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를 봤던 그때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마치 온몸에 전기가 감돌고 있는 전기맨(?) 같았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 로비에 나온 젊고 낯선 배우는 차갑고 깊은 까만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로 MBC 드라마 에서 열연한 배우 한갑수(韓甲洙·48)다. 불꽃 카리스마로 연극 무대를 내달리더니 어느 날 갑자기 TV 속에 나타났다. 그것도 강아지 같은 함박웃음과 함께 말이다. 연기 인생 30년. 그 누구도 몰랐던 반전 연기로 사랑받은 배우 한갑수를 만났다. 아직도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하지 않다는 대세 배우의 삶과 가족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아이고 어른이고 많이도 알아봅니다
“촬영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다가와서 친구 부르듯 그냥 이름을 불러요. 제가 아무리 ‘이놈! 아저씨한테!’라며 무서운 표정을 지어도 신이 나서 그러는 거예요.”
MBC 주말 드라마 는 한갑수에게 드라마 하나 끝난 것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작품이 됐다. 배우로 살면서 처음 가져보는 기분을 안겨줬다고나 할까. 무대에 올라 관객의 박수를 받아왔지만, 조명이 없는 거리로 나서면 박수갈채는 온데간데없었다. 이 드라마는 달랐다. 촬영장에 모인 아이들은 한갑수를 “아바디”를 목 놓아 외치는 또래 친구 대훈이로 대했다. 드라마가 끝난 다음에는 사람들이 알아봐도 너무 알아보니 인기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인생을 바꿔준 대박 드라마가 된 것. 지금 와서 하는 얘기이지만 한갑수는 방송 연기 초반 배우로서 자존심이 상해 고사하는 일이 많았다.
“캐스팅 디렉터들이 제 연극을 봤는지 연락을 해오더라고요. 한 회 잠깐 출연할 수 없냐고요. 그런데 처음에는 기분 나쁘다고 안 한다고 했어요. 내가 연극을 몇십 년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연락을 해오던 디렉터 중 한 명이 한갑수의 마음을 움직였다. 연극은 많이 했어도 카메라 연기는 안 해봤으니 경험해보라 권유했다. 미디어 매체에도 시선을 줬으면 한다고 말해줬다. 연극을 많이 했지만 생각해보니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후 경찰이건 면접관이건 주어지는 역할은 작건 크건 열심히 해냈다. 한갑수가 시청자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한 작품은 MBC 드라마 과 이다.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특히 이휘향에게 간 이식을 해주는 오빠 역할을 했던 은 인생작 로 가는 도움닫기 역할을 해주었다.
“의 김사경 작가님이 을 보시고 저를 추천하셨어요. 당시 북한 외교관 태영호씨가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제 역할이 그와 비슷한 북한의 고위직이라더군요. 이제는 좀 지성인을 연기하나 싶었죠. 드라마가 시작하고 한참 지나 제가 등장하는 대본이 나왔다며 작가님이 연락하셨어요. 그런데 열 살 아이 연기가 가능하냐고 묻더라고요.”
연극 에서는 피바람을 일으키는 윤원형을, 유진 이오네스코의 잔혹극 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 역할을 했던 그다.
무대 위 선 굵은 배우, 아이를 연기하다
잔인함과 공포를 연기하던 배우가 열 살 아이 지능을 가진 연기라니.
“네? 저는 열 살 연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바보냐고도 물어봤어요.”
걱정돼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일상의 언어로 흐르는 드라마에 나이 든 남자가 아이처럼 연기하는 것이 과연 어울릴까 걱정에 걱정을 더해갔다. 이에 김사경 작가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아이처럼 본능대로 말할 것과 북한 아이만의 순수함을 표현해 달라고 했다.
“순수를 어떻게 하지? 일단은 맑게 웃자는 것이 큰 콘셉트였어요. 내가 눈도 크고 쌍꺼풀도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걸 시청자가 귀엽게 봐줬던 거 같아요. 그리고 이휘향 선배님과 (임)수향이가 너무 악한데 제가 팍팍 시원하게 요즘 말로 사이다처럼 이야기하니까 많이들 좋아하신 것 같아요. 두 분이 잘했기 때문에 제가 덕 본 겁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사이가 나빴지만 평소에 제일 친했어요.”
연기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영역이었다. 시청자에게 이렇게까지 사랑받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에 자신의 능력보다 함께한 선후배의 도움이 컸다며 겸손하게 공을 돌리는 배우 한갑수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얼굴, 꽤 쓸모 있습니다
경남 거창 출신인 한갑수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지역의 한 청소년 극단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도우며 연극을 시작했다. 무일푼 극단 생활 3년 만에 배우로 무대에 오른 그는 경남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연극제의 연기상을 휩쓸었다. 괴물 같은 연기력을 눈여겨본 연출가 이윤택이 2001년 그를 서울 무대에 올려세웠다. 30대 중반의 한창 물이 오른 남자 배우의 연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의 역할은 늘 실제 나이에 비해 한참이나 많았다. 지금도 주어지는 역할은 실제보다 열 살 이상 많다. 현재 방송되고 있는 KBS 2TV 저녁 일일 드라마 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나이가 많은 선배 연기자가 아들로 혹은 동생으로 등장하는 일은 이제 다반사다. 본인의 나이와 맞지 않은 역할을 하는 게 서운하지 않을까? 아니라고 했다.
“연출가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도 연출가님한테 흰머리가 좀 있는데 염색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제 헤어스타일이 좋다면서요. 한 촬영 감독님은 오히려 제가 늙어 보이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왜냐하면, 실제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면 대사 암기가 좀 어렵고 50대 연기는 남자 배우나 여자 배우나 할 수 있는 배역이 많이 없다더라고요. 제가 사실 많이 하는 역할이 주인공 아버지 역할입니다. 대부분 60대 역할일 수밖에 없죠.”
이번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도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상대 배역으로 등장한 배우가 예순두 살이었는데 한갑수가 오히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던 것. 결국, 상대 배역을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하려고 분장팀이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나는 내가 노안이라는 걸 알아요. 어디 가서 나이 얘기하면 깜짝 놀라더라고요. 변희봉 선생님이 저에게 ‘몇 살이냐’고 물어봐서 ‘오십입니다’ 했더니 ‘애’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또 좋은 건 역할도 역할이지만, 나이가 한참 들어 보이니까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더라고요(웃음).”
천생 배우 어린 아내의 특급 매니지먼트
한갑수는 소속 회사 없이 아내 변혜경(39)씨와 촬영 현장을 다니고 있다. 아내가 한갑수의 매니저인 셈. 드라마를 하게 되면서 단 하루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 가면 사람들이 아내 변혜경씨를 더 많이 찾는다. 배우 이휘향도 그랬다.
“미스 변 어디 있느냐고 이휘향 선배님이 그러세요. 밥 먹으러 가야 한다고요. 나랑 가자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랑요. 감독님도 너무 좋아하셨어요.”
아내는 현장 스태프와 친해질 수 있게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잘 웃고, 모르는 사람들한테도 인사를 잘했다.
“만약 저 혼자 다녔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제 스타일이 원래 연기에 집중해야 하니까 누구랑 말도 안 하고, 친해질 수 없거든요. 그런데 옆 사람이 분장이나 의상 스태프랑 친하니까 편안하게 이것저것 부드럽게 부탁합니다. 우리 집사람 덕분에 참 좋죠. 현장에서 저 혼자 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을 아내가 해주고 있습니다.”
배우 한갑수의 아내로 매니저로 사는 변혜경의 직업 또한 배우다. 그것도 천부적인 연기실력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 무대 위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관객과 호응하던 모습이 생생한 멋진 배우였다. 열 살 차이 어린 여배우는 2001년 무대에서 연기 연습을 하는 한갑수를 보고 반해버렸다.
“거창에서 연희단거리패로 옮겨서 연극을 할 때였는데 밀양에서 합숙생활을 했어요. 아내는 연희단 소속 배우였고요. 아침마다 단원들이 조별로 다 모이는데 한 달 내내 아내가 ‘한갑수 내 꺼다’ 하고 소리치는 겁니다. 정말 장난인 줄 알았어요. 저리 가라고도 했어요.”
장난 같던 아내 변혜경의 고백은 사실이었다. 결국 연극의 주인공으로서 공연을 닷새 앞두고 아내는 사랑의 탈출(?)을 하고야 말았다. 장례가 촉망되는 여배우의 결혼을 극단은 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하고도 극단 대표인 이윤택 선생님 마음에 우리가 남으셨나봐요. 진주에서 신혼살이할 때 그 지역으로 강연을 오신 적이 있었어요. 강연하시다가 ‘한갑수 저놈이 우리 혜경이를 훔쳐갔어요’ 그러셨답니다(웃음). 이 선생님이 아내를 딸처럼 예뻐해서 상심이 크셨을 거예요.”
최악의 궁합을 이기고 최고 부부가 되다
“결혼 전에 저희가 결혼하면 아내가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애를 못 낳거나 낳아도 불구가 될 거란 말을 들었어요. 다행히 애도 낳고 별일 없는가 싶었는데 아내가 아이 낳고 100일 만에 쓰러졌습니다.”
깨소금 냄새나는 신혼생활도 잠시, 시련의 연속이었다. 아이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아내 변혜경씨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고 급기야 상대방의 말도 왜곡돼 들린다고 하다 정신을 잃었다. 뇌전증이라고 했다.
“병원에 다녀도 원인이 나오지 않았어요. 한의원에도 갔었고, 심지어 신병이란 말도 들었어요.”
처가에서 아이를 대신 키워주고 병원비 대부분을 지원했지만, 가족 부양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인어른이 서울대병원 앞에 가서 시위도 했어요. 딸의 머리라도 한 번 열어봐 달라고요.”
발병 7년 만에 아내 변혜경씨는 뇌 수술을 받았다. 수술 두 번째에 문제의 위치를 찾아냈고, 세 번째 누운 수술대에서 원인을 제거했다. 수술 직후 만난 아내는 딸도 한갑수씨도 못 알아봤다고. 그래도 젊은 사람이라 의료진이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몸이 좋아졌다.
배우가 숙명인 한갑수의 해피스토리
작년 하반기 한갑수는 가족과 함께 경남 진주에서 서울 근교로 이사 왔다. 이곳으로 오고 얼마 안 있어 드라마를 하게 된 것뿐만 아니라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자신의 직업이 가진 숙명적 불안감과 사랑 사이에서 여전히 고민하는 진짜 배우였다.
“배우는 오래가기 쉽지 않습니다. 소모되고 금방 잊히죠. 평생 숙명처럼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해서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찾아줘야죠.”
한갑수라는 배우가 지금보다 선명해질 때까지 소속사에 들어가는 일 없이 아내와 함께 일할 생각이다. 지금의 상태로 소속이 되면 다작을 해야 하거나 정체성이 모호해질 것을 우려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가 다시 배우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우스갯소리로 ‘10년 후에는 나는 일을 좀 쉬고 아내가 열심히 연기했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몸도 완쾌되고 아이도 다 키웠으니 아내도 연기를 많이 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해줍니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혜경이가 나이 들면 연기자로서 더 빛을 낼 것이라고 봅니다. 현장을 같이 다니는 이유가 많이 보고 배웠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거든요.”
현장을 함께 다닌 덕에 아내 변혜경씨도 잠깐이나마 에 얼굴을 비치기도 했다. 매니저 일을 하는 틈틈이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아내가 대견스럽다.
“부부생활 15년을 해보니 조금씩 서로 알게 된 거 같습니다. 힘든 것이 좀 거쳤으니 저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조수경 ㈜글로벌아너스 대표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돈도 번다.’ 이보다 더 행복한 직업이 또 있을까? 앙코르 커리어에서는 자기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취미를 통한 창직이야말로 자기에게 제일 잘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는 아주 좋은 방법이다. 필자가 운영했던 연세대, 이화여대, 항공대 중장년 아카데미에서도 취미를 통한 창직이 많이 이루어졌다. 그중 항공대 ‘드론 활용 창업 과정’에서는 드론(drone)을 취미로 좋아하는 시니어분들이 대거 참여했다. 교육 이후 드론과 연계해 창직을 하신 분들이 많았는데 자신이 좋아하는 취미로 일을 가져서 그런지 누구보다도 열정이 넘치는 삶을 살고 계신다. 하지만 무턱대고 취미를 직업으로 삼았다가는 실패하기 십상이다. 취미가 수익까지 가져다주는 성공적인 직업으로 연결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 취미와 재능은 별개임을 인식하라
사람들은 흔히 자기가 좋아하는 것과 타고난 재능을 혼동한다. 내가 춤을 좋아한다고 해서 댄서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과 타고난 재능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어야 돈까지 벌 수 있는 직업을 만들 수 있다.
2.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아라
좋아하면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분야를 찾는 것이 취미를 통한 창직의 핵심이다. 좋아하기만 하고 잘할 수 없다면 수익을 창출하기가 어렵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면서도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객관적인 기준을 갖고 제대로 파악하라.
3. 열정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지식과 전문성을 갖춰라
취미를 열정적으로 하는 것과 그것을 성공적인 직업으로 바꾸는 데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노래를 취미 삼아 열정적으로 한다고 해서 다 가수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직업이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지식과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
4. 작게 점진적으로 시작하라
창직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나가는 것이기에 리스크가 존재한다. 그래서 우선 수익이 있는 다른 일을 하면서 작게 점진적으로 접근하기를 권한다. 필자가 아는 ‘아더’라는 정신과의사 선생님은 탱고를 너무 좋아해 의사로서 일을 하면서 댄스치유학회도 만들고 탱고 강사도 하면서 점진적으로 접근해 현재는 탱고업계에서 자리를 잡았다.
5. 경력과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라
시니어의 최고 자산은 수십 년간의 경험과 경력이다. 취미를 통한 창직에서도 최대한 자신의 경험과 경력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실례로 항공대 ‘드론 활용 창업 과정’의 교육생이었던 드론활용연구회 유진철 대표는 대안학교 교장으로서의 경력을 활용해 자유학기제와 연계해 드론 교육 사업을 하고 있다. 교육시장을 잘 알기에 다른 분들보다 빠른 성공이 엿보인다.
6. 고객을 이해하라
비즈니스에 대한 기본은 나를 필요로 하는 고객을 이해하는 것이다. 취미로 사진을 하던 은퇴자들이 설립한 장애인 전문 사진관 ‘바라봄 사진관’은 언론에 많이 보도되고 크라우드펀딩이 성공하는 등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 장애인인 고객을 잘 이해하고 배려한 것이 성공의 핵심 키다.
7. 시장 공략은 창의적으로 하라
취미를 통해 창직을 하더라도 남들과 똑같이 시장에 접근하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창의적인 아이디어와 발상의 전환으로 틈새시장을 찾아 공략해야 실패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 필자가 진행한 중장년 아카데미 교육생이었던 ‘미벨의 감성 여행 스토리텔러’ 박미종 대표는 은행 지점장까지 지낸 분인데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스토리가 있는 ‘스페인 여행 이야기’를 만들어 사업을 시작,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살고 있다.
8. 반 박자만 앞서가라
취미를 통한 창직을 제대로 하려면 시대의 흐름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좋아하는 마음에 너무 앞서가면 시장이 형성되기 이전이라 때로는 고객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필자가 드론 활용 창업 과정을 할 때도 한국은 드론시장이 형성되는 초기였기에 이 부분을 강조했다. 창직을 하려면 5년 정도만 앞서가라. 그렇게 반 박자 앞서갈 때 성공 가능성은 더욱 커진다.
9. 커뮤니티를 최대한 활용하라
취미를 통한 창직은 커뮤니티 활동을 열정적으로 하다가 직업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 동호회는 취미 교류의 장인 동시에 정보 교류의 장이다. 활발히 교류하다 보면 정보도 얻고 그 커뮤니티 사람들이 고객이 되기도 한다. 종종 창직의 기반도 마련된다.
10. 인내하며 실패를 즐겨라
취미를 통한 창직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어떤 분은 재즈를 너무 좋아해 직장생활을 하면서 수십 년간 투잡으로 공연을 뛰다가 은퇴 후 전업 재즈 가수가 되었다. 이렇게 취미를 통한 창직은 때로는 수십 년이 걸릴 정도로 시간이 많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즐기면서 할 수 있기에 실패해도 계속 시도하다 보면 어느덧 창직의 길로 들어서 있을 것이다.
취미를 통한 창직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자신감을 갖고 앞으로 나아가보자. Bravo Your Life!
이맘때쯤이었다. 1962년 완도 앞바다의 햇살은 따뜻했다. 바닷가엔 조개껍데기가 지천에 널려 있었다. 뱃머리에 선 소년은 이 정도 기온이면 다시는 추위에 떨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 안심했다. 당시만 해도 전라남도 완도에서 서울로 가려면 배를 두 번 타야 했고, 꼬박 24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14세 소년은 멀고 긴 상경길이 걱정되지 않았다. 고향에는 다시 내려오고 싶지 않았다. 금의환향을 위해서는 차라리 먼 여정이 낫다고 생각했다. 소년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눈 앞의 조개들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소년은 나전칠기 대한민국명장 임충휴(任忠休·67)씨다.
“원래 어릴 때부터 공부에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무작정 서울로 가출을 했죠. 신문팔이며 구두닦이며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그런데 서울의 추위는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요. 한 달 만에 집으로 도망쳐왔어요. 그리고 날이 좀 풀렸을 때 다시 서울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어요. 동네 이장이셨던 아버지는 그때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다시 도망쳐올 것 같으면 생각조차 하지 말라고. 성공하려면 인내가 있어야 한다고 말이죠.”
임충휴 명장은 그날부터 아버지의 조언을 평생 가슴에 새기며 살고 있다. 그의 작업실 한쪽에는 큼지막하게 쓰인 ‘忍耐’라는 글자 액자가 걸려 있다.
그는 두 번째 상경 때 생각을 바꿨다. 무작정 돈을 좇기보다는 기술을 배울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인천의 라이터 공장에 들어갔다. 그의 성실함이 통했는지 후암동의 한 공장에서 함께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았다. 나전칠기 공장이었다.
나전칠기를 처음 본 소년은 바로 사랑에 빠져버렸다. 영롱한 빛깔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그가 나고 자란 고향에서 전복 껍질은 지천에 널린 흔한 것이었지만, 주걱 대신 무엇을 긁을 때 말고는 쓸모가 없었다. 그런 하찮은 것이 이렇게 아름답게 변하다니 신세계를 만난 것 같았다. 그는 이 기술을 꼭 자기 것으로 만들겠노라 다짐한다.
월급·휴일 없어도 감지덕지
그러나 기술을 익히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처음 3년간은 월급도 받지 못했다. 그저 명절 때 주는 옷 한 벌과 간식 정도 사먹을 수 있는 용돈이 전부였다. 일요일도 없었다. 휴일은 한 달에 한 번뿐이었다. 그래도 숙식을 해결하며 어깨너머 기술을 훔쳐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작업만 고됐던 것이 아니다. 한겨울에도 찬물로 청소를 하느라 손과 무릎에는 생채기가 가실 날이 없었다. 아직도 그의 몸에는 당시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말도 못하게 힘들었죠. 어린아이에게는 벅찬 일들뿐이었어요. 당시엔 기술자 중 상당수가 통영 분들이었는데, 연장 명칭은 죄다 일본어였죠. 전라도 출신 아이가 일본어가 섞인 경상도 사투리를 어떻게 알아듣겠어요. 그런데 말도 못 알아듣는다고 혼났죠(웃음).”
엄격한 교육은 요령을 부리지 않고 길고 번거로운 과정을 끊임없이 반복해야 제대로 된 완성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체득하도록 해줬다. 전통 공예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3년이 지나고 그는 이미 한 사람의 몫을 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그리고 또 한 번의 기회가 찾아온다. 중일(잡부가 아닌 정식 기술자의 초보 단계) 자리를 줄 테니 공장을 옮겨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이었다. 그렇게 인연이 된 공장은 보문동의 조안공예사. 이곳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0호 나전장 김태희 선생의 제자 안승권씨가 운영하던 공장이었다. 임충휴 명장은 아직도 당시에 인연을 맺은 13명과 친목회를 통해 친분을 이어가고 있다.
그를 담금질한 성공과 고난의 시간들
제대로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기쁨에 날아갈 것 같았지만 그 역시 순탄하지는 않았다. 옻칠에 사용되는 고운 토분(土粉)을 얻기 위해 매일같이 흙먼지를 마셔야 했고, 나무판자 표면을 곱게 고르는 작업에 종일을 바쳐야 했다.
그렇게 또 정신없이 5년을 보내고 나니, 임충휴 명장은 업계에서 꽤 알려진 기술자가 돼 있었다. 탐을 내는 사람도 많았다. 말 그대로 어엿한 기술자였다. 웬만한 화장대나 문갑 정도는 만들 수 있는 실력이 됐다. 그리고 또 한 번의 스카웃 제의가 있었다. 이번에는 김호창 선생이었다.
“김호창 선생님 덕분에 한 단계 더 성장할 수 있었죠. 제 성실함을 눈여겨보셨는지
4년 만에 그 공장에서 공장장을 맡게 됐어요. 저보다 나이 많은 사람도 많고, 실력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악착같은 제 모습이 맘에 드셨나봐요. 그곳에서 공장장으로 일하다 아내를 만나 결혼하고, 제 회사를 차리게 됐어요. 독립하고 나서도 선생님이 하청을 주고 신경을 써주셔서 자리 잡는 데 큰 고생은 하지 않았어요.”
어렵게 융통한 300만원이 밑천이 됐다. 시작은 직원들 먹일 밥 지을 곳이 없어 비 맞으며 음식을 할 정도로 열악했다. 전라도 사람을 차별하는 풍토도 있어 어떻게든 신용만은 지키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성공이라는 계단을 차근차근 밟아나갔다.
“그때는 9자 나전칠기 장롱이 300만원 정도 했어요. 그 돈이면 당시 시골에서 논 20마지기(약 6000평)를 살 수 있었어요. 고향에서 장롱이 그 가격이라고 하면 믿지 않았으니까요(웃음). 덕분에 여러 고관대작의 집에 들락날락했는데 그분들 중에 재벌이나 국회의원, 장관도 있었죠.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는 삼성종합건설의 부탁으로 쿠웨이트 영빈관에 줄 선물로 자개병풍을 만든 것이에요. 사진이라도 하나 남겨놨으면 좋았을 텐데….”
인내는 그를 배신하지 않았다. 뚝섬과 성남에 나눠져 있던 그의 작업장에는 직원이 어느 새 100명에 달했다. 제대로 된 9자 나전칠기 장롱이 만들어지는 데는 6개월이 걸리는데, 그의 작업장에서는 하루에 하나꼴로 완성됐다. 그만큼 꾸준한 수요가 이어졌을 정도로 그의 작품은 시장에서 사랑받았다.
“당시 나전칠기 장롱은 주부들에게는 일종의 로망이었어요. 누구나 갖고 싶어 했고, 부의 상징이었죠. 실제로 정부에서는 이 장롱을 사치품으로 간주해 특소세 인지가 있어야 거래가 가능하도록 했어요. 주부들이 자개장을 갖기 위해 계모임을 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어요.”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그에게도 어려움이 닥쳤다. 1978년 2차 유류 파동에 잠시 휘청했던 사업이 좀 견뎌지나 싶더니 1997년 IMF라는 직격탄을 맞고 말았다. 현찰 대신 받았던 어음들은 줄줄이 부도가 났다. 당시 부도난 어음의 총규모는 12억8000만원 정도. 개인사업자가 넘길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당시 인사동과 명동, 신설동에 거래하던 가게들이 많았죠. 물론 대부분 어음으로 거래를 했어요. 받지 못한 돈이 12억이 넘었어도 절 믿고 따라준 거래처, 직원들을 실망시킬 순 없었죠. 몇 채 가지고 있던 집들을 모두 처분하고 빚잔치를 했죠. 직원들에게 퇴직금도 조금씩 챙겨주고. 그러고는 칠기와는 인연을 끊으려 했죠.”
실제로 그는 칠기와 잠시 이별했지만 다시 돌아왔다. 그도 천직을 잊기 어려웠지만, 그의 솜씨가 사장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주변의 만류도 컸다. 그렇게 해서 지금의 진성옻칠공예가 다시 부활했다.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과거의 제작 방식과 전통 소재에 더욱 집중했고, 이러한 노력은 2004년 노동부의 칠기 분야 명장 지정으로 결실을 맺는다. 그는 명장 지정 이후에도, 전승공예대전 문화재청장상, 한국옻칠공예대전 금상 수상, 대한민국명장회 최우수 명장 위촉 등으로 진가를 제대로 인정받고 있다.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냈다며 주는 상 같았어요. 그간의 노력이 인정받은 것 같아 기뻤습니다.”
그는 명장 제도가 기능인들의 사기를 살리고, 상공인들의 활동에 활력을 불어넣었다고 평가했다.
칠기에 대한 몇 가지 오해
나전칠기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는 자개 장식에 관한 것. 나전칠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수많은 자개 장식이다. 이 자개 장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가구는 높은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일까? 임 명장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칠기의 생명은 곱고 투명하게 옻칠을 하는 실력과 옻칠의 재료인 칠액에 있어요. 칠액은 옻나무의 수액을 정제해서 만드는데 1Kg에 70만원을 호가하기도 해요. 그래서 예전엔 저렴한 동남아에서 캐슈(cashews) 나무 수액으로 만든 칠액을 쓰는 곳도 있었어요. 사실 자개가 가구 표면에서 차지하는 면적이 넓으면 넓을수록 만드는 과정은 쉬워요. 또 자개 재료는 상대적으로 저렴하고요. 그래서 자개는 약간의 장식으로만 쓰인 옻칠 가구가 훨씬 귀하고 비쌉니다.”
또 옻칠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조금 다른 방법으로 진행된다. 말리는 과정이 그렇다. 칠액을 바르고 말리고 바르고 말리는 과정이 수차례 반복되어야 제대로 된 옻칠의 광택이 살아난다. 투명 옻칠은 이 과정을 스무 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보통 말린다는 표현은 수분이 날아가 표면이 단단하게 굳는 것을 의미하지만, 옻칠은 물로 말린다. 습도가 80% 이상 되는 곳에서 표면을 굳혀야 특유의 투명함이 살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업실의 건조장 바닥은 늘 흥건하다.
이렇게 천연재료로 만들어진 칠기는 모양뿐만 아니라 기능적으로도 훌륭한 생활 도구가 된다. 환경호르몬이 원인으로 지목되는 아토피 같은 질환을 예방하는 데도 좋은 친환경 재료로 알려져 있다. 칠기 가구가 아기용 옷장으로 입소문이 난 것도 이 때문이다. 잘 썩지도 않고 불도 잘 붙지 않는다.
후진 양성을 위한 노력
임충휴 명장은 최근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옻칠을 전수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보통의 장인이라면 옻칠을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 마음먹은 제자들 중에서 후계자를 골라 기술을 전수하겠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지금 업계의 가장 큰 문제는 일할 장인이 없다는 것이에요. 특히 자개장 같은 건 기능인이 부족해서 웬만한 곳에서는 만들 엄두도 못 내요. 50세 정도는 이제 현장에서 젊은 축에 듭니다. 예전엔 옻칠조합 회원이 100명도 더 됐는데, 이젠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가 돼서 조합도 없어졌어요.”
그래서 시작한 것이 후진 양성이다. 군포시에 위치한 서울남부기술교육원 옻칠나전학과에서 취업이나 취미를 목적으로 모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술을 가르친 지 2년이 됐다. 이제 그를 사사한 학생이 100명이 넘는다. 장인에게 기술은 밥줄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는 교육원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
“전통공예를 현대적 디자인에 접목하고 싶어도 매일 비슷한 것만 만들어온 사람들에겐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칠기 소비를 늘리기 위해서는 다양한 시도가 필요한데 말이죠. 그런데 교육원에서 학생들을 만나면서 오히려 제가 배우는 기분이에요. 실제로 미술 전공자들도 많이 있고요. 이제 교육원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치기 시작한 일은 제 인생에서 보람 있는 일 중 하나가 됐어요.”
바깥 공기를 마시고 싶었다. 천장이 높고 어두운 극장 안은 어린 배우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무겁고 답답했다. 찾아다닌 끝에 밖으로 통하는 문 앞에 섰다.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여니 주황빛 석양이 스며들다 온몸을 감싼다. 문밖에는 까치머리에 안경을 쓴 사내가 태양과 마주하고 앉아 있다. 그는 미래의 마임이스트 유진규(柳鎭奎·64)다. 내면의 대화와 몸짓 언어를 택한 그는 오늘도 소통의 벽에 길을 내며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
김장난장, 오랜만에 몸 좀 풀까?
“어디서 만날까요?”
서울시청 앞 광장 한복판에서 만났다. 인터뷰 약속을 잡은 날, 마임이스트 유진규는 한창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올해로 세 번째인 김장문화제의 축제 프로그램 ‘김장난장’ 예술감독을 맡은 것. 그는 마임이스트이기도 하면서 관록의 축제 장인(匠人)이기도 하다. 축제 불모지였던 춘천에서 국제마임축제를 만들어 25년간 예술감독을 해왔다. 그의 손을 거치면 일상으로부터 탈출이 가능했고, 남녀노소가 한바탕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축제로 거듭났다. 유진규는 이날 새로운 도전, 시민들과 함께하는 김장 퍼포먼스 생각에 한껏 신나 있었다.
“김장문화제 주최 측에서 대중과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보자고 제안을 해왔어요. 잠깐 고민을 했죠. 지금까지 공연예술축제를 해왔는데 김장이라니? 그럼 어떻게 접목시켜야 하지? 그때 머리에 그린 그림이 춘천국제마임축제 때 하던 아수라장과 도깨비난장이었어요. 축제다운 난장을 한번 해보겠다고 해서 만든 것이 ‘김장난장’이에요. 저는 축제 난장 전문가이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려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리허설을 할 수도 없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모일지도 헤아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우려는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11월 5일 진행된 ‘김장난장’은 젊은 세대에서부터 시니어 세대까지 모두가 어울릴 수 있는, 말 그대로 한판 난장이었다. 몸빼 바지에 고무장갑을 낀 시민들은 스스로 절여지고 다듬어지는 배추 역할로 참여했다. ‘김장난장’이 끝난 뒤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유진규는 “생각보다 사람들이 재밌어했다. 색가루(인체 무해한 전분가루를 사용했다)를 뿌려대서 시민들이 도망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어울려 한껏 즐기는 모습을 봤다. 잘 노는 민족임을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축제의 달인(?) 손에서 또 한 번 위트 넘치는 작품이 탄생한 것이다.
마임 하면 유진규, 유진규 하면 마임
자, 그럼 이제부터는 마임이스트 유진규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그는 정신없이 자신의 근황을 쏟아냈다. 그런데 도통 이 글을 읽으면서도 “이 사람이 도대체 누구길래”라며 궁금해 하는 독자를 위해 친절한 설명 들어간다. 유진규는 마임하는 예술가, 즉 마임이스트다. 그렇다면 ‘마임’이란 무엇인가. 들어도 생소할 수밖에 없는 예술, 직접 물었다. 마임이 무엇입니까?
“마임이라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찰리 채플린이나 어릿광대들이 보여주는 판토마임을 생각할 거예요. 쉽게 얘기해서 말은 하지 않지만 여러 가지 몸짓과 재주를 통해서 자기를 보여주고 표현하는 예술입니다. 그런데 판토마임과 마임은 달라요. 희극배우들이 하는 판토마임이 대중적 형태라면, 마임은 다분히 예술적이고 개인적인 세계가 개입됩니다.”
지금까지 ‘마임 하면 유진규, 유진규 하면 마임’으로 인식됐다. 축제의 장인보다는 ‘한국 마임의 아버지’라는 이름표가 그를 따라다닌다. 45년간 이어진 몸짓에서는 독보적인 에너지가 느껴진다. 다양한 변화와 시도를 통해 담백하고 깊은 숨을 마임에 불어넣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그다.
물끄러미 앉아 있기를 좋아한 소년, 마임에 빠지다
유진규가 마임의 매력에 빠져든 것은 운명이었다. 말 없는 것들에 대한 관심이 어렸을 때부터 남달랐다.
“타고난 것일 수 있어요.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는 것을 좋아했고,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어요. 사실 물끄러미 바라본다는 것은 말 없는 세계이거든요.”
어렸을 적 그의 꿈은 수의사. 동물원이 있던 창경원(지금의 창경궁)에 자주 드나들면서 동물들과 함께하는 삶을 그렸다. 건국대학교 수의학과에 입학해 잠시나마 꿈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시대였다.
“제가 70학번이에요. 유신시대 직전이었죠. 대학생이 고등학생보다 더 자유롭지 못했어요. 나는 대학교 들어가면 자유를 맘껏 누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더군요. 방황하다 만난 것이 연극이었어요. 1년은 휴학하고 1년은 방황했어요. 삶에서 중요한 시점이었죠.”
결국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길을 버리고 연극을 택해 극단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극단 안에서도 유진규는 모순점을 발견했다.
“예술은 자유로워야 하는데 극단 역시 철저한 조직사회였어요. 한 사람이라도 어긋나면 안 되는 조직화, 분업화된 곳. 한쪽으로는 재밌었는데 다른 한쪽으로는 억압을 느꼈어요. 그럴 때 마임을 알게 됐습니다. 마임은 내가 생각한 것을 글로 써서 내 몸으로 표현하면 되는 거였어요.”
극단을 나온 그는 독립적인 마임의 길로 들어섰다. 그 길 역시 순탄하지 않았다.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1981년 춘천으로 내려간 그는 소를 키우며 살았다. 건강문제로 생사의 기로에 서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시간이 흘러 그 또한 빛바랜 과거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길 위의 공연자, 나를 부르는 그곳이 무대
유진규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춘천국제마임축제 예술감독이라는 타이틀이다. 스스로도 한 몸과 같다고 말해왔던 춘천국제마임축제 예술감독직에서 그는 2013년 물러났다. 흔히들 말하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었다. 갑작스럽고 힘든 시간이었지만 또 다른 도전을 알리는 신호였다.
“2년 동안은 혼돈 상태였어요. 마음 정리를 하면서 앞으로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나가야 하나 나 자신과 대화를 많이 했어요. 결국 나는 공연하는 사람, 예술가였습니다.”
찾아주는 곳이 있으면 언제든 무대에 오르리라 마음먹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뜻밖의 제안을 받았다. 2014년 진주골목길아트페스티벌에서 길거리 공연이 가능한지에 대한 타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유진규는 자신이 무대가 있는 극장에서 공연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거절하고 전화를 끊었어요. 그런데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제 자신에게 물었죠. 넌 배우잖아. 거리에서 널 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너는 극장에서만 공연하는 사람이라고? 그런데 거리와 극장은 뭐가 다르냐. 극장은 모든 것이 보장된 곳이고 거리는 던져진 공간이죠. 거리에서는 보고 싶으면 보고, 안 보고 싶으면 안 보는 게 가능해요. 보다가 가도 괜찮고, 중간에 봐도 괜찮고 보면서 떠들어도 괜찮고 보면서 먹어도 되죠. 네가 배우라고? 그렇다면 어디서든 공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아?”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답했다.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한 번도 거리에서 공연을 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게다가 마임축제를 할 때는 매년 거리공연을 하는 200여 명의 사람을 일일이 보고 선택했다. 공연 장소를 지정해주고 잘하는지 못하는지를 평가하던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평가하던 사람이 평가를 받는 사람이 된 것.
“내가 여기서 물러나면 반쪽자리 공연자밖에 안 되는 거죠. 기왕 깨진 몸 부딪혀보자. 극장에서도 공연할 수 있지만 거리 무대에도 서보자. 그것이 완전한 공연자라고 생각했어요.”
일주일이 지난 뒤 주최 측에 다시 전화를 걸어 공연 참여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거리공연에 모험을 걸었다. 다행히 관객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왜냐하면 아무도 못 가게 해야 하잖아요. 가는 사람이 보이면 마음이 흔들려. 막 불안하고(웃음). 관객들은 재미없으면 무조건 가버려요. 볼 이유가 없잖아요. 그다음에는 대학로에서 했습니다. 첫날은 관객이 많았는데 둘째 날은 다르더라고요. 가는 사람을 부를 수도 없고 말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관객과 함께 살아남는 배우가 진짜 배우라는 생각을 거리공연을 하게 되면서 알게 됐어요.”
자연 속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다. 자연 속에서는 기타, 바이올린, 타악기 등 모든 것이 더 생생하게 어울렸고 분위기에 따라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공연을 했다.
“연주자와 함께 작업을 하다 보면 분위기에 따라 많이 달라져요. 현실로부터 떨어져서 공연하면 사람도 자연의 흐름에 맡기게 됩니다. 비도 올 수 있고 바람도 불 수 있고요. 알게 뭐야 어떤 일이 생길지(웃음).”
디어 마이 손주, 할아버지는 사양할게
유진규는 4년 전 할아버지 대열에 합류했다. 마임축제 일로 힘든 와중에 웃음을 안겨준 고마운 손주다. 그리고 2년 만에 또 외손주를 봤다. 지금은 두 아이의 할아버지가 됐다. 할아버지라니, 처음에는 좀 거부감이 들었다고 한다.
“할아버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다 꺾여버리더라고. 할아버지니까 이러면 안 되지. 할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하지? 할아버지로 내면 정리가 되는 것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나는 할아버지 거부! 할아버지 아니야! 초반에는 그랬어요.”
물론 손자를 보자마자 웃음이 터지고 좋은 마음은 어쩔 수가 없다. 하지만 그게 자칫 진짜 할아버지로 가는 길이 될까봐 슬쩍 경계한다.
“주위에도 손주가 생기면 사람들이 정신이 없어요. 술 마시다가도 손주 보러 간다면서 가버려요. 일단 할아버지처럼 마음이 꺾이고 구부러지면 안 되거든요. 특히 내가 하는 일은 어디서나 당당하게 맞서고 깨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래서 나는 언제나 외손주하고 맞짱을 떠야 한다고 생각해요. 친구처럼 지내야 해요. 할아버지와 손주 관계로 가버리면 자꾸 아이들의 작전에 말립니다. 안아주기도 하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아요(웃음). 맞짱뜨는 게 늘 중요해. 관계가 정립되고 어느 한쪽에서 고개를 숙이는 순간 소통은 끝나거든요.”
나? 무대에서 안 내려갈 거야!
춘천국제마임축제와 헤어진 것이 두고두고 아쉽겠지만 그는 요즘 들어 부쩍 왕성한 활동을 하는 중이다. 자연 속, 무대 위, 광장. 어디든 그의 발길이 닿고 필요한 곳이면 찾아가 공연을 펼친다. 전성기가 제대로 왔다는 느낌이다. 은퇴시기를 물어보니 절대 자신의 인생에는 접수되지 않을 단어가 바로 ‘은퇴’란다.
“일본 부토 무용의 대가 중에 100세가 돼서도 공연을 한 분이 계셔요. 직접 보지는 못했는데 큰 극장 무대에 배우인 아들이 아버지가 앉아 있는 휠체어를 밀고 무대 위를 걸어 나오더래요. 느릿하게. 그리고 무대 중앙에 멈춰선 아들은 휠체어를 객석 앞쪽으로 돌려놓았대요. 늙은 배우는 휠체어에 앉아 손을 들었고요. 그 순간 일본 사람이 좋아하는 빨간 장미 꽃잎을 수도 없이 날렸다는 거야. 나도 그렇게 될 때까지 공연할 겁니다.”
유진규는 사람들에게 ‘하고 싶어 하는 일을 끝까지 놓지 않고 했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마임이스트 유진규. 그는 오늘도 내일도 차가운 길, 붉은색 흙길 위 그리고 뜨거운 조명 아래서 깊은 몸짓으로 세상과 소통할 것이다.
지금은 창의적 시대가 대세이다. 누구나 창조적인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면 성공을 기대할 수도 있다. 그것은 피나는 노력의 대가이고 사람들을 감동시켜주기도 한다.
사람들의 문화 수준이 놀라울 정도로 변화되어간다. 먹고살기 위한 의식주를 넘어 이제는 여가와 각종 기념일들도 그냥 넘기는 법이 없다. 없던 날들도 만들어 별별 축하 날들이 생겨났다. 젊은이들의 톡톡 튀는 생동감의 일상은 현재에 머무를 줄을 모르고 고공 행진을 한다.
필자의 작은 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한 가족 모임이 있었다. 결혼을 한 후 처음으로 맞이하는 기념일이다. 필자는 집에서 준비를 하고 싶었으나 시간들이 맞지가 않았다. 사위도 딸도 출퇴근 시간이 다르고, 두 부부가 이제 1년 차 전공의 의사이니만큼 서로 시간이 자유롭지가 않았다.
큰딸은 시내의 한복판 호텔 레스토랑에 예약을 했다고 했다. 가격이 만만치 않아 걱정을 했으나 자기들이 알아서 한다니 따르기로 했다. 선물을 준비해야 했다. 부모라고 받기만 하는 것보다 뭔가 특별한 장만을 해야 했다. 이것저것 생각을 해봤으나 새 신부에게는 현금이 가장 적절한 것 같아 필자는 그렇게 하기로 했다.
큰딸은 동생에게 케이크를 준비한다고 했다. 필자는 비싼 호텔에서 그것도 준비해주지 않느냐고 물었다. 큰딸은 특별한 선물이라며 설명을 늘어놓는다. 그 케이크는 미리 한 달 전에 예약을 해야 하며, 생일 당사자 사진도 보내야 한다고 했다. 무슨 소리냐고 그때는 아무 느낌 없이 대답만을 했다. 다만 가격을 말할 때는 눈이 휘 동그래졌다.
비록 필자가 부담하지는 않았지만 아깝다는 생각에 한마디를 했다. 쓸데없이 낭비를 한다며 몇 마디 잔소리를 했더니, 큰딸은 들을 척도 하지 않고 방으로 휑하니 들어간다. 요즈음 다 큰 자식들이 부모의 말을 귀담아들을 리가 없다. 현실이 그렇게 변해만 가니 어이가 없다.
호텔에서 오랜만에 온 가족이 모였다. 모처럼 단란하게 식사를 마치고 케이크가 올라왔다. 커다란 뚜껑을 여는 순간 감탄이 흐른다. 온 가족의 눈동자가 한 곳으로 향했다. 우아하게 앉아있는 작은 딸의 모습이 선명하게 한눈에 들어온다. 캐릭터를 기가 막히게 만들어 케이크 옆에 다소곳이 앉혀놓았다.
작은딸도 사위도 입이 코에 걸렸고 환희가 넘친다. 물론 필자 부부도 한참 동안을 들여다보며 신기함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케이크 자체도 일반 것들과는 매우 다른 형태로 만들어졌지만 생일을 맞이한 주인공 사진을 그대로 만들어 그 위에 장식 한것은 기발한 아이디어다.
그 생일 케이크 하나로 온 가족은 행복함으로 가득하며 많은 시간 동안 이야기꽃을 피웠다. 참으로 훌륭하고 멋있는 케이크가 그만한 가치가 흘러넘쳤다. 평범하고 단순하게 촛불을 켜고, 다시 불어서 썰어먹는 것이 아닌, 작품 감상의 시간으로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대단히 멋지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큰딸은 자기의 선물이 최고라며 자랑을 과시한다. 뭐라고 할 말이 없었다. 필자도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엄지손가락을 불끈 들어줬다. 그 빵집은 지금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반드시 예약을 해야만 하는 곳으로 주인장은 일부러 초상화를 배우며 밤낮으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선물이란 말 그대로 상대방에게 기쁨을 주기 위함이다. 작은딸은 대 만족이라고 했다. 가족들은 아까워서 함부로 먹어 보지도 못했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작은딸은 먹고 남은 것을 고이 모시고 집으로 가지고 갔다. 자기 모습이 살아있는 그대로를 몇 날 며칠 동안 간직하며 아주 흡족 했다고 했다.
각고의 노력이 함께한 장인정신은 사람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안겨준다. 누군가의 '작은 아이디어가 커다란 감동으로' 다가와 깊은 감사의 마음이 들었다. 가족들을 모처럼 웃음바다로 만들어주었다. 사람이 만들어낸 창조의 힘은 위대하다는 생각으로 하루를 보냈다.
가격을 떠나 감동을 주는 기발한 아이디어의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또 하나의 행복이다.
건강한 가정이 모여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고 이런 공동체가 모여 국가의 초석이 된다. 하지만 가정 해체가 심심찮게 일어나면서 아동학대, 노인 소외 등 심각한 사회문제로 이어지고 있는 게 현실이다. 허물어지는 가정 해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우리 사회의 대안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전문가들은 바로 효(孝)라고 말한다. 이번 호에서는 효를 실천하는 3인이 한자리에 모여 이 시대의 효의 진정성에 대해 진솔한 대화를 나눴다.
△ 무크지 을 창간하는 권혁승 백교문학회장(이하 권혁승 회장)
△ 효경영의 리더 상훈유통 이현옥 회장(이하 이현옥 회장)
△ 교육을 통해 효 문화를 정착시키는 최종수 한국효문화센터 이사장(이하 최종수 이사장)
장소 이투데이 6층 회의실
Q.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전통적 가치 ‘효.’ 요즘 효를 얘기하려면 저마다 답답하다고 한탄합니다. 무엇 때문에 시니어들이 분노하는 걸까요?
△ 이현옥 회장: ‘효는 백행지본(百行之本)’이에요.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모든 행동의 근본이죠. 부모가 없었다면 자식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치에 섰더라도 이는 모두 부모의 은덕이죠. 부모 모시는 일을 우선으로 해야 하는데 바쁘다, 먹고 살기 힘들다는 핑계로 찾아뵙는 것은 소홀히 하고 전화 한 번 하는 정도로 생색내는 자식들이 늘어나고 있어요. 죽는 날까지 자식 잘 되기를 바라고 좋은 소식 있기를 고대하며 밤낮으로 자식 걱정을 하는 게 부모의 마음이죠.
△ 최종수 이사장: 자식들의 마음가짐을 바로 세우기 위해선 교육이 우선돼야 해요. 옛 서당에서는 과 을 기본으로 어려서부터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예절을 가르쳤어요.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비는 아비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각자 직분에 충실하게 하는 밑바탕에는 효가 자리 잡고 있었지요.
이런 이유로 초·중·고교에서 효와 예절, 질서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어요. 학식을 갖추는 것보다 사람이 되는 게 우선이지요.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게 된 게 주위에 있는 문화예술인들이 ‘우리 매일 같은 것만 할 게 아니고, 인성과 효에 대한 공감을 통해 새로운 일을 한번 해보자’고 한 것이 계기가 됐어요.
△ 권혁승 회장: 우리나라 효 사상이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가고 있고, 한국의 가족주의도 전부 없어져 가고 있어요. 이러한 현상을 두고 ‘가정 파괴’라는 말들을 씁니다. 이는 곧 가정의 예절이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가정의 예절이란 자식이 부모를 공경할 줄 알아야 하는데, 요즘은 어버이날이나 부모 생신날이라 해서 선물하나 사서 주는데 그건 효가 아니죠. 효 사상이라는 것은 한국인의 정신문화라는 것이고, 물질의 교류나 거래는 아니죠. 부모자식 간에 아파트 사주고 비싼 선물 사주고, 물론 그것도 효도의 한 방법 일수 있지만, 한국의 기본 사상이자 문화 사상은 아니라고 봅니다.효의 출발점을 가정의 예절에 두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부터 아이들을 교육해야 해요. 요즘은 어린이 교육이 잘못돼 개인주의나 황금만능주의가 팽배해졌지만, 한국 효 사상이 무너져가는 위기 상황이라고 느끼니 씁쓸하죠. 그러한 문제로 우리(3인)가 모인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웃음).
Q. 지금 효는 현실적으로 어떻게 실천되고 있나요?
△ 권혁승 회장: 요즘 대다수 부모는 자식에게 의지하려고 하지 않아요. 그리고 자식들은 부모에게 효도하려는 생각을 안 하고 있죠. 효를 바라지도, 하지도 않는 게 현 상황인거죠. 그래도 지금 우리가 하는 효 운동을 계속 꾸준히 전개해야 하는데, 도움이 필요합니다. 각 시·구 문화원에서 부모에 대한 시 낭송회를 1년에 한 번씩 한다든지, 강의를 한다든지 말입니다. 이렇게 효에 대한 교류를 해야 효심이 생기는 것이죠. 젊은이들에겐 부모의 은혜에 보답하고 날마다 반성을 해나가는 것이 효예요. 아이들이 “학교 다녀 오겠습니다”, “다녀 왔습니다” 인사를 하는 것이 기본인데 휙 갔다가 말없이 돌아오죠. 젊은 엄마들도 다 어릴 적 해본 것으로 신경을 못 써서 그렇지 아이들도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효심’. 그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봤어요. 대한민국 국어사전에 이렇게 나옵니다. 첫 번째, ‘효성스러운 마음’. 두 번째, ‘효심은 엄하게 키운 자식일수록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한 법이다’ 그러니 부모가 애를 잘 키워야 하죠. 적당히 키우면 효도가 안 돼요. 불효라는 것은 아이에게만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니고 상대적인 것, 부모자식 간 주고받는 것이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를 실천하는 방법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해 왔어요. 이기주의와 황금만능의 물신주의는 가정의 안녕과 질서의 근원인 효를 경시하므로 해체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어린이나 젊은이 할 것 없이 절대가치와 기준이 상실되어가고 있는 현실이죠.
자식을 물질적으로 키우면 그게 효가 안 된다는 것입니다. 권 회장 말씀대로 엄하게 키우고 가정에 모범을 보여야 하죠.
Q. 지난해 12월 ‘효도계약’을 지키지 않은 아들에게 증여한 부동산을 돌려받을 수 있다는 대법원 판결이 나왔습니다. 이 판결을 놓고 가족모임에서 효도계약서를 쓰는 시니어들이 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립니다.
△ 권혁승 회장: (부모자식 간 효도계약서 등의 문제에 대해서) 나도 그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요. 한국인은 효에 대해 우리 전통문화, 민족문화로 자부심을 가져야 하는데 개중에는 부모자식 간 효도 계약서를 쓴다든지 하는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사실상 그런 경우는 거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그런 몇몇 사건을 미디어에서 너무 부풀리는데, 그런 것을 줄여야 해요. 부모자식 간 화합하고 소통해야 하는데 불화가 있다면 잘못되는 것이죠. 아이들이 자랄 때 가정 예절이나 인성 교육을 해야 하는데 그런 것이 없으니 그렇게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자식이 잘못했든 부모가 잘못 가르쳤든 소통이라는 것은 쌍방이에요.
△ 최종수 이사장: 효도계약서를 쓰고 하는 효는 결코 효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계약을 하는 것도 문제, 그것을 퍼뜨리는 언론도 문제이지만, 어쨌든 그것은 효가 아니고 효가 될 수도 없어요. 중요한 것은 두 분(권혁승, 이현옥)도 그렇지만 자신의 모든 열정과 재산을 털어 효 문화를 전파하는 훌륭한 분들이 계시는데 국가는 대체 무엇을 하는가 생각이 들어요.
지방자치단체 강령에도 효에 대한 지침 등이 있지만, 지나친 복지로 효가 묻히고 퇴색하고 있어요. 노인, 장애인 복지 등을 위한 비용이 당연히 들겠지만, 그중 일부를 효를 위한 예산으로 책정해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이 효를 통해 그런 노인과 장애인 등을 돌볼 수 있도록 말이죠.
Q. 효에 관한 교육과 정책 지원이 줄어들고 있다는데요.
△ 권혁승 회장: 예를 들어 우리 어린이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아버지, 어머니에 대한 시 낭송회를 한다고 하면 그들도 그 며칠 동안은 아버지 어머니 생각을 하지 않을까요?
효가 뭔가 선물만 주는 게 아니라 기본을 익히는 교육을 해야 해요. 이런 말이 적절할지는 모르지만 각 지역마다 문화원이 있어요. 대개 문화 강좌를 한다든가 음악, 미술, 무용 등을 가르치는데 효 문화에 대해서도 강의하면 안 될까 싶어요. 문화원마다 책정된 예산들을 다 그런 예술 강좌에만 써야 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의 독자들의 나이대를 보면 나라 망하고, 6·25사변 나고 배고프고 살기 어려워서 그런 걸 찾을 수 없는 시대였다 할지 몰라도, 그 와중에도 뜻있는 사람들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어요. 좋은 효자·효부 정말 많습니다. 지금이라도 늦었다는 생각 말고 기본적인 교육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요?
△ 이현옥 회장: ‘효’를 바탕으로 회사를 경영하다 보니 직원들도 만족해하고, 사고도 발생하지 않아요. 부모님을 모시고 여행을 가는 직원들에게 홍천 대명콘도와 양양 솔비치콘도 숙박을 지원해 줍니다. 1년에 상·하반기 2번 가능하고, 시댁이나 처갓집 식구들도 함께 갈 수 있게 하는데 주로 직원들이 장인·장모를 모시고 가는 편입니다.
‘너희들이 부모에게 잘함으로써 우리 직장도 건전하게 발전이 되는 거다’라고 자주 말합니다. 매년 5월에는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전 직원이 가족을 데리고 세종시에 있는 효림원(효 마을)을 방문해 효심을 나누고 효 문화행사를 진행하죠.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서는 무엇을 바꾸어야할까요?
△ 최종수 이사장: 효 문화예술 교류 차원에서 학교에 전문 강사가 방문해 효 강의 등을 하는데, 어느 정도 한계가 있지만 꾸준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어머니들의 생각이 좀 바뀌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효에 대해 토론회를 한다고 하면 관심도 없고, 다른 학원에 가라고 하는 등 꽁무니를 빼기 때문이죠. 학생들을 모집하면 3분의 1 정도만 자발적으로 오고, 3분의 1은 학교에서 하라니까 억지로 온 것이고, 또 3분의 1은 참여는 하지만 구실만 있으면 학원에 가거나 빠지려고 해요. 그런 경우에 학생도 학생이지만 어머니들이 적극적으로 인성이나 효, 예절에 관심을 가져야 해요. 인성이 기본이 된 다음에 학력을 쌓아야지 기본도 안 되고 학력만 쌓으니 아이들이 머리만 커지는 것이죠.
효라는 것은 평생 죽을 때까지 해야 하는 것인데, 유가(儒家)에서 배울 때는 부모가 살아 계실 때 모시기를 잘 해야 한다고 하는데, 종교가 달라 많은 부분에 갈등이 생겨나고 있어요. 그런 효가 필요 없다고 하는 단체도 생기고, 내가 효를 안 해도 살 수 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을지는 몰라도, 효는 우리나라 정서나 젊은이들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덕목입니다. 지난해부터 인성교육진흥법을 시행하여 인성교육을 강화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많은 단체가 갈팡질팡하고 있어요. 인성과 예절 교육은 효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 문화, 이런 운동은 돈이 많다고 할 수 있는 운동도 아니고 시간이 많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죠. 어떠한 소명감에 의해서 하는 것이지 이해타산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기브 앤 테이크’가 아니라 ‘기브’만 하는 거죠.
요즘 부모는 자식의 효도를 바라지도 않고, 자식도 안 하는 상황이지만 결코 포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에요. 효는 어디 내다 팔래야 팔 수 없는 한국인의 아주 기본적인 사상이자 문화 사상으로 한국인만이 가지고 있는 정서니까요. 2018년에 동계 올림픽을 하는데 외국인들이 많이 왔을 때 ‘한국은 효의 나라다’라는 게 선전되면 얼마나 좋겠어요(모두 웃음).
△ 이현옥 회장: 생전이나 사후에도 예에 벗어남이 없어야 합니다. 즉, 살아 계실 때도 예를 지켜야 하나 돌아가신 후에도 예를 지켜야 합니다.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자(慈)라면 자식의 부모 사랑은 효(孝)라고 합니다. 부모는 진 땅을 걸어가도 자식은 마른 땅을 걸어가기 바라는 게 부모입니다. 그래서 전체를 바쳐 희생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인프라 구축이 우선시되려면.
△ 최종수 이사장: 정부의 지원도 중요하지만, 그럴 수 있는 분위기가 먼저 조성돼야 합니다. 내가 과천문화원장을 8년 정도 하고, 전국문화원 회장을 4년 동안 했어요. 그러면서 체계적으로 구축하여 효 문화를 선도하려는 효 문화센터를 만들려고도 했죠. 그러나 주변에서 ‘왜 저렇게 판을 벌이나’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어요. 그러니 그런 것을 하려고 해도 먼저 주변의 인식과 분위기를 바꾸지 않으면 안 돼요.
△ 권혁승 회장: 국내 효 문화를 바로잡고 육성, 창달해야 하지만 아울러서 교양을 갖출 수 있어야 해요. 효는 한국 고유의 문화예요. 이 문화가 옛날 중국이나 일본에서 온 게 아니죠. 물론 서양에서도 방식이 다를 뿐 효도를 잘 하죠. 영국의 역사 철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책에 ‘인류문화 발전을 위해 한국이 크게 기여한 게 있다. 그것이 한국인의 가족제도와 효 사상이다’라고 썼어요. 그는 이러한 효 사상을 전 세계에 번지도록 해 모든 세계인이 가족을 사랑하는 정신이 퍼졌으면 좋겠다는 뜻을 설파했고요. 소설가 톨스토이도 “불효하는 사람은 벗으로 삼지 말라”고 했어요. 미국연방준비제도 의장을 지낸 버냉키(Bernanke)도 미국 프리스턴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이제 여러분은 졸업을 하니 매주 한 번씩 부모님에게 전화해라”라고 말했습니다. 생일에 선물을 사주고 하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1주일에 몇 번씩 전화 걸어 안부를 여쭙는 것이 한국 효의 기본입니다. 이러한 점이 전 세계에 한국인이 어깨 펴고 이야기할 수 있는 자랑거리가 될 수 있고, 자부심이라 할 수 있어요.
한국의 효 사상을 세계에 널리 알려서 모든 세계인들이 한국의 효 사상을 본받고 한국하면 ‘아! 효의 나라’라고 생각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더 나아가서는 효 문화를 유네스코 문화재로 등록한다든가, 널리 번지도록 힘써야 해요.
△ 이현옥 회장: 이런 분위기를 조성해서 좋은 일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여 정부와 언론이 주목하고, 효에 대한 인식이 관철됐으면 합니다.
△ 권혁승 회장: 효에 대한 좌담회는 한국 언론사, 매체 사상 처음 있는 일 아닐까요? 아마 단군 이래 최초일 것 같아요. 오늘로 끝내지 말고 계속 이어갔으면 좋겠어요. (웃음)
Q. 효 문화 확산을 위해 어떤 일을 하고 계시나요?
△ 최종수 이사장: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의 타고난 소질과 능력을 개발해 나의 길을 찾고 이웃과 사회를 위한 사랑과 봉사가 바로 ‘효’라는 것이죠. 이를 위해 시대에 맞는 효 문화의 창출이 바로 인성 교육의 출발점이라고 보고 한국효문화센터를 2011년 시작했어요.
한국효문화센터는 효에 관련된 교육과 행사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진정한 효가 무엇인지 되돌아보며 자신에 대한 사랑의 첫걸음을 시작으로 하는 인성 교육과 밝고 건강한 사회 구현이 목표예요.
예술단체장들이 효 문화사업을 하면서 학술회의도 하고, 학생들을 모아 토론한 내용들을 토대로 효 문화를 어디서부터 시작을 해야 하는지 단초를 발견했어요. 요즘 고등학생들은 입시에 시달리지만, 그중에서도 고전 등을 훤히 꿰뚫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라 하지만, 마냥 그럴 것이 아니라 헌혈도 하고 기증도 해서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낫지 않느냐는 의견도 나왔죠. 그러한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 시대에 효 문화사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해줬어요. 아이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수준에 맞는 효 문화사업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렇게 글짓기, 그림 그리기 대회도 하고, 매년 토론회도 열면서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있어요. 국내 최대 규모의 ‘효’를 주제로 한 문화축제로 1회성 행사로 할 수밖에 없는 여건이지만 그만큼이라도 확실히 효과가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상을 받는 아이들과 부모님들을 만나보면 그때만이라도 가족끼리 효에 대해 이야기하고, 부모를 생각한다고 하거든요.
△ 이현옥 회장: 효 문화라는 건 다들 잘 알고 있지만 실천하는 게 어려워요. 어머니가 살아 계실 적에 특히 5형제 중 셋째인 나를 많이 아끼셨고 사랑을 주셨죠. 공직생활 중에도, 사업을 할 때도 어머니가 편찮으시면 달려가 돌봐드리는 등 장남 역할을 했어요. 고향 마을에 1981년 대덕연구단지가 들어서면서 선산을 세종시 조치원으로 이전해 효림원을 조성했어요. 어머니는 그 안에 있는 농가주택에서 4개월 동안 고생하시다 90세에 돌아가셨고, 5일장을 치렀어요. 매년 시묘살이를 하기 위해 내려갔고 거기 가서도 돌아가신 어머니와 대화도 나누고 3년 탈상을 했는데 마을 회장이나 이장이 그 모습을 눈여겨봤나 봐요. 그러다 매년 추모식을 하면서 마을 사람 100명을 초대해 아이들에게 선물도 주고, 면장 추천을 받은 어려운 학생들에게는 500만원씩 장학금도 수여하는 행사를 진행했죠. 사실 3년만 하고 그만두려 했는데, 막상 해마다 해온 것을 그만두기는 어려웠어요. 나로서는 자식의 도리로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소문이 나자 군에서 우리 마을을 성균관장에게 추천해 각지에서 몰려와 선전을 해주고, 포상도 받았어요. 나중에 알고 보니 마을 사람들이 1만원, 5000원씩 자발적으로 980만원을 모아서 선산 공원 입구에 효비를 들여놓았어요. 마을이 효의 고장이니까 “마을 입구에 ‘효림원’이라고 세워 놨어요. 그때 어머니가 옥색 한복을 입고 꿈에 선명히 나타나시더니 ‘마을에서 이렇게 효비도 세워주고 행사도 열어줬는데, 너도 고마운 뜻을 표시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어요. 작은 유통업을 하던 나는 영농조합 농장을 하나 인수했어요. 그곳에서 생산하는 오이, 토마토, 배 등 농산물을 국가유공자 요양원이나 보훈병원, 군부대 등 10여 기관에 기증하고 있어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지역의 소득 증대도 되고, 고용창출도 되니 농민들이 굉장히 좋아합니다.
△ 권혁승 회장: 7년째 백교문학상 효친문학상 작품을 전국적으로 공모하는데, 글과 시 속에 효 사상, 효심 또는 모정이 깃들어져 있는 작품을 심사 기준으로 삼아 상을 주고 있습니다. 아무리 잘 쓴 글이라도 사친과 관계없는 글은 입선이 안 되죠. 자식들은 부모가 그렇게 사랑을 줘도 사랑인 줄 몰라요. 일상에서 공기를 마시듯 깨닫지 못하는 것이죠.
강릉 시골 마을에다가 사모정 정자를 지었어요. 마을의 쉼터가 되라고. ‘사모정’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이라 해서, 한쪽에는 도예 조각 하는 교수님의 작품도 세워 놨죠. 정자를 강릉시에 기증했는데 하고 나니까 주변에서 그 정자만 가지고 효 사상이 함양되겠느냐 해서 ‘사친문학상’을 만들라 하더라고요. 그걸 만들어 전국적으로 등단한 문인을 대상으로 작품공모를 하고 있어요. 거기다 이 사상을 전 세계에 알려야 되겠다는 의미를 담아 이라는 책을 만들었어요. 국내 200여 도서관에 비치했고, 영어판을 제작해 65개국 130개 도서관에도 전달했어요. 유엔, 세계은행에도 책이 있어요. 대통령, 교육부장관, 문화부장관 등에게도 돌리고,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보냈는데 잘 전달이 됐는지는 모르겠어요(웃음).
작년에 사모정이 있는 공원이 너무 좁다고 해서 확장공사를 1년간 했어요. 높이가 3m인 고석에 ‘효 사상 세계화의 발원지 효향 강릉’이라 쓰고 밑에 영어로도 써놓았어요. 그 옆의 돌에도 효에 대한 글을 영어와 중국어, 일본어로 새겼어요. 오는 9월에 도 창간할 예정입니다.
“수영이요? 이제 무엇이 좋다 나쁘다 이야기하기 어렵게 됐어요. 생활의 일부가 되었으니까요.” 서울 서대문구에 있는 서대문문화체육회관에서 만난 서은희(徐銀姬·57)씨의 이야기다. 그녀는 올해로 수영경력 24년의 베테랑이다. 그 24년이라는 기간보다 더 대단한 것은 거의 빠짐없이 1주일에 3일은 수영을 해왔다는 것이다. 수영이 직업이었다면 ‘장인’이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이다. 글·사진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처음 수영을 시작한 것은 이곳이 서대문 YMCA수영장이라는 이름으로 1993년에 개관할 때였어요. 그때 제 나이가 34살이었는데, 더 나이 들기 전에 운동을 시작하자는 마음으로 수강을 하게 됐죠. 경쟁이 꽤 치열해서 새벽부터 나와 줄 섰던 기억이 나요.”
타고난 운동신경도 있는 데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시작한 터라 수영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게 몸에 익어갔다. 강사들의 칭찬도 그녀가 힘차게 팔을 저을 수 있는 원천이 됐다.
물 위를 오가는 그녀의 실력은 수치로도 증명됐다. 바로 메달이다.
“과거에는 같은 구의 몇 개 수영교실 회원들끼리 모여 겨루는 구청 개최 경기가 많았어요. 저는 자유형과 배영이 주 종목이었는데, 우승 메달이 넘쳐 나중에는 주번 지인들에게 나눠줄 정도로 넘치기도 했죠. 우리 클럽의 수준이 높은 편이었기 때문에 단체전에서도 메달을 놓치는 법이 없었어요.”
오랜 기간 수영을 해 온 덕에 건강만큼은 누구보다 자신 있다고 이야기하는 그녀다. 남들 다 걸리는 감기도 늘 그녀에게만큼은 남의 일이었고, 아직도 25m 정도는 잠수로 단숨에 내달릴 수 있을 만큼 거뜬하다.
“심폐능력과 지구력은 운동하지 않는 분들과 차이가 나는 것 같아요. 또 같은 수영교실의 선배들을 보면 삶의 활력이 느껴져요. 당연히 모두 건강하고요. 회원들과 함께 나이가 들어가면서, 젊을 땐 몰랐던 건강과 체력의 소중함을 알게 됐고, 수영이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새삼 깨닫게 됐어요.”
서은희씨는 초보자들이 수영을 시작하면서 가져야 할 덕목은 ‘인내심’이라고 조언했다.
“수영교실을 다니다 보면 처음 시작하는 분들을 많이 봐요. 그런데 그분들 중 상당수는 얼마 버티지 못하더라고요. 이런 새내기들과 이야기할 기회가 많은데, 그때마다 전 대부분의 고민은 시간이 해결해주니 꾸준히 하시라고 이야기해요. 수영은 시간이 필요한 운동이거든요. 그냥 묵묵히 연습하다 보면, 익숙해지기 마련이에요. 처음부터 조급할 필요가 없어요.”
수영이 주는 또 다른 매력으로 그녀는 ‘함께 하는 사람들’을 꼽았다. 가족보다 더 함께하고, 이야기 나누는 시간이 많다 보니 이제는 서로의 숟가락 개수까지 알 정도가 됐다. 이런 소중한 인연을 더 뜻깊게 하기 위해 ‘울타리 봉사회’를 만들었고, 초창기부터 참여했던 서은희씨가 모임을 이끌어 나가고 있는 상태다.
그녀가 이 문화체육회관을 통해 접한 또 하나의 인연은 ‘압화(押花)’. 수강생으로 시작해 지금은 매주 금요일 직접 수강생들을 가르치는 강사가 됐다. 화원 프레스플라워 중앙회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주변에서 만나자거나 밥을 산다고 해도 수영 수업과 시간이 겹치면 거절해요. 수영을 몸이 기억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수영 수업에서 만나는 사람들이 소중하기도 하니까요. 1주일에 세 번 짧은 수업이지만, 이 시간이 제게 주는 영향은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너무나 소중합니다. 다른 분들에게도 꼭 권하고 싶어요.”
마침내 소줏고리의 주둥이 끝에 작은 이슬이 맺힌다. 마치 옥구슬 같은 이슬이 한 방울씩 떨어질 때마다 정재식(鄭宰植·53) 예도(藝道) 대표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진다. 그러기를 잠시, 이슬이 모여 물결을 일으키기 시작하자 부드럽고 무거운 향이 주위를 감싼다. 향기의 끝에서 달콤함이 느껴지자 안심했다는 듯 어머니 유민자(柳敏子·73) 명인이 허리를 펴고 일어난다. 유씨(柳氏)가문의 가양주 옥로주가 완성되는 순간이다.
글 이준호 기자 jhlee@etoday.co.kr 사진 이태인 기자 teinny@etoday.co.kr
옥로주(玉露酒)는 경상남도 하동의 유씨 가문이 대대로 전수해 온 가양주다. 가양주(家釀酒)란 말 그대로 집에서 담근 술. 유민자 명인은 어린 시절 집안에서 담가오던 술을 기억했다.
“집안 어른들이 매년 술을 담갔던 것이 기억나요. 늘 그것을 보고 자랐으니까. 일제 강점기 때는 술 빚는 것이 금지됐지만, 몰래 담가 대나무 숲에 묻어두기도 했어요. 순사들이 귀신같이 찾아내 깨부수면 다시 빚기를 반복했어요.”
그렇게 대대로 이어진 집안의 비기(秘技)가 자연스레 전수돼 평탄하게 이어져 온 것으로 예상했지만, 뜻밖에 숨은 사연이 많았다.
“부친으로부터 전수받은 기술을 현대화하기 위해 아들이 나서주었죠. 아들은 과거의 기록들을 발굴하고 국가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경상대학교, 동국대학교 등 여러 곳을 다녔습니다. 또 궁중요리가도 만나 옥로주를 인정받기도 했어요. 덕분에 1994년에 무형문화재로 등록될 수 있었어요. 그리고 아들은 원하던 미술공부를 위해 프랑스로 떠났죠. 그게 아쉬워요.”
1996년 유 명인은 정부의 전통식품 명인 10호로 지정돼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처음에 사업은 잘되는 듯했다. 옥로주의 맛과 향에 애주가들이 매료돼 술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연 매출 10억원을 넘어섰고, 당시 김대중 대통령에게 직접 ‘진상’하는 영광까지 맛봤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에선 만찬주로 선정됐다.
하지만 평생 술에만 매달렸던 장인이 경영에 능숙할 리 없었다. 아들의 부재도 독이 됐다.
“제가 손이 커서 여기저기 술을 퍼주기도 했고, 술의 인기가 높아지자 경영에 다른 사람들이 참여한 것도 문제였죠. 엄청났던 주세(酒稅)를 고려하지 못했던 것도 실수였어요.”
결국 엄청난 규모의 부도가 났고, 빚을 떠안게 됐다.
당시 아들인 정재식 대표는 술과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해 1998년부터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한국미술협회 판화분과 위원장을 맡을 정도로 미술계에서 확고한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그러다 2013년 학교를 떠나 지금의 예도를 설립한다. 가문과 어머님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학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정 대표는 이야기한다.
“어머니가 그동안 쌓아 올린 명예가 무너지는 것을 볼 수는 없었으니까요. 옥로주는 어머니의 희로애락이 담겨 있는 술이기도 하고요. 전혀 다른 분야처럼 느껴질 수 있지만, 술을 빚는 것이나 미술은 한 분야라고 생각합니다. 장인정신이 필요하다는 동질성도 있고. 예도주가(藝道酒家)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문입니다.”
실제로 정 대표는 본인의 미술적 감각을 살려 옥로주를 담는 술병을 직접 디자인했다.
유민자 명인은 비록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 다시 시작하게 되었지만, 아들에게 집안의 전통을 물려줄 수 있게 된 것에 무척이나 안심하고 있다.
“술을 빚는 것은 엄청나게 까다롭고 예민한 작업이에요. 파리 한 마리만 입을 대도 쉬어버리는 것이 술이니까요. 이젠 옛날 방식으로 누룩을 만드는 곳도 거의 사라져 누룩을 재현해 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속 편히 술을 만들 수 있으니 행복하지 않을 수 없죠.”
옥로주가 가업으로 계속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에 두 모자는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대학생인 아들이 벌써 관심도 많고 가끔 돕기도 해, 후대는 걱정없다는 것이 정 대표의 설명이다.
그렇게 명인이 직접 버무리고 빚은 술은 2014년부터 본격 제조되기 시작돼 올가을 추석 대목을 맞이해 출하할 예정이다. 전통주의 깊은 향을 더욱 살리기 위해 3년 숙성을 기본으로 하겠다는 다짐이다. 현재는 과거 옥로주의 깊은 향을 잊지 못하는 애호가들을 대상으로만 주문 판매하는 상태다.
정 대표는 “옥로주의 장점은 부드러운 목넘김과 깊은 향에 있습니다. 율무가 들어가 술이 부드럽고, 독하지만 금방 취하고 금방 깨며 숙취도 없습니다. 술이 장(腸)까지 내려가기 전에 깬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니까요.(웃음)”라고 말했다.
“자네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1994년 1월, 현대건설 이사였던 최동수(崔東秀·77)씨가 사직서를 내밀자 고(故) 박재면 회장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삼성이나 롯데에 가려고 그만두는 거냐?”는 물음에 “기타를 만들겠다”고 대답하자 더욱 황당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당시 현대건설은 국내 건설업계 1위 업체였고, 잘 나가는 건축담당 이사였던 최씨의 갑작스러운 은퇴를 쉽게 받아들이는 것이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최씨의 선택은 하루아침에 결정된 것이 아니다. 기타를 만들고자 한 것은 학창시절부터 고이 간직해온 그의 꿈이었고, 20여 년에 걸친 아내와의 약속이었다.
아내와 애인(?)을 위한 선택 ‘은퇴’
최동수씨가 아내인 수필가 허숭실(필명)씨와 연애하던 시절의 일이다. 덕수궁 후원을 걷던 최씨는 허씨에게 엉뚱한 고백을 했다. “당신과 데이트하느라 내 애인을 돌보지 않았더니 그녀가 병들었소. 오늘 당신에게 그 애인을 소개해 주리다.” 허씨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그의 애인을 만나러 가자고 했다.
그러자 최씨는 들고 있던 기타를 무릎 위에 척 올려놓고는 “기타가 바로 내 애인”이라고 털어놨다. 그가 말한 애인이 사람이 아닌 기타라는 사실에 그녀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허씨 앞에서 최씨는 “그동안 데이트 자금을 마련하느라 애인을 전당포에 맡겨두었더니 습기가 차 피부가 트고 몸도 틀어져 속상하다”며 기타를 쓰다듬었다고 한다. 그 모습을 본 허씨는 ‘풋내기 예술가’를 발견한 듯 반가움에 가슴이 뛰었고, 그날의 감동이 결국 그녀를 ‘기타 만드는 남자의 아내’로 만들었다.
최씨의 기타 사랑은 고등학생 시절 읽은 한 소설을 통해 시작됐다. 지금은 책 제목도 가물가물한 일본 소설이지만, 당시 전쟁터에서 다리 불구가 된 주인공이 창녀가 된 아내의 집 근처 전봇대 아래에서 기타 연주를 하는 장면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그 이후 기타에 매료돼 아버지를 졸라 기타를 하나 샀지만, 아무리 연습해도 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결국 직접 취향에 맞는 기타를 손수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한다. 마땅한 재료가 없어 집안의 오동나무 장롱 서랍을 뜯어가며 기타를 제작하기 시작했고, 그때부터 결혼해서 얼마 동안은 틈틈이 기타를 만들었다. 하지만 건축설계 사무소를 운영하면서 밤낮으로 기타 만들기에 몰두하는 그의 모습을 본 아내는 견디다 못해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아이들 교육을 다 마치고 난 뒤에 기타를 만들면 그때는 전폭적으로 지지하겠어요.” 아내의 말에 그는 본업에 충실하기로 마음먹고 1975년 현대건설에 입사한다. 입사 후, 18년을 바레인, 사우디아라비아, 이라크 등 타국에서 지내며 아침 6시부터 자정까지 밥벌이에 몰두했다. 그러던 어느 날, 1993년 그가 싱가포르에서 근무하던 때, 아내는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외로움도 암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에 그는 조기 은퇴를 결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남은 인생은 아내와 함께 즐겁게 살다 가겠다고 다짐하던 최씨에게 한 가지 꿈이 피어올랐다.
“사표를 내기 전 아내에게 ‘나 기타 만들까?’라고 물어봤죠.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계산기를 가져와 탁탁 두드리더니 ‘앞으로 삼시 세끼 먹는 데는 문제없겠네요. 인생 1막은 아이들을 위해 물질에 투자했으니, 2막은 당신의 정신적 자유에 투자하도록 해요’라며 흔쾌히 제 결정을 받아들이더군요. 20년 전, 아이들을 키우고 나면 기타를 만들어도 좋다고 했던 그 약속을 지킨 거죠.”
그렇게 그는 아내와의 여생을 위해, 그리고 애인과의 재회를 위해 은퇴를 결심했다.
‘소리가 나는 작은 집’을 건축하다
기타 제작을 결심한 그는 그동안 지내던 서울의 아파트를 정리하고 경기도 고양시 일산으로 이사했다. 31년간의 건축가 경험을 살려, 마당이 딸린 집을 직접 지었다. 아늑한 그의 집은 ‘행운의 열쇠’ 모양을 따서 설계한 1층을 지나면, 기타 제작 공간인 지하실 ‘목운(木韻: 나무에서 소리가 난다는 뜻) 공방’이 나온다. 최씨의 꿈과 애정이 깃든 이곳에서는 1년에 단 2대의 기타만이 세상 밖으로 나온다. 딸을 키운다는 생각으로 기타를 만들고, 시집보내는 마음으로 기타를 파는 그다. 이 때문에 최씨는 기타를 파는 게 아니라 “백마 탄 기사에게 시집보낸다”라고 말한다. 딸을 키우는 심정으로 정성을 다하는 그이지만, 아무래도 기타를 만드는 데는 숙련된 솜씨가 뒷받침돼야 할 터. 기타 제작을 위한 그의 노력도 대단했다.
“은퇴한 첫해에는 미국 힐즈버그(Healdsburg)에 있는 아메리칸 기타스쿨에 입학했어요. 이듬해에는 스페인 코르도바(Cordoba)의 기타페스티벌에서 마에스트로 호세 로마니요스(Jose Romanillos)에게 제작 마스터 클래스를 지도받았죠. 두 과정 모두 한국인으로는 처음이라고 해요. 현재는 미국 현악기 제작가 협회(GAL: Guild of American Luthiers)의 유일한 한국인 회원이기도 하고요.”
기타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18년간의 해외생활은 그의 꿈을 실현하는 디딤돌 역할을 했다. 해외 근무라는 이점을 활용해 외국의 공방과 자재상들을 찾아다니며 제작에 필요한 공구를 수집한 것. 그렇게 오랜 시간 기타를 만들기 위해 준비해온 만큼 그는 욕심을 내거나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의 시계는 꼬박꼬박 기타를 위한 시간으로 쉼 없이 달려가고 있었다. 집 지하실의 기타 공방으로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하고 오후 6시에 퇴근한다. 야근도 마다치 않는다. 그렇게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드는 기타는 1년에 2대 남짓이다. 기타 제작 과정은 단번에 결과물을 내기보다는 완성까지 꼼꼼한 설계와 인내가 바탕이 돼야 하는 건축일과 닮은 점이 있었다.
“기타는 ‘소리가 나는 작은 집’과 같아요. 제 인생 전반전을 장식한 싱가포르 선텍 시티(Suntec City), 카타르 국립대학 건물, 이라크 북부역사 등을 짓는 것처럼 기타를 만드는 일도 미학적 판단과 설계가 필요한 종합 예술이죠.”
세상에 단 하나뿐인 ‘최동수표 악기’
오랜 꿈, 아내의 내조를 밑천 삼아 시작한 기타 제작은 꾸준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처음에는 친구나 동료 등 지인에게 주기 위해 만들었는데, 근래에는 서정실, 변보경, 배장흠 등 유명 기타리스트에게 기타를 헌정했다. 대개 유명 기타리스트의 경우 독일이나 프랑스 등 해외 장인이 만든 것을 사용하는데, 그런 이들이 그가 만든 기타를 쓴다는 것은 이미 실력이 아마추어 수준을 넘어섰음을 증명한 것이다. 그의 기타는 보통 1대당 1000만원 가량이다. 예상한 가격보다 비싼 값을 받을 때도 많지만, 그가 공짜로 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필요한 사람에게 자신의 기타를 주는 것은 결코 공짜 거래가 아니라고 말한다.
“어떻게 돈으로 그 가치를 표현하겠어요? 대부분 손님이 알아서 가격을 정해서 지급하죠. 조금 손해 보는 경우가 있을지 몰라도, 결코 손해가 아니랍니다. 내가 공짜로 기타를 주면 어떤 이는 나에게 훌륭한 그림을 주기도 하고, 좋은 책을 보내기도 하니까요. 악기는 파는 게 아니라 인연을 만드는 과정이라 생각해요. 악기는 내 딸인데, 내 딸을 데려갔으면 그도 사위처럼 내 자식이 되는 거지요.”
그는 팔기 위해 만드는 것은 단순히 ‘기타’라 하겠지만, 아름다운 소리를 내기 위한 단 하나의 ‘악기’를 만들고 있다고 설명한다. 판매나 주문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상상했던 모습의 기타를 하나둘씩 실물로 탄생시키는 최씨다.
온도와 습도가 적당한 봄철이면 기타를 만들기 적합하다. 이 시기에 결의 방향과 울림이 좋은 나무를 골라 온도를 맞춘 작업실에 한 달가량 둔다. 그다음 색을 입히는데, 그는 붓 대신 천으로 만든 솜방망이로 문질러 칠하는 방식을 고수한다. 한 번 칠할 때마다 100~150번을 문지르고, 이 과정을 100번 정도 반복해야 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서너 달이 걸리기 때문에, 기타 한 대를 만들고 나면 3~5kg씩 체중이 줄곤 한다.
하지만, 이러한 고통에도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작업은 튜닝이다. 아무리 독특하고 멋진 기타라도 그 감탄은 오래가지 못한다. 결국 기타도 악기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은 소리다. 나무마다 고유한 진동이 있는데, 이를 조화롭게 맞추기 위해 일일이 손으로 나무 두께를 가늠해 조율한다. 기타의 모양이 나오면 제대로 된 소리를 얻기 위해 대전의 음향 전문가에게 보내 진동 실험을 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다시 튜닝을 한다. 튜닝은 한 달이 걸리기도 하고 반년이 걸리기도 하는데 하다가 안 되면 다시 뜯어서 처음부터 만들어야 한다.
“기타리스트 배장흠씨의 기타도 앞판을 세 번, 뒤판을 두 번 바꿔가며 튜닝을 마친 작품이에요. 그는 기타가 만족스러웠는지 고맙게도 그 이후에 제가 만든 기타를 두 대 더 구입했죠. 2014년 7월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공연 무대에서도 제가 만든 기타로 연주했어요. 딸을 시집보낸 입장에서는 참 뿌듯하고 기분 좋은 일이죠.”
요즘 그는 리라(lyre: 고대에 사용한 발현악기) 모양의 기타 제작에 몰입하고 있다. 원래는 일흔넷까지만 기타를 만들려고 했지만, 여전히 46번째 기타 만들기에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는 그동안의 기타와의 인연을 모아 만든 책 (가제)를 준비하고 있다. 기타를 통해 천상의 소리를 선사하고, 책을 통해 기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게 목표다.
“어언 나이가 차서 손을 거둘 날이 가까워져 오잖아요. 그전에 꿈속에서 상상만 하던 리라 기타와 같은 작품을 몇 가지 만들어 보고 싶어요. 또, 책이 출간되어 많은 분이 제 이야기를 읽어준다면 기타 제작 생애의 목표의 반은 성취한 셈이죠.”
시계의 역사는 인류 문명의 발전과 함께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초의 시계는 자연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해가 뜨고 지고 달이 차고 기울고 조수간만의 차이가 생기는 자연의 순행에서 인간은 시간이라는 개념과 함께 이를 물리적으로 표시하는 시계라는 도구를 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글 장세훈(張世訓)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학계에서는 기원전 3000년 전 고대 이집트의 해시계를 시계의 기원으로 보고 있으며, 영국의 전설적인 거석기념물인 스톤헨지 또한 실제 용도는 해시계였다는 주장이 지배적이다. 한편 고대 그리스인들은 날씨가 흐리거나 야간에도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클렙시드라라는 물시계를 발명했고, 1434년 장영실이 세종대왕의 명을 받아 완성한 자격루 또한 물시계의 작동 원리를 응용 발전시킨 것이었다. 이밖에도 모래로 시간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모래시계와 기름의 연소량을 시간 계측에 활용한 램프시계도 중세시대에까지 널리 사용되었다.
시계의 역사는 이토록 오래되었지만, 근대적인 개념의 기계식 시계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건 17세기 중반부터다. 물리학 및 관측천문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기계식 시계의 이론적 토대인 진자의 등시성 원리를 16세기 말에 발견한 것을 기점으로, 네덜란드 태생의 물리학자 크리스티안 호이겐스는 이를 최초로 시계에 적용해 시계 제작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 그가 1675년 개발한 진자시계는 후대의 과학자들과 시계 제작자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고, 그들의 손을 거치며 점차 다양한 종류의 시계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탁상시계와 휴대가 간편한 회중시계가 유럽의 귀족과 부유층을 중심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편으로는 시계가 인류의 생활 깊숙이 뿌리내렸음을 의미했다. 물론 그 시절만 하더라도 휴대용 시계는 일반 서민들은 쉽게 볼 수조차 없는 사치품이었다. 유명 시계 제작자들은 주로 왕가나 귀족들을 위해서만 소량씩 주문제작방식으로 시계를 제작했고, 긴 체인을 연결해 양복 포켓 안에서 수시로 꺼내 볼 수 있는 회중시계는 특권층의 권력을 과시하는 수단이 되면서 귀금속 케이스로 제작한 시계들이 각광을 받았다.
한편 회중시계는 기술적으로도 당대 시계제작자들의 도전정신을 자극했다. 크기가 큰 추시계류와 달리 회중시계는 부품들의 사이즈부터 매우 작고 더욱 정밀한 가공이 요구됐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마이크론 단위까지 정확하게 측정, 절삭할 수 있는 기계들이 앙트완 르쿨트르 등 몇몇 선구적인 인물들에 의해 19세기 초반에 개발되었다.
프랑스에서 주로 활동한 스위스 태생의 시계 제작자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는 18세기에 등장한 가장 중요한 시계 제작자이자 시계 역사상 어쩌면 가장 영향력 있는 발명가 중 하나로 손꼽힌다. 최초의 셀프와인딩(로터의 회전에 의해 자동으로 태엽이 감기는 형태의) 시계였던 퍼페추엘(1780년)을 비롯해, 훗날 브레게의 상징이 된 정교한 패턴의 기요셰 다이얼(1786년)과 파랗게 열처리를 한 브레게 핸즈(1783년), 충격 흡수장치인 파라슈트(1790년), 브레게 헤어스프링으로 불리는 탄성과 내부식성이 탁월한 밸런스 스프링(1795년), 그리고 지지대 역할을 하는 케이지 안에 끊임없이 밸런스 휠을 회전시켜 중력을 상쇄하는 혁신적인 설계의 투르비용(1801년)에 이르기까지 현대 기계식 시계 제조의 기틀이 되는 여러 중요한 발명들이 브레게 한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브레게는 회중시계 시대를 앞당긴 인물이면서 훗날 손목시계의 등장까지 예견한 진정한 의미의 천재였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시계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변화가 가시화된다. 바로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의 세대교체가 그것이다. 최초의 손목시계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만, 1904년 루이 까르띠에가 친구인 조종사 산토스 뒤몽을 위해 제작한 까르띠에의 ‘산토스’를 최초의 현대적인 손목시계로 꼽는다. 케이스 모서리를 둥글린 사각에 가까운 케이스, 두툼한 러그, 착용감을 고려한 아담한 사이즈는 산토스를 당시의 어떠한 시계와도 차별화시켰다. 까르띠에는 또한 제1차 세계대전에 투입된 프랑스의 전투 장갑차에서 착안한 아이코닉한 사각시계 ‘탱크’를 1917년 탄생시켜 일찍이 손목시계 제조사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IWC, 론진, 호이어(태그호이어의 전신) 등 여러 제조사들이 손목시계 제조에 발 빠르게 합류했다. 특히 롤렉스는 세계 최초의 방수 케이스인 오이스터(1926년)를 비롯해, 오토매틱 무브먼트인 퍼페추얼(1931년), 자정 무렵 날짜창이 자동으로 변경되는 시계 데이트저스트(1945년), 최초의 다이버 시계 서브마리너(1953년) 등 몇몇 선구적인 발명으로 손목시계 시대를 앞당긴 동시에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시계 브랜드로 거듭나게 된다.
손목시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용시계로 인기를 모으면서 대중적으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됐다. 종전 직후인 1950년대에는 이미 스위스 시계업계가 주류로 군림했다. 1960년대 말까지 스위스 시계 산업은 전례 없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고 시계는 더 이상 사회 고위층만의 전유물이 아닌 대중도 향유할 수 있는 수준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본의 세이코를 필두로 한 쿼츠시계의 광풍에 밀려 스위스 시계 산업은 1990년대 초까지 기나긴 암흑기에 접어들게 된다. 기계식 시계와 달리 수정자와 배터리로 작동하는 쿼츠시계는 적은 제조비용으로 훨씬 더 많은 시계를 생산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특유의 정확함으로 소비자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1990년대에는 쿼츠시계에 싫증을 느낀 사람들이 기계식 시계를 찾기 시작했고 2000년대 접어들면서 기계식은 쿼츠와 사이좋게 시장을 양분할 만큼 다시 예전의 선호도를 되찾는다. 각종 컴퓨터와 스마트폰이 일상의 주축이 된 요즘 수백 년 방식 그대로 제작되는 기계식 시계가 다시 높은 인기를 누리는 현상은 어찌 보면 난센스처럼 보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기계식 시계를 선호하는 이들이 많다는 것은 쿼츠시계에서는 느낄 수 없는 기계식 시계만의 예스러운 감성과 장인정신, 그리고 예술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좋은 시계란 무엇인가? 명품 시계에도 트렌드가 존재하는가?
좋은 시계의 기준이란 어찌 보면 상대적이고 자의적인 개념이다. 기술적으로나 미적으로 그리 훌륭하지 않은 시계일지라도 한 개인의 관점에선 충분히 최고의 시계로 비칠 수 있다. 또한 소중한 추억이 담긴 시계라면 가격대를 떠나서 그 자체로 특별한 가치를 갖게 마련이다. 특정 시계에 ‘명품’이라는 수식을 붙이는 것 또한 조심스러울 때가 많다. 그럼에도 현실에는 주저 없이 명품으로 분류할 수 있는 시계들이 분명 존재한다. 단지 고가라서, 다이아몬드로 화려하게 장식을 해서, 누구나 알 만한 유명 브랜드라서 꼭 명품이 아니라, 정제된 디자인과 오래 봐도 질리지 않을 클래식한 다이얼, 우수한 설계의 무브먼트와 같은 요소들이 명품 시계를 규정하게 한다.
세상 돌아가는 순리가 그렇듯 명품 시계 시장에도 소위 말하는 트렌드라는 게 있다. 가령 20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하더라도 사이즈가 크고 대담한 디자인의 시계들이 세계적인 인기를 누렸다. 당시만 해도 신생 브랜드였던 위블로, 벨앤로스 등이 이러한 트렌드에 힘입어 시계 업계에 완전히 자리를 잡는가 하면, 전통적으로 빅사이즈 시계를 브랜드의 개성처럼 강조해온 IWC, 파네라이 같은 제조사들도 엄청난 혜택을 입었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명품 시계 업계의 트렌드는 과거로의 회귀로 규정지을 수 있다. 빅사이즈 트렌드에 대한 반발로 시계 사이즈를 다시 줄이기 시작한 제조사들이 늘어났으며, 지나치게 화려하고 스포티한 디자인 대신 단순하면서 고전적인 디자인이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수십 년 전의 헤리티지 모델을 현대적으로 복각하는 것도 업계의 주류로 자리를 잡았다. 반면 블랙, 화이트 다이얼 일색인 고급 시계 업계에 최근 들어서는 블루, 그레이, 브라운, 옐로 등 다양한 컬러가 도입되고 있으며, 단순히 색만 입히는 차원이 아니라 기요셰, 그랑푸 에나멜링, 핸드 페인팅 등 다양한 전통 다이얼 제작 기법까지 적용해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바쉐론 콘스탄틴, 파텍 필립, 까르띠에, 반클리프 아펠, 예거 르쿨트르, 율리스 나르당, 샤넬 같은 제조사들은 자체적으로 양성한 전문 에나멜러와 인그레이빙 장인, 주얼리 세팅 장인들을 활용해 다이얼에 예술성을 가미하는 ‘메티에 다르(Metiers d'Art)’ 시계들로 고급 시계 제조의 또 다른 예술적인 경향을 선도하고 있다.
시계와 사회성
시계를 순수하게 취미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과시하는 수단으로 여기는 이도 적지 않다.
소위 명품으로 분류되는 고급 시계 소비자들 중에는 해당 시계에 담긴 진정한 가치나 스토리텔링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해당 브랜드가 사회적으로 환기하는 아우라와 이름값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고급 시계가 사회 통념상 일반 소비재가 아닌 사치재로 통하기 때문에, 종종 신문의 사회면이나 방송에서는 부정부패한 방식으로 돈을 축적한 이들이 가진 재산을 은닉하기 위해 혹은 불법 로비를 위해 고급 시계를 구입하고 선물했다는 식의 가십성 기사도 종종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의 시계가 어찌 수천, 수억 원에 달할 정도로 고가일 수 있는지에 관해 묻기에 앞서 우리는 해당 시계가 지닌 본연의 가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시계 칼럼니스트로서 스위스 주요 시계 브랜드들의 시계가 제작되는 매뉴팩처(공장)를 방문할 기회가 있는데, 매뉴팩처 투어를 거치는 동안 가장 먼저 드는 생각 중 하나는 이토록 복잡하고 정교한 과정을 거쳐 제작된 시계가 비싸지 않을 이유를 발견하기도 힘들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의 고급 시계에 지불하는 금액 속에는 해당 브랜드의 오랜 역사와 전통, 제조 노하우가 담겨 있는 데다, 기계식 시계의 경우 수백 개의 작은 부품들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계되어 조립되고 나아가 각각의 부품들을 사람 손으로 일일이 다듬고 장식을 하기 때문에 주변의 흔한 대량생산형 저가 시계들과는 확연히 다른 프로세스로 완성됨을 알 수 있다. 오랜 경력과 출중한 실력을 가진 시계제작자를 가리켜 ‘마스터(장인)’라고 칭하는 것도 고급 시계 제조의 배경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시계는 분명 재화만 있다면 사고팔 수 있는 물건이지만, 때로는 돈이 있어도 살 수 없는 시계들도 있다. 하이엔드 시계 제조사들 중에는 시계를 단지 판매 목적이 아닌 브랜드가 지닌 기술력과 추구하는 가치를 최대치로 구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실험적인 시계를 제작하는 곳도 있다. 까르띠에가 2009년에 선보인 유니크 피스 ‘아이디 원(ID One)’과 2012년에 발표한 ‘아이디 투(ID Two)’가 그 대표적인 예로서, 시계 제조 방식에 새로운 혁신을 도모하고 궁극적으로는 더욱 완벽에 가까운 시계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반영한 결과라 할 수 있다.
까르띠에처럼 시계 제조 기술을 극한으로 밀어붙인 예가 있는가 하면, 바쉐론 콘스탄틴이나 반클리프 아펠처럼 최상의 예술적인 시계를 완성하기 위해 전통 공예 장인이 최소 2주에서 길게는 몇 달간에 걸친 수작업으로 완성한 유니크 피스들도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일부 시계애호가 및 수집가들 사이에서는 열렬한 지지를 받는 MB&F, 그뤼벨 포시, 로랑 페리에 등의 독립 시계브랜드들과 필립 듀포, 카리 보틸라이넨과 같은 존경받는 독립 시계 제작자들의 시계도 매우 한정된 수량만 제작되기 때문에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운 시계로 손꼽힌다. 이러한 귀한 시계들은 차후 소더비나 크리스티 등 세계 시계 경매에 출품돼 애초의 금액대를 훨씬 상회하는 경매가에 낙찰돼 화제가 되기도 한다. 예술 작품도 마찬가지겠지만, 흔히 볼 수 없어 희소하고 기술력과 예술적 표현의 한계에 도전한 마스터피스급 작품들은 반드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마련이다. 고급 기계식 시계가 세계 주요 경매에 단골손님이 된 것도 하나의 완성도 높은 시계는 예술품과 동등한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러한 귀한 시계를 향유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부류일까? 물론 기본적으로 부(富)도 따라야겠지만, 단지 부유해서만은 가질 수 없는 탁월한 감식안과 시계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열정, 그리고 좋은 시계를 가치에 맞게 즐길 수 있는 애티튜드(자세)를 지닌 자야말로 진정한 주인이 아닐까 싶다.
>> 장세훈 타임포럼 시계 칼럼니스트
타임포럼 주 필진으로서 시계 각 분야의 뉴스 및 심층 리뷰와 칼럼을 담당하고 있으며, 매년 바젤월드, SIHH, 워치스 앤 원더스 등 주요 시계 박람회를 취재해 기사화하고 있다. 또한 일본의 시계 전문지 스페셜을 번역 보완 출간한 를 감수 및 추가 저술했으며, 주요 시계 제조사와 대표작을 선별한 e-북 를 저술했다.
>> 타임포럼 소개
2006년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시계에 관한 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커뮤니티로 성장했다. 10만 명에 달하는 회원들이 직접 시계 구입 후기와 착용 소감, 다양한 질문과 답변 등을 주고받음으로써 시계에 관한 국내에서 가장 독보적이고 방대한 정보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다.
홈페이지: http://www.timeforum.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