 장례 자료를 눈과 손으로 확인하고 익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40여 건에 달하는 대통령과 총리의 장례 역사를 공부하여 전체 장례에 대한 지식을 통괄할 수 있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에게 장례 전체 일정에 대한 관리가 맡겨졌다. 그는 그때의 지식을 바탕으로 국가장 매뉴얼을 만들었다.
“수원성은 건축 기록 덕분에 지금도 지을 수 있을 정도잖아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은 저밖에 없어요. 행안부가 이사를 다니면서 자료가 사라졌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지식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이론의 구축과 정리,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실제로 진행한 커다란 경험들까지, 유 대표가 단숨에 최고 전문가의 자리에 오르게 된 건 우연이 만들어준 다리에 최선을 다한 그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최 전 대통령의 장례 이후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 또한 유 대표의 관리 아래에 진행하게 됐다. 워낙 큰 일들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였었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국가급 규모의 장례에 대한 경험이 이미 있었던 유 대표로서는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만큼 사연도 많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때, 행안부에서 노제에 쓸 만장 2000개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우선 대나무를 구하는 게 걱정이었는데, 담양군청에 요청을 했더니 다음 날 트럭에 2000개를 실어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장에 쓰일 글씨는 명정을 써주신 동방대학원대학교 정상옥 총장님께 부탁 드려서 교수님들과 재학생들, 총장님 선후배들이 모여서 800장을 만들었고, 조계사 지관스님이 만장을 쓰는 모습이 방송에 나가니 전국의 서예가들이 올라 와서 하루만에 1200장을 써주셨습니다. 그런데 1500개 정도 작업을 끝냈을 때, 발인 전날 오전에 행안부에서 이유는 묻지 말고 대나무가 아니라 PVC로 만장대를 교체하라는 전달을 받았죠. 밤샘해서 겨우 발인 날 새벽에야 완성하여 시청 앞으로 가져 갈 수 있었습니다.”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가장이 가능할까?
아직 단체장, 특히 국가장에 대해선 민감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명칭이 제각각인 건 기초적인 문제 중 하나일 뿐이다. 그에 더해 우리네 정치와 역사가 만들어낸 미묘한 사안들이 돌출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국가장법을 보면 가족들이 요청하면 국가장을 치를 수 있고, 국가장을 치르면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어요. 그런데 노태우, 전두환 두 전 대통령은 서훈이 취소되어 현충원 안장대상자에서 제외되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가족들이 국가장을 요청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국가장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유 대표는 이어서 국가장이면 국가적인 공식행사인지 약식행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흔히 국가장이면 국가적인 공식행사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국가적인 공식행사인지, 아니면 약식행사인지를 가르는 건 애국가 제창을 하느냐 마느냐입니다. 문제는 국가장에서 애국가가 나온 적이 없다는 거예요.”
유 대표는 또한 국가장에서 종교 색채를 유지시키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볼 수도 있는 것이 국가장인데 식순에 4대종교 의식을 굳이 보여주는 건 시간적으로 낭비라는 것. 또한 다른 종교인이 봤을 때도 불만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장례는 엄연한 문화, ‘제대로 하자’
“우리나라 장례 문화에서 일제 문화 좀 없애고 싶어요. 특히 장례식에서 상주가 완장을 차는 건 일본 쪽 문화예요. 3.1 운동이 고종 황제 국장 치르면서 했잖아요.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얀 옷 입는 거에 거부감 있는 거야 일본인들이. 그래서 머리 자르고 까만 옷 입으라고 했어요. 그게 세련된 것처럼 보이게끔 선전도 했고. 그리고 모두가 까만 옷 입으니까 그 중에서 상주를 구분시킨다고 완장을 차게 한 거예요. 일제 때 했던 걸 왜 아직도 하고 있어요?”
유 대표는 인터뷰 말미로 가며 ‘제대로 하자’는 말을 거듭 했다. 그 말에서는 문화로서의 장례가 그 자체로 권위와 전통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그것은 남들은 쉬이 가질 수 없는 극단적으로 드물고 특별한 경험들을 통해 유 대표가 얻게 된 고유한 꿈이자 마땅한 자격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