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합창을 좋아한다. 현대백화점 합창단 출신이다. 오디션을 거쳐 선발된 사람이 여자 38명에 남자 2명이었는데 남자 한 명이 안 나오는 바람에 결국 청일점이었다. 여성들 소리에 알토로 겨우 끼어들어 연습을 하자니 여러 모로 죽을 맛이었다. 6개월 연습 후 경연대회에서 동메달을 딴 후 그만 두었다. 그러나 합창의 매력을 배웠다. 인간의 여러 목소리를 동시에 맞춰서 부르면 아름다운 소리가 되고 엄청난 감동이 있다는 것을 배웠다.
롯데 콘서트홀에서 열린 이번 공연은 그동안 열심히 클래식 음악회에 다니면서 익숙해진 곡들이다. 합창만 모은 공연을 봤으면 했던 것이 그대로 맞아 떨어진 공연이었다. ‘환희의 송가와 오페라 합창 명곡(Ode to Joy & Opera Chorus)’ 공연이었다. 다른 때와 달리 표를 구하기가 어려웠으나 겨우 3층 맨 뒷자리를 얻었다. 세종문화회관 대극장 3층에 버금가는 급경사였다. 합창단과 오케스트라가 한눈에 다 들어오니 좋긴 한데 역시 무대와 너무 멀어 합창을 제대로 감상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합창은 남녀 각각 30여명으로 구성된 마에스타 오페라 합창단과 역시 30여명으로 구성된 송파소년소녀합창단이 맡았다.
무대가 특이하게 빈야드 방식으로 꾸며졌다. 평면이 아니라 포도밭처럼 원형 계단식으로 배치되어 눈길을 끌었다. 평면보다 시각적으로 구성미도 있고 편안하게 보였다.
프로그램 1부는 바그너의 오페라 탄호이저에 나오는 ‘입장 행진곡’으로 시작했다. 이어서 구노의 오페라 파우스트에 나오는 ‘병사들의 합창’, 도니제티의 오페라 ‘람메르 무어의 루치아‘에 나오는 ’널 향한 기쁨의 소리’, 비제의 카르멘에 나오는 ‘집시 아이들의 합창’,‘투우사의 노래’, 베르디의 오페라 일트라바트레에 나오는 ‘대장간의 합창’, 푸치니의 오페라 나비부인에 나오는 ‘허밍 코러스’,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 나오는 ‘공주는 잠 못 이루고’로 40분에 걸쳐 펼쳐졌다.
인터미션 후 2부에서는 베르디의 오페라 나부코에 나오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베토벤의 합창교향곡 4악장’, 베르디의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에 나오는 ‘축배의 노래’가 40분 동안 이어졌다.
이 중에서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필자가 특히 좋아하는 곡이다. 이탈리아에서 제 2의 국가로 불리는 노래인데 베르디의 장례식 때 무려 8천 명의 합창단이 불러 유명하다. 8천 명의 합창은 대단했을 것이다. 남성 합창단의 웅대한 울림을 들을 수 있는 곡이다.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 4악장’은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현재 유럽 연합의 공식 상징가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모처럼 좋은 기회였는데 무대가 너무 뒷자리라 소리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점이 아쉽다. 내심 곡마다 다른 합창단이 나오기를 기대했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마에스타 오패라 합창단이 소화했다.
카르멘에 나오는 곡들은 월드컵 수변 무대, 롯데 콘서트 오페라 갈라 쇼에 이어 세 번째라서 아주 익숙해졌다.
우리의 근대사 속 중요한 장면에서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영정사진이다. 부산의 이태춘 열사의 사진을 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옆에 나란히 선 문재인 대통령의 사진이나, 이한열 열사의 영정사진을 든 이상호 의원의 사진은 그 장면만으로 아직까지도 상징성을 인정받고 회자된다. 영정사진은 고인이 누구였는가 설명하는 생의 마지막 수단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정사진을 마련하는 일을 꺼려하고 좀 더 뒤로 미뤄놓고 싶어 한다. ‘장수사진’이라는 선의가 느껴지는 명칭으로 바뀌어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영정사진이 언제부터 우리의 장례 문화에 자리 잡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가장 오래된 기록을 꼽자면 1934년 11월 일본 총독부에 의해 발표된 의례준칙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의례준칙 전문 중 기제(忌祭)의 서(序) 첫 번째 항목에 ‘제주지방(祭主紙榜) 또는 사진(寫眞)을 제위(祭位)에 봉안(奉安)함’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전까지 영정(초상화)은 지금의 용도와는 조금 달랐다. 조선시대까지는 장례나 상례 때 등장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에서 조상을 기리기 위해 신주나 지방 대신 사용했다. 사당을 이전에 영당(影堂)이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 영정사진 탄생
실제로 일본에서는 훨씬 더 이전에 영정사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개항을 통해 사진이란 문물이 수입된 이후 일본에선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했다. 또 세이난전쟁(1877년) 때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되는 군인들에게 사진을 한 장씩 찍어줬다는 기록도 나오는데 이때의 사진을 일본의 최초 영정사진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 전통은 청일전쟁(1894년)에도 이어졌다.
국내에 사진이 본격적으로 들어 온 것은 1883년. 한성순보에 촬영국이라는 사진관에 대한 보도가 나오는데, 황철이란 사람이 세운 사설 사진관이다. 이후 지운영은 1884년 고종의 어진을 찍었다. 이들을 통해 많은 인물사진이 촬영된 것으로 전해지나 남은 기록은 거의 없는 상태다.
일제강점기 시절 영정사진 자료 역시 찾기가 쉽지 않다. 일제강점기의 고종 황제나 순종 황제 장례식에도 영정사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완용의 매일신보 부고 기사에는 그의 초상사진이 쓰였지만, 경성일보에 게재된 그의 장례식 보도사진 속 제위에도 영정사진의 모습은 없다.
광복 후인 1945년 7월 5일 당시 주한미국공보원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이 촬영한 백범 김구 선생의 장례식 영상자료에는 백범의 영정사진이 등장한다. 그의 사진은 운구행렬과 효창공원까지 함께했다.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이철영 교수는 “과거 국내에선 장례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데 인색해 영정사진의 기록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발견되는 오래된 사진도 대부분 1960년대 이후의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일제의 의례준칙에 기록이 남아 있는 만큼 일본의 영향을 받아 장례 때 영정사진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장의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1982년을 기준으로 영정사진의 대중화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다. 당시 부산에서 일본식 장례 상품을 그대로 들여온 상조회사가 영업을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영정사진 문화가 함께 들어왔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일본에서 영정사진이 장례식에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라는 의견이 있다.
인식 바뀌어 웃는 사진 쓰기도
불과 얼마 전까지 영정사진 제작은 남겨진 자녀나 가족의 몫이었다. 따로 영정사진을 찍어두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 그러나 정작 가족이 사망했을 때 준비되는 영정사진은 증명사진이나 주민등록증 사진을 확대해 인화한 조악한 수준의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전 준비의 필요성이 점차 커져갔다.
그러다 사진 장비와 기술 보급으로 사진관이 많아지고, 영정사진 촬영을 일종의 봉사활동 수단으로 삼는 사진가들이 늘면서 사진에 대한 걱정은 줄어들게 됐다. 또 이를 통해 영정사진에 대한 인식도 상당히 개선됐다.
영정사진 촬영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한 동호인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정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노인이 많았다”며 “그러나 최근에는 영정사진이 장수사진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사진찍기를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심지어 2~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촬영해두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는 동네 노인정 등을 통해 영정사진을 파일 형태로 공동 보관하는 문화까지 생겼을 정도라고.
그렇다면 영정사진은 어디에서 준비하는 게 좋을까. 제일 만만한 곳은 역시 사진관이다. 영정사진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가족사진을 찍는 날 영정사진까지 함께 찍어두는 사람들도 있다. 또 최근에는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기 위한 인물사진 전문의 흑백사진관도 서울 북촌이나 연남동 등 일부 지역에서 생겨나고 있다. 가장 대중화된 사진 크기는 28×36㎝다.
현직 사진사들은 아직까지도 본인이 직접 와서 찍는 영정사진보다 생전 사진을 바탕으로 합성해 만드는 게 많다고 말한다. 물론 요즘은 자신의 장례식에 쓸 영정사진을 미리 준비해두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솜사탕 사진관 고용주 실장은 “영정사진을 찍으러 오시는 분들의 태도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져 치아가 보이게 웃거나 심지어 선글라스를 쓰고 측면 모습을 촬영하는 사람도 있다”면서 “만약 의상이 문제라면 평상복을 입고 촬영한 뒤 한복이나 양복으로 간단히 합성할 수 있고 비용도 6~7만원 선으로 장례식장에서 만드는 비용보다 저렴하니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우리사회는 지금 초고령화 사회로 가고 있다. 시니어들의 보다 건강하고 행복한 삶을 위하여 많은 기업이 참여하였다. 모르면 손해이다. 그냥 숨만 쉬는 것은 의미가 없다. 많이 보고 듣고 배우고 실행하여 건강 수명을 최대한 늘려야만 한다. 알고 실천하는 만큼 건강해지고 행복해진다.
삼성동 코엑스 C3 4홀에서는 '액티브 시니어 페어 2017' 행사가 열리고 있다. 기간은 10월 11일부터 3일간이었다.
혈액순환을 돕는 운동기구, 편안한 잠자리를 위한 건강베게 등이 있고 백내장 검사, 혈당 검사, 몸의 불균형을 잡아주는 도구 등 건강을 위한 다양한 제품들이 참살이를 추구하는 시니어들을 기다리고 있다.
박람회에서 문화 충격을 받은 것은 장례문화였다. 지금의 장례문화는 일제의 잔재란다. '헐! 이럴 수가! 80년대 초에 이외수의 를 읽고 경악했었다. 일제는 우리나라의 중요한 산맥마다 중심에 쇠막대기를 박았다. 우리민족의 혼을 말살하려는 술책이었다는 것이다. 그때 '악독한 일본놈들'이라고 이를 갈았는데 다시 한 번 디테일한 일본인들의 교활함에 섬짓해졌다. 삼베옷은 불효했다는 의미로 자손들이 입는 거지 망자가 입는 옷이 아니란다. 죄수나 천민이 입던 삼베옷을 일제가 의례준칙을 통해 수의로 제정한 후 실행을 강제했다고 한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값비싼 수의를 장만하느라고 애를 쓴 것이다. 대표 이미지 한복이 수의로 추천되는 샘플 중 하나이다. 중국산 삼베수의를 보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싸구려 폴리에스터 제품이 80만원짜리라고 하였다. 패션과 패블릭을 공부한 내가 보기에는 여간 허접한 것이 아니었다. 국화는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꽃이라 한다. 장례식에 추천되는 꽃은 카네이션이나 계절꽃을 사용하면 된다고 하였다. 수의도 본인이 좋아하던 옷을 입히면 된다고 하였다.
우리가 모르는 사이 우리 생활 깊숙이 박혀 있는 일제 잔재를 하루속히 뿌리 뽑아야 한다. '우리 문화 바로 알리기' 캠페인을 벌여서라도 반드시 우리 고유의 문화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금년은 유래 없는 10일간의 추석 명절 휴일로 국민들은 긴 휴식의 시간을 맞이하게 됐다. 텔레비전에서는 연일 젊은 사람들이 해외여행으로 빠져나갈 것이라는 뉴스를 내보낸다. 해외여행을 가고 싶어도 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지만 명절을 중시하는 어른들에게는 괘씸한 젊은이들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우리 국민 가운데는 명절만 되면 매년 두 번씩 반복되는 교통체증을 겪으면서도 성묘를 하기 위해 고향을 찾는 사람이 많다. 꼭 성묘가 아니더라도 오랫동안 보지 못한 가족과 지인들을 만난다는 즐거움으로 고향을 찾는다. 그런데 명절이 끝난 후에는 부작용도 심심찮게 나타난다. 가족 간 갈등이 표출되기도 하고 이혼율이 급격히 높아진다는 통계도 보인다. 어찌된 일일까? 즐거운 명절이 행복으로 연결되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한 번 더 명절의 의미를 되새겨봐야 한다.
명절은 오랜 전통을 계승하면서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그 속에는 우리 민족이 가진 특성과 농경문화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다. 계승과 소멸을 되풀이하면서 전통은 우리 앞에 서 있다. 관혼상제를 중시하던 문화를 돌아보면 지금 우리의 전통이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관례는 단발령을 계기로 자취를 감춰버렸고, 혼례는 서양식으로 대부분 진행되고, 상례 역시 장례식장이라는 장소를 설치해 상조회사에서 대신 치루고 있다. 그나마 남은 것이 제사인데 그 역시 원형이 변형되고 있다.
이번 추석 명절에도 조상들의 산소를 찾아 성묘를 하고 차례를 지낼 것이다. 그런데 농경사회에서 만들어진 성묘의 풍습은 급속한 도시화와 핵가족화로 인해 변화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장례 방식이 매장에서 화장으로 옮겨가면서 묘지 문제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지 오래되었다. 이러한 형태로 진행되면 성묘를 가는 사람들도 줄어들 것이고, 한 세대만 지나면 성묘 자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70~80세가 넘은 어른들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일이 조상의 묘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는 일일 텐데, 그 후손들은 그로부터 자유롭고 싶은 마음도 있고, 심지어 손자 세대로 가게 된다면 이마저 사라질 처지에 놓여 있다.
변화는 자연스런 이치일지도 모른다.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고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과거에서 현대로, 현대에서 미래로 변화하는 것을 쉽사리 인정하지 못하는 기성세대에게는 성묘가 사라진다는 사실이 매우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요즘에는 제사를 언제 지낼 것인가를 두고 설왕설래하는 집안도 많다. 과거에는 늦은 밤 시간에 시작해서 새벽에 끝났지만 요즘에는 직장 문제로 늦은 시간까지 제사를 지내는 일이 불편해서 제사시간을 바꾸는 경우가 있다. 만약 시간을 바꾸지 않으면 다음 날 결근을 하거나 휴가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제사를 지내는 일 자체가 후손으로서의 의무감 이외에 다른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심지어 제사 절차나 상차림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제사를 지내지 않거나 다른 종교 시설에 모시겠다고 호언장담하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기 싫어서 종교를 바꾸는 사람도 있다고 하니 씁쓸할 뿐이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 정말 고민이 아닐 수 없다.
전통을 지키기 위해 성묘의 방법을 바꾼 가족이나 문중도 많다. 흩어진 조상님들의 산소를 찾아 성묘하려면 많은 시간이 소비되어야 하기 때문에 이제는 조상들의 산소를 한곳에 모아놓고 제사를 지내거나 성묘를 하는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불과 30년 전만 해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만 지금은 이러한 문제를 두고 심하게 비난하는 사람은 없다. 성묘나 제사가 사라지는 것보다 오히려 어떠한 방법으로든 지켜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전통을 지키자니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고, 전통을 버리자니 불효자라는 소리를 들을 것 같은 현실 속에서 누구나 진퇴양난의 고민을 할 것이다.
조선시대의 예학자였던 신의경 선생은 개장(改葬)을 논의하면서 “옛날의 개장은 분묘가 어떤 이유에서 붕괴되어 시신이나 관이 없어질 우려가 있을 때 하는 것이었으나, 요즈음에는 풍수설에 현혹되어 아무 이유가 없이도 천장(遷葬, 천묘)을 하는데, 이것은 심히 잘못된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장(移葬)이나 개장은 특별한 이유 없이 해서는 안 되는 일이며, 이것은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훼손되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지 않아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집안이 번창하기를 기대하면서 조상의 묘를 함부로 이전하거나 개장하는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상을 한곳에 모시고 성묘를 하는 것은 부득이한 선택일지 모른다.
과거 매장하던 풍습에서 화장하는 풍습으로 바뀐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지만 이제 70% 정도의 국민이 화장 방식을 선택하고 있다. 최근에는 시신을 화장해 그 유골을 그릇에 담아 봉안당(奉安堂)에 모시는 가족이 늘고 있다. 국토가 좁은 우리나라에서 국가의 정책으로 화장을 권장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이고, 봉안당이나 수목장이 관심을 받는 것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필자가 평소에 노인을 많이 상대하고 있지만, 과거처럼 매장을 고집하는 사람은 드물다. 조상들의 묘를 돌보는 것은 자신들의 책무이지만 정작 본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자식들에게 짐을 지우지 않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다. 후손들이 잘 해내기도 어렵고 선산에 묻혀도 수시로 돌볼 자녀도 많지 많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안다. 그래서 스스로 미래에 대해 포기하는 것일까.
전통을 계승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선진국이 자신의 정체성을 전통에서 찾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우리의 고민은 불편한 진실도 아니고 어쩌면 자연스럽고 당연한 질문일 것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나를 이 세상에 나올 수 있도록 해준 조상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고, 동시에 죽음의 문제를 떠올리게 된다.
시대가 달라지면 조상을 생각하는 마음도 달라지고 방법도 달라진다. 어떤 것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도 어려운 문제다. 이 세상에 정답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가장 좋은 방법은 가족과 친척 혹은 문중에서 충분한 논의를 거쳐 좋은 방법을 강구하는 것은 어떨까. 그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을 행복하게 만드는 도리에 대해 고민하는 일이다. 이번 추석은 행복한 명절이 되기 위한 지혜를 모아보면 좋겠다.
죽은 사람에게 입히는 옷이라고 알고 있는 수의(壽衣)는 우리 전통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단어다. 엄밀히 따지면 장례 과정에서 염과 습을 할 때 입히는 옷이라고 해서 습의(襲衣)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수의라는 단어는 일제강점기 시절 일제가 의례준칙을 통해 임의로 뜯어고친 예법을 우리 민족에게 강요하는 과정에서 변질된 단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이 과정에서 변질된 것은 또 있다. 바로 삼베수의의 등장이다. 현재 우리 장례문화에서 삼베수의는 표준이 된 상태. 일부 지역에서 만들어지는 삼베수의는 가격이 1000만원을 넘기도 한다. 대통령 중 가장 최근에 사망한 고(故) 김영삼 전 대통령도 황금색 삼베수의를 입고 국립묘지에 잠들어 있다. 그런데 왜 삼베수의가 문제라는 걸까?
최근 한 편의 논문이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최연우 교수의 ‘현행 삼베수의의 등장배경 및 확산과정 연구’라는 제목의 논문이다. 일제가 죄수복을 상징하는 삼베로 짠 수의를 어떻게 우리나라에 확산시켰는지 확인하도록 해주는 연구였기 때문이다. 최 교수는 연구 과정에서 한 권의 책 에 주목했다.
“삼베수의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25년 발간된 이 책을 통해서예요. 김숙당이 쓴 최초의 전문 재봉 서적인데 그동안 김숙당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지지 않았어요. 그러다 조사를 통해 식민통치 기관이었던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교원으로 근무했던 사실을 확인했죠.”
김숙당은 당시 우리의 전통문화와는 거리가 멀었던 삼베수의를 이 책을 통해 강조한다. 최 교수는 일제가 우리 민족의 자원을 수탈하기 위해 철저한 사전 준비를 했고, 삼베수의가 등장한 것도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 아니겠냐고 추측한다.
“결국 그 후 의례준칙을 통해 삼베수의는 명문화돼요. 기록을 살펴보면 1934년에 의례준칙이 제정됐고, 삼베와 무명을 수의로 사용한다고 규정했죠. 일제는 이렇게 규칙을 정해놓는 것으로 끝낸 것이 아니라 의례준칙시행서를 통해 지방별로 이 규칙을 실행하도록 강제했어요. 각종 단체와 기관도 동원됐습니다. 당시 이렇게 절약된 비단이 일본 신사에 바쳐졌다는 기록도 있어요.”
일제가 준 영향은 우리의 장례문화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영좌(靈座) 주변이 국화로 장식되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국화는 일본 왕실을 상징하는 꽃이다. 우리 조상들은 장례에서 생화를 사용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었다. 대신 종이꽃을 사용했다.
유가족이 팔 완장과 가슴에 리본을 착용하는 것도 일제의 잔재 중 하나다. 학계에선 일제가 군중이 모이고 군중의 활동이 만세운동으로 변질되는 것을 최대한 막기 위해 장례를 가족 중심으로 간소화하고 구분을 위해 가족에게 완장을 차게 했다는 이야기도 했다.
최 교수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피해를 입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의 장례에서도 고인이 마지막으로 삼베수의를 입고, 국화꽃으로 조문을 받는 것이 답답했고, 완장과 리본을 찬 상주들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삼베는 죄인을 위한 옷감
그렇다면 우리 조상들은 수의로 어떤 옷을 입었을까.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이철영 교수는 가장 좋은 옷을 생각하면 된다고 말한다.
이 교수는 “삼베수의가 잘못 전해지고 있는 전통이라는 것이 학계에선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우리 조상들은 일반적으로 평상복 중에서 가장 좋은 옷을 수의로 지어 입었습니다. 당연히 비단과 같은 재료가 많이 쓰였고요. 평소에 옷감으로 사용되지도 않는 삼베를 수의로 입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죠.”
실제로 조선시대 때 삼베로 만든 옷은 범죄자들이 입는 죄수복으로 쓰였다. 조상들이 삼베옷을 ‘상복’으로 사용한 것은 상주나 가족은 ‘부모님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인이자 불효자’라는 개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자식된 도리로 스스로 고행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런 의미의 상복을 우리는 고인에게 입히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베수의 관습이 지속된 것은 일제의 의례준칙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가정의례준칙 때문이라는 의견도 많다. 1969년 가정의례준칙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는데 ‘식물성 의복 또는 수의를 갈아입히고 입관한다’는 표현이 나온다. 삼베수의가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 삼베수의가 정착된 배경 중 하나로는 삼베가 대마라는 특수한 작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대마는 환각제인 대마초의 재료가 되는 식물이기에 1977년 국가에서는 대마관리법을 제정하고 대마 재배를 허가제로 변경한다. 이러한 제도적 변화는 늘어나는 삼베수의의 수요에 비해 공급이 제한되는 결과를 낳았고, 이를 좌지우지하는 유통상들에게는 커다란 이권이 됐다.
영원히 입는 옷, 수의
그렇다면 수의는 조상들에게는 어떤 옷이었을까. 최연우 교수는 이렇게 설명한다.
“보통 수의를 인생에서 마지막에 입는 옷이라고 생각하잖아요. 하지만 우리 조상들은 영원히 입는 옷이라는 개념도 가지고 있었죠. 육체가 있는 상태에서 마지막까지 입고 있다가 제사나 차례와 같은 강신(降神) 과정에서 입고 나타나는 옷도 마지막에 입었던 수의가 되는 것이죠. 그래서 당시 예서를 살펴보면 환갑이나 진갑이 되면 수의를 미리 준비하는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가장 좋은 옷을 입기 위해 관리는 관복을, 유학자들은 하얀 심의를 입었다. 여성은 혼례복으로 입던 원삼을 입기도 했다. 최 교수에 따르면 한 종가집 종부는 혼례식에 입었던 옷을 수의로 다시 준비하면서 “땅으로 시집간다”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실제로 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출토되는 전통복식들을 살펴보면 우리 조상들은 비단으로 만들어진 화려한 색상의 옷들을 입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 전통 수의를 지키려는 노력은 연구로 끝나지 않았다. 출토복식 전시회를 통해 일반인에게 우리의 전통 수의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고, 또 전통 수의의 복원이 이뤄지기도 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입었던 곤룡포 수의다. 김 전 대통령 생전에 단국대학교 측이 이희호 여사에게 제안해 미리 준비해놨던 전통 수의가 장례식에서 사용됐다. 곤룡포는 조선시대 때 국상에서 망자(임금)가 입었던 수의다. 단국대 측은 아예 전통복식을 따르는 수의를 보급하기 위해 ‘단국상의원’이라는 회사를 설립해 전통 예복을 판매하고 있다.
지난 8월 27일, 야학 시절 필자에게 만년필을 선물로 주셨던 진 선생님께서 별세하셨다. 서둔야학 단톡방에서 이 소식을 알게 된 필자는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이게 무슨 일이야! 말도 안 돼! 이 일을 어떡하면 좋아! 지난 2월에도 예술의전당에서 건강한 모습을 뵈었는데!’
아아! 님은 가셨는데
님을 보내 드릴 수가 없습니다.
그 크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아야 하는데,
북한농업 발전, 미얀마 농촌 프로젝트 등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굵직한 일들을 여기저기 벌여놓으셨는데,
아직 할 일이 너무도 많으신데,
어찌 그리 황망히 가셨나요!
선생님! 내 사랑하는 선생님!
삼성병원 장례식장에 걸려 있는 선생님의 사진을 보고 또 보았다. 가슴이 먹먹하고 미어졌다. 그로부터 하루도 선생님을 생각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런데도 밥을 먹고 잠을 잘 수 있는 자신이 용납되지 않았다.
야학 시절 진 선생님의 손은 거칠기가 세상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분이었다. 제주도 가난한 농촌 집안 출신으로 당신 손으로 학비를 해결하며 공부를 하셨기에 그 노고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들은 바에 의하면 1년 벌어서 1년 공부할 정도로 힘들게 학업을 하셨다고 한다. 험한 일 궂은일을 가릴 수 없었던 선생님의 손은 늘 상처 투성이였으며 굳은살이 박혀 울퉁불퉁했다. 그 손이 안쓰러웠던 필자는 언제부턴가 선생님을 뵙게 되면 얼른 손부터 보게 되었다. 입고 있는 옷도 군복에 대충 검은 물을 들인 작업복 아니면 서울대 교복 차림이었는데 자주 빨아 입지 못해서인지 얼룩덜룩할 때가 많았다.
가톨릭 신자인 진 선생님은 철저한 휴머니스트였다. 필자의 아버지가 서울대 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는 바쁘신 와중에도 틈틈이 문병을 와주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우리 가족을 돕느라 물심양면으로 애쓰시던 선생님은 아버지 산소 양쪽에 어디선가 구해오신 진달래꽃까지 심어주셨다.
우리 가족을 보살펴주시던 진 선생님은 야학 후배 윤선이가 아버지를 잃었을 때는 또 그 후배를 돕느라 동분서주하셨다. 우리 아버지와 윤선이 아버지가 돌아가신 것은 우리가 서둔야학을 졸업한 지 각각 1, 2년 후의 일이었는데 선생님은 졸업한 야학생들의 궂은일까지도 모른 척하지 않고 끝까지 보살펴주신 것이다. 당신도 여러 가지 복잡한 일이 많았을 텐데도 제자들을 그렇게 살뜰히 보살펴주시는 분이었다.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늘 ‘참을 위하여 일생을 바치라’고 강조하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대신 아버지 역할을 해주셨는데 최근에 찾아 뵌 선생님은 필자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우리 가족을 선생님께 맡긴다는 말을 했다고 전해주셨다. 읽을 책 하나 변변히 갖고 있지 못했던 우리 형제들에게 두터운 골판지로 된 김유신장군 책과 외국 동화책을 사다 주셨는데 영어로 돼 있던 그 책의 내용은 기억 못하지만 주인공 소녀의 토실토실한 볼은 지금도 참 귀여운 인상으로 남아 있다. 또 책을 좋아하는 필자에게는 특별히 헤르만 헤세의 를 선물해주셨다. 내용은 별로 흥미롭지 못했지만 선생님의 사랑이 묻어 있던 그 책에 상당한 애착을 가졌기에 오랜 세월 소중히 간직했다. 어디선가 어렵게 구한 은박지로 표지로 쌌으며 책을 볼 때는 손을 비누로 깨끗이 씻은 후 볼 정도로 아꼈다.
"과자 한 봉지 실컷 먹어 봤으면…."
진 선생님의 어렸을 때 소망이었단다. 당신 어렸을 때 생각이 나서였을까? 궁핍한 살림에 과자 하나, 사탕 하나도 마음대로 먹지 못했던 우리 형제들을 위해 가끔 과자도 사다 주셨다. 영어가 씌어 있는 흰색 봉투에는 입에 넣으면 살살 녹는 밤과자, 부채 모양의 부채과자 등이 가득 들어 있었다.
필자의 집은 수수깡과 진흙을 섞어 만든 집 벽에서 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우리 형제들은 겨울에는 대낮에도 두꺼운 이불을 펴놓고 그 속에 발을 묻었다. 밖에서 뛰어 놀다 들어와 그대로 이불 속으로 발을 밀어 넣는 통에 이불이 꼬질꼬질했다. 그 방에서, 추워서 옹송그리고 있던 동생들은 한줄기 따스한 빛 같은 진 선생님을 만나곤 했다. 그러나 필자는 선생님이 반갑지 않을 때도 있었다. 궁색함, 누추함이 그대로 드러난 모습이 창피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애국애족의 정신이 투철하신 선생님의 영향을 받았다. 학비를 걱정하는 가난한 고학생이면서도 나라와 민족을 망각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덴마크의 개척자 달가스, 이스라엘의 민족지도자 그룬트비히와 우리나라의 안창호 등 애국애족의 민족주의자에게 한창 매료되어 있던 필자가 이라는 책을 보고 싶어 하는 것을 알게 된 선생님은 어디선가 그 책을 구해다 주셨다. 그 책을 읽으며 '나라와 민족'이라는 그 거창한 이상주의의 바다에 빠져버렸다.
20여 년 전의 어느 날이었다. 별안간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선생님께 필자가 말했다.
"선생님 제가 이제 아무 데도 가지 않고 선생님 곁에서 선생님을 보살펴드릴 거예요. 선생님 눈이 되어드릴 거예요."
깨고 나니 꿈이었다. 너무도 생생한 꿈이었다. 필자에게 끝이 없는 사랑을 주셨던 선생님에 대한 마음이었다. 그때까지 받기만 한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던 충정이었다.
진 선생님,
제 숨이 끊어지지 않는 한 가슴에 고이 모셔두겠습니다.
당신은 너무도 아름다웠던 내 동화 속 왕자님이었습니다.
를 읽어보면 79권에 조조(曹操)의 사후, 그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은 죄를 물어 위(魏) 문제(文帝)로 등극한 조비(曹丕)가 자신의 친동생이자 정적인 조식(曹植)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짓지 못하면 죄를 묻겠다는 장면이 나온다. 그리고 바로 그 유명한 조식의 ‘칠보시(七步詩)’가 나온다. 그런데 이 칠보시의 원작자에 대해 아직까지도 논쟁이 있다. 조식이 활동하던 건안(建安) 시대에는 칠보시 같은 오언시(五言詩)가 아직 자리 잡지 못한 시기였다. 게다가 정사(正史)인 와 조식의 사후 편찬된 어디에도 이 시가 보이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는 어느 문헌에 최초로 등장할까? 위진남북조 시대 송나라의 유의경(劉義慶)이 편집한 다. 이 문헌이 편찬된 시기와 조식의 시대는 약 200년 차이가 나는데, 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위 문제 조비가 동아왕(東阿王) 조식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지으라 하고, 만약 짓지 못하면 대법(大法, 사형을 의미함)을 받을 것이라 하자, 조식이 이에 시를 짓기를 ‘煮豆持作羹,漉菽以為汁。 萁在釜下然 ,豆在釜中泣。 本自同根生,相煎何太急?’라 하니, 황제가 심히 부끄러워하는 안색이었다.
이 문헌에 등장하는 ‘칠보시’의 원전은 특이하게도 6구의 오언시로 이루어져 있다. 즉 시에 관한 한 고금 제일이라 칭할 만한 조식이 불완전한 6구 형태의 오언시를 남겼다는 점이 의문스럽다. 또 가 위진시대 유명했던 인물들의 일화 및 대화만 기록한 글이어서, 이 시가 언제, 어떤 일로인해 지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위의 글을 토대로 시기를 유추해보면, 일단 조식을 동아왕으로 칭하고 있는데, 조식이 동아왕으로 봉해졌을 때는 그의 형 조비는 죽고, 조카인 조예(曹叡)가 명제(明帝)로 보위를 이은 후여서 이 시의 신뢰성은 또다시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후 이 시는 의 주석에 인용된다. 에 가장 권위 있는 주석을 단 이선(李善)은 60권, 임언승(任彥昇)의 에 대한 주석에서 “에서 말하길, 문제(文帝)가 진사왕에게 일곱 걸음 안에 시를 지으라 하니 그 시는 ‘萁在灶下燃,豆在釜中泣。本是同根生,相煎何太急’이다”라고 하면서 본래의 6구를 절구(絶句) 형태인 4구로 줄여 소개한다. 그러다가 조식 사후 1100여 년이 지난 명나라 때 나관중(羅貫中)이 쓴 에서 이 시는 실제와 허구가 뒤섞인 일화들과 함께 다시 화려하게 등장한다.
煮豆持作羹, 漉菽以為汁. 萁在釜下然, 豆在釜中泣. 本自同根生, 相煎何太急.
煮豆燃豆萁, 豆在釜中泣. 本是同根生, 相煎何太急.
조식의 칠보시는 소개되는 문헌에 따라 약간씩 다르게 인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이불 속에서 뭉개다 일어나 TV를 보는 고등학생 아들 가오(량진룡 분). 그 시각 어머니 정 여사(포기정 분)는 동네 ‘Wellcome’ 슈퍼마켓에서 일하느라 바쁘다. 도입부만 보면 게으른 망나니 아들을 둔 홀어머니 고생담 아닐까 싶지만, 점차 관객은 가오가 HKCEE(홍콩 중등교육검정시험) 결과를 기다리며 여름방학을 보내고 있는 학생이며, 신문을 사오라거나 무거운 짐을 들어달라는 어머니의 소소한 심부름에도 군말 않는 착한 아들임을 알게 된다.
외할머니 생신 잔치 때, 외국을 들락거리는 잘사는 외삼촌 가족 사이에서 쭈뼛거리는 정 여사와 가오. 외할머니가 입원하자 가오는 바쁜 어머니 대신 사촌 여동생(진옥련 분)과 함께 부지런히 죽 도시락을 날라댄다. 외할머니는 “네 엄마는 일밖에 모른다. 남동생 둘을 다 공부시켰고, 맏딸로 고생 많이 했다”며 울먹인다. 이 장면은 공장에서 일하는 홍콩 여성들의 옛 사진과 남편의 관 앞에서 서럽게 우는 정 여사 모습으로 이어진다.
정 여사는 같은 아파트로 이사 온 혼자 사는 할머니(진려운 분)의 TV 구입을 도와주고, 할머니는 말린 버섯을 선물한다. 서로 의지하는 이웃이 된 정 여사와 할머니는 아들과 손자의 시험 결과를 궁금히 여긴다. 세상 떠난 딸이 남긴 유일한 자손인 손자가 보고 싶지만, 사위가 재혼해 맘놓고 전화하기도 힘든 할머니. 정 여사는 사위와 손자를 만나러 가는 할머니와 동행한다. 손자는 아르바이트로 바쁘다며 나오지 않고, 사위는 할머니가 “손자에게 해준 게 없어서…”라며 내미는 금반지를 물리치고, “새 장모님이 아프셔서…” 하면서 음식 값을 치루고 훌쩍 나가버린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할머니는 “자네와 가오에게도 주려고 은반지를 샀어. 손자와 사위 내외에게 주려던 금붙이도 자네가 갖게”라며 반지 상자들을 내민다. 정 여사는 “그럼 간직해둘게요. 무슨 일이든 도와드릴게요” 한다. “나도 가오를 손자로 여기고 기도할게”라고 답하는 할머니.
중추절을 앞두고 월병(月饼) 티켓을 구해온 외삼촌(고지삼 분)은 배웅 나온 가오에게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다. “네 유학비용은 걱정하지 마. 외삼촌들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허안화 감독의 은 정 여사와 가오, 할머니의 일상(장을 보고, 조리하고, 밥을 먹고, 설거지하고, 친구를 만나고, 집안 대소사에 참석하는 별스럽지 않은 하루하루)을 통해 서민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보여준다. 특히 밥 먹는 장면이 어찌나 많은지 고기와 푸성귀 볶음, 계란 부침과 국 등 두 개 이상 찬이 오르지 않는 식탁에, 젓가락으로 밥과 반찬을 입안에 쓸어 넣듯 하는 빠른 식사까지. 만한전석(滿漢全席)을 자랑하는 중국 요리를 느긋느긋 음미와는 것과는 거리가 먼 초간단 조리와 초스피드 식사 장면으로 시간 흐름을 보여주며, 원제목인 ‘天水圍的日與夜’와 영어제목인 ‘The Way We Are’에 충실한 영화임을 증명하려는가 싶다.
먹는 문제를 중하게 혹은 별스럽지 않게 보여주던 영화는 마지막도 식사 장면으로 마무리한다. 중추절을 맞아 저녁 식탁에 둘러앉은 정 여사와 가오와 이웃 할머니. 웃으며 과일과 월병을 나누는 그들 뒤로 고층 아파트 불빛이 보이고, 창밖으로 이동한 카메라는 아파트 광장에 모여 중추절을 기리는 주민들을 보여준다. 노동으로 그날의 끼니를 장만하는 서민 아파트 사람들에게도 달은 은은한 빛을 내린다.
이 영화는 허안화 감독의 생활 밀착형 세밀화 작품(, )의 맥을 잇고 있다. 가족과의 마작놀이 셈도 바로 치루는 정 여사의 반듯함, 금목걸이를 주고받는 정 여사와 할머니의 정서적 연대를 식사 장면처럼 무심하게 그려낸다. 눈썰미 좋은, 영화에 푹 빠진 관객이 아니라면 물처럼 흘려보내기 쉬운 장면들. 산다는 것은 밥 먹고 잠자는, 그날이 그날 같은 소소한 일상으로 이어지는 것 같으면서도, 아들은 교회 선생님을 잠깐 흠모하고, 어머니는 늙고 병들며, 친척 장례식장에서 종이돈 접는 품앗이를 하기도 한다.
이렇다 할 설명이나 교훈 없이 담백한 장면을 그리기만 했는데도 허안화 영화에서는 이 장면이 차곡차곡 쌓여 가슴이 뻐근해진다. 세월이 흘러도 뭉클하게 떠올릴 것 같다. 허안화 감독의 작품에는 영화배우 같은 배우가 아닌, 마치 그 지역에 사는 평범한 외모의 실제 인물이 일상을 보여주는 것처럼 천연덕스러운 배우들의 연기가 큰 몫을 한다. 무심한 표정 안에 꾹꾹 눌러 담은 삶의 회한을 미세하게 드러내는 포기정과 진려운의 연기는 아무리 칭찬해도 과하지 않다.
은 영화 배경으로 천수위를 택함으로써 홍콩 현실을 담아내는 사회적 책무에도 충실하게 복무한다. 천수위(天水圍)는 1990년대 홍콩의 토지 개간으로 생긴 서민 주거 지역이다. 1980년대부터 중국 대륙에서 홍콩으로 이민 온 이들 30여 만 명이 살며 고층 아파트형 공용 주택이 많다. 새로운 환경에 대한 부적응과 사회 지원 부족으로 가정 폭력, 자살, 실업 등의 불행한 뉴스가 많았는데, 2007년 10월 어머니와 두 자녀가 고층 주택단지에서 사망한 사건이 유명하다.
홍콩과 중국은 하나가 됐지만, 영화에서는 높은 벽이 그려진다. 특히 천수위는 1980년대 홍콩 누아르의 몽콕 지역처럼 묘사된다. ‘슬픔의 도시’로 알려진 천수위는 중국과 홍콩의 관계, 홍콩의 정체성 모순이 집약된 배경으로 등장한다. 천수위를 배경으로 한 유국창 감독의 (2008)도 홍콩 영화 금상장 신인상과 미술상 후보에 오르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천수위에서 영화를 찍겠다는 허안화의 제안에 제작자는 영화가 음울해질 거라는 이유로 거부했다고 한다. “그럼 아주 저렴한 텔레비전 영화를 찍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으로 9월에 촬영을 시작해 연말 전에 완성했다. 제작비도 100만 홍콩 달러 정도밖에 안 들었다. 고화질 HDV 비디오카메라로 촬영한 을 본 제작진은 다음 작품인 (2009) 제작에 동의했다고 한다.
중국과 홍콩의 경제적 격차와 그로 인해 발생하는 인구 이동과 계급, 사회 격차를 은유적, 함축적으로 담아낸 은 제28회 금상장 시상식에서 감독상, 각본상, 여우주연상, 여우조연상 4개 부문을 석권했다.
는 과는 무관하다. 중국에서 온 웡히우링(장정초 분)과 리삼(임달화 분) 부부는 천수위의 아파트에 산다. 의처증 심한 리삼은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아내를 폭행한다. 참다못한 웡히우링은 두 딸과 여성복지시설에 몸을 의탁한다. 리삼이 찾아와 마치 새 사람이라도 된 양 사과하며 마음을 고쳐먹은 듯하다가도 발작적으로 웡하우링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홍콩 남자와 사랑에 빠져 홍콩에서의 근사한 삶을 상상했던 중국인 아내의 팍팍한 일상. 이 나이를 초월한 두 여성의 우정을 그렸다면, 는 중국-홍콩 가족의 파멸 드라마다.
한때 홍콩 감독 허안화(1947년~)에 관한 국내 평가는 “여러 장르를 아우르며 실망과 환희를 동시에 안겨주는, 높낮이가 심한 연출자”였다. 그러나 필자는 (1997)과 같은 범작에서도 실망한 적이 없다. 서극, 담가명 등과 함께 1980년대 홍콩 뉴웨이브를 이끌었던 허안화는 진중한 사회파 드라마에서부터 액션, 시대극, 멜로를 아우르며 홍콩과 홍콩인이 처한 현실을 이야기하는 저력을 발휘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모녀의 20년 세월을 그린 (1990), 치매 노인을 둔 가정 이야기를 맏며느리 중심으로 그린 (1995), 매염방의 연기로 영원히 기억될 (2002)만으로도 그가 영화계에 남긴 선물과 성취는 이미 넘친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여류라는 수식어를 자랑스럽게 쓸 수 있는 몇 안 되는 감독 중 한 명인 허안화가 마지막 연출작으로 생각했던 (2011)는 평단과 대중의 찬사를 얻었다. 이로 인해 허안화의 은퇴 심경을 번복하게 했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제13회 전주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처음 소개된 는 제68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제48회 금마장영화제 감독상 등을 받았고 2012년 제84회 아카데미영화제 외국어영화상 부문 홍콩 영화로 선정되었다.
는 단 한 명의 악인도 등장하지 않는, 그래서 절정도 극적 엔딩도 없는 담백한 영화다. 그렇다고 지지부진하고 무의미한 일상 묘사에만 머무는 심심하고 지루한, 소위 예술 영화인 체하는 작품도 아니다. , , 과 마찬가지로 보통 사람의 삶과 인간관계를 깊이 사색할 수 있는, 그러나 감동을 강요하지 않는 수채화 같은 영화다. 겸손하고 진지한 현실 응시와 표현력이 영화의 미덕임을 확인케 하는 작품인 것이다. 이런 영화를 계속 내놓는 허안화의 뚝심과 이 같은 소재에 제작비를 대는 홍콩 영화계의 인프라가 존경스럽고 부럽다.
는 홍콩의 최고 스타 류더화(유덕화)가 제작을 자처하고 시나리오에 감동받아 주연까지 요청한 작품이다. 홍콩 누아르의 청춘 아이콘에서 진지한 소품에 돈을 대는 제작자로 성숙한 류더화를 칭찬하지 않을 수 없다. 주윤발, 양조위, 여명, 양가휘 등 홍콩 남성 스타들은 어쩐 일인지 도무지 나이를 먹지 않는데, 특히 1961년생인 류더화는 대학생 역할을 맡아도 빠져들 만큼 늙은 티가 나지 않는다. 에어컨 수리기사로 오인받을 정도로 허름한 잠바와 배낭 차림으로 나오는 에서도, 노총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상영된 (2012)에서는 조연으로 잠깐 출연하는 등 역할의 크고 작음을 문제 삼지 않는 류더화 같은 스타 제작자가 있어 홍콩 영화계의 미래가 밝아 보인다.
는 시리즈와 등을 제작한 홍콩의 유명 영화 프로듀서 로저 리의 개인사를 바탕으로 했으며, 로저 리가 직접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다. 혈연으로 맺어진 식구만을 가족으로 여기는 편협한 사고가 고령화 사회의 걸림돌이 될 것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을 간 후 혼자 홍콩에 남은 영화 프로듀서 로저 리 (류더화 분)는 잦은 중국 출장 등으로 바쁘게 산다. 그런 그를 돌보는 것은 60여 년 전부터 그의 집에서 일해온 늙은 가정부 타오지에(예더셴 분)뿐. 어느 날 뇌졸중으로 쓰러진 타오지에는 로저의 짐이 될 수 없다며 요양원을 고집한다. 자기 집안 식구를 4대나 모셨으며 자신을 키워주기도 했던 타오지에를 보러 이따금 요양원을 찾는 로저와 양아들 노릇을 해주는 그에게 감사함과 미안함을 느끼는 타오지에와의 이심전심. 그리고 두 사람 눈에 비친 요양원 노인들의 일상.
출장에서 돌아와도 이렇다 할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타오지에가 자신의 식성에 맞춰 요리해주는 각종 해산물 요리와 우설 찜을 먹기만 하는 로저. 그는 먼지 하나 없이 집 안을 쓸고 닦는 타오지에를 늘 제자리에 있는 가스레인지 혹은 청소기 같은 존재로 여기는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이는 그의 무심한 성격에서 기인했던 것일 뿐, 타오지에가 요양병원에 입원한 후 로저는 따뜻한 본심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부터 관절을 못 쓰게 된 나이에 이르기까지, 결혼도 하지 않고 로저의 가족을 돌봐온 타오지에에겐 로저 가족과의 관계가 전부다. 노인병원에서 잠시 외출 나온 타오지에는 그동안 보관해온 소중한 물건들을 로저에게 보여준다. 그녀가 평생 간직해온 것은 로저와 함께 찍은 옛날 흑백 사진, 로저가 아기 때 입었던 옷과 장난감, 그리고 자신의 첫 월급봉투 등이었다.
자신과 함께 시부모를 봉양해준 타오지에를 병문안하러 온 로저의 어머니는 로저와 단둘이 지내게 되었을 때 이런저런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무조건 베풀기만 했던 타오지에의 행동과는 대조되는 행위였다. 즉 로저에게 타오지에라는 존재는 어머니보다 더 가까운, 자신을 속속들이 알고 이해해주는 또 다른 어머니였던 것이다. 이는 로저가 누이에게 하는 말에서도 확인된다. “내가 아플 때 타오지에가 나를 돌봐줘 살아났는데, 이제 내가 그녀를 돌볼 수 있어서 다행이야.” 누이는 오빠에게 “어린 시절 유독 오빠만 챙겼던 타오지에가 서운했어. 그러나 나도 타오지에가 키워줬으니 장례식 비용만큼은 내가 부담하게 해줘”라고 말한다.
이처럼 로저의 가족은 타오지에의 헌신에 깊이 감사해하며 그녀의 노후를 책임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특히 로저는 타오지에가 퇴원해서 살 집은 물론 요양병원 비용까지 알아서 준비한다. 형제의 결혼식 피로연에 타오지에를 데려가 함께 가족사진을 찍는다거나, 자신이 제작한 영화 발표회장에 타오지에를 초청해 그녀에게 기쁨과 자랑스러움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모자지간이나 다름없는 로저와 타오지에의 관계 못지않게 이 영화에서 비중을 차지하는 장면은 두 사람 눈에 비친 요양병원 노인들과 직원들의 일상이다. 정초 연휴 때도 병원에 남아 있는 노처녀 최 간호사(진해로 분). 아들에게 전 재산을 준 뒤 버림받았음에도 아들만 기다리는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에게 화를 내면서도 모시러 오는 딸. 깊은 병에 걸린 딸과 그 딸을 보러 오는 어머니는 병원비 걱정 끝에 말없이 사라진다. 타오지에에게 돈을 빌리곤 하는 노인의 에피소드도 가슴 뭉클하다. 빌린 돈으로 젊은 여자를 사러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로저가 돈 빌려주지 말라고 하자 타오지에는 이렇게 말한다. “할 수 있을 때 하는 게 좋지.”
에피소드의 주인공들은 삽화처럼 간간이 등장할 뿐이지만, 관객들이 그들의 전 인생을 짐작할 수 있을 만큼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남긴다. 류더화와 예더센을 제외한 요양원 노인들은 비전문 연기자들이며, 요양병원 묘사는 거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다. 여기에 유머와 페이소스가 곁들여진 소소하면서도 세심한 묘사가 더해진다.
커튼으로 가림막을 한 조그만 방들이 다닥다닥한 한 서민요양병원 스케치는 에서 여주인공 손 여사의 이모와 이모부의 요양원 생활을 떠올리게 한다. 사실 는 의 자매편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소재와 묘사의 연관이 많아 보이며, 절제된 카메라워크와 단정한 화면구성 또한 그러하다.
1961년생인 류더화와 1947년생인 예더센은 (1985)에서 모자 지간으로 호흡을 맞춘 이래 여러 차례 모자지간으로 출연한 바 있어, 에서의 호흡이 자연스러웠고 각종 연기상으로 그 보답을 받았다. 1992년 공리가 로 여우주연상을 탄 이래, 예더한은 19년 만에 중국어권 여배우로 두 번째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유명 감독과 배우의 우정 출연도 이야깃거리에서 빼놓을 수 없다. 로저가 중국 출장에서 영화 일정을 의논하고 함께 술을 마시는 영화인들로는 , 시리즈의 서극 감독, , 등의 제작자 시남생, , 등으로 유명한 감독이자 배우인 홍금보인데 이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출연했다.
‘죽음을 어떻게 준비할까?’에 대한 고민에서 간과하기 쉬운 것 중 하나는 내가 기르고 있는 애완동물이나 유품의 정리다. 그게 뭐 그리 어려울까 싶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가족이나 친지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것일 수도 있고, 무작정 버리기에는 아까울 물건일 수도 있다. 지금 당장은 필요한 물건들이니 미리 정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고 맡아줄 누군가가 있다 해도 미안한 기분이 든다. 어떻게 해야 할까?
우리보다 고령화 사회를 먼저 맞이한 일본은 유품정리에 대한 문제의식도 빨랐다. 일본의 경우 유품정리가 이슈가 된 것은 고독사하는 사망자의 수가 급속히 증가했기 때문이다. 장례를 처리하고 상속할 자녀가 없는 경우 본인의 유품을 처리하기가 곤란한 것도 문제가 됐다. 실제로 일본 정부에서는 2030년 초고령화로 인해 50세 남성
3명 중 1명은 미혼인 상태에서 사망하게 되며, 전체 노인 중 절반은 고독사하게 될 것이라는 자료를 발표했을 정도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유품정리사다. 일본 유품정리사인정협회(遺品整理士認定協会)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까지 일본 내에서 유품정리사로 활동 중인 인원은 약 1만6000명에 달하며, 등록법인도 900여 개나 된다.
버리는 것만이 능사 아냐
우리나라의 경우는 유품정리사에 대한 인식이 아직 부족한 편. 국내에서 활동 중인 유품정리 업체 중 상당수는 고독사하거나 살해당한 시신을 수습하는 ‘특수청소업체’다. 아직까지는 고인이나 고인의 유품을 직접 처리하는 것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크기 때문이다.
유족이 있거나 고인이 병원에서 사망한 경우에는 주로 폐기물업자나 재활용업자가 유품을 처리한다. 고인이 사용하던 집기를 헐값에 사들여 사용 가능한 제품은 중고물품 업체에 판매하고 나머지 유품들은 폐기하는 것이다. 이들은 유족에게 직접 의뢰를 받기도 하지만 상조업체나 장례식장 등을 통해 일을 맡기도 한다.
전문가들은 고인 유품에 대한 이러한 처리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일본의 대표적 유품정리회사인 키퍼스의 한국법인 키퍼스코리아의 김석중 대표는 이렇게 조언한다.
“국내에선 고인의 유품을 버리고 처분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유족들도 유품을 어떻게 처리할지 몰라 당황하는 경우가 많고요. 그러나 유품정리의 기본은 판매를 통해 환급 가능한 유품을 골라내고, 사회적·문화적 자산에 대한 온당한 가치를 매기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버리는 것은 그다음의 문제입니다. 또 상속 등 법률적 절차에 대한 고려도 필요합니다.”
김 대표에 따르면, 세상을 뜨기 전에 직접 자신의 유품정리를 부탁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한다. 대부분 다급하게 유족에 의해 의뢰를 받는 게 대부분이라는 것. 고인이 미리 부탁할 때엔 사망 후 자녀나 지인을 통해 연락이 오기도 하지만, 요양병원이나 상조회사 등을 통해 영면 소식을 알게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적극적인 사전정리가 필요
전문가들은 죽음을 앞두고 운신이 쉽지 않은 상태에서 허둥지둥 정리하는 것보다는 평소에 조금씩 자신의 물건을 정리해두길 조언한다.
예를 들어 사진이나 서신과 같은 개인적인 추억의 물건을 기록물로 보고 남길 것인지, 아니면 미리 파기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이다. 본인 입장에선 자산이라 보기 어려운 것들도 물건에 따라 기증 등을 통해 활용방안을 찾을 수도 있다.
또 유품을 정리하는 사람이 힘들지 않도록 미리 조금씩 정리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한다. 유품을 정리할 사람을 미리 정해놓거나, 사전에 유품정리 부탁을 할 만한 사람과의 인간관계를 돈독히 해놓는 것도 중요하다. 결국 사후의 유품 정리는 본인이 결코 할 수 없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 일을 맡을 사람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기르던 반려동물의 처리는?
고인이 기르던 반려동물도 문제다. 반려동물의 양육이 더 이상 어려워질 때 지인들에게 분양하거나, 관련 기관에 분양을 부탁하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상당 부분은 유기견이나 유기묘로 내몰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고 누군가에 맡기는 것도 미덥지 않을 때가 있다. 비용과 함께 양육을 부탁한다 하더라도 사후에 그 약속이 잘 지켜지는지 알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관련 신탁 상품도 등장했다. 지난해 KB국민은행은 업계 최초로 KB펫신탁 상품을 출시했다. 이 상품은 고객이 은행에 자금을 맡기고 반려동물을 돌봐줄 새로운 부양자를 지정하면, 은행이 고객이 사망한 후 반료동물의 보호나 관리에 필요한 자금을 반려동물 부양자에게 일시·분할해서 지급하는 신탁상품의 일종이다. 처음 출시됐을 땐 반려견만 해당됐지만, 최근에는 반려묘까지 그 대상을 확대했다. 가입 문턱도 높지 않다. 일시금을 맡길 경우엔 200만원 이상, 월 적립식일 경우엔 1만원 이상이면 가입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