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에게 넓은 길을 터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 정도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다. 인생 전반부의 정열을 바쳤던 첫 직장과 후회 없는 이별이었다. 인생 전반전을 마치고 시니어로서의 삶을 준비하고 있던 찰나. 이렇게 당황스러울 수가. 역전의 용사는 다시금 회사로부터 부름을 받고야 말았다.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다른 곳으로의 항해 대신 회귀를 선택한 최찬식(59) 씨를 만났다.
“정년 3년을 남겨두고 명예퇴직했습니다. 조건도 상당히 괜찮았어요. 그땐 기분 좋았죠. 얽매이는 생활 안 해도 되니까요. 인문학 강의도 듣고 요가와 요리도 배우고 알차게 살았습니다. 바빴죠. 사회적기업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회사에서 다시 돌아오라고 하더라고요.”
한국지엠 부평공장 옆 카페에서 만난 최찬식(59) 씨는 지난 5월 마침표를 찍었던 옛 일터로 다시 돌아왔다. 명예퇴직하고 또다시 같은 일을 하기 위해 직장으로 돌아가는 일은 흔하지 않다. 1986년, 한국지엠의 전신인 대우그룹에 입사한 최찬식 씨는 대구에 있던 대우자동차 부품회사에서 일을 시작해 1990년 말 대우국민차 공장이 있던 창원으로 사간전보를 갔다. 1996년 4월 부평공장으로 자리를 옮긴 후 해외 자동차 공장 건설사업 분야에서 일했다.
“인도, 이란, 이집트, 베트남, 태국 등 세계 각 나라에 자동차 공장을 많이 지었어요. 라노스, 누비라, 레간자를 다 만들어야 했어요. 그 차들을 생산할 수 있는 있는 설비를 현지에 가서 설치해야 했어요. 1998년까지는 참 좋았죠.”
1990년대 후반 대우자동차의 인기는 꽤 높았다. 부동의 1위였던 현대자동차의 아성을 대우차가 흔들었다. 이렇듯 대우는 국내가 아닌 해외에 자동차 생산 공장을 지으며 사업의 규모를 키웠다. 이쯤 되면 나오는 얘기가 바로 IMF 금융경제위기. 해외 사업을 통 크게 벌였던 대우그룹은 계열사 전체가 휘청거릴 수밖에 없었다. 대우그룹의 몰락 중에서 자동차 사업의 인수 합병은 국가적 충격이었다.
“그때 인생이 조금 힘들었어요. 월급이 3개월 정도 안 나오기도 했습니다. 지엠(General Motors) 사가 대우자동차를 흡수하면서부터 월급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지엠 공장에 자동차 설비를 공급하는 역할을 했어요. 해외 현지에 나가서 기획 단계에서부터 자동차 양산할 때까지 관리했습니다.”
자동차 양산 시점이 되면 철수하고 또 다른 나라로 향했다. 2010년까지 해외 지사에서 일한 이후 팀의 수장으로서 한국에서 해외 사업을 지원했다.
“물론 중요한 시점에는 공장을 짓고 있는 현지로 날아갔죠. 외국은 20~30군데 다녀온 것 같아요. 작년 3월 부장까지 달고 회사생활을 마쳤어요. 끝낼 시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연인으로 1년 살기
회사를 관두고 한 달 남짓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좀 쉬었는지 몸이 근질거려 작년 5월부터 듣고 싶었던 강좌를 들으러 다녔다. 휴식을 하겠다며 회사를 박차고 나왔는데 생각지도 않게 수료증이 쌓였다.
“5월부터 바삐 지냈습니다. 수료증이 대단히 중요한 것은 아닌데 연속으로 듣는 것도 있지만 두세 번만 들어도 수료증을 주는 데가 있다 보니 스무 개나 되더라고요. 중국어 공부도 하고, 재테크 관련 수업도 들었습니다.”
한국지엠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 잠깐 사회적기업에서 일할 기회가 있었다. ‘지혜의 밭’이라는 스타트업 기업이었다. 한 달 정도 기획과 관리를 도맡아 일했다. 설립한 지 1~2년 된 기업이었고 공연 예술 쪽 일을 하는 사업체였다.
“제 입장에서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평생 공장에만 있던 사람이었고 대표는 예술만 아는 분이었죠. 회사를 이끌어가는 기본이 안 되어 있었어요. 제가 한글이나 파워포인트 같은 팁을 조금만 줘도 무척 감사해하더라고요.”
사회적기업에서 일하면서 안타까운 현실을 느꼈다고. 대표와 최찬식 씨가 맨땅에 헤딩하듯 일을 하고 열정을 쏟아 부어도 끝이 없었다. 회사에 3~4명만 있어도 상황은 좀 나았을 것이다.
“어느 순간 ‘이게 뭐지? 지금 잘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기업의 수익 모델이 좋아서 성장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주말에도 일하고 있더라고요. 그런 측면에서 고민이 좀 있었습니다.”
퇴역 베테랑에게 날아온 SOS
사회적기업에 대한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닐 때 한국지엠에서 연락이 왔다. 공장건설 프로젝트 매니저로 일해 달라는 전 직장 상사의 부름이었다. 함께 일할 조직은 이미 구성돼 있었다.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닙니다. 이렇게 또다시 회사에 들어와도 될까 싶더군요. 회사 측에서는 그런 생각 하지 말고 그냥 들어오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기존 기업에 대한 의리가 있잖아요. 다시 회사로 돌아갔더니 먼저 온 사람 몇몇이 있었어요.”
한국지엠 입장에서 봤을 때 인재를 육성해야 하는 시간과 물리적 상황을 감안했을 때 신규채용보다는 기존에 일했던 사람들 중에서 쉬는 사람 혹은 다른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게 이득이었을 것이다.
“애초에 직장 상사는 제가 퇴직하는 것을 말렸습니다. 저는 후배들의 성장을 위해서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회사에 다시 돌아온 것에 대해서는 제가 일을 잘했다고 말하면 너무 건방진 것 같습니다. 회사를 나가기 전에 관계가 좋았고 일도 깔끔하게 처리했으니까 저를 불렀다고 생각해요. 문제가 있었다면 부르지 않았겠죠. 회사가 시대의 풍파 속에 쓸리고 깎이기는 했지만 32년을 한결같이 다닌 오랜 일터였습니다.”
스스로도 인복은 타고 났다고 생각한단다. 어딘가로 움직일 때마다 항상 은인을 만났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팀워크가 좋았고 헤어질 때도 인상 찌푸리는 일은 없었다.
아빠는 워커홀릭! 좀 쉬셔요
“명예퇴직을 결심했을 때 조건이 좋았긴 했지만, 이른 새벽에 일어나는 것을 30년 이상 하니 쉬고 싶었습니다. 또 들어올지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아내의 불만도 제가 너무 쉬지 않고 일하는 거예요. 그래요. 워커홀릭(일 중독자)이 맞는 거 같아요.(웃음)”
최찬식 씨가 일을 끊임없이 하는 것에 대해 제일 반대하는 사람은 딸이다.
“쉬려고 나왔는데 왜 계속 일을 하느냐고 그러더군요. 사회적기업에 다닐 때도 출근시간만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이 족히 걸렸어요. 딸이 일 그만두라는 얘기를 많이 했습니다.”
현 회사에서 하는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서, 언젠가는 사회적기업에서 제대로 일해볼 계획이라고 했다. 제가 직장생활에서 했던 경험을 조금이라도 알려주면 되게 좋아하더라고요. 도와주면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도 하게 되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진지하게 쉬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 너무 달려만 온 것 같다고.
“이런 얘기하면 우리 딸이 뭐라고 하냐면 ‘아빠는 못 쉬어, 두세 달 쉬면 또 뭔가를 할걸!’ 하고 말합니다.”
야심차게 은퇴했지만 멀리 가지 못하고 다시 돌아와 제2인생을 시작한 최찬식 씨. 시니어 전문가로서 다시 돌아간 새(?) 직장에서 또 다른 가능성과 멋진 삶을 찾아가기를 기원한다.