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브라보가 만난 사람]손인숙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관장, 실로 그려 나가는 실그림 인생
- “나의 실그림은 예술 혹은 창조 자체를 실행에 옮기는 나의 삶이자 나의 우주다.” 여기 자신의 혼을 온전히 실어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열어가고 있는 예술가가 있다. 예순 중반의 나이에 자수를 통한 ‘실그림’이라는 독보적인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손인숙(孫仁淑·64)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관장을 만났다. 글 김영순 기자 kys0701@etoday.co.kr 사진 전재현 사진 작가 손인숙 관장의 작품들은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9월 18일부터 6개월 동안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 초청 전시돼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한국의 멋을 서구의 예술 애호가들에게 펼쳐 보일 예정이다. 지금까지 작품 한 점 팔지 않고 이 같은 영광이 오기까지 그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삶과 예술혼이 하나로 어우러진 자기절제와 수행으로 작업정신을 펼쳐나간 실그림 거장. 예원(藝園)의 삶이 작품보다 더 감동적이다. 전통 자수의 현대적 계승을 통해 일가를 이룬 손인숙 관장과의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그의 손을 보게 됐다. 고사리 같은 손이다. 그러나 그 손이 만들어낸 예술 세계는 고되고 독보적인 영역에 있었다. 실그림이라는 그 예술 세계는 손 관장의 어머니 직계로 3대째 이르는 대를 잇는 길이기도 했다. 실그림 예술 세계의 알파이자 오메가, 어머니 “외할머니는 못 뵈었습니다. 저를 실제로 가르친 건 어머니였죠. 아버지는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일 때 돌아가셨고…. 하지만 어머니는 교육자여서, 제 소질을 계발하기 위해 제가 학교를 갔다 오면 따로 숙제를 내주곤 했어요. 그림을 그리게 한 거죠.” 손 관장의 어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로 평생 교편을 잡았던 분이다. 자수 스승이었던 어머니는 손 관장의 유년 시절부터 함께 수를 놓았고 어떤 문양인지, 어떤 색을 고를 것인지 항상 옆에서 눈으로 가르쳐주었다. 매일 매일 틈 날 때마다 수를 놓으며 지냈던 일상의 잔잔한 시간들. 일상의 사색과 자수를 대하는 자세를 배우는 인고의 시간들이 그의 작품의 원천적 에너지인 동시에 자수와 자신이 일체가 되는 아우라로 계승됐다. “나에게 자수란 어느 한 땀도 사색이 반영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어느 한 땀도 내 몸속으로부터 나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이렇듯 나의 자수에 대한 기본적 세계관은 어머니로부터 비롯됐고 주변 사물에 색과 힘을 불어넣어 줄 수 있는 자수에 대한 나의 항해 또한 어머니로부터 출발했습니다.” 손 관장의 어머니는 변화할 미래를 예견하기도 했다. 그녀의 어머니는 일찍이 미래에는 문화전쟁이 온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혜안이 있으셨어요. 어머니 말을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이해합니다. 계속적으로 문화를 창조해야 생존할 수 있는 현재가 됐기 때문이죠. 그때 어머니는 저에게 한국의 문화를 세계 최고로 만들어라, 교수도 하지 말고 인간문화재도 하지 말고 일에 미쳐 최고의 작품을 만들어 세계와 공유하라고 충고했습니다.” 한국과 프랑스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는 예술가가 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서 자수를 전공하면서부터 꿈을 현실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하게 됐고 자신감이 생겼어요. 그렇게 하다 보니 오늘이 왔습니다.” 오늘이 왔다는 것은 그가 갖게 될 영광에 대한 표현이었다. 올해한국과 프랑스의 수교 130주년이 된 걸 기념해 프랑스 국립 기메박물관에서 그의 250여 작품을 6개월 간 전시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전시회의 제목은 다. “결국은 미쳐서 해야 하는 겁니다. 똑같은 걸 만드는 건 누구나 하기 때문이죠. 나만의 세계가 있어야 해요. 제가 여기까지 올 때는 고통을 즐겼다고 보면 돼요. 고통을 고통이라고 생각했다면 답이 없었을 겁니다.” 손 관장은 작품을 하면서 밖을 나가본 적이 없다고 밝혔다. 출입을 삼가고 작업에 몰입하면서 보낸 시간은 하루에 13시간. 기메박물관의 전시 허가가 난 다음에는 사람들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그게 불가능해졌다고 하니 박물관 전시라는 사건은 공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그를 만나고 싶었던 이들에게도 다행인 일이지 싶다. 내년까지 이어지는 전시가 프랑스에 이어 영국까지 추가 예약돼 있다. 세계 인류를 위한 문화를 공유한다 손 관장의 작품 세계는 실그림을 축으로 해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로 채워지고 있다. 불교미술, 인물화, 풍속화, 민화, 산수화, 서예, 한방문화, 추상화에 이르는 그 수는 어림잡아 20여 가지. 그중에 건축까지 들어 있다니 그가 추구하는 예술적 자유로움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만들어지는 작품들 중에는 20년째 작업하고 있는 것들도 있다. 그야말로 예술가로서의 강렬한 자의식과 가치 부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들이다. 그는 조각 장인·옻칠 장인·매듭 장인·배접 장인 등 각 분야 전통 장인과 30여 년 동안 한 팀처럼 작품을 함께 만들어왔다. 자수는 그가 하지만, 목공예와 결합하거나 노리개에 응용하는 등 퓨전 작업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의 자수 작품은 목공예·목가구·보자기·장신구·함·병풍 등 21가지 장르를 넘나들고 있다. “다시 태어나도 이 일을 할 거예요. 사실 이게 고통이지만….” 그렇게 고통스럽다면서 어째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대답 또한 너무도 예술가다웠다. ‘제가 못 다한 게 너무 많아서’라는 것이다. “이걸 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모두 다 한국 문화에 기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 인류의 문화를 만든다는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개인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생각은 또한 제 어머니의 철학이기도 해요.” 그는 아직도 깊이 못 들어간 장르가 있다고 아쉬워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나면 그 못 해 본 걸 완성해보고 싶다는 것이다. 전통에 도전, 전통 자수를 뛰어넘다 이렇듯 자유롭게 사고하고 도전하는 손 관장에게 전통이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전통은 나에게 무의식적인 소재의 바다였고 의식적으로 넘어야 할 산이었으며 긴 시간의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의 대상과도 같았습니다. 동시에 나를 있게 한 존재의 근원이기도 했죠.” 악귀를 물리치고 복을 불러오는 전통 자수 문양은 그 숫자의 한계가 있었으므로 그는 좀 더 다양한 문양을 새겨 넣기도 했다. 머릿속에 떠오른 복잡하고 섬세하며 화려한 감성은 바로 색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형태뿐 아니라 패턴의 느낌만으로도 다양함이 가능하다는 것이 그녀가 다다른 예술적 지점들 중 하나였다. 그러면서도 작품 표현에서 전통 복식, 목공예, 불화와 같이 종래에 있었던 수많은 전통 예술들이 그의 예술 세계 속에서 차용됐다. “전통을 전통으로만 보면 오늘이 없어집니다. 전통에 도전해 자신만의 색을 마련할 수 있어야 예술이죠.” 그의 작품들 중에 가장 강렬하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들은 풍경화와 추상화, 그리고 그 중간쯤에 위치한 순수 창작 실그림들이다. 특히 마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린 것 같은 추상 작품들은 그녀가 색을 다루고 형상을 파괴하면서 실의 질감을 파격적으로 과감히 살리고자 한 결과물일 것이다. 힘들다고만 생각하면 끝이 없어 손 관장은 작업을 하면서 가장 힘든 때를 작업하는 장인, 즉 파트너들과 호흡이 맞지 않을 때를 꼽았다. 그가 추구하는 방향으로 함께 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 이는 공동 작업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점이다. 그러나 손 관장은 ‘힘들다’는 감정에서 멈추지 않았다. “저는 힘들다는 생각을 반대로 생각하는 습관이 있어요. 힘들다고만 하면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힘듦을 즐겨야 합니다. 과거에 물난리가 나서 작업장이 잠긴 적이 있었어요. 기가 막히잖아요? 하지만 그때 저는 손해를 손해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그리고 그 일을 마음에서 던져버렸죠. 오너인 제 입장에서 함께 일하는 그분들과 같이 힘들어 하면 안 되죠. 정말로 힘들면 그만두면 됩니다. 그리고 모든 일에 대해 토막을 잘게 끊어서 크게 붙인다는 생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과연 오너다운 말이랄까, 그는 자신을 오너로서 대함에 있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다양한 장르를 실험하느라 다양한 장인들과 함께 해야 하는 그의 작업 특성상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인터뷰 내내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 대한 감사를 표했다. “제가 하는 작업은 저 혼자서 될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에게 자꾸 감사해요.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일상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힘을 놓지 않고 살았다 “자수는 나입니다. 그리고 자수는 우주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나의 우주란 사실은 나의 일상이며 내 사고들의 집합체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자수를 시작했습니다.” 손 관장이 자신의 작품 세계의 시작을 설명하는 말에서, 예술가의 가족에 대한 생각이 떠올랐다. 예술계의 신화랄까, 예술가가 작품에 몰입해 완전히 빠지면 뒤에 남는 예술가의 가족들은 불행해진다는 이야기. 손 관장의 가족들은 그를, 쉬지 않고 만들고 있는 우주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남편은 내 예술을 기꺼이 이해해줘요. 그리고 엄마가 하는 일을 보는 딸 둘도 너무 착하고. 심지어 시댁에서도 제가 하는 일을 인정해주었죠.” 손 관장의 예술은 남편과 자식에 더해 친정과 시댁 모두가 인정하고 지원해줘 만들어질 수 있었다. 흔치 않은 집안이다. 그리고 그러한 환경이 만들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이제 세계가 인정하기 시작했다. “저는 한 번도 일상적으로 작아 보이는 것들을 가볍게 본 일이 없다고 생각해요. 그 어떤 것이라도 눈에 들어오는 것들을 내 감성으로 사로잡는 일을 소홀히 한 적이 없었어요.” 그가 설명하는 일상적이고 작아 보이는 것들에 대한 감수성에는 ‘유혹이란 상대에 대한 배려로부터 나온다’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 충실함은 한눈에는 보이지 않는 부분까지도 완성돼 있어야 한다는 그녀의 철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손 관장에게 후계자에 대해 물어봤다. 그는 실그림이라는 영역은 후계자 양성이 어려운 분야라고 선선히 밝혔다. “요즘은 둘째 딸이 내 작업을 도와주는 중입니다. 뭔가를 만드는 건 아니고 우선 제 일을 지원해주는 거죠. 4대째 예술가의 기질이요? 그건 두고봐야죠(웃음).” 그는 오전 3시부터 새벽을 열며 새벽빛을 고민하다가 상념에 한 땀을 시작하면서 일상적 우주를 어떻게 실그림으로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끊임없이 자문하고 있다. 한순간에 깨닫거나 진보하는 것이 없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실그림으로서의 예술에 대한 질문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의 작품세계에 반해 예원 실그림 문화재단 이사장직을 흔쾌히 맡은 이기수 전 고려대 총장은 수서에 자수박물관을 짓는 데 힘껏 돕고 있다. 조만간 착공될 계획이란다. 손 관장이 사는 서울 강남구 개포동 경남아파트 1층의 60평쯤 되는 갤러리에는 그의 작품과 자수 관련 민속품이 빼곡하게 모여 있다. 2009년부터 이곳에는 수많은 사람이 찾아와 그의 작품을 감상하고 작가와 이야기를 나누는 공간이 됐다. 해외에서 더 알아주는 팬클럽이 생길 정도다. 이제 우리나라 자수예술의 미를 한 단계 높이고 세계인이 모두 함께 느끼고 좋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킬 것이라는 그의 약속을 입증한 셈이다.
- 2015-10-07 10:31
-
- [브라보 라이프 인터뷰] “죽음을 다루면서 삶을 더 알차게 살게 됐습니다”
- 유재철 씨를 설명할 때는 꼭 붙는 명칭이 있다. 바로 ‘대통령 염장이.’ 최규하 전 대통령, 노무현 전 대통령을 염하고 장례 전반을 진행한 것이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전직 대통령들의 장례와 같은 국가적 행사뿐만 아니라 서경보 스님, 정몽헌 회장, 정대 스님, 법장 스님, 법정 스님, 여운계씨와 같은 큰스님들과 유명인사들의 장례도 도맡아서 진행했던 유재철 연화회 대표지만, 시작은 그저 평범한 한 명의 염장이였을 뿐이라고 그는 말한다. 어떻게 해서 그는 염습이라는 쉽지 않은 분야를 자신의 업으로 받아들이고 장인의 소명의식으로 최고 전문가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됐을까? “염습은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도와드리는 일이다. 염을 하는 그 순간만큼은 잡념이 없어지고 몰입하게 된다.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어 생각한 대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경지를 느끼는 고귀한 업으로 일한다.” 염습이라는 것 자체에 거부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아직 많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것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것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그러나 업의 험상궂은 이미지와는 달리, 유재철 연화회 대표를 처음 봤을 때 느낀 것은 맑고 순하다는 인상이었다. 그의 말속에서 자신이 맡은 일의 가치를 믿고 그 일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라 느껴졌다. 유 대표가 염장이가 된 것은 우연의 힘, 혹은 우연을 가장한 운명의 힘처럼 보인다. 경기도 광주에 고향이 있는 유 대표는 일찍이 집안 내에서 시행되던 장례에 대한 지식을 갖추고 있었고, 까다롭고 복잡한 상례 또한 낯설지 않았다. 돌아가신 가족들을 위한 염을 진행하곤 했다. 즉 장례 문화에 대해 거부감이 없었으며 염에 대해 일찌감치 익히고 있었던 것이다. 방황 끝에 발견한 ‘대통령 염장이’의 시작 그러나 경험적으로는 익숙했어도 장례를 업으로 삼고자 하는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녔다. 27살부터 사업을 시작한 그는 아파트 섀시 설치, 방화문 제작, 의류 등 닥치는대로 일을 했다. 그런데 그 어느 사업도 잘 풀리진 않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라도 광주에서 능인회라는 장의업을 하고 있던 친구들을 알게 됐습니다. 두 친구들은 불교 청년 운동에 소속된 젊은 사람들이었고 정직한 장의업을 통해 상당한 성공을 거두고 있었어요. 그래서 그들 일을 도우면서 저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에 그들의 성공을 보고 장의업을 배우겠다는 사람은 제법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유 대표처럼 직접 염을 하는 것에 적극적이고 능숙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 유 대표는 이내 친구들의 인정을 받았다. 유 대표가 염을 업으로 하게 된 것은 방황 끝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염을 배우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하게 되자 유 대표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높이기 시작했다. 전국을 돌아다니며 염을 잘한다는 사람을 만나 배움을 구한 것도 그 증거다. 각 지방마다 각기 다른 지식들이 전수되고 있었고 유 대표는 그 하나하나를 확인하고 맞추며 정돈된 염습 체계를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다. “서른 살 중반에 광주 친구들에게 석달 배워 서울에 장의사를 시작했죠. 3년을 틈나는 대로 전국을 다니며 염하는 걸 배웠어요. 막상 가서 염하는 걸 보면 참고할 수 있는 분도 있었지만 배울 게 없는 분도 있는 등 상황이 여러 가지였어요.” 당시 장의업이나 상조회사들은 서울 밖 지방에서 발달되어 있었으나 시장으로서는 역시 서울이 가장 큰 규모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상조회사들은 지방에 머무르려 하고 있었고 영업 조직만 서울에 올려 놓은 형국이었다. ‘동네 장의사’보다는 뭔가 특색 있는 장의사가 되고 싶어 종로구 견지동 조계사와 제일은행 본점 사이에서 처음 장의사를 시작한 게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침 그때 큰스님들이 많이 돌아가셨고 큰스님 장례를 한 번 치르면 손님이 수천 명씩 왔다. 이런 대규모 5~7일장을 10년 넘게 하면서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 동국대 대학원 장례문화학과를 다니기 시작한 것도 스님들과의 인연 덕분이라고 말했다. 모든 것이 도전이었던 최규하 전 대통령의 장례 염장이로서 자신을 쌓아가던 유 대표에게 마침내 삶의 전환점이 왔다. 2005년 동국대학교 대학원의 장례문화학과를 다니며 석사 학위 논문을 쓰던 유 대표는 단체장에 관한 논문 작성에 착수했다. 대통령 관련 자료는 행정자치부에서 관리하고 있었는데 모두 기밀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김구 선생 자료와 비밀 해제된 육영수 여사의 장례 자료를 입수하여 논문을 준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2006년 10월 22일 최규하 전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를 듣고 곧바로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을 찾아갔다. 뭔가 자신이 할 일이 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석사 논문 때 인연을 맺은 직원을 만나 ‘도와줄 게 없느냐’고 물었더니 ‘마침 잘 왔다’며 최 대통령 장례는 물론 2년 전 돌아가신 영부인 홍기 여사의 이장을 도와 달라고 했다. 최 대통령과 현충원에 합장하기 위해서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현직이었을 때 육영수 여사가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육영수 여사는 큰 문제 없이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죠. 그러나 최규하 전 대통령의 부인인 홍기 여사는 최 전 대통령보다 2년 먼저 돌아가셔서, 미리 장례를 치르다 보니 현충원이 아니라 원주에 있는 선산에 안장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최규하 전 대통령이 돌아가시면서 홍기 여사를 이장하여 현충원에 함께 합장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 겁니다.” 국장은 행자부에서 담당하는 일이었지만 매뉴얼은 없고 파편적인 자료들만 모아져 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유 대표는 5일장을 진행하면서 날밤을 새면서 공부를 하고 그걸 쉼 없이 적용하며 악전고투해야 했다. 갑작스러운 일들 투성이였지만 유 대표는 결국은 해냈다. “당시 최 전 대통령의 종친회도 장례 과정에 참석했었는데, 종친회에서 제안한 명정, 그러니까 관직과 이름을 쓰는 명정 문구를 봤더니 일반 양반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 전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 아닙니까? 좀 더 격이 높아야 한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임금의 명정 문구로 교체할 수 있었죠.” 세 명의 대통령을 모시고, 장례의 최고 전문가가 되다 최 전 대통령의 장례는 유 대표에게도 큰 도움이 됐다. 복사나 촬영을 불허하는 박정희, 윤보선 전 대통령 등의 장례 자료를 눈과 손으로 확인하고 익히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40여 건에 달하는 대통령과 총리의 장례 역사를 공부하여 전체 장례에 대한 지식을 통괄할 수 있게 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에게 장례 전체 일정에 대한 관리가 맡겨졌다. 그는 그때의 지식을 바탕으로 국가장 매뉴얼을 만들었다. “수원성은 건축 기록 덕분에 지금도 지을 수 있을 정도잖아요? 저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게 지금은 저밖에 없어요. 행안부가 이사를 다니면서 자료가 사라졌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지식에 대한 갈망이 만들어낸 이론의 구축과 정리,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실제로 진행한 커다란 경험들까지, 유 대표가 단숨에 최고 전문가의 자리에 오르게 된 건 우연이 만들어준 다리에 최선을 다한 그 자신의 노력 덕분이었다. 그래서 최 전 대통령의 장례 이후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장례 또한 유 대표의 관리 아래에 진행하게 됐다. 워낙 큰 일들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움직였었기에 정신이 없었지만 국가급 규모의 장례에 대한 경험이 이미 있었던 유 대표로서는 해낼 수 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만큼 사연도 많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 때, 행안부에서 노제에 쓸 만장 2000개를 준비해 달라고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우선 대나무를 구하는 게 걱정이었는데, 담양군청에 요청을 했더니 다음 날 트럭에 2000개를 실어서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만장에 쓰일 글씨는 명정을 써주신 동방대학원대학교 정상옥 총장님께 부탁 드려서 교수님들과 재학생들, 총장님 선후배들이 모여서 800장을 만들었고, 조계사 지관스님이 만장을 쓰는 모습이 방송에 나가니 전국의 서예가들이 올라 와서 하루만에 1200장을 써주셨습니다. 그런데 1500개 정도 작업을 끝냈을 때, 발인 전날 오전에 행안부에서 이유는 묻지 말고 대나무가 아니라 PVC로 만장대를 교체하라는 전달을 받았죠. 밤샘해서 겨우 발인 날 새벽에야 완성하여 시청 앞으로 가져 갈 수 있었습니다.” 노태우, 전두환 전 대통령은 국가장이 가능할까? 아직 단체장, 특히 국가장에 대해선 민감한 문제들이 남아있다. 명칭이 제각각인 건 기초적인 문제 중 하나일 뿐이다. 그에 더해 우리네 정치와 역사가 만들어낸 미묘한 사안들이 돌출될 때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국가장법을 보면 가족들이 요청하면 국가장을 치를 수 있고, 국가장을 치르면 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어요. 그런데 노태우, 전두환 두 전 대통령은 서훈이 취소되어 현충원 안장대상자에서 제외되었어요. 그런데 이분들이 돌아가시고 가족들이 국가장을 요청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그리고 국가장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가만히 있을까요?” 유 대표는 이어서 국가장이면 국가적인 공식행사인지 약식행사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흔히 국가장이면 국가적인 공식행사라고 생각하죠? 그런데 국가적인 공식행사인지, 아니면 약식행사인지를 가르는 건 애국가 제창을 하느냐 마느냐입니다. 문제는 국가장에서 애국가가 나온 적이 없다는 거예요.” 유 대표는 또한 국가장에서 종교 색채를 유지시키는 것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전세계에서 볼 수도 있는 것이 국가장인데 식순에 4대종교 의식을 굳이 보여주는 건 시간적으로 낭비라는 것. 또한 다른 종교인이 봤을 때도 불만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이었다. 장례는 엄연한 문화, ‘제대로 하자’ “우리나라 장례 문화에서 일제 문화 좀 없애고 싶어요. 특히 장례식에서 상주가 완장을 차는 건 일본 쪽 문화예요. 3.1 운동이 고종 황제 국장 치르면서 했잖아요. 그때 우리나라 사람들이 하얀 옷 입는 거에 거부감 있는 거야 일본인들이. 그래서 머리 자르고 까만 옷 입으라고 했어요. 그게 세련된 것처럼 보이게끔 선전도 했고. 그리고 모두가 까만 옷 입으니까 그 중에서 상주를 구분시킨다고 완장을 차게 한 거예요. 일제 때 했던 걸 왜 아직도 하고 있어요?” 유 대표는 인터뷰 말미로 가며 ‘제대로 하자’는 말을 거듭 했다. 그 말에서는 문화로서의 장례가 그 자체로 권위와 전통을 가질 수 있길 바라는 마음이 절실히 느껴졌다. 그것은 남들은 쉬이 가질 수 없는 극단적으로 드물고 특별한 경험들을 통해 유 대표가 얻게 된 고유한 꿈이자 마땅한 자격이기도 할 것이다.
- 2014-10-17 15:34
-
- [우리는 ‘잉여’가 아니다-갈 곳 없는 노인들④끝] 노인들 군집하는 ‘퇴적공간’ 줄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 이 시대에서 노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평균수명은 늘고 있지만 은퇴연령은 갈수록 낮아지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오늘날의 한국이다. 빈곤을 떨치기 위해 일평생을 처절하게 저항해도 나이 들어 맞닥뜨리는 것은 계속되는 빈곤에 소외까지 더해진다. 살기가 팍팍해지면서 노화는 단순히 나이로만 정의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닌 것이 됐다. 오근재 전 홍익대 교수(현 연세대 특별초빙교수)가 자신의 저서인 ‘퇴적공간’에서 지적했듯 건강한 신체와 지적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 해도 노동시장에서 퇴출되면 한 순간에 노인으로 전락한다. 노화는 한 개인이 노동시장으로부터 밀려나는 거리에 비례한다는 것이다. 이는 저성장시대에 양질의 일자리가 줄어드는 환경 속에서 누구나 노인이 될 수 있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한때 사회를 이끌어온 주역이었으나 지금은 떠밀리다시피 ‘잉여’의 존재로 전락한 그들. 청주, 인천, 안산에서 만난 노인들은 하나같이 ‘갈 곳이 없다’고 호소했다. 왜 다른 선진국에서는 볼 수 없는 노인의 군집현상이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이 문제를 남보다 먼저 고민한 오근재 교수(사진)를 통해 들어봤다. ◇전통적 가족붕괴가 노인 소외의 뿌리 “가까운 일본에는 서울의 종묘시민공원 같은 노인들만의 퇴적공간은 없습니다.” 오 교수는 한국 노인의 군집현상을 전통적인 가족제도의 붕괴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며 이같이 말했다. 일본도 에도시대 장인들 사이에 장남에게 직업을 물려주는 은퇴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일정한 연령을 기준 삼는 방식이 아니라, 언제든지 부모가 장남에게 ‘이제 맡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는 시점에 자식에게 직업을 물려주는 방식이었다. 부모는 장남의 휘하에 스스로 들어가서 가게의 일을 도왔고 은퇴한 노인들은 아들의 존경을 받으면서 세습자의 조력자로서 여생을 보낼 수 있었다. 일본의 이런 세습제는 지금도 여전히 큰 흐름이 유지되고 있다. 일본과는 달리 우리나라는 은퇴한 노인은 가정과 사회에서 배제된다. 가족제도의 붕괴로 개인의 고립이 심화되면서 노인들이 위안을 구하고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퇴적공간에 모여들기 시작했다는 것이 오 교수의 분석이다. 비슷한 처지에 놓인 수많은 이웃을 목격함으로서 안도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빠른 산업화는 가족제도 붕괴의 촉매제 역할을 했다. 산업화의 부작용으로 가족제도의 붕괴가 가속화됐기 때문이다. “서구의 산업혁명은 약 250년이라는 세월 속에서 사회적 충격을 흡수하면서 점차적으로 진행됐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지난 50년 동안에 속도 빠르게 이뤄졌어요. 지금은 세계 11위의 경제대국의 반열에 올랐지만 급속하게 사회가 변해가는 과정에서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그 충격으로 쓰러졌습니다. 현대인들은 변화의 내용보다 그 변화의 속도에 충격을 받아요. 그 결과로 지금의 노인 집합이 나타났다고 봅니다.” 소외란 원래 자기 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가 어떤 이유로 그 자리로부터 떠나 있는 현상이다. 노인의 소외는, 노인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를 잃어버리고 그 자리를 떠나게 됨으로 일어난다. 그는 “가족구성원인 노인 가족의 존경을 받으며 가정을 지킬 때 소외되지 않을 수 있다. 전통적인 가족제도에서는 그 자리가 노인의 자리였기 때문”이라며 “이런 측면에서 일차적으로 가족제도의 붕괴가 노인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더 이상 내다팔 것이 없는 노인들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오 교수는 가족제도의 붕괴뿐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의 노동력의 상실도 노인이 소외되는 중요한 이유로 지목한다.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것을 돈으로 바꾸면서 자신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살고 있는 인간은 돈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시장에 내다 팝니다. 지식도, 체력도, 몸매의 아름다움도, 심지어 감정까지도……. 사람들은 이들을 노동이라는 이름으로 시장에 내다 팔아서 동가물인 화폐와 교환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원래 인간에게 고유한 것들입니다. 인간 활동과 감정은 인간 자신의 구성물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었던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모조리 팔아서 소진되었을 때, 인간은 소외된다. 원래 자기의 것들을 모조리 팔아버려서 이제는 더 이상 팔 것들이 남아 있지 않을 때, 인간은 어느 순간 자신이 빈껍데기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마치 술병에 술이 더 이상 남지 않을 때처럼 말입니다. 이때도 그 병은 술병일까요? 자본주의 체제에서 젊음을 바쳐온 이 시대의 노인들도 마치 빈 술병처럼, 자신의 것들을 모조리 팔아버리고 아무 것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 빠져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돈이 될 만한 것을 더 이상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오 교수는 빈곤층과 노인의 소외현상을 비슷하게 평가한다. 인간은 개나 소처럼 생물학적인 존재지만 문화적 가치를 높게 친다. 때문에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모든 교환가치는 결국 문화적 가치와 연계된다. 이런 식의 가치부여가 자본주의 사회의 시장가치를 형성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빈곤층은 노인들처럼, 시장에 내다 팔가치를 지니지 못한 계층입니다. 그러므로 문화적 존재에 근접하지 못하고 생물학적인 존재에 근접한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노인들이나 빈곤층을 이루고 있는 하층계급에 속한 사람들, 이들은 원래 문화적 존재가치를 인정받으면서 살아야 마땅하며 그렇게 살고 싶은 존재들인데, 그들의 자리에서 떨어져 나와 생물학적인 존재에 가까운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복지정책은 가족관계 복원에 힘써야 오 교수는 정부의 복지정책도 가족해체와 노인소외의 중요한 이유라고 주장한다. 정부나 지자체에서 더 많은 보조금을 타내기 위해서는 가족과의 관계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현행 복지정책이 노인의 고립을 더욱 심화시키고 있다는 생각이다. 현재와는 정반대로 가족관계를 강화시키는 복지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이 오 교수의 생각이다. 그는 우리나라의 복지제도가, 어린아이든 젊은 부부든 노인이든 가족관계로부터 이탈되면 이탈될수록 지급액이 커지는 지급방식을 채택하고 있어 시간이 흐를수록 노인들을 소외시켜나갈 것이라고 예상한다. “지금의 복지제도는 인간을 개인화시키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습니다. 영유아를 집에서 엄마가 직접 양육하는 경우보다 영유아 보호시설에 위탁하는 경우에 정부나 지자체의 보조금이 많아집니다. 노인도 홀로 남아 있을 때일수록 보조금 지급액이 커집니다. 아무리 혼자 힘들게 생활하더라도 아들이나 딸이 서류상 가족관계로 남아 있으면 그들로부터 실질적으로 아무런 생활보조비를 얻어 쓸 수 없다고 하더라도 정부로부터의 복지비용은 격감합니다.” 노인들이 한 푼이라도 복지비용을 더 받으려고 자녀들과 자신의 삶이 부정하기 위해 몸부림친다는 게 오 교수의 견해다. 그래서 그는 우리 사회에서 복지정책 뿐 아니라 모든 정책이 가족관계를 복원하는 방향으로 입안되고 추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국민 개개인의 소외감을 줄이고 행복감을 증대시키기 위해서다. “이는 안보와 국가방위의 문제와도 직간접적으로 연계됩니다. 지켜야할 부모나 자식도 없고 사랑하는 이웃도 없는 국민들로 국가가 구성되었을 때, 자기의 목숨을 걸고 조국을 지킬 수 있는 개인은 흔치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노인들을 돌보는 복지센터와 같은 곳도 가정을 지원할 수 있도록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복지센터는 ‘상처 싸매기’와 같은 대증요법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 보다 바람직한 일은 노인들이 가정으로부터 더 이상 시가지를 배회하지 않도록 새로운 복지정책을 만드는 것이다. “법의 정신은 마침내 법 없는 사회를 추구한다는 말처럼, 길거리에서 소일하는 노인들의 숫자가 줄어들어 노인복지센터가 쓸모없는 기구가 되는 날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저는 복지정책의 입안자도 시행기관의 관리자도 아니지만 보다 길고 인내를 요구하는 정책을 세우고 이를 시행해나가야 한다고 보는데……. 이러한 일을 공약으로 내거는 정치집단이나 정치가는 없겠죠. 그러한 공약으로는 표를 얻어낼 수 없을 테니까요.” 오 교수는 노인만을 위한 공간이 사라지고 우리 모두가 어우러지는 공간을 꿈꾼다. 분리되고 격리돼 있기 때문에 ‘노인만을 위한 공간’이라는 꼬리표가 붙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방황하는 노인들의 군집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그 만큼 불확정성이 높은 사회라는 지표이기도 하다. “노인만을 위한 공간이란, 그것이 아무리 좋은 시설, 좋은 운영시스템을 지녔다할지라도, 그것은 우리 사회의 주류로부터 격리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 사회가 분류되고 찢기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두가 어울려 사는 사회가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나가야 할 바람직한 사회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 2014-04-22 16:29
-
- 탑골미술관 1주년 기념, 전통 불화(佛畵) 전시 열려
-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 임석환 불화장(69)의 전통 불화 정신을 계승하다 종로구 경운동에 위치한 탑골미술관(관장 희유)은 탑골미술관의 개관 1주년을 기념하여 오늘부터 5월 21일(수)까지 기획전 ‘불화(佛畵), 전통으로 피어나다’를 연다. 불화(佛畵)란, 사찰전각에 걸려 있는 각종 탱화를 비롯하여 부처님의 일대기, 설법장면, 경전 내용, 사찰의 전설 등을 알기 쉽게 그림으로 표현한 것을 말한다. 이번 전시는 오늘날 급격한 변화의 시대에서 고유의 전통문화가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에 전통적 기법을 이어받은 불화를 새롭게 조명해보려는 움직임에서 시작되었다. 즉 불화(佛畵)가 불교 교리와 의미를 고도로 압축하여 표현한 종교적 색채를 띤 그림이지만, 넓게 본다면 우리나라에 불교가 들어온 약 1800년 전부터 계승된 우리 고유의 미술이자 전통문화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불화와 그 속에 면면히 이어져온 전통적인 문화에 대한 감각, 미술에 대한 전수에 대해 관객들과 소통하고자 마련됐다. 단청장이면서 불화장 이번 불화전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18호인 임석환 선생과 그 제자들의 작품으로 구성됐다. 선에서 선으로 이어지고, 면으로 채워 또 선으로 마무리하는 섬세하고도 화려한 불화의 그 장엄함을 표현한 임석환 선생은 故혜각스님으로부터 단청을, 故혜암스님으로부터는 불화를 배운 장인이다. 임석환 선생은 2005년 무형문화재 단청장으로 지정받았으나, 그 내용과 기법의 단청과는 다르다고 판단되어 2006년에야 분리되어 불화장으로 지정됐다. 이번 불화전은 특별한 만남이 기다리고 있다. 임석환 선생의 스승인 故혜암스님께서 1920년대 처음 기초 과정을 공부하시면서 그렸던 습화(習畵)와 그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초(草)가 함께 전시된다. 이 ‘습화’와 ‘초’는 전시로는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이기 때문에 전통미술과 전통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귀한 자료를 만나볼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될 것이다. “불화는 붓 손질 한번, 선 하나에도 정신과 혼을 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부처님의 자비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불화를 그리는 사람들은 이를 생계의 수단으로 생각하기보다 수행의 자세로 다가가야 한다. 그래서 시대의 문화재를 그린다는 생각으로 열정과 정성을 다해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임석환 선생의 말처럼 장엄하고도 혼이 담기는 불화가 그려지는 장면을 바로 눈 앞에서 접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또한 4월 9일(수)부터 4월 20일(일)까지는 다양하고 화려한 전통문양을 부채에 직접 그려보거나 자신의 띠에 맞는 십이지신을 액자에 그려볼 수 있는 체험도 진행된다. 임석환 선생의 불화장 시연은 4월 11일, 12일, 13일 오전(10시~12시)과 오후(2시~4시)에 진행될 예정이다. 복지와 미술이 함께하는 탑골미술관을 운영하는 서울노인복지센터 관장인 희유(希有)스님은 “불화를 그린다는 것은 고도의 집중력과 혼을 담으려는 고집과 그 시대를 통찰하고 표현하는 혜안을 필요로 한다”며, “이번 전시에서는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초와 스승의 습화를 바탕으로 그 전통이 계승되어온 현장을 많은 분들과 함께 하길 바란다”고 밝혔다.
- 2014-04-08 17:24
-
- 마도로스 심장ㆍ파일럿 정신 담은 ‘손목위 동반자’
- IWC Schaffhausen은 영원불멸의 클래식하고 지적인 디자인, 그리고 그 속에 숨어있는 최고의 기술력이 빛나는 스위스 시계 브랜드다. 1868년 창립 이래 장인의 완벽함과 혁신적인 기술력을 대변해오고 있다. 멈추지 않는 IWC의 혁신은 140년 이상의 전통과 조화를 이뤄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는 ‘프로버스 스카프시아(Probus Scafusia; 샤프하우젠의 정교하며 신뢰할 수 있는 장인 제조 기술)’이라는 철학 아래 많은 역사적 시계들을 탄생시켰다. 모든 IWC 시계에 새겨져 있는 ‘프로버스 스카프시아’ 마크는 “최고가 아니면 만들지 않는다”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상징하는 IWC의 약속이다. ◇파일럿 전문 시계에서 출발·최초 손목시계= IWC의 역사는 보스턴 출신의 미국인, 플로렌타인 아리오스토 존스에서 시작된다. 그는 이상주의와 날카로운 사업 통찰력을 적절히 갖춘 워치 메이커였다. 그는 현대적인 미국 제조 기계를 사용해 정확한 포켓 워치 무브먼트 제작에 집중했다. 이는 당시의 저임금 경제인 스위스에 시계의 혁명을 일으켰다. 그렇게 존스는 1868년 샤프하우젠에서 사업을 시작하면서 IWC라는 회사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IWC는 1884년 디지털 디스플레이가 장착된 포켓 시계를 처음으로 선보이면서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최초로 손목시계를 만드는 작업에 성공하면서 1899년에는 글로벌 리더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IWC는 세계 최고의 기술과 자부심으로 다양한 타임피스 라인들을 탄생시켜왔다. 1970년대 독일계 회사인 VDO가 IWC를 인수한 뒤에도 전통적인 기계식 시계 제조방식을 고수해 기술적으로 까다로운 남성용 기계식 시계 부문에서 입지를 굳건히 이어갔다. ◇IWC의 장인정신… 높은 완성도와 희소성= IWC의 매력은 역사와 장인정신, 그리고 기술력이다. IWC 무브먼트를 한 번이라도 접해본 사람들이라면 IWC의 세심하고 정직한 장인정신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는 IWC의 모토 ‘프로버스 스카프시아’를 그대로 보여주며, IWC의 광고 캠페인 ‘엔지니어드 포 맨(Engineerd For Men)’처럼 기계적 기기에 대한 감성을 자극한다. 하이 컴플리케이션 시계는 모두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이 과정을 얼마나 정교하면서 숙련된 기술로 해내는가가 그 브랜드의 기술과 생산력을 얘기하는 척도가 된다. 뛰어나고 복잡한 기능을 가진 시계를 몇 개월에 걸쳐 단지 몇 개만 생산해내는 일은 많은 시계 브랜드가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하이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상용화할 수 있는 수량으로 일정하게 생산하면서 브랜드의 가치관에 따라 수량을 조절할 수 있는 브랜드는 그리 많지 않다. IWC 테크니션들은 약 1주일도 걸리지 않는 시간에 생산을 완료한다. 높은 완성도를 자랑하며 희소성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생산 수량을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다. 이 것이 바로 기술력이며, 이는 IWC의 자부심이다. ◇6가지 시계 콜렉션과 스토리= 또 다른 IWC의 매력은 전혀 다른 디자인의 6가지 시계 콜렉션을 가지고 있고, 그 각각의 콜렉션에는 풍부한 스토리가 담겨있다는 것이다. 콜렉션은 △다빈치의 천재성을 시계와 오버랩 시킨 ‘다빈치(Da Vinci)’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세계 최초의 항해 전문시계 ‘포르투기즈(Portuguese)’ △파일럿의 역사와 함께한 진정 파일럿을 위한 ‘파일럿 워치(Pilot's Watch)’ △대지의 강인함에서 기인한 기술력의 표본인 ‘인제니어(Ingenieur)’ △다이버를 위한 최고의 오토매틱 매케니컬 시계의 위치를 지켜나가는 ‘아쿠아타이머(Aquatimer)’ △이탈리아의 휴양지 포르토피노의 여유를 담은 ‘포르토피노(Portofino)’ 등이다. IWC는 1885년부터 생상된 모든 시계에 대한 데이터 관리를 하고 있다. 모든 시계의 칼리버 무브먼트 번호, 소재, 케이스 번호가 기입된다. 최근 모델의 경우, 시리얼 번호까지 상세하게 기록된다. 이러한 기록을 통해 IWC는 그 오랜 기간 동안, 어떤 시기에 제작된 시계이든지 유형에 따른 분해수리가 가능하다. 예를 들어 ‘존스 칼리버’와 같은 초창기 제품들도 현재도 유지, 보수 관리되고 있다. 기계식 무브먼트는 정기적인 유지보수가 필수다. IWC의 방대한 교체 부품 창고에는 심지어 19세기에 만든 시계의 부품도 보유하고 있다.
- 2014-03-06 11:31
-
- [퍼스트 클래스 스토리] 로얄 코펜하겐, 1197번의 붓질로 완성되는 덴마크 왕실 도자기
- 로얄 코펜하겐(Royal Copenhagen)은 1775년 덴마크의 줄리안 마리 황태후(1729~1796)의 후원으로 설립된 곳이다. 장인 정신이 돋보이는 예술적 제품으로 지난 238년 동안 덴마크 왕실을 비롯한 전세계 명사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특히 뛰어난 공예술로 인정받고 있는 ‘플로라 다니카(Flora Danica)’와 총 1197번의 붓질을 통해 완성되는 ‘블루 플레인(Blue Plain)’은 장인들의 자부심이 그대로 전해지는 품격을 갖춘 제품으로 평가된다. 덴마크에서 로얄 코펜하겐은 하나의 도자기 브랜드를 넘어 국가를 상징하는 문화 유산이자 자부심이다. 단순히 도자기 제품을 생산하고 판매하는 회사가 아니라 문화산업에 기여하는 기업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동 시대 예술가들과 협업해 ‘메가(Mega)’, ‘엘레먼츠(Elements)’를 출시하며 끊임없이 혁신을 추구하고 있다. ‘Everyday Luxury(일상에 럭셔리를 담다)’라는 슬로건과 함께 명품의 예술적 가치를 일상 생활에서 전달하고 있는 로얄 코펜하겐은 전 세계 30여 개국에서 만나볼 수 있다. 한국에는 지난 1994년에 한국로얄코펜하겐이 설립되어 전국에 16개 매장을 보유하고 있다. ◇일상에 럭셔리를 담다… 로얄 코펜하겐의 탄생= 18세기 유럽 귀족들은 금, 은, 주석 등의 금속 재질 식기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었다. 그러다 실크로드를 통해 자기가 아시아에서 수입되었고, 귀족들은 하얗고 매끈한 표면의 도자기를 ‘하얀 금’이라 부르며 귀하게 여겼다. 이 시대에는 도자기 생산 여부가 강대국 판단의 기준이 되기도 했다. 당시 자기 공장들은 각 국의 기술 수준을 나타내는 척도였고, 유럽인들은 자국 공장에서 생산된 화려한 화기와 식기류를 선물로 교환하며 사회적 신분을 드러내는 상징물로 사용했다. 당시 유럽은 기술 부족으로 백자처럼 희고 매끄러운 재질의 자기를 만들어 내지 못했고 질그릇 수준의 도자기 제작에 만족해야 했다. 1710년대 마이센(Meissen) 도자기 공장이 자기 제작 기법을 알아냈으나 제작 기법을 오랫동안 비밀로 유지하고 있었다. 1770년대 초반에는 자기의 원료가 널리 알려지고 관련 책들이 발행됐지만 자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불가능했다. 광물학 전문가였던 약제사 프란츠 하인리히 뮐러는 1770년 초부터 실험을 시작해 석영, 고령토, 장석을 이용해 경질 자기라 불리는 중국 도자기를 만드는 비법을 알아냈다. 훌륭한 품질의 자기를 자체적으로 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한 것. 이후 1775년 덴마크의 줄리안 마리 황태후와 그녀의 아들이자 왕세자인 프레데릭이 로얄 코펜하겐을 설립했다. 로얄 코펜하겐의 최초 공장인 덴마크 왕립 자기 공장은 약 100년간 왕족에 의해 운영되어 오다가 1868년에 민영화됐지만 여전히 덴마크 왕실의 이름과 특권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다 1884년 알루미나(Alumina) 도기 공장과 합병되면서, 코펜하겐의 교외에 위치한 프레데릭스베르의 새 부지로 이사했다. 1885년에는 화가이자 건축가였던 아놀드 크로그(1856-1931)가 아트 디렉터로 임명되면서 ‘블루 플루티드(Blue Fluted)’ 제품에 언더글레이즈 기법(유약 아래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발전시킨 새로운 기법을 적용했다. 풍경을 묘사하고 자연주의적 채색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기법의 자기는 1889년 파리에서 열린 만국 박람회에 전시됐고, 이후 로얄 코펜하겐은 언더글레이즈 기법을 적용한 자기 생산을 계기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빙앤그론달은 1853년에 설립된 자기 공장으로, 로얄 코펜하겐과 경쟁을 펼치다 1987년에 로얄 코펜하겐그룹으로 인수됐다. 로얄 코펜하겐은 약 두 세기가 넘는 오랜 기간 동안 덴마크를 비롯한 전 세계 가정에 예술, 전통 그리고 장인 정신을 전하고 있다. ◇오버글레이즈로 탄생한 플로라 다니카= 플로라 다니카는 오버글레이즈 채색 기법의 가장 뛰어난 예술성을 보여주는 한 예로, 로얄 코펜하겐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제작되고 있다. ‘오버글레이즈(Overglaze)’란 전문용어는 가마에서 재벌구이를 한 후에 채색하는 것을 말한다. 결과적으로 채색이 된 자기를 섭씨 850도에서 한 번 더 구워 염료가 녹아 유약과 융합되도록 한다. 금 장식은 구운 직후에는 매트하고 무뎌 보이나 유리 붓이나 사포로 다듬은 후에는 빛나는 광택으로 나타난다. 플로라 다니카 제품은 하나 하나가 상당량의 작업에 따른 결과물로, 수많은 손을 거쳐 완성된다. 톱니 모양의 가장자리는 보통 자기 점토가 아직 부드럽고 유연할 때 수작업으로 잘라내어 모양을 만든다. 과일 바구니와 아이스 돔과 같은 아이템을 조각할 때도 마찬가지다. 이는 극도의 인내력과 정확성을 요구한다. 자칫 작은 실수가 하나라도 생기게 되면 되돌릴 수가 없게 된다. 숙련된 장인은 하루에 약 하나에서 한 개 반의 과일 바구니를 재단할 수 있다. 구멍을 뚫은 후에는 가장자리를 물을 묻힌 작은 붓으로 매우 조심스럽게 다듬어 모든 부분의 울퉁불퉁한 부분이 완전히 사라지도록 매끄럽게 만든다. 뚜껑, 덮개, 손잡이에 달려 있는 꽃 가지들은 꽃잎 한 장, 수술 하나까지 다 수작업으로 만들어진다. 가끔 수술이 워낙 작은 탓에 핀 끝을 이용해 꽃 위에 올려놓기도 한다. 이 작업이 끝나게 되면 아직 채색되지 않은 플로라 다니카 아이템들을 초벌구이를 한 후 유약을 바르고 1430도 온도에서 재벌구이를 한다. 이 공정들은 200여년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가이드라인을 면밀히 따른다. 젖은 상태의 부드러운 자기 점토를 단단하고 투명하게 빛나는 흰색의 자기 제품으로 변모시키는 공정은 위태롭기 때문에 자기를 제대로 지지해주지 않으면 굽는 동안 무너지거나 모양이 변형된다. 회사 관계자는 “플로라 다니카에는 2등급 제품이란 없다. 작은 실수 하나라도 발견되면 그 제품은 가차 없이 폐기해야만 한다”며 “200여년 전 그랬던 것처럼 오늘 날 플로라 다니카를 완벽하게 생산해내는 것은 팀 내의 협력과 최고의 예술성 간의 상호작용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 2014-02-17 10:44
-
- [퍼스트 클래스 스토리] 까르띠에, ‘세기의 결혼식’ 완성시킨 ‘왕의 보석’
- 보석과 오브제 아트의 세계 최고의 디자인·제조 업체로 널리 알려진 까르띠에는 167년의 역사를 지닌 브랜드다. 파리의 한 보석상의 숙련공이었던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가 1847년, 그의 주인이었던 아돌프 피카르로부터 파리 몽토르겨이가 29번지, 보석 아뜰리에를 인수 받으면서 시작된 까르띠에. 루이 프랑수아 까르띠에는 그의 이니셜인 ‘L’과 ‘C’로 둘러싸인 하트와 마름모꼴을 그의 장인 마크로 등록한다. 바로 이것이 까르띠에 하우스의 탄생, 기나긴 러브 스토리의 시작이었다. ◇영국 황실의 보석상= 1899년 까르띠에는 보금자리를 옮겨 뤼드라뻬 13번지에 작업장을 연다. 이때부터 알프레드는 그의 세 아들에게 까르띠에 하우스의 해외 경영을 맡김으로써 국제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루이 조제프(1875~1942)는 파리를 맡고, 자끄 떼오뒬(1884~1942)은 런던, 삐에르 까미유(1878~1964)는 뉴욕에 각각 터를 마련해 사업 영역을 넓혀간다. 일찍이 영국의 에드워드 7세로부터 ‘왕의 보석상, 보석상 중의 왕(Jeweler to kings, king of jewelers)’이라는 칭송을 받은 까르띠에는 세대를 거듭할수록 보석상으로서의 명성을 높여 갔다. 에드워드 7세는 1902년 자신의 대관식을 위해 27개 티아라 제작을 맡기기도 했다. 이후 에드워드 7세는 까르띠에를 최초로 ‘영국 황실의 보석상’으로 임명했다. 영국 황실의 보석상으로 임명 받은 이후 까르띠에는 스페인, 포르투갈, 러시아, 시암(현 태국), 그리스, 세르비아, 벨기에, 루마니아, 이집트, 알바니아 왕실과 오를레앙 일가, 모나코 공국으로부터 그와 비슷한 자격을 부여받았다. ◇명작 ‘트리니티’의 탄생= 오늘날 까르띠에를 있게 한 최고의 작품 ‘트리니티’는 창업자의 손자 루이 까르띠에가 1924년 친구인 시인 장 꼭도를 위한 반지를 만들어 선물한 순간 시작됐다. 이 반지는 까르띠에의 심볼이자 뮤즈로 자리 잡아 현재까지도 전 세계에 걸친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화이트골드, 옐로우 골드, 핑크 골드 3가지 색 골드의 환상적인 하모니, 우아한 소용돌이를 만들어내는 특별한 반지 ‘트리니티’는 세 개의 밴드가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우아함을 표현하는 까르띠에의 명작으로 꼽힌다. 손목 위에 핀 불멸의 사랑, 까르띠에의 또 다른 명작 ‘LOVE(러브)’ 팔찌는 1969년 탄생했다. 뉴욕 작업장에서 디자이너 알도 치풀로는 진정한 사랑을 표현하는 남녀공용 팔찌를 제작했다. 팔에 일단 이 팔찌를 끼운 다음 특수 제작된 스크류 드라이버를 이용해 영원히 빠지지 않도록 고정했다. 중세의 기사가 아내에게 매단 정조대에서 힌트를 얻었다. 이 디자인은 주얼리를 몸에 걸치는 방식에 혁명을 불러왔다. 팔찌는 더 이상 옷이나 그 날의 활동에 맞춰 선택하는 액세서리가 아니게 됐다. 까르띠에 ‘러브 브레이슬릿’은 전용 드라이버가 있어야만 착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혼자서는 착용할 수 없다. 러브 콜렉션의 상징인 스크류 모티브 부분에 다이아몬드가 총 4개 세팅돼 있다. 팔찌의 인기에 힘입어 반지 ‘러브 반지(LOVE Ring)’도 탄생했다. 이들은 이제 전 세계 까르띠에 소비자들의 영원한 사랑을 상징한다. 러브 반지 역시 까르띠에의 대표적인 문양인 스크류 문양이 새겨져 있다. 핑크골드 컬러로 다이아몬드가 3개 세팅돼 있다. ◇세계 최고의 보석상 까르띠에의 장인정신= 보석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예술적 영감으로 만들어낸 까르띠에 하우스의 장인정신은 그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수많은 매력적인 제품들로 전 세계를 사로잡고 있다. 하나의 보석 작품이 탄생하기까지 까르띠에 하우스는 수많은 단계를 거친다. 까르띠에의 예술적 영감을 통해 생성되는 모티브의 콘셉트는 처음에는 단어로만 존재한다. 무수한 스케치와 회의, 수정의 반복 과정을 통해 레이아웃이 만들어지고 본격적인 제작 단계에 들어간다. 여러 색의 왁스로 테스트용의 기초적인 형태를 제작해 아이디어를 더욱 구체화한다. 석회 주물, 연마과정, 광택과정, 양각세공과정, 비늘 세공, 브러싱 공정, 보석의 세팅 과정 등을 거치게 되며, 각 과정마다 또 다시 수많은 검사와 수정이 이루어진다. 까르띠에의 모든 작업은 자연광을 이용한 스튜디오에서 이루어진다. ◇액세서리에서 ‘시계의 명가’로도 부상= 보석으로 유명한 까르띠에는 사실 창립 초창기부터 손목시계 제조사로서도 명성이 높았다. 한 세기를 훌쩍 넘긴 세월 동안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류의 시계를 선보였지만, 그 중에서도 ‘산토스(Santos)’와 ‘탱크(Tank)’는 까르띠에가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대표 컬렉션이다. 까르띠에가 시계를 생산하게 된 것은 알프레드 까르띠에의 아들, 루이 까르띠에에 의해서였다. 시계 디자인과 제조 기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루이는 까르띠에만의 보석 디자인, 세공을 응용해 벽시계, 탁상시계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1923년에 최고의 예술미와 기술이 조화를 이룬 ‘포르티끄 미스터리 클락(Portico mystery clock)’을 제작, 특허권을 따내기도 했다. 당대 최고의 시계 전문가들과의 공동작업을 통해 기술적인 완성을 더해오던 까르띠에는 시계 전문가인 모리스 코우와 함께 미스터리 클락의 성능을 개발, 향상시켰다. 1907년에 에드몬드 예거와의 공동작업으로 특허권을 딴 손목시계 버클은 시계 제조 역사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까르띠에의 탁상시계와 손목시계는 대부분 왕실, 귀족, 대부호를 위한 것이였다. 때문에 최고의 디자이너, 시계 기술자, 감정사, 세공 전문가, 광택 전문가들의 손과 최상의 소재가 사용됐다. 이러한 엄격한 소재 선택과 완벽한 세공, 제조 기술은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 현대에 접어 들면서 까르띠에는 여러 라인의 시계를 개발해 전 세계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 2014-02-06 15:40
-
- [퍼스트 클래스 스토리]밀레, 세계의 주부 허리 펴게 한 명품 독일가전
- “내 아들도, 내 손자도 세탁기를 만들고 청소기를 만들 것이다. 100년 후에도 200년 후에도 밀레는 가전회사다.”(창업자 칼 밀레의 4대손 마르크스 밀레 회장) 한 번 사면 20년 이상 사용할 수 있는 뛰어난 품질력. 밀레는 ‘가전업계의 벤츠’로 불리고 있는 독일 명품 가전회사다. 1899년 칼 밀레와 라인하르트 진칸 두 사람이 공동 설립했다. 현재 전세계 40여개국에 지사를 거느리고 있으며, 창업자 4대손인 칼 마르크스 밀레 회장과 라인하르트 진칸 회장이 공동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창업 이래 115년 동안 밀레가 명품 브랜드로서의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비결은 창업자인 칼 밀레 이래 4대에 걸쳐 체계화된 ‘Immer Besser(지금보다 더 나은)’ 정신을 들 수 있다. 밀레가 말하는 ‘Immer Besser’은 투명한 가족경영 체제 아래 ‘장인정신’을 바탕으로 지금보다 더 나은 제품을 만들며 ‘Made in Germany’의 명성을 잇는 것이다. ◇더 나은 여성의 가사를 위해… ‘모델A’ 개발= 창업자 진칸과 밀레는 무엇보다도 어떻게 하면 여성들의 가사를 도울 수 있을까 고민했다. 연구 끝에 1903년 상하운동 추로 교반기를 작동해 세탁을 한결 수월하게 만든 세탁기 ‘모델A’를 개발했다. 이를 계기로 1911년 밀레는 최초의 전기구동 탈수장치가 장착된 목조형 세탁기를 개발했다. 목조형 세탁기는 과거 손으로 직접 세탁기를 돌려야 했던 여성들의 수고가 사라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성공에 힘입은 밀레는 1912년 자동차 생산에도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대규모 자금투자가 불가피해짐에 따라 무차입 경영을 추구하는 경영원칙에 따라 과감히 중단했다. 이후 밀레는 생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가전제품에 개발을 집중하면서 1925년 최초로 석탄으로 가동되는 드럼세탁기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이 제품은 상업시설에서도 사용 가능한 충분한 용량으로 의류건조기와 함께 호텔, 음식점, 병원 등에서도 널리 적용됐다. 이어 1927년에는 양동이 형태의 밀레 최초의 진공청소기(모델명 L)를 출시했다. 이 제품의 디자인은 오늘 날의 진공청소기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자전거와 오토바이 수요가 감소하자 1960년부터는 스포츠용 모터자전거 생산을 마지막으로 이륜차 사업을 중단하고 가전사업에 전념하게 된다. ◇가족 경영의 살아있는 교본이 되다= 밀레는 1899년 창립이래로 공동 창업자인 진칸(Zinkann) 가문과 밀레(Miele) 가문이 번갈아 가며 4대째 가족 경영체제를 이어오고 있다. 두 가문이 100%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으며, 밀레 가문이 51%, 진칸 가문이 49%를 소유하고 있다. 두 가문은 공동으로 경영한 지난 115년 동안 철저한 역할 분담과 협력 정신으로 단 한 번도 경영권 다툼을 벌인적이 없다. 한 세대를 거칠 때 마다 한 집안이 독주하는 것을 막기 위해 기술부문과 경영부문의 대표를 번갈아 맡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밀레는 후계자 승계 방식도 독특하다. 후계자는 양 가문에서 수 십여명이 경합을 거쳐 최종 후보를 선정한다. 최종 후보에 오르게 되면 4년 이상 다른 회사에서 경영 실무를 쌓은 뒤, 6명의 심사위원 앞에서 업무능력 시험과 최종 면접을 거쳐 후계자로 선정된다. ◇독일 가전을 지킨 장인정신= 밀레는 제품의 품질을 위해 독일에서 생산하는 것을 원칙으로 ‘Made In Germany’를 고집하고 있다. 생산공장은 총 10곳으로 이 중 9곳은 독일에 있으며, 나머지 1곳도 같은 문화권인 오스트리아에 위치해 있다. 세계에서 두 번째라는 높은 임금 수준에도 불구하고 이 원칙을 고집하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 만든 제품은 본사에서 그 품질을 확인할 수 없으며, 생산과정을 일일이 감독하기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기초가 튼튼한 엔지니어링 기술은 밀레의 가장 오랜 전통이자 자랑이다. 품질을 위해 최소 20년 수명에 맞게 1만시간의 성능 테스트를 거친 제품 만을 시장에 선보인다. 현재 밀레의 1만6000여 임직원 중 25년 이상 근속사원은 약 1만여명(전체 60%)에 달한다. 이 중에는 40년 혹은 50년이 넘은 직원도 있다. 심지어 3대, 4대째 대를 이어 근무하는 가정도 있다. 일례로, 최근 50년 근속 사원상을 수상한 폴 퍼레본씨는 그의 할아버지가 30년, 아버지는 42년간 밀레에서 근무하는 등 3대를 합치면 무려 120년 이상을 밀레에서 근무했다. 회사 측은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직원들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최고 품질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자신했다. ◇기능성과 안전을 우선한 디자인= 밀레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함보다 기능성을 최대한 살리는 디자인에 중점을 둔다. 모든 제품이 20년 수명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오래도록 질리지 않는 세련된 외관과 보이지 않는 기능성을 살릴 수 있는 디자인을 추구하는 것. 특히 라인만 봐도 밀레 제품임을 알 수 있도록 디자인의 고유성을 유지해오고 있다. 청소기를 제외한 모든 제품은 백색을 고집하지만, 제품 내부에 들어가는 부품의 디자인은 변화를 거듭한다. 밀레의 디자인 센터는 제조설비가 있는 공장 내에 있고, 생산설비와 함께 800여명의 디자인센터 직원들이 연구와 개발을 진행하고 있다.
- 2014-01-23 17:12
-
- [퍼스트 클래스 스토리]롤렉스, ‘완벽한 1초’… 말 그대로 시계의 역사
- 롤렉스의 전통은 ‘완벽의 추구’라는 장인 정신에 의해 이어져 내려왔다. 롤렉스가 추구하고자 하는 길은 완벽한 품질의 시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오직 품질로만 승부한다’는 창업자 한스 빌스도르프(Hans Wilsdorf)의 경영 철학 아래 품질과 전통의 가치, 참신함 그리고 기술적인 혁신의 완벽한 조화는 롤렉스의 영속성을 지켜나가는 비결이다. 그러한 롤렉스 철학이 바로 세계 최초의 손목시계와 방수시계를 만들었고, 전 세계인들에게 최고의 시계 브랜드로 사랑을 받고 있는 원동력이다. ◇손목시계 제조의 역사를 이끌다= 장인 정신과 혁신적인 기술력으로 20세기 시계 제조의 역사를 전환시켜온 롤렉스. 세대를 초월한 전통, 고결함, 품위의 가치를 추구하는 롤렉스의 역사는 1900년대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24세의 나이로 런던에 시계 전문 유통회사를 설립했던 바바리아 출신의 사업가인 한스 빌스도르프는 회중시계가 주류였던 당시, 손목시계의 미래를 이미 예견하고 있었다. 그는 조심성이 많은 대중들에게 안정성을 보장하고 손목에 착용할 만큼 소형 시계를 제조하기 위해 스위스에서 제조된 높은 정확도의 무브먼트(Movement)를 장착시켰다. 이렇게 탄생한 손목시계는 유행에 민감한 남녀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빌스도르프는 그의 창조물에 누구나 발음하기 쉬운 ‘롤렉스(Rolex)’라는 브랜드 명을 부여했다. 그는 시계 무브먼트의 정확성과 품질 개발에 초점을 뒀다. 1910년 스위스에서 손목시계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인 크로노미터 인증을 획득했고, 1914년에는 그 당시 항해용 큰 시계에만 크로노미터 인증을 수여하던 영국의 큐(KEW) 천문대로부터 손목시계로는 처음으로 A등급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았다. 이후 손목시계는 정확성과 동의어가 됐다. ◇세계 최초의 방수·태엽시계= 빌스도르프는 1926년 시계의 안정성을 향상시키고 전 세계에 롤렉스 제품의 우수성을 보여주려는 노력으로 ‘오이스터(Oyster)’라는 이름의 세계 최초의 방수·밀폐·먼지 방지 시계를 개발해 특허를 획득했다. 런던의 속기사였던 메르세데스 글릿즈가 두 번째로 1927년 영불 해협을 헤엄쳐서 횡단한다는 소식을 접한 빌스도르프는 그에게 방수 시계인 오이스터를 협찬했다. 글릿즈는 15시간 15분에 걸쳐 영불해협 횡단에 성공했고, 시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이는 시계 업계의 신화가 됐다. 이 이야기는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롤렉스에 대한 수많은 증언의 시작일 뿐이며 그들의 탐험과 용기는 롤렉스 브랜드의 우수성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게 됐다. 이후 빌스도르프는 데일리 메일(Daily Mail) 전면에 방수 손목시계의 성공을 홍보하고 오이스터를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주력했다. 오이스터는 곧 또 다른 탁월한 기능을 갖게 된다. 1931년 손목의 움직임으로 태엽이 감길 수 있도록 해 시계가 영구적으로 작동하는 자동 태엽 메커니즘의 원조가 되는 영구 회전자(Perpetual rotor)를 개발한 것이다. 이 때부터 수동 시계는 시대의 뒤편으로 물러나게 된다. 이후 1945년 최초의 자동 날짜 표시 기능이 있는 최초의 크로노미터 시계를 비롯해 1953년 최고 100m의 깊이로 방수·반압 기능을 갖춘 ‘서브마리너(Submariner)’에 이르기까지 발전을 거듭한다.
- 2014-01-16 11:09
-
- [퍼스트 클래스 스토리] 벤틀리, 장인정신 100년…여왕도 반한 ‘브리티시 모터링’ 정수
- 눈에 보이는 것만을 추구하지 않고 자동차의 본질과 고유의 품격을 지켜온 영원한 명차 벤틀리모터스. 벤틀리는 100여년이라는 역사 속에서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고유의 철학을 계승해 오며, 오늘 날까지 세계 최고의 명차로 인정받고 있다. 파워풀한 주행성능과 고유의 품격이 이상적인 조화를 이뤄낸 자동차 이상의 자동차, 벤틀리는 단순히 호사스러움만을 추구한 럭셔리카는 아니다. 궁극의 주행 성능을 발휘하면서도 동시에 안락함을 보장하고, 어떤 브랜드와도 비교할 수 없는 고유한 품격마저 지녔다. ◇벤틀리의 탄생 ‘스피드광 벤틀리 형제’= 벤틀리의 역사는 스피드광인 월터 벤틀리와 동생인 호레이스 벤틀리가 1912년 자동차 회사를 설립하면서 시작된다. 처음에는 기술력이 부족해 자체 제작 차량을 판매하지 못하고, 프랑스의 DFS 모델을 수입해 판매하는 것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월터는 DFP 엔진을 직접 튜닝해 자동차 경주에 참여했고, 좋은 성적을 거두자 본격적인 자동차 생산에 착수했다. 이후 1919년 벤틀리의 첫 모델이 탄생했다. 벤틀리 최초의 자동차 ‘3리터(3-liter)’는 진보된 기술과 내구성으로 인해 출시되자 마자 경주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며 인기를 끌었다. ‘3리터’는 섀시에 직렬 4기통 엔진을 장착하고, 그 위에 고든 크로스비(Gordon Crosby)가 디자인한 보디를 얹은 모델이었다. 고든 크로스비는 재규어의 ‘leaping cat(뛰는 고양이)’ 모양 라디에이터 장식물을 만든 인물로 당시 벤틀리의 엠블럼 ‘날개 달린 B’ 배지를 그린 주인공이기도 하다. ◇고성능 ‘럭셔리 카’로 입지를 굳히다= 월터는 성능 시험 및 홍보 효과를 위해 자동차 경주에 ‘3리터’를 출전시켰다. ‘3리터’는 크고 웅장한 디자인이여서 당시 경주대회를 지배하고 있던 경량의 부가티와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을 깨고 1921년 시즌부터 여러 경주에서 우승하는 성과를 거뒀다. 성공의 비결은 바로 엔진. 4기통 엔진은 당시로서 굉장히 진보된 기술이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보편화됐다. 벤틀리는 다음 해인 1922년부터 일반인 판매가 시작되면서 스포츠카 드라이버들로부터 각광을 받았다. ‘3리터’는 1924년과 1927년에 르망 24시간 경주에서 우승했고, 이후 벤틀리는 1929년과 1930년에 르망 24시간 경주에서 우승한 ‘6.5리터’와 1928년에 우승한 ‘4.5리터’를 발표했다. 1929년에는 ‘6.5리터’ 스포츠 버전인 ‘스피드 식스(Speed Six)’가 우승을 차지하며 4년 연속 르망 24시 우승이라는 새로운 역사와 함께 당대 최고의 오토메이커로서 기술력을 인정받게 된다. ◇시련왔지만… 컨티넨탈 시리즈로 부활= 벤틀리의 역사 속에서 항상 즐거움과 영광 만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연이어 찾아온 경제공황 속에서 벤틀리는 1931년 롤스로이스와 한 식구가 됐다. 벤틀리는 기존 스포츠카의 명성을 이어 받아 인수합병 후에도 롤스로이스와는 별도의 라인업을 유지했다. 바로 1952년에 등장한 ‘R타입 콘티넨탈’이다. 헤드라이트부터 리어 콤비네이션 램프까지 하나로 연결된 디자인의 이 차량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4인승 모델로 각광 받았다. 1998년부터 벤틀리는 롤스로이스와 관계를 청산하고 폭스바겐그룹과 손을 잡으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다. 특히 2006년 ‘컨티넨탈 플라잉스퍼’와 ‘컨티넨탈 GT’의 역할이 컸다. 이후 ‘컨티넨탈 GTC’, ‘GT Speed’, ‘GTC Speed’ 등을 연이어 출시하며, 컨티넨탈 라인의 성공을 이어갔다. 벤틀리의 4도어 모델 중 가장 강력한 모델인 신형 ‘플라잉스퍼’는 지난해 9월부터 국내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동차를 위해= 벤틀리만의 철학과 정신은 ‘남들이 멈추는 곳에서 우리는 시작합니다(We Start Where Others Stop)’라는 표현으로 대변되는 생산방식에서 잘 드러난다. 모든 자동차 브랜드들이 자동화를 통한 대량생산을 미덕으로 확신하는 시대, 벤틀리는 고유의 수작업 방식을 고수했다. 영국 크루(Crewe) 공장에서 근무하는 벤틀리의 장인들에게 한 대의 차를 완성해 내는 것은 하나의 작품을 만드는 작업과 같다. 실제 벤틀리의 플래그십 모델인 뮬산을 제작하는데 소요되는 시간은 총 300시간 정도. 이 중 인테리어 작업에만 170시간이 필요하다. 즉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한다고 가정할 때 한 대의 벤틀리가 탄생하기 위해서 7주가 넘는 시간이 걸리고, 인테리어를 완성하는데만 4주 가까운 시간이 소요된다. ‘코치빌더(Coach Builder, 귀족용 고급 마차를 주문 생산하던 장인)’의 전통을 철저히 계승하고 있는 장인들이 벤틀리의 품격을 만들어 낸 것이다. 벤틀리가 특별한 또 다른 이유는 고객이 원하는 모든 옵션을 제공해 이 세상에서 단 한대뿐인 나만의 차를 만든다는 것. 비스포크(Bespoke) 방식인 벤틀리의 뮬리너 옵션을 이용하면 고객이 원하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자동차가 탄생한다. 벤틀리는 고객의 어떠한 요구도 충실히 구현해 낸다. 영국 여왕의 공식의전 차량인 ‘벤틀리 에스테이트 리무진’은 여왕이 평소 모자를 즐겨 쓴다는 것을 감안해 차체를 높게 제작, 모자를 착용하고도 숙이지 않고 차에 탑승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벤틀리는 창업 당시 월터가 내건 슬로건인 ‘좋은차, 빠른차, 최고의 차(Good car, Fast car, Best car)’을 지키기 위해 노력한다. 벤틀리의 모든 엔진에는 엔진 넘버와 제작에 참여한 엔지니어의 서명이 새겨져 있다. 여느 수퍼카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뜨거운 심장을 만든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음을 말해준다.
- 2014-01-10 0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