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에게 넓은 길을 터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정도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인생 전반부의 정열을 바쳤던 첫 직장과 후회 없는 이별이었다. 인생 전반전을 마치고 시니어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던 찰나. 이렇게 당황스러울 수가. 역전의 용사는 다시금 회사로부터 부름을 받고야 말았다.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다른 곳으로의 항해 대신 회귀를 선택한 최찬식(59) 씨를 만났다.
“정년 3년을 남겨두고 명예퇴직했습니다. 조건도 상당히 괜찮았어요. 그땐 기분 좋았죠. 얽매이는 생활 안 해도 되니까요. 인문학 강의도 듣고 요가와 요리도 배우고 알차게 살았습니다. 바빴죠. 사회적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다시 돌아오라고 하더라고요.”
한국지엠 부평공장 옆 카페에서 만난 최찬식(59) 씨는 지난 5월 마침표를 찍었던 옛 일터로 다시 돌아왔다. 명예퇴직하고 또다시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직장으로 돌아가는 일은 흔하지 않다. 1986년, 한국지엠의 전신인 대우그룹에 입사한 최찬식 씨는 대구에 있던 대우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일을 시작해 1990년 말 대우국민차 공장이 있던 창원으로 사간전보를 갔다. 1996년 4월 부평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해외 자동차 공장 건설사업 분야에서 일했다.
“인도, 이란, 이집트, 베트남, 태국 등 세계 각 나라에 자동차 공장을 많이 지었어요.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를 다 만들어야 했어요. 그 차들을 생산할 수 있는 있는 설비를 현지에 가서 설치해야 했어요. 1998년까지는 참 좋았죠.”
1990년대 후반 대우자동차의 인기는 꽤 높았다. 부동의 1위였던 현대자동차의 아성을 대우차가 흔들었다. 이렇듯 대우는 국내가 아닌 해외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지으며 사업의 규모를 키웠다. 이쯤 되면 나오는 얘기가 바로 IMF 금융경제위기. 해외 사업을 통 크게 벌였던 대우그룹은 계열사 전체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우그룹의 몰락 중에서 자동차 사업의 인수 합병은 국가적 충격이었다.
“그때 인생이 조금 힘들었어요. 월급이 3개월 정도 안 나오기도 했습니다. 지엠(General Motors) 사가 대우자동차를 흡수하면서부터 월급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지엠 공장에 자동차 설비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어요. 해외 현지에 나가서 기획 단계에서부터 자동차 양산할 때까지 관리했습니다.”
자동차 양산 시점이 되면 철수하고 또 다른 나라로 향했다. 2010년까지 해외 지사에서 일한 이후 팀의 수장으로서 한국에서 해외 사업을 지원했다.
“물론 중요한 시점에는 공장을 짓고 있는 현지로 날아갔죠. 외국은 20~30군데 다녀온 것 같아요. 작년 3월 부장까지 달고 회사생활을 마쳤어요. 끝낼 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인으로 1년 살기
회사를 관두고 한 달 남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좀 쉬었는지 몸이 근질거려 작년 5월부터 듣고 싶었던 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휴식을 하겠다며 회사를 박차고 나왔는데 생각지도 않게 수료증이 쌓였다.
“5월부터 바삐 지냈습니다. 수료증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아닌데 연속으로 듣는 것도 있지만 두세 번만 들어도 수료증을 주는 데가 있다 보니 스무 개나 되더라고요. 중국어 공부도 하고, 재테크 관련 수업도 들었습니다.”
한국지엠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 잠깐 사회적기업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지혜의 밭’이라는 스타트업 기업이었다. 한 달 정도 기획과 관리를 도맡아 일했다. 설립한 지 1~2년 된 기업이었고 공연 예술 쪽 일을 하는 사업체였다.
“제 입장에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평생 공장에만 있던 사람이었고 대표는 예술만 아는 분이었죠. 회사를 이끌어가는 기본이 안 되어 있었어요. 제가 한글이나 파워포인트 같은 팁을 조금만 줘도 무척 감사해하더라고요.”
사회적기업에서 일하면서 안타까운 현실을 느꼈다고. 대표와 최찬식 씨가 맨땅에 헤딩하듯 일을 하고 열정을 쏟아 부어도 끝이 없었다. 회사에 3~4명만 있어도 상황은 좀 나았을 것이다.
“어느 순간 ‘이게 뭐지? 지금 잘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업의 수익 모델이 좋아서 성장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주말에도 일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측면에서 고민이 좀 있었습니다.”
퇴역 베테랑에게 날아온 SOS
사회적기업에 대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닐 때 한국지엠에서 연락이 왔다. 공장건설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해 달라는 전 직장 상사의 부름이었다. 함께 일할 조직은 이미 구성돼 있었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이렇게 또다시 회사에 들어와도 될까 싶더군요. 회사 측에서는 그런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들어오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기존 기업에 대한 의리가 있잖아요. 다시 회사로 돌아갔더니 먼저 온 사람 몇몇이 있었어요.”
한국지엠 입장에서 봤을 때 인재를 육성해야 하는 시간과 물리적 상황을 감안했을 때 신규채용보다는 기존에 일했던 사람들 중에서 쉬는 사람 혹은 다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게 이득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직장 상사는 제가 퇴직하는 것을 말렸습니다. 저는 후배들의 성장을 위해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서는 제가 일을 잘했다고 말하면 너무 건방진 것 같습니다. 회사를 나가기 전에 관계가 좋았고 일도 깔끔하게 처리했으니까 저를 불렀다고 생각해요. 문제가 있었다면 부르지 않았겠죠. 회사가 시대의 풍파 속에 쓸리고 깎이기는 했지만 32년을 한결같이 다닌 오랜 일터였습니다.”
스스로도 인복은 타고 났다고 생각한단다. 어딘가로 움직일 때마다 항상 은인을 만났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팀워크가 좋았고 헤어질 때도 인상 찌푸리는 일은 없었다.
아빠는 워커홀릭! 좀 쉬셔요
“명예퇴직을 결심했을 때 조건이 좋았긴 했지만,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30년 이상 하니 쉬고 싶었습니다. 또 들어올지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내의 불만도 제가 너무 쉬지 않고 일하는 거예요. 그래요. 워커홀릭(일 중독자)이 맞는 거 같아요.(웃음)”
최찬식 씨가 일을 끊임없이 하는 것에 대해 제일 반대하는 사람은 딸이다.
“쉬려고 나왔는데 왜 계속 일을 하느냐고 그러더군요. 사회적기업에 다닐 때도 출근시간만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 족히 걸렸어요. 딸이 일 그만두라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현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서, 언젠가는 사회적기업에서 제대로 일해볼 계획이라고 했다. 제가 직장생활에서 했던 경험을 조금이라도 알려주면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도와주면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진지하게 쉬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 너무 달려만 온 것 같다고.
“이런 얘기하면 우리 딸이 뭐라고 하냐면 ‘아빠는 못 쉬어, 두세 달 쉬면 또 뭔가를 할걸!’ 하고 말합니다.”
야심차게 은퇴했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제2인생을 시작한 최찬식 씨. 시니어 전문가로서 다시 돌아간 새(?) 직장에서 또 다른 가능성과 멋진 삶을 찾아가기를 기원한다.
점프슈트를 입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방미가 소녀처럼 웃었다. 특유의 눈웃음, 그리고 다부진 몸매, 허스키한 목소리로 팬들의 마음을 흔들며 데뷔한 40년 전의 얼굴 그대로라면 믿겠는가. 부동산 관련 책을 출간하고 저자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는 요즘 ‘BangmeTV’ 제작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면서 맨 얼굴로 그날그날의 이슈와 생각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재미와 의미가 더해지는 작업이란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는 여자 방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봤다.
MBC 2기 공채 개그맨으로 1978년 연예계에 데뷔한 방미는 1980년 ‘날 보러 와요’로 한국 가요계를 휩쓸었고 동명의 영화 출연료를 종잣돈으로 국내 부동산 투자를 시작해 해외 부동산까지 성공, 서울 강남은 물론 제주도까지 섭렵하며 큰 부를 쌓았다.
“1983년 LA 공연차 미국을 방문한 뒤 해외 진출과 비즈니스를 꿈꿨어요. 그러다 1993년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발표한 후 연예계를 떠났고 미국 뉴욕으로 갔어요. 2007년 거기서 이모가 하던 주얼리숍 등을 운영하면서 뉴욕, 로스앤젤레스, 하와이 등의 부동산에 투자했어요. 성공을 거둔 건 맞아요. 이 모든 것들이 근검절약하고 노력한 덕분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어요.”
연예인을 하면 돈 좀 벌 수 있을까 하고 시작했다는 그녀는 그동안 전심전력하며 열심히 살았던 젊은 날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육십의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에 호탕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너무 반갑다.
사람들은 아직도 감칠맛 나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한다. 그녀를 ‘날 보러 와요’를 부른 1980년대 인기가수로만 여기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2007년에 가수생활 종료를 선언하고 재야의 부동산 투자 고수로서 활약한 지 오래다.
언니, 아직 죽지 않았다요?
서울 신사동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지금 한국 사회는 뭔가 안 풀리고 답답한 상태라며 쓴소리를 한다. 그 답답함이 너무 싫어서인지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그녀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런 시원시원함이 나이를 거스르는 듯한 그녀의 외모와 잘 어울렸다.
방미는 2018년부터 유튜브를 통해 ‘BangmeTV’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 삶의 이야기, 헬스, 부동산 투자, 정치에 대한 얘기들을 풀어내는 출구다. 그런데 그녀의 채널은 댓글을 달 수 없게 해놨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맥락 없는 비난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나를 꼴 보기 싫어해요. ‘너는 뭐냐. 뭔데 잘난 척이냐’라는 식으로 말하죠. 하지만 저는 전혀 신경 안 써요. 버닝썬 사건처럼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잘난 척하는데 알고 보니 ‘바지사장’인 경우 많잖아요? 심지어 나를 사기꾼이라고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세금 안 내고 사기꾼이었으면 가만 놔뒀겠어요?”
그녀의 솔직 담백함은 지독히 가난했던 ‘흙수저’ 시절을 극복한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듯싶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어렵게 살다가 출세를 하고 돈을 벌고 명예를 얻었죠. 돈을 벌기 시작한 건 ‘날 보러 와요’를 부를 무렵이었고, 버는 대로 저축했어요. 시작과 동시에 계획을 잘 짰어요. 돈에 대한 플랜을 말이죠. 적금을 부어 오백만 원을 모으면 차를 사고 전세를 얻을 수 있겠다 하는 식으로 구상이 늘 있었죠. 그게 습관이 됐어요. 그렇게 지금까지 계획에 맞춰 살아왔죠.”
물론 그녀의 삶이 생각한 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젊었을 때는 굉장히 싸가지 없었다”라고 표현하는 그녀는 20여 년 전, 믿었던 사람에게서 10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사기를 당한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하고는 자신의 교만함을 반성하고 깨닫게 됐다고 한다.
잘 하는 일 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계획을 중시하는 방미답게 오래전부터 유튜브 방송도 차근차근 준비했다. 사실 그녀는 유튜브를 하기 전에 이미 10년 넘게 블로그 ‘악질 방미’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었다.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가수를 그만뒀어도 ‘연예인’이라는 자신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번 연예인은 영원한 연예인이죠. 방미가 죽으면 신문에 ‘가수 방미’라고 기사화될 테니까요. 그러니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가볍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행사를 하거나 신곡을 또 내기는 싫었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블로거에서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또 다른 모험을 하며 그녀는 제작, 연출, 각본, 진행 등 실로 다양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중이다. 현재 구독자 수는 1만6000여 명.
“아직 폭발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지는 않고 있어요. 50대, 60대가 시청자의 주류이다 보니 구독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분위기는 아니예요. 그게 좀 아쉽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제가 여전히 무대 체질인 거 같기는 해요. 유튜브를 하면 신나거든요.”
유튜브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고 싶은 마음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 특히 비중을 두고 방송을 하는 분야는 재테크다.
“제가 현물은 잘 모르지만 부동산은 40년간 발로 뛰면서 많은 정보를 얻었어요. 그래서 알려줄 게 많아요. 20년은 한국에서, 20년은 미국에서 부동산 투자를 하며 보냈으니까요.”
‘나는 해외 투자로 글로벌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
사실 방미는 그동안 세 권의 책을 낸 저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가장 최근에 낸 책은 ‘나는 해외 투자로 글로벌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로,
5월 초에 발간되어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보를 쉽게 얻기 힘든 해외 부동산 투자에 대한 내용을 다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그녀가 실제로 수익을 낸 지역들을 예로 들어 비자 발급, 관련 용어 설명, 미국의 각 지역 정보에서부터 수수료와 세금까지 다양하고도 실전적인 투자 정보를 담고 있다. 해외 투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주목할 수밖에 없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그녀는 지금도 국내외를 오가며 지내고 있지만 현재는 청담동에서 거주하고 있다. 사무실은 압구정동에 있다. 그리고 작년에 제주도에 리조트도 마련했다.
“해외에서 살다 보니 한국에 왔을 때는 꼭 자연을 충분히 느낄 수 이 있는 곳이어야 하더라고요. 이장희 ‘형’(그녀는 이장희에게 노래 ‘주저하지 말아요’를 받으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도 울릉도에 사는 이유가 그래서일 거예요. 산과 바다 등 자연을 보면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부동산 관련 책을 출간한 의미까지 듣고 나니 부동산 투자가로서의 방미가 궁금해졌다. 특히 제주도는 10여 년간 계속 투자가들의 관심을 끌었기에 그녀가 전문가로서 제주도의 부동산 가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슬쩍 듣고 싶었다. 독자들을 위해 제주도 투자에 대한 그녀만의 노하우를 청했다.
제주도 투자, 이것만은 명심하라
“제주도는 집을 잘 선택해야 해요.”
그 이유는 중국인들이 이미 많은 땅을 선점했고 매체의 영향으로 제주도 붐까지 일어나면서 난개발을 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 속에 지어진 집들이 문제점이 많다는 게 방미의 진단이다.
“제주도는 섬이고 초원이다 보니 야생동물, 바퀴, 개미 등 벌레가 많아요. 그리고 하수구 등 배수 문제도 있고요. 나이 들어서 거기 가서 영원히 살겠다? 그건 무리라고 봐요. 제주도 초원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죠. 그런데 가서 막상 살면 한 달도 못 견뎌요.”
방미는 제주도에서의 집은 세컨드하우스 개념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세컨드하우스로 살 때 제주도의 분위기를 한껏 내보겠다고 검은 화산석으로 치장한 집을 사는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말리고 싶어요. 제주도 돌은 TV에서나 다른 사람 집 보면서 감상하고, 정말 편하고 세련된 집을 선택해야 해요. 집 밖으로 나갔을 때 KFC도 있고 스타벅스도 있는 편의성이 있는 곳에 마련하는 게 좋아요.”
그녀는 사방이 펼쳐져 마치 그림 같은 풍광을 자랑하는 곳은 오히려 불편함이 많다고 지적했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문화를 즐길 수 있고 편리함이 있는 곳, 인프라 접근성과 재밋거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재야의 부동산 고수로서 한마디
“그래서 제주도는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집을 사면 안 돼요. 그건 하와이도 그래요. 철칙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
바닷가 앞에 있는 집에는 필연적으로 벌레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습한 날씨가 많은 섬에서 바닷가까지 앞에 있으면 생활 환경이 최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제주도는 쉬려고 가는 곳이지 고생하려고 가는 게 아니라는 게 그녀의 관점이다. 얘기를 듣고 보니 그녀가 주택이 아닌 리조트를 선택한 것이 당연해 보였다. 리조트나 레지던스는 청소와 식사 등 필요한 서비스들을 기본으로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투자처로서의 제주도는 지금 어떨까? 그녀는 제주도의 부동산 경제 사정이 현재 최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되려 그렇기 때문에 투자처로서의 가치는 높아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눈여겨보고 있어요. 올 하반기가 투자할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삼방산 밑 지역과 서귀포 중문 관광단지 쪽이 괜찮아 보여요. 삼방산은 요즘 방송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예전부터 핫한 곳이었어요.”
최소한 10년 계획을 세운다
부동산 투자에서 전문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그녀를 보니 현재의 방미에게 가수로서의 욕구는 더 이상 없다고 봐도 좋을 듯했다. 사실 그녀는 꼭 참석해야 할 행사가 있어도 가서 노래는 절대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설 수 있는 무대들은 이제 후배에게 물려줘야죠. 그 자리 외에도 내가 활동할 수 있는 자리들이 있을 테니까요.”
가수로서 최선을 다한 시절이 있기에 후배의 자리를 뺏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인간에 대한 배려와 정의(正義)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가수가 아닌 부동산 투자 강의를 하는 방미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제 강의료가 1000만 원이에요. 그렇게 금액을 정한 건 강의를 꼭 들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시라는 의미도 있지만 너무 비싸니까 부르지 말라는 의미도 있어요. 하지만 정말 의미가 있는 자리에서 강연을 할 때는 돈을 받지 않으려고 해요.”
그녀는 삶을 충분히 즐겼다고 말한다. 해외에서의 삶도 풍족했다. 뉴욕에서 10년 번 돈으로 LA에서 5년 동안 즐겁게 살았다. 이제 그녀는 4~5개월은 한국에서, 3개월은 미국에서, 나머지는 여행을 하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잘살았어요. 이제 내일모레가 칠십(?)인데 인생 정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해봐야죠. 그러니 더 돈을 벌겠다, 다시 노래 좀 불러볼까 하는 욕심은 없어요.”
방미는 모든 계획의 단위가 최소한 10년이라고 했다.
내 마음대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
그녀는 유튜버 활동이 큰 욕심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매력이 있단다. 그걸로 돈을 벌기는커녕 되려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며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으니 그 정도 자유는 당연하지 않냐는 게 그녀의 말이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쉬운 길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앞으로 10년 동안은 내 맘대로 살고자 해요. 이제는 나한테 투자를 하고 싶어요. 우선 충분히 잘 멋지게 쓰고 행복해지는 데 집중하자, 그러니 미리 고민하지 말자는 생각이죠.”
물론 늘 계획하고 사는 게 습관이 된 그녀가 모든 걸 내려놓을 리는 없다. 우선 유튜브 구독자 수를 올해 말까지 3만 명 정도까지 늘리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스튜디오를 만들고 싶어요. 강연과 세미나, 공연, 요가, 운동, 놀이터 등이 가능한 만남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은 거죠. 요즘 시니어는 예전에 비해 훨씬 건강해요. 베네피트에 공감하며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브라보는 젊은 애들이 잘 안 하는 말이다. 진정 우리 나이여야 할 수 있는 말”이라면서 멋지게 정리해버리는 방미는 그야말로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고 외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브라보’스러운 미래 계획은 또 어떻게 세울지 궁금해졌다.
삶이 즐거운 건 살고 싶은 대로 살 때다. 그러나 살고 싶은 대로 살기 쉽지 않다.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그냥 대충 살기 십상이다. 이럴 때 삶이란 위태한 곡예에 가깝다. 곡예 역시 진땀을 흘려야 한다는 점에서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왕지사 한 번 태어난 인생, 심란한 곡예보다는 평온한 활보로 삶을 즐기는 게 낫겠지. 이 사람을 보라. 살고 싶은 대로 산다. 남들이 어떻게 살건, 남들이 뭐라 하건 상관없다. 내 방식대로, 내 지향대로 산다.
사는 것처럼 사는 건 어떻게 사는 거지? 좋은 삶이란 뭐지? 나답게 잘 산다는 건 어떤 거지? 김형태 목사(50)는 그런 궁리를 일찍부터 줄기차게 해왔던 모양이다. 뭐시라? 누군들 그런 생각 안 해보겠어? 그리 따질 입들이 많겠지만, 김 목사의 모색은 한결 심각하고 절실한 것이었다. 이미 신 안에 사는 사람이었지만, 해서 잡다한 혼선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삶이었겠지만, 그러나 그는 현재의 삶을 새롭게 하는 일에 늘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심지어 화두였다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문제. 어떻게 살긴,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게 인생인걸, 무슨 거한 포부가 있기에 화두까지 타셨나? 그리 또 따질 입들이 있겠지만, 김 목사는 화두를 파 궁구한 나머지 마침내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했다. 귀농 행(行)! 바로 그거.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아내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삶과 교육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주변에 공동체생활의 이상과 실천을 말씀하시는 스승들도 많아 영향을 받았고요. 도시의 복잡하고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 대안적 삶을 실천하고 싶다는 거. 그게 제대로 사는 길이라는 결론을 얻고 산골로 내려왔습니다.”
여기 합천 땅 황매산 기슭으로 내려온 건 6년 전. 이곳에 오기 이전, 청송과 산청에서도 한두 해 시골살이를 했는데, 그건 워밍업이었단다. 이미 몸을 풀고 링에 올랐기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더란다. 기쁨에 들떠 산골에 입장했다니 행복, 혹은 행복의 조짐을 움켜쥔 셈이었다.
아까 나는 이 집 입구에 도착해서 탄성을 내질렀다. 오! 근사한걸! 집 뒤편으로 좍 병풍을 친 산경이 기차게 삼삼해서였다. 아울러 그의 거처가 아름다워서였다. 마당 너른 집에 들어앉은 자못 큼직하고 미끈한
2층집이니 말이다. 수려한 산봉들이 우아한 코러스를 공연하는 터전이니 땅값부터 겁나게 나가겠는걸! 난 속물답게 그리 여기며 은근히 부러웠더랬다. 하지만 그게 아니구나. 김 목사는 이 집에 세 들어 산다. 우리를 자주 속 터지게 하는 ‘쩐’이라는 거, 그 요상한 물건을 그는 거의 지니질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종잣돈이라도 마련한 뒤 귀농해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에 한동안 귀농을 망설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존경하는 스승께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언제까지 준비만 하고 앉아 있을 텐가? 떠나라, 유목민처럼 서슴없이 떠나라!’ 그래 그냥 따랐지요.”
“맨손으로 내려왔다는?”
“별로 손에 쥔 게 없었어요. 목회를 했던 교회에서 준 퇴직금 2000만 원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제가 이 마을에 들어와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좋은 주민들과 돈독한 인연을 맺게 됐으니까. 이 집 주인도 그중 한 분이에요. 저의 대안적 삶에 관한 포부를 듣고 집을 임대해줬을 뿐만 아니라 개축까지 거들어줬거든요.”
“‘토기장이의 집’이라는 북 카페를 운영하시는군요. 이 집 쥔 양반은 토기를 굽나보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토기장이’란 성경의 토기장이 이야기에서 따왔어요. 아내와 딸이 북 카페를 운영합니다. 저는 농사에 주력하고.”
“목회는?”
“카페 공간을 예배당으로 여기지만, 간혹 신도가 찾아오지만, 여길 와서 제가 목사라는 걸 밝히지도 않았습니다. 땀 흘려 정직한 농사를 짓는 일, 농약으로 오염된 땅을 살리는 일, 이웃들과 어울려 품앗이를 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노래하는 삶, 그 무엇보다 자연이 주는 영성으로 사는 일 자체가 이미 목회라 여기며 삽니다.”
자연의 영성 안에서 살기
목회라는 건 할 만큼 했으니 이젠 내려놨다는 얘기라기보다는 한결 진정한 목회자의 실천적 삶으로 접어들었다는 얘기일 테지. 그가 외로운 떠돌이로 산 바가 없었겠으나, 귀농으로 드디어 조용한 포구에 정박했다는 투의 안심과 자부심이 비친다. 그런 그에게 산골이란, 자연이란, 농사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이상적 조건일 게다. 도시의 빌딩 숲속에선 이상 구현이 어려운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야야, 어디서건 네가 너의 임자로 살면 참인 것이야! 불가에 전해지는 뉴스가 그렇다. 도시에서 그는 무엇에 식상했을까?
“사는 장소가 도시이냐 시골이냐는 물론 중요하지 않지요. 어떻게 사느냐에 문제가 있을 뿐이니. 그런데 도시에서는 마음을 돌보며 살기 어렵지 않던가요? 나를 돌아볼 짬조차 없질 않던가요? 남을 딛고 일어서야 한 발이라도 앞설 수 있지 않던가요? 산골에 산다는 건 자연의 영성 안에 사는 건데요, 가령 흙을 만지고 있으면 사람이 단순해집니다. 놓쳤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시에선 얻을 수 없었던 힘이 생겨요.”
“농사란 여전히 못 믿을 직업으로 간주되고 있어요. 나오는 것 없이 골병만 든다고들 하죠. 김 목사님 농사는 무난할까?”
“애초 이 마을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전혀 몰랐는데요. 와서 보니 저와 같은 가치관과 철학을 가진 분들이 이미 살고 있더라고요. 시인 서정홍 선생님을 비롯해 유기농을 하는 ‘열매지기 공동체’의 아홉 농가 사람들, 이분들의 도움과 가르침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오랫동안 구상하고 추구했던 공동체적 삶 속으로 빠르게 섞여 들어간 거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농사 규모는 얼마나 되죠?”
“초기엔 200평이었으나 현재는 1200평으로 늘었어요. 마을 분들이 빌려준 밭이에요. 여기에다 아들과 함께 감자, 고구마, 수수, 생강, 양파, 콩 등의 작물을 재배합니다. 아직 이렇다 할 수익은 없지만, 기계를 쓰지 않고 오직 몸을 써 일하기에 조금 고되지만, 그러나 만족합니다.”
“땀 흘려 노력을 했을 텐데 아직 수입이 발생하질 않다니, 이걸 어쩌나?”
“자급자족은 할 수 있으니 문제될 게 없지요. 소출이 적더라도 우선은 땅을 살려놓고 보자는 게 유기농의 정신입니다. 문제는 요즘의 심각한 기후변화에 있어요. 노련한 토박이 농부들조차 대책을 찾지 못해 고심합니다.”
만물만상이 변하는 건 이치이지만 21세기의 날씨 변동은 왜 이 모양인가. 괴상한 게 기후뿐이랴. 나 하나, 내 가족 하나만 잘살면 장땡이라는 식으로 일쑤 남을 짓밟기를 장기자랑하듯 해대는 이 시대의 이기적 세태는 또 얼마나 수상한가. 모름지기 학교 교육부터 창의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소리가 왁자하지만 정작 바뀌는 게 없으니 썰렁한 농담이다. 일찍이 이런 파행에 불신을 느낀 탓일 테지. 김 목사는 자식 셋 모두를 공교육에 맡기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양육했다.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아이들 말이다. 폼나는 학력을 걸치지 않고선 흑싸리 껍데기 등외품 취급을 당할 세상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릴 땐 많이 불안했다 하대요. 불안과 마주앉아 자기 고민들을 많이 했다고. 근데 그게 필요한 고민이었다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고민과 함께 내적 성장을 한 것 같아요. 학교나 학원에서 찾기 어려운 답을 스스로 배워 찾아냈다고 봅니다. 야생의 어떤 감성으로 나답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나 할까.”
“성적 경쟁의 격투장인 학교에서 심히 시달리며 세상의 명암을 알아가는 건 딱히 부정적이기만 할까요? 고난을 겪고서야 근본이 강해지는 법인데.”
“공교육은 개개인의 성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다움을 용납하지 않는 거죠. 제 아이들은 너무도 잘 자랐어요. 각자 자기 색깔이 있는 일을 찾아 하고 있어요. 모두 경제적 자립을 했고요. 일테면, 막내인 아들은 올해 스물두 살인데 어엿한 청년 농부입니다. 지적 욕구가 강해 책을 무섭도록 읽어대요. 저희 북 카페가 운영하는 ‘담쟁이 인문학교’에서 물리학이나 죽음을 주제로 한 강의도 하는 아이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된다
어쩌면 위험한 모험일 수 있는 홈스쿨링으로 자녀를 야무지게 키우고, 물적 토대 없는 용감한 귀농에 자족하고, 눈앞의 현실만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들에겐 환상적일 수 있는 ‘자연의 영성’이라는 걸 가슴에 담고 사는 조용한 삶. 줏대와 슬기가 아니고선 꾸려내기 어려울 경관이다. 땅에 쏟는 떳떳한 노동과 자연을 향한 겸손한 순응 역시 맑은 생활의 원천이자 길일 테지.
“현실적인 감각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걱정을 많이 합니다. 산 속에서 뭘 먹고 사느냐, 신도 한 사람이라도 찾아오겠느냐고. 하지만 저는 만족하며 삽니다. 특히나 귀농으로 맺어진 좋은 인연, ‘열매지기 공동체’ 사람들을 만난 건 정말 만족스러워요. 커다란 행운이에요.”
“많은 공동체가 종단엔 실패를 하더군요. 그 가치는 아름답지만, 원초적 이기주의자인 인간이라는 종을 공동의 틀 안에 모아 함께 움직인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 필요한 일이죠. 같은 길을 가되 구성원들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존중되는 공동체라면 문제가 없을 거라 봅니다. 저는 귀농 후 자연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열매지기 공동체’를 통해서 알게 된 것도 많습니다. 마음자리를 늘 돌아보는 눈이 생겼어요. 예전 같으면 용납 못했을 일도 아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는데, 이게 마음이 좀 넓어진 덕분이겠죠.”
“모두들 물귀신 같은 물신에 덜미를 잡혀 사는 세상이에요. 소박한 소유로 자족하는 김 목사님에겐, 가령 노후 불안 같은 건 없을까?”
“아무런 대책이 없으나 불안도 없어요. 늙어 병들면 그냥 죽으면 되지 않겠어요? 최소한의 물적 조건은 필요하겠지만, 그 필요라는 건 먹고 입고 잠잘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이미 저희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이 돈 들어가지 않게 짜여 있어서 더더구나 문제될 게 없지요. 게다가 시골에선 굶어죽기가 아주 어렵습니다.(웃음) 온 산야에 먹을 것 지천이고, 경로당에서 뭔가를 챙겨주고 하니까.”
이루면 더 이루고 싶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욕망이다. 이미 가졌으면서도 더 가지고 싶어 하고 다 가지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관성이다. 이런 삶에서, 그는 벗어나고 싶은 게다. 벗어나고 싶어 하는 척하는 시늉이 아니라 안팎이 두루 한결같은 실천이자 실력이라면, 그건 내공이겠지.
“자연 속에서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어도 됩니다. 자연 속에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답게 변하는 것 같더라고요. 요즘은 더욱 소극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힘을 빼고, 의도를 가지지 않고, 누구를 설득할 것도 없이, 그저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자 해요. 죽음이 찾아오면 인디언처럼 산에 들어가 조용히 사라지면 그만이겠죠. 자연이 그렇잖아요? 있다가 없어지는 거.”
있다가 없어지는 것. 누구나 그 평범한 진리 하나를 몸에 붙이고 산다면 과히 걸릴 게 없겠지. 물신도 귀신도 사신(死神)도 두려울 것 없을 게다.
김형태 목사가 주는 귀농준비 Tip
•귀농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그래야 정붙이고 살 수 있다.
•은퇴자 귀농의 실패 확률은 매우 높다. 농사로 몸 건강을 망칠 수 있어서다. 도시와는 다른 시골 풍습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에도 낭패를 볼 수 있다.
•귀농 초기엔 찍소리 안 하고 지내는 게 좋다. 원주민들과 융화하기 위해서는.
•땅으로 재테크하지 말자. 귀농인들 때문에 시골 땅값이 근거 없이 오르는 사례가 많다. 그럴 경우 대안적 삶을 원해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겨울 칼바람이 맵차게 몰아치는 산골이다. 마을의 품은 널찍해 헌칠한 맛을 풍긴다. 산비탈 따라 층층이 들어선 주택들. 집집마다 시원하게 탁 트인 조망을 자랑할 게다. 가구 수는 50여 호. 90%가 귀촌이나 귀농을 한 가구다. 햐, 귀촌 귀농 바람은 바야흐로 거센 조류를 닮아간다. 마을 이장은 김종웅(76) 씨. 그는 이 마을에 입장한 1호 귀농인이다. 김 씨의 이주 이후, 그의 소개나 추천에 이끌려 이곳으로 덩달아 귀촌한 지인들도 많다고.
귀농 이전, 김종웅 씨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특별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이 무난하게.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서울을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더 이상 서울에서 살다간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겠는걸!” 그런 투의 독백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절절하게 치올라 목으로 터져 나오는 걸 깨닫고서였다. 몽둥이를 높이 쳐든 빚쟁이들에게 주야로 쫓겨서가 아니었다. 위험한 사상을 유포하거나 발칙한 범죄를 자행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선량한 소시민의 노릇을 다하며 살아왔노라 자부하는 인물이다. 사적으로 원한을 사거나 공공의 적으로 몰릴 행장 따위를 눈곱만치라도 지은 바가 없었기에.
그렇다면 뭣 땜에? 단순하고도 절박한 이유 하나가 있었다. 몸이 자지러지는 적색경보를 울렸던 것. 심혈관질환을 가지고 있었던 김 씨는 어느 날 졸도를 해 응급실 신세를 졌더란다. 뇌졸중이었다지. 다행히 위기를 잘 넘기긴 했으나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쯤에서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면 하나밖에 없는 명줄을 졸지에 놓칠 수도 있는 상황임을 직시하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던 것 같다. “옳다구나, 시골로 가자!” 여러 밤을 잠 못 이루고 눈을 끔벅이며 심오한 연구를 하다 어느 아침에 내린 결론이 그랬다. 얘기를 들어볼까.
“아이쿠, 이러다가 나 죽겠구나, 칠십도 안 된 나이에 그럴 순 없지, 설령 죽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산골에서 죽자, 과수 농사를 지어 좋아하는 과일이나 실컷 따먹다가 죽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 살다 보니 건강이 엄청 좋아지더라고. 그 무엇보다 서울에서 받고 살았던 스트레스라는 게 사라진 덕분이라 봐요. 맑은 공기와 깨끗한 먹거리도 도움이 됐겠죠. 귀농으로 얻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건강 회복은 가장 크게 얻은 선물입니다.”
사람의 몸뚱이는 내남없이 조만간 땅에 묻혀 한 줌 풋거름으로 돌아간다. 그러하니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남은 시간을 선용해야 한다. 김 씨는 산골을 요번 인생 최후의 근사한 정처로 점찍은 뒤 미련 없이 서울생활을 청산했다. 미련이 남을 만큼 화려하거나 열광할 만한 서울생활도 아니었다. 근면과 성실을 인생의 교사로 여기고 오로지 바지런히 일하고 또 일했을 뿐이다. 그로써 처자를 어엿하게 건사하고, 아울러 건전한 세상과 명랑 사회 건설에 암암리에 이바지했던, 그지없이 평범하고 떳떳한 서울살이였다.
일 중독이 행복한 에고이스트
김 씨는 오랫동안 전파상을 운영했다. 전파상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부터 자동차 정비일을 했다. 그의 별명은 맥가이버. 드라이버 하나면 뭐든 뚝딱 뜯어 고치고 헤집어 살려낸다. “누가 뭐래도 난 유능한 전자 기술자야!” 그런 자부심으로 자신의 직분에 충성과 충실을 다했던 모양이다. 도대체가 방황이나 일탈은 물론, 시련과 굴곡이 없는 인생이었다는 거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신비할 지경이지만, 운명의 신은 보디가드처럼 그를 각별히 수호해 이 살벌한 세상의 파랑을 사뿐히 건널 수 있도록 도운 것 같다.
그런 김 씨에게 귀농이란 어쩌면 생애 최초이자 최후의 도전이거나 반전일 게다. 그는 아내 방성녀(71) 여사에게 ‘고지식한 남정네’라는 소리를 넌덜머리나도록 숱하게 들으며 살아왔다. 그러고 보면, 조용하고 점잖은, 좀 딱딱한 이 남자의 돌연한 산골 이주란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도봉산으로 이사 간 것만큼이나 신기하고 기발한 행보라 할 수밖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난제를 기어이 풀어야만 할 특유의 사정이 그만큼 절박했겠지. ‘건강 회복’이라는 미션 말이다.
“전파상이 호경기일 땐 수입도 짭짤했어요. 하루에 쌀 두세 가마에 해당하는 수입을 올렸으니까. 그것참, 그 당시 재테크에 눈떴다면 꽤나 재미를 봤을 테지만, 그런 재주, 도통 없었기에 그저 저축이나 부지런히 했어요. 서울을 뜨려고 자산을 정리해 보니 7억 정도의 자금력이 되더라고. 이것의 절반가량을 귀농 비용으로 썼어요. 농토 구입과 집짓기에 필요한 자금으로.”
“귀농하신 지 9년이 지났죠? 일흔 나이를 목전에 두고서 농사를 택하셨어요. 그게 무모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최대치로 몸을 쓰는 게 농사라서. 게다가 건강에도 적신호가 왔는데.”
“제가 천성적으로 일을 좋아해요.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어느 날 제가 조용히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직 일이 좋아 일에 사는 사람이더라고요. 서울에서도 열심히 일했지만, 서울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골에선 더욱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게 되더라고요. 농사는 제게 적격이거든요. 게다가 과일을 좋아해 과수원을 하고 있으니 일석이조라 할까.”
“오직 일을 좋아한다는 말씀, 얼른 곧이들리질 않아요.(웃음) 일보다 더 즐거운 것들이 많은 게 인생이지 않나요?”
“집사람이 저를 두고 말하길, 너무나도 부지런한 사람, 불쌍할 정도로 일만 아는 남자, 놀아본 적이 없어 노는 방법 자체를 모르는 남자라 합니다. 그러나 어쩌나? 저는 일에서 성취감을 느껴요. 아마도 일종의 일 중독자이겠으나 저는 그게 만족스러워요.”
“과수원의 수익성은 어때요?”
“지금은 사과농사를 하지만 몇몇 작목을 두루 경험해봤어요. 매번 신통치 않더라고. 농사 기술 자체가 서툴기도 했지만 판로가 늘 문제였어요. 현재는 사이버 판매망을 구축해 그럭저럭 무난하게 굴러갑니다. 부부 두 사람의 인건비 정도 건지는 수준이지만 이마저도 행운이지 않겠어요? 이 늙은 나이에 일하고 싶은 만큼 실컷 일할 수 있다는 건 농사가 주는 최상의 즐거움이고요.”
사람이 너무 한가하면 수상한 생각이 몰려든다. 그러나 오직 일벌레로만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는 동물이다. 휴식과 놀이도 일종의 생필품이지 않겠는가. 저 명랑하고도 흥겨운 옛날 유행가가 외쳐대듯이, 우리는 틈틈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구현해야 하는 것이며, 늙어서도 짬짬이 잘 놀아야만 한다. 카를 마르크스가 얘기했듯이, 단지 노동에만 매몰된 인간은 짐승보다 불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 씨는 일을 숭상하기를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아니한 채 살아왔다.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왕림해 뭐라 고상한 조언을 해도 자신의 소신을 수정할 용의가 전혀 없는 인물이다. 서울에서도 그랬듯이, 지지구재재구 귀여운 새들이 종일 노래를 하는 목가적인 전원에 내려와서도 그는 자신에게 일의 대가(大家)라는 임명장을 수여하고서 쾌재를 부른 것 같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오직 자신의 일을 위해 고용한 사람의 집 안팎은 먼지 한 점 없이 청결하다. 농장일을 마쳤더라도 밤늦게까지 외등을 밝혀 마당을 쓸고 닦고 다듬어야 직성이 풀려 비로소 발 뻗고 편한 잠을 자는 사람! 일테면 하늘이 와지끈 무너진다는 특급 뉴스가 들려온다 하더라도 오늘 할 일은 기어이 오늘 당장 완수하는 사람! 그의 아내 방성녀 여사의 증언이 그렇다. 아내는, 이런 일벌레 남편과 사는 일이 때로 끔찍하지 않을까? 숨 막히지 않을까? 이쯤에서 잠깐 방 여사님의 얘기를 들어보자.
“한마디로 일에 미친 양반이에요. 죽기 전엔 못 고칠 버릇이라 봐요. 귀농할 땐 이제 좀 즐기며 부부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했지만, 이미 몸에 밴 습성이 안 바뀝디다. 한잔합시다, 하면 안 해! 놀러갑시다, 하면 싫어! 개미처럼 일하고 다람쥐처럼 굴레 속에서 빙빙 도는 인생이지요. 건전하고 씩씩한 남편이지만 일 중독을 행복으로 여기는 에고이스트예요. 무엇으로 어떻게 이 양반을 뜯어말릴꼬? 남편으로서도 일이 오직 즐거울 리 있으랴, 하는 생각에 새삼 연민을 느끼기도 해요. 언젠간 저 양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 맺히더라고요. 아, 당신, 힘들어하는구나, 덧없이 흐르는 노년을 아쉬워하는구나. 둘이서 껴안고 함께 엉엉 울었어요. 그러면 뭐하나? 이튿날이면 다시 일벌레로 돌아가는걸.(웃음)”
한 달 생활비는 50만 원
일의 대가 김종웅 씨의 일 종목은 농장일과 가사에 그치지 않는다. 귀농 이후 뒤늦게 독학한 컴퓨터 실력을 바탕으로 괴산군청 사이버 기자로 맹활약을 해왔다. 충북 도지사가 임명한 충북 귀농 홍보대사로도 활동한다. 게다가 마을 이장까지 맡아 동분서주! 76세 노인이 후루룩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일들은 아니니 가히 장관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노구에다 청년의 정신을 이식하는 방법을 일찌감치 터득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귀촌·귀농인들은 흔히 동네 이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만 정착이 빠르다고 널리 알려졌다. 이장을 마을의 절대 권력자로 보는 눈들도 있지 않던가. 하나, 김 씨의 생각은 다르다.
“이장의 횡포나 전횡을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제 경험으로는 그게 다 옛날 얘기예요. 요즘 이장들은 엄청 심한 시집살이를 합니다. 마을 심부름꾼일 따름이에요. 업무도 너무 많아요. 공무원 일의 절반쯤은 도맡아 하니까. 활동비 20만 원이 나오지만, 무척 힘이 들고 내 시간 빼앗기고, 봉사정신이 아니고선 감당하기 쉽지 않을 거라.”
“봉사정신으로 일한다 하더라도 고충이 많겠죠?”
“전엔 원주민과 귀촌·귀농인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잦았어요. 그걸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일, 그게 이장 몫이라 여기고 나름 애썼어요. 지금은 원주민 비율이 확 줄어 텃세 같은 걸 부릴 세력 자체가 거의 사라졌지만.”
“아마도 이 마을에 전무후무한 일꾼 이장이 납셨다고 정평이 났을 듯.”
“깐깐한 이장이기도 해요. 시골사람들은 흔히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태우는데요, 전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질 못하겠더라고. 속으로 꾹꾹 누르고 참노라면 스트레스 받으니까.”
“한 달 생활비는 얼마나 쓰시죠?”
“도시에서보다 지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게 귀농의 장점입니다. 우리 부부는 한 달 평균 50만 원쯤 쓰며 살아요. 그 이상 지출할 때도 있지만, 남아도는 달도 많았어요.”
“앗! 겨우 50만 원?”
“돈 들어갈 게 없습디다. 먹거리는 거의 자급자족을 해요. 술, 담배 안 하지, 외식 안 하지, 불가피한 외출 외엔 틀어박혀 일만 하지, 뭐 돈 들게 있을까나. 약간의 부식비, 공과금, 차량 유류비 정도만 해결하면 되니까. 애당초 집사람이랑 50만 원으로 살자 다짐하고 귀농했는데 자연스럽게 실행되더라고.”
눈치 빠른 독자라면 뒤에 이어진 김 씨의 언설을 이미 미루어 짐작하리라. 돈보다 귀한 가치, 돈 주고 살 수 없는 만족과 행복의 요소에 관한 견고한 철학의 표명이 있었으니, 그건 일에 관한 예찬이 아니면 달리 무엇일 수 있으랴.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 질문을 거창하게 해보았다. 열심히 사시는 당신에게 남모를 회한이 있다면 그건 뭐냐고. 한참을 생각하다 들려준 답은 뜻밖에도 정감에 찬 것이었다.
“허무하게 늙어가는 아내를 농장에 내놓아 얼굴을 그을리게 만든 것. 그 하나예요.”
김종웅 씨가 들려주는 귀농 준비 Tip
•비빌 만한 언덕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게 현명하다. 인척이든 지인이든 연고가 있을 경우엔 적응이 빠르고 외로움을 덜 수 있으니까.
•시골에서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의 자금력은 필수다.
•원만한 처세를 하지 않을 경우 원주민들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다분히 보수적인 시골 풍토를 이해, 충돌만큼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꽃에서, 어떤 이는 생명의 환희를 본다. 어떤 이는 상처 어린 역정을 느낀다. 원주 백운산 자락 용수골로 귀농한 김용길(67) 씨의 눈은 다른 걸 본다. 꽃을 ‘자연의 문지방’이라 읽는다. 꽃을 애호하는 감수성이 자연과 어울리는 삶 또는 자연스러운 시골살이의 가장 믿을 만한 밑천이란다. 꽃을, 자연을, 마치 형제처럼 사랑하는 정서부터 기르시오! 귀촌·귀농 희망자들에게 전하는 김 씨의 메시지란 대략 그렇다.
김용길 씨는 산수경관 기차게 삼삼한 곳에 산다. 도시의 ‘난리 블루스’를 뒤로 하고 이곳에 들어온 건 10여 년 전. 비유컨대, 그간 적응하고 생존하느라 코피를 닷 말쯤 쏟은 것 같다. 하지만 이를 악물어 견디고 버티고 솟구쳐 씽씽한 활로를 찾았다. 성취한 게 많다. ‘성공한 귀농인’이라 소문났다. 처음 이 산중에 입장할 때 김 씨 내외는 빈손이었다. 아니, 빈손 정도가 아니라 서럽게도 빚 얻어 귀농했다. 이 얘기는 좀 있다 하기로 하고, 흠, 그가 자주 입길에 올리는 꽃 얘기부터 들어볼까?
“가령, 어젯밤 제 농장에 강도란 놈이 숨어들었다 칩시다. 숨고 보니 꽃들이 지천이지 않겠어요? 문득 놀랍지 않겠어요? 그 순간 강도의 가슴엔 천사 같은 생각이 밀려들 겁니다. 꽃의 위력이 이와 같아요. 제가 여길 와 마당에 꽃양귀비를 잔뜩 심었어요. 그걸 싹눈으로 해 ‘용수골 꽃양귀비 축제’라는 마을 제전으로 발전시켰어요. 축제 땐 인파가 넘칩니다. 마을의 농산물 판매에 효자 노릇을 하고 있어요. 꽃으로 거둘 수 있는 홍보 효과, 경제 효과가 이처럼 커요. 그 무엇에 앞서 꽃으로 대변되는 자연에 관한 사랑, 자연이 몸에 붙은 체질, 이런 게 있어야 시골생활을 진정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꽃을, 자연을, 그것들의 본받을 만한 힘과 미덕을 얘기하는 이 사람은 군인 출신이다. 육사를 나온 그는 군에서 말처럼 내달렸다. 보안사(현 기무사)에서 군대 말년을 보내다 2006년에 대령으로 전역했다. 요즘 요상한 ‘기무사 계엄령 문건’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김 씨가 보는 군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군의 정치화가 문제입니다. 그 무엇에건 진력하는 기질로, 군대에서도 저는 죽기 살기로 열심히 뛰었어요. 정치군인 비슷하게 흐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타고난 성품은 어쩔 수 없더라고. 기본적으로 정치 성향과 멀고, 게다가 비판적이기도 해 결국은 발언권 센 놈들에게 튕겨났죠. 그 늑대 소굴에서 벗어나고 싶어 중령 시절부터 전역을 신중하게 숙고했어요.”
“그 옛날, 제가 입대하던 첫날, 단상에 오른 정훈 장교에게 들은 발칙한 연설이 기억에 선명합니다. ‘너희들은 이 시간 이후 인간이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잡아먹을 수 있는 돼지일 뿐이다!’ 군이 비민주적이고 시대에 뒤처지는 집단이라는 인상은 지금도 여전해요.”
“한마디로 영혼 없는 집단입니다. 탈인간화, 몰인간화한 조직이죠.”
“군대에 식상했다는 것, 그게 귀농의 직접적인 계기?”
“귀농 동기가 단순하진 않아요. 제가 야생화도감에 나오는 400여 종의 식물을 모조리 외울 정도로 자연을 좋아합니다. 시골살이에 적당한 성향의 소유자죠. 늑대처럼 오염된 인간들을 피해,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에 살며 어려서부터 좋아한 그림이나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자면 일단 시골에 내려가 사는 게 답이었어요.”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기도
김 씨는 군에 있을 때부터 그림 습작을 땀 흘려 했다. 마치 감옥을 사는 자가 창살 너머로 들어오는 밤하늘의 영롱한 별을 바라보듯 절박한 심정으로. 전역과 동시에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 시골에 들어와 미술관부터 지었어요. 작지만 소중한 꿈의 공간이죠. 그런데 말이죠, 귀농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어요. 시골생활을 작정했으나 갈 곳이 없더라고. 제가 원래 가난한 농가 출신입니다. 부모님께서 고생고생하며 농사에 전념하셨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어요. 제가 육사를 간 것도 배가 고파서였어요. 그 궁색했던 고향으로 낙향하고 싶었으나 이미 도시화가 진행돼 가당치 않은 현실이었죠.”
“흔히 터 잡기부터 애환의 드라마가 펼쳐지죠.”
“터를 마련하려면 자금이 필요한데 가계 상황이 엉망이었어요. 전역하고 보니 빚이 산더미 같더라고. 군인 남편의 진급을 위해, 아이들은 물론 시어머니와 시동생까지 돌보느라 그간 아내가 나 몰래 이리저리 자금을 융통해 썼던 겁니다.”
“괴롭고도 헌신적인 내조였군요.”
“돈 문제로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아 군 생활에 차질이 오면 어쩌나, 그런 우려를 한 아내 나름의 궁여지책이었지만, 하마터면 이혼할 뻔했죠. 연금 타서 이자 갚고 나면 남는 게 없더라고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시골에 내려가되 일단 재테크로 조속히 돈부터 벌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게 용케 성공했어요.”
“어떻게? 무엇으로?”
“우선 은행과 친척을 통해 7000만 원을 빌렸어요. 그러곤 시장경제의 약점인 부동산, 그걸 뚫고 들어가 보자는 작정을 하고 부동산 재테크 관련 책들을 독파했죠. 그런 뒤 여기저기 땅들을 알아보다 이곳 땅 1400평(4400m²)을 사들였는데 이 땅이 원래는 값싼 맹지였어요. 귀농 금기사항 제1칙은, 맹지는 절대 피하라! 그러나 저는 이판사판 한순간에 질렀어요. 이후 온갖 험한 고생을 감수해 기어이 길을 냈죠. 그러자 땅값이 벼락처럼 뛰기 시작합디다.”
인생이란 기묘한 서커스. 요령과 용기에 인자한 천사의 협찬까지 겹치면 후루룩 팔자가 바뀐다. 김 씨가 맹지에 길을 내자 인근에 고속도로 IC가 생기고, 혁신도시니 기업도시니, 요란한 개발바람이 불더란다. 햐, 현재 20배 가까이 지가가 상승한 상황. 그렇다면 맹지 투자란 은근히 매력적인 종목인가? 독자님들께선 유념하시라. 아니란다. 절대 금물이라는 거다. 김 씨 자신의 케이스는 워낙 기묘하고도 특별한 성공적 일탈일 뿐이라는 거다.
빠른 두뇌 회전, 상류로 거침없이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생동하는 촉, 과감한 깡, 집요한 근면성, 아마도 이런 것들이 김 씨의 밑재산일 게다. 그는 군 복무를 하면서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녔다.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논문도 썼다. 생판 객지인 시골에 살면서는 숱한 파란을 겪었다. 마을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는 식의 드잡이도 흔했으나 다 이겨냈다. 덮쳐오는 난관마다 용을 쓴 엎어치기와 돌려차기와 허리치기로 끝내 돌파한 걸로 보인다.
‘낭만을 가져라!’
김 씨는 늘 바쁘다. 일테면, 수시로 귀농·귀촌 교육장에 강사로 불려 다닌다. 강의료 수입만 연 1000만 원에 이르기도 했다지. 귀농 선수 다 됐다. 작물은 내내 블루베리를 기른다. 이미 한물간 걸로 소문난 블루베리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 후다닥 작물전환을 왜 안 하지?
“블루베리 시장성은 아직도 무궁무진해요. 전성기는 지났다지만 기술력을 발휘한다면 지금도 평당 6만 원은 나옵니다. 시골 농부들이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기술력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농사를 잘 짓는 게 아닙니다. 판로 개척에도 둔하죠. 귀농인들이 똘똘한 기술력을 보유할 경우 기존 농민들보다 승산이 큽니다. 주변 농가들의 블루베리 85%가 죽었을 때에도 제 농장의 블루베리는 싱싱하게 살았어요.”
“머리와 몸을 악착같이 써도 타산 맞추기 어려운 사업이 농업 아녜요?”
“농사꾼들은 이미 하층으로 몰렸어요. 시장경제의 딜레마죠. 난처한 우리 농촌의 현실을 고려할 경우, 사실 제가 교육장에서 양심적인 소리를 하기가 힘듭니다. 부동산 재테크로 성공한 입장에서 농사나 귀농을 권장한다는 건 사치스러운 얘기일 수 있어요. 축산이나 시설하우스 등 공장형 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연간 1억 원 이상을 벌기도 하지만 일부에 불과해요. 근본적으로는 농업혁명이 필요합니다. 현 상황에서 우선은 기술 영농과 작물 브랜딩이 필요해요.”
“열악한 농업 구조에도 불구하고, 농업이란 가장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사업일 수 있죠. 때로 저는, 고달플망정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농부를 만나 감동을 받곤 했어요.”
“농사란 자연과 더불어 자급자족하는 일입니다. 떳떳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살 수 있죠. 제가 귀농 이후 사람이 됐어요. 농사짓는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용서가 없는 자연에 순응해야 하기에. 겉으로는 겸손하지 않을망정 속으로는 겸손이 차오르는 걸 느낍니다.”
대체로 기억은 망각에 진다. 끝내 묻히지 않는 기억, 그중 아픈 기억은 한(恨)으로 응어리진다. 김 씨의 기억 속 앨범에도 한이라 할 만한 게 꽂혀 있으니, 성장기에 바라봤던 부모님의 가난과 고난의 참경이 바로 그것. 그의 귀농 배경이기도 하다.
“제 부모님은 평생 농부로 살며 평생 가난에 허덕였어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을 망쳐가며 일을 하고서도 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출세를 해서 농업 구조를, 제도를, 현실을 바꿔보자, 그런 생각이 많았어요. 그게 귀농 원동력인데요, 이 마을에 와서 보니 역시나 비참했어요. 농업 자체가 구조적으로 피폐한 현실이지만, 일단 우리 마을이라도 좀 방향을 틀어보자, 어떻게 해서든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힘을 보태보자, 그런 생각으로 꽃양귀비 축제를 비롯해 많은 마을사업을 주도해왔습니다.”
“어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 한다, 그런 반발이 없진 않았겠죠?”
“그간 멱살도 잡히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 욕도 먹고, 당신 때문에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누가 잘살게 해 달라 했냐, 별별 곤욕을 다 치렀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말도 안 되는 타협까지 해가며 마을을 바꾸기 위해, 주민들이 인정할 때까지,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했어요. 부글부글 속에서 끓는 게 많았지만, 그 와중에 정이 들었어요.”
뜨겁거나 차갑거나, 그게 아닌 미지근한 건 난 싫어! 아마도 김 씨는 스스로에게 그리 외치며 사는 사람. 군문에서건 귀농한 시골에서건, 삶의 야생과 야전(野戰)의 스릴을 도발하거나 도전하는 인물. 이런 그가 ‘낭만을 가져라!’ 귀띔한다. 귀촌·귀농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말이다.
“돈 벌 계산보다는, 시골생활에 관한 총천연색 꿈을 꾸는 게 중요합니다. 얄팍한 꿈이 아닌, 간절한 꿈에서 강렬한 힘이 나오니까 말이죠. 그리고 시골에 가려면 시골 지향적 가치, 자연 지향적 가치부터 생각하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제 꿈은 자그만 목장 하나라도 만들고,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아직은 제대로 이루질 못했지만, 여전히 절실한 꿈이라 매너리즘 같은 것에 빠지진 않고 삽니다.”
나이 든 사람의 가슴엔 은연중 ‘자연’이 깃든다. 서러운 날들의 기억이 헹구어지며 시(詩)랄까, 그림이랄까, 발효한 감성의 문양이 서린다. 시골의 자연 속에선 한결 더 눅진하게.
김용길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노후 시골생활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분명하다. 중요한 건 충분한 준비. 돈과 땅과 집 문제에 치중하기 전에 인생을 보는 가치관부터 수정하는 게 필요하다. 시골 지향적, 자연 지향적 가치관을 가슴에 채워야 한다. 사람도 원래 자연의 하나이지 않는가.
❷ 혼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멘토를 만들자. 시골 목사, 공무원, 귀농인, 현지 농민 중에서 도움 받을 만한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자.
❸ 나 혼자만 잘살려는 생각을 버리고 원주민과 적극 어울려야 한다. 매사 조금만 양보하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50~60대에 국민연금에 다시 가입해 노후를 준비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특히 소득 상위층이 집중된 수도권을 중심으로 국민연금 재테크 바람이 불고 있다.
A(58·여) 씨는 최근 국민연금 예상 수령액을 조회해보고 전략을 새롭게 짰다. 젊은 시절 직장생활 10여 년 동안 부은 국민연금의 노령연금 예상액은 월 50만 원 남짓했다. 마흔 무렵 퇴직 후 20년 가까이 소득이 없다는 이유로 국민연금 ‘납부 예외’를 신청해 보험료를 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 국민연금 수령자들을 보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지난해 실버취업 후 그동안 내지 못했던 예외기간의 보험료 약 2000만 원을 추후납부했다. 그는 “젊어서는 국민연금보험료 납부가 세금처럼 느껴져 피하고 싶었는데, 막상 연금 수령시기가 다가오니 진작 내지 못한 게 아쉽다”고 했다. 만 62세가 되면 받게 될 예상 연금액이 월 90만 원 수준으로 2배 가까이 올랐다.
국민연금은 금융회사에 가입하는 개인연금과 달리 물가상승률을 반영해 연금액을 올려주기 때문에 실질 수익률이 높다. 2017년 기준 국민연금 평균 수익비는 최저 1.6에서 최고 2.9로 나타났다. 가입자가 낸 보험료에 비해 적어도 1.6배 이상 더 많은 연금으로 돌려받는다는 의미다.
국민연금은 보험료가 같더라도 가입기간이 길수록 연금액이 많아지기 때문에 추납·임의계속 가입 등으로 가입기간을 늘리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다. 국민연금 ‘더’ 받는 4가지 제도 활용법을 살펴본다.
1. 소득 없던 기간 → 추납
국민연금 추후납부(이하 추납)는 국민연금에 가입한 후 실직이나 폐업, 가정주부로 경력단절 등의 사유로 국민연금 가입이 제외된 기간 동안 납부하지 않았던 국민연금 보험료를 추후에 납부하는 것을 이른다.
지난해 추납 신청자 연령을 살펴보면, 60세 이상은 7만1234명(51.5%)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50대 5만386명(36.4%) 순이었다. 반면 30대(3%)와 40대(8.6%)는 현저히 비율이 낮았다. 추납이 연금받을 시기가 가까워진 50~60대를 중심으로 노후준비 수단으로 많이 활용되는 것으로 분석된다.
지역별로는 서울(24.6%), 경기(24%), 부산(7.5%) 등 수도권에 신청자가 집중됐으며, 특히 서울 강남구, 송파구 등 부유층 거주 지역의 신청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추납 건수는 2013년 2만9984건에서 2017년 13만8424건으로 매년 급증하는 추세다. 올해는 지난 5월 말까지 이미 5만2568명이 신청할 정도로 열기가 뜨겁다. 추납 보험료는 일시에 전액을 납부하거나 금액이 큰 경우 최대 60개월까지 분납이 가능하다.
2. 찾아갔던 일시금 → 반납
전업주부 B(57) 씨는 1988년 1월부터 1990년 3월까지 직장을 다니다 그만두고 1년 후 반환일시금을 받았다. 이후 결혼해 전업주부로 지내다 2015년 2월에 회사에 다시 취업했다. 2017년 10월에 예전에 찾아간 반환일시금을 반납, 만 63세에 월 26만8000원의 연금 수령을 받을 수 있게 됐다. B 씨는 이후 추납을 신청해 연금액을 더 늘렸다.
1999년 이전에는 가입자 자격상실 후 1년이 경과하면 반환일시금 청구가 가능했다. 반환일시금 반납은 과거 반환일시금을 받은 자가 다시 취업 등으로 국민연금 가입자가 된 경우 신청이 가능하다. 당시 수령했던 반환일시금에 이자를 더해 반납하면 가입기간이 복원돼 연금액을 높이는 데 유리하다. 반납금은 전액을 일시에 납부하거나 금액이 클 경우 최대 24회까지 나눠 낼 수 있다.
3. 납부 예외자·만 60세 이후 → 임의가입·임의계속가입
40대 전업주부 C 씨는 예전에 7년간 국민연금보험료를 납부한 뒤 결혼 후 경력단절로 국민연금을 중단했다. 그러던 중 국민연금 의무가입자가 아닌 전업주부도 국민연금을 납부할 수 있는 제도를 알게 됐다. C 씨는 현재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는 최소 가입기간(10년)이 부족해 노후에 일시금 수령만 가능하지만, 임의가입 신청을 통해 약 월 9만 원 정도를 납부하면 연금을 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 만 60세까지 292개월에 총 2800만 원을 납부하면, 만 65세부터 월 예상연금액 약 50만 원을 받을 수 있다. 여성 기대수명인 85세까지 연금을 받는다고 가정하면, 납부한 보험료 대비 4배가 넘는 총 1억2000만 원을 연금으로 돌려받는 셈이다.
임의가입은 18세 이상 60세 미만 국민 중 국민연금 의무가입 대상이 아닌 전업주부나 학생 등이 본인의 선택에 따라 국민연금에 가입할 수 있는 제도다. 소위 ‘강남 아줌마’로 불리는 고소득층이 노후준비 수단으로 선호하는 방식이다. 임의가입자 수는 지난 2012년 말 20만7890명에서 2017년 말 32만7723명으로 크게 늘었다.
만 60세 이후라면 임의계속가입을 선택할 수 있다. 임의가입제도와 마찬가지로 가입기간이 부족해 노령연금을 받을 수 없을 때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 임의계속가입자 수는 지난 3월 말 기준 38만 명을 넘어섰다.
4. 연금 수령시기인데 소득 많다면 → 연기연금
내년부터 국민연금을 받게 될 D 씨는 아직 소득이 있어 노령연금 수령시기를 늦출 생각이다. 연기연금은 노령연금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연기할 경우 연금액을 높여주는 제도다. 1개월마다 연금액이 0.6%(1년 7.2%)씩 늘어나고, 최대 5년까지 늦추는 것이 가능하다. 따라서 노령연금 수령시기를 최대 5년늦추면 노령연금을 36%나 더 받을 수 있게 된다.
특히 근로소득이나 사업소득이 많은 경우라면 노령연금 수령시기를 늦추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에 대해 김동엽 미래에셋은퇴연구소 상무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노령연금 수급자가 소득이 많은 경우 5년간 ‘감액’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연기연금 제도를 활용해 노령연금 수급시기를 뒤로 늦춰 감액을 피하는 것이 유리하다.”
더욱이 연기가산율(36%)과 물가상승률만큼 더 많은 연금을 받을 수 있다. 다만 노령연금은 연금 수령자가 사망할 때까지 지급된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노령연금 수급시기를 늦췄는데 일찍 사망할 경우 오히려 손해를 볼 가능성도 있다.
평생을 한 직장에서 근무하며 하나의 일에만 매달려 살아온 이들에게 두 번째 삶, 은퇴 후 인생설계는 그저 막막한 일일 뿐이다. “후배들에게 미리미리 준비하라고 잔소리했지만, 정작 회사 밖으로 나오니 눈앞이 캄캄하더라”는 어느 공기업 정년퇴직자의 소감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퇴직 후의 삶을 미리 준비해야 하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제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런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최근 자사 임직원의 은퇴 준비, 노후 준비를 돕기 위한 기업들이 늘고 있다. 선명한 미래가 업무의 생산성 향상에 도움이 된다고 믿는 것 아닐까. 이런 기업 중 모범 사례로 꼽히는 포스코를 찾아 인생설계 프로그램이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들여다봤다.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본지 제호와 비슷해 친숙하게 여겨지는 이 이름은 포스코의 퇴직 후 인생설계 프로그램명이다. 교육 참여는 50세 이상의 포스코 임직원이라면 누구나 신청이 가능하다.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은 2001년부터 포스코인재창조원이 운영해온 정년퇴직 예정자 대상의 교육 과정인 ‘그린 라이프 디자인’이 원형이라 할 수 있다. 교육 진행 과정 중 정부의 정년퇴직 연장 정책에 따라 2016년과 2017년에는 정년퇴직자가 발생하지 않게 되면서 프로그램 운영에 변화가 있었다. 이런 변화의 배경에는 ‘준비기간’에 대한 의견도 반영됐다. 교육 시점이 정년퇴직 3개월 전부터 시작되어 인생설계에 제대로 반영하기엔 빠듯했기 때문이다. 그린 라이프 디자인 교육은 2001년부터 2015년까지 약 3000여 명의 직원들이 참여했다.
인재창조원 관계자는 “정년퇴직 예정자를 대상으로 한 그린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이 퇴직이 임박한 이들을 대상으로 실제적으로 필요한 서류 처리나 연금 문제 등에 초점을 맞췄다면,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은 퇴직 후 생활에 대한 마인드 변화, 방향성 제고와 같은 포괄적인 부분이 중심이 된다”고 설명했다.
미래가 명확해야 근로의식 높아져
올해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에 참여 예정 인원은 330명. 포스코의 주된 사업장인 포항과 광양의 임직원 300명과 서울 근무자 30명이 참여한다. 강의에 참여하는 인원만 13명. 포스코인재개발원의 교수 외에 다양한 분야의 사외 강사들이 각 전문 분야의 교육을 담당한다.
포스코인재창조원 김일수 교수는 이 프로그램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한다.
“50대를 넘어선 직원들이 퇴직 후 삶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갖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부분 젊은 시절부터 포스코에 몸담아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회사 밖에서의 삶에 겁을 먹을 수 있거든요. 그래서 회사가 나서서 이들의 일과 삶에 대한 생애설계와 퇴직 준비를 지원해 불안감을 해소시키고, 근로의식도 고취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지요. 또 퇴직 후 삶의 방향을 설정함으로써 행복한 인생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부분도 있고요.”
2016년과 2017년 진행된 프로그램에는 총 700여 명의 임직원이 참여했다. 본인의 생애설계에 대한 진단과 자산관리, 생애관리, 건강관리 교육이 중점적으로 이뤄졌고, 관심 분야와 관련한 현장 탐방과 체험 학습도 이뤄졌다. 참여자의 만족도는 꽤 높은 편이어서 자체적으로 조사한 결과 5점 만점에 평균 4.88점의 반응이 나왔다.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은 올해 변화를 줬다. 초기 프로그램이 1일 8시간 포괄적인 방식으로 진행돼 교육시간 부족, 교육 내용 전문성에 대한 의견이 많았기 때문이다. 올해부터는 직업형 트랙과 자산형 트랙으로 나눠 자신에게 맞는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자산형 트랙의 경우 자산관리는 결국 부부 공동의 이해가 있어야 한다는 점에 착안해 임직원의 배우자도 함께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또 원한다면 두 프로그램 모두 참가할 수 있다. 일반적인 재무관리 교육과 달리 특정 금융상품의 밀어주기가 없다는 점도 참여자들에게 환영받는 이유다.
‘먹고사는 문제’ 이외의 것까지
직업형 트랙은 1인 창업이나 프랜차이즈 창업의 특징과 차이점, 창업 과정에서 극복해야 할 위험 요소, 재취업을 원하는 이들을 위한 구직 목표 설정, 자격증 취득 등과 같은 현실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자산형 트랙은 수익형 부동산이나 부동산 경매 또는 공매에 대한 정보, 세금과 관련 법률에 대한 소개, 각종 금융상품이나 상속·증여와 관련한 교육도 실시한다.
또 각 프로그램에선 즐거운 여가를 위한 본인의 여가 유형 진단에서부터 여가 활용 방법과 건강관리를 위해 지켜야 할 사항 등도 함께 소개한다.
프로그램의 구성이 단순히 ‘먹고사는 문제’에 국한되어 있지 않은 것이 흥미로운 부분. 포스코인재창조원 관계자는 이렇게 주제가 넓어진 것에 대해 “직원들의 요구가 있었다”고 설명한다.
임직원들의 관심이 많은 건강과 재무, 인간관계, 여가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는 것은 단순한 재테크 활동뿐만 아니라 정년퇴직 후 품위 있는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욕구를 반영한 것이다.
물론 재취업이나 창업에 대한 일반적인 개념이나 준비사항에 대한 교육도 진행한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개인별로 성격검사와 적성검사도 실시한다. 여기에 직원에게 재취업 장애요인은 없는지 체크한다.
오프라인 교육과 별도로 사이버학습을 사전학습 형태로 진행하는 것도 이 프로그램의 특징 중 하나다. 인생설계, 창업, 귀촌과 같은 커리어 디자인과 재무 디자인, 라이프 디자인을 온라인을 통해 접할 수 있다.
은퇴 대비에 ‘눈치 보기’는 없어
올해 브라보 라이프 디자인 프로그램의 참석률은 전체 대상자의 20% 정도. 은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는, 정년퇴직을 10년 앞둔 임직원까지 대상에 포함되는 것을 고려하면 꽤 높은 편이다.
혹시 회사가 먼저 나서서 ‘퇴직’에 대해 논하는 것이 사측에서 퇴직을 권하는 것처럼 비춰지진 않을지, 또 프로그램 참여가 퇴직 의사를 밝히는 것처럼 여겨지진 않을지 의문을 가졌지만 참가자들은 “사내 분위기를 모르는 상태에서 갖는 의문”이라고 일축한다.
한 프로그램 참석자는 “포스코라는 기업의 특성상 대부분의 직원들이 정년을 채우고 퇴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기고 정년 때까지는 업무에만 집중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면서 “이런 문화 때문에 정년퇴직 후 생애설계에 대해 논하는 것이 어색하지 않은 것이 사내 분위기다”라고 설명했다.
전철역에서 집까지 가는 길목에 먹자골목이 있다. 크고 작은 업소들이 길 양옆에 포진해 있다. 경쟁이 심해져서인지 몇 달 못 가 문 닫는 업소들이 많다. 그러고는 새 업소가 간판 달고 인테리어 다시 해서 문을 연다. 그때 축하 화분들이 많이 들어온다. 부피가 큰 것으로는 고무나무, 관음죽 등 열대 관엽식물들이 많다. 그런데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서 밖에 둔 열대 식물들이 그대로 얼어 죽은 채 방치되어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업소 영업도 부진한데 입구의 얼어 죽은 열대 식물들이 더 처량하게 보인다.
이런 현상은 요즘 사람들이 무지해서 생기는 일이다. 어린 시절부터 콘크리트 아파트에서만 살던 사람들이 식물을 길러봤을 리 없다. 열대 식물들은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얼어 죽는다. 기온이 내려가면 실내에 들여놓아야 한다. 실내에 들여놓으면 공간을 차지한다며 밖에 두는 사람이 많다. 실내에 들여놓는 것도 식물에게는 환경이 바뀌는 것이므로 스트레스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너무 더우면 웃자란다. 웃자란 식물은 그만큼 허약해서 어느 정도 자라면 감당을 못하고 시들어버린다.
사무실에서는 심지어 마시다 남은 커피나 녹차를 화분에 붓는 사람도 있다. 화장실까지 가서 버리기가 귀찮은 것이다. 커피가 식물에 좋을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믹스 커피는 설탕 같은 첨가물이 들어가 좋을 리 없다. 원두커피 찌꺼기도 일부러 화분에 주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하지만 식물에게는 깨끗한 물이 가장 좋다.
애견은 날씨가 추워지면 옷까지 사다 입힌다. 그러나 개에게는 안 좋단다. 애견에게는 그렇게 극성스러우면서 식물에게는 관심이 없다. 열대 식물을 파는 사람들에게는 얼어 죽는 나무가 많을수록 좋은 일일지도 모른다. 그래야 소비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국가적 낭비다.
식물을 기르는 것은 정서적으로 상당히 바람직한 일이다. 정성을 다해 식물을 키우다 보면 자연의 이치를 깨닫게 되고 애정도 생긴다. 그런데 요즘은 공동주택에 살다 보니 실내에서 식물 기르기가 마땅치 않다. 햇볕 잘 드는 남향집이면 좀 낫지만, 북향집은 햇볕이 부족해 실내 식물들이 햇볕 드는 쪽으로 기를 쓰며 가지를 뻗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젊은 시절,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장기간 파견 근무를 할 때 식물이 주는 위로를 새삼 느꼈다. 주변은 온통 황토빛 사막이었다. 식물은 찾아보기 어려웠고 있다 해도 잎이 거의 보이지 않았는 누런 먼지를 뒤집어쓴 것들이었다. 그래서 국내에 휴가차 들어오면 잔디 씨를 사서 가져갔다. 방 안에 작은 용기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린 필드를 만들었다. 용기에 탈지면을 깔고 물을 붓고 잔디 씨를 뿌려놓으면 일주일 후 파란 싹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일종의 수경 재배였다. 초록색이 인간에게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그때 알았다. 그래서 귀국하자마자 아파트를 팔아 치우고 넓은 마당에 잔디가 깔린 단독주택을 샀다. 마당에 온갖 과일나무를 심고 각종 꽃들을 키웠다. 그래서 당시 열풍이던 아파트 폭등의 호기를 잡지 못해 재테크에 실패했지만 후회는 없다. 그 시절이 가장 행복하게 기억되기 때문이다. 다시 기회가 되면 단독주택으로 이사 가서 넓은 마당에 온갖 식물들을 기르며 살고 싶다.
# “다단계 피라미드에 불과하다. 처음 가입한 사람에게는 고수익을 보장해주지만 가입자가 줄면 파산하는 것과 같다.” 그레고리 맨키프 하버드대 경영대학 교수가 국민연금을 두고 한 말이다. 향후 고령화로 연금 수급자가 증가하면, 머지않아 국민연금 기금이 바닥날 수 있다는 우려는 이 같은 맥락에서 나온다. ‘연금 고갈론’ 외에도 쥐꼬리만 한 연금이 나온다 해서 ‘용돈연금’이라 불리기도 한다.
# 강남아줌마들은 국민연금으로 노후 재테크를 한다? 지난 10월 국회 보건복지위 소속 정춘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민연금공단으로부터 제출받은 ‘최저보험료를 납부하는 임의 가입자의 배우자 소득수준별 현황’에 따르면 최저보험료를 납부하는 임의 가입자 중 배우자가 월 400만원 이상인 가입자가 4만9382명으로 45.1%에 달했다. 저소득 취약 계층보다 강남아줌마로 불리는 고소득층이 노후 준비 수단으로 국민연금을 선호함을 보여준다.
국민연금은 극과 극의 평가가 잇따른다. 국민연금이 오랫동안 온갖 불신에 휩싸여 있음에도, ‘돈’에 밝은 강남아줌마들이 각별히 선호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용돈연금?’ 실제 얼마나 받나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올 8월 기준 국민연금 노령연금 수급자의 월평균 수령액은 36만4600원이다. 국민연금이 ‘용돈연금’이라는 비난을 받는 이유다.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2017년 기준으로 우리나라 국민연금 신규 수급자의 평균 가입기간은 약 17년에 불과하고, 실질 소득대체율은 약 24%에 머물렀다.
국민연금 노령연금은 10년 이상 보험료를 납부해야 연금으로 수령 가능하며, 가입기간이 길수록 연금액이 불어난다. 10~19년 가입자의 월평균 수령액은 39만5840원, 20년 이상 가입자의 월평균 수령액은 89만2190원으로 집계됐다.
기존 60세 이후였던 국민연금의 수급 연령은 2013년부터 4년을 주기로 한 살씩 단계적으로 늦춰지고 있다. 1969년 이후 출생자는 65세부터 수령할 수 있다. 일각에서는 향후 수급 연령이 더 늦춰질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연금액도 1988년 도입 당시 소득 대비 70%를 내걸었지만 현재는 40%로 조정돼 2060년까지 기금이 버틸 수 있도록 연장된 상태다.
국민연금은 국가가 최종적으로 지급을 보장하기 때문에 국가가 망하지 않는 한 지급된다. 현재 국민연금과 같은 공적연금제도를 실시하는 전 세계 170여 개국 중 연금 지급을 중단한 사례는 단 한 곳도 없다.
송승용 희망재무설계 이사는 “고령화에 따라 향후 국민연금의 수령 시기가 늦춰진다거나 소득대체율이 낮춰질 가능성은 있지만, 현재 연금을 받는 어르신 세대는 물론 20~30대 젊은 세대라 해도 평균수명 이상으로 살 경우 낸 돈보다 많이 돌려받을 수 있다”며 “물가 상승에 따라 매년 연금액을 올려줄 뿐 아니라 노후를 위한 최소한의 ‘강제 저축’이 된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민연금 앞당겨 받으면 손해일까
중소기업 부장인 정인호(50)씨는 은퇴만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진다. 정씨는 “50세를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知天命)’이라고 부르는데, 현실에선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벼랑 끝 나이인 것 같다”며 “퇴직하면 국민연금을 받기까지 10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데 어떻게 버틸지 걱정”이라고 했다.
국내의 경우 평균 은퇴 연령이 여성 직장인은 47.3세, 남성 직장인은 55세다. 대부분의 직장인이 현실적으로 50대 전후로 퇴직한다고 보면 길게는 20년 넘게 무소득 기간을 견뎌야 한다. 그렇다면 국민연금 개시 전에 은퇴해 당장 생활비가 필요하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노령연금 수급시기 5년 전부터 조기노령연금을 신청할 수 있다. 단 이때 소득이 없거나 소득이 국민연금 가입자의 평균소득액(2016년도 기준 약 210만원)보다 낮아야 신청이 가능하다.
유의할 점은 조기노령연금을 신청하면 연금액이 감액된다는 사실이다. 연금 받는 시기를 1년 앞당길 때마다 연금 수령액이 6%씩 줄어든다. 5년 빨리 받으면 30%나 줄어든다. 예를 들어 만 61세부터 노령연금을 월 100만원 받을 수 있는 사람이 5년 앞서 56세부터 연금을 받으면 월 수령액이 70만원으로 줄어드는 셈이다.
그렇다면 조기노령연금 수령은 무조건 손해일까. 국민연금공단에 따르면 조기노령연금 신규 수급자는 2013년 8만4956명에서 지난해 3만6164명으로 크게 감소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안정적인 소득 확보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국민연금은 기본적으로 가입자가 죽을 때까지 받는 연금이기 때문에, 수령을 늦췄다가 불행하게 일찍 세상을 떠날 경우에는 오히려 연금을 제대로 받지 못하게 된다. 가입자가 사망했을 때 유족이 받을 수 있는 연금은 가입기간에 따라 기본 연금액의 40~60%(+가족 부양액) 수준이다.
만일 조기노령연금을 받지 않더라도 은퇴로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기 어렵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국민연금은 만 60세까지 의무가입이다. 퇴직하면 직장 가입자에서 지역 가입자로 전환되는데, 소득이 없을 때는 납입 유예가 가능하다. 단 향후 받을 연금액은 유예된 기간만큼 줄어든다. 국민연금 예상 연금액은 국민연금공단 홈페이지(www.nps.or.kr)에서 ‘내 연금 알아보기’를 통해 조회할 수 있다.
부부 가입자, 배우자 먼저 사망할 경우
맞벌이를 하다가 은퇴한 김영모(56)씨 부부는 국민연금의 유족연금 논란이 일 때마다 억울한 기분이 든다. 김씨는 “부부가 각자 국민연금 보험료를 20년 이상 냈는데, 예기치 않게 배우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면 두 사람 몫을 온전히 받을 수 없다는 게 억울한 것 같다”고 말했다.
국민연금은 한 사람에게 2개 이상의 급여 수급권이 생길 경우 하나만 선택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즉 배우자가 사망하면 유족연금이나 본인의 노령연금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를 ‘중복급여의 조정’이라고 한다.
예컨대 국민연금 부부 가입자 중 남편이 먼저 사망했을 경우를 가정해보자. 배우자는 남편이 남긴 유족연금이 본인의 노령연금보다 많을 경우, 유족연금(최대 기본 연금액의 60%+부양가족연금액)만 받을 수 있다. 본인의 노령연금을 계속 지급받겠다고 선택하면, 본인의 노령연금액에 유족연금액의 30%만 추가로 받게 된다. 어느 쪽을 선택하더라도 부부가 함께 생존해서 연금을 받을 때보다 30~40% 감액이 되는 구조다.
이에 반해 공무원연금은 중복급여 조정 대상이 아니다. 유족연금과 노령연금을 동시에 수령할 수 있다. 국민연금 부부 가입자의 반발이 일어나는 까닭이다. 국민연금 부부 수급자는 2010년 10만8674쌍에서 2012년 17만7857쌍, 2014년 21만4456쌍, 2015년 21만5102쌍으로 급증하다가 지난해 25만 쌍을 돌파했다.
‘12시 땡땡땡’. 고전 속 신데렐라는 자정이 임박하자 허겁지겁 궁을 빠져나간다. 12시를 알리는 종이 울리면 마차는 호박으로 바뀐다. 금융상품도 일몰 시간이 되면 혜택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올해 12월 31일은 금융상품의 홍수 속에서도 좀처럼 찾기 힘든 대표적인 절세 상품 중 하나인 해외주식형 비과세 펀드의 막차 운영시간이다. 내년 말이면 ‘만능통장’으로 불리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의 막차도 떠난다.
막차 시간
2017년 12월 31일
해외주식형 펀드, 3000만원 한도 비과세
중소기업을 운영하는 박모(58)씨는 추석 연휴 직후 증권사를 찾았다. 오랫동안 국내 주식 투자는 해왔지만, 좀처럼 해외 투자는 못하고 있던 때에 지금이 해외 투자 전용 통장을 만들 적기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1만원짜리 통장이라도 연내 만들어둬야 앞으로 10년간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고, 분산 투자 관점에서도 해외 주식 투자가 필요해 가입을 서둘렀다”고 말했다.
올해 말로 비과세 혜택이 종료되는 해외주식형 펀드에 ‘막차’ 타기가 한창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2월 출시된 비과세 해외주식형 펀드의 판매 잔고는 지난 8월 2조원을 돌파했다. 특히 지난 8월 한 달에만 2179억원이 몰리는 등 올 하반기 들어 자금 유입이 두드러지고 있다.
모든 투자가 그렇듯이, 혜택 종료기간이 임박했다고 ‘묻지 마’ 가입은 외려 실(實)을 부를 수 있다. 그러나 금융 전문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올해가 가기 전에 소액으로라도 비과세 해외주식형 계좌를 만들어둘 것을 적극 추천한다.
비과세 해외주식형 펀드는 해외 투자 비중이 60% 이상인 펀드와 국내에 상장된 해외 상장지수펀드(ETF)에 투자할 경우 펀드 매매차익 및 환차익에 붙는 세금을 면제해주는 상품이다.
이 상품은 가입 후 10년 동안 납입 원금 기준 1인당 3000만원까지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 기존 해외 상장주식이나 펀드에 투자하면 15.4%의 배당소득세를 물어야 한다.
홍춘욱 키움증권 투자전략팀장(이사)은 “앞으로 절세 상품은 줄어들고 종합과세 적용은 확대될 것으로 예상되므로, 연내 가입하면 향후 10년간 비과세 혜택이 적용되는 해외주식형 펀드는 하반기 가입해야 할 우선 추천 상품”이라고 말했다.
국내 투자자들의 경우 국내 자산 선호 성향이 유별하고, 연령대가 높을수록 특히 해외 투자를 망설이는 경향이 높다. 그러나 글로벌 주식시장 규모의 채 2%가 안 되는 ‘좁은 국내’에 투자를 집중하기보다, 글로벌 차원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 위험을 낮추고 수익을 높이는 분산 투자전략이 될 수 있다.
실제 비과세 해외주식형 펀드 출시 이후 지난 8월 말까지 설정 규모 상위 10개 펀드의 수익률은 13%에서 53% 수준이다. ‘KB통중국고배당증권’이 가장 높은 53.4%를 기록 중이고, ‘피델리티글로벌테크놀로지’는 46.8%다.
이러한 비과세 해외주식형 펀드를 활용하는 효과적인 투자 전략은 한곳에 뭉칫돈을 넣기보다 소액이라도 여러 개의 통장을 만들어두는 것이다. 일단 올해 안에 1만원이라도 넣어 여러 개의 펀드를 만들어둔 뒤 내년부터 시장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추가 납입하는 방식이다. 이를테면 이 상품의 비과세 한도가 3000만원까지이므로, 1만원씩 300만원 한도로 10개의 전용계좌를 개설하는 식이다. 이때 ‘여러 개의 통장’이 강조되는 것은 장기 투자를 고려한 다양한 지역 포트폴리오 구성이 바람직하기 때문이다. 홍춘욱 팀장은 “장기적으로 보면 시장이 순환하는 특성상 한 국가에 들어가기보다 선진국, 신흥국 국가에 고루 분산 투자하는 것이 안정적으로 수익률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3000만원의 비과세 한도는 거액 자산가들에게는 넉넉지 않을 수 있지만, 가족의 경우 개인별 가입이 가능하다. 신동일 KB국민은행 대치역PB센터 부센터장은 “비과세 해외주식형 펀드는 가족이라도 개인별 한도가 적용되므로, 4인 가족이면 최대 1억2000만원까지 비과세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해외주식 간접투자를 통해 이러한 혜택을 보려면 반드시 기존 해외주식 펀드가 아닌 전용 신규계좌를 개설해야 한다. 또한 내년부터는 펀드 종류를 변경하면 혜택을 받을 수 없음을 유의해야 한다.
막차 시간
2018년 12월 31일
개인종합자산관리계, 비과세 한도↑, 수익률 개선
‘만능절세통장’으로 불리는 개인종합자산관리계좌(ISA)는 지난해 혜성처럼 등장했다. ISA는 한 계좌 안에서 예금과 적금, 채권, 주식 등 각종 금융상품을 자유롭게 투자할 수 있는 데다 절세 혜택까지 부여되는 상품이다. 연간 2000만원, 5년간 최대 1억원까지 다양한 금융상품을 편입할 수 있다. 때문에 금융권의 사전 예약 경쟁이 치열할 정도로 등장 전부터 초미의 관심을 불러일으켰지만, 이내 ‘찻잔 속 태풍’으로 잦아드는 듯했다. 이러한 ISA가 보다 강력하게 업그레이드된다. 이른바 ‘ISA 시즌2’다.
세법개정안에 따라 내년부터 비과세 한도금액이 일반형은 기존 200만원에서 300만원으로, 서민형(총급여 5000만원 이하 근로자 또는 종합소득 3500만원 이하 사업자)은 종전 250만원에서 500만원으로 올라간다. 비과세 초과분은 분리과세(지방소득세 포함 9.9%)가 적용된다.
까다로웠던 중도인출 제한도 유연해진다. 종전에는 5년의 의무가입 기간 동안 퇴직이나 폐업 등의 중대한 사유가 아니면 중도인출이 불가능했지만, 내년부터는 조건 없이 자유롭게 중도인출이 가능해진다. 그동안 저조했던 운용 실적도 최근 개선되고 있어 국민 재테크 상품으로 매력이 커졌다는 분석이다.
강우신 IBK기업은행 한남동 WM센터장은 “ISA 안에서 글로벌 주식과 해외채권을 절반씩 섞어 투자하면 일시적 손실은 있어도 중장기적으로 연 5%의 수익은 안정적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 8월 말 기준으로 25개 금융사의 ISA 누적수익률(운용한 지 3개월이 넘은 상품 기준, 일임형)은 평균 6.3%다. 최근 1년간 누적수익률은 4.5% 수준으로, 정기예금보다 3배 정도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모델포트폴리오(MP)로 보면 초고위험이 12.69%로 가장 높고 고위험 9.02%, 중위험 5.37%, 저위험 2.95%, 초저위험 1.78%순이다. 위험 성향에 따라 모델포트폴리오를 선택하면 되는데, 고수익 추구형은 그만큼 위험이 높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세제 혜택을 받기 위한 의무가입 기간은 5년이며, 내년 말까지 가입해야 한다. 금융소득종합과세자는 제외된다. 또한 소액이라도 소득이 있어야 가입이 가능해 전업주부 등의 가입은 제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